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닐 도날드 월쉬 / 조경숙
원제 : CONVERSATIONS WITH GOD book 2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출간 : 2019.07.25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닮은 것'을 끌어당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떠올랐던 문장이다. 자신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지금 자신이 무엇을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고,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이란 지금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환상과는 꽤나 다를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체험을 통해 '나'인 것과 '나이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선택하는 행위에서 다듬어지는 어떤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풍요와 연결이 될 것이고, 반드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남이 주지 않는 것에 노하지 않으며 나누어 줄 수 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그것이 '자비'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든다거나 그의 이익을 위해 손해를 끼쳤을 때 마음이 평온하지 않다면, 그 지점에서 멈춰 서서 살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불편한가. 이것은 자비가 아니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불편한 마음을 못 본 체 하고 겉으로만 화를 표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화가 나지 않을 때, 그저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그는 '자비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선뜻 내어주기가 꺼려진다면, 지금 마주해야 할 것은 '자비'가 아니라 '결핍'이나 '축적'일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가를 바라게 된다면, 그것 또한 '자비로운' 행동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무 것도 내어주지 않는 것이 '자비로운' 행동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선택과 행위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 뒤에 세워진 '의도'에 따라 행해질 때 의미를 가진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방향성대로 행하는 것에 너무 큰 괴로움이 느껴진다면 자아상을 다시 세워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자비롭지 않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의로운' 것이 더 자신의 본질에 맞을 수도 있는 일이고, 이것도 저것도 너무 힘들다면 진짜 자신 모습을 가만히 느껴봐야 할 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혼란의 순간에도 '잘못 되어가는' 일은 없다. 그것에 대한 깊은 믿음과, 모든 선택에서 보다 큰 '사랑'의 방향으로 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끌어당김이나 현실 창조, 그 외 다른 방법들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본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실패'와 '미구현'의 차이에 관해 더 깊게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자신을 반영해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결과 또한 자신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자신과 닮아있고 가까운 것인지, 얻을 것임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았는지,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과 선택으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는 않았는지.
'원하는' 것은 '되고자 하는' 것에 가까워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정체성, 모토에 가깝다. 그것이 일관될 수록, 그리고 자신의 본질에 가까울 수록 결과는 빠르고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해도 아는 바대로 행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방향성이 다른 선택을 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막지 못하는 순간에, '어째서 이렇게나 힘든 것인가, 나의 무엇이 이 선택을 어렵게 하는가'를 생각하던 때에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던 것에 대한 답들을 얻었지만, 그대로 행하기가 어렵다고 느껴 외면하고자 하는 자신을 본다.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진리 속에 그 모든 것이 포괄된다.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
- 나는 언제나처럼 '감사의 말' 가장 앞머리에, 이 책을 포함해서 모든 것의 근원인 존재에게 감사하고 싶다. 나처럼 이 근원을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영원한 근원이었고, 근원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 이 책은 신이 보낸 메시지다. 이 책에서 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거의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이 지구 상의 사회, 성(性), 교육, 정치, 경제, 신학 혁명을 제안한다. 이 같은 제안이 나온 맥락은 이 행성의 거주자로서 우리 자신이 그런 바람을 표명해왔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지금껏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창조하고, 우리 의식을 높이며,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쪽을 택한다고 말해왔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신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기로 선택한다면, 신은 기꺼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 우리가 정말 그런 세상을 세울 수 있을까? 신은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는 것뿐이라고.
- 그러니 우린 이 점에서 함께인 것 같다.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고, 그 결과 우리가 하는 일을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사실에 충실하게 머무는 것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먼저 나는 이 책이 딱 맞는 때에 여러분 인생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 아마 지금은 이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여러분을 위해 쌓아 놓은 체험들을 끝낼 때쯤이면, 여러분도 틀림없이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완벽한 질서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여러분 삶에 이 책이 찾아온 것 역시 예외가 아니다.
- 이제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라. 그리고 결코 멈추지 마라. 먼저 자신에게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라.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한 진리를 여러분 자신에게 말하고, 그러고 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 또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에 대해 진리를 말하라. 이것이 '진리를 말하는 다섯 단계'다. 이것이 자유에 이르는 5중의 길이다. 그러면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아니. 하지만 그게 바로 네가 삶을 꾸려갈 때 결정하는 방식이니, 난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너는 계속해서 마음을 바꾸고 있다. 삶은 계속되는 창조 과정임을 잊지 마라. 너는 시시각각 네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 내리는 결정과 다를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선각자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모든 선각자들 Masters의 비밀이 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선택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요?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네 의지가 네 현실로 확실하게 드러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선택하라. 그렇게 되기까지 몇 년씩 걸리는 사람도 있고, 몇 달씩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또 몇 주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깨달음에 근접한 사람이라면 며칠이나 몇 시간, 혹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에게 창조는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의지와 체험 사이의 간격이 줄어가는 것을 볼 때, 너는 자신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중임을 알 것이다.
- "너는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 내리는 결정과 다를 때가 자주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당신 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바꿔선 안 된다는 뜻입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꿔라. 하지만 마음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우주 전체의 방향 역시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네가 어떤 것에 대해 "마음을 정할 때", 너는 그에 맞추어 우주를 작동시키고 있다. 너희가 이제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복잡한 역학들로 이루어지는 그 과정 속에는, 너희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힘들,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힘들이 개입된다. 이 힘들과 이 과정 모두가 소위 삶이라는 존재 전체를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상호작용하여 짜낸 경이로운 옷감의 일부다. 그것들의 본질은 나다.
그렇다면 제가 마음을 바꾸면 그게 당신을 곤란하게 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건가요?
나에게는 어떤 것도 곤란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너 자신에게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대할 때 한 가지 마음과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라. 그리고 네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때까지는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초점을 맞추고, 중심을 잡고, 거기에 머물러라. 이것이 전심(心)한다고 할 때의 의미다. 뭔가를 택할 때는 네온 힘과 네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택하라. 겁먹지 마라. 계속 가라! 그것을 향해 계속 가라, 단호하게.
-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선택한 현실을 창조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너는 네가 선택한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또 너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너는 계속해서 무엇이 네게 "최선"인지 알아내려 한다. 또 너는 네 모든 선택이 "좋은 것"이길 미리 보장받고 싶어 한다. 게다가 너는 계속해서 마음을 바꾼다!
제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떤 게 제게 최선인지 알아내려 하면 안 되나요?
"최선"이란 건 오만가지 변수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건 선택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는 오직 한 가지만 고려하면 된다. 이것이 '내가 누구인지 Who I Am'를 진술하는지, 이것이 '내가 되고자 선택하는 존재 Who I Choose to Be'를 선언하는지만. 삶 전체가 그런 선언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너는 그런 선언을 우연히 할 수도 있고 네 선택으로 할 수도 있다. 선택으로 사는 삶은 의식하는 행동으로 사는 삶이다. 우연으로 사는 삶은 의식 없는 반응으로 사는 삶이다.
