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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버고지언, 제임스 린지] 어른의 문답법 -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일루젼 2022. 6. 13.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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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피터 버고지언 / 제임스 린지 / 홍한결

원제 : How to Have Impossible Conversations 
출판 : 윌북 
출간 : 2022.03.03 


       

기대가 무척 컸던 책이었는데, 즐겁게 읽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저자들이 설명하는 내용과 취지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예시로 든 대화들이 내게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대화 목적에 따라 필요하다면 오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대화의 톤&매너는 전형적인 WASP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을 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이러한 스킬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대화에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믿음을 굳이 내가 수정해줘야 할 상황은 쉽게 오지 않겠지만, 협상이나 타협이 필요한 순간도 생기게 마련이니 쓸모가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또 상대방이 내게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경우 알아차릴 수 있는 편이 선택지가 늘어나므로 일단 알아만 둔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알아차리더라도 대응하지 않고 속으로만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저자들은 상대방이 기술을 사용할 경우 적극적으로 그에 협조해볼 것을 권한다. 스스로의 생각을 점검하고 잘못된 믿음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이며, 설사 상대방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의 화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그를 통해 자신의 대화술을 더 다듬고 논리를 교정해 스스로의 기술을 갈고닦아 나가라는 것인데 불현듯 현재 미국의 상황은 심각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소셜미디어에서의 편향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개개인의 성향에 맞춰진 추천 피드들은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한다. 내가 '아닌' 것에 대한 감수성이 낮아지면 연민이나 공감이 생길 여지는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타인을 내 생각대로 개종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저자들도 그런 의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대화 예시들은 다소 극단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공격성 없이 체험할 수 있는' 기술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만 알고 있을 때의 선택은 YES/NO의 가부지만, 다양한 것을 이해하고 고려한 선택은 선택지 중에서의 최선이 된다. 또한, 언제나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세계 안에서의' 한정적인 최선임을 기억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한다면 극단적인 대립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사족으로, 전도를 한다거나 세금 등의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종교적 믿음이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다소 의문이다. 저자들은 유신론에 관해 꽤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블랙스완의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회복하는 경우도 실제로 존재하니 예수의 부활이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상상임신도 실제로 있는 현상이므로, 굳이 그렇게 트집을 잡는다면 몇 가지 실제 현상이 겹쳐져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있지 않나?라고 오히려 삐딱하게 보게 된다. -물론 나는 문자 주의자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저자들의 약력을 따져가며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환경에 의한 경험적 반발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들이 펴는 논리와 예시들을 보건대 이들은 화이트 칼라 백인 남성이지만, 기독교인은 아니라 주류와 마찰을 빚는 쪽이라 생각된다. 특정 대화 주제에 유독 튀는 공격성을 보이는 것에는 개인적인 경험들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런 식으로 넘겨짚어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일론 신앙을 가진 아시안 여성으로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공격성이라 특이 사항으로 생각하고 기록해둔다.        

 

저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형태를 들고있지만, 사실 절대적으로 어떤 예외도 없는 진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일정 수준 이상 해당 대화의 기술에 숙달된 사람들끼리는 말그대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 되리라 예상한다.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을 듣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헤아려보고 싶은 마음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책에서 언급하는 '말이 안 통하는 대화'란, 상대방의 생각이나 믿음 또는 도덕관, 정치관, 세계관이 나와 너무 달라서 대화해봤자 도저히 소득이 없어 보이는 경우를 뜻한다. 상대방이 대화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는 여기에 속하지 않음에 유의하자. 예컨대 상대방이 폭력적, 위협적으로 나온다거나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말을 듣지도 않는 경우는 이 책에서 말하는 '말이 안 통하는 대화'가 아니다.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방법은 없다. 그런 사람을 억지로 대화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책은 없을 것이다.

 

-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양방향 소통이 안 되어서다. 상대방이 대화를 함께 나눈다기보다 연설을 일방적으로 늘어놓기 때문이다. 우리를 자기 생각을 주입할 그릇 아니면 논박하여 물리칠 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상대방이 이야기할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대화가 안 통할 것 같아도 이야기를 나눌 방법은 있다. 이 책은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상대방이 아무리 화가 나 있더라도, 또 아무리 우리와 견해가 달라서 예의 있는 대화가 불가능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방법은 있다. 상대방이 아무리 극단적인 골수 신봉자이거나 특정 당파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해도,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만 아니라면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다. 

