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한은화
출판 : 동아시아
출간 : 2022.03.23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음
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너무 재미있고, 놀랍고, 부러운 글이었다.
"서울 도심에 같이 한옥을 짓고 사는 연인이 있다?"
어느 부분에서 놀라지 않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지 싶다가도, 막상 내 일이 된다면 이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저자가 글을 너무나도 유쾌하고 유려하게 써놓아서 그렇지 꼼꼼히 뜯어보자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다. 때로는 구청, 때로는 시를 상대로 공문서를 직접 작성해 협상하고, 전혀 모르던 부분인 건축-그것도 규제가 가득한 구도심 구한옥-에 뛰어들어 건축가와 시공사 사이에서 조율해가며 '원하는 바'를 피력했다. 그나마도 대수선도 아니고 지하 공간을 만들어 올리는 재건축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도로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싶은 고비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선택한 차선들이 현장에서 벌어진 한 순간의 실수로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당연하다 싶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했다. '모든 걸 내 취향에 맞춘 드림 하우스'란 필요한 비용도 비용이지만, 설사 충분한 비용이 있다고 해도 절대 완벽한 구현이 불가능하리라는 깨달음이 밀려온다. 중요한 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것 뿐이다.
저자는 웃으면서 풀어가고 있지만, 실생활을 바라보지 못하는 탁상공론과 불합리한 규제들도 눈에 띈다. 저자의 표현 중 "한옥을 문화재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문구가 깊게 남았다. 정말 재생을 원한다면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야 한다. 한옥이건 양옥이건 "사람"이 살아갈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된 집의 사진들을 보는 순간, 저자가 한 권 내내 풀어놓은 고생담은 어디론가 씻겨 내려가고 부러움이 가득 찬다. 나도 나를 위해, 내 가치관과 생활을 고려해 설계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원래도 개량 한옥에 관심이 있는 편인데,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욕심이 절로 인다. 이 집은 두 사람의 삶을 최대한 고려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지만 제3자가 보았을 때도 충분히 아름답고 편안해보인다. 나 또한 진정한 나만의 집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그러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갈 의욕이 불타올랐다. 내가 내 몸을 건사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나만의 집을 지어보는 꿈이 생겼다. 현실 가능성만을 따지지 말자. "꿈"은 "꿈"으로 존재하는 동안 가장 빛난다. 그렇지 않아도 유튜버 "오느른"의 폐가 리모델링 동영상을 보면서 차오르던 뽐이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에서 터져버렸다. 주말과 주중을 분리한 세컨 하우스라는 가정 하에 일단 계획이라도 세워보고 싶다.
설사 실제로 삽을 뜨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삶의 방향성은 자기자신을 얼마나 잘 아는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는 동안 "원한다고 생각하던 것"을 실제로 체험했을 때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보다 예민하게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산다는 건 자기 자신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설사 막상 완성한 집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 동안 얻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감동, 활기까지 불러일으켜준 고맙고 멋진 책이었다.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고, 생생하고, 아름답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종로구 체부동에 한옥을 짓고 산 지 2년째다. 가족 구성원은 최진택과 한은화. 10년 차 연인이고, 법적으로 동거인이다. 마당 있는 집을 찾다 어쩌다 한옥을 짓고 산다. 부부도 아닌,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가 집을 짓는다고 하니 주변으로부터 언제 결혼하느냐는 질문을 꽤 받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결혼식장(집)을 짓고 있다고 답해 왔다. 집에서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식장은 완공됐고,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으며 여전히 결혼에 게으르다.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한옥 짓기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서울살이를 하며 원룸 또는 투룸을 전전하며 살던 우리는 문 열면 방만 있는 집이 아니라, 집 안에도 바깥 공간 한 평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졌다. 좋은 날 하늘 보며 바람 쐬며 볕 쬐며 맥주 한잔할 수 있는 테라스나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의 방을 하나 터서 테라스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베란다마저 확장해 버리는 대한민국의 평균 삶터 아파트에서 이런 소수 의견은 반영될 수 없다. 결국 2016년 당시 4년 지기 연인은 의기투합해 서울에서 주택 찾기에 뛰어들었고, 1년 반의 부동산 중개사무소 투어 끝에 지붕이 무너져 내린 서촌의 한옥 한 채를 샀다.
-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물을 만드는 것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공간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표준화된 방 개수와 매매 가격만 따지는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획일화된 아파트 대신 너다운 집과 나다운 집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너무 쉽게 비교하고 평가하고 좌절하는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요. 의사가 병을 찾듯이 건축가는 사람들의 꿈을 찾아 구현합니다. 내가 볼 땐 사람들이 그 꿈을 접고 사는 것 같아요. 하꼬방(판잣집)처럼 작아도 자기의 꿈이 구현된 집이라면 아름답습니다. 돈이 많아도 가난하게 사는 부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아요."
- 우리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정착시킬 곳을 원했다. 삶도 찾고 돈도 버는 조화를 슬쩍 기대했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계산기부터 두드려야 하는 셈법 앞에서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철부지 같기도 했다. 대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평당 얼마짜리일까. 내 삶이 담길 터의 가치는 평당 얼마여야 합당할까. 이런 셈법이 있기나 할까.
- 우리는 느리지만 천천히 알아가는 삶을 살길 원했다. 한국영화로도 만들어진 모리 준이치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고향 마을 '코모리'로 귀향한 주인공 이치코가 나온다.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치코가 직접 먹을거리를 재배하고 수확해 요리하고 먹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진택과 나는 삶에 허덕허덕 치일 때마다 이 영화를 보고 또 보곤 했다. 오로지 편의만을 좇느라 잊었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리뷰자 주 : <리틀 포레스트> 여름-가을 편과 겨울-봄 편을 몇 번이고 보곤 했다. '삶'에 집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 계절감과 생활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 계절마다 존재하는 것들의 이유도 알 수 있다. 겨울 추위 덕에 밖에 널어놓은 무가 얼었다 녹으며 꼬들꼬들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치코는 말한다.