(리뷰자 주 : 이것은 확언이기도 하고 모토이기도 하다.)
- 내게 가까이 오라, 내게로 가까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 그렇다면 이제 지난번 진도로 되돌아가서 시간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미리 보내진 pre-sent 시간 같은 건 없다! 내가 단언하지만, 너는 예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너는 이해하고 있다. 이 시간 말고는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순간 말고는 어떤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뿐이다.
그럼 "어제"와 "내일"은요?
그것들은 네 상상이 빚어낸 허구이고, 네 정신이 지어낸 구조물이다. '궁극의 현실'에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도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 "시간"은 연속체가 아니다. 그것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존재하는 상대성의 요소다. 시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개인들에게는 출생에서 죽음으로 달려가고, 우주에는 어떤 유한점(有限点)에서 또 다른 어떤 유한점으로 달려가는 소위 시간줄로 시간을 생각하지 마라. "시간"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시간을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을 나타내는 탁상용 종이 꽂이로 생각하라. 이제 그 종이 꽂이에 여러 장의 종이가 꽂혀 있다고 상상해보아라. 차곡차곡. 이것들이 시간 요소들이다. 하나하나의 요소는 뚜렷하게 구별되지만 다른 것들과 동시에 존재한다. 종이 꽂이의 모든 종이는 한꺼번에 존재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도...
-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순간', 이 순간, 영원한 지금 순간뿐이다. 모든 일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내 영광은 바로 지금 찬미받고 있다. 신의 영광을 기다리는 일 같은 건 없다. 내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만든 건 그냥 내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냥 그것이 내 현실로 드러나길 기다릴 수 없었다.
- 그렇다면 너는 이제 그 말도 더 잘 이해하느냐? 너희가 "옳음"과 "그름"의 관념을 창조해낸 것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란 걸 알겠느냐? 이런 규정들, 즉 경계들이 없었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이해하겠느냐?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너희의 관념을 바꿀 때마다, 너희도 나처럼 계속해서 그 경계들도 바꾼다는 사실을 이해하겠느냐?
- 너는 그 사람들에게 "옳음"과 "그름'에 대한 관념은 문화마다. 시기마다, 종교마다, 지역마다... 심지어 가족마다 개인마다 다르고, 달라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옳다고 여기던 일이, 예를 들면 마법처럼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화형에 처하던 일을, 오늘날에는 "못된 일로 여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된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라 단순한 지리상의 차이로도 달라지는 규정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 된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 행성에서 몇몇 행위들은 (예컨대 매춘) 한 곳에서는 불법이지만, 길을 따라 겨우 1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다른 곳에서는 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면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지 여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그 일을 저지른 곳이 어디인가의 문제다. 이제 나는 1권에서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납득하고 이해하기가 대단히 대단히 힘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 당신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서 당신에게 오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가는 게 아니라요. 당신은 천국과 지옥을 세워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그냥 한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
너희가 어떻게 이런 관념에 이르렀는지 알겠다. 이건 바로 내가 너희 세계 속에 설정한 방식이다. 그래서 너희는 세계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너희 현실에서는 '좋은 것'이 '나쁜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내 현실도 똑같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있는 곳에는 어떤 "나쁜" 것도, 어떤 '악'도 없다. '모든 것인 전체', '하나'가 있을 뿐이고, 이에 대한 '깨달음', '체험'만이 있을 뿐이다. 내 세계는 '절대계'다. 그곳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고 존재한다. 내 세계는 '존재' 전체가 '사랑'인 곳이다.
(리뷰자 주 : 비나에서 최초로 악의 개념이 생기는 것은 여성 원리에 '악'의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원성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함에 가깝다. '옳음'이 태어나면 '그름'도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것의 모든 것은 선도 악도 아닌 초월이다.)
- '자신이 누구인지', '되고자 원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그런 다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너희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내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을 너희의 제한된 이해 속에서 너희의 가장 '장대한 이상'이라는 건축물을 올려놓을 뼈대로 사용하라. 만일 "미래"에 대해 영감이 떠오른다면, 그것을 존중하라. 만일 어떤 "과거 삶"에 대해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알아보라. 쉽사리 그것을 무시하지 마라. 무엇보다도, 너희의 신성한 자아를 창조하고 드러내고 표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큰 영광 속에서 알게 된다면, 그 길을 따라라.
- 모든 사람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지금 체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다. 나는 만인이기에.
- 공간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공간은 드러난... 시간이다. 사실 공간, 다시 말해 그 속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빈" 공간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이다. "가장 빈" 공간조차도 수증기로 가득 차 있다. 너무나 엷고, 저 멀리 무한한 영역 너머로까지 뻗어나가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수증기로. 그리고 그 수증기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존재하는 건 에너지, 순수 에너지다. 이것은 진동, 즉 떨림으로 드러나며, 특정 진동수로 이루어지는 '전체'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물질을 함께" 묶는 "공간"이다.
(리뷰자 주 : 물질계에서 하나의 공간에 동시에 겹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물질은 이동하는 것일까, 전달되는 것일까?)
너희의 일직선 시간 모델을 써서 설명하면, 한때 우주의 모든 물질은 하나의 미세한 알갱이로 응축되어 있었다. 지금 존재하는 식의 물질을 밀도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너희로서는 이 알갱이의 밀도성(密度性)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지금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공간이다. 모든 "고체"는 2퍼센트의 딱딱한 물질과 98퍼센트의 "공기"로 되어 있다! 게다가 물체들 속에 있는 소립자들 사이의 공간은 어마어마하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에 보이는 천체들 사이의 거리와 같다. 그럼에도 너희는 이 물체들을 딱딱하다고 말한다. 사실 한때 우주 전체는 "딱딱했다". 물질 분자들 사이에는 사실상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물질이 자신에게서 "공간"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공간"이 사라지고 나자, 그 물질은 바늘 끝보다 더 작은 영역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실제로 어떤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간" 이전에 하나의 "시간"이 있었다. 너희가 반(反)물질이라고 불렀을, 가장 순수한 '최고의 진동 에너지' 형태만이 존재하던 시간이. 이것은 시간 전의 시간, 너희가 아는 대로의 물질 우주가 존재하기 전의 시간이었다. 어떤 것도 물질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낙원, 즉 "천국"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물질 matter도 없었기에". (지금의 너희 언어에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될 때 "무슨 일인가 What's the matter?"라고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잠깐만! 여기 최고의 죄가 있다. 너희는 자신이, '신을 안다'고 느끼면 틀림없이 최고의 죄의식을 느끼리라. 어떤가, 재미있지 않은가? 너희 삶 전체를 통틀어 너희는, '자신이 가장 많이 원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그것들을 너희에게로 끌어오리니. 이것들은 모두 삶의 재료들이다. 그것들을 사랑할 때, 너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바란다고 선언할 때, 너희는 삶이 마땅히 제공해야 할 모든 좋은 것을 택하겠노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미국과 너희 세상이 진실로 잘 굴러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사람이 기꺼이 전체로서 너희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할 때뿐이다.
