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명호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20.01.28
<욕망을 이롭게 쓰는 법>.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거나, 자제하라가 아니어서 눈에 확 띄었다.
'이롭게 쓰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호기심으로 읽어보았다.
우선 저자가 말하는 욕망은 욕구와는 다른 개념이다. 진정한 자신, 본연의 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욕망의 근원이다. 거기에서부터 비춰지는 '길', 근원 자체이자 가장 순수한 에너지가 우리와 이어지는 지점이 바로 욕망이며, 욕망은 그 자체로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불꽃일 뿐이다. 따라서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그것을 찾아나가는 방법으로 명상을 권하고 있다. 이 책은 챕터마다 짧게 따라할 수 있도록 명상법을 실어두었는데, 익숙해지면 일상 중에 짧게라도 자주 해볼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만약 그나마도 시도하기 힘들 정도로 삶에 치이는 상황이라면, 저자는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도 명상이라고 말한다. 하루 하루 모든 일에서 내가 하는 이 일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를 바라며,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사랑을 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워가며 보다 넓은 '나'를 향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것이 진짜 삶이다. 때로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다보면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기도 하고, 기이한 능력을 얻은 것 같아지기도 한다. 그것들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나는 욕망에 사로잡혀 욕구에 갇힌 나가 된다.
짧고 간단하게 쓰였으면서도 많은 메시지가 담긴 책이었다.
즐겁게 읽었다.
- 그렇게 나타난 당신이라는 존재는 100여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세계에 머물다가 다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그중에서도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불과 인생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몸이 덜 자란 어린 시절과 움직임이 불편해지는 나이 든 시절에는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명료한 의식을 지니고 자신의 의지로써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조차도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의 여정이 펼쳐집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지닌 생명체로써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이 세계에 머물다가 아쉬움 없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까요?
- 저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욕망의 이로움에 대해 말하면 모두들 놀라운 표정을 짓습니다.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욕망의 이로움을 말씀하시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욕망의 세계입니다. 욕망을 놓으라는 말은 현실을 살아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주에게 생명을 창조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인간도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창조의 욕망에 의해 번식하고, 생존의 욕망에 의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욕망이 없다면 진화도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단세포 생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은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성장하려는 원초적인 욕망이 우리 DNA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힘입니다. 내재된 본질적인 에너지이며, 그 원시적인 힘은 한량없이 크고 무한합니다. 욕망은 삶의 불꽃을 활활 태우는 뜨거운 연료입니다. 거대한 불의 에너지이기에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이 없고, 도덕적인 가치 판단과도 무관합니다. 그래서 그 화염에 휩싸이지 않도록 잘 경계해야 합니다. 욕망의 불을 잘 다루면 삶의 생기와 활력을 주는 원동력이 되지만, 잘못 쓰면 목숨마저도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거대하고 위대한 불의 힘을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잘 다루는 것입니다.
- 지금 책 읽는 것을 멈추고,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반응을 따라서 내면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 반응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껴보십시오. 생각과 감정이 그치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만을 자각하게 됩니다.
-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을 선택해야 잘 사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슴 뛸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 때문에 주저합니까?"
해보고 싶은 것들은 무엇이든 다 해보십시오. 당신은 한계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십시오.
- 모든 생명체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지향합니다. 행복한 삶 또한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과정이지요. 우리는 어떤 삶을 살든 욕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여 고통스러운 삶과 행복한 삶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 네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여기 첫 번째는 세상이 원하는 조건과 기준을 충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입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여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만족합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알아줄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우월감과 자만심에, 잘난 사람을 만나면 열등감과 시기심에,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경쟁심에 빠져듭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쉽게 화를 냅니다. 관심은 타인에게 향해 있지만 실상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므로 만족감을 외부의 대상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소유와 소비, 감각적 욕망을 통해 오는 만족을 행복으로 삼기에 늘 불안정합니다.
