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생강
출판 : 걷는사람
출간 : 2019.07.17
책등을 훑어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치킨으로 귀신 잡는 법>이라니...!!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집어 들고 말았다.
최근 가능하면 채식 위주로 먹어보려고 노력 중인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곳에 고기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의약품 캡슐을 만드는 젤라틴도 원료가 동물성인지를 따져야 하는데, 예전에 해외 캡슐 제품에는 비건 표시가 되어 있었던 게 얼핏 기억이 났다. 대체육 뿐 아니라 만두, 육포, 라면 등 다양한 비건 제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국내에서도 이런 방향성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약품을 비건/논비건으로 생산할 경우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이며 구분을 위해 식별표기를 다르게 할 것인지 통일할 것인지 등의 사항에 관심이 간다. 실무에선 그게 중요하니까...)
다시 돌아오면, 우유와 계란은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며 때때로 닭고기는 먹곤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래도 한동안 치킨을 먹지 않아서일까, 제목을 보자마자 입안을 감도는 기름 맛에 이번 주말에는 치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단편보다도 짧은 장(掌)편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일 뒤편에 수록된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저자는 단편과 짧은 소설을 구분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호흡이 무척 짧은데도 한 편 안에서 분위기가 바뀌는 지점들이 있었고, 날카로운 현실 풍자가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 틈틈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상상력이 뛰어나다, 설정이 매력적이다라는 느낌 보다는 친숙함 속에 숨겨진 낯섦음이 좋았다. 읽다보면 손쉽게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일상 속의 장면들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즐겁게 읽었다.
- 차가운 귀신을 잡으려면 뼈가 드러나고 살덩이가 조금 붙어 있는 식은 치킨 한 덩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내가 자주 가는 이태원의 옛날식 치킨집 주인이었다. 튀긴 닭 냄새가 벽지에 밴 그곳은 테이블 세 개 정도의 아주 작은 가게였다. 문을 열면 기름 냄새가 가득해 그대로 훅 프라이드치킨의 품으로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튀겨주는 닭은 옛날식이어서 약간의 후추가 섞인 고운 소금에 찍어 먹어야 제격이었다. 사장은 튀긴 닭을 덥석덥석 뜯어 커다란 플라스틱 접시에 내주었다.
-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살인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닭 모가지 치는 직업을 택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상상은 금방 다시 싸늘해졌다. 요즘에는 목이 잘린 생닭이 닭집으로 공수될 거라는 상식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말 닭집 사장이 차가운 귀신에 대해 말할 거라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곧 자정이 지나면 음력 2월 22일, 차가운 귀신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지."
심지어 닭집 사장은 차가운 귀신의 꼴에 대해서는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세상에 차가운 귀신이 커다란 얼음판 위에서 발이 시려 깡충깡충 뛰는 것 같은 꼴로 다가오다니.
- <치킨과 차가운 귀신>
- 지구의 인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인종을 말살시키곤 했다. 한 줌의 향신료나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품을 얻기 위해서. 또한 성욕이 넘치는 그들은 같은 인종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성적인 도구로 착취한 긴 역사가 있었다. 닭, 염소, 소, 원숭이, 심지어 과학기술이 발달한 후에는 냉동된 짐승의 고기나 실리콘과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 인형까지 등장했다. 지구의 역사는 수많은 소설로 만들어졌다. 혁명가, 여왕, 노예, 왕, 식인종, 선장, 공장장 등 수많은 직업군들이 그 소설 속에 등장했다.
- X의 아버지가 가상으로 만든 별이었지만 심지어 지구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냉동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Y별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푸른 별 지구는 지금은 한 줌의 우주먼지에 불과하다고 했다. 적잖은 수의 헛소리꾼들이 푸른 별 지구에서 죽은 후 Y별의 인류로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X의 아버지가 말하지 않던 연결고리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다. X의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아들에게 그런 존재들을 경멸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지구에 있을 거라고 추측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들과 다름없단다. Y별의 고고학은 단순한 유희에 불과할 따름이지. 그 유희를 진실로 믿는 순간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는 거란다."
