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로날트 D. 게르슈테]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일루젼 2021. 10. 5.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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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로날트  D. 게르슈테 / 강희진
출판 :  미래의창
출간 :  2020.03.16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시대별로 한 인물과 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질병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과 가정들을 풀어나간다.

상세한 부분도 있고, 축소되거나 간략하게 언급된 부분도 있지만 현대로 넘어올 수록 활동시기가 겹치는 각 인물들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즐거웠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독일계가 아닐까 싶었는데 스스로의 정체성은 미국 쪽에 조금 더 가까운 모양이다. 후반부는 미국 대통령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현대에는 세계 정세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미국 대통령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질병이 바꾼' 이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거창하지 않나 싶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기록된 사실만 놓고 봤을 때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스스로가 역사학자이자 의사이므로 양측의 관점을 적절히 혼재해 설명한 글이다. -딱히 전문적인 질병, 치료의 내용을 다루지는 않으므로 따분하지 않다.-

 

즐겁게 읽었다. 


-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이 이러한 긍정적 효과를 불러온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역병이 번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대부분 지역은 기근과 빈곤에 시달렸다. 몇몇 지역은 인구 과밀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가 발전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1352년 이후 인구수가 급감하면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제한된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 앞에서 언급했던 의사 가브리엘레 팔로피오는 1564년 매독에 관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프랑스 질병 De morbo gallico>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고로 '매독 Syphilis'이라는 병명은 팔로피오가 천문학자인 지롤라모 프라코스토로Girolamo Fracostoro와 함께 153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병명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에야 확고한 병명으로 자리 잡았다. 저서에서 팔로피오는 매독의 증상과 당시의 처치법을 소개했고, 나아가 전염을 막는 예방법까지 제시했다. 파도바 Padova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 중이던 해부학 교수 팔로피오는 대규모 인원이 표본으로 참가하는 연구를 사상 최초로 실시했다. 

 

- 영어에는 매독과 매독 치료법 사이의 치명적 연관성을 지적하는 속담이 하나 있다. "금성과는 하룻밤을, 수성과는 평생을!"이라는 속담이 바로 그것이다. 

 

- 역사학자인 헨리크 에베를레 Henrik Eberle와 의사인 한스 요아힘 노이만 Hans-Joachim Neumann 이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오도어 모렐 Theodor Morell을 비롯한 여러 목격자들의 진술과 그 시절에 기록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히틀러의 병력 전기문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도 히틀러의 건강은 보통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특별한 자들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 주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극단적 만행은 심신의 심각한 질병이 없는, 의학적으로 건강 상태가 매우 정상적인 사람에 의해서도 자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루스벨트에게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초선에 성공한 뒤 1933년 3월 4일 거행한 취임식에서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는 말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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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과는 담쌓고 살기, 위스키든 샴페인이든 상관없이 늘상 술을 달고 살기, 매 끼니 과식하기, 입에는 늘 담배나 궐련을 물고 있기!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전부 다 하면서도 천수를 누리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기! 의사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고 죽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삶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이다. 

 

- 대학에 진학해서는 의학과 함께 추가로 역사학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정해진 최소 학기 안에 두 가지를 모두 이수하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두 과정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의학과 역사학의 연관성을 찬찬히 잘 설명해주신 지도교수님들 덕분이었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역사의 여신 클레이오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내 안에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 예리한 독자들은 몇 가지 오류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부디 어느 작가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고 여겨주길 바란다. 이와 관련해 나는 늘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의 말에서 위안을 얻곤 한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밖에 없다." 

 

- 소문이 퍼지자 알렉산드로스는 아몬 신을 숭배하는 이집트 문화를 고려하여 자신이 제우스-아몬이며, 두 신이 하나의 몸에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후 주화에 새겨진 알렉산드로스의 초상과 동상에는 아몬신을 상징하는 산양의 뿔이 곱슬머리 사이에 추가되었다.  