- 두 번째는 이원성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삶입니다. 사회적 규범 안에서 원만한 관계를 맺고 나의 일과 너의 일, 세상의 일을 구분할 줄 압니다. 각자가 다른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므로 내 것만을 우기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조정하면서 원하는 바를 이룹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세속적 처세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 도덕과 규범에 얽매여 의무감으로 행하는 자기희생, 혼자만의 즐거움에만 몰입하는 개인주의 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언제든 그의 내면 또는 외부에서 갈등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 세 번째는 이원성 세계의 욕망을 떠나서 영적 차원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며 결국 사라질 것임을, 나 자신 또한 실체가 없는 무아적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다고 생각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영적 고결함을 욕망의 제거와 동일시하여 생기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기 쉽습니다. 자신의 해탈을 중시하기에 타인에 대해서는 닫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로부터 멀어져 있기에 차가운 바윗돌이나 메마른 고목같이 느껴집니다.
- 네 번째는 나 자신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모든 존재를 위해 밝고 이롭게 사용하는 삶입니다. 이들의 자기 인식, 가치관과 세계관은 올바르고 명확합니다. 욕망을 잘 알고 다스려 삶의 동력으로 삼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을 붙들고 소유하려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실체 없는 것들이 근본적으로 본연의 세계, 하나의 세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도 알므로 이 세상을 완전한 곳으로 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삶에 등장한 모든 대상도 차별 없이 받아들입니다. 욕망 속에 있으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온 만물이 본래 하나이므로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실상 나를 위해 일하는 것임을 압니다.
-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첫 번째의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현상유지만으로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다면 두 번째의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현실을 벗어나 홀로 열반에 들고 싶으면 세 번째의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진정 의미 있고 차원 높은 삶과 정신세계를 추구하려 한다면 네 번째의 삶을 선택하십시오.
- 욕망은 몸이 요구하는 감각, 즉 오감을 만족시키는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핍과 불안이 동기가 되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욕망은 나 자신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힘이고, 성장하고 진화하려는 열망입니다. 다시 말해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데 꼭 필요한 원동력입니다. 욕망은 당신 내면에 숨어 있는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욕망의 대상을 종교나 사회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만든 틀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성공도 행복도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욕망을 이뤄가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 내가 나아갈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왜 내가 그 길을 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위 질문들의 답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람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바람을 이루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그만큼 자신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사람마다 행복에 필요한 요소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성격,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조차 행복의 조건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은 연봉 높은 대기업에 취직해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열심히 일할 때 삶의 만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식물을 기르며 자유롭게 살아갈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 그 무엇보다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려면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 어떤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선택이 나에게 진정한 이득이 될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가슴에서 울림이 느껴질 때까지 해답을 찾아보고 또 찾아보십시오.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신 자신입니다.
-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내가 나를 잊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작은 나'의 영원한 소멸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현상에 더 집착하게 만들고 몰두하게 하여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내 안의 텅 빈 '본연의 나'와 멀어지게 합니다. 이 사실만 자각해도 당신은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 본래 나는 온전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또한 온전합니다. 사실 좋고 나쁜 일이란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과 순리에 따라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응, 그래, 좋아. 감사합니다'라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롭고 깨달은 자는 바로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삶이 힘들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조차 세상은 온전하고 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수용과 감사의 열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남자와 여자 등 서로 속성이 다른 것들끼리 짝을 맺어 온전함과 완전함을 드러냅니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좋고 나쁨이 아닌 것처럼, 어둠이 꼭 나쁘고 밝음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고, 이 둘이 상호 보완하여 완전한 하루를 만듭니다. 그믐달이 있기에 보름달이 있습니다. 덜 차오른 '못난 나'가 있어서 꽉 찬 ‘잘난 나’도 있게 됩니다. 나의 특정한 일부만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마십시오. 한 생명으로, 본질로서 내 존재는 언제나 완전합니다.
- 그러니 자신의 부끄럽고, 미진하고, 못난 모습에 대해 비난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에너지를 맞받아치게나 대응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부하면 에너지가 깎여버립니다.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되 휩쓸리지만 마십시오. 그러면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의 굴레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의식의 틀에 저장되어 있는 습성과 습관에 먹이를 주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밀면 당기고, 당기면 미는 에너지 운용법입니다.
