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구스타브 융] 프로이트와 융의 편지

일루젼 2021. 10. 8.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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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칼 구스타브 융 / 정명진
출판 :  부글북스
출간 : 2018.01.20 


2차 시도에서 성공.

 

한때 도전하고 싶은 책은 쌓아두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만 계속해서 읽는 스스로를 두고 인스턴트 중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조금씩 근육을 붙여나가기는 싫은데, 또 완전히 손을 떼는 것도 싫어서 '뭔가를 하고는 있다'는 자기위안식 독서가 아닌가 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나는 '살고' 있는 것인가,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소비'에서 '생산'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등등의 사춘기적 생각들이었다.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자기고백적인 글들을 모아두되, 기왕이면 조금씩은 발전하는 모습이 남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전할 독서 목록과 함께 시작했었다. 그 목록을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이전까지 '재미있어 보여서' 읽던 것과는 다른 독서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떻게 낯선 분야를 시작하고, 어떻게 계속 찾아 읽을지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스스로를 돌아보면 여전히 방정리를 핑계로 인스턴트식 독서를 하고 있다.

조금 나아진 건가 싶기도 하고, 퇴보한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중간에 쉬지 않고 이어진 10년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씩 하기도 한다. 해서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는 시기를 보낼 수 있기를.

 

 


 

이 책은 융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오고간 서신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전문이 실려있지는 않으나 전체적인 맥락과 주요한 내용들을 편지가 오고간 시간 순으로 정리해두었다. 두 사람의 문체에 확연한 차이를 두어 헛갈리지 않도록 했으며, 편지의 서두와 말미에 상대와 스스로를 칭하는 호칭의 변경도 섬세하게 표현했다.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두드러지는 중의적 표현과 호칭의 변화도 주목해서 읽어봄직 하다. 

 

신화학에 몰두하다 결국 일종의 부친 살해를 시도한 융과, 후대의 성장을 억누르는 노장의 이미지를 피하려 했으나 결국 그를 통해 융과 아들러를 배출한 프로이트.

 

알을 깨는 것은 일종의 전복적인 사고다. 이를 선형적으로 바라보자면,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계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이 과거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알이라는 비유가 남긴 '껍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잔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전까지 속했던 것의 핵심은 흡수했다는 이미지도 함께-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표된 저술이 아닌, 특정인에 대한 사적인 글에서의 그들을 만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 아이는 오랫동안 자네가 아버지로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처음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깨닫게 될 것이네. 
 

- 사람은 인상에 지나치게 휘둘리거나 지나친 기대나 계획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의견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너무나 간절히 갈망한다는 점입니다. 

 

- 이제 더 멋진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신화학입니다. 제가 볼 때,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연스런 신화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터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화들은 신경증의 핵심 콤플렉스에 대해 꽤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멋진 예가 헤로도토스의 책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파프레미스에서 아레스의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벌인 축제 동안에, 나무 막대기를 가진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모의 전투를 대규모로 벌였지요. 부상자도 많이 나왔답니다. 이것은 전설 속의 사건을 재현한 것이지요. 외국에서 성장한 아레스가 자기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어머니가 있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사건이지요. 그녀의 종자들이 그를 몰라보면서 그에게 출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시로 들어가서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데려와서 어머니의 종자들을 제압하고 자기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이런 장면들은 이시스 숭배와 키벨레 숭배, 아타르가티스 숭배(히에라폴리스), 헤카테 숭배 등에서 재현되지요. 특히 키벨레 숭배에선 자기 거세도 행해집니다. 스파르타에서 젊은이들을 채찍질한 것도 그 유산이지요. 죽어가면서 재생하는 신(오르페우스 비의 , 탐무즈(Thammuz), 오시리스, 아도니스 등)은 어딜 가나 남근 숭배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여자들이 남근상을 마음대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지요. 그건 '죽어가면서 재생하는 신'입니다. 저는 저의 지식이 아마추어이고 어설프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며 교수님에게 너무나 진부한 말을 하고 있지 않나 하고 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인들도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신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우리의 고전학자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신화들로부터 삶을 해석해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 사람이 종교의 욕구를 느끼는 종국적 바탕이 유아기의 무력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어. 이 유아기의 무력감은 동물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훨씬 더 크다네. 사람은 유아기 이후로 부모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며, 스스로 정의로운 신과 친절한 자연을 만들어 내지. 그런데 이런 신과 자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었던 의인화 중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된 의인화라네.

