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엘리자베스 길버트] 모든 것의 이름으로

일루젼 2023. 1. 19.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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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엘리자베스 길버트 / 변용란

원제 : The Signature of All Things

출판 : 민음사
출간 : 2022.10.14


       

아름다운 연대기였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읽은' 게 아니라 '체험'한 것 같은 느낌. 

 

860 페이지가 넘는 책장들을 넘길 때마다, 매 순간 '생生'으로 존재했던 앨마 휘태커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삶은 언제나 그 순간으로 완결되지 않는 긴 흐름으로 존재했다. 해서 그녀의 삶은 모든 장마다 완결되었고, 동시에 미완으로 이어졌다. 아이로서의 그녀, 자매로서의 그녀, 딸, 아내, 선태학자, 이방인으로서의 그녀는 모두 제각각 같은 인물이면서 다른 인물이었다. '사실'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으며 '진실'이란 언제나 조각으로서만 존재한다. 

 

저자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가치관과 삶으로 보여준 거대한 '자연'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란, 그것에 충실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러나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인 유전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프루던스 문제'는 어디까지를 '나'로 인식할 것이냐는 인간의 인식론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그것에 대한 개개인의 답은 종교, 신비, 윤리 등 다양한 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정답'은 없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살아남은' 개체들의 변화로 이어지는 거대한 춤이기 때문에. 그저, 보여줄 뿐이다. 

 

아름다웠다.  

 

 

사족. 다만, '빙빙 돌리다'는 아마 pass around일텐데, 조금 더 맛을 살렸더라면 싶은 아쉬움이 살짝 있다. 

뭔가를 덧붙이기에는 아직도 너무 벅차 있으므로 일단 여기에서 줄인다. 언젠가 폭발한 단상들이 조금 더 정리가 된다면 이어서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건 정말 읽어보셔야 하는 책이다.   

        

 


 

   나도 침묵의 교감에 대해서는 약간 경험이 있답니다.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 일부러 표정을 지운 헨리의 얼굴 때문에 누구라도 그의 본심을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뱅크스는 이 마지막 훈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졌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헨리가 듣기에, 뱅크스는 지금 뭔가 상당히 엉뚱한 일, 즉 언젠가 헨리도 신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안한 셈이었다.

 

- 소년은 배에 탄 신사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들의 발음도 연습했다. 그러자 행동거지가 나아졌다. 그는 어느 장교가 동료에게 한 말을 엿들었다. "제 놈들도 귀족인 양 회유하는 게 못 배우고 열등한 놈들을 상대할 때 제일 잘 먹힌다니까." 헨리는 장교들이, 귀족 같아 보이는(혹은 최소한 귀족에 대한 영국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원주민에게라면 누구에게든 거듭 정중하게 대하는 ...

 

- 큰돈을 벌 수 있는 기나나무는 안데스의 고산 지대에서만 찾을 수 있고, 록사라고 하는 머나먼 페루 땅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니븐의 충고 정도가 헨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인력도, 지도도, 지식을 더 가르쳐 줄 책도 없었으므로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목사에 가기 위해 그는 강과 가시, 뱀, 질병, 열기, 추위, 비, 스페인 관료들을 견뎌 내야 했고,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위험했던 난관은 스스로 고른 고집불통의 노새와 전직 노예, 적대적인 흑인 들이었다. 그들의 언어와 적개심, 비밀스러운 꿍꿍이에 대해선 그저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 헨리는 돈의 매력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좀 더 신비로운 권력의 매력까지도 간파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이 단순히 황홀한 수준을 넘어서 위협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아이는 말을 배운 순간부터 언쟁을 쉬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맷돌처럼 아이의 건방진 태도를 꾸준히 갈아 내지 않았다면 아이는 확실히 버릇없는 인물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사실 아이는 그저 집요할 뿐이었다. 아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했고, 마치 국가적 위기라도 닥친 양 감춰진 모든 정보를 끝까지 캐내는 버릇까지 있었다. 아이는 조랑말이 어째서 새끼 말이 아닌지, 더운 여름밤에 이불 위로 양손을 비벼 대면 왜 정전기가 생겨나는지 알려고 했다. 버섯이 식물인지 동물인지 알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설령 대답해 줘도 '왜 그것이 무슨 이유로 확실한지' 알고 싶어 했다. 

 

- 앨마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대는 아이에게 딱 맞는 부모를 만난 셈이었다. 질문을 정중하게 표현하는 한, 아이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헨리와 베아트릭스 휘태커는 둘 다 따분함을 못 견디는 성격이라 딸아이의 탐구 정신을 격려했다. 심지어 버섯에 대한 앨마의 궁금증은 진지한 답변으로 이어졌다.(이런 경우에 베이트릭스가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존경받는 스웨덴의 식물 분류학자 칼 린네를 인용하며 광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법과, 식물과 동물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돌은 자라날 뿐이고, 식물은 자라면서 생명을 지녔어. 동물은 자라고 생명을 지닌 데다 느끼기까지 한단다.") 베아트릭스는 린네를 논하기에, 네 살짜리 아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베아트릭스는 앨마가 거의 홀로 똑바로 서자마자 공식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 앨마가 말을 시작해서 혀짤배기 소리로 기도문을 암송하고 교리 문답을 배울 수 있다면, 베이트릭스는 자기 아이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 그 결과 앨마는 만으로 네 살도 되기 전에 숫자를 익혔다. 그것도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라틴어로. 라틴어 공부는 특히 중요했다. 라틴어에 무지한 사람은 영어로든, 프랑스어로든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베아트릭스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덜 서두르긴 했지만, 일찍이 그리스어도 조금씩 가르쳤다. (아무리 베아트릭스더라도 아이가 다섯 살 이전에 그리스어를 배워야 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베아트릭스는 지적인 딸을 직접 가르쳤고, 만족스러움을 맛보았다. 아이에게 직접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베아트릭스는 인류의 지능이 기원후 2세기부터 꾸준히 하락했다고 믿었던 탓에, 자기 딸을 위해서라도 필라델피아에 아테네식 사설 학원이 유행하는 풍조를 크게 반겼다. 

 

- 수석 가정부 한네커 데 그루트는 과도한 공부 때문에 어린 여자애일 뿐인 앨마의 뇌가 혹사당한다고 여겼지만 베아트릭스는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았으며, 반 데벤더르 가문의 아이는 남녀를 막론하고 태곳적부터 그런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주변의 우려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멍청한 생각 마, 한네커. 역사적으로 잘 먹고 건강하고 총명한 여자애가 '너무 많이 공부해서' 죽은 적은 없어." 베아트릭스는 가정부를 꾸짖었다. 

 

- 유제품 공방과 그 옆에 자리한 식료품 저장고에는 매혹적인 연금술과 미신, 마법의 기운이 감돌았다. 유제품을 만드는 독일인 하녀들은 식료품 저장고 문에 분필로 보호 부적을 그려 놓고,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그들은 악마가 저주를 내리면 치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앨마에게 말했다. 앨마가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물어보면, 어머니는 잘 속아 넘어가는 순진함을 꾸짖으며 실제로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긴 강의를 펼쳤다. 알고 보니, 치즈는 신선한 우유에 응고 효소를 넣고 완벽하게 합리적인 화학적 변형을 거친 뒤, 밀랍 껍질에 담아 적절한 온도에서 숙성시키는 것이었다. 강의를 끝마치고, 베아트릭스는 식료품 저장고 문에 그려진 육각형 별을 지우더니 미신에 사로잡힌 바보들이라며, 유제품 공방의 하녀들을 혼내 주었다. 다음 날, 앨마는 분필로 그린 육각형 별이 다시 생겨났음을 보았다. 어떤 방법이든 치즈는 계속 제대로 만들어졌다. 

 

- 앨마는 이를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지식의 한 조각이라고여기며, 몇 시간 동안이나 멍하니 앉은 채 놀라워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몽롱하게 생각에 빠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이 든 그녀는 수첩에 신비로운 가을 크로커스를 그리고, 날짜와 함께 자신의 의문과 주장을 적어 두었다. 이처럼 그녀는 부지런했다. 무슨 일이든,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베아트릭스는 항상 발견한 대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림으로 기록해 두고, 가능할 때마다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으라고 딸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 앨마가 그린 산형화들은 정확했지만, 내심 정확한 것 이상을 바랐다. 그 그림이 아름답기를 바랐다. 어머니에게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자, 베아트릭스는 딸의 생각을 고쳐 주었다. "아름다울 필요는 없어. 아름다움은 정확함을 방해할 뿐이야." 

 

- 휘태커 부부는 두 번 다시 빙엄 부부에게 저녁 초대를 받지 못했다. 휘태커 부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베아트릭스는 유행에 민감한 숙녀들의 대화와 옷차림을 못마땅해했고, 헨리는 세련된 응접실에서 지켜야 하는 따분한 예의범절을 혐오했다. 그 대신에 헨리는 도시에서 강을 건너와 언덕 높은 곳에 자신만의 사교계를 형성했다. 화이트에이커의 만찬은 가십거리를 주고받는 장이 아니라, 지적이고 상업적인 자극이 오가는 곳이었다. 세상으로 나아가 어디선가 흥미로운 업적을 달성할 만한 대범한 젊은이가 있다면, 헨리는 그 청년을 만찬 식탁에 불러들이고 싶어 했다. 필라델피아를 거쳐 가는 덕망있는 철학자나 존경받는 과학자, 장래가 촉망되는 신참 발명가들 또한 초대되었다. 때로는 여자들도 만찬에 참여했는데, 존경받는 사상가의 부인이거나 중요한 책의 번역가이거나 미국을 순회 중인 흥미로운 여성 배우들이었다.

 

- 헨리의 식탁은 어떤 이들에게 약간 부담스러웠다. 굴, 비프 스테이크, 꿩 요리 등 음식 자체는 풍요로웠지만, 화이트에이커에서 만찬을 즐기려면 완전히 느긋한 마음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손님들은 심문을 받기도 하고 도전이나 도발을 당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적수가 식탁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예의를 차리기보다는 격렬한 반격이 난무하는 대화 속에서 고결한 신념이 두들겨 맞기도 했다. 몇몇 명사들은 뼛속 깊이 분노하며 화이트에이커를 떠나기도 했다. 좀 더 영리하거나, 얼굴이 좀 더 두껍거나, 혹은 후원자가 절실한 다른 손님들은 돈벌이에 유리한 합의나 수익 높은 동업 관계, 아니면 브라질에 있는 주요 인사에게 전할 적절한 소개장을 얻어서 화이트에이커를 떠났다. 화이트에이커의 만찬장은 아주 위험한 경기장이었지만, 그곳에서 얻은 승리는 당사자에게 평생 가는 경력을 쌓아줄 수도 있었다. 

 

- 앨마는 네 살 때부터 이처럼 경쟁적인 식탁에서 환영받았고 종종 아버지 옆에 앉았다. 터무니없이 멍청한 질문이 아닌 한은 언제든 질문해도 좋았다. 심지어 일부 손님들은 아이에게 매혹되기도 했다. 한번은 화학적 안정성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 한 사람이 외쳤다. "와, 마치 말할 줄 아는 조그만 책처럼 똑똑하구나!" 앨마가 절대 잊지 못할 칭찬이었다.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은 어린 여자애한테 질문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헨리가 지적하듯, 위대한 과학자가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도 자기 이론을 옹호하지 못한다면 그저 사기꾼일 따름이었다. 

 

-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것이 앨마의 시선을 곧장 끌어당겼다. 밝은 금발을 등 뒤로 땋아서 늘어뜨린, 앨마보다 약간 작은 소녀 하나가 베아트릭스와 한네커 사이에 서 있었다. 두 여인은 소녀의 가냘픈 양어깨에 각각 한 손씩을 얹고 있었다. 앨마는 아이가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어느 일꾼의 딸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애가 누구든, 등불에 비친 아이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에 물들어 있었지만 아주 예뻤다. 

- 하지만 앨마가 불안감을 느낀 이유는 여자애의 얼굴 때문이 아니라 소유권을 주장하듯 아이의 어깨를 짚고 있는 베아트릭스와 한네커의 단호한 태도 때문이었다. 한 남자가 여자애를 데려가려는 듯 다가서자 두 여인은 아이를 더욱 세게 붙잡으며 간격을 좁혔다. 남자는 물러갔다. 현명한 행동이라고 앨마는 생각했다. 어머니의 표정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나움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었다. 앨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인의 얼굴에 똑같이 떠오른 사나운 표정을 발견하자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훑고 내려갔다. 무언가 두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폴리는 앨마와 동갑이었지만, 가냘픈 체구에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아이는 고급 프랑스 비누를 조각해서 만든 완벽한 인형에다 누군가가 반짝거리는 청록색 눈동자 한 쌍을 박아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를 단순히 예쁘장한 아이 이상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작고 도톰한 분홍색 입술이었다. 그 입술 때문에 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요염함을 풍겼고, 작은 밧세바처럼 보였다.   

- 비극적인 그날 밤, 폴리가 순경과 함께 거구의 일꾼들에 둘러싸인 채 화이트에이커 저택으로 왔을 때 (남자들 모두가 아이 몸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와 한네커는 곧바로 아이의 앞날에 위험밖에 없음을 예견했다. 일부는 소녀를 빈민 구호소로 보내라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 고아를 자기가 책임지고 키우겠노라 주장했다. 그곳에 있던 남자들 절반은 어느 시점에든 여자애의 어머니와 놀아난 장본인이었고(베아트릭스와 한네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여인은 헤픈 여자가 낳은 이 예쁜 여자아이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 두 여인은 한 사람처럼 움직이며 폴리를 남자들 무리에서 떼어 놓았고 연신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숙고해서 내린 결정은 결코 아니었다. 따뜻한 모성애에서 샘솟아 나온 자비심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여자로서의 깊은 본능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한밤중에 격앙된 열 명의 남자들과 함께 그토록 작고 아름다운 여자아이를 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남자들을 떼어 내고 폴리를 안전하게 지켜 낸뒤에, 베아트릭스와 한네커는 어쩔 작정이었을까? 그제야 두 사람은 숙고하고 결정을 내렸다. 사실 결정을 내릴 권한은 베아트릭스 홀로 갖고 있었으므로, 결국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다소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폴리를 휘태커 집안의 일원으로 당장 입양해서 영원히 데리고 있겠다고 말이다. 

 

- 베아트릭스의 결정은 신속했고 주저하지도 않았다. 헨리는 더 반대하지 않고 수긍했다. 더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마저 없었다. 
   

- 프루던스의 등장은 화이트에이커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훗날 앨마가 여성 과학자가 된 이후였다면, 통제된 환경에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요소가 유입됐을 때 다방면으로,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더 잘 이해했겠지만, 어린아이로서는 적의 침입 같은, 불쾌감과 비운의 예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앨마는 따뜻한 마음으로 침입자를 안아 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왜 그래야 하겠는가?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침입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줄 수 있겠는가?

 

- 새 망아지도 오기로 되어 있으니, 조만간 프루던스도 승마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는 화이트에이커에 가정교사를 둘 예정이었다. 베아트릭스는 동시에 둘을 직접 가르치기는 지나치게 힘든 일이 되리라고 결론지었고, 프루던스는 이제껏 평생 공식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젊은 가정교사를 집안에 들이는 편이 나을 터였다. 어린이 방은 이제 공부에 전념하는 교실로 탈바꿈할 예정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앨마는 자매가 된 아이에게 글씨 연습과 셈, 숫자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물론 앨마가 정신적인 훈련 측면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지만 프루던스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자매의 도움을 받는다면 장차 잘 해낼 수 있을 터였다. 아이의 지능이란 원래 대단히 탄력적인 데다 프루던스는 아직 어리므로 따라잡기에 충분하다고, 베아트릭스는 말했다. 꾸준히 훈련하면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수행할 수 있다고. 그건 그저 열심히 노력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 베아트릭스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앨마는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프루던스의 얼굴만큼 짜증 나는 것이 또 있을까?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시듯 아름다움이 정말로 정확함의 훼방꾼이라면, 프루던스를 아름답게 만들어 낸 존재는 대체 뭐지? 세상에서 가장 덜 정확하고 가장 거추장스러운 인물이잖아! 앨마의 불안감은 시시각각 커져 갔다. 미처 심사숙고해 볼 만한 근거를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는 무언가를, 무언가 자신에게 끔찍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예쁜 아이가 아니다.'라는 점이었다. 기분 나쁜 비교 덕분에 앨마는 갑자기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프루던스는 귀엽고 앨마는 거대했다. 프루던스의 머리카락은 은빛 도는 비단 같은 금발이었지만 앨마의 머리카락은 녹슨 쇠의 색깔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머리는 조금도 말을 듣지 않았고, 아래쪽을 제외하면 온 사방으로 뻗치며 자라났다. 프루던스의 코는 작은 꽃 같았다. 앨마의 코는 쑥쑥 자라는 마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렇듯 비참하고 우울한 비교는 끝도 없었다.  
 
- ... 해야 옳았다. '다 와 간다'고 하는 대신에 '거의 당도했다'라고, '헐레벌떡 갔다'가 아니라 '급히 떠났다'라고 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이 집안 가족들은 '얘기 좀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었다.' 나약한 아이였다면 아예 말하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전투적인 아이였다면 어째서 다른 가족들은 변호사처럼 '대화를 나누'는데, 헨리 휘태커만은 천박한 부두 노동자처럼 '얘기 좀 하는'지 알고 싶다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헨리는 저녁 식탁에 앉아서 상대방의 면전에 대고 '불알 처먹은 당나귀 같은 놈'이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왜 베아트릭스에게 언어 교정을 받지 않는지 말이다. 하지만 프루던스는 나약하지도 전투적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그녀는 매일같이 영혼의 칼날을 연마해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완벽하게 노력을 기울이는 꾸준함과, 흔들림 없는 조심성을 지닌 아이였다. 화이트에이커에서 다섯 달을 보내고 나자 프루던스의 말씨는 더 고쳐 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항상 꼬투리를 잡으려고 빠짐없이 감시하던 앨마조차 실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 밖에 푸르던스는 자세, 예절, 평소 몸단장 같은 다른 측면에서도 빠르게 점수를 땄다. 

- 프루던스는 불평 없이 모든 교정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녀는 고칠 부분을 찾아 다녔고, 특히 베아트릭스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프루던스는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거나 옹졸한 생각에 빠졌다거나 신중하지 못한 말을 했을 때, 스스로 베아트릭스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꺼이 설교를 청해 들었다. 그런 식으로 프루던스는 베아트릭스를 단순히 어머니로서뿐 아니라, 어머니이자 고해성사를 베푸는 사람처럼 우러렀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부터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단점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해 왔던 앨마는 그러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그 결과, 앨마는 프루던스를 더욱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프루던스에게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면이 있었는데, 앨마는 그 안에 무언가 못되고 어쩌면 사악하기까지한 것이 감추어져 있으리라고 믿었다. 앨마에게는 그저 의뭉스럽고 약삭빠른 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프루던스는 누구에게도 등을 돌리지 않고서, 문 닫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방에서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었다. 또한 프루던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날짜를 절대로 잊는 법이 없었고 적절한 때에 항상 하녀들에게 생일 축하를 건네거나 편안한 안식일을 보내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온갖 종류의 일을 챙기는 등, 전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배려했다. 앨마 눈에는 부지런히 선을 추구하는 그러한 행동과 인내심이 전부 너무 앞서 나가는 가식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의심의 여지 없이 앨마가 깨달은 사실은, 프루던스처럼 완벽한 사람과 비교되면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헨리조차 프루던스를 '우리 귀여운 예쁜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앨마의 옛날 별명인 '자두'는 초라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프루던스와 관련한 모든 것들이 앨마를 초라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 그러나 위안거리는 있었다. 최소한 교실에서는 앨마가 항상 우위를 차지했다. 프루던스는 절대로 학업에서 그녀를 따라오지 못했다. 분명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므로 프루던스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가엾은 아이는 바스크 석공처럼 책에 열심히 매달렸다. 프루던스에게 모든 책은 뙤약볕 아래서 헐떡거리며 언덕 위로 끌고 올라가야 하는 화강암 덩어리 같았다. 지켜보기에 거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지만, 프루던스는 고집스레 매달렸고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발전했다. 성장 배경을 감안한다면 인상적인 수준의 발전이라고 인정해 줄 정도였다. 수학은 그녀에게 늘 난제였지만, 머리를 두들겨 가며 기초 라틴어를 습득했고 시간이 흐르자 꽤 유창한 억양으로 그럴듯한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글씨 연습만 해도, 프루던스는 공작 부인의 필체만큼이나 세련되어질 때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훈육 방법을 동원해도 학문 영역에서의 진짜 차이를 좁히기란 불가능했으며 앨마는 프루던스가 절대 가닿을 수 없는 영역 너머로까지 뻗어 나가는 정신력을 재능으로서 갖고 있었다. 앨마는 단어 암기력이 대단했고 계산에도 천부적이었다. 그녀는 반복적인 연습과 시험, 공식 원리를 사랑했다. 앨마에게 무언가를 한 번 읽는다는 것은 그 내용을 영원히 소유함을 의미했다.

 

- 헨리는 탐욕스럽게 책들을 손에 넣었다. 몇 권씩이 아니라 아예 트렁크째로 사들였다. 그런 류의 장서들은 응당 분류해둬야 했지만, 물론 헨리는 책을 분류하고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고달픈 분류 작업은 수 년째 베아트릭스의 몫이었고, 그녀는 통째로 들어오는 책을 솎아 내서 보석 같은 책만 남겨 두고 나머지 수많은 싸구려 책들은 필라델피아 공립 도서관으로 실어 보냈다. 그러나 1816년 가을이되자 베아트릭스의 분류 작업은 점점 뒤처졌다. 책들은 그녀가 분류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쏟아져 들어왔다. 마차 차고의 창고마다 아직 열어 보지조차 못한 가방이 쌓여 갔고, 그 안에는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매주 온갖 개인 서재의 장서 전체가 새로이 화이트에이커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자(명문가들이 차례차례 파산했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골칫덩이가 될 지경이었다. 
 

- 어쩌면 누군가는 교양 있는 미혼의 열여섯 살 소녀가 검열받지 않은 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감독도 없이 홀로, 절제되지 않은 사상의 막강한 습격을 받으며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베아트릭스는 실용적이고 정숙한 젊은 여성으로 자라도록 이미 앨마를 성공적으로 교육해 냈으므로, 불결한 사상을 거부하는 방법 쯤은 분명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앨마가 책이 든가방들을 열었을 때 맞닥뜨리게 될 것들에 대해서 철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혹시 어쩌면 앨마의 못생긴 외모와 어색한 태도 때문에 '관능'의 위험에 면역 되었으리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쉰 살이 다 되어 현기증과 집중력 결핍을 수시로 겪고 있던) 베아트릭스가 단순히 부주의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앨마 휘태커는 혼자 있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 반대하는 게 틀림없다는 수군거림마저 필라델피아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둘 다 친구가 없었다. 앨마도 프루던스도 과학과 무역에 종사하는 성인 남자들과 식사를 같이 했을 뿐, 정신세계까지 확실히 형성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둘은 젊은 구혼자들과 적절하게 대화하는 법 따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했다. 앨마는 화이트에이커의 아름다운 연못에 핀 수련을 보고 감탄하는 젊은 방문객이 나타나면, "아니에요. 잘못 아셨군요. 저건 수련이 아니에요. 연꽃이죠. 수련은 수면에 떠 있지만 연꽃은 수면 위로 한참 올라오거든요. 차이점을 한 번 알고 나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실 거예요."라고 대꾸하는 종류의 아가씨였다. 
   

- “당신이 틀림없군요!" 레타는 상이라도 탄 듯 프루던스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프루던스는 말 그대로 선물다웠다. 
평소처럼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프루던스는 붓을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레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레타는 지나칠 정도로 기뻐하며 프루던스의 팔을 두드리고 나서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잠시 프루던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앨마는 레타가 프루던스의 미모에 대해 언급하거나, 앨마와 프루던스가 어떻게 자매일 수 있는지 묻기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했다. 처음 앨마와 프루던스를 함께 보는 경우, 두 명 중 하나 꼴로 꼭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매라면서 한 사람은 피부가 완전히 도자기 인형인데, 한 사람은 어떻게 이토록 낯빛이 붉지?', '어떻게 한 쪽은 이토록 가녀린데, 한 쪽은 이다지도 몸집이 크지?' 프루던스 역시 그런 달갑지 않은 질문을 기다리며 긴장했다. 그러나 레타는 조금도 프루던스의 미모에 정신이 팔리거나 위축된 것 같지 않았고, 두 사람이 사실상 자매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도 않은 듯했다. 그녀는 단지 프루던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기뻐하며 손뼉을 쳐 댔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셋이 됐네요! 이런 행운이! 우리가 남자였다면 이제부터 뭘 했을지 알아요? 서로 끔찍하게 신경을 긁어 대다가 뒤엉켜 나뒹굴고 싸우면서 코피를 냈을 거예요. 그러다가 싸움을 마치면 상처만 잔뜩 나서 괴로워하다가 ... "

 

- 우리는 바이올린, 포크, 스푼

우리는 달과 함께 춤을 추네

우리에게 도둑 키스를 하려면서두르는 게 좋을걸!

- 앨마가 이 짧고 웃기는 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전에 (누가 바이올린이고 누가 포크이고 누가 스푼인지) 프루던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프루던스는 절대 소리 내서 웃는 법이 없었으므로,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호탕하고 유쾌하고 컸다. 그렇게 인형같이 생긴 사람의 입에서 절대 나올 것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누구세요?" 프루던스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나서 물었다. "난 레타 스노, 절대로 길을 잃지 않는 당신의 새 친구랍니다."
"글쎄요. 레타 스노, 내가 보기엔 길도 잃고 정신도 잃은 것 같은데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여기 있잖아요."
레타가 야단스레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정말이었다.

 

- 고양이의 태도가 너무도 확신에 넘치고 편안해 보여서 감히 아무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고양이를 집에 두게 되었다. 레타의 행동도 그와 비슷했다. 그날 화이트에이커에 나타난 레타는 제멋대로 편하게 굴었으며, 그러다 보니 문득 항상 거기 드나들던 사람처럼 여겨졌다. 엄밀히는 아무도 레타를 초대한 적 없었지만, 레타는 어떤 일에도 초대를 필요로 하는 아가씨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자기가 내키는 시간에 찾아와서 원하는 만큼 머물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는 스스로 갈 준비가 되면 떠나갔다. 

 

- 레타 스노는 충격적일 정도로(부럽기도 했다.) 제멋대로 살았다. 레타의 어머니는 아침마다 몸단장에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는 사교계의 고정 멤버였고 오후에는 또 다른 사교계의 고정 멤버들을 만나느라 시간을 보냈으며 저녁 시간도 늘 댄스파티로 끔찍이 바쁜 사람이었다. 늘 집을 비우는 아버지는 딸이 하고 싶다는 것은 다 들어주었고, 결국에는 튼실한 말 한 마리 ... 

 

- "터무니없는 말을 다 듣겠군요." 베아트릭스가 낱말 하나하나 강조하며 힐난했고, 앨마는 음절 하나하나에 움찔움찔 했다. "내 나이가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잃는 걸 지켜봤을지 상상이 되겠지요? 그럴 때마다 울면 어떻게 되겠어요? 누군가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비극이 아니에요. 누군가의 할머니가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건 더군다나 마냥 눈물을 흘릴 일이 분명 아니죠. 젊은 세대에게 품위와 분별력을 가르쳐서 전하고 난 이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조모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더욱이 슬퍼하는 하녀의 침대에 쓰러져서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절제되고 엄격한 태도로 하녀에게 모범을 보였다면 더 나은 시중을 받았을 텐데, 아가씨는 그 하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군요." 
앨마가 괴로움에 움츠러드는 사이, 레타는 멍한 표정으로 꾸지람을 들었다. 그것으로 레타 스노는 끝장이라고 앨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어서 레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옳은 말씀이세요! 어쩜 그렇게 상황을 참신하게 받아 들이시는지! 부인 말씀이 전적으로 옳아요! 저도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누군가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레타의 뺨 위로 흘러내리던 눈물이 스스로 말려 올라가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거의 실제로 보는 느낌이었다.


 - 레타가 스노 가문이 아니라 휘태커 가문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졌으리라. 가족이 더 있었다면 앨마와 프루던스도 스스럼없이 친밀감을 가지고 친구로서 자매로서 살아가는법을 배웠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앨마는 지독한 서글픔에 사로잡혔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수없이 가르침을 받았듯이 세상은 원래 있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냉정하게 견뎌 내야 했다. 


 - 앨마는 나이 어린 하인 한 명에게 돌아섰다. 꽤 뜀박질이 빨라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살 볼라틸레(sal volatile)를 가져와."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앨마는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방금 아이에게 라틴어를 사용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탄산암모늄을 가져오란 말이야."
또다시 멍한 표정. 앨마는 홱 돌아서서 방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올바른 낱말을 쓰지 못한 탓이었다. 앨마는 정신을 가다듬고서 다시 시도해 보았다. 
"녹각정액을 가져와."
그러나 그것 역시 친숙한 용어가 아니거나, 그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닌 듯했다. 하기야 녹각정(옛날에는 사슴뿔에서 뽑아낸 재료를 암모니아의 원료로 삼았다.)은 학자들이나 알고 쓸 법한 고어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자신이 원하는 물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을 찾아내고자 고심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불렀더라? 플리니우스는 그것을 '함모니아쿠스 살(hammoniacus sal)'이라고 불렀다. 13세기 연금술사들은 항상 그 물질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플리니우스나 13세기의 연금술을 언급하는 일은 방 안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앨마는 죽은 언어와 쓸모없는 정보로만 가득 찬 쓰레기통 같은 자신의 머리를 저주했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 드디어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뜨고서 실제로 들어먹힐 만한 명령을 내질렀다.

"코 자극제! 어서! 가서 찾아봐! 이리 가져와!"

 

- "유감스럽지만, 우리에게는 친구들의 행운을 기뻐해 주고 축복을 빌어 줄 의무가 있어."
앨마는 다시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지만 프루던스가 먼저 입을 막고 경고했다. "말을 계속하기 전에 자제력을 되찾는 게 좋을 거야, 앨마. 안 그러면 무슨 말이든 본심을 드러냈음을 후회하게 될 테니까."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앨마는 이미 속마음을 드러냈음을 '깊이' 후회했다. 이런 대화를 아예 시작하지도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최선의 방법은 당장 대화를 끝내는 것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앨마가 입을 다물어야 할 귀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공포스럽게도 그녀는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 "내가 레타를 부추겼을 것 같아? 네가 벌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해?"
맙소사, 프루던스에게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였다면 만만찮은 변호사가 되었을 터다. 앨마는 지금까지 이토록 참담하거나 형편없이 쩨쩨해진 느낌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주저앉아서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프루던스는 의자까지 앨마를 쫓아와서 그녀를 굽어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건 그렇고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비슷한 상황이니까 지금 너한테 얘기할게. 이런 화제를 꺼내는 건 탈상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넌 이미 우리 가족의 애도 기간이 끝났다고 결정한 것 같구나." 
그러면서 프루던스는 검은색 상장이 사라진 앨마의 오른팔을 살짝 만졌고, 앨마는 거의 움찔하며 소스라쳤다.

 

- "한네커, 솔직히 난 킹스턴 부인이 쉰 살이나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인이 우리한테 자궁 연구를 허락할 리도 없고요." 
"난 그저 네가 지금 생각하듯 미래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게다가 너한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한네커는 이제 일손을 멈추었고 목소리도 진지해졌다. "누구나 실망스러운 부분은 있는 법이다, 얘야." 
앨마는 네덜란드어로 "얘야."라고 하는 말소리가 참 좋았다. '킨디에(kindje)'. 앨마가 어렸을 때 겁에 질려서 한밤중에 가정부의 침대로 기어오르면 항상 한네커가 불렀던 애칭도 그것이었다. '킨디에.' 그 자체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누구나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한네커."
"별로 아는 것 같지 않던데. 넌 아직 어리고 그래서 자기 밖에 생각을 못 하지. 넌 네 주변 사방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곤경을 좀체 알아차리지 못해. 반박하지 마. 그게 사실이니까.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나도 네 나이 때는 너만큼이나 이기적이었지. 젊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건 전통이야. 난 이제 더 현명해졌어. 안타깝게도 젊은 사람들의 어깨에 늙은이의 머리를 달거나 젊은 사람들이 돌연 현명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언젠가 너도 시련 없이 이 세상을 거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누구든, 굉장한 행운을 타고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조차 마찬가지야." 
"그럼 우리는 그런 시련을 통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죠?"
목사나 철학자, 시인에게도 반문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일 만큼 한네커 데 그루트에게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글쎄다, 얘야, 어디까지나 '너의 시련'이니까 너 좋을 대로 뭐든 할 수 있겠지. 네 몫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 몫으로 내가 무얼 하는지는 말해 줘야겠구나. 난 시련의 머리채를 후려잡아 가지고 땅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장화 뒤꿈치로 갈아 버리지. 너도 배워서 똑같이 해 봐." 한네커가 부드럽게 말했다. 

- 그래서 앨마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실망스러운 부분을 장화 뒤꿈치로 갈아 버리는 법을 배웠다. 마침 튼튼한 장화도 갖고 있었으므로 그런 일을 하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녀는 도랑으로 걷어차 버릴 수 있도록 슬픔을 모래먼지처럼 미세하게 가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그 일을 했고 어떨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시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앨마는 짧은 초록색 모피 같은 이끼 사이로 손가락을 파묻으며 기쁜 예감에 복받쳤다. 내 것이 될 수도 있어! 이제껏 과소평가된 이 식물군을 중점적으로 연구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앨마라면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끈기뿐만 아니라 시간도 있었다. 능력도 있었다. 연구에 필요한 현미경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연구물을 출판해 줄 사람도 있었다. 

 

- 이 모든 사실을 깨닫자, 앨마는 스스로의 존재를 더 크게 느낌과 동시에 아주 작다고 느꼈다. 하지만 작아졌다는 그 느낌마저 유쾌했다. 세상이 돌연 끝없는 가능성의 눈금 사이로 줄어들었다. 한평생을 풍요로운 축소판의 세계 속에서 살게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최고로 멋진 발견은, 앨마가 이끼에 관한 '모든' 것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이끼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 시점에서 이미 단언할 수 있었다. 이끼는 어딜 가나 있었고, 종류도 심오할 만큼 다양했다. 아마 그녀는 이 작은 바위 하나에 펼쳐진 이끼의 절반도 다 이해하기 전에 늙어 죽을 터였다. '만세!' 그것은 남은 일생 동안 앨마가 해야 할 일이 쫙 펼쳐져 있다는의미였다. 게으름을 부릴 필요도, 불행해 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외로워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 앨마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면 그 발견에 감사하며 신께 성호를 그었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짜릿한 종교적 깨달음과 신비한 교감의 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마는 과도하게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어쨌든 약간이나마 기도처럼 들렸다. 
"내 앞에 쌓인 일거리에 축복을! 자, 시작해 볼까요."

 

- 이끼는 불타 버렸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황폐해진 땅에서조차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최초의 식물 생명체였다. 숲을 처음부터 다시 살려 내려는 무모함도 보였다. 이끼는 부활의 동력이었다. 한 줌의 이끼는 죽은 듯 건조된 상태로 사십 년 동안 동면한 채 있다가도 그저 물만 적셔 주면 거뜬히 되살아났다. 

 

- 그러나 지질학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어디 중간쯤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바로 '이끼의 시간'이었다. 지질학의 시간과 비교하면 이끼의 시간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바위가 100만 년 동안 꿈도 꾸지 못할 성취를, 이끼는 고작 1000 년 사이에 이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인간의 시간과 비교하면 이끼의 시간은 매우 느렸다. 교육받지 못한 인간의 눈에는 이끼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듯 보이리라. 그러나 이끼는 생동하면서 놀라운 결과물을 낳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십 년이나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이끼의 흐름을 추적할 수 없을 만큼 이끼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 이제 벌써 이십오 년 이상 그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항상 그런 나날이 이어지리라고 앨마는 생각했다. 앨마 휘태커에게는 조용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었다.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 이 모든 시시콜콜한 사연들은 <인콰이어러>가 프루던스 휘태커 딕슨의 특이한 삶을 다룬 기사를 통해 이미 1838년에 낱낱이 드러났다. 폭도들이 노예 해방 운동가들의 회의장을 불태워 버린 사건에 자극받은 이 신문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 관한 흥미로운(재미도 보장하는)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어느 유명한 노예 폐지론자가, 묵묵히 관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은 휘태커 가문의 양녀를 언급한 순간, 기자의 관심은 프루던스 딕슨에게 쏠렸다. 기자는 즉각 흥미를 보였다. 이제껏 휘태커라는 이름은 필라델피아에서 대가 없는 후원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프루던스의 생생한 미모도 한몫했다.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었다.) 그 빼어난 얼굴과 소박한 생활의 극단적 대조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매혹적인 주인공으로 만들 뿐이었다. 칙칙한 옷차림 밖으로 드러나는 우아하고 새하얀 손목과 섬세한 목선 때문에라도 그녀는 포로로 잡힌 여신,수녀원에 갇힌 아프로디테의 현신으로 보였다. 기자는 그녀를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면직물을 입는 건 결백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악은 그런 식으로 우리 가정에 스며들기 때문에 전혀 결백한 행동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안겨 주며 응석을 받아 주는 일 역시 순수한 즐거움일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사탕이 인간의 고통과 잔혹한 핍박으로 얻어낸 것이라면 그 같은 즐거움은 죄악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우리 집안에서는 커피나 차도 마시지 않습니다. 저는 필라델피아의 모든 선량한 기독교인들의 양심에 우리와 같은 행동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노예 제도를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계속그 착취의 결과물을 즐긴다면 위선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위선에 어떻게 미소 지어 주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앨마에게 그 기사는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앨마의 눈에 프루던스의 가치관은 어쩐지 자존심이나 허영심으로 보일만큼 의문스러워 보였다. 프루던스는 평범한 인간이 가질 법한 허영심을 품지는 않았을 테지만(앨마는 프루던스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었다.) 앨마는 프루던스가 좀 다른 방식으로, 지나친 궁핍과 희생을 과시함으로써 좀 더 섬세하게 허영을 떨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지 봐.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사는지 잘 보라고.'라고 말하는 듯했다. 더욱이 앨마는 프루던스의 흑인 이웃인 해링턴 가족이 하룻밤이라도 옥수수 빵과 당밀보다 더 나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딴 공허한 방식으로 유대감을 가지겠답시고 다 같이 쫄쫄 굶어야 하나? 차라리 딕슨 부부가 그냥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하면 왜 안 된단 말인가? 

 

- "저는 제가 한 말이 기록되어서 자랑스러워요. 필라델피아의 모든 신문 기자들 앞에서 똑같은 말을 또다시 자랑스럽게할 수도 있어요."
프루던스는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아버지가 저의 신념을 공유하시지 못하는 건 유감이에요."

"나는 네 신념 따위 코딱지만큼도 관심 없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만약에 내 창고가 조금이라도 해를 입기만 해 봐라..."
"아버지는 영향력 있는 분이세요." 프루던스가 말꼬리를 잘랐다. "아버지가 이런 명분에 목소리를 내 주시면 큰 힘이 될 테고, 아버지의 돈이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훨씬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어요. 아버지도 사무치는 가슴으로 직접..."
"사무치는 가슴따위 집어 치워라! 너는 이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들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을 뿐이야!"
"그럼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아버지?"

"입 다물고 네 가족이나 돌봤으면 싶구나."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부 제 가족이에요."
"흰소리 집어치우고 내게 설교할 생각 마라. 그들은 가족이 아니야.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네 가족이야."
"제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일 뿐이에요." 프루던스가 말했다.
그 말에 헨리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그 말은 그의 허를찔렀다. 그 말에는 앨마 역시 충격을 받았다. 콧등을 세게 얻어맞은 듯 예기치 못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발언이었다. 

