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한상아
출판 : 다른
출간 : 2020.07.30
직급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특정 순간에는 사이에 '낀' 입장에 속하게 된다. '낀' 입장은 난감하다. 중재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입장을 헤아리면서도 전체를 위한 일은 해야 하고, 성과도 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도 지켜야 한다. 각자의 색깔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두 입장 사이에 끼인 중간관리자로서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출판사에 관심이 가서 출판한 책들을 하나씩 골라 읽어보는 중인데, 전체적으로 '읽기 쉽고', '깔끔하면서도', '실용적인' 글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개인의 체험담에 치중한 에세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 부분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사실 학부 때부터 회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스스로의 성격에 잘 맞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조직에 속할 때에도 최대한 독립성이 유지되는 형태로 일해온 터라, 책 속의 사례들이 조금 낯선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조금씩 존재하는 수직적 압력을 떠올리면 크게 괴리감이 들 정도는 아니다. 프리랜서도 수주할 때에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게 마련이고, 모든 만남에는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형태 중 누군가에게는 갑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을인 형태는 넓게 보자면 사실 '모든 사람'들이 맺고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면을 보여주게 될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자식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친구이고 형제이고 부모일테니까.
그런 시각에서 읽어보면 꼭 회사원이 아니더라도 와닿는 부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즐겁게 읽었다.
1. 상사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깜깜이형
2. 오로지 자신의 업무 영역만 챙기는
여전히실무자형
3. 좋은 정보를 혼자서 독점하는
욕심꾸러기형
4. 남 좋은 일만 하다가 에너지를 소진하는
호구형
5. 여전히 상사와의 관계가 어렵기만 한
얼음형
6.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하는
흉작형
7. 큰 그림보다 세부적인 일만 파고드는
미세미세나노형
8. 함께 일하기보다 혼자만 일하는
독고다이형
9. 매사에 불만이 많고 후배들 앞에서 상사를
험담하는 투덜이형
10. 자신이 하던 일만 하던 방식대로 진행하는
일편단심민들레형
- 직장 내에서 일하는 사람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본인 업무 영역에서만 충실하게 성과를 내면 되는 '현장 실무자'다. 실무자는 중간관리자가 지시하는 업무 방향을 이해하고 성실함을 무기 삼아 실행과 결과로 옮겨놓으면 '일잘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둘째는 잘 따르는 동시에 잘 이끌어야 하는 '중간관리자'다. 실무를 꽉 잡고 있는 전문가여도 중간관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조직 안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선후배 눈치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를 함께 다뤄야만 한다. 마지막은 작든 크든 사업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최종 의사결정권자'다. 부담감이 큰 자리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꿈꾸는 명예로운 자리기도 하다.
- "놔둬. 목마른 사슴이 우물 찾는 거야."
"다 그렇게 삽질하고 혼나면서 배우는 거다."
이 얼마나 조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무책임한 말들인가. 자신의 불친절함을 후배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포장한 말들이다. 직장생활에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은 결코 속 깊은 정을 나누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굳이 길게 공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인 센스와 눈치로 알아서 잘 따라오기를 바라는 '고맥락 문화'는 사원들을 당황시킨다. 고맥락 문화는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이 주장한 개념으로, 충분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보다 당시의 맥락과 상황을 판단해 상대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문화를 말한다.
-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잘해야 하는 고맥락 문화는 조직 전체의 관점에서도 상당한 비용을 소모하게 만든다. 구두보고가 능숙하지 않은 실무자는 중간관리자와 최종 의사결정권자의 의중을 모른 채 갈피를 못 잡고 시간을 허비하며 헤매게 된다. 예를 들어 기획안을 작성할 경우 프로젝트의 최초 목적과 기획 의도를 반영해 콘셉트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 시간을 보내고 엉뚱한 방향을 잡아 바로 실행의 영역으로 돌입하는 것이다. 의사결정권자의 머릿속에는 숫자 1이 있는데 실무자는 영문자 I를 그리기 시작한다. 조직의 실행력을 높이려면 '최소 커뮤니케이션'을 피해야 한다.
- 고맥락 문화는 '지식의 저주'로부터 탄생한다. 지식의 저주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을 예상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 거라고 착각하면서 생기는 인식의 왜곡 cognitive bias을 뜻한다.
- "실리콘밸리에 가지 않아도, 똑똑하지 않아도 혁신을 할 수 있다. 당신이 하는 일 또는 주위에서 '고통'을 찾아라. 멀리서 찾지 마라."
넷플릭스 공동 창업자 마크 랜돌프 Marc Randolph의 말이다. 전 세계 비즈니스 무대에서 혁신을 거듭하는 유니콘 기업의 CEO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비즈니스 문제 해결의 실체는 고객 관점으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것이다.
