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박초롱]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일루젼 2022. 4. 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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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초롱
출판 : 현암사 
출간 : 2022.03.03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윤심덕의 구슬프면서도 시원한 곡조가 잘 어울리는 한 권이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취향에 관한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내 경우는 칵테일보다는 싱글몰트 쪽이라, 함께 바 투어를 나서기에는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가까이 산다면 좋은 술친구로 지내고 싶다. 무언가를 깊게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어떤 것을 강하게 건드린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기도 하고, 더욱 굳건해지기도 하는 취향들을 헤아리다 보면 '나' 자신을 조금쯤은 더 깊게 이해하게 된 기분이 든다. 

 

현암사가 이런(?)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였나? 싶어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무척 유쾌하고 즐겁게 읽었다. 좀 더 느슨한 시기가 오면 서촌 가서 코블러에서 디스코 볼란테도 한 잔 하고, 보리마루 탭하우스에서 라스푸틴도 마셔야지.  

 

곧, 여름이다. 

 


   

 - 박초롱.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데 돈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딴짓 전문가, 취미 부자, 경험주의자.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변한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술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칵테일의 세계에 빠져서 바를 찾아다녔다. 급기야는 낮에는 카페 낮섬이다가 해가 지면 낯섦으로 바뀌는 바를 운영했다. 낮에는 한적한 섬 같은 곳이었으면 했고, 밤이면 모든 게 낯설어지는 공간이었으면 했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만나 작고 충만한 무언가가 되는 칵테일의 세계를 이야기하다 보니 그게 내가 사는 세계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둘에 대해서 쓰게 되었다. 매거진 <딴짓>을 발행하고, 여성과 일에 대한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를 진행하고 있다. <딴짓 좀 하겠습니다>,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야망 있는 여자들의 사교 클럽>, <우리 직업은 미래형이라서요>를 썼다. 

    

- 무언가를 애호한다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다. 한껏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자주 '욜로하다 골로 간다'거나 '가난한 애들은 이유가 있다'라는 말로 폄하된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일에는 돈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마시고 싶은 거 다 마시면서 집이 없다고 불평한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서 미래가 없다고 투덜거리다니! 좋아하는 마음에도 자격이 필요해진다. 근면히 노동하고 아껴 통장부터 두둑이 만들 것. 일단 적금부터 붓고 드립 커피를 사 마실 것, 빈티지 인테리어는 먼저 집을 산 이후에 할 것. 삶의 우선순위는 자본에 논리에 맞춰 줄을 선다. 집과 차가 없는 자, 칵테일을 탐하지 말지어다. 

 

- 얼마 전 딸기에 취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달콤함과 상큼함에 따라 딸기를 분류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단단하고 달콤한 금실 딸기에서는 복숭아 같은 향이 난다는 것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만년설은 딸기에 눈을 섞은 듯한 핑크빛을 띤다는 것도, 금실에서 느껴지는 달달함은 다른 딸기와 달리 꿀에 가깝다는 것도,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제철에 딸기 농장에 찾아가 막 딴 딸기를 맛보는 건 즐거웠고, 가까운 곳에 붙어 있는데도 농장마다 딸기 맛이 다르다는 건 놀라웠다. 

-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야만 보이는 세계, 손으로 더듬어야만 느낄 수 있는 세밀한 결, 여러 번 곱씹고 음미해야만 알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아무리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해 본 사람은 알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달라진다는 걸. 

 

- 칵테일이 좀 사치스러운 술일지라도, 우리가 술을 생각할 때 거기까지 갔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것을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고 싶을 권리가 있으니까. 경험하는 만큼 우리 세계는 더 넓어질 테니까.


