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최지욱] 이건 그릴 수 없겠지

일루젼 2022. 7. 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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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지욱
출판 : CABOOKS 
출간 : 2018.10.19 


       

이번 여름에는 그림 아니면 수영을 꼭 배우기로 결심했었다. 주로 겨울보다는 여름에 뭔가를 결심하는 편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날이 더워지면 열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 정도는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다. 여름에는 체온을 올리기 위한 에너지를 아낄 수 있으니 그나마 활동력이 좀 생기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원체 추위를 많이 타서 한때는 진단명을 받고 치료를 받았던 적도 있었고, 한 여름에도 뜨거운 음료만 고집했었는데, 올 여름 들어서는 얼음 띄운 음료도 잘 마실 수 있어서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매년 여름마다 뭔가 하나씩은 결심하곤 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수영과 미술 강습 중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수영은 이미 몇 차례 실패했던 경험이 있고, 미술은 교복을 벗은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꼭 수영을 제대로 배워볼 마음이었는데, 그럴거면 방학 시즌을 피해서 소규모 레슨을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해서 이번 여름에는 색연필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이런 저런 그림 관련 도서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와 읽게 되었다. <이건 그릴 수 없겠지>라니. 자신만이 그릴 수 있다는 자부심일까, 이런 건 도저히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조일까 궁금했다. 그렇게 읽다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느낌에 저자에게 자꾸만 나를 겹쳐 보게 되었다. (저자께는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툭툭 던져놓듯이 풀어가는 문장들이 담담하면서도 쌉싸름해서, 혼자 속으로 생각하던 것들을 들켰나 싶을 만큼 내 이야기 같아서, 적당히 흘려 읽고 말았다. 꽉 쥐어가며 읽으면 괴로워질 것만 같아서. 

 

좋았다.        

 


   

 

 

 

- 노트를 펴고 한숨 쉬며 몇 주를 보내고 나니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글 쓰는 게 너무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시각은 했지만, 역시 너무 어렵다. 그림 그리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용기가 몇십 배 더 필요하다. 내 말투가 어땠던가를 떠올려 보려는데, 도무지 가물가물 생각이 안 나서 결국 일전에 읽고 좋았던 글들을 다시 읽었다. 꽤 구체적인 일화에서 시작하는 글이 많았고, 내 생각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책은 오래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던 것 같다. 지나간 일은 몽땅 뭉쳐 서랍에 넣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 다른 누군가가 읽게 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써야만 풍부하면서도 잘 정리된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 편인데, 나는 서랍 속에 봉인해두는 일기만을 오랫동안 써왔기 때문에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하는 넋두리나 일상 속 단순한 소회 이상의 글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 일기장을 뒤적이며 옛 기억들을 들춰보던 습관은 시시한 일기를 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종이 위에 부지런히 적는 행위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쓸모없는 것이라도 생산해냈다는 만족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물론 일기가 창작활동의 준비운동이 되어준 날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충 몸 풀고 다시 침대에 누웠던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부지런한 창작자는 그저 '기분'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실제로 무언가 만들어 낼 테지만, 나는 대부분의 날을 '소비만 하지는 않았다'는 자기 위안으로 시작하고 마감해왔다. 글을 쓰기 전에 이렇게 길게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책을 유익하게 만들기는 글렀다. 자칫하면 재미없을뿐더러 해롭기 짝이 없는 책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 서문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과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 흡연실이 점차 사라지면서 담배도 많이 줄었다. 가끔은 테이블에 앉아 피우던 담배가 그립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담배 타임'이 다른 잡무들과 분리되어서 내가 방금 한 대 피웠는지 아닌지 헷갈릴 일도 없고, 무의미하게 줄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도 없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냥 옛날 그 공간의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일과 휴식과 수다 사이를 메우고 있던 연기는 명료하지 않았던 사고와 일상을 그런대로 긍정하게 해 주었다. 아마 그 무거운 연기 때문에 더 아득히, 더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걸 테다. 그때는 잡생각과 넘치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담배만 태울 수 있다면 오만가지 잡념으로 5-6시간은 너끈히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와 떠올려보면 허무할 정도로 무용한 생각들에 아낌없이 시간과 건강을 내어줬다. 그래서 그립다는 느낌을 입 밖으로 뱉기가 늘 조심스럽다. 내가 그리운 것이 '정확히' 그 대상인지 그저 더 젊은 시절의 나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실제로 금연에 성공한다면 나는 그녀를 불러낼 어떤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커피를 마시는 건 구태여 시간을 내어야 하니 번거롭고, 그렇다고 대뜸 '인사나 하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짧은 담소를 나누기에는 담배를 대체할 만한 매개가 없다. 이렇게 슬쩍 확인하는 친구의 안부도 금연에 성공한 이후에는 먼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

