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앤 밴크로프트] 20세기 신비 사상가들

일루젼 2022. 3. 3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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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앤 밴크로프트 / 양억관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1993.04.01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 접하는 사상가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 조금씩이라도 들어보거나 저작을 읽어본 사상가도 있었는데 이렇게 한 권에 모아서 읽으니 각자의 사상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이 보인다. 물론 저자의 해석이 덧입혀지기는 했지만 최대한 해당 인물의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 느껴졌다.

 

다소 기묘한 느낌이었다. 많은 시대에 걸쳐 정신적인 것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 그들의 말 속에 공통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거리가 아닌가 싶다. 결국 '죽음'이라는 현상이 존재하는 한 이런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가들 중에서도 일상적인 삶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과 그로부터 엄격한 거리를 둔 사람들로 나뉘는 것은 꽤 흥미롭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길을 걸은 이들을 읽고 있자면 결국 누구나 자신만의 길이 있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모든 것이 가능한 가운데, '무엇이 나의 길인가'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닌가 싶은. 

 

가벼운 흥미로부터 시작해서 나름대로는 꽤 긴 시간에 걸쳐 이 지점까지 오게 되었다.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불투명한 부분이 많지만, 단순한 충동과 구분할 수만 있다면 '즐거움'이나 '원함'을 따라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볼 때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또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만은 아니었다. 큰 흐름이라는 방향성을 두지 않고서 행하는 노력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았다. 슬픈 점은 그런 것들은 흐름 속에서 깨닫기가 쉽지 않아서,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뒤늦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나'를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이렇게 현실적이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큰 흐름이 존재할 때는 그것을 느끼고 순응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맺는다. 

 


   

 

1. 다리를 놓은 사람들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앨런 왓츠(Alan Watts),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2. 고고한 사람 :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3. 수피의 메신저 : 구르지예프(Gurdjieff), 팍 수부(Pak Subuh)

4. 힌두의 구루 : 메허 바바(Meher Baba),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rharshi)

5. 불교의 중도 : 초감 트룽빠(Chogyam Trungpa)

6. 유태의 예언자 : 마틴 부부(Martin Buber)

7. 오컬티스트 : 다이온 포춘(Dion Fortune), 루돌프 슈타이너(Rodolf Steiner)

8. 보는 사람 : 카스타네다(Castaneda)

9. 신비주의자의 성모 : 마더 테레사(Mother Theresa) 

 

 

- 그러나 정신의 가장 커다란 비극은, 빠르건 늦건 언젠가는 육체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것이다. 병든 몸은 언젠가는 모든 혼을 사라지게 한다. 사고력은 그 존재성을 잃어버리고, 거기에는 고통과 구역질과 혼수만이 남는다. 정신의 비극 따위는, 생명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점잔을 빼며 걸어가는, 잰 체하기를 좋아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정신이란 단순한 기분파의 사치 같은 것이다. 남아도는 생명력의 부산물이다. 마치 후버 새의 머리 장식 깃털이나, 이미 무용한 존재로 운명 지어진 무수한 정자들처럼.

 

- 트라부스코 대학에 관계할 당시, 그는 자신의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신비적 체험에 관한 책으로, ‘자연과학자의 논리가 직접적인 지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동서양의 신비 사상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뇌, 명상, 자비, 자기 인식, 은총 등 존재에 관한 많은 중요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너무도 멋들어지게 정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헉슬리는 여전히 지성의 함정에 빠져 있다. 거기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신비 사상가들의 지혜이다. 이 책을 인상 깊게 만드는 것도 역시 그들이다. 헉슬리는 교활한 거미처럼 멋들어진 언어의 거미줄을 엮어, 거기에 잘 가공된 보석을 장식해두었지만, 그 자신은 그 보석이 아닌 것이다. 그는 지적으로는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하며, 모든 문제는 세계의 근본적인 진실의 빛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결론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선인과 악인으로 명확하게 분리된다는 이하의 문장에 나타나 있다. 

 

- 그 대신에 그는 엄격하고 완전무결하며 곤경과 고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위선적인 메시아로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설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계속된다.  

"진실이란 길이 없는 대지이다. 어떠한 종교, 어떤 종파, 어떤 길에 의해서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견해이며, 이 견해에 대해 나는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무한하고, 어떠한 조건도 없고, 또 어떠한 길에 의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을 조직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추종자들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싶다... 단지 진솔하게 귀 기울이고, 진실하게 살며, 그리고 영원을 끝없이 바라보는 사람이 다섯 명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해하지도 않고, 편견에 가득 차 새로운 것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조차도 자기의 허망하고 혼탁한 자아에 맞추어 해석해버리는 사람들이 몇 천 명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자유이며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존재이다. 부분도 상대적인 것도 아니며 영원한 진실 그 자체이다. 그 때문에 나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 나에게 맹종하고, 언젠가는 종교나 종파가 되고 말 감옥을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 종교의 공포로부터, 구제의 공포로부터, 정신성에의 공포로부터, 사랑에의 공포로부터, 죽음에의 공포로부터, 그리고 인생 그 자체의 공포로부터..." 

