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닐 도날드 월시 / 조경숙
원제 : CONVERSATIONS WITH GOD book 1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출간 : 2019.05.10
약 일주일에 걸쳐서 천천히 읽어나갔다. 이전까지 읽어왔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있었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있었다.
문득 읽음을 통해서 얻는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생활 속에서의 실천과 그를 통한 피드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은. 그리고 나면 또다시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불과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달라진 면이 있다. 적어도 두려움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매 순간 열정을 다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살아라.'
수많은 영성 도서와 자기계발서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처음에는 신기했다.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상태를 결정했다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흘려보내야 한다. 무언가를 '그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본질을 정했다면 그것이 '아닌' 것들은 그것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이미 그것은 '된' 것이므로 '원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역설과도 같다. A라는 상태가 되겠다고 정하고, 그 상태를 사랑하게 되면 그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이는 A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A라는 상태가 되겠다고 정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결정한 만큼의 현실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천을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언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항시 관찰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정말 자신이 되고 싶은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다.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것을 열망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모든 것이 조화로워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을 가까이서 살펴본다면 돌부리와 작은 벌레와 미생물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쁜 것은 없다. 제각기의 본성에 따라 가장 적절한 곳에 자신다운 행위를 하며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의 총합이 '조화'라면, 자신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만 '조화'로워지게 된다. 지금의 자신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 또한 다른 자신이 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신을 두고 지금의 자신과 다른 부분을 바꿔나가는-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노력도 현실 차원에서의 창조일 것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잘못된 것도, 나쁜 것도 없다. 전체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 속에서 작은 가지가 부러지고 떨어진 열매들이 썩고 있어도, 그 어떤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자신의 세계에서 흘려보내 공기로 만들어버리면 그 뿐이다.
어려운 길이다.
-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여러분이 이 대화에 뛰어들었으면 한다. 여러분을 여기로 데려온 건 바로 여러분의 인생 체험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여러분 저마다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리라. 자, 이제 내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한 가지 의문, 즉 '신은 누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내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받은 대답은 이러했다.
-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언제나 말한다. 문제는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말을 귀담아듣는 가다.
- 먼저 '말한다 talk'를 '교류한다 communicate'로 바꿔보자. 뒤의 것이 훨씬 낫고 훨씬 충실하며 더 정확한 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즉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내게 얘기하려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말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 때문에 나는 말만으로 교류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말로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자주 쓰는 교류 형식은 느낌이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다.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자신에게 참인지 알고자 한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느낌이란 건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도 자주 있고, 그러나 네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것이야말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이다. 비결은 그런 느낌들에 다가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영상을 자주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전달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낌도 생각도 체험도 모조리 실패할 때, 나는 말을 쓴다. 사실 말은 가장 비효율적인 전달자다. 말은 너무나 빈번하게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를 낳곤 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은 그저 입 밖에 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과 생각과 체험을 드러내는 소리 말은 상징이자 기호 표지(標識)다.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다. 너희가 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 앎을 주는 것은 체험이다. 물론 너희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앎의 다른 도구들도 주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도구들을. 그런데 여기서 최고의 역설은 너희가 '신의 말'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체험은 아주 하찮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 너희는 체험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있어서, 체험한 신이 말로 들은 신과 다를 때 아무 생각 없이 체험을 버리고 말을 간직한다.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너희가 어떤 것을 체험하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로 알고 직관으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말이란 너희가 아는 것을 상징으로 나타내고자 할 뿐이어서, 흔히 너희의 삶을 어지럽힌다. 자, 이런 것들이 내 교류 도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그 자체로 교류 방법은 아니다. 모든 느낌과 모든 생각과 모든 체험과 모든 말이 다 나한테서 나오는 건 아니기에.
- 그게 악마의 짓이라거나 그저 누군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들, 혹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전능한 신',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드러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산을 옮긴다 해도 "그건 악마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통해 신 자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내면 체험으로 신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외부 관찰은 필요하지 않다. 또 외부 관찰이 필요하다면 내면 체험은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신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요청 자체가 곧 신이 그곳에 없다는, 즉 신의 어떤 것도 지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에. 그런 진술은 그런 체험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생각은 창조력을 갖고 있고, 너희의 말은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생각과 말은 함께 어우러져 너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신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체험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청하지 않을 것이기에.
-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 want'는 너희의 진술은 정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 wanting'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다.
- 기도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열렬한 진술이다. 따라서 어떤 기도도 응답 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모든 기도, 모든 생각, 모든 진술, 모든 느낌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 기도를 얼마나 열렬하게 진실하게 지속하는가에 따라, 바로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은 너희의 체험 속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기도에 응답이 없었다고 할 때도, 실제로는 가장 열렬하게 품고 있는 생각이나 말 혹은 느낌이 작용한다. 하지만 너희가 알아두어야 할 건, 생각을 조종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 뒤의 생각이란 점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이것을 '받침 생각 Sponsoring Thought'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걸하거나 간청한다면 너희가 선택하는 것을 체험할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진다. 그 모든 간청의 배후에 있는 '받침 생각'은, 자신은 지금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에, 그런 식의 받침 생각이 너희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뒤덮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받침 생각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신은 틀림없이 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생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수는 아주 적다. 신이 모든 요구를 언제나 들어주리라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요구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이해할 때 기도하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된다. 그것은 결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의 진술이다.
- 이렇게 시작해보자. 영혼,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오랫동안 사색해왔다. 너희와 내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 세상 나이의 몇 배나 되는 이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러니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로운지 족히 짐작이 가리라!
-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앞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너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 uncreate' 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기 위해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가?
-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생기게 하는 것 / 생긴 것 / 존재하는 것
이 '삼중'의 실체는 신의 표지다. 그것은 신성한 패턴이다. 하나 속의 셋은 숭고한 영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든, 신과 의식이든, 혹은 그 외의 다른 모든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너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너희는 삶의 모든 조악한 관계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나쁜 일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말씀인가요? 이 세상의 재앙과 재난들조차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자신'의 대립물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는,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은 없나요?