"추우면 힘들긴 하지만 춥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도 있다."
한옥에서의 삶도 그랬으면 했다. 우리의 40대 인생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천천히 다져진다면. 아파트에 살면서 밖에 나갈 궁리만 하지 말고, 밖을 품은 한옥을 짓고 산다면. 집에 담을 우리의 취향을 알아가고, 그 취향을 정리해 좀 더 깊게 파고들며 살 수 있다면. 무엇을 좇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허덕이는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걸아는 삶, 하늘을 보며 사는 삶, 되도록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땅도 집도 작기만 한데 우리의 꿈은 부풀어 갔다. 이 집에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 돌이켜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을 겪었을까 싶다. 하지만 막상 내 일로 닥치면 도무지 객관적일 수 없다. 허둥지둥하게 된다. 그동안 숱하게 봤던 땅 살 때 주의할 점, 구도심에 구옥 살 때 주의점, 참고해야 할 문서 등을 땅을 보고 계약하는 순간까지 몽땅 잊어버리고 말았다. 순진한 마음은 게으름과 같다. 느슨했기에 구멍 난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초보여서 실수할 수 있다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니 무섭고 힘들었다. 누군가가 살이 쪽쪽 빠져 해골처럼 다니는 우리에게 "집 지을 때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다"라며 "다만 처음부터 많은 문제가 밀어닥친 것뿐"이라고 위로했다. 우리는 그 말을 정말 믿고 싶었다. 이제부터 탄탄대로라면 괜찮다.
- 집을 지으면 어른이 된다고 한다. 늙는다고도 했다. 대체 어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을 떠올리다 든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이니 그 안에서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수록 세상은 넓고 내가 얼마나 작은 지를 알게 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작아진 나만큼 줄어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간극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나를 커다란 세상으로 기어이 던지는 것이 어른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 던져진 내가 나아가지 못하고 어느 순간 파묻혀 버려도 그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엘라 휠러 윌콕스는 그의 시 <고독>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되리라"라며 뼈를 때리지 않던가. 우리는 두렵고 무서워도 딛고 나아가 집을 지어야 했다.
- "집 짓기는 결국 마음 짓기인 것 같아."
집 짓는 과정에서 무수히 허물어지는 마음을 다시 지어 올리고, 그렇게 애써도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러면서도 꿈을 꾸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삶. 우리는 어쩌다 오래된 동네에서 한옥을 짓게 됐고 마음을 짓게 됐으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 집 짓기는 묘하다.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경험이다. 나에게 꼭 맞는 집을 짓는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사적인데, 이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공적이다. 공공이 정한 룰에 따라 공공의 허가를 받아야 하니, 아무리 내 집이라 하더라도 100퍼센트 내 마음대로 짓기가 어렵다. 그래서 소통이 잘되는 건축가를 만나야 한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명확히 설명해 주고, 건축주의 내밀한 생활 습관과 취향을 고려해 이를 공간으로 구현해 내는 이가 건축가다. 우리에게도 집을 새로 짓는 고치든 건축가를 구해야 할 때가 왔다. 흔히 한옥을 짓겠다며 목수부터 찾는데, 이는 잘못된 접근법이다. 1965년 건축사 제도가 도입된 이래 소송은 변호사, 치료는 의사, 약은 약사에게 맡겨야 하듯 집 짓기는 건축가의 일이 됐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대목수가 알아서 한옥을 지었겠지만, 건축법과 관련 제도가 정비된 오늘날에는 설계부터 인허가, 감리(공사 감독과 관리)에 이르는 모든 역할을 건축가가 맡는다.
- 일본의 디자이너이자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인 하라 겐야가 2017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2011년 도쿄에서 "집을 통해 디자인하고, 행동하자"라는 슬로건을 달고 '하우스 비전'이라는 프로젝트를 론칭하기도 했다. 나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으로 그에게 좋은 집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그전까지 거침없이 답하던 그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 대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 짓는 동안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준 말이기도 했다.
"역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집이 제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정감을 주는 집이죠. 비싸야 좋은 집이 아니라 내 의지로 선택한 집이자 작은 부분까지 (직접) 결정한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집에 살 때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원하지 않는 집에 살면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잖아요."
내 몸에 꼭 맞는 맞춤옷 같은 집이 좋은 집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리폼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꼭 맞는 집을 짓기 위해 맨땅에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매 순간 늘 불안했다. 우리의 다름이 틀림은 아닐까. 오답 노트를 쓰고 있는 거라면 어쩌나. 내가 나를 제대로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나와 진택은 수시로 흔들리고 혼란에 빠졌다.
- 애가 타서 물어본들, 타인의 취향일 뿐이었다. 결국 나와 진택, 우리가 살 집이었다.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했다. 흔들리는 마음은 그 중심을 잡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면 어느 순간 중심을 잡게 될 것이다.
- 흔들리는 과정 속에서 우리 집의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알게 되니 마음은 편해졌다. 가족이 사는 집 두 채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한 지인은 건축가에게 물어보고 안 된다는 이야길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집의 한계를 잘 파악하고, 안 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집을 짓고 나서 '이건 이렇게 하지, 왜 안 했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 그럴 때 나도 이미 검토했지만 이유가 있어서 포기한 부분이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내가 왜 그걸 선택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아니까. 그런데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속상하더라고, '왜 그걸 안 했지? 왜 그 생각을 못했지?'라는 마음이 드니까 불만족스러워지고, 충분히 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좋아. 그래야 결국 포기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지."
