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백남원(두들)
출판 : 성안당
출간 : 2018.05.04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림 생각이 나고, 그림을 그리려고 앉으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 기우뚱거림 때문에 며칠을 헤매었다. 당분간은 그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하되 어떤 것이든 하는 동안에는 그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볼 생각이다.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는 것이 즐거워서 나름대로의 속도로 꾸준히 해왔지만, 의무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다. 잠시 독서를 쉬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제한하고 얽매지는 않을 생각이다.
잠깐 그림 이야기를 해보자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과 '즐겁게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성장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즐겁게만 그려서는 그림이 늘지 않고, 잘 그리기 위해서 공부하는 그림만 그려서는 질려버리고 만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나 같은 경우는, 즐거운 그림을 마음껏 그리다가 '원하는 대로 표현되지 않는 갑갑함'이 역치를 넘을 때에만 공부를 위한 그림에 도전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드로잉의 정석>은 '드로잉'을 대하는 자세와 기초에 관한 책인데, 이전까지 읽었던 작법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의 책들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했지만 설명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뿐이었다.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아니면 이제 갓 시작한 사람을 위한 조언.
어느 쪽이건 설명이 친절하고 상세하지는 않았다. 대상이 숙련자라면 기초 지식은 있다는 전제하에 설명을 진행하니 생략된 부분이 많았고, 입문자라면 어려운 내용보다는 당장 흥미를 느낄 수 있게 굉장히 단순화한 설명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림'이라는 영역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부분이 많은 것도 한 원인인 듯 싶다. '나는 이렇게 했다'를 풀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째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해서도 다소 개인적 차원의 설명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드로잉의 정석>은 '체계'라는 것이 느껴지는 설명이 실려 있어 감동적이었다. '일단 따라해보세요'와는 다른 접근법. 특히 '눈으로 따는' 부분이 실제로 관찰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형태를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말은 사실 '계측'과 '해체'를 하라는 의미였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이해했다.
소장할 가치가 있다.
추천.
- '드로잉, 한 달 만에 완전 정복하기'
만약 이 책 제목이 저랬다면 무척 매력적이었겠죠? 하지만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어, 한 달 만에 완전 정복하기', '이것만 암기하면 나도 영어 박사' 같은 식의 책 제목에 수차례 속아 보지 않았나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마땅한 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내 것이 될 수 없지요. 저런 식의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싶기도 하지만 드로잉 역시 싼 값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합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정복할 수 없죠. 그렇다고 무작정 그려 대기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못 됩니다.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다 지칠 가능성이 크거든요.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드로잉의 핵심원리를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핵심 원리이고 체계적인 접근일까요?
- 저는 성공한 모든 사람의 성공 요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 성공 요인은 바로 성공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것이죠. 유치한 유머 같나요? 그러면 그림을 잘 그리는 원인은 재능을 타고 나서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가요? 사실 성공 원인이 성공할 팔자를 타고나서라고 얘기하는 것과 그림을 잘 그리는 원인이 재능을 타고나서라고 얘기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 20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오면서, 4살 꼬마부터 6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르쳐 보고 관찰하면서, 각종 그림 관련 실기 서적을 탐독하고 분석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재능은 타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대부분 믿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상식에 반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재능이란 신이 준 능력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요건이 갖춰진 상태를 이르는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요건들은 얼마든지 후천적 노력으로 갖춰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그 요건들은 어떤 것이며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할까요?
-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일부를 그리는 행위입니다. '어떤 것을, 어떤 시점에서, 어떤 프레임으로 담아낼까?',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생략할까?'라는 문제를 자신만의 감각과 철학으로 해결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보고 그려도 사람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드로잉을 통해 자기 자신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 드로잉 역시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드로잉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별다를 것 없던 일상과 사물이 새롭게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미 몇 번이나 봐서 결말을 뻔히 아는 영화인데도 새롭게 느껴지는 경우처럼 말이죠. 같은 사물이라도 다른 느낌을 가지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의 시선입니다.
- 팔을 크게 움직여 선을 그을 수 있도록 자신과 종이 사이의 간격은 손을 자연스럽게 뻗었을 때 연필이 닿는 정도로 합니다. 수직선, 수평선, 사선을 연습할 경우 선과 연필은 대략 직각을 이루도록 합니다.