- 아니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소위 나쁜 일들을 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각된 감각으로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너희 자신의 창조물들이다. 너희는 항상 창조하는 과정 속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일분 일분마다, 그리고 날마다. 너희가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지금은 그것에 대한 내 이야기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라. 너희는 하나의 커다란 창조기(器)여서 말 그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새로운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과 사건과 조건과 상황들은 모두 의식에서 창조된다. 한 개인의 의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둘 이상의 의식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어떤 종류의 창조 에너지가 분출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중의식이라면? 우와! 그 힘은 너무나 막강하여 세계적인 중요성과 지구적인 결과를 낳는 사건들과 환경들을 창조할 수 있다.
-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식으로, 너희가 그런 결과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만큼이나 너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 역시 나처럼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으로 네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희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너희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앞선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선각자가 늦든 빠르든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부라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그 따위 짓"을 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자가 저 발에 있다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할 때라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을 바꿀 힘을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뭔가를 바꾸는 첫 단계는 네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너희가 개인 차원에서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너희의 오성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는 어떤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노력하라.
-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죽이는 짓을 끝내는 것처럼 극히 간단한 일에도 함께 합의를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늘에다 대고 종주먹을 치면서 너희의 삶을 질서 잡히게 해달라고 외쳐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 스스로 하지 않는 어떤 것도 내가 너희를 위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법칙이고 예언이다. 세상이 지금 상태대로 존재하는 것은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하는 것이다.) 지구가 지금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의 삶이 지금 방식대로인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는 그 따위 트럭에 치이길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강도에게 습격당하거나, 그런 미치광이에게 강간당하길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말할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 너희 모두가 도둑의 마음속에 훔치려는 욕구, 즉 감지된 필요를 만들어낸 상황의 원인 제공자들이다. 너희 모두가 강간을 가능케 하는 의식을 창조했다. 너희가 자신에게서 범죄를 일으킨 이런 면을 볼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을 치유할 수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걸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라. 운 나쁜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라. 더 나은 내일이라는 사소한 약속으로 대중을 움츠러들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 편견을 끝장내라. 성(性) 에너지에 대한 무의미한 금기와 억압들을 치워버려라. 그보다는 성 에너지의 경이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그것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게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강도와 강간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사회로 나아가는 긴 여정에 들어설 것이다.
-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트럭이 튀어나오고 하늘에서 벽돌이 떨어지는 이른바 "사고란 것"에 대해서는 그런 개개 사건을 더 큰 모자이크의 작은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너희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각자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악마의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악마 같은 건 결코 없으며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는 실현되지 않음이라는 망각의 늪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 싸움에서 패배할 수 없다. 너희는 실패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싸움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그것을 끊임없는 투쟁으로 볼 것이다. 너희는 그 투쟁을 둘러싸고 웬만한 종교 하나를 창조해내기에 족할 만큼 오래도록 그 투쟁을 신봉할 수도 있다. 이런 종교는 투쟁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 가르칠 것이다. 그 가르침은 틀렸다. 그 과정을 진행시키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오히려 승리는 지는 데서 얻어진다.
- 그래, 네 삶이 '도약하길' 바란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되기 바라는 대로 네 삶을 그려보고 그 속으로 옮겨가라,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점검하라.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라. 네 고귀한 전망에 걸맞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라. 네 가장 위대한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끔 적어두어라. 네 가장 좋은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연관된 사람들과 함께 그런 행동을 바로 잡아라.
- 하지만 나는 문제를 무시하거나 문제가 없는 척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그 상황에 관련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을 말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만일 네가 망했다면 너는 망한 것이다. 그 사실을 놓고 거짓말을 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얘기를 지어낸다는 건 속을 허하게 만드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망했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잣대는 그 사실에 관한 네 생각, 예를 들면, "망한 건 나쁜 일이다", "이건 끔찍한 일이다", "괜찮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실제로 망하기까지 하는 일은 절대 없는데, 나는 못난 놈이다" 따위의 생각이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망한 상태로 있을 것인지 보여주는 건 그 사실에 관한 네 말, 예를 들면, "나는 망했어", "나는 땡전 한 푼 없어", "내 수중에는 돈이 말랐어" 따위의 말이다. 네 현실이 그런 식으로 지속되게 만드는 것은 그 사실을 둘러싼 네 행동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잔뜩 기가 죽어 앉아있고,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 따위의 행동이다.
- 우주에 관해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어떤 상황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가치판단 내리길 그만둬라. 두 번째로 알아둬야 할 사실은 모든 상황이 다 한순간이라는 것이다. 항상 똑같이 머무는 것도 없고, 정지된 채 남아 있는 것도 하나도 없다. 그러니 뭔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 아마도 너는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파악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대해 판단하는 짓을 그만두고.
- 제가 저 자신의 영혼에 대해 판단하고 있다고요?
- 끊임없이. 나는 방금 전에 죽고 싶어 하는 자신에 대해 너희가 어떤 식으로 판단하는지 보여주었다. 너희는 자신이 살고 싶어 한다고, 참으로 살고 싶어 한다고 판단한다. 또 너희는 자신이 웃고 싶어 한다고 판단하고, 울고 싶어 한다고 판단하며, 이기고 싶어 하고 지고 싶어 한다고 판단한다. 즉 기쁨과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고 판단한다. 특히 너는 자신이 지고 싶어 한다는 판단을 잘 내린다.
- 제가요?
- 너는 어디선가 자신의 기쁨을 부정하는 게 신성한 태도요, 삶을 찬양하지 않는 게 성스러운 태도라는 사고방식을 만난 적이 있다. 너는 자신에게 말해왔다. 부정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 부정하는 게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그냥 부정일 뿐이다. 만일 너 자신을 부정하고 나서 기분 좋게 느낀다면 네 세계에서 그것은 좋은 것이다. 만일 네가 기분 나쁘게 느낀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대개의 경우엔 너는 판단하지 못한다. 너는 그래야 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자신을 이런저런 식으로 부정한다. 그러고 나서 너는 그렇게 한 건 좋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자신이 기분 좋게 느끼지 못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므로 맨 먼저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이런 판단들을 그만두는 것이다. 영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바람과 함께 가라. 영혼과 더불어 가라. 영혼이 추구하는 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바람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목표다. 영혼은 그 느낌을 추구한다. 지식이 아니라 느낌을 지식은 이미 갖고 있지만, 지식은 개념에 불과하다. 느낌은 체험이다. 영혼은 자신을 느끼고자 하며, 직접 체험하여 자신을 알고자 한다.