- 해보지 않으면, 먹어보지 않으면, 가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만져보지 않으면, 타보지 않으면, 뛰어보지 않으면 무엇이 즐거운지 알기 힘들다. 다행히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부모님 세대에 비해 꽤 많은 걸 해보고 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취미란에 쓸 수 있던 객관식 보기는 많지 않았다. 독서, 피아노, 영화감상, 태권도, 서예, 십자수, 펜팔, 다이어리 꾸미기 속에서 나는 얼마간 풍족함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고, 내 목구멍을 내가 책임지게 되면서 먹고사니즘의 문제에 치여 무언가를 즐기는 일은 언제나 뒷전이 되고야 말았다. 취미라는 말에는 먹고살 만한 자의 가벼운 여흥이나 낙관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 그렇지만 가끔 그런 두려움이 생긴다. 언젠가 안정이 되면, 이 모든 게 괜찮아지고 나면 나는 그다지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애호하는 것이 없는 내 삶은 흑백영화처럼 색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이 점점 줄어들면 나중엔 아예 좋아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좋아하는 게 없는 삶을 정말 괜찮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작은 결의 차이를 손으로 더듬어 세밀히 살필 만큼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느 정도 변화한다고 믿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낯빛부터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여기저기 헤프게 두고 다니는 것은 그만큼 삶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든다. 나는 젊을 때부터 고요한 호수 같은 마음을 갖고 싶지는 않기에, 좋아하는 일에 함부로 마음을 내어주며 살고 싶다. 좋아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또박또박 힘을 주어 좋아한다고 말하고, 어떤 점이 어떻게 좋은지 날을 세워 관찰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에서 만큼은 신중해지고 싶지 않다.

 

- 취향을 가진다는 건 퍽 비싼 일이다. 취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단 무언가를 먹어보거나, 마셔보거나, 보거나, 듣거나, 해보거나, 타보거나, 참여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즐기는 것은 그다음이다.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다음이다.

 

- 오페라를 즐기려면 어릴 때부터 몇 번은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간 경험이 있어야 하고, 즐기는 스포츠로 승마를 꼽으려면 말 타고 장애물을 넘진 않아도 가볍게 뛸 정도로는 익혀야 한다. 오페라 공연은 한 회에 몇십만 원씩 하고, 승마는 한 시간에 십만 원은 주어야 말 허리에 다리라도 감아볼 수 있기에, 일단 지금은 유튜브 광고를 참으면 들을 수 있는 발라드를 듣고 운동화만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달리기를 선택한다. 발라드와 달리기도 좋지만 어쩐지 그것을 택하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접시 색깔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회전초밥집 의자에 앉아만 원짜리 그릇에 담긴 초밥을 바라보며 천 원짜리 계란 초밥을 먹는 기분이랄까. 계란 초밥이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저 만 원짜리 초밥 맛이 궁금하다. 

 

- 솔직히 광어에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소주한 잔과 즐길 때의 그 기쁨이, 봄에 딴 쑥부침개에 달달한 밤막걸리를 곁들였을 때의 환희가 위스키 한 잔보다 근사하면 근사했지 못하진 않다. 그랬다면 정말 칵테일이 필요한 그 순간에, 위스키 한잔이 간절한 그 밤에, 빈 지갑을 걱정하며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가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몰라서 꾸지 못하는 꿈은 안타까워할 기회도 없다. 안타깝게도 술의 다양한 세계를 알아버린 애인과 나는 가끔 예상치 못한 수입이 생길 때나 기념일이면 코블러에 간다. 코블러는 영화 <소공녀>에서 주인공 미소가 자주 가는 바이기도 하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고 말하는 미소,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는 대신 차라리 집을 포기해버린 미소는 코블러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 여러 면에서 나는 꽤 솔직한 편이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교육받았을 뿐 아니라 솔직한 것이 '솔직히'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시 나는 낯을 붉히게 되는 노골적인 솔직함보다는 지나친 격식을 선택하고 싶다. 인위적인 연극 무대 위에서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무언가에 대해서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 비약하자면 그것이 좀 더 문명화된 사회 아닐까? 

 

- 모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달콤하고 드라이하면서, 화려하면서 심플한 칵테일을 원한 셈이다. 보드카와 진과 럼과 위스키를 때려 붓고, 캄파리와 쿠엥트로, 베일리스와 카시스를 섞은 칵테일 맛은 정말 괴이할 것 같다. ... 나처럼 쓰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다. 자기가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은 남의 흉내를 내지 않는다. 