 

- 오직 현자들만이 순수하게 지적인 추정을 근거로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신화의 영원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 신화학이 저의 내면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수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의식적 '관심 통로'가 전적으로 기독교 상징체계의 무한한 깊이로 모아지고 있으며, 기독교 상징체계의 대응물은 미트라교에서 발견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 AD.331-363)는 미트라교를 기독교와 동등한 것으로 다시 소개했지요.)... 최종적으로 그는 아후라-마즈다의 도움으로 성공합니다.

 

- 우리 두 사람은 어느 물리학자와 우리의 일상적 관심과 아주 먼 주제를 놓고 대화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지요.
(당시에 취리히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n)을 말한다.)

 

- 길가메시와 에아바니를 인간과 인간의 조악한 관능성으로 해석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자질과 비천한 자질로 이뤄진 그런 짝(대체로 형제)은 모든 전설과 문학을 관통하는 모티프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런 유형의 가장 최근 예가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 판자라네. 신화적인 인물 중에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디오스쿠로이, 그리고 로물루스와 레무스 유형의 형제 혹은 쌍둥이 짝이라네. 하나는 언제나 다른 하나보다 약해서 먼저 죽게 되어 있어.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불평등한 형제라는 역사 깊은 주제는 어떤 사람과 그의 리비도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지. 이 같은 고대의 모티프들은 언제나 새로이 해석되고 있지만(심지어 천문학에서도 그런 해석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하네), 그런 모티프들의 기원은 무엇일까? 

 

- 저는 교수님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저의 전체 태도에 어떤 근본적 변화를 야기할 만큼 충분히 컸지요. 지금 교수님은 제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믿어도 좋습니다. 제가 변명을 하거나 가볍게 보아 넘겨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마침내 얻게 된 통찰이 지금부터 저의 행동을 이끌 것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훨씬 더 일찍 이런 통찰을 얻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더라면 교수님에게 그렇게 많은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형상이 생기고, 형상이 변하면서 
영원한 마음이 영원한 창조 활동을 벌이지요. 
주위엔 온갖 피조물의 이미지들이 떠돌고 있지만 
그들은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그림자뿐이지요.

- 괴테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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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사람이 편지에서 강조하듯, 정신분석에는 정직이 아주 중요한데도 편지를 읽으면 그들의 내면에서 기만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칼 융의 회고록에 따르면, 융이 1907년에 프로이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 프로이트의 처제가 그에게 프로이트와의 애정 관계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융이 프로이트에게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적은 결코 없었다. 어쩌면 둘이 처음 만난 그때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결별의 씨앗이 뿌려졌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에피소드를 보면, 두 사람이 1909년에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서로를 분석하는 상황에도 기만이 영향을 끼친다. 프로이트의 꿈에서 삼각관계를 말해주는 자료가 나오는데도 프로이트가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자, 그것으로 분석이 도중에 끝나게 된다. 

 

- 존경하는 프로이트 교수님께 교수님의 '그라디바' (Gradiva)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저는 단숨에 다 읽어버렸지요. 명쾌한 해설이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일곱 겹의 무지를 갖춘 신들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그 글을 읽고도 진실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편협한 정신과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 다시 말해 작품의 소재가 어디서 왔으며 작가의 인격이 개입하고 있는 대목이 어딘지에 대해 물었다네. 이에 대해 그는 고대의 부조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뮌헨의 유모로부터 복제품을 얻어 갖고 있지만 원본은 본 적이 없다더군. 그 부조가 폼페이의 한 여자를 새긴 것이라는 공상을 품은 사람은 그 자신이었어. 폼페이의 정오의 열기 속에서 꿈을 꾸기를 좋아했고 또 언젠가 꿈을 꾸다가 거의 환상 상태에 빠진 사람도 그였다네. 그 외에, 자료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더군. 첫 시작 부분은 그가 다른 작품을 쓰고 있는 사이에 돌연 그에게 다가왔다고 하더군. 그 순간 그는 다른 것은 모두 옆으로 밀어놓고 그것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미리 정리되어 완전한 상태로 왔고, 그는 단번에 이야기를 끝냈다더군. 이것은 분석을 계속할 경우에 최종적으로 그가 어린 시절에 아주 은밀히 겪었던 에로틱한 경험에 닿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자기중심적인 공상이다는 뜻이라네. 