- 가장 고귀한 느낌이란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은 영혼이 갈망하는, 진리로의 위대한 복귀(復歸)다. 이것이 완벽한 사랑의 느낌이다. 완벽한 사랑이란 완벽한 흰빛이 일반 빛깔에 대해 어떤 관계인지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흰빛을 아무 빛깔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흰빛은 모든 다른 빛깔을 다 포함한다. 흰빛은 존재하는 모든 다른 빛깔이 섞인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증오, 분노, 정욕, 질투, 탐욕)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합(合)이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의 총화이며, '모든 것 everything'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슨 수로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내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때 무슨 수로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밟아나가는 여행의 단순함과 그 외경스러운 위대함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이해한다. 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 인간의 영혼이 한 번도 아래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번도 오른쪽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물론 영혼이 하는 일은 우리가 숭고함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최상의 '자신'을 고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 이것은 많은 생을 들여야 할 만큼 엄청난 과제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축복하기보다는 판단 내리기에 급급하고, 뭔가를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거나 "충분치 않다"고 규정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비난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너희는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건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이건 정말 하나같이 심오하군요.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제게 이런 얘기를 해준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는요.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이 중 일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당신은 우리가 "옳은 것"을 이해하려면 "그른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건 예를 들면 우리가 악마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 악마를 치유할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물론 진짜 악마 같은 건 없지만, 네가 선택한 용어로 대답한다면 말이다. 치유란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걸 이해하겠느냐? 신 말고는 선택할 것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신이 되길 선택할 수도 없다.
- 여기서 다시 비전적 측면들은 제쳐놓고 현실 문제로 들어가서, 너희가 남용당하는 상황에서도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만 알아낸다면, 적어도 너희는 그 남용만은 그만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와 가해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남용해도 좋은 상황에서는 가해자 자신조차도 남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용할 수 있는 상황은 가해자를 치유해주는 게 아니라 망치게 만든다. 가해자가 자신의 남용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거기서 뭘 배우겠는가? 반대로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음을 깨칠 때,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남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반드시 남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허용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 그렇다. 너희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때때로 남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를 이곳에서 그곳으로(상처받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으로 - 옮긴이) 가장 빨리 데려다주는 것은 완벽한 정직이다. 즉 어떤 것에 대해 너희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기꺼이 보여주고 인정하고 밝히고 선언하는 것. 네 진실을 말하라. 부드럽게, 하지만 충분히 완전하게. 네 진실에 따라 살아라. 유연하게, 그러나 완전하고 일관되게. 그리고 체험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면 쉽고 빠르게 자신의 진실을 바꾸어라.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신이라면 네가 관계 속에서 상처받을 때 "거기서 비켜 서.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네가 상처를 입고 있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게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그 관계가 네게 무엇을 뜻하는지 판단하고, 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너는 '되고자 하는 자신'을 선택하고, 또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럼 저는 제가 속한 관계들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나 저를 신의 눈에 흡족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참을성 많은 아내나 왜소한 남편, 혹은 제가 속한 관계들의 희생자가 될 필요는 없는 거군요.
- 맙소사, 물론 그럴 필요가 없지.
- 너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과, 아마도 너희보다 더 잘 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판단을 "옮음"과 "그름"에 관한 너희의 일상 판단 중에서 너희 자신의 이해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들일수록 특히 그러하다. 사실 문제가 중요할수록 너희는 더 기꺼이 다른 누군가의 관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왜 너희가 삶의 어떤 영역에 대해,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동안에 생기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 확실한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는지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흔히 이런 영역과 문제들 속에 너희 영혼에게 가장 핵심 되는 주제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신의 본질이라든가, 참된 도덕성, 궁극의 실체, 전쟁과 의학과 임신중절과 안락사를 둘러싼 생사관, 개인의 가치관과 그것의 구성 및 판단의 성격 같은 것들이 너희 대부분은 이런 주제들을 벗어던지고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렸다. 너희는 그런 주제들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희는 외친다. "누가 판단해줘! 나는 그 판단에 따를 거야. 따를 거라고!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만 얘기해달라고!"
- 인간에게 종교가 그토록 인기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종교가 단호하고, 일관성 있고, 추종자들의 기대를 명확히 해주고, 엄숙하다면, 신앙 체계가 무엇인가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특성들을 고루 갖춘 종교가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걸 무조건 믿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찾아낼 수 있다. 아무리 괴상한 행동과 믿음이라도 신의 뜻으로 돌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그들은 그게 신의 방법이요, 신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생각할 필요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 자, 이제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뭔가를 죽여야 할 정당한 근거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너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어떤 외부의 권위도, 자신에게 해답을 제공해주는 어떤 고차원의 근거도 필요 없다는 걸 깨달으리라. 너 스스로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살인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바를 깊이 통찰한다면, 너는 명백한 대답을 얻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신의 권위에 근거한 행동이다. 남들의 권위에 근거해서 행동할 때 너희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기 위해서 종교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행동 규범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반응으로 사회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살인이 과연 정치적인 해결책이나 영적 깨침, 사회문제의 치유책으로 적절한 방법인가? 거기다가 누군가가 너를 죽이려 들 때 너는 살인으로 대응해도 좋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지키려 할 때, 너는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폭력을 쓰겠는가? 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일 때도?
- 너희는 이런 그림들이 마음에 드는가? 너희가 만들고 싶은 인상들이 이런 것들인가? 이런 초상화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가? 이런 의문들을 다룰 때는 신중해야 한다. 이런 의문들은 아마 네게 생각을 요구할 것이다. 생각하기는 힘든 일이다. 가치판단 내리기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것들은 너를 순수한 창조의 자리에 서게 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난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가 무수히 많을 터이기에. 그럼에도 너희는 판단해야 하고, 그에 따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너희의 임의대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선택, 전혀 자신의 지식에서 비롯되지 않은 판단을 순수한 창조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 자신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된다. 너희 대부분은 그처럼 중요한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은 그런 일을 남들에게 맡겨버리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너희 대부분은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습관의 피조물, 다른 사람이 창조한 피조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 남들이 너희더러 이러저러하게 느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너희가 느끼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할 때, 너희는 깊은 갈등을 체험한다. 그럴 때면 너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어떤 것이, 남들이 얘기해준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겠는가? 어떻게 하겠는가?