- 엄마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마시는 건 따뜻한 칵테일인 핫 버터드 럼이다. 바닐라향이 진한 돈파파 럼에 버터와 럼을 넣고 녹인 칵테일이다. 함께 들어간 설탕은 달달하고, 버터는 고소하고, 시나몬 파우더는 향긋하다. 눈이 오는 날 따뜻하게 마시기 좋은 칵테일이다.  

 

-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봤다. 오랫동안 아껴왔던 <웨스트월드>를 시즌3까지 몰아보고,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이 이름을 틀리지 않고 발음할 날이 올까?)의 <세 가지 색> 시리즈 블루, 화이트, 레드를 연달아 봤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나서 단순히 내가 이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그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죽을 때까지 오로지 소비자로 만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안 그래도 덧없는 내 삶이 끝도 없이 하찮게 느껴지지만, 압도적으로 수려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침통하게 무릎을 꿇게 된다. 그래, 네가 이겼다.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참 아름답구나! 

 

- 온갖 친구를 돌려가며 술집에 함께 갔다. 지난주에는 도라지와 그곳에 갔다. 도라지는 메뉴판에 우리나라 전통술이 많다고 행복해했다.
"황금보리소주가 있네. 소나무와 학도 있고, 아니, 선비진도 있고! 신례명주까지!"
"난 전통술 하면 어쩐지 막걸리밖에 떠오르는 게 없더라."
"막걸리에도 단계가 있는 거야."
"난 막걸리 하면 땡볕에 논에서 일하다가, 새참이 오면 쪼르르 가서 마시는 장면이 생각나. 금색 그 플라스틱 그릇 같은 거에 콸콸콸 부어서 꽉 마시면, 땀에 젖은 옷 밑으로 막걸리가 흐르는 장면 같은 거."
"그건 고통을 잊게 하는 술이지."
"고통을 더하는 술도 있어?"


- 도라지는 술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고통을 줄이게 하는 술과 쾌락을 더하게 하는 술. 내가 말하는 막걸리는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의 술이라 했다. 고되게 일하고 나서 그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참으로 마시는 탁주가 그런 술이라 했다. 나는 어느 한낮에 편의점에서 보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소주 한 병을 계산한 뒤, 라면 먹는 곳에 서서 반 병을 원샷하던 아저씨는 낡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술마다 맥락과 기능이 다른 거야."
"쾌락을 더하게 하는 술은 뭐가 있는데?"
도라지는 비싼 술은 보통 쾌락을 더하게 하는 술이라고 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 하는 술, 잔의 10분의 일이나 채울까 말까 하면서 만 오천 원씩 받는 위스키나, 포장이 화려하고 이름이 긴 와인 같은 것들이 그렇다고. 막걸리는 보통 고통을 줄이는 술이었는데 고급화되면서 일부는 쾌락을 더하게 하는 술로도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교양에 감탄했다.
"나는 네가 철학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게 이럴 때 실감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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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단골바뿐이랴. 어른이 되면 한강은 아니더라도 실개천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다. 뚜껑 열리는 람보르기니는 아니더라도 국민 차 한 대는 뽑을 줄 알았으며, 멋있는 할머니로 늙기 위해 차곡차곡 연금을 붓고 있을 줄 알았다. 아, 이것은 일장춘몽이라. 한여름 밤의 꿈이라. 제자야,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덧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 나의 노년에도 지구가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혐오가 놀이가 된 시대에 무사히 나이 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없다. 안전한 미래는 지난주에 길을 걷다 도둑맞았고, 눈부신 희망은 어제 드라이마티니와 바꿔 먹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에 대한 희망을 다 날려버리자 내손에 남는 게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도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던 것처럼,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 그래. 내게는 단골바가 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를 다닐 수 있는 취향이 남았다. 무언가를 애호하고 아끼는 마음이 남았다. 이것은 나의 작고 이상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 무언가를 아끼고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을 응원한다. 애호하는 마음에 자격을 고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는 술, 특히 칵테일이 그렇다.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던 어린 나는, 자라서 칵테일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출간 축하파티에는 미모사를, 추운 겨울밤에는 에그노그를, 일상이 지루한 날이면 페니실린을 마신다. 덕질의 끝은 창업이라고 했나. 이 바 저 바를 종종거리다가 결국 내 손으로 바를 차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술에 대한 찬양과, 칵테일에 대한 예찬과, 그것들을 마시며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하리라 마음먹는다면, 혹은 좋아하던 마음을 응원받는 기분이 든다면 좋겠다. 당신이 그 작고 이상한 세계를 지켜나가기를.

