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그렉 브레이든]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 1,700년간 잠들어 있던 신과 소통하는 언어

일루젼 2023. 1. 18.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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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그렉 브레이든 / 황소연

원제 : Secrets of the lost mode of prayer 
출판 : 김영사
출간 : 2021.05.25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를 읽고 관심이 생겨 동저자의 다른 책인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을 읽어보았다.

 

저자가 자신의 체험들을 섞어가며 설명하는 기본 원리들은 여타의 영성 도서들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화와 시각화를 기반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축복하라는 (호오포노포노) 내용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움을 감각하여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감각하고 이끌어내라는 메시지도 낯설지 않다. 저자가 이 모든 방법들을 통틀어 말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바로 '감정'이다. 

 

내가 네빌라이징이나 루시드 드림의 성공 이후 추가적인 진행을 멈췄던 것은, 당장의 내 호기심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사용처가 있을 것 같다는 주저함도 있었지만, 사실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정과 생각이 현실화가 가능하다면 내가 먼저 작업해야 할 것은 내 감정의 정화와 제어였다. 시각화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나 자신을 닦아야 보다 예민하게, 매 순간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나는 거울을 통해 나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는 충동을 느끼고 있다. 내가 타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들은 사실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힐 리 없다는 믿음과 사랑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된다면, 가치 판단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수 있다. 세상이 그런 나를 수용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나 또한 타인을 보다 너그럽게 수용해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을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상황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 아닌, 나 자신과 확장된 나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때, 보다 깊고 내밀한 감정들을 제대로 감각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내적 확신이 있다. 

 

아름다움이 가진 매혹의 힘은 사람에게 감정적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그것은 실로 개개인의 미적 취향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자신의 주변을 자신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로 가득 채우라. 그것이 곧 그대다. 

 

또한 모든 것을 축복하라. 상처도, 고통도, 그것을 경험하게 한 이에게도, 경험한 이에게도, 목격한 이에게도. 

 

보다 적극적인 이 정화법은 '나의 세계 안의 모든 것은 곧 나다'라는 개념을 확장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며 축복으로 정화하라'고 권한다. 전쟁, 기아, 잔혹한 뉴스부터 일상적 불행과 스쳐가는 타인까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감사와 축복을 행하라는 것. 저자가 권하는 '감정의 기도'는 '필요할 때' 행하는 작업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우리 안에는 아름다운 야성의 힘이 존재한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t.Francis of Assisi 

 

 

만약 그대가 나처럼 이 노에 그대의 영혼을 의지한다면, 
우주를 창조한 힘이 그대의 힘줄 속에 스며들 것이다. 

그 힘은
당신의 사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영역에서 나온다.

- 잘랄루딘 무함마드 루미 Jalalad-Din Muhammad Rumi
 

옳으니 그르니 따지고 판단하지 말라.
그 너머의 마당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다.

- 잘랄루딘 무함마드 루미  Jalalad-Din Muhammad Rumi


아름다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영원
하지만 그대가 바로 영원이요, 그 거울인 것을.

- 칼릴 지브란 Khalil Gibran

 

 

 

- 신비주의자 게오르기 구르지예프 George Gurdjieff(1866?~1949)가 평생 진리를 탐구한 끝에 발견한 것이 바로 이 힘일 것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 사원에서 저 마을로, 이 스승에게서 저 스승에게로 옮겨 다니며 고대인이 남긴 단서를 추적하다가 중동 지방의 첩첩산중에 은밀히 자리한 한 수도원에 이르러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스승은 그에게 진리를 좇아 거기까지 온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말을 해준다. 

"이제 그대는 어떻게 해야 마음속 열망이 실체가 되는지를 깨달았다." 

 

- 성 프란치스코가 '아름다운 야성의 힘'이라고 부른 것을 내면에서 일깨우고 마음속 열망을 실현하려면 우선 우리 자신과 우리의 관계, 세상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신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 이해의 실마리는 선인들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칼릴 지브란 Khalil Gibran(1883~1931)은 <예언자 The Prophet>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배울 수가 없음을 일깨우며 이렇게 말했다. 
"선잠을 자고 있을 뿐 이미 그대의 내면에 자리한 것은 누구도 그대에게 알려줄 수 없다."

 

- 우리 안에 지식이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좌우하는 힘과 소통하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게 던진 질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였고, 두 번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였다. 이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늘날의 기도 문화를 아주 오래된 과거의 영적 전통에 비춰보면 쉽게 풀릴 것이다. 

 

- 나바호 인디언의 '니즈호니구 빌 이이나 Nizhonigoobil tina'라는 기도문은 번역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름다움과 함께 살아가기를, 아름다움에 의해 살아가기를,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살아가기를."

 

-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를 풀 열쇠가 이 안에 들어 있다. 바로 인생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아름다움의 힘과 이 기도에 의지한다면, 두려움을 피해 무의미한 삶을 사는 대신, 삶의 경험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언제든 상처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나바호 인디언은 '아름다움의 기도'를 통해 힘과 위안을 얻고 세상의 고통에 대처하는 길을 찾았다. 

 

- 지혜와 상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무의미한, 심지어 잔혹하기까지 한 일이 될 것이며, 우리는 끝없는 고통의 순환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처 -고통-분노-증오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고대인의 유산과 전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은 '삶'이란 우리의 내면이 변화하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삶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하느냐 고통으로 경험하느냐는 하루하루의 순간들 속에서 어떠한 자질을 발현하느냐 하는 내적 능력에 달려 있다. 

