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시아란] 저승 최후의 날 1-3

일루젼 2022. 6.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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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시아란
출판 : 안전가옥 
출간 : 2022.03.31 


저자 : 시아란
출판 : 안전가옥 
출간 : 2022.03.31


저자 : 시아란
출판 : 안전가옥 
출간 : 2022.03.31 


     

아주 즐겁게 읽었다. 내용을 알고 찾아 읽은 것은 아니었고, 반납된 도서 사이에서 발견해 읽기 시작했다가 뒤가 궁금해 전자책으로 결제, 하루 만에 끝까지 달려버리고 말았다. 안전가옥의 앤솔로지들을 좋아했었는데 드디어 첫 리뷰를 쓰게 된 점도 기쁘다. 

 

 

지도 교수가 관측을 위한 천문 망원경 사용을 허가해주지 않아 욱하는 마음에 '맨눈보다는 낫겠지'하는 심정으로 지리산 천문대로 달려간 채호연. 마감 시간이니 퇴장해달라는 요청에 입구를 나서다 당황하게 된다. 당연히 셔틀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셔틀은 고사하고 차편이란 차편은 모두 끊긴 상황. 당연히 자차로 오셨을 줄 알았다며 직원마저 사라진 뒤, 야산에 홀로 남아 친구에게 SOS를 치게 된다.
그렇게 달려와준 친구에게 교수 욕을 하며 밤길을 달려가던 중, 갑자기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백색 빛이 쏟아져 내리는데... 

 

 

<저승 최후의 날>은 이승과 저승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인간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죽음의 순간 자신이 믿는 사후세계관에 따른 저승으로 가게 된다. 누군가는 기독교적 저승, 누군가는 시왕저승, 또 누군가는 무신교의 저승으로 행한다. 각 저승들은 산 사람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상들이다. 그리고 각 저승에 속한 영혼들 또한 한 때는 산 사람이었던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저승의 모습은 이승의 모습을 좋은 면에서건 나쁜 면에서건 많이 닮아있다. 

 

시아란 작가가 그리는 저승은 <신과 함께>를 통해 알려진 십왕저승과는 또 다르다. 고전적인 해석에 갇히지 않고 현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저승의 업무와 역할들은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위로로, 어느 순간에는 씁쓸한 뒷맛으로 다가온다. 독자들은 저승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시대와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탄탄한 설정,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모두 이 소설의 큰 장점이지만, 위기의 순간 제각기 '자신만의 믿음'에 따른 선택을 내리는 인물들을 보며 독자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생각과 고민들은 이입을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직접 고민해보는 능동적 시도 없이도 자연스럽게 보다 '자신에 가까운' 가치관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각 권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발췌문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책을 읽는데 걸린 만큼의 시간이 걸렸지만, 개인적인 감상들을 길게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주었으면 하고, 제각각 자신만의 즐거움과 해답들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괴롭고 힘겹기보다는 호기심이 반짝이는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미워하는 마음 중에서도, 그 미움을 의심하게 되는 마음으로 용서도 증오도 선택하기 어렵다면 심판은 시간에 맡기고 자신의 마음이 가장 평온해지는 선택을 하기를.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속박하지는 말기를. 

두려움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몰리지 말기를.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사람들을 이해해보기를.

그것이 괴롭다면 자신만이라도 사랑할 수 있기를. 

 

누군가는 이야기를 전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그것 역시 인간사이므로 

연민만을 남기고 모두 잊어버리기를.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승이 살아남은 가해자들의 땅이라면
저승은 먼저 죽은 피해자들의 땅이다. 

 

 

- 방금 걷어 내려 한 나뭇가지는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무줄기에 굉장히 정밀하게 깎은 나뭇잎 모양의 강철 칼날에 가까웠다. 잔뜩 매달린 칼날을 흔한 나뭇잎인 줄 착각하고 쓸어 넘기려 했으니 이만한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전 호연의 손이 닿았을 때 묻은 피가 칼날 위에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이게 뭐야..."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호연은 숨을 들이삼켰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자 칼날이 매달린 나무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사위에 그런 나무들밖에 없었다. 이 숲의 모든 나무는 칼날을 잎으로 기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야...? 여기 지리산 맞아?"
오싹하며 마음속으로 굉장한 공포가 밀려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심박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얼어 죽을 만큼 차갑게 질려 갔다. 호연은 예리한 칼날이 매달린 나뭇가지들을 조심스레 피하며 불빛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한번 공포를 느낀 몸은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한 발짝 떼는 순간 발 디딘 곳의 흙이 무너졌다. 호연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확 움켜쥐었다. 순간 손바닥에 뜨거운 통증을 느낀 호연은 비명과 함께 가지를 뿌리쳤고, 그 기세로 산비탈을 굴렀다. 

 

- '사람은 죽어서 열 명의 대왕에게 심판을 받고 다시 새 몸뚱이를 입고 태어난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전통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저승의 모습이지만, 실제 저승의 생김새는 그리 간단하게 생기지 않았다. 떠도는 영혼을 구해 오고, 죄가 무거우면 그 죄를 갚게 만들고, 알맞은 길로 인도해 다시 이승으로 내려 보내는 일. 이 모든 일들이 거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저승이라고 해도 결국 이승에서 살다 온 망자들이 모여 만드는 장소이고, 누군가는 일거리를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저승의 여러 대왕들부터 현장을 뛰는 저승사자와 역사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망자들이 저승을 관리하고 있었다.

 

- 최초의 어머니가 삼도천을 건너 저승에 도달한 이래, 염라대왕의 관청은 저승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 대왕이 열 명으로 늘어나며 '시왕+저승’으로 정착되고, 저승의 관원들이 계속늘어나는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염라대왕부는 저승 전체를 아우르는 심장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최고 결정권자인 염라대왕이 주기적으로 은퇴하며 새 대왕을 맞을 때마다, 저승의 모습은 조금씩 변화했다. 가혹한 지옥이 완화되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육도 윤회의 해석 방법이 바뀌고, 대왕의 심판 업무가 판관에게 위임되고, 마침내 전근대의 동양식 관료제를 답습하던 저승 전체가 현대적 관료 사회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시왕저승은 망자의 심판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부와 그들의 사무를 돕는 여섯 곳의 소육왕부 小六王府로 구성된 십육 부 체제의 거대한 조직이다. 그 중심인 염라대왕부는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비서실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과거에 염라대왕이 다른 저승 왕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던 것을 대리하는 부서로, 위임받은 일부 행정 업무를 염라대왕의 이름으로 대행하는 것은 물론 저승 왕들 간의 이견 조율까지 처리하는 요직이었다.  

 

- 그때였다. 쿵 하는 충격음과 함께 꺄악 하고 망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혜영과 경철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온몸에 피를 흘리는 망자가 인간 같지 않은 흉측한 몰골로 난동을 부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구조대가 사출산에서 망자들을 신속히 구조해 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망자의 영혼이 사출산에서 일정 이상 상처를 입으면, 고통으로 영혼이 망가져 이성을 잃는다. 스스로의 윤회 길이 막힘은 물론, 주변의 망자들이나 저승 관원들까지 해칠 우려가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급히 제압을 시도했지만, 이성을 잃은 망자는 구조대원들과 주변의 다른 망자들을 공격하며 날뛰었다. 역사까지 투입되어 망자를 힘으로 억누르고서야 상황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 혜영의 눈매가 확 찌푸려졌다. 이승에서부터 줄곧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혜영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패턴이었다. 혜영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한경철 심사관 같이 남성으로 보이는 동료에게 떠넘기는 게 가장 쉬웠다. 웃을 수 없게도, 그렇게만 해도 진정하는 이들이 참 많았다. 다음으로는 윽박지르든 위협하든 해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고약한 방법으로는 이 망자를 그냥 방치해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다른 사람에게 신원 확인받고 진광대왕부에 들어가든, 헤매다가 사출산으로 도로 나가서 험한 꼴을 당하든... 그때 뒤에 있던 다른 망자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너 이... 사람을 속여 먹어? 장난해 지금?"
"사망하셨으면 사람 아니시죠. 아무튼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결국 생각하던 걸 말로 뱉어 버린 혜영이었다.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리라.
"안 가! 못 가! 사람을 어디 저승에 팔아 넘기려고!"
그리고 안내를 다 마쳤는데도 이렇게 눌러앉아 있으면 뒷일은 혜영이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저는 안내 다 해 드렸고요. 미어터지는 여기 로비에 계실지 이동하실지는 이제 알아서 하세요." 

- 예슬은 탱화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게 시왕도라는 건데, 원래는 저런 풍경이라야 하는데 말이야. 조선시대 같은 관복 입고 다니고. 주변에 둘러싼 이 사람들이 다 저승 관원들, 그러니까 판관이나 역사나 녹사錄仕들일 텐데... 풍경이 이렇게 다른데 관원들은 똑같네. 판관이 다섯, 귀왕이 넷, 동자가 둘, 사자가 하나. 숫자는 맞는데..."

 

- 그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호연은 머리를 굴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목격했던 초신성, 시간적 연관성.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저승 직원들의 외침 속에서 손을 들게 된 근거들이었다. 떠올린 그 순간은 정말 강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막상 타인에게서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맞받아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근거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연에게는 조금 익숙한 감정이었다. 나름의 연구 결과나 가설을 만들어 지도교수 앞에 자랑스럽게 가져갔더니 지도교수의 매서운 비판에 엉망진창으로 토막이 났을 때, 곤혹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질 수 없다는 듯 오기가 끓어오르는 순간이 온다. 말이 안 되면 되게 만들면 된다.  


