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보라
영제 : Cursed Bunny
출판 : 아작
출간 : 2022.04.01
최근 며칠간 리뷰를 쓸 때마다 느꼈던 얇은 막이랄지 껍질이랄지를 벗어난 기분이다. 엷은 안개에 갇혀서 몽롱한 상태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은 하고 있는 기분은 정말로 답답하고 끔찍했다.
이번 탈출법은 소금빵 에그 샌드위치와, 토닉워터 얼음을 띄운 차가운 레드 와인의 힘이다. 그리고 약간의 우울한 음악이다. 혹은 단순히 뭔가가 틀어졌음을, 그래서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린 걸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조금 부끄러워지겠지만 그 순간에는 앞을 생각하지 말고 푹 빠져버리는 게 가장 빠른 탈출법인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이 리뷰는 취중 리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꽤 오랫동안 이슈가 되는 것이 신기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은 정말 만족한다. 딱 떨어지는 설명이나 반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읽는 동안 느껴지는 감각과 오싹함,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감의 느낌, 끈적하게 남는 이미지와 촉감이 정말 멋졌다. 기묘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들. 정말 좋았다.
약간의 사족들을 덧붙이자면, 책 소개에서 한국어 저서들이 번안된 경우에도 영제를 원제라고 표기하는 점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사례가 많지 않아 번거롭겠지만, 한국어로 먼저 발표된 책들의 '원제'는 한국어 제목이 맞다고 본다. (cursing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뻘생각도 해본다.)
<저주토끼>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 좋았다. 이후 <재회>에서도 등장하는 반복의 이미지. 스스로의 강한 집념에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저주이며 서글픔이다. 그러나 소년의 행복은 진짜였으리라 생각한다.
<머리>의 오싹함은 소설 속의 이야기와 이미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대물림 되는 굴레, 그 속에 보이는 과거의 '나', 그럼에도 외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만성화. 그녀의 딸이 본 '머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차가운 손가락>에서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김 선생'이라는 호칭은 진실일까? 그렇다면 지난 해 옆 반을 맡았고 반지를 끼고 있었던 그녀가 '최 선생'일까, 목소리가 '최 선생'일까?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몸하다> 역시 그렇다. 정보라의 글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 자체로도 완결성과 매력이 뛰어난데 그 속에 녹아든 사회적 시각을 더듬어 읽으면 또 다르게 읽힌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느낌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다른 방향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차도의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생각이 많이 났다. 모든 것이 '그녀'만의 문제가 되는 기묘함. 그리고 슬픔.
<안녕, 내 사랑>은 상당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기에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 '한 없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기대하는 미래상이기는 하다. (결말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지만) 일방적인 관계라고 상상하기 쉽겠지만, 그마저도 상호 작용을 통한 피드백이 주는 만족감이라는 것. '나의 장미'가 특별해진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다시 생각해보니 첫사랑 신화인 듯도 싶다. 모든 것이 나에게 맞추어진,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관심과 배려란 지독히 이기적이기에 환상적이다.)
<덫>은 강렬한 이미지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들이 아닌 딸에게 덧씌워진 눈동자에 대해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몇 번 더 읽고 싶은 단편이었다.
<흉터> 또한 이미지들이 강렬한 환상 소설이다. 독자는 사건들의 이유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일어나는 사건들과 이미지들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근원이 사라지면 찾아오는 것은 엔딩이다. 그 누구도 해피 엔딩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즐거운 나의 집>은 중간 정도에서 눈치를 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손에 꼽히게 따스할지도 모른다.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 요령 없음과 초연함이 신포도의 변명이 되지 않으려면 '못'이 아니라 '안'이어야 한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사막과 초원의 이미지 때문에 개인적인 가산점이 들어간 단편이다. 황금 배의 주인이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몇 문장이 마음을 울렸다. <부치하난의 우울> 때 상상했던 이미지들과 연결되어 좀 더 몰입했던 것 같다.