 

-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당신이 이 집안에서 쫓아내는 딸은 항상 당신께 성실했고, 또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한 남자에게 온정과 연민을 바랄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세요. 이건 잔인한 짓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양심에도 가책을 가져오리라고 믿어요.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헨리 휘태커. 그리고 기도를 올릴 때 내 아버지의 도덕성에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하늘에 계신 주님께 물어볼 거예요. 어쩌면 도덕성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 자매의 집을 방문하며 단 한 번도 따뜻한 기운이나 편안한 기분을 느껴 본 적 없었던 앨마는 늘 만남을 마치며 안도했다. 앨마는 프루던스를 볼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프루던스의 엄격함과 도덕성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앨마는 아버지와 프루던스의 마지막 대면에서 아버지가 부끄럽게 행동했다고 느꼈다. 아니, 헨리와 앨마 '둘 다' 부끄럽게 행동했다. 그날의 사건은 그다지 보기 좋지 못한 장면으로 새겨졌다. 프루던스는 선하고 올바른 쪽에 확고하게 서 있는 반면 (비록 독실한 신앙인인 척하긴 했지만) 헨리는 단순히 사업상의 이윤을 보호할 목적으로 양딸을 내쳤다. 그럼 앨마는? 글쎄, 앨마는 헨리 휘태커의 편에 섰다. 열렬히 나서서 프루던스를 변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프루던스가 걸어 나간 뒤에도 화이트에이커에 마냥 남아 있었으므로 최소한 겉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헨리 휘태커는 관대한 사람도 아니고 친절한 사람도 아닐지 모르지만 귀중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앨마가 필요했다. 그는 앨마 없이 살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일을 관리할 수 없었고, 그의 일은 막대하고 중요했다. 앨마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 그뿐만 아니라 노예 폐지론은 앨마의 가슴에 절실히 와닿는 명분도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노예 제도를 혐오했지만 다른 관심사가 워낙 많아서 그 문제를 매일같이 양심을 후벼파는 주제로 여기지 못했다. 어쨌든 앨마는 이끼의 시간대에 맞춰 살았지만, 순전히 그 일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일단 아버지까지 돌봐야 했으므로 매일 급변하는 인간의 정치적 드라마에까지 발맞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노예 제도는 터무니없는 불의였고 폐지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불의가 있었다. 가난도 그중 하나였고, 폭정과 절도, 살인도 있었다. 미국 이끼에 관한 최고의 책을 저술하고, 세계적인 가족 기업의 복잡한 업무도 관리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모든 불의를 없애는 데 손을 보태기란 불가능했다. 

 

- 그게 진실 아닌가?
그런데 프루던스는  어째서 정도를 벗어나면서까지 자신의 엄청난 희생을 과시하며 주변 사람들 모두를 옹졸하고 인색한 돼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일까? 

- 저 위대한 린네가 일찍이 적어 두었듯.

'나투라 논 파시트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그러나 앨마는 자연이 '실제로' 비약했다고 생각했다. 깡충이든, 폴짝이든, 휘청이든, 미세한 도약에 불과했겠지만 그래도 비약은 비약이었다. 자연은 분명 변화했다. 

 

- 꼬리이끼의 일부 좋은 분명 다른 종보다 우세하게 자라나서 과거의 꼬리이끼로부터 변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에서 갈라져 나왔거나 다른 군락을 멸종시켰음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직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순 없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음은 확실했다. 

 

- 조지가 점박이 '카타세툼' 양란 석판화 한 장을 앨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난초는 지나칠 만큼 정교하게 묘사된 까닭에 종이를 뚫고 자라날 듯 보였다. 노랑 바탕에 빨강 점이 박힌 꽃잎은 살아 있는 살갗처럼 촉촉해 보였다. 잎은 탐스럽고 두툼했으며, 구근 뿌리는 실제로 털어 대면 흙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앨마가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다 감상하기도 전에 조지는 다른 멋진 판화를 하나 더 보여 주었다. 탐스러운 황금빛 꽃이 너무 싱그러워서 거의 바르르 떨릴 듯 보이는 '페리스테리아 바르케리'였다. 석판화에 채색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색감뿐만 아니라 질감을 살리는 데도 거장이었다. 꽃잎은 다듬지 않은 벨벳 같았고, 꽃잎 끝에 흰 안료를 살짝 얹어서 꽃마다 이슬의 흔적을 표현해 놓았다. 이어 조지가 또 다른 판화를 건네자, 앨마는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난초인지 모르겠지만 앨마는 분명코 본적 없는 종류였다. 사랑스러운 분홍색 꽃망울은 요정이 화려한 무도회에 가려고 차려입은 듯했다. 그토록 복잡한 꽃의 구조를 그토록 섬세하게 그려 낸 작품은 난생 처음이었다.  

 

- 그러나 파이크 씨는 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저택을 등지고 서서는 베아트릭스의 오래된 그리스식 정원을 쳐다보았다. 앨마와 한네커가 어머니를 기리는 뜻으로 수십 년간 깔끔하게 유지해 온 정원이었다. 그는 좀 더 잘 감상하려는 듯 약간 뒤로 물러나더니 굉장히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은 뒤 정원의 북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대각선으로 길게 정원을 가로지르더니 남동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이와 폭이 똑같은 두 개의 화단을 기준으로 정원의 범위를 계산하려는 사람처럼 넓은 보폭으로 걸어갔다. 북서쪽 구석에 당도한 그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앨마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또렷하게 볼 수는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광경이었고, 앨마는 서둘러 그를 만나고자 마차 차고를 나섰다. 

 

- "파이크 씨." 그에게 다가가며 앨마가 손을 내밀었다. "휘태커 양이시로군요!" 그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앨마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여긴 직접 와서 보고도 제 눈을 믿지 못하겠네요! 말씀해 주세요. 휘태커 양, 대체 어떤 미치광이 천재가 이 정원을 유클리드 기하학의 엄격한 원리에 딱 맞게 설계했는지 말이에요?" 

"제 어머니의 생각이셨어요.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지만 귀하께서 어머니의 목적을 알아보셨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하셨을 겁니다."
"이걸 보고 누가 모르겠습니까? 황금 비율인걸요! 거미줄처럼 이어진 사각형을 담은 두 개의 큰 사각형이 있고 통로는 그 둘을 절반으로 나누는 데다, 직각 삼각형도 여러 개 보이는 군요. 정말 보기 좋습니다. 누군가 이런 정원을 장엄한 규모로 만드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니 대단합니다. 회양목도 완벽하군요. 모든 대칭 형태에 등식 부호를 이어 놓은 듯합니다. 어머님은 지극한 기쁨 같은 존재이셨지요?"

"지극한 기쁨이라..." 앨마는 그랬을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글쎄요. 다만 저희 어머니가 정확하고 엄밀한 사고를 기쁨으로 여기시는 분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 "사람들은 대부분 이끼를 상당히 지루하다고 생각해요. 이 점을 미리 경고해둬야겠네요, 파이크 씨." 

"그런 걸로는 겁먹지 않습니다. 저는 늘 다른 사람들이 지루해하는 주제에 매력을 느끼거든요."
"그 점은 저랑 같으시네요."
"그래도 말씀해 주시죠, 이끼의 어떤 부분을 높이 사신 겁니까?"
"기품이요." 앨마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또 이끼의 고요함과 지능이요. 제 연구의 한 부분이기도 한데, 전 이끼가 '참신해서' 좋아요. 더 크고 중요한 식물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식물학자들이 이미 다루었거나 연구된 적이 있는데 이끼는 다르니까요. 전 이끼의 정숙함도 존경하는 것 같아요. 이끼는 우아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죠. 이끼와 비교하면 식물계의 다른 품종은 전부 다 너무 뻔뻔하고 유난스러운 것 같아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시겠어요? 좀 더 크고 눈에 잘 띄는 꽃들은 때때로 멍청하게 군침이나 흘리는 바보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거 아세요? 완전히 얼이 빠져선 무기력하게 입을 헤벌린 채 고개만 까딱까딱하는?" 
"축하드립니다. 방금 난초과 식물들을 완벽하게 묘사하셨군요."

- 앨마는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때문에 언짢으셨군요!"
그러나 파이크 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놀려 드린 거예요. 전 한 번도 난초의 지능을 변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난초를 좋아하지만 딱히 영리해 보이지는 않거든요. 당신의 판단 기준으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끼의 지능을 변호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훨씬 즐겁군요! 당신이 이끼를 대신해서 식물들의 성격을 분석이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이끼를 변호해야 하니까요! 이끼는 지나치게 무시당해 왔지만 정말로 고상해요! 사실 저는 그 미시 세계가 진정한 모습을 감춘 위대한 선물임을 알기 때문에 그걸 연구하게 되어서 영광스러워요."

 

- 앰브로즈 파이크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은 듯했다. 바위에 당도하자 그는 앨마에게 질문을 열 개쯤 던지더니, 콧수염이 바위에서 자라난 듯 보일 정도로 이끼 군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는 각기 다른 종을 설명하는 앨마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변이에 관한 그녀의 초기 이론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어쩌면 그녀는 너무 오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랐다. 어머니라면 그렇다고 단언했을 것이다. 앨마는 말을 하면서도 이 가엾은 남자를 엄청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과분할 만큼 엄청난 호의를 보였다! 오래도록 혼자만의 생각으로 넘칠 듯 꽉 채워 둔 금고를 열어서 아이디어를 마구 늘어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인간이란 원래 가슴속에 열정을 너무 오래 담아 두고 있으면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에게 그 생각을 공유하고 싶기 마련인데, 앨마는 너무나도 오래도록, 무려 수십 년씩이나 묵혀 두고 있었던 것이다. 

 

-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휘태커 양." 그가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서 외쳤다. "이끼 군락의 진정한 본성은 뭡니까? 말씀하신대로 이끼는 겉보기에 정숙하고 순해 보이게끔 속임수를 쓰는 데 아주 능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셨다시피 이끼는 막강한 능력을 갖추고 있죠. 당신이 연구하는 이끼는 다정한 개척자입니까? 아니면 적대적인 약탈자입니까?
"농부인지, 해적인지, 그런 의미인가요?" 앨마가 물었다.

"정확합니다."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네요. 어쩌면 둘 다 약간씩 해당되거든요. 저도 항상 그게 의문이에요. 그걸 알려면 또다시 이십오 년쯤 걸릴지도 모르죠."
"당신의 인내심을 존경합니다." 

- 시간을 두고 앨마가 앰브로즈 파이크를 더 잘 알게 되었다면, 그가 언제 어디서든 쉬고 싶을 때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는 사람임을 눈치챘으리라. 분위기만 허락된다면 그는 격식을 갖춘 응접실 카펫에도 털썩 주저앉을 사람이었다. 특히 생각과 대화만 즐겁다면 어디든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세상은 온통 그의 의자였다. 세상에 그런 자유도 있었다. 앨마는 그런 식의 자유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바로 그날, 그가 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동안, 앨마는 조심스레 근처 바위에 앉았다. 

- "당신은 자기 일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십니까?"
앨마는 잠시 그 질문에 대해서 고심한 뒤 대답했다. "그래요. 가끔 왜 그럴까 생각도 하지만요. 세상 사람 대다수는, 특히 힘들게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일하지 않는 걸 행복이라고 여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 저는 왜 이렇게 부지런히 일을 할까요? 이끼의 생김새가 그만큼 마음에 든다면, 왜 그냥 단순히 이끼를 보며 감탄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로 만족하지 못할까요? 왜 굳이 그 비밀을 파헤쳐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걸까요? 보시다시피 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기에 평생 전혀 일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이 풀잎처럼 한가롭게 마음을 비우고 빈둥거리는것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야 당신은 창조와 그 모든 멋진 배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겠죠." 앰브로즈 파이크가 간단히 대꾸했다.
앨마는 얼굴을 붉혔다. "대단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대단하니까요." 그가 방금처럼 똑같이 단순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그들 뒤쪽으로 펼쳐진 숲 어딘가에서 개똥지빠귀가 노래하고 있었다.

 

- "그런데 왜 결국 집에 오셨어요?" 
"외로웠거든요."
그는 정말이지 특이한 솔직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앨마는 깜짝 놀랐다. 외로움 같은 약점을 타인에게 내보이기란 그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험난한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제가 너무 병들기도 했습니다. 재발성 열병에 걸렸거든요. 하지만 그게 완전히 불쾌한 일만은 아니었죠. 열병을 앓을 땐 놀라운 환상을 보기도 하고 목소리도 들리거든요. 때로는 그걸 따르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라니까요."
"환상, 아니면 목소리요?"
"둘 다요! 하지만 어머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정글에 빼앗긴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마음은 갈가리 찢겼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어떻게 될지 계속 고민하셨을 겁니다. 분명 아직도 제가 뭐가 될지 고민하고 계실걸요! 그래도 이젠 최소한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아시니까 다행이죠."
"그 오랜 세월 가족분들이 당신을 많이 그리워하셨겠어요."
"가여운 분들이죠. 제가 많이 실망시켰어요. 제 가족은 훌륭한 사람들인데 저만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았죠. 가족 모두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특히 어머니가 안쓰럽습니다. 제 짐작이 맞다면, 어머니는 제가 굴러 들어온 좋은 기회를 다 차 버렸다고 믿고 계세요. 하버드도 겨우 일 년 만에 관뒀거든요. 그 말의 의미가 뭐였건 다들 저더러 장래가 촉망된다고 했지만 저에게는 대학 생활이 맞지 않았어요. 무슨 신경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강의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걸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교 클럽의 유쾌한 친구들과 동년배 집단 같은 문화도 정말 안 맞았죠.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대학 생활의 대부분은 사교 클럽과 동년배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 표현대로 제가 원하는 건 구석에 앉아서 식물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었거든요." 
"감사할 일이죠!" 앨마가 말했다.

- "잠이 드셨더군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잠이 저를 덮친 거예요."
여전히 풀밭에 누운 채로 그는 고양이나 아기인 양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었다. 그는 앨마 앞에서 곯아떨어졌음에 전혀 불편해하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녀도 불편하지 않았다.
"피곤하셨나 봐요."
"전 몇 년째 피곤합니다." 그가 일어나 앉아서 하품을 하더니 모자를 다시 썼다. "어쨌거나 저한테 이렇게 좋은 휴식을 허락하시다니 참으로 너그러우시군요. 감사합니다." 
"이끼에 관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당신이 너그러우시죠."
"전 즐거웠습니다. 더 듣고 싶군요. 막 졸음에 빠져들면서 참 부러운 인생을 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끼처럼 세밀하고 세련된 이상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모든 존재를 소모한다니!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과 온갖 편안한 것들에 둘러싸여서요."
"중앙아메리카 정글에서 십팔 년을 보낸 분께는 제 인생이 따분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전 이제껏 제가 경험한 것보다 좀 더 지루한 인생을 누려 보고 싶거든요.”
"소원은 조심해서 빌어야 해요. 지루한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가 없답니다!" 

- "많은 분들이 같은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저의 선천도 포함해서요. 그런데도 저는 오랜 세월 제 본분보다 낮게 살았습니다." 
"나는 내 본분보다 높게 살아왔네. 계속 말이야! 처음 미국에 왔을 땐 나도 자네 또래의 젊은이였어. 이 나라에는 사방에 돈이 깔려 있음을 알았지. 그저 지팡이 끝으로 돈을 파내면 되더군. 그런데 자네는 뭘로 가난의 핑계를 댈 셈인가?" 
파이크 씨는 악의 없이 헨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좋은 지팡이가 없어서 말이죠."
앨마는 꿀꺽 침을 삼키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조지 호크스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헨리는 듣지 못한 듯했다. 가끔 앨마는 아버지의 청력이 나빠졌음을 하늘에 감사할 때가 있었다. 그는 이미 관심을 집사에게 돌린 뒤였다. 

 

- "저희 아버지를 용서하세요. 조지는 저희 아버지를 잘 알지만, 대개 헨리 휘태커를 겪어 보지 않은 분들은 저런 발언을 들으면 할 말을 잃기도 하시거든요." 
헨리가 조는 사이에, 앨마는 낮은 목소리로 파이크 씨에게 말했다.
"식탁을 차지한 곰 같은 분이시네요." 파이크 씨가 질렸다기보다는 감탄에 가까운 말투로 대꾸했다.
"정말 그렇죠. 하지만 감사하게도 진짜 곰처럼 동면해 주셔서 저희한테 시간을 벌어 주기도 하시죠!"
앨마의 말에 무뚝뚝한 조지 호크스의 입술에도 미소가 감돌았지만, 앰브로즈는 여전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헨리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 아버지는 아주 엄한 분이셨어요. 전 아버지의 침묵에 항상 겁을 냈습니다. 저렇게 자유롭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건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서 있어야 하는지 언제든 알 수 있으니까요."  
 

- 그는 연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독히도 지쳐 보였다. "그럼 말씀드리죠, 휘태커 양. 저는 절대 두 번 다시 여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아주 천천히, 제가 살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느린 속도로 일을 하고 싶습니다." 

 

- "제가 들은 소식은 달라요, 아버지. 야자수 온실을 지은 뒤로는 다들 옛날의 위용을 되찾았다고 하던걸요." 
앨마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걸까? 심지어 죄를 짓는 건 아닐까? 큐 가든에 대한 헨리의 뿌리 깊은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러나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헨리가 질투심에 불타오르기만 하면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불러내는 것이 나쁜 짓 같지는 않았다. 

 

- 앨마가 이토록 행복한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앰브로즈 파이크가 도착하기 이전까지 앨마의 존재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다. 그녀의 세상은 제법 협소하고 일상 역시 반복되었지만, 못 견딜 만한 삶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최대한 활용했다. 앨마는 이끼에 몰두하며 자신의 연구 활동이 거리낄 것 없고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학술지와 표본실, 현미경, 식물학 논문, 해외의 식물학자들 그리고 수집가들과 나누는 서신 교류, 아버지를 향한 의무가 있었다. 나름의 관습과 습관, 책임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거의 삼십 년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페이지만 펼쳐 놓은 책 같은 신세였지만, 그 페이지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낙천적이었다. 흡족했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괜찮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 또 한 번 그는 신중하게 오래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다른 어떤 세상이요?" 앨마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참견이 지나친 것 같았다. 그러나 앨마는 더욱더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사과할게요, 앰브로즈. 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때까지 질문을 파고드는 나쁜 습관이 있어요. 제 본성이 그런가 봐요.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무례하지 않아요. 난 당신의 호기심이 즐겁습니다. 다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려줄 자신이 없군요.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내서 존경하는 사람의 애정을 잃고 싶진 않으니까요." 

 

- "그럴지도 모르죠.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광기라고 생각하셨어요. 친구들도 광기라고 생각했고, 의사들도 광기라고 믿었죠. 하지만 나 자신은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느꼈어요." 
"어떻게요?" 매 순간 두려움이 커져 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앨마는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신들린 느낌이라고 할까요? 마법에 걸린 듯한? 물질적 경계의 소멸? 불꽃의 날개를 단 듯한 영감?" 그는 전혀 미소 짓지 않았다. 퍽이나 진지했다. 그런 고백은 앨마에게 심각한 충격이었으므로 감히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사고 체계 안에서 '물질적 경계의 소멸' 따위는 설 자리가 없었다. 용기를 갖게 해 주는 물질적 경계의 확실성보다 앨마 휘태커의 인생에 위안과 확신을 가져다주는 건 없었으니까. 

- 앰브로즈는 말을 더 잇기 전에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앨마가 온도계나 나침반인 양 쳐다보았다. 마치 전적으로 그녀의 반응에 따라 방향을 선택하려는 듯 그녀를 판독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열아홉 살 때 하버드 도서관에서 야코프 뵈메가 쓴 전집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 아세요?"

- 당연히 앨마도 그를 알았다. 화이트에이커 도서관에도 그의 책이 몇 권 소장되어 있었다. 앨마는 뵈메의 책을 읽었지만 결코 그를 존경하지는 않았다. 야코프 뵈메는 16세기 독일 구두공으로, 식물에 관한 신비로운 환영을 본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초기 식물학자로 여겼다. 한편 앨마의 어머니는 그를 중세 미신의 오물 같은 잔재라고 평가했다. 야코프 뵈메를 둘러싼 세간의 갑론을박은 꽤 격렬했다. 그 옛날 구두공은 스스로 '모든 것의 서명'이라고 명명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즉, 신이 지상의 모든 꽃과 잎, 열매와 나무의 형태 속에 인간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마리를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창조주가 지닌 사랑의 증거를 담은 신성한 암호라고, 뵈메는 주장했다.

 

- 수많은 약용 식물의 생김새가 치료 대상인 질병이나 해당장기를 닮은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인간의 간 모양을 닮은 바질 잎은 간 질환에 확실한 효과가 있다. 노란 진액이 나오는 백굴채는 황달 때문에 생긴 피부의 황변을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 뇌 모양인 호두는 두통에 도움을 준다. 차가운 개울 주변에서 자라는 머위는 얼음물에 빠져 생긴 기침과 한기를 치료할수 있다. 잎사귀에 핏빛 무늬가 점점이 튀긴 듯한 마디풀은 살갗의 상처를 치료한다. 그렇게 끝도 한도 없이 이어졌다. 베아트릭스 휘태커는 그런 이론에 늘 냉소적이었고 ("대부분의 잎은 간 모양인데, 그걸 다 먹으라는 소리니?") 앨마는 어머니의 회의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 "뵈메의 생각에 대해 요즘 과학이 어떤 판단을 하는지는 나도 압니다. 반박을 이해해요. 야코프 뵈메는 합리적인 과학적 방법론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죠. 그는 질서정연한 사고를 하는 데 서툴렀습니다. 그의 글에는 흐트러지고 쪼개진 직관의 거울 조각이 가득합니다. 비합리적이었어요. 어리숙했고요. 그는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본인의 확신에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든 그냥 넘겨 버렸죠. 그는 주변 사실들을 자신의 믿음에 끼워 맞췄습니다. 아무도 그걸 과학이라 부르지 않죠." 

 

- 앨마는 친구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가 너무 오래도록 잠자코 있기에 앨마는 어쩌면 그가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께서는 우리가 그 표식을 찾아낼 수 있도록 신 스스로를 이 세상에 '찍어' 놓았다고, 뵈메는 말했습니다." 
앨마도 그 유사성에는 일리가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판화가처럼 말이죠." 
그 말을 들은 앰브로즈는 안도감과 고마움이 물밀듯 밀려드는 얼굴로 앨마를 돌아보았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나를 이해해 주시는군요. 청년이었던 내가 그 생각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지 아시겠지요. 뵈메는 그 신성한 '날인'이 일종의 신비한 마법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신학이란 바로 그 마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남긴 작품을 읽을 수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불구덩이에 내던져야 한다고요." 

 

- "난 그런 줄 몰랐어요. 친애하는 앨마. 당신은 늘 굳건해 보여서요." 앰브로즈가 다정히 말했다. 
"우린 둘 다 굳건하지 않아요." 앨마가 대꾸했다.

 

- 화이트에이커로 돌아온 두 사람은 평범하고 쾌적한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앨마는 마차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계속 정신이 산란했다. 가끔 난초를 그리거나 석판 인쇄를 준비하느라 앰브로즈가 바쁠 때, 앨마는 그를 관찰하며 광기나 사악한 정신의 징후를 찾았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귀신의 환영이나 터무니없는 환각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갈망하고 있다 해도, 그 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성이 병든 증거도 없었다. 빤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든 앰브로즈에게 시선을 들켜도 그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고 다정하고 의심이 없었다. 관찰 당하는 것을 염려하지도 않는 듯했다. 뭔가를 숨기느라 안달하지도 않았다. 앨마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후회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앨마를 향한 그의 태도는 더욱 따스해질 뿐이었다. 그는 전보다 더 이해심을 발휘하며 더 많이 격려하고 더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온화한 성품은 항상 똑같았다. 그는 헨리든, 한네커든, 모든 이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했다. 가끔 피곤해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열심히 일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앨마만큼이나 열심히 일했다. 그가 이따금 피곤해함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밖에는 늘 똑같았다. 그는 상냥하고 스스럼없는 앨마의 친구였다. 앨마가 보기에 과도하게 종교에 심취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일요일마다 앨마와 함께 의무적으로 교회에 갈 때를 제외하면 기도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면에서 그는 평화롭게 지내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 한편, 트렌턴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이후로 앨마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도무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수수께끼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답을 원했다. 앰브로즈 파이크는 미친 사람인가? 앰브로즈 파이크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사람인가? 앨마는 경이와 기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었지만, 다정한 친구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그가 그 사건을 겪으며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신을 만나 본 적도 없고, 만나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현실과 물질세계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삶을 영위해 왔다. 언젠가 마취제에 취해 이를 뽑았을 때 앨마는 눈앞에서 별이 떠다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 작용하는 정상적인 약효일 뿐임을 알았고,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계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앰브로즈는 환영을 볼 때 마취제나 다른 물질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의 광기는... 머리가 말짱한 광기였다.  

 

- 앰브로즈와 대화를 나눈 뒤 몇 주간 앨마는 종종 한밤중에 깨어나 살며시 도서관으로 내려가서 야코프 뵈메의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그 옛날 독일 구두공을 찾아본 적 없었지만, 그녀는 이제 존중과 열린 마음으로 그 책에 접근하고자 노력했다. 뉴턴이 뵈메의 책을 읽었으며 그를 숭배했음은 앨마도 아는 사실이었다. 뉴턴 같은 석학이 그의 말에서 지혜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앰브로즈처럼 특별한 사람이 그 내용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얼마라고 안 될 이유가 있을까? 

- "그런데 왜 나한테 직접 묻지 않았습니까?"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절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이 책들의 오류가 신경에 거슬리네요. 이런 오류가 왜 당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궁금해요. 뵈메는 터무니없는 비약과 모순, 혼란스러운 사상을 주장해요. 논리의 힘으로 곧장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지만 실상 그의 논리는 허점투성이죠." 그녀가 손을 뻗어서 펼쳐 놓은 책을 가리켰다. "가령 여기, 이 장만 해도 그래요. 저자는 성서 속 식물에 감추어진 신의 비밀을 풀어 줄 열쇠를 찾고 있지만, 정보 자체가 옳지 않은데 그걸 어떻게 납득할 수 있죠? 마태복음에 언급된 '들의 백합'을 해석하면서 음절에 담긴 비밀을 밝히고자 '백합'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분석하고 있어요. 그러느라 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지만...  앰브로즈, 들의 백합이라는 것 자체가 해석의 오류예요.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백합을 언급했을 '리' 없다고요. 팔레스타인에는 토종 백합이 두 종밖에 없고 둘 다 아주 희귀해요. 초원을 뒤덮을 만큼 지천으로 꽃을 피웠을 리 없어요. 평범한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꽃도 아니고요. 가장 현명한 청중에게 설교하며 예수는, 그들이 자신의 은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흔한 꽃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물론 확인할 순 없지만, 아마 예수는 야생 아네모네, 그러니까 '아네모나 코로나리아'라는 품종을 말했을 거예요..."
앨마는 말꼬리를 흐렸다.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드는 말투가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앰브로즈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친애하는 앨마, 당신이 시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난 당신이 번역한 성서를 즐겨 봤을 겁니다.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은 백합이 아니라 아네모네 코로나리아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이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함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니라.' 교회의 서까래를 울릴 찬송가도 당신이 짓는다면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나는 교회에서 청중이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앨마, 그 주제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의 버드나무로 하프를 만들어 걸고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은 어떻게 해석할 거죠?" 
  

- "이젠 당신이 나를 시험하는군요. 하지만 지역을 감안할 때 포플러나무였으리라고 생각해요." 앨마는 자존심이 상해서 발끈하며 말했다.
"그럼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요?"
앨마는 바보 같다고 느꼈지만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건 살구나 마르멜루였을 거예요. 마르멜루는 젊은 여자의 욕망을 끌기에 그리 달콤하지 않으니 살구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어쨌거나 사과였을 리는 없어요. 성지에는 사과가 없었어요. 그리고 에덴의 나무는 종종 무성한 은빛 잎사귀 그늘로 초대하는 양 묘사되는데, 그건 살구나무의 가장 흔한 특징이죠. 그러니까 야코프 뵈메가 사과와 신과 에덴을 언급했을 때는..."  

 

- 앰브로즈는 이제 너무 심하게 웃느라 눈가를 닦아 내야 할 정도였다. 그가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친애하는 나의 휘태커 양. 당신의 정신세계는 정말 놀랍군요. 그런데 그런 위험한 합리화야말로 여성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었을 때 신이 두려워했던 결과죠. 당신은 모든 여성 인류에게 경계가 될 만한 귀감입니다! 당장 지식 습득을 멈추고 만돌린이나 바느질, 다른 쓸모없는 일감에 손을 대야 해요!" 
"날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는군요."
"아니에요, 앨마, 아닙니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를 이해하려는 당신의 노력에 감동받았습니다. 친구로서 그보다 더 큰 애정은 없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하려는 당신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큰 감동입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정확한 원칙이 없어요. 뵈메가 말한 대로 신성은 '근거'가 없습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 바깥의 어떤 것이죠. 이를테면 우리 둘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어요. 나는 날개를 달고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반면, 당신은 돋보기를 손에 쥐고 발을 땅에 굳건히 디디고 선채로 다가가죠. 나는 외부 세계에서 신을 찾고 새로운 삶의 길을 추구하는 뜬구름이나 잡는 방랑자입니다. 당신은 땅을 밟고 서서 세세한 증거를 연구하고요. 당신 방법이 더 합리적이고 더 체계적이지만 나는 내 방식을 바꿀 수 없어요."

 

- "나는 뭐든 이해하는 걸 끔찍이도 사랑하죠." 앨마가 인정했다. 
"정말 그런 것 같지만 그게 끔찍하진 않아요. 철저히 체계화된 정신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예요. 하지만 단순히 이성으로 인생을 경험하기란 내겐 두툼한 장갑을 끼고 어둠 속에서 신의 얼굴을 더듬는 것과 같습니다. 연구하고 묘사하고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가끔은... '비약'을 해야 하죠." 
"하지만 나는 당신이 비약하려는 방향의 하느님을 이해 못하겠어요."
"왜 꼭 이해해야 하죠?"
"당신을 더 잘 알고 싶으니까요."
"그럼 나한테 직접 물어요, 앨마. 이런 책에서 나를 찾지 말고요. 내가 여기 당신 앞에 앉아서 당신이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걸 모조리 말해 줄게요."

 

- "우리 주님이 식물학자여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앰브로즈가 물었다.
앨마는 그 질문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수학자랄까요. 물고 늘어지고 또 지워 버리니까요.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이론을 세우고 새로운 계산법을 찾아내죠. 과거의 오류를 내다버리고요. 내가 보기엔 이게 더 이성적인 방식이에요."
 
-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다시 그를 보았다. "나는 논쟁을 피할 수 없어요, 앰브로즈, 내가 헨리 휘태커의 딸이라는 걸 명심해요. 나는 논쟁 속에서 태어났어요. 논쟁은 나의 첫 번째 유모였다고요. 평생 나와 뗄 수 없는 동료였어요. 더욱이 나는 논쟁을 신봉하고 심지어 사랑해요. 논쟁은 미신에 사로잡힌 생각이나 태만한 사고를 물리치도록 유일하게 검증된 바른 길이기 때문에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 결과가 말만 가득 남길 뿐, '들을' 수 없다면..." 앰브로즈가 말꼬리를 흐렸다.
"'무엇'을 듣죠?"
"서로를 듣는 겁니다. 말이 아니라 생각 말이에요. 서로의 영혼요. 당신이 내게 뭘 믿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겁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구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혹적인 것들로 살아 움직이고 있어요. 전기와 자성, 아주 격정적이고 또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죠.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는 보편적 공감이 깃들어 있어요. 신비한 지식의 수단이랄까요. 난 그걸 직접 봤기 때문에 확신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내던졌을 때 나는 이제껏 완전히 열린 적조차 없는 인간 정신의 창고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걸 열어젖히면 이제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란 아무것도 없겠죠. 내적이든 외적이든, 논쟁이며 토론을 전부 그만둘 때에만 우리가 가진 진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어요. 그건 정말 강력한 힘이에요. 그리스어로도, 라틴어로도 쓰인 적 없는 자연의 책이죠. 내가 항상 믿으며 누군가와 나누기를 원했던 마법의 총합이고요." 

 

-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요." 앨마가 말했다. 
"당신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고요." 앰브로즈가 대꾸했다.
그 말에 앨마는 결코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화가 나고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눈물이 핑돌았다. 
"우리가 함께 침묵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줘요, 앨마." 앰브로즈가 그녀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당신도 나를 신뢰한다고 생각해요. 더는 당신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의미하는 것이 뭔지 보여 주게 허락해 줘요." 

 

- "우린 바로 여기서도 함께 침묵할 수 있어요. 앰브로즈." 
그는 거대하고 우아한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아뇨, 못 해요. 바로 옆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옛날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어요. 여기는 너무 넓고 시끄러워요. 조용히 숨어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줘요. 미친 소리 같다는 거 알지만 전혀 미친 게 아니에요. 우리가 공감하려면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이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너무 나약해서 내 힘만으로는 공감할 수 없다고 믿었죠. 그런데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난 더 강해졌음을 느껴요. 내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줘요. 당신에게 바라는 건 거의 없지만, 이 방법밖에는 달리 나를 설명할 수 없으니까 이번 한 번만 내 청을 받아 줘요. 만일 내 믿음이 진실임을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없다면, 당신은 늘 나를 비정상이거나 어딘가 모자라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니에요, 앰브로즈 난 절대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이미 그러고 있지요." 절박한 듯 그가 말허리를 잘랐다. "혹은 결국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당신은 날 동정하든 혐오하든 할 테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친애하는 동료를 잃게 되겠죠. 그건 정말 날 힘들고 슬프게 할 거예요.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아직 그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내 말의 진짜 의미를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아까 자연에 한계가 없다고 한 말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말없이 논쟁도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어요. 우리 사이에는 그럴 만큼 충분한 사랑과 애정이 있으니까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나 침묵을 통해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죠. 당신을 만난 뒤로 그 마음이 더욱 커졌고요. 우리는 둔하고 평범한 애정을 뛰어넘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니까... 나만의 생각일까요? 내가 당신 곁에 있을 때 평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지 않나요?"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체면상 쉽게 인정하기도 어려운 문제였다. 

- "그래서 내게 뭘 바라는 거죠?" 앨마가 물었다.
"내 마음과 영혼을 들어 봐 줘요. 나도 당신 영혼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독심술 말이군요, 앰브로즈, 그건 시시한 여흥이에요."
"뭐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나는 언어가 방해하지 않을 때 모든 게 드러난다고 믿어요."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하지만 당신은 과학자잖아요. 왜 시도해 보지 않죠? 잃을 것도 없고, 어쩌면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어요. 어쨌건 이걸 해내려면 아주 깊은 정적이 필요합니다. 모든 방해를 없애야 하죠. 부탁해요, 앨마. 단 한 번만 부탁을 들어줘요. 당신이 아는 제일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공감'을 시도해 봅시다. 언어로는 전할 수 없는 걸 보여 줄 수 있도록."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너야, 앨마! 그 앤 항상 너를 존경했어. 처음 여기 왔을 때 걔한테 네가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해 봐라! 네가 가진 모든 지식과 능력을 생각해 봐. 그 앤 항상 너에게 칭찬받으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넌 결코 칭찬해 주지 않았어. 한 번이라도 그 앨 칭찬해 본 적 있니? 널 따라가려고 그 애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한 번이라도 알아준 적 있어? 그 애의 재능에 감탄해 본 적 있어? 아니면 너보다 못하다고 조롱이나 했니? 넌 어떻게 그 애의 훌륭한 자질을 계속 고집스레 모른 척할 수 있었니?" 
"난 그 애의 훌륭한 자질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니다, 넌 그걸 절대 믿지 못했을 뿐이야. 순순히 인정해라. 넌 그 애의 선한 마음을 가식이라고 생각하잖아. 사기꾼이라고 말이야."
"늘 그런 '가면'을 쓰고 사니깐 그렇죠..." 앨마는 자신을 변호할 핑계를 찾느라 고군분투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사실이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알려지지도 않기를 그 아이가 바랐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면 뒤에 가장 착하고 가장 너그럽고 존경스러운 여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난 안다. 넌 어떻게 그걸 못 보니? 오늘날까지도 프루던스가 얼마나 칭찬받아 마땅하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지 네 눈에는 안 보이니? 너의 존경을 얻으려면 개가 얼마나 더 애써야 한다는 거니, 앨마? 그런데도 넌 여전히 그 애를 칭찬한 적도 없고, 이젠 바보 같은 네 아버지가 해적질로 얻은 막대한 재산을 몽땅 물려받고도 전혀 불편한 마음 없이 자매를 외면할 작정이구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희생에 눈멀었던 건 너나 네 아버지나 똑같아." 

- "말조심해요, 한네커." 앨마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맞서 싸우며 경고했다. "엄청난 충격을 주고서 내가 아직 멍한 상태일 때 공격하는 건 반칙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인데, 오늘만큼은 날 조심스레 대해 줘요, 한네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미 너를 조심스레 대하고 있단다, 앨마.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네 앞에서 벌벌 떨었는지도 모르지." 늙은 가정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대꾸했다. 

 

- 깊은 충격을 받은 앨마는 마차 차고의 서재로 달아났다. 더는 두 발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기운이 없어서 구석에 놓인 허름한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호흡은 밭고 얕았다. 스스로가 이방인인 양 느껴졌다. 언제나 앨마의 세상에서 단순한 진실을 가리켜 주던 내면의 나침반은 분주히 정지할 곳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 데로도 불지 않는 바람에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일행 중에 편지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너 하나 뿐이어선 안 돼. 물을 찾아야 하면 개를 따라가고 허기로 죽기 직전이면 사냥을 하겠답시고 힘 빼지 말고 벌레를 먹어. 새가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너도 먹을 수 있지. 네가 마주칠 수 있는 제일 무서운 위험은 뱀이나 사자, 식인종이 아니야. 가장 위험한 놈은 발에 잡힌 물집, 부주의, 피로야. 주기적으로 일지와 지도를 기록하는 걸 명심해야 해. 네가 죽으면 네가 남긴 기록이라도 훗날 탐험가들에게 쓸모 있을지 모르니까. 급할 때에는 언제든 피로 글씨를 쓸 수 있다." 

- 폭풍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고, 바다에서 하늘까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며 기둥처럼 치솟는 기다란 물줄기를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난생처음 보는 장대하고 신성하고 경외로운 광경이었다. 대기의 압력이 높아지자 고막은 터질 것 같았고 폐 속으로 숨을 들이켜기조차 힘겨웠다. 이후 꼬박 오분간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압도당해버렸다. 이곳이 어떤 세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앨마가 이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제 끝난 듯했다. 이상하게도 아무 상관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리운 사람도 없었다. 알고 지낸 그 어떤 인물도 뇌리를 스치지 않았다. 앰브로즈도, 그 어느 누구도. 후회는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준비되었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멍하니 황홀경 속에 서 있었다.  

열대 폭풍이 마침내 지나가자 바다는 다시 전처럼 평온해졌고, 앨마는 그때 평생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꼈다. 

- 남태평양에서 수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나이 든 선원 하나가 앨마에게 타히티인들은 항해를 위해 별 하나를 골라서 따라가는데, 그때 그 별을 자신의 '아베이아(aveia)', 즉 수호신이라고 부른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곳 사람들이 좀 더 흔하게 쓰는 별이라는 말은 '페티아(fetia)'라고 했다. 예를 들어 화성은 붉은 별이므로 '페티아 우라(fetia ura)'였다. 새벽별은 ‘페티아 아오(fetia ao)', 빛의 별이었다. 타히티인들은 뛰어난 항해사라면서 선원은 있는 그대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별도 달도 없는 밤에 자기 감각만으로 바다 조류를 느끼며 항해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바람의 종류도 열여섯 가지나 안다고 했다. 
   

