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고바야시 야스미] 분리된 기억의 세계

일루젼 2023. 1. 12.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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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출판 : 하빌리스 
출간 : 2020.04.25 


'나'로서 사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내가 나에게 자유로운 나로 존재할 것을 허용할 수 있다면, 동시에 타인에게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게 된다. 그 존재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허용해주지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 해줄 수는 없다. 이는 동시에 자신과 사회에 대한 깊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나를 허용해주지 않을 리 없다는, 지금까지 쌓아온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힐 리 없다는 믿음.  

 

선택의 순간, 약간의 긴장과 설렘은 있을 수 있겠지만, 가능한 한 두려움에서 가장 먼 선택을 하는 것을 권한다.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가를 되돌이켜 봐야 할 지점은 그 선택으로 인해 괴로운 -불일치의- 순간이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춰 자기 자신을 다시 살핀 후 새로운 선택을 하면 된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세계에서의 고전적인 조언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이다. 가이드들은 언제나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의 선택의 방향에 따르는 영향과 그 상태에서의 최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에의 거부 또한 허용한다. 바꿔 말해, 그렇지 않았던 경우라면 가이드가 아니었거나, 그에 굴복해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이다.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더 이상 장기 기억을 가질 수 없게 된 인류가 맞이하는 신세계이다. 최초의 혼란 이후, 보조적인 기억 장치로서의 메모리는 어느 순간 영혼의 또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다. 저마다의 사연, 저마다의 가치, 저마다의 고민과 고통이 담긴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그래서 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 "확률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면 원인이 따로 있지 않은지 의심해야 해."

 

- "자기가 작업하는 중에 누군가 콘솔을 만졌으니 엄청 화가 났겠지." 

다치바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한심한 범인 찾기보다는 안전 점검이 우선이죠."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우선순위를 잘못 정해선 안 되죠'라는 소릴 들었지."

"그야말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 아빠는 항상 "합리적인 판단이야말로 긴급할 때 목숨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야."라고 말했다. 자, 이 노트의 존재를 설명하는 합리적인 가설은 무엇일까? 이 노트에 적힌 내용이 틀렸다고 가정해 보자. 즉, 그건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자신의 필적이 분명한 이 노토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결론. 이 노트에 적힌 게 사실이다.

 

- 엄마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해보기도 전에 포기해선 안 돼. 이건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그것도 한둘이 해봤자 의미가 없어. 가능한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해. 지금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어. 

 

- 리노는 미사키의 손바닥에 매직으로 글을 썼다.

'치매가 아니니까, 울지 마!!'

"이래도 모르면 이제 설명하지도 않을 거야."

"왜?"

"시간 낭비니까. 지금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에 기억이 사라졌을 때도 또 이해하지 못할 거야."

 

- "안전밸브가 열린 것과 냉각수가 과잉인 것. 이 두 가지 관계가 마음에 걸려. 어느 쪽이 다른 하나의 원인일까. 아니면 공통된 다른 원인이 있을까. 안전밸브를 여는 건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아.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어."

"일단 대증요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더는 판단을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 평소라면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오감으로 느끼고 평소와 다른 뭔가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노트에 기록할 수 없는 미묘한 감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재는 그것에 따를 수가 없었다

 

- 뭐지? 내가 뭘 알아차렸지? 아마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에 시간이 부족해. 직감이 말이 되어 나오기 전에 점점 사라져 버려.

 

- 기억이 없어진 순간, 개별로서의 인류는 더 이상 지적 생명체가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사색을 해냈더라도 10분만 지나면 사라졌다. 물론 기록을 남길 수는 있으나 인간이기에 가능한 순간적인 번뜩임은 도저히 문자나 그림에 담을 수 없었다. 당면한 일상생활은 할 수 있더라도 새로운 발명이나 발견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문자로 표출되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머릿속에서 재구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장인의 기술을 계승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결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수리할 수 없는 게 조금씩 늘어나고 마침내 문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인류는 서서히 쇠퇴할 것이다. 문명이 사라지면 사람들 주위에서 정보가 급속히 사라질 테고, 인간은 잠재적인 지적 능력을 쓰지도 못하고 야생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퇴행할 것이다. 그 이후 일어날 진화의 방식이 인류가 잃은 기억 능력을 대신할 새로운 지적 능력을 얻는 식일지, 아니면 쓸모없는 지성을 삭제하고 원시적인 원숭이의 일종으로 돌아가는 식일지는,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런 사태를 피할 방법은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더는 지적 생명체가 아닐지라도 인류 전체를 하나의 지성으로 볼 수는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 물질, 에너지와 정보의 네트워크를 포함한 인류 문명이라는 지성이었다. 

 

-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내 메모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딱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와닿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히로타 테쓰지라고 하면, 나의 본질은 이 메모리라는 소리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 나는 이제까지 이 메모리를 콘택트렌즈나 틀니처럼 신체의 인공적인 부속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를테면 어떤 여성과 내가 콘택트렌즈를 바꿔 꼈다고 해도 대단한 일은 아니다. 피차 제대로 물건이 보이지 않거나 눈이 아픈 정도겠지. 콘택트렌즈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메모리가 바뀌니까 인격까지 교환하게 된 것이다.

 

- 하지만 내 본체가 이 메모리라는 생각을 받아들여도 다른 큰 문제가 남았다. 그렇다면 이 신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메모리가 뽑혀도 이 신체 -히로타 테쓰지의 신체도- 는 살아있다.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나 그것은 말하고 먹고 걷고 잠들 것이다. 그런 존재를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신체와 메모리가 한 세트로 인간이라고. 무엇보다 대망각 이전에는 메모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기능은 원래 인간의 뇌가 수행했다. 그러니까 이런 성가신 문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대망각으로 인해 장기 기억 기능이 뇌 밖에 필요해졌다. 메모리가 존재함으로써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니까 신체와 뇌가 다 모여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역시 메모리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신체도 메모리와 같은 인간이다. 둘이 다 모여야 인간이지만, 한쪽만 있어도 인간인 것이다. 

 

- 어? 그럼 메모리만으로도 인간인가? 그건 어째 아닌 것 같은데. 