- 하지만 X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커다란 수첩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지구의 형상과 기원, 역사에 대한 빽빽하고 백과사전적인 지식들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건 진정 지구에 미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X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지구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X는 시치미를 뚝 떼는 데 익숙했다. 어쩌면 날 때부터 왼쪽 엉덩이를 퍼렇게 만든 그 몽고반점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버지, 몽고반점이란 말은 지구에서 온 말이 아닐까요?"
X의 얼굴이 여드름으로 덮이던 무렵 그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
"글쎄, 너는 왜 그리 생각하지?"
X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몽고가 지구에 있으니까요.'
- "몽고반점은 그저 작은 불운에 불과하다. 그건 별의 많은 사람들이 타고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니까."
- <멍든 별>
- 애매한 계절에 애매한 밤 날씨였다. 반팔을 입고 나왔다가 사뭇 오한 들기 쉬운 밤이었다. 하지만 나는 빌린 검정 옷을 입었고 왠지 밤길을 걷고 싶어졌다. 그런 버릇이 있었다. 겨드랑이가 거뭇거뭇해질 무렵부터 생긴 버릇인 것 같았다. 시간이 남는 날 버스를 버려두고 엉뚱한 골목으로 돌아 걷는다거나 하는.
-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바로 내 친구였다. 그 역시 엉뚱하게 걸었다. 농사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시를 쓰겠다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해군에 입대한 이후 배를 타고 다니다가, 지금은 아프리카로 떠나 있었다. 나는 기껏해야 코트를 걸치고 춥지 않은 밤에만 걷는 정도였다. 그가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라면, 나는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이었다. 일에 치이는 중년의 인간은 종종 자기도 모르게 유령이 될 때가 있었다.
-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
- 알바생의 의문은 천국이란 편의점 앞 파라솔 라운지를 보고 해결되었다. 천국의 파라솔 라운지는 끝이 없었다. 파라솔 의자에 앉은 천국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한 카드를 허벅지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서 눈을 감았다. 알바생은 곧바로 천국이란 편의점을 지키는 용팔이에게 가서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건지 물었다.
"물건을 구입한 카드를 허벅지에 대면 곧바로 추억에 잠길 수 있네. 새우깡을 대면 새우깡에 대한 생전의 즐거운 기억으로 빨려들지. 콘돔을 대면 콘돔에 대한 생전의 즐거운 기억으로 가고. 결국 이곳 천국은 살아있던 시절에 대한 추억으로 겨우 유지되는 곳이라네."
- 파라솔 라운지는 끝이 없이 넓었다.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알록달록한 파라솔로 가득했다. 그 파라솔 너머에 알바생이 일하는 곳과 다른 천국이라는 이름의 편의점들이 또 존재했다. 그곳 편의점에서도 알바생처럼 억울한 이유로 천국의 시민이 되지 못한 누군가가 알바생으로 살아갈 터였다. 알바생은 좀 씁쓸했다. 그는 만약 천국이 있다면 이승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짜릿한 행복이 있는 곳이라고 믿었다. 아마 성실히 일하기는 했으나 너무 팍팍하게 살아와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곳이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알바생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추억이 나한테 행복이었을까?'
- "명심할 게 있네. 역치가 가장 강한 감정이 추억으로 남는다네."
"역치요?"
"예를 들어 삼각김밥을 먹고 배불렀을 때와 식중독에 걸렸을 때 중 어느 순간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겠나?"
"아마도 식중독?"
"그렇지. 그런 경우에는 카드를 허벅지에 대면 물똥을 지지락 싸는 고통과 그 느낌만 체험한다네."
- 그 순간 천국이란 편의점의 알바생은 쾌감 속에 깨달았다. 그가 살아왔던 이승의 생이 선한 삶이 아니라 성실한 알바의 생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꼬마의 과자를 빼앗아 먹던 찰나의 짜릿짜릿함이 알바 인생의 영혼을 잠시나마 훌훌 훑고 지나갔다.
- <천국이란 이름의 편의점>
- 소설가의 로망 중 하나는 누군가 대신 소설을 써주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그냥 소파에 앉아 있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문장들이 구슬구슬 흘러나와 써진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내 손가락 끝에서 마르지 않는 만년필의 샘처럼 발상의 잉크가 쏟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우발적 살인은 존재해도 우발적 소설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발적으로 쓴들 대부분이 나중에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 소설가들은 꿈의 힘을 빌려보려고도 한다. 실제로 소설가들 몇몇은 꿈속에서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한다.