 

- 칼리굴라 황제보다 약 60년 후에 태어난 수에토니우스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그렇듯 자기만의 시각과 평가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그 기준이 얼마나 옳았는지 지금 우리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들은 꽤 믿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각종 구설과 잡설에 열광하던 학자였다. 내용이 '막장'으로 흐를수록 더 기뻐하며 장차 몇천 년동안 많은 이들이 읽게 될 자신의 작품에 각종 풍문을 포함시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바로 그러한 대목들을 읽으며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 트라야누스는 네르바(재위 96~98),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와 더불어 이른바 '로마제국의 5현제'로 꼽힌다. 

 

- 6세기에 발발한 페스트는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아누스 1세와도 관련이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했던 황제도 이 병에 걸렸지만 다행히 죽음은 면했다. 황제가 몸져누워 있는 동안 역사상 가장 현명한 여인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황후 테오도라가 국정을 책임졌다. 

 

- 로마 황제 네로도 검투장을 찾을 때면 유색의 돌멩이를 눈앞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검투사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말은 곧 그 유색의 돌멩이가 당시의 안경이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네로 황제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 '베릴 beryl', 즉 녹주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독일어에서는 안경을 '브릴레 Brille'라고 하는데, 베릴에서 유래된 단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그러던 중 영국에서 당대를 주름잡던 위대한 의사 하나가 콜레라의 전염 경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공중보건과 위생 관념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의학에 혁신적인 발견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 혁신적 순간을 탄생시킨 의사는 존 스노우 John Snow 였다. 

 

- 함부르크-에펜도르프 병원에서 근무하던 논네 교수는 레닌의 건강악화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떤 종류의 뇌 장애 때문에 날 불러들이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모호한 답변을 남겼다. 

 

- 1929년 10월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직 그 누구도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10월 25일 월스트리트에서 이른바 '검은 금요일' 사태가 벌어졌다. (뉴욕 증권가 기준으로 보자면 '검은 목요일'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시차 때문에 유럽에서는 '검은 금요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여파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발생했고, 경제가 휘청거리자 나치당으로 대표되는 극우파들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 모든 사태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이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최고의 무기는 목소리였다. 정치에 갓 뛰어들어 뮌헨에서 선동가로 활약하던 시절에 히틀러는 자신의 말재주가 매우 훌륭하며, 연설가로서 발군의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폭발적 목소리와 극적인 등장으로 대중과 지지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선거전이 진행되는 내내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듣고자 하는 이들이 호프집과 광장에 모여들었다. 

 

- 루스벨트는 4선에 성공했고, 1945년 1월 20일에 취임 선서를 했다. 폭우 속에 간단하게 진행된, 아마도 가장 음울한 취임식이었을 것이다. 며칠 뒤 루스벨트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전후 유럽과 세계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해 3대 거물이 만나는 자리인 얄타로 향해야 했던 것이다. 얄타까지 가는 여정은 젊고 건강한 청년도 소화하기 벅찰 정도로 험난했다. 크루즈를 타고 몰타 Malta 섬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처칠과 합류한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흑해로 갔다. 크림 반도에 착륙한 뒤에는 영하의 추위를 뚫고 지프를 타고 약 6시간을 달려 회의 장소인 얄타로 향했다. 얄타는 러시아 차르의 요양지였지만, 루스벨트가 도착했을 당시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 한편, 닉슨의 이러한 피해의식을 부추긴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존 F. 케네디였다. 닉슨은 존 F. 케네디가 최상위층의 욕망과 허영심을 잘 대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 닉슨과 같이 대선에 출마할 당시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이었다. 닉슨은 케네디를 가리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민심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음울한 분위기의 닉슨보다 매력적이고 잘생긴 케네디를 선택했다. 

 

-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던 몇 달간 이든이 다량의 약을 복용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암페타민 amphetamine 없이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성제의 일종인 암페타민 과다복용은 신경 질환을 자극할 뿐이었다. 10월 5일, '중재' 계획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그 중대한 순간에 이든은 고열로 쓰러졌다. 