    

-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해 보면, 이를테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하나의 상황과 거기에 대한 반응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그 단편적인 틈 속에서 마음의 묵은 습성을 버릴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편견을 가지지 않고 상황을 신선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계속해서 주시하면, 마음을 주로 자극하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의 본질이란 그 불완전성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정적을 획득하고, 문제가 스스로 해결되어 연장되는 일이 없어지면, 두뇌는 이러한 자극을 받지 않게 되고 다시 활력을 얻어 무구(無)하면서도 명쾌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자발적인 올바른 행동은 혼란이 없는 두뇌로부터 생겨난다. 그러한 두뇌는 진실을 보고 공포에 떨지 않고 거기에 대응할 수가 있다. 

- 무구의 정신이란 신체, 마음, 두뇌, 정신으로 구성되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고에 오염되지 않는 무구의 정신은 진리란 무엇인가,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명상이다. 진리라는 황홀을 동반한 이 비범한 아름다움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반이란 공포를 일으키고 쾌락을 지속시키는 사고를 이해하는 것이며, 질서, 그리고 미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투쟁, 공격, 잔인, 포악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의 기반을 세웠을 때, 최고의 지성인 감수성이 생성되어 인생 전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이것은 언제나 운을 하늘에 맡기고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크리슈나무르티에 의하면 동기란 결과에의 집착이다. 이를테면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결과를 좌우하려 하거나, 결과에 고집하지 않고 최선을 기울일 수 있다면, 동기가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삼지 않다는 의미로, 동기를 없앨 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매우 엄한 의견으로 생각될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을 위해서 특정의 체험을 획득하는 것과 행복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 때문에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무엇인가를 얻게 한다. 집착 없이 사상 자체를 위해 사상과 관계하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방해하지 않고, 사상 그 자체의 순수하면서도 오염되지 않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투영하는 사고나 감각이라는 무용지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각한다는 것은 인생의 시련으로부터 배워, 체험을 쌓아 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체험의 축적에 의한 상흔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욕망에 따라 단순히 체험을 축적해도, 결국 마음은 천박한 그대로이며 표면적인 그대로이다. 끊임없이 체험과 감각을 추구하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자각은 자연적으로 편안히 그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다. 체험을 통하여 자극을 구하는 마음은 둔감하여 빠른 움직임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결코 자유롭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자기중심적인 활동을 이해한다면, 마음은 선택 없는 자각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 기회가 있을 적마다 구르지예프가 언급한 테마의 하나는, 자기를 변하지 않는 전체로서의 나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착각이다. 구르지예프는 이것을 인간의 가장 커다란 오류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현상은 단지 제멋대로 일어날 뿐으로 인간은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인간 기계가 어떻게 단일한 나일 수 있는가 하고 그는 의문을 던진다. 모든 사고와 감각이 단절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나라고 한다. 실제로는 순간순간 다른 자신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언제나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는 데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오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모든 감각, 모든 사고가 하나의 <나>에 속하는 것이며, 가신은 그 전체로서의 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인물 전체로서 기능하고 있고, 사고나 감정은 그 전체적인 인물의 하나의 현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개의 사고나 감정은 이러한 완전적인 인간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간다. 단일한 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나, 서로 전혀 접촉하지 않는 것도 있는 복수의 작은 <나>로부터 성립하는 것이다. 

 

- 교체되는 나, 즉 주도권을 둘러싼 끝없는 적나라한 투쟁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좌우되고 있다. 따뜻함, 빛나는 햇빛, 좋은 날씨는 즉시에 하나의 나를 불러내고, 추위, 짙은 안개, 비는 또 다른 하나의 나 - 연상, 감정, 행동 등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이 변화하는 나를 컨트롤할 수 없다. 그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거기에 대한 무지가 그 원인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때의 나 속에 있다. 물론 나 속에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나도 그 자체의 의식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우연이나 기계적인 외부의 자극에 의해 기인되는 것이다. 교육, 모방, 독서, 나아가 종교나 카스트나 전통이 가지는 최면적인 마력, 또는 신선한 슬로건의 매력 등은, 인간의 인격 속에 몇 가지 강력한 나를 생성시킨다.  

 

- 중요한 것은 자기 동일시를 그만두는 것이라고 구르지예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동일시를 정지시킬 수 있다면, 즉 스스로의 행동에 주체에 대해 나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자신의 '본질', 즉 본래의 자기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 그 본질에 있어서 내맡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텅 비고, 희망이나 욕망, 바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이다. 신에게 자신을 내맡긴다는 바람조차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원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생명력의 작용을 통하여, 신이 자신 속에 작용하는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팍 수부는 말한다. 이것은 친구가 손을 이끄는 대로 나아가는 것과 닮아 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어떤 일에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팍 수부의 관점에서 본 신에의 내맡김이다. 

 

- 이러한 세 가지 단계는 음식물로 섭취되어 인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잡아먹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 단계의 생명력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 단계의 상호작용은 성적 결합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적 결합은 창조 행위를 암암리에 표현하고 있다. 바파는 인간을 세계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장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신체를 토양에 비유하고 있다. 비옥한 토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개개의 인간은 제각기 다른 토양에 상당하는 것이다. 가장 고차적인 것은 '황금의 대지'이다.