 

- 칵테일을 생각하면 도시의 밤이 떠오른다. 실제로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 Bar는 대체로 도시에 있다. 더 외로워서라기보다는, 혼자임을 연출하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우습지만 나는 마음껏 고독하고 싶을 때 칵테일을 마시러 간다. 외로운 것과 고독한 것은 다르다. 외로움은 밖에서부터 나에게로 오고, 고독함은 내게서부터 밖으로 간다. 고독함에는 일말의 주체성이 담겨 있다. 

 

- 그래도 바에는 주로 혼자 간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 비밀에 담긴 영혼까지 같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을 때,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고민이 덧없이 느껴져서 차라리 침묵하고 싶을 때,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거나 '너라고 뭐 다를 줄 아냐'라는 말속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간다. 

 

- "너는 뭘 좋아해?"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상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전화기가 뜨거워지도록 밤새 조잘거렸다. 나는 오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를 봤어. 나는 이 감독의 전작도 좋아하거든? 너 그 영화 봤어? 그럼 어떤 영화를 좋아해? 난 지금 아이스크림을 먹어. 난 클래식 밀크가 좋은데, 너는? 그럼 좋아하는 색은 뭐야? 늦게 도착해 진도를 허겁지겁 따라가는 학생처럼 다급하게 서로가 좋아하는 걸 묻는다. 상대를 못 만난 지난 시간이 아쉽다 못해 억울한 것처럼, 다 듣고 나면 그 사람이 손에 다 쥐어질 것처럼.

- 그렇게 좋아했던 마음이 이제는 없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눈을 같이 보고 싶다며 4시간을 운전해 그의 집 앞까지 가던 마음이, 카톡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얼굴 붉히던 마음이, 만나지 않는 시간에도 차오르는 마음을 비워 내기 위해 편지지를 꺼내던 마음이, 이제는 없다. 고작 서른 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았을 뿐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되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서러워서나, 우리가 같이 놀던 놀이터에 내 마음만 덩그러니 남는 게 슬퍼서는 아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예고도 없이 여위는 마음이 허무해서, 함부로 식상해져서 그렇다.

 

- 칵테일바에는 혼자 가는 걸 가장 좋아하지만 가끔은 친애하는 친구를 데려가고 싶을 때도 있다. 옷장에서 잘 다린 옷을 꺼내 차려입고 함께 바까지 걸어가고 싶다. 친구에게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겨보지 않겠냐고 권하고 싶다.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묻고, 그에 어울리는 칵테일을 추천하고 싶다. 파티의 여흥을 좀 더 이어가고 싶을 때라면 칵테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맨해튼을 권하고, 더운 여름 리조트의 정취를 즐기고 싶다면 화려한 과일 가니시를 곁들인 블루라군을 추천하고 싶다. 칵테일을 마신 후에 색색의 가니시를 집어 슬쩍 빨아먹는 재미! 그 모든 걸 위해서는 일단 바에 함께 가는 게 먼저다. 뭐든 해보지 않으면 좋아하기 힘드니까.