- 어느 날 우리 팀 앞을 지나가던 실장님이 신입사원도 왔으니 환영회를 하자며 즉흥적으로 저녁 회식을 제안했다. 모든 팀원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 그러시죠"라고 대답해 당일 회식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순간 신입사원의 머뭇거리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표정이 맘에 걸려 혹시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잠시 시간을 내 물어봤다. 그 후배는 "저녁 약속이 있는데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말을 못 꺼냈어요. 실장님께 참석 못 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근데 다른 날로 바꾸면 안 되나요?"라고 이야기했다. 회사 문화에 길들여진 내 머릿속에는 "○○○ 씨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회사에서는 또 그게 아니지. 오늘은 특히 000 씨 환영회식이고, 실장님이 먼저 말도 꺼내셨잖아요. 선배들도 이미 다 된다고 대답했고요"라는 말이 자동 재생되었다. 하지만 후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후배는 회식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모두 약속 없는 날로 다시 정하자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후배의 생각은 틀린 답이 아니었다. 여태껏 조직에서 통용되던 모범 답안에서 벗어난 답일 뿐이었다.
- 얼마 전 뉴질랜드의 한 20대 국회의원이 연설 도중 던진 한마디가 전 세계에 화제가 되었다.
"오케이, 부머! OK, Boomer!"
젊은 세대가 특히 심각한 문제로 여기는 환경 문제에 대해 연설하던 중 자신의 의견에 야유를 보내며 연설을 방해하는 베이비부머 세대 의원들에게 "알겠어, 꼰대!"라는 말로 응수한 것이다. 사사건건 참견하고 반대하는 기성세대에 반감을 가졌던 이들 사이에서 이 영상은 굉장히 큰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짤방'을 만들고 여기저기 공유하며 하나의 놀이로써 이 영상을 즐겼다. 영어권 속어, 은어 등을 다루는 사전 사이트 '어번 딕셔너리 urbandictionary.com'에서는 "오케이, 부머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베이비부머들이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할 때면 그게 왜 틀렸는지 설명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수십 년간 쌓인 잘못된 정보와 무지를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오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 한참이 지나도 나의 퇴사 의지가 꺾이지 않자 식사 자리는 얼음장이 되었다. 한순간에 나는 말이 전혀 안 통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로 전락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팀장님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내 마음속 신호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길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참 고집 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외골수네!"
최근 2년간 퇴사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그의 최종 목표는 오로지 나를 눌러 앉히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퇴사 결심을 돌리기 위해 마련된 멘토님과의 첫 일대일 식사 자리는 퇴사 결정에 확신을 줬다. 나를 위한다는 좋은 마음으로 포장된 일방적 강요는 불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가슴을 새카맣게 태운 그 화살은 성난 마음에 불을 지펴 '보란 듯이 더 성공하고 말겠어'라는 청개구리 심보까지 키워줬다. 팀장님의 선한 의도는 일방적 강요에 대해 스스로 부여한 일종의 면죄부였다. 그 면죄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바로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야"였다. 팀장님은 자신이 던지는 말과 표현이 선을 넘는 참견임을 모른 채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목적지가 하나뿐인 대화는 그만큼 갈등에 취약하다. 상대방에게는 강요를 수락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경로를 이탈하면 곧장 채찍이 날아온다. 경험상 선의로 시작된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한 의도 어딘가 일그러진 구석이 있다. 진짜 선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잘못된 표현 방식으로 관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 구성원들의 업무가 독립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팀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때 "저 친구는 팀워크 능력이 참 좋아" 라며 인정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떠넘겨진 일'은 개인을 성장시키기 어렵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의 본질과 목적을 고민하지 않고 일부 기능적인 부분만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기계가 아니라 '기계 부품처럼 일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프로야구 투수들 중 가장 고된 포지션은 중간에 투입되는 계투라는 말이 있다. 선발투수로서 경기를 주도하는 것도 아니고, 승리를 지키는 화려한 마무리 투수도 아니다. 심지어 경기 상황에 따라 언제든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등판 일정이 주기적이지 않으니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 무력하기 쉽고 컨디션을 조절하기도 어렵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계투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일을 하는 투수를 패전처리조라 한다. 이미 큰 점수 차로 패배가 확정된 경기에 나서는 투수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으로 치면 성공하지 못한 프로젝트의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는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업무를 할 때는 일의 의미를 찾기도 어렵고 의욕도 떨어진다. 회사에서 즐거운 일이란 성취감이 있는 일이다. 무언가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실행해서 원하는 결과를 냈을 때 느끼는 뿌듯한 감정 말이다. 그 과정에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평소 관심 있던 분야를 공부하는 즐거움, 업무를 통해 새롭게 맺은 소중한 인연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나의 업무를 온전히 담당할 때 느끼는 즐거운 감정들이다.
