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일루젼 2022. 6. 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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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 / 임홍빈

원제 : 走ることについて語るときに僕の語ること 
출판 : 문학사상 
출간 : 2009.01.05 


       

일독 후 발췌만 정리해두고 하루 정도를 묵혔다. 리뷰를 쓸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서이기도 했고, 조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이, 출간된 지 꽤 시일이 지난 이 책을, 직장 동료가 들고 출근하는 것을 보았다. 기묘한 내적 친밀감이 솟아났다. 

 

신체 활동만이 가지는 힘은 틀림없이 있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느껴지는 감각들. 그 중에서도 상대와 승패를 겨루는 승부적인 활동에 비해 혼자서 기록을 쌓아나가는 활동들은, 틀림없이 육체적이면서도 묘하게 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몰입감. 그것을 신체 활동 중에 감각하기 위해서는 고행에 가까울 만큼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야 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거의 매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사람. 그것이 생업이 아닌 사람. 나는, 약간의 존경심을 담아 그를 '기행가'라고 부르고 싶다. 

 

'러너스 하이'. 그러나 이 쾌감이 42킬로를 달리게 해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루키에게 '달린다'는 행위는 그의 표현처럼 일종의 정화 작업이며, 일상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이자 기반이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면역력을 키우는 행위이다. 즉, 자신을 닦고 마주하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속도가 아무리 느리더라도 '걸을 수는' 없으며,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묘비명을 남기고 싶은 것이리라.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건, 그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살아내고 있으므로. 

 

조깅을 몇 차례 시도했다가 포기한 전적이 있다. 내게 달리기란 그렇게 즐거운 체험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달려서 도착한 곳의 풍경,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을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딸림 과정 같은 것이었다. 내가 지구력을 가지고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활동은, 현재로서는 숨쉬기와 독서 정도인데...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신체 활동이 하나 이상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아마 달리기가 되지는 않겠지만, 하지 않으면 찌뿌둥하고 아쉬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름이 되길 바라본다. 모쪼록 그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견딜 수 있는 인내심도 함께 해주길.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달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손을 움직여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 대부분의 일반적인 러너는 "이번에는 이 정도 시간으로 달리자"라고, 미리 개인적 목표를 정해 레이스에 임한다. 그 시간 안에 달릴 수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뭔가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며, 만약 그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뭔가를 달성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된다. 만약 시간 내 달리지 못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실력을 발휘했다는 만족감이라든가, 다음 레이스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면, 또 뭔가 큰 발견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대체로 오랜 시간을 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깊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글쎄, 도대체 나는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확실히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즐거울 때는 어느 정도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앞에서도 썼듯이,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두서없이 떠올릴 때도 있다. 때때로(그런 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소설의 괜찮은 아이디어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 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 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해가 뜰 때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되도록 빨리 자도록 하자, 라고 정했다. 그것이 누구나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방식이었다. 이제 손님을 상대로 하는 장사는 그만두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되도록 만나지 말자. 그런 조촐한 사치가 적어도 당분간은 허용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나와 아내는 느끼고 있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나는 원래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7년간의 '열린 생활'에서 '닫힌 생활'로 크게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러한 열린 생활이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어느 기간 존재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많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 시기는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종합적인 교육 기간 같은 것이었고, 나에게 있어 진정한 학교였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었다. 학교라는 데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배운 후에는 나와야 하는 곳이다. 

 

- 하루를 통틀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대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이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중요한 일을 끝내버린다. 그 뒤의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잡무를 처리하거나 그다지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을 처리해 나간다. 해가 지면 느긋하게 지내며 더 이상 일은 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며 편히 쉬면서 되도록 빨리 잠자리에 든다. 대체로 이런 패턴으로 오늘날까지 매일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덕택에 20년 정도 매우 효율성 있게 잘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나이트 라이프 같은 것은 거의 없어져버리고, 사람들과의 교류는 틀림없이 나빠진다. 화를 내는 사람도 생긴다. 어딘가를 가자, 뭔가를 하자, 는 권유가 있어도 전부 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

 