- "우린 정말로 파이크 씨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웰스 목사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쩌면 제일 그리워하는 건 저일지도 모르지요. 이 작은 정착지에서 그 친구의 죽음은 정말 큰 손실이었어요. 여기 오는 외지인 모두가 파이크 씨처럼 이곳 사람들과 잘 지내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아버지 없는 불쌍한 애들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원한이나 악한 일은 아예 모르는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었어요. 친절했고요.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진짜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현지인들에게 몸소 보여 준 거죠. 그런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어요. 여기 오는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의 행동이 매번, 단순한 이곳 주민들 눈에 좋게 보일 리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파이크 씨는 선의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 만큼 현지인과 친해지는 재능도 있었죠. 그 친구는 아주 거침없고 너그러이 모두에게 말을 걸었어요. 먼데서 이 섬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 전부가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타히티는 위험한 낙원이 되기도 해요. 유럽의 훨씬 엄격한 도덕관념에 물든 사람들한테는 섬과 섬사람들 모두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거든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그걸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하기도 해요. 안타깝지만 심지어 선교사들까지 나서서 애처럼 순진한 여기 사람들을 부려 먹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 이 사람들이 좀 더 스스로를 잘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파이크 씨는 누굴 이용해 먹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 "하지만 전 현지인들에게 줄 선물도 가져왔어요. 훔쳐갈 필요는 없었다고요. 어차피 나눠 주려고 했는데, 선물로 가위와 리본을 가져왔다고요!" 
목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물이 잘 전달됐겠군요!"
"하지만 저한테 꼭 돌아와야 할 물건들이 있어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담긴 물건이에요."

그에게 동정심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은 앨마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앨마의 당황한 심정을 다소나마 알아주었다. "안됐어요, 휘태커 자매님. 하지만 염려 마세요. 영원히 도난 당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냥 가져갔을 뿐, 어쩌면 일시적인 소동일 거예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시면 그중 일부는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소중한 물건이 있다면 제가 특별히 부탁해 보지요. 가끔 제가 제대로 부탁하면 물건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 목사가 손뼉을 쳤다. "먹을 것! 당연히 뭘 좀 드셔야죠! 미안합니다, 휘태커 자매님! 저는 잘 먹지를 않는 사람이라, 상당히 드물게 먹는다고 할까요. 다른 분들은 꼭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까먹습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군 걸 집사람이 알면 험한 말로 혼꾸멍을 내려 들 텐데." 

 

- "다 해결되었습니다. 마누 자매님이 보살펴 주실 겁니다. 여기선 다들 최소한의 음식만 먹고 삽니다! 오두막으로 뭘 좀 가져다주실 거예요. 저분께 '아후 타오토(ahu taoto)'도 가져다드리라고 부탁해 두었습니다. 잘 때 덮는 숄인데, 여기선 다들 밤에 그걸 두르고 자거든요. 제가 호롱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젠 그리로 가시지요. 달리 더 필요한 게 뭔지 저는 안 떠오르네요." 

앨마는 필요한 물건을 수없이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일단 음식과 잠자리가 보장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어쨌든 그 집에 어떤 인연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개가 올 것을 알기에 밤에 홀로 잠들어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안전함이나 사생활에 대해서 희망을 버렸던 앨마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얼마 안 되는 그녀의 소지품을 지키고, 집 주변에 경계선을 그으려는 시도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동물이나 날씨나, 마타바이 만에서는 모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아무 이유 없이 앨마의 '파레'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공정을 기하자면 그들은 늘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짐은 조금씩 다시 나타났다. 누가 그런 물건을 돌려주는지도 절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섬 자체가 천천히 집어삼켰던 앨마의 짐을 조금씩 토해 내는 듯했다. 

 

- 앰브로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앨마는 웰스 목사의 얼굴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유심히 살폈지만 그의 생각을 읽어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항상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등대처럼 꾸준했다. 목사의 성실함은 너무도 완벽하고 온전해서 가면 같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 웰스 목사는 항상 앨마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토록 많은 것을 잃었으면서도 그토록 쾌활하고, 불평이라곤 없이 그토록 적은 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앨마는 그가 집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소유한 '파레'는 없었다. 그는 교회 회중석에서 잠을 잤다. 종종 '아후 타오토'도 덮지 않고 잠을 잤다. 그는 고양이처럼 어디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그에게는 성경책 말고 자기 물건이라는게 없었는데, 가끔은 성경책마저 몇 주일간 사라졌다가 누군가 도로 가져다 놓기도 했다. 그는 가축을 기르지도 않았고 텃밭을 가꾸지도 않았다. 산호초에 갈 때 타고 나가는 작은 카누 역시 마음씨 고운 열네 살짜리 소년에게 빌린 것이었다. 온 세상의 죄수나 사제나 거지를 따져 봐도 그 사람보다 덜 가진 이는 없으리라고 앨마는 생각했다.

 

- 런던 선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해 주지 않았다. 십년 가까이 웰스 목사는 런던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지시 사항도, 원조도, 격려도 없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종교를 세워야 했다. 우선 그는 세례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세례식을 거행해 주었다. 과거의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구세주를 영접했음이 '상당히 확실해지기 전까지' 아무도 세례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런던 선교회의 지침과는 많이 동떨어진 행동이었다. 그러나 타히티인들은 과거의 믿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단순히 즐거운 놀이로서 세례받기를 '원했다.' 웰스 목사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는 수백 명의 비신자들과 절반의 신자들에게 세례해 주었다. 

- "제가 감히 누구라고 세례받겠다는 사람을 막겠습니까?" 놀랍게도 그가 앨마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아내는 인정하지않았습니다. 잠재적인 기독교인이라도 세례받기 전에 아주 엄격하게 신앙을 시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종교 재판 같았어요! 아내의 주장은 종종 신앙심을 억지로 일치시키려던 런던의 동료들을 떠오르게 했지요. 하지만 집사람과 저 사이에서도 신앙심이 일치하지 않는데 어쩌겠습니까! 착한 저의 아내에게 저는 가끔 말했습니다. '친애하는 이디스, 우리가 고작 스페인 사람이 되려고 그 먼 거리를 온 거요?' 누군가 강에 풍덩 빠지기를 원한다면 저는 그 사람을 강에 빠뜨려 줄 겁니다! 누군가 하느님을 찾아온다면 그건 제가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통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세례해 준다고 해될 게 뭐 있겠어요? 강물에 들어갈 때보다 조금은 더 깨끗해졌을 테니 어쩌면 천국에도 좀 더 가까워졌겠지요." 

이따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 년에도 여러 번, 혹은 연이어 수십 번씩 세례해 주기도 한다고 웰스 목사는 고백했다. 단지 해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요? 정말 행운이 아니었을까요?" 웰스 목사가 앨마에게 말했다. 
그는 그 말 역시 항상 똑같이 쾌활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웰스 목사의 바로 그런 점이 수수께끼였다. 끊임없이 유쾌한 그의 태도 뒤에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지, 앨마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냉소적인 사람일까? 이단자일까? 얼간이일까? 그의 순진함은 훈련의 결과일까, 타고난 성품일까? 언제 보아도 천진난만하고 거리낌 없는 그의 표정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의심이나 탐욕이나 잔인함을 품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너무도 진솔했다. 거짓말쟁이가 얼굴을 들 수 없게 하는 얼굴이었다. 개인사나 여행의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는 앨마도 가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다.  

- 예수의 이야기에는 타히티인들에게 친숙한 요소가 들어 있었고, 그 친숙함 덕분에 초창기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에게 예수를 수월하게 소개할 수 있었음을 그녀는 웰스 목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타히티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포(po)'와 '아오(ao)', 즉 어둠과 빛으로 구분된다고 믿었다. 그들의 위대한 신, 조물주 타로아는 '포'에서 태어났다. 밤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였다. 그 신화를 알게 된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포'에서 태어났다고, 타히티인들에게 설명했다. 밤의 어둠과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고. 그 설명은 타히티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밤에 태어나는 존재는 위태롭고도 엄숙한 운명을 타고났다. '포'는 이해할 수 없고 두려운 죽음의 세계였다. '포'는 악취가 풍기며 썩어 가는 무서운 곳이었다. 영국인들은 우리의 하느님이 인류를 '포'에서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왔다고 가르쳤다. 

 

- 그런 접근은 타히티인들에게 상당히 잘 먹혀들었다. '포'와 '아오'의 경계선은 위험한 영역이라, 아주 용감한 영혼만이 감히 한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최소한 다들 예수를 존경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포'와 '아오'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에 가깝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좀 더 긴밀했고, 그 둘이 뒤섞인 곳에서는 일이 꼬이고 엉망이 된다고 웰스 목사는 앨마에게 설명해 주었다. '포'에 대한 타히티인들의 공포는 결코 가시지 않았다. 

"제가 안 본다고 생각할 때면 다들 여전히 '포'에 사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어둠의 신을 기리거나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뇌물을 바쳐서 그들이 귀신 세상에 계속 머물기를, 빛의 세상에 얼씬거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포'는 무찌르기 가장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저 낮이 찾아왔다고 해서 타히티인들 마음속의 '포'의 존재까지 사라지진 않거든요." 웰스목사가 말했다. 

 

- "마누 자매님도 '포'를 믿으세요?" 앨마가 물었다. 
"물론 아니죠. 아시다시피 그분은 완벽한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그분도 '포'를 존중합니다." 웰스 목사는 늘 그렇듯 아무런 동요 없이 말했다.
"그럼 그분이 귀신을 믿는다는 거군요?" 앨마가 캐물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아니게요. 하지만 그분은 귀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또 그것이 마을에 얼씬거리기를 원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끔 그들을 쫓아내느라 어쩔 수 없이 제물을 바치기는 합니다."
"그럼 귀신을 믿는다는 의미네요."
"절대 아니라니까요. 그냥 그걸 관리하는 겁니다. 이 섬의 특정 지역에는 마누 자매님이 우리 마을 주민들더러 절대 못가게 하는 장소가 있지요. 타히티에서 가장 높고 접근하기도 힘든 곳인데, 거기로 걸어가면 안개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서 곧장 '포'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 이곳에서 더 알아낼 것은 없었다. 
더 머물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젠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충동적으로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 왔지만, 이제는 북반구로 향하는 다음 번 포경선을 타고 떠나면서 살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화이트에이커를 포기했고 그곳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 '내일 아침'의 연설은 바닷가의 작고 소박한 선교지 마을에서 앨마가 익숙해 있던 겸손과 온화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덜었다. '내일 아침'의 태도에서 겸손이나 온화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오만하고 태연자약한 인물은 처음이었다. 키케로의 명언이 원전의 웅장한 라틴어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지금 앨마가 목도하고 있는 타히티어의 천둥 같은 웅변술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라틴어 밖에 없을 듯했다.)

"네모 움쿠암 네쿠에 포에타 네쿠에 오라토르 푸잇, 쿠이쿠엠쿠암 멜리오렘 쿠암 세 아르비트라레투르."

(Nemo umquam neque poeta neque orator fuit, qui quemquam meliorem quam se arbitraretur.)
'자기보다 나은 이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시인이나 웅변가는 아무도 없으리니'
 

- "자연 과학자시라고요!" 내일 아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흥미를 보이며 멋진 영국식 억양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저도 자연 과학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뭇잎이며 곤충, 산호 따위에 가치를 둔다며 친구들은 저를 미친 사람 취급했죠. 하지만 즐거운 공부였어요. 세상을 그렇게 깊이 연구한다니, 얼마나 가치 있는 삶입니까. 참으로 행운이십니다." 

 

- "그것 역시 또 다른 상실의 유산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비탄의 표현으로 손끝을 자릅니다. 유럽인들이 쇠와 강철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그 일이 더 쉬워졌어요."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앨마는 마주 미소를 지어 주지 않았다. 너무도 끔찍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직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제 할아버지는 '라우티(rauti)'셨어요. '라우티'에 대해서 아세요? 웰스 목사님은 수년간 그 말을 번역하는 데 도움을 주셨지만 어렵더군요. 아버지는 '웅변가'라는 말을 쓰시는데, 그런 표현으로는 그 역할의 위엄을 전하지 못해요. 차라리 '역사가'에 가깝긴 하지만 역시나 정확하진 않아요. '라우티'의 임무는 싸움에 나서는 전사들 곁에서 같이 달리며, 그들이 누구인지 상기시킴으로써 용기를 북돋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선조의 영웅적 행동을 잊지 않도록 하는 거죠. '라우티'는 이 섬에 사는 모든 이들의 족보를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전부 다 알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는 노래를 부릅니다. 일종의 설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격렬하죠." 

 

- 그는 이유가 있어서 앤마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틀림없이 이유가 있으리라. 
내일 아침은 동굴 입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어로요? 영어로는 똑같은 힘을 전하지 못하지만 가사를 좀 옮겨 보면 이런 식입니다. '놈들의 의지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바짝 경계하라! 번개처럼 저들을 공격하라! 너는 아라바, 호라니의 아들이며, 장어들의 아버지이자 강력한 아나파의 우두머리였던 타푸누이에게 태어난 파리티의 후손 파루토의 손자이니, 너는 그런 존재다! 바다처럼 저들을 부숴 버려라!" 내일 아침은 천둥처럼 큰 소리로 그 말을 내뱉었고, 그의 외침은 바위에 부딪힌 뒤 파도 속으로 잦아들었다. 그가 다시 앨마를(팔에 소름이 돋았다. 영어로도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데, 타히티어로는 얼마나 엄청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돌아보며 대화하는 말투로 덧붙였다. "때로는 여자들도 싸웠습니다." 

"고마워요."라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다른 식구들처럼 돌아가셨습니다. 가족이 죽은 뒤 저는 홀로 남은 아이였습니다. 타히티에서는 런던이나 필라델피아처럼 아이에게 그런 운명이 그리 가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독립심을 키운 덕분에, 누구든 나무에 올라가거나 낚싯줄을 던져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여기선 밤에 얼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타바이 만 해변에서 뛰노는 가족 없는 아이들과 비슷한 처지였죠. 저에게는 같이 어울릴 또래가 없었으니 그 아이들만큼 행복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문제는 육신의 굶주림이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이었습니다. 아시겠어요?" 

 

- "제가 머리를 쓰는 게 쉬웠듯이 당신도 머리를 쓰는 게 쉬웠죠?"
"그래요." 앰브로즈가 그 외에 또 무슨 얘기를 했을까?

 

- "웰스 목사님은 제 아버지가 되셨고, 그 뒤로 저는 항상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친딸과 아내보다도 저를 더 사랑하신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수양아들보다는 확실히 저를 더 사랑하시죠. 앰브로즈 얘기를 들으니 당신도 아버님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셨다죠? 어쩌면 헨리는 부인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하셨다던데요?" 
앨마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과 거리를 사이에 두었음에도 (심지어 죽음으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어머니와 프루던스에게 느끼는 의리가 얼마나 크기에 그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않아요, 앨마?" 내일 아침은 좀 더 다정하게 캐묻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독특한 힘을 갖게 되잖아요. 안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다른 사람들보다 마침 우리를 골라서 더 좋아하면, 우리는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데 익숙해지죠. 당신도 그렇지 않았어요?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앨마는 그 말이 사실인지 자신을 돌아보았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 아버지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전부 외면한 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전 재산을 남겼다. 앨마가 절대 화이트에이커를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아버지에게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딸을 사랑했기 때문임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앨마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던 때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내 생각엔 저 못생긴 아이가 예쁜 아이보다 열 배는 더 가치가 있다네."라고 말하던 순간도 기억했다. 1808년 화이트에이커에서 무도회가 열렸던 밤도 기억났다. 그날 이탈리아인 천문학자는 손님들을 천문도에 따라 '실물처럼' 배열해서 멋진 군무를 연출했다. 앨마의 아버지는 모든 이들의 중심에서 우주를 호령하는 태양으로서 "그 아이한테도 '자리'를 주시오!"라고 외쳤고, 앨마가 마음껏 뛰어다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날 밤 앨마의 손에 불을 쥐여 주고, 그녀가 프로메테우스 같은 혜성이 되어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열린 세상을 실컷 만끽하게 해 주었던 사람은 분명 헨리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 그 누구에게도 아이에게 불을 쥐여 줄 만한 권위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앨마에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을 주지 않았으리라. 

 

- 내일 아침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저를 일종의 예언자라고 생각하셨어요."
"당신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뇨.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일단 저는 '라우티'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같은 웅변가죠.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용기를 북돋는 주문을 외칩니다. 저의 동포는 큰 시련을 겪었기에 그들이 다시 강해지도록 제가 밀어붙이는 겁니다. 하지만 옛날 우리의 신들보다 새로운 신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과거의 신이 진짜 위대했다면 제 동포들은 아직 다 살아 있었겠죠. 이것이 제가 전도하는 방식입니다. 힘이죠. 이 주변 섬에선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화함과 설득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이들이 실패한 곳에서 제가 성공을 거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는 상당히 허심탄회하게 앨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쉬운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무언가 더 있기는 합니다. 옛날 사고방식으로는 중간자가 존재한다고 믿죠. 이를테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전달자 역할을 하는 사람 말입니다." 

 

- "앨마. 당신은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제게 이해시켜주었죠. 대상을 이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요. 이젠 제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당신에게 고백해야겠군요. 저는 정복자입니다. 으스대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단지 그게 제 본성이죠. 어쩌면 당신은 정복자를 만나 본 적이 없을 테니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내 아버지는 정복자였어요. 난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합니다."
내일 아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곡을 짚었다. "헨리 휘태커.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씀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당신도 저를 이해할 수 있겠네요. 알다시피 정복자의 본능은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 동굴에는 단순히 이끼가 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이끼가 넘실대고 있었다. 여느 초록색이 아니라 오싹해질 정도의 초록색이었다. 살아 있는 짐승의 털가죽처럼 두툼하게 뒤덮인 이끼는 바위 표면을 빼곡히 채우며 돌덩어리를 잠자는 신비로운 짐승으로 변모시켰다. 의아하게도 동굴 가장 깊은 곳이 가장 밝게 반짝거렸다. 보석을 세공해 놓은 듯 완벽하게 장식되어 있는 그 이끼는 '시스토테가 펜나타(Schistotega pennata)'였다. 

(리뷰자 주 : 발광이끼.)

- 도깨비의 황금, 용의 황금, 요정의 황금이라는 뜻의 '시스토테가 펜나타'는 최고로 진귀한 동굴 이끼였고, 지층의 제일 깊은 곳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묘안석처럼 반짝거렸다. 또 매일 아주 잠깐씩만 빛을 받아도 영원히 그 영광을 잃지 않는 천상의 식물이었으며, 찬란한 표면에 속아 넘어간 여행자들이 수 세기 동안 수도 없이 감추어진 보물로 착각하고 달려들었던 가짜 보석이었다. 매우 작은 이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을 때만 겨우 발견할 수 있었던 기묘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빛이 동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으므로, 앨마에게 그것은 실질적인 재물보다 더 눈부신 '진짜' 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보물 창고 속에 들어와 있었다. 

 

- 기적과도 같은 장소에 들어선 그녀가 처음 보인 반응은 아름다움에 눈을 질끈 감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허락 없이는, 일종의 종교적 윤허가 내려지기 전까지 봐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볼 자격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긴장을 풀고 꿈속의 광경이라며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과감하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끼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동굴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미지의 갈망으로 뼛속까지 아파 올 정도였다. 이토록 무언가를 탐내 본 적이 없을 만큼 아련한 빛을 뿜어대며 장관을 이루는 그곳의 이끼를 소유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앨마는 그곳이 자기를 집어삼켜 주기를 바랐다. 지금 바로 거기 서 있는데도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남은 평생 이곳을 그리워하겠지. 
"앰브로즈는 늘 당신이 이곳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일 아침이 말했다.
 
- "아, 해답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전부 다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내일 아침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내일 아침은 다시 노를 저었고, 해변으로 향했다. 거의 저녁 예배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환대 속에 귀가했다. 그는 아름다운 설교를 했다. 
감히 그들에게 어디에 다녀왔는지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 앨마는 힘들고 긴 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는 매 시간이 유익했을 뿐 아니라, 낯선 배와 이국적인 항구에서 몇 달씩 갇혀 지내는 기간을 오히려 반겼다. 거칠고 요란한 '하루 라푸' 경기를 하다가 마타바이 만에서 거의 익사할 뻔 했던 경험 이후, 앨마는 면도날처럼 위태로운 생각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으므로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물속에 있는 동안 그녀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생각은 이제 늘 그녀의 내면에서 살고 있었으며,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생각이 그녀를 쫓아다니는지, 그녀가 그 생각을 쫓아다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종종 그 생각은 마치 꿈속의 생명체처럼 가까이 다가왔다가 사라지고, 그리고 또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온종일 맹렬하게 끼적이고 셀 수 없는 기록을 남기면서 그 생각에 빠져 지냈다. 밤중에도 그녀의 머리는 끊임없이 그 생각의 발자취를 따라다녔으므로, 몇 시간마다 잠에서 깨어나 무언가를 더 적어야만 했다. 
 

- 또 앨마도 잘 알듯이, 가장 아름답거나 뛰어나거나 독창적이거나 우아한 사람이라 한들 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가장 가차 없거나 운이 좋거나 고집스러운 사람이 살아남았다. 변화를 감당하는 비법은 가능한 한 오래도록 삶의 시험을 견디는 것이었다. 재앙과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시련의 용광로같은 세상에서 생존 확률은 가혹하리만치 희박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세상이 그들을 빚어낸 만큼 자기들 역시 세상을 빚어냈다.

 

- 앨마는 속력을 높여서 엄청난 양의 글을 써 댔다. 수정을 하느라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지만, 거의 매일같이 옛 초고를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속도를 늦추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어도 넘어지지 않고 '걷기'는 불가능한) 사람처럼 앨마는 맹목적인 속도로 스스로의 사상을 펼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넘어지거나 주눅이 들거나, 더 심하게는 생각 자체를 잊게 될까 봐 두려워서 속도를 늦추고 좀더 신중하게 집필하기가 겁났다. 이끼의 점진적 전이를 실례로 들어서 종의 변이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하는 데는 공책과 식물 표본집을 들춰 보거나 화이트에이커의 오래된 도서관을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끼 분류에 관한 방대한 지식은 이미 앨마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고, 세부적 기억 역시 두개골 구석구석 새겨져 있었으므로 다른 자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지난 세기에 이미, 종의 변이와 지질학적 진화를 주제로 삼아 쓰인 모든 사상은 그녀 손가락 끝에 (말하자면 정신의 손가락 끝에) 담겨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수천 수만 개의 책과 상자 들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무한히 정리되어 있는, 끝없는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그녀에게는 도서관이 필요 없었다. 그녀 '자체'가 도서관이었다.

 

- 여행을 떠난 지 처음 몇 달 동안, 앨마는 이론의 기본적 가설을 쓰고 또 고쳐 썼다. 마침내 더는 요약할 수 없을 듯한, 열 가지의 핵심 개념을 정립했다. 
지구 표면에 분포하는 땅과 물의 영역은 언제나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지 않는다.
화석 기록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이끼는 생명의 탄생 이후 모든 지질학 시대를 견뎌 낸 듯 보인다.
이끼는 환경에 적응하는 변화 과정을 거쳐서, 그와 같은 다양한 지질학 시대를 견뎌 낸 듯 보인다.
이끼는 서식지를 바꾸거나(즉, 좀 더 호의적인 기후로 옮겨가는 것) 내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이를테면 변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
 

- "안타깝지만 고인이 됐어요." 
데이스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았다. 앨마는 그 점이 흥미로웠다. 어머니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사실은 사실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삼촌은요? 반 데벤더르 부인은 계신가요?"

"죽었다."

앨마는 그처럼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삐딱하긴 했지만 이렇듯 솔직하고 퉁명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대화가 그녀는 즐거웠다. 모든 대화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혹은 그녀의 운명이 이 노인의 운명과 엮일지 않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앨마는 익숙한 세계, 즉 네덜란드 땅, 데벤더르의 영역에 와있다고 느꼈다. 고향에 있다는 느낌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 "암스테르담에는 얼마나 오래 있을 작정이냐?" 
데이스가 물었다.
"기약은 없어요."
앨마의 대답에 그가 깜짝 놀랐다.
"자선을 구하러 왔다면 네게 줄 건 없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 어머니, 오랜 세월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앨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도 자선은 필요 없어요. 아버지께서 유산을 넉넉히 물려주셨거든요."
"그럼 암스테르담에는 무엇 때문에 머물겠다는 거냐?" 그는 경계하는 태도를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이곳 호르투스 식물원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자격으로?"

"식물학자로서요. 특히 선태학자로서요."

"'선태학자'라고? 대체 네가 이끼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냐?"

그 대목에서 앨마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이란 근사하다. 마지막으로 웃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웃느라 그녀는 한동안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웃음기를 숨겨야 했다. 그 광경은 가엾은 늙은 삼촌을 더 초조하게 할 뿐이었다. 그녀도 스스로의 명분을 납득할 수 없었다. 
왜 보잘것없는 자신의 명성이 먼저 알려져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오, 어리석은 오만함이라니!

- 이끼 동굴은 호르투스 식물원의 인기 전시실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만 찾는 곳이기도 했다. 바로 서늘한 어둠과 고요함,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이었다.(다시 말해 그런 사람들은 보란 듯이 피어난 화초나 큼지막한 백합꽃, 시끄러운 가족 관람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앨마는 동굴 구석에 앉아 자신이 만든 세상에 찾아오는 부류의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했다. 다들 부드러운 이끼 표면을 어루만지며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긴장도 풀었다. 그녀는 그 조용한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 "넌 그냥 신을 죽인 자가 될 용기가 없을 뿐이야." 평생 안식일마다 경건하게 교회를 방문하던 착실한 네덜란드 신교도가 말했다. "앨마, 뭐가 두려운 게냐? 네 아버지의 뻔뻔함을 조금이라도 보여 봐라, 얘야! 세상에 나아가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봐! 필요하다면,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말 많은 논객들도 다 깨워라! 호르투스가 너를 보호할 거야! 우리가 직접 출간할 수도 있다! 질책이 두렵다면, 내 이름으로 발표해도 된다고."

그러나 앨마는 교회가 두려워서 망설이는 게 아니라, 아직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반박의 여지 없이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논리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구멍을 메울 방법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앨마는 완벽주의자에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어서, 아주 작은 구멍이더라도 도저히 무시한 채 발표할 수 없었다. 삼촌이 자주 언급하듯, 종교를 거스르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보다 훨씬 더 신성한 '이성'을 거스르기가 두려웠다. 

- 앨마의 이론에 남은 구멍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에서 비롯하는 진화론적 이득을 평생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연계가 정말로 도덕관념 없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공간이라면, 무조건 상대를 이기는 것만이 우세와 적응과 인내를 향한 열쇠가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가령 프루던스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앨마와 데이스가 수년째 밤늦도록 그 문제를 토론할 때마다 삼촌을 좌절하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런 논리였다. 1858년 초 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따분한 궤변론자처럼 굴지 마라! 그냥 논문을 발표해!" 데이스가 말했다.
"전 궤변론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외삼촌. 기억하시죠, 전 어머니의 두뇌를 물려받았잖아요." 앨마가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넌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구나. 논문을 출판해서, 이제는 세상이 그 문제를 토론하게 두고,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고민에서 좀 벗어나자꾸나." 
그러나 앨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제가 논리의 구멍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분명히 그럴 테고, 제 연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예요. 경쟁적 변화 이론이 정말로 옳다면, 인간성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에 옳게 적용되어야 한다고요."

 

- 필요한 만큼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충분한 음식과 마실 것을 챙겨 들고 사무실에 숨어든 뒤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종의 기원에 관하여>첫 장을 펼쳐서 다윈의 아름다운 산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그녀의 생각과 똑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깊고 깊은 동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앨마의 이론을 훔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찰스 다윈은 앨마 휘태커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같은 보물을 찾아 헤매는 두 명의 탐험가처럼, 그녀와 찰스 다윈은 둘 다 똑같은 보물 상자를 발견했다. 그녀가 이끼에서 도출한 이론을 그는 되새류에서 끄집어냈다. 앨마가 화이트에이커의 바위 초원에서 관찰한 것을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똑같이 찾아냈다. 앨마의 바위 초원은 섬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섬은 섬이었고, 너비가 삼 미터든 오 킬로미터든, 섬에 생겨난 야만적이고 경쟁적인 싸움터에서는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극적인 사건들이 대부분 일어나는 법이었다.
아름다운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줄곧 앨마는 비탄과 옹호, 회한과 감탄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 다윈은 "생존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개체가 탄생한다. 불확실한 상태의 알갱이 하나가 어느 개체는 살고, 어느 개체는 죽을지를 결정한다."라고 적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서든 유기적 세계의 어디에서든 아름다운 적응을 본다."라고 했다.
너무나 압도적이고 격렬하고 복잡한 감정에 휩싸임을 느끼며 앨마는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용광로에서 튀어나온 불덩이처럼 그녀를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그녀가 옳았다. 
'그녀가 옳았다!'

- 앨마가 보기에 그 전략은 다윈의 탁월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다윈은 문제 '전체'를 파헤치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다루게 될지 모르겠지만, 진화에 관한 조심스러운 초기 논의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같은 깨달음에 앨마는 또 한 번 혀를 내둘렀고,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이마를 쳤다. 훌륭한 과학자라면 어떤 주제가 되었든, 문제 '전체'와 곧장 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다윈의 방식은 데이스 삼촌이 수년간 앨마를 설득하던 내용과 똑같았다. 그는 아름다운 진화론을 출간했지만, 연구 영역을 식물학과 동물학에만 국한함으로써 인간들이 자신의 기원에 관해 벌이게 될 논란은 남겨 두었다. 

- 앨마는 다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영국 해협을 단숨에 가로질러 켄트까지 기차를 탄 다음, 다윈의 집 문을 두들기며 묻고 싶었다. "끊임없는 생물학적 투쟁의 압도적 증거를 바탕으로, 나의 자매 프루던스와 자기희생의 개념을 해명해 보세요?" 그런데 당시에는 모두들 다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과학자와 만남을 주선할 만한 영향력은 앨마에게 없었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찰스 다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한 청사진을 얻게 되었는데, 그 신사가 뛰어난 논객은 아님이 명백해졌다. 어차피 그는 아마 이름 모를 미국인 선태학자와의 논쟁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앨마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문을 닫기 전에, "대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다는 겁니까, 부인?"이라고 말했을 터다. 

 

- "위기가 클수록 진화는 더 빨라진다."

그러한 사안을 살펴보면서 앨마의 머릿속에는 달리 의문이 없었다. 자연 선택은 다윈이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다윈의 '유일무이'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앨마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앨마는 그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을 뛰어넘을 만큼 놀랐다. 그것은 학계에서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 같았다. 하지만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존재함을 알고 나니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녀에게는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앨마는 '그보다 더 모호한 존재'였기 때문에 비록 월리스로서는 앨마가 자신의 이름 없는 동지임을 알 수 없었지만, 휘태커와 월리스, 그들은 동지였다. 하지만 앨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혼으로 맺어진 기묘하고 기적적인 인연의 남동생이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듯했다. 만약에 그녀가 조금만 더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면, 찰스 다윈과 세상을 뒤바꾼 그의 엄청난 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떠들썩한 소란 속에서 적개심도 절망감도 수치심도 없이, 비뚤어지지 않고 의젓하게 행동하도록 해 준, 그 따뜻한 동료의식으로 엮인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의 이름을 두고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다윈은 역사적 인물이 되었고, 앨마에게는 윌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었다.

- 앨마는 스스로의 진화 이론에 대해서, 그리고 다윈과 자신의 보잘것없는 관련성에 대해서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자기와 그림자 남매를 이루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녀는 수년간 그의 경력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의 성공에는 무한한 자부심을, 실패에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처음에 월리스는 영원히 다윈의 부록, 아니면 심복 정도로 남을 것만 같았다. 자연선택과 다윈의 이론을 전방위로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1860 년대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리스는 엉뚱하게 방향을 틀었다. 1860년대 중반에 그는 심령론과 최면술을 접했고, 좀 더 점잖게 말하자면 '신비술'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해협 건너편에서 찰스 다윈이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는 듯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언제나 함께 언급되던 상황이었는데, 윌리스가 돌연 논란이 그칠 줄 모르는 비과학적인 공상의 세계로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윌리스가 강신술과 손금을 읽는 모임에 가고,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장담한 사실까지는 용서의 여지가 있었지만, <초자연적 현상의 과학적 측면>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일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 하지만 앨마는 그의 특이한 믿음과, 열정적이고 용감한 주장 때문에 더더욱 월리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인생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한정되었지만, 절제를 모르는 무모한 사상가, 즉 월리스가 다방면적으로 학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앨마는 큰 기쁨을 누렸다. 그에게 다윈의 귀족적 예의범절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때그때 떠오른 영감과 생각, 설익은 개념을 쏟아 낼 뿐이었다.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매달리는 일 없이, 즉흥적으로 이것저것을 찔러 댔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월리스의 관심은 앨마에게 어쩔 수 없이 앰브로즈를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예전보다 그가 더 좋아졌다. 앰브로즈처럼 월리스도 몽상가였다. 그는 기적을 굳게 믿었다. 그는 우리가 감히 어떻게 자연 법칙을 이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면서, 오히려 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것을 연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다만 기적이었다. 월리스는 최초로 날치를 본 인간이 아마 기적을 목격했노라 생각했으리라고 논리를 펼쳤다. 그리고 날치를 처음 '묘사'했던 사람은 분명 거짓말쟁이로 불렸으리라. 앨마는 그토록 장난스러우면서도 고집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라면 화이트에이커의 만찬식탁에서 멋진 활약을 벌였으리라고 그녀는 종종 상상했다.

 

- 하지만 월리스는 좀 더 합법적인 과학적 탐구도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았다. 1876년에 그는 자신의 걸작 <동물의 지질학적 분포(The Geographical Distribution of Animals)>를 출간했는데, 그 책은 나오자마자 동물 지리학 분야에서 가장 독보적인 교과서라고 칭송받았다. 멋진 책이었다. 앨마의 시력은 이제 상당히 어두워졌으므로 앨마의 젊은 조카 미미가 그 책의 내용을 대부분 읽어 주었다. 앨마는 책의 특정 문단에 드러나는 월리스의 아이디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때로는 큰 소리로 환성을 질렀다. 

- 다윈은 월리스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악담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윌리스 역시 다윈을 힐난한 적이 없었지만, 앨마는 그토록 명석하면서도 기질과 태도가 완전히 정반대인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할지 항상 궁금했다. 그녀의 의문은 1882년 4월, 찰스 다윈이 사망하면서 풀렸다. 다윈의 유언에 따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그 위대한 남자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맡게 되었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 친애했음을 앨마는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 이해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앨마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 물론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았고, 그가 죽도록 자연 선택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하지 않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앨마는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나비의 의태, 딱정벌레의 변종, 독심술, 채식주의, 유산 상속의 폐해, 곡물 거래소를 없애는 데 대한 그의 계획, 모든 전쟁을 종식하는 방법, 인도와 아일랜드의 자치에 대한 그의 옹호, 대영제국이 저지른 잔혹성에 대해서 당국이 전 세계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그의 제안, 사람들이 들고 회전할 수 있도록 지름이 120미터나 되는 교육용 풍선으로 거대한 지구 모형을 제작하겠다는 그의 포부... 그런 화제들 말이다. 
즉, 그는 앨마와 있을 때면 긴장을 풀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앨마가 늘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마음을 완전히 놓은 그는 유쾌한 대화 상대였는데, 끊임없이 광범위한 주제와 그것에 대한 열정을 기꺼이 털어놓았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워낙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기 이야기만 털어놓지 않고, 앨마의 인생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 두 사람은 한동안 기분 좋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앨마는 타히티에서 처음 내일 아침과 단둘이 있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과 나는 생각보다 서로의 운명에 좀 더 가까이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지금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한테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과연 옳은 일일지 자신이 없었다. 자기 혼자 품어 온 진화 이론에 대해서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진 않았다. 혹시나 그가 거짓말이라고 여긴다면 더 괴로운 일이었다. 또는 그의 업적이나 다윈의 유산에 그녀가 도전하는 듯 보이더라도 최악이었다. 아무래도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휘태커 양, 당신과 보낸 마지막 며칠간은 정말로 즐거웠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나도 즐거웠습니다. 당신이 예상하는 것 이상이었어요."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는 제 생각에 귀를 기울여 주시다니 참 너그러우십니다. 당신 같은 분은 많지 않죠. 제가 생물학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저를 뉴턴과 견주더군요. 하지만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유부단하고 유치한 얼간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말아요. 사람들이 당신을 모욕할 땐 나도 참 못마땅했어요." 앨마가 옹호하듯 그의 손을 두들기며 말했다.

 

- 그는 무례를 저질렀을까 봐 염려하듯 말꼬리를 흐렸다. 앨마는 그가 나이 든 노인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자책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이상한 늙은이로 취급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앨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 "그러니까 여전히 다윈이 맨 처음이네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럼요, 당연하죠. 다윈 씨는 최초이면서 가장 철저했어요. 그 점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월리스 씨, 내가 별다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님을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저보다는 당신이 먼저 이 결론에 도달하셨군요. 다윈이 우리 둘을 이겼음은 확실하지만, 당신은 저보다 사 년 먼저 이런 결론을 얻으셨어요."
"글쎄요..." 앨마는 망설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에요."
"하지만 휘태커 양, 그렇다면 우리 셋이 있었다는 의미잖아요!" 흥분과 깨달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 앨마는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1819 년 어느 화창한 가을날의 화이트에이커로 되돌아갔다. 그녀와 프루던스가 처음 레타 스노와 만난 날이었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어렸고, 하늘은 푸르렀고, 사랑은 아직 그들에게 서글픈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레타가 생기로 반짝거리는 눈을 들어서 앨마를 올려다보며 말했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셋이 됐네요! 이런 행운이!"

 

- "그분한테 화난 적은 없나요?" 앨마가 물었다. 
"절대 없죠. 과학계에서는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가야 하므로, 자연 선택은 언제나 그분의 이론입니다. 게다가 그걸 감당할 만한 위엄을 갖춘 사람도 그분 뿐이죠. 저는 그분이야말로 천국과 지옥, 연옥을 두루 거치며 우리 인류를 이끈 금세기의 베르길리우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릴 인도하는 신성한 안내자이십니다." 
"나도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휘태커 양께서 자연선택 이론으로 저보다 앞섰음은 조금도 언짢지 않지만, 만약 당신이 다윈보다 앞섰음을 알았다면 전 크게 상심했을 겁니다. 그분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거든요. 저는 그분이 계속 왕좌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그분의 왕좌를 위협하는 일은 없어요, 젊은이. 걱정마세요." 앨마가 다정하게 말했다.
월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휘태커 양께서 저를 젊은이라고 불러 주시니 상당히 기분 좋은데요. 일흔을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대단한 칭찬입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늙은이한테는 그게 그저 진실일 뿐이죠."


- "제 믿음이 뭔지 아십니까? 인간의 연민과 자기희생의 근원에 대한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는 진화론이 우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나머지 자연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진화론만으로 우리 인간의 독특한 양심을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식과 감정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진화론적으로 전혀 필요 없는 부분이죠.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런 사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체스를 두는 사고력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아요. 종교를 발명하고 우리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논의하는 사고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페라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음 역시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오페라도, 과학도, 예술도 필요 없죠. 윤리학이니 도덕성이니, 기품이니 희생이니 하는 것들도 필요 없습니다. 애정이나 사랑도, 우리가 느끼는 수준까지는 확실히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수성은 불행을 안겨 줄 수도 있는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연 선택 과정에서 우리가 그런 정신을 갖게 되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대부분의 능력은 자연 선택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으면서도 말이죠. 우리가 그토록 특별한 정신을 갖게 된 이유를 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세요?
"알아요. 난 당신의 업적에 관해서 많이 읽었거든요." 앨마가 나직이 말했다.