 

- 메모리를 돌려놓으면 그 순간 원래 신체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남성 테쓰지는 그렇게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 나는 아직 이 여성의 몸 안에 있다. 자신을 히로타 테쓰지로 생각하는 건 착각이고 실은 다도코로 치사코라는 사실은 알겠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는 걸 알겠는데 이대로 자신이 사라지고 그 위에 치사코의 기억이 새로 적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이건 죽음의 공포에 가까웠다. 아니, 지금, 여기 있는 있는 인격이 몇 분 후에 사라진다면 그거야말로 죽음이었다. 

죽기 싫어.

 

- "기억이 마음대로 바뀌면 더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니까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뭘 의지하면서 삽니까?"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면 되지."

"마음은 자신과 현실의 관계에서 생깁니다. 현실이 없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아요."

"정말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사람은 자기 마음의 한 부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어. 분리된 마음은 이른바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아. 너는 마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마음의 이야기? 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래.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 이제 이 몸은 내 거야. 아니, 오히려 이제 이 메모리는 내 거라고 해야 하나. 

 

- 나는 내가 쌓아 올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스스로 개척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니까. 

 

- "이 세게의 모든 게 내 환상이라고 해보죠."

나는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 자유다."

 

- "논리적인 말이 아니면 스스로 인정할 수 없나?"

"이건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나만 알 수 있는데 나는 자신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전개되지?"

"내가 존재한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나는 이 세계를 오감으로 느끼고 있죠. 그러니까 나는 내 밖의 것에서 찾아오는 뭔가를 느낍니다. 그것은 내 마음과는 다른 무엇입니다. 즉 내 밖에 세계가 존재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내가 세계라고 느끼는 것의 모습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너는 자신의 안팎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신과 자신 이외의 것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만약 자신의 밖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면 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말도 안 됩니다. 도플갱어나 유체 이탈이란 세상을 속이는 말에 불과합니다."

 

- "어째서 네게 그런 기묘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나?"

"아뇨. 그런데 당신은 알고 있지 않나요?"

"나는 그저 도울 뿐이야. 답은 스스로 찾아내야 해. 내가 알려주면 의미가 없지. 스스로 찾아내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거야."

"옳고 그름? 무슨 옳고 그름이요?"

"그 또한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답 중 일부지."

"마치 선문답 같네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어."

"종잡을 수 없는데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인생에서 결단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지. 종잡을 수 없다고 해서 도피가 허락되는 건 아니야."

 

- "죽은 자의 기억이죠. 내가 떠올리는 것은 죽은 자의 기억입니다."

"사후에도 영혼은 존속한다는 말인가?"

"그건 모릅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사후에도 기억은 존재합니다."

"기억이 존재하면 영혼도 존재하는 거 아닌가?"

"영혼과 기억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기억과 영혼이 별개라면 영혼에는 기억 이외의 어떤 속성이 있을까?"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만은 아니겠죠."

"그러나 다른 기억을 지닌 존재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는 어떨까요? 같은 기억이 있다면 같은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 "그 메모리가 원래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메모리가 꽂힌 사람은 그 인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되는 것일 뿐이죠. 기억을 이어간다는 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사상을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지금 그 인물이 이 공동체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게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어요?"

아픈 곳을 찔렸다.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자기만족으로 이 공동체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메모리를 이용해 그들을 내 노예로 부리고 있는 걸까?

 

- 그랬다. 이 여성이 바라는 일은 내가 하는 일과 같았다. 이 여성의 생각을 부정하면 내 행동 역시 부정해야 했다. 이 여성의 생각 중 어떤 점에 저항감을 느끼는 걸까? 나나는 자신의 마음을 분석했다. 

 

- 우선은 죽은 사람의 기억을 산 사람의 몸에 부활시킨다는 것의 옳고 그름이었다. 그런 일을 하면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개념은 왜 흔들리면 안 되나?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곧 육체적인 죽음이 아닌가? 육체는 사멸해도 정신은 메모리라는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개념에 저촉되는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그 인물은 죽은 게 아니다. 죽은 것은 정신이 담겨있던 육체에 불과하다.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것은 옷을 갈아입거나 자동차를 새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이밖에도 육체를 제공하는 측이 메모리에 이용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육체는 육체일 뿐이다. 거기에 기억은 없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는 것은 가치관이나 의사도 없다는 소리이다. 육체를 도구라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착취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은 메모리에 있지 육체에 있지 않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을까?

 

- 죽은 자의 기억을 산 자에게 이식한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매력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그게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심장이 멈추고 뇌의 기능이 중지해도 죽은 자의 기억은 반도체 안에 남는다. 그 자체는 살아있지도 않고 의식도 없다. 기억은 자유전자와 정공(positive hole)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다른 육체에 꽂으면 바로 의식이 부활한다. 주관적으로는, 메모리를 꽂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과 직접 이어져 있다. 죽은 직후에 다시 눈을 뜬 거나 마찬가지다. 

 

- "옛날과 달리 무당이란 건, 죽은 자에게 몸을 빌려주고 산 자와 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죠."

 

- 세계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나를 거부하나? 아니면 이제 진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한 건가?

 

- 세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니, 녹아내리는 것은 내 정신인가. 

 

- 하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은 언젠가는 누군가 하게 되어있다. 죽은 사람의 메모리 폐기는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단시간에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나요?"

"냉정하게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했으니까요."

 

- "나는 그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처럼 아무도 직면한 적 없는 일에 직면하게 되면 숨겨져 있던 능력이 드러나죠. 저도 원래는 평범한 여고생이었어요."

 

- "추측이라도 좋아요. 알려줘요. 당신은 왜 노력했죠?"

"당신은 왜 그걸 알고 싶죠?" 리노는 내 눈을 응시했다. 

"왜 인공지능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게 애매하기 때문이죠." 리노가 미소 지었다. "당신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세요."

 

- "나는... 내 인생이 공허해. 왜 사는지 모르겠어. 노력해 봤자 무슨 소용이지? 단순한 자기만족 아닐까?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업을 갖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지? 미래를 위해 노력할 바에는 현재의 시간을 즐기는 게 낫지 않나? 필요한 돈을 버는 방법은 있어. 그렇다면 노력할 의미가 뭐지?" 