 

- 한때 서울 마포구에서 북바(Book Bar)를 운영했다. 바는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이어지는 경의선 숲길의 끝자락에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20분 남짓 걸어야 했다. 누가 바를 찾아오겠다고 하면 나는 '생각보다 먼데?'를 지나 '이미 지나친 거 아냐?'를 넘어 '난 길을 잃은 게 확실해'가 될 때까지 와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 손님들은 대개 '난 길을 잃은 게 확실해' 정도에서 바를 찾아내곤 했지만, 이 정도면 9와 4분의 3 승강장이라며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  

 

- 어떤 손님은 혼자 있기를 원했고, 또 어떤 손님은 내심 바텐더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 여부를 물어볼 수 없어서 나는 눈치껏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그건 시를 쓰거나 글을 다듬는 일과도 조금 닮았다. '장면'이라는 단어를 '광경'으로 바꾸는 것, '가득하다'는 말을 '그득하다'라는 말로 바꾸는 것, '바라보다'라는 동사 대신 '쳐다보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 '사뭇' 대신 '자못'을 채워 넣는 것, '문득'에 밑줄을 긋고 '불현듯'이라 쓰는 것. 이러한 것들은 상황과 맥락과 분위기를 살펴야 잘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 낯선 세계에 가면 언제나 그 세계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데, 칵테일을 마시는 것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일인지라 이 세계에 처음 온 사람에게는 이 세계의 언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아는 칵테일도 잘 없고,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 무시당할 것 같고, 엉뚱한 걸 시켰다가 그 비싼 칵테일을 다 마시지도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된다. 그러나 손님이 칵테일을 모른다고 무시하는 바텐더는 직업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바텐더는 말하자면 술 세계의 가이드라서, 당신의 언어로 낯선 세계를 안내해줄 의무가 있다. 당신이 아는 칵테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해도 바텐더는 친절하게 칵테일을 추천해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바텐더에게 어떤 술을 추천해줄 수 있는지 묻고, 그 칵테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그와 여러 상의 끝에 내가 마실 칵테일을 고르는 것도 칵테일 값에 포함되어 있다. 그 과정도 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 "돈이 좋다. 부럽다."
"그치. 자랑하고 싶었어."
"자랑을 뭘 허락받고 해."
"자랑은 원래 허락받고 해야 하는 거야."
홍이는 벤츠를 산 걸 마음 편히 자랑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자랑을 자랑으로만 들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건 그렇지 싶었다. 삶이 고단한 사람 옆에서는 웃음소리도 조심해야 하는 거니까. 


- 애인은 칵테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술에, 아니 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음식에 해박하다. 그릴을 사서 양고기를 아랍식으로 척척 구워내는 것도, 바쁜 아침에 터키식 샐러드를 뚝딱 만들어내는 것도, 영국의 코티지 파이를 디저트로 내오는 것도 애인이다. 음식이라는 게 그저 맛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며 훠궈를 만들어줄 때는 대만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주고, 커리와 곁들여 먹는 빵은 인도식으로 천으로 덮어둔다. 흰 살 생선 요리에는 샤르도네를, 부엌에 기름 냄새를 풍겨가며 만든 깐풍기에는 상선여수를 내온다. 애인 덕에 나는 계절과 날씨, 기분과 함께하는 사람에 어울리는 요리와 술을 즐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애인은 얇은 지갑으로 취향을 즐기는 데 있어 국가대표급의 능력이 있다. 

 

- 나는 말이나 글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다. 점쟁이들의 말이 잘 들어맞는 것도 어쩌면 그가 어떤 문장을 내뱉는 순간 그 문장이 듣는 사람에게, 또 세계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 같다. 무당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가 내뱉는 말이 우주의 기운을 바꾼다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비논리적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재수 없다고 문지방도 안 밟고, 죽는다고 빨간펜으로 이름도 안 쓰는 사회니까 뭐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 애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와서 하버드 박사를 하겠다는 목표보다는, 매일 한 편씩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역시 하버드 박사만큼이나 어렵다는 걸 안다) 애인은 내가 이슬아 작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산문집은 내가 아껴 읽는 몇 안 되는 책이다. 매일 한 편의 글을 써내는 사람은 자신을 숨기기 어렵다. 글은 무서울 정도로 쓰는 사람을 잘 드러내기에,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슬아 작가의 글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 김영민 교수님처럼 마음껏 시기하고 싶은데, 그 압도적인 사랑스러움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는다. 그냥 마음껏 좋아해 버리는 게 마음 편하다.