- 그는 마치 앨마의 대꾸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우리가 왜 그토록 특별한 정신과 영혼을 갖게 됐는지 제가 이유를 말씀드리죠. 그건 우리와 교감하기를 바라는 최고의 초월적 지성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릴 부르는 거죠. 우리가 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불러내서, 우리가 그 지성에 가닿도록, 그와 같은 뛰어난 정신을 갖도록 허락한 겁니다. 우리가 찾아 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무엇보다도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나도 당신 생각이 뭔지 알고, 상당히 독창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앨마는 다시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아름다운 이론이군요. 지금까지그 어떤 것보다도 내 의문에 대한 해답에 가까워요.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미스터리를 또 다른 미스터리로 답하고 있군요. 난 그걸 과학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요. 나라면 차라리 시라고 부르겠어요. 안타깝게도 나는 당신 친구 다윈 씨처럼 여전히 경험 과학이 일러 주는 확고한 해답을 찾고 있죠. 미안하지만 그게 내 본성이에요. 하지만 라이엘 씨는 당신에게 동의했을 겁니다. 그는 신성한 존재만이 인간의 정신을 창조해낼 수 있었으리라고 주장했으니까요. 내 남편도 당신 생각을 좋아했을 거예요. 앰브로즈도 그런 사상을 신봉했죠. 그 사람은 당신이 언급한 그 최고의 초월적 지성과 하나가 되기를 갈망했어요. 그런 합일을 추구하다가 세상을 떠났죠."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 한참 뒤 앨마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정신을 진화의 법칙에서 배제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적 차원에서 우릴 인도하는 최고의 초월적 지성에 관한 당신의 생각에 대해서 다윈 씨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늘 궁금했어요."
월리스도 미소 지었다.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영혼의 세계와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갈망은 혹시... 자신을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만성적인 증상이 아닐까요? 용서해요. 당신을 모욕할 의도는 없어요. 내가 깊이 사랑했던 사람은 당신과 똑같이 어떤 신비한 신적 존재와 교감하고, 육신과 이 세상을 초월하고, 더 나은 영역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으려는 욕구를 품고, 몸소 그런 길을 추구했었죠. 내 눈에는 그 사람이 참 고독해 보이더군요. 아름답지만 고독했어요. 당신도 고독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놀라워요." 

 

- "걱정 마세요, 월리스 씨. 당신과 농담이나 주고받자는 게 아니니까. 나는 진심으로 운이 좋다고 믿어요. 세상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난 운이 좋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 본 적이 없어요. 이 세상은 정말로 신비로우면서도 종종 시련의 장이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면 인간은 언제든 성취할 수 있어요. 지식은 모든 필수 요소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니까요." 
그가 여전히 대꾸하지 않자 앨마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 세상을 넘어서는 어딘가를 결코 고민하지 않았던 까닭은 언제나 이 세상이 나에게 충분히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이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크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지 의아했어요. 어째서 그들이 보다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를 꿈꾸거나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지... 하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겠죠. 우린 다 다르니까요. 내가 원했던 건 '이' 세상을 아는 것 뿐이었어요. 이제 끝이 임박했으니,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보다 약간은 더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더욱이 얼마 안 되는 나의 지식 역시 다른 사람들이 축적해 놓은 지식의 역사에 더해졌어요. 말하자면 위대한 도서관에 힘을 보탠 거죠. 그건 사소한 업적이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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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스프루스 소나무로 맥주 만드는 것을 도왔는데, 선원들은 싫어했지만 마실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그들이 사냥하고 잡아먹는 짐승들의 거주지보다 한 치도 나을 것 없어 보이는 불편한 동굴에서 사는 원주민들과 고래잡이 기지에 발이 묶인 러시아인들을 만났다. 책임자인 듯한 러시아 장교(키가 크고 잘생긴 금발 남자)에 대해서 쿡 선장이 하는 말을, 헨리는 우연히 들었다. "그 친구는 분명 좋은 가문 출신의 신사야." 어디를 가든, 심지어 이토록 암울한 툰드라에서조차 '좋은 가문 출신의 신사'라는 점은 중요한 모양이었다.  

 

- 헨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뱅크스는 점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뱅크스는 헨리가 지난 몇 년 동안 식물학을 정복할 기세로 죽도록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최고의 식물 전문가가 될 가능성까지 갖추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뱅크스는 다른 사람이 채어 가기 전에 이 청년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뱅크스 역시 벌써 여러 차례 인재를 도둑질해 온 사람이었다.  

 

- 얼마 안 되어 헨리는 총검 끝으로 위협이라도 받는 양 페루를 누비고 다녔는데, 그 총검의 정체란 바로 본인의 강렬한 야망이었다. 로스 니븐은 죽기 전에, 남미 여행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충고를 해 주었고 청년은 현명하게 그 충고를 모두 잘 따랐다. 첫째, 절대로 장화는 신지 마라. 원주민의 발처럼 보일 때까지 맨발을 단련시켜서, 축축한 짐승 가죽에 싸인 채 발이영영 썩어 가는 걸 피해라. 둘째, 묵직한 옷가지는 버려라. 원주민들처럼 옷을 가볍게 입고 춥게 견디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더욱 건강해질 거다. 그리고 셋째, 원주민들처럼 매일 강에서 목욕을 해라.

 

- 베아트릭스는 건강한 아기를 안고서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로 기도를 읊조렸다. 딸이 건강하고 분별 있고 지적으로 자라나기를, 그리고 지나치게 분을 바르는 여자애들과 절대로 친하게 지내지 않기를, 저속한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경박한 남자들과 도박 테이블에 둘러앉거나, 프랑스 소설을 읽거나, 야만스러운 원주민들에게나 어울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어쨌든 좋은 가문에 최악의 불명예를 가져올 만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어로 '에인온노젤(een onnozel)', 얼간이로 자라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어머니의 축복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베아트릭스 휘태커처럼 엄격한 여인으로서는 그 정도 축복이면 충분했다.

 

- 근방에 살던 독일 출신 산파는 이런 수준의 괜찮은 집에서 순산을 했으니, 따라서 앨마 휘태커 역시 괜찮은 아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방은 따뜻했고 주방에서는 수프와 맥주를 끊임없이 들여왔으며, 산모는 네덜란드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하듯 튼실했다. 그리고 산파는 보수를, 그것도 두둑이 챙겨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돈을 안겨 주는 아기라면 누구든 그럭저럭 괜찮은 아기였다. 그래서 산파는 앨마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 비록 아주 열렬하지는 않았지만.

 

- 저택의 수석 가정부인 한네커 데 그루트는 별 감흥이 없었다. 아기는 사내아이도 아니고 예쁘지도 않았다. 얼굴은 죽 그릇 같았고 회칠한 바닥처럼 창백했다. 아이들이 으레 다 그렇듯 이 아기도 일거리를 만들어 내리라. 그리고 일거리라는 게다 그렇듯, 아마도 그 책임은 그녀의 어깨 위에 놓일 터였다. 하지만 신생아를 축복하는 일은 의무에 속했고 한네커 데 그루트는 항상 의무를 준수했으므로, 어쨌거나 그녀도 아이를 축복했다.

 

- 키가 크고 위협적인 요크셔 출신의 더 얀시는 집주인 대신엄격한 관리자로서 국제 무역과 관계된 일을 전부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필라델피아 항구가 해빙되어 네덜란드령 서인도 제도로 떠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해 1월 마침 저택에서지내고 있었다.) 갓난아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없었다. 공정하게 따지자면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휘태커 부인이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자, 얀시 씨는 다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아끼는 특유의 태도로 "어려운 거래를 살렸군."이라고 언급했다. 그게 축복이었을까? 단언하기는 좀 어렵다. 하지만 그는 늘 회의적이었으므로,약간의 특혜를 적용해서 그냥 축복으로 받아들이자. 분명 저주할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 헨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손에 넣고자 하는 표본이 무엇인지 물은 뒤, 그것을 주말까지 구해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항상 수첩과 목수용 연필을 가지고 다녔다. 상대가 영어를 못하면 헨리는 그들더러 원하는 물건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식물화가이기도 했으므로 자기네 요구 사항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했다. 

 

- 헨리는 그런 작업에 매우 적합한 소년이었다. 식물을 구분하는 데도 뛰어났고 꺾꽂이용 나뭇가지를 살려 보존하는 데에는 전문가였으며 정원을 돌아다녀도 아무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낯익은 얼굴인 데다 흔적을 감추는 데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재능은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쌩쌩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에서 온종일 일을 하고 나서 다시 밤새 도둑질을 했다. 희한한 식물, 귀중한 식물, 작란화, 열대 난초, 신세계에서 가져온 신기한 식충식물 등이었다. 또한 그는 저명한 신사들이 그려 준 식물 그림을 잘 간직했고, 세상이 탐내는 모든 식물들의 수술 하나, 꽃잎 하나까지 속속들이 알게 될 때까지 그 그림들을 공부했다.  

 

 - 나중에 뱅크스는 소년을 바다로 내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은밀히 조언해 주었다. "항해하는 동안 매일같이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 넬슨 씨 말에는 귀를 기울여라. 따분한 사람이긴 해도 식물에 관해서라면 네가 앞으로 배우게 될 것보다도 더 많이 아는 사람이야. 나이 많은 선원들한테 휘둘릴 테지만 절대로 불평해선 안 돼, 안 그러면 상황이 네게 불리해질 뿐이다. 프랑스 괴질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창녀들은 멀리해라. 배 두 척이 항해에 나가겠지만 너는 쿡 선장과 함께 영국 군함 '레졸루션 호'에 탈 거다. 절대로 선장 앞에서 얼쩡대지 말고, 입도 뻥끗하지 마라. 아예 선장과는 말을 섞지 말아야겠지만, 혹시라도 그와 얘기하게 되면 네 녀석이 이따금씩 내 앞에서 하던 대로 방자한 태도를 결코 보여선 안 된다. 선장은 나처럼 그런 꼴을 봐주지 않을 거다. 쿡과 나는 닮은 데가 없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깍듯한 예절을 중시하는 거물이다. 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네 신상에 이로울 거다. 마지막으로, 영국 군함은 다 마찬가지지만 '레졸루션 호'에서 지내다 보면 불한당과 신사가 기묘하게 뒤섞인 무리 속에서 살아가야 할 거다. 헨리, 영리하게 굴어라, 신사들을 네 본보기로 삼아라."  

 

- 그 여자들은 하나같이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사랑의 행위를 잘 아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남자들은 결코 그 섬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헨리는 모든 여자들을 멀리했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풍만한 가슴을 뽐내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에 독특한 체취를 풍기면서 헨리의 꿈속에 머물렀지만 대부분 이미 프랑스 괴질에 걸려 있었다. 그는 수백 번의 향기로운 유혹을 물리쳤다. 그래서 놀림받았지만 의연하게 버텼다. 그는 스스로에게 좀 더 큰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식물에만 집중했다. 그는 치자나무, 난초, 재스민, 빵나무 열매를 수집했다. 

 

- 하와이의 추장들은 분노에 차 있었고, 노략질을 일삼는 원주민들 역시 공격적이었다. 하와이인들은 다정한 친구 타이히인들과 사뭇 달랐으며 더욱이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하지만 쿡 선장은 깨끗한 물이 필요했으므로 보급품을 다시 채울 때까지 항구에 머물러야 했다. 원주민들의 약탈도, 영국인들의 보복도 빈번했다. 총탄에 원주민들이 부상을 당하자 추장들은 겁에 질렸고 서로 협박이 오갔다. 쿡 선장이 흐려진 정신 탓에 약탈을 당할 때마다 점점 더 잔혹해지고, 더욱더 갑작스러운 짜증을 토하며, 화도 더 많이낸다고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런데도 원주민들은 도둑질을 이어 갔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배에서 곧장 못을 뽑아 갔다. 구명정과 무기도 훔쳐 갔다. 더 많은 총이 발포되었으며 더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헨리는 불침번을 서느라 며칠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 사실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았다. 

 

- 그는 헨리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포트와인 한 잔을 권했지만 헨리는 술을 거절했다. 

 

- 영국인들만이 기나나무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 늑장을 부렸다. 주로 그들의 반(反)스페인 정서와 구교도에 대한 편견 탓이었지만, 이상한 가루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보다는 차라리 사혈을 선호하는 오래된 관습 때문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나나무에서 약물을 추출하는 과정은 정교한 과학 기술을 요했다. 해당 나무의 종류만 해도 70여 종에 달했고, 정확히 어느 나무의 껍질에 가장 강력한 약효가 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채집가 개인의 평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개는 9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원주민들이 그런 일을 맡았다. 런던 약방에서 '기나피'라며 종종 만날 수 있는 가루는 벨기에 해협을 통해 은밀하게 밀수된 물건이었는데, 상당수 가짜여서 효과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껍질은 급기야 조지프 뱅크스 경의 관심을 끌기에 이르렀고, 그는 나무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제는 잠재적 부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하나만으로 자청해서 탐험 대장으로 나선 헨리 역시 알고 싶어졌다. 

 

- 맨발로 굶주려 가면서도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기력을 유지하려고 헨리도 원주민처럼 코카 잎을 씹었다. 스페인어도 배웠는데, 말하자면 그가 이미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고집스레 우겼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그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때까지 목청껏 고함을 질러 댔다. 

 

- ... 없이 현관에 나타나서 문을 두들기는 행동은 사교적 무례함뿐아니라 신체적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게다가 헨리는 빈손으로 뱅크스를 찾아왔는데, 식물 수집가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헨리가 페루에서 가져온 수집품은 카디즈부터 타고 온 배 안에 아직 실린 채,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해 있었다. 인상적인 수집품이었지만, 표본은 모두 저 멀리 상선에 황소 방광과 술통, 마대, 운반용 유리상자에 꽁꽁 감추어져 있었으니, 뱅크스로서는 그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헨리는 직접 가져온 물건을 뭐라도 하나 뱅크스의 손에 쥐여 주었어야 했다. 기나 '로하' 껍질을 직접 들이밀수 없었다면 최소한 예쁘게 핀 수령초 한 포기라도 안겨야 했다. 무엇으로든 노인의 관심을 끌어서, 그가 헨리 휘태커와 페루에 쏟아부은 연간 40파운드의 돈이 그냥 허비되지 않았음을 믿을 수 있도록 기분을 달래 주어야 했다. 

 

- 그러나 헨리는 낮은 자세로 기분을 풀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은 퉁명스러운 비난을 던져서 스스로의 공을 깎아 먹었다. "기나나무는 장사를 해야 할 물건인데, 단순히 연구만 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나리의 잘못입니다!" 충격적일 만큼 신중하지 못했던 이 한마디는 뱅크스를 바보라고 비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장사'라는 불쾌한 오명으로 고결한 소호 스퀘어 32번지를 더럽혔다.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신사인 조지프 뱅크스 경이 행여나 개인적으로 상업에 종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듯이.

 

- 공정을 기하고자 헨리 편을 좀 들어 주자면, 그의 머릿속도 전적으로 명료하지는 못했다. 그는 수년간 외딴 숲에서 홀로 지냈고, 그렇게 동떨어져 생활하다 보면 지나칠 만큼 생각의 고삐가 풀려 버리기 마련이었다. 헨리는 '머릿속으로' 이 주제를 수도 없이 뱅크스와 의논했기에 막상 실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자 안달이 났다. 헨리의 상상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처리되어 벌써 성공을 거둔 터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가능한 결론은 딱 하나뿐이었다. 뱅크스가 훌륭한 생각이라며 그의 제안을 반가워하면서 인도 사무소의 적절한 담당자에게 헨리를소개해 준 뒤, 필요한 모든 허가서와 재정적 지원을 해결해 주고, 이 야심만만한 계획을 내일 오후에 당장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헨리의 꿈속에서 기나나무 농장은 이미 히말라야에서번성하는 중이었고, 그는 조지프 뱅크스가 과거에 한때 약속했던 것처럼 눈부시게 부유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런던 사회에서도 신사로 환영받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헨리는 조지프 뱅크스가 이미 서로를 소중하고 절친한 친구라고 여기고 있으리라 홀로 믿고 있었다. 

 

- 한 가지 작은 문제만 없다면 비로소 헨리 휘태커와 조지프 뱅크스 경은 정말 소중하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즉 문제는 조지프 뱅크스 경이 헨리 휘태커를 근본 없이 자라서 도둑질이나 일삼던 어린 일꾼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장차 녀석의 성품이 나아지면 어떻게든 쓸모를 뽑아내려고 그를 살려 두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 거기에 가 보지 못했지만 전도유망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특히 젊은 나라의 활기찬 수도인 필라델피아의 장래가 촉망된다고 했다. 꽤 쓸 만한 선적항도 있고, 동부 연안의 중심지이며 실용적인 퀘이커 교도와 약제사,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로 가득한 도시라고 말이다. 소문으로는 오만불손한 귀족들도 없고(보스턴과 달리) 쾌락을 두려워하는 청교도들도 없으며(코네티컷과 달리) 봉건 영주인 척하는 골치 아픈 인물들도 없다고 했다.(버지니아와 달리) 종교적 관용과 언론의 자유, 수려한 경관이라는 확고한 원칙을 바탕으로 윌리엄 펜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는 욕조에서 묘목을 키우며 자신이 세운 대도시가 식물과 사상의 위대한 온상이 되기를 상상하던 인물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누구든 전적으로 아무나 환영받았다. 물론 유대인은 예외였다. 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헨리는 필라델피아가 아직 실현되지 못한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일 배경이 되리라 짐작했고, 그곳을 자기 사업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 그러나 어디에든 정착하기 전에 그는 아내를 맞이하고 싶었고,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이왕이면 네덜란드인 배우자를 원했다. 그는 영리하고 정숙하면서 경솔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만한 여자를 원했고, 그런 여자라면 네덜란드에서 찾는 것이 제격이었다. 

 

- 곶처럼 툭 튀어나온 곳에 위풍당당하게 드높이 자리 잡고 태연자약하게 반대편 도시를 굽어보는 그의 저택은 저 멀리에서도 쉽게 눈에 띄고 웅장해 보이도록 설계되었고, 구석구석 부유함을 뽐내게끔 건축되었다. 모든 문손잡이는 황동이었을 뿐 아니라 번쩍거려야 했다. 가구는 런던의 세던 공방에서 직접 수입해 왔으며, 벽에는 벨기에산 벽지가 도배되었고, 도자기 접시는 중국 광저우산이었고, 지하 창고에는 자메이카산 럼과 프랑스산 레드와인이 들어찼고, 전등은 베네치아에서 입으로 불어 만든 수공예품이었으며, 저택 주변에 심긴 라일락은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꽃을 피웠던 품종이었다. 

- 그는 자신의 부에 대한 소문이 거침없이 퍼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헨리 수준의 부자라면, 사람들이 그를 더 대단한 부자로 상상해도 상관없었다. 이웃들이 헨리 휘태커의 말은 은제 발굽을 박았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믿도록 놔두었다. 그러나 솔직히 은제 말발굽은 아니었다. 다른 모든 이들의 말처럼 쇠발굽을 달았고, 무려 헨리가 직접 박은 것이었다.(페루에서 엉터리 도구로 형편없는 노새의 발굽을 달아 줄 때 배운 기술이었다.) 이렇듯 소문이 훨씬 즐겁고 대단한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줘야 한단 말인가. 

 

- 헨리는 할라파 치료법을 엉터리라고 의심했고, 제 식솔들은 그 누구도 먹지 못하게 했다. 그는 북미 주민들보다 훨씬 황열병에 친숙한 카리브해 주변의 크리올 의사들이 훨씬 덜 야만적인 방법으로 치료함을, 강장제와 휴식을 처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장제와 휴식으로는 돈을 벌어들일 수없는 반면, 할라파는 엄청난 상품이었다. 이것이 바로 1793년말까지 필라델피아 인구의 3분의 1이 황열병으로 죽고, 헨리는 재산을 두 배로 늘리게 된 내막이었다. 

 

- 헨리는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온실을 두 채 더 지었다. 베아트릭스의 제안으로, 그는 미국 고유 품종의 꽃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곧 유럽에 관목을 수출했다. 값진 아이디어였다. 미국의 초원과 숲에는 유럽인들의 눈에 이국적으로 보이는 식물품종이 가득했고, 아주 쉽게 해외 시장에 팔 수 있었다. 헨리는 필라델피아 항구에서 빈 배를 출항시키기가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이제 양쪽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네덜란드동업자들과 자바에서 기나피를 추출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본국에서도 돈벌이가 가능해졌다. 1796년 무렵, 헨리는 중국에 수출할 인삼 뿌리를 채집하기 위해 수집가들을 펜실베이니아 산악 지대로 파견했다. 사실상 그는 미국에서, 앞으로 수년간, 중국인들에게 뭐든 팔아 보고자 궁리를 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 하지만 집 밖은 더 많은 즐거움과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우아한 온실에는 보온을 위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무두질한 가죽으로 온통 꽁꽁 싸 놓은 소철, 야자수, 양치식물이 가득했다. 온실을 습윤하게 유지하느라 시끄럽게 돌아가는 무시무시한급수 동력기도 있었다. 신비로운 속성 재배 온실은 항상 어지러울 만큼 더웠는데, 오랜 바다 여행을 마친 섬세한 수입 식물들을 치유하는 곳으로, 새 힘을 얻은 난초들이 꽃을 피웠다. 감귤류 온실에서 자라는 레몬나무는 해마다 여름이면 폐병 환자처럼 바퀴 달린 받침대에 실린 채 자연의 햇빛을 맞곤 했다. 참나무가 줄지어 선 길 뒤쪽으로는 작은 그리스 신전이 숨어 있어서, 신의 땅 올림포스를 떠올리게 했다. 

 

- 숲이 끝없이 우거진 삼림 지대도 있었다. 일부러 경작하지 않고 그대로 둔 땅에선 토끼와 여우가 뛰놀았고, 손에 먹이를 올려놓으면 공원 사슴들이 다가와서 먹곤 했다. 앨마는 자연을 배우기 위해 마음대로 숲속을 돌아다녀도 좋다는 부모의 허락을, 아니 격려를 받았다! 앨마는 딱정벌레와 거미, 나방을 수집했다. 어느 날 그녀는 큼지막한 줄무늬 뱀이 훨씬 큰 검은 뱀한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식사가 끝나기까지 몇 시간이나 걸렸지만 끔찍해도 멋진 광경이었다. 호랑거미가 분탄에 대롱을 깊이 박는 모습과, 개똥지빠귀가 등지를 짓느라 강가에서 이끼와 진흙을 물어 오는 모습도 보았다. 한번은 잘생긴 작은 애벌레(애벌레치고 잘생겼다는 의미다.)를 입양해서 친구로 삼고자 집에 가져왔다가 나중에 실수로 깔고 앉는 바람에 죽이기도 했다. 굉장한 충격이었지만 아이는 쭉 살아갔다. 그때 어머니가 해 준 말이 있었다. "울음을 뚝그치고 계속 살아가야 해." 모든 생명은 다 죽는다는 설명이었다. 양이나 암소 같은 일부 동물들은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 없이 태어나기도 한다. 인간은 모든 죽음을 슬퍼할 수 없다. 앨마는 여덟 살 때 이미 베아트릭스의 도움을 받아서 양의 머리를 잘랐다.

 

- 앨마는 항상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유리병과 작은 보관함, 탈지면, 수첩이 들어 있는 개인 채집 도구로 무장한 채 숲에 들어갔다. 날씨가 달라질 때마다 각기 느끼는 즐거움 역시 변했으므로 그녀는 어떤 날씨에도 밖으로 나갔다. 어느 해, 늦은 4월이었던가, 눈 폭풍이 새의 노랫소리와 썰매 종소리랑 함께 뒤섞여 들려오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집 밖으로 나가기에 충분했다. 부츠나 치맛자락을 버리지 않으려고 진흙탕위를 살금살금 걷는다면 결코 제대로 된 탐험할 수 없다는 점도 그녀는 배웠다. 개인 식물 표본집에 넣을 멋진 표본을 구해서 돌아오기만 하면, 그녀는 신발과 치마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 채 귀가해도 절대 혼나는 법이 없었다.   

 

- 아홉 번째 여름을 맞이한 앨마는 완전히 혼자 힘으로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을 알게 되었다. 오전 5시에 관찰하면 언제나 눈개승마꽃이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6시에는 데이지와 금매화가 피어났다. 시계가 7시를 알리면 민들레가 깨어났다. 8시엔 별봄맞이꽃의 차례였다. 9시엔 별꽃, 10시엔 콜히쿰. 11시가 되면 모든 과정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정오 무렵, 눈개승마꽃이 오므라들었다. 1시에는 별꽃이 닫혔고, 3시에는 민들레가 꽃잎을 접었다. 금매화가 꽃잎을 닫고, 달맞이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저녁 5시 즈음은, 앨마가 깨끗이 손을 씻고 집에 돌아와 있지 않으면 혼이 나는 시각이었다.

 

- 앨마는 무엇보다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가장 알고 싶어 했다. 모든 것을 뒤에서 시계처럼 조종하는 창조주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녀는 꽃잎을 일일이 따서 내부의 구조를 연구했다. 곤충도 마찬가지였고, 곤충의 사체를 발견할 때마다 해부에 몰두했다. 어느 9월 말의 아침, 앨마는 이제껏 봄에만 피어난다고 알고 있던 크로커스가 난데없이 피어났음을 보고 매혹되었다. 엄청난 발견이야! 다른 모든 식물이 죽어 가기만 하는 추운 초가을에, 보호해 줄 잎사귀도 없이,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피어났을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흡족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가을 크로커스니까 그렇지."라고 베아트릭스가 딸에게 말했다. 맞다, 그들이 가을 크로커스임은 분명하고도 확실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멍청한 꽃이라서? 시간의 흐름을 잊은 걸까? 얼마나 중요한 사무실에 꽂히겠다고 밤새내린 혹독한 첫서리를 뚫고 꽃을 피워 내는 고통마저 감수한단 말인가?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저 다양성의 결과란다." 베아트릭스가 설명해 주었지만, 앨마에게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앨마가 더 깊이 파고들자 베아트릭스는 대꾸했다. "모든 것에 해답이 있지는 않아."      

 

- 헨리는 자식 앞에서 의논하기에 너무 어둡거나 복잡하거나 난감한 주제는 없다고 믿었고, 베아트릭스도 강력하게 동의했다. 만일 앨마가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음번에는 뒤처지지 않고자 더욱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리라는 게 베아트릭스의 논리였다. 대화에 참여할 만한 지식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사람에게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계속하세요."라고 중얼거리라고, 베아트릭스는 앨마에게 가르쳤다. 앨마가 식탁에서 홀로 지루해하더라도, 분명 누구든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화이트에이커의 만찬 모임은 아이가 재미있어하라고 마련된 것이 아니었으므로(사실 베아트릭스는 인생에서 귀중한 것들을 어린이의 재미를 위해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앨마가 몇 시간이고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

 

- 목성 역할로 폰테실리가 뽑은 사람은 은퇴한 선장이었는데, 우스꽝스러울 만큼 뚱뚱한 남자였다. 그의 비대한 체구가 태양계에 자리 잡자, 거기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발작적 웃음을 터뜨렸다. 토성은 약간 덜 뚱뚱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을 만큼 비대한 언론인이 맡았다. 태양을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잔디밭에 펼쳐질 때까지 사람들을 계속 호명했다. 그러고 나서 폰테실리는 술에 취한 신사들이 올바른 천체 궤도를 유지하도록 필사적으로 인도하며, 헨리 주변으로 각각 궤도를 지정해 주었다. 곧 숙녀들도 떠들썩한 오락에 합류했고, 폰테실리는 남자들 주변으로 그들을 배치했다. 숙녀들은 저마다 좁은 궤도를 움직이는 각각의 위성 역할을 맡았다. (앨마의 어머니는 서늘한 달 같은 표정으로, 지구의 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런 다음 마에스트로는 가장 예쁜 아가씨들을 선발해서 잔디밭 가장자리에 별자리를 수놓았다. 

- 관현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천체로 이루어진 이 풍경은 선량한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평생 보아 온 것 중 가장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왈츠였다. 정중앙에 선 태양왕 헨리는 활짝 웃으며 불꽃처럼 머리카락을 빛냈고, 크고 작은 체구의 다른 남자들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여자들도 그 남자들의 주변을 회전했다. 아가씨들의 무리는, 우주의 가장 바깥쪽 구석에서 머나먼 미지의 은하계를 나타내며 반짝거렸다. 폰테실리는 높은 정원 담벼락에 올라가서 위험하게 비틀거리며, 전체적인 예술 작품을 지휘하고 고함을 질러 대면서 명령을 내렸다. "속도를 지키세요, 신사분들! 숙녀분들은 궤도를 이탈하지 마시고요!"

 

- 앨마도 끼고 싶었다. 이렇게 짜릿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악몽을 꾸고 난 뒤를 제외하면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깨어있던 적도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이 유쾌한 유희에서 망각된 존재였다. 평생 '그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아이'로 지내왔듯 그날도 그녀는 거기 참석한 유일한 아이였다. 그녀는 정원 담장으로 달려가서 위험스레 비틀거리는 마에스트로 폰테실리에게 소리쳤다. "저도 끼워 주세요!" 이탈리아인은 서 있던 곳에서 앨마를 내려다보며 초점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꼬맹이는 누구지? 어쩌면 앨마는 완전히 무시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헨리가 태양계의 중앙에서 소리쳤다. "그 아이한테도 '자리'를 주시오!" 
폰테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여전히 팔을 휘저으며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듯 시늉했고, 앨마에게 소리쳤다. "너는 혜성이다!"

 

- "혜성은 뭘 하는데요?"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거야!" 이탈리아인이 명령했다. 앨마는 그대로 따랐다. 그녀는 행성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의 궤도를 파고들기도 하고 같이 따라 돌기도 ...

 

- 넓은 계단 꼭대기에 당도한 앨마는 저택 현관 입구에 등불을 든 남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친 아버지가 짜증으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한가운데 서 있었다. 수면 모자를 쓴 한네커 데 그루트도, 앨마의 어머니도 거기 있었다. 그렇다면 심각한 일이 틀림없었다. 앨마는 어머니가 이 시각에 깨어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어쨌거나 소녀는 예뻤으며 완전히 멍청해 보이지도 않았다. 실제로 흥분이 가라앉자 폴리는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고(거의 귀족적인 몸가짐이었다.) 방금 양친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치고는 더욱 그랬다. 

- 폴리한테서 베아트릭스는 아이를 위해 자신이 만들어 줄수 있는 훌륭한 미래 뿐만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장래의 가능성까지도 감지했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 올바른 도덕적 영향을 받고 자란다면, 이 소녀는 제 어머니가 극단적 대가를 치러야했던 쾌락과 사악함의 길로부터 방향을 틀 수 있으리라고 베아트릭스는 믿었다.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씻기는 것이었다. 가엾은 아이는 신발과 손이 피투성이였다. 두 번째로 할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폴리는 애완용 새와 일자리를 구하는 거리의 아가씨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 시점부터 아이의 이름은 프루던스 prudence 가 되리라. 아이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해 줄 이름이라고 베아트릭스는 바라고 또 기대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불과 한 시간 내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앨마 휘태커에게 이제 여자 형제가 생겼으며, 그 아이의 이름은 프루던스라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전해진 사연이었다. 

 

- 결국 그녀는 흡족해했다. 젊은 딕슨은 완벽하게 따분한 학문의 귀재로, 미숙한 점이나 유머러스한 부분이라곤 전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나흘간, 휘태커 집안의 딸들에게 자연 철학과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화학, 천문학, 광물학, 식물학, 역사 수업을 각각 돌아가며 가르치도록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었다. 앨마는 별도로 광학과 대수, 구면 기하학 수업도 받았지만, 프루던스는 제외되었다. 베아트릭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드물게 자비심을 베푼 결과였다. 금요일에는 학업에서 벗어나, 미술 교사와 무용 교사, 음악교사를 초빙해서 소녀들의 교육 커리큘럼을 완성했다. 아침마다 두 소녀는 어머니가 홀로 가꾸는 그리스식 정원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일을 해야 했다. 그곳은 베아트릭스가 엄격한 유클리드 대칭 원리에 따라(모든 식물을 구형과 원뿔형, 복잡한 삼각형으로 정확하게 다듬어 놓았다.) 모든 통로와 토피어리(조경수의 정형법. 주로 상록수 등을 전정하여 특정한 모양으로 다듬는다.)를 배치해서 기능 수학의 승리를 구현한 공간이었다. 소녀들은 또한 일주일에 몇 시간씩 바느질을 익히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저녁 시간이면 앨마와 프루던스는 공식 만찬 식탁에 불려 가서 전 세계에서 온 손님들과 지적 교류를 함께했다. 집에 손님이 없는 경우, 앨마와 프루던스는 응접실에서 밤늦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와 화이트에이커의 공식 서신을 작성했다. 일요일은 교회에 가는 날이었다. 잠자기 전에는 기나긴 밤 기도를 올렸다.   

 

- 하지만 앨마에게는 정말로 별반 괴로운 일과가 아니었다. 그녀는 활기 넘치고 매력적인 젊은 숙녀로 거의 휴식할 필요가 없었다. 앨마는 정신 활동과 원예 노동, 만찬 모임에서 오가는 대화를 즐겼다. 밤늦도록 아버지의 서신 작성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늘 행복했다. (종종 그 순간만이 아버지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어떻게든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냈고 그런 시간에는 주로 독창적인 원예 기획을 창안했다. 잘라 온 버드나무 가지와 씨름하며, 때로는 싹에서 뿌리가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잎에서 뿌리가 나오기도 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그녀는 손에 들어오는 모든 식물을 해부하고 기억하고 보존하고 분류했다. 그녀는 말린 식물로 아름다운 '호르투스 시쿠스(hortus siccus)', 즉 멋들어진 작은 식물 표본집을 만들었다. 

- 앨마는 날이 갈수록 식물학을 더 좋아하게 됐다. 그녀를 그만큼 매혹시킨 건 식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마법 같은 질서였다. 앨마는 체계와 순차 배열, 분류, 색인 같은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느꼈으며, 식물학은 그런 기쁨에 탐닉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녀는 일단 분류 체계의 순서에 따라 배열된 식물들이 그 순서를 고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식물의 대칭에는 복잡한 수학적 규칙이 깃들어 있었고, 앨마는 그러한 규칙에서 평온함과 경의를 느꼈다. 예컨대 식물의 모든 좋은 꽃받침 개수와 꽃잎의 분할 사이에 일정한 비율을 지녔고, 그 비율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그 규칙에 시계를맞출 수도 있을 정도였다. 변함없이 위안이 되고 흔들림 없는 법칙이었다. 

- 앨마에게 소원이 있다면 식물 연구에 쏟을 시간이 더 생겼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기묘한 환상을 품었다. 자연 과학을 연구하는 군대 막사 같은 곳에서 새벽이면 나팔소리에 기상한 뒤 제복을 차려입은 젊은 동식물 학자들과 함께 행진하고, 온종일 숲과 개울과 실험실에서 연구하며 지내는 삶을소망했다. 다른 헌신적인 분류학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아무도 서로의 연구를 방해하지 않고 다만 가장 짜릿한 발견의 순간만을 공유하는 식물학 수도원이나 식물학 수녀원 같은 곳에서살고 싶었다. 심지어 식물학 교도소라도 좋을 것 같았다! (세상에는 벽으로 격리되어 지적 망명이 허락되는 곳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런 곳을 '대학'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앨마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1810년대의 어린 소녀들은 대학을 꿈꿀 수 없었다. 베아트릭스 휘태커의 딸들조차 못 할 일이었다.)

 

-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언제나처럼 회계 장부를 정리하고 기도를 올리고 난 뒤, 베아트릭스가 항상 하던 대로 딸들을 단속했다. 
"앨마, 공손한 대화는 말꼬리 빼앗기 놀이가 아니란다. 드물겠지만 그런 태도가 상대방에게 생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세련된 행동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주인으로서의 가치는 본인의 지식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고, 손님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데 있어."
앨마가 반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설교를 이어 갔다.
"그뿐만 아니라, 일단 농담이 의도한 대로 재미를 제공하고 나면 지나치게 웃어 줄 필요는 없단다. 최근 들어서 넌 지나치게 오래도록 웃어 대더구나. 거위처럼 꽥꽥거리는데도 기품있는 여자를 나는 만나 본 적이 없다."

- 그러고 나서 베아트릭스는 프루던스에게 향했다.
"프루던스, 네가 무의미하고 거슬리는 수다에 참여하지 않았음은 감탄할 일이다만, 대화를 아예 마다하는 건 다른 문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도, 방문객들은 널 모자란 아이로 생각할 거야. 사람들이 내 딸들 중에서 한 사람만 말할 줄 안다고 여긴다면 그건 우리 가문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불쾌한 낙인이 될 거다. 여러 차례 이야기 했듯이 수줍음은 또 다른 종류의 허영심이야, 버리거라."
"죄송합니다. 어머니, 오늘 저녁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라고 프루던스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건 너의 '생각'이겠지. 하지만 난 저녁 식사 바로 직전에, 네가 가벼운 시집을 들고서 상당히 기분 좋게 독서하는 모습을 봤다. 식사 직전에 가벼운 시집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불과 한 시간 만에 몸이 불편해질 리 없어."
"죄송합니다, 어머니." 프루던스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 에드워드 포터 씨에 대해서도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오래 너를 빤히 응시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주시는 모든 이들을 모욕하는 행동이야. 너는 진지한 주제에 관해서 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이야기함으로써 남자들의 그런 행동을 따돌리는 법을 배워야겠다. 가령 네가 포터 씨와 러시아 주둔군에 대해서 토론했더라면 그 사람도 더 일찍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르지. 그저 착하게만 군다고 능사가 아니야, 프루던스. 넌 영리해져야 해. 물론 여자는 남자들보다 항상 도덕적이지만,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재치를 연마하지 않는다면 도덕성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프루던스가 말했다.

"기품만큼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누구에게 기품이 있고누구에게 없는지, 시간이 흐르면 드러날 거다."

 

- 해가 거듭될수록 휘태커 가문의 딸들은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교정을 거쳐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지만, 아마도 그 동기는 달랐을 것이다. 프루던스가 교정받기 힘들어하던 부분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한편 앨마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을 어려워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모든 본능을 끊임없이, 거의 물리적으로 억눌러서 도덕적 규율에 순종하거나 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굴복함을 의미했다. 따라서 예의범절은 준수됐고, 겉으로 보기에 화이트에이커의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그러나 진실을 들여다보면 앨마와 프루던스 사이에는 거대한 방파제가 존재했고, 그 방파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그걸 무너뜨리도록 두 사람을 돕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 수천 가구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헨리 휘태커에게는 불행한 해가 아니었다. 온실 난로는 어둑어둑한 날씨 속에서도 열대 식물들을 대부분 지켜 냈고, 어차피 그는 위험천만한 노지 농사에 생계를 맡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취급하는 의약용 식물은 대부분, 기후 변화에 영향받지 않은 남미대륙에서 수입되었다. 더욱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었고 병든 사람들은 더 많은 약을 찾았다. 따라서 식물 재배나 재정적으로 헨리는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 아니, 헨리는 오히려 그해에 부동산과 진기한 고서를 횡재했다. 농부들은 더 밝은 태양과 건강한 토양과 더 호의적인 환경을 찾겠다는 희망을 안고서 떼 지어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서부로 몰려갔다. 헨리는 그렇게 파멸 당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땅을 대거 사들였고, 그 덕에 훌륭한 제재소와 숲, 초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지위와 명망 높은 필라델피아의 몇몇 가문도 그해 나쁜 기후로 인한 경제 불황의 여파로 몰락했다. 헨리에게는 멋진 소식이었다. 다른 부유한 가문이 망할 때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그들의 땅이며 가구, 말, 프랑스산 고급 안장, 페르시아산 직물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매물은 그들의 장서였다.  