 

- 이 책을 쓰는 동안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이 이미 바뀌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담배를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마칠 때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 나이 들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는 습관을 조심하려는 요즘이다. 실로 아직 젊은 나이고, 그런 말을 많이 할수록 정말로 늙게 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10번씩은 예전 같지 않은 몸 상태에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니 말을 금해봐야 별 소용없는 듯하다.  

-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을 때까지 완벽히 정비한 침대에서 밤새도록 뒤척이는 것도, 기지개를 켜다 담에 걸리는 것도, 더 이상 좌식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도 모두 근 1,2년 사이의 변화다. 이런 문제는 가벼운 농담거리다. 앉았다 일어설 때 무릎을 펴지 못해 주저앉았다는 지인의 경험담에 맞장구칠 수 있는 우스운 잡담으로 써먹기 좋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자신을 농담의 소재로 쓰면서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 대화를 좋아한다. 머리에 새똥 맞은 얘기, 너무 익숙한 동네에서 길 잃은 얘기 같은 것.)

 

- 지난 여름의 일이다. 여느 날처럼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바람을 어떻게 그릴 거냐는 질문이었다. 그 친구는 바람의 모양과 바람이 부는 감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화면만 바라보았다. 바람을 어떻게 그릴지 생각해본 일은 당연히 없고, 그제야 생각해내려 해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그 질문을 한 친구는 수년간 회전하는 물체들의 운동성을 정지된 화면으로 그려내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실링팬 연작을 보면 날개의 일부만 보이거나 많아지거나 사라지기도 하는데, 이 장면을 그려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골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숙제인데, 이제는 바람을 그린다니. 손 등 위를 빠르게 날아간 파리에 슬쩍 움찔했다.

 

- 바람 그리기에 관한 질문을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온종일 걸어야 했다.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바람을 그리는 것이 내게 숙제가 되었다. 바람에 쓸리는 모래 알갱이, 흔들리는 이파리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살갗과 옷자락 사이에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걸음을 걷는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도 리드미컬한 바람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행인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봉다리의 바스락 소리도, 순식간에 지나간 비둘기 그림자도 모두 바람 같았다. 오규원의 시구가 문득 떠올라 잠시 개운했지만, 여전히 그 감각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상자에 담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상자부터, 집 한 채가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컨테이너까지 준비해 왔다. 상자에 바람을 담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가둬 둔 바람은 더 이상 바람이 아니니까. 이미 흘러버린 시간을 담아내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 그녀는 생각한다. 마주 보는 면이 뚫린 상자 안에는 어쩌면 수많은 바람을 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작업은 바람을 잡은 찰나의 순간을 무한히 반복하여 연장하는 일이 된다.

- 구름을 보면 넋을 잃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10월은 무척 반가운 달이다.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다양한 구름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쯤의 나는 '지구는 아름답다'고 매일같이 말하고, 일행이 있다면 함께 구름을 볼 것을 종용한다. 뭉게구름과 새털구름, 양떼구름, 먹구름이 모인 장면은 마구잡이로 배치된 자체로 아름답다. 지금 사는 동네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조금만 시선을 들어도 하늘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공원이 있어 해질녁에 맥주와 주전부리를 챙겨 밖으로 나가기 바쁘다.