 

- 리비도의 분리, 즉 리비도가 자기성애적인 형태로 퇴행하는 현상은 자기주장, 즉 개인의 심리학적 자기 보존에 의해 잘 설명됩니다. 히스테리는 '종의 보존'이라는 차원에, 편집증(조발성 치지매)은 자기 보존, 즉 '자기 성애'의 차원에 집착하지요. ... 편집증 환자는 언제나 내적 해결책을 추구하고, 히스테리 환자는 언제나 외적 해결책을 추구합니다. 이유는 편집증의 경우에 콤플렉스가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 되는 반면, 히스테리의 경우엔 콤플렉스가 언제나 코미디 비슷한 것이 되고 이 코미디에서 인격의 한 부분이 방관자의 역할을 맡기 때문이지요. 

 

- 제가 볼 때 이 모든 어려움의 원인은 한 가지인 것 같습니다. 뇌의 기능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지요. 어디서나 우리는 '정신=물질'이라는 등식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일원론적 관점, 말하자면 '정신=내적으로 지각된 기능'이라는 관점이 이 귀신을 쫓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논리를 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오래 전에 논리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셨을 테니까요. 

 

- 나는 자네가 '마이너스 쪽 진동'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지금 자네는 최근에 자네 상관에게 행사한 엄청난 영향력의 역효과를 겪고 있다는 뜻이네. 앞으로 밀고나가는 것은 거꾸로 압박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법이라네. 그러나 나는 확신하고 있네. 자네는 나로부터 몇 발짝 벗어나면 거기서 자네의 길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네는 나와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을 걸세.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이런 확신을 품는 이유를 자네한테 제시할 수는 없네. 확신은 아마 내가 자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네. 그러나 나는 자네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 만족하고 있으며 우리가 갈라설 것이라는 두려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 자네는 나의 일부 특이성을 잘 인내하기만 하면 될 거야. 

 

- 이 대목에서 라살(Ferdinand Lassalle:1825-1864)이 시험관을 깨뜨린 화학자에 대해 한 멋진 문장을 기억하게. '물질의 저항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 그는 자신의 연구를 계속 이어가더군.'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물질을 감안할 경우에 실험실 안에서의 사소한 폭발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없을 거야. 어쩌면 우리는 시험관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거나 지나치게 빨리 데우거나 했을 거야.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위험 중 어떤 부분이 물질에 있고 어떤 부분이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방식에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네. 

 

- 자네의 최종적 '개종'과 깊은 확신이 그로스와의 경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는 화를 낼 수 없으며 단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깊은 통일성이 그저 놀라울 뿐이라네. 

- 이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하네. 나의 활력은 한 가지 임무를 제외하고는 패 고갈된 상태야. 2주일 안에 뮌헨으로 갔다가 거기서 암머발트로 갈 걸세. 이번 여행의 과제가 바로 '쥐 인간'에 관한 논문이네. 이 논문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 거의 나의 표현력을 넘어서고 있어.

 

- 저는 언젠가 이 분야(신화학)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책을 쓰겠다는 뜻을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물론 팩트를 찾는 등 몇 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하지요. 그물을 넓게 펼쳐야 합니다. 고고학, 아니 신화학이 지금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신화학은 경이로운 자료의 보고이지요. 교수님께서도 일종의 스펙트럼 분석 같은 것을 위해 그쪽 방향으로 불빛을 비춰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제가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던 이유 하나는 제가 매일 밤 상징의 역사, 즉 신화학과 고고학에 파묻혀 지냈기 때문입니다. 지금 헤로도토스(Herodotus)를 읽고 있으며, 그 과정에 몇 가지 멋진 발견(예를 들면, 2권에 나오는, 파프레미스(나일강 델타에 있던 고대 이집트의 수도/옮긴이)에서 행해지던 숭배)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크로이처(Georg Friedrich Creuzer: 1771-1858: 독일 고고학자)의 책 4권을 읽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담겨 있지요. (몇 년 동안 묻혀 있었던) 고고학에 관한 저의 관심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풍부한 광맥이 신경증 이론의 계통발생적 바탕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훗날 저는 '야르부흐'를 위해서 이 자료 중 일부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이미 헤로도토스 시대부터 고상한 척 구는 태도가 독특하고 진기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헤로도토스 본인이 인정한 바에 따르면, 그가 '체면을 이유로' 많은 것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일찍부터 체면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저는 나이트(Richard Payne Knight: 1750-1824: 영국 고고학자)의 '남근 숭배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Two Essays on the Worship of Priapus)에서 중요한 책을 발견했어요. 