- 제대로 움직이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더디다. 그 대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꽤 긴 시간 동안 무리 없이 무난한 상태로 계속 움직일 수 있다. 전형적인 '장거리형 근육'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 단거리에는 적합지 않다. 단거리 경기라면 내 근육의 엔진이 걸리기 시작할 때쯤에는 레이스는 벌써 끝나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근육의 특성은, 전문적인 것은 잘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근육의 특성은 그대로 내 정신적인 특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생각은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특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반대로 정신의 특성이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방법이 작가에게 유일한, 옳은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는 여러 종류의 문학이 있듯이 작가도 여러 종류의 작가가 있다. 그리고 그들 작가들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다루는 것도 다르고, 목표하는 곳도 다르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있어서 유일한 올바른 방법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해달라고 한다면 '기초 체력'의 강화는, 좀 더 큰 규모의 창조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은 해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다(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쪽이 훨씬 좋다), 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무척 평범한 견해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듯,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열심히 하는 만큼의(어떤 경우에는 지나치리만큼의) 가치가 있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 19세기의 영국 풍경화에 나올 법한 의미심장한 모양의 구름이 두껍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바람은 전혀 없다. 내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저 묵묵히 결승점을 향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풍경 속에서 나는 한없이 조용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뱉는다. 호흡소리에는 흐트러짐을 들을 수 없다. 공기는 매우 온화하게 내 안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나의 말 없는 심장은 일정한 속도로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고 있다. 내 폐는 부지런한 일꾼의 풀무처럼 규칙적으로 새로운 산소를 체내로 거두어들인다. 나는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문제없이 가동되고 있다. 연도의 사람들이 "힘내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라고 큰 소리로 외쳐준다. 그 소리는 투명한 바람이 되어 내 몸속에 들어와 그냥 지나가 버린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저 멀리까지 그대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매우 고요하고 고즈넉한 심정이었다. 의식 같은 것은 그처럼 별로 대단한 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있어 의식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존재로 다가온다. 의식이 없는 곳에 주체적인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 같은 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라고. 
 
- 자랑스럽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성취감 같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듯이 가슴속에 북받쳐 오른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 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기쁨보다는 안도감 쪽이 오히려 강했는지도 모른다.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 앞에서도 썼지만,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 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럴 때에는 그저 가설을 몇 가지 제시할 수밖에 없다. 혹은 의문 그 자체를 차례차례 부연 해갈 수밖에 없다. 혹은 그 의문이 지닌 구조를 뭔가 다른 것과 구조적으로 맞대어 비교하든지.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 랜덤하우스에서 내 책을 담당하고 있는 리즈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그녀도 뉴욕 시티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내용이다. 그녀로서는 처음 달리는 마라톤 풀코스이다. "즐겁게 달리세요! Have a good time!"라고 답장 메일을 보낸다. 그렇다, 마라톤 레이스는 즐기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몇만 명의 사람들이 42킬로미터를 달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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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파리의 한 호텔방에 드러누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를 읽다 보니, 마침 마라톤 러너에 관한 특집 기사가 눈에 띄었다. 여러 유명한 마라토너들을 인터뷰해서, 레이스 도중에 자신을 질타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어떤 만트라 mantra(원뜻은 불교 힌두교의 진언眞言. 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해서 외우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었다.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있자니까, 모두 정말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42.195킬로미터를 달리고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풀 마라톤이라는 것은 가혹한 경기인 것이다. 만트라라도 부르짖지 않으면 하지 못할 힘든 일이다. 

 