 

- 케네디 일가는 힘과 활력을 중시하는 집안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는 아홉 명의 자녀들이 아직 어릴 때부터 삶은 승부의 연속이고, 제대로 된 '케네디'가 되려면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조지프와 완고한 아내 로즈 슬하의 아홉 자녀 중 둘은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약간의 지적 장애를 지니고 있던 로즈마리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오늘날에는 야만적이라고 평가하는 전두엽 절제술 lobotomy을 받아야 했다. 수술은 실패했고 로즈마리는 이후 70년 동안 요양소에 갇혀 지내야 했다. 부모가 그토록 중시하는 운동 경기에 참가하지도, 참가했다 하더라도 승자가 되지 못했을 또 다른 아이는 바로 1917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였다. 

 

- 같은 민주당 내 경선 후보이자 나중에 부통령을 거쳐 케네디의 후임자가 된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도 경선 당시 케네디를 가리켜 "샛노란 얼굴을 한 녀석"이라며 비난했지만, 케네디의 건강 상태를 대중 앞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훗날 케네디의 전기작가 로버트 댈렉 Robert Dallek은 만약 케네디가 그 이전까지 앓았던 질병들이 모두 공개되었다면 대권에 대한 야망을 접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그랬듯 케네디 역시 대중들에게 병력을 감춘 채 대선에 출마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대중은 직업 정치가들의 미꾸라지 같은 변명들, 일반 대중들이 못 알아듣게 일부러 더 어렵게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복잡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친다. 그것이 그 바닥의 생존 전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개를 가로젓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거짓말과 변명까지 등장하면 국민들로서는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탐할 때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된다. 프랑수아 미테랑 Frangois Mitterand도 그런 직업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 훗날 귀블러는 회고록 <커다란 비밀 Le grand secret>(발간 즉시 프랑스에서는 금서로 지정됨)에서 그 말은 들은 미테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듯 이렇게 말했다고 밝혔다. "됐습니다. 이미 지쳤습니다." 

 

- 귀블러는 회고록에서 "보편적 거짓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미테랑이 얼마나 은밀하게, 어떤 정체모를 약물로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은폐 시도는 초반에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참모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을 잘했던 것이다. 미테랑은 거의 매일 약물 치료를 받았고, 해외순방을 갈 때면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밤늦게 치료가 이루어졌다. 

 

- 그 직후에는 더 아찔한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나토 NATO 연합군이 실행한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 훈련 때문이었다. 소련 은 서방 연합군이 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소련에 선제 핵공격을 퍼부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안드로포프는 지병도 지병이었지만, KGB 출신이기 때문에 의심과 편집증이 체화된 인물이었다. 그렇게 최악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침착함의 대명사라 불러도 좋을 단 한 명의 인물이 세계가 핵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던 위기를 막아냈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Stanislav Petrov 중령은 1983년 9월 26일 밤, 소련 위성관제센터에서 당직 사령으로 근무 중이었다. 페트로프는 초고도의 침착함과 신중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최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건강상의 문제를 늘 왜곡된 사진으로 중화시키려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자신의 직무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1965년 담낭 적출술을 받고 며칠 뒤 기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일부러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수술 자국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미국민들은 전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건강상태를 숨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게다가 존슨이 병원에 입원할 당시에는 이미 대통령이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즉 존슨은 일부러 자신의 커다란 수술 자국을 노출함으로써 암에 걸렸다는 소문을 일축시킨 것이었다(요즘은 내시경으로 수술을 하기 때문에 수술 자국이 존슨 대통령 시절보다는 훨씬 작다). 

 

- 해당 지역은 1870년 여름,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된 것에 모종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계기는 '엠스 전보 조작 사건 Emser Depeche'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프랑스에서 보낸 전보를 조작해서 공개했고, 이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 2018년 9월 출간된 그의 저서 <공포 Fear>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맞이한 백악관의 내부 사정을 묘사한 것으로,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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