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지훈]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 17만 유튜버 '아는 변호사'의 결혼 이혼 실전 문답

일루젼 2022. 6. 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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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지훈
출판 : 21세기북스 
출간 : 2021.03.10 


       

저자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이기 때문일까? 같은 결혼과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최유나 변호사의 <우리 이만 헤어져요>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결혼하기 전까지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오다가 갑작스레 '여성'으로서의 삶을 요구받게 되며 겪은 혼란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그의 어조가 서글펐다. 나는 여전히 내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과거 어느 시점의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상황이 변하고 사람이 변했므로, 당시에 옳았던 것이 이제는 옳지 않을 수 있다.

 

매순간 깊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가장 중심에 두고 적합한 선택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실로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행위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 가장 옳은 선택이 번복이라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더라도 미래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힘들어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더 큰 실수가 아닐까?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내 경우에는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이것을 대운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살아가며 쌓인 경험치가 체득적 감각이 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변화한다.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한다. 그것들을 처음 접했을 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방식인 천성이 유지될 뿐이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30대의 나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겨우 2-30년의 경험을 통해 선택한 배우자와 몇십 년을 함께 한다면, 관계성에 변화가 없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 시기에 가장 적절한 짝이었던 사람이, 다음 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변화는 나쁜 쪽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장과 성숙 또한 변화다. 사람은 제각기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에 따라 살아가게 되므로, 특정 시기에 더이상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을 때에는 관계성을 변화하는 것이 서로에게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배우자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절대로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그 관념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자. 

 

물론 서로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함께 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서로의 성장 목표가 유사한 흐름이고 각자가 충분히 좋은 사람들이라는 전제 조건 하에 기대해 볼 수 있는 확률이다. 이미 틀어졌는데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더 나은 선택지가 생길 가능성을 거부하는 일은 피하도록 하자. 상대가 나와 잘 맞는지를 알아나가는 과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는 단호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와, 자신이 그것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잘 숙고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형태의 삶을 그려나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매 순간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결정은 언제라도 번복될 수 있다. 다만 법적인 결정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인 것이다.

 

"북극성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다른 별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는 인용구가 인상 깊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행복은 없다. 각자가 자신의 중심을 찾아갈 때에, 모든 선택의 중심에 확고한 '지기(知己)'가 있을 때에 보다 '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그대를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그리고 불사의 것도, 비불사의 것도 아닌
존재로 창조하였나니

그럼으로써 그대를
그대 자신의 의지와 명예에 따라 자유롭게
그대 자신의 창조자요 건설자가 되게 함이니라.

오로지 그대에게만
우리는
그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거한
성장과 발전을 주었도다.

그대는
하나의 우주적 생명의 싹을
그대 속에 간직하고 있나니라.

-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 30세에 결혼을 했으며, 37세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은 저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진정한 '나'로 살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말입니다. 저의 30대는 시작부터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20대에 치열하게 공부해서 고시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었으니 당연히 안정적인 30대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저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버렸습니다. 사실 저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 생물학적인 나이와 삶에 대한 통찰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흔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불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압도되어 있던 저는 현재를 살 수 없는 상태, 즉 심각한 우울증의 터널에 갇혔습니다. 실패를 만회할 길이 없던 저는 이제 그만 삶을 끝내겠다는 생각과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10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분노에 차 있던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과거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왜 결혼을 했지?'라는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아, 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맞아 사실 나는 이런 걸 싫어했지',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 저는 이제껏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철저하게 만들어진 나'를 깨부술 수 있었고, 비로소 가장 솔직한 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내가 없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이제라도 나로 살 것인가? 선택은 간단했습니다. 

 

-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를 해본 적도 없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삶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외로운 이유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외롭다, 안정을 찾고 싶다는 등의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결혼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 동반자를 만났다면 이제 결정할 일은 법률혼에 대한 선택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법률혼, 사실혼, 동거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두 사람만의 전혀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법률혼을 한다는 것은 두 사람에게 법이 강제하는 권리와 의무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관계를 법이 규율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혼인신고는 그런 의미가 있는 법률 행위입니다. 우리 민법은 법률상 부부에게 동거, 부양, 협조, 정조의무를 부여하고 부부에게 각각 일상 가사 대리권을 발생시킵니다. 즉 부부에게는 일상적인 공동생활을 위한 법률상 대리권이 생기고, 그로 인한 채무에 대해서는 연대하여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의적인 책임이 아니라 법적인 책임입니다. 
 