"대답은 당신 질문 안에 있네요."

 

- "만약 당신이 그걸로 만족하고 있다면 애당초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죠. 당신의 마음은 충족되지 않았어요. 뭔가를 바라고 있죠."

"내 마음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고? 마음이 없는 당신이 뭘 알지?"

"당신의 마음은 충족되어 있나요?"

 

- "왜 보답도 없는 노력을 했지?"

"이유는 없어요.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요."

"위선자의 말 같네."

"위선자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저는 인류 문명이 조용히 사라지는 걸 견딜 수 없었어요. 만약 지금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인류의 긴 역사가 모두 사라진다는 걸 깨달았죠. ... 저는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역사 같은 건 사라져도 그만 아닐까. 사람들의 생활사 같은 걸 모아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금방 사라질 거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 "뭐? 이런 푼돈에 일하겠다고?"

"괜찮아. 내 마음이야."

"네 마음? 아아, 확실히 네 마음이지. 하지만 이 돈으로 일을 받아들이면 나는 다시는 네게 일을 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망설였다. 그리고 곧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 "어떤 중개인도 너를 상대해주지 않을 텐데?"

단순한 허풍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그것뿐이다.

 

- "정신이란 과거 경험의 집적으로 형성되지. 이를테면 같은 기억이더라도 정신이 다르면 말과 행동이 달라져. 여기에 하나의 무구한 뇌가 있다고 해보자고. 거기에 한 인물의 어린 시절 기억을 옛날 것부터 순서대로 입력하면 그것은 원래 인간과 비슷한 정신을 가질 것 같지 않나?"

 

- 나는 내 자신이 땅에 서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아니,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세계는 어떻게 됐나요?" 내가 물었다. 

"세계는 원래대로 있지."

"그러나 세계는 녹아내리기 시작하지 않았나요?"

"세계의 모습은 네 마음에 달렸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는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 있어. 세계가 어떻게 보이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있는 데 불과해."

 

- "네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세계에는 다양한 일이 일어나니까."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요?"

"잘 들어. 이미 너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 "응. 틀림없이 그 사람이라면 빌려줄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그게 꼭 그럴까? 돈이 없잖아?" 사토시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아버지가 말했다.

"이런 일은 오래 할 게 아니라고도 했어."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건 곧, 이제 무당 일로 돈을 벌 생각이 없다는 소리지." 아버지가 말했다. 

"어떤 뜻이었는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사토시가 말했다. 

 

- "십 분의 일의 요금으로도 괜찮다고 한 사람이 시간을 조금 넘겼다고 화를 낼 리 없어. 만약 시간을 꼭 지키고 싶었으면 손님에게 맡기지 않고 감시를 붙였겠지."

"맞아. 이 사람은 심판자를 내쫓았어."

    

- "잠깐만. 그렇다면 진짜와 환상을 어떻게 구별하지?"

"왜 구별할 필요가 있죠?"

"그야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면 곤란하잖아."

"어떻게 곤란하죠?"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면 기분 나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되죠."

 

- "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진짜와 환상을 구별할 방법은 없어요. 구별할 수 없다면 진짜와 환상은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 "그럼 세계에는 확실한 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다는 거군요."

"그렇다."

"그럼 곤란합니다. 어쨌든 이 세계에도 확실한 게 존재할 겁니다."

"그건 네 사정에 불과해. 세계는 네 처지와는 관계가 없지 않을까?"

"그럼 근본적으로 현실과 환상은 구별할 수 없단 말입니까?"

"맞다. 그리고 구별되지 않는 걸 구별하려는 시도는 난센스지. 너는 있는 그대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해."

"그게 환상일지도 모르는데?"

"네가 받아들이면 그게 현실이 되지."

 

- "당신은 신을 연기하고 있습니까?"

"나만이 아니다. 너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지. 시험해 보겠나?"

"어떻게 하면 되죠?"

"그저, 그걸 바라면 되지."

 

-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나?"

 

- "너는 다양한 인생의 다양한 범죄를 모두 지켜봤지. 그것은 모두 용서할 만한 것들이었나?"

"범죄자인 제가 그걸 단죄할 순 없죠.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으로서의 약점으로 인해 생겼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인간을 용서했구나."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이 세계가 그 증거지. 모든 인류에게 정토가 약속되었어."

  

  - "저는-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당신 스스로 결정하세요. 저는 그래서 당신을 부활시켰죠."

 

- "왜 저를 선택했나요?"

"당신에게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심한 무당이었어요."

"당신은 다시없을 존재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영겁의 윤회전생을 거듭하며 성장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당신에게는 그런 비슷한 일이 벌여졌죠."

"저한테요?"

"당신 안에 다양한 기억이 남았어요. 그것들이 중층적으로 쌓여 당신의 지금 영혼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수많은 인생을 윤회전생을 한 것과 똑같은 경험을 당신에 부여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찮은 인간입니다."

"그건 당신이 아직 성장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정이 현저해졌을 때 인류의 궁극적인 진화가 시작될 겁니다."

 

- 나는 내 안에 있는 수백수천의 영혼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우리 인생은 쓸모없지 않았어. 인류의, 생명의 진화에 이바지한 거였어.

나는 그들이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 "현실인지 환상인지 판단할 필요는 어떤 방법으로든 구별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지. 무슨 방법을 써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구별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 "보세요. 지금 눈앞에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모험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지요."

 

- 한편 내 눈에는 지구 안쪽의 다른 지구도 보였다. 지구가 반투명하게 되어 그 안에 작은 지구가 무수히 비쳐 보였다. 

 

- "어느 게 진짜 지구입니까?"

"모두 다 평등한 지구랍니다. 어떤 미래나 당신을, 그리고 인류를 받아줄 겁니다. 당신이 선택하세요."

"만약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죠?"

"계속 다시 시작하면 되죠. 다시 시작할 시간은 무한하답니다."