 

- 물론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말을 아예 섞지 않는 게 더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피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가 말을 걸어올 수도 있고, 자리를 뜨기 어려운 모임에서 종교나 정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또 이야기 주제가 외면하기엔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는 풀어나갈 방법을 알고 있는 게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낫다. 여러분은 이제 아무리 격앙된 대화도 잘 대처해나갈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1장. 기본 : 품격 있는 대화의 일곱 가지 원리

1. 목표 인식하기 : '이 대화를 왜 하는가?'
2. 협력 관계 조성하기 : 적이 아닌 파트너가 되자
3. 라포르 형성하기 : 공감대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4. 상대방의 말 듣기 : 말은 줄이고 더 많이 듣는다
5. 내 안의 메신저 잠재우기 : 내가 생각하는 진실을 전달하지 않는다
6. 상대방의 의도 파악하기 : 상대방의 의도는 생각보다 선하다
7. 대화를 끝낼 시점 판단하기 : 불편한 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2장. 초급 : 생각의 변화를 이끄는 아홉 가지 방법

1. 본보기 보이기 :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행동을 내가 먼저 보인다
2. 용어 정의하기 : 용어를 우선 정의한다
3. 질문하기 :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4. 극단주의자와 선 긋기 : 우리 편의 나쁜 행동을 지적한다
5. 소셜미디어 신중하게 이용하기 : 소셜미디어에서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6. 기여 요인 논하기 : 탓하기에서 기여 밝히기로 관점을 바꾼다
7. 인식 원리에 주목하기 : 상대방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8. 배우기 : 생각이 닫힌 사람의 사고를 이해한다
9. 하지 말아야 할 행동 : 대화 중에 저지르기 쉬운 기초적 실수 

 

 

3장. 중급 :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

1. 친구가 잘못 알고 있게 놔두기 : 친구가 나와 믿음이 달라도 괜찮다
2. 퇴로 만들어주기 : 창피하지 않게 생각을 바꿀 길을 터준다
3. 표현 익히기 : 2인칭(너)보다는 3인칭(그것, 그 사람)이나 협력적 표현(우리)을 쓴다
4. 프레임 바꾸기 : 대화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엇나가면, 관점을 바꿔본다
5. 내 생각 바꾸기 : 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바꾼다
6. 척도 도입하기 : 척도를 활용해 개입의 효과를 판단하고, 상대방의 확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본다
7. 아웃소싱 :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외부 정보에 관심을 돌린다

 

 

 

 

 

더보기

 

 

-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옳은 믿음이든 그른 믿음이든 그 자체가 행동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옳은 믿음보다는 그른 믿음을 갖기가 훨씬 쉽다. 

- 그런가 하면 믿음은 바뀔 수도 있다. 믿음을 바꾸는 데는 바람직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다. 대화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강압은 여러 자명한 이유로 바람직하지 않은 데다가 효과 자체도 턱없이 떨어진다. 누구나 답답하면 본능적으로 강압의 유혹을 느끼지만, 원수에게 두들겨 맞는다고 믿음을 바꿀 사람은 없다.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 모든 건 기본에 달려 있다. 복잡하고 화려한 발레 동작도 발레의 기본 기술 위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전문 기술은 탄탄한 기본에서 비롯된다. 원활한 대화 역시 하나의 기술이다. 이 또한 지식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에, 일단 기본 원리부터 배워야 한다. 기본이 몸에 익으면 나중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능력이 발휘된다. 하지만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계속 대화가 틀어지고, 결국 관계가 경색될 수밖에 없다. 

 

- 이 장에서 배울 바람직한 대화의 일곱 가지 기본 원리는 목표 인식하기, 협력 관계 조성하기, 라포르 형성하기, 상대방의 말 듣기, 내 안의 메신저 잠재우기, 상대방의 선의 명심하기, 대화를 끝낼 시점 판단하기다. 이 장에 소개된 기본 원리만 숙달해도, 앞으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대화가 훨씬 더 바람직하게 흘러갈 것이다. 또 이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고급 기술을 익히려고 해도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되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 상대방이 꺼낸 화제를 가로채서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얼마 전 쿠바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나도 쿠바에 가보았다며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상대방의 쿠바 여행이 어땠는지 묻도록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전환해선 안 된다. 그러면 라포르가 훼손된다. 

 

- 충분히 설득력 있게 주장을 편 것 같은데, 상대방이 바로 반박하고 나설 때가 있다. 발신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수신자가 수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설교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효과적인 대화법을 연구한 여러 문헌에 따르면 '메시지 전달'은 통하지 않는다. 메신저는 정치적, 도덕적 견해 차이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 자체를 할 줄 모른다.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대화란 주고받는 것인데, 메시지는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다. 메신저는 무언가를 굳게 신봉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고 결국 생각을 바꾸리라 착각한다. 