- 그중에 한 사람은 형(그 사람도 마라토너)으로부터 배운 문구를, 마라톤을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머릿속에서 되뇐다고 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게 그의 만트라였다. 정확한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극히 간단하게 번역하면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가 된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 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케임브리지 사람들은 내가 8월에는 하와이에서 지낸다고 하면 "여름인데 일부러 그런 더운 데로 가다니 정신이 이상한 거 아냐?" 하며 한결같이 놀란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북동쪽에서 쉬지 않고 불어오는 무역풍이 하와이의 여름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고 있는가를. 아보카도의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를 하거나 문득 생각이 날 때면 그대로 남태평양의 후미진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갈 수 있는 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한 기분으로 가득 차게 해 주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달리는 거리가 늘어감에 따라서 체중도 줄어갔다. 2개월 반 만에 7파운드가 줄고, 배 둘레에 조금씩 붙기 시작한 군살도 빠졌다. 7파운드라고 하면 3킬로그램 정도 된다. 정육점에 가서 3킬로그램의 고기를 사서 손에 들고 집까지 걸어 돌아오는 걸 상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무게를 몸에 붙이고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꽤 복잡한 기분이 든다. 보스턴에서의 생활에는 생맥주(사무엘 아담스의 서머 에일 Summer Ale)와 던킨 도너츠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래도 매일의 집요한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 나와 같은 나이에 접어든 사람이 새삼스럽게 이런 것을 쓴다는 것이 다소 어리석은 일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매일 1시간이나 2시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혼자 달리고 있어도, 4시간이나 5시간을 혼자 책상에 앉아 묵묵히 글을 쓰고 있어도 별로 고통스럽다거나 지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내 안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말없이 책을 읽거나,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쪽을 좋아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 그래도 젊어서 결혼을 하고 나서는(결혼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음식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타인과 어울리는 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몸소 배웠다. 그 결과 다소 일그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나, 사회성 같은 것도 서서히 몸에 익혀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20대의 10년 동안 나의 세계관은 적지 않게 변화했고, 인간적으로도 얼마간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온갖 경쟁과 다툼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면서, 살아남기 위한 실전적인 요령 같은 것을 터득해왔던 것이다. 이 10년간의 그 나름대로 힘든 생활 체험이 없었다면, 소설 같은 걸 쓰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고, 또 쓰려고 생각해도 틀림없이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그다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 나는 지금 50대 후반이다. 21세기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와서, 내가 정말로 50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젊었을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언젠가 21세기가 오고, (아무런 일이 없다면) 그땐 내가 50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젊었을 때의 나에게 있어 5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을 정도로 곤란한 일이었다. 믹 재거는 젊었을 때 "마흔다섯 살이 되어 <새티스팩션 satisfaction>을 부르고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60세를 넘긴 현재도 <새티스팩션>을 계속 부르고 있다. 그런 것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웃지 못한다. 젊은 날의 믹 재거는 45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젊은 날의 나에게도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믹 재거를 비웃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비웃을 수 없다. 나는 다행히 젊고 유명한 록 싱어는 아니었다. 내가 그 당시 아무리 어리석은 말을 했다고 해도,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인용당할 리도 만무하다. 그건 그저 그뿐인 일이 아닐까? 

- 그리고 현재, 나는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거기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나 스스로도 잘 판단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각별히 문제 삼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생각된다. 나에게 있어 혹은 다른 누구에게 있어서도 아마 그렇겠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 나로서는 자질구레한 판단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피할 수 없는 여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아마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 (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 지금도, 42킬로를 달리고 나서 내가 느끼는 것은, 처음 그리스에서 마라톤까지 달려갔던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마라톤을 할 때마다 대체로 여기에 쓴 것과 같은 심적 프로세스를 되풀이하고 있다.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 힘들다. 

 