 

- 아무래도 내 책임이 중대한 듯하나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듯했다. 실패한다 해도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더보기

- 어라? 이거 내가 쓴 거야? 깜빡 졸았나? 내가 쓴 것도 잊어버리다니. 건망증인가? 일단, 지금은, 9시 20분.

 

- 지금까지 쓴 걸 보면 나 말고도 세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내가 쓴 건지 확인할 수 있을까? 손글씨라면 필적으로 알 텐데. 앗, 그건가! 손글씨로 쓰면 되겠네. 지금은, 10시 반. 손글씨로 시간을 적어두자.

 

-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저녁 먹은 걸 기억한다고 썼는데 나도 기억해. 그 말은 곧 모두가 같은 인격이란 거 아닌가? 그런데 기억은 공유가 안 된다고? 

 

- "그럼 일단 메모하세요."

"뭘요?"

"자신의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요. 그러지 않으면 다시 금방 잊고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 "그리고 최대한 빨리 대체 인원을 부르는 게 좋겠어요."

"대체 인원이요?"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 "그렇군요.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충분한 판단 능력이 있습니다."

"기억이 있어야 판단을 할 수 있죠. 환자의 증상을 다 잊으면 어떤 처치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메모를 하는 거잖아요."

"메모하는 걸 잊어버리면요? 그때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메모를 안 했는데 나중에 중요해질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럼 모든 걸 적어두면 되죠."

"그건 불가능해요. 지금 대화를 전부 메모할 수는 없죠."

"그럼 녹음하면 되죠."

"녹음을 다시 듣는 데는 녹음하는 만큼의 시간이 걸려요. 필요한 정보를 바로 검색할 수 없으면 도움이 되질 않잖아요."

 

- 상황이 변했다. 점점 정보가 사라지는 상태에서 집에 있으면 위험할 듯해 구급차를 불렀는데, 구급대원도 같은 증상이라면 오히려 집에 머무는 편이 안전할 것 같다.

 

- 바닷물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떠다니므로 냉각수로 사용하기 전에 부유물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해파리 방지망으로 해파리 등의 유입을 막는다. 다음은 해수 제진 장치로 부유물을 제거한다. 내부는 4단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냉각수로 이물질이 혼입 되는 것을 철저히 막아준다. 부유물의 중심은 해파리와 해조 같은 해양 생물인데, 특히 겨울철에는 방지망을 넘어온 오징어와 문어, 게 등의 어패류가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소의 직원들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이런 해산물 '조업'에 나서고는 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유키는 제어실 안을 둘러보며 서성거리는 당직 과장 다치바나 쇼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게 문제야." 

 

- "현재 이렇게 모든 걸 기억하잖아. 기억 소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시점에서 해결된 게 분명해."

"단시간 동안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 "만약 광범위하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면 TV와 인터넷이 기능할까요?"

"원자력 발전소처럼 복잡한 시스템도 기능해. 세상 시스템 대부분은 멈추지 않았을 거야."

 

- "다음은 기억의 유지 시간을 알아보지."

다치바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각자의 메모를 보면 기억된 가장 오래된 작업 시간부터 추측할 수 있을 거야. 각자 알려주게. 참고로 내 기억은 약 10분이면 사라지는 것 같다."

각자가 자신의 기억 유지 시간을 보고했다. 짧으면 7분, 길면 15분이었다.

 

- "아니야. 상당히 영리한 방법일 수 있어. 종이 메모는 분실할 우려가 있는데 블로그나 SNS에 쓴 글은 잊어도 다시 볼 가능성이 크지."

 

- "아, 공황 상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폭동은 아닙니다. 모두 어쩔 줄 모른 채 돌아다니거나 쭈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보통 난동을 피우기보다 침울해지잖아요."

 

- "전원, 우선 심호흡하게. 그리고 당황하지 말고 경보의 종류와 시간을 메모해. 그리고 대책을 생각한다. 설계 규칙을 믿는 한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어."  

 

- 노트에 적힌 바에 따르면, 기억이 계속되는 것은 길어야 십여 분 정도인 듯했다. (확실한 사실인지 실험으로 확인하고 싶으나 그런 일을 했다가는 영원히 확인 작업이 끝나지 않으므로 일단 기록을 믿기로 하자) 따라서 작업 단위는 10분 이하로 해야 한다. 시간이 더 걸리는 작업은 어떻게 해서든 간략화하거나 나눠서 순서대로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간단한 생각이라도 반드시 알고리즘을 적고 그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뭐지?

 

- 노트에 매달리느라 간과한 거였다. 자신의 기억을 보완하는 게 노트라 믿고 노트의 기록에서 결론을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히카와처럼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컴퓨터가 기록한 데이터를 이용해 해석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현황을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히카와는 자신이 기억 장애라는 걸 잊었기에 오히려 올바른 방법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일상생활이라면 확실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발전소 같은 거대한 시스템은 애당초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애매한 노트 기록에 집착했던 게 가장 문제였죠."

 

- 글자는 점토판에 그림 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고대 문명 때 시작된 것이다. 글자 덕분에, 그전까지는 가족이나 기껏해야 수십 명의 친한 사람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었던 지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과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지금은 하나의 정보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고 수십 년 전의 정보를 바로바로 검색할 수 있다. 정보의 공유만이 아니다. 정보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수치 계산 등의 단순한 작업은 컴퓨터에 맡기게 되었다. 즉 본래 인간의 뇌가 수행하던 지적 작업의 큰 부분을 외부에서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지금은, 지성이란 게 인간의 신체 내부에 머물지 않고 외부의 광대한 인터넷 공간에 흩어져 있다고 할 수 있죠.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거대한 네트워크와 그 내부에 흩어진 지성의 핵심인 개별 인간의 정신, 저는 이게 인류가 도달한 지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씁쓸한 마음이 들지만 애당초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좋지 않다. 평소에도 잘 잊는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말자. 

 

- 인간은 모든 일을 단기 기억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데, 몇 분에서 수십 분 후에는 그것을 장기 기억으로 넘긴다. 이 시스템이 파괴되면 기억은 몇 분에서 몇 십 분만 유지된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 그런 상황에 빠지면 그 이후의 인생은 추억이랄 게 없다. 추억은 그 이전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다.