그러니까 집단적인 의식은 집단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거군요.
바로 맞혔다. 이것은 너희의 기록된 역사 전체에 걸쳐서 수도 없이 증명되어왔다. 바탕은 자신을 자신 속으로 끌어당긴다. 너희 과학자들이 소위 '블랙홀'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과 똑같이. 그것은 비슷한 에너지를 비슷한 에너지 쪽으로 끌고 가며, 나아가 물체들까지도 서로 끌어당기게 한다. 그때 이 물체들은 서로 반발해야, 즉 서로 멀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영원히 서로 합쳐져서, 사실상 자신들의 지금 모습을 잃고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될 것이기에. 의식 있는 모든 존재는 이 사실을 직관으로 알고 있어서, 자신이 다른 모든 존재와 맺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영원한 녹아듦'에서 물러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다른 모든 존재 속으로 녹아들어가 '영원한 하나 됨'을 체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상태다. 이 상태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이 상태를 향해 이끌린다. 이 밀물과 썰물의 왕복 운동은 우주와 우주 속에 있는 만물의 기본 리듬이다. 이것이 섹스 sex, 즉 '에너지의 협동 교환 the Synergistic Energy Exchange'이다. 너희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서로(그리고 그 바탕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결합하는 쪽으로 이끌려간다. 그러다가 '결합의 순간'이 되면, 그 '결합'에서 떨어지려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너희는 서로 반발한다. 그 '결합'을 체험할 수 있도록, 그 '결합'에서 자유롭게 남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너희가 일단 그 '결합'의 일부가 되고 거기에 계속 머무른다면, 너희는 더 이상 '분리'를 알지 못할 것이기에 그것을 통일로서 인식할 수도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신이 자신을 '그 모든 것'으로 알려면 신은 자신을 '그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 알아야 한다.
- 너희는 그들도 너희가 도달한 결론과 똑같은 결론에 이르길 원한다. 그래서 너희는 그 결론이 너희에게 가져다준 실수를 되풀이하게 만드는 운명을 아이들에게 지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옛 가치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해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했던 주장들은 어떻게 하고요? 십대 출산율과 십대 미혼모의 믿기지 않는 급속한 상승은요? 또 우리 세상이 미쳐 날뛰는 건요?
너희 세상은 미쳐 날뛰어왔다. 나는 그 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하지만 너희 세상이 미쳐 날뛰어온 건 너희가 너희 학교들더러 가르치도록 허용했던 것들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미쳐 날뛰어온 건 너희가 학교들더러 가르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학교들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임을 가르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너희 학교들이 조건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맙소사! 우리는 우리 종교들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또 너희는 너희 자식들이 자신과, 자신의 몸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경이로운 자신의 성적 자아를 찬양하는 것을 배우도록 허용하지도 않겠지. 또 너희는 너희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육체에 깃든 영적 존재로서 자신을 알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테고. 더욱이 너희는 너희 아이들을 육체 속에 들어간 영혼으로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성(性)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논의하고, 즐겁게 설명하고 체험하는 사회에서는 사실상 성범죄라는 게 없고, 예기치 못한 나이에 출산하는 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사생아"나 원치 않는 출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로 진화한 사회들에서는 모든 출산이 축복이며, 모든 어머니와 모든 아이가 사회의 보살핌을 받는다. 사실 그런 사회라면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사가 강자와 권력자들의 시각으로 기울지 않는 사회들에서는 과거의 잘못은 드러내 놓고 인정되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백히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단순히 기억해야 할 사실들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력과 살아가는 재능을 가르치는 사회들에서는, 과거의 소위 "정당한" 행동들조차 집중적인 점검을 받는다. 어떤 것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그런 식으로 되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 살아가는 재능을 가르치는 학교 제도라면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어떤 식으로 접근한다는 겁니까?
너희 교사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주려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사건을 몰고 온 모든 사실 -사실 전부- 을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교사들은 그 충돌의 양쪽 당사자들 입장에 선 역사가들의 시각을 검토하면서, 어떤 것에나 하나 이상의 관점이 있기 마련임을 깨달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그들은 그 문제와 관련된 사실들을 암기하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놓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이제 너희들은 이 사건에 관한 모든 걸 들었다. 너희는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또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일어났던 일 전부를 알고 있다. 우리는 너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수집할 수 있었던 모든 '지식'을 너희에게 주었다. 이제 이 '지식'에서 너희는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만일 너희가 그 당시에 직면했던 문제들과 그 당시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해결했던 문제들을 풀어야 할 사람으로 뽑힌다면, 너희는 어떤 식으로 그 문제들을 풀겠는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아, 그럼요. 그런 건 쉬운 일이죠. 그런 식이라면 말입니다. 말하자면 지나고 나서라면, 누구라도 답안을 낼 수 있기 마련이죠. 누구라도 그 사람들 어깨너머로 쓱 훑어보고는 "나 같으면 다르게 했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왜 너희들은 하지 않느냐?
뭐라고요?
왜 너희들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 너희들은 어깨너머로 쓱 훑어보고, 너희 과거에서 배워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 까닭을 말해주지. 너희 아이들에게 너희 과거를 살펴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허용한다면, 아니 교육의 일부로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일을 처리해온 방식에 그들이 다른 의견을 가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아이들은 너희와 의견을 달리할 것이다. 너희는 단지 그런 불일치가 학교에서 너무 많이 허용되지 않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피켓을 흔들고, 소집영장을 찢고, 브래지어와 깃발을 불태운다. 그들은 너희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 너희가 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한다.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너희에게 비명을 질러왔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구!" 하지만 너희는 듣지 않는다. 너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너희는 그들이 수업에서 얻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북돋우고 싶지도 않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 여기에 들어와서 우리가 지금껏 잘못했다고 말하지 마. 그냥 우리가 옳은 걸로 받아들여."
이것이 너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너희가 교육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 지금의 너희 학교들은 무엇보다 대답을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학교의 최우선 역할을 질문하는 데 두었더라면 훨씬 더 유익했을 텐데 말이다. 정직하다, 책임진다, 혹은 "공평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점에서 2+2=4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은 모든 아이가 자기 스스로 그 대답들을 찾아내고 창조하게끔 북돋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혼란이 온다구요!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비(非)혼란 상황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이지...
좋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되면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거라고 하죠.