<재회>. 읽는 동안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 읽고 덮은 후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단편이었다. '구원자 신화'는 모든 비극의 씨앗이다.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성숙한 사람들 간의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로 남을 수 있으며, 한쪽만이 미성숙할 경우에는 일방적인 시혜일 뿐 대등한 만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렉트라/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성숙한 이성'에 대한 동경이자 자신의 미성숙함을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줄 '구원자'에 대한 갈망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는 육아나 소년미에는 원래 관심이 없다. 반생 이상을 성인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스스로 설 수 있는 것이 우선이다.)
만족스럽게 읽었다. 추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 전등은 매우 귀여웠다. 토끼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 부분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았지만, 토끼는 한껏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토끼의 양쪽 귀 끝과 꼬리 끝 그리고 눈은 검었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새하얀 색이었다. 딱딱한 재질인데도 보드라운 분홍 입술과 복슬복슬한 털의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면 토끼의 몸체가 하얗게 빛났고, 그 순간만은 마치 살아 있는 토끼 같아서 귀를 쫑긋 세우거나 코를 벌름거리기라도 할 것 같아 보였다.
-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다. 토끼는 단 한 번의 예외였다.
- 그 야심에 제동을 건 것은 정부의 식량정책이었다. 농업정책의 핵심은 쌀을 자급자족하는 것이라 공표하고 정부에서는 특정 종류의 술을 발효할 때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물을 붓고 발효시키던 전통 방식은 정부의 이런 정책 때문에 사라지고 대신 주정(酒精), 즉 99% 에탄올에 물을 붓고 이 역겨운 액체를 사람이 마실 수 있게 하려고 감미료를 억지로 섞은 싸구려 술이 시장에 대량으로 풀렸다. 할아버지의 친구는 낙심했다. 그러나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았다.
(리뷰자 주 : 이때 맥이 끊긴 전통주 명가들을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 저주하려는 상대방이 저주의 물품을 직접 만져야만 한다. 그것이 저주의 핵심이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 <저주토끼>
- 아이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치채지 못했던 주름살과 늘어지고 거칠어진 피부를 발견했다. 그녀가 준 립스틱이 썩 잘 어울리는 아이의 얼굴은 이제 아이가 아닌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익숙한 낯선 얼굴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윤곽을 그대로 발견하고 놀라움과 대견함과 사랑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아이가 긴 머리에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고 보라색 물을 들인 날 그녀는 혼자 거울 앞에 서서 꼬불꼬불하게 누른 '아줌마 파마'를 하고 검은색으로 물을 들인 자신의 머리를 몰래 만져보았다.
- 그러면 그녀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그녀는 혼자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 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러나 생각의 샘은 하염없어서 퍼내고 또 퍼내도 다시 흘러나오곤 했다.
- <머리>
- "조금 걱정해 주는 척한다고, 그 목소리가 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데나 따라오고..."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킥킥 웃으며 여전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 <차가운 손가락>
- 그러나 나는 1호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는 내 피조물이고 내가 만든 반려자였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나를 위한 존재, 달리 표현할 방법도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완전한 '내 것'이었다.
- 인공 반려자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점점 다양해졌다. 외모도 이삼십 대쯤의 젊은이로 보이는 모델뿐 아니라 청소년이나 중년 남녀 혹은 노인형 모델도 출시되었다.(어린이 모델도 있지만, 특별 허가를 받아야 데려올 수 있고 무엇보다 내 분야가 아니다.) 어느 연령대의 어떤 모델이든 후속 기종으로 갈수록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졌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정교하고 인간다워졌다. 주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주인에 대해 '배웠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했다. 그래서 인공 반려자는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인의 취향과 성정에 가장 알맞은 동반자로 변화하고 '성장'했다. 그러므로 인공 반려자를 개발하고 시험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 <안녕, 내 사랑>
- 이유는 모른다.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벌판을 배회하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그대로 끌려간 곳이 산속의 동굴이었다. 소년은 동굴 안에 묶였다. 쇠사슬에 휘감긴 손발이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확인하고 소년을 그곳으로 데려왔던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 버렸다.