 

-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정보가 넘어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지금에 와서는 관찰할 수도 실험할 수도 없으므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가설은 있다. 과거에는 뇌 내부의 현상이 모두 전기 화학적인 반응에 근거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현상이 발생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공간의 성질을 이용한 양자 물리학적 작용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 그렇게 해서 지금은 대망각 이후에 탄생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성장했다. 그들은 자신의 뇌로 장기 기억을 수행한 경험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반도체 메모리에 의존해서 살았다. 그들에게 기억이란 반도체 메모리였다. 인류는 좋든 싫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바로 거기서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 옆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기는 어디지? 일단 내가 서두르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려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그리고 그대로 계단을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왜 서둘렀는지, 그게 생각나지 않았다. 

 

- "아아, 팔꿈치에 있네."

중년 여성은 팔꿈치 소켓에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끼웠다. 

히로타 테쓰지. 갑자기 내 이름이 떠올랐다.

 

- "빠지지 않도록 잘 끼워둬요. 이게 없으면 당신은 갓난아이나 다름없잖아요."

"아, 절차 기억이나 의미 기억은 다 있으니까 읽기 쓰기와 자동차 운전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요."

 

- 그리고 몇 걸음 더 달렸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어라?

테쓰지는 그 자리에 멈춰서 위화감의 원인을 생각했다. 

 

- 어떻게 나는 하이힐을 신고 달릴 수 있었지?

답은 간단했다. 늘 신어서 익숙하기 때문이다. 절차 기억이라는 녀석이다. 이른바 '몸이 기억하고 있어'라는 게 그 말이다. 물론 실제로 기억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뇌지만.  

 

- 아니, 인격이 교환된 것처럼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착각일 수 있다. 지금 이러고 있는 시점에도 나는 본질적으로는 어떤 여성이며, 그저 히로타 테쓰지의 기억을 지니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성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름도 주소도 가족 구성도 전혀 모른다. 아는 것은 전부 히로타 테쓰지에 대한 것뿐이다.

 

- 그럼 이 히로타 테쓰지의 의식은 어떻게 되지? 히로타 테쓰지의 신체를 찾을 때까지 사라지는 게 아닐까? 히로타 테쓰지의 원래 의식은 그의 육체에 내내 존재할 테니까 문제가 없나? 아니야.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스스로를 히로타 테쓰지로 인식하고 있는 의식이 있다. 이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 "당신은 누구인가요?"

"아직 조금 치사코인 듯한 느낌이 드는데 어쩐지 그건 꿈같기도 해요."

다시 몇 분 후 테쓰지가 물었다.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눈앞의 남성이 고개를 저었다.

 

- "어때요?" 테쓰지가 물었다. 

"저는 히로타 테쓰지입니다." 남성이 대답했다. 

너무나도 기묘한 느낌이었다. 자신 역시 히로타 테쓰지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히로타 테쓰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인물이 있는 것이다. 

 

- "직전의 단기 기억이 남아서 그래. 그럼 기억이 이중이 된다는 소린가."

"다도코로 씨도 이제 곧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남성인 테쓰지가 말했다.

"다도코로 씨는 아직 여기에 없어. 그녀는 거기 있지."

테쓰지가 메모리를 가리켰다. 

 

- "그러니까 여기는 어디든 내가 바라는 곳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 장소에 어울리는 인물로 변한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나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도 되고 만약 네가 원하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모두 환상이네요."

"그렇지 않아. 모두 현실이지."

"현실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 없죠."

"그건 곧 네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건, 실제로 변화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네 기억은 현실인가?"

"그렇죠. 내 기억은 현실의 한 부분입니다."

"만약 현실이 변하면 네 기억도 변하겠지."

 

- 옛날에는 기억력을 시험하는 유형의 입학시험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문제의 대망각 이후 기억력을 묻는 시험은 치러지지 않게 되었다. 그야 당연히 아무도 혼자 매사를 기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 기억이 개발된 후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외부 기억은 필요한 걸 모두 기억한다. 따라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단 외우려고 하면 절대 까먹지 않게 되었다. 기억력을 묻는 시험은 점점 불필요해졌다. 시험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관찰력, 논리적 사고 능력, 결단력 같은 넓은 의미의 문제 해결 능력이었다. 

 

- "지금은 기억의 양을 묻는 출제는 전혀 없지. 하지만 나는 기억과 시험 결과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네."

"무슨 뜻이죠?"

"소논문을 쓸 때도, 수학을 풀 때도 인간의 사고에는 독특한 패턴이 존재해. 즉, 좋은 사고 습관을 획득하면 시험 점수를 올릴 수 있을 거란 거지. 요컨대 단순한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지식을 활용하는 방법 역시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지 않겠느냐는 거야."

"하지만 절차 기억은 뇌 안에 남아있잖아요."

"절차 기억이란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라거나 수영하는 법처럼 운동과 관련된 기억이야. 문제를 푸는 순서 같은 것은 뇌 안에 남지 않아."

 

- "가령 입시 비결이 메모리에 들어있다고 해도 그런 비법을 얻은 것은 본인의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아. 그렇지. 그런데 왜?"

이 사람은 내 말뜻을 모르나?

"처음부터 메모리에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본인의 노력으로 그런 메모리로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 "태어난 후의 기억을 모두 잃다니, 슬플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일이든 마음먹기 나름이란다. 이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이토록 절망적인 기분은 처음입니다. 행운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 "하지만 저는 자신을 도쿠가와 토시야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착각이야. 네 몸은 이시다 켄토의 것이고 영혼 또한 이시다 켄토의 것이야."

 

- 자신이 '켄토'라는 사실은 실감하지 못했어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육체가 켄토인 한 상속권이 있었다. 문제는 영혼이었다. 과연 이 육체에 깃들어있는 영혼은 토시야의 것일까, 켄토의 것일까? 

 

- "기억이 마음일까?"

"...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을 도쿠가와 토시야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영혼이 아니라 기억의 힘에 기인한 겁니다."

"나는 켄토의 인생을 빼앗은 걸까?"