나는 지금 너희가 이런 것들에 대해 배우거나 판단했던 것들 일체를 학교가 너희 자식들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전혀 반대다. 오히려 예전에 어른들이 배우고 발견하고 판단하고 선택했던 것들 전부를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학교가 그들에게 봉사하는 길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이 모두가 어떤 식으로 굴러왔는지 관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 학교들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옳은 것'으로서 학생들에게 제시한다. 실제로는 자료들은 그냥 그것, 자료로만 제공되어야 하는데도. '과거 자료'가 '현재 진실'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전 시기나 이전 체험에서 나온 자료는 언제나 새로운 질문의 근거로 쓰여야 하고, 오직 새로운 질문의 근거로만 쓰여야 한다. 보물은 언제나 대답이 아니라 질문 속에 있기 마련이니.
그리고 질문들은 항상 같아야 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보여준 이 과거 자료에 관해 너희는 동의하는가, 아니면 의견을 달리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언제나 이것이 중심 질문이고, 언제나 이것이 초점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제 아이들이 이 질문에 자기 부모의 가치를 적용하리란 건 명약관화하다. 부모는 아이들의 가치 체계를 창조하는 데 계속해서 강력한 역할, 명백히 최우선 역할을 할 것이다. 학교의 취지와 목적은 가장 어린 나이에서부터 공식 교육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그런 가치들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사용하고 적용하고 작동시키게 북돋우는 것, 그렇다, 그것들을 문제 삼도록 북돋우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문제 삼길 원하지 않는 부모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매개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당신이 묘사하는 그런 학교가 있길 바랍니다. 정말로요!
이 모델에 접근하려고 애쓰는 몇몇 학교들이 있다.
있다고요?
그렇다. 루돌프 슈타이너 Rudolph Steiner란 사람의 저서들을 읽어봐라. 그가 발전시킨 발도르프 학교 Waldorf Schule의 방법들을 연구해봐라.
- 당신은 발도르프 학교가 최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나는 그것이 쓸 만한 보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인간으로서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 너희가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 너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볼 때, 나는 그것을 교육이 어떻게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시행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비록 너희 행성과 너희 사회에는 그런 예들이 드물긴 하지만, 내가 열거할 수 있는 여러 예들 중 하나로 말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집단의식의 강요가 아니라, 집단의식의 변화다. 행위와 모든 법률과 모든 정부 정책은 '존재 상태'에서 나와야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참된 반영이어야 한다.
- 우리 사회의 법률들은 당연히 우리 자신을 반영하죠! 법들은 모두에게 "이것이 현재 미국의 상태라고.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지”라고 말하지요.
아마 최상의 경우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너희 법률이란 건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권력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상태를 선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법으로 "무지한 다수"를 가르친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다.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만일 우리 중에 똑똑하고 잘난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기꺼이 사회와 세상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건 다수를 돕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그 소수의 동기에 따라 다르고, 그 동기의 명확성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수들 스스로 자신들을 다스리게 놔두는 것보다 더 "다수에게 봉사"하는 건 없다.
너희는 누군가의 친절이 필요하지 않으니, 그가 불친절하다고 해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으니, 그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누가 너희에게 잔혹하거나 해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히려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처신하는 게 필요하지 않고, 그들이 너희를 해칠 수 없음을 너희가 확신할 것이기에.
너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누가 너희 생명을 가져가려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지면, 나머지 것들도 사라질 수 있으니, 너희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내면의 직관으로 너희가 창조했던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으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너희가 '내면의 평화'를 발견할 때, 어떤 사람이나 장소나 물건이나,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의 있고 없음은 너희 마음 상태의 창조자일 수 없고, 너희 존재 체험의 원인일 수 없다.
이것이 너희가 몸의 전부를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천만에, 너희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너희 육신과 육신의 기쁨 속에서 완전해짐을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몸의 일에 대한 너희의 몰두는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일 것이니, 너희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몸의 감각을 체험할 것이다. 행복을 느끼거나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 제가 지금 언급하는 견해, 많은 사람들이 지닌 견해란,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받을 만큼 받아왔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먹어 살리려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짓, 사실 열심히 일해 "해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벌주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본래 그들이 가난하길 원해서 가난하다고 믿지요. 대부분이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책임지기보다는 정부의 젖꼭지나 빨려한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부의 재분배, 공유는 사회주의의 죄악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만인의 노력 전체를 담보로 인간의 기본 존엄을 보장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악마적 기원을 갖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공산당 선언 Communist Manifesto>에 나오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구절에서 찾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관념이 냉정하고 무자비하다는 비판을 받으면, 그들은 기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온다는 주장에서 도피처를 구하죠. 그들은, 애초부터 불리함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들이 "해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해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해내지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너는 그게 감사할 줄 모르는 건방진 생각이라고 느끼는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든 다른 어떤 생각이든, 생각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질문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는 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생각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을 살펴볼 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런 생각을 지니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 내가 관찰하기로는, 소위 불리함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 아니 집단들은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높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누구도 불리하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개개 영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 딱 맞는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자기 스스로 창조하기 마련이기에. 너희는 모든 것을 선택한다. 너희 부모와 국적과 재진입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비슷하게. 너희는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깨닫기 위해서 사람과 사건과 환경들을 선택하고 창조한다. 현재 너희가 원하는, 정확하고 올바르고 완벽한 기회들을 끌어오게끔 고안된 사람과 사건과 환경들을.
달리 말하면, 영혼이 이루려는 바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불리하지 않다". 예컨대 영혼은 자신이 이미 시작한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장애가 있는 몸으로 일하거나 억압적인 사회나 심한 정치경제적 긴장이 있는 곳에서 일하길 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희는 설령 물질적인 의미에서는 "불리함"에 직면한 사람이라도, 형이상학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사실상 올바르고 완벽한 조건임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게 현실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불리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참으로 그들이 원하는바로 그곳에 있으니, "자신들의 업보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까?
그것은 대단히 좋은 질문이고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먼저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해 판단한 것들의 반영임을 기억하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술, '되고자 하는 자신'을 결정하는 창조 행위임을. 나는 계속해서 이 측면으로 돌아가리니,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유일한 일이며, 너희가 꾀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영혼이 진행시키는 일, 다른 일정은 없다. 너희는 '참된 자신'이 되려 하고, '참된 자신'을 체험하려 하며, 그것을 창조하려 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이라는 모든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이제 이런 맥락 속에서, 너희 세계에서 관찰되는 식의 상대적인 용어로, 소위 불리해 보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너희가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저 상황과 관련해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가?"
달리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너희가 남과 만났을 때는 "나는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너희의 첫 번째 질문은 언제나 나는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 가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니라.