- 조직의 비전과 미션을 수립하고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리더가 똑같은 이야기를 직원들 앞에서 수십 번씩 반복하며 이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단 한 번의 엄숙한 선언으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전 직원이 절절히 중요성을 느끼고 공감하며 즉시 실행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 무리한 기대라는 것이다.
- 비즈니스 코칭에서는 AAR After Action Review이라는 기법을 자주 활용하는데, 팀원과 업무 관련 면담을 나눌 때 다음 네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라고 조언한다.
첫째, 해당 업무를 진행하면서 최초에 얻고자 한 것
둘째, 업무를 통해 실제로 얻은 것
셋째, 그 차이와 원인
넷째, 앞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 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최초에 얻고자 한 것'에 대한 이야기다. 팀원과 리더(또는 조직)가 원하는 끝 그림이 다르면 아무리 과정이 훌륭해도 결과에 만족하기 어렵다. 시작부터 대화를 아끼면 기대하는 결과를 얻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 스마트하게 일하는 회사에서는 최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예방할까? 그들은 일의 원칙을 뚜렷하게 세워 직원들과 공유하고 이를 제도와 환경으로 뿌리내리게 한다. 넷플릭스의 CEO 윌모트 리드 헤이스팅스 주니어 Wilmot Reed Hastings, Jr. 는 자유와 책임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 자유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자유는 완벽하지 않다. 따라서 일의 자유에도 몇 가지 제한이 있다. 첫째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고객의 신용정보 유출 등)은 예방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도덕적, 윤리적, 법적 문제로 해를 끼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자유와 책임을 상징하는 다양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A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B급 성과를 지속하면 존경과 감사를 담아 퇴직급여를 지급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A급 성과를 유지하면 더 큰 책임과 높은 급여로 보상한다는 평가와 보상 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한 휴가와 출장 경비를 재량껏 쓸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운영한다. 이런 제도를 큰 사고 없이 운영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넷플릭스에 가장 이로운 방향으로 행동하라"와 같은 대원칙에 더해 "개인 돈으로도 갈만한 출장을 가라", "얼마나 많은 시간 일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해냈는지에 집중하라"와 같은 세부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워라밸을 부르짖는 90년대생이 회사에 등장하면서 중간관리자는 퇴사를 고민하는 후배와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워라밸의 개념도 없고 한번 입사하면 그 직장에 뼈를 묻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에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세 번이나 퇴사 의사를 밝히며 이직을 했고, 선배로서 후배의 퇴사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배웠다. 퇴사를 앞두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선후배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평생 믿고 의지하는 둘도 없는 파트너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 리더 입장에서 끔찍이 아끼던 후배가 회사를 떠난다고 하면 당장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그 후배가 팀에서 일을 잘하는 핵심 멤버라면 그의 이탈로 팀의 분위기는 술렁일 것이고 남은 동료들의 업무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업무 공백에서 오는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순간의 사탕발림으로 절대 얻을 수 없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앞서겠지만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있는 힘껏 진심을 보여주며 조직 내에서 커리어를 관리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배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훗날을 기약하며 멋지게 보내줘야 한다.
- 만약 후배가 이직 의사를 밝혔다면 이미 더 나은 커리어 또는 연봉에 대해 따져본 다음일 가능성이 크다. 후배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선배라면 이직하려는 회사에 대해 사업 포트폴리오가 불균형하다거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부실하다는 둥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식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이직 의사를 밝힌 것만으로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그 순간부터 후배의 마음은 철옹성처럼 닫혀버리고 '선배와 나의 관계는 결국 지금 직장에 한정된 것이었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 직장을 떠났을 때 배신자가 되는 상황이라면? 두 사람은 조건부 관계였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아끼는 후배를 위한 노파심에 날선 표현을 던지며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후배의 마음속 청개구리를 키울 뿐이다. 후배는 이미 이직할 회사에 대해 선배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후배의 논리를 깨부수려는 시도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은 퇴사를 마음먹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스스로 수없이 질문하며 고민한 뒤 결정한다. 그런데 선배가 무턱대고 술자리를 만들어 친목도모를 하거나 멘토링을 하는 등 갑자기 경로를 한참 벗어난 돌발 이벤트를 만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문제의 핵심에서 한참 벗어난 리더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와 같은 말로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는 리더는 후배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유형이다.
- 후배를 아끼는 선배로서 후배의 입장에 공감하고 이런저런 대안을 제시하며 고민의 범위를 넓혀줘도 후배의 마음이 너무 확고해 변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쉽지만 이때는 후배의 성공을 응원하며 과감히 놓아줘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편이 낫다. 직장을 떠나는 후배와의 아름다운 이별은 무엇일까? 바로 그동안 수고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그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는 것이다.