 

- 해를 거듭하면서 헨리는 귀중본을 수집하는 데 열광하 게되었다. 영어로 쓰인 책도 좀처럼 안 읽는 데다, 카툴루스(기원전 1세기 무렵의 로마 서정시인) 같은 것은 확실히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치고는 특이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책을 읽고 싶어 했다기보다, 점점 방대해지는 화이트에이커의 서재에 모셔 둘 전리품을 얻고 싶어 할 뿐이었다. 헨리는 다른 책보다도 유독 의학 서적과 철학 서적, 절묘한 삽화가 들어간 식물학 서적을 갈망했다. 그는 방문객들이 온실에서 자라는 열대 보물들만큼이나 그런 책들에 황홀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만찬 전에 진귀한 책을 하나 선택해서 (혹은 베아트릭스에게 골라 달라고 해서) 모여든 손님들에게 보여 주기를 하나의 의례로 삼을 정도였다. 특히 유명한 학자들이 방문할 때면 그러한 의식을 거행했는데, 그들이 숨을 멈추고서 소유욕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문필가들은 대부분 한쪽에는 그리스어가, 다른 한쪽에는 라틴어가 적혀 있는, 16세기 초에 발행된 에라스무스의 귀중본을 직접 만져 볼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으리라.  

 

- 그래서 베아트릭스는 책을 살피고 분류하는 작업의 조력자로 앨마를 선택했다. 앨마는 그 일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프루던스는 그리스어를 거의 몰랐고 라틴어에도 거의 무능한 데다, 식물학 서적의 경우 1753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판본(다시 말해, 린네 분류법이 도입되기 이전과 이후)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했는데, 그 방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앨마는 화이트에이커의 서재를 질서 있게 정리하는 임무에 제격이면서도 열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리하는 책에 관한 심오한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열의를 가지고 부지런히 색인을 작성했다. 묵직한 나무 상자를 옮길 만큼 신체적으로도 튼튼했다. 게다가 1816 년에는 날씨가 워낙 안 좋았으므로 실외에서 즐길 만한 오락거리가 거의 없었으며, 정원에서 일을 해 본들 얻을 것도 별로 없었다. 앨마는 일종의 실내 원예 작업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서재 일을 도맡았고, 덤으로 근육을쓰는 일과 아름다운 책을 누리는 데에 매우 기뻐했다. 

- 앨마는 책 수선에도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식물 표본을 고정해 본 경험이 많아서 제본실에 있는 각종 재료를 사용하는 데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제본실은 서재 바로 옆에 잘 보이지 않게 난 문으로 통하는 작고 어두운 방이었는데, 베아트릭스는 낡은 옛날 책들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필요한 종이와 천, 가죽, 밀랍, 아교를 전부 그곳에 보관해 두었다. 몇 달이 지나자 앨마는 그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잘 해냈고, 베아트릭스는 분류된 책이든 되지 않은 책이든 화이트에이커의 서재 관리를 전적으로 앨마에게 일임했다. 베아트릭스는 서재 사다리를 오르내리기에는 너무 몸도 불고 지쳐서, 그 일 자체에 진력이 나 있는 상태였다. 

- 누구의 서재에서 나온 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로 의학서적이 들어 있던, 아무 표시도 없고 달리 주목할 것도 없는 가방 안에서 앨마는 그 물건을 찾아냈다. 흔한 갈레노스의 책 몇 권과 히포크라테스의 최신판 번역서 몇권이 들었을 뿐 새롭거나 흥미진진한 책은 없었다. 그런데 그 책들 가운데 두툼하고 송아지 가죽으로 튼튼하게 장정되어 있는, 익명의 저자가 쓴 <쿰 그라노 살리스(Cum Grano Salis)>라는 책이 있었다. '소금 한 알갱이로'라니 우스운 제목도 다 있었다. 처음에 앨마는 4세기에 쓰인 <데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요리에 대하여'라는 뜻)를 15세기 베네치아에서 다시 펴냈듯 그저 요리에 관한 논문인가 생각했는데, 그 책은 화이트에이커 서재에 이미 소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빨리 책장을 넘겨 보니 그 책은 영어로 적혀 있었고, 요리와 관련한 그림이나 목록이 전혀 없었다. 앨마는 첫 장을 펼쳤고 마음을 사납게 두근거리게 하는 내용을 읽고 말았다. 

 

- 익명의 저자는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장 놀라운 신체의 돌기와 구멍을 부여 받으며, 아주 어린아이들은 그 신체의 일부를 순수한 즐거움의 대상으로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절대 만지지도, 절대 공유하지도, 절대 즐기지도 말아야 한다며 억압하고 또 혐오하는 척해야 한다. 이런 사실이 내게는 의아하기 짝이 없다! 대체 왜 우리는 그러한 인체의 선물을 본인과 동료의 몸에서 탐구하면 안 되는가? 그러한 황홀경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정신에 불과하며, 그렇게나 순수한오락을 금지하는 까닭은 인위적 '문명'의 논리뿐이다. 한때 딱딱한 예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나의 정신은 수년간 가장 절묘한 신체적 쾌락의 도움으로 깨우침을 얻었다. 음악이나 그림, 문학을 대하듯 똑같이 전념하고 연습한다면 진실로 성적 표현 또한 순수 예술의 하나로 추구할 수 있음을 나는 확인하였다. 존경하는 독자여, 이 책장에 담긴 이야기들은 평생에 걸친 나의 에로틱한 모험을 솔직하게 기술한 것이며, 혹자들은 '추악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청년 시절부터 행복하게, 또한 나의 신념상 악의 없이 추구한 결과다. 만일 내가 종교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수치심의 굴레에 얽매여서 이 책을 '고백록'이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관능에 관한 한 수치심에 동의하지 않으며, 연구 결과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인류 종족 또한 관능적 행동을 수치심으로 여기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나는 어쩌면 그러한 수치심의 부재야말로 인류라는 종의 자연적 상태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다만 서글프게도 우리 문명이 그 상태를 왜곡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평범하지 않은 개인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폭로' 하는 바이다. 나의 폭로가 신사들뿐만 아니라 모험을 즐기는 교육받은 숙녀들에게도 안내서이자 여흥으로 읽히기를바라고 믿는다."  
 

- "보관함에는 전부 온도계를 '두 군데' 붙여야 한다고 전해. 하나는 유리 자체에 묶고 하나는 흙 속에 파묻으라고. 표본을 더 선적하기 전에, 만일 부두에 도착했을 때 서리가 내릴 거 같으면 밤에 표본상자들을 다 하역해야 한다고 선원들한테 단단히 이르라고 해라. 상자에 식물이랍시고 검정 곰팡이만 잔뜩 들어 있는 걸 또 받게 되면 나는 '땡전 한 푼' 지불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또다시 봉급을 가불해 줄 수는 없다고도 전해. 아주 나를 파산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식한테 내가 아직 일자리를 주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말이야. 봉급은 제대로 돈벌이를 했을 때 다시 주겠다고 똑똑히 말해라." 그러면 앨마는 이렇게 편지를 시작했다. "친애하는 귀하께, 휘태커 상사에서는 귀하의 모든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귀하가 겪으신 모든 불편을 유감스럽게..."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적임자는 앨마 뿐이었다. 베아트릭스가 임종 시에 앨마에게 부탁한 일도 그것이 전부였다. 앨마는 아버지를 떠날 수 없었다. 

 

- 베아트릭스는 앨마가 절대 결혼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짐작했을까? 십중팔구 그랬으리라는 걸 앨마는 이제야 깨달았다. 누가 그녀를 원하겠는가? 180센티미터도 넘는 키에 교육은 지나치게 많이 받았고, 색도 모양도 수탉 벼슬 같은 머리카락의 여자 거인을 누가 데려가겠는가? 조지 호크스가 최고의 후보자, 정말로 유일한 후보자였지만 이제 그는 없었다. 앨마는 적합한 남편감을 찾을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 

 

- 그러나 앨마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다가 막상 '구상난풀'이 자라는 이끼 품종들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잘 생각해 보니 수많은 이끼의 품종을 구분해 낼 자신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끼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서너 종? 십몇종? 몇백 종?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생각이 떠올랐다. 그걸 어디에서 배웠지? 이끼에 대해서 누가 책을 쓴 적 있나? 아니면 이끼 식물 전반에 관해서라도? 앨마가 알기로 그 주제를 다룬 권위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그 분야로 경력을 쌓은 사람도 없었다. 누가 그런 걸 원하겠어? 이끼는 난초가 아니고, 레바논 삼목도 아니다. 이끼는 크지도, 아름답지도, 눈에 띄지도 않았다. 또한 헨리 휘태커 같은 사람이 재산을 불릴 수 있을 만큼 의학적 성분을 지녀서 돈이 되는 식물도 아니었다.(그래도 아버지가 소중한 기나나무 씨앗을 자바로 운송할 때, 온전히 보존하고자 마른 이끼로 포장했었다는 얘기를 앨마는 기억했다.) 어쩌면 그로노비우스 18세기에 활동한 네덜란드 식물학자가 이끼에 관해 뭔가 저작물을 남겼을지도?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네덜란드인의 저술은 이제 거의 칠십 년이나 해묵은 내용이라서 엄청나게 시대에 뒤떨어지고 내용도 부실했다. 확실한 것은 아무도 이끼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앨마는 심지어 마차 차고의 낡은 벽 틈을 마른 이끼로 메워 놓기까지 했다. 흔하게 쓰는 이불용 솜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녀도 이끼를 간과했던 것이다.

 

- 이끼가 뭔가 그녀에게 반응하는 듯했다. 이끼는 따뜻하고 폭신해서 주변 공기보다 훨씬 더 따스하게 느껴졌고, 예상보다 훨씬 촉촉했다. 자기만의 기후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런 바위들이 수십 개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이어져 있었는데, 제각각 비슷한 이끼 카펫을 덮고 있으면서도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숨이 벅차오름을느꼈다. '여기가 바로 온 세상이었어.' 그곳은 세상보다 더 컸다. 그곳은 윌리엄 허셜의 막강한 천체 망원경으로 바라본 우주의 창공이었다. 거대한 행성이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미지의 은하계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로 그녀의 코앞에! 그곳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집이 내다보였다. 스쿠컬 강을 오가는 낯익은 낡은 배도 보였다. 멀찍이 아버지의 복숭아과수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한네커가 당장이라도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면 들릴 만한 거리였다. 

 

- 앨마의 세계와 이끼의 세계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서로가 서로를 뒤덮고, 서로를 향해 얽힌 채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한쪽 세계는 시끄럽고 거대하고 빠른 반면, 다른 세계는 조용하고 작고 느려서 상대편 세계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을 듯 보였다. 

 

- 그런 이유로 이끼의 또 다른 이름인 민꽃식물의 라틴어 학명, '크립토가메(cryptogamae)'는 '숨은 결혼'이라는 뜻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든 이끼는 평범하고 지루하고 수수하고 원시적이기까지 했다. 도시의 제일 초라한 길가에서 자라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잡초도 이끼와 비교하면 무한히 복잡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끼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앨마는 알게 되었다. 이끼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이끼는 돌을 잡아먹었지만, 반대로 그 어떤 것도 좀처럼 이끼를 잡아먹지 못했다. 이끼는 수 세기 동안 끄떡없었던 바위를 천천히, 그러나 지독히 파고들며 먹이로 삼았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한 줌의 이끼는 절벽을 자갈로 만들 수 있고, 그 자갈을 다시 표토로 바꿀 수도 있었다. 땅 위에 노출된 석회암 아래로 파고든 이끼 군락은 물길을 만들어 살아 있는 해면처럼 바위에 달라붙은 뒤 직접 칼슘을 함유한 수분을 빨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같은 이끼와 광물질의 혼합물은 일종의 침전 대리석으로 변해 갔다. 단단하고 우유처럼 새하얀 대리석 표면에는 실핏줄 같은 파란색과 초록색, 회색 무늬가 영원히 남았다. 그것이 바로 태곳적부터 자리 잡은 이끼의 흔적이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태고의 이끼 군락이 만들어내고 무늬를 새겨 넣은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 이끼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뿐인데, 세상의 시간이 무궁무진함을 앨마도 이제 깨닫는 중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동일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1830 년대에 이미 앨마는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읽었고, 이 책은 지구의 나이가 이제껏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많다는 점을 시사했다. 어쩌면 수백만 년도 더 됐다는 것이었다. 앨마는 1841년에 이르러, 라이엘의 예측보다 지질학적으로 훨씬 오래된 연대표를 제시한 존 필립스의 최신 저작을 더 신봉했다. 필립스는 지구가 이미 자연사의 세 시대(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쳐 왔다고 믿었으며, 이끼 화석을 포함해 각 시대에 속하는 식물군과 동물군 화석을 확인했다. 

 

-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세상이 오래되었다는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었으므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지만 앨마는 충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앨마는 본인만의 독특한 시간 이론을 정립했고, 그녀의 이론은 라이엘과 필립스가 연구하는 데 참고했던 원시 해양 이판암의 화석 기록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사실 앨마는 우주 전체를 운영하는 시간 체계가 여러 종류이리라고 믿고 있었다. 앨마는 성실한 분류학자로서, 심지어 시간 체계를 구분해 이름까지 붙여 두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시간'이었는데, 이는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결함 있는 기억을 취합했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 기억의 서사였다. 그것은 아주 최근의 과거부터 겨우 상상 가능한 미래까지 곧고 좁게 펼쳐졌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특징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흘러간다는 점이었다. 우주 전체에서 인간의 시간은 손가락을 튕기는 정도의 찰나였다. 필멸의 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안타깝지만 앨마의 인생 또한 인간의 시간에 속했다. 따라서 스스로 제일 뼈아프게 알고 있듯이 그녀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다. 앨마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찰나의 존재일 뿐이다. 

 

- 시간의 스펙트럼 반대편 끝에는 '신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앨마는 가정했다. 은하계가 생겨나고 신이 살아가는 불가해한 영원을 의미했다. 그녀는 신의 시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신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든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진저리 나곤 했다.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신의 시간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신의 시간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시간 바깥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부분을 치워 두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시간의 존재를 감지했고, 그게 어떤 종류든 거대하고 무한한 정체로서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 좀 더 가까운 고향인 지구로 돌아오면, 앨마가 '지질학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영역 또한 존재했다. 찰스 라이엘과 존 필립스가 최근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논의한 바로 그 시간대였다. 자연사는 이 범주에 속했다. 지질학의 시간은 '거의' 영원처럼, 신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속도로 흘러갔다. 바위와 산맥의 속도로 움직였다. 지질학의 시간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일부 학자들이 이제야 겨우 주장하듯 지금껏 그 누가 짐작했던것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에 걸쳐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었다. 

 

- 알고 보니 아내 노릇 역시 레타 스노 호크스 부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그런 역할을 할 재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레타에게는 어른 노릇조차 적합하지 않았다. 어른은 습관의 제약을 받는 데다 지나치게 진지해야 했다. 레타는 더 이상 소형 이두마차를 타고 자유로이 도시를 쏘다닐수 있는 어리석은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출판업자의 부인이자 조력자였고, 스스로도 그 신분에 맞게 처신해야 했다. 레타 혼자 극장에 놀러 가는 일도 더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일이 허락된 적은 결코 없었지만 과거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는 그것을 금지했다. 그는 극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조지는 아내에게 교회 예배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일주일에 여러 차례나 교회에 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레타는 지루함 탓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뒤챘다. 결혼한 이후로 제멋대로 옷을 입을 수도 없었고, 생각나는 대로 대뜸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다. 아니, 노래를 부를 수는 있었고 가끔 그러기도 했지만 옳은 일 같지 않았고, 남편을 화나게 할 뿐이었다. 

 

- 그러나 앨마가 도착했을 때 레타는 이미 엄지손가락을 빨며 희미한 겨울 하늘에 드리운 앙상한 검은 나뭇가지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베개 위에 흩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조지는 약국에서 아편팅크를 조금 보내왔다며 약효가 있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조지, 제발 습관적으로 약을 먹이지 마세요. 레타는 워낙 민감한 체질이라 아편팅크를 너무 많이 먹이면 해로울지도 몰라요. 가끔 터무니없이 굴기도 하고 비극적으로 군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제 생각에 레타는 인내와 사랑으로 지켜보면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도록 도와줘야 해요. 레타한테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아마..."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전 항상 조지 편이에요, 레타 편이기도 하고요." 앨마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했을까? 벌써 함부로 너무 입을 놀렸는지도 모른다고, 혹은 남편으로서의 그를 비난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졌다. 가엾은 남자. 그는 지쳐 있었다.

"우정이 있으니까요, 조지. 그걸 써먹으세요. 절 언제든 부르셔도 좋아요." 앨마가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 그는 앨마의 말대로 했다. 1826년 레타가 자기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 버렸을 때 조지는 앨마를 불렀다. 1835년 레타가 사흘간 사라졌다가 결국 피시타운에서 길거리 아이들과 함께 잠든 채로 발견 되었을 때도 앨마를 불렀다. 1842년, 레타가 가위를 들고 하인을 쫓아다니며 유령이라고 주장했을 때도 조지는 앨마를 불렀다. 하인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이제 아무도 레타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려고 하지 않았다. 조지는 1846년에 레타가 잉크보다 눈물로 이해할 수 없는 편지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도 앨마를 불렀다. 조지는 그러한 상황과 혼란을 감당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의 사업과 정신에 끔찍한 타격을 주었다.  

 

- 꼬리이끼는 앨마가 매우 집중하고 있는 연구 대상이자 그녀가 이끼에 대해 품은 환상의 정점이었다. 세상은 수백 수천종의 꼬리이끼로 뒤덮여 있었고, 각각의 변종은 조금씩 달랐다. 앨마는 세상 그 누구보다 꼬리이끼에 대해 많이 알았지만, 여전히 꼬리이끼 속(屬)은 그녀를 괴롭혔고 한밤중에도 그녀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한평생 생물의 메커니즘과 기원에 호기심을 품었던 앨마는 이 복잡한 이끼 속에 관해 특히 강렬한 의문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보냈다. 꼬리이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왜 그렇게 유난히 종류가 다양할까? 자연은 어째서 그토록 근소한 차이밖에 없는 개체를 제각각 만드는 수고를 감수했을까? 어째서 꼬리이끼의 일부 변종들은 다른 유사친족들보다 더 강인할까? 꼬리이끼 종들은 처음부터 늘 그렇게나 무수히 혼합된 채 존재해 왔을까,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뒤 각자 변이를 이루었을까? 

 

- 최근 과학계에서는 종간 변이에 관해 열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앨마는 꽤 열의를 가지고 그 논쟁을 따라갔다. 전혀 새로운 논의는 아니었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사십 년전에 처음 그 주제를 다루었을 때, 그는 지구상의 모든 좋은 스스로 완벽해지려는 유기 조직 '내부의 정서' 때문에 본디 생성된 이후로 변이를 겪는다고 주장했다. 좀 더 최근에 앨마는 익명의 영국인 저자가 쓴 <창조의 자연사 흔적(Vestiges of theNatural History of Creation)>(로버트 체임버스가 종교계의 공격을 피하고자 1844년에익명으로 출간한 초기 진화론)을 읽었는데 그 역시 종이 진화 및 변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종이 '어떻게' 변화를 겪는지 납득할 만한 메커니즘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변이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 그러한 견해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어느 독립된 개체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개념을 인정하는 것은 곧 신의 영역에 대한 의문이었다. 기독교인의 입장은 하느님이 세상의 모든 종을 하루 만에 창조했고, 그러한 천지창조 이후 신의 창조물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앨마가 보기에도 종의 변화는 점점 명확해지는 듯했다. 앨마가 직접 이끼 화석을 관찰해 보니 요즘 이끼와는 상당히 달랐다. 가장 작은 크기의 자연만 해도 그랬다! 리처드 오웬이 최근 '공룡'이라고 명명한 도마뱀 같은 생명체의 거대한 화석 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때 그 엄청난 크기의 동물이 지구를 활보하고 다녔지만, 확실히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점에 논란의 여지 따윈 없었다. 공룡은 무언가 다른 생명체로 대체되었거나, 다른 것으로 변했거나,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멸종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석판화 기술이 선보인 지 불과 사년 뒤에 태어난 그녀는 화이트에이커의 서재에다가 이제껏 세상에 나온 것 중 최고 품질의 석판화 작품들을 일부 수집해두고 있었다. 앨마는 스스로 석판화의 기술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판화들은 그녀의 믿음이 틀렸음을 보여 주었다. 조지 호크스 역시 석판화를 잘 알았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보다 뛰어난 전문가는 없었다. 그런데도 앨마에게 한 장 한 장 다른 난초 그림을 넘겨 보여 주는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앨마에게 그림을 전부 보여 주고 싶어 했고, 그것도 한꺼번에 보여 주려고 했다. 앨마도 계속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먼저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잠깐만요, 조지, 잠깐만 쉬었다 하죠. 말씀해 주세요, 이걸 그린 건 대체 누구예요?" 앨마는 최고의 식물화가들을 전부 알고 있었지만 이 예술가는 그녀가 모르는 인물이었다. 저 유명한 월터 후드 피치도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런 작품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아주 특별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름은 앰브로즈 파이크예요." 
 

- 연한 밤색 머리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청년이 갈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마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보기에 스무 살도 채 넘지 않은 듯했지만 앨마는 그런 나이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은 가죽 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는데, 이미 세계 여행을 몇 번이나 한 듯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망가져 버릴 것처럼 보이는 낡은 가방이었다. 앨마는 밖에 나가서 그를 맞이하기 전에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 화이트에이커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고, 처음 오는 방문객들의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화이트에이커는 워낙 장엄하고 위압적인 건물이었으므로 특히 처음 와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어차피 그곳은 상대를 주눅 들게 하려고 설계된 집이었다. 따라서 경외감과 부러움, 두려움을 숨길 수 있는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모르는 경우에는 더더욱. 

 

- 그제야 비로소 앨마는 파이크 씨가 처음 보기보다 꽤나 나이가 들었음을 알아보았다. 그건 당연했다. 처음 본 인상처럼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로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서 봤을 때 대학생처럼 보였던 까닭은 그의 열정적인 태도와 재빠른 걸음 때문이었다. 가난뱅이 젊은 학자의 제복 같은 소박한 갈색 양복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살피니 그의 나이가 보였고, 특히 모자를 풀밭에 던져 놓고 햇빛 아래 누워 있으니 연륜이 더욱 두드러졌다. 얼굴에는 희미하게 주름이 있었고 오랜 세월 햇빛에 그을어 주근깨도 보였으며 관자놀이 근처의 연갈색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앨마는 그가 서른다섯 살이나 어쩌면 서른여섯 살쯤이리라고 추측했다. 그녀보다 열 살 이상 어리지만 그래도 애송이는 아니었다. 

 

- "그렇게 밀접한 세상을 연구해서 얻는 진짜 보상은 무엇일까요. 작은 경이로움 따위는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지요. 일반론보다 소상한 것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은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세세한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못해요. 아예 그런 훈련이 되어 있질 않죠." 
"하지만 가끔 전 저의 세상이 '너무' 세세해져서 두려워요. 이끼에 관한 책들은 쓰는 데 몇 년씩 걸렸고, 돋보기 하나만 있으면 다 들여다볼 수 있는 페르시아산 극세 모형 공예품이랑 달리 결론도 엄청나게 복잡해요. 제 일은 아무런 명성도 가져다주지 못해요. 수입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가 시간을 얼마나 현명하게 쓰는지 아시겠죠!" 
"호크스 씨 말씀으론 서평이 좋다던데요."
"확실히 그렇긴 했죠. 지구상에서 선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십여 명 남짓한 신사분들의 의견에 따르면요."
"열 명도 넘게! 그렇게나 많습니까? 오래 살면서도 책 한 권 내 본 적이 없고, 가엾은 부모님이 자기 아들을 수치스러운 게으름뱅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지금 얘기하고 계시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당신 작품은 최고예요." 

그가 손사래 치며 칭찬을 마다했다. 

 

- "어쩌면요. 저희 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으실 테고, 저희 아버지 역시 저의 직업 선택에 몹시 분노한 채 땅에 묻히셨습니다. 제 일도 직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죠. 어머니께는 다행스럽게도 동생 제이콥이 있었고, 저 대신 효심 깊은 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 뒤를 이어 대학에 간 동생은 저와 달리 정규 학업을 마쳤어요. 동생은 죽도록 공부하면서 온갖 영예와 상을 휩쓸었는데, 가끔 저는 그 애가 그러다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제는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회중 앞에 섰던 바로 그 프래밍엄 교회 연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동생은 착한 녀석일 뿐만 아니라 성공도 했습니다. 그 녀석은 파이크 가문의 자랑입니다. 지역 주민들도 동생을 존경하죠. 저도 동생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동생의 인생이 부럽진 않아요." 

 

- "어떻게 됐는데요? 주님과 멀어지셨나요?" 앨마가 다소 과감하게 물었다.
"아뇨,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 너무 가까이 다가갔죠." 
앨마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대답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밀어붙였다고 느꼈다. 그리고 손님 역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휴식하며 개똥지빠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 한참 뒤 앨마는 파이크 씨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갑자기 잠이 들 수 있다니! 방금 전까지 깨어 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잠에 빠진 것이다! 몹시 피곤한 긴 여행 끝에, 앨마가 또 온갖 질문을 퍼붓고 선태식물과 변이에 관한 이론까지 늘어 놓았으니, 아무래도 그를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다른 바위 지역으로 걸어가서 한 번 더 이끼 군락을 살폈다. 그녀는 굉장히 유쾌하고 나른한 기분이었다. 파이크 씨라는 사람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앨마는 그가 화이트에이커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 알고 싶어졌다. 어쩌면 여름 내내 머물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다정하면서 꼬치꼬치 캐묻기를 좋아하는 존재와 함께 지내면 얼마나 즐거울까. 남동생이 있으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한 번도 남동생이 있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절실하게 남동생을 바랐고, 앰브로즈 파이크가 남동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이야기해 봐야 했다. 그가 머물고 싶어 한다면 낡은 유제품 창고 하나를 개조해서 그를 위한 화실로 꾸밀 수도 있을 터였다. 

 

- "손으로 일일이 꽃에 광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아마 네 어머니는 무덤에서 돌아누우실 거다." 
"꽃이 아니에요. 잎사귀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한네커도 항복했고, 머지않아 앨마는 가정부가 새 일꾼들을 지휘하며 지하실에 있는 오래된 밀가루 통을 끄집어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던 시절 이후로 앨마의 기억에도 없던 일이었다. 
"청소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약간은 소홀히 하는 편이 오히려 낫거든요. 가령 버려진 헛간과 오두막 근처에서 자라나는 라일락이 가장 멋지잖아요? 아름다움을 제대로 선보이려면 때로 약간씩 무시해 줘야 해요." 앰브로즈가 주의를 주었다.
"바나나 껍질로 난초에 광을 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뇨!" 앨마가 깔깔대며 말했다.
"어휴, 하지만 그건 '난초'잖아요. 걔네들은 다르죠. 난초는 존경심을 담아 다루어야 하는 신성한 유물이에요. 앨마.
"하지만 앰브로즈, 지금의 성전(聖戰)이 끝나고 나면... 이 저택 전체가 신성한 유물로 보일 거라고요!"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앨마'와 '앰브로즈'라고 불렀다.

 

- 그래서 앨마는 광기라는 주제를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기를 바라며 대화를 중단했다.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고자 그녀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편히 독서하기에 마차는 너무 덜컹거렸고,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자꾸 딴데로 흘러갈 뿐이었지만, 앨마는 어쨌거나 독서에 몰두한 체했다. 한참 지난 뒤 앰브로즈가 말했다. "오래전에 내가 왜 하버드를 떠났는지, 아직 얘기 안 했죠."

- "네, 물질 세계를 포기하는 겁니다. 돌담에 둘러싸인 교회를 포기하라고, 심지어 설교조차 포기하라고요! 그래야만 신이 보는 대로 창조의 순간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고요. 앨마도 알겠죠, 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목사가 될 순 없었습니다. 학생도, 아들도, 아니, 살아 있는 인간조차 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뭐가 됐나요?"
"난 불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평범한 존재가 하는 행동을 일체 그만 두었죠. 나는 말을 중단했습니다. 먹는 것도요. 햇빛과 빗물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상상이 안 되겠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정말로' 햇빛과 빗물만으로 살았습니다. 별로 놀랍지도 않더군요. 신앙이 있었거든요. 난 어머니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독실한 아들이었으니까요. 내 형제들이 논리와 이성을 소유했다면, 나는 늘 창조주의 사랑을 내면으로 더 많이 느꼈습니다. 어렸을 때 기도에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어머니가 교회에서 흔들어 깨우며 예배 시간에 잠들었다고벌을 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잔 게 아니었어요. 그저 좀 더 친밀하게 신과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앨마는 또 한 번 대답을 두려워하며 물었다. 
"신을 만났습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은 그렇다고 믿었어요. 최고로 장엄한 생각들을 품게 됐거든요. 나는 나무 안에 감추어진 언어를 읽을 수 있었어요. 난초 안에 살고 있는 천사를 봤습니다. 신기한 식물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하는 새로운 종교를 봤죠. 그 찬가를 들었어요. 지금은 그 음악이 기억나지 않지만 절묘했어요. 또 이 주간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죠. 사람들이 내 생각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런 것 같진 않더군요. 황홀해서 붕 뜬 기분으로 나는 연신 즐거워했습니다. 다시는 다치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된 듯했어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을 잃었죠. 나는... 무결했습니다. 아, 그 이상이었어요. 그런 엄청난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어요! 예컨대 나는 모든 색깔의 이름을 다시 붙였습니다! 새로운 색깔, 감추어진 색깔이 보였거든요. 맑은 청록색의 일종인데, '스위센'이라는 색깔이 있다는 거 알아요? 나방들만 그 색깔을 볼 수 있어요. 그건신의 가장 순수한 분노를 보여 주는 색이죠. 신의 분노가 투명한 파란색이라곤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진짜로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앨마가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음, 나는 봤습니다. 특정한 나무와 특정한 사람 들을 둘러싼 '스위센'의 후광을, 난 봤어요. 또 전혀 빛이 없는 곳에서 나는 자애로운 빛의 왕관을 보았어요. 그 빛에는 이름이 없지만 소리가 있더군요. 나는 그 빛이 보이는 곳마다, 아니 그 빛이 들리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곧 거의 죽을 뻔했죠. 친구인 대니얼 투퍼가 나를 눈밭에서 발견했어요. 겨울이 오지 않았다면 그런 삶을 지속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음식도 먹지 않고요?" 앨마가 물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
"가끔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성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식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단기간이긴 하지만 가끔 나는 신앙의 힘으로 그때 식물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빗물과 햇빛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두 달을 견뎠겠어요? 나는 이사야를 떠올렸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앨마는 어렸을 때 자신도 식물이 되고 싶어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그녀는 아버지한테 인내심과 애정을 더 받기를 바라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실제로 '정말' 자기가 식물이라고 믿은 적은 없었다.

앰브로즈는 계속 이야기했다. "나를 눈밭에서 발견한 뒤로 친구들은 정신 이상이라며 나를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우리가 방금 다녀온 곳과 비슷한 곳이었나요?" 앨마가 물었다.

그는 무한한 슬픔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오, 아뇨. 우리가 방금 다녀온 곳과는 전혀 달랐어요." 

 

- "안타깝게도 안 되더군요. 하지만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혹은 정신을 쏟을 만한 곳이 생긴 거죠. 투퍼의 어머님 덕분에 나는 다시 식사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건을 겪는 동안 신의 성난 '스위센'이 드리웠던 나무들과 사람들을 나는 전부 피해 다녔습니다. 내가 목격한 새로운 종교의 찬가를 갈망했지만 가사가 기억나질 않았어요. 그 뒤로 곧 나는 정글로 떠났습니다. 가족들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죠. 그곳에 가면 다시 광기를 만날 거라고, 고독이 내 체질을 망칠 거라고요."  
"그렇던가요?"
"어쩌면요. 단언하기 어렵네요. 처음 만났을 때 말했듯이 나는 거기서 열병에 시달렸습니다. 열병 때문이 기력이 쇠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고통을 반겼어요. 열에 시달리는 동안 또다시 신의 허락을 거의 목격할 뻔했거든요. 하지만 거의 그랬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나뭇잎과 덩굴에 적힌 신의 칙령과 조약을 볼 수 있었어요. 주변에 늘어진 나뭇가지가 내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물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 어딜 보든 신의 서명이, 선으로 그려진 표식이 보였지만 도저히 읽어 낼 순 없었습니다. 전처럼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지만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나에겐 아무것도 드러내 주지 않더군요. 병이 들었을 때 또 한 번 난초에 숨어 있는 천사를 얼핏 보았지만 그들의 옷자락밖에는 보지 못했어요. 그나마 아주 순수한 빛이 비치고 사방이 고요해야만 볼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죠. 전에 내가 본 것과는 달랐어요. 한번 천사를 보았던 사람은 그들의 옷자락만으론 만족하지 못합니다. 십팔 년이 흘렀지만 나는 한때 내가 목격했던 것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됐어요. 정글 가장 깊은 곳에 홀로 있어도, 열에 달뜬 착각 속에서도 말이에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난 항상 다른 뭔가를 갈망할 겁니다." 
"정확히 뭘 갈망하는 거죠?" 앨마가 물었다. 
"순수함과 영적 교감이요." 

 

- 슬픔과 함께 아름다운 어떤 것을 빼앗긴 듯한 또렷한 공포에 압도당한 채 앨마는 그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앰브로즈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위로를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미친 사람일까?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앰브로즈가 그런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놀라운 비밀이라니!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앨마는 천사를 본 적도, 진정한 신의 분노의 색깔을 목격한 적도, 불 속으로 몸을 던진 적도 없었다. 그녀는 '불구덩이로 내던진다.'라는 말의 의미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한다는 의미일까? '왜' 그런 짓을 할까? 

- 그러나 책 속에서 그녀는 더욱 커져 가는 미스터리와 의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앨마에게 뵈메의 글은 모호하고 주술적인 데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원칙들로 가득했다. 그는 연금술과 결석(結石)에 집착하는 케케묵은 중세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는 귀중한 돌과 금속에 힘과 신성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양배추의 갈라진 틈에서는 신의 십자가를 보았다. 세상 만물에 영험한 힘과 신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자연의 모든 형상이 곧 '베르붐 피아트(verbum fiat)', 즉 신의 말씀, 창조된 발화, 실물로 나타난 경이로움이었다. 그는 장미가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실은 사랑 '그 자체'라고, 현존하도록 만들어진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는 종말론자이면서 동시에 이상향을 꿈꾸었다. 이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이하지만, 인류는 에덴의 경지에 도달해서 모든 인간이 동정이 되어 즐기고 뛰노는 인생을 누리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신의 지혜는 여성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뵈메는 "신의 지혜는 영원한 동정녀이니, 아내가 아니라 정숙함과 순결함으로 흠결 없이 신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녀는무수한 기적의 지혜이다. 그녀 안에서 성령은 천사의 이미지를드러낸다. 그녀는 모든 열매에 몸을 내주지만 열매의 현신은 아니며, 그 안에 담긴 우아함과 고상함이다."라고 적었다. 

 

- 앨마에겐 하나도 들어먹히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주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식음을 전폐하거나 말을 포기하거나 육체의 쾌락을 포기하고 햇빛과 빗물로만 살아가고 싶은 갈망을 확실히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뵈메의 글은 현미경과 이끼와 손에 잡히는 견고함과 명백함을 갈구하게 할 뿐이었다. 야코프 뵈메 같은 사람들은 왜 물질세계로 만족하지못했을까? 현실에서 보고, 만지고,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하지 않은가? 

 

- "진정한 생명은 불에 깃들어 있으며, 하나의 수수께끼는 다른 하나의 수수께끼를 담지하고 있다."라고 뵈메는 적고 있었다. 앨마 역시 수수께끼를 품고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불꽃이 튀지 않았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다. 뵈메의 글은 화이트에이커의 도서관에 있는 다른 장서로 그녀를 인도했다. 식물학과 신성함의 교집합에 대한 또 다른 케케묵은 논문들이었다. 그녀는 회의와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오래된 신학 이론과 낡아서 폐기된 마법사들의 주장을 샅샅이 읽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3세기 독일의 스콜라 철학자이자 자연 과학자, 최초의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다.)를 탐구했다. 맨드레이크(마취제로 사용하는 유독성 식물, 과거에는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와 유니콘 뿔에 대한 사백년 전 성직자들의 글마저 의무감을 가지고 읽었다. 당시 과학은 결점투성이였다.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는 세찬 바람이 밀려들 정도로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과거에 그들은 기묘한 개념을 믿었다. 박쥐는 새이며, 황새는 물속에서 동면하고, 모기는 이슬에서 솟아나고, 거위는 따개비에서 부화하며, 따개비는 나무에서 자라난다는 따위의 믿음이었다. 순전히 역사적인 관점에서야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주장을 존중해야만 하는가? 그 점은 의심스러웠다. 앰브로즈는 왜 중세 학자들에게 매혹되었을까? 분명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은 결국 오류의 길이었다.  

 

- 7월 말 어느 무더운 한밤중에 앨마가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고 콧등에 안경을 걸친 채 17세기에 발간된 <아르보레툼 사크룸(Arboretum sacrum)>(이 책의 저자도 뵈메처럼 성경에서 언급한 모든 식물에 새겨진 신성한 메시지를 읽어 내려고 했다.)을 읽고 있으려니 앰브로즈가 들어왔다. 앨마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다만 앨마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드넓은 방 중앙에 놓인 긴 탁자로 와서 앨마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앨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거나, 그날 밤 아예 잠자리에 든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 앨마는 앞에 놓인 두툼한 책을 덮었다. 손길이 너무 단호했는지 책은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앰브로즈 쪽으로 의자를 돌려놓은 뒤 무릎 위로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나는 자연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래서 당신의 정신 상태가 심히 염려돼요. 낡아서 폐기된 이런 이론들에서 당신이 어떻게 모순과 어리석음을 간과할 수 있는지 이해 못하겠어요. 당신은 하느님이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식물 속에 우리를 더 나은 단계로 이끌어 주는 단서를 감춰 놓은 은혜로운 식물학자라고 짐작하지만, 나는 그 점을 입증하는 증거를 도무지 못 찾겠어요. 이 세상에는 우리를 치유하는 식물만큼 해로운 독초도 많아요. 예컨대 당신의 식물학자 신은 왜 마치목과 쥐똥나무를 만들어서 우리의 말과 소를 죽게 하나요? 거기에 감추어진 섭리는 대체 뭐죠?" 
"우리 주님이 식물학자여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앰브로즈가 물었다.
앨마는 그 질문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수학자랄까요. 물고늘어지고 또 지워 버리니까요.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이론을 세우고 새로운 계산법을 찾아내죠. 과거의 오류를 내다버리고요. 내가 보기엔 이게 더 이성적인 방식이에요."
"하지만 내가 만나 본 수학자들은 딱히 연민을 내보이거나 인생을 풍요롭게 살지 않던걸요." 
"그렇죠. 신이 우리를 더하고 빼고, 나누고 지워 버리는 것처럼 그 사람들의 방식 역시 지난하고 험난할 거예요. 인류가 왜 고통받고, 운명이 왜 그렇게 무작위적인지 보여 줄 수 있을만큼."
"이거 참 우울한 관점인데요! 난 당신이 삶을 그렇게 막막한 걸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대체적으로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움보다는 경이로움을 찾아내거든요." 
"나도 알아요. 그래서 당신을 걱정하는 거예요. 당신은 이상주의자이고, 따라서 실망할 수밖에, 어쩌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당신은 은총과 기적의 복음을 추구하지만 인간 존재의 슬픔은 그런 것과 상관없죠. 당신은 전 우주의 설계가 완벽한 까닭은 바로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윌리엄 페일리 같아요. 인간의 손목 구조에 대한 페일리의주장, 혹시 생각나요? 음식을 채집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는 데 적합하도록 절묘하게 빚어진 손목이 곧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했죠? 하지만 인간의 손목은 이웃을 죽일 수 있는 도끼를 휘두르는 데에도 완벽하거든요. 거기에 어떤 사랑의 증거가 있죠? 덧붙이자면 여기 앉아서 따분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나는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언덕 위의 찬란한 도시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뭐랄까 고약한 훼방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요." 