 

- 오이디푸스 신화와 닥틸로스들을 확인한 자료가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베스타 여신을 지키는, 수녀 비슷한 처녀들의 카운터파트는 키빌레를 지키는, 스스로 거세한 성직자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말씀, 즉 '하늘의 왕국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고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선 자기 거세가 드물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웃한 에데사에선 아타르가티스 여신을 모시는 성직자들의 자기 거세가 원칙이었지요. 덧붙여 말하자면, 같은 장소에 남근 형태로 만들어진 180피트짜리 뾰족탑이 있었습니다. 남근상이 대체로 날개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농담: '단순히 생각만으로도 그것을 세우니까요.') 교수님께서는 파리에 있는 중세 초기의 납 메달들을 아십니까? 한쪽 면에는 그리스도 십자가가, 다른 쪽 면에는 페니스 혹은 여성의 외음부가 새겨져 있는 메달 말입니다. 또 이탈리아 산타가타데고티 라는 곳의 폐니스 십자가(인만(Thomas Inman: 1820-1876: 영국의 아마추어 신화학자)의 부정확한 삽화이지만)를 아시는지요? 중세 초기에 남근숭배를 말해주는 암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건강하게 지내시길. 

   

- 슈테켈과의 토론은 불가피할 거야. 그는 모든 원리들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줏대 없고 무비판적인 동료야. 나도 그에 대해 자네와 똑같이 느끼고 있어. 불행히도 그는 무의식의 비밀들을 탐지해내는 놀라운 코를 갖고 있어. 그건 우리는 증거만 인정하는 품위 있는 사람인데 반해 그 사람은 철저하게 야비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의 해석에 반대했다가 나중에 그의 해석이 맞았다고 인정해야 했던 때가 종종 있었다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우리 편으로 지켜 나가는 한편으로 그를 불신하면서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네. 

 

- 자네가 신화학 쪽으로 깊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반갑네. 앞으론 조금 덜 외롭겠군. 나는 자네가 그 발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까지 참지 못하겠어. 나도 7월에 나이트의 책을 주문했는데, 아직 받지는 못했어. 자네도 곧 신화도 신경증과 똑같은 핵심 콤플렉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게 될 거야. 그러나 우리는 신화학 분야에선 아마추어에 불과해. 유능한 조력자들이 급히 필요하다네. 

 

- 리비도 이론의 도움을 받아 정복해야 할 또 다른 분야가 바로 신비주의인 것 같습니다.지금 저는 신화학을 적절히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점성술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 어둠의 땅에 기이하고 경이로운 것이 많지요. 이런 무한한 분야를 제가 떠돌아다니고 있는 데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인간 정신에 대한 지식을 위해 전리품을 많이 챙겨서 돌아올 것입니다. 꽤 오랫동안 저는 무의식의 심연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신비의 향기에 취해야 합니다. 

 