 

- 우리가 의심을 떨쳐내고 감정의 언어로 기도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누구에게 빼앗길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우리의 일부가 깨어난다. 

 

- 통역자가 주지 스님의 대답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바로 이 대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기도를 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본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몸속에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한 행위들입니다. 기도는 감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 이 기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특정한 자세나 손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은 채, 기도가 이미 응답받은 것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런 무형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치유, 친구와 가족의 풍요로움, 나라 사이의 평화를 가져오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아니, 벌써 끝났어요? 나는 당신이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요!" 
데이비드는 이런 식의 기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대답을 했다. 그는 신발 끈을 묶으려고 땅바닥에 앉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나는 비를 기도하겠다고 말했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만약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했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 그것은 곧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에 힘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치유를 간청하는 기도는 질병에 힘을 넘겨주는 일이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는 가뭄에 힘을 넘겨주는 일이다. 
"이러저러한 것을 달라고 매달리면, 그것은 우리가 바꾸고 싶어 하는 것들에 더욱더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 

 

- "간단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비가 내릴 때의 느낌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빗방울이 내 몸에 닿는 느낌, 비가 쏟아져서 진창이 된 마을 광장에 맨발로 서 있는 느낌을 느꼈어요. 비가 올 때면 마을의 흙집에서 나는 냄새도 맡았고, 비를 맞으면서 가슴 높이까지 자란 옥수수밭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닐 때의 기분도 즐겼습니다." 

 

- 데이비드는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이 어떻게 기도를 완성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서 보다는 창조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모든 가능성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가 선택한 것들을 이 세상으로 불러오게 됩니다." 

 

- 자, 이제는 기도가 응답을 받았을 때 달라지는 당신의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보자. 도움을 요청할 때 느끼는 간절함과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편안함과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과 편안함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찾고 구하는 기도는 갈망 상태에 머물게 하지만, 이미 받았다는 느낌은 우리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 준다.   
 

- 어떤 모습이 비치든 튜브는 그것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으며 강조하지도 왜곡하지도 않는다. 단지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비출 뿐이다. '신의 마음의 장 The Field of God's Mind'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형을 그림으로 그리듯 우리 내부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 이 같은 심오한 지혜에 따르면, 우리의 건강과 평화에 대한 책임은 '우연한 사건'과 '악운'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이런 사고방식은 어떤 사람에게는 가히 파격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자신의 경험과 믿음에 비춰보아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과학 연구들은, 일련의 사람들이 명상과 기도로 긴장을 풀면 이들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미친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 통일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라는 우리의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기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고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지혜는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상과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각, 느낌, 감정, 믿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그래서 가정의 해체, 관계의 단절, 실업, 전쟁의 위협이 만연한 현재 상황을 초래한 것이라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대한 중요성을 띤다. 

 

- 핵심은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감정 상태가 우리가 창조하는 현실의 청사진이라는 데 있다. 에너지장이 내면의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상처와 분노를 청소해두어야 한다. 마음속에 두려움과 상처를 품고 있다면 어떻게 '신의 마음'이 치유와 평화를 반영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분노와 좌절, 질투, 상처라는 강력한 감정과 맞닥뜨렸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기도를 올릴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강력한 틈새 공간으로 접속하는 동안 부정적인 감정을 유보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과거의 지혜로 눈을 돌려보자. 

 

- 예수는 또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꽃 피우면, 너희는 구원을 받으리라."
결국 우리 각자의 내면에 살아 있는 사랑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치유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에 연약한 우리 자신을 드러내놓아야 한다. 상처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느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 방법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기 자신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사랑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때로 상처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지혜와 상처, 그리고 사랑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치유의 세계를 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짧고, 명료하며, 직설적이다. 큰 시련은 우리에게 그것을 견디고 치유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을 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이 불변의 지혜를 명료하고 온화한 문장에 담아 대대로 전수했다.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의 시련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 우리가 목표로 여기는 '균형'이 실제로는 촉매로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프랙털 이미지에서도 그렇다. 패턴은 컴퓨터 화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나서야, 즉 패턴들이 똑같아지고 나서야 나누어지기 시작하고 더 큰 균형을 이루기 위해 더 새로운 패턴으로 진화한다. 우리의 삶도 정확히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 디지털 영상은 해체했다가 재조립하는데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우리의 내면에서 특정 주기가 완성되려면 몇 달 내지는 몇 년, 수십 년, 때로는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기 쉽다. 비슷한 직장으로 이직하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사귀고, 비슷한 이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나서야 "아하!" 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 예를 들어보자.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동료와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지난번 직장을 그만두고 떠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벌어진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던 적이 있는가? 여기서 반복되는 패턴은 반드시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판단을 배제하고 생각해 보자. 새로운 환경에서 예전의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생이 당신에게 무엇인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리고 깨달음을 얻으면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 핵심은 이것이다. 시련은 당신이 준비된 경우에만 온다는 것. 우리가 이 원리를 알든 모르든, 인생이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주든, 우리는 위기가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그런 경험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니까!   

 

- 균형과 변화의 주기에 면역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과 친구가 얼마나 많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든,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든 누구에게나 인생의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마다 변화의 계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 겉과 속이 다른 삶의 패턴은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는 진실한 감정을 긴장감이나 적대감 뒤로 감추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관계로부터 도피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날마다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서로 동떨어진 세상에 산다. 문제가 상사에게 있든 연인에게 있든 본인에게 있든,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타협하고 기다린다. 그러다가 별안간 '쾅!' 하고 일이 터진다.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던 일이 난데없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내일이 없는 양 그 일에 매달리기도 한다. 
 