 

- 바파는, 성적 결합에는 인간 본래의 힘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남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는 진정한 자기가 저차의 힘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만일 그가 욕망이나 사고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면, 자기의 본성에 대한 내재적인 각성을 자각할 것이다. 왜 인간은 저차의 힘을 의식하지 못할까? 그것은 저차의 힘이 솟아오르더라도, 인간에게는 하나의 자극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바파는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힘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다가온다. 저차의 힘이 인간의 일상적 의식에 유입할 때, 다른 경우에도 잘 사용되는 길을 통과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힘의 출처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성행위 때처럼 인간의 의식이 순수한 인간의 단계에까지 부상했을 때, 저차의 힘의 작용을 의식하고, 자신을 그 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저차의 힘은 이미 지배력을 상실하고, 역으로 인간이 주인이 되어 저차의 힘을 제각기 가야만 할 자기 길로 이끌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가면을 덮어쓴 저차의 힘과 만나더라도 이미 속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자리만 확보한다면 인간 단계의 힘은 인간에게, 동물 단계의 힘은 동물에게, 각가의 힘의 요청이 적절히 만족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 그가 프리오레를 설립한 목적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고, 양심과 무의식의 행동(예민한 주의 깊은 행동과 부주의한 반응) 사이에 반드시 일어나는 갈등에 언제나 눈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융합, 내적 조화는 '길', 즉 '예스'와 '노'의 투쟁을 통하여 획득된다고 구르지예프는 발한다. '내적 갈등' 없이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아무런 대합적 힘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한다면, 기분이 내키는 대로 비람이 부는 대로 어디에도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변화토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정신성조차도 그 예외가 아니다. 자아는 정신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때 가르침은 외적인 것,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 기댈 수 있는 철학으로 취급된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그 가르침과 일체가 되어, 또는 가르침 그 자체가 될 것을 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 '정신성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이러한 욕구는, 길을 나아감에 따라 탈락해 가는 것입니까?'라고 트룽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트룽빠의 대답은 이러하다. 최초의 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것. 충동의 힘으로 당신은 어떤 종교적인 환경에 자신을 둘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충동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점차로 조용해지고, 드디어 단조롭고 지겨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좋은 징후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체험과 실제로 관련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련성을 얻지 못하고서는, 정신의 길은 본질적인 자기의 체험이 아닌 순수한 외적 위안물이 되며, 그것은 위험하기조차 한 것이다. 

- 그에 대한 명상은 마음을 자비심으로 가득 찬 사랑으로 넘쳐흐르게 해 준다. 그 심볼은 단지 그러한 상태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명상자의 의식에 그 상태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나아가 구체적인 실레로써, 다이온 포춘은 문장(紋章)을 들고 있다. 고대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철학을 머리로 짜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계로부터 개개의 요소를 추출해 내어, 인격화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상징하는 상상의 인물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영국의 예술가들이 총력을 기울여, 바다를 배경으로, 사자를 발 앞에 두고, 손에는 삼지창,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유니온잭을 그려 넣은 방패를 든 여성상을 만들어 낸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발라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이 인물상을 분석해 보고, 이 복잡한 상형(상형문자) 속 개개의 심볼에는 제각기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니온 잭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십자가는, 대영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네 인종을 나타내고 있다. 투구는 미네르바의 그것이며, 삼지창은 넵튠(Neptune:로마 신화에 있어서 바다의 신.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에 해당한다 - 옮긴이 주)의 것이다. 사자가 상징하는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달리 해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다. 실제로 오컬트적인 상징은 거의 문장에 가까운 것이다. 상형을 만드는 사람은, 문장관이 문장을 디자인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한다. 문장학에서는 모든 상징이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사용하는 가문이나 가계를 나타낼 수 있도록, 그러한 심볼을 결합하여 문장을 만들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술의 심볼이란, 마술이 발휘하는 힘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 이것과 꼭 같은 형태로 생명의 나무의 세피로트는 신의 성질을 상징하고 있다. 모든 세피라를 합하면 전체의 흐름이 나타난다. 한 개의 세피라에는 완결되고 폐쇄된 상태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멈출 줄 모르는 나선 속에서 서로 그 성질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카발라의 명상을 가르치게 되면서, 포춘은 우선 정상의 케테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포춘에 의하면, 제자는 보통 스승으로부터, 생명의 나무의 정상의 세피라는 순수한 혼의 영역에 속하고, 우리들이 형태를 가진 신체 속에 있는 한 실현되지 못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정상 이외의 세피라로부터 시작하면, 우주의 법칙에 일치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이다. 