- 소설가로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그러나 재능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그 양이나 질을 그 소유자가 잘 컨트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양이 부족하니까 약간 양을 늘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절약해서 조금씩 꺼내 가능한 한 오래 쓰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터져 나오고 싶을 때 저절로 분출해버리고, 나올 만큼 다 나와 고갈되면 그것으로 책 한 권이 끝나는 것이다. 슈베르트나 모차르트같이, 또는 어느 시인이나 록 싱어처럼 풍부한 재능을 단기간에 기세 좋게 소진하고, 드라마틱하게 요절해서 아름다운 전설이 되는 삶도 확실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별로 참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나는 평소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아침나절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 책상에 앉아서 내가 쓰고 있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않는다. 설사 풍부한 재능이 있더라도, 아무리 머릿속에 소설적인 아이디어가 충만해 있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독한 충치의 통증이 계속된다면 그 작가는 아마 아무것도 쓸 수 없지 않을까? 집중력이 격심한 통증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계속 써나가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 만약 이와 같은 거장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문학의 역사는 지금처럼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든다면, 셰익스피어, 발자크, 디킨스... 그러나 거장들은 어디까지나 거장들이다. 그들은 뭐라고 해도 예외적인, 신화적인 존재들이다. 거장이 될 수 없는 세상 대부분의 작가들(물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은 많든 적든 재능의 절대량의 부족분을 각자 나름대로 연구하고 노력해서 여러 측면에서 보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소설을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써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방향에서 자신을 보강해가느냐 하는 것이 각자 작가의 개성이 되고 특징이 된다.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 나의 맥박은 보통 1분 동안 오십 번 정도밖에 뛰지 않는다. 꽤 느린 편이라고 생각한다(지난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딴 다카하시 나오코 씨는 서른다섯 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해서 30분쯤 되면 그것이 일흔 번 가까이까지 올라간다. 전력으로 달린 직후에는 백 번 가까이 된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보통 사람과 같은 정도의 맥박 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도 확실히 '장거리형' 체질이다. 나는 매일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맥박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긴 거리를 달린다고 하는 기능에 맞춰 신체가 맥박 수를 조정한 것이다. 처음부터 맥박이 빠르고 그것이 거리를 달려감에 따라 점점 올라간다면, 심장은 바로 파열해버린다. 미국의 병원에 가면, 우선 간호사에 의한 예비 진단과 같은 절차가 있어서 맥박을 재는데 언제나 "아, 당신은 러너군요"라는 말을 듣는다. 장거리 주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두 비슷한 맥박 수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 어찌 됐든 그럭저럭 이 고통에 찬 20킬로를 이를 악물고 견뎠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힘든 고비를 넘겼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일렀다. 거의 그것만 생각하면서 참았다. 만약 내가 피도 살도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허물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확실히 여기 있다. 그에 따라 자기라고 하는 의식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순간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은 이른바 '편의적인 형식'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것은 기묘한 사고방식이며 기묘한 감각이었다. 의식이 있는 것이 의식을 부정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무튼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기적인 장소로 몰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 달리 연명할 길이 없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정도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 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기 위한 휴식은 착실하게 취했다. 그러나 걷지는 않는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어떻게든 계속 달리는 사이에, 75킬로 근처에서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갔다. 그런 감각이 있었다. '빠져나갔다'라는 말 이외에 그럴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돌벽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저쪽으로 몸이 통과해버렸던 것이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정확한 시점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저편으로 나는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아, 이렇게 해서 빠져나가는구나' 하고 그대로 잘 납득했다. 그럴듯한 논리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나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빠져나갔다'라고 하는 사실만은 납득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아무것도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라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라는 말이다. 나타난 흐름을 자동적으로 어렵사리 계속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거기에 몸을 맡겨놓고 있으면 어떤 힘이 나를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끌어주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계속 달리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 무렵에는 피로하다고 하는 것은 내게 그다지 중대한 문제는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 피로에 지쳐 있다는 것이 늘 그런 상태'라고 하는, 이른바 상태로서 내 안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들끓고 있던 근육의 혁명 의회도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더 이상 누구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있으면 마지막 단계쯤에 일분일초라도 빨리 골인해서, 아무튼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그런 건 추호도 생각나지 않았다.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꽤 철학적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철학적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말이 아닌 오직 신체를 통한 실감으로서, 말하자면 포괄적으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 설상가상으로 보일러가 갑자기 고장이 나서 온수와 난방이 완전히 중단되어 버렸다. 그뿐이 아니다. 복도의 화재 경보 센서에 문제가 있는 듯 계속해서 경보음이 웽웽 울려 퍼지고 있다. 아무튼 매일이 어수선하고 소란스럽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하버드 스퀘어 근처에 위치해 대학 사무실에도 걸어갈 수 있어 아주 편리하지만,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 시기와 우연히 겹치게 된 것이 불운이었다. 하지만 불평만 늘어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고, 마라톤도 가까워지고 있다. 적어도 무릎의 트러블은 진정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뭐니 뭐니 해도 희소식이다.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자. 

- 10월 20일, 비와 다리의 이상 등으로 나흘쯤 달리기를 쉰 다음, 오랜만에 달린다. 오후, 기온이 조금 올라간 이후에 따뜻한 복장을 하고 밖에서 40분쯤 천천히 달려본다. 고맙게도 무릎에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달리기 시작해서, 상태를 보아가며 서서히 스피드를 올려 나간다. 괜찮다. 발도 무릎도 뒤꿈치도 이제는 문제없이 잘 움직인다.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무튼 레이스에 출장해서 완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그리고 레이스를 즐기는 것.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내 목표다. 맑게 갠 날이 사흘 동안 계속되고, 그 덕분에 지붕의 방수 공사도 겨우 끝났다. 공사 감독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스위스에서 왔다는 키가 큰 청년)가 "사흘 동안 좋은 날씨가 계속되면 어떻게든 방수 공사는 완료될 텐데..."라며 하늘을 보면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맑게 갠 날이 사흘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더 이상 비가 샐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보일러도 수리가 끝나고 따뜻한 물도 펑펑 나온다. 간신히 따뜻한 샤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실 보일러 공사 때문에 막혀 있던 하수구 뚫리고, 세탁기와 건조기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일부터 실내 난방도 들어온다고 한다. 암울한 나날이었지만 이제 대부분 무릎의 상태를 포함해서-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리뷰자 주 : 상황과 상태의 공조.)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안감은 떨쳐낼 수 없다. 한순간 내 눈앞을 스쳐간 검은 그림자는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것은 지금도 이 몸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면서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큰 저택에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교활한 도둑처럼, 나는 내 몸의 내부를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본다.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의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미로인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또 하나의 미로인 것이다. 도처에 어둠이 있고, 도처에 사각死角이 있다. 도처에 무언의 암시가 있고, 도처에 이중성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경험과 본능뿐이다.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뭔가를 더 생각해본들 소용없다. 이제는 당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능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딱 한마디, '상상하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브루클린에서, 할렘에서, 미드타운으로, 수만 명의 주자들과 함께 뉴욕의 거리를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을, 몇 개인지 모를 거대한 강철의 현수교를 내가 넘어가고 있는 것을 번잡한 센트럴파크 사우스를 따라 달리면서 결승점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의 기분을, 레이스를 완주한 후에 먹으러 가는 호텔 근처의 고풍스런 스테이크 하우스를. 그런 광경은 온몸에 조용한 활력을 가져다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침묵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둔다.  