- 내가 터득한 바로는 인생에서 우연한 일이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장애는 더 큰 패턴의 일부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내 의견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신의 영적인 길은 바로 이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면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 그것이 곧 당신이 찾아야 할 영적인 길이 아닐까요?"

 

- 삶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가져다준다. 컵에 물을 채우려면 수도꼭지를 틀어야 하듯이, 감정의 도구상자를 완비하고 있다는 것은 인생의 수도꼭지에서 변화가 흘러나올 것이라는 신호이다. 우리가 수도꼭지를 틀기 전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영혼의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변화의 수도꼭지를 튼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인생이 무엇을 선사하는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우리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목적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크나큰 두려움들을 경험하고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두려워하는 대상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몹시 두려운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제럴드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끔찍하게 두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제럴드보다 먼저 나를 찾아와 상담한 한 여성은 혼자 있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 우리는 이성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인간관계와 일을 통해, 상실과 실패를 통해, 정체성의 최극단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는 자문한다. 
"이런 경험 속에서도 우리는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한결같다. 큰 목소리로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든, 그저 삶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든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행복할 때나 힘들 때나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인생의 가장 쓰라린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는 보증이다. 사랑이 우리를 치유하게 하려면 사랑을 우리 삶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고대의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쓰라린 상처를 가장 심오한 지혜로 바꾸는 길을 찾아야 한다. 

 

- '상처'와 '지혜'의 경험은 자연스러운 순환 주기의 일부로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상처는 우리가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므로, 일어난 일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면 순환을 바라보는 초점도 바뀌게 된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든 도망치고 싶든, 어떻게든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을 때는 그 감정 안에 갇히기 쉽다. 하지만 무엇에서 비롯된 상처이든 우리 안에는 상처를 지혜로 바꾸는 힘이 있다. 상처를 준 경험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고통을 대하는 마음가짐, 곧 우리가 느끼는 방식은 변화시킬 수 있다. 

 

- 언뜻 삶의 사건들을 새롭게 느끼는 척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가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들어 서양의 과학자들은 고대인이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했던 미묘한 법칙을 알게 되었다. 이 법칙은 주변 세상이 일종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 제안한다. 세상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을 그대로 비추는 양자망 quantum fabric인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몸의 건강 상태는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 세계 평화에 대한 지지까지도 우리의 마음 깊이 자리한 믿음을 그대로 반영한다.  
 

- 많은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힘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열쇠가 이 미묘한 원리에 있다! 인생의 진리를 찾아다니던 구르지예프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외딴 수도원에 이르렀을 때 내면의 강력한 힘이 깨어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으라는 권유를 들었다. 그의 스승은 말했다.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힘을 그대의 내면에서 획득할 때까지 이곳에 계십시오."

 

- 나는 그 힘이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얻는 사랑과 지혜, 공감이라고 믿는다. 마음의 상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열쇠는 삶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게 하는 비결과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힘이다.  

 

- 어떤 것이 끝나고 다음 것이 시작되기 전의 짧은 순간, 그 '사이'에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은하계의 탄생과 소멸에서부터 직업과 인간관계의 시작과 끝, 심지어는 들숨과 날숨 같은 호흡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 행위에는 시작과 끝이 있게 마련이다. 출발과 정지, 팽창과 수축, 삶과 죽음의 주기가 있는 것이다.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시작'과 '끝' 사이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어떤 순간이 존재한다. 바로 그 순간에 마법과 기적이 일어난다! 아무것도 선택된 것이 없는 상태, 그 찰나의 틈에 모든 가능성이 존재한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몸을 치유하는 힘,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힘을 받게 된다. 모든 사건은 이 강력한 마법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 축복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 그저 그것이 일어났다고 인정하게 해 준다. 일단 경험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고 나면, 상처는 정체되지 않고 몸 안을 돌아다닌다. 축복은 루미가 말한 옳고 그름을 초월한 곳에 도달하는 관문이며, 틈새 공간에 접속하는 열쇠인 셈이다. 축복이 마음의 상처를 일시적으로 보류해 주면 그동안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대체할 수 있다. 

 

- 우리는 축복하는 행위를 통해 인생의 가장 쓰라린 상처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해방하는 힘을 얻게 된다. 축복을 하면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난 근본 원인을 찾느라 쓰라린 상처를 헤집고 원인을 캐내는 고통을 끝없이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상처를 파헤쳐 원인을 깨닫는 힘든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면 어느 정도 치유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축복하는 행위만으로도 내면의 힘을 일깨워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것도 순식간에 분노와 상처로 얼룩진 나약함의 자리가 아니라 강인함과 명료함의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 기도할 수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시작된다. 

 

- 너무 간단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축복이 그렇게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 축복을 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삶에 축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불편하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이 질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은 이렇다. 

 

-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거나 보복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통념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꿔 말하면,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너도 당해야 한다는 식의 대응을 넘어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축복은 당신의 것이니 축복의 혜택을 마음껏 누려도 좋다!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왜 자신을 상처 안에 가두고 고통을 초래하는 믿음을 고집하는지 그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위 질문들에 대해서는 옳은 대답도 없고 그른 대답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자기 생각이 어느 자리에 있으며 당신이 자신의 믿음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 예수가 제공하는 열쇠 중 하나는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지혜의 말과 행동에서는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불멸의 자리(예수 자신이 '왕국'이라고 부르는 곳)'에 들어가려면 중용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고 말할 때도 그런 기품이 느껴진다.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만들 때, 위를 아래처럼 만들 때, 남성성과 여성성이 그대 안에서 하나가 될 때 ... 그대들은 왕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예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넘어서서 볼 수 있을 때, 즉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고 분별하는 마음을 접어둘 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을 뛰어넘을 때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 같은 진리가 실재하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을 삶 속에 실현하려면 가슴의 느낌으로 '신성神性의 장 the Field of the Mind of God'에 말을 걸어 창조해야 한다. 