- 온 세계에 저승이 시왕저승 한 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권에 따라, 종교에 따라 갈래를 달리하는 여러 저승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여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른 염라대왕과 다른 시왕들이 지배하는 중국 전통의 시왕저승이 따로 있었고, 팔백만 신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황천도 있었다. 한반도 안에 존재하는 몇몇 무속신앙을 따르는 소규모 저승세계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 노군께서는 말씀하셨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고. 무언가가 두렵다면 도망치는 것도 좋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정체를 샅샅이 알아내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라고. 

 

- 알두스의 변광 주기가 최근 갑자기 바뀐 것이 원인이었다. 센터의 논문 기획 위원들은 논문이 그 부분까지 설명해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앞선 가설을 토대로 이 논문에서는 알두스 알파의 가스가 알두스 베타로 빠르게 빨려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 변광 주기가 바뀐 원인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이 논문을 토대로 저희 태양연구센터 쪽이 독자적으로 추론한 것입니다. 논문이 시사하는 쌍성계 구조에 따르면, 블랙홀인 알두스 베타의 자전축은 지구 방향을 향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만약 알두스 알파가 베타에 잡아 먹히기 시작했다면, 가스가 거대한 강착원반 Accretion Disk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호연이 뒤쫓듯이 중얼거렸다.
"제트로군요." 

- 자전 속도가 빠른 블랙홀이 주변의 천체를 잡아먹을 때 빨려 들어가던 물질의 일부가 블랙홀의 자전축 방향으로 뿜어져 나오는 현상이 관측된 바 있었다. 별 하나가 다 잡아 먹힐 때까지 플라즈마 상태의 입자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분출되는 것이다. 상대론적 제트 Relativistic Jet. 소위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레이저 총'이라 불리는 현상이었다.

 

- "채호연 연구원님이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최악인 경우의 수는 무엇일까요?" 
호연은 당황했다. 기훈이 자꾸만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정상재 교수에게 가설의 취약함을 지적당했을 때의 두려움이 쐐기처럼 마음에 박혀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가설을 가다듬었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나누면 충분할 일에 자꾸만 자신을 전면에 세우는 게 불편했다. 호연은 기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신이 없다고 발뺌할 배짱도 없었다. 호연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져서 답을 찾아냈다. 

 

- "설명 드리겠습니다. 육도윤회란 인간의 영혼이 지상으로 돌아갈 때 고를 수 있는 환생처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전에 지은 죄의 무게와 종류에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지요. 이를 위해 환생문이라 불리는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 이승의 출생처를 탐색하여 영혼을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극락도, 인간도, 축생도, 수라도, 아귀도, 지옥도.... 이렇게 여섯 가지인가요? 극락이나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는 건가요?"
예슬의 질문에 담당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구하오나 극락이나 지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섯 갈래 길 모두 인간 세상 속에서 갈라집니다."
깜짝 놀란 예슬은 눈을 크게 떴다. 윤회청 담당자의 설명에 의하면, 육도 중 축생도를 제외한 다섯 갈래가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는 길이었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의 망자는 인간도로 향한다. 특별히 더 나을 것도 없고, 다 같이 어렵고 힘든 인간의 삶으로. 정말 보상을 받을 만한 영혼들이 가는 극락도란 평화롭거나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의미했고, 전생에 지은 죄를 갚을 필요가 있는 이들이 가는 수라도는 전쟁과 폭력이 가득한 곳이었으며, 아귀도는 가난과 굶주림이 가득한 곳, 그리고 지옥도는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축생도만 동물로 태어나는 길로 운용해 왔습니다."

 

- "그래도 저걸 들으니까 좀 이해가 간다."
"뭐가?"
"인간 세상에 왜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잔인한 일이 많은가 했거든."

환생시킬 때 태어나는 환경이 다를 뿐 전부 인간 세상에서 다시 뒤섞인다고 하면, 극락을 사는 사람 옆에 수라와 아귀가 살고, 그 밑에는 누군가가 지옥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예슬은 호연의 말에 약간 공감이 갔다. 

 

- "저승시왕 설화는 한국 민속 문화에 뿌리가 깊지 않습니까? 불교나 무속 신앙과 무관하셨더라도 다른 사후세계를 믿지 않으셨다면 대체로 저희 수명부에 오르시게 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저승을 소재로 이승에서 창작된 문화 매체 또한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히 신앙을 갖지 않으신 분들 중에 그런 걸인상 깊게 보고 이쪽으로 오시는 분도 계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저희 수명부에 기재된 분의 숫자가, 조금 전에 들으신 바와 같이 약 1,425만 명에 달합니다."

 

- "그럼 믿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영은 호연이 하는 말을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호연은 다시금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재차 가다듬었다. 이제 좀 더 명확한 말로 꺼낼 수 있었다. 
"이승에 신앙이 있어서 특정 저승이 생겨날 수 있다면, 신앙이 소멸하면 저승도 사라지는 거 아닌가요?" 
 

- <이것도 다 이 늙은이 마음에 걱정이 되어 건네는 말이다만.>

시영은 퍼뜩 놀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네가 떠나던 그날, 내가 네게 '선업을 지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예."
차분하고 인자한 노군의 목소리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노군은 타이르듯, 또는 당부하듯 선문답처럼 충고를 건넸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올바르기보다는 서둘러야 하는 법이다. 어떤 선善은 때를 놓치면 이룰 수 없느니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 명심하겠습니다."
시영은 노군의 충고를 재촉으로 받아들였다. 서둘러 염라대왕께 의견을 구하고, 저승의 안부에 대해 확실한 결정을 내릴 것을 당부하는 것이라고. 

- 에니스 최 박사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그랜트 장군 신이 이렇게 될 걸 다 내다보고 날 여기로 보내신 거고, 목숨뿐 아니라 명예까지 건진다고 하셨으니까 아마 어련히 안전하게 여기서 살아 나가겠거니 예상한다 이거야. 여러분들 모두 그랜트 장군 신의 영험함에 묻어가는 줄 알라고."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피네건 박사는 물었다.
"... 아니, 닥터 최가 신령의 가호를 받았다고 해도,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최 박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닥터 피네건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지. 딴 사람들도 저마다 믿는 종교 있으면 믿는 신이나 신들한테 기도 좀 해. 무사히 살아서 나가게 해 달라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 
최 박사의 그 말에 회의실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공기가 조금은 옅어졌다. 그렇다고 기도밖에는 할 게 없다는 말로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될 리는 없었다. 물론 최 박사는 거기까지 상정해 놓고 있었다. 
"지금 '그렇지, 기도밖에 할 게 없지' 하고 납득한 사람들은 반성해야 해."
어느 틈엔가 신비한 동방 미신 이야기를 하던 때의 싱글벙글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최 박사는 진지한 얼굴로 동료 연구원들을 독려했다. 
"우리 다 과학자들 아냐? 죽기 전까지는 과학자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 아니야. 시설에서 나가지 않아도 우리가 조작할 수 있는 지하 시설 내부의 관측 장비가 많고, 지상 당국이 관할을포기한 관측 장비도 원격으로 연결해 쓸 수 있을 거고. 살아 있는 우리가 이 현상을 규명하고 기록에 남겨야지.
최 박사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여기까지. 다들 재난 영화의 피해자에서 전문가로 돌아가자고."
그 손뼉 소리에 연구원들의 마음이 단단해졌다. 아직 할 수 있는 연구가 남아 있다면, 지하에 갇혀 있어도 무의미한 생존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 "닥터 피네건, 당신은 진짜로 좀 푹 쉬어야겠어. 어디 가서 눈 좀 붙여."
"알겠습니다. 닥터 최 이제 본부에서 연락도 없을 테니까요..."

피로에 찌들어 고개를 끄덕이는 피네건 박사에게 최 박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자기 전에 머리맡에 이거 걸어 놓고."
"이게 뭡니까...?"
최 박사가 그에게 쥐어 준 것은 드림캐쳐 Dream Catcher였다. 침대로 다가오는 악몽을 거미줄 같은 그물로 붙잡아 준다는 미국 원주민의 전통 장신구였다. 이상한 꿈 꾸지 말고 푹 자라는 의미인 것은 바로 이해되었지만, 피네건 박사는 피식 웃으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최, 조금 전에 분명 한국 무속신앙 이야기를 잔뜩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지만 최 박사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무당 쫓아다니면서 한인교회는 꼬박꼬박 나가셨어. 마음의 평화에 도움이 될 거 같으면 손에 잡히는 대로 믿어 보는 거 아니겠어? 사도신경이든, 아브라카다브라든, 불경이든, 뭐든. 과학자라면 그 정도 열린 마음은 가져야 할 것 아니야."
종교관도 과학관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궤변이었지만, 피네건 박사는 그 궤변에서 웃음과 안심을 찾을 수 있었다. 

- "그게 신경 쓰이십니까?"

대답 대신 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수현은 생불왕부를 거쳐 사자가 되고 관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 이야기였다. 시영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되짚어 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시영은 답했다. 
"... 아마도 그런 이유를 달아서라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수현은 시영의 고백을 묵묵히 들었다.
"한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다 구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게 내 탓이라고 말하는 이에게는 사과가 닿지 않았습니다. 사과를 받은 이는 처음부터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구름차가 평등대왕부의 옛 풍도지옥을 통과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저승의 강풍을 견디는 방풍벽이 하염없이 뒤로 흘러갔다. 단조로운 그 풍경을 바라보며 시영은 말했다.
"그래서야 이 어려운 마음을 누구에게 전한단 말입니까." 
 