- 하나의 치수가 틀어지면 다른 모든 것들의 위치가 흔들리고, 집에 둘 수 있을지의 여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재고 또 졌다. 수전 높이는 얼마, 세면대 높이는 얼마, 계단 폭은 얼마... 줄자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날에는 발로 쟀다. 하나, 둘, 셋, 넷! 치수를 재고 공간감을 익히며 우리는 조금씩 우리 집과 우리를 이해해 나갔으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했다. 이렇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를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 심지어 담장 위에 기와를 얹어야 한다. 담장이 한옥 몸체를 가려서는 안 된다. 길에서 한옥을 볼 수 있게 담장이 낮아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한옥은 철저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집이다. 전통 방식으로 쌓는 한옥 담장은 비싸다. 돌값도 기왓값도 비싼 탓이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사방으로 담을 칠 공간이 없는 도심 한옥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고 해야 하나. 도심 한옥에 비해서 땅이 넓은 은평 한옥마을의 경우, 담장을 둘러치고 대문간까지 만드는 데 5,000만 원은 족히 든다고 했다. 이러니 한옥 짓기가 참 힘들다. 남이 보기에 좋은 집치고는, 담장 값이 너무 비싸다. 우리 집의 경우 회벽에 기와 조각인 와편을 넣은 전통 한식 담장을 설치했는데, 공사비가 270만 원이 들었다. 길이가 2미터밖에 안 되는 담장 값이 그렇다. 옛 한옥을 보면 흙으로 담장(토담)을 만들기도 하고 반듯한 사괴석이 아닌 막돌로 담장을 쌓기도 했다.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각자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담장을 만들었다. 서울시 지침에는 벽돌도 쓸 수 있다고 명시했지만, 일정 부분 모양을 내기 위해 넣는 정도다. 벽돌로만 쌓은 담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리뷰자 주 : 음. 기와 담장을 보면 나도 모르게 멍하니 살펴보게 된다. 별 게 아니라면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만 뭔가를 구성할 수 있다면 꼭 갖고 싶은 담장이기도 하다.)
- 건축주 입장에서는 총력을 다해 지은 집의 당호를 정하고, 그 이름대로 살고픈 마음이 있다. 이름에 걸맞은 삶을 꿈꾸는 거다. 열심히 지은 집인 만큼 이 집에서의 삶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집에 담고자 한다. 한옥의 경우 상량식도 한다. 집의 뼈대가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대들보 또는 마룻보 위에 대공(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집의 제일 꼭대기 나무 부재인 마룻대(상량)를 올리며 축하하는 의식이다. 마룻대에는 집을 지은 내력이나 축원문을 쓴다. 이른바 상량문이다. 마룻대에 쓰기도 하고, 따로 홈을 파서 축원문을 봉인하기도 한다. 옛집을 고칠 때 이런 상량문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니 재밌다. 집의 이력을 적어놓은 유산과도 같다. 지금은 온라인에서 건축물대장 등을 통해 집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런 내밀한 기록을 집에 직접 남겨두었다.
(리뷰자 주 :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서 초희 언니가 8살에 쓴 상량문이 생각난다.)
- 처음에는 쉬운 길로 가고 싶었다. 화원 사장님에게 "저희 집에 오셔서 조경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슬쩍 짐을 떠넘겼다. 예쁜 완성품을 돈만 내고서 쉽게 갖고 싶었다. 사장님은 칼같이 끊었다.
"내가 출장비를 받고 꾸며줄 수는 있는데, 그다음은 어떡해? 관리를 못 할 거잖아요. 화단에 심은 식물이 죽으면 그냥 둘 거예요? 본인이 심어보고 겪고 배워야 정원 생활자가 될 수 있다니까."
그리고 처방했다. "나들이 삼아 주말에 시간 될 때마다 와서 보고 가세요."
역시 한 번에 뚝딱 되는 일은 없다. 집 짓는 동안 내내 그랬다. 내 취향을 알고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늘 시간이 걸렸다. 나를 알아가는 것은 꽤 수고로운 일이다. 가끔씩 남의 취향과 유행을 내 취향으로 삼아 단박에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곤 했다. 사장님은 이 게으른 욕망을 죽비로 내리쳤고, 우리는 사장님의 처방대로 봄날 주말마다 화원을 찾았다.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으로 가서, 버스로 갈아타 화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금씩 식물을 익혀나갔다. 진달래가 음지 식물이라는 것도 화원을 다니면서 알았다. 그제야 산의 응달마다 진달래가 피어 있는 게 보였다.
- 넷플릭스의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즌 3>의 첫 번째 주인공이자, <뉴욕타임스>에서 '철학자 같은 요리사 the Philosopher Chef'라고 소개한 정관 스님이 꼭 키워보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백양사 천진암에서 스님의 삼시 세끼를 취재하다 들은 말이었다.
"나를 알게 하는 힘과 에너지를 주는 것이 음식입니다. 미식도, 탐식도, 과식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은 음식으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음식을 만들죠. 정해진 조리법이 아니라 마음 에너지에 따라, 음식 재료의 본질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요리할 수 있어요. 음식 재료를 아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분에 고추는 상추는 한 포기의 식재료를 꼭 키우라고 권합니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얻는 것, 즉 음식 재료를 아는 것은 나의 에너지의 기원을 아는 일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 식물을 심지 않을 수 없다. 땅과 가까운 집에 살게 됐으니 더더욱 그래야 했다.
- 반세기 넘게 구축되어 온 아파트 중심의 도시가 불편하다면, 모두 똑같이 생긴 공간에서 살며 서로 비교하고 돈으로 평가하는 삶터가 피로하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처럼 아파트 담장을 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좀 더 다양한 선택지와 다듬어진 길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값만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계산법은 너무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개인들의 삶과 취향을 중심에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집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면 어떨까.