 

- <도마복음>의 번역본들은 우리에게 축복을 하라고 권하면서도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왜 축복이 효과가 있는지는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참조할 만한 내용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현세와 다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영적 자질을 설명하는 대목일 것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을 왜 축복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질문이다. 오래전 축복의 힘을 발견했을 때, 나 역시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답은 의외로 명쾌하다. 상처를 대면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상처가 곪아 소중한 것들을 서서히 하나씩 앗아가고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방치하든가,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한 다음 건강하고 활기찬 삶으로 나아가든가.  

 

- 다음 구절이 위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열매 맺으면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내면에 있는 그것이 너희를 파멸시키리라."

- 이 원리를 적용할 때 겪는 어려움과 보상은 성 프란치스코의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는 신을 사랑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앎이 더 깊어질수록, 나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아름다운 경험이든 추악한 경험이든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치유의 길을 선택한다면, 축복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 이들처럼 축복을 일상에서 실천하면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나 상처 주는 것들을 축복하는 힘을 내면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 "나는 이 축복이라는 것을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한 번 해볼 겁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한 번 해보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살겠어요." 
나는 대답한다. "좋아요! 한 번이면 충분해요!"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축복의 문을 열어젖히는 그 순간, 우리의 내면은 변화한다. 변혁이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나면 절대 그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까닭이 없다. 내 몸의 병이 낫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마음을 할퀴는 감정을 느끼려고 하겠는가? 한 번 시도하고 되돌아갈 생각이든 계속해볼 작정이든, 축복이 작동하는 경험 전체를 두루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미워하던, 어쩌면 분노를 품기까지 했던 사람과 장소, 사물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 타인의 상처를 대면하면 자기 자신을 잊기 쉽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신의 마음'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우리의 반응, 즉 감정의 잔상이다. 가족 간의 사건이든 파장이 큰 전 세계적 사건이든 규모에 상관없이 비극이 일어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가지는 느낌이 의식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비극을 목격한 우리 자신을 축복하라! 

 

- 계속 축복하라! 내 경험에 의하면, 축복 연습은 한두 번 만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처를 마음속 깊이 꼭꼭 숨기는 기술을 연마하며 살아왔다. 그 감정을 감쪽같이 위장해서 파묻어놓은 바람에 감춰둔 곳을 아예 잊어버리기도 한다. 처음 몇 번은 축복의 의식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쳐놓은 단단한 방어막을 뚫고 들어가려면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할 것이다. 

 

- 그러니 축복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소리 내어 축복의 말을 하라. 거듭거듭 반복하라. 이름이든 단체든 사람이든 날짜든, 고통을 안겨준 원인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말하라. 구체적일수록 당신의 몸이 기억하는 상처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배 속 깊숙한 곳에서 뻗어 나오는 열기로 몸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축복의 말을 계속 반복하라. 축복의 말을 반복함에 따라 온기가 생겨나 몸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도 놀라지 말기 바란다. 축복이 상처의 응어리를 풀어 온몸을 돌게 만드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축복의 의식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상처를 준 대상은 그대로 존재하겠지만 상처를 느끼는 방식은 바뀌었다. 이것이 축복의 힘이다. 이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아름다움을 정의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움이 자기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한다. 과학자에게 아름다움은 수학 방정식을 풀 때 주어지는 우아한 해답의 형태를 띨 수 있다. 사진작가는 사진작품에 드러난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위대한 창조질서의 표현'으로 본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우주의 내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미적 경험을 하므로 아름다움의 정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힘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경험이나 성질, 판단, 개념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정의를 내리든 아름다움이 어떤 힘을 지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변화한다. 아름다움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아름다움으로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을 치유할 수는 있다. 

 

- 고대의 전통들이 주장하듯이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힘을 지녔다면, 아름다움은 자연의 힘 가운데 가장 기이한 힘을 가진 듯하다. 우리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중력이나 전자력과는 달리,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까지 잠들어 있다. 아름다움은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까지는 휴면 상태로 있다.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생명체는 우리뿐이므로, 우리가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인정할 때만 아름다움은 잠에서 깨어난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아름다움은 가슴과 머리와 영혼으로 하는 경험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삶의 '불완전성'에서 완전함을 보려는 우리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받겠지만, 자신도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 충격은 누그러질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경험 속에서 균형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 

 

- 날마다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물 안에 늘 존재한다. 아름다움이 절대 존재할 리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 우리는 각자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늠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 균형을 가늠하는가? 당신에게 아름다움의 잣대는 무엇인가? 

 

- 이 이야기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나는 그 남자의 겉모습만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단정 짓고 말았다. 굳은살이 박이고 말라비틀어진 그의 몸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동전 한 닢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나와 무언가를 공감하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그가 아니었으면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그의 세상을 일부분 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선입견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또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허락할 때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 흥미롭게도 우주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의외의 순간에 깨달음을 선사하곤 한다. 교훈은 대부분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직후에 오는 것 같다. 마치 진정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시험에 들게 하는 것처럼! 