 

- 수술 전날 입원해서 탱탱볼과 드라마를 봤다. 하루에 삼만 원을 내야 하는 5인실 병동에서 환자용 침대에 둘이 몸을 욱여넣고 봤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남편이 가족들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겠냐고. 자기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 얼렁뚱땅 사랑하는 거 아냐?"
탱탱볼이 말했다.
"얼렁뚱땅 하는 게 뭔데?"
"뚱땅거리며 하는 거지. 사랑이 뭔지 생각 안 해보고 대충대충. 마음 가는 대로."
탱탱볼은 누가 좋고, 보고 싶고, 안고 싶은 것만으로 사랑이라 부르는 건 너무 게으르지 않냐고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괜히 십 대 청소년들인 게 아니라고. 그런 마음만으로 어떤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십 대 때나 하는 일이라고 했다. 

"걔네가 오십 대였으면 그렇게 서로 죽자고 좋아하지 않았으려나?"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어려워야지. 그 선택이 어려워야지."
꽤 근사한 대답이로구나 싶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라면 고개만 끄덕였을 것이고, 사회제도가 그렇다거나 남들도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면 침묵했을 것이고, 요한복음을 읽어주었더라면 혀를 찼을 텐데 말이다. 탱탱볼은 어려운 사랑을 한 이력이 충분했다. 나는 경력자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 "얼마 동안 마시면 안 되나요?"
"입원하시는 동안에는 당연히 안 되고요. 퇴원하신 후에도 몇 주는 참으시는 게 좋아요."
내가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탱탱볼을 바라보았다.
"내가 논알콜 칵테일 만들어줄게."
어려운 사랑에 대해서만 경력자인 탱탱볼이 말했다.

"논알콜 칵테일은 칵테일이 아니야."

"그럼 뭔데?"
칵테일이야말로 얼렁뚱땅 만들어진 단어다. 사람들은 음료를 두 개 이상 섞기만 하면 칵테일이 된다고 믿는 것 같다. 하기야 보드카에 오렌지주스만 대충 부어도 스크루 드라이버가 되고, 진에 토닉만 부어도 진토닉이 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아무 음료나 대충 섞는다고 다 칵테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칵테일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데. 그건 만들기 위해 이틀 전부터 준비해야 하는 코블러의 디스코 볼란테 같은 칵테일에 대한 모욕이다.
"그런 건... 혼합음료지."

- 이십 대의 연애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마냥 낭만적일 것 같지만(생각해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애를 '낭만'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나처럼 자의식이 비대한 스무 살이 하는 연애는 그리 뜨겁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여러 번의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가슴에 길쭉하게 그어진 흉터를 사랑하기보다는, 탄탄한 가슴을 보며 달콤한 말썽을 일으키고 싶었다. 이십 대의 나는, 상대를 사랑하기보다는 상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우리를 사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 작은 물결만 일어도 괜히 물장구를 쳐 파도로 만들곤 했다. 둘이 하는 연애인데 관객이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굴었다. 

 

- 그의 친절은 너무 구려서 그의 뒤에 가지런히 선 술병의 반짝거림조차 흐리게 만들었다. 어째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멘트를 개발하지 않는 걸까. 어찌하여 이다지도 구리단 말인가! 선생님 같은 바텐더는 시골에서 올라온 바가 어색한 소녀에게 계속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바의 문화란 무엇인지, 칵테일 베이스는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들을 때처럼 흘려들으며, 나는 스카치위스키에 베르무트와 레몬주스를 셰이킹 한 홀인원을 시켰다. 차라리 맛이 없기를 기도하며.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남자들은 거의 모든 곳에, 언제나 있다. 바에도 예외는 아니라서 나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옆자리의 손님에게 저급한 농담을 듣기도 한다.