- 법률혼이 해소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인데, 바로 사망과 이혼입니다. 결혼은 싫어졌다고 해서 중간에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망과 이혼이 아니면 혼인 계약을 해지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혼 시에는 재산 분할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도 뒤따릅니다. 이와 같이 민법은 법률혼에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과 같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RPG 게임을 할 때도 먼저 규칙을 이해하기 위해 공략집을 공부하는데, 심지어 여러 가지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는 법률혼을 결정하면서 게임의 규칙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면 그 결혼은 이미 실패가 예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제도이고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첫째, '나를 세우고 내 인생을 살아갈 것', 둘째, '내가 바로 선 후에 동반자를 찾을 것', 셋째, '가족의 형태를 결정할 것'입니다. 

- 사람들은 조금 친해지면 버릇이 없어지고 함부로 대하기 십상인데 안평중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가 안평중을 '교제를 잘한 사람'으로 평가한 근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판단의 근거를 면밀히 살피지 않고 막연한 느낌, 기대, 평판 등에 근거해 섣불리 사람을 평가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판단의 근거를 면밀히 살피기란 어렵고 힘든 일이며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오로지 나의 기대와 희망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평가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의 사사로운 말과 행동을 살피고,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관찰하며,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인지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기사(省其私)와 시·관·찰(視觀察)로 연결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더 알아보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 지인(知人)의 첫 단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 태도, 낯빛, 습관 등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살피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를 관찰(觀察)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표면적으로 보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상대방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진심인지 고찰하는 것입니다. 고찰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관찰보다 더욱 심화된 단계의 지인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있는 곳,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는 자신을 숨기고 꾸미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좋은 말과 행동을 할 때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즐거워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세세하게 살피는 '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위와 같이 3단계를 거쳐 사람을 세세하게 살펴야만 비로소 상대방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가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가지고 있나요? 덕과 재를 겸비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면 먼저 그런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연습하십시오. 여러분과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상대방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나요? 그 사람은 여러분이 각자의 기준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지인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사로운 욕심입니다. 상대방의 외적인 조건, 단편적인 상황에 혹하거나 욕심에 눈이 멀면 명명백백한 것도 보이지 않아 결국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사기를 당하는 메커니즘이 이와 같습니다. 지인은 공적인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 큰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사람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지인의 툴을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 배우자를 고를 때의 마땅한 자세는 바로 '문(問)'입니다. 우리는 묻는 행위를 통해 상대방이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상대방이나 어떤 상황에 대한 궁금증, 의혹이 있다면 반드시 물어보십시오. 무턱대고 좋은 의도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에이, 설마 그런 뜻은 아니겠지. '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 거야'라며 상대방의 행동을 무조건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는 의미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성숙하다는 것은 물리적인 나이를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잘 물어볼 수 없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그것을 감정과 분리해 이성적인 질문으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통찰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잘 질문한다는 것은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나갈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황에 맞게 잘 질문하지 못한다면 착해서도 아니고 예의가 있어서도 아니며 그저 미숙한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닙니다. 

- 질문을 했다면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십시오. 상대방의 사사로운 말과 행동을 세밀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기사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한 질문을 문제점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냥 무시해버리고 마는지, 기분 나빠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하는지, 회피하는지 등을 살피세요.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상대방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대책을 찾기 위한 후속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과 절대로 결혼하지 마세요. 