- 어찌 보면 한국인의 유별난 카페 사랑도 결국 집에서 파생된 공간 문화다. 한국인은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카페로 간다. 카페는 이른바 '공유형 거실'이자 '모두의 거실'로 기능한다. 방의 집합체인 집과 달리 카페는 답답하지 않은 공간이다. 상업 공간이라 천장고가 높고, 통창도 많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식물도 많다. 볕 좋은 날에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인기다.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날씨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는 함께 쓰는 카페가 위험해졌다. 집이 갑갑해지면 카페에 가던 한국인의 생활 패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하지만 단독주택은 바로 알 수 있는 시세가 없다. 감정평가사가 현장에 출동하는 감정평가 과정을 따로 거쳐야 한다. 여기에 LTV 40퍼센트를 적용받는데 아파트와 달리 대출금이 더 깎인다. 일명 '방 공제'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방 공제는 그야말로 방을 값으로 매겨 제외하는 것으로, 단독주택의 방 개수에 각 지자체가 정한 필수 의무 보증금액을 곱해 대출 가능한 금액에서 뺀다. 예를 들어 서울의 방 세 개짜리 단독주택을 담보로 대출받을 때는 방 하나당 보증금 4,000만 원으로 계산해 감정평가를 토대로 나온 대출금에서 총 1억 2,000만 원을 제외하고 빌려준다. 단독주택의 방 한 칸은 언제든 셋방으로 임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계산법이다. 과거 주택난이 심각했을 때 이런 방 쪼개기가 성행한 탓이다. 은행에서는 리스크 관리 차원임을 강조한다. 반면 아파트의 경우 방 공제를 방 한 개에만 적용하거나 보증보험을 받는 경우 아예 적용하지 않는다. 누가 아파트 방 하나만 세를 주느냐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에 비하면 단독주택은 대출받기 까다롭고, 대출금도 적다. 한마디로 상품성이 떨어진다.
- 진택과 나는 서로 묻고 계속 답했다. 갑갑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삶터를 찾아 떠났지만 실제로 마주한 현장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와 동떨어져 있었다. 해답을 쥐고 출발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을 보고 돌아오면 늘 흔들렸다.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사는 buying 것인가, 사는 living 곳인가. 실제 시장은 이렇게 확고한데, 시스템은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위정자들은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고 입으로만 이야기하니 우스웠다.
- 프랑스 태생의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숱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고서도, 말년에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 4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의 궁전'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2017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전시를 열었을 때 실제 사이즈로 구현해 놓은 4평 오두막이 전시장에 놓여 있었다. 바다를 볼 수 있게 큰 창을 냈지만 실내는 매우 작았다. 집 밖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기에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지만, 4평 오두막은 분명 우리에게 물었다.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삶터의 면적은 얼마일까.
- 대신 우리는 한옥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을 그렸다. 마당 뒷마루에 앉아 해님과 달님을 벗 삼아 술도 마시고 차도 마셔야지. 마당 한편에 귀여운 해태상을 놓고, 매화나무를 심자고 이야기했다. 욕실에는 작은 욕조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어차피 작은 집이니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것만 두고 살자고 했다. 술을 담가 먹자는 말도 나왔다. 마당에 김칫독도 묻고, 커튼 대신 예쁜 보자기를 창에 걸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식을 제대로 배워서 자격증을 따고, 동네 공방에서 무엇이든 배워보자고 했다. 전국의 공예 장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시골 동네 고물상만 돌아다녀도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 남은 건 공사비와 설계 및 감리비였다. 정부에서 보조해 주는 한옥 지원금이 일부 있긴 했지만 전체 공사비를 가늠했을 때 우리는 허리띠를 '바아싹' 졸라매야 했다. 우리는 매달 버는 족족 공사비를 내야 했다. 설계와 공사를 합쳐 최소 1년 넘게 걸릴 일이었다. 어디 가서 손 벌릴 곳도 마땅히 없어서 우리는 나름 치열하게 전략을 짰다. 작전명은 티끌 모아 태산. 일단 안 쓰고 모으자는 것이었다. 진택과 나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 출신이 아니었고, 대학생 때부터 혹은 졸업 이후 스스로 생활을 알아서 일궈가는 독립 생활자였다.
- 집 짓기를 위한 슬기로운 합숙(동거)생활이 시작됐다. 우리의 미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로또 당첨이 아니라, 동거인의 평소 씀씀이와 경제관념이었다. 나는 나의 투룸에 도착한 그의 짐을 보았을 때 적어도 그로 인해 우리가 실패할 일은 없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15년 넘게 홀로 서울살이를 했음에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미니멀리스트 중에서도 궁극의, 무소유의 경지에 이른 도인 같았다.
- 편의점에서 500밀리리터 물을 한 통 사면 950원이다. 대형 슈퍼에서는 400원대다. 집에서 쓰는 브리타 정수기의 물을 담아 가면 0원이다. 몇백 원 가지고 아무렴 어때, 하는 순간 돈은 구멍 난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마냥 순식간에 사라진다. 950원짜리 물을 사 먹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의 절약 생활의 기본 정신을 담은 제1선언이었다. 쓰지 말아야 할 돈은 쓰지 않는다. 물을 시작으로 카페에서 커피도 사 먹지 않고 집에서 내린 커피를 싸 들고 다녔다. 택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품을 들이면 대중교통으로 어디든, 더 정확히 갈 수 있는 서울에 살지 않는가.
