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도밍] 기묘한 병 백과

일루젼 2022. 7. 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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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도밍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19.12.20 


       

'도밍' 작가의 일러스트를 무척 좋아했다. <세 가지 환상>으로 처음 만났었는데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일러스트들이 정말 취향이었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최근 따라 그려보고 싶은 그림들을 생각하다 문득 그녀의 그림들이 기억이 났다. 실물 책은 책방 어디 한켠에 곱게 꽂혀 있겠지만 발굴이 좀 어려울 것 같았고, 급한대로 컬러링북이라도 구해보려던 참에 리디셀렉트에서 <기묘한 병 백과>를 발견하고 재독했다.

 

마음의 병이 생긴 이들,

혹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것으로 정해지는 이들. 

 

<기묘한 병 백과>는 그림과 연결된 사연들을 읽으면서 감상해도 좋고, 그림들만 먼저 훑어보며 자신 만의 감상을 느낀 다음 글을 읽어도 좋다. 각각의 방식 모두 울림이 있다.         

 


   

   

 

 

 

- 이오는 이야기를 방문해, 먼발치에서 바라본 뒤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고,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적거나 말을 인용하며, 이오의 주관적인 견해를 추가해 작문을 하기도 한다. 이오는 늘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듣는다. 이오의 기록이나 물건들 중 어떤 것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새것이고, 어떤 것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것이다. 

 

- 이오는 가끔씩 무언가를 받아 온다. 이오에게 초대장을 보낸 이들은 종종 이야기를 마친 후 이오에게 무언가를 건네기도 한다. 그들은 이오가 원하건 원치 않건 주기 때문에, 이오도 이오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받아온다. 터진 풍선 조각이나 무늬 병의 조직, 질 좋은 검은 눈물 잉크 한 병, 가시덤불의 가장 굽은 부분이나 레이스의 끝자락 같은. 

 

- 이오는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던 아픔의 파편들을 받고 나면 돌아온 뒤에도 며칠 밤을 함께 앓기도 한다.

타인의 마음을 듣는다는 게 그런 일이다. 

 

- 그리고 결국, 가장 흔한 무늬병의 병원균을 채취해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병균체들을 채집 후 크고 흰 종이에 배양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아픔의 본질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에 매료되고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병균체들이 아름다워 보이나 봅니다. 예술계 일각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추상화가 아니냐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아픔 그 자체의 모양을 확인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아픔의 본질일까요, 아니면 단지 원인일까요?

 

- 그는 몸에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자라나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겉으로 드러났다는 이유로,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선정적으로 소비됐다. 사실은 같은 근원을 가지는 이 현상 위로, 제멋대로 다양한 이름이 나붙는다. 

'누구나 다 그렇다니까. 너무 흔한 일이라니까.'

알록달록 정신없이 자라나는 무늬 아래에서 그저 입 다물고 있을 수밖에.

 

- 그는 계속해서 간지러움에 시달렸다. 아무리 호소하고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질러도, 그의 간지러움은 그 고통만큼의 공감을 살 수 없었다. 발끝까지 쭈뼛 서고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이 간지러움. 신경을 타고 흐르는 이 말초적인 고통은 자주 비웃음을 샀다. 간지럽다는 표현의 가벼운 어감이 판단의 무게가 되었다. 언어의 인상이라는 게 이렇게 아프다. 피가 나지도, 욱신대지도 않는 이 감각은 그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멎지 않는다. 간지럽다는 말로 쓰이기 때문에. 

 

 

 

 

- 그는 정말 특별해지고 싶었다. 어릴 때, 선생님은 별 모양 스티커를 붙여주곤 했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눈길을 줘야 할 이름에는 별표를 치곤 했다.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강해진 끝에, 수많은 별표들이 그 중력에 이끌려 날아왔다. 특별할 것 없는 몸에 뾰족한 별들이 날아와 가볍게 박혔다. 특별해지고 싶었으나, '무엇으로 어떻게'에는 뜻이 없었던 탓이다.

그저 정말 특별해지고 싶었다.