- "비서실장님도 아시다시피, 시왕저승에는 사람의 영혼만 찾아옵니다. 동물령들은 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이렇게 저승이 있다면 분명 동물들에게도 저승이 있을 텐데, 그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 사람 저승의 기억도 이승에 내려가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판에, 동물로 태어났을 때의 사후세계를 증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윤회청 엔지니어들은 동물들이 가는 저승에 대해 간접적으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천 년간 환생문을 관리해 오던 장인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통찰 같은 것이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환생시키려고 할 때도,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악업이 가득 찬 영혼을 억지로 좋은 몸에 들여보내는 건 어렵습니다. 환생문에 들여 보낼 때 저항이 걸립니다. 괜히 육도를 나눠 놓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영혼을 축생도로 보낼 때는 아무 저항이 없습니다. 굳이 환생할 곳에 급을 나눈다고 하면 축생도를 가장 낮게 보는 이유입니다."
영혼이 맑고 증오나 악행이 덜할수록 더 평화로운 곳의 육신에 들어가기 더 쉽다는 것이었다. 하정 수석은 운명론이나 계급론으로 해석될 것을 경계한다면서도, 소위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영혼이 '낮은 곳'에 태어나기는 쉽지만, 그 반대는 매우 어렵다는 게 환생문 관리자들 사이의 정설이라고 설명했다.
"그걸 아니까 저희들은 그래도 되도록이면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환생문 들어가기 조금 어렵더라도 최대한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드려야 영혼이 조금이라도 성숙할 기회를 갖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능이 있고 생각을 하는 영혼들이니까 이런 배려가 가능합니다. 동물 저승이 만약 있다면 거기선 어떻게 환생을 하겠습니까? 체계가 없을 거 아닙니까?"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가설의 영역이었다. 하정 수석은 한번 동물로 태어난 영혼이 다시 사람 몸을 입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었다. 동물들의 저승에 만약 환생의 길이 있어도 거의 무작위적으로 작동할 것이므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비율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 "그래서 저희들은 축생도를 운용하면서도 되도록 고등동물들로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과 접촉이 많은 동물들... 개, 고양이, 말, 소, 돌고래, 이렇게 좀 감정 표현도 할 줄 알고, 인간 세상을 마주할 줄 아는 동물을 물색해서 보내고 있었죠. 그런데 세균이요? 새우에 따개비요? 거기 들어간 영혼이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저는 짐작도 안 갑니다. 이게 무슨 바다거북이가 나무판 올라타는 소립니까?" 
그때 오 박사가 손바닥을 다른 손 망치로 땅 치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아, 그거 나 알아요. '맹구우목盲龜遇木’이다, 그쵸?"

하 수석은 버럭 하니 성을 냈다.
"그걸 아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시영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맹구우목이란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가르침 중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인간이 죽어서 윤회를 할 때 다시 인간의 몸을 입을 확률이란, 바닷속에 사는 눈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 숨을 쉬러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하필 그때 물 위에 구멍 난 나무판자가 떠 있어 그 판자에 목이 낄 확률과 같다는 가르침이었다. 요컨대 육도 중 다섯도를 사람 몸으로 운용해 온 윤회청 관계자들로서는, 한번 사람 몸을 입은 영혼을 되도록 사람 몸에 머물게 하여, 저승이 맹구우목의 장이 되지 않도록 애써 온 셈이었다. 성을 낼 만했다. 하지만... 

- "그 이야기, 원래는 아까 회의 자리에서 더 자세히 하려고 했어. 그런데 정상재 교수 그분이 계속 그렇게 나오고, 너도 몰아붙여져서 그거 아니라고 말하고 그러니까 이야기를 못 한 거야." 
호연은 거듭 자책감이 들었다.
"... 미안해. 내가 너무 오락가락해서."
"흔들린 거겠지."
예슬의 대꾸에는 안타까움과 핀잔이 함께하고 있었다. 호연은 예슬의 그 대꾸를 잠시간 곱씹었다. 고맙고 조금 아팠다. 예슬이 아무리 자신을 도와주고 싶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던 걸 계속 철회하고 뒤집어서야 선뜻 도와줄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 저승에 존재하는 열 명의 대왕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전승되고 있었다.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취급되는 '시왕생칠경'과 같은 저승의 모습을 다룬 종교 문헌들이 있고, 사찰에서는 시왕도를 탱화로 그리기도 했다. 한편으로 저승시왕에 대한 개념은 한국의 민속 문화 그 자체에도 뿌리를 내려, 고전 단편소설집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와 같은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가 하면 무당들의 무속 신앙으로도 침투했다. 무당들이 죽은 이를 달래기 위한 굿을 할 때 자연스럽게 저승사자나 염라대왕, 저승시왕 등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 신앙은 많은 부분이 무가, 그러니까 굿노래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어. 그리고 그 노래는 지역마다 구전되는 형식이 다르고, 저승시왕에 대해서도 그래. 진광대왕부터 오도전륜대왕까지 열 명의 시왕을 부르는 노래는 전국적으로 흔해. 지장보살을 더 찾는 곳도 많고. 하지만 지장보살을 '지장왕'으로 추켜 올리는 곳은 드물어." 

차근차근 길게 이어지는 예슬의 이야기를 호연은 경청하고 있었다. 처음 알게 되는 흥미로운 지식이었다. 그리고 호연은 자신이 예술의 전공 분야에 대해 이만큼 긴 이야기를 듣는 게 처음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친구와 생전에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호연을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왕의 수가 더 늘어나는 경우는 지장보살에 더해서 저승의 재판관이나 저승사자까지 더해서 왕으로 꼽기 때문이야. 서남도서 지역 신앙에서 자주 관찰되는 패턴이고, 신안이나 흑산도 쪽에서는 열넷이라고 보기도 해. 특히 왕을 열여섯 명까지 호명하는 건, 내가 알기로는 제주도 서귀포 일대에서 전승되는 시왕굿 노래뿐이야."
지장왕, 생불왕, 우두영기, 좌두영기, 동자판관, 사자왕. 예슬은 기억을 더듬어 시왕굿 노래의 그 부분을 따라 불러 보았다. 호연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예슬에게 물었다.
"열여섯 명의 왕. ... 그래서 소육왕부가 있고, 여섯 명의 왕이 더 계신 거라는 이야기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 "망자께서는 저승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시고서 하는 말씀입니까?"
우도왕이 많이 삭여 내놓은 핀잔에 정 교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는 듯 대꾸했다.
"모르지요. 그래서 여쭙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는 몽매한 일개 망자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우도왕은 정 교수의 사사로운 무례함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 다른 저승이라고 해도 이승에서처럼 산 넘고 물 건너가면 자연히 가 닿는 곳들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나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저승에 이르는 저승길을 넘으려면, 그 너머에 있는 저승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 경문이나 교리를 중얼중얼 외우면서 저승의 입구에 해당하는 사출산 쪽으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길을 나섰다가는 영영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 "이상하군요. 시왕저승은 분명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날 거라고 믿는 사람들만 오는 곳 아니었습니까? 다른 저승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 교수에게는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우도왕은 간단한 설명으로 이를 풀어냈다.
"신앙이 아닌 지식으로 알고 오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망자께서도 이승의 다양한 종교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야소교나 회교의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는 들어 보셨을 것 아닙니까."
"아하, 과연. 그렇군요.”
우도왕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언급하며 예를 들자, 정 교수는 단번에 납득했다. 우도왕은 보충 설명을 조금 더 했다.
"그리고 간혹 정말 여러 저승으로 향할 수 있는 망자들도 계십니다. 무당 같은 분들은 이 신에게 빌고 저 신에게 빌고 하기 때문에, 평소에 염라대왕께 제를 올리고 산신령께도 올리고 했다고 하면, 사망했을 때 더 이끌리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너무 지나치게 겸손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려는 일이 있으면 자신을 믿고 하세요. 내가 망자분 보기 좋았다고 말한 것은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한 바가 있어서 나한테 도움을 구하러 온 거니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고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고민하고 있었던 듯, 진광대왕은 한달음에 충고를 쏟아 냈다. 이어 조금 투덜거리듯이 덧붙였다.
"그사이에 누구한테 뭔 소리를 들고 왔는지 그렇게 계속 조심조심, 기가 꺾여 있는지 원."

 

- 더듬거리며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말이 마음에 곧바로 스며들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지,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해야 할지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 "좋은 분이시네."
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조금 전의 무거운 충고가 마음에 짐처럼 남아 떨떠름했다.
"응, 그래도 난 역시 저런 분들 좀 어렵더라..."
"어려워?"
"오히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라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좋은 충고와 조언을 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한 선의를 느끼지만, 그 선의를 어떻게 풀어 내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착한 수수께끼를 떠안는 것 같은 느낌. 호연은 그런 것을 건네는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옳은 것인지 결론을 짓기 어려웠다. 
 