- 만약 둘 중 하나라도 "궁상맞아, 짜증 나,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말 따위는 꿀꺽 삼키고, 되도록 이 미션을 끝까지 즐겁게 수행하려 노력했다. 우리의 집(꿈)이 지어지고 있지 않은가. 잠깐의 소비는 찰나의 해방감을 줄지언정 우리에게 쾌적한 보금자리를 안겨주지 못하나니, 지구를 지키는 푸른 지구 방위대 블루와 그린의 팀플레이는 환상적이었고, 가족들이 보기에는 지독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껏 이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를 가로젓는다. "둘 다 진짜 지독해..."
- 그러니까 24.6평의 땅을 샀는데, 실제로는 18평이라는 이야기다. 줄자로 재보는 실측의 오차 범위를 고려해도 너무 심했다. 2017년 11월 30일, 이 전화 통보를 받은 날 신문에 적힌 그날의 운세는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는 날이었다.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했던 집에 대한 미움이 말 그대로 솟구쳤다. 우리 땅을 먹은 이웃집 어딘가에 대한 미움과 이런 복잡한 시골 동네에 살겠다고 마음먹었던 나에 대한 미움으로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사랑하는 우리가 사랑하여 뿌리내리길 원했던 동네였는데. 오래된 동네의 텃세인 걸까, 땅이 우리를 거부하는 걸까. 체력과 정신력이 너덜너덜해진 우리는 우연히 지나가는 경구조차 하늘이 내린 위로인 양 붙들기 시작했다. 마치 이별 직후 듣는 모든 노래가 내 이야기인 것과 같은 상태가 됐다. 진택은 TV 광고에서 보고 잽싸게 찍어둔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와 같은 글귀를 절망하는 내게 보여주곤 했다. 그래, 우리는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만, 왜 이렇게 고달픈 걸까.
- 오래된 동네에는 이런 먹고 먹히는 관계가 비일비재하다.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다. 여는 순간 세월 속에 묵혀 있던 카오스가 쏟아진다. 체부동에 있는 어느 10평 한옥의 주인은 이웃집이 먹고 있는 1평 공간을 찾으면 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1평은 숫자로 보면 작지만, 집 면적의 10퍼센트다. 종로의 어느 한옥을 산 이는 2층 한옥을 지어 상가로 쓰려했는데 현황측량을 한 뒤 계획을 접었다. 알고 보니 산 집이 남의 땅을 너무 많이 침범해 확장한 상태였다. 신축하면 집이 너무 작아진다. 눈으로 보기에 이 정도면 넓다 싶어 샀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다. 차라리 내가 남의 땅을 먹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돌려주고선을 명확하게 그으면 되니 속이라도 편할 테다. 그런데 주변 집이 다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니 갑갑했다. 우리 집은 너른 마당을 낀 여섯 채의 집 중 가장 작은 집이었다. 이렇게 작은데 심지어 주변의 큰 집에 땅을 내어주고 있다니. 이렇게 자비로울 수가! 우리 땅을 돌려받으려면 대체 몇 집과 싸워야 하는 걸까. 햇살이 따뜻한 집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었는데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싸울 준비부터 해야 하다니. 절망적이었다.
- 아는 변호사는 고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전 주인과 세게 싸우라고 했다. 계약을 파기하거나, 가격을 조정하라는 조언이었다. 볕 좋은 한옥에서 결혼해 살고자 했던 모든 꿈이 바스러지고 온통 싸울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무엇보다 내가 바람을 넣은 탓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있는 진택에게 미안했다. 그냥 남들처럼 아파트를 살걸, 왜 마당 있는 집에 살겠다고 아파트 담장을 넘어서서 이 고생을 한단 말인가. 퇴근 후 집에서 옛집과 관련된 일과를 정리할 때마다 슬픔이 차올라 울기 시작하는 나를 달래며 진택도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둥켜안고 함께 우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미안해 블루, 내 짝지야. 내가 평범하게 살던 당신을 이런 험지로 끌어들였어... 꺼이꺼이." 살이 쭉쭉 빠져 얼굴이 해골마냥 야위기 시작했다. 나도, 진택도.
- 오래된 동네의 순환 문제는 심각했다. 앞서 말했듯 집 밖 골목길에는 물 빠지는 우수관로와 오물 나가는 오수관로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즉, 변기 물과 빗물이 결국 길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흘러나간다. 당연히 아파트 단지나 새로 조성하는 신도시 택지 지구에서는 두 배관을 분리해 뽑는다. 심지어 요즘 아파트 단지에는 정화조도 안 묻는다. 대신 각 지자체의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바로 연결하는 관을 설치한다. 오래된 아파트도 정화조를 폐쇄해 버리고, 처리장으로 바로 보내는 직관로를 설치하는 추세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인 친구들이 정화조 청소차를 모른다고 했을 때 놀랐던 적이 있다. 초록색 몸체에 파란 호스를 가진 청소차, 이른바 '똥차'를 본 적이 없다고? 대단지 아파트, 새로 조성되는 도시에서는 정화조가 사라지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집집마다 정화조를 묻어둔 오래된 동네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여전히 똥차가 방문한다. 매년 정화조 청소를 안 하면 벌금도 내야 한다. 오래된 동네에서는 정화조가 없어도 되는 직관로 공사는 언감생심이다. 빗물과 똥물이 빠지는 관조차도 분리하지 않은 곳이 태반이다. 우리는 집을 새로 지어 오수관과 우수관을 따로 뽑아냈지만, 결국 이 두 개의 관은 골목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말았다.