- 바닥에는 맨땅 위에 거적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언제나 검은 돌 위에서 맨몸으로 살았던 그에게는 그 거적 한 장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오두막 안은 침침했으나 동굴 속처럼 완벽한 어둠은 아니었다. 공기는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신선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섞여서 풍겨왔다. 짚으로 엮은 지붕의 틈새로 별빛이 반짝였다. 그는 오래전 동굴 속에서 쇠사슬을 돌에 부딪쳤을 때 튀었던 조그만 불꽃을 생각했다. 저 바깥에 보이는 둥글고 커다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처럼 동굴 안에 갇힌 사람이 쇠사슬을 거대한 돌벽에 부딪치며 저 수많은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공허와 어둠을 어떻게든 견뎌보기 위해서? 그는 알 수 없었다. 저 바깥에 있는 허공의 거대한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쇠사슬을 돌벽에 부딪치고 있든, 그 자신은 한때 곁에서 기어가던 벌레처럼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잠들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것'의 발톱에 쇠사슬이 휘감긴 채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태양 빛 속에 '그것'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기괴하게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 나타난 '그것'은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회색이었다. 잿빛 깃털에는 잘 단련한 쇠 같은, 생기 없이 차가운 윤이 흘렀다. 발톱과 부리는 은빛이었고, 그 은빛 부리 한가운데에 짧지만 깊은 흠집이 불그스름하게 나 있었다. 자신이 휘두른 쇠사슬이 부딪친 자국일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부리 옆에는 새파란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푸른색은 처음 마주 대하는 자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깊고 맑고, 그리고 잔혹했다.
- <흉터>
- 자신이 '요령'이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요령'을 남들은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돈을 최대한 빨리 많이 벌어서 더 넓은 집과 더 비싼 차를 사고 자식을 수업료 비싼 영어 유치원과 경쟁률 높은 사립학교에 집어넣고 계절마다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남 보기에 '번듯한' 삶일 수는 있어도 그녀가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원했고 이웃과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동네 공동체를 찾고 있었다.
-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몇 번이고 곱씹어 보는 것이다. 그녀의 처지에 놓였다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남편은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그녀 또한 대학 시절에 학점과 스펙에 매달리고 대기업이나 공무원 취업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장을 최고로 치는 주위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압박을 지겹게 여기고 경멸했기 때문에 남편이 원하는 삶의 지향점이 자신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취업했다.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한 '대안적 삶'이라는 말만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직장이란 대체로 직원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얼마 못 가서 깨달았다. 그녀가 대안 없는 생계를 걱정하며 직원들의 정상적인 근무가 아니라 일방적 희생으로 운영되는 대안적 직장에서 하루하루 시달리며 부스러져 가는 동안 남편은 그녀의 대학 선배였지만 그녀보다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딱히 내놓을 만한 직업 없이 '대안적인 삶'을 찾아 떠돌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녀 모르게 빌려 쓴 이천만 원이었다.
- 남편은 자기가 갚겠다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다고 약속했다. 진심이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세상이 진심 하나만 있으면 이천만 원 돈이 저절로 생겨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 <즐거운 나의 집>
- 왕자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더듬는 동안 공주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낯선 남자의 손끝이 얼굴을 만지는 것이 공주는 쑥스럽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금지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감각이 당황스럽고 조금은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즐겁고 들뜨기도 했다. 그래서 왕자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공주는 조금씩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왕자가 손가락을 떼었을 때, 공주는 이미 완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왕자인지 사랑 그 자체인지 자기 자신의 흥분된 감정인지는 공주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 "사막에 비가 내릴 때 눈먼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라. 그러면 왕자에게 걸린 저주가 풀릴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공주가 묻기 전에 황금 배의 주인은 이어서 말했다.
"인간의 본모습은 공주가 아는 것과 다르다. 저주가 풀리더라도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다."
- "이곳에 남아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황금 갑판을 울렸다.
"나와 함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되어 시간의 지평선을 떠다니며 살 수 있다. 태양과 달이 부서져 사라지는 날까지, 별과 구름이 손에 잡히는 이 무한한 공간이 모두 공주의 것이다."