이건 인간관계를 진행시키는 방식에 관해 제가 지금껏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통찰이군요. 제가 지금껏 배워왔던 것들 전부와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 인간관계들이 그토록 엉망진창인 건, 너희가 언제나 상대방이 원하고 남들이 바라는 것을 알아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너희가 진실로 원하는 것 대신에 말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줄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데, 그때는 자신이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결정한다. 너희가 보기에 상대방에게서 바랄 것이 전혀 없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할 으뜸가는 이유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너희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에 너희가 바라거나 바랄지도 모르는 뭔가가 상대방에게 있는 걸 보게 되면, 너희의 자기 생존 양태가 잽싸게 자리를 차고 들어앉아, 너희는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주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그렇게 한 것에 화를 낸다. 특히나 상대방이 너희가 바라는 것을 결국 주지 않을 때는.
- 자 어디,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보자. 아, 그렇군. 불운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지.
첫째,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판단하라.
둘째, 만일 자신을 '원조'와 '도움'과 '사랑'과 '자비'와 '배려'로서 체험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것들이 가장 잘 될 수 있을지 자세히 살펴보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 되는 자신의 능력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깨달아라.
사실 그들을 혼자 내버려 두거나, 그들에게 자조(自助)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때때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최상의 방법이자 너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잔치다. 인생은 잡다한 뷔페 요리 같은 것이니. 너희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라는 큰 접시 하나를 줄 수 있다. 너희가 어떤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그를 깨어나게 만드는 것, 그에게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기억하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때로는 밀거나 당기거나 살짝 찌르는 것 같은 약간의 도움으로... 그리고 때로는 너희가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일 없이, 그의 진로를 달리게 하고, 그의 길을 따르게 하며, 그의 두 발로 걷도록 만들겠다는 결정만으로.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 선택에 대해 알고 있으며, 날마다 그것을 놓고 고민한다.) 너희가 불운한 사람들에게 도움 될 기회를 갖는다는 건, 그들을 다시 마음 쓰게 하는 re-mind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자신에 대해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그들에 대해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그들을 불운한 사람으로 보는 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 헷갈리는군요. 잠시만 다시 뒤로 돌아가도 됩니까? 좀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전 당신이, 우리가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은 종종 그들을 혼자 내버려 두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 같군요. 이 두 가지 진술은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은데요.
그 문제에 대해 너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명확히 해주마. 다른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식의 도움은 일절 제공하지 마라. 절대 너희 쪽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나서지 마라.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이나 국민에게 너희가 제공해야 하는 것들 전부를 알려줘라 - 그런 다음에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기울여라. 즉 그들이 무엇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알아보라.
그들이 원하는 도움을 제공하라. 그 사람이나 그 국민이 그냥 내버려 두길 원한다고 말하거나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낼 때는, 너희가 주고 싶은 도움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이 너희가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은혜일 수 있다. 설사 나중에 가서 그들이 다른 걸 원하거나 바라더라도, 너희는 그것을 주는 게 너희 일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너희 일이라면, 그것을 주어라.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주지 않도록 하라. 무력하게 만든다는 건 의존을 조장하거나 의존을 낳는 것을 말한다. 사실 남을 힘 있게 만들면서도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진실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곤경을 철저히 무시한다면, 그건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무 적게 하는 것도 너무 많이 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너희가 더 높은 의식을 갖자면, 형제자매의 극심한 곤경을 고의로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이 "자업자득으로 고생하게 내버려 두는 게 너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은혜"라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태도는 최고의 정당화이자 오만이다. 이것은 단지 너희가 팔짱 끼고 있는 것을 정당화해줄 뿐이다.
- 당신이 제안하는 건 어떤 겁니까?
이것은 제안이 아니다. 이것은 도전이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의 모든 돈, 너희의 모든 지폐와 동전과 주(州)의 통화를 내던지고 다시 시작할 테면 해보라고 도전한다. 널리 공개되고 완전히 투명하고 금방 추적되고 완벽하게 책임지는 국제통화제도를 발달시키고, 남들에게 봉사한 서비스와 생산한 생산물에 대해서는 '채권 Credits'을 사용한 서비스와 소비한 생산물에 대해서는 '채무 Debits'를 받는 '세계 공용 보수체계 Worldwide Compensation System'를 세울 테면 세워보라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투자 수익과 상속재산, 시합 상금, 봉급과 임금, 사례금과 사은금 따위의 모든 것이 이 '채권 채무 방식'에 근거할 것이다. 그래서 이 외에 달리 유통할 수 있는 통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채권' 없이는 아무것도 구입하지 못할 것이고, 모든 사람의 채권 채무 제표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공개될 것이다.
(리뷰자 주 : ... 크립토?)
그 사람의 은행 거래 내역을 알려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노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체계는 그런 시나리오에 접근한다. 사람들은 지금 너에 관해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거나, 적어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단지 서로에 관해서만이 아니다. 너희는 매사를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기업들이 얼마를 대금으로 지불하고 얼마를 쓰는지도, 각 항목별 가격만이 아니라 각 항목별 비용이 얼마인지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 다시 한번 너를 초대하노니, 다음 것들을 그냥 한번 생각해보라.
네 생각엔 너희가 이런 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더 이상 어떤 비밀도 없고 완전무결한 투명함만이 존재하는 삶을?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왜 할 수 없는가?
너희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감추는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이고,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실이 아닌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사실은 대관절 어떤 것이냐?
생략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저지른 그런 거짓말들이 너희 세상을 너희가 진실로 원하는 곳으로 만들었느냐? 침묵과 비밀유지로 이루어지는 조작(시장이나 특정 상황이나 혹은 단순히 어떤 개인에 대한 조작)이 진실로 우리를 이롭게 해 주었느냐? "프라이버시"라는 게 과연 우리 정부와 기업과 개인들의 삶이 잘 되도록 해주었느냐? 만일 모두가 뭐든지 다 알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
- 네 감정을 따르라는 것이 네가 얻고 있는 지침이다. 네 영혼에 귀를 기울이고 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라. 내가 어떤 선택사항이나 견해나 관점을 네게 제시하더라도, 네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 만일 동의하지 못하겠으면, 동의하지 마라. 바로 이것이 이 훈련의 유일한 목적이다. 다른 것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네 의존을 통째로 이 책에 대한 의존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네가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神)다. 나는 생각하는 너다. 나는 소리 내어 생각하는 너다.
이 자료가 '가장 높은 출처'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물론 그것은 '가장 높은 출처'에서 왔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가장 높은 출처'는 바로 너라는 점이다. 그리고 네가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그 모든 걸, 네 삶의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창조하는 것도 너라는 점이다. 바로 '네'가... 네가 그것을 창조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 네가.
그러니 순전히 정치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서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가? 그렇다면 그 대답을 바꿔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네가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며, 어떤 것에 대한 네 지금 생각을 네 다음번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더 타당하고 더 진실되고 단정하기 전에. 네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언제나 네 새로운 생각임을 잊지 마라. 언제나 그러함을.