- 어떠한 속성도 운동도 없이 모든 것을 떠받치고, 유지하고, 조건 지우는 영원불변의 순수한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모든 마술의 최초의 공식이다. 최대한으로 응축된 가장 밀도 짙은 이 영원불변의 존재를 가까이 실감하지 못하는 한, 무한의 힘을 실감할 수는 없다. 그 이외의 원천으로부터 생성되는 에너지는 유한하면서 동시에 부분적인 것이다. 모든 에너지의 순수한 원천은 케테르 이외에는 없다. 에너지의 집중을 목적으로 하는 마술사의 작업(그 이외의 작업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은, 반드시 케테르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무한의 힘의 저장고인 보이지 않는 그것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힘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형태나 운동 이외의 존재의 발현 방식을 모르는 사람의 두뇌로서는, 명백히 비존재이진 않지만 전혀 형태도 없고 수동적인 이러한 상태에 대해, 적절한 개념을 획득하기는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우주 철학의 기반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정적인 존재의 베일로 케테르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이원성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신과 악마가 우리들의 우주 속에서 영원한 투쟁을 펼치게 될 것이며, 그 투쟁에 종지부가 찍히는 일이란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속성도 운동도 없이 순수한 존재를 마음에 떠올리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태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무분별한 빛을 발하여 눈을 부시게 하는 백광으로 생각해도 좋고, 또는 무(無) 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우주 공간의 암흑이라 생각해도 좋다. 마음의 눈으로 명상에 의해 파악된 이러한 심볼은, 아무리 방대하고 치밀한 과학적 정의보다도 케테르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우리들은 케테르를 정의할 수는 없다.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케테르에의 실감을 의식 수준에 가져다 주기 위하여, 케테르의 이미지는 턱수염을 기른 고대 왕의 옆얼굴을 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오른쪽뿐이다. 왼쪽이 가려져 있는 것은 케테르는 결코 인간의 의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케테르는 왕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또 모든 것은 그를 원천으로 하여 발전한다. 그 때문에 양자는 그 비현현이라는 성질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이다. 

 

- 몇 번인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돈 후앙은 익살을 떨어 수행 중의 지식을 카스타네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자네가 무서워져서 그만두어 버린 것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돈 후앙은 말한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색해져 내리며, 허무함만이 남게 되는 거야.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볍고 유연해지지 않으면 안 돼." 

- 그러나 돈 후앙의 향정신성 식물에 관한 가르침과 상세한 주술의 훈련이, 기지의 세계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을 벼리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인생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카스타네다는 5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술사의 트릭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하고부터, 그는 돈 후앙이 진실로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겨우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책 <주술의 체험 - 분리된 아이덴티티>와 세 번째 책 <주술사가 되다 - 아스트랄에의 여행>에서는, 돈 후앙은 자신의 몇 가지 멋진 가르침을 독자에게 던져 주고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세계를 멈추는 훈련으로 전수된 것이었지만, 당시의 카스타네다는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 집안의 명예, 조국 등에 관한 자신의 감정을 버릴 수가 있다. 살아가는 유일한 의의는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기쁨을 느끼고 웃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우행(行)이나 인생을 컨트롤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고뇌하는 보통의 사람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컨트롤은 너무도 절묘하여, 기분만 내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데다가,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처럼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행위가 끝났을 때에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것이다. 

 

- 카스타네다가 말하는 그 사람의 허무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볼려고 하지 않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돈 후앙은 말한다. 그가 인생을 허무하게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승리와 패배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은, 돈 후앙의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돈 후앙에게 있어 승리나 패배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 나아가서 옆 사람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신체기관의 지각력에는 특정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묘사가 일치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타자의 세계를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개관적 세계란, 우리들 자신의 세계이다. '세계는 우리의 내적 감각과 지각과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뛰어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박사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세계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면 매우 편리하기는 하다. 그러나 결코 그 존재만에 의하여 세계로서 현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나타난 세계는, 정말로 그 세계의 극히 특정한 부분의 극히 특정한 행위에 조건 지어져 있다. 즉 두뇌에서 일어나는 특정의 사건에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이다.' 돈 후앙은 다른 세계를 자신은 알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세계는 환각성 식물을 통하여 바라본 세계의 다른 측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로 생각할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꿈의 한 장면이 일상적인 자신의 환경과 전혀 다른 장소, 시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작용이란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카스타네다는 누구에 대해서도 통어된 어리석음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것은 돈 후앙이 언제나 연기를 펼치면서 결코 본심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돈 후앙은 여기에서 매우 심오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나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우의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연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유기체의 구조 그 자체가 가면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의식만이 무형이다. 의식이 지각하는 것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색이나 형태를 가진 가면을 덮어쓰고 있다. 하나하나의 형태가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식물이나 동물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나무는 나무답게 소는 소답게 행동한다. 그리고 인류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다. 자신의 연기의 역할을 꿰뚫어 볼 수가 있으면, 배우는 그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면서 성실하게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은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점이다. 깨닫지 못한 인간에 있어 연극은 현실이다. 깨달은 인간에 있어 연극은 연극으로서 현실이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 수녀들은 수련 기간 (9년 간 계속된다) 중에 철저한 정신적 단련을 받는다. 그리고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청빈의 서약은 특히 엄격한 것이고, 그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심 전력을 기울여 봉사할 것을 서약한다. 부자를 위해서 일한다거나 노동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는 수녀는 거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의 혼란을 일으키지 잃고, 스스로의 생각을 검열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되기 위해서는, 수녀들은 감정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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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의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며, 같은 정도의 다른 사람을 선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터이다. 이를테면 시몬 베이유, 오로빈도, 에블린 언더힐, 사이 바바와 같은 신비주의자들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을 여기에 다루지 않은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책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결정판이 아니다. 

 

- 이 책에서 취급한 신비주의자와 현자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나>라고 감지했던 그때의 나란 누구이고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아이덴티티의 수수께끼를 문제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한 권의 책 속에 제각기 전혀 다른 가르침이나 철학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나라는 언어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이다. 그중에는 심신을 벗어 던진 나라는 감각은 그 자체로 지고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로부터, 체험으로부터 분리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앨런 왓츠의 '나'(당신은 듣는 것을 듣고, 냄새 맡는 것을 냄새 맡는 것 이상으로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까지 포함된다. 