- 옳거나 그른 것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 그렇다, 그런 건 없다. 네게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만이 있을 뿐이다. "옳음"과 "그름"이란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들이다. 나는 이 용어들을 이런 식의 의미로만 사용한다. 다시 말해 네게 도움이 되는가란 면에서, 혹은 네가 원하는가라는 면에서, 돈에 대한 네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음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네가 돈은 나쁜 것인데 너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자, 이제 너는 그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게다가 내 아들아, 너는 특히 이런 집단의식을 신주처럼 떠받들고 있다. 다른 대다수 사람들은 그 갈등 관계가 너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그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런 일로 돈을 버는 데 신경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쁜 걸"로 "나쁜 걸" 얻으니까. 하지만 너는 자신이 이날 이때껏 해온 일들을 사랑한다. 너는 그 일들 속에 채워 넣은 네 활동들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의 대가로 많은 돈을 버는 건, 네 사고방식으로는 "좋은 것"의 대가로 "나쁜 것"을 받는 것이기에, 너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는 순수한 노동의 대가로 "부당이득"을 취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으려 들 것이다... 마치 그 노동의 대가를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순수성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실제로 돈에 대해 이중 감정을 갖게 된다. 즉, 네 일부는 돈을 거부하고 또 다른 네 일부는 돈을 갖지 못했다고 화를 낸다. 이제 우주는 네게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들을 접수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 그러므로 돈과 관련된 네 삶은 들쑥날쑥하게 흘러갈 것이다. 돈에 대한 네 생각이 그렇게 들쑥날쑥 흘러가고 있으니까. 네게는 분명한 초점이 없다. 너는 사실상 무엇이 자신의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대한 복사기에 지나지 않는 우주는 네 생각들을 그저 무수히 복사해내기만 한다. 이제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돈에 대한 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 아마 그 질문일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보통 취하는 창조 방식은 생각과 말과 행위, 혹은 행동을 포함하는 3단계 과정이다. 먼저 생각, 다시 말해 형태를 이룬 발상 혹은 최초의 개념이 떠오른다. 이어 말이 나온다. 대부분의 생각은 결국 말로 되어 나오는 법이다. 흔히 글이나 이야기로, 이것은 생각에 에너지를 보태주어 생각이 세상 속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제 생각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된다. 마지막으로 말은 때때로 행동으로 옮겨져 소위 결과로, 즉 애초에 생각에서 시작된 것의 물질 표현으로 나타난다. 너희가 지은 세계 속에 있는, 너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즉 창조의 세 가지 중심들이 모두 사용되는 방식으로나 이것이 약간 변형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받침 생각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 이건 아주 좋은 질문이고,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머무르고 드러내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다.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지만,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 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지만,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 너희에게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지.
- 학교는 너희가 알고자 하는 어떤 걸 모를 때 가는 곳이다. 너희가 어떤 걸 이미 알고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앎을 체험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너희가 가야 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삶(너희의 표현대로)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다. 이걸 하기 위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걸 기억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 그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전형은 대체로 이렇다. 만일 사이 더없이 완벽하고 더없이 애정 깊은 존재라면, 왜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지진과 회오리바람과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 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깊은 신비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 속에 들어 있다. 나는 너희 주변에 너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내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게 하여 내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사랑 아님 not loving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너희에게도 내게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너희가 나온 곳도 거기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삶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神)은 아들이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 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다.
- 물론 너는 신을 아버지-아들로서 설명하는 게 성(性)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너희의 가장 최근 경전들에 나오는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앞서 나온 경전들은 이 비유를 어머니-딸의 관계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너희 사고방식에서는 그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아니면 생기게 하는 것과 생긴 것 간의 관계로 보거나.
- 삶의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관계들 속에서 이 삼위일체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 너희 종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삼위일체 진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표현해왔다. 너희 정신과 의사들 중 일부는 초의식과 의식과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너희 심령 주의자들 중 일부는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며, 너희 과학자들 중 일부는 에너지와 물질과 에테르를 본다. 너희 철학자들 중 일부는 어떤 것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모두 진실일 때만 너희에게 진실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시간을 말할 때 너희는 오로지 세 가지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지각 속에는 전(前)과 지금과 후(後)라는 세 순간이 존재한다. 우주 속의 지점들을 다루든 자기 방 안의 지점들을 다루든 간에, 너희는 공간 관계의 면에서 여기와 저기와 이것들 간의 사이 공간을 인식한다.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너희는 어떤 "사이 in-between"도 인식하지 못한다. 숭고한 영역의 관계들은 변함없이 3개 조(組)인 반면 조악한 관계들은 언제나 2개 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왼쪽-오른쪽과, 위-아래,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덥다-춥다, 그리고 일찍이 창조된 것 중에서 최대의 쌍인 남성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쌍들에는 사이라는 게 전혀 없다.
- 그리하여 작은 영혼은 전체에서 자신을 떼어냈으며, 거기다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이 영역에서 자신의 체험 속으로 온갖 종류의 어둠을 불러들이는 힘을 행사하여 그것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영혼은 더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너희가 가장 암담한 순간에 소리치듯이 그렇게.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너희 곁에 서 있다. 늘 변함없이 '참된 너희'를 기억시킬 채비를 갖춘 채, 너희를 집으로 불러들일 채비를 갖춘 채. 그러므로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되어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 그리고 너희가 자기 아닌 것에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고, 그 같은 창조를 이룬 자신을 칭찬하라. 너희가 그걸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조차도.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라. 너희가 창조하는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진술이기에. 내가 너희에게 작은 영혼과 태양에 관한 이런 우화를 들려준 건 세상이 왜 이런 식인지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며, 모든 이가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본질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기억하는 그 순간, 세상은 한 찰나에 변화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 지금, 인생은 학교이며 너희가 인생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들이 다 너희의 배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에도 이런 견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다시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너희는 배워야 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채 지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밝힘으로써 너희는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게 만들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거룩한 것으로 만든다.