 

- 우리는 길을 가다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혼자 걸어갈 때는 이상한 사람을 만나도 그저 흘끔거리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면, 타인의 기행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목격한 것을 언급하곤 한다. '불완전함'을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덜 완벽한 것을 덜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우리의 성향일지 모른다. 

 

- 이보다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모아놓을 수 있을까? 모두가 흥미롭기 그지없었지만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신경 근육에 문제가 있어 팔다리를 통제하기 어려운 장애인인 듯 했다.... 나는 인생에서 우연이란 결코 없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가 내 앞을 지나갈 때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입이 일그러질 정도로 한 걸음 한 걸음 서툰 발걸음을 내딛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에게 걷는 것은 하나의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 불과 몇 초 사이에 그가 주고 간 선물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그의 의지와 용기였다. 그가 지금 이곳에 없었다면 내 인생의 이 순간은 얼마나 공허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 용감한 남자는 그의 존재 자체로 내 인생에 아름다움을 심어주었다. 나는 그가 내 앞에 나타나준 것에 감사하며 생각했다. 오늘 이 남자를 본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 사람이 많은 곳에 가게 되면 주위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자. 그러고 나서 한 사람을 의식적으로 주목하자. 누구라도 좋다. 그 사람의 어떤 점이 가장 감동적인지 생각해 보자. 

 

- 테레사 수녀 같은 현인들은 어떤 설명이나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도 아름다움이 그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아름다움은 이미 여기 있다. 어디에나 늘 존재한다. 우리의 역할은 그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삶은 아름다움을 찾아낼 기회이자, 어디에서든(극심한 상처에서도, 지극한 기쁨에서도) 찾아낸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울 기회이다.

 

- 하지만 그런 기도문은 그저 관례가 아닐까? 기도 자체가 아니라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 짜여 오늘날 공식처럼 여겨지는 기도문이 마음속에 기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 우리는 날마다 순간순간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살아간다. 모든 순간의 느낌을 일일이 의식하지는 못해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느낀다. 감정이 곧 기도이고 우리가 항상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늘 기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순간이 기도이다. 삶은 기도이다! 우리는 늘 창조의 거울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치유 혹은 질병의 신호, 평화 혹은 전쟁의 신호,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존중하거나 파괴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 즉 기도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의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 기도를 하나의 '행위'로 여기면, 기도를 멈추면 기도의 효과 또한 멈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기도로 여긴다면, 기도는 짧은 시간 동안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20세기에 발견된 고대 문서들이나 내 인디언 친구가 비를 기원하며 올린 기도, 티베트 사원의 주지 스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기도는 행위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 이런 전통들은 기도를 가끔씩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24시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감정이 기도이고 우리는 언제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어딘가에는 늘 평화가 있게 마련이므로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자신이 치유되었음에 감사해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이 치유되었음에 감사해도 좋다. 우리는 날마다 얼마간 치유되고 회복되기 때문이다.  

 

- 실험의 효과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기도가 끝났기 때문이다.  

 

- 기도는 우리가 하루 중 특정한 시간에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 상태이다. 응답에 둘러싸이고 바라는 것에 에워싸이라는 구절은 주지 스님과 내 친구 데이비드의 말과도 통한다. 응답받았을 때의 충만감을 진심으로 느껴야만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치유된 삶과 치유된 관계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낄 때, 세상의 평화에 에워싸인 것처럼 느낄 때, 그 감정이 언어이자 기도가 되어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힌다. 

- "나를 엠 숙모가 있는 집으로 데려다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도로시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발을 구르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면 스타벅스 앞이든 회사 회의실이든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장면이 날이면 날마다 반복될 것이다. 도로시의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도로시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 그것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도로시는 옆에 있는 착한 마녀 글린다나 먼치킨에게 마법을 부리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마법의 물건', 즉 슬리퍼를 가진 사람은 도로시였다. 도로시의 신발은 모세의 지팡이나 요셉의 외투, 샤먼의 돌과 같다. 도로시는 발을 세 번 구른 것을 시작으로 이미 집에 있다는 느낌에 젖었고, 순식간에 집에 와 있었다! 

- 우리의 내면에 태초의 마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제 전 세계가 공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릴 때 이성과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능력을 꿈꾼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어릴 때는 현실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아직 물들지 않아 스스로 믿음을 제한하지 않는다.

- 비록 삶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잊혔지만, 누구나 위대한 힘과 연결되는 느낌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그 연결을 갈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의 방식을 지금까지 보존해 왔다면? 예를 들어, 부지불식간에 동화나 마법의 이야기에 잃어버린 기도의 양식을 찾는 힌트가 보존돼 있다면? 이것이 가능할까? 감정이 기도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기로 선택한 그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랑과 공감, 이해, 보살핌을 바란다면, 내면에서 그런 자질을 키워야 '신의 마음'이 그것을 우리의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반영해 줄 수 있다. 풍요를 바란다면, 삶 속에 이미 존재하는 풍요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그리고 그 힘은 당신의 내면에 있다! '당신'이 골자이다. 컴퓨터에서 코드에 의해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듯, 말은 우리의 몸 안에 감정을 일으키는 방아쇠와 같다. 하지만 코드나 말은 의미를 부여받기 전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의미란 코드에게는 컴퓨터 운영체제이고, 우리의 말에게는 우리의 감정이다. 