"글쎄요. 적어도 제... 토시야의 인생은 빼앗겼습니다."

"켄토로 산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니? 원장 자리가 약속되어 있잖니. 만약 그냥 토시야였다면 병원도 개업하지 못하고 평생 월급 의사였을 거야."

"행복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진정한 인생은 아니었죠."

 

- 만약 켄토의 메모리를 꽂으면 토시야인 나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경치도 마지막이었다. 토시야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 풍경을 즐겼다. 둔치에 앉아 수면에서 노는 물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된 것 같네. 

토시야는 켄토의 메모리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바라본 후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 "그리고 나의 이 육체 역시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네 육체는 세계의 일부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특별한 건 하나도 없지."

"그럼 내 마음은 어떤가요? 내 마음은 존재하지 않나요?"

"그건 내가 모르는 일이지."

"맞습니다. 당신은 모르죠. 그러나 나는 알아요. 나는 모든 존재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주체는 의심할 바 없는 접니다. 따라서 적어도 나는 존재합니다."

 

- 정말일까?

내가 내뱉은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하나이고 또 다른 내가 존재한 적은 없어. 가령 육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내 정신은 어디까지나 하나인 거야. 내 밖에 내가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정말?

그리고 나는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 하루카는 종종 하루나가 너무 자유분방하게 산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에 대해 하루나는 너도 자유롭게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론했으나 좀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루카는 하루나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자기처럼 살기를 바라는 듯했다. 하루나는 그런 동생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내 진짜 기억은 사라졌다는 말인가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가지고 계신 메모리는 원본과 완전히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진짜입니다."

그런가?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나?

 

-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하루나의 몸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도 하루나의 메모리를 꽂고 살아. 하루카의 몸은 거기에 있고 다시 하루카의 메모리를 꽂고 살겠지. 둘 다 인생을 잃지 않아."

'하루나'의 말은 정론이었다. '하루나'는 지금처럼 하루나의 메모리를 계속 쓸 수 있었다. 거기에 문제는 없었다. 하루카에게는 하루카의 원래 메모리를 꽂는다. 인생에 반년 동안의 공백이 생기겠으나 그건 어쩔 수 없다. 메모리 제조사의 배상금만 있으면 참지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 현재 나는 자신을 하루나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나에게 꽂혀있는 메모리를 돌려주면 바로 폐기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반년 동안의 인생은 영원히 사라진다. 지금 몸에서 메모리를 빼면 하루나로서의 의식은 1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사라지고 다시는 자각하지 못한다. 곧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카로 자원봉사에 참여했던 일도, 하루카와 마음을 터놓고 싶다고 느꼈던 것도 완전히 사라지리라. 그리고 그런 경험을 가지지 않은 '하루나'만이 계속 살게 된다.

 

- 하루카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메모리 검사를 하러 왔다가 갑자기 인생이 끊어진 상황이다. 만약 이대로 자신의 몸에 메모리가 꽂히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내가 하루나의 메모리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결단하면 하루카는 그 순간 정신적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결단한 나는 살인자이다. 

그랬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살인자가 되거나. 내게는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 "물론 하루카는 죄가 없어!" 하루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나도 죄가 없다고!"

그래. 나도 잘못한 게 없어. 하루카도. 그리고 '하루나'도. 우리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죄를 지어야 했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그건 알아. 하지만 하루나가 가져야 할 몸은 하나뿐이야."

"그럼 당신 메모리를 저 사람들에게 주고 그 몸에 이 메모리를 꽂아."

 

- 왜,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걸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 "물론 사람은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인생의 다양한 일을 떠올린 게 아니라 다양한 인생을 떠올렸어요."
"그것은 네 친구나 지인의 인생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게 아닐지도 모르고요."

"접점이 없는 사람의 인생을 떠올린다는 건, 책 같은 걸 읽은 거겠지."

"아뇨. 그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본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직접 경험한 듯한 기억입니다."

 

- "다른 인생을 경험했다면 윤회전생이지."

"진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경험한 건 아닌 듯합니다."

"무슨 소릴 하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다시 산 듯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너대로 있고 그 위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다시 살았다고?"

"잘 설명할 수 없으나 그 해석이 가장 와닿네요."

 

- 그 무렵부터 내게 문제가 생겼다. 내 안에 아야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사라진 아야의 기억이 부활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섯 살까지의 아야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다섯 살 이후로 아야로 계속 살아왔기에 아야라는 자의식이 점점 명확해졌다. 다섯 살이었던 그날부터 나는 내내 아야를 연기해 왔다. 그러나 생활의 다양한 순간순간마다 일일이 '아야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야의 사고를 시뮬레이션했다. 즉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아야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 아야를 상정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지 준비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익숙해지니까 그게 더 편했다. 그러다 보니까 토모야로서의 사고는 불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토모야의 몸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토모야로서 생각해도 그게 말과 행동에 반영될 일은 없었다. 나는 늘 아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붙였다. 

 

-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토모야로 생각하는 일이 전혀 없이 아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의식을 빼앗긴 듯한 공포를 느꼈다. 

 

- 그런데 그러면 왜 안 되는 걸까? 여중생이 여중생의 마음을 가진다고 잘못될 게 뭐 있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경악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여자가 되고 만다. 내가 나로 있으려는 데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생존 본능이었다. 한편으로 이 몸은 원래 아야의 것이니 아야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는 생각도 있었다. 애당초 내 기억을 아야에게 맡긴 것 자체가 이기적인 게 아니었을까. 내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그런 혼란의 날들을 보냈다. 

  

- "만약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오랜 기억을 새로운 육체에 이식해도 원래 영혼과는 다르다면."

"만약 그렇다면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절대적인 죽음이 되어버리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것도 안 괜찮을 것도 없죠.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이라면 우리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건가?"

"뇌의 형성과 함께 자연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럼 그건 언제 발생하지? 마음의 스위치는 언제 들어오나?"