- 이 경우 아마도 재개발을 위한 지분으로 길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길에 가스관을 묻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듯했다. 오래된 동네를 보존하고자 재생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재개발을 원하는 사람은 많고 진통은 여전했다. 그동안 이 낡은 동네의 유일한 비전은 모두 밀고 새로 짓는 아파트 재개발밖에 없었던 터다. 돈 많이 들고 티 안 난다고, 공공이 오래된 동네의 순환 문제를 긴 세월 외면해 온 결과다. 이러니 오래된 동네에서의 삶은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 오래된 동네는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혹은 아파트로 재개발되기 전의 임시 거처에 불과한 걸까. 오래된 동네를 정말 재생하려면 삶터의 기본부터 다져야 한다. 퀴퀴한 냄새가 더는 나지 않도록 배관 공사를 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전선을 땅속에 묻는 지중화사업을 하고, 차를 댈 수 있게 주차장을 만들어주고, 불이 나도 안심할 수 있게 소방 도로를 일정 부분 확보해 준다면 더는 오래된 동네를 기피할 이유가 없다. 퀴퀴한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도록, 순환이 잘되도록 애쓰는 것이 진짜 재생이 아닐까. 모두가 아파트를 갈망하는, 아파트밖에 없는 도시가 되어가는 진짜 이유는 이런 어설픈 재생에 있다.
- 우리는 아파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원했다. 옛날식 한옥, 즉 할머니들이 한옥 하면 떠올리는 '살기 불편한 집'을 지으려는 게 아니었다. 목구조에 기와지붕이라는 한옥의 기본 틀을 유지하되 현대 생활에 맞게 지어진 집을 원했다. 다행히 한옥을 설계하는 건축가 중에는 양옥을 설계하는 이도 많다. 한옥 시장이 작아서 한옥 설계만으로 버터내기 힘든 영향도 있겠지만 말이다.
- 21세기에 한옥을 짓고 살게 될 줄이야. 테라스나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아 떠난 우리의 여정이 한옥에 닿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옥살이에 대한 로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래된 동네마냥 한옥은 불편한 점이 많은 집이다. 특히 한국인이 한옥을 바라보는 잣대는 매우 엄격하다. 한옥을 옛 모습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조금이라도 변형하면 못마땅해한다. 약간만 달라도 중국풍이니 일본풍이니 하면서 이게 무슨 한옥이냐는 말이 기어이 나온다. 한옥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문화재에 멈춰 있을 뿐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한옥의 진화는 용납이 안 되는 듯했다.
- 우리는 한옥에서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집에 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살 생각도 없었다. 골동품을 놓거나 고가구를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현대의 가구나 물건들이 한옥에 잘 어울릴지 더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살림집으로서의 현대 한옥이었다. 안방은 공간의 유연성을 위해 침대 대신 이부자리를 펴는 좌식 공간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나머지 공간은 모두 입식으로 쓰길 원했다. 다이닝 공간에 큰 식탁도 놓고 싶었다. 한옥에서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화장실이 밖에 있거나, 심지어 부엌에 아궁이가 설치된 모습을 상상한다. 정말 그렇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요즘 한옥에는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가스보일러로 바닥 난방을 하며, 주방은 그 어느 집보다 현대식이다. 물론 지붕과 벽에도 단열재를 넣는다.
- 한옥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수납공간이다. 좁은 한옥 방에 붙박이장이라도 둘 경우, 방은 더더욱 복도가 되어버린다. 아파트에 살다가 은평 한옥마을로 이사한 2층 한옥 주인장도 "이 집 면적이 아파트보다 더 크지만, 이사 올 때 짐의 3분의 1만 가지고 왔는데도 수납하는 데 애를 먹었다"라고 전했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만 사고 되도록 소유하지 않으려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만,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 제품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집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선택할 수 없는 삶보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길 원했다. 따라서 널찍한 지상공간을 위해, 지하를 파서 수납공간을 넉넉하게 갖춰야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소파 등 원하는 가구를 들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싶었다. 현대적인 지하 공간이 있는 '벙커 한옥'의 꿈. 이 꿈이 우리를 그 어렵다는 오래된 동네 신축 공사의 길로 이끌고 말았다. 물론 또 다른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 대학 친구 A는 세종시의 30평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대학시절 약 9개월 동안 아메리카 대륙 종단 여행을 함께 하며 소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기도 한 전우 같은 사이다. 그가 홀로 사는 집은 컸다. 베란다까지 확장한 집이라 40평대 아파트나 다름없었다. 그가 세종시에 자리 잡을 당시, 세종시에는 아파트 전세 매물이 넘쳐나 풀옵션 원룸과 임대료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집을 아예 옮기기보다 주중에만 머물 거처를 찾았던 공무원들은 아파트보다 원룸을 원했다. 텅 빈 아파트를 채우기 위해 각종 가전제품을 사는 것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그 덕에 A는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넓은 아파트에 살게 됐다. 방에 갇혀 사는 나로서는 A가 이 방 저 방 옮겨가며 살지 않을까 싶어 "이 친구, 정말 호사스럽게 사는구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직장 일로 바쁜 A는 안방과 거기에 딸린 옷방과 화장실, 주방만 오가며 산다고 했다. 방을 다 쓰기엔 청소하기 힘들다나.
- 집에는 숱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집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의 총합이다. 하지만 이렇듯 질문하고 답하는 일은 대체로 익숙하지 않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라면 하나는 부모 방, 하나는 아이 방, 하나는 옷방 겸 서재. 이런 식으로 배분하는 삶에 익숙해져서 이게 정말 필요한지 아닌지를 정하기란 영 쉽지 않다. 특히 원하는 대로 공간을 만들 수 없는 작은 땅의 한계 탓에 우리는 실오라기 같은 군더더기조차 없도록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공간을 무수히 발라내고 발라내야 했다. 나와 그 모두 40년 동안 고민해 본 적 없는 이슈였다. 다행히도 그런 건축주는 우리만이 아니었고, 건축가는 건축주의 기호를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 젊은 건축가 그룹 '푸하하하프렌즈'는 마치 시험지처럼 질문지를 만들어 작성하게 한 후에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물론 학교 시험지에서는 볼 수 없는 질문이 가득하다. 가령 "나에게 집이란? 4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10점), "퇴근 후 나의 동선을 순서에 따라 배치하시오" (3점)와 같은 질문들이다.