- 지금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무의식적 공상의 내용과 형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정말 좋은 결과를 일부 거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저의 밤 시간은 주로 점성술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적 진리의 핵심을 파고들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천궁도를 해석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틀림없이 교수님에겐 믿기지 않을 놀라운 것들이 확인되었지요. 어느 여자 환자를 예로 들면, 그녀가 출생할 때 별자리의 위치를 계산했더니 그녀의 성격이 꽤 분명하게 나타나더군요. 또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의 인생사와 일치하는 세부적인 사항도 드러나더군요. 이 여자 환자는 특별한 어머니 콤플렉스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간 점성술에서 본능적으로 하늘로 투사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황도 십이궁을 나타내는 기호는 성격을 나타내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정해진 어느 시점에 리비도의 전형적인 성격들을 묘사하고 있는 리비도의 상징인 것 같다는 뜻이지요. ... 저는 교수님의 가정도 저의 가정처럼 모두가 잘 지내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 저는 이번의 만남도 경이로 가득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징조들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면, 교수님의 발견 덕분에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곳의 입구에 닿게 될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를 저는 '소피아' (Sophia)라는 영지주의의 개념을 빌리지 않고는 묘사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이 개념은 고대의 지혜가 정신분석의 형태로 재탄생하는 것을 묘사하기에 아주 적절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용어이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지 않겠지만, 교수님께서 저의 <리비도의 변형과 상징>이 교수님의 연상과 공상을 풀어놓을 수 있도록 허용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렇게만 하시면 교수님은 이상한 것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 지금 논의되고 있는 모티프를 놓고 본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네. 쌍둥이 중 먼저 죽는 약한 형제는 태반 혹은 후산이라네. 단지 그것이 언제나 같은 어머니에 의해 아이와 함께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네. 이 같은 해석은 몇 달 전에 정신분석에 대해 전혀 모르는 현대의 신화학자의 논문에서 발견되었어. 그러나 프레이저(James George Fraser)의 <황금가지>(Golden Bough) 1권을 보면, 많은 원시인들 사이에서 후산이 형제(여형제)나 쌍둥이로 불리면서 보살핌도 받고 먹을 것도 얻어먹는다는 내용이 나온다네. 물론 이 보살핌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지. 만약에 개인의 내면에 불행하게도 부정할 수 없게 될 계통 발생적인 기억 같은 것이 있다면, 이것이 '분신' (doppelginger)의 불가사의한 측면의 기원일 것이네. 

 

- 또 책과 연구 보고서를 바탕으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결론을 끌어내는 것과 많이 달라. 게다가, 내가 증명하고자 하는 진리들을 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관심도 시들해지고 있어. 물론 그런 진리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아무런 소용이 없지. 나는 이 작업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을 통해서 나 자신이 귀납적인 연구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전반적인 기질은 직관적이라는 사실을, 또 정신분석이라는 순수하게 경험적인 학문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 나 자신이 어떤 특이한 접근법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 

 

- 슈필라인은 '창세기'의 사과 이야기를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예로 제시하더군. 그러나 '창세기'의 신화가 어느 신참 성직자가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갖고 왜곡한 것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성 직자는 두 가지 별도의 자료를 하나의 이야기로 엉성하게 엮었을 거야(꿈에서처럼). 이 성직자가 두 가지 자료 모두에서 나무를 하나씩 발견했기 때문에, 신성한 나무가 두 그루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네. 이브의 창조에 매우 이상하고 독특한 점이 있어. 랑크는 최근에 성경 이야기가 원래의 신화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을지 모른다는 점에 주목하더군. 그런 식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거야. 이브가 아담의 어머니일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처벌이라는 잘 알려진 주제를 다뤄야 한다네. 똑같이 이상한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결실의 한 요소(석류)를 먹도록 준다는 모티프라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거꾸로 돌려놓으면, 우리는 여기서도 익숙한 무엇인가를 보게 된다네. 남자가 여자에게 먹을 과일을 주는 것은 오래된 결혼 의례(예를 들면, 석류를 먹은 탓에 플루톤의 아내로 지하세계에 남는 벌을 받은 프로세르피나의 이야기)라네. 따라서 신화들의 표면적인 버전을 정신분석에서 이뤄지는 발견과 무비판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야. 신화가 오랜 역사 속에서 겪은 왜곡을 제거할 수 있는 어떤 비교 연구법을 통해서 나름대로 신화의 원래 형태를 밝혀낼 수 있어야 해. 

 

- 그런 한편, 교수님께서 제가 '종교적 리비도의 구름' 안에 눈에 띄지 않게 오래 머무는 것에 대해 염려하실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편지로 정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만 하면, 저는 이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교수님께 기꺼이 전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숨어 있도록 만드는 것은 어머니들의 영역, 즉 우리가 알고 있듯이,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가 빨리 성장했다가 바위에 갇히게 된 그곳으로 내려가는 '카타바시스' (katabasis: 하강)이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저는 다시 올라올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저는 표면에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손톱으로 긁어가며 저의 길을 뚫었습니다. 저를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정신분석을 더욱 영광스럽게 할' 온갖 경이로운 것들을 갖고 나갈 것입니다. 

 

- 동봉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모튼 프린스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위해 정신분석을 이용했다네. 이것이 미국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의견엔 그런 일은 미국에서 틀림없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사생활 침해에 해당하는 것으로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네. 그러나 나는 어떤 성명이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자네에게 넘기겠네. 특히 자네가 9월에 미국 협회를 만날 계획이니 말이네. 