 

- 메시지 전달은 선생이 되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다. 반면 대화는 주고받으며 서로 배우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것만 좀 알아들으면 생각을 바꿀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가 아닌 메시지 전달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 사람은 가진 정보에 따라 행동하고 믿음을 형성하며, 그에 따른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가진 정보가 다르면 나오는 결론도 다르다. 가령 옛날 의사들은 몸 안에 피가 너무 많으면 병이 난다고 믿어 병을 치료할 때 거머리를 썼다. 거머리를 환자의 몸에 붙여 피를 빨게 했는데,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디까지나 좋은 결과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으며, 현대인과는 가진 정보가 달랐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피의 양과 질병이 무관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 우리는 누구나 선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상황의 전모를 보지 못해 올바른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혹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마음을 버리고, 이런 마음을 가져보자. 상대방은 문제를 나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혹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악한 사람일 가능성보다는, 선의를 갖고 있으나 의사소통에 서툰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 앞에서 원활한 대화법의 기본을 어느 정도 익혔으니 이제 보유 기술을 좀 더 늘려볼 차례다. 이 장에서는 각종 개입 기법을 알아본다. 여기서 개입이란 상대방의 믿음 형성 과정에 비집고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목표는 상대방의 굳은 믿음을 누그러뜨려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인식에 개입해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는 방법을 배워보자. 

- 앞서 설명했듯이,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알리고 내가 생각하는 확실한 근거를 대는 식으로는 목표를 이룰 가망이 희박하다.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상대방의 믿음을 더 공고하게 만들기 쉽다. 의심의 씨앗을 효과적으로 심어주려면 좀 더 미묘한 기법을 써야 한다. 그러면 대화도 더 흥미로워진다. 우선, 내가 먼저 본보기를 보이는 행동과 구체적인 질문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가 있는지 알아본다. 그다음에는 용어의 뜻을 다르게 생각해 서로 딴 얘기를 하거나 대화가 표류하는 현상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아본다.

 

- 상대방이 내가 어떤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무리 자체에 반감이 클 때 쓸 수 있는, 무척 강력하면서 간단한 기법도 알아본다. 한마디로, 내가 극단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주어 공감대를 구축하면 된다. 이런 대화 기술을 활용하면 대화가 원활히 풀려나가면서 '배우는' 모드로 접어든다. 특히 상대방이 왜, 어떻게 지금처럼 생각하고 믿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면 상대방에게는 물론 스스로도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는 게 아니었음을 겸허히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항상 기억하자. 남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려면 우선 나부터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행동이 있다면, 내가 먼저 본보기를 보이자.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해주길 원하면,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자. 조용히 들어주길 원하면, 나부터 조용히 듣자. 언성을 높이길 원하면, 내가 언성을 높이자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길 원하면, 내가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자. 예의를 지키길 원하면, 내가 예의를 지키자. 근거를 제시하길 원하면, 내가 근거를 제시하자. 내 말에 귀 기울여주기를 원하면, 나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자. 말로는 쉬워도 실천하긴 어렵다. 하지만 꼭 지켜야 할 원칙이기도 하다. 특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원칙은 대화가 엉뚱하게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 '무지에 대한 무지' 현상을 연구한 두 학자가 있다. 로버트 윌슨 Robert A. Wilson이라는 철학자와 프랭크 카일 Frank Keil이라는 심리학자인데, 1998년에 쓴 논문 <설명의 그림자와 여울 The shadows and shallows of explanation>에서 사람들이 사물의 작동 원리를 실제보다 잘 안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연구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타인의 전문성을 믿음으로써 자신이 실제보다 더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인류의 지식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는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수중에 있으니 책에 든 정보를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연구해보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지식이 없는 상태다. 그런 맥락에서, 이러한 오류를 이 책에서는 앞으로 '읽지 않은 장서 효과 Unread Library Effect'라고 부르겠다.  