- 우리 팀에는 정기 보고 뒤에 항상 따라붙던 교리 해석의 시간이 있었다. 종교 단체도 아닌 회사에서 교리 해석이라니? 이 시간의 목적은 회의 때 나온 수많은 말의 행간을 읽고 상사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 없이 각자의 해석대로 각개전투를 하면 이른바 '바다를 끓이는 것처럼' 비효율적이고 막막한 과정이 뒤따랐기에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이 단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따로 회의를 하지 말고 보고할 때 직접 물어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기획서의 부족한 점을 지적받는 상황에서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원하시는데요?"와 같이 당돌하게 정답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의 때 나온 상사의 말을 해석해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중간관리자와 실무자들의 몫이었다.
- 회사에서 인정받던 파트장 선배는 교리 해석의 시간마다 기가 막히게 행간을 읽어냈다. 평소에도 상사의 의식의 흐름과 속내를 정확하게 읽어내 "파트장님, 혹시 신내림 받으셨어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오갈 정도였다. 리더의 성향과 현재 조직의 상황, 그의 감정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기가 막힌 논리로 그의 의중을 하나씩 캐낼 때마다 감탄사 가절로 나왔다. 선배가 추론해낸 리더의 생각은 대부분 구체적이었고 팀원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납득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 주변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선의에 고마움을 느끼고, 실제로 그들은 조직의 윤활유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회사에서 성과를 인정할 때만큼은 그들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프로축구의 세계에서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둔 수비수나 골키퍼가 있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하는 상은 매년 공격수가 독차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 와튼스쿨 최연소 종신교수로 임명된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 Andam Grant는 그의 책 <기브 앤 테이크 Give and Take>에서 조직 내 사람들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그는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정도에 따라 도움만 받는 이기적인 '테이커 taker', 도움을 주고받는 것의 균형을 맞추는 '매처 matcher', 다른 사람을 있는 힘껏 돕는 '기버 giver'로 유형을 분류했다. 재밌는 사실은 기버의 경우 조직에서 가장 높은 성과를 내거나 가장 낮은 성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다. 고성과자 기버와 저성과자 기버의 차이는 이타적인 마음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도 함께 추구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고성과자 기버는 업무에서건 관계에서건 일방적 헌신이 아니라 윈윈 win-win 하는 구조를 꾸준히 만든다. 이와 달리 헌신만 하는 기버는 헌신짝이 될 확률이 높다.
- 직장생활을 하며 솥에 가득 차 있는 김을 적절히 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중간관리자는 안 그래도 일이 많고 바쁜 시기를 보내는 위치로, 조직에서 신임을 얻은 만큼 상사의 지시를 받아 급히 처리해야 하는 수명 업무들이 물밀듯이 치고 들어온다. 갑자기 상사가 요청하는 업무들과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들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아주다 보면 일의 양은 계속해서 늘어난다.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처럼 잡무는 받으면 받을수록 세포가 증식하듯 늘어난다. 그럼에도 들인 노력에 비해 조직 내에서 받는 인정은 기대만큼 크지 않다.
- 같은 상황에서 현명한 기버들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일을 처리한다. 성숙한 방어기제를 활용하는 것이다. 방어기제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갈등 상황, 무기력한 상황이 생겼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떠올리는 생각과 행동을 말한다. 중간관리자가 자주 처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업무로 정신없이 바쁜 중에 상사는 위에서 지시한 수명 업무를 중간관리자에게 맡기려 한다. 이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새로운 일을 받는 상황이 부담스럽고, 바쁜 줄도 모르고 일을 자꾸만 부탁하는 상사에게 짜증이 날 수 있다. 이때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활용하는 중간관리자는 일단 싫은 내색을 못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속으로 끙끙 앓는다. 또한 '우리 부장님은 내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만만하니까 자꾸 일을 주는 거야'라며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킨다. 이는 '억압'과 '투사'라는 부정적인 방어기제다. 이런 종류의 방어기제는 타인과 자신에게 피해를 주고 간혹 부정적인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표출되어 자신의 이미지까지 갉아먹는다.
- 반면 현명한 중간관리자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활용한다. "부장님, 저 진짜 이러다 일에 깔려 죽을지도 몰라요!"라고 너스레를 떨거나 자신에게 업무 요청이 올 걸 미리 '예상' 하고 심정적으로 이에 충분히 대비한다. 예상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감정적으로 스트레스받기보다 자신의 업무 상황을 효과적으로 알리고, 일을 맡는다 해도 납기일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을 넌지시 표현하며 일정을 가급적 넉넉히 조정하기도 한다. 오히려 '오죽하면 부장님도 내가 일이 많은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 또 부탁을 할까'라며 심정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업무가 과중한 상황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종류의 방어기제를 '유머'와 '억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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