-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다가 이윽고 앰브로즈가 물었다.
"우리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건가요, 앨마?"

앨마는 대답을 고심했다. "어쩌면요."
"왜 우리가 말다툼을 벌여야 하죠?"
"용서해요. 앰브로즈 난 지쳤어요."
"당신은 매일 밤 이렇게 도서관에 앉아서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대느라 지친 거예요."
"나는 평생 동안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며 살아왔어요. 더 옛날 사람들과도요." 
"하지만 그들의 대답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이젠 나를 공격하잖아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이미 실망한 당신한테 내가 어떻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앨마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앰브로즈는 이제 좀 더 정다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서로 논쟁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만 상상해 봐요, 앨마."

- 앨마도 독심술에 대해 못 들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요즘 들어서 너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가끔 보면 요새 필라델피아의 숙녀들은 모두 영매가 된 것 같았다. 어딜 가든 시간 단위로 이용할 수 있는 '영혼의 매개자'가 발에 차였다. 간혹 그들의 실험이 명망 있는 의학 잡지나 과학 잡지까지 점령하곤 했으므로 앨마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최면술에 관한 기사를 본 적도 있었는데, 암시만으로 최면에 유도된다는 둥 온갖 미신적 주장은 앨마에게 그저 축제 판에서 벌어지는 놀이에 불과했다. 어떤 이들은 그런 탐구를 과학이라고 칭했지만, 앨마에게는 죄다 짜증 나는 오락거리일 뿐이었다. 그것도 어쩌면 위험한 종류의 오락거리. 

- 한편 앰브로즈는 그런 부류의(열의에 넘치고 예민하기 그지없는) 심령론자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들과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우선 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참 유행 중인 신비주의 열풍을 따라잡기에는 극단적인 고립 상태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인간 두개골의 요철에 따라 서른일곱 가지의 능력과 성향과 감정이 나뉜다고 주장하는 골상학 잡지 따위도 구독한 적이 없었다. 영매를 찾아간 적도 없었다. <더 다이얼> 19세기에 창간된 미국의 정치 잡지도 읽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앨마에게 브론슨 앨콧이나 랠프 왈도 에머슨 같은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

- "상상력은 부드러우며 물을 닮았다. 그러나 욕망은 허기처럼 거칠고 건조하다."라고 야코프 뵈메는 주장했다. 
그러나 앨마는 두 가지를 모두 느꼈다. 그녀는 물과 허기를 모두 느꼈다. 상상력과 욕망을 모두 느꼈다. 그러자 공포 비슷한 감정과 광기 어린 쾌감이 뒤섞이며 그녀는 곧 스스로 익히 아는 그 휘몰아치는 쾌락에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은밀한 곳에서 쉴 새 없이 샘솟는 관능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앰브로즈의 손길도 없이 (그냥 손을 잡은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자신의 손길도 없이, 단 일 인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치마를 허리까지 올리거나 몸속에 손을 집어넣을 필요도 없이, 심지어 호흡의 변화조차 없이 앨마는 절정의 순간으로 치달았다. 한순간 그녀는 별도 없는 여름 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처럼 새하얀 섬광을 보았다. 그녀의 감겨 있는 눈꺼풀 뒤에서 세상이 우윳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는 눈먼 황홀경을 느꼈고 곧이어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끔찍이도 수치스러웠다.

- 그녀는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는 무얼 느꼈을까?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맙소사, 그는 무슨 '냄새'를 맡았을까? 그러나 그녀가 반응을 보이거나 미처 몸을 빼내기도 전에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앰브로즈는 여전히 움직이지도, 몸을 뒤채거나 달리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끈질기게 그녀의 발바닥을 간질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그 간지러운 감각은 실제로 하나의 질문이 되었다. 바닥에서 곧장 솟아오른 '발언'이었다. 그녀는 그 질문이 발바닥을 뚫고 들어와서 다리뼈로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어 그 질문은 은밀한 곳의 젖은 길을 따라 헤엄치며 자궁까지 기어 올라왔다. 소리 내어 말한 목소리처럼 그것은 거의 또박또박, 그녀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앰브로즈가 앨마의 내면에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이제는 그 말이 들려왔다. 그러자 그의 질문이 비로소 완벽하게 형태를 이루었다. 
'이런 나를 받아 주겠어요?' 
그녀는 묵묵히 맥박으로 대답했다. '그러겠어요.'
그러자 다른 어떤 것이 또 느껴졌다. 앰브로즈가 그녀의 몸속에 들여놓은 질문은 다른 무언가로 돌변했다. 이제 그것은 '그녀의 질문'이 되었다. 앨마는 앰브로즈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가까스로 아주 급하게 질문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그 질문이 몸속에서 팔로 뻗어 나가도록 했다. 그러고는 잠자코 기다리는 그의 손바닥에 질문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이런 건가요?' 
그가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거의 아플 정도로 앨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단 한 마디 말로 정적을 산산조각냈다. 
"네."

 

-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뒤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앞으로 수년간 앨마는 그런 결정(이해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었던 갑작스러운 결혼)을 어떻게 내렸는지 의아해했지만, 제본실에서 겪은 경험 이후로 며칠 동안 결혼을 불가피한 운명처럼 느꼈다. 앨마에게 그 작은 방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은 전부 다(순수한 상태로 느꼈던 앨마의 오르가슴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에게 생각을 전했던 일까지) 기적이거나 최소한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다가왔다. 앨마는 그날 일어난 일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생각을 들을 수 없다. 앨마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사람은 전류 따위를 전달하거나, 그저 손이 닿는 것만으로 그토록 솔직하고 에로틱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의문의 여지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 "결혼 생활에서 만족이라뇨?" 앨마는 발끈했다. "제가 언제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적이 있나요, 아버지? 제가 뭘 부탁한 적이 있어요? 요구한 적은요? 아내로서 제가 상대에게 어떤 어려움을 안겨 줄 것 같으세요?" 
헨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알 수 없지. 그건 네가 알아봐야 할 일이잖니." 
"앰브로즈와 저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이에요, 아버지. 색다른 부부로 보인다는 점은 알지만 전..."
헨리가 딸의 말을 잘랐다. "절대 자기변명을 하지 마라, 앨마. 나약해 보여. 어쨌든 나도 그 친구가 싫지 않다." 그는 다시 책상 위의 서류로 관심을 돌렸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앨마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더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을 승낙한 듯했다. 최소한 거부당한 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앨마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한 가지 더." 헨리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신부는 첫날밤 치르기 전에 부부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보통 몇가지 조언을 들어야 할 텐데, 내 짐작으론 네가 바로 그렇지 싶다. 남자이자 너의 아버지로서 나는 너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없어.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그 일을 맡았겠지. 한네커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 괜한 수고는 하지 마라. ..."

 

- 앰브로즈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의자에 묶여 있는 굶주린 포로 같았다. 그의 한쪽 손은 흐릿하게 지워졌다. 헝클어진 머리 탓에고통스러운 잠에서 거칠게 흔들어 깨운 사람처럼 보였다. 앨마의 곱슬머리는 비극적이었다. 앨마에게는 전체적으로 지독히도 서글픈 경험이었다. 그러나 앰브로즈는 사진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와, 이건 '명예 훼손'인데요!" 그가 소리쳤다. "자기 모습을 정직하게 본다는 게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지! 그래도 이 사진을 보스턴에 있는 내 가족한테 보낼 거예요. 어머니가 당신 아들을 알아보셨으면 좋겠는데."

- 결혼을 약속한 다른 사람들도 대개 이렇게나 급하게 일을 진행할까? 앨마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구애와 약혼, 결혼식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여성지를 곰곰이 들여다본 적도 없었고, 청초하고 순진한 소녀들을 위해 쓰인 가벼운 연애 소설에 빠져 본 적도 없었다.(분명 성관계에 관한 외설스러운 책들을 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한마디로 앨마는 노련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정도로 유난스럽게 사랑에 대한 앨마의 경험이 부족하지만 않았더라면, 앰브로즈의 구애가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앰브로즈와 서로 알고 지낸 석 달 동안 그들은 한 번도 연애편지와 시, 포옹을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둘 사이의 애정은 확실하고 꾸준했지만 거기에 열정은 없었다. 

- “내 영혼의 보물."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앨마의 손을 잡고 약혼 이후 지난달 내내 매일 밤 그러했듯이 손가락 마디 바로 위쪽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내게 무한한 평화를 가져다주었어요." 
"앰브로즈." 그의 이름과 그의 얼굴로부터 경이로움을 느끼며 앨마가 대꾸했다.
"우리는 자는 동안 영혼의 힘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요.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맞닿은 거리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겠죠. 밤의 고요함 속에서 여기 함께 있으면 우린 마침내 시간과 공간, 자연법칙과 물리 법칙에서 자유로워질 거예요. 꿈속에서 우리 마음대로 세상을 떠돌아다니겠죠. 시간을 거슬러 날아다니며 죽은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동물이나 사물로도 변신할 거예요. 우리의 지성은 사라져 버리고 정신이 놓여날 거예요." 
"고마워요."라고 그녀는 멍하니 말했다. 그런 엉뚱한 말에 대해서 딱히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일종의 구애일까? 보스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관계를 진척시키나? 그녀는 자기 입 냄새가 안 좋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그의 입 냄새는 달콤했다. 앨마는 그가 등불을 꺼 주었으면 했다. 그녀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그가 즉각 손을 뻗어서 등불을 껐다. 어둠은 더 편안하고 좋았다. 앨마는 그를 향해 헤엄쳐 가고 싶었다. 그가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서 입술로 가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잘 자요, 나의 아내."
그는 앨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의 호흡으로 알 수 있었다.) 잠이 들었다.

- 앨마가 신혼 초야에 기대하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두려워했던 모든 경우의 수 가운데 이런 상황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 "어떤 대상을 충분히 사랑하면 그 대상은 결국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게 되어 있어요." 라고 앰브로즈는 앨마에게 말했다.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빌면서 질문했을지도 모르겠다. 앨마는 앰브로즈를 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사랑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비밀도 드러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아에리데스 오도라타’로 거둔 그의 승리를 질투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가 애정을 쏟은 그 식물 자체를 질투했다. 그녀는 일에 집중할 수조차 없는데, 그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앨마는 마차 차고에 있는 그의 존재가 짜증 나기 시작했다. 왜 그는 항상 방해를 할까? 그의 인쇄기는 시끄럽고 뜨거운 잉크 냄새를 풍겼다. 앨마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썩어 가는 느낌이었다. 걸핏하면 성질도 냈다.  

 

- 놀라운 주장이었으므로, 그 주제에 관한 이론과 토론이 열띠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박학다식한 윌리엄 휴웰이 만들어 낸 과학자라는 뜻의 '사이언티스트(scientist)'도 불과 최근에야 생겨난 말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무신론자를 뜻하는 불경한 단어,즉 '에이시스트 (athiest)'와 비슷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그 노골적인 새 용어를 반대했다. 그냥 계속 단순하게 '자연 철학자'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가? 그러나 자연과 철학의 영역 사이에서 이제 구분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자연계 연구가 파죽지세로 나아가면서 성경 속 진실에 대한 도전 역시 너무 빈번해졌다.따라서 식물학자나 지질학자를 겸하던 목사들은 점점 드물어졌다. 과거에는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신의 존재가 드러났지만, 지금은 똑같은 자연의 경이로움 때문에 신이 도전받고있었다. 학자들은 이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 과거의 지반이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오랜 확신은 흔들리고 힘을 잃었으며, 화이트에이커에 홀로 남은 앨마 휘태커마저 자기만의 위험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인구 증가와 질병, 사회 격변, 기근, 파멸에 관한 토머스 맬서스의 이론에 대해서 숙고했다. 존 윌리엄 드레이퍼가 촬영한 놀랍고도 새로운 달 사진에 관해서도 고찰했다. 지구가 언젠가 빙하기를 겪은 적이 있다는 루이 아가시의 이론도 살펴보았다. 하루는 온전히 조립해 놓은 거대한 마스토돈의 화석 뼈를 보려고 샌솜 가에 있는 박물관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오기도 ...   
 

- "너의 자매 프루던스는 조지 호크스를 사랑했어. 더한 것도 이야기해 주지. 조지 호크스도 그 애를 사랑했다. 오늘날까지도 프루던스는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도 아직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내가 장담한다." 
앨마에게는 통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친부모님이 아니라든지, 그녀의 이름이 앨마 휘태커가 아니라든지, 그녀가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듣는 듯, 무언가 엄청나고 단순한 진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왜 프루던스가 조지 호크스를 사랑하겠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 이상의 지적인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 애한테 '친절' 했으니까. 앨마, 네 자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미모가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열여섯 살 때 프루던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남자들이 그 애를 어떻게 쳐다보았는지 기억하니? 늙은 남자, 젊은 남자, 유부남, 일꾼들까지 전부 다 말이다.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남자치고 그 애를 하룻밤 놀잇감으로 삼고 싶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걔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은 늘 그런 식이었지. 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더 나약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싼값에 팔아 버렸다. 하지만 프루던스는 정숙한 아가씨였고 착했어. 걔가 왜 식탁에서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무슨 일에든 의견을 내세우기에 너무 어리석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걔가 왜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니? 진짜 아무것도 못 느껴서겠니? 프루던스가 원했던 건 그저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앨마경매장에 서 있는 사람처럼 평생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넌 모를 거야." 
그 점은 앨마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조지 호크스는 그 애를 친절하게 쳐다봐 준 유일한 남자였다. 물건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서 말이야. 너도 호크스 씨를 잘 알잖니, 앨마. 그런 남자 옆에서 젊은 여자가 얼마나 안전함을 느끼는지 너도 모르진 않겠지?"

물론 그 점을 잘 알았다. 조지 호크스는 앨마 역시 항상 안전하다고 느끼게끔 해주었다. 안전하면서도 인정받는 느낌. 
 
 - "호크스 씨가 왜 화이트에이커에 와서 지냈는지 궁금한 적없니, 앨마? 네 아버지를 만나려고 그렇게 자주 찾아왔을까?"

고맙게도 한네커는 '너를 보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자주 왔다고 생각하니?'라고 덧붙이지 않았지만, 굳이 묻지 않은 그 질문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사람은 프루던스를 사랑했다, 앨마. 나름대로 조용히 그 애한테 구애한 거야. 그뿐만 아니라 프루던스도 그 사람을 사랑했지." 

 

- "한네커의 말이 다 사실이라면 참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다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이제껏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요?"
"뭐하러?" 한네커가 어깨를 으쓱했다.

- "하지만 프루던스는 왜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했을까요? 프루던스는 나를 좋아한 적도 없는데."
"걔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것과 하등의 상관도 없단다. 그 앤 선량한 사람이고, 선량한 원칙에 따라 인생을 사는거야." 
"나를 동정한 걸까요? 그래서 그랬을까?"
"오히려 그 앤 너를 동경했어. 항상 너를 본받으려고 애썼지." 
"말도 안 돼! 절대 그런 적 없어요."

 

- 어머니는 죽었다. 아버지도 죽었다. 제대로 남편 노릇을 했든 안 했든, 남편도 죽었다. 유일한 자매인 프루던스는 앨마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지만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지 호크스의 삶은 완전히 비극이었다. 레타 스노는 형편없이 망가지고 갈가리 찢겨 재앙이 되었다. 이제 앨마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마지막 생존자인 한네커 데 그루트마저 실상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 앨마는 서재에 앉아서 마침내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심신이 건강하고, 노새처럼 강인하며, 예수회 사제만큼이나 많은 교육을 받았고, 세습 귀족만큼이나 부유한 쉰한 살의 여성이었다. 아름답지 않다는 점은 분명했지만 여전히 치아 대부분이 멀쩡했고 신체적으로도 병 하나 잃지 않았다. 불평할 것이 과연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치스러운 환경 속에서 지냈다. 남편이 없음은 물론이고 아이도, 이젠 돌봐야 할 부모도 없었다. 그녀는 능력 있고 지적이고 근면하고 용감했다. (비록 지금은 자신 없지만 항상 그렇다고 믿어 왔다.) 앨마의 상상력은 당대의 가장 과감한 과학 사상과 발명을 흡수했으며, 동시대의 가장 명석한 두뇌들과 바로 자신의 식탁에서 만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이 부러워서 울고 갈 만한 막강한 도서관을 소유했고, 그녀는 그 도서관의 장서들을 몇 차례나 탐독했다. 

 

- 그 모든 배움과 특권으로 앨마는 어떤 인생을 구축했던가? 선태학에 관한 보잘것없는 책 두 권(세상은 도무지 그 책에 열광하지 않았다.)의 저자였고, 현재 세 번째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아버지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해서 한순간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처녀이자 과부이자 고아이자 상속녀이자 노부인이자 완전 바보였다. 
앨마는 스스로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자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희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결혼했던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서 아무것도몰랐다.

 

- 그녀는 항상 스스로를 기품 있고 세속적인 지식을 잘 아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늙은 심술쟁이 공주(현시점에서 따져 보자면 야들야들한 새끼 양의 고기가 아니라 늙고 질긴 양의 고기)에 불과했다. 그 어떤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도 모험해 본 적 없고, 여행은 고사하고 뉴저지 주 트렌턴에 있는 정신병원을 제외하곤 필라델피아를 벗어나 본 적조차 없었다. 

- 그토록 딱한 처지를 제대로 직면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렇지도 않았다. 솔직히 이상스럽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앨마의 호흡이 느려졌다. 나침반은 혼자 돌다가 빠져 버렸다. 그녀는 무릎 위로 양손을 올리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진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그녀는 한 치도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앨마는 아버지와 오래도록 거래한 변호사 사무실로 홀로 걸어간 뒤 그의 책상 앞에서 장장 아홉 시간 동안 서류를 작성하고, 시행 조건을 점검하고, 반대 의견을 무마했다. 변호사는 그녀의 행동을 어느 것 하나 찬성하지 않았다. 앨마는 그의 말에 단 한 마디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축늘어진 턱살이 씰룩거릴 정도로 누렇게 센 머리를 흔들어 댔지만, 앨마의 결심을 조금도 되돌릴 수 없었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임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 앨마는 열대 지방에서 서늘하게 지내려면 흐린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함도 알고 있었다. 비누 거품을 옷감에 먹여서 밤새 말리면 꽤 괜찮은 방수복이 된다는 점도 알았다. 피부에 바로 닿는 곳에는 플란넬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선교사들(최근 신문과 채소 씨앗, 키니네, 손도끼, 유리병)과 원주민들(옥양목, 단추, 거울, 리본) 모두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면 좋다는 것도 알았다. 여행 도중에 망가질까 봐 굉장히 겁났지만 그녀는 가장 가벼운 현미경을 하나 챙겼다. 번쩍이는 신품 항해용 정밀 시계와 작은 여행용 온도계도 챙겨 넣었다. 모든 물건을 트렁크와 나무 상자(말린 이끼로 정성 들여 속을 채운)에 담아서, 마차 차고 바로 밖에 작은 피라미드처럼 쌓아 놓았다. 앨마는 삶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그렇게 적은 꾸러미로 쌓여 있음을 보면서 공포에 찬 전율을 느꼈다. 저토록 적은 물건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도서관 없이 어떻게 ... 

 

-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어가 쓸모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개껍질과 깔끔한 관목 조경수로 정원을 꾸민 작은 집들은 감탄할 만했으며, 공들여 차려입은 여자들의 옷은 눈이 부셨다. 그 지역을 좀 더 탐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모두들 곧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는 멕시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했다. 열병이 배를 휩쓸었다. 아무도 피해 가지 못했다. 의사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쓸모가 없었으므로 앨마는 곧 미리 챙겨 온 귀한 설사약과 구토제를 나눠 주었다. 스스로 간호사 타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약사로서는 꽤 능력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일부는 아예 추종자가 되었다. 

- 별안간 앨마도 병에 걸렸고, 침상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열에 시달리며 그녀는 막연한 꿈과 생생한 공포를 맛보았다. 그녀는 줄곧 스스로를 애무했으며, 발작적인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며 깨어났다. 그녀는 줄곧 앰브로즈의 꿈을 꾸었다.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열병 탓에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자 그에 대한 추억이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무서울 정도로 왜곡된 기억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앰브로즈를 보았지만(어느 날오후 보았던 것처럼 똑같이 벌거벗은 채로) 이번에는 ... 
 

- 남쪽으로 멀리 손 닿지 않는 곳에 얼어붙은 남극 땅이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항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루해진 선원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계속 항해했다. 앨마는 걷는 즐거움과 땅의 냄새가 그리웠다. 주변에 연구할 만한 식물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해조류를 끌어올려 달라고 선원들에게 부탁했다. 해조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서로 구분하는 법은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곧 어떤 해조류는 뿌리가 복잡하고 어떤 해조류는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해조류는 결이 있고 어떤 해조류는 표면이 매끄러웠다. 앨마는 해조류를 끈끈한 점액이나 쓸모없는 시커먼 덩어리로 망치지 않고 연구용으로 보존하는 법에 대해 고심했다. 그 방법을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할 일이 생겨났다. 선원들이 작살 고리를 마른 이끼로 포장해 두었음을 발견한 일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이로써 그녀는 다시 한 번 친숙하고 멋진 연구 대상을 갖게 되었다. 

- 앨마는 선원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땅이 주는 안락함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떨어져 있는 삶을 그들이 어떻게 견뎌 내는지 그녀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까? 바다는 그녀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괴롭히기도 했다.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한 인상을 준 경험은 없었다. 바다는 물질을 정제하는 과정 자체이자 신비로운 걸작인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배는 액체로 된 인광이 다이아몬드처럼 펼쳐진 바다를 지나갔다. 배의 움직임에 따라 기묘한 초록빛과 보랏빛의 입자가 솟아올랐고, 마치 '엘리엇 호'가 거친 바다를 가로질러 반짝거리는 기다란 베일을 끌고 가는 듯 보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어서 앨마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닷물로 뛰어들지 않는지, 황홀한 마법에 이끌려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 잠이 오지 않는 날 밤에는 타히티에서 거뜬히 지낼 수 있도록 발을 단련하기 위해 맨발로 갑판을 걸어 다녔다. 별빛은 고요한 바다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워서 횃불처럼 빛났다. 머리 위에 자리한 하늘은 주변을 둘러싼 바다만큼이나 낯설었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오리온자리와 플레이아데스 성단 같은 별자리도 몇 개 보였지만, 북극성은 사라졌고 큰곰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잘 아는 보석들이 창궁에서 사라져 버린 탓에 사무치도록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보상처럼 하늘에서 새로운 선물이 찾아들었다. 이제는 남십자성과 쌍둥이자리, 폭넓게 펼쳐진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 새로운 별자리에 깜짝 놀란 앨마는 어느 날 밤 테렌스 선장에게 "니힐 아스트라 프라에테르 비디트 에트 운다스.(Nihilastra praeter vidit et undas.)"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호라티우스의 송시 구절이에요. 별과 파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죠."
"아쉽게도 나는 라틴어를 모릅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요." 그가 사과했다. 

- 앨마가 '엘리엇 호' 갑판에서 바라본 타히티의 첫 인상은 구름 없는 짙푸른 하늘로 치솟을 듯 갑작스레 우뚝 서 있는 산봉우리였다. 화창하고 청명한 아침에 막 깨어나 갑판으로 올라온 그녀는 세상을 둘러보았다. 예상도 못 한 풍경이었다. 타히티의 풍경은 앨마의 가슴에서 숨을 앗아 갔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이해서였다. 평생 동안 이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림도 보았지만, 이제까지 여기가 이만큼이나 '높고' 특이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타히티의 산들은 펜실베이니아의 나지막한 구릉과는 전혀 달랐다. 푸르른 신록으로 뒤덮인 거친 능선은 충격적일 정도로 가파르고 뾰족한 데다 어지러울 만큼 높고 눈부신 초록색이었다. 정말이지 그곳은 모든 것들이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변 바로 앞까지도 초록색이 온통 넘쳐 났다. 코코넛 야자수는 바다에서 곧장 자라난 듯한 형국이었다. 

- 불안한 풍경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페루의 중간쯤, 그야말로 동떨어진 외딴 곳에 와 있음을 실감한 그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여기에 섬이 있지? 타히티는 드넓고도 끝없이 광대한 태평양에 불쑥 솟아오른 훼방꾼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다 한가운데서 기묘하게 제멋대로 솟아난 대성당 같다고 할까. 사람들이 타히티를 묘사할 때 항상 그래 왔듯이 앨마는 일종의 낙원을 맞닥뜨리리라고 생각했다. 에덴에 당도한 듯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게 되리라고. 부갱빌(프랑스인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해낸 18세기 해군 지휘관)은 이 섬을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섬이라는 의미로 '라 누벨레 시테레(La nouvellecythère)'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솔직히 앨마가 보인 최초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이토록 화창한 아침에, 이토록 달콤한 기후 속에서 갑작스레 맞닥뜨린 유명한 유토피아로부터 그녀는 위협밖에 느끼지 못했다. 앰브로즈는 이곳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앨마는 여기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어린 사내아이 몇 명이 앨마 주변에 모여들더니 짐 가방에 자갈을 던지는 대범한 놀이를 시작했고, 가끔 그녀의 발치까지 돌이 날아왔다. 급기야 나이 들고 몸집이 큰 여인이 나타나서 인상을 쓰며 쫓아 버렸고, 아이들은 강물로 뛰어들었다. 오후에 접어들자 조그만 낚싯대를 든 남자들이 앨마를 지나쳐 해변으로 내려가더니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파도가 잔잔히 밀려드는 바다에 목까지 담근 채 서서 물고기를 잡았다. 갈증과 배고픔은 이제 못 견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차마 짐을 두고 떠나지 못했다. 
 

- 앨마는 몇 달 전에 이미, 필라델피아를 떠나기 전부터 타히티에서는 자신과 앰브로즈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여행 내내 그녀는 '휘태커 양'으로 행세했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노처녀로 여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로도 그녀는 노처녀였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앰브로즈와 그녀의 결혼을, 어떤 종류로든 결혼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확실히 노처녀처럼 보였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대개의 경우 앨마는 거짓말하기를 싫어했지만,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분명 앰브로즈 파이크의 흔적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만일 사람들이 앰브로즈가 그녀의 남편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선뜻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앰브로즈가 앨마의 부탁대로 아무한테도 결혼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면, 파이크 씨가 아버지의 직원이라는 점 말고 두 사람 관계를 다르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앨마는 유명한 식물 수입가이자 제약업계 거물의 딸로서 그저 여행을 온 자연과학자였다. 

 

 - 앨마는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인상적인 소개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다.(레타 스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빼고.) 웰스 목사는 앨마 휘태커가 필라델피아에서 왜 그토록 길을 떠나와 선교지 한가운데 놓인 나무 상자와 여행 가방 더미에 앉아 있는지 캐묻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앰브로즈파이크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가방 속에 한가득 비밀스럽고 난잡한 그림을 감추어 두었던 남편이 도덕적인 본보기라며 열정적으로 칭송받고 있으리라는 점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웰스 목사님." 가까스로 그녀가 대꾸했다. 

- 놀랍게도 웰스 목사는 그 주제로 이야기를 더 끌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파이크 씨를 제일 소중한 친구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지적인 동료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그 친구 얼굴을 다시 보거나 한 번 더 손을 잡고서 우정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기꺼이 먼 길이라도 만나러 갈 의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내게 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요. 파이크 씨는 본향인 천국으로 불려 갔고 우린 여기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웰스 목사님."이라고 앨마는 또다시 대꾸했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 "그렇군요!” 그가 세 번째로 말했다. "이젠 저희와 함께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가시지요, 휘태커 자매님."
"그러죠." 앨마는 포기하고 동의했다.
그는 앨마를 이끌고 교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가진 귀중품과 전 재산을 남겨 두고 떠나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 예배당의 길이는 육 미터도 채 안 될 것 같았다. 안에는 소박한 나무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회반죽을 칠한 벽은 깨끗했다. 고래기름을 태우는 등잔 네 개가 실내를 어슴푸레하게 비추었다. 세어 보니 신자는 열여덟 명이었고 모두 타히티 현지인들이었다. 여자가 열한 명, 남자가 일곱 명이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무례한 태도가 아니기를 빌었다.) 앨마는 모든 남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앰브로즈의 그림에서 본 그 소년은 없었다.  
 

- 예배는 그걸로 끝이었다.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앨마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십오 분이면 그녀의 소지품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디로' 가져갔을까요? 누가요?" 앨마가 물었다.
"흐음." 웰스 목사는 방금 전까지도 앨마의 짐이 놓여 있던 자리를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쉽게 답을 드리기 어렵겠네요. 아마 아이들이 모두 가져갔을 겁니다. 대개 이런 건 어린 사내 녀석들 짓이죠. 하지만 없어진 건 확실하군요." 
그런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웰스 형제님! 짐을 안전하게 치워 놓아야 하는지 제가 여쭤봤잖아요!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란 말이에요! 어디든 집안에 넣어 두고 안전하게 문을 잠가 둬야 했어요! 왜 그러라고 하시지 않았죠?" 앨마는 낭패감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는 진심으로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래요. 짐을 집 안에 들여놓았더라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전부 다 가져갔을 겁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는 가져갔을 거예요." 

앨마는 현미경과 종이 뭉치, 잉크, 연필, 약품, 유리병들을 생각했다. 옷은 어쩐다? 맙소사, 위험스럽고 입에 담기도 힘든 그림이 가득 들어 있는 앰브로즈의 가방은 어쩌지? 눈물이 날것 같았다. 

 

- 그러고는 재빨리 문법으로 옮겨 갔다. 선교단 정착지의 주민들은 능숙함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영어를 구사했지만(어떤 이들은 상당히 유창했고 어떤 이들은 꽤 독창적이었다.) 항상 언어학에 유달리 뛰어났던 앨마는 최대한 타히티 어로 소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타히티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녀의 귀에 들리는 그들의 언어는 말이라기보다 새소리에 가까웠고, 그 언어를 익히기에는 앨마의 음악성이 부족했다. 앨마는 타히티어가 그리 체계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틴어나 그리스어처럼 엄격한 규칙이 없었다. 마타바이 만 사람들은 유독 나른하고 불량하게 말하면서 매일 같이 쓰는 말을 바꾸었다. 때로 그들은 영어나 프랑스어를 섞어서 상상의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타히티인들은 난해한 말장난을 좋아했는데, 앨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는 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마타바이 만 사람들은 고작 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파페에테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그곳' 사람들은 타라바오나 테아후포 사람들과도 또 다른 언어를 썼다. 똑같은 문장 하나도 섬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오늘 쓴 말의 의미가 어제 쓴 말의 의미와 달라지기도 했다. 앨마는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이 신기한 땅의 특징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 첫 주에는 종이 일부와 페티코트, 약병 하나, 수건, 노끈 뭉치, 머리빗을 되찾았다. 충분히 오래 기다리면 다 돌려받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고 어떤 물건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치맛단에 동전을 촘촘히 꿰매 넣었던 또 다른 여행복 한 벌은 놀랍게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여벌의 보닛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여행복이 돌아온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도 일부는 돌아왔지만 많지는 않았다. 구급약상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으나 식물 표본 보관용 유리병들 여러 개는 문가에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신발 한 짝이 사라졌다. 그것도 한 짝만! 누가 신발을 한 짝만 가져가서 뭘 하려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안 됐지만, 동시에 상당히 쓸모 있는 수채화 물감 세트는 돌아왔다. 다른 날에는 소중한 현미경 본체를 돌려받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 접안대를 대신 가져가 버린 뒤였다. 집안으로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 앨마의 과거 흔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루하루 찾은 것과 잃어버린 것을 받아들이고 경이를 느끼고, 또다시 찾고 잃어버리기를 반복하는 것밖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그러나 앰브로즈의 가방은 두 번 다시 사라지지 않았다. 문 앞에 가방이 다시 나타난 날 아침, 곧장 그녀는 '파레' 안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폴리네시아의 미노타우르스가 지키기라도 하는 듯 손댄 흔적조차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그 소년을 그린 그림은 한 장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타바이 만에서는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은데, 왜 그 가방과 내용물만은 그토록 존중받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누구에게 '왜 이 물건은 손을 대지도, 그림을 훔쳐가지도 않나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 안에 든 것이 어떤 그림인지, 그 가방이 앨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들은 드디어 하얗게 바랜 묘석 군데군데에 십자가가 새겨진 묘지에 당도했다. 웰스 목사는 곧장 작은 묘비로 깔끔하게 표시된 앰브로즈의 무덤으로 앨마를 데려갔다. 마타바이 만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선명한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자리였다. 앨마는 실제로 무덤을 보면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했지만, 계속 차분한 채였고 오히려 그와 더욱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는 앰브로즈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앨마가 이끼를 연구하는 동안, 경이와 신비에 대해 떠들면서 풀밭에 길고 멋진 다리를 뻗고 누워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곳보다 필라델피아에, 그녀의 기억 속에 더 많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발밑에서 그의 뼈가 썩어 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앰브로즈는 땅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공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도 거의 땅에 붙어 있지 않았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땅속에 갇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여기에는 관을 짤 만한 목재가 없어서, 이곳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듯이 토속 천으로 파이크 씨를 감싼 뒤 낡은 카누 선체에 담아서 매장했습니다. 제대로 된 연장이 없으니 여기서 널빤지를 만들기란 워낙 어려운 작업이고, 또 원주민들은 좋은 목재를 구하면 그걸 무덤에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낡은 카누를 대신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파이크 씨의 기독교 신앙을 깊이 존중해 주었어요. 자리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도록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었죠, 모든 기독교 교회에서 하듯이 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들은그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기를 빕니다. 그는 최고의 인간이었어요." 
"그 사람, 여기서 지낼 때 행복해 보이던가요. 웰스 형제님?"
"결국에는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그 친구도 섬에서 즐길 거리를 많이 찾았습니다. 난초가 좀 더 많이 자라기를 바랐음은 확실해요! 말씀드렸다시피 자연사를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타히티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어요." 
"파이크 씨가 형제님을 괴롭힌 적은 없나요?" 앨마가 과감하게 한 발 더 나아갔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섬에 옵니다. 여기 해변으로 떠밀려 온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네가 어떤 데 왔는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고, 아내가 가끔 얘기했어요! 어떤 사람은 완벽한 신사인 듯 보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본국에서 범죄자였더군요. 반면에 유럽에서는 완벽한 신사로 지내다가 범죄자처럼 살아 보려고 이곳에 온 사람들도 있지요! 다른 인간의 마음이 어떤지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앨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1810년, 그는 런던의 승인을 먼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타히티어로 번역했다. "성경 전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제 생각에 타히티인들이 좋아할 것 같은 부분만 골라서 번역했지요. 휘태커 자매님에게 친숙한 성경보다는 훨씬 짧습니다. 예컨대 사탄이 언급된 부분은 모두 빼 버렸습니다. 타히티인들은 어둠의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존경심과 매력을 더 느낄 것 같아서 사탄을 지나치게 거론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요. 갓 결혼한 여인이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은 뒤 첫 아이를 아들로 달라고 사탄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어요. 제가 기도의 방향을 고쳐 주려고 하니까, 그 여인은 '하지만 전 모든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는 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더는 사탄을 논하지 않기로 결정한 겁니다. 사람은 융통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융통성을 발휘해야 해요!"

- 런던 선교회에서도 결국 그 같은 융통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진노한 나머지 웰스 부부에게 즉각 설교를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세상 반대편에 있는 런던 선교회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겠는가? 한편 웰스 목사는 이미 설교를 중단한 '뒤'였고, 아직 자신의 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누 자매에게 설교를 맡겼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했고, 뛰어난 언변으로 그를 설파했다. 그 소식은 런던 교단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공포감이 타히티인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했고, 포마레 왕은 첫 개종자가 되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처음 한 행동은 연회를 준비하여, 먼저 옛 토속 신들에게 음식을 바치는 의식 없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왕이 진노한 신들에게 벌받아 고꾸라져 죽으리라고 굳게 믿은 군중이 겁에 질린 채 몰려들었다. 그는 고꾸라져 죽지 않았다. 
그 뒤로 모두들 개종에 나섰다. 온갖 모욕과 떼죽음에 시달린 타히티는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 "여기서는 족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족보를 30대 조상까지 암송할 수 있는 타히티인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가계도 하고 다를 게 없어요. 그 족보에 들어가는 것은 크나큰 영예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제게는 이 섬에서 함께 살아갈 타히티인 아들들이 있고, 저 같은 늙은이에게는 그게 위안이 된답니다." 
"하지만 함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앨마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라보라 섬이 얼마나 먼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형제님을 도울 수도 없고 필요할 때 돌봐드리지도 못해요." 
"물론 사실이지만 그저 그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만 해도 위안이 됩니다. 제가 꽤나 서글픈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의도한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제게 부여된 소명을 떠날 수 없어요. 여기서 제가 하는 일은 심부름이 아니에요. 나중에 은퇴해서 편히 노망이나 부리며 살아도 되는 그런 일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바람과 슬픔에 맞서는 뗏목처럼,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작은 교회를 유지하는 겁니다. 제 뗏목에 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이죠. 그 누구도 뗏목에 타라고 강요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 제가 뗏목을 버리겠습니까? 선교사 한 사람 몫을 하기 전에 벌써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된 거 아니냐며, 제 착한 아내도 제게 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사람 말이 맞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누구 한 명이라도 제대로 개종 ... "

- 그러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았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히로 패거리도, 로저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기미조차 없었다. 요란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는 집 밖으로 나섰다.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고 후텁지근한 밤, 마타바이 만이 거울처럼 잔잔해져 있었다. 쏟아질 듯 하늘을 뒤덮은 별들이 고스란히 수면에 반사되어, 이제 하늘은 두 개가 되어 있었다. 하나는 위에, 하나는 아래에. 정적과 순도 높은 풍경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해변에서는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 이곳에서 지내며 앰브로즈도 저런 광경을 보았을까? 하룻밤에 두 개의 하늘을? 이런 두려움과 경이로움, 고독과 존재감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순간을 그도 느껴 보았을까? 방금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깨운 사람은 바로 그였을까? 앰브로즈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자 애썼지만 자신이 없었다. 어느새 앰브로즈의 목소리를 들어도 더는 알지 못하게 된 건가? 
앨마를 깨우며 '들어 봐요.'라고 부추기는 것은 참으로 앰브로즈다운 짓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만약에 죽은 누군가가 산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려 든다면 그건 아마도 앰브로즈 정도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데다 기적을 바라는 그 고결한 환상에 의거해서. 그는 기적 따위를 별로 믿지 않는 앨마에게도 거의 절반쯤 기적을 믿게 한 적이 있었다. 제본실에 있던 밤, 말없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발바닥과 손바닥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자기들이 마법을 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 소년은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쯤 앨마가 그를 찾아냈거나 막연하게라도 누군가 그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앰브로즈가 상상해 낸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상상 이상으로 더 서글퍼졌다. 그 소년은 불안정한 정신을 지닌 외로운 남자가 만들어 낸 허구였다. 앰브로즈는 너무도 친구가 그리워서 스스로 하나를 만들어 냈다. 상상의 친구, 아름다운 유령 연인을 통해 그는 항상 갈망했던 영혼의 결혼을 찾아냈다. 앰브로즈의 정신은 가장 좋을 때에라도 전혀 온전하지 못했다! 그는 제일 친한 친구의 손에 정신 병원에 갇힌적도 있었으며, 식물에 찍힌 신의 지문을 볼 수 있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앰브로즈는 난초에서 천사를 보았고, 한때는 자신이 천사라고 확신하던 인물이었다. 생각해 봐! 앨마는 외로운 남자의 나약하고 정신 나간 상상력이 날조해 낸 유령을 찾아서 세상을 반 바퀴나 돌아왔다. 