 

- '읽지 않은 장서 효과'는 2001년 프랭크 카일과 레오니드 로젠블릿 Leonid Rozenblit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두 사람은 그러한 효과를 가리켜 '설명 능력의 착시현상'이라 칭하고, '통념의 한계에 대한 착각'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실험은 수세식 변기의 작동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먼저 참여자들에게 작동 원리를 자기가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는지 그 자신감의 정도를 숫자로 답하게 했다. 그런 다음 작동 원리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게 했다. 그러고는 자신감을 다시 숫자로 답하게 했다. 그러자 참여자들은 자신감이 전보다 훨씬 낮아졌음을 시인했다. 직접 설명해보고 나서는 자신이 '빌린 지식'에 의존했을 뿐이며 실제로는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도덕'과 관련된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도 용어 정의의 차이로 대화가 엇나가기가 아주 쉽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뜻이 엄청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치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진보주의자는 복지 제도를 국가의 도덕적 책무로 간주할 테지만, 보수주의자는 공짜 혜택을 나누어주어 노력할 동기를 떨어뜨리는 조치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진보주의자는 복지 문제를 '배려와 위해 care and harm'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보수주의자는 복지 문제를 주로 '공정 fairness'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 자세히 논한다). 이 경우 '복지'라는 단어는 그 가리키는 대상은 같지만, 사람마다 그 단어에서 느끼는 도덕적 함의가 확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그럴 때는 부당한 수급 문제라든지 빈곤 감소 방안을 직접 논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복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자칫 공정성이라든지 누구에게 어디까지 지원해야 하느냐를 놓고 엉뚱한 논쟁이 불붙을지도 모른다. 대화에서 중요한 용어(가령 '진리', '여성', '복지')의 뜻을 두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사안으로 넘어가거나 대화를 잠시 중단하자. 

-  무슨 대화를 할 때건 의견 일치를 쉽게 볼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편' 극단주의자들이 도를 넘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엇갈리는 상대라면 우리 편 극단주의자들을 신뢰하지 않을 테니, 나도 같은 의견임을 밝히면 의견 일치를 쉽게 볼 수 있다. 또, 오늘날의 양극화된 언론 환경 때문에 상대방은 '우리 편' 중에서도 온건한 입장보다는 극단주의자들이 펼치는 주장에 익숙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우리 입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논거는 잘 모를 것이다(우리도 상대방에 대해 마찬가지다). 이는 언론이 광적인 인물일수록 더 확대해 보도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언론계 격언 중에 "유혈 뉴스가 톱뉴스 If it bleeds it leads”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나와 입장이 엇갈리는 상대방은 우리 편 극단주의자와 나를 한통속으로 생각하기 쉽다. 극단주의의 폐해는 심각하다. 극단주의는 부족주의 部族主義, 양극화, 근거 없는 의심, 불신, 방어적 태도를 부추길 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상대편의 견해를 부당하게 왜곡. 과장하는 현상을 부추긴다. 설상가상으로, 한쪽에서 극단주의를 취하면 다른 쪽에서도 극단주의로 응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편의 극단주의자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면, 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다. 극단주의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도덕적 견해가 아무리 다른 상대와도 합의점을 금방 쉽게 찾을 수 있다. 상대방은 나를 보며 '다른 편 사람이긴 해도 그쪽의 터무니없는 문제를 인지하고 반대하는구나. 광신자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나의 '도덕적 부족 moral tribe'과 분리되는 동시에 상대방과 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드러나면서 도덕적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 소셜미디어에 도발적 질문을 올리고 예의 있는 논의를 기대하는 건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짓이다. 우리 둘도 그랬음을 고백한다. '도발'과 '예의'는 소셜미디어 세계에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위의 도발을 벌인 결과, 의도했던 목적(사람들에게 더 깊이 따져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를 의심해보게 만드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정반대의 역효과만 일어났다. 우리는 완전히 '꼴통'으로 취급받았다.  
 

- 상대방의 결론보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큰 이점이 있다. 사람마다 남에게 이의를 제기받으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있다. 자주 듣는 반론에 대해 늘 반복하는 주장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자기가 결론에 '어떻게'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입이 아프게 반복했던 메시지를 거두고 대화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상대방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에 도달한 추론에 질문을 제기할 때보다 상대방이 방어적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방어벽을 쌓고 입장을 더 강하게 고수할 위험이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그런 문제가 많이 사라진다. 믿음 자체보다는 인식 원리를 캐물을 때 상대방이 위협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 상대방의 인식 원리를 캐묻기 전에 짤막하게 긍정적 언급을 한다. "흥미로운 시각이네요.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을 내리셨어요?"라거나 "그렇군요. 알 것 같으면서 정확히 모르겠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되는 건가요?"라고 말한다. 이 질문들은 모두 대화를 유도하는 교정 질문임에 유의하자. "설명해주세요"라는 지시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닫힌 질문도 아니다. 