- 만일 너희가 정확하게 재표출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영원 속에 투영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은 너희가 선택한 것들이다. 잘못은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창조한 것이 너희 자신이기 때문에.
- 너희는 이런 꼬리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나쁘다는 꼬리표를 달기보다는 그것들이 너희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너희가 세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바로 이 지적(知的), 영적(靈的) 부정직함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였다면, 혹은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만이라도 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책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토록 완벽한 고통으로 만들고, 그토록 신랄한 역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재해와 재난들, 즉 회오리와 태풍, 화산 폭발, 홍수 따위의 물질적 소동들을 특별히 네가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창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들이 네 삶에 미치는 강도(强度)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분방한 상상력으로도 네가 조장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류의 결합된 의식이다. 세상 전부의 공동 창조가 이런 체험들을 낳는다.
- 이 내용은 정신박약자와 허약자, 신체장애자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제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닌데요.
- 너는 그 사람들이 네 말처럼 장애를 가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너는 한 인간의 영혼이,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히 삶의 도전들과 마주친다고 상상하느냐? 이게 네가 상상하는 것이냐?
- 한 영혼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체험할지 미리 선택한다 말씀인가요?
- 그렇게 한다면 마주침의 목적이 무산될 것이다. 마주침의 목적은 지금이라는 거룩한 순간에 너희 체험을 창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이 체험할 삶을 미리 선택하지 않는다.
- 예수는 그들의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영혼들이 자기 과정의 일부로서 치료를 요청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그 과정의 완벽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영혼이 뜻하는 바를 인정하고 이해했다. 만일 예수가 정신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모든 질병이 불완전을 나타낸다고 느꼈다면, 그는 지구 상의 모든 이를 그냥 한꺼번에 치료하지 않았을까? 너는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하느냐?
- 아뇨.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 좋다. 그런데 네 정신은 여전히, 왜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고통받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치료해주었을까, 몹시 알고 싶어 하는군. 그렇다면 왜 신은 그것이 어떤 고통이든 항상 고통을 묵인하는가? 과거에도 줄곧 제기되어온 이 질문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그 과정 속에 완벽함이 존재한다는 것. 게다가 무릇 삶이란 선택에서 비롯된다. 선택에 간섭하거나 선택을 문제 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선택을 비난하는 건 특히나 더 적절하지 못하다. 그 선택을 관찰하고, 그런 다음 그 영혼이 좀 더 고상한 선택을 추구하고 더 고상한 선택을 내리고자 할 때, 그것을 도와줄 뭔가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남들의 선택을 주의 깊게 지켜보되 판단하지는 마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완벽하다는 걸 그들이 깨닫게 해 주라.
- 네가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이 네게 가져다준 것들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준 것들을 놓고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고통과 괴로움을 멎게 하고 환상을 끝장내고자 한다. 너는 지금대로의 세상에 질려 있다. 너는 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구하지 마라. 이제 그것을 불러내도록 하라.
-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그러지. 우선 자신에 관한 네 가장 고귀한 생각(자신이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생각-옮긴이)을 갖도록 하라. 네가 날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다면 되리라고 생각되는 네 모습을 상상해보라.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라. 그 모습과 네가 현재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느냐?
- 예.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 좋다.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자신에 관한 고귀한 전망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도 나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제 네가 지금 있는 곳과 되고자 하는 곳 사이의 차이를 알았으니,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네 가장 고귀한 전망에 걸맞게 바꾸기 시작하라. 의식적으로 바꾸기 시작하라. 그렇게 하려면 실로 엄청난 정신과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도 해야 한다. 또 여기에는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이 자각으로 가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만일 네가 이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평생의 반을 아무 의식 없이 보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너는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는, 네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자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며, 또 이 결과들을 체험하고 나면, 그 결과들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관련 있음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그런 의식 없는 삶을 그만두라는 외침이다. 이것은 너희의 영혼이 태초부터 너희에게 일깨우고자 했던 과제다.
- 자, 네 영혼은 가장 고귀한 느낌을 찾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고자, 완벽한 사랑이고자 한다. 네 영혼은 이미 완벽한 사랑이다. 네 영혼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 영혼은 그것을 아는 것 이상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완벽한 사랑이 되고자 한다. 당연히 너희는 신이 되려 하고 있다! 그것 외에 네가 이르고자 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 너희는 순간순간 너희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아마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어째서 그런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여기 있다.
1. 나는 너희를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했다.
2. 신은 창조자다.
3. 너희는 하나 속에 셋인 존재들이다. 너희는 이 세 측면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성부, 성자, 성신이라 할 수도 있고, 마음, 몸, 영혼이라 할 수도 있으며, 초의식, 의식, 잠재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다.
4. 창조는 너희 몸의 이 세 부분들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너희는 세 가지 차원에서 창조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창조의 도구들이다.
5. 모든 창조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그러고 나면 모든 창조는 말로 옮겨간다("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창조는 행동에서 완료된다("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했다").
6. 너희가 생각은 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는 것은 한 차원에서만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희 현실에 구현된다.
7. 너희가 진정으로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창조 과정에는 반드시 믿음, 즉 깨달음이 들어가야 한다. 절대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소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이다.("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따라서 창조에는 언제나 깨달음이 수반된다. 깨달음이란 본능적인 명확성, 완벽한 확실성, 어떤 것의 현실성에 대한 완벽한 인정이다.
8. 깨달음의 이 자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감사의 자리다. 그것은 미리 하는 감사다. 그리고 아마도 창조하기 전에 창조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최대 열쇠일 것이다. 그 같은 당연시는 신이 용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달음의 확실한 표지다. 모든 선각자는 그 행동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안다.
9. 너희가 창조하고 또 창조했던 모든 것을 찬양하고 즐겨라. 그것의 일부를 거부하는 건 자신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너희 창조물의 일부로서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너희가 그것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그것을 축복하고, 그것에 감사하라. 그것을 비난하지("빌어먹을! God damn it!") 마라.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니.