- "원래 '염라대왕'이라는 칭호는 힌두 신화 속 죽음의 신 '야마'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불교 신앙과 접목된 것은 이미 싯다르타 시대 직후의 문헌인 아함경에서부터 이름이 오르내리다, 훗날 도교와 결합하면서 지금의 시왕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시왕경이 발간된 것으로 여겨지고요."
예슬은 생전에 읽었던 연구 논문의 결론부를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 교수의 친절해 보이는 경청의 미소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예술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지만,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힌두의 야마 신에 대한 기록은 인도의 고전 신앙 시대인 초기 베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리그베다'에서도 언급되는데요. 그 시기만 해도 이미 기원전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 "사실 저희가 우도왕부 자료를 통해 조사한 것은 기록의 유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관련된 기록을 찾지 못한 것으로부터 결론을 내린 것이니, 이는 곧 '부존재의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는 논리학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호연은 부존재의 증명에 대해 떠올렸다. 석사과정 시절, 논문 작법 수업을 들을 때 들었던 개념이었다.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존재한다는 증거 하나를 가져오면 모든 논의가 종료된다. 그렇지만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증거를 아무리 많이 찾아내더라도, 만약 훗날 정말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단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 앞에서 부존재의 증명은 붕괴하기 때문이다. 기훈은, 지금 정상재 교수의 주도로 진행한 조사가 마치 그런 방향이 아니었느냐고 묻고 있었다. 시왕저승의 과거 기록에 사후세계의 붕괴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걸 일반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호연은 실망스레 중얼거렸다. 호연이 내내 가지고 있던 정상재 교수의 멋진 이미지는, 어쩌면 화면 너머에만 존재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롤모델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깎여나가는 만큼 화는 화대로 나면서, 그에 덧붙여 일렁거리는 실망감이 기름불처럼 호연의 마음속을 헤집고 다녔다. 남에게 분노하는 만큼 자신도 고통스러웠다. 

 

- 당황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정해진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원칙을 준수하고 바른 일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 시영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이 길이요, 자신이 쌓아 가야 할 선한 업의 길이라고 늘 믿었다. 역병이 돌아 요절하던 순간에도 시영은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따를 것이고, 사후에 자신의 역할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고히 믿었기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 산신노군의 품에 자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례없는 재해가, 그리고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가장 두려웠던 공포의 순간이 시영의 마음에 큰 상흔을 남겼다. 어쩌면 정말 시영의 영혼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완전한 미지에 대한 공포이자 영원한 소멸에 대한 공포에 다름없었다. 그렇게 정신이 혼탁해졌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쉬운 결론에 이끌렸다. 바르지 않은 방향에 손을 들었다. 자신이 판단을 그르쳤다고, 수현이 말했다. 온 영혼에 스스로를 향하는 고통이 가득 차올랐다.

 

- 그 분노가 학식과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아집과 독선으로부터 온 것임을 안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쉽게 두려움을 집어먹은 결과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더는 두려움에 마음을 내맡길 수 없었다. 

- "왜 그렇게 받아들이시죠?" 
정 교수가 사나운 시선을 예슬에게로 돌렸다. 예슬은 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왜 반대되는 증거 하나만 나오면 주장하시던 게 한 번에 부정될 것처럼 말씀하세요?"
예슬이 생각하기에 정상재 교수는 스스로가 해 온 주장에 자신이 있다면 절대 취하지 않을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다면 그 옳은 주장이 도전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정 교수는 줄곧 약간의 의심도 거부하며 의심이 제기되는 것만으로 자신의 주장 전체가 부정된다는 듯 불쾌감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정 교수는 그 말에 그저 침묵으로 답했다. 그 침묵 자체가 무엇보다도 선명한 대답과도 다름없었다. 그런 정 교수를 바라보며 기훈은 큰 실망감을 담아 정 교수에게 물었다. 
"설마 확신을 갖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던 겁니까? 부재의 증명 방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확신하지 못하셨던 겁니까?" 

- 호연은 염라대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정상재에 대한 실망과 혐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연은 자신이 너무 늦게 문제를 제기한 탓에 시영이 불필요한 각오를 해야만 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제가 충분히 제 생각과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당당하게 생각한 걸 지켜 낼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예요. 제 잘못도 있습니다."
호연은 반성과 자책을 담아 염라대왕에게 간원했다. 그런 호연이 안타까웠던 예슬이 나서서 호연을 다시금 변호하려던 찰나에, 염라대왕이 예슬을 바라보며 왼손을 넌지시 들어 보였다.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예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섰다.
"채호연 망자, 고개를 드세요."
염라대왕은 호연에게 말했다.
"그대는 갓 죽어 저승에 올라온 망자에 불과합니다. 그대에게 힘이 없는 것을 그대의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 노련한 이들을 상대로는 힘겨운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 한마디에 호연의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생각들이, 홀연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졌다. 잔뜩 굳어 있던 호연의 어깨가 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염라대왕은 무표정하게, 그러나 염려가 담긴 목소리로 호연에게 말했다.
"만약 오늘의 일로 느낀 것이 있다면 그대의 영혼을 더 성숙시킬 계기로 삼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이시영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나 또한 참작하여 조치할 것이니 지나친 염려를 말기 바랍니다."
호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호연에게 염라대왕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대가 감사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승의 법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죽비를 한 번 휘둘러 소리를 울리고 선언했다.

- 시영은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차츰 진정시켜 나갔다. 염라대왕의 뜻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 신임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안고서 다시금 일을 해 나갈 수밖에 없다. 기왕에 이 일을 계속하는 거라면 염라대왕에게도, 산신노군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는 앞서와 같은 불찰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승의 모든 신앙자들이 죽고, 저승의 존재 그 자체가 잊혀져 영영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형편에, 도대체 무슨 앞날을 기약해 다시 만나리라는 말을 하셨단 말인가? 물론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고 흔히 한 묶음으로 언급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시영은 산신노군께서 그 사자성어를 허투루 붙여 말씀하지 않으셨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더는 두려움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판단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영은 곧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은 백 년 가까이 그런 마음으로 지내 왔고, 그 결과가 오늘이었다.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없다. 시영은 고쳐 생각해 보았다. 이미 두려움에 휩싸여 버렸다면, 두려움으로부터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앞서 시영은 그러지 못했다. 판단을 그르칠 위기가 온다면 그러지 않도록 일부러 느리게 갈 필요가 있었다. 시영은 그러지 못하는 편이었다. 잘해야 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지체할 수 없다고 자신을 채찍질해 온 마음가짐 하나하나가, 도리어 자신을 궁지로 몰아갔음을 시영은 알게 되었다. 

 

- 혼자 깊은 고민에 잠겨 가던 시영은, 곧 고민하기를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모든 의문과 고민들을 혼자서 결론 내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시영은 주변을 믿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날짜가 바뀌면, 자신은 다시 직무에 복귀하게 될 것이었다. 그때 이 의문을 좀 더 파고들어 보리라. 그리고 다른 이들의 조언을 구하되, 그 목소리에 휩쓸려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 주변에 있었다.   

 


 

- "그러니까 앞서 수정해 온 걸 새삼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고쳐 온 거고, 지금 저희가 그걸 돌이켜서 얻을 게 없을 텐데요."
하지만 시영은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다 확실하다고 장담하는 목소리를 쉽게 믿었던 결과로 인해 그 많은 일들을 겪었다. 진영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라고 해서 진정성이 없어 오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 혼란을 앞뒀을 때, 앞서 이루어져 온 일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질 것이다. 그 무서움을, 시영은 뼈아프게 깨달았다. 

- "저승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세계입니다. 저승의 경제를 넘기 위해서는 건너편 저승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특정 저승에 대해 이미 알고 그 저승을 믿는 망자들이 그 믿음대로 저승에 들어간다. 또한 이미 죽은 망자들은 건너편 저승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그곳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시왕저승의 입구인 사출산을 지나 한참 더 나아가면, 저승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그곳에 도달하면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아무 것도 없는 대지만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저승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함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나아간다면, 이윽고 다른 저승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 "북유럽 전통 신화는 분명 기독교 전래와 함께 지역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19세기 유럽에서 복고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바이킹이나 켈트 쪽 신화들이 재발굴되었어. 그리고 유럽의 여러 민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구미권에서 어느 정도 종교로서의 위세를 회복했고..."

조금 전 예슬의 반응은 부정이 아니었다. 가능성을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처음 토르 이야기를 꺼낸 호연도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진짜야? 진짜로 토르를 믿는다고?"
예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의 현대 이교주의 신앙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 소위 오딘 odin 교, 현대에 와서 북유럽 다신교 전통을 되살려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

 

- 북유럽 신화에 나타나는 저승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전사들이 향한다는 오딘 신의 궁전 발할라 Valhalla였다. 또 그곳에 들어가지 않은 전사들이 향하는 프레이야 신의 정원 폴크방 Fólkvangr이 있고, 그 밖에 전장에서 죽지 않고 평안히 죽은 이들이 무난하게 향하게 되는 안개의 땅 니플헤임 Niftheim이나 그곳에 존재한다는 저승의 땅 헬 Hel 등을 꼽을 수 있었다. 특히 그중 발할라에 대해서는 일반인도 알 만큼 그 모습에 대한 지식이 퍼져 있었다. 전장에서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전사들이 가는 사후세계로, 그곳에서 전사들은 먼 훗날 세계 멸망의 순간인 라그나뢰크 Ragnarök를 맞이할 때 오딘 신의 편에 서서 싸울 유령 전사, 에인헤랴르 Einherjar로 다시 태어난다. 황금 방패로 장식된 궁전에서 머물며, 낮에는 끝없는 전투로 몸을 단련하고, 밤에는 바닥나지 않는 술과 고기로 가득한 연회에서 쾌락을 누린다. 발퀴리 Valkyrie라 불리는 존재들이 발할라의 저승사자에 해당하며,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명예로운 전사들을 선택해 발할라로 맞이한다. 

 

- "저는 국내 무속신앙 연구가 주 전공이라 정말 교양 수준으로만 아는 거지만요. 더 정확한 서술은 '에다' 같은 현지 전통 문헌에 더 상세히 나올 거예요." 