 

- 여러분이 자주 하는 실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지 않고 '내가 잘하면 되지', '결혼할 사이인데 뭘 그런 걸 물어봐', '잘하겠지'라며 눈앞의 문제들을 회피합니다. 내가 잘한다는 것은 공통의 인식 위에 함께 노력할 때 가능한 문제 해결방법입니다. 상대방은 자신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네가 문제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노력한다는 말입니까. 상대방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질문하는 과정이 귀찮다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회피해버린다면 작은 문제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는 이혼하거나 나를 죽이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결말을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묻고 살피는 성숙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 우습게도 저는 29세에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대한민국의 '여성'이라는 사실과 드디어 여자의 일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여성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에 해당하니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타적'인 것은 좋은 것이니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무 자르듯이 그렇게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성질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이기적이고 어떤 때는 이타적이며, 어떤 때는 게으르고 어떤 때는 부지런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이기적인 게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나쁜 사람입니다. 모두가 나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두가 나쁘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고 충분히 이기적으로 선택하세요. 

-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남들이 보기에 착하다고 평가받는 선택을 할까요? 누군가가 착한 결정을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따지기가 싫은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필수 능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니라 사리에 맞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리에 맞게 생각한 후 선택을 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착한 결정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선택을 할 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또 사리에 맞게 생각할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은 해야 하니 그냥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걸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과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며, 이런 착함을 도선(徒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헛되이 착해서 결국 조용히 조직을 망칩니다. 

- 파혼을 결정한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과 감정적인 것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파혼 이유 중 '내가 결혼하기 싫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그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파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변의 불편한 시선과 오해조차도 날려버릴 수 있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파혼을 하지 못할 테고, 용케 파혼을 했더라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후회와 괴로움으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파혼의 판단이 섰다면 하지 마세요, 그 결혼. 

- 어느 순간부터 그 자체로 지켜내야 하는 인생의 신성한 목표로 변질되고, 이혼은 무책임과 실패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러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을 참아내고, 이것이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답게 살기 위한 결혼을 해야 하고, 나답게 살기 위한 이혼을 해야 합니다. 결혼도 이혼도 나답게 살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나답게 살 수 있을 때 나는 가장 이타적일 수 있고, 비로소 내 삶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허구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신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됩니다. 이혼 사유를 법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그 후의 문제입니다. 

- A, B, C, D는 각각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봐 미안해서, 이혼 자녀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질까 봐 두려워서, 아이가 정서적으로 결핍을 느낄까 봐, 자기 아이를 이혼 가정의 자녀와 못 놀게 하겠다는 친구의 말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파탄 났는데도 이와 유사한 걱정과 근심으로 이혼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E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결혼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딸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딸의 책상을 정리하다가 딸이 자신처럼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 친구와의 관계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희생하며 살아온 이유가 오로지 딸을 위해서였는데,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 F는 항상 권위적인 남편에게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혼이 났습니다. 그래도 어린 아들을 위해서 참았습니다. 한 번은 가족끼리 외출을 하고 온 뒤 주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이유 없이 남편에게 폭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뒷좌석에는 어린 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망연자실한 엄마에게 '엄마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생각해 봐' 하더니 차에서 내려 아빠를 따라 가버렸습니다. 아직 사리분별이 없는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는 매일 혼나는 엄마, 잘못하는 엄마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엄마가 잘못해서 아빠가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부모는 건강하게 바로 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부모입니다. 사실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것은 회피입니다. 지금의 불화를 직면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압감으로부터의 회피, 이혼 후에 맞서야 할 두려움으로부터의 회피입니다.   

 

- 그리고 자신의 회피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공포를 만들어냅니다. 이혼 후의 주홍 글씨, 아이의 결핍, 더 나아가 자신의 자녀를 이혼 가정의 아이와 못 놀게 하겠다는 친구의 상상까지 동원합니다. 혹여나 이혼을 결정하는 데 자녀의 의사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아직 사리분별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입니다. 아이의 의사를 묻고 이에 따라 이혼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과 불도 구분할 줄 모르는 어린 자녀에게 인생의 중대한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도 그 아이에게 묻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혼의 토대가 된 엄마 아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사실 그럴 만한 통찰력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선택할 뿐입니다. 나이가 어린 자녀일수록 이런 모습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내가 그때 이혼하지 않은 건 너 때문이야',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는데', 부모로서 이보다 더 무책임한 말은 없습니다. 