-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전혀 다른 하늘이 되어있기 마련이라서 처음 올려다본 하늘처럼 새롭게 감탄하고는 한다. 문제는 구름을 감상하는 중간 슬쩍 따라오는 체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도저히 그릴 수 없겠지, 라는. 눈부신 정오의 여름, 나뭇잎 사이로 떨어져 일렁이는 빛이나 충분히 어두워지지 않은 거리에 켜지는 가로등을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들이 감동적인 만큼 그림으로 그릴 의욕은 사라져 버린다. 그나마 서툴게 찍은 사진도 실망스러워 다시 보지 않는다.  

 

- 처음 그림을 팔아본 일화도 하나. 대학교 크로키 수업 시간에 모델을 그리기 지겨워 다른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 있었다. 그중 그 수업을 가르치던 강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자신을 그린 드로잉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을 처음 만나본지라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몰랐다.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담배 한 갑을 요구했고, 그는 바로 말보로 레드 한 갑을 내밀었다. 그때는 담배 한 갑이 2,500원쯤 했었다. 드로잉을 가져가면서 액자에 넣어 걸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실제로 걸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리뷰자 주 : 이건 '그림을 사고 싶다'가 제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 다른 얘기지만, 옛날에는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좋았다. 그 어감에는 약간의 모자람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연상되었고, 그 영역에 내가 포함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끄러움의 정체는 깊은 곳에 나 자신을 여전히 아마추어로 여기는 마음일지 모른다. 내가 되고 싶은 프로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a) 일어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이 일정하다.

b) 술은 적당히 즐기고, 역시 같은 시간에 잠을 잔다.

c)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한다.

d) 매일 한 장 이상의 드로잉을 한다.

e) 그 와중에 요리를 해 먹고, 집을 깔끔하게 유지한다.

f) 변수가 없을 만큼 다양한 일을 해보았다.

g) 시작한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가늠할 수 있다.

h) 생활이 망가지지 않도록 능숙하게 스케줄을 조정한다.

i) 등등 거의 완벽함.

- 창작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새로운 것을 늘 시도해야 한다는데, 나만큼 익숙함을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음식만 해도 그렇다. 문득 낫또에 빠진 뒤에는 6개월 동안 낫또만 먹었고, 집에서 하는 요리는 매번 토마토 수프다. 맘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몇 장씩 사서 입는 것도 그렇고, 커피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새로운 카페 탐방을 미루는 것도 그렇고, 메뉴를 훑어보다 미련 없이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 번 들어가 봤던 화장실 칸만 다시 찾는 것도 마찬가지. 매번 다니던 길보다 더 가까운 루트가 있다고 해도 좀처럼 새로운 길로 다니지 않는다. 지독한 길치인 것도 한몫하지만. 

- 몇 달 전 우연한 기회에 어린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다. 그중 하나가 모험심이 없는 성격을 자책하길래, 덕분에 앞으로 새로울 것이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실제로 나는 익숙한 경험을 매번 새롭게 느끼는 재능이 있다. 좋게 포장한 말이지만. 어쨌건 평소에는 익숙함만을 따르는 내가 매번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꽤 요상하다. 다른 주제, 다른 목적을 가진 그림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기가 달갑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다. 전과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과 익숙한 스타일의 반복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느낌이다.

-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고유의 그림체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한동안 이렇게만 그려야지 싶다가도 막상 새로운 그림을 그림 때는 다른 질감으로 완성해버리고 만다. 모니터에서 떨어져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색감이라도 이전 작들과 비슷하게 맞춰볼까 고민하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스타일에 관한 고민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종종 다른 작가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걱정과 다르게 '모두 네 그림 같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그때는 그냥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다. 

- 어느 날 그림 그리는 한 친구가 따끈따끈한 그림 한 장을 전송했다. 이전에 그렸던 그림과 다른 것 같다며, 자기 그림 같냐고 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그림임이 확실해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새로운 시도를 할수록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기 내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이 책을 쓰고 있다. 매일 걸어도 낯선 길이다.