 

- 그저 하나의 가설을 두고 그녀가 쓸데없이 조사를 한답시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사연을 좀 더 비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좀 더 사악한 진실이 있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앰브로즈를 그리워하는 대신 증오할 수있도록, 앰브로즈에게 남색과 타락이라는 혐오스러운 짓거리를 저지른 혐의가 있기를 바랐을 터다. 어쩌면 그녀는 이곳 타히티에서 그 소년 하나를 찾으려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소년들'을, 앰브로즈가 차례로 범하고 파멸시킨 미소년 집단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다. 진실은 단순했다. 앨마는 불온전한 정신을 소유한 순진한 청년과 결혼할 만큼 멍청하고 성욕에 눈이 어두웠다. 그 청년이 자신을 실망시키자 그녀는 분노에 사로잡혀 잔인하게 그를 남태평양으로 추방했고, 그곳에서 그는 정직하고 무능력한 옛날 선교단이 운영하는 (그것을 운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가망 없는 작은 정착지에 은둔한 채 갈 곳 없는 환상 속을 떠다니다가 외롭게 죽었다. 
 

- '내일 아침'의 공연은 족히 한 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노래 부르게 했고, 기도하게 했고, 새벽에 진격할 준비라도 시키는 듯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걸 경멸할 텐데, 앨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베아트릭스 휘태커는 열띤 부흥회에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광분한 사람들은 예절과 이성을 잊을 위험이 크다고 믿었고, 그러면 문명인으로서의 지위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어쨌든 '내일 아침'의 떠들썩한 독백은 이제껏 웰스 목사의 교회에서 들어 본 설교와 완전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실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루터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필라델피아 목사와도 달랐고, 아주 간단한 말로 단순하게 설교하는 마누 자매와도 달랐다. 그것은 웅변이었다. 전쟁의 북소리였다. 크테시폰을 방어하는 데모스테네스였다. 아테네의 죽음을 애도하는 페리클레스였다. 카틸리나를 꾸짖는 키케로였다. 
 
- 앨마가 내일 아침의 곁에 다가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날 밤에는 굉장한 축하연이 벌어졌다. 왕족을 접대하는 듯한 잔치였고, 분명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해변에 모인 수백 명의 타히티인들은 구운 돼지고기와 생선, 빵나무 열매, 칡 푸딩과 얌, 무수히 많은 코코넛을 먹어치웠다. 군데군데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 물론 한때 타히티를 유명하게 했던 외설스럽기 그지없는 춤은 아니었고, 그들이 '후라(hura)'라고 부르는 그나마 제일 덜 민망한 전통 춤이었다. 다른 선교단 정착지에서는 그런 춤마저 용납되지 않겠지만, 웰스 목사는 가끔 허용하고 있음을 앨마도 알고 있었다. ("그게 왜 해가 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언젠가 그는 앨마에게 말했고, 앨마는 종종 되풀이되는 그 한마디가 웰스 목사를 설명해 주는 완벽한 신조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앨마는 이제껏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그 광경에 사로잡혔다. 젊은 여성들은 재스민과 치자꽃을 세 줄로 엮어서 머리를 장식하고 목에도 꽃목걸이를 늘어뜨렸다. 음악은 느릿하고 선율의 강약은 확연했다. 얼굴에 수두 자국이 있는 아가씨들도 더러 있었지만 모닥불 빛에 비친 그들은 전부 똑같이 아름다웠다. 선교단이 전해 준 긴소매 통짜 원피스를 입었음에도 여자들의 팔다리와 골반 동작은 은근 ... 

 

- 앨마는 그 모든 광경에 매혹된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웰스 목사를 주시했다. 그의 곁에는 흠잡을 데 없는 영국 신사처럼 완벽한 자세로 내일 아침이 앉아 있었다. 저녁 내내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의 코에 코를 부비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세련되고 너그러운 태도로 모든 이들을 맞았다. 결단코 평생 동안 그보다 아름다운 인간을 본 적이 없음을 앨마도 인정해야 했다. 물론 타히티는 어디서나 신체적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는 동네이므로, 한동안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이곳 남자들은 아름다웠고 여자들은 더 아름다웠고 아이들은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타히티인들과 비교해 봤을 때, 팔다리만 삐죽하게 길고 구부정하게 등이 굽은 대부분의 창백한 유럽인들은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외국인들이 수천 번쯤 반복해 온 이야기였다. 그랬다. 이곳에서는 아름다움이 지천이었고 앨마 역시 숱하게 보아 왔지만, 내일 아침은 그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아름다웠다. 

 

- 그의 피부는 짙고 광택이 흘렀으며 미소는 서서히 떠오르는 달 같았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자애로운 분위기와 함께 그냥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를 빤히 쳐다보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잘생긴 외모만이 아니고 눈빛으로도 관심을 부르는 남자였다. 마치 아킬레스의 현신인 듯 정말이지 위풍당당한 몸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장에서 누구든 앞다투어 따를만한 인물이었다. 웰스 목사는 과거 남태평양 섬 주민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앨마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승리자들은 적들의 사상자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피부색이 짙은 시체를 골라냈다. 거구의 시체를 찾아내면 시신을 갈라서 뼈를 도려낸 뒤 그 뼈로 낚싯바늘과 끝, 무기를 만들었다. 몸집이 제일 큰 남자의 뼈에는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으므로, 그 뼈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지니면 무적의 기운이 전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아침의 경우, 일단 먼저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의 뼈로 무기고를 다 채울 만한 무기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잔인한 생각마저 들었다. 

 

- 앨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그토록 가까이서 그의 얼굴(지워지지 않는 얼굴, 그다지도 오래 그녀를 괴롭히고 매혹시켰던 얼굴, 그녀를 지구 반대편에서 이곳으로 데려온 얼굴, 상상 속에서 고집스레 조목조목 뜯어보던 바로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맥이 빠져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얼굴은 앨마에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데 반해, 그는 '그녀'를 보고도 그녀만큼 충격받지 않았다. 앨마는 그를 그렇게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는 앨마에 대해 전혀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대체 그가 왜 알아야 한단 말인가?

- 그는 차분하게 앨마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상할 정도로 너무 긴 속눈썹이었다. 쓸데없이 풍성한 속눈썹은 과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거의 적대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앨마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저런 속눈썹이 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나서 기쁘군요." 그녀가 말했다. 
내일 아침은 정치인처럼 고상한 말투로, 기쁨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그가 손을 놓아주자 앨마는 자리를 떠났고, 내일 아침은 다시 웰스 목사에게, 행복하고 요정같이 체구가 작은 백인 아버지에게 관심을 돌렸다.

- 앨마는 좀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면밀히 그를 주시하고 근처를 배회하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했다. 내일 아침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점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사실 어찌나 사랑을 받던지 버럭 화가 날 정도였다.  

-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앨마가 물었다.

"물론이죠, 휘태커 자매님." 그가 아주 쉽게 앨마의 이름을기억해 내며 응답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그녀에게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좀 더 조용한 장소가 있을까요? 상의할 게 있는데,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어서요."
그는 편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 마타바이 만에서 그런은밀한 곳을 찾아내셨다면 경의를 표해 드리겠습니다.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든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그럼 좋아요."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혹시 누군가 엿듣지나 않을지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과 나는 생각보다 서로의 운명에 좀 더 가까이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저 휘태커 자매일 뿐이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파이크 부인으로 살았다는 점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앨마."
오랜 시간처럼 느껴지는 동안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럼요." 그가 대꾸했다.
또다시 긴 침묵.

 

- "나도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이윽고 앨마가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저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대답을 재촉받자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은 내 남편을 잘 알죠."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을 그리워하죠."
그 대답에 앨마는 충격받았지만, 반박이나 부인보다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이 대화를 예상하며, 앨마는 만약 내일 아침이 앰브로즈를 비도덕적인 거짓말쟁이로 비난하거나 그에 대해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체한다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부하거나 외면할 의도가 없는 듯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여유로운 자신감 이외의 기미를 찾아보았으나 이상한 낌새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 "당신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군요."
"그리고 언제까지고 그리워하겠지요. 앰브로즈 파이크는최상의 인간이었으니까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앨마는 한 방 먹은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초조해졌다.
"그게 진실이니까요."
"그를 사랑했나요, 타마토아 마레?" 혹시 그의 평정심이 깨지는지 또다시 얼굴을 살피며 그녀가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서 보았듯 앨마도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본명을 듣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분을 만난 사람은 다 그분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사람을 '특별하게' 사랑했지 않나요?"
내일 아침은 양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한가로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온 세상을 둘러보았다. 한참 뒤 그가 다시 앨마에게 시선을 향했다. 둘의 키는 거의 비슷했다. 앨마의 어깨 역시 그에 비해 그다지 좁지 않았다. 
"궁금하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대답 대신 말했다. 앨마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느꼈다. 이젠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야 했다.
 

-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당신이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나에 대해서 좀 털어 놓아야겠군요. 나는 타고난 성격상, 언제나 미덕이나 은총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나는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려고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왔지만 지금까지 소득이 없었습니다. 앰브로즈에 대해서 알아낸 얼마 안 되는 사실은 더 큰 혼란을 주었을 뿐이에요. 우리 결혼은 평범한 결혼도 아니었고 기간이 길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편에게 느끼는 사랑과 염려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보호하느라 진실을 덮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 목표는 당신을 공격하거나 당신을 적으로 삼으려는 게 아님을 이해해 주세요. 혹시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비밀이 있더라도 나한테는 털어놓아야 합니다. 내겐 당신이 작고한 내 남편에 대해서 비밀을 품고 있다고 짐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나는 남편이 그린 당신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은 당신과 앰브로즈의 관계에대해서 내가 진실을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홀로 남은 부인의 간청이라 여기며, 당신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내일 아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하루 저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저녁 늦게까지 걸릴 텐데요?" 그가 물었다.
앨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그가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앨마는 발끈했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챈 그가 해명에 나섰다. "혹시 먼 거리의 등산을 감당하실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여쭈었습니다. 자연 과학자이시니 건강하게 단련되셨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쭤봐야 했습니다. 무언가 보여 드리고 싶지만, 무리가 되어선 안 되죠. 가파른 산악 지형을 올라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럴 겁니다." 앨마는 또 한 번 짜증을 느끼며 대꾸했다. "지난 일 년간 나는 이 섬 전체를 돌아다녔습니다. 타히티에서 보아야 할 곳은 전부 돌아보았죠." 
"다 보진 못하셨을 겁니다. 앨마 전부는 아닐 거예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일 아침이 반박했다.

-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두 사람은 출발했다. 내일 아침은 둘의 여행을 위해 카누를 준비했다. 웰스 목사가 산호 정원을 둘러보러 갈 때 이용하는 작고 위험해 보이는 카누가 아니라,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훌륭한 카누였다. 
"타히티-이티에 갈 겁니다. 육지로 가려면 며칠 걸리겠지만, 해안선을 따라가면 대여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배를 타도 괜찮으시겠어요?" 
앨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배려하는 마음으로 물었는지 깔보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마실 물을 담은 대나무 통과 점심으로 먹을 '포이' 약간을 네모난 옥양목에 싸서 허리띠에 묶었다. 이미 섬에서 최악의 나날을 견뎌 내느라 엄청나게 낡아 버린 드레스 차림이었다. 내일 아침은 타히티에서 일 년을 보낸 뒤 농장 일꾼만큼이나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앨마의 맨발을 흘끔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주의 깊게 보았음을 앨마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맨발이었다. 하지만 발목 위로는 완벽한 유럽 신사였다. 평소처럼 하얀 셔츠에 깨끗한 양복을 입었지만, 재킷은 벗어서 얌전히 접더니 ... 

- 앨마는 자식들을 모두 잃은 여인과, 어머니들을 모두 잃은 소년 사이의 각별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좋아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 충격받았다. 충분히 절실한 말 같지가 않았다. 이어 앨마는 마누 자매의 또 다른 신체적 특이점을 떠올렸다. "손가락은 어떻게 된 거죠? 손가락 끝마디가 없던데?" 그녀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그래서 전 정착지 마을이 있는 마타바이 만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몇 주간 저는 선교단 교회를 관찰했습니다. 소박한 삶이었지만 섬의 다른 곳보다 더 나은 것들을 누리고 있더군요. 단번에 돼지를 죽일 수 있는 날카로운 칼도 있고, 손쉽게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는 도끼도 있었어요. 제 눈에는 그들이 사는 오두막도 호화로웠죠. 웰스 목사는 너무 하얘서 유령처럼 보였지만 악령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유령들의 언어를 썼지만 우리 말도 좀 할 줄 아셨어요.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흥을 주는 그의 세례식을 구경했습니다. 에티니 자매님은 벌써 웰스 부인과 함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드나드는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저는 창문 밖에 누워 수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저도 완전히 교육받지 않은 아이는 아니었어요. 물고기 이름을 150개나 알고 있고 모래 위에 별자리 지도를 그릴 수도 있지만, 물론 유럽식으로 교육받은 건 아니었죠. 어떤 아이들은 수업용으로 작은 칠판을 갖고 있었습니다. 검은색 용암 조각 표면에 모래로 광을 내서, 저도 직접 칠판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산에서 나는 플랜테인 진액으로 칠판을 더 검게 염색한 다음, 그 위에다 하얀색 산호로 선을 그렸죠. 거의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지워지진 않더라고요!" 그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 멋진 도서관이 있었다죠? 게다가 앰브로즈 말로는 꼬마일 때부터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다던데요?" 
앨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앰브로즈는 그녀의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그 사실이 떨리도록 기뻤지만(그는 앨마를 잊지 않았다!) 찜찜함도 느껴졌다. 내일 아침은 그녀에 대해 그 밖에 또 무엇을 알고 있을까? 앨마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는 분명 훨씬 많은 듯했다. 


- "저도 언젠가는 도서관을 보는 게 꿈이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도 보고 싶고요. 어쨌든 어느 날 저를 지켜보던 웰스 목사님이 다가왔습니다. 친절한 분이었어요. 앨마도 만나 봤으니 그분이 얼마나 친절했을지 상상하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분은 저에게 임무를 하나 주셨어요. 파페에테에 있는 선교회에 전할 소식이 있다더군요. 목사님은 저더러 당신 친구에게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죠. 전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어요. 저는 '메시지가 뭔데요?'라고 물었죠. 그분은 저에게 뭔가 적힌 칠판을 건네면서, 타히티어로 '이게 메시지란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의심스러웠지만 저는 달려갔습니다. 몇 시간 뒤 저는 부두 옆 교회에서 다른 선교사를 찾아냈죠. 그분은 타히티어를 전혀 못 했습니다. 메시지가 뭔지도 모르고,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에게 칠판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칠판을 보더니 교회 안으로 들어갔어요. 밖으로 나온 그는 저에게 작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그때가 처음으로 종이라는 물건을 맞닥뜨린 순간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얇고 하얀 '타파' 옷감이라고 생각했어요.대체 어떤 종류의 옷감으로 그렇게 작은 조각을 만들 수 있는지는 몰랐겠지만 말이에요. 그저 꿰매서 옷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죠. 저는 십 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부리나케 달려 마타바이 만으로 돌아갔고, 웰스 목사님에게 종이를 전달했더니 기뻐하면서 그게 바로 당신의 메시지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를 빌리고 싶다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저는 타히티 아이였고, 그 말은 곧 마법과 기적을 안다는 의미였지만 도무지 그 마법의 속임수는 이해가 안 되더군요. 어쨌든 저는 웰스 목사님이 칠판으로 다른 선교사에게 '무언가를 말했다.'라고 여겼습니다. 칠판에 목사님을 대신해 말을 전하도록 명령을 내려서 그분의 바람이 이루어진 게 틀림없었어요! 저도 그 마법을 알고 싶었죠! 저는 손수 흉내 내서 만든 석판에 명령을 속삭인 다음 산호로 줄 몇 개를 그렸습니다. 제가 내린 명령은 '죽은 우리 형을 되살려 내라.'라는 것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어머니를 찾지 않았는지 의아하지만, 당시에는 형을 더 그리워했던 것같아요. 어쩌면 형이 보호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죠. 나보다 훨씬 용감한 형을 항상 우러러 봤거든요. 마법을 부리겠다는 저의 시도는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고, 놀랄 일도 아니었죠. 하지만 제 행동을 본 웰스 목사님은 곁에 앉아서 말을 걸었고, 그것으로 저의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뭘 가르쳐 주시던가요?" 앨마가 물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두 번째로는 영어를, 마지막으로는 읽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참 뜸을 들인 뒤 그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훌륭한 학생이었어요. 당신도 훌륭한 학생이었다죠?"
"맞아요, 언제나."
 
- "그 사람은 제 생각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래요. 그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앨마가 말했다.

"그 사람은 저 역시 생각에 귀 기울이기를 원했지만 제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네. 나도 이해해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사람은 악을, 악이 몰려다니는 길을 볼 수 있었어요. 사악한 색깔이 뭉쳐 있다는 식으로 악을 설명해 주더군요. 그 사람은 파멸할 운명을 볼 수 있었어요. 선량함도 볼 수 있었고요.특정한 사람들 주변에는 선량함이 소용돌이친답니다." 
"알아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앨마, 그 사람은 우리 형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어느 밤에는 별빛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날 하룻밤뿐이었죠.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자 그가 슬퍼했습니다. 그사람은 우리가 영혼을 합해서 함께 들어 본다면 메시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네."


- "앨마,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지상에 아무도 없어서 외로워했습니다. 그는 끝내 집을 찾을 수 없었죠."
앨마는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수치심과 죄책감과 회한이 가슴을 조여 왔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눈에 갖다댔다. 결코 울지 않겠노라고 모든 의지를 전부 발휘해야 했다.그녀가 주먹을 떼고 눈을 뜨자 내일 아침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중단해야 할지, 신호를 기다리듯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앨마가 바라는 것은 그가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그 사람은 당신과 함께 뭘 하고 싶어 했나요?" 앨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벗을 원했어요. 쌍둥이를 원했어요. 우리가 똑같아지기를 원했죠. 당신도 알겠지만 그 사람은 저를 오해했습니다.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저보다 저를 더 높이 평가했어요. "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도 오해를 했죠." 앨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됐을지 당신도 알겠군요."
"당신은 그와 함께 뭘 하고 싶어 했어요?"
"저는 그와 관계하기를 바랐습니다." 내일 아침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자책하는 듯 움찔했다.
"나도 그랬어요."
"그럼 우린 똑같은 사람들이네요."라고 내일 아침은 말했지만 그런 생각이 그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 듯했다. 앨마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 "그래서 그와 관계를 했나요?"
내일 아침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 사람이 저 역시 순수한 인간이라고 믿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는 저를 최초의 인간이자 새로운 부류의 아담이라고 여긴 것 같았고, 저는 그가 그렇게 오해하도록 그냥 놓아두었어요. 저의 모습을 그리는 것도 허락했죠. 아니, 허영에 가득 차서 나를 그리라며 제 쪽에서 그를 '부추겼습니다'. 난초를 그리듯이 떳떳하게 벌거벗은 모습의 나를 그리라고 제안한 사람은 저였어요. 신의 눈으로볼 때 벌거벗은 남자와 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제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었죠."

"그래서 그 사람과 관계를 했나요?" 앨마는 좀 더 직접적인 대답을 예상했으므로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며 되풀이해서 물었다. 

- 앨마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묻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을 테고, 그러면 남은 평생 그 질문을 곱씹으며 괴로워하게 되리라. 그녀는 다시 용기를 그러모아서 물었다. "앰브로즈는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곧장 그가 대답하지 않자 앨마가 덧붙였다. "웰스 목사님께는 감염으로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마지막에는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진짜 사인은 뭐죠?"
"말씀드리기 유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슬픔 때문에 죽었어요."
“무슨 말이에요, 슬픔이라니? 어떻게요?" 앨마가 다그쳤다. "얘기해 주어야 해요. 난 환담이나 나누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도 아니고, 어떤 이야기를 듣든지 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말해줘요, 어떻게 된 일이죠?" 
내일 아침은 한숨을 쉬었다. "앰브로즈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꽤 심하게 자해를 했습니다. 이곳 여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상어 이빨로 머리에 자해를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하지만 그들은 타히티인들이고, 그건 타히티의 관습입니다. 이곳 여인들은 그 끔찍한 행위를 안전하게 해내는 법을 알고 있죠. 그들은 정확히 얼마나 깊게 자신을 베어야 하는지, 그래서 심각한 해를 입히지 않고서 피로 슬픔을 배출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압니다."

 -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저에겐 그 짐을 지고 갈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제가 짊어지게 해 주세요." 내일 아침이 말했다.
다시 목소리를 되찾은 앨마가 말했다. "앰브로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군요. 그런데도 웰스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제대로 기독교식 매장을 해 주셨고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앰브로즈는 기독교인의 본보기였으니까요. 제 아버지로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특별한 자비심과 관대함의 소유자이시죠."
앨마는 천천히 이야기의 조각을 좀 더 맞추며 물었다. "아버님은 제가 누군지 아실까요?"
"아실 거라고 짐작합니다. 선량한 제 아버지는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부 아시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몹시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절대 캐묻지도 않으시고 참견도 않으시고..."
"놀라시면 안 되죠. 제 아버지는 친절함의 화신이시니까요."
또다시 긴 침묵. 그러다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당신에 대해 다 안다는 의미는 아니죠? 그분이 당신과 내 남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아실까요?"라고 앨마가 물었다. 
"역시 그러리라고 짐작해야 옳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은 계속 칭찬만..."
앨마는 생각을 마무리할 수 없었고, 내일 아침도 굳이 대꾸하려 들지 않았다. 앨마는 한참 동안 놀라움에서 비롯한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연민과 용서에 관한 프랜시스 웰스 목사의 아량은 틀림없이 논리나 언어를 적용할 수 없는 비범한 경지였다. 

- 그럼에도 결국 또 한 가지 끔찍한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고 약간은 미치지 않았나 싶은 질문이었지만, 역시나 앨마는 꼭 알아야 했다. 
"앰브로즈에게 강제로 완력을 행사했나요? 그를 다치게 했어요?" 앨마가 물었다.
내일 아침은 은연중 비난이 담긴 그 질문을 언짢아하지 않았지만 돌연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가 서글프게 말했다. "오, 앨마.정복자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저는 강제로 완력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단 제가 결정을 내리면 다른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죠. 모르겠어요? 제가 웰스 목사님에게 저를 아들로 입양해 달라고, 본인의 혈육인 가족보다 저를 더 사랑해 달라고 강요했던가요? 라이아테아 섬 주민들에게 여호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던가요? 당신은 지적인 여성입니다, 앨마.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 앨마는 주먹으로 다시 눈을 눌렀다. 눈물이 나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지만, 이제야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앰브로즈는 그녀에 대한 혐오감에 움츠러들었던 반면, 내일 아침에게는 몸을 만지도록 '허락'했다. 그 사실은 오늘 알게 된 다른 모든 이야기보다도 실망스러웠다. 그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뒤에, 겨우 그토록 하찮고 이기적인 문제로 자신을 더 앞세운다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 "조심하세요. 세 글리상. (C'est glissant.)"
방금 프랑스어로 미끄러지기 쉽다고 주의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으므로 내일 아침 역시 지친 게 틀림없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프랑스 어를 할 줄 아는지조차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놀라웠다. 외딴섬의 고아 소년치고 그는 참 잘 성장한 사람이었다. 

 - 한동안은 환청인 듯했지만 모퉁이를 돌자, 리본처럼 새하얀 포말을 날리며 거센 소용돌이와 함께 요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200미터 정도 높이의 폭포가 보였다. 폭포의 강한 물줄기가 세찬 바람을 일으켰고 피어오른 수증기는 유령처럼 떠돌았다. 앨마는 그곳에서 잠시 멈추고 싶었지만 폭포는 내일 아침의 행선지가 아니었다. 그는 말소리가 잘 들리도록 그녀에게 몸을 기댄 채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젠 다시 올라갑니다." 
네발로 기다시피 그들은 폭포 옆으로 올라갔다. 곧 앨마의 ㅍ대나무 줄기를 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뿌리째 뽑혀 나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폭포 꼭대기 근처에 다가가자 평평한 바위 사이로 키 큰 풀과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앨마는 이곳이 그가 이야기했던 고원(그들의 목적지)이 틀림없다고 판단했지만, 그곳이 뭐가 그리 특별한지 처음에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 아침이 가장 큰 바위 뒤로 돌아가자, 앨마도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작은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집 안에 만들어 놓은 방처럼 절벽 안쪽으로 아늑하게 들어간 그 공간은 사방을 막아선 벽의 길이만 해도 팔구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앨마 휘태커가 이제껏 보아 온 것 가운데 가장 호사스러운 이끼 카펫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 그제야 앨마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격렬하게 흐느끼느라 그녀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고(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마치 비극의 가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뭔가가 그녀의 몸 한가운데서 떨어져 나가며 심장과 폐를 산산조각 냈다. 그녀는 총에 맞은 병사가 동료의 품에 쓰러지듯 내일 아침에게 안겼다. 그가 앨마를 부축했다. 그녀는 덜걱거리는 해골처럼 몸을 떨었다. 흐느낌이 잦아들지 않았다. 약한 남자였다면 늑골이 부러졌을 만큼 힘을 주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그와 맞닿은 몸을 곧장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가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그에게 빨려 들어가서 장기에 흡수되고, 지워지고, 없어지고 싶었다. 

- 발작적인 슬픔에 잠겨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윽고 앨마는 그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격렬한 흐느낌은 아니었지만, 서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앨마가 그의 부축을 받고 있는 만큼 그녀도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끼의 성소(聖所)에 함께 서서 그의 이름을 눈물로 외쳤다.

- 창백한 그녀의 피부는 얼룩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반면, 그의 피부는 얼룩을 오롯이 흡수해 버렸다. 전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수치심 때문에 침묵을 지킨 것이 아니라, 서로 좀 더 닮아지고 가까워진 느낌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지쳐 있었다. 그들은 옷을 입고 남은 빵나무 열매를 먹고, 폭포를 내려와서 절벽을 다시 기어 내려온 뒤 동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보송보송하게 마른 채 높이 올려져 있는 카누를 찾아서 마타바이 만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 "날 용서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이제 그녀가 알아야 할 것은 마지막으로 하나뿐이었고, 두번 다시 서로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했으므로 지금 물어야 했다. 그는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하라고 청했다.
"당신 그림으로 가득한 앰브로즈의 가방은 지금껏 일년 가까이 해변에 있는 나의 '파레'에 놓여 있었어요. 누구든 가져갈 수 있었을 거예요. 누구든 섬 전체에 당신 그림을 뿌려 댔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이 섬 주민은 누구도 그 물건에 손조차 대지 않았어요. 이유가 뭘까요?"  

 

- 다시 한 번 춤을 추는 잔치가 열렸다. 또 한 번 연주자들이 찾아오고, 씨름과 닭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모닥불을 피운 뒤 다시금 돼지를 잡았다. 내일 아침은 사랑을 받는다기보다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존재임을 앨마는 이제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떠맡아야 할 책임감과 지위에 대해 그가 얼마나 능력 있게 처신하는지도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의 목에 셀 수 없이 많은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는데, 꽃들은 마치 사슬처럼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선물을 받았다. 새장에 든 초록색 비둘기 한 쌍, 꽥꽥거리며 버둥거리는 새끼 돼지 한 무리, 더는 발사되지 않는 18세기 네덜란드의 장식용 권총, 염소 가죽으로 장정된 성경책, 아내를 위한 보석과 옥양목, 자루에 든 설탕과 차, 교회에 매달 쇠 종 등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발치에 선물을 내려놓았고 그는 고상한 태도로 그 선물을 받았다. 

- 땅거미가 지자 여인들은 빗자루를 들고 무리 지어 해변으로 몰려가더니 '하루라푸(haru raa puu)' 경기를 위해서 모래사장을 청소했다. 앨마는 '하루 라 푸' 경기를 본 적이 없었지만, 웰스 목사한테 얘기를 들어서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공을 잡아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의 게임이었다. 전통적으로 대략 삼십 미터쯤 되는 길이의 모래사장에서 여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맞서는 경기였다. 즉석 경기장 양쪽 끝에는 모래밭에 선을 그어서 골대를 만들었다. 공 대신 플랜테인 잎사귀를 촘촘하게 엮어, 무겁지 않지만 지름이 중간 크기의 호박만 한, 두툼한 덩어리를 사용했다. 경기의 요지는 상대팀한테서 공을 빼앗아 태클을 피해 반대편 끝까지 전진하는것이었다. 공이 바다로 들어가면 파도 속에서 경기가 계속되었다. 선수들은 상대가 점수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었다. 

- 영국인 선교사들은 '하루 라푸'가 숙녀답지 못하고 호전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다른 정착지에서는 금지된 경기였다. 사실 그 경기가 숙녀다운 수준을 상당히 벗어난다는 선교사들의 판단에는 일리가 있었다. 여자들은 '하루 라 푸’ 경기를 하다가 매번 부상을 입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다. 웰스 목사가 감탄하듯 언급했던 것처럼, 그야말로 '놀라운 야만성의 발현'이었다. 그렇다, 폭력이 바로 그 경기의 요점이었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전쟁을 훈련하듯 여자들은 '하루 라푸'를 훈련했다. 그래서 전쟁이 임박하면 여성들도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교단에서는 기독교인답지 못한 순수한 야만성의 표출이라며 금지한 '하루 라 푸’를 웰스 목사는 왜 용납했을까? 그야 항상 같은 이유였다. 단지 해될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일단 경기가 시작되자 앨마는 웰스 목사의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루 라 푸' 경기에는 해될 것이 꽤 숨어 있었다. 공이 움직이자 여인들은 무시무시하고 겁나는 존재로 돌변했다. 아침 목욕 때마다 앨마가 보아 왔고,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그들의 아기를 무릎에 올린 채 얼러 주기도 했으며, 목청껏 성실한 기도를 올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면서 꽃으로 머리카락을 예쁘게 장식하고 다니던 친절하고 호의 넘치는 타히티 여인들은 순식간에 악에 받친 악독한 전사들로 바뀌었다. 앨마는 경기의 요점이 정말로 공을 잡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편의 팔다리를 찢어 버리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 둘을 합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냥하기 짝이 없던 에티니 자매가(그 '에티니 자매'가!) 다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서 땅바닥에 패대기쳤는데, 그 상대편 여인은 공 근처에 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 해변에 모인 군중은 그 광경에 열광했고 환호를 보냈다. 웰스 목사도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앨마는 그가 예수님 앞에 서서 웰스 부인의 도움으로 호전적인 삶을 등지기 전에 한때 콘월에서 얼마나 불한당 같은 시절을 보냈을지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공과 상대 선수들을 공격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웰스 목사는 더 이상 악의 없는 왜소한 요정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모르고 쥐를 쫓는 사냥개를 더 닮아 있었다.

 

- 그러다가 완전히 느닷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말이 앨마를 덮쳤다. 
아니,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땅바닥으로 쓰러뜨린 건 말이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달려 나와 온 힘을 다해 앨마를 옆으로 밀어뜨린 장본인은 마누 자매였다. 마누 자매는 앨마의 팔을 잡고 경기장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 더욱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희미한 빛이 보였다. 
뭔가 사랑스러운 것을 향해 초대받은 느낌, 누군가의 소환에 응하는 느낌이었다. 임종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기억났다.

"헷 이스페인 (Het is fijn.)" 
'기분이 좋아.'

 

- 그러다가(상황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어 버리기 직전까지 불과 단 몇 초만 남았을 때) 앨마 휘태커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의 존재를 이루는 모든 세포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흔들림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헨리와 베아트릭스 휘태커의 딸이며, 겨우 한 길 물속에서 익사하려고 이 세상에 맞서 버텨오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또한 다음의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만일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주저 없이 그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세상은 살기 위해 불굴의 전투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과 힘없이 항복한 채 죽어 가는 사람들로 확실히 나뉜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이었다. 단지 인간의 삶에만 적용되는 진실도 아니었다. 가장 위대한 피조물로부터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해당하는 진실이었다. 이끼도 그랬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뒤에서 힘을 실어주고 변이와 변종 들을 일으키는 자연의 섭리이자 온 세상을 해명하는 진리였다. 앨마가 끊임없이 찾고 있었던 진리이기도 했다. 

- 그녀는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자신을 찍어 누르던 몸을 내동댕이쳤다. 코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눈은 따갑고 손목은 삐었고 가슴에는 멍이 들었지만 그녀는 물 위로 올라와서 숨을 들이 쉬었다. 그녀는 자신을 물속에 처넣었던 여인을 찾아 둘러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수없이 다양한 인생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가득한 머리를 지닌, 그녀의 친구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거인, 마누 자매였다. 마누는 앨마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애정 어린 웃음이었다. 동지애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것은 그저 웃음이었다. 앨마는 마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목을 조를 듯 친구의 멱을 틀어잡았다. 히로 패거리가 가르쳐 준 그대로, 앨마는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서 천둥처럼 고함쳤다. 

오바우 테이에!(OVAU TEIE!)

토아 하우 아에 타우 페투아 이 타 오에!(TOA HAU A’ETAU METUA I TA 'OE!)

에 오레 타우 소모레 데 마에 케 이아 에오! (E 'ORE TAU'SOMORE E MAE QE LA IA EO!)

나다!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전사였다!
너는 내 창을 들지도 못하리라!

 

- 그러고 나서 앨마는 마누 자매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마누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앨마의 얼굴에 대고 수긍하는 뜻으로 요란하게 포효했다. 
앨마는 해변으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 해변에서 그녀를 향해 환호나 야유를 보냈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물속으로부터 걸어 나갔다. 

 

- 등까지 굽은 섬 출신의 작은 개가 승선하는 일을 반기는 선장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로저의 승선을 거부해서 앨마를 태워 주지 않은 채 항해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여정은 상당히 지연되었다. 승선을 거절하지 않는 경우에도 종종 로저를 데려가는 대신 뱃삯을 두 배나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녀는 돈을 냈다. 여행용 드레스 밑단의 비밀 주머니를 몇 개 더 열어서 한번에 하나씩 금화를 더 꺼냈다. 사람은 언제나 내놓을 뇌물을 갖고 있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 앨마는 시간을 기나길게 연장하다 보면 생존 경쟁은 단순히 지구상의 생명을 '규정'할 뿐 아니라, 지구상의 생명을 '탄생' 시킨다는 가설을 세웠고, 굳게 믿었다. 확실히 그 원리는 지구상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종을 탄생시켰다. 경쟁이 바로 메커니즘이었다. 종 사이의 차이, 종의 멸망, 종의 변이 같은 대부분의 생물학적 미스터리 뒤에는 경쟁 원리가 숨어 있었다. 경쟁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 지구는 자원이 제한된 곳이었다. 자원을 위한 경쟁은 가열되고 지속되었다. 삶의 시련을 견뎌 내는 데 성공한 개체의 일부 특질이나 돌연변이는 다른 개체보다 그들을 더 단단하고 영리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러한 긍정적 변화를 얻고 나면, 살아남은 개체는 유리한 특질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그 자손들은 편하게 앉아서 우월한 위치를 즐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또 다른 우월한 경쟁자가 나타거나 필요한 자원이 고갈되기 전까지는 그렇다는 의미였다. 생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 속에서 종의 구조는 어쩔 수 없이 변해 갔다.

- 앨마는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연속 창생'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뭔가가 영원히 펼쳐지며 생성된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허셜은 그런 창조가 우주적 범위에서만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앨마는 이제 그 같은 창조가 '어디서나', 생명체의 모든 수준에서 지속된다고 믿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하는 수준에서나, 인간의 수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난관은 언제 어디서든 시시때때로 나타났고, 자연계의 조건은 변화했다. 이점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풍족한 시기가 있으면 '히아이아(hiaia)', 즉 기근의 계절이 뒤따라왔다. 잘못된 환경에서는 그 어떤 생명체도 멸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합한 환경에서는 무엇이든 변이할 수 있었다. 멸종과 변이는 생명이 탄생한 이후 이어져 왔고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겁의 미래까지 계속 이어지리라. 그것이 바로 '연속 창생'의 원리가 아니라면, 앨마로서는 다른 대안을 알지 못했다. 

 

- 그뿐만 아니라 생존 경쟁은 인류의 '내면'까지 정의한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변이한 이교도였다. 그는 영리하고 자기 보존 능력 또한 뛰어났으므로,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을 파악해 냈다. 그는 과거 대신 미래를 선택했다. 그의 예지력 덕분에 내일 아침의 아이들은 강력한 아버지가 존경받는 새로운 세상에서 번성할 것이다.(혹은, 또 다른 난관이 파도처럼 밀어닥쳐서 그들을 위협할 때까지는 번성하리라. 그러고 나면 그들은 또 각자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할 터다. 그들 자신의 싸움이므로 아무도 그 파도를 막아 줄 수 없을 것이다.

- 한편 신의 은총으로 천재성과 독창성, 아름다움, 우아함을 갖춘 앰브로즈 파이크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에게는 인내하는 재능이 없었다. 앰브로즈는 세상을 잘못 읽었다. 그는 세상이 낙원이기를 바랐지만 사실 그곳은 전쟁터였다. 그는 영원한 것, 지속적인 것, 순수한 것을 갈망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는 공기처럼 가벼운 천사의 약속을 간절히 원했지만, 만인과 만물이 그러하듯, 준엄한 자연의 법칙에 묶여 있었다. 또 앨마도 잘 알듯이, 가장 아름답거나 뛰어나거나 독창적이거나 우아한 사람이라 한들 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가장 가차 없거나 운이 좋거나 고집스러운 사람이 살아남았다.

 

- 앨마는 자기 생각에 '경쟁적 변화 이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영영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거대하고 낭만적이며 실증적 존재로 부풀려질 운명이기는 했지만 내일 아침과 앰브로즈 파이크의 실례를 제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언급한다면 앨마의 이론은 곧 터무니없이 비과학적 주장이 되리라. 
그녀는 이끼만 가지고도 충분히 자기 이론을 증명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묘한 꿈속에서 뒤섞이는 건 앰브로즈와 내일 아침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뒤얽히는 듯했다. 밤마다 앨마가 사로잡히는 공상 속에서는 화이트에이커의 오래된 제본실이 이끼 동굴로 변했다. 그녀의 마차 차고는 작지만 쾌적한 그리펀 정신 요양원의 병실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필라델피아의 초원은 따뜻한 검은 모래사장으로 변했다. 프루던스는 갑자기 한네커의 옷을 입고 있었고, 마누 자매는 베아트릭스 휘태커의 그리스식 정원에서 회양목을 손질했다. 헨리 휘태커는 작은 폴리네시아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스쿠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 앨마는 그런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기긴 했지만, 꿈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생명 활동을 관장하는 동떨어진 요소들이 마침내 하나로 엮이는 듯 정말로 놀라운 통일감을 느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알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스스로 얽혀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과 승리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앰브로즈와 결혼식을 몇 주 앞두고 있을 때 경험했던, 찬란하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단순히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두뇌 기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만물을 관찰하듯,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정신을 갖게 되었다.