 

- 구르지예프의 아버지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으로, 수많은 아시아의 전설이나 서사시를 암송하는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전승되는 이야기나 집에 모인 사람들의 토론은 젊은 구르지예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나아가 그는 양 떼와 함께 코카서스 지방을 배회하는 미개 종족, 특히 예지디스 족이라 불리는 악마 숭배자들에게 마음이 이끌렸다. 그들은 기묘한 관습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른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빙 둘러싸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예지디스 족의 소년들을 구르지예프는 몇 번이고 보았다. 구르지예프는 좋은 교육을 받는 행운을 가졌다. 아버지의 친구인 그곳의 신부가 그에게 흥미를 가져 승려와 의사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베풀어 주었다. 신부의 생각으로는 그 둘은, 하나를 빼고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 마음씨 좋은 신부는, 승려 구르지예프도 의사 구르지예프도 볼 수 없었다. '진리의 탐구자'가 되어 우주의 감추어진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 구르지예프가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 그의 멋진 모험은, 그의 저서 <위대한 만남> 속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러시아의 스파이로서 달라이 라마의 가정교사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티벳에서의 10년 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실리주의자로 모든 장사에 손을 뻗쳐 성공한다. 많은 참새를 잡아 노랑색 물감을 들여 카나리아로 속여 팔았는데, 비가 내리려고 하는 통에 급하게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그는 카펫을 짜거나 미싱 다루는 법, 나아가 최면술로 사람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 등도 배웠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커다란 사업은 코르셋 업계로의 진출이었다. 

 

- 구르지예프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인간이란 외부적인 다양한 사건에 조종되는, 기계가 장치된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일관성이 전혀 없는 스스로의 공포와 욕망의 먹이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해 간다. 한 사람이 같은 인간에 머무는 일이란 결코 없다. 개체로서의 자기를 가지지 않는 충동과 반응의 집적물인 것이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사람,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 당신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들 모두가 기계이다.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인 것이다... 기계로서 태어나 기계로서 죽을 뿐이다.'

 

- 우스펜스키는 구르지예프에게 기계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를 묻는다. '그렇지!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구르지예프는 대답한다. '기계이기를 그만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계 그 자체를 알 필요가 있다. 기계, 진짜 기계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다. 즉 기계가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이미 기계가 아니다. 적어도 이전과 같은 기계는 아니다. 그 행동에는 책임이 동반되기 시작한다.' 

- 라티한을 행하는 사람들이 받는 은총의 하나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방향 지울 것인가를 인식하는 새로운 능력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테스팅'이라 불리는 방법이 사용된다. 가능한 한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질문을 확실히 언어화한 다음,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라티한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면 대답은 저절로 명확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하는 마음이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그렇게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은총이 되었다. 

 

- 그것은 신의 힘이라고 말해지곤 하지만, 바파는 표 나게 그것이 신으로부터 나오는 힘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신만이 그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저차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또 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을 설명하거나 분류하거나 할 수는 없다. 그에 의하면 거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록 거기에 관해 아무리 멋진 설명을 했다 하더라도, 기껏 설명이란 사고하는 마음이나 상상의 투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참가한 자신이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어로서가 아닌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드디어 인간의 위에 위치하는 생명의 단계, 즉 다섯 번째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성인들이나 예언자들이 이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 스스로 '광대한 바다에 필적하는 형태를 넘어선 정신적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각과 사랑으로 모든 유형의 것을 감싸는 희유의 남녀들이 그들이다. 수부드는 독립된 종교가 아니다. 그 멤버에는 모든 기성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라티한에 의해 자신이 속하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아마도 자기 의지를 내맡기는 것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수부는 수부드의 제창자이며 성스러운 힘의 최초의 전달자로서, 그 어린이들로부터 예언자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극히 보통 인간 이외의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강력한 존재는 그 자신이 아니라 생명력이며, 그는 단지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바파가 단지 있는 그대로의 바파이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빵과 버터와 치즈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이것이 인간이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나에게 그렇게 존재할 것을 원하는 한, 그것으로 인하여 신에의 길이 가로막히는 일은 없다.' 

 

- 이론적 지성이 정신적 감응의 방해가 된다는 것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불교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사후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제자에게, 석가는 그러한 질문에는 아무런 득도 없을 뿐 아니라 종교의 본질과도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선에서는 '생각하지 말라, 보라'라고 말하고 있고, 힌두교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당신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것이 해방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머리 그 자체는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멋진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에게 내재하는 분석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관찰자는, 있는 그대로에 따르려 하는 전체로서의 나에게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 크리슈나무르티나 트룽빠와 같은 현자는 분별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에 따르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메허 바바의 방법론은 제자에게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그들의 분석하고 판단하는 지성을 무사(無私)의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려 하였던 것이다. 왜 무사인가 하면, 자아가 있어야 할 장소에 메허 바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때, 제자는 마음속에 메허 바바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는 것이다. 또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메허 바바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일상적인 자아를 감소시켜 나가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메허 바바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 따르라고 단언한다. 