 

- 이 장에서 배울 기술을 활용하면 상대방의 생각을 더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그러려면 앞에서 다룬 내용을 얼마나 확실히 체득했느냐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이 장에서 배울 중급 기술과 하나로 융합해야 한다. 이 장에서 소개할 기법들 가운데 일부는 감정의 영역에 속해서, 따지고 옹호하고 바로잡아주고 싶은 본능적 충동을 이겨낼 필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기법은 감정의 영역 밖에서 지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상황을 판단해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 이 장에서 배울 것은 개입 기법이다. 상대방의 인지에 개입해 믿음을 수정하도록 이끄는 전략을 배운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중엔 내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상대방이 설령 혐오스러운 믿음을 갖고 있다 해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한다. 또 상대방이 부담 없이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퇴로'를 마련해주려면, 나만이 옳다는 생각이나 으스대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야 한다. 상대방이 옳을 때 내 생각을 기꺼이 바꿀 수 있으려면, 자존심도 잠깐 내려놓아야 한다. 

 

- 그럼 누군가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간단하다. 상대방이 잘못 알고 있게 놔두자. 특히 친구 사이면 더더욱 그렇게 하자. 고쳐주거나 따지고 싶어도 그냥 가만 놔두자. 사실 나와 친구가 둘 다 조금씩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 '상대방이 잘못 알고 있게 놔둔다'라는 정신은 언뜻 보이는 것보다 심오한 의미가 있기도 하다. 상대방이 현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건 기껏해야 내 '생각'일 뿐이지, 확증된 '사실'도 아니다. 고작 내 생각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가게 할 이유가 없다. 

- 남의 믿음을 고쳐주려는 시도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많다. 우정이 손상되고 관계가 허물어질 수 있다. 남의 믿음을 비판하는 일은 믿음에 그저 관여하는 것과 다르다. 더군다나 남의 도덕적 믿음을 비판하려면 어떤 대가가 따를 수 있는지 잘 알아야 한다. 설령 상대가 도덕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도, 꼭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떠한 도덕적 믿음을 갖는 이유는 다양하다. 문화나 개인적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무지해서일 수도 있다. 추론을 통해 그릇된 도덕적 견해에 도달했다고 해서 악한 사람은 아니다. 추론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 하지만 의견 차이가 큰 사안에 대해 친구와 대화를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면, 관계를 더 두텁게 할 기회로 삼자. 이때 바람직한 방법이 있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듣는 것이다. 친구가 어떤 견해를 가졌으며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정말로' 이해해보자. 그런 다음엔 내가 이해한 친구의 생각을 말해주며 맞게 이해했는지 물어보자. 상대의 믿음의 바탕에 깔린 가치를 나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논쟁에서 이기는데 몰두하여 귀중한 관계를 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그래도 왜 꼭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하나만 기억하자. "나와 도덕적 견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움직이고자 할 때, 가장 성공률이 높은 수단은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정은 좋은 삶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 망신을 무릅쓰고 자기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인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도덕적 사안을 자기가 오판했다고 시인해야 하거나 자신의 도덕적 정체감, 즉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위협받을 때는 더욱 그러기 어렵다. 예컨대 백신은 위험하므로 자녀에게 맞혀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녀를 무책임하고 위험하게 키웠음을 시인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퇴로를 만들어주면 상대방이 부담을 덜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거나 믿음을 수정하기 더 쉬워진다. 이렇게 말하자. "그래, 예전에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있었으니 당연히 불신할 만도 했지." 퇴로 만들어주기가 특히 중요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어떤 사안에 스스로 해박하다고 믿거나, 투철한 도덕관을 가졌거나, 개인적·도덕적 정체감을 위협받을 때다. 

 

- 척도 질문은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 우선 "그 생각이 옳다고 얼마나 확신해? 확신이 전혀 없으면 1, 절대적으로 확신하면 10이라고 할 때 1에서 10까지 점수를 매기면?"이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8이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그때 "왜 6이 아니고?"라거나 "어떻게 하면 6으로 내려갈 것 같아?"라고 묻지 말고, 곧바로 더 큰 숫자를 제시한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9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뭐야?" 그러면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품은 의문을 드러내게 된다. 