-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평가의 핵심은 관찰에 있습니다. 관찰은 '의문(疑問)'을 전제로 합니다. 즉 문제 제기를 하고 그 사람의 말과 그 말에 맞는 행동이 있는지를 살피며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착한 폴라는 '의문'을 '의심'이라 생각하고 그레고리를 전혀 관찰하지 않습니다. 
 

- 고통스럽기는 해도 이미 익숙해진 고통 속에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편합니다. 하지만 이혼은 새로운 고통입니다. 똑같은 고통이지만 새로운 고통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도전입니다. 이혼은 끝이 아니기 때문에 이혼 후에 펼쳐질 삶에 대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 여러분의 삶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을 때 나를 비난할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권위 따위는 그냥 버리십시오.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영향받지 마십시오. 그리고 문제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십시오. 모든 문제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함부로 죄책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모든 권위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나라는 사람을 깊게 들여다볼 기회가 찾아옵니다. 

 

- 그런데 반대로 이혼을 안 하면 그 삶은 성공일까요? 여기서의 성공은 무엇일까요? 가정을 유지했다는 점일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가정을 유지하려고 하나요? 가정을 유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상담 사례처럼 아이들도 남편도 나도 더 이상 가정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가정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문제가 있는 가정을 깨지 못하고 그 형태만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 더 큰 실패입니다. 이혼에는 새로운 시작과 성장하는 내가 뒤따르지만, 깨지 못해 유지되는 가정에는 예견된 절망과 거기에 순응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절망을 참을 수 있습니까?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의합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패를 맞게 되는 순간,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비극이 생기는 거야', '왜 이렇게 나는 운이 없을까', '다른 사람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해'라며 현실을 부인하고 원망하나요? 

 

- 이혼 후 너무 우울해서 죽을 것만 같은가요? 우울하다고 하면 보통 전문가들이 어떻게 조언해주나요? 아마도 다음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해줄 것입니다. 첫째, 규칙적인 생활을 해라. 둘째, 잠이 안 오면 억지로 누워 있지 말고 책을 읽거나 잠을 유도할 수 있는 잔잔한 활동을 해라. 셋째, 운동을 해라. 우리가 상식으로 다 알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우울증이 극복될까요? 깊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입니다. 간단한 운동조차도 몰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조언은 경미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깊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 아닙니다.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 우울증은 이혼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삶에 내가 없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겪는 우울증은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찾아왔을 것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후회와 걱정 이 두 가지 감정뿐입니다. 후회는 분노와 원망으로, 걱정은 공포로 발전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현재를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과거에 대해 후회한다는 것은 나의 머릿속이 항상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 주변의 누군가가 어떤 조언을 해줬더라면', '얘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무한 반복됩니다. 과거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치미는 것입니다. 후회와 화가 뒤섞여 나의 내면은 깊은 우울로 가득 찹니다. 

 

-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신을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뇌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 잠시라도 뇌를 쉬게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타임머신처럼, 무한궤도처럼 과거의 시간이 반복됩니다. 이와 같이 우울증이라는 터널에 갇힌 사람은 생각의 고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지금 이 거대한 실패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무리 미래를 살아갈 힘을 모으려고 애쓰지만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흩어져버립니다. 새롭게 쌓아보려 해도 모래성은 이내 무너지고 맙니다. 나의 뇌는 쉬지 않고 일하지만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있으며 정작 미래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못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미래가 다가오는 것 그 자체가 공포입니다. 

 

- 우울증이라는 터널에 갇히면 칠흑 같은 어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압도당한 나머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우선은 내가 터널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 자체를 부인하면 안 됩니다. '아, 내가 터널에 빠졌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꾸밈없는 가장 솔직한 나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자꾸만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애써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십시오. 

 

-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과거 특정 시점에 대한 반복적인 후회에 빠져 있다면 아마도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 모든 사람이 터널에 갇히진 않습니다. 여러분이 터널에 갇혔다면 그것은 지금껏 살아온 내가 아닌 삶을 죽여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여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Karl Augustus Menninger)의 말처럼 인생의 흠은 우리에게 주어진 규칙과 계획 그리고 사회적 압박에서 자유로워져 스스로 길을 선택하게 하는 유일한 기회이므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터널에 갇힌 시간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터널에 갇힐 때의 나와 빠져나올 때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통의 시간을 자신을 발견하는 유용하고 값진 시간으로 만드십시오. 