 

- "바에 와서 여자 혼자 술 마시는 거, 말 걸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덕분에 나는 사소한 것을 다짐하며 산다. 웃기지 않으면 웃지 말자. 공감하지 않으면 고개를 끄덕이지 말자. 쓸데없이 친절하지 말자. 세상에는 스스로를 친절한 오빠로 포지셔닝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닌지라, 나는 가끔 과격한 언어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라는 말은 늘 기분이 나쁘고, '여자가'로 시작하는 말은 유쾌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나는 집에 오는 버스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한다. 못 배운 사람들이 험악한 말을 내뱉는 것뿐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어떨까. 교양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 말이라고 싸잡아 던져 버린다면 어떨까. 당장 기분이 나아질까. 저들은 사악한 이들, 혹은 모자란 이들, 그러니 이 공정하고 혹은 현명한 내가 참아주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이 세계를 그렇게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낭만주의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나를 혐오하는 인간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위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 사람들이 대부분 헤테로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와 광록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광록이가 여자인 지인에게 '남자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묻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열에 한 명은 퀴어인 세상에서 상대의 연인이 이성일 것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 조심스러움은 귀했다. 물론 광록이는 거기서 늘 한발 더 나아가긴 했지만. 
"걔네는 여자 둘이 산대?"
"응. 둘이 망원동 산대."
"설마 고양이 키워?"

"응. 키우던데."
대화가 여기까지 오면 광록이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레즈네."
"망원동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여자 둘이 살면 레즈야?"
내가 그렇게 되물으면 의심 많은 도마 Thomas를 보는 신자의 눈빛으로, 광록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 그런 농담을 공유하던 우리에게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자 둘이 돈을 합쳐 집을 사고, 앞으로도 쭉 함께 살아가자는 약속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약속을 한 그들이 레즈비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의 세계란 어찌도 이리 좁은지! 

 

- 홍대에는 여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숨겨진 바가 비교적 많았다. 네이버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간판도 제대로 없는 바(모두 그렇진 않다지만). 막상 들어가면 탄성이 나올 만큼 근사할 때도 있었다. 내가 방문했던 바의 칵테일은 프레젠테이션이 화려했고 가니시도 다양했다. 상자를 열면 연기가 피어오르며 한 잔의 칵테일이 마법처럼 나올 때도 있었고, 장미 한 송이가 통으로 가니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모두를 위한 바도 필요하지만 소수자를 위한 바도 필요하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있는 한은 말이다. 

- 최재천 교수는 동물에게도 동성애가 자연스럽다고 했다. 전체 개체 수의 10%가 동성애를 하고, 이성애만 있는 종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동성을 사랑한다고 해서 차별하는 종은 인간뿐이다. 동성애는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아시아인임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아시아인임을 치료받아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동성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코미디언 완다 사이키스 Wanda sykes는 스탠딩 코미디에서 이렇게 말한다. "흑인인 것보다 게이인 게 더 힘들어. 왜냐면 내가 흑인인 걸 커밍아웃할 필요는 없거든. 어버이날에 부모님 앉혀 놓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지." 

 

- 회장님과 술을 마신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다. 알고 지낸 지는 15년 남짓 되었으나 술잔을 부딪치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종로의 참새 집에서 오뎅탕에 청하를, 홍대의 산울림 1992에서 송명섭 막걸리에 육전을, 합정 디스틸바에서 맨해튼을, 청담 원스인어블루문에서 애플 모히토를, 이태원 써스티몽크에서 바이엔슈테판을 마시며 우리는 서울의 밤거리를 쏘다녔다. 아, 세상은 넓고 마실 술은 많아라. 별 달리 함께하는 일도 없이, 딱히 나눠야 할 이야기도 없이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나 술을 마셨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열 번 정도. 가끔 친구들에게 내가 아직도 그와 술을 마신다고 하면 이런 감탄이 따라오곤 했다. 
"교수님을 아직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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