- 그런데도 너희는 국가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는지 궁금한가? 여기 대중 정치 운동의 주요 지도자 한 사람이 있다. 의사당 안에서 자기 반대파를 때려눕히는 것으로 자신의 됨됨이를 과시해야 했던 사람이. 너희는 이해하는 것이라곤 힘뿐인, 대단히 미개한 종족이다. 너희 행성에는 어떤 참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법'이란 '자연법'이다. 설명할 수도 없지만, 또 설명하거나 가르칠 필요도 없는 법. 관찰하는 것만이 가능한 법.
참된 법이란 누구나 당연히 그 법의 지배를 받게끔 되어 있기에, 모두가 자유롭게 그 법의 지배를 받는 데 서로 동의하는 그런 법이다. 따라서 그들의 동의는 동의라기보다는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법들은 강요될 필요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결과라는 단순한 방책이 그것들을 이미 강요하고 있기에.
네게 예를 하나 들어주마. 고도로 진화한 존재들은 망치로 자기 머리를 내리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다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의 머리도 망치로 내리치지 않는다. 진화된 존재들은 네가 어떤 사람의 머리를 망치로 친다면, 그 사람이 다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네가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그 사람도 화가 날 것이고, 그런데도 네가 그 사람이 화낼 짓을 계속하면, 그는 결국 자기 망치를 찾아내서 네 등을 내리칠 것이다. 따라서 진화된 존재들은 다른 사람을 망치로 치는 건 자신을 망치로 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네가 가진 망치가 더 크고 그 수가 더 많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얼마 안 가 너도 다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관찰할 수 있는 결과다.
진화되지 못한 존재들, 미개한 존재들도 같은 것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간다.
- 어떤 추한 것이라도 일단 말로 표현되고 나면, 너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발견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표현된 모든 느낌에서, 너는 그것들이 일단 표현되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네가 진실로 어떻게 느끼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발견한다. 이런 식으로 느낌은 농간을 부릴 수 있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이긴 하지만, 그것이 네 마음이 만들어낸 어떤 모조품은 아닌지, 네가 과연 자신의 참된 느낌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맙소사! 그래서 이젠 제 느낌조차 믿을 수 없게 됐군요. 전 그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구요! 당신이 제게 가르쳐준 게 바로 이거라고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 네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니 잘 들어야 한다. 어떤 느낌들은 참된 느낌들, 즉 영혼에서 태어난 느낌들이지만, 어떤 느낌들은 모조(模造) 느낌들이다. 이것들은 너희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 느낌들이다. 달리 말해 그것들은 전혀 "느낌"이 아니다. 그것들은 생각이다. 느낌으로 변장한 생각들. 이런 생각들은 너희의 이전 체험과 너희가 남들을 관찰한 체험에서 나온다. 누가 이빨을 뽑을 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고 나면, 너희도 이빨을 뽑을 때 얼굴을 찡그린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얼굴을 찡그린다. 너희의 이런 반응은 현실과는 무관하다. 단지 남들의 체험이나 예전에 너희에게 일어난 일에 근거해서 너희가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인간 존재로서 겪는 가장 위대한 도전은 '지금 여기가 되는 것', 상황을 꾸며내길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pre-sent 순간(너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보낸 sent" 순간)에 대해 생각하길 그만두어라. 그 순간 속에 있어라. 기억하라, 너희는 이 순간을, 엄청난 진실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그 순간을 하나의 선물로 자신에게 보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해내고 싶어 하던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도착하면 너희는 당장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속에 있는 대신, 너희는 그 순간 밖에 서서 그것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다시 반응한다 re-acted. 다시 말해 너희는 예전에 했던 식으로 행동한다.
- 이제 이 두 단어를 잘 살펴보라.
REACTIVE (반응하는)
CREATIVE (창조하는)
이 둘은 같은 단어다. 단지 "C"만 움직였다! 그러니 너희가 매사에 정확하게 "C"를 놓을 때 너희는 '반응하지' 않고 '창조하게' 될 것이다.
- 어쨌든, 보다시피 내가 지적하려는 바는 각각의 순간을 그에 대한 사전 생각 없이 깨끗한 상태로 만날 때, 너희는 예전의 자신을 재연(再演)하는 대신 지금의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삶은 창조 과정이다. 그런데 너희는 줄곧 그게 마치 재연 과정인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이전 체험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러내고, 그에 따라 대응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정상 normal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연스러운 natural 것은 아니다. "정상"이란 건 일상적인 것을 뜻한다. "자연스러운” 건 애써 "정상"이려고 하지 않을 때의 너희 상태다. 자연스러움과 정상은 같은 게 아니다. 특정 순간에 너희는 정상인 일을 할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일을 할 수도 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자연스럽지는 않다. 사랑에 차서 행동한다면 너희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화내고 분개하면서 반응한다면, 너희는 정상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 그 사람이 떨어져 죽은 건 그가 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올바른 존재 상태였다면, 그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희와 다른 존재로 과시하고자 했기에, 결국 신성(神性)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빌딩 위의 그 사람은 자신이 나머지 너희와 다르다고 상상하는 자기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거짓으로 자기 증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더 크고 더 많은 권능을 지닌 존재로 구별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자기애 ego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각기 분리된 자기애로는 본래 '하나'인 것을 복제하거나 증명할 수 없다. 빌딩 위의 그 남자는 자신이 신임을 증명하려 함으로써 만물과 자신의 통일이 아닌 분리만을 증명했다. 결국 그는 '신성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려 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통일성을 증명함으로써, 또 그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서나(그리고 바라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통일성과 전체성을 봄으로써 신성을 증명했다. 이 점에서 그의 의식과 내의식은 하나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불러내는 건 무엇이나 그 '성스러운 순간'에 그의 '신성한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 저는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왔습니다. 제가 그런 식의 설교를 지겨워해도 용서해주시겠지요?
환멸을 느낄 만큼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사실 네가 애쓴 데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해야겠지만, 말하자면 '노력 A'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네가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 말에 동의하진 못하겠다. 네가 구하고 두드리는 걸 35 년 동안 했다 말았다 했다는 데는 대개는 말았다 쪽이지만 동의해줄 수 있지만. 이전에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너는 문젯거리가 생겼을 때라야, 뭔가가 필요할 때라야 내게 왔다. 나이 들어 성숙해지자 너는 그게 신과 맺는 올바른 관계가 아닐 성싶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하려 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는 대개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더 시간이 지나서 신과의 영적 교류로만 신과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너는 교류를 도와주는 것들을 실천하고 행했다. 하지만 너는 이것들조차 산발적이고 일관성 없이 시도하곤 했다. 너는 명상에 잠겼고, 의식을 거행했으며, 기도와 찬송으로 나를 불러냈고, 네 속에 있는 '내 영혼'을 깨웠다. 하지만 네 마음에 들 때만, 네가 영감을 느낄 때만 그렇게 했다. 이런 식이라도 나(神)에 대한 네 체험이 영광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너는 네 삶의 95퍼센트를 분리의 환상에 사로잡혀 보냈다. 궁극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으로 깜박이는 순간들을 간신히 여기저기에 가지면서.