- 술을 좋아하는 또 다른 선배 중 한 사람은 꿈과 현실, 소설 속 상황이 헷갈릴 때가 있다고 했다.
"내가 어떤 소설을 썼어. 그런데 나중에 그게 내 꿈에 등장해."
"소설로 썼던 상황이 꿈속에서 그대로 펼쳐진다는 거죠?"
"아니, 꿈에서는 몰라. 꿈에서는 그게 그냥 현실처럼 여겨져. 별다른 것도 아니야, 그냥 욕실 변기에 앉아 있는 거, 지하철역에서 어슬렁거리는 거, 그런 장면이야."
"원래 형이 그런 장면들 길게 잘 쓰시잖아요."
나는 쓸데없이, 라는 말을 생략했다.
"응, 그런데 안타깝게도 낯선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꿈에 등장하지 않지. 하여튼 꿈에서는 그게 현실인데 깬 다음에 그게 내가 소설로 묘사했던 어떤 장면하고 너무 비슷하게 여겨지는 거야."
- 사실 나는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다. 다만 인상적인 한 통의 편지나 첨부파일처럼 파고드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귓가에서 지잉,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정수리에 있는 혈이 단번에 뚫리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꿈은 이내 현실의 무언가를 암시한다.
- 나는 예지몽에 대해 직접 소설로 쓴 적은 없다. 허나 고백하자면 예지몽을 꾸는 소설가인 셈이다. 그게 자랑은 아니다. 오히려 좀 안타까운 일이었다. 많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이나 만화가들, 드라마 작가들이 예지몽을 소재로 다룬다. 하지만 그것은 극적인 재미를 주기 위한 낡은 트릭으로 쓰이는 일이 태반이었다. 아니, 트릭이라 칭하기도 잔망스럽고 그냥 양념 정도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더구나 나는 국정원에 소속돼 김정은의 앞날을 보는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작가였다. 허나 꼭 그런 이유만으로 내 소설에 예지몽 체험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예지몽은 국가적인 재난을 예지 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예지몽들은 좀 구차하고 사소했다. 휴대폰이 망가지는 꿈을 꾼다. 다음날 휴대폰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중요한 순간에 배터리가 나간다. 그것이 암시적인 꿈이라면 휴대폰의 가격에 버금가는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린다.
- 그리고 놀랍게도 작가 생활 십 년 차가 넘자 청탁받은 원고에 대한 출판사의 반응을 예지몽으로 미리 볼 때도 있다. 청탁이 온 잡지에 소설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날이 찾아온다. 자다가 문득 귀에서 기계음이 울리고 정수리에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느덧 꿈속의 장면은 출판사 회의실 같은 곳으로 바뀌어 있다. 그곳에서 평론가들 혹은 편집자들은 혀를 끌끌 차며 이 원고의 단점에 대해 빈정거린다. 가끔은 이건 이렇게 고치는 게 좋았을 거라고 훈수를 두기도 한다. 그들은 마치 소설가들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당연히 그 자리에 없지만) 꿈의 대화에서 나의 작품을 벌거벗긴다. 투고한 원고의 경우 암시의 내용은 더욱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원고를 버릴지 말지 결정하는 인물들의 감정 상태가 그대로 꿈을 타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심장이 타버릴 만큼 두렵다. 내 인생 전체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듯한 수치심을 느낄 때도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꿈에서는 자연스럽게 1인 2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순간 소설은 바로 나다.
- <소설가가 꾸는 꿈>
- 그녀의 가정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틀을 갖춰나갔다. 그 사이 금순의 집은 월세방에서 단독주택으로, 최종적으로는 아파트로 옮겨갔다. 신혼에 장만한 전자제품은 그 시기에 재빨리 신제품으로 바뀌었다. 금순은 트렌드세터는 아니었지만 중산층 아파트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가전제품을 고르는 안목은 지니고 있었다. 앞서가는 것은 남우세스러웠지만, 촌스러운 건 또 못 견디는 것이 금순이었다.