 

- 척도를 이용하는 더 고난도의 기법도 있다. 상대방의 확신도가 10점 척도로 7 이상이라고 하면, 이렇게 묻는다. "나는 [X]가 옳다고 3만큼 확신하는데, 어떻게 하면 너처럼 이만큼 확신할 수 있지? 내가 뭔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알고 싶어. 그렇게 믿게 된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줄 수 있어?" 이렇게 하면 상대는 본인의 인식 과정을 직접 하나하나 설명하게 된다. 내가 질문을 계속 궁리해가며 물어보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인식의 간극을 설명해줄 테니 매우 효과적이다. 다시 말해 내가 놓친 부분을 '상대가' 설명해주는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 상대방이 확신이 낮아지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상대방의 인식 과정이 정말 강하게 확신해도 될 만큼 타당하다면 더 좋다. 그러면 내가 무언가를 배운 것이니, 그에 따라 내가 가진 확신을 조절하거나 높일 수 있다. 이 기법은 '인식 원리'에 주목하기'와 교정 질문을 척도 도입과 결합한 것이다. 

 

-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논박하는 것보다 논박당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바꾸는 게 남의 그릇된 믿음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개입을 시도하다 보면 실제로 그럴 때가 있다. 상대방의 인지에 개입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나 자신의 인지에 개입해 믿음을 수정하게 되는 경우다. 그런 경우야말로 최고의 개입이니, 피하지 말고 당당히 받아들이자. 나의 그릇된 믿음을 바꿀 좋은 기회 아닌가. 자신의 그릇된 믿음이 드러나면 누구나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저항하면서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기분이 상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비난을 퍼붓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무척 중요한 게 퇴로 만들기와 협력적 표현 사용하기다. 그런가 하면 판단력을 발휘할 필요도 있다. 때로는 친구 말을 그냥 들어주고, 친구가 잘못 알고 있게 놔두고 넘어가는 편이 낫다. 

 

- 대화 중에 내가 틀렸음을 깨달으면, 내가 틀렸다고 말하자. "생각을 바꿨다"라는 말만큼 강력하고 당당한 말도 없다.  

 

-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려고 평소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믿음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명확한 근거만 보여주면 그 사람이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애초에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다른 근거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합리적 논거를 꼼꼼히 살펴서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럼에도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례로 햄은 그렇게 믿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자신의 기존 믿음을 뒷받침하는 사항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데 대개 서투르다. 믿음이 틀렸음을 확인하기보다는 옳음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가졌거나 갖고 싶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쏙쏙 뽑아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성향이 있다. 또 대부분은 믿음을 먼저 형성한 다음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찾아 나서곤 한다.  

- 창조론이 거기에 딱 부합하는 예다. 진화의 증거는 과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지만, 미국인의 34퍼센트는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리고 단 33퍼센트만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오로지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 진화했다는 믿음을 표명한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는 진화에 관한 증거나 설명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믿음에는 증거와 무관한 각종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덕성(창조론을 믿거나 믿는 척하면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라든지 사회적 요인(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누구나 그렇게 믿거나 믿는 척하고 있으며, 진실 모색보다 타인과의 융화가 더 중요한 상황) 등이다. 도덕적 사고와 사회적 사고가 이성적 사고를 압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 도덕적, 사회적 믿음이나 정체성 차원의 믿음을 바꾸려고 할 때,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행동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음에 반하는 근거를 제시받으면 믿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는, 역화 효과가 있음을 잊지 말자. 역화 효과가 일어나면 상대방이 기존 믿음을 한층 더 고수하면서 대화가 교착되고, 결국 노력은 헛수고가 되기 쉽다. 역화 효과를 유발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사실'이다. 근거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  사실 대단히 중요한 초점 이동이다. 반증 불가능한 믿음의 대부분은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의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맥주 트럭의 예는 반증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현실적이진 않다. 맥주 트럭의 적재물에 관해 반증 불가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트럭에 맥주가 실렸는지 아닌지가 자기 삶에 도덕적으로 중요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니얼 데닛은 그 밑바탕에 깔린 믿음을 '믿음에 대한 믿음'이라고 부른다. 즉 어떤 믿음을 가지면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다. '좋은 사람은 [X]를 믿으므로 나도 [X]를 믿어야 하며, 내가 [X]를 버리면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 믿음 때문에 타당한 반증 기준을 제시해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런 사람이 믿음을 수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믿음이 잘못일 수 있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의 수정은 곧 자신이 가진 (도덕적) 정체성의 훼손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지적이거나 인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의 일일 때가 있다. 사실을 거론함으로써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기가 극히 어려운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반증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해보려 하지 않는 행동은 자신의 믿음을 지켜낸,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준다. 가령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 (주삿바늘을 통한 질병 전파를 막고자 약물사용자가 쓴 주삿바늘을 새것으로 무료 교환해주는 공공 서비스. 미국 여러 주에서 시행되고 있으나, 약물 남용 조장을 우려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 옮긴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런 사람이 생각을 바꾸려면, 많은 사람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좋은 일에 자기가 반대했음을 시인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 반증 조건을 묻다 보면 상대방이 워낙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조건을 말해서 당혹감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너무 황당한 조건이잖아. 저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대화를 이어가기 전에 현재 상황에 비추어 내 목표가 적절한지 생각해보는 게 좋다. 또 상대방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수도 있으니, 그런 경우는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의심스러우면 일단 발을 빼자. 