 

- 기도는 사적인 것이다. 감사하는 느낌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쓰는 말들이 당신에겐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기도가 갖는 재미있는 측면이다. 그러니 당신만의 기도문을 만들어라! 신과 소통하는 성스럽고 은밀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오로지 당신에게 의미 있는 특별한 말을 찾아야 한다. 어떤 내용이든 좋다. 당신의 기도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한마디 말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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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년 전 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의 고지대 사막에 살았던 위대한 지혜의 수호자 나바호 Navajo 인디언은 대지와 자연은 물론 주변 부족에 의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극심한 가뭄과 더위, 식량 부족이라는 혹독한 환경에 시달리면서, 그들은 외부 세상의 모진 환경을 견디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통이 지닌 힘을 다스리고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생존은 그 방법을 배우는 데 달려 있었다.

 

- 그들은 시련에 의해 극심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면의 강력한 힘이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존의 열쇠는 역경에 처했을 때 방황하지 않고 그것에 몰두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내면에서 '구심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시련을 견뎌내는 강인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깨달음을 마음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삶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통찰하는 자신감을 내면에서 얻은 것이다. 

 

- 고대인의 지혜와 궤를 같이하는 나바호 인디언의 전통은 행복이든 고통이든 모두 우리의 책임이라는 인생관을 견지한다. '아름다움의 기도 Beauty Prayer'라 불리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들의 지혜는 기록과 구전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세 구절로 핵심을 요약할 수 있다. 나바호 선인들은 짤막한 기도문을 통해 우리의 내면과 외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심오한 지혜를 전해주었는데, 이는 최근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기도문은 우리 몸에 화학변화를 일으키고 세상의 양자적 가능성 quantum possibilities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이 기도문은 지극히 단순한 형태 안에 분명한 뜻을 담고 있다. 

 

- 루미와 성 프란치스코는 일상의 흔한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시의 언어로 표현했다. 고대인들이 우주의 위대한 힘, 우리와 우주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 시대의 말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 힘은 '기도'를 의미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결과가 삶"이라고 간단히 설명하면서, 기도는 "대지와 심장을 정화하기 때문에 생명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 지식은 우리와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이 문명이 저 문명으로, 이 일생이 저 일생으로 이어지는 동안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인류 전체의 역사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잘 보존된 과거의 정보라고 해도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는 한낱 '자료'에 불과하다. 과거에 대한 지식은 의미가 더해져야 비로소 현재의 살아 있는 지혜로 탈바꿈한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혜'와 '상처'는 동일한 경험의 양극단이며, 동일한 순환의 시작이자 끝이다. 소중한 것을 상실하거나 무언가에 실망할 때, 혹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처부터 받는다. 지혜는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우러나온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음으로써 상처를 지혜로 승화시킨다. 축복, 아름다움, 기도는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이다. 

 

- 그리스도교 목회자 새뮤얼 슈메이커 Samuel Shoemaker(1893~1963)는 단순한 시적 문장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도의 힘을 설명했다. 
"기도가 반드시 우리에게 맞게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맞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확실하다."

 

- 시간을 거슬러 상처를 준 원인을 바꾸지는 못해도,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약속이 깨지면서 느낀 충격과 실망감이 우리에게 뜻하는 바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아픈 기억조차 치유할 수 있게 된다.  

 

- 살다 보면 감정을 억눌러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라밖에서는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의 다름이 증오로 표출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평화와 치유 같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 

 

- 20세기 후반에 진행된 실험들은 우리가 모두 우리를 세상의 사건들과 연결하는 에너지장 energy field에서 헤엄치고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이 에너지장은 '양자 홀로그램 Quantum Hologram', '신의 마음 Mind of God'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연구들에 따르면, 우리 마음속의 믿음과 기도는 에너지장을 통해 주변 세상으로 전파된다. 

 

- 현대의 과학이든 고대의 전통이든 시사하는 바는 같다. 삶 속에서 경험하기를 바라는 상황들을 우리 스스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지구상 가장 외딴곳들에 숨겨져 있는 잃어버린 기도의 양식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문서와 전통 속에 대대로 보존되어 온 '잃어버린' 기도 양식은 어떤 특별한 기도문이나 표현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감정에 의존할 뿐이다. 특히 이 기도는 더 높은 근원을 향해 무기력한 심정으로 도움을 간청하기보다는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느낄 것을 권장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우리를 세상과 연결하는 에너지장에게 '말을 거는' 것은 바로 이 응답받았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감정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세상은 물론 삶과 관계를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된다.

 

- 이 기도 양식을 사용하기 위한 열쇠는 아름다움과 축복, 지혜, 고통의 숨겨진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축복, 지혜, 고통은 삶이 가져다주는 깊은 상처에 아파하고, 상처를 통해 배우고, 상처를 놓아주고, 상처를 뛰어넘는 대순환 과정에서 각각 필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 2천 년 전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작자 미상의 문서에 따르면, 우리의 내면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뿐 아니라 우리와 그 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또한 존재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행하기 힘든 것은 천사처럼 생각하는 것이며 ... 천사가 행하듯이 행하는 것이다."

- 기도는 신과 천사의 언어이다. 또한 지혜와 아름다움, 은총으로 삶의 고통을 치유하도록 부여받은 언어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배우든 1세기의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배우든 메시지는 동일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언어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인생의 과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후손을 위해 당대의 언어로 상세한 지침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몸의 치유, 관계의 개선, 세계의 평화라는 세 가지 염원이 '잃어버린' 기도 양식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도와는 달리, 이 기도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감정이라는 침묵의 언어에 기반한다. 이 기도는 기도가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한다. 고대인들은 이런 감정을 통해 우리가 창조의 힘, 곧 '신의 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 학자들은 어떤 기도든 네 가지 범주에 하나 이상 해당한다고 말한다.