- 이미 짐작하겠지만 금순은 실제 존재하는 여성이 아니었다. 금성전자 상품디자인팀에서 금성전자 시절부터 기업의 잠재 고객으로 설정해 놓은 가상의 여성고객 캐릭터였다. 80년대 금순은 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센스 있다는 평을 듣는 전업주부였다. 디자인팀은 신제품의 디자인을 고려할 때마다 과연 '금순'이 이 상품을 좋아할 만한가를 늘 염두에 두었다. 디자인만이 아니라 제품의 기능성까지 모두 고려 대상이었다. 가상의 고객 금순의 안목으로 탄생한 몇몇 가전제품은 시장에서 큰 히트를 쳤다. 금순이 '금손'이 된 것이었다. 그 후 금성전자에서는 가전제품 상품 디자인의 최종 판결을 내리는 부서가 따로 만들어졌다.
- <LG의 로자> 시안 설명회에서는 놀라운 과학기술들이 동원되었다. LED 스크린에 3D 영상으로 신도시의 아파트 대단지를 묘사한 그래픽이 펼쳐졌다. 그 위를 마놀라블라닉 힐을 신은 로자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그녀의 뒷모습만 보일 뿐 앞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멀티태스킹의 대가답게 오른손으로 스파게티면을 볶으면서, 왼손으로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사진을 올렸다. 그 와중에도 로봇청소기에게 명령을 내려 거실 소파 밑을 다시 청소하도록 했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수많은 업무를 동시에 처리했다. 두 아이의 학교 숙제 문제를 처리하고, 타사 홈쇼핑에서 주문한 남편의 기능성 팬티 품질이 형편없어 반품 신청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끊은 후에는 시어머니의 생신 준비를 위해 하나뿐인 동서와 짧게 통화도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 업무사항을 부하직원들에게 미리 지시했다. 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될 수 있도록.
"전지현이 될지, 김희선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LG전자의 새로운 모델은 바로 LG의 로자를 연기하는 셈이죠. 만 39세의 나이지만 만 29세처럼 보이는 여성으로 홈쇼핑 MD로 일하고 있죠."
회의에 참석한 여성 중간간부가 손을 들었다.
"아마, 실제 저렇게 살다간 로자는 기절하고 말 거예요. 그리고 피로에 찌들어서 피부에 쩍쩍 금이 가겠죠. 슈퍼맘 트렌드가 한물간 지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요?"
LG의 로자 TF 팀장이 입꼬리를 한쪽으로 치켜올리며 비웃었다.
"맞아요, 우리의 로자는 슈퍼맘입니다. 슈퍼맘 트렌드가 사라졌다고요. 오브 코스, 하지만 직장 여성에게 슈퍼맘의 생활을 강요하는 상황이 달라졌나요? 다행히 LG의 로자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있는 건 LG 가전의 도움 덕이죠. 슈퍼우먼의 망토처럼 이제 LG 가전은 일하는 여성을 위한 마법의 망토인 셈입니다."
- "저희 팀이 LG의 로자를 통해 추구하는 건, 일상의 여행화입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일과 가정은 삶의 피로를 불러오는 짐이 아닙니다. 바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여행이죠. 그 여행의 동반자가 바로 가족입니다. 그 삶의 여행에 LG전자 가전제품이 함께 합니다."
마지막으로 LED 화면 속에서 LG캐리어를 손에 쥔 로자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회의 테이블로 걸어 나왔다.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놀라운 영상이었다. 하지만 그 홀로그램 속 로자에게는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로자를 반대했던 백발이 성성한 남성 이사마저 넋을 잃고 물끄러미 로자를 바라보았다. 여성 중간간부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로자의 텅 빈 얼굴이 무풍 선풍기의 텅 빈 원통 내부 같다고 생각했다.