10. 설사 창조의 일부 측면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축복하면서 그냥 다른 것으로 바꾸어라. 다시 선택하라. 새로운 현실을 불러오라.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라. 이것을 장대하게 해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를 따를 것이다. 너를 따를 것을 온 세상에 요구하고 크게 외쳐라.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
- 거기다 몸을 누일 간단한 깔개 하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명상과 신에 대한 묵상에 바칠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신을 보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들에게 배우자와 자식들을 딸려줘라. 새벽 3시에 깨어나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보채는 아기에게서 신을 보게 하고, 월말마다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서 신을 보게 하며, 배우자를 덮친 병과 실직과 아이의 열과 부모의 근심에서 신을 보게 하라.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삶이다. 나는 네 피곤을 이해한다. 나는 네가 그런 투쟁에 신물이 났다는 걸 안다. 하지만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를 따를 때 그 투쟁은 사라질 것이다. 네 신적 공간에서 살도록 하라. 그러면 모든 사건이 다 축복이 되리니.
- 너희는 아직도 '참된 자신을 깨달으려("실현시키려")' 애쓰는 중이다. 삶(곧 나)은 너희에게 '참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넘칠 만큼 제공할 것이다(삶은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임을 명심하라). 너희는 '자신'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창조할 수 있으며, 사실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같은 대답을 가지고 나서지는 않는다. 똑같은 외부 체험이라 하더라도 하루는 참고 아끼고 친절하게 대하는 쪽을 택하고, 또 어떤 날에는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하면서 대하는 쪽을 택한다. 선각자는 항상 똑같은 대답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가장 고귀한 선택이다. 이 면에서 선각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 제자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 대응하거나 반응할 때, 어떤 수준의 선택을 하는지만 보아도 그 사람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 물론 이런 이야기는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낳는다. 이것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신학과 철학들이 중심으로 삼아온 질문이다. 진실로 이 질문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다른 질문들에 몰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어떤 것이 가장 고귀한 선택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가장 이로운 선택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가장 적게 손해를 볼 것인가란 질문에.
- 손해 안 보기나 최대한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삶을 살면, 삶의 참된 이익은 놓치고 만다. 그럴 기회를 놓치고 그럴 가능성을 잃는다. 이런 식의 삶은 두려움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식의 삶은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너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보호도 필요하지 않다. 사랑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너희가 앞의 두 가지 질문 가운데 두 번째 질문(어느 것이 이로운 선택인가라는 질문 - 옮긴이)에만 계속 답한다면, 너희는 결코 체험으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얻거나 잃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이와 다른 식으로 보는 사람, 자신을 좀 더 고귀한 존재로 보는 사람, 이기거나 지는 것이 인생의 시험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 시험은 사랑하는가 아닌가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는 남자는 "내 몸이 나"라고 말한다. 첫 번째 질문을 던지는 여자는 "내 영혼이 나"라고 말한다. 그러니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들어라. 너희에게 얘기하노니, 모든 인간관계의 결정적인 대목에는 딱 한 가지 질문만이 존재한다. 지금 사랑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 여기서 논의는 다시 한번 비전(秘典)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탐구하자면 "악"이라는 용어와 그에 관련된 가치판단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객관적 현상과 체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삶의 목적 자체가 점점 더 커져가는 무수한 현상들의 무더기 속에서, 소위 악이라는 몇 가지 산재된 현상들을 가려내길 너희에게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자신도, 또 다른 어떤 것도 선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을 인식하거나 창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소위 악이라는 것과 소위 선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악이라 규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악이다.
- 너희는 이 삶에서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계 속에 살고 있다. 이것, 즉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규정하며, 그렇게 하고자 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체험의 장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의 기능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신처럼 되는 것이 순교자가 되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희생자가 되는 걸 뜻하지 않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상처와 위험과 상실의 모든 가능성이 제거된 상태인 깨달음으로 가려면, 상처와 위험과 상실을 너희 체험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런 체험과 관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왜 저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없는 겁니까?
- 뭐라고? 삶의 재미도 누리면서, 거기다 생활비까지 챙기고 싶다는 건가? 형제여, 너는 꿈꾸고 있다!
- 뭐라고요...?
- 아, 농담이다. 네 마음을 살짝 읽었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게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지금까지의 네 생각이었다. 그렇지. 자, 이쯤에서 돌아보면 우리는 이 문제를 벌써 여러 차례 다뤄왔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비를 버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히 삶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걸 못하게 놔두지 않는다.
- 하지만 여기에는 꼭 제기되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다룰 때 흔히 놓치곤 하는 것이 이 요소다.
- 그게 뭡니까?
- 존재와 행동 간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행동 쪽에 역점을 두어왔다.
- 그렇게 해서는 안 되나요?
-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없다. 너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는가만이 있을 뿐. 너희가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선택한다면, 너희는 행동을 가지고는 그것들을 거의 얻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행복과 만족을 선택한다면, 행동 과정에서는 그것들을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신과의 재결합, 최상의 앎, 깊은 이해, 끝없는 자비, 완전한 자각, 절대적인 성취를 선택한다면, 너희는 행동으로는 그것들을 거의 이루지 못할 것이다.
- 마음의 기능은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몸의 기능은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함께 창조할 때, 신은 현실 속에 구현된다. 그럴 때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럴 때 하늘은 크게 기뻐한다.
-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 영혼은 너희가 '참된 자신'을 아는 데 필요한 것이 되고, 그것을 하고, 그것을 가질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너희 영혼은 지금 이 순간에 너희가 읽고 있는 글들로 너희를 데려왔다. 예전에도 너희를 지혜와 진리의 글들로 데려갔던 것처럼. 지금 너는 무엇을 하려 하느냐? 어떤 존재가 되길 선택하려는가? 너희 영혼은 과거에도 무수히 그러했던 것처럼 기다리면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 그 말씀은 제가 어떤 존재 상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제 세속적인 성공 여부가 결정되리란(저는 여전히 제 성공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뜻으로 이해해도 됩니까?