- 수많은 눈들은 시영을 보기도 하고, 호연을 보기도 하고, 다른 방향이나 하늘 또는 땅을 바라보기도 하며 재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괴물체가 날개를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깃털이 스치며 후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개의 생김새가 독수리 같을 뿐, 새 같은 구석은 전혀 없었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이승의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거미의 꿈틀거림과 고슴도치의 바늘 세우는 모습이 뒤섞인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경악해 묻는 호연에게, 시영 또한 조금 창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사입니다! 놀라지 말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게 천사라고? 다음 순간, 호연은 조금 전 들었던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성경에 적힌 말대로라면 천사는 굉장히 기괴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런 기괴한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계시를 전하려 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우스개였다. 분명 중세 유럽의 성화에 그려진, 날개가 제멋대로 붙은 천사의 그림 같은 것도 같이 게시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 기괴한 모습의 천사를 죽어서 맨눈으로 보게 되자 도저히 겁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문 너머는 얼음 동굴을 복잡하게 파 놓은 로비와 같은 장소였다. 일행이 나온 곳은 로비의 2층에 해당하는 곳으로, 1층 부분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로비를 빙 둘러 복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로비의 한가운데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큼지막한 금속 실린더가 설치되어 있었다. 실린더의 주변으로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나무로 된 난간이 빙 둘러 세워져 있었다. 로비에서 여러 방향으로 동굴이 몇 개나 이어지고 있었으며, 각 동굴에는 1층과 2층 어느 곳에서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통행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 한 동굴로 일행을 안내하며 수현이 설명을 이어 갔다.
"현재 송제대왕부의 판단 죄목은 다른 이들이 베푼 호의를 제대로 되갚았느냐는 것입니다. 불효는 그중 일부일 뿐이죠.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든 은혜를 입고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할 줄 몰랐던 영혼들이 이곳 교정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 "보시다시피, 현재 한빙지옥에서는 체벌을 가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적당히 추운 방에 가두어 놓고, 성찰의 시간을 줄 뿐입니다. 그리고 한 번씩 나와서 따듯한 온기를 쬐다가 시간이 되면 도로 추운 방으로 돌아가는 걸 반복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조 선임의 물음에 수현이 답했다.
"따듯한 은혜를 반복적으로 느껴 보는 거죠."

-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면 되게 이상한 게 아는데요. 죽은 지 얼마 안 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망자의 영혼은 여러분들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하거든요..."
수현은 조금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망자의 영혼은 자유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자발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영혼의 본질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승에서는 일부러 행동거지를 바꾸더라도 영혼을 담고 있는 육신과 뇌가 물리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금세 도루묵이 되곤 하지만, 저승에서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 호연은 자신의 추측이 거의 맞아 떨어졌음을 깨닫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 무신론자들의 저승."
조금 전 호연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완성되어 간 추론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형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종교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 자신의 믿음에 따른 저승으로 향한다면, 종교나 신화를 아예 불신하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떤 관점에서는, 신앙을 강하게 부정하는 마음가짐 또한 일종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로서의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그것이었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지만, 적어도 신과 같은 존재가 지배하는 천국은 없다는 식의 무신론이 인간의 믿음으로 성립한다면,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사후세계 또한 존재할 터였다. 그 철학적인 함의와는 무관하게 쉽사리 인용되곤 하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글귀와, 이성적인 과학 문명 예찬에 종종 사용되는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단편적이었지만, 무신론의 울타리를 노크할 만한 주제들이었다.

 

- 인간이 죽어서 저승길에 책을 가져오는 것은 어려웠다. 기껏해야 이승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 부장품으로 태워 주는 책 정도만이 저승에 전달될 수 있었다. 저승에서 저승의 방법으로 새로이 책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저승의 신통력으로 산 사람의 행실이나 운명 따위를 적을 게 아닌 이상에는 전부 직접 써 내려가야만 했다. 시왕저승에서는 한때 오천 년 어치의 공문서를 우도왕부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원들이 업무를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자료들이었다. 이 많은 책들은 오로지 지식의 축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 저승 도시에 죽어 나타난 망자들이 하나하나 새로 써서 모아 온 것일 터였다. 그 뜻과 노력을 상상하니, 시영은 아찔함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이 서가입니다." 
서가의 색인표에는 '종교와 신화'라고 적혀 있었다. 도서관 홀에서 짧은 가지처럼 뻗어 나온 서가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은 책장이 양쪽으로 놓여 있었다. 책장마다 도서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죽은 영혼들의 기억을 추려 내어, 엘리시움 학술원이 그간 편찬해 온 종교 및 신화에 관련한 책들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특히 북유럽 신화 속 저승과 관련해서라면, 여기 '에다'의 연구서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박사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호연에게 건넸다. 호연은 조심스레 책을 받아 들고 표지를 살펴보았다. 하드커버로 제본된 도서는 단색 표지였고, 제목이 간결하게 적혀있었다. Research on Paganism: based on the Prose Edda(산문 에다를 기반으로 한 파가니즘 연구).
"파가니즘...?"
잘 모르는 영어 단어의 출현에 호연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페레이라 박사가 바로 설명해 주었다.
“이교주의 말입니까? 현대에 들어서 종교로서 기능하는, 북유럽 신화를 포함한 여러 전통적 비기독교적인 신앙 체계를 부르는 말입니다."

 

- 시영과 호연이 읽고 있는 필사본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영어판 '산문 에다'를 포함한 여러 도서를 발췌 번역한 것이었다. 영어를 아는 페레이라 박사의 조수가 원문을 읽으면, 그 말을 들은 호연이 한국어로 받아 적었다. 글로 된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영혼끼리의 말은 언어의 장벽이 없이 통하는 현상을 이용한 번역 방법이었다. 아이슬란드의 문인 스노리 스투루손이 북유럽 신화 속의 신들과 세계의 모습을 문답의 형태로 기록한 산문 에다를 중심으로, 다른 북유럽 신화를 다룬 도서들을 참고해 발할라에 관련된 서술을 죄다 옮겨다 적었다. 그렇게 전부 모아 놓으니 소책자 한 권 분량이 나왔다.
"오딘은 '전사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전장에서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아들로서 인정받는 까닭이다. 그는 전사들을 발할라로 인도하여, 훗날 유령 군단인 에인헤리아르가 되도록 한다."
"발할라에는 무려 540개의 문이 있는데, 늑대 펜리르와의 싸움을 위해 전사들이 출전할 때에는 하나의 문으로 800여 명의 전사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간다."
"유령 군단의 전사들은 매일같이 오딘의 궁전에서 전투를 벌인다. 전장에서 상대방을 쓰러트리더라도, 되돌아온 뒤에는 서로 화해하여 다시 함께한다..." 

- 벽과 같은 재질의 돌로 만들어진 문에는 또렷한 획으로 날카로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알파벳에 가깝지만 더 날카롭고 각진, 사나워 보이는 글자였다. 호연은 어디선가 그 글자를 본 기억이 있었다. 이른바 '룬 문자'라 불리는 것이었다. 룬 문자가 잔뜩 새겨진 문의 정중앙에는 정삼각형 세 개를 서로 얽어 겹쳐 놓은 기하학적인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 밤이 존재하는 곳, 피비린내 나는 숲, 곳곳에 널린 전투 흔적, 거인이 와서 지었음직한 튼튼한 성벽 곳곳에 나 있는 540개의 웅장한 문, 옛 게르만족이 사용하던 룬 문자,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전사. 

 

- "오래된 예언에 말하던 신들의 황혼이, 단 한순간에 찾아올 줄을 누가 알았나? 별이 번쩍이며 하늘이 무너지니, 땅에 사는 인간들은 모두 짓눌려 죽었음이라. 싸움터에서 죽는 용맹한 전사도 더는 없으리라. 심지어 죽은 이들도 거듭 죽을 위기가 다가오니, 오딘의 유령 전사들은 늑대와의 싸움을 맞이하기도 전에, 어디에도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운율이고 뭐고 알 수 없었지만, 호연은 머릿속에 시상이 떠오르는 대로 읊어 나갔다.
"우리는 먼 나라 저승에서 찾아온 사자.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 벌어진 일을 알고, 죽어서 다시 죽는 일이 없도록 방법을 찾는 이들이니, 들여보내 주시길."
전사는 이제는 제법 진중한 표정이 되어 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려던 말을 다 뱉어 내자 한 걸음 늦게 엄청난 부끄러움이 호연을 엄습했다. 죽은 뒤에 이것저것 헤매던 끝에, 결국에는 북유럽 저승에 와서 전사에게 에픽 epic이네 사가 saga입네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만화 많이 본 아이들이 인터넷에 써 올리는 심각한 글귀 같다. 이게 뭐 하는 거람.'

호연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죽어서 맥박도 안 뛰는데 홍조는 왜 올라오는 건지, 호연은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난감했다. 