- 아무리 초라해 보이더라도, 이 삶은 나의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내가 되려면, 바로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지만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앞선 장에서 설명한 대로 기존의 신념과 관념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리고 텅 빈 '본연의 나'를 만나십시오. '본연의 나'는 어떤 순간에도 나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때 드러납니다.
- 두 개의 흰색 스크린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하나의 스크린(A)에는 텅 빈 여백만 있습니다. 다른 스크린(B)에는 어떤 영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영상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관습들의 정보가 투영된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기존의 영상은 꺼버려야 합니다. 영상이 흘러가고 있는 스크린 위에다 새로운 그림을 덧칠한다면 그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배경에다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한다면, 진정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의 의식은 원래 텅 빈 스크린과 같습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DNA에 기록된 정보들이 작동하고 외부로부터 얻은 경험까지 더해져서 더 이상 백지가 아니라 관습, 통념, 교리 등이 잔뜩 채색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 채색된 내용들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었고, 우리는 그 정체성을 ‘나’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나’의 정체성을 걷어내면 다시 텅 비어 있는 의식만 남습니다. ‘나’가 만들어낸 생각이나 감정을 비우고 깨끗한 의식만 남았을 때, 모든 대상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몸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당신은 밖의 대상과 교감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 당신의 DNA는 우주 탄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생명체의 정보를 품고 있습니다. 우주가 생겨난 뒤 지구가 탄생했고, 그 지구에서 처음으로 단세포 동물이 나타났습니다. 그 단세포 동물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 마침내 인류가 되었습니다. 진화란 한 생명체가 탄생해서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식을 탄생시킨 후 죽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여기서 DNA는 조상과 자손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메모리 카드입니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DNA 안에는 우리 몸을 구성하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모든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조상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한 많은 정보들도 담겨 있습니다. 이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들이 함께 내 안에서 공존하며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는 당신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부모의 아픔, 조부모의 상처, 선조들의 고통에 대한 정보가 새겨져 있습니다.
- 그녀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명상을 통해 외가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의 마음을 내려놓았고, 선대가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곧 그녀는 지긋지긋한 두통에서 자유로워졌고 이후로는 순간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면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단지 그걸 알아차리기만 해도, 대부분의 문제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 그렇게 무심히 생각을 바라보면 그 속삭임들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생각이 멈춰지면 의식은 텅 비어버립니다. 그 텅 빈 고요 안에서 '의도'를 뚜렷이 떠올려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하나의 바람이어야 합니다. 그 바람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런저런 걸림이 없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바람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때 당신의 숨은 능력이 외부로 드러납니다.
- 지금 이 순간 책을 내려놓고, 모든 선입견과 의심을 비워버리고, 당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떠올려보십시오. 하루에 두 번, 잠들기 직전과 잠에서 깨어날 때 그것을 반복해서 떠올려보십시오. 떠올릴 때 설렘이 느껴집니까? 가슴속에 따뜻한 울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의식의 틀’ 안에 의도의 씨앗이 뿌려지고 심어진 것입니다.
- 당신은 의도를 심었습니다. 이제 그 의도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는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 의도를 즉시 마음에서 놓아버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 의도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무거운 짐으로 변해 당신을 구속할 것입니다. 의도란 소원하는 바이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그 의도를 이루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나 생각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당신의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또 다른 의도를, 더 나은 의도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창조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 그렇다고 해서 잊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도가 진심이라면, 그것은 이미 당신의 무의식 안에 뚜렷이 새겨졌습니다. 가끔 그 의도가 떠오를 때 당신은 다음의 세 마디만 속삭이듯 내뱉으면 됩니다.
"응. 그래. 좋습니다."
이 단순한 수용의 표현이 당신의 무의식에 뿌리내린 의도에 물을 주고 싹을 틔워 현실로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의 의도가 무의식에 뿌리내리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의도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행동하게 됩니다. 남들에게는 힘든 일인데 당신은 힘든 줄도 모르고 해내게 될 것입니다. 결과는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역할은 심부름을 하는 것까지입니다. 결과는 텅 빈 '본연의 나'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당신 앞에 주어진 일을 하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현실을 인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됩니다.