- 앞의 두 가지 방법과 마찬가지로 종이 위에 연필을 댄 후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선이 끊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유롭게 선을 그어 보세요. 연필로 종이 위를 스치는 느낌도 아니고, 연필로 종이를 누르는 느낌도 아닙니다. 연필이 종이에 딱 붙어 안정적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세 가지 필압을 이용해 차례대로 선을 그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필압으로 선을 그으면 미세하게 떨리거나 불안정한 필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필압으로 그어 보면 훨씬 안정되게 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특히 세 번째 필압은 기준이 되는 필압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선의 강약도 이 기준 필압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변화 없는 선도 매끄럽게 그으려면 이 필압으로 긋는 것이 좋습니다.
- 초보자들의 드로잉을 보면 선이 지나치게 조심스럽거나 힘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의 강약도 변화무쌍한데, 그것은 자신의 기준 필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손끝 감각으로 기준 필압을 충분히 익힌 후 그것을 기준으로 필압에 변화를 줄 때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기준 필압도 연필에 가해지는 힘이 아니라 연필과 종이의 마찰 정도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탄력 있고 리듬감 넘치는 선을 만드는 비밀은 바로 선의 속도 변화에 있습니다. 빠른 선과 느린 선의 적절한 조합이 선의 강약과 긴장, 탄력을 만들어 내죠. 또한 속도 변화가 있는 손 움직임은 선의 리듬감을 살려 줍니다. 선의 '속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앞서 살펴본 초보자와 숙련자의 선을 다시 비교해 보면, 숙련자들의 선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이 초보자들의 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과 원근법의 표현 방식이 100%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체계화한 것이기에 주변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관찰할 수만 있다면 원근법의 많은 부분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근법에는 크게 공기 원근법(색채 원근법)과 투시 원근법(선 원근법)이 있습니다.
- [사진 2-1]에서 볼 수 있듯이 야외로 나가 풍경을 바라보면 가까이 있는 것은 색도 진하고 선명해 보이지만, 멀리 있는 산은 하늘색에 가까우면서 윤곽선도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까운 곳의 색과 윤곽선은 짙고 선명하게, 먼 곳의 색과 윤곽선은 옅고 흐리게 하여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이 공기 원근법입니다. 공기 원근법은 모서리가 분명하지 않아서 투시 원근법을 적용하기 힘든 공간이나 대상을 그릴 때 이용하기 좋은데, 투시 원근법과 함께 적용하면 공간의 깊이감을 훨씬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투시 원근법은 소실점에 의해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소실점은 멀리까지 뻗어 있는 기찻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찻길을 볼 때 두 레일이 만나는 점이 바로 소실점인데,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소실점에서 시각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투시 원근법에는 소실점이 하나인 1점 투시, 두 개인 2점 투시, 세 개인 3점 투시가 있습니다. 투시 원근법은 건물처럼 모서리가 분명한 기하학적 공간이나 입체물을 표현할 때 주로 이용합니다. 드로잉을 배우는 초기에는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기에 집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투시 원근법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 다소 어려움을 느낄 수 있으니 여기서는 1점 투시의 기본적인 개념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어떤 대상을 간단하게 표현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c처럼 윤곽선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곽선은 이해하기에 가장 익숙하고 쉬운 시각 언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a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c와 같은 윤곽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윤곽선은 그릴 대상과 배경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우리 뇌가 스스로 만들어 낸 일종의 관념입니다. 따라서 대상을 윤곽선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대상의 시각적인 느낌, 특히 입체감 표현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입체감 표현을 포기하자 선 자체가 심미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장점이 생깁니다.
- 주변의 지인들에게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당한 이유를 한번 물어보세요. 명왕성과 행성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입이 없어서도 아니고 말을 할 줄 몰라서도 아닙니다. 명왕성과 행성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지요. 즉, 그림에서도 선을 긋고 명암을 넣을 줄 알아도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잘 그릴 수가 없습니다. 이때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대상을 제대로 보는 방법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요소인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눈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림의 초보자라도 자신이 그릴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대상을 보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죠. 마치 자신의 병에 대해 인정하는 환자가 치료에 협조적이듯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이 더 빨리 잘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듯 우리는 무언가를 볼 때 자신이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모습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 해프닝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림 3-8]을 보면 중앙에 흰색 삼각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사실 흰색 삼각형은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종의 착시죠. 그런데 한번 눈에 띈 흰색 삼각형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이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림 3-8]을 보면 볼수록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흰색 삼각형은 더 밝게 느껴지고, 급기야 외곽선까지 보이는 듯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자신이 무언가를 봤다고 느끼면 그것을 고집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것(흰색 삼각형의 외곽선처럼)을 만들어 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은 정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림 3-9]는 누가 봐도 두 개의 사과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본 것은 사실 [그림 3-10]의 a와 b가 나란히 붙어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반달 모양인 b를 사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록색 사과가 빨간 사과에 가려져 일부 보이지 않는다는 정황을 만든 후 c의 빗금 친 부분을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죠. 이렇게 우리의 눈은 자신이 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황까지도 만들어 내곤 합니다.