 

- "지금 지닌 모든 믿음은 하나같이 10년 전과 똑같아?" 상대방이 지금 지닌 모든 믿음은 10년 전과 똑같다고 대답하면 15년 전, 20년 전으로 바꿔서 다시 물어본다. 상대방이 그동안 바뀐 믿음도 있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말한다. "10년 전에 넌 지금 믿지 않는 무언가를 믿었어. 10년 후에 지금을 되돌아본다면 아마도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10년 후에도 '10년 전의 나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믿었구나' 하고 깨닫지 않을까?" 참고로 '잘못된 false'보다는 '사실이 아닌 untrue'이 부드럽게 들려서 방어 태세를 유발할 우려가 적으니 그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 다만 상황상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으면 '잘못된'이라고 하자. 

- 만약 상대방이 자기가 기억하는 한 자기가 지닌 믿음은 무엇이든 늘 '완전히' 똑같았다고 주장한다면, 상대방은 거짓말 또는 자기기만을 하고 있거나 극단적으로 인식이 폐쇄된 상태다. 다시 말해 믿음이 완전히 닫혀 있어 전혀 바꿀 수 없는 경우다. 드문 경우지만, 이때는 대화를 계속할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 마지막으로, 상황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꼭 익힐 필요가 있다. 하버드대학 법학 교수 로저 피셔 Roger fisher 등이 공저한 책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상황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협상가로서 갖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를 갖추게 되는 것과 같다. 타인의 생각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관점이 가진 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믿는 감정의 세기를 느껴야 한다. 상대방을 현미경으로 딱정벌레 보듯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딱정벌레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알아야 한다." 

 

- 상대방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방을 비난하고 싶어도 참는다. 그러면 상대방을 자극하여 사태를 키울 뿐이다. 목표는 사태를 진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조롱하든 모욕하는 욕설을 하든, 상대편의 공격에 똑같이 맞대응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에게 "바보"라고 할 때 "너도 바보"라고 하면 상황은 악화할 뿐임을 기억하자. 맞받아치기는 금물이다. 
 

- 이 책에서 말하는 이념가란 '자신의 믿음을 수정할 의향이나 여지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이념가와는 대화를 시도해도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런 사람은 대개 메시지를 전달하며 일방적인 연설을 하기 마련이다. 이 장에서는 이념가를 이해하고 대화 상대로 삼는 방법, 그리고 그런 사람의 인지에 개입하여 의심을 주입하기 위한 전략과 기법을 알아본다. 그 비결은 한마디로, 이념가의 도덕 감각이 그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대화는 세 가지를 동시에 다룬다고 생각하자. 사실(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감정(어떻게 느끼는가), 그리고 정체성(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이다. 

- 도덕적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는 항상 정체성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직접 하든 돌려서 논하든, 그럴 수밖에 없다. 이념가와 나누는 대화는(아니 누구와 나누는 대화이건) 비록 겉으로 사실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대화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도덕을 논하는 대화다. 또 그런 대화는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논하는 대화일 수밖에 없다. 

 

- '나는 어떤 가치를 중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어떻게 찾았는지 신중히 검토해본 사람은 드물다. 정의, 공정, 충성, 진실 같은 도덕적 개념의 의미와 시사점을 깊이 고민해본 사람 역시 드물다. 이는 피터가 교도소 수감자를 교육하고 종교적 강경주의자와 대화하면서, 그리고 논쟁적인 도덕 문제를 주제로 수천 회에 걸쳐 여러 사람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는 도덕적 직관이 있다. 거기에다가 각자가 속한 사회, 가정, 종교, 문화 등의 영향으로 스스로 도덕적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도덕을 어떻게 수호해야 하는지, 위반 행위를 어떻게 적발해야 하는지, 위반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믿음을 제약하는 요소는 많다. 우리의 믿음은 감정, 문화, 심리적 요인뿐 아니라 정보 접근성의 차이, 경제·사회적 계층 등 개인적 여건, 유전적 특성, 당대의 시대정신에도 좌우된다. 그러나 자신이 도덕적 지식에 이른 '과정'이 과연 신뢰할 만한지 깊이 고민하고 따져본 사람은 드물다. 문제는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성찰을 이미 마쳤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내린 도덕적 결론이 옳다고 강하게 느끼면서도,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보통 잘 알지 못한다. 누구나 도덕적 인식 원리를 건드려보면 허술함이 드러난다. 그 취약점을 이용해 믿음에 개입하자. 우리의 믿음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을 파고들어, 의심을 불어넣고 믿음에 대한 확신을 낮출 수 있게 돕자. 그리고 겸허한 자세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자. 