너는 지금도 여전히 차 수리와 전화요금 청구서와 네가 인간관계들에서 원하는 것들에 헌신하는 걸 삶이라 생각한다. 즉 너는 자신이 창조한 드라마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헌신하는 것을 삶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계속해서 드라마를 창조해내는 까닭을 깨달아야 하는데도, 너는 그 드라마를 연기해내느라 너무 바쁘다. 너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네 깨달음대로 살지 않는다. 너는 신과 교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그 방법대로 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이 그 길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는 그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는 내게 와 자신이 35년 동안 줄곧 구하고 두드려왔노라고 말한다. 나도 네 환상을 깨뜨리긴 싫지만... 이제 내게 환멸을 느끼는 건 그만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할 때가 왔다.
- 자, 내가 말해주마. "그리스도"가 되고 싶은가?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라. (너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그 방법을 보여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처럼 되어라(너는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가르침들을 남겼다.). 네가 그것을 구하려고만 하면, 너는 이 점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네게 지침들을 주고 있으니.
- 내게 가까이 오라, 내게로 가까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묵주 기도를 하고, 돌에 입 맞추고, 동쪽을 향해 절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추를 흔들고, 근육을 움직여보아라. 아니면 책을 써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너희는 각자 나름의 틀을 지니고 있다. 너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이해해왔고 나를 창조해왔다.
-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남자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여자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둘 다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쪽도 아니다. 너희 중 일부에게 나는 순수 에너지다. 또 일부에게는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궁극의 감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너희는 그냥 '내가 ~이다! Am'라고 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나는 ~이다.' 나는 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이고, 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햇살이며, 네 얼굴 위에서 춤추는 비다. 나는 공기 속 꽃향기이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이며, 향기를 실어 나르는 공기다. 나는 네 맨 처음 생각의 시작이고 네 마지막 생각의 끝이다. 나는 네 가장 멋진 순간에 반짝였던 아이디어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영광이다. 나는 지금껏 네 가장 사랑스러운 일을 추진케 한 느낌이며, 그런 느낌을 몇 번이고 다시 갈망하는 네 부분이다. 네게 잘 맞는 일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예배 의식(儀式)이든 논증이든 명상이든 생각이든 노래든 말이든 행동이든 간에, 네가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나를 기념하며 그렇게 하라.
-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천국에 갔다. 지옥은 없다. 따라서 천국 말고 그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다. 그의 행동들은 너희가 잘못 mistake이라고 할 만한 것들, 즉 진화되지 않은 존재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유죄판결로 벌줄 수는 없다. 그것은 교정할 기회, 진화할 기회를 제시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해악이나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다. 그 영혼들은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지상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단지 그 영혼들이 들어선 기쁨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시기상조였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 되었다"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 설령 그들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쳐도, 그들은 가장 차가운 마음을 가진 고립주의자들조차 더 이상 무시해버릴 수 없을 만큼 독일에서의 고통이 광범하게 확산될 때까지도, 그것을 무심하고 냉담하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치 운동 성장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던 건 패거리 의식 collective consciousness이다. 히틀러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 그가 그 순간을 창조한 건 아니다. 이것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해서 분리와 우월성에 대해 떠들어대는 집단의식은 대중이 동정을 잃게 만드니, 동정을 잃게 되면 그다음엔 당연히 양심을 잃기 마련이다. 완고한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패거리 개념은 남들의 곤경은 무시하면서도, 자기네 곤경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사람이 책임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복수와 교정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치식 해결책, 즉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였다. '히틀러 체험’의 끔찍함은 그가 인류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용납했다는 사실에 있고, 그 체험의 경악스러움은 히틀러가 나섰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섰다는 사실에도 있으며, 그 체험의 부끄러움은 히틀러가 몇백만의 유대인들을 죽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히틀러가 제지당하기 전에 몇백만의 유대인들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 체험의 목적'은 인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 역사를 통틀어 너희는 주목할 만한 선생들을 모셔왔으니, 그들 모두는 '참된 자신'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기회들을 너희에게 제공했다. 이 선생들은 너희에게 인간 잠재력의 최고치와 최저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생생하고 숨 막히는 예들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기존 의식 상태대로라면 너희 중 다수가 갈 수 있고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 보여주었다. 잊지 마라, 의식만이 전부이고, 너희의 체험을 창조하는 건 의식이다. 집단의식은 워낙 강력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결과를 빚을 수도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추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 선택은 언제나 너희 것이다. 만일 네가 너희 집단의 의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라. 남들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네가 본보기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너 자신의 집단을 형성하라. 너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험하기를 원하는 의식의 발단이 되어라. 네가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그런 의식을 체험하리니.
그것은 너와 더불어 시작된다. '모든 것'이, '모든 일'이.
- 너희는 자기표현 과정을 매개로 하여,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영원한 순간' 속에 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을 '가장 웅대한 해석'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너희 삶의 사람들과 사건들과 환경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이 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여러 층(層)의 과정이다. 그 모든 것이 여러 수준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너희의 일직선 현실에서 너희는 체험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 중의 하나로 본다. 너희는 자신이 한 번의 삶을 갖는다고 생각하거나, 설령 여러 번의 삶이라 해도 당연히 한 때에 딱 한 가지씩만 갖는 걸로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란 게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면 너희는 모든 "삶"을 한꺼번에 가지지 않겠느냐! 실제로 너희는 그렇다! 너희는 이번 삶, 현재 실현되고 있는 삶을 너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모두 한꺼번에 살고 있다! 미래의 사건에 대해 "기묘한 예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 너희를 그 사건에서 돌아서게 만들 만큼 강력한 예감을? 너희 언어로는 이것을 전조(前兆)라고 부른다. 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너희의 "미래" 속에서 이제 막 체험한 어떤 일에 대해 너희가 갑작스럽게 지니게 된 단순한 자각일 뿐이다. "미래"의 너희가 "이봐, 이건 조금도 즐겁지 않아. 이건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전체 집단들 중에서 그 수가 가장 적다. 사실 그 수는 아주 적다. 이 집단은 물질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있다. 이 집단이 몰두하는 건 영적 진실과 영적 실체, 영적 체험이다. 이 집단의 사람들은 삶을 영적인 만남, 영혼의 여행으로 본다. 그들은 이런 맥락 안에서 모든 인간사에 반응하고, 모든 인간 체험을 이 패러다임 안에서 파악한다. 그들의 투쟁은 신을 찾고, 자아를 실현하며, 진리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진화하면, 이 투쟁은 더 이상 투쟁이 아니라 과정 process이 된다. 그것은 '자기규정'(자기 발견이 아니라)과 '성장'(배움이 아니라)과 '존재'(행위가 아니라)의 과정이 된다. 구하고, 애쓰고, 찾고, 뻗고, 성공하는 이유가 완전히 달라지고, 어떤 일을 하는 까닭이 변하니, 그와 더불어 그 일을 하는 사람 역시 변한다. 과정이 그 이유가 되니, 행위자는 존재자 be-er가 된다. 예전에는 평생 구하고, 애쓰고,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세속의 것을 마련하는 데 있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하늘의 것을 체험하는 데 있다. 예전에는 주요한 관심이 몸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주요한 관심이 영혼에 대한 것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모든 것이 변한다. 삶의 목적이 바뀌고, 따라서 삶 자체도 바뀐다. "위대해지려는 동기"도 변하니, 그와 더불어 세속의 부를 탐내고 확보하고 지키고 늘리려던 욕구도 사라진다.