- 자, 이제부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관찰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워 보겠습니다. 관찰은 우리의 눈이 대상을 단지 식별하는 단계를 넘어 의미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살피는 행위를 말합니다. 대상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힌다면 드로잉이 훨씬 쉬워지고, 실력도 꾸준히 향상될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이라고 하여 열심히 본다고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관찰 능력을 향상시키는 세 가지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 첫째. 목적을 가져라.
어떤 대상을 관찰하려고 할 때 그저 열심히 보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사진 3-4]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사진을 자세히 본다고 가정했을 경우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찾든지, 아는 사람을 찾든지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관찰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눈이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군중이 모인 사진이군."이라고 식별을 끝낸 후 딴짓을 하려 하면 "이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을 찾아봐."라고 분명한 임무를 부여해야 비로소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 둘째.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질문은 관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특별한 목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대상의 어떤 특징을 출발점으로 삼아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진 3-5]를 보니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그 느낌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여기에서 '남자의 직업은 무엇일까?', '남자는 어떤 기분일까?' 이런 질문들은 남자의 복장, 용모, 표정 등을 자세히 관찰하게 합니다. 또한 '벤치에는 저 사람과 비슷한 남자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 '가방을 몇 개나 쌓으면 남자의 머리보다 높아질까?'와 같은 질문들은 벤치, 남자, 가방 간의 상대적 크기를 관찰하게 하죠. 이처럼 다양한 질문들을 만들어 내어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대상을 꼼꼼히 보게 되고, 단순히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는 사람이군! 하고 떠나려는 시각을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바로 관찰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 셋째, 관찰한 것을 직접 그려 보라.
많은 질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찾은 해답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시험을 치러 보지 않으면 내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느 정도 향상되었는지 알 수가 없죠. 이처럼 시험을 통해 성취도를 가늠해 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듯이 관찰을 했으면 직접 종이 위에 그려 봄으로써 관찰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러한 피드백 과정을 거치면 더욱 구체적인 질문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보다 정교한 관찰이 가능해집니다.
- 우리는 '관찰'이라는 하나의 용어만을 사용하므로 그 안에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가지 관찰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관찰하는 방법은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관찰을 할 때 우리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첫 번째 방법은 '보이는 대로 관찰하기'이고, 두 번째 방법은 '이해하며 관찰하기'입니다. 두 관찰법은 이용하는 경우도 다르고, 관찰을 통한 결과도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두 관찰법에는 각각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떤 장점과 한계가 있는지 정확히 이해한 후 자신이 하려고 하는 드로잉에 맞게 적절한 관찰법을 선택하여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우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다 싶으면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찬찬히 들어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내용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보이는 대로 관찰하기'의 가장 큰 장점은 미리 짐작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과 같습니다. 즉, 대상의 작은 부분이나 덜 인상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갖고 관찰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드로잉을 한다는 건 세상을 순수하고 열린 눈으로 보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보이는 대로 관찰하기'의 이러한 장점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보이는 대로 관찰하기를 통해 드로잉을 할 때 대상에 대한 계측 감각과 드로잉 감각이 정확하다면 무척 사실적인 그림이 나올 것이고, 계측 감각이나 손의 정확성이 약간 떨어진다면 그것 나름대로 사실성과 서투름이 묘하게 어우러진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그리기 연습을 꾸준히 하여 감각을 다듬는다면 지우개를 전혀 쓰지 않고 단번에 대상을 정확히 드로잉 할 수도 있게 됩니다.
- 반면에 보이는 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대상을 모르는 상태로 만들어 관찰하는 것이므로 드로잉이 끝나고 나면 대상에 대한 정보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대상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 상태에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탄탄하고 균형 잡힌 드로잉을 해야 할 경우나 움직이는 대상, 혹은 조각으로 해체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진 대상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같은 대상이라도 보이는 대로 관찰한 경우와 이해하며 관찰한 경우는 관찰 내용이 매우 다릅니다. 보이는 대로 관찰한 경우는 인물이 얼굴을 살짝 돌리기만 해도 새로 해체하고 계측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하며 관찰한 경우는 그릴 대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관찰했기 때문에 대상의 위치가 바뀌어도 처음의 계측이 유효하다는 것을 잘 기억하세요.