- 소설가들의 인터뷰에서 종종 이런 경험을 듣는다. 캐릭터를 만들어 특정한 공간에 놓아두면 이후에는 그들이 사건을 만들고, 작가는 그 이야기를 그저 받아쓰면 된다는 얘기 같은 것. 내게도 간혹 예상치 못하게 순조로운 네모가 있다. 어떤 선을 그어놓았더니 거기에 물이 고이고 사다리가 눕고 공간이 기울어지면서 리본이 떨어지고, 요소들이 절묘하게 착착 들어앉아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리기만 하면 되는 날.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상황을 매번 기대할 수는 없으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붙여놓고 떼어놓기를 반복한다.

 

- 나는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썩 좋지 않다.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당혹스러운 경험도 종종, 아니 사실 많다. 기억력도 훈련을 통해 향상된다는데,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써 온 탓일까? 일기장에 적고 난 뒤 바로 잊어버리는 습관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왔다.

 

- '몇 날 며칠에 A가 B 카페에서 C를 시켜 먹었잖아. 그때 파란 잠바 입고 있었는데 기억 안 나?’

이런 문장들을 들으면 나는 바로 백지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A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나와 무슨 관계인지조차 가물가물하기도 한데, 그럴 때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설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매번 오해라며 손사래를 치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고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 어쩌면 내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성격이 산만하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나눌 때 진심으로 경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주변의 소음, 유리잔의 빛, 굴러다니는 먼지들에 조금씩 주위를 뺏기는 듯하기도 하다. 모든 일상적인 것을 너무 열심히 본 탓에, 분위기와 인상만 남은 채 대화는 사라져 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주한 사람의 옷 주름, 이마를 가로지른 머리카락, 찻잔을 만지는 습관들을 관찰하는 일은 또다시 그 사람을 마주쳤을 때 실용적으로 아는 체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뿌옇게, 어떤 덩어리로, 혹은 아주 작은 한 부분, 그 시공간의 느낌 따위로 기억하다 보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어쩐지 떠오르는 그림을 그리는 데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다만 사실적이지는 않더라도 뿌옇게, 어떤 덩어리로 어쩌면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대한 감정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변명해본다.

 

-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는 것, 좋은 술을 마시면 숙취가 적다는 것. 깊지 않은 관계에서도 즐거움과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정말 다양한 삶이 있다는 사실은 늘 내게 용기가 되어주었다. 평생 몸담을 것 같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네팔로 건너가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사람, 건축일을 하다가 제주도에 집 지어 농사를 짓는 사람, 뒤늦게 탱고를 접했다가 아예 춤을 업으로 삼게 된 사람, 한국에서 도망쳐 독일에 정착해버린 사람... 끝에 다다라 무너질 때에 훌쩍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보며, 내 인생에도 어떤 새로운 시작이 찾아오게 될까,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으로 미래를 점쳐본다는 것이 신기하고 좋다. 물론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도 조금은 그렇지 않을까.

 

- 메모에서 그림을 시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다들 그림을 그릴 때 생각을 정리하며 메모를 할 텐데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굳이 말을 했을까. 그래서 문득 부끄러웠던 날이 있다. 그 메모란 것이 딱히 거창하지도, 의미심장하지도 않으니까. 심지어 아무 데나 적어 놓기 때문에 사라져 버린 메모들도 많고. 그래서 요즘에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둔다. 밥 먹다가, 자려고 누워있다가, 지하철 타고 가다가 끄적이는 글. 애초에 이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래된 습관이다. 길가다가 괜히 눈에 들어온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는 심리와 비슷하다. 어쩌면 그저 '중얼거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딘가에 맴돌던 인상을 비슷한 무게의 단어들로 뱉어보는 것이니까(그것이 처음의 인상과 같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메모로 시작한 그림은 허공에 뜬 아슬아슬한 토대를 이어 붙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

 

- 학부 때 시 쓰기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수업을 맡았던 강사가 시를 쓰는 사람인데도 말을 퍽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강의는 자료 없이 모두 말로 진행되었으나, 그가 말하는 내용은 거의 이미지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었다고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 예를 들면, "여기 네모난 것이 있는데, 이게 막 틈새가 삐죽하게 튀어나와요. '그런 느낌'이요."