- 너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너희가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조건 없이 주는(다시 말해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너희는 조건 없이 받는 법을 배우리라. 삶이란 것은 너희에게 그런 상태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운송 수단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본 생존권이 있고, 설사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설사 그들이 아무 기여도 하지 않더라도, 인간다운 생존은 삶의 기본권 중 하나라는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감싸도록 해보라. 나는 너희에게 모든 사람이 충분히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자원을 주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나누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냥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빈둥거리며, "자선금이나 모으러 다니는" 걸 막을 방도는 뭡니까?
첫째로, 어떤 삶이 허비되는 삶인지 심판하는 건 너희 일이 아니다. 70년 동안 시에 관해서 생각하며 빈둥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몇천 명의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통찰력의 문을 열어주는 단시(短詩) 한 편을 내놓는다면, 그것이 과연 허비되는 삶이냐? 평생 남에게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남을 속이고, 협박하고, 조종하고, 해치기만 하던 사람이, 그래서 그 결과로 자신의 참된 본성 중 뭔가를 기억해낸다면, 아마도 몇 평생을 들여서 기억해내려고 애써왔을 뭔가를 기억해낸다면, 그래서 마침내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면, 그것이 과연 허비되는 삶이냐? 그 삶이 과연 "쓸모없는" 것이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밟아가는 여정을 심판하는 건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 너희 일은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가 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사람들이 그냥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빈둥거리고, "자선금"이나 모으러 다니는 걸 막을 방도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럴 방도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진짜로 이것이 들어 먹히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도 기여하는 사람들이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도 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죠?
아니다. 그들은 화낼 것이다. 그들이 계몽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계몽된 사람이라면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분노가 아니라 큰 자비로 대할 것이다.
자비요?
그렇다, 기여자들은 비(非)기여자들이 가장 위대한 기회와 가장 장엄한 영광, 즉 창조할 기회와 '참된 자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관념을 체험하는 영광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을 터이고,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게으름에 대한 벌로 충분하다는 걸 알 터이니.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굳이 그런 벌이 필요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진실로 기여하는 사람들은 자기 노동의 과실을 가져가서 게으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에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까요?
너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구나.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존분이 주어질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득의 10퍼센트를 기부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소득이 정해지는 방식으로 말하면, 공개된 시장원리에 따라 그 삶의 기여 가치가 평가될 것이다. 지금 너희 나라에서 그렇게 되고 있듯이.
그렇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있겠군요. 지금 하고 똑같이! 그건 평등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평등한 기회다. 모든 사람이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기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지식을 획득하고 기술을 발달시키며, '즐거운 곳'에서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동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기에.
'즐거운 곳'이라니요?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일터"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러움은 남지 않겠습니까?
부러움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질투라면, 아니다. 부러움은 더 나아지도록 너희를 몰아가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두 살짜리 아이도 자기 오빠 손에는 닿는 문손잡이를 자기도 잡고 싶어서 용을 쓰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부러움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러움은 자극제이며, 순수한 바람이다. 부러움은 위대함을 낳는다. 반면에 질투는 다른 사람을 더 못하게 만들려는 두려움에 쫓기는 감정이다. 그것은 흔히 원망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것은 분노에서 시작해서 분노로 끝난다. 그래서 질투는 사람을 말려 죽인다. 질투는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질투로 뒤엉킨 삼각관계 속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질투는 죽이지만, 부러움은 태어나게 한다.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온갖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누구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억눌리지 않을 것이니, 인종이나 성별(性別)이나 성적(性的) 성향 때문에 억눌리지 않을 것이며, 출생이나 계급 신분, 나이 때문에 억눌리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든 간에 억눌리지 않을 것이다. 그냥 어떤 이유의 차별이든 차별 자체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 그 나머지, 예를 들면 연간 2,500만 달러(이것은 논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사용한 지극히 임의적인 수치다)가 넘는 나머지 모두는 인류 전체를 이롭게 할 정책과 사회보장에 쓰일 것이다. 그 이유?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지닐 수 있는 소득의 최고 한도는 이 행성의 의식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리니, 즉 그것은 삶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지 않고, 가장 많은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반영할 것이며, 사실 부를 나누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끈질기고 노골적인 사회 정치적 딜레마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낸 가장 큰 단일 요소였다는, 그에 연이은 깨달음을 반영할 것이다.
부, 다시 말해 무제한의 부를 축적할 기회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초석인데요. 지금껏 세상이 알아왔던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를 만들어낸 자유기업과 자유경쟁 체제 말입니다.
문제는 너희가 진짜로 그렇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 진화된 존재들은 절대 "가장 큰 망치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놀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개한 존재들은 그 놀이밖에 하지 않는다. 덧붙여둘 것은 이것은 주로 남자들이 하는 놀이라는 점이다. 너희 종족 중에서 '망치로 다치게 하기'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극히 드물다. 그들은 새로운 놀이를 즐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망치를 가졌다면, 나는 그걸 두드려서 정의를 만들어내고 자유를 만들어내겠네. 나는 그걸 두드려서 이 세상 전체에 내 형제자매의 사랑을 만들어내겠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진화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진실이란 자연법처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법이 아닌 모든 법은 관찰할 수 없다. 그래서 너희에게 설명해줘야 한다. 너희는 그것이 왜 너희 자신을 위해서 좋은지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너희에게 보여져야 한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여 나를 바꾸는 법 (0) | 2022.07.08 |
---|---|
[바딤 젤란드] 타프티가 말해주지 않은 것 - 세상에서 가장 괴이하고 매혹적인 자기계발 픽션 (0) | 2022.07.04 |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 3 (0) | 2022.07.01 |
[브루스 D. 페리, 오프라 윈프리]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열 번의 대화 (0) | 2022.06.22 |
[정명호] 욕망을 이롭게 쓰는 법 -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십시오 (0) | 2022.06.15 |
[알렉산더 로이드] 메모리 코드 -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하루 10분의 비밀 (0) | 2022.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