 

- "이것은 불편함의 문제인데, 불편하면 그냥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고 말해도 돼. 하지만 네가 별로 중요한 관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그냥 무시해. 그런 사람들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거든." 

 

- 자신이 잘못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 기준을 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 사실을 말한 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고통이 아닌 단순히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이들의 건강한 정신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낙인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 낙인이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에 빠져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기보다 자기 자신을 세우는 데 더 집중하십시오. 엄마와 아빠가 당당하면 아이들도 당당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제게 고민 상담을 해왔습니다. 태권도 선생님이 자꾸 아빠에 대해서 묻는데, 어디까지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다른 곳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자꾸 물어봐서 무척 난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태권도 선생님은 아이의 입을 통해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아이를 상대로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태권도 선생님의 행동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대등한 어른에게는 감히 물어보지 못할 질문을 상대가 어린아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선량하고 인간다운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에게까지 네가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어. 태권도 선생님이 어른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질문에 네가 공손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야.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돼. 그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선을 넘었어. 그런 사람은 선생님으로 대하지 않아도 돼. 무례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는 거야. 다음에 또 누군가 너한테 그렇게 하면 너의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꼭 화를 내도록 해. 그리고 그런 사람은 멀리해.

- 엄마와 아빠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서 있기만 한다면 그 부모를 보고 자라는 자녀들은 걱정할 게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녀가 외부에서 받는 편견과 차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혼을 하지 않은 가정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 상담자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왜 이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남자를 잘못 만나 불행하게 살았어'라는 원망과 분노만이 가득한 상황에서는 '저 사람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행복할 거야'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재혼은 곧 구원이자 탈출구로 여겨집니다. 

 

- 먼저 내 결혼생활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실패한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부부 중 어느 한쪽에만 문제가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설령 상대방에게 100퍼센트 문제가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했던 통찰이 없는 나도 큰 문제입니다. 

 

- 사업에 실패하면 그 실패에 대해 분석합니다.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인생은 왜 그렇게 소홀하게 생각하시나요. 사업보다 내 인생이 더 중요합니다. 내 삶이 바로 서야 경제 활동도 잘하고, 돈도 벌고,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좋은 남자부터 찾아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재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첫 번째 결혼의 실패와 이혼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섣불리 결정한 재혼은 여러분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입니다. 그 어려운 이혼을 통해 겨우 자유롭게, 나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왜 나를 탐구하지도 않은 채 섣불리 재혼을 결정합니까. 지금 급한 것은 재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로 세울 때입니다. 

 

- 우리는 가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막연한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가족을 만듭니다. '가족'이란 듣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삶의 안정감은 타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안정과 불안, 행복과 불행은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기만의 삶의 태도를 정립해가는 여정입니다. 내 안에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없으면 나는 무엇을 해도, 누구와 있어도 불안하고 공허합니다.  

 

- 실패 후 저는 '삶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태도를 만들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혼과 이혼은 모두 삶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삶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도와 같아서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일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파도도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자는 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북극성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다른 별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북극성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 모두가 하나의 북극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우리가 걱정하는 결혼, 결혼생활, 이혼 후의 삶, 그리고 자녀의 삶이 모두 각자의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이때 주변의 외부적인 사건에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기 위해서는 내 본연의 모습에 가장 충실한 상태여야 합니다. 가장 나다운 모습이어야 합니다. 

 

- 지금 저는 이한우 선생님의 논어를 제 삶 속에 녹여내어 이지훈 류의 논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류논어(我流論語)'라고 부릅니다. 아류논어는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내 삶 속에서 해석된 논어입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논어를 만드십시오. 그리고 이 작업은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실패에 좌절하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실패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경험입니다. 지금의 나는 성공과 실패의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진 모습입니다. 자기기만을 하며 실패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실패를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홍글씨는 우리 삶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삶의 조각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창조적인 작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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