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사와무라 이치] 시시리바의 집

일루젼 2022. 3.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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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원제 : ししりばの家 
출판 : 아르테(arte) 
출간 : 2021.06.23 


     

<보기왕이 온다>를 읽었을 때 매력 있는 캐릭터 설정과 여운이 남는 마무리가 기억에 남던 작가였다. 

완성형 작가로서 <사관장>, <백사장>에서의 '미쓰다 신조' 같은 압도적인 흡입력이나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 작가의 이후 작품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도서관에 발견한 김에 읽어보았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사와무라 이치'의 장점은 조각내서 보여주기인 것 같다. 치밀하게 짜여진 설정이나 복선, 섬뜩함보다는 전체를 부분 부분 보여주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상적인 장면의 조각, 과거와 현재의 조각들을 모아서 보다 큰 그림을 드러내는 모자이크에 가깝다. 일본 추리 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이 자주 쓰는 구성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묘하게 자신의 일상과 겹쳐보게 된다. 

 

상황의 원인이나 해결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조금 더 편하고 캐주얼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편안하게 읽었다.  

 


   

 

- 그 이후, 히가도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이상해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음침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툭하면 고개를 숙이곤 했는데 이제 똑바로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겁먹은 모습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몸에는 당당한 풍격이 자리했다. 영혼이 보인다고 말하는 일도, 수업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없어졌다. 히가의 변화에는 담임 선생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밝아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떤 감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항상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냉담하다고 해야 할까? 반 친구들은 예전과는 다른 이유로 히가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일부 여자애들은 두려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부터 히가가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렀다. 늘 혼자 다니는 외톨이 여학생, 눈에 띄는 여학생에게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건 흔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히가의 경우에는 그런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학교에 빠지기 일쑤였고 집이 가난했던 탓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 반 친구들에게도, 수업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묻더니, 조심 나는 표정으로 문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모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 생각이 마구 뒤섞이면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그녀의 말을 믿는다면 그녀의 눈에는 모래가 똑똑히 보인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집 안에 있는 모래를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이어지면서 다른 의미로 나타났다. 그녀는 모래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 어느새 습관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범한 거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건 평범한 모래야. 모래는 그냥 모래잖아. 평범한 모래를 뭐냐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

 

- "집이 싫으니?"
할머니의 온화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나 아빠가 때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싫은 사람이 있어?"
또 머리를 가로저었다. 할머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살며시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렇다면 집에 가렴."

 

- 할머니는 다정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집에 가서 뭐가 싫은지 잘 살펴보렴. 자세히 관찰하는 거야. 집을 연구한다고 해도 좋아. 정말로 싫은 것과 별로 싫지 않은 걸 하나씩 생각해 봐. 그러다 좋아하는 걸 찾으면 행운이지. 그걸 잘 기억해두렴. 그런 행동은 어른이 되면 도움이 될 테니까. 좋은 남편을 찾을 수도 있고."

 

- 이 집은 정말로 이상하다. 미쳤다. 시게타의 쓰레기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비정상이다. 모래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모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다. 

 

- "그런데 얼마 전에 사이타마에 있는 옛집에 들러 물건을 찾는 사이에..."

그녀가 책을 들추며 포스트잇이 붙은 페이지를 펼쳤다.

"이런 게 나왔어. 그래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 그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요시나가와 이가라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고."

- "이가라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앞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그 얘기 말인데, 난 거짓말로 돈을 갈취하지는 않아."
그녀는 앞쪽에서 걸어가는 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사기꾼이 아니야. 물론 액막이가 끝나면 정당한 보수는 받아. 자선 사업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 돈은 필요 없어. 이상한 모임에 나오라고 권하지도 않아. 순수하게 무료로 그 모래를 제거할 거야."