"언제랄 게 아니라 차차 형성되겠죠. 단순한 신경 세포의 연결이 복잡한 네트워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말 그런 걸 믿나? 복잡하게 작동하는 기계와 우리 마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네.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그건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이야. 그 행동은 언제나 일정한 규칙에 근거하고, 반도체 스위치를 켜고 끄는 순간 확정되지. 그건 곧 0과 1의 나열에 불과해. 아무리 0과 1의 수를 늘리더라도 그건 마음이 아니야."

"좋아요. 그저 복잡하기만 한 기계에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죠. 그렇다면 반도체 칩에 기록한 기억에도 역시 마음은 없는 거 아닙니까?"

"기록은 마음 자체가 아니야. 기억과 뇌가 만나면서 거기에 비로소 마음이 생기고 영혼이 깃들지."

그런가? 기억과 영혼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그렇다면...

 

- "기억 장치의 장착을 거부하는 데는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건 아마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장치에 대한 과잉 거부라고-"

"그건 아니지."

 

- 나나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말했다.

"그런 주장이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해야 하잖아요.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도 일단 외부 장치를 장착해야죠."

"소용없어. 그 장치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야. 일단 붙이면 절대 놓을 수 없지."

"하지만 기억이 없는 생활은 정말 불편할 겁니다."

"불편한지 아닌지는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걸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군. 기억 없는 생활이라는 게 말이야."

 

- 물론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다음 날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니, 나나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확실히 성장했다. 매일 처음부터 시작해도 마음을 터놓을 때까지의 시간이 점점 짧아졌고 사람 수도 늘어났다. 그리고 점점 이곳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 나나는 그들의 지혜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을 설득하는 임무가 일생일대의 승부가 되리라 느낀 나나는 설득을 미루고 그들의 공동체의 잠입해 자연스럽게 지내는 일에 전념했다. 그들의 생활은 진짜 아미시처럼 자급자족을 목표로 했다. 

 

- 대망각 이후로 태어난 사람이 메모리를 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두 버리는 걸 의미했다. 그건 자살과 거의 같은 결심이었다. 나나는 그런 젊은 사람을 보며 자살 대신 이 길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으나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 그런 그들과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추억이랄 게 없었다. 절차 기억과 메모에 의존해 행동할 뿐이었다. 즉 그들에게는 과거라는 게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망각 이전의 기억을 지닌 세대와 그들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과거'라는 개념조차 모호했다. 그들에게 '과거'란 10분쯤 이전의 일이었다. '어제'나 '작년'이라는 말은 단어로는 알지만, 그것은 '신'이나 '무한' 혹은 '허수'와 마찬가지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미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기억이 없는 그들에게 '내일'이나 '내년'이라는 것 역시 실감을 동반한 개념이 될 수 없었다. 물론 단어로는 이해하고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존재하는지는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 오래된 사람들은 현재의 기억은 없으나 수십 년 전까지의 인생 지식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생존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젊은 세대로도 말하기나 간단한 작업은 할 수 있었으나 에피소드를 기억할 수 없기에 간단한 교섭조차 어려웠고 미래 예측도 극히 힘들어했다. 따라서 사고파는 데 교섭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맑은 날에 비가 올 것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일상은 매우 불완전했지만 노인들의 지도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었다. 

 

- 나나는 망설였다. 자신이 도우면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그건 시청 직원의 선을 넘는 일이다. 자신의 원래 역할은 이 공동체를 해산하고 사람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다. 공동체 존속을 돕는 것은 원래 목적에 반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의사에 반해 억지로 사회가 보호하는 것도 꺼려졌다. 공동체를 존속시키면서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그들의 리더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시청 직원이라는 신분과 지금까지의 인생을 버리고 그들을 이끌겠다는 결심은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부 기억 없이 살겠다는 사상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익히지도 않은 채소를 그대로 아이의 손에 쥐여주는 부모. 배고파 울부짖는 갓난아기. 

 

- "헉!" 나나는 자신이 여성 일원의 몸 안에 있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이런 느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지식이 이 여성에게 넘어갈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 눈앞에 또 다른 자신이 있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 나나의 해결책은 나나의 메모리를 아미시 일원에게 삽입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공동체 사람들의 손으로 다양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러면 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미시 일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셈이었다. 

 

- "이제 됐잖아. 내 메모리를 돌려줘." 또 다른 나나가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이 공동체의 경제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 "저기, 빨리 돌려줘. 어쩐지 기억이 사라지는 것 같단 말이야." 또 다른 자신이 팔을 잡아당겼다. 

"당연하지. 메모리가 없으면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지니까. 그것도 잊었어?"

"그래? 어쨌든, 당신에게서 뭔가를 돌려받아야만 할 것 같아." 

"당황할 필요는 없어. 당신 뇌에서 기억이 사라져도 여기 남아있으니까."

 

- "빨리... 내가 사라진다고."

나나는 또 다른 자신을 무시했다. 

 

- 나나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어쩌면 감각이 마비되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일을 해선 안 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애당초 인류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사상 처음이니까 그에 대한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의 양심에 따라 문제만 없다면 인도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 나나는 이렇게 며칠 동안, 옷을 갈아입히는 인형놀이를 하듯 옷과 몸을 바꿔가며 즐겼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걸 입고 거리고 나가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망설였으나 생각해 보니 여기 공동체 여성은 나나의 돈으로 산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뿐이니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그런데 원래 몸의 인격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인격이 항상 뇌 안에 있다면 가령 나나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원래의 인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때 내린 결정은 원래 인격이 내린 게 아니란 말인가?

나나의 마음은 때때로 흔들렸고 그런 마음을 애써 뿌리쳤다. 

나는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게 아닐까? 아니며 벌써 들어온 걸까? 

 

- 모순이지만, 나나는 그런 불안을 떨치려고 점점 더 몸 바꾸기 놀이에 빠졌다. 그리고 나이나 성별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 이 남성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걸까? 물론 연애하려면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공동체에서 '동의'라는 단어는 무슨 뜻일까? 현시점에서 이 남성이 나나와 연인이 되고 싶어 하면 그건 이 남성의 의사가 아닌 걸까? 

이런 논리는 자신이 봐도 좀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남성이 나나와 연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나가 이 남성을 자신의 연인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네."

조금 전의 자신이 말했다. 아직 나나로서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보면 평범한 커플이야."