-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요."
공주가 마침내 대답했다.
"나와 같은 인간 남자를 만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또 어른이 되어 짝을 찾고 자손을 낳는 모습을 보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바람과 모래의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이 끝난 뒤에 나에게 오라."
-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 "Widziałem że będzieś."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그가 말했다.
"Czekałem." (기다리고 있었어.)
- 오래된 굉장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폴란드의 이름은 덥고 건조했다. 나는 한 손에 차가운 음료수를 들고 그에 앉아 있었다. 삶은 불안했다. 나는 그 불안으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었다.
- 남자가 영어로 다시 말했다. 대부분의 폴란드인은 외국인이 폴란드어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남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내게 말을 걸었는지, 노인은 누구인지,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말려들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 "Wróci."(돌아올 거예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Zawsze wraca." (항상 돌아오니까.)
그리고 남자는 일어서서 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가 버렸다.
- 동유럽의 도서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내가 찾아간 대학의 도서관도 폐가식이었다. 다시 말해 필요한 자료의 서지 번호를 찾아서 신청서를 일일이 작성해서 제출하면 담당 사서가 보관 서고에 가서 책을 찾아다 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신청서를 썼다. 그리고 해당 카운터에 가서 내밀었다. 그 신청서를 받은 담당 사서가 그 남자였다. 나도 남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사무적으로 신청서를 받아서 한 장씩 넘겨보더니 두 시간 뒤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가 다른 관련 자료를 찾기로 했다.
- 두 시간 뒤에 창구에 갔을 때 남자는 책더미를 내밀며 말했다.
"Więc pani mówi po polsku?"(그러니까 폴란드어를 하시는군요?)
"Tak."(네.)
아주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 내가 노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가 나중에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인종적인 호기심도 아마 없지는 않았겠지만 거기까지는 묻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저녁이 되면 광장에 나와서 가볍게 뭔가 사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당시의 폴란드 물가는 놀랄 정도로 쌌고, 시내 중심가의 관광지라도 제대로 된 식당이 아니라 길거리 음식과 노천카페의 음료수 정도라면 나의 넉넉지 않은 사정으로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탄산수와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관광용 마차가 광장을 도는 모습을 바라보며 앞날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밝은 미래 따위는 믿지 않았다. 먹고살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보다는 조금 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고, 앞날보다는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돌아가면 아마도 여기서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느릿하게 저물어가는 햇살을 즐기며 시간을 낭비하던 때가 그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애썼다.
- 그렇게 도서관에서 하루를 마치고 광장으로 향해서, 노천카페의 빈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Piwo?"(맥주?)
그가 짧게 물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도서관을 나와서 광장으로 가면 잠시 후에 그가 나타났다. 혹은 일하지 않는 날에는 그가 먼저 광장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같이 간단한 저녁을 먹으면서 그는 주로 맥주를 마셨고 나는 커피나 탄산수를 마셨다.
-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 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 "어째서 그런 불행한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내가 중얼거렸다.
"트라우마라는 거겠지."
그가 대답했다.
- 다시 만났을 때도 그는 같은 아파트에 계속 있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의 아파트는 이전보다도 더 텅 비고 적막해진 것 같았다.
"결혼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말했다.
"할 뻔했어."
그가 대답했다.
"왜 안 했어?"
내가 물었다.
"그녀가 묶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가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가 물었다.
"왜 결혼하지 않았어?"
-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 이해하게 되면 그 뒤에는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 이제 내가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욕실에 서 있었다. 누군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주기를 기다리며.
-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면 슬픔이 그리워질 테니까
<작가의 말>
<저주 토끼>는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출판사에서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는 다분히 진취적인 의견을 준 적이 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작품을 쓸 때의 의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저주 토끼>에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외롭다. 세상은 대체로 사납고 낯설고 가끔 매혹적이거나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곳이며, 등장인물(혹은 등장 토끼 혹은 등장 로봇)들은 사랑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분투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거나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교류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정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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