 

- "모든 망자가 인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향하는 행선지와 살아갈 처지는 다릅니다. 인간도가 가장 평균적인 경우에 해당하고요. 그 외의 네 가지 문에는 그 특징에 맞는 망자들이 환생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 "이거 하나는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부잣집에 태어난다고 극락도의 소생은 아닙니다. 신체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고 전생에 악업을 지어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편한 출생처와 힘든 출생처라는 것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육도윤회는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지 않습니다." 
수현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저희가 악행을 저지른 망자의 영혼을 수라도나 지옥도로 보내는 것은, 죄의 대가로 고생해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 환경에서 영혼에 다른 것들을 새겨서 다시 돌아오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덕적인 타락을 이겨 내고, 가까운 곳에 있는 불의에 함부로 동조하지 않을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천 년도 전에 지금과 같은 육도윤회의 틀을 짤 때부터, 이 원칙은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힘들고 가난한 데 태어나게 만들어서 선행을 쌓게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성관이 물었다. 수현은 조금 환멸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 거듭 말씀드리지만, 육도가 꼭 그렇게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돈 많은 부잣집이 수라도의 출생처인 경우도 있습니다. 내전을 겪는 나라로 가는데도, 육도는 극락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망자분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써 축생도에 보내드리는 경우도 있고요. 인세의 잔인함을 더 겪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이렇게, 육도의 윤회는 윤회청이 망자 한분 한 분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한 결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설명드리려면 너무나 복잡한 원칙들이고, 더욱이 지상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시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겁니다. 그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 "'보편적 사후세계 가설'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 들어 보셨을 리 없겠군요." 
호연은 페레이라 박사가 강조해 말한 가설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도서관에서 북유럽 사후세계에 관한 문헌을 열람하기 직전, 페레이라 박사가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언급하신 기억이 나네요."
페레이라 박사는 호연이 맞장구를 치자 기쁜 듯 더 활짝 웃으며 가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 가설은 즉... 세상에는 구체적인 종교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인 믿음에 대한 저승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요새는 이곳 엘리시움의 특수성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언급되는 가설입니다만, 원래는 신앙인들의 저승에 대한 가설을 세우다가 나온 이론입니다."
시영과 호연은 차분히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엘리시움의 학자들에게 있어서 종교인들이 가는 사후세계는 언제나 지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이곳에 무신론자들만이 모여 있다면, 그 많은 신앙인들은 죽어서 어디로 향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서로 다른 사후세계를 가질 것이라는 가설은 빠르게 정설로 채택되었다. 불분명한 것은 아브라함 계 유일신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아우르는 신앙의 사후 세계관이었다. 이 종교들은 각각 별개의 종교로 보기에는 공유하는 경전이나 비슷한 믿음의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하나의 사후세계를 공유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명백히 다른 결을 지닌 종교였다. 이 같은 문제는 심지어 같은 종교로 취급되는 신앙 안에서도 생기는 문제였다. 저마다의 종교마다 하나씩의 사후세계가 있으리라는 추측은, 가톨릭과 정교회를, 구교와 신교를 각각 별개의 종교로 볼 것이냐 하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유
대교에는 수많은 지파가, 개신교에는 무수히 많은 교단이 있었다. 이슬람교 또한 수니와 시아로 나뉘는 큰 교파의 분열이 존재했다.  

"이처럼 교단이나 교파마다 믿음의 종류가 조금씩 다를 텐데, 그들 각각이 그들만의 사후세계를 누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넓게 보면 아브라함 계열의 모든 유일신교를 믿은 영혼들이 하나의 사후세계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왔지요."

 

- 시영은 안 비서관이 보고한 대책의 내용에 조금 놀라워하고 있었다. 시영 자신이 직접 대책을 고민했더라도 거의 같은 내용에 도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영이 이끌어 온 비서실의 업무 방향을 잘 알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안유정 비서관의 꼼꼼한 성격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대신해 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마치 당사자가 한 것이나 다름없게 준비해 두는 이들은 흔치 않았다. 자신이 미처 놓칠 만한 부분까지 챙겨서, 흠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정말로 좋은 동료들을 두었다고 시영은 생각했다. 그 동료들을 믿고, 비서실에 주어지는 그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 아무리 훈련받은 군인이라 하더라도 마음속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온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두려움을 지우는 방법은 결코 훈련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그처럼 특수한 직무를 맡는 이라면, 마음을 좀먹는 공포에 상대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조국을 지킨다는 애국심으로, 누군가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또 누군가는 임무가 끝난 뒤 진탕 술에 취하는 것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박인영 대위에게 그것은 신앙이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복무는 아닐 것이다. 기쁜 일은 축복일 것이요, 어려운 일은 시험이리라.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고, 의인이 되고자 노력한다. 말씀에 충실하고, 미혹됨을 경계한다. 하늘에서 정한 바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인영은 믿고자 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휩싸이더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기둥과도 같이 그의 마음의 중심을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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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념의 혼란을 나름의 고민 끝에 토로한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최 박사의 이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단순하고 간략했다. 

"쉽게 생각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

"닥터 최, 그게 말이 된다고 봅니까?"

피네건 박사는 익숙한 당혹감에 잠겼다. 하지만 최 박사는 거리낌이 없었다.

"반대로, 뭐가 문제인데? 알파 센터우리에서 날아왔든 사후세계에서 날아왔든 어디선가 날아온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심지어 외계에서 날아온 것도 아니고 지구 출신들이니까, 어떻게 보면 외계인보다도 가깝지."

상당히 파격적인 프레임의 해석이었다. 피네건 박사는 그 어처구니없음을 규탄해 보려 했지만,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어디서부터 문제 삼아야 할지도 곤란한 지경이었다. 썩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이고 무속적인 존재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며 현실 감각에 혼란을 일으키느니, 차라리 지구를 감시하던 외계인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기독교인이자 과학자로서는 차라리 마음이 편할 듯했다. 

 

- "권선징악으로 사람들을 단속하는 것이 종교가 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과연 미래에 종교가 남아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종교의 영속성을 부정하듯 그렇게 단언하는 전 교수의 말에서 다분히 유물론적인 확신이 묻어 나왔다. 

 

- "맞습니다. 차라리 전 교수님 말씀처럼 과감하게 생략해서 동화처럼 만드는 것이 낫겠습니다.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면 후대의 독자들에게 좀 더 설득적일 거고요."

예슬도 동의하는 의견을 덧붙였다.

"네. 예를 들면 송제대왕부 같은 경우에는, 은혜를 모르는 이들을 추운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은혜가 무엇인지 온기로 가르쳐 준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 듯해요."

 

- "그러고 보니 SF 소설이 하나 생각나는데요."

"소설이요?"

성관이 되묻자, 호연이 떠올린 책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소설 중에,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청년이 동생에게 받아 적으라면서 150억 년 전 빅뱅에서부터 운을 떼는 이야기가 있어요."

기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척을 했다.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세 이야기죠?"

"모세?"

예은이 조금 놀란 듯 호연을 돌아보자, 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설의 내용을 소개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출애굽 이후, 모세는 산에 올라 신으로부터 우주의 창세 이후 역사에 대한 152억 년 어치의 계시를 받고 내려온다. 그리고 형인 아론과 함께 그 내용을 파피루스에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하지만 그 방대한 역사를 받아 적을 종이 값이 무섭지 않느냐는 아론의 지적을 듣고서는 그 내용을 6일분으로 축약하기로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소설도 있구나..."

 

- "... 나는 이 저승에 오는 망자들이 그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 원치 않습니다. 지옥의 혹형은 그래서 없어진 것입니다." 

성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그대는 그대에게 위협이 가해졌을 때 순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까?"

그 물음에 성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바라보는 염라대왕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 "한편 내 의견과는 별개로, 나는 이 일을 담당한 망자들끼리 합의한 결론이 있다면 그대로 진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설령 내 의견과 그 결론이 상충되었더라도 나는 지지하였을 것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난처했던 호연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 간신히 대답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권한을 위임하였고, 여러분은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 태양계에는 지구, 화성, 목성과 같은 큰 행성들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은 소행성들이 존재한다. 특히 화성과 목성 사이의 우주 공간에는 소행성대라고 불리는 공간이 존재해, 많은 소행성이 궤도를 이루어 태양을 공전하고 있었다. 일차 조사 대상은 소행성대의 소행성들이었다. 번호순으로 나열된 주요 소행성들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그중 대다수가 우주 방사선의 직격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방사선의 힘에 의해 표면의 먼지들이 떠오르며 반사도가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소행성대의 일부가 영향권 바깥에 있었다. 정상으로 보이는 소행성들의 현재 위치를 태양계 지도 위에 표시하자, 분명한 경계선이 나타났다. 소행성 번호 4번 베스타 Vesta는 영향권 밖으로 판단된 데 비해, 근처를 돌고 있는 9번 메티스 Metis는 영향권이었다. 

"이 경계선을 한계 지점 A로 명명합니다."

 

- 이차 조사 대상은 목성 궤도에 떠다니는 소행성들이었다. 거대한 가스 행성인 목성의 중력과 태양의 중력 사이에서 교묘한 균형을 이룬 소행성들이 목성의 공전 궤도상 라그랑주 점  Lagrangian Point에 몰려 있었는데, 이들을 '트로이 소행성군'이라고 불렀다. 트로이 소행성군은 다시 둘로 나뉘어, 목성보다 공전 궤도를 앞서가는 L4 라그랑주 지점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 캠프'로, 목성을 뒤따라가는 L5 라그랑주 지점의 것들을 '트로이 캠프'라 칭하고 있었다.  

 

- "일단 제공해 드릴 경전의 내용을 최대한 꼼꼼히 외우십시오. 그걸 잘 외우면서 저승길을 나서야 합니다. 외우면서 길을 떠난다, 그것 자체는 정말 잘하셨습니다."

량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영의 안내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시영은 머릿속을 더듬어, 저승을 건너는 요령을 어떻게 쉽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아주 별천지를 향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내가 잘 아는 어떤 마을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계속 걸어오시면 됩니다."

어디선가 쉬운 비유가 떠올라 시영은 떠오른 그대로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떠나실 때 '떠나고 있다'는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미련을 남기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 "먼저 서버에 대해서입니다. 식별 코드는 'DSN-2'와 'DDSN'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기계실 출입문에 봉인지가 붙어 있었습니다만, 방위고등연구 계획국 DARPA의 마크가 붙어 있었습니다."