- 하지만 이런 작은 결정들이 모여 집을 완성한다. 그래서 어려웠다. 집을 설계하는 과정은 이 집에서 살아갈 이의 행동 패턴을 상상하며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었다. 때로는 어릴 적 주택에 살았던 기억도 도움이 되었다. 짐으로 꽉 차 있던 다락방에는 내가 몰래 만들어 둔 틈새 공간이 있었고, 그 속에 웅크려 있으면 아늑하고 평온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다락방을 만들었다. 손님이 오면 묵을 공간으로도 적당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보지 않은 집의 모든 공간을 상상하며 결정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결정하면 앞만 보고 달리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정말 나란 말인가. 한 번은 집 짓는 동안 기꺼이 멘토가 되어주셨던 한옥문화원의 장명희 원장님과 통화하다가 "쿨한 건축주가 되긴 틀린 것 같아요" 라며 나도 모르게 우는소리를 했다.
- 그날도 화장실과 옷방의 위치 때문에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는 이야기를 하던 차였다. 단출한 지상 한옥살이를 위해서는 옷방을 지하에 둬야 하는데, 왠지 지하에 두기가 꺼림칙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원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쿨하지 못한 나한테 화가 났다. 내 하소연을 들은 원장님의 조언은 이랬다.
"그럼 당연하지. 사람 마음이 원래 아침저녁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자기 집 짓는 일이니까 오죽하겠어. 쿨한 척하는 건축주가 되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원하는 대로 지을 수 있는지 끝까지 집중해요."
- 최근 수선을 한 종로구 옥인동의 어느 한옥은 옥빛의 아름다운 타일 외벽을 갖고 있다. 다른 한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집주인은 서울시의 한옥 수선 지원금을 포기했다. 서울시의 심의 규정을 따르면 타일이나 벽돌을 못 쓰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한옥 지원금을 받은 집은 외벽과 담장이 세트장처럼 똑같이 생겼다. 벽은 주로 삼단 구성인데 가장 윗부분에는 창과 하얀색 회벽이 있고,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사괴석을 쌓은 화방벽火防壁, 맨 아래에는 집의 토대인 기단석을 이룬다. 은평 한옥마을의 한옥도, 서촌의 우리 집도, 북촌의 한옥도 모두 똑같다.
- 하지만 근대 도시 건축의 산물인 서촌이나 북촌에는 타일 외벽을 가진 한옥이 꽤 있다. 어떤 집은 옥빛 타일, 어떤 집은 흰빛, 어떤 집은 붉은빛의 타일. 색깔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나름 모자이크 문양을 내기도 한 동네 한옥의 타일 외벽을 보면서 집집마다 개성 있는 색감을 뽐내는 스페인 소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나무색, 흰색, 검은색 위주인 한옥에도 색을 입힐 수가 있구나. 독특한 색감에 더해 실용성도 갖췄다. 돌보다 타일이 더 싸고, 돌을 다듬어 쌓는 것보다 타일을 붙이는 것이 공사하기에도 편하다.
- 한동안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타일 외벽을 가진 한옥을 보면 사진을 찍었다. 곧 사라질 서촌의 근대문화유산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타일 외벽을 가진 한옥이더라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개·보수하면 모두 똑같은 삼단 외벽으로 바뀐다. 결국 한옥 육성책에 따라 동네의 고유한 특성은 지워지고 있다. 이처럼 전통 재료와 방식에 갇혀 있는 한옥의 현실이 정말 답답하다. 조선시대에 멈춰 있는 서울시의 한옥 정책과 달리, 한옥은 한 시대에 고정되어 있던 집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타일을 쓰기도 했고 유리를 사용하기도 하며 변화해 왔다. 집도 변해야 산다. 멈춰 있는 집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다.
- 지금은 지을 수 없지만, 선조들은 벽돌조 한옥도 지었다. 벽돌은 돌을 일일이 가공해 써야만 했던 과거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깨부순 혁명적인 소재다. 작아서 옮기기도 편하고 규격이 정해져 있어 시공하기도 좋았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도 가능했으니 조선시대에 벽돌은 그야말로 최신식 재료였다. 19세기만 해도 중국에서 벽돌을 수입해 썼다. 20세기에 들어서야 벽돌 공장이 생겼고, 조선 말기에는 궁궐을 지을 때도 벽돌을 꽤 많이 사용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조 건물은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안에 있는 '번사창'이다. 1884년에 준공된 번사창은 무기 제조소와 창고로 쓰였다.