- <금순, LG, 로자>
- 일산 백석동의 <미스터 버티고>는 주택가에 위치한 자그마한 서점이었다. 손님이 열 명만 넘어도 서점의 실내가 꽉 차는 곳이었다. 이 작은 서점에서 취급하는 목록은 문학과 인문학 서적, 에세이가 대부분이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자기계발서류나, 학습지 종류는 들이지 않았다. 서점 내부는 짙은 갈색이어서 길가에서 보면 커피 냄새가 풍길 법한 인상이었다. 실제로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희미하게 커피 내음이 풍기기도 했다. 이 작은 서점에는 앙증맞은 테이블이 세 개 있었다. 원하는 손님은 책을 마시며 서점 주인이 내려준 커피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손님들이 구입하지 않은 책을 들고 커피를 마셔도 서점 주인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서점 주인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면 꼼지락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혹시나 손님이 구입하지 않은 책에 갈색 얼룩을 남기지는 않을까 소심하게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 버티고 씨는 이 자그마한 서점을 떠나면서 스스로를 위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다. 그것은 자정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서점을 오픈하는 것이었다. 딱 사흘만. 별것 아니지만 버티고 씨가 꿈꿔오던 밤이기도 했다. 자정 넘은 시간과 적막이 가득한 두 시, 새벽녘에 어쩌면 책을 읽고 싶어 찾아오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버티고 씨는 그 손님을 위해 이 서점을 오픈하고 싶었다. 하지만 버티고 씨의 예상과 달리 첫날 손님은 겨우 한 사람이었다.
- 아, 그는 너무 무례한 손님이었다. 버티고 씨는 취객을 상대하는 편의점 알바생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양복 차림의 그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저벅저벅 걸어왔다. 서점 안을 어슬렁대던 버티고 씨는 처음에 좀비가 찾아오는 걸로 오인했다. 회색 양복 차림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쿨럭, 기침을 토하며 <미스터 버티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더니 벌컥, 손잡이를 쥐고 안으로 들어왔다.
- 행패는 아무리 고급스럽게 포장해도 행패였다. 하지만 가게 주인이란 손님을 쫓아낼 수 없는 망부석 같은 존재였다. 특히 서점 주인은 손님이 책 열 권을 앉은자리에서 몽땅 다 읽어버린다고 한들 어쩔 수가 없었다.
- <책방의 좀비 (1)>
- 퀭한 얼굴의 여자가 무심한 얼굴로 뼈로 만든 형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커다란 롯데면세점 비닐 가방 안에 담긴 검정 봉지를 꺼내 풀어헤쳤다. 그 안에서 썩은 살이 너덜너덜 붙은 동물 뼈들이 나왔다. 여자는 날카로운 금속성 도구를 가지고 뼈에 붙은 썩은 살들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내 집 아래층에서 이런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거였다.
- "아직 안 끝났군요."
나는 은밀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개골을 만들기가 쉽지 않대요. 그건 가장 고급 기술이라고 뼈쟁이가 그러더군요. 혼이란 게 인간의 정수리로 들어와, 정수리로 빠져나간대요. 그 안에 혼을 가둬서, 정수리의 마개를 닫아야 더는 ... (중략)"
- <복원작업>
- 여은 씨는 속보로 뜬 뉴스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기자가 촬영한 영상은 아니었고 시민들이 휴대폰으로 찍어 SNS에 업로드한 영상들을 뉴스 채널에서 보도하는 중이었다. 일산 백석동 고양터미널 밖으로 사람들이 서둘러 빠져나오고 있었다. <미스터 버티고>에서는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지하 1층, 지하 1층!"
"어떻게 해. 서점 안에 유모차를 두고 왔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품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유모차가 오르빗이었나 보네. 구입한 게 아니라 렌털한 건가..."
- 아내들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넓은지 남편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남자들의 인간관계에는 여자와 술, 골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여자들의 인간관계 안에서는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차곡차곡 쌓인다. 뷔페 접시 위에 올라가는 각각 다른 요리들처럼.
- <책방의 좀비 (3)>
- 내가 어린 시절 들었던 괴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계단과 여자가 만난 이야기였다. 계단이 있다. 그리 가파르거나 높아서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계단은 아니다. 장식이 많거나 대리석이거나 화려한 아치를 이루는 관광명소의 것도 아니다. 시멘트로 대충 만든 계단은 턱이 낮고 층계의 개수가 많지 않다. 계단 귀퉁이가 깨져 자갈 크기의 시멘트 조각들이 다음 칸으로 호르르 떨어지곤 한다. 당연히 내 괴담 속 그 계단은 양지가 아니라 그늘진 곳에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이 혼자 오르내리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11월처럼 여겨지는 그런 종류의 계단이다. 괴담 속에서 그 계단이 존재하는 장소는 역사가 오래된 고등학교다.