 

- 그러나 때때로 완전히 시간을 초월해 버리고 만 것처럼 맹렬하게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인간은 일상보다 리얼한 의식 상태를 체험한다. 거기에는 크리슈나무르티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창조적'이라고 부르는 투명감과 해방감이 있다. 그때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실감을 맛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감각이 그것의 특징이다. 이 상태를 구르지예프는 객관적 의식이라 이름 지었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외계도 그와 같이 선명하게 된다. 실제로 이전에 본 적도 없는 빛으로 감싸이는 것이다. 집착이나 의존이 사라지고, 세계를 진정으로 평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자기의 욕구라는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구르지예프는 인간의 의식을 크게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하였다. 잠들어 있는 상태, 통상의 각성된 상태, 자기 상기의 상태, 객관적 의식의 상태이다. 그의 가르침에는 이 네 가지 상태에 기초한 것이 상당히 많다. 통상의 자각 상태는 기계-인간의 상태이며, 객관적 의식에 도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엄격한 워크(work)와 훈련을 거치면, 객관적 의식에 연결되는 제3의 자기 상기의 상태는 손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이 기계적인 반응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진정한 의지, 즉 '하다'라는 행위가 가능한 힘은, 제3의 상태인 내적인 자기 또는 본질과의 만남과 함께 생성되는 것이다. 거기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인간은 단순한 충동의 집적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3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 구르지예프가 그 가르침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세 가지 심리적 요인이 있다. 첫째, 인간은 보통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힌두어의 자기란 유일한 진실, 즉 세계의 활동에 있어서 모든 범위의 일체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개체로서의 인간에게도 모든 것과 일체화된 기반이다. 이 기반을 자각하게 되면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진정한 자기에 도달했다는 감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진정한 자아, 즉 자기 존재에 관한 지식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마하리쉬가 말하는 길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 이 운명에 사로잡혀, 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 것은 자아뿐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들이 상상하는 형태와 같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2 - 자기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알고, 신에게 자기 자신을 건네준다. 자신의 의지를 신의 뜻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어떤 행동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감각을 벗어던진다(마하리쉬는 진정한 자아를 자주 신과 동일시한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힌두교 구루의 대부분은 본래 두 개의 자기중 하나에 기울어지기 쉽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 모두를 놀랄 정도로 명쾌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주로 자기를 찾아가는 첫 번째 길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머리에 의한 분석만으로는 중도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두 번째 길인 혼의 성장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 자신의 내면을 아무리 뒤져도 나는 보이지 않았고, 나를 추적할 수도 없었다는 질문자들에 대해, 라마나 마하리쉬는 습관적인 허위의 동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은 눈을 뜬 시간에 한정되어 있고, 외부로 눈을 돌려 자신과는 다른 것을 보는 데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 결과 보고 있는 사람, 보고 있는 대상, 보는 행위가 모두 같은 하나의 의식의 현현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나 자신을 어떻게 구분하는가?'라고 그는 물음을 던졌다. '눈앞에 거울이라도 가져다 놓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일까? 자각은 그 자체로 나이다. 깨달으라. 그것이 진실이다.' 

- 사고의 근원에 있는 나의 지각조차 아직 형태와 결합되어 있다. 무엇에도 결합시킬 수 없는 자기의 순수한 의식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자아란 순수한 리얼리티이며, 그 빛 아래에서는 육체도 자아도 빛난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이다. 모든 사고가 숨을 죽였을 때, 거기에는 순수한 의식이 남는다.' 제자들 중에는 자기를 찾아가는 지식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라마나 마하리쉬는 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길을 가도록 권하였다. 마하리쉬가 말하는 신에의 헌신에는 지성보다는 의지가 요구된다. 끊임없이 아이덴티티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신의 뜻대로 가는 것을 추구하고, 자신이 행위자라는 감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내가 행위자이다"라는 에고이즘은, 커다란 검은 독사와 비슷하다. 그 해독제는 "행위자는 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지식은 행복에의 길이다"라고 아쉬타바크라 기타에는 쓰여져 있다. 행위자로서의 자기가 없다는 감각은 멋진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 우리들은 자신의 행위와 가르침 사이에 모순이나 비틀림을 느낄 때마다, 그 비틀림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상황을 적당히 변명하려 한다. 그 변명의 주체란, 정신적 어드바이서를 치부하는 자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국가의 상황과 비슷하다. 정책이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을 때, 반드시 국왕은 그의 정신적 어드바이서인 법왕에게 가서 축복을 구한다. 법왕은 국왕이 종교의 보호자라는 것을 구실로 삼아 국왕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축복을 내린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서도 이와 같이 교묘하게 일이 진행된다. 자아가 국왕과 법왕의 두 가지 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모든 정신 수행의 주요한 포인트가 자아의 관료제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식, 종교, 도덕, 분별, 위안 등 무엇이든지 자신이 구하는 것에 관한 보다 높고, 보다 초월적인, 보다 정신적인 번역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러한 정신적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면, 최후에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정신적 길의 거대한 컬렉션의 포로가 된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신적 컬렉션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은 골동품상을 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1918년에 포춘은 이스트런던 크리닉의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어떤 종류의 심신상관(psychosomatic)의 병례에는, 탄트라 요가가 말하는 상태와 지극히 유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여성다움이란 남성의 다이내믹한 행동을 보조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둔 서양의 여성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포춘은 여성이란 긍정적인 창조력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소위 탄트라 요가의 여성적인 힘인 샤크티는, 쿤달리니 즉 뱀의 힘이 되어 등허리를 상승하여, 그 사람의 전 존재를 각성시키고, 드디어 머리 꼭대기에서 남녀가 일체화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창조력은 남성을 각성시키고, 남성 에너지를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포춘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포춘은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의 합일을 묘 사하는 몇 편의 소설을 썼다. 그리고 1919년에는 골든 돈에 참가하여 그녀 자신이 무척 존경하고 있던 J. W. 브로디 인즈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는 포춘에게 '마술'의 의식을 가르치고, 후에 그녀는 그 가르침을 자신의 카발라의 가르침에 삽입시켰다. 