- 나는 네 세속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너만 거기에 연연할 뿐이지. 너희가 장기간에 걸쳐 특정한 존재 상태를 이뤄낼 때 자신이 하는 세상 일에서 성공하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 "생계를 꾸리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참된 스승들은 생계를 꾸리기보다는 삶을 꾸리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특정한 존재 상태들에 이르면, 삶은 풍족하고 충만하며 장대하고 보상받을 것이기에, 세속적인 부(富)와 성공은 조금도 너희의 관심을 끌지 않을 것이다. 삶의 역설은 너희가 세속적인 부와 성공에 아무 관심이 없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너희에게 흘러들어올 길이 열린다는 점이다. 기억하라, 너희는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걸 체험할 수는 있다.
- 제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다고요?
- 그렇다.
- 전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죠. 우리가 대화를 막 시작하던 무렵에요. 그러나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당신은 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해오신 것 같은데요. "네가 생각하는 대로, 네가 믿는 대로 다 이루어지리라"는 식으로요.
- 그 두 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우주로서는 네가 생각하는 걸 그대로 실현해주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네 생각은 "나는 세속적인 성공을 원한다"이다. 너도 이해하다시피 그런 생각은 호리병 속에 든 요정처럼 창조하는 힘이 있다. 네 말은 요정의 명령이다. 이해하겠느냐?
- 그런데 왜 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 이미 말했듯이 네 말은 요정의 명령이다. 그런데 네 말은 "나는 성공을 원한다"였다. 그럴 때 우주는 "알았다,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 그래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라. "나"라는 말은 창조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다. "나는"이라는 두 단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 말들은 우주에 보내는 진술이며, 명령이다. 이제 "나"라는 말(이 말은 '위대한 나 the Great I Am'를 불러들인다) 뒤에 따라오는 건 뭐든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 + "성공을 원한다 want"는 "성공이 모자라는 wanting 너"를 만들어내며, "나" + "돈을 원한다"는 "돈이 모자라는 너"를 만들어낸다. 생각과 말에는 창조력이 있기에 다른 결과는 나올 수 없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네가 성공과 돈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네 생각과 말과 행동 은서로 일치되고, 따라서 너는 확실히 이것들이 모자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알겠느냐?
- 맙소사! 정말로 그렇게 되나요?
- 물론이다. 너희는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주다. 그런데 너희가 예컨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딱 한 번 한 생각이나 말이라면, 그것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끔 그러하듯이 "뒈져라!"라거나 "지옥에나 가버려!" 라거나, 그 밖에 별로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생각하거나 뱉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 그거 고맙군요.
- 천만에. 그러나 너희가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꾸자꾸 되풀이한다면, 한두 번이 아니라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 되풀이한다면, 그것들의 창조력이 얼마나 엄청날지 생각해봤는가? 자꾸자꾸 되풀이된 생각이나 자꾸자꾸 표현된 말은 표현된 꼭 그대로 된다. 즉 생각하거나 말한 그대로 밀려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외부로 나와 실현된다. 그것은 너희의 현실이 된다.
- 그 말이 흔히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것, 비극이다. 너희는 비극을 사랑하고 삶의 드라마를 사랑한다. 너희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때까지 너희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언제고 너희의 진화 과정에서 드라마를 사랑하고, 너희가 살아온 "이야기"를 사랑하는 걸 그만둘 시점이 온다. 그때가 바로 너희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정하는 때, 꼭 바꾸기로 선택하는 때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이제 너는 알고 있다. 네 현실을 바꾸려면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하길 그만두면 된다. 네 경우라면 "나는 성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 저한테는 그게 거짓말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저 자신을 놀리는 게 됩니다. 제 마음은 "말도 안 돼!"라고 소리칠 겁니다.
- 그럼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을 하라. "지금 성공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라거나 "모든 게 다 내 성공을 돕고 있어"라는 식으로.
- 뉴에이지식 긍정 훈련의 배후에 깔린 수법이 바로 그런 건데요.
- 긍정이 너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진술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다. 긍정은 이미 이루어졌음을 너희가 아는 것에 대한 진술일 때만 효과가 있다. 소위 최고의 긍정은 감사와 인정의 진술이다. "신이시여, 제가 성공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말과 행동으로 옮겨진 그런 관념이나 생각은 그것들이 참된 앎에서 온 것일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데서가 아니라, 결과가 이미 만들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온 것일 때,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예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그에 앞서 기적을 가져다준 것에 대해 내게 미리 감사했다. 그로서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언한 것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과 나의 관계를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너희의 앎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 그러니 이제 네가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원하지" 말고 "선택하라". 너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을 선택하려는가? 더 많은 돈을 선택하려는가? 좋다. 그럼 그것들을 선택하라. 어중간하게 선택하지 말고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선택하라. 그러나 네가 이르게 될 발전 단계에서 "세속적인 성공"이 더 이상 네 관심을 끌지 않는다 해도 그리 놀라지 마라.
- 모든 영혼의 진화 과정에는 더 이상 몸의 생존이 아닌 영혼의 성장이 주요 관심이 되고, 더 이상 세속적인 성공 달성이 아닌 자기실현이 주요 관심이 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때가 아주 위험하다. 특히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실체가 바로 그거라는 것, 즉 자신이 몸의 존재가 아니라 몸속의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 중인 그 실체가 이 관점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전인 이 단계에서, 흔히 마음은 몸의 일들에 대해 더 이상 아무 신경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 영혼은 드디어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만 너무 흥분해 있다!
- 그럴 때 마음은 몸과 몸에 관한 모든 문제를 내팽개친다. 모든 게 다 무시된다. 모든 관계가 옆으로 제쳐지고, 가족들도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직업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청구서들은 그대로 방치된다. 몸은 오랫동안 먹지조차 못한다. 이제 그 실체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영혼과 영혼의 문제들에 집중된다. 이런 사태는 그 존재의 나날의 삶에서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비록 그 마음은 어떤 외상(外傷)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마음은 더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네가 미쳤다고 말한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너는 미쳤을 수도 있다.