첫째, 격식을 갖추지 않은 일상적 기도

둘째, 간청하는 기도
셋째, 예배 의식에서 행하는 의식적 기도
넷째, 명상적 기도

 

- 다른 형태의 기도가 항상 존재해 왔다. 다섯째 기도 양식, 즉 '잃어버린' 기도는 오롯이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 이런 기도 양식을 나타내는 것들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례로, 아메리카 남서부 사막지대에 세워진 고대 석조 건축물은 원래 '예배당 Chapel'이었다. 그곳은 지혜를 공유하고 기도를 올리는 성소였다. 땅을 깊이 파서 지은 이 원형의 석조 건축물은 이른바 '키바 kiva'라고 알려져 있는데, 새기고 깎고 색칠한 키바의 벽들을 잘 살펴보면, 잃어버린 기도 양식이 원주민의 전통 속에서 어떻게 활용됐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 포코너스 지방의 키바 유적지 내부에는, 오래전 석조 건물의 벽을 뒤덮었던 진흙 벽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진흙 벽토에는 풍요로운 옥수수 들판 위를 떠도는 비구름과 번개의 모습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다른 벽에는 엘크와 사슴 같은 야생동물이 그려져 있어, 계곡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보여준다. 고대의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을 기록해 놓았다. 그들은 경험하고 싶은 것들의 이미지로 주변을 가득 채워놓고 기도를 올린 것이다! 그 그림들은 오늘날 교회나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적이나 부활의 장면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이미지들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기도가 이미 응답받았다는 느낌을 불어넣어 준다. 고대인들에게 기도는 오감이 총동원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이었다. 

- 이 기도를 아직 해본 적이 없다면 한번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엇이든 당신의 인생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병이 치유되는 것도 좋고, 가족이 풍족해지는 것도 좋고, 인생을 함께할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것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하지 말고,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껴보라.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기도가 온전히 다 이루어졌을 때의 충족감을 구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느껴보라. 

 - 지성의 장이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제야 그 개념을 좀 더 고차원적 단계로 끌어올려 탐구 대상으로 삼고 대세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동료였던 프린스턴대학의 물리학자 존 휠러 John Wheeler(1911~2008)는 만물을 연결하는 에너지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2002년 휠러가중병에서 회복된 후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연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사건이 자신이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기자가 묻자, 휠러는 의식과 우주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고 대답했다.

- 1972년 인구 만 명이 넘는 미국의 24개 도시에서 공동체 인구의 1퍼센트 미만(100명)이 참여했을 뿐인데도 각각의 공동체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와 유사한 몇몇 연구가 이어진 후 중동에서 '국제 평화 프로젝트 International Peace Project'라는 주목할 만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논문은 1988년 <분쟁의 해결 Th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이라는 학술지에 실렸다. 1980년대 초반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 기간에 연구자들은 단순히 머리로만 평화를 생각하면서 평화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평화를 '느끼도록' 특정한 사람들을 훈련했다.

 

-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전쟁으로 파괴된 중동 전역에 배치되었다. 그들이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는 동안 테러리스트의 활동이 멈추고, 범죄 발생 건수가 줄고, 응급실 방문자 수와 교통사고 발생률까지 급격히 감소했다. 훈련자들이 평화로운 감정의 표현을 멈추자, 통계치는 반전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전체 인구 중 소수만이라도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그 평화가 주변 세상에 투영된다는 기존의 연구 결과를 입증한 것이다.  

 

- 연구자들은 평일과 휴일, 심지어 달의 주기까지 고려했는데, 너무나 일관된 데이터가 나오는 바람에 평화를 세상에 투영하려면 몇 명이 평화의 경험을 공유해야 하는지 정확한 인원수까지 산출할 수 있었다. 그 수는 전체 인구의 1퍼센트의 제곱근이다. 이 공식으로 도출한 수는 생각보다 적다. 예를 들어 인구가 100만 명인 도시라면 100명 정도이다. 전 세계 인구를 78억이라고 한다면, 전 세계적으로 필요한 수는 9천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 숫자는 시작 단계에서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나타낸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효과는 더 빨리 나타난다. 

- 엘리엇은 자신의 이론을 경제 주기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는데, 그의 연구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주식시장 예측 모델로 알려진 엘리엇 파동이론 Elliott Wave Theory의 토대가 되었다. 돈을 쓰는 습관 등 인간의 모든 행태를 수치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리 놀라운 생각이 아니다. 숫자는 우주의 기원부터 커피잔 속의 우유 소용돌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만국공통어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추론을 따른다면, 자연이라는 가시적 세계를 느낌과 감정의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은유 metaphor로 볼 수도 있다는 주장 또한 타당하지 않을까! 프랙털 기하학 fractal geometry 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 비교적 최근에 부상한 프랙털기하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혁신적 방식으로, 수학에 예술을 가미해 과거에는 방정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것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프랙털기하학을 이용하면 비쭉한 산봉우리에서부터 혈관에 이르기까지, 해안선에서부터 실오라기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자연계의 많은 것을 모델화할 수 있다.  

 

- 가장 많이 알려진 프랙털 패턴은 망델브로 방정식 혹은 망델브로 집합이다.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 Benoit Mandelbro(1924~2010)가 1970년대에 발견한 이 '살아 있는' 방정식이 컴퓨터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곡선과 나선, 레이스 모양이 빠르게 형태를 바꾸면서 아름다운 패턴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것은 균형과 혼돈 사이를 오가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춤을 추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을 통해 여러 색깔과 패턴이 변하는 자극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감정적 관계가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 패턴들은 우리의 삶을 수놓는 수많은 관계와 사건, 그 안에 녹아 있는 희로애락을 대변한다.  