- 모델이 없어야 잘 그리는 사람과 모델이 있어야 잘 그리는 사람.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 중에는 인물화를 사실감 넘치도록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앞에 모델이 없으면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보고 그리는 것은 그렇게 잘하면서 상상만으로 그리라고 하면 그림이 무척 유치해지죠.
- 또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델이 없더라도 앉은 사람, 걷는 사람, 넘어진 사람, 앞모습, 옆모습, 고개 숙인 모습 등 상상만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모델이 눈앞에 있어도 모델의 사실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평소 그리던 대로 양식화된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모델을 보거나 안 보거나 잘 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매우 드뭅니다. 마치 오른손잡이 아니면 왼손잡이는 있으나 양손잡이가 드물듯이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잘 이해한 사람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관찰법의 차이 때문이죠.
- 우리의 관찰법은 a와 c 사이의 어딘가에 속해 있습니다. a에 가까울수록 관찰을 할 때 보이는 대로 관찰하는 경향이 강하고,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을 잘합니다. 이들은 모델이나 사진만 있으면 그림을 사실적으로 잘 그리는데, 주로 순수 회화를 하는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반면 c에 가까울수록 이해하며 관찰하는 경향이 강하고, 상상해서 그리는 것을 잘하죠. 이들은 모델이나 사진을 직접 보지 않아도 상상해서 잘 그립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는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아주 간혹 볼 수 있지만 b에 위치한 사람처럼 보이는 대로 관찰하는 것과 이해하며 관찰하는 것 모두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릴 수 있는 그림의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 여기에서 상상하여 잘 그린다는 것은 인체의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비현실적으로 자유롭게 그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구조에 맞게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사람에게는 저마다 익숙한 관찰법이 있는데, 그에 따라 드로잉 스타일도 결정됩니다.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도 좋지만, 두 관찰법을 서로 잘 조화시키면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고, 그릴 수 있는 그림의 폭도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새 두 가지 관찰법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데 익숙해질 것입니다. 타고난 왼손잡이라도 노력을 통해 양손잡이가 될 수 있듯이 말이죠.
- 앞서 우리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기 위해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계측'과 '해체'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계측'은 객관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배우면 누구나 정확하게 할 수 있고, 배우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술 교육 현장에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계측을 배워도 여전히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계측'과 '해체'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평면화'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기본적으로 드로잉은 입체인 세상을 납작한 종이에 옮기는 작업이므로 입체를 평면의 정보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을 '평면화'라고 부릅니다. 화가들은 그림 그리기에 앞서 이미 세상을 평면화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종이에 옮길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지금까지 배운 계측, 해체도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평면화하여 볼 줄 알아야 하는 만큼 이 작업은 드로잉을 배우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 프로, 아마추어 할 것 없이 무언가를 그리고자 할 때 사진을 많이 이용합니다. 사진이 주는 편리함 때문이죠. 사진을 이용하면 화구를 싸들고 굳이 찬바람 부는 들판으로 나갈 필요도 없고, 탁자 위의 정물이 시들까 봐 서둘러서 그릴 필요도 없고, 밥 사 줘가면서 아는 사람을 몇 시간씩 모델로 세워 둘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둘째 치고, 사진의 가장 큰 편리함은 사진 안에서는 이미 세상이 평면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3차원을 평면화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인데, 카메라는 그 작업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죠. 만약 실제 사물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자신이 직접 평면화해야 하므로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이 얘기는 사진을 보고 그림 연습을 하는 것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정인 평면화 훈련을 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드로잉 초보자들은 가능하면 실제 대상을 보고 연습하도록 하세요.
-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뿐 아니라 이미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이미 평면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각 정보가 한 차례 걸러졌기 때문에 더욱 쉬운 것이죠. 그래서 드로잉이 어렵고 부담스러운 초보자들의 경우 사진이나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이 드로잉과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실제 대상을 보고 그리는 훈련을 거쳐야만 진정한 드로잉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만약 누군가가 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옮겨 그리는 것과 실제 대상을 직접 그리는 것에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그림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렇듯 대상의 형태를 설명하는 요소들로는 d의 1처럼 대상의 부분과 부분이 만나는 곳, 2처럼 실루엣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 3처럼 부분과 부분의 공간 관계를 보여 주는 곳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곳들을 무의식적으로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인물을 그릴 때 얼굴에 관심이 가는 것은 정서적인 연관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얼굴은 인체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인데,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한 인체에서 얼굴은 유독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5-1]을 보면 눈의 동자와 흰자위, 빨간 입술과 하얀 치아가 강한 대비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인체에서 얼굴을 제외하고 오밀조밀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과 손은 인체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부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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