- '그런 느낌'은 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 이전에 먼저 있었던 이미지가 무엇일까 추론해야 했다. 시를 쓰는 일이 머릿속에 그려진 인상에 맞는 단어들을 신중하게 골라 얹어보는 작업일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나의 메모도 이미 있었던 이미지를 말로 반죽해놓는 작업일 것이다. 글자로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잡힌 적도 없이 흩어져버린달까. 그 글자들을 흔들리는 발판 삼아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나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새삼,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싶다. 이렇게 또 책 읽지 않은 날을 반성하며 메모를 적는다. 

 - 대부분 시간을 컴퓨터와 씨름하다 보니 3년 사이 온갖 증상을 않는 몸이 되었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사람의 숙명인 듯 한동안 관절염에 시달려 고생하기도 했다. 집 가까운 곳으로 마실 나갈 때도 에어 맥스를 신어야 했으니 안타까운 숙명이 아닐 수 없다.

 

- 관절에 무리가 없는 신체활동을 해볼 요량으로 올봄에 수영을 시작했다. 사실 첫 몇 주는 물속에 들어가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충분한 운동이어서, 지금은 체육관이 휴관하는 날은 먼 곳까지 원정을 다닐 정도로 거의 매일 수영을 하고, 내친김에 아침저녁으로 요가를 한다. 이런 증세를 이쪽에서는 소위 '물뽕을 맞는다'고 표현한다. 수영을 시작한 뒤 물이 너무 좋아져서 틈만 나면 물에 들어갈 기회를 엿본다. 그림 이곳저곳에 물을 그려 넣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바다도 가고 싶고, 이왕 바다를 간다면 더 깊이 들어가면 좋겠다 싶어 뭐에 홀린 듯 스쿠버다이빙 자격증도 땄다.

- 먹고 살기 급급한 프리랜서에게 다이빙은 사치스러운 취미일 수 있다. 아마도 내 욕심만큼 자주 바다에 나가보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몇 주 뒤에 일본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한 김에 여태껏 관심 없던 료칸을 예약해봤다. 온천이나 해볼까 해서. 온천수도 물이니까. 수영, 요가, 다이빙, 온천. 무엇보다 내게도 여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놀라운 요즘이다.

 

- 나는 작정하고 여행한 적이 몇 번 없다. 스무 살 초반에 인도와 네팔로 6개월 다녀온 후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여행에 대한 환상이 별로 없는 사람의 여행은, 혹여 불쾌할지 모를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도 다녀오고 나서 어떤 귀중한 것을 얻었다고 긍정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이중 삼중의 소모전에 돌입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특별하지만, 번거로운 이벤트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영국으로 수영장 투어를 가고 싶고, 보홀로 다이빙 투어도 가고 싶고, 하카네에서 온천도 하고 싶고 그렇다.

 

- 시간이 오래 흐른 뒤 올 한 해를 두고두고 회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때가 서른 하고도 셋이었지. 그때 말이야, 문득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 내 첫 다이빙 투어는 동해였다. 풍경이 매번 다르고 거칠다고 하여 이상하게 끌렸다. 해변에 빨대나 소주병 같은 것이 버려진,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 폭죽을 터뜨리는, 갈매기가 망부석처럼 가로등 위에 앉아있는 풍경이 그때까지 내가 알던 동해바다였다. 그러니 이전에 내가 동해에 가봤다고 했다면 그 말은 절반만 사실이다.

 

- 에메랄드 빛 바다가 아니면 실망할 거로 생각했는데, 탁하고 추운 동해바다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10M 앞이 허공이었는데, 한 발 더 다가서면 거대한 산이 코앞에 드러나는 신기한 광경. 붉은 뿔 산호와 아직 채 피지 않은 흰 말미잘로 온통 뒤덮인 협곡과 홀로그램처럼 흔들리는 해초 사이에 헤엄을 쉬는 물고기들. 머리까지 얼어붙는 한류와 뜨끈한 난류 사이를 몇 번 지나면서 나는 내가 이 어둡고 장엄한 공간에 잠시 들른 무력한 방문객이라는 사실에 감동했다.

 

- 아마 이 물속도 그릴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늘 그리고 싶은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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