 

- 빈터슈타인(Alfred Baron von Winterstein)이 비의와 지하방의 신성한 의식을 알고 있는 비법 전수자가 지성소를 처음 출입할 때 느끼는 그런 경외심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타났습니다. 그런 그를 우리는 복점관의 자비로운 미소로 환영했지요. 

 

- 저는 단지 논의를 위해 대담한 추측을 제시할 뿐입니다. 원시인의 내면에 떠돌 엄청난 크기의 불안은 폭넓은 의미(토템 등)에서 터부 의식을 창조해냈으며, 근친상간 터부도 그중 하나입니다. 근친상간 터부가 좁은 의미에서 말하는 근친상간의 특별한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토템의 신성이 그 토템의 생물학적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이 관점에서 본다면, 근친상간은 그것이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불안이 유아기의 자료를 퇴행적으로 활성화시키며 근친상간을 속죄 의식으로 바꿔놓기 때문에 금지되는 것이지요(마치 근친상간을 바랐거나 바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특별히 강력한 근친상간 소망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근친상간 금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근친상간 금지의 병인학적 의미는 소위 성적 외상(trauma)과, 다시 말해 그 원인을 언제나 퇴행적 재활성화에서 찾는 성적 외상과 직접 비교되어야 합니다. 성적 외상은 겉보기에 중요해 보이거나 진짜이며, 근친상간 금지 또는 근친상간 장벽도 그렇습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근친상간 금지가 성적 외상을 대체했지요. 성적 외상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단순한 공상인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듯이, 근친상간 장벽이 진정으로 존재했는지 여부도 심리학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소위 근친상간의 문제가 명백히 중요해질 것인지 여부는 기본적으로 훗날의 발달의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비교도 있습니다. 진짜 근친상간이 이따금 일어나는 것은 도덕적 근친상간 금지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 

 

- 이 같은 경향은 신전을 건설하는 재료를 공급하는 채석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전과 신전의 의미는 그 건축에 쓰이는 석재의 성격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이것은 또 근친상간 터부에도 적용됩니다. 특별한 하나의 심리학적 제도로서 근친상간 터부는 근친상간 예방보다 훨씬 더 크고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비록 그것이 똑같은 것을 바깥에서 보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신전은 사용한 재료에 따라 희거나 노랑거나 붉지요.) 신전의 석재처럼, 근친상간 터부는 실제의 근친상간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상징입니다. 히스테리가 성적 외상과 별로 관계가 없고, 동물숭배가 수간의 성향과 별로 관계가 없고, 신전이 석재와 별로 관계가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지금 이성을 옆으로 제쳐놓고 정신 장치를 쾌락에 맞춘다면, 나는 자네의 혁신에 강한 반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네. 반감의 이유는 두 가지라네. 첫째, 자네의 혁신이 지니는 퇴행적인 성격이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불안은 근친상간의 금지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를 보였다고 믿고 있네. 그런데 지금 자네는 그와 정반대로 근친상간의 금지가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는 정신분석 이전의 시대에 흔히 논의되던 이론과 매우 비슷해. 둘째, 물론 내가 아들러의 모든 발명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아들러의 이론과 불행할 만큼 비슷하다는 점이라네. 아들러는 근친상간 리비도가 '미리 준비된다'고 말했어. 말하자면 신경증 환자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전혀 품지 않지만 스스로 겁을 먹고 자신의 리비도를 멀리할 동기를 자신에게 제공하길 원한다는 뜻이지. 그래서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리비도가 자기 어머니마저도 가만두지 않을 만큼 대단히 큰 척 꾸미게 된다는 것이 아들러의 이론이라네. 지금도 이 이론은 무의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탓에 가능한 공상처럼 보인다네. 자네가 암시하는 바에 비춰보면, 나는 자네가 근친상간 리비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틀림없이 이와 다를 것이라고 믿지만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시 이 반대들이 쾌락 원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네. 