- 어찌 된 일일까. 행당동에 사는 사람들이 유독 기와지붕을 좋아해서일까. 이는 지자체의 전통 강박증이 만든 도시 풍경이다. 수원시는 2013년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화성과 조화를 이루는 도시 정비 및 경관 계획을 수립하겠다며 지구단위계획을 수정했다. 이에 따르면 건물을 신축할 때 무조건 기와지붕을 설치해야 한다. 지붕에 쓸 수 있는 재료는 한식 기와, 일반 점토 기와, 전통형 기와 무늬 강판으로, 이 역시 지구단위계획에 규정되어 있다. 콘크리트 건물이라도 지붕은 한식 기와여야 한다. 성곽 안 동네(행궁동)와 바깥 동네 일부는 이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건축해야 한다. 획일적인 규제가 오히려 어색한 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19년 행당동에 모양새가 남다른 집 한 채가 들어섰다. 시멘트 벽돌 외벽에 타이타늄 아연판 지붕을 얹었다. 규제를 따르지 않고 이 동네에서는 쓸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졌는데도, 원래부터 이 오래된 동네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고 주변과도 조화를 이룬다. 정수장을 서울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젊은 부부를 위해 설계한 이층 집이다. 물론 정부의 허가를 받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건축가는 이 새로운 재료로, 화성이 품은 오래된 동네의 경관과 더 잘 어울리는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 머리가 하얀 타설공의 일솜씨는 가히 압권이었다. 그는 늪처럼 푹푹 빠지는, 몸을 가누기 힘든 콘크리트 속을 휘젓고 다니며 엄청난 압력으로 움직이는 호스를 제어하면서 독무를 뒀다. 쏴아아 덜커덕, 쏴아아 덜커덕, 레미콘의 소음이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현장에서, 호스를 잡은 노장은 "어어어!" 하는 일갈과 손짓만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쏟아지는 힘을 버티며 방향을 조절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된 독무였다. 그렇게 바닥 기초를 다지는 콘크리트가 반듯이,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희한하게도 덜 마른 콘크리트에 벌이 꼬였다. 노장이 말했다. "콘크리트가 향긋해서 그래. 벌이랑 잠자리가 와서 많이 죽지. 젊은 친구들이 벌처럼 잠자리처럼 죽어나가기 싫어서인지 이 일을 안 하려고 해. 너무 힘들거든."
- 공사 현장에서는 어떤 공정이든 세대의 끝이 보였다. 그나마 타일공과 목공은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타일공 중에는 호주나 캐나다에서 일하다 온 유학파가 꽤 있었다. 해외에 일자리도 많고 벌이도 괜찮아서 외국에 나가려고 일을 배우는 젊은 사람도 있는 편이다. 목공도 젊은 세대가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건축 공정의 경우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세대의 끝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기술은 발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오늘은 어제처럼 집을 짓기가 힘들고, 아마도 내일은 오늘처럼 집을 짓기 어려울 것이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경험이 필요한 일도 많기 때문이다.
- 온갖 골치를 겪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쉼표를 안긴 순간이었다. 지하는 너무나도 잘 파져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팠다. 그 덕에 지하의 천장고가 높다. 답답하지 않다. 바짝 마른 흙이 나온 지하답게 늘 건조하다. 겨울에는 가습기가 필수다. 지난여름에 폭우가 계속됐지만, 제습기를 따로 돌리지 않았다. 설계를 할 때부터 지상 공간이 부족해 옷방을 지하에 둘 수밖에 없어 걱정했는데 옷방은 여전히 보송보송하다. 집을 다 짓고 난 뒤 평온한 어느 날, 강석목 대표를 만났다. 집을 짓기까지 좌충우돌했던 지난날의 소회를 나누는 자리였다. 강 대표는 "서촌에 세울 수 없는 집을 지었다"라고 말했다. 보물 같은 지하가 있는 한옥이라서다. 그는 "한옥과 다른 현대적인 공간이 지하에 있고, 음악을 크게 틀어놔도 소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100년이 지나도 골조에 문제가 없을 터이니 물려주는 집으로 생각하고 사세요"라고 말했다.
- '못 지을 집'을 '물려줄 집'으로 바꾸며 기어이 지었다. 그걸로 됐다 싶었다. 끝을 몰라 지치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두렵기만 했던 그 많은 순간을 우리는 기어이 지나왔다. 추운 겨울날 찜질방 같은 안방에서 등을 지지고,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봄기운이 느껴지는 마당에서 천천히 내린 드립 커피를 홀짝거리며 우리는 지난날을 잠깐씩 추억하곤 한다.
- 대학로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 가면, 이 당호가 적힌 제법 큰 현판이 건축가의 책상 뒤에 놓여 있다. 오래되었지만 힘찬 글씨가 눈길을 끈다. 뜻을 풀이하면 '이슬을 밟는 집'이다. <소학>에 나오는 효행을 뜻하는 단어다. 한 선비가 아버지가 기침하시기 전에 웃옷을 걸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가 일어나 나오시면 따뜻해진 옷을 벗어 걸쳐 드린다는 이야기다. 승 선생은 이 현판을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집 설계비 대신 받았다고 한다. 원래는 전라북도 부안의 200년 된 고택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집은 폐가가 되었고, 유 교수가 현판만 간직하고 있었던 터다. 당시 승 선생이 설계한 유 교수의 집은 그 유명한 수졸당守拙堂이다.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의미다. 유 교수는 <도덕경>에 나오는 사자성어인 대교약졸大巧若拙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건축가는 현판을 받고서 '이로재'로 사무소 이름을 바꾸었다. '이슬을 밟는 집'을 의역하면 '효성이 지극한 가난한 선비의 집'이라는 의미이고, 이 절제와 검박의 정신은 '빈자의 미학'이라는 자신의 건축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렇듯 승 선생은 주택을 설계할 때마다 그 집의 이름을 직접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축주가 이를 원하는 경우도 많다.
- 남서울 화훼단지는 수도권의 반려식물 공급처였다. 비닐하우스에는 실내 식물들이, 노지에는 밖에서 키우는 나무들이 있었고, 화분과 같은 각종 부자재만 파는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화훼단지에는 식물에 관한 모든 것이 있었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화원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매화, 대나무, 배롱나무는 없었다. 대신 비닐하우스 안에도, 밖의 노지에도 듣도 보도 못한 화초와 나무들이 그득했다. 발 딛는 순간 압도당했다. 우리는 백지상태인데 총천연색으로 뒤덮인 세상이 눈앞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고나 할까. 일전에 논현동 타일 가게에 갔을 때 눈이 핑핑 돌던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이 생소한 세계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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