"설마..."

피네건 박사는 신음했다. DARPA는 미군의 국방기술 연구기관이었다. 

 

- "아니, 전혀? 센터장이라고 숨기는 거 전혀 없어. 나도 이런 게 왜 우리 시설 안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네."

"정말입니까?"

약간의 불신을 담아 묻는 피네건 박사에게 최 박사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관리자가 DARPA라며. 나 같은 이민 가정 출신 아시안한테 정보가 흘러오겠어?"

반박하기 힘든 설명이었다. 피네건 박사는 백악관과 워싱턴에 자리 잡은 백인 남성 집단을 떠올렸다.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둥 이민자를 그만 받아야 한다는 둥 고함치는 이들이, 특별히 이민 가정 출신의 최 센터장을 우대해 뭔가를 자세히 알려 줬으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 일부러 기록물에 손을 대서라도, 다른 참여자들을 줄줄이 언급해 그 사이에 섞이는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불멸을 바랐을 뿐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게 의심을 이어 가면서도 호연은 그 의심이 자신의 마음속 분노로부터 자라난 몹쓸 잡초가 아닐지 계속 고민했다. 차라리 자신이 부끄러운 의심을 했고 아무도 큰 잘못을 한 게 아니길, 정상재의 변심 내지 개심을 믿었던 이전의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는 게, 그렇게나 무서우세요?"

 

-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당황했고, 그럴 리 없다는 억지에도 곧바로 수긍하고 싶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두려움에 꺾이고 싶지는 않았다. 

 

- "잠깐이면 돼."

하지만 예슬은 거듭 대화를 거절했다.

"그 잠깐이 어려운 거야."

 

- "그게... 그렇게 버거울 정도야?"

예슬은 곧바로 답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우상이고 미신이잖아."

 

- "그래요. 어서 와요. 오늘 기술적인 이야기를 좀 하게 될 거 같았는데 강수현 씨가 못 내려온다고 그러지 뭐예요. 그런데 그분이 왔어도 아마 전문가를 불러오라고 시켰을 것 같네요. 혹시 전공이?"

"천문학 박사과정 밟고 있었어요."

"세상에, 어쩌다가 그렇게 끔찍한 선택을 했담?"

자학적인 농담에 호연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최 박사가 종교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엄청나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첫인사 교환에서부터 자신이 제대로 믿어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1974년 푸에르토리코의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허큘리스 대성단 방향으로 발사된, 이른바 '아레시보 메시지'입니다."

당시 뛰어난 성능의 전파 망원경을 새로 건설한 천문학자들은 새 망원경의 성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우주 탐사 붐 속에서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위치, 생명의 원리, 인류 문명의 규모 등을 담은 그림 메시지를 만들었고, 이를 전파에 실어 별로 가득한 우주 저편의 성단을 향해 쏘아 보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화면에 나타나 있는 '아레시보 메시지'라고 불리는 그림이었다. 

 

- 아레시보 메시지는 가로 스물세 칸, 세로 일흔세 칸, 총 1,679 칸의 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파는 한 줄로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에 그림을 보내려면 그림의 가로 세로 길이를 함께 보내서 재배열하도록 해야만 했다. 이 메시지는 가로와 세로 길이를 각각 소수素數로 정의하였기 때문에, 메시지의 전체 길이를 알면 가로 세로 길이를 수학적으로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우주에서 이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수준의 문명은 비교적 쉽게 평면 그림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당대의 천문학자들이 함께 고민하여 만들어 낸 역작이었다.

"저희는 이 양식을 재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오직 그림만을 우주로 보내게 됩니다." 

 

- 호연 또한 난색을 표했다. 단지 그런 반응 또한 최 박사 입장에서는 이미 예상 범주 내였다.

"응, 그럴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정보 용량과 방법이 제한된 이유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의견을 전해 줄 사람들이 오셨으면 했어요."

최 박사는 특히 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연은 굳이 자신이 내려와야 했던 이유를 납득했다. 전달할 내용이 어느 정도 전달되었음에도 페레이라 박사가 고민하고 있자 최 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고로 너무 무리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말고요. 왜냐면 사후세계 분들이 아무 데이터도 안 주셔도 우리는 그냥 우리 다 죽었다는 메시지 하나 만들어서 보낼 거니까. 저기 두 번째 보이죠? 새로 쓸 이차 아레시보 메시지. 인류의 단말마."

부담을 덜어 주겠다는 의도였지만 자신들은 전혀 곤란할 게 없으니 알아서 잘 대응해 달라는 배수진처럼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남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예슬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문장을 읽어 나갔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 예슬은 멈추지 못하고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 예슬은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마음이 지극히 평온했기 때문이다. 울어야 할 이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마음에 가득하던 불안이 모두 사라지고 그 사이사이에 평화가 깃들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 눈물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 왜 하필 그 순간 성경이 손에서 미끄러져 나왔을까? 왜 하필 이 같은 문장을 보게 되었을까? 왜 그것을 읽고, 마음에 사무치도록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모든 것들이 우연이었을까?

 

- "아뇨. 그냥 다 같이 알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시영은 좀 더 자세히 다시 물어볼까 하다가 곧 예슬이 자신과는 다른 종교적 가치관을 연구해 왔음을 상기하고 말을 아꼈다. 포교 연구 그룹이 어떤 종교적 기적을 경험했을 거라고 짐작한 시영은 그대로 수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습니까. 닷새 뒤라는 날짜 또한 그렇게... '알게' 되신 겁니까?"

"네."

시영은 종교적 신비의 영역에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 사전에 저승사자들이 답사했던 길을 따라서 다시 세운광장 오른편의 골목으로 진입해 세운상가 아래를 통과했다. 말라붙은 청계천을 세운교에서 건넌 뒤 청계상가 밑을 통과해 을지로 방향으로 나아갔다. 

 

-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반신반의했다. 사후세계의 존재도, 염라대왕 운운하는 이야기들도, 오며 가며 출현하는 저승사자와 망자들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편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선의를 바라며 도움을 요청해 온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부탁을 들었다.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을 온전히 믿지 않고 때로는 강하게 의심하면서도, 그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려고 한 끝에 여기까지 이른 것이었다. 인영은 그들을 돕고 싶었다. 망치를 내리치며 인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물었다.

'하나님, 이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소리 없이 던진 그 질문이 인영의 마음속에서 마치 종소리처럼 거듭해 맴돌았다. 

자신은 과연 우상의 경전을 새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마저도 하늘에서 계획되어 땅에서 이루어지는 숱한 일들 중 하나인 것일까.  

 

- 인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조금 뒤면 알두스가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리라. 동이 튼 하늘은 아침답지 않게 어둡고, 현란한 오로라가 마치 물 위에 뜬 기름띠처럼 검푸른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지상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하늘이었다.

 

- 아쉽거나 아깝지는 않았다. 기록은 기억을 오래 남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은 기억이 기록을 의지해야 할 만큼 오래 살아 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작전을 마친 뒤의 이 풍경은,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잊기 어려울 것 같았다. 

 

- "제비뽑기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기회를 가지고 살아남을 거예요."

 

- 하지만 그런 직원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피네건 박사는 최 박사의 결론이 옳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제 적어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공정한 수단을 통해서라도 평등하지 않게 찾아왔을지 모르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이른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 "...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닥터 최. 단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배전반을 수동 조작할 수 있다면 거의 확실하게 동작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저는 정말 아쉬워서..."

아쉬움을 토로하던 그는 이내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코를 풀었다.

최 박사는 요란하게 우는 피터스버그의 어깨를 툭툭 쳐서 다독이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끝가지 챙길 테니까."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닥터 최."

눈물을 말 그대로 들이 삼키며 피터스버그는 의례적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피네건 박사도 으레 있는 감동적인 결려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니스 최 박사가 돌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로. 아까 자연의 뜻에 맡기자고 했는데, 우리가 식량이 고갈된다고 곧바로 다음날 죽는 건 아니잖아? 다들 최대한 버텨보자고. 나도 최대한 오래 살아 보려고 노력할 테니까."

피네건 박사도, 엔지니어 피터스버그도, 평소의 에니스 최 박사가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한없이 진지하면서 어디까지 짓궂은 것인지 모르는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네건 박사는 이 미끼를 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몇 초 정도 망설였다. 물어보면 최 박사는 또다시 엄청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 의도에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 진짜로 몇 달씩 식량 없이 살아남을 작정입니까?"

 

- "어... 요약하자면, 그래서 요가, 명상, 단식을 통해 살아남겠다 이 말입니까?"

최 박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피네건 박사는 최 박사가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경험이었다. 최 박사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던 피터스버그는 물론 모여든 여러 직원들은 헛웃음과 함께 유머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 박사는 웃으려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나 진지해? 누가 먼저 죽는지 내기할까? 책상머리에만 계속 붙어있던 우리 닥터들보다는 오래 살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닥터는 그야말로 책상머리에서 연구만 하던 박사들 이야기였지만 모여든 이들 중에는 의무실 의사도 있었다. 그는 최 박사에게 절규하듯이 말했다.

"닥터 최! 항상 충고하지만 유사 의학에 너무 지나치게 진지하세요!"