- 1920년에 그녀는 골든 돈의 런던 롯지(브로디 인즈의 그룹은 스코틀랜드의 조직이었다)에 가담하여,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고, 오히려 파괴적이라고 해야 할 몬나 마테스의 부하가 되었다. 몬나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여동생으로, 카발라의 권위였으며, 골든 돈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리델 맥그레거 마테스의 미망인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변덕이 심한 투시자였다. W. B. 예이츠는 그녀의 투시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 다음으로, 호크마와 비나는 남성과 여성 본질의 창조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소위 생식기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호크마와 비나 안에는 전 생명력의 근원이 내재하는 것이다. 생식기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한 밀교의 심원한 측면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고대인의 이교 신앙의 퇴폐성에 오명을 덮어 씌우고, 그 몰락을 가지고 오게 한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의 비밀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이끌어 내는 다이내믹한 힘이, 활동하지는 않으나 모든 가능성을 가진 것에 자극을 가한다는 원리 위에, 모든 것이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 속에는 놀라운 지식의 열쇠가 포함되어 있고, 비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색스가 그 하나의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성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다양한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섹스에 대한 선입관이라든지, 이러한 중대하면서도 위대한 문제에 대한 인습적인 태도에 사로잡혀, 능동적인 힘에 의한 활동하지 않는 모든 가능성에의 자극이라든지 수정이라는 위대한 원리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습의 억압에 지배당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지, 그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는 언어가 걸려 있는 곳의 비밀을 알 자격이 없다. 이러한 지식이 불순함을 생성시키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불순함이란 컨트롤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이 설정한 한계를 짓밟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본능과 정열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억압하고 잘라내 버리는 자와 마찬가지로 비의에 관계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명백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의의 달성에는 고행과 금욕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 포춘에게 있어 타로는 생명의 나무를 이해하는 데에 뺄 수 없는 것이며, 점성술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에 필적하는 것이다. 생명의 나무와 점성술과 타로는 세 개의 다른 신비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시스템의 세 가지 측면이며, 서로가 서로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점성술도 생명의 나무를 기반으로 배우지 않는 한 철학적인 시스템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며, 같은 논리가 타로 점의 시스템에도 적용된다. 또 타로 자체도 알기 쉬운 해설에 따라, 생명의 나무를 인간 생활에 적용할 때에 소중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모든 점의 시스템, 모든 실천적 마술의 시스템이 생명의 나무에 기초한 원리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누구라도 이 열쇠 없이 그것을 사용하려 하는 사람은, 등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질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시판하는 약을 그 선전문구의 처방에 따라 복용하는 무모한 사람과 비슷하다. (생명의 나무를 알고 있는 입문자는, 생리학의 원리와 약의 화학적 성질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처방하는 의사와 닮아 있다.) 

- 포춘은 카발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의 요가라는 것을 확신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요가와 명상의 본격적인 실천이 결여되고, 이론과 복지만을 강조할 뿐인 종교는 불과한 것이며 불충분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리스도교에 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거기에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실천이 없는 한, 점점 많은 사람이 동양의 방법론으로 나아갈 것임을 정확하게 예언했던 것이다.

- 이러한 신체적 요소나 힘에 생명을 부여하는 별개의 실체이다. 이 신체를 보거나 다른 존재에게서 이러한 것을 지각하기 의해서는, 각성된 '정신의 눈'이 필요하다. 물론 정신의 눈을 가기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논리적 근거에 기초한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색채를 보는 것처럼, 정신의 눈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에테르체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때때로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현대의 많은 과학적 연구가 에테르체의 실재를 증거 하는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와 그의 제자들은 에테르체를 물질적 신체를 감싸고 있는, 그 사람의 건강 상태에 따라 특정의 색깔을 띠는 오라로서 설명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소련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전자파를 인간의 물질적 신체가 발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대부분의 사람의 시각 범위는, 이 전자파의 파장에 조금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렌즈를 단 공동에 특정의 투명한 염료를 주입하여 시각을 보강한 특수한 안경을 단 도구를 사용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생물학 교수는 확실히 인간의 오라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오라는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지만, 자석이 피부에 닿으면 반응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오라는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쪽은 밝고, 바깥쪽은 흐릿하며, 손가락이나 코 등의 신체의 돌출부에서 가장 멀리까지 뻗어 나간다. 