- <간>
- 지구는 화성보다 빠른 속도로 공전하기에 이 년에 한 번 화성 안쪽에서 공전하는 지구가 화성을 앞지르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 밤하늘의 화성은 기묘한 곡예를 시연한다. 화성은 얼마간 밤하늘에서 하루하루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성이 마이클 잭슨으로 변해 밤하늘에서 문워킹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얼어붙은 불타는 별의 뒷걸음질은 지구인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화성증후군이라 이름 붙여 카테고리로 묶어놓은 이들은 대개 이와 흡사한 착각을 체험한다. 단 역행하듯 보이는 것은 밤하늘의 화성이 아닌 그들이 머무는 세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제외하고 뒤로 쓸려간다.
- 화성증후군에 속하는 이들이 세계의 역행을 경험하는 순간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믿어온 이데올로기를 저버린 혁명가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과학자들은 화성증후군과 맥이 다르다. 그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 인간은 풀잎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자마자 스스로 시들었을 따름이다. 배우자나 자녀의 죽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세계의 역행을 체험하는 건 아니다. 붕괴와 역행은 다르다. 붕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잿더미다. 하지만 세계의 역행은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찾아오나 하염없이 곤란하다. 그것은 계속해서 뒤로 쓸려나가는 사막의 모래바람에 가까워 무심결에 삼라만상의 풍경이 현실 아닌 신기루로 믿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기루 안에 오롯이 서 있는 건 화성증후군에 시달리는 당신이다.
- 화성증후군의 증상은 깨달음이나 비극에서 오지는 않는 것 같다. 아직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대개 걷다가 멈추고 돌아보는 과정을 겪는다. 아니면 들고 있던 샤넬을 내려놓는다. 라면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다 다시 계란 푼 매운 국물 속에 호로록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다. 연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상대의 체온이 저온에 맞춰진 전기담요처럼 느껴져 당황스러웠다고 우리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이들의 기분은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들과 비슷하다. 익숙한 일상의 공전궤도를 돌던 내가 슬그머니 이탈될 때의 그 무력한 공기.
- 이 사례에 속하는 최초의 여인은 번화가를 무심히 걷던 중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지구가 아닌 화성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화성이요? 당신은 그곳에 가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난 화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요. 그곳은 흔적의 별이죠.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화산이 있고, 거대한 계곡이 있어요. 하지만 뜨거운 용암도 콸콸 흐르는 물도 없죠. 거긴 흔적의 별이에요. 모든 것들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지구에 살고 있지만 화성에 있는 것과 다름없죠. 내 주변이 전부 흔적처럼 여겨지니까요."
- 화성증후군의 초기 증상은 사소하지만 곧 만성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리는 짐작했다. 물론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증후군이 발전해나갈 가능성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모든 징후에는 밤과 낮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 우리 연구소는 <화성증후군>에 대한 체계적 탐구를 위해 국가기관에 지원금을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지원금 요청은 거절당했다. 담당 공무원은 공식적인 거절의 문장 뒤에 개인적 소견을 덧붙여 우리에게 보냈다.
"국가는 국민의 화성증후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일 퍼센트의 물과 공기만 있는 공간에서조차 살아갈 수 있는 존재를 국민이라 생각하니까요."
- 심지어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나를 찾아온 것도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따지듯이 내게 물었다. 자신의 언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었는데, 남자 친구가 되어서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느냐면서.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으며, 그녀가 믿는 것은 오직 화성 여행이었다. 그녀는 나 역시 화성 여행에 동참하기를 바랐으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우리의 마음 깊이 행성과 연관된 무의식의 자아가 있어. 너의 경우는 수성과 연결되어 있는 이성적인 인간이고, 내 여동생은 천왕성과 이어져 있는 미친년이야. 운이 좋게도 나의 무의식의 자아는 화성과 이어져 있지."
내 생각에 그녀가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니는 <화성연구센터>의 '호갱님'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지구와 조건이 다른 행성들의 에너지를 무의식의 명상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와 조건을 갖춘 화성의 에너지는 우리가 무의식에 집중하면 다다를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 <화성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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