그러곤 나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줘."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집에는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해졌다. 그것까지는 사실이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히가가 영능력자임을 내세워 먹고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야기의 차원이 달라진다. 이건 사기나 오컬트 범주에 속한다.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 어머니는 당신 말에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경악했다.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히가가 우리 집에 왔었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 후에도 어머니가 무슨 말인가 했지만 내 귀에는 닿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TV를 켜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몸은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머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방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변함이 없다. 컴퓨터와 책 말고는 어린 시절부터 똑같은 방이다. 평소의 평온한 생활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별안간 숨이 막히고 답답해졌다. 가슴 안쪽에서 기묘한 감정이 모락모락 솟구쳤다. 머릿속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평온한 일상도, 평범한 생활도 아니다. 나는, 어머니는, 이 집은...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자 머릿속에서 다시 사박사박 모래 소리가 들렸다. 

- 내 방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고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취침. 히가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연락해서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연락할 권리도, 그녀의 연락을 받을 권리도 나에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 똑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산책 코스가 바뀌고 긴이 조금씩 늙어가는 것 말고는, 모래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고, 쌍안경으로 그 집을 확인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긴과 장난치고, 어머니가 부르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바뀌지 않는 날들 속에서 그것만 바꾸었다. 사소한 일이다. 어리석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하고 있었다. 

- "그 집에서 나온 후로 현실을 보게 됐다고 말한 거, 기억해?"
나는 매일 밤마다 하는 회상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다.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 힘을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우리 집은 가난했으니까."
그랬지,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억눌렀다.

 

-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뿌리쳤다. 여기서 도망가면 끝이다.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그 집에 꽁꽁 묶인 채, 이 집에서 예전과 똑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생활은 평온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는 걸...

 

- "이제 준비하자. 이건 방지책이야." 

당황하면서 받아 들자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덧붙였다.

"그 모래를 마시면 위험해. 그건 틀림없어."

나는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어디에서나 파는 마스크였다.

"액막이를 해놓았어. 일종의 부적이니까 웬만한 나쁜 건 막을 수 있어."

그녀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과연 커피숍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 유다이도 거짓말을 했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도 쉴 수 없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한밤중에 집에 온 유다이는 항상 시든 배추처럼 축 늘어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밥을 차리고 배웅한다. 한밤중에 집에 온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한다. 그것 말고는 대부분 문자 메시지로 연락하고, 가끔 잡담 같은 이야기를 하는 날이 이어졌다.

 

- 2010년 새해 첫날, 근처의 신사를 찾았다. 한밤중에, 그것도 작은 신사였는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들어도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유다이의 얼굴을 보고 같이 외출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집에 오는 길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거웠고, 좁은 욕조에서 몸을 붙이고 있는 것도 행복했다. 같은 시간에 침대에 들어가는 것도,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꼭 껴안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시덕거리는 것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같이 신년 음식을 먹는 것도, 해마다 1월 2일에 하는 하코네 역전 마라톤을 보는 것도, 여성 만담 콤비가 나오지 않는 신년 특별 프로그램을 같이 보는 것도.

유다이는 1월 4일부터 출근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알아차렸다. 지금은 어느새 2월 초다. 유다이와의 추억이 정초 연휴부터 전혀 갱신되지 않았다. 

 

- "우리 둘에겐 시간이 필요해. 시간을 들여서 해결하고 싶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러곤 식탁에 놓인 비닐봉지와 편지를 힐끔 쳐다보더니, 불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은 이것부터 어떻게 해줘."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보고 말을 바꾼 듯했다. 왠지 부끄러웠다. 그녀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제대로 생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하곤 완전히 다르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무서워졌다. 왜냐하면...
"알았어, 미안해."
도시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더니, 다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조용히 일어섰다. 새빨개진 이마에는 모래 알갱이가 몇 개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즈사는 도시를 용서한 게 아니다. 문제를 뒤로 미룬 것도 아니다. 앞으로 평생에 걸쳐 갚으라고 한 것이다. 시간을 들여 해결하자는 말은 그런 뜻이다. 내가 그녀를 무섭다고 느낀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남편을 시험하듯이 단어를 고른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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