 

- 교수님께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교수님과 제가 서로를 분석하다가 '분석에 응하면 권위의 훼손을 피할 수 없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계기로 분석을 그만둔 적이 있지요. 이 말씀은 그 후로 일어날 모든 것의 상징으로 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 스타일이지요. 따라서 교수님께서 스위스 식의 퉁명스러움에 마음 상해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의 말들을 정직해지려는 노력으로 받아주시고, 이기적인 권력 추구라는 빈(Vienna) 식의 얕보려는 기준이나 아버지 콤플렉스라는 세계의 다른 암시들을 적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요즘 제가 사방에서 듣고 있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결과 저는 분석가의 다수가 콤플렉스를 암시함으로써(마치 콤플렉스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인 양, 치사한 이론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진보를 평가 절하할 목적으로 정신분석을 악용하고 있다는 개탄스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현재 두루 전파되고 있는, 특별히 불합리한 난센스는 저의 리비도 이론이 항문 에로티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이론'을 꾸며 내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저는 정신분석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 분석가들의 신경증에 대해 보다 길게 논하지 못해 미안하네만, 이것을 일축으로 해석하지 말기를 바라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결단코 동의하지 못하겠소. 당신이 짐작하는 것과 달리, 당신은 나의 신경증에 피해를 입은 것이 없다는 점이오. 

 

- 존경하는 융 박사 
잡지의 이름을 바꾸자는 당신의 제안을 학회와 두 디렉터에게 넘기고 그 결과를 당신한테 보고하겠소. 객관적인 진술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인간의 (퇴행적인) 한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의 매우 특별한 결점이기도 하오. 이 같은 주장이 당신한테는 해당되지 않았으면 좋겠소만, 당신은 다음과 같은 말실수에도 화를 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추종자들까지도 저를 '당신'의 무리로 보지 않습니다.' 

 

- 저는 직업상 규칙에 따라 더없이 겸손한 자세로 분석했으며 이 분석으로 인해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물론 교수님도 환자가 자기 분석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신경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요. 교수님처럼 말이죠. 만약 교수님께서 콤플렉스를 모두 벗어던지고 교수님의 아들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아들들의 약점을 겨냥하던 태도를 버리고 교수님 자신의 결점을 똑바로 보면서 변화시키려 노력한다면, 저는 저의 방식을 수정함과 동시에 교수님에게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이 악덕을 뿌리 뽑아버리겠습니다. 

 

- 그것 외엔 당신의 편지는 답장 불가능하오. 당신의 편지는 개인적 대화에서 다루기 어렵고 편지로는 다루기 불가능한 상황을 창조하고 있소. 분석가들 사이에는 자신의 신경증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워 할 일이 전혀 아닌 것으로 통하고 있소.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받소. 따라서 나는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것을 제안하오. 나는 그렇게 해도 잃을 게 전혀 없소. 내가 당신과 나눴던 유일한 감정적 끈은 이미 오래 전에 약해졌기 때문이오. 과거의 실망들이 쌓이면서 무디어지게 된 결과라오. 당신이 최근에 뮌헨에서 한 말에 비춰보면, 당신은 우리의 관계 청산으로 얻을 게 엄청 많소. 당신은 어느 한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당신의 과학적 자유를 억제한다는 식으로 말했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당신의 자유를 완전히 누리고, 나에게 할 '우정 표현'까지도 아끼라고.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의 전반적인 이익에 개인적 감정을 종속시켜야 한다고 우리는 합의했소. 이제 우리의 공동 사업과 과학적 목표의 추구에 관한 한, 당신은 내 쪽에서 정확성이 부족했다는 식의 불만은 하지 못할 것이오. 미래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은 과거에도 그럴 수 없었다는 뜻이라오. 나도 당신으로부터 똑같은 것을 기대하오. 

 

- 교수님께서 저의 비밀 편지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저도 비밀 편지 없이도 일을 잘 처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괴롭힐 뜻은 전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만약에 교수님께서 저에게 다정한 태도를 고백하신다면, 저는 거기에 보답할 저의 권리를 요구해야 하며 따라서 교수님이 이따금 저에게 베푸는 것과 분석적 고려를 생각하면서 교수님을 대할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진리들을 이해하는 능력은 그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는 전진에 비례한다는 것을 교수님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만약에 신경증적 증후들을 갖고 있다면, 어디선가에서 이해력이 실패하게 되어 있지요. 어디서 실패하는지는 이미 과거의 사건들이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제가 교수님에게 진솔한 진리를 제시한다면, 그것이 설령 교수님에게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 뜻만은 교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저의 훌륭한 의도는 충분히 명확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교수님에게 달렸습니다. 

 

- 저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포기하자는 교수님의 바람에 동의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우정을 강요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이 교수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에 대한 판단은 교수님 본인이 가장 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침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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