 

- 별. 성운이 아닌 모든 빛나는 천체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별은 우리에게 뾰족뾰족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 둥근 몸이 아니라 몇 억 광년을 넘어 우리의 눈에 비치는 빛의 파장만을 사랑해왔다. 별들은,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제 본질이 아닌 광채로서 존재하다 못해 그 뾰족한 모서리들에 스스로를 빼앗겼다.  

 

- 그래서 별은 가끔 헛되고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상, 소망, 이상이나 특별함 같은 것들을. 어떤 것들은 분명 실재하지 않기에 빛나고, 어쩌면 사실과 다르기에 갈망하게 되는 것이므로. 

 

-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늘 이것저것 되고 싶은 모습을 떠올렸다.

무엇이건 지금보다는 나으리라.

 

- 상상에 가속이 붙자,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몸의 곳곳과 주변의 공기까지 바라던 모습을 닮아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변화가 끝나고 난 뒤, 그의 모습은 본래의 것에서 너무도 멀어졌다. 비효율적인 신체는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아름답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 만족하는지, 후회스러운지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 시간이 지난 건 부패하기 마련이니, 내가 소중히 모아 온 모든 것들도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져 내게 병균이 되나요? 

전부 다 내가 억지로 끌어안고 온 거라고요?

 

- 늘 원하고 바라고 갈망했지만, 그 어떤 대상도 그 마음에 보답해주지 않았다. 대가 없는 목마름의 끝에 그는 이 극적인 갈망 그 자체를 바라게 되었다. 한때는 무언가를 바랐겠지만, 이제는 갈증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찾고 있다. 

갈망이 갈망을 채우는 꼴이 되었다.

 

- 그 그림자는 매일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언젠가, 그림자의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소녀는 제 집 벽에서 커다란 그림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소녀는 그것이 와르르 머리 위로 쏟아질까 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소녀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가 등불 쪽으로 몸을 돌려 일어서면 파도는 잠잠해지고 그림자는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 같은 말을 듣고도, 남들보다 더 크게 다치는 마음이 있다. 유독 언어로 이루어진 것들에 더 아파하는 인생이 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 모양을 누구보다 선명히 느끼기 때문이리라. 그런 말들은 형상도 없이 상처를 남기지만, 그런 마음들이 지르는 비명은 들리지 않는 법이다. 

 

- 이 바다의 인어들은, 종종 닿을 수 없는 별에 대한 꿈을 꾼다. 연안에는 그런 인어들을 낚기 위해 매달아 두었던 미끼들이 남아 있다. 별이 아니면서 별인 것처럼 반짝이는 거짓말들이.

 

 


 

안녕하세요 도밍입니다. 

 

우선, <기묘한 병 백과>라는 애매모호한 세계를 손에 쥐고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어리고 서툰 스물한 살에 이오를 만나 일기를 적듯 시작했던 글과 그림들이, 책이라는 멋진 옷을 입고 많은 분들과 만나게 되었네요. 

 

다소 우울하고 축축한 정서의 작업들입니다만, 보는 이에게 아픔을 전염시키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의 것들은 아닙니다. 

<기묘한 병 백과>는, 기분이나 마음을 알아채고 이야기함으로써 배출구가 되고 위로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써온 작업들입니다.

 

'이것저것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날 살갗에 닿는 차가운 욕조의 온도', '다 마른 줄 알았던 옷의 끝자락이 아직 살짝 축축할 때의 마음', '잠은 달아난 지 오래인데도 이불 안에서 나갈 수 없을 때, 그런 나약한 나를 누르는 이불의 무게', '생각 없이 끓인 차의 향내 나는 증기가 나를 긍정하는 것만 같은 순간' 같은 것들. 

 

내가 분명히 느꼈음에도, 명확하고 분명한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분, 마음들. 이렇듯 비문이나 완결되지 못한 단어의 나열로 남고 마는 것들. 우리가 앓아온 그 애매모호한 애수들을 인정하고,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을 부른 모든 이야기에 방문해, 마음들을 듣고 기록해온 '이오'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작업들을 통해 더 자세히 알려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오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거나, 들어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은유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오가 듣고 돌아와 기록한 것들을 토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이니, 이후의 여정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이 책이 당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어쩌면 위로가, 어쩌면 카타르시스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이오 역시 제가 아니냐고요?

 

그럴 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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