- 한 개인이 외부로 발산한 에너지는 먼바다에서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느냐가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 결국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나를 위해 한 일이니 잘했다고 자랑할 필요도, 교만을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대가를 바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 누군가 묻습니다.
"그럼 나의 인생, 나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나만의 인생, 나만의 삶에서 벗어나서 모든 사람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되도록 자신을 확장한다면 이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예전에 사무실에 페인트칠을 해주러 오셨던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명상이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지, 우리처럼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명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에 가시가 있고 뼈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명상 안 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여유롭고 하는 일마다 잘 되면 명상을 왜 합니까? 지금의 삶이 고단하고 때로는 일이 꼬여 고통스럽기에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제 말에 그분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조금 진지해진 태도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도 명상을 할 수 있습니까?"
"네. 지금 페인트칠을 하는 것도 명상입니다.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페인트칠을 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을 빨리 끝내고 일당 받아 퇴근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지요."
"좋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만 더 보태면 명상이 됩니다. 나의 이 페인트칠로 인하여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될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평안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의도)으로 일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3년 안에는 도장업체 사장님이 되실 겁니다."
-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할 때우리는 그들로부터 도움의 에너지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공도의 이를 행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이로움을 펼치는 것은 ‘텅 빈 나’, ‘본연의 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저절로 따라옵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고 풍요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바람대로 사는 사람은 10퍼센트도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뭐 잘 되겠지? 안 되면 말고'라는 막연한 기대심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은 불확실한 현실을 불러올 뿐입니다. 반면 먼저 분명한 의도를 세우고, 그다음 텅 빈 상태에서 현실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머지않아 꿈은 현실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가족에게만 이로운 일을 바란다면 당신은 당신의 가족에게서만 도움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를 이롭게 하고, 이 국가를 이롭게 하고, 인류를 이롭게 하고, 온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온 세상으로부터 도움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온 세상에서 도움의 에너지를 받고 싶다면, 첫째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 그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주변의 사람들 전부를 소중히 하고 존중하십시오. 그들이 단지 모습이 다를 뿐인 '또 다른 나'임을 명심하십시오.
- 둘째로,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소중히 다루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책상, 연필, 종이, 전구 하나까지도 함부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종이가 없고 연필이 없다면 내 뜻을 전달할 수도 없고, 공부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전등이 있기에 어두운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물들이 있기에 내가 편리하게 내 뜻을 펼칠 수 있으니,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물들도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죽고 땅에 묻히면 내 몸은 나무의 영양분이 되어 나무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 나무로 종이가 만들어지니, 종이와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사물들은 각기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들이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셋째로, 결과에 초점을 두지 마십시오. 자기 일의 가치를 알고 거기에만 몰입하십시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나와 내 가족, 조직과 국가, 나아가서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긍지를 갖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십시오. 내 직업이나 활동이 이 세상에, 모든 이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도록 하십시오.
- 만약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면, 그 식당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건강함을 주고 그렇게 건강해진 사람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전파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경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어느새 풍요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건물 짓는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있다면, 당신이 나르는 벽돌 한 장 한 장이 튼튼하게 쌓여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집이 만들어지기를 바라십시오. 그곳이 사람들에게 평안함과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일하십시오.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일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잡초 씨앗을 뿌리면 잡초가 자라고, 호박씨를 뿌리면 호박이 열립니다. 씨앗이 곧 열매이자 수확물이며 결과물입니다.
- 내가 돈을 벌고 나와 내 가족이 잘 살기 위해서 일하는 차원을 넘어서십시오. 현실이 그렇지 않아 보이더라도, 마음으로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나를 도와줄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일은 당신의 욕망이 투사되어 현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곧 당신의 욕망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길입니다. 당신의 욕망의 에너지를 더 크게 확장시키는 길입니다. 반면 지금 하는 일을 등한시하거나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자기 욕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기에 에너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 우리가 살면서 흔히 하게 되는 커다란 착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고 주변 환경이 대가를 주는 만큼만, 즉 '연봉'만큼만 혹은 인정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영리한 태도인 양 여깁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능은 놋그릇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빛이 납니다. 그 빛이 주변을 밝혀 이롭게 합니다. 그러나 쓰지 않으면 이내 녹이 슬고 점점 주변도 어두워집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과 실력이 큰지 작은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명심하십시오. 작은 일일지라도 큰 의도를 품고 행하십시오.