"가능하면 여자 말은 쓰지 말아 줘."

"그야 그렇... 지."

나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 나나는 공동체 사람들의 신체를 이용한 놀이를 중단하고 말았다. 요컨대 기억이 없더라도 육체에는 나름의 마음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은 지독한 죄였다. 메모리를 다른 사람에게 꽂는 것은 농장일이나 경영에 관여할 때 혹은 생명에 관한 일일 때로 한정했다. 

 

- 나나의 머리에 피가 솟구쳤다. 그건 이 몸이 금방 열을 받는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었다. 

 

- 아니,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동안은 과거의 가치관을 활용해 서로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야 했다. 

 

- 부모와 자식의 복잡한 관계를 들으면서 나나는 깨달았다. 어느새 인류는 선을 넘고 말았다는 것을. 

 

- 나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나나는 다시 한번 자문했다. 

 

- "나는... 무당이었습니다."

그 순간 기억이 발화하듯 부활했다. 

 

- "몇 번이나 설명해야 알겠어? 이건 영혼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쉽게 말해 '혼령 부르기'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의 메모리를 매개자, 그러니까 무당이라 부르는 인간에게 끼워 재생하는 것일 뿐이라고."

 

- "이대로 이 녀석의 기억이 사라지길 기다려야 해. 10분쯤이지."

"왜 바로 혼령을 불러내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이 녀석의 기억이 남은 상태에서 죽은 사람의 메모리를 꽂으면 그 메모리에 이 녀석의 기억이 기록되겠지."

"그러면 안 되나요?"
"별로 안 될 건 없지만, 앞으로 그 죽은 사람의 기억을 불러낼 때마다 관련도 없는 무당의 기억까지 재생될 거 아냐. 그러니까 기억이 오염된다는 말이지."

 

- "아아. 한번 오염되면 돌이킬 수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

 

- "엄밀히 따지면 무당의 뇌 안에서 재생되는 가상 인격이 싫어해."

 

- "아프진 않았는데 그냥 모든 게 사라지는 느낌이었어."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

"내가 아니라 세상이 사라지는 듯한..."

 

- "이럴 때가 자주 있어." 중개인이 말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령 부르기 자체를 거절하지. 이럴 때 심판자의 역할이 필요하지."

 

- "영구히 빌리고 싶어. 아니, 사들이고 싶어."

"하루나 이틀이라면 모를까 일생은 무리입니다. 무엇보다 무당이 받아들이지 않겠죠. 당연합니다. 아무리 큰돈을 받더라도 평생 몸을 빌려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 죽음이 불명료해질 경우, 법률적으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유산 상속이나 생명 보험금 수령을 언제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배우자가 사망했는데도 혼인 관계가 끝나지 않으면 남은 사람은 영원히 재혼할 수 없다. 육체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면 연금도 영원히 받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사 개념의 확립과 법률 이론의 구축, 나아가 모든 법률의 근본적인 개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아직 이만한 문제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사후 메모리 보관 금지였다. 일단 이 조치로 기존의 죽음 개념을 지킬 수 있다고 식자들은 생각했다. 

 

- "잠깐! 그럼, 1시간이 지나면 이 몸은 무당에게 돌려줘야 해?"

"그렇게 약속했어."

"나는 어떻게 하고? 또 죽어?"

 

- 그래. 아주 잠깐이야. 살짝 초과하는 정도라면 무당도 눈 감아 주겠지. 

 

- 당신은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어. 당신이 그날 무당에게 몸을 돌려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으리라는 법은 없어.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몸을 돌려줘야 할 것 같다. 사토시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야. 혼령 부르기 일이 끝났는데 느닷없이 자신은 노인이 되어 있다면 그를 위로할 방법은 없어.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그는 괴로워할 이유가 영원히 없지. 아내가 말했다. 

 

- "그건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새로운 인생은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야."

"꿈을 계속 꾼다는 의미입니까?"

"꿈은 나쁜가?"

"네. 현실과 꿈은 다릅니다. 꿈속에서 행복해졌다고 해도 그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해주지. 꿈에 관한 판단은 그다음에 해도 좋을 거야."

 

- "홀로그램은 물건을 만질 수 없잖아요."

"물건을 만지고 싶으세요? 그럼 그 감각을 인공 뇌에 신호로 전달하면 됩니다."

 

- "저를 속이는 게 아닌가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감각을 뭐든 재현해 보죠. 뭐가 좋을까요?"

 

-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맛은 느끼겠으나 씹는 느낌 같은 즐거움은 느낄 수 없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 "저한텐 손이 없어요. 어떻게 먹죠?"

느닷없이 손이 나타났다.

"이건 홀로그램 손인가요?"

"조금 다릅니다. 홀로그램은 광학적인 실체가 있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그렇다면 홀로그램 손이라고 생각하세요."

환상의 손은 마치 진짜 손처럼 내 뜻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분명히 거기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 "어쨌든 진짜와 환상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줘."

"그런 건 없어요."

"농담이겠지."

"정말입니다. 구별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구별할 의미도 없죠."

 

- "그럼 이런 얘기인가? 모든 게 연극이고 당신도 여기 스태프도 실은 존재하지 않고 환상일 수도 있나?"

"드디어 알아차렸군요?"

사사다가 웃었다. 사사다도 스태프도 다음 순간 모두 사라졌다.

 

- "알려줘. 뭐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지금 기억은 제가 체험한 겁니까?"

"그렇다. 네가 준비되었다고 판단해서 동결을 해제했다."

 

      

 

 

 

 

 
분리된 기억의 세계
기억이 분리된 세상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희비극 여고생 리노는 어느 날, 기억이 단시간에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다. 이 현상은 전 세계에서 발생해 인류를 공황에 빠뜨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이제 인류는 장기 기억을 저장시킨 외부 메모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한편, 몸과 마음이 분리된 이 세계에서 ‘나’는 여러 명의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는데……. 장기 기억 없이 태어난 세대가 그리는 미래의 범죄,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악몽이 펼쳐진다.
저자
고바야시 야스미
출판
하빌리스
출판일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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