 

- 옆에서 부대끼는 경쟁자보다 더 위협적인 적수는 세상에 없었다. 가장 위급한 전쟁은 항상 집안에서 벌어지는 법이다. 앨마는 수십 년간 몇 센티미터의 공간 안에서 벌어졌던 승리와 패배의 전투 과정을 지칠 만큼 자세히 기록했다. 그간의 세월 동안 기후 변화가 각각의 종에게 어떤 이익을 주었는지, 새들은 이끼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이끼에게 우주 전체나 다름없는 바위 표면은(초원 울타리 옆의 늙은 참나무가 쓰러지자 하룻밤 사이에 그늘의 양상 역시 바뀌었다.)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적어 나갔다. 
"위기가 크면 클수록 진화는 더 빨라진다."라고 그녀는 적었다.
"모든 변화의 동기는 절박함과 위급 상황이다."
"자연계의 아름다움과 다양함은 바로 끝없는 전쟁의 가시적 유산이다."
"승리자는 승리를 누리겠지만, 더는 승리할 수 없는 순간까지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이번 생은 자신 없고 어려운 실험이다. 때로는 시련을 겪은 뒤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가장 진기하고 아름다운 개체라고 해서 자생력까지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자연의 싸움은 악의 작용이 아니라, 막강하고 무심한 자연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생명의 형태가 존재하는데, 모두 다 생존하기에 자원은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원칙이다."

- 14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는 그런 과정을 수백 번 되풀이했다. 
앨마가 로테르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논문이 거의 완성되었다. 아직 몇 군데 미진한 부분이 있었으므로 완전히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에 등장하는 생명체는 여전히 불만스럽고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그녀를 괴롭히자, 앨마는 그 사실을 정복할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렸다. 자신의 이론이 반박의 여지없이 대부분 정확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만약 자기 생각이 옳다면, 그녀는 다소 혁신적인 내용의 40쪽짜리 과학 논문을 손에 쥐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다면? 그렇더라도 '필라델피아 이끼 서식지의 삶과 죽음'에 관해 일찍이 과학계에서 본 적 없는, 가장 정교한 논문을 썼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 그녀는 로테르담에서 로저를 받아 주는 유일한 호텔을 찾아낸 뒤 며칠 동안 묵었다. 앨마와 로저는 숙소를 찾느라 오후 내내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거듭 그들을 쫓아내는 호텔 점원들의 꼴 보기 싫은 표정에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로저가 좀 더 근사하고 매력적인 개였다면, 방을 구하는 데 이토록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앨마는 그 작은 주황색 잡종견을 있는 그대로 고귀한 존재라 여겼으므로, 그런 대우가 몹시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이제 막 세상의 문턱을 넘지 않았던가? 앞으로 똑같은 소리를 지껄여 댈 오만불손한 호텔 점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고, 편견과 수치심과 유감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창녀는 아니지요?" 그냥 확인해 보려는 듯 노파가 물었다. 
이번에는 앨마의 입에서 "하느님 맙소사!"라는 말이 곧장 흘러나왔다. 도무지 어쩔 수 없었다. 호텔 주인은 그녀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듯했다. 

- 앨마는 식물원의 높은 벽돌담을 비스듬하게 비추는 초저녁 햇살 속으로 한 걸음 나섰다. 로저는 바로 옆에 있었고, 겨드랑이에는 수수한 갈색 종이로 싼 꾸러미를 끼고 있었다. 문 옆에 선, 깔끔한 경비원 제복을 차려입은 청년에게 다가가서 유창한 네덜란드어로 오늘 식물원 책임자가 자리에 있는지 물었다. 청년은 원장님이 일 년 내내 출근하기 때문에 자리에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앨마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분께 말 좀 전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먼저 댁은 누구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물어도 되겠소?" 청년은 앨마와 로저를 깔보듯 쳐다보며 물었다. 질문 자체에는 큰 불만 없었지만, 앨마는 그의 말투가 몹시 언짢았다.
"나는 앨마 휘태커이고, 이끼와 종의 변이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은 왜 만나려는 거죠?"
그녀는 큰 키를 한껏 오만하게 뽐내며 '라우티'처럼 자신의 혈통을 위풍당당하게 읊어댔다. "내 아버지는 한때 당신 나라에서 '페루 왕자'라고 불리던 헨리 휘태커입니다. 나의 조부님은 영국 왕 조지 2세에게 '사과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은 분이죠. 외조부님은 장식용 알로에의 거장이자 삼십 년 이상 이곳 식물원의 책임자로 계셨던 야곱 반 데벤더르이며, 그 자리는 그분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그분의 아버지 또한 '그분'의 아버지에게 자리를 물려받았죠. 그 내력은 이 시설이 최초로 건설된 16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내가 알기로, 현재 당신이 모시는 책임자는 데이스 반 데벤더르 박사님이시죠? 그분은 내 삼촌이에요. 그분의 누이 이름은 베아트릭스 반 데벤더르였고요. 그분이 내 어머니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적용한 식물원 조경의 대가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 모퉁이 근처에, 호르투스 담장의 바로 바깥에 있던 사택에서 태어나셨죠. 하긴, 17세기 중반 이후로 모든 데벤더르 가문 후손들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경비원은 입을 떡 벌리고 앨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젊은이가 소화하기에 너무 많은 정보라면, 그냥 나의 외삼촌께 가서 미국에서 온 조카가 무척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요."

- 그는 좀 더 앨마를 쳐다보다가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서 '벤텔테이피헤(wentelteefje)'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앨마는 분명 저녁 간식을 먹고 있던 그를 방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도 그 '벤텔테이피헤'를 맛볼 수 있다면 거의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피 토스트를 마지막으로 맛본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 한네커가 만들어 주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리라. 냄새만으로도 향수에 젖어서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데이스 삼촌은 그녀에게 커피는 물론이고, 버터를 발라서 노릇하게 구운 '펜텔테이피헤’를 나눠 줄 생각 ..  

- 자제력을 되찾은 앨마는 눈가를 훔쳐 낸 다음, 그에게 미소 지었다. "놀라게 해 드렸다는 거 알아요, 데이스 삼촌." 그녀의 말투는 자연스레 좀 더 따듯하고 친숙한 태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용서하세요. 저는 독립할 능력이 있는 여자이고, 어떤 식으로든 삼촌의 삶을 방해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연구자로서, 분류학자로서 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저도 그 능력을 삼촌처럼 이곳에서 발휘하고 싶습니다. 식물학의 역사와 제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모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곳 식물원에서 제시간과 재능을 쏟으며 남은 평생 동안 일하고 싶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저에게 최고의 기쁨이 되리라고 존경을 담아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 말과 함께 앨마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갈색 꾸러미를 탁자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말로만 제 능력을 알아 달라고 청하진 않겠어요. 이 꾸러미 안에는 제가 지난 삼십 년간 수행했던 연구를 바탕으로 최근 정립한 이론이 담겨 있어요. 일부 개념은 다소 과감하다고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바랄게요.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내용은 혼자만 알고 계셔 주세요. 제 결론에 동의하시지 않더라도, 저의 과학적 수준에 대해서는 파악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담은 저의 분신이니까, 이 문서는 소중히 다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 앨마는 호르투스 식물원을 나와서 무작정 항구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마차를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마차에 앉아 있기에는 기분이 너무 들떠 있었다. 빈손이지만 마음은 가뿐했다. 물론 조금 충격을 받아서 멍했지만 진정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습관적으로 그녀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로저를 찾았지만 녀석은 따라오지 않았다. 맙소사, 불과 십오 분 동안 만나면서, 개와 평생의 역작을 그 사무실에 두고 나오다니! 
얼마나 놀라운 만남인가!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가!

- 하지만 앨마가 여기에 있고 싶다면, 감당해야 할 위험이었다. 호르투스가 아니라면, 암스테르담에, 적어도 유럽에 있고 싶었다. 남태평양에서 지내는 내내, 그녀는 북반구가 진심으로 그리웠다. 계절의 변화와 겨울에 내리쪼이는 밝고 쨍한 햇살이 그리웠다. 가혹하게 추운 날씨와 그에 따라 팽팽하게 당겨지는 엄정한 정신도 그리웠다. 그녀는 외모도, 기질도 열대지방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에덴동산 같다고 생각하며, 역사의 시초를 품은 타히티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앨마는 태곳적 상태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이 이룬 발명과 진보의 최첨단을 구현하는 현대 안에서 살고 싶었다. 요정과 유령의 땅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같이 변화하는, 전보와 기차와 발전과 이론과 과학의 세상을 원했다. 생산적이고 진지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역시 생산적이고 진지한 환경에서 다시 일하고 싶었다. 빽빽한 책장과 수집용 유리병, 곰팡이 탓에 잃어버릴 염려 없는 종이와, 밤에 도둑맞은 일 없는 현미경이 선사하는 안락함을 원했다. 최신판 과학 잡지를 손에 넣고 싶었다. 동료들이 그리웠다.  

 

- 그들이 앨마를 받아 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받아 주지 않는다면? 도박이었다. 반 데벤더르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앨마가 바라는 만큼 절실하게 그녀의 존재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호르투스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앨마의 바람도 반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 눈에는 앨마가 침입자이자 애송이로 보일 테니까. 데이스 삼촌에게 논문을 두고 온 선택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논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알 수 없었다. 지루해할지 (필라델피아의 이끼라고?) 종교적 문제로 화를 낼지(연속 창생?) 과학적 경계심을 품을지(자연계 전체에 적용되는 이론'이라고?.

 

- 앨마는 자신의 논문이 무모하고 거만하고 순진하고 케케묵은 데다 퇴폐적이고, 심지어 약간 프랑스 냄새마저 풍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논문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능력을 담아낸 증거였다. 어차피 가족이 그녀를 받아 줄 거라면, 그 능력 역시 알아주었으면 했다. 

- 하지만 반 데벤더르 가문과 호르투스 식물원이 앨마를 거부하더라도 그녀는 어깨를 펴고 계속 나아갈 작정이었다. 어찌 되었든 암스테르담에 거주지를 마련하거나, 로테르담으로 돌아가거나, 어쩌면 라이덴으로 가서 대학교 근처에 자리 잡아야 할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아니라면 프랑스도 있고, 독일도 있었다. 어디서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테고, 어쩌면 다른 식물원에서 일자리를 얻을지도 몰랐다. 여자라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특히 아버지의 명성과 딕 얀시의 영향력을 뒷배로 삼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선태학을 연구하는 저명한 교수들을 전부 알았고, 그들 중 상당수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누군가의 조수가 되겠다고 청할 수도 있었다. 가르치는 일도 언제든 대안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교 수준은 안 되겠지만, 어딘가 부유한 집안의 가정 교사 자리는 언제든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식물학으로 안 된다면 언어를 가르칠 수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럴 만한 언어가 충분했다. 

- 앨마가 경쟁적 변화 이론의 관점에서 자매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삼촌은 신음과 함께 수염을 잡아당기며, "또 그 이야기냐!"라고 외쳤다. "아무도 프루던스를 모른다, 앨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앨마는 신경 쓰였고, 급기야 '프루던스 문제'라고 부르게 된 그 난제는 앨마의 이론 전체를 뒤흔드는 위협이었으므로 그녀의 마음을 꽤나 괴롭혔다. 모든 것이 굉장히 개인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특히 괴로웠다. 결국 앨마는 거의 사십년 전에 프루던스가 실천했던 위대한 배려와 자기희생 계획의 수혜자였고, 그녀는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프루던스는 조지 호크스가 자기 대신 앨마와 결혼하기를, 그래서 '앨마가 그 결혼으로 이득을 누리기를' 바라며 묵묵히 하나뿐인 진실한 사랑을 포기했다. 프루던스의 희생이 완전 허사로 돌아갔다고 해도 그 행위의 진실함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왜 그런 행동을 할까?

앨마는 도덕적 관점에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지만(프루던스가 친절하고 이기심 없기 때문에)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해명할 수가 없었다.(왜 친절함과 이타심이 존재할까?) 앨마는스스로 프루던스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외삼촌이 왜 수염을잡아 뜯는지 전적으로 이해했다. 거대한 인간과 자연사의 범주에서 본다면 프루던스와 조지, 앨마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 삼각관계는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져서 논란의 주제로 들먹이기조차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인간은 왜 그런 행동을 할까? 
앨마는 프루던스를 생각할 때마다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복기했고, 경쟁적 변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그렇다고 프루던스 휘태커 딕슨이 극히 희귀한 사례도 아니었다. '누가 되었건' 사리 추구의 범위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컨대,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대신해 희생하는 것은 앨마로서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지만(가계를 지속하는 데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동료를 보호하려고 적진으로 곧장 뛰어드는 전우의 희생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한 행동이 용감한 병사나, 그의 가족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희생 덕분에 이제 죽어 버린 그 병사는, 자기 미래를 던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혈통의 존속마저 끊어 버렸다. 또한 앨마는 굶주린 죄수가 감방 동료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이유도 설명할 수 없었다

 

- 앨마는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스스로 그토록 고결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은 분명 그러한 행동을 꽤 자주 했다.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다면 프루던스와 웰스 목사는(특이한 선함의 또 다른 모범 사례였다.) 주저 없이 자기 음식을 거부할 테고, 낯선 이의 아기나 심지어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 불사하리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더 나아가, 나머지 자연계에서도 인간이 보이는 자기희생의 극단적인 예시는 적잖이 나타난다. 벌집이나 늑대, 혹은 새들의 무리나 심지어 이끼 서식지 내부에서도 가끔씩 일부 개체는 집단의 더 큰 이득을 위해 죽어 갔다. 그런데 늑대가 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레 우러나온 호의에서, 소중한 수분을 개미에게 양보하고자 죽음을 선택하는 이끼 역시 절대 찾아볼 수 없었다! 


- "인간을 예외로 하면 되잖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했다." 삼촌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안했다. 
"'거대한 존재의 사슬'을 논하는 게 아니잖아요, 삼촌. 저는 윤리적이거나 철학적 주장에는 관심 없어요. 저는 보편적 생물학 이론에 관심이 있다고요. 자연법칙은 예외를 인정할 수없고, 만약 그런다면 법칙이 될 수 없어요. 가령 프루던스는 중력에서 예외일 수 없잖아요. 따라서 제 이론이 정말로 맞다면, 경쟁적 변화 이론에서도 예외를 인정할 수 없어요." 
"중력이라고?" 그가 눈을 굴렸다. "맙소사, 얘야, 잘 생각해라. 넌 이제 뉴턴이 되고 싶은 것이로구나!"
"단지 옳고 싶은 거예요." 
마음이 가벼울 때면 프루던스 문제는 거의 우스꽝스럽게느껴졌다. 프루던스는 어린 시절 내내 앨마에게 문제였는데, 앨마가 자매로서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가끔 이 집안에서 두 번 다시 프루던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프루던스 문제라면 고민할 만큼 했어." 데이스 삼촌이 말했다.

 

- 책을 읽어 나가면서도 데이스 삼촌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은 서로 모순되었다. 삼촌이 살아서 이것을 보았더라면! 살아생전에 이걸 보지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분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분노를 느꼈을까! 그가 마지막에 했을 법한 이야기는 이제 듣지 못할 것이다. "그것 봐라, 내가 발표하라고 '누누이' 말했지!" 하지만 그는 조카딸의 연구를 뒷받침해 주는 위대한 주장에 축하도 보냈을 것이다. 삼촌 없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죽을 만큼 그가 그리웠다. 앨마는 삼촌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기꺼이 꾸지람을 견뎠을 터다. 아버지도 살아 계셔서 이것을 보았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 역시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도 이것을 보았으면 했다. 물론, 앰브로즈도 앨마는 그 논문을 발표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 왜 발표를 하지 않았던가? 
그 질문이 그녀를 쿡 찔러 댔다. 하지만 다윈의 걸작을 읽으며(분명 그것은 걸작이었다.) 앨마는 그 이론이 그의 것임을, 그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먼저 주장했더라도, 그녀는 결코 다윈보다 더 잘 풀어내지 못했으리라. 그 이론을 앨마가 출판했다면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녀가 여자라거나 모호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도 아니었지만), 단지 다윈만큼 달변으로 세상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과학적 학식은 완벽했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았다. 앨마의 논문은 고작 40쪽이고 <종의 기원에 관하여>는 무려 500쪽이 넘었지만, 다윈의 책이 훨씬 더 읽기 편한 작품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다윈의 책은 예술이었다. 친근했다. 즐거웠다. 소설처럼 읽혔다. 

-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자연 선택'이라고 칭했다. '경쟁적 변화 이론'이라는 앨마의 거창한 제목보다 간결하고 훌륭하고 빼어난 용어 선택이었다. 자연 선택에 관한 사례를 끈기 있게 제시하며, 다윈은 결코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독자에게 상냥한 이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앨마가 간파한 것처럼 끊임없이 죽이고 죽어 가는, 똑같이 어둡고 난폭한 세상에 대한 글을 썼는데도 그의 언어에는 폭력의 흔적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앨마는 감히 그만큼 온화한 문체로 글을 써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앨마의 글은 망치였다. 다윈의 글은 찬송가였다. 그는 검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다가왔다. 그뿐만 아니라 창조주를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책장 곳곳에서 성령을 시사했다!  
 
 - 앨마는 그 주제와 관련한 강연에 전부 참석했고, 감상문과 공격과 비평을 전부 읽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탄과 탐색을 함께하는 기분으로 그 책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녀는 과학자였기에, 다윈의 이론을 현미경 아래 놓고 싶었다. 그의 이론에 적용해서 자신의 이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윈이 프루던스 문제를 어떻게해결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 대답은 곧 드러났다. 그는 해결하지 않았다.

 

- 다윈은 상당히 교활하게도 책에서 인간이라는 주제를 회피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넘어갔다. <종의 기원에 관하여>는 자연에 관한 책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공공연히 다루지 않았다. 그는 그 부분에서 손놀림을 조심했다. 그는되새와 펭귄, 이탈리아 그레이하운드, 경주마, 따개비의 진화를 논했지만, 인류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활기차고 건강하고 행복한 개체가 살아남아서 개체수를 늘린다."라고 썼으나 결코 '우리 역시 이 체계의 일부다.'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과학적 사고를 지닌 독자라면 스스로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임을 다윈은 잘 알고 있었다. 종교적 사고를 가진 독자들 역시 그런 결론에 도달할 테고 신성 모독이라며 분개하겠지만, 다윈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는 대중의 분노 앞에서 결백한 모습으로 켄트에 자리한 조용한 시골집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되새와 따개비에 대한 단순한 논의일 뿐인데, 뭐가 문제 되겠어?' 

 - 지식인들의 세계는 온통 다윈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정립하느라 들썩거렸지만 정작 그는 놀랄 만큼 침묵을 고수했다. 프린스턴에서 열린 신학 세미나에서 찰스 호지가 다윈을 이단으로 비난했을 때도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캘빈 경이 그의 이론을 거부했을 때에도(캘빈의 동의가 있었다면 믿음직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므로 앨마는 그 결정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다윈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지지자들을 모으지도 않았다. 저명한 가톨릭계 천문학자인 조지 설이 자연 선택 이론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가톨릭교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을 때도 다윈은 응답하지 않았다. 영국 성공회 목사이자 소설가인 찰스 킹슬리가 자신 또한 "원시적 형태의 자기 발달 능력을 신께서 창조했다는 데 반감이 없다"고 공언했을 때조차 다윈은 동감을 표하지 않았다. 신학자 헨리드루먼드가 성경으로 진화론을 옹호하려고 하자 다윈은 아예 논의를 회피했다.

-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목사들이 은유에서 도피처를 찾는 동안(성경에 언급된 천지 창조의 7일은 실제로 일곱 단계의 '지질학적 시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루이 아가시 같은 보수적 고생물학자들은 분노로 눈이 시뻘게져서 다윈과 지지자들을 사악한 변절자라고 비난했는데, 앨마는 그 과정을 주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윈 대신 싸웠다. 이를테면 영국의 막강한 토머스 헉슬리, 달변가인 미국의 아사 그레이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다윈은 영국 신사답게 모든 논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 한편 앨마는 지지 선언이 나올 때마다 남몰래 희열을 느꼈듯 자연 선택에 관한 모든 공격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였다. 그저 '다윈'의 생각만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 생각들은 '그녀의 것'이기도 했다. 다윈 본인보다 그녀가 그 같은 논란에 더 낙담하고 더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그 점은 그가 그 이론을 주장하는 데 앨마보다 더 나은 대변인이라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다윈의 조심성이 실망스럽기도 했다. 가끔 그녀는 다윈을 흔들어 깨워서 싸우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앨마는 헨리 휘태커처럼 떨치고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연히 코피도 흘렸겠지만 다른 사람의 코피도 터뜨렸을 터였다. 그들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지지자를 생각하면 '그들의' 이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웠으리라... 만약 그녀가 이론을 발표했다면 말이다. 물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겐 싸울 권리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러고 있자니 너무도 초조하고 마음이 산란하고 어지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아무도 앨마를 만족시킬 만큼 프루던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 이론에는 여전히 구멍이 나 있었다.

 

- 후커는 몇 년째 다윈에게 출판을 권유했지만, 앨마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듯이 그는 확신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과학사의 위대한 우연의 일치로 인해, 다윈이 거의 이십 년간 홀로 키워 왔던 아름답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이제 지구 반대편에서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서른다섯 살의 독학 자연 과학자에 의해 거의 한 마디 한 마디 똑같은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런던에 있는 앨마의 지인은 다윈이 자연 선택 이론을 발표하겠다는 월리스의 편지에 경악했으며, 월리스가 먼저 발표한다면 일반적 개념의 소유권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고 말해 주었다.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경쟁 개념을 논하던 다윈이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두려워한 것 같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신사의 마음을 가진 다윈은 1858년 7월 1일에 열린 린네 학회에서 월리스의 편지도(자연선택에 관한 자신의 연구와 나란히) 발표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그 가설은 자신이 먼저 세운 것임을 입증하는 데 힘썼다. <종의 기원에 관하여>의 출판은 그로부터 일 년 반 이내에 신속히 진행되었다. 서둘러 출판한 것으로 봐서 앨마는 다윈이 당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윌리스가 바짝 뒤쫓고 있었으니까! 몰살 위협에 처한 수많은 동물과 식물 들이 그러하듯, 찰스 다윈도 억지로 행동을 취하도록, 적응하도록 강요받았다. 앨마는 자기 이론에 직접 적어 놓은 글귀를 기억했다. "위기가 크면 클수록 진화는 더 빨라진다."

 

- 안전한 먼 곳에 있는 앨마의 눈에 비친 요즘 미국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급격히 성장하는 땅이었다. 거기에 있지 않음이 다행스러웠다. 미국은 그녀가 과거의 일생을 보낸 곳이었다. 더는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으며 그 나라 역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듯했다. 앨마는 네덜란드 여인으로서, 학자로서, 반 데벤더르로서 사는 삶을 사랑했다. 그녀는 모든 과학지를 구독했고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커피와 빵을 앞에 두고 동료들과 활기찬 토론을 벌였다. 호르투스 식물원은 해마다 여름이면 대륙으로 건너가서 이끼를 수집해 오도록 앨마에게 한 달간 휴가를 주었다. 그녀는 지팡이와 수집 도구를 들고 장엄한 알프스 산맥의 곳곳을 누빈 덕분에 그곳을 꽤 잘 알게 되었다. 양치식물로 뒤덮인 축축한 독일의 숲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노부인이 되었다.

- 1870년대가 도래했다. 평화로운 암스테르담에서 앨마는 팔십 번째 해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등산하는 일만큼은 어려웠지만, 호르투스에서 이끼 동굴을 돌보며 가끔 선태학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므로 더는 이끼를 구분하지 못할까 봐 걱정스럽기는 했다. 그런 서글픈 순간이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올 때를 대비해서, 그녀는 촉감으로 구분하는 법을 터득하고자 어둠 속에서 이끼 연구를 꾸준히 연마했다. 꽤 능숙해졌다. (죽을 때까지 이끼를 꼭 봐야 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그녀는 항상 이끼를 '알고 싶어' 할터였다.) 다행히 이제는 훌륭한 조력자가 일을 거들어 주었다. 앨마가 가장 아끼던 어린 사촌 마거릿(애칭은 미미였다.)이 이끼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면서 곧 앨마의 제자가 되었다. 학업을 끝마친 그녀는 호르투스에서 앨마와 함께 일했다. 미미의 도움으로 앨마는 두 권짜리 책 <북유럽의 이끼(The Mosses of Northern Europe)>를 완성할 수 있었고, 그 책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책에 참여한 화가가 앰브로즈 파이크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삽화도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앰브로즈 파이크가 되진 못했다. 아무도 될 수 없었다.

 

- 앨마는 찰스 다윈이 더욱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성공을 시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칭찬받을 자격이 있었고 스스로도 품위를 유지해 냈다. 그는 자기만의 탁월함과 신중함을 내세우며 진화론을 계속 연구했다. 1871년에 그는 드디어 자연 선택의 원칙을 인간에게 적용한 역작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를 출간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렸음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그의 시점에서 책의 마지막 결론('그래, 우린 원숭이다.')은 거의 당연한 귀결로 여겨졌다. <종의 기원에 관하여>가 첫선을 보인 이후 수십 년간 세상은 '원숭이 문제'를 예상하고 토론해 왔다. 편들어 주는 주장이 나타났고, 수많은 논문 역시 나오면서 끊임없이 반박과 논거가 제시되었다. 다윈은 신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개념에 세상이 적응하도록, 그 문제를 내놓기에 앞서 차분하게, 질서정연하고 조심스럽게 오래 기다린 듯했다. 앨마는 또 한 번, 그 누구보다 면밀히 그 책을 검토했고 깊이 감탄했다. 
그래도 여전히 프루던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월리스는 곧 급진적인 정치 사건에 휘말려 들면서 겨우 되찾은 평판을 또 잃고 말았다. 그는 토지 개혁과 여성 참정권, 가난한 사람들과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서 맹렬하게 싸웠다. 그는 투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았다. 고위직에 있는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그를 괜찮은 기관의 안정된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윌리스는 워낙 극단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감히 그를 고용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앨마는 그의 재정 상태가 염려스러웠다. 씀씀이도 가히 지혜롭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간파했다. 모든 면에서 월리스는 모범적인 '영국 신사' 노릇을 거부했다. 아마 실제로도 그는 모범적인 영국 신사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말하기 전에 생각해 보지도 않거니와 논문을 출판하기 전에 절대 머뭇거리지 않는, 다혈질의 노동자 계급이었다. 혼돈과 논란에 대한 열정이 빈대처럼 그에게 들러붙어 있음을 보면서도, 앨마는 그가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윌리스가 설령 바늘 한 개를 들었을지언정 세상을 콕콕 찌르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앨마는 그가 일으킨 가장 최신의 스캔들을 전해 들을 때마다 "당신이 뭐라고 해 줘야 해요. 당신은 저들에게 말해 줘야한다고요!"라고 중얼거렸다.

 

- 월리스 씨의 숙소로 반 데벤더르 가문의 아늑한 개인 저택이 제공될 예정이며, 암스테르담의 가장 아름다운 지역에 자리한 식물원의 바로 옆에 있으니 마음 놓고 편하게 이용해 주시면 좋겠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젊은 식물학자들은 저 유명한 생물학자에게 호르투스와 도시의 멋진 볼거리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서 무척 행복해할 테고, 이렇듯 훌륭한 손님을 초청하게 되어 식물원으로서도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앨마는 편지에 '충심을 담아, 이끼 큐레이터 앨마 휘태커로부터.'라고 서명했다. 

- 월리스의 부인 애니로부터 답장이 신속하게 날아왔다.(그녀의 아버지가 약학 분야의 위대한 화학자이자 일류 선태학자였던 윌리엄 미튼임을 알게 된 앨마는 짜릿한 기쁨을 맛보았다.) 월리스 부인은 남편이 암스테르담에 올 기회를 얻어서 기뻐한다고 적었다. 그는 1883년 3월 19일에 도착한 뒤, 이 주간 머물 예정이었다. 월리스 부부는 앨마의 초청에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넉넉한 사례비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앨마의 제안과 돈이 진짜로 필요한 상황이었음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정말 키가 컸다! 
그건 앨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앰브로즈만큼이나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나이도 앰브로즈가 살아 있었다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60대였고, 자세가 약간 구부정하기는 했지만(종을 연구하느라 오랜 세월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퍽 건강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수염이 성성했는데, 앨마는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이제는 시야가 밝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초면에 그런다면 무례할 뿐만 아니라 당황스러운 짓이었으므로 자제했다. 어쨌든 앨마는 그 남자를 만나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 그러나 방문 초기에는 워낙 바쁜 일정이 많았으므로 앨마는 거의 군중에 파묻혀 지냈다. 풍채가 아무리 당당하더라도 그녀는 노인이었고, 나이 든 여인은, 비록 그녀가 모든 경비를 지불한 장본인일지라도 규모가 큰 행사에서 제외되곤 했다. 위대한 진화 생물학자를 만나려는 사람들은 넘쳐 났으며, 다들 열정적인 젊은 과학도였던 앨마의 어린 친척들 역시 연애에 푹 빠진 사람처럼 월리스를 에워싸고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는 데 열심이었다. 예의 바르고 다정한 성격의 윌리스는 특히 젊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저마다 연구 과제를 뽐내고 조언을 구하는 부탁을 받아 주었다. 당연히 젊은이들은 그와 함께 암스테르담을 쏘다니고 싶어 했는데, 따라서 며칠 정도는 그곳 시민들의 자부심이 한껏 드러난 좀 우스꽝스러운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그러고는 야자수 온실에서 강연이 열렸고, 그 다음으로 학자들과 기자들, 고위 관리들의 진지한 질문들이 쏟아졌으며,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해야 하는 길고 지루한 만찬이 뒤를 따랐다. 월리스는 강단과 만찬장에서 늘 달변이었다. 그는 논란을 피해 가며, 자연 선택에 관한 지리하고도 멍청한 질문들마저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전부 응대해 주었다. 그의 아내가 행동거지를 잘 일러뒀음이 틀림없다고 앨마는 생각했다. '잘했어요, 애니.' 
앨마는 기다렸다. 그녀는 기다리는 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앨마에게는 그가 정말로 젊게 보였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누린 인생의 황금기는 늘 나이 든 남자들과 함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숙하고 훌륭한 사고를 지닌 사람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끊임없이 아찔하게 펼쳐지는 대화를 지켜보았던 어린 시절도 그랬다. 화이트에이커에서 아버지와 밤늦도록 식물학과 무역에 대해 토론했던 시절도 있었다. 타히티에서 선량하고 점잖은 프렌시스 웰스 목사와 보낸 시절 역시 있었다. 데이스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행복한 사 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늙었고, 그녀보다 나이든 사람이 더는 없었다! 지금 수염까지 백발이 된 구부정한 사람(고작 60대의 어린 사람)과 앉아 있는 그녀는 아주 늙은 거북이였다. 

 

- "저는 '신'이라는 말은 언급한 적도 없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애썼죠. 그 말을 쓴 건 그분이었어요. 저는 우주에 존재하는 최고의 초월적 존재가 우리와 합일하기를 갈망한다고 얘기했을 뿐이니까요. 저는 영혼의 세계를 믿습니다만, '신'이라는 단어를 과학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엄격한 무신론자거든요."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녀는 또다시 그의 손을 두드렸다. 앨마는 그의 손을 두드리는 것이 정말로 즐거웠다. 그녀는 매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를 순진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월리스가 말했다.
"난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현존하는 사람 중에서 당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어서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뻐요."
"당신이 모든 사람들보다 오래 살더라도, 당신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모든 이들은 결코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요."
"사랑스러운 개념이네요." 앨마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강신술 모임에 가 보셨습니까? 제가 모시고 갈 수도 있어요. 경계를 건너서 남편분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 앨마는 그 제안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밤에 앰브로즈와 제본실에 들어가서 손바닥을 통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신비롭고 형언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경험이었다. 아직도 그녀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알지 못했다. 아직도 그게 전적으로 사랑과 욕망에 빠져 있던 그녀의 상상이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앰브로즈가 정녕 마법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가끔씩 생각했다. 어쩌면 진화론적 변이가 그에게만 벌어진 까닭에, 전혀 엉뚱한 상황에서 태어났거나 역사적으로 잘못된 순간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 아마 그와 같은 또 다른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리라. 아니면 그 자신도 실패한 실험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어떤 존재였든 끝은 좋지 못했다.
"강신술 모임에 초대해 주겠다는 말은 고맙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네요. 나도 침묵의 교감에 대해서는 약간 경험이 있답니다.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시면 연락해주십시오." 
"꼭 그러죠.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죽은 다음에 강신술 모임에서 당신이 '나'에게 보낸 전갈을 받을 확률이 더 높을걸요! 나는 머지않아 떠날 테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그럴 기회가 오겠네요." 
"당신은 절대로 떠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은 몸 안에 머물고 있을 뿐이에요. 죽음은 단지 그 둘을 분리하는 거죠."

 

- "우리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갈릴레오가 선언했을 때, 그렇게 믿어 왔던 인간들에게는 분명 섬뜩한 타격이었을 거예요. 신이 어느 기적적인 순간에 특별히 우리를 빚어낸 게 아니라고 다윈이 선언했을 때 세상이 받았던 충격과 똑같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지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궁금하군요, 월리스 씨. 영혼의 세계와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갈망은 혹시... 자신을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만성적인 증상이 아닐까요? 용서해요. 당신을 모욕할 의도는 없어요. 내가 깊이 사랑했던 사람은 당신과 똑같이 어떤 신비한 신적 존재와 교감하고, 육신과 이 세상을 초월하고, 더 나은 영역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으려는 욕구를 품고, 몸소 그런 길을 추구했었죠. 내 눈에는 그 사람이 참 고독해 보이더군요. 아름답지만 고독했어요. 당신도 고독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놀라워요."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그럼 휘태커 양께는 그런 욕구가 없으십니까? 중요하게 느껴지고 싶다는?"
"당신께는 말씀드리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여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슴 아픈 일도 겪었고, 내 소망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어요. 본인의 행동에 실망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죠. 나는 내가 사랑했던 거의 모든 이들보다 오래 살았어요.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은 자매 하나뿐인데, 걔와는 삼십 년 이상 서로 보지 못했고, 평생토록 친밀하게 지내지도 못했어요. 난 화려한 경력을 쌓지도 못했어요. 인생에서 단 한 번 독창적이고 아주 중요한 이론을 고안해 냈고, 우연히 그게 나를 널리 알려 줄 기회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나서기를 망설인 바람에 결국 기회를 놓쳤어요. 내겐 남편이 없어요. 자손도 없죠. 한때는 부를 가졌지만 내려놓았어요. 시력도 나빠져 가고 허파와 다리도 나를 괴롭히고 있죠. 한 해 더 살아서 또 봄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않아요. 나는 태어난 곳에서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서 죽을 테고, 나의 부모님, 자매와 멀리 떨어진 여기에 묻힐 겁니다. 지금쯤 당연히 속으로 반문하고 있겠죠? 이 비참하고 불행한 여자는 왜 스스로 운이 좋다고 말하는 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질문에 대꾸하기에는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걱정 마세요, 월리스 씨. 당신과 농담이나 주고받자는 게 아니니까. 나는 진심으로 운이 좋다고 믿어요. 세상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난 운이 좋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 본 적이 없어요. 이 세상은 정말로 신비로우면서도 종종 시련의 장이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면 인간은 언제든 성취할 수 있어요. 지식은 모든 필수 요소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니까요."
그가 여전히 대꾸하지 않자 앨마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 세상을 넘어서는 어딘가를 결코 고민하지 않았던 까닭은 언제나 이 세상이 나에게 충분히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이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크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지 의아했어요. 어째서 그들이 보다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를 꿈꾸거나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지... 하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겠죠. 우린 다 다르니까요. 내가 원했던 건 '이' 세상을 아는 것뿐이었어요. 이제 끝이 임박했으니,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보다 약간은 더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더욱이 얼마 안 되는 나의 지식 역시 다른 사람들이 축적해 놓은 지식의 역사에 더해졌어요. 말하자면 위대한 도서관에 힘을 보탠 거죠. 그건 사소한 업적이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해야겠죠."

 

- 이번에는 그가 앨마의 손을 두드렸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휘태커 양."
"암요."
그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난 듯했다. 그들은 둘 다 지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앨마는 논문 원고를 앰브로즈의 가방에 다시 넣어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은 뒤 사무실 문을 잠갔다. 두 번 다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월리스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도왔다.   
  

      

 

 

 

 
모든 것의 이름으로
“이 소설은 하나의 인생 그 자체다.”(《오 매거진》),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이뤄 낸 가장 뛰어난 작품!”(《엘르》)이라는 열광적인 서평이 증명하듯, 『모든 것의 이름으로』는 집요할 만큼 철저한 고증(실제로 저자는 당대 미국 여성 지식인들의 편지와 일기 등 거의 모든 기록물을 샅샅이 살펴봤다고 한다.)을 바탕으로 전 세계 그리고 두 세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시공간을 정교하게 직조해 낸 완벽한 시대 소설(19세기의 사회상과 지적 흐름을 생생하게 그려 내기 위해 저자는 자연 과학, 철학, 복식,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에 걸쳐 1800년대 말의 유럽과 미국, 폴리네시아 등 전 세계의 역사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다.)이자, 온갖 차별과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식물학(특히 모두가 ‘보잘것없다’고 여긴 선태학)에 헌신한 앨마 휘태커라는 인물의 치열한 일대기다. 런던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끝내 식물 무역과 약품 제조업으로 최고의 부를 거머쥔 풍운아 헨리 휘태커의 남다른 사업 감각과 다부진 체력, 네덜란드의 식물학계를 주름잡아 온 유서 깊은 가문의 여성 베아트릭스 반 데벤더르로부터 뛰어난 지성과 인내력을 물려받은 주인공 앨마는 새로운 세기의 여명과 함께, 세상의 모든 풍요를 품고 있는 대저택 화이트에이커에서 태어난다. 앨마는 훌륭한 두뇌와 타고난 지적 호기심을 자산으로 여러 언어를 통달하고, 진리에 대한 끈질긴 탐구심으로 집 안에 마련된 도서관의 책들과 대자연의 생명체들을 불철주야 연구한다. 이렇듯 경이로운 나날 속에서 앨마는 뜻밖의 사건으로 입양된 자매 프루던스와 편치 않은 관계를 가까스로 이어 가며 같이 성장하고, 섣부른 첫사랑 탓에 큰 상처를 입고, 소중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변덕스러운 아버지를 모시며 식물학자의 꿈을 끈질기게 키워 나간다. 그러나 영영 함께할 것 같았던 자매와 친구가 차차 결혼하고, 곁에 노쇠한 아버지와 퉁명스럽지만 다정한 늙은 하녀 한네커밖에 남지 않자 앨마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흘러넘치도록 많은 재산과 스스로 꿈꾸었듯 식물학자로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정말 여기서, 화이트에이커라는 안락한 테두리 안에서 현재의 삶에 만족해도 문제없는지 좀처럼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놀라운 재능을 지녔지만 앨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존재, 어딘가 광신자 같고 신비주의자 같기도 한 식물화가, 앰브로즈 파이크가 돌연 그녀 앞에 나타난다. 이제껏 우리 세계의 과학적 진실만을 찾아 헤매 온 식물학자, 부친의 거대한 기업을 돌보는 사업가로서 평생 살아가더라도 상관없다고 굳게 믿어 온 앨마에게 앰브로즈는 돌이킬 수 없이 거대하고 치명적인 파문을 일으킨다. 마침내 앨마 휘태커, 역사 속에 자리했지만 결국 잊히고 만 한 여성 과학자의 위대한 일생이 잠들어 있던 모든 진실과 함께 진정한 막을 올리게 된다.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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