 

- '읽지 않은 장서 효과'를 가장 크게 겪는 사람은 더닝 - 크루거 효과(Kruger & Dunning, 1999)에 빠질 가능성도 가장 높다. 더닝-크루거 효과는 제대로 된 전문가는 필요한 문헌을 상당히 많이 읽었으므로 이러한 '읽지 않은 장서 효과'가 발생하지 않고 자신감을 어느 정도만 느끼지만, 아는 게 거의 없거나 전무한 사람은 읽지 않은 장서 효과가 최대로 나타나서 실제보다 큰 자신감을 느끼는 현상을 가리킨다. 어느 정도는 알지만 전문가는 아닌, 그 중간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크게 떨어진다. 자기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만큼은 알게 되면서, 읽지 않은 장서 효과를 벗어난 셈이다. 

 

- 극단주의는 고착된 믿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정치적 견해를 온건화한다면 예의 바르고 생산적인 대화를 촉진하고, 사람들의 생각 변화를 유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온건화할 때의 장점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건전성이 향상될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지도자를 열렬히 신뢰하며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극단주의자들은 기만과 조종에 잘 휘둘린다. 예를 들면 미국의 보수 극단주의자 중에는 진보 정치인이 총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언질만 있어도, 총기와 탄약 구매에 거금을 쏟아붓는 이들이 많다. 총을 빼앗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볼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다. 좌파 극단주의자들은 무엇이건(이를테면 화요일에 타코 먹기 문화 같은 것도) 인종차별적 동기나 저의가 깔린 것으로 해석할 여지만 있으면, 자신들의 가치에 지대한 위협이 된다고 간주한다. 또 양쪽 극단주의자들 모두 자기 진영의 도덕적 지도자라는 이들이 판매하는 엉터리 보충제와 치료약에 거금을 지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많은 문자 주의 기독교 신자들은 진화론이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신뢰성을 직접 부정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원죄와 예수의 속죄까지 부정한다고 본다. 이 점은 문자 주의자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데 넘어설 수 없는 도덕 차원의 걸림돌이 된다. 아무리 과학적 근거를 많이 제시해도 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이들이 먼저 타당한 생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예수에 대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그리고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 에크먼은 대화 상대가 자극받아 화를 냈을 때 대비해 유의할 점을 밝히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남들 앞에서 모욕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하자. 분노한 상태에서는 자기가 들은 말에 정말 모욕 의도가 있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와 상대방이 한 말에 대한 정보 중에서 일부만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상태다. 즉, 분노에 반하는 정보는 인지하지 못하고, 분노를 뒷받침하는 정보만 인지하게 된다. 상대방이 설명 또는 사과를 건네도 화난 사람은 그 정보(상대방이 사과했다는 사실)를 즉각 행동에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Ekman, 2003, p. 39) 대화 상대를 잘 모른다면 생각보다 큰 위험이 초래될 수도 있다. 에크먼에 따르면, "대개 감정 반응이 빠르고 강한 사람일수록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훨씬 어렵다(p. 48)."

- 에크먼은 이 점을 아주 확실히 하고 있다. "상대방의 분노를 그냥 흡수하거나 상대방의 분노에 전혀 대응하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불쾌한 행동을 멈추게 하려면 상대방 본인이 자기의 무슨 행동이 불쾌함을 유발했는지 알아야 한다(Ekman, 2003, p. 124)." 스톤 등의 저서 <우주인들이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받을 때 우주정거장에서 가장 많이 읽은 대화 책>에서 강조하는, 감정은 적절히 조치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계속 우리의 관심을 갈구한다는 점도 이와 통한다(Stone, Patton, & Heen, 2010, pp. 86-90). 상대방의 화를 흡수하면 분한 마음이 조용히 쌓이기 쉽다. 그렇게 되면, 그 감정도 인정하고 적절히 조치해주어야 한다(Stone, Patton, & Heen, 2010, pp. 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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