조바심과 걱정은 하늘에 맡기고 지금 주어진 일에 몰입하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우주와 감응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 서점마다 자기 계발에 관한 책, 명상에 관한 책,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이 적힌 책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책들은 이루고자 하는 것을 강렬하게 소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소망이 확실해지며, 지속적이고 집중된 생각으로써 원하는 것을 끌어당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 소망이 곧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긍정의 에너지는 긍정적 상황을 불러오고 부정의 에너지는 부정적 상황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힘겨운 상황들은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리 쉽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 어둡게 드리우듯이, 소망이 너무 강렬하면 그만큼 의심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변화의 흐름에 '작은 나'가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념이나 의지를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이루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흐름에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강조했듯이 당신의 '의식의 틀'에 얽매일 소망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데서 우러나온 설렘과 울림이 있는 소망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의도를 마음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십시오. 마음속에 그림을 그릴 때도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힘을 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과정이 애씀 없이 저절로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흐름에 맡기십시오. 흐름에 맡긴다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 당신은 무엇에 의해 구속되고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내맡김의 즐거움, 하늘의 조율을 기다리는 여유, 인위적이지 않은 마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가벼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 역설적이지만 소망은 이런 상태에서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해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명상입니다.
- 편안히 눕고, 양손을 가볍게 배꼽 위에 올려둡니다. 입술은 살짝 벌리고 혀는 입천장에 댑니다. 몸이 편안해야 긴장된 신경이 이완됩니다. 신경이 이완되어야 생각, 감정, 욕구 등이 고요해집니다. 의식의 작용이 멈추면 생명의 에너지는 잘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 누워 있는 내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지켜보십시오.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십시오.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숨을 지켜보십시오. 하나하나의 세포가 열리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하나의 세포가 열릴 때, 모든 세포가 그와 함께 깨어납니다.
- 내 몸이 하나의 '의식의 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팎의 경계가 안개처럼 옅어지고 물보라처럼 희미해집니다. 그 상태에서 이렇게 되뇌십시오.
"나는 본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 오늘 하루 일어난 모든 일은 내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고 경험한 것입니다.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응, 그래, 좋습니다."
- 그리고 서서히 현재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보십시오.
- 처음에는 영사기가 비추는 장면들처럼 현재 의식이 깜빡이는 듯 느껴질 수 있습니다. 켜졌다가 꺼졌다가, 켜졌다가 꺼졌다가... 그러다가 한순간에 탁 꺼져버립니다. 그때 당신은 죽음(잠)의 세계, 삶의 텅 빈 배경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됩니다. 현재 의식이 사라지는 그 마지막 경계를 지켜보면서 깊은 침묵의 잠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잠과 꿈속에서도 텅 빈 본연의 의식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본연의 나'는 몸, 생각, 감정을 초월해서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 당신은 꿈을 꿀 때에도 그곳의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겠다는 '공도의 이'를 세우고 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꿈을 꾸는 사람의 에너지체와 늘 똑같은 무의식의 작용에 매여 있는 사람의 에너지체는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명상을 날마다 실천하다 보면 잠들기 직전의 마지막 현재 의식, 마지막 숨을 알아차리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만들어진 현재 의식과 만들어지지 않은 본래 의식의 경계를 알아차리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숙면이 선사해주는 경쾌한 에너지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생화학자이자 전문의로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제가 존경하던 선배와 대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명상 수련 중에 일어난 영적 체험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오랜 수행 끝에 소주천이 열리고, 대주천도 열리면서 단전에 모인 기운이 온몸을 돌게 되었습니다. 2분 이상의 긴 호흡으로 뱃속의 화기가 온몸을 뜨겁게 감 싸고, 내장의 기운이 빙글빙글 돌더군요. 양기와 음기가 조화롭게 꽉 차면서 연단이 된 것이지요. 어느 때는 제 오장육부와 뼈가 투시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저를 유심히 바라보던 선배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정신분열 증상인데... 명상하는 사람이 왜 현상에 집착해서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지?"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무안함과 허탈감, 분노 등 여러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오랫동안 피나는 수련을 통해 이런 경지에 올랐는데 고작 현상에 집착하여 정신이 혼란해진 환자로 취급하다니!'