 

- 소련의 과학자 키를리언(Kirlian)은 보다 한 걸음 나아가, 고주파 전자장을 발생시키는 기계를 만든 후에, 필름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맨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렌즈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 논쟁의 데 상이 되고는 있지만, 이 결과 생물은 모두 고주파장 하에 놓이면 빛과 색을 발하고, 백열 섬광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 중에서 가장 의미 깊은 것은, 그 패턴이나 색(이를테면 손가락에 나타나는)이 대상의 기분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 전체를 <초자연>에서 취급한 라이얼 왓슨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방금 뜯어낸 신선한 이파리는 숨구멍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발광하는 내광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 빛은 이파리가 죽어감에 따라 하나하나 꺼져 버린다. 같은 종류의 식물로부터 채취한 같은 이파리도 같은 패턴을 나타내지만, 그 식물 중에 병에 걸린 나무가 있으면, 그 이파리가 나타내는 패턴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때, 슈타이너가 인간의 에테르체를 '보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얼 왓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간의 감수성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초음파에 해당하는 것이 들리기도 하고, 불가시의 파장을 보는 사람도 있다. 살아 있는 존재를 감싸고 있는 오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펙터클의 가장 외측에 있는 적외선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일는지 모른다. 이 파장은 가시의 색채를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형 세포의 능력을 넘어서 있지만, 광도가 낮은 것에 대해 보다 민감한 간상체의 능력의 범위에는 들어올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상 감각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도, 슈타이너가 말하는 세 번째의 신체 또는 테두리인 아스트랄체를 볼 수는 없다.  

- 네 번째로 슈타이너는 세 가지 신체를 조직하고 조화시키는 것으로서 근원적인 <나>, 즉 '자아'를 설정하고 있다. 나의 순수한 감각 속에 슈타이너는 영을 보고 있다. 그리고 아스트랄체를 혼이라 하고, 나를 영이라 한다. 이 책 속의 다른 현자들, 그중에서도 라마나 마하리쉬는, 나라는 감각에 주목하는 것에 커다란 정신적 중요성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아마도 슈타이너의 우주 분석은 그것을 역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그는 저작 속에서, 광물체로부터 정신적인 외적 우주의 존재에로 구성해 가는 경향이 보이는데, 그의 사상의 기반이 특수화되어 가는 전체라는 프로세스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정신적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하강하는 프로세스로 다시 읽어내는 것이 알기 쉬울 것 같다. 슈타이너에게는 그러한 하이어라키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에 정신적 실체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왜 그의 우주가 체험의 단계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존재, 실체, 그리고 민족혼 등의 과밀 상태의 우주를 만들어 내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자신에게는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슈타이너가 자신을 특수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생애에 관한 일화 속에는, 어떤 곳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함과, 자신이 오컬트적인 힘을 통하여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고 싶어 하는 기분이 표현되고 있다. 슈타이너는 투시하는 눈을 열어주는 일련의 특별한 훈련법을 고안하였다. 그는 비교적 수행을 할 때에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이전에 그 기반이 되는 도덕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도덕적으로는 세 걸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의 저서 <신비학 개론(An outline of Occult Science)> 속에는, 사고, 의지, 평정심, 긍정적 정신, 열려진 마음을 개발하는 훈련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 대부분은 부처의 팔정도를 근본으로 하는 매우 멋진 훈련법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난 다음, 자신의 행동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듯이 쳐다보면서 복습하는 훈련법은, 진정으로 눈을 열어주는 것이며, 반드시 일반화되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결코 타인의 진전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모두에게 그것을 보고하도록 한 구르지예프와는 정반대이다), 여하튼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늘 상대의 최상의 가능성을 찾아, 거기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 차크라(Chakra: 신체 속의 영적 센터를 의미하는 힌두어 - 옮긴이 주)를 열어주는, 보다 비교적인 훈련법은 슈타이너 센터에서 지도자가 직접 가르쳐 준다.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다른 훈련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슈타이너가 로맨틱한 공상가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물론 이러한 부분들에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를 그의 저작 속에 들면서,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신화적 세계에서의 과거의 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 오컬트의 길도 역시 진창에 빠지기 쉬운 길이다. 오컬트적 '사실'에의 슈타이너의 화려한 몇몇 도약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격에는 충분한 독립심과 건전함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의 독립심은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신지학협회의 지도자 중에는 독일 지부의 발전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 세계를 멈출 때, 돈 후앙 그는 이미 그 자신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을 투영하지 않고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의 언어는 놀라울 정도로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고,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이었다. '사람이 보는 것을 배우게 되면, 거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 식물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돈 후앙을 찾아 간 카스타네다는, 그에게 보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돈 후앙의 기법 속에는, 첫째로 카스타네다를 사물을 느끼게 만드는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카스타네다도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에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외부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정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외부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돈 후앙의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식물에 말을 걸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카스타네다는 자신의 외부로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라는 감각이 유연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의 단계는, 대상에 대해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그만두고, 거기에 관해 지식을 가지지 않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하게 보는 것이다. 상상과 개념에 포함된 지적 내용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돈 후앙은 친밀감을 주고, 민첩하고 현명하다. 그의 기법은 멋들어진 실천적 지혜가 결합된 것이며, 보는 것도 그의 사상 전체의 가르침 중 하나의 측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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