 

- 이제부터 고백하겠다. 나는 대량으로 LP 레코드를 샀다. 보스턴 근방에는 양질의 중고 레코드 가게가 아직도 많이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뉴욕이나 메인 주의 레코드 가게까지 다리품을 팔았다. 산 것은 70퍼센트 정도가 재즈이고, 그 밖에는 대체로 클래식 음악, 그리고 약간의 록, 나는 오래된 LP를 수집하는 것에 관한 한(아니, 무척) 열성적인 인간인 것이다. 그만큼의 레코드를 일본까지 운반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작업이었다. 현재 우리 집에 있는 레코드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다. 세어본 적도 없고, 감히 그런 무서운 일을 하려는 마음조차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열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무척 많은 수의 레코드를 사 모았고, 무척 많은 수의 레코드를 처분해왔다. 그 변화가 너무 격렬해서, 실제로 얼마나 있는지 그 수를 여간해서 파악할 수 없다. 그것들은 내게 왔다가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 총수량은 의심의 여지없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레코드를 내가 갖고 있는가, 와 같은 그런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수량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몇 장 정도의 레코드가 있느냐고 질문받으면, "무척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자세 교정을 위해서 몇 사람인가 수영 코치의 지도를 받았지만, 여간해서 만족할 만한 사람과는 만날 수 없었다. 세상에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수영하는 법을 요령 있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이 내 실감이었다.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만(적어도 나로서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수영법을 가르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것 같다. 아니, 수영이나 소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수순으로 정해진 말을 써서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있어도, 상대를 보고 상대의 능력이나 경향에 맞춰서 자신의 언어로 어떤 사물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많지 않다, 라고 할까.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 어깨 돌리는 법만 집요하게, 아주 싫증이 날 정도로 반복시킨다. 어깨 돌리는 법 연습만으로 하루가 끝날 때도 있다. 이건 상당히 피곤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품 조각이 전부 조립되어 전체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거기서 처음으로 개별 부품의 기능을 알 수 있게 된다. 밤이 새고 하늘이 밝아지면, 그때까지는 그저 뿌옇게밖에 보이지 않던 집의 지붕 모양이나 색깔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과 같다.

 

- 단조롭고 지루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일체가 되면 멋진 리듬 머신이 탄생한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집요하고 엄격하고 그리고 참을성 있게 개별 파트의 나사못을 조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 그런 의미에 있어서 무라카미 트라이애슬론은 실로 안성맞춤의 대회인 것이다. 참가 인원도 그렇게 많지 않고(대략 삼백 명에서 사백 명 정도다), 대회 운영도 거창하지 않다. 작은 지방 도시의 수수한 트라이애슬론 대회이다. 마을 사람들도 따뜻하게 응원해준다. 지나치게 떠들썩하지 않고, 느긋한 분위기가 내 취향에 맞는다. 대회 자체와는 관계가 없지만 온천물이 풍부하게 넘치는 온천관도 있고, 음식도 맛있고, 지역 특산주(특히 시메하리쓰루')도 맛있다. 레이스에 참가하는 사이에 현지에 점점 알게 된 사람들도 늘어났다. 도쿄에서 일부러 응원하러 와주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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