선배는 조심스럽게, 진지하면서도 무척 염려되는 눈빛으로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알기로 명상은 가슴을 열고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현상으로 인해 자네 현실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순간, 제 안에 들끓던 감정의 에너지가 '휙' 하고 들어온 한 생각에 멈춰버렸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수많은 수련으로 대체 무엇을 체험하고자 했던가?'
‘수련을 통해서 내 삶은 진정 무엇이 바뀌었던가?'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자각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침묵이 흘렀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그 멈춤 속에서, 깊은 어딘가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신비현상이 사실이건 환상이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현상들에 대한 제 밑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저는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 빠져 헤매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알고 싶다는 초심이 어느 사이엔가 변질되어 수행 중 일어나는 신비현상에 빠지고 취했던 것입니다. 여전히 저는 생명의 에너지를 일깨워 초월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우월감과 교만함에 젖어 있는 '작은 나'일 뿐이었습니다.
- 영적 수행의 목적은 본래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품었다면 자기 탐구의 행위가 초심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이 물음표(나는 누구인가 / 나는 무엇인가)를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물음표는 밤하늘의 북극성과 같아서,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 각 단계마다 환상적인 향연이 일어납니다. 즉 수행의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생명의 에너지가 온몸을 순환하고 의식이 천체의 별들처럼 정렬되어 빛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아름답고 찬란한 현상을 경험하게 합니다. 더불어 영적인 능력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그 능력들은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에게 내재된 힘들입니다. 다만 오감과 분별심, 물질적 세계관, 생존욕 등의 한정된 의식에 묶여 잠자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감이 열리고 분별심이 사라지면 억눌려 있던 그 초월적인 힘들이 자연스럽게 솟구치게 됩니다. 견고했던 몸과 딱딱했던 마음이 꺼풀을 벗을 때마다 환희심과 지복감도 샘솟습니다. 이 영적인 쾌락을 어찌 물질세계의 감각적 쾌락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 문제는 그리하여, 자칫 잘못하면 '좌선쟁이'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좌선쟁이'란 자기 내면의 즐거움에 빠져서 현실을 망각하고 종일 명상 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도 수행자들 중에서 "무엇을 보았다, 특수한 경험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능력이 생겼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는 허황된 말들이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신비현상과 초월적 능력은 어디까지나 무지개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쫓으면 좋을수록 멀어집니다. 붙잡으려 하는 순간 사라집니다. 실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에 취하고 탐닉하다 보면 오직 그 상태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미묘하지만 잘못된 방향입니다. 이 모습이 쾌감에 중독된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중독은 집착과 고통을 줍니다. 고통을 소멸하는 길에 올랐다가 그 황홀경이 주는 감각적 갈망에 불타서 고통을 겪는 모순을 겪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현실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정에서 늘 자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 대략적으로 말해보자면 자기 인식의 지혜를 닦는 공부와 에너지를 운용하는 수행을 병행하면서도 신비현상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만이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게 해 주는 지름길입니다.
- 사실, 단순히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났는지만을 지켜보는 것은 진정한 알아차림이 아닙니다. 내가 일으킨 한 생각이 어떻게 세상에 투사되고, 어떻게 다시 내게 돌아와 반응을 일으키며, 그 반응이 세상으로 또다시 돌아나가 어떤 방식으로 재창조를 하는지 또렷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 인과의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한 점'이 보일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 줄 조건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그 무엇도 뚫을 수 있는 레이저 광선처럼 빛나는 의식으로써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지켜보는 것, 그것을 저는 ‘일점정신'이라고 부릅니다.
- 가슴에 중심을 둔 채로 천천히 일점정신을 느껴보십시오. 너와 나, 이곳과 저곳,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는 그 한 점에서 아무런 집착도 걸림도 없는 절대적 평화와 고요, 안정을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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