- 삶이 몸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이 역으로 다른 식의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실체는 전에는 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인 듯이 행동했지만, 이제는 몸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얼마 안 가 그 실체가 기억해내게 되듯이(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다. 너희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너희는 언제나 3중의 존재로 머물 것이다. 죽음이 닥치면 몸과 마음은 떨어져 나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몸은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을 뒤에 남겨둔 채 형태를 바꾸긴 하지만, 그 외피(外皮)는 항상 유지한다. 마음(이것을 뇌와 혼동하지 마라) 역시 세 가지 차원, 혹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영혼 및 몸과 함께 결합하여 너희를 따라간다. 만일 너희가 다시 지상의 삶이라는 이 체험을 선택해야 한다면, 너희의 신성한 자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진짜 차원들을 소위 몸, 마음, 영혼으로 분리시킬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세 가지 다른 특성을 지니긴 하지만, 같은 하나의 에너지다. 너희가 이 지상에서 새로운 신체 속에 존재하기로 마음먹으면, 너희의 에테르성(性) 몸(너희 중 일부는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은 그 진동수를 낮춘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빠른 진동에서 질량과 물질을 낳는 속도로 늦춘다. 이 실제 물질은 순수한 사고의 창조물이다. 이것은 너희 마음이, 너희의 3중 존재 중에서 고귀한 마음의 측면이 이뤄낸 작품이다. 이러한 물질은 수천조 수천 경의 각기 다른 에너지 단위들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마음으로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 덩어리로 응고된 것이다. 너희는 진짜로 주(主)된 마음이고!
- 이 미세한 에너지 단위들이 자체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몸은 그것들을 버린다. 그러면 마음은 새로운 에너지들을 창조한다. 마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 속에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에테르성 몸이 그 생각을 "포착해서" 더 많은 에너지 단위들의 진동수를 낮추면(어떤 의미에서는 그 에너지 단위들을 "결정화[結晶化]하면"), 그것들은 다시 물질이 된다. 너희라는 새로운 물질이 이런 식으로 너희 몸의 모든 세포는 몇 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 너는 문자 그대로 몇 년 전의 너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 만일 너희가 질병에 대해 생각한다면(혹은 계속 화내고 증오하고 부정적이라면), 너희의 몸은 이런 생각들을 물질 형태로 전환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이고 병적인 형태를 보고 "무슨 일이야 What's the matter?"(이 말을 직역하면, "그 물질은 무엇인가?"가 된다 - 옮긴이)라고 물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물어놓고도 자기네가 얼마나 정확한 질문을 던졌는지 깨닫지 못한다. 영혼은 너희에 관한 진실을 간직한 채, 이 모든 드라마가 펼쳐지는 걸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순간마다 지켜본다. 영혼은 그 청사진을 원래 계획을 맨 처음 생각을 생각의 창조력을 결코 잊지 않는다. 영혼이 하는 일은 너희에게 '상기시키는 remember' 것, 즉 문자 그대로 '다시 마음을 쓰게 re-mind' 만드는 것이다. 너희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그리하여 지금 되고자 하는 자신'을 선택할 수 있도록.
- 내 아들이여, 이번 생에서 너는 사자(使者)다. 예고하는 사람이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며, 진리를 추구하고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한 번의 생애가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 아, 그럼요. 하지만 누구나 그 이상을 바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그렇지! 그리고 넌 그렇게 된다! 너는 항상 그 이상을 바라게 될 거야. 그게 네 본성이니까. 항상 더 나아지려고 하는 건 신성한 본성이지. 그러니 추구하라, 그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구하라. 이제 나는 이번 장의 서두에서 네가 던진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고자 한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네가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 외에 다른 건 일절 하지 마라! 네게는 시간이 거의 없다. 어떻게 생계를 위해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그 따위 삶이 있단 말인가?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 만일 네가 "하지만, 하지만... 제게는 딸린 식구들이 있습니다... 먹여 살려야 할 어린것들이 있고... 저만 쳐다보는 아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만일 네가 몸이 하는 일을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너를 기쁘게 해 줄 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일을 하라. 그러면 최소한 네 기쁨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 네 몸이 하는 일이 하찮다는 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몸의 활동은 어떤 존재 상태에 이르고자 시도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 상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만사가 제대로 질서 잡혀 있다면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행복하다. 그래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자비로워지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비롭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결정이 몸의 행동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의식 없이 행동하는 사람만이 몸이 하는 일을 매개로 영혼의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네 몸이 하는 일이 삶은 아니다"란 내 진술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네 몸이 하는 일이 네 삶의 현 상태를 반영해주는 건 사실이다.
- 이것은 또 다른 신성한 이분법이다. 그러나 다른 건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둬라.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간에 누구나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찾아내라! 그러면 네 가족들은 네가 돈을 벌고 못 벌고에 상관없이 기쁨에 찬 가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일어나 네 곁을 떠나려 한다면, 그들 나름의 기쁨을 찾을 수 있게 사랑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라. 한편, 만일 네가 몸의 일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정도로까지 성숙해지면, 너는 하늘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도 훨씬 더 자유롭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신은 행복한 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행복해하는 것까지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네가 이제까지 해온 일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진술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 일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다.
-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내가 '자신'이라면, 네가 하는 일을 사랑하라. 그렇게 하는 게 네가 창조하는 너 자신을 생생하게 진술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여자가 '자신'이라면, 네 일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 그러나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너희의 물질 형상은 너희가 마음으로 창조해낸 현실을 체험하고, 너희가 창조해낸 자아를 영혼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기(利器)이자 경이로운 도구이며 영광스러운 매개체로서 창조되었다. 영혼은 고안하고 conceive,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그 순환 구조는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만일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는(느끼는)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른 체험을 바란다면, 영혼은 그저 새로운 자아 체험을 고안해내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그러면 몸은 이내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는 이것의 가장 훌륭한 예였다. 너희는 예수가 어떤 식으로 부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믿지 않는가? 믿어라 그런 일은 일어났다!)
- 그러나 영혼이 결코 몸이나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리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너희를 삼위일체의 존재로 만들었다. 너희는 내 형상대로 내 닮은꼴로 만들어진 삼위일체의 존재다. 자아의 세 측면들은 결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각자 한 가지씩 기능을 갖고 있으며,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기능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것들보다 먼저 작용하지도 않는다. 세 가지 기능들은 한치의 차이도 없이 동등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고안-창조-체험. 너희는 고안한 것을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체험하며, 체험한 것을 생각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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