 

- 엘리시움 학술원 측은 예상대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들 이외의 사후세계 존재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소위 '동방 사후세계 정권의 각료'는 쉬이 거스르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로 비춰졌다. 수현은 등 뒤에 역사를 세워 놓고 고압적으로 행세하며 유럽인들로 구성된 엘리시움 학술원을 압박했다. 수현은 먼저 호연의 타협안을 철회하고, 정상재가 쓴 사사문을 그대로 집어넣으라고 요구했다. 난색을 표하는 편집위원들과의 한바탕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엘리시움 측의 관계자들과 데려간 역사가 몸싸움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결국 수현은 원하는 바를 얻어 냈다. 내용에 대한 지적에 동의하며 일보 후퇴하는 척하면서 분량만큼은 무조건 보존받아야겠다는 대안으로 다시 물러선 것이다.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오면 안 되었던 겁니까?"

장절한 외교적 말다툼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혜영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담당자였던 채호연 망자님이 분량 보존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이기도 했고,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우리 주장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협상만 하면 다 끝나는 일도 아니었고요." 

 

- "도대체가... 이미 죽은 영혼인데, 의식을 잃을 수도 있는 건가요?"

시영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합니다."

영혼은 본인에 대한 생각과 인식대로 느끼로 행동하게 된다. 숨이 찰 것 같은 길을 걸으면 숨이 차지만, 같은 길을 숨이 차지 않을 거라고 믿고 빠르게 나아가면 가뿐히 나아갈 수도 있다. 숨을 쉬지 않지만 숨이 막히기도 하고, 뛰지 않는 심장의 쿵쾅거림을 느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무엇도 느낄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보고 들은 것에 압도된다면, 생각 속에 잠겨 의식을 등지는 것도 가능하다.

 

- "그 말에도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상재의 얼굴이 한순간 안도감으로 환해졌다.

 

- "그리고 세상에 누구 하나 일리 없는 이유로 잘못을 저지르는 이는 없습니다."

상재의 표정은 곧장 굳어졌다. 그런 그에게 염라대왕은 물었다.

"정상재 망자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정당하다고 믿는다면 왜 허락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우물쭈물하며 그는 대답했다.

"... 허락을 구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새로이 글귀를 써 내릴 시간은 있었으나 허락을 구할 시간은 없었다는 것입니까?"

"이 정도는 사소하여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럼 그 사소한 일이 상대방에게 진정 보상이 되는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습니까?"

거듭해 묻는 염라대왕 앞에서 상재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염라대왕의 지적이 이어졌다.

"이름과 경과를 남김으로써 후대인들에게 기억되는 것이 보상이 될 것이라는 취지는 이해합니다. 모두가 그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믿은 것도 선해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진정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이라면 그 선행을 받을 이들과 상의하고 허락을 구했어야 마땅합니다."

 

-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전혀 동의한 적 없다고 단번에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하지만, 여기는 저승의 심판 자리였다. 정상재라는 망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정제된 말로 규탄해야 한다는 데 호연의 생각이 미쳤다. 

 

- 더 나아가서 죽어 저승에 온 모든 망자들에 비해서 자신들이 특별히 언급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정상재의 말처럼 '신'이 되고 '불멸'을 얻어 마땅한 존재인가? 

호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공로자 목록의 완성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목록 따위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영혼들 가운데 자의적으로 어떤 이들의 이름을 골라내 나열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었다. 

 

- 하지만 지금 호연은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저 악다구니를 흘려 넘길 수 있었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비록 죽은 뒤라고는 하지만 자기 힘으로 온전히 뭔가를 이루거나 바꿀 수 있음을 배웠고 섣불리 자신을 깎아내리며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 "그대가 남들을 가리켜 하는 비난은 전부 그대 자신을 드러내는 말에 다름없다. 그대야말로 위선자요, 그대야말로 가장 철없는 자다! 그대야말로 제 두려움을 남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으며, 그대야말로 타인을 모함하고 있으며, 그대야말로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그때그때 태도를 바꿔 대는 자가 아닌가!"

 

- 후련했다. 아주 속이 다 시원했다. 혼자서 먼 길 한 번 걸어와 보라지. 권력자가 아니라는 걸 느껴 보라지. 고생 좀 해 보라지. 하지만 그를 고생시키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 심판까지 끌고 왔어야 하는 일이었을까? 적당히 추궁하고 수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까? 그가 저승길을 걸어오며 개고생을 한다고, 호연 자신이 얻을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저걸 그냥 놔둬야 했을까. 저질러 놓은 짓에 대한 아무 책임도 안 지게 놔둘 수는 없지 않았나. 그 책임을 묻는 자신에게는 권력이 없었을까? 혹시 자신이 그룹 책임자로서의 권한을 휘둘러 그를 억지로 찍어 누른 것은 아닐까? 혹시 그 권력으로 그를 고발하는 대신 그를 용서하거나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도 충분히 억울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걸 듣기 위해서 자신이 좀 더 노력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 "잘하신 거예요."

"... 잘한 게 맞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호연에게 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하신 게 맞아요. 정당한 고발을 하셨고, 처분에 대해서는 염라대왕 폐하와 비서실장님의 결정을 신뢰하셔도 됩니다."

그러고는 조금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승 법정은 믿으셔도 괜찮아요. 못다 이룬 정의 구현이 전문인걸요."

 

- '이승이 살아남은 가해자들의 땅이라면 저승은 먼저 죽은 피해자들의 땅이다.' 

 

-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후에 떠나시는 길은 믿음에 따라 나뉘니까요."

그리고 혜진을 바라보며 확언했다. 

"하지만 제가 모셔 갈 틈은 없었습니다."

"모셔 가려고 오신 거였습니까."

씁쓸히 묻는 혜진에게 혜영은 긍정했다.

"네. 혹시라도 저희가 부탁드린 것 때문에 신앙을 인정받지 못하시는 처지가 되시면... 저희가 사죄드리는 마음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 그러면 오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라는 담당자의 말에도, 혜영은 쉬이 포기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 혹시나 했죠. 알겠습니다."

인영은 정말로 시왕저승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약간 실망스럽고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밖에는 없었다. 혜영은 본 적도 믿어 본 적도 없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의 영혼에 흠이 잡히지 않고 무사히 그가 바라던 천국으로 향했기를. 자신들과 함께했던 일이 그의 사후에 누가 되는 일이 없었기를. 그의 영혼에 합당한 위로와 영광이 가득하기를. 

 

- "닥터 채, 정말 커미티 안 해 줘도 되겠어요?"

호연은 아, 하고 깨달은 뒤 웃음을 터트렸다. 앞서도 이미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학위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죽은 호연에게 자신이 그 기회를 주고 싶다는, 절반 정도는 진담처럼 느껴지는 농담이었다. 

호연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제 와서 뭘요."

"그래도 그 고생한 게 있는데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겠어요?"

다시금 권하는 에니스 최 박사의 말에 호연은 새삼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고생한 걸 권위로 되돌려 받으려 하는 행동의 허무함을 정말 숱하게 겪을 수 있었던 지난 수십 일이었다. 호연은 다시금 최 박사에게 말했다.

"... 정말 필요 없어요. 학위가 있든 없든, 저는 그대로 저인걸요."

그 말을 들은 최 박사는 가장 즐겁고 기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멋지네요! 닥터 최, 드디어 박사학위라는 헛된 몽상으로부터 벗어나 니르바나에 이르렀군요? 나는 그렇게 못 했어요. 너무 좋은 선택이에요."

예전 같았으면 난처하고 떨떠름하게 웃어넘겼을 것 같은 농담이었지만 오늘 호연은 순수하게 마주 웃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 "오늘도 전력 공급 상태는 양호해. 생전에 연구원들이 남겨 놓은 수동 제어 매뉴얼을 절반 정도 믿고 나머지 절반은 오로지 내 감에 의존해서 배전량을 조절했는데 다행히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 이제는 별로 조절할 일도 없어 보이네. 누구한테 기도한 게 먹힌 걸까? 정신없이 하나님, 부처님, 군신 관운장에 나바호 토템까지 찾았던 것 같은데. 어디든 영험했으면 된 거겠지.

 

- "그래도 살아 있네. 사람 목숨 정말 질기다 진짜... 아, 이 영광을 로스앤젤레스 퍼시픽 요가 아카데미의 레오나르도 팜 선생님께 돌립니다. 그 광고판,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앞길이었어. 맞아, 거기였어. 응."

 

-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상쾌함과 돌이킬 수 없이 위태로운 감각이 온 영혼을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 발을 물속으로 내딛고 또 한 발을 내디디며 그는 점점 강물의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아무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저승 세계일까? 자신이 최초의 '염라'가 되어 삼도천을 넘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꿈인가?

죽음의 순간에 뇌가 만들어 내는 환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곳은 어디일까?

나는 과연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은 그럼 누구이고, 무엇인가?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좋다고 속삭이는 듯한 물살에 몸을 맡겼다. 

 

- 과학적 현상과 문화적 전통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 이야기에 맞추어 왜곡을 가하거나, 편의적으로 적용하거나, 완전히 창작한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 작품은 어떠한 새로운 지식을 배우거나 도출하는 데 있어서 최초 출처로 사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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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 속에 다루어진 시왕저승은 부분적으로 상충되는 여러 민담을 조합한 뒤 작품에서 다루기 편리한 방법으로 재조합 및 변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왕저승에는 본래 서천꽃밭이 존재하는 등 향기나 맛에 관련된 설화가 존재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하였습니다. 

 

- 본 작품에 등장하는 무속 신앙의 의례들은, 특히 무가의 경우, 가능한 한 자료를 참조하였으나 작품 내의 필요에 따라 활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변형, 개작, 조합한 부분들이 있는 창작의 결과물입니다. 특히 작품 내에서 언급된 '시왕굿 노래' 또한 이처럼 원전을 응용한 창작물이므로, 실제의 무속 신앙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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