 

- 컴퓨터 화면에서 모든 패턴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때 균형이 이루어지듯이, 모든 요소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때 우리는 가장 큰 재능뿐 아니라 가장 큰 시험 또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 이미지들은 주고받음, 수축과 팽창, 상처와 치유같이 영원히 계속되는 대립 요소들의 춤을 상징하며,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가 기울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이야기해 준다. 우리는 그 이미지들 속에서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 

 

-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배울 때, 생존과 치유를 위한 도구들을 우리의 '영적 도구상자' 안에 전부 갖출 때 비로소 배운 것들을 적용하여 로맨스나 직업상의 변화, 동업자, 우정 등을 우리에게 끌어당길 수 있다. 영적 도구를 갖추기 전에는 결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상처받고 실망하고 상실과 배반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런 난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 대신할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그런 선택을 했다. 바꿔 말하면, 안전한 게임을 한 것이다. 제럴드는 마음이 이미 가정에서 떠났으면서도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몸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었다. 충만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직장과 친구, 사랑을 떠나는 것과 달리 선택할 만한 대안이 없을까 봐 두려워 기존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 사람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더 좋은 대안이 나타날 때까지는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집착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확실성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패턴이긴 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패턴인 것만은 사실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라이프 스타일이든,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패턴을 계속 반복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가까운 사람들과도 쉽사리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속내를 보여야 할지 잘 몰라서, 겉으로는 멀쩡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절망에 빠져 비명을 지르면서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면서도 인간관계의 달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제럴드는 과거에 경험한 연애와 교제, 직장생활을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들로 설명했다! 그는 파국을 맞이할 때마다 그것이 '실패한' 관계였다고 규정지었다. 사실 그는 인간관계가 워낙 훌륭하고 원만하다 보니 그가 가장 두려워한 혼자되는 외로움은 맛볼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치유는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두려움은 점점 더 교묘해져 갔다. 결국 삶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지점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 우리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수없이 통과하게 되는데, 원래 처음이 가장 힘든 법이다. 최초의 경험은 그만큼 가장 강력한 변화의 도우미가 되어주는 것 같다. 왜 그렇게 크게 상처받았는지 이유를 깨닫고 나면, 뼈아픈 경험은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 두 사건을 연결하는 신비로운 공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선인들의 지혜에 담겨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하루에 두 번씩 지구가 그 신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태양이 막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 직후, 아직 밤의 어둠이 미처 내리기 직전의 순간이다. 두 번째는 밤의 어둠이 막 지나간 직후, 태양이 하늘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기 직전의 순간이다. 

 

- 둘 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완전한 낮도 아니고 완전한 밤도 아닌 시간이다. 전통에 따르면, 그 짧은 순간이 통로가 열리는 때이다. 바로 그 순간에 심오한 진리가 깨우쳐지고,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며, 기도가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인류학자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1925~1998)는 유명한 저서 <또 하나의 현실 A Separate Reality>에서 이 통로를 '세계 사이의 틈'이라고 부르면서, 이 통로를 통해 영혼과 마귀, 힘이 공존하는 비가시적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불빛 하나가 켜졌다가 다음 불빛이 켜질 때까지 그 사이에는 반드시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건이 완성되고 새로운 사건이 아직 시작되기 전의 찰나, 그 공간 속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균형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는 삶과 죽음, 고통과 치유, 전쟁과 평화의 모든 시나리오들이 잠재적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이 지점이야말로 느낌과 기도가 삶의 청사진이 되는 곳이다. 

 

- 루미가 말한 옳고 그름을 초월한 곳에 이르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축복의 지혜 안에 있다고 본다. 어떤 대상을 축복하는 것이 축복의 대상을 승인하는 것과 같다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축복은 어떤 행동이나 상황, 사건을 용납하지도 방해하지도, 권장하지도 않다. 축복에는 가치판단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 그대로 인정할 뿐이다.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행위는 치유의 시작을 허용하는 열림 자체이다.  

 

- 로런스에 따르면, "감정의 카타르시스 과정은 부당하게 당했다는 느낌을 극복하게" 해 준다. 상처를 감추는 방어기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치유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무엇 때문에 상처를 받았는지 아예 잊어버렸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몸은 잊지 않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몸의 세포와 DNA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과 직접 소통한다. 몸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그것에 상응하는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 축복이란 현재 마음을 괴롭히고 있거나 과거에 마음을 괴롭혔던 일에 대한 감정을 다시 규정하게 하는 생각이나 느낌, 혹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축복은 상처받은 감정을 몸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풀어주고 치유의 빛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감정의 윤활유'이다. 마음에 윤활유를 바르기 위해서는 누가 고통을 받았고, 어떤 이유로 고통을 받았으며, 누가 그 결과를 목격했는지, 상처받은 사건을 모든 측면에서 인정해야 한다.  

 

- 무엇이 축복인가에 관한 토론을 하다 보면 무엇이 축복이 아닌가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축복한다고 해서 내게 일어난 일이 대수롭지 않다거나 또 일어나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잔혹한 행위나 학대를 용인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일에 대해서 승인 도장을 찍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다시 경험해도 괜찮다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수소, 질소, 산소, 탄소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원소는 우주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물질이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문자 그대로 별과 은하를 구성하는 물질과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 몸을 짓고 수리하는 데 필요한 자재가 모자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는 것일까? 

 

- 인체의 모든 세포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적의 장기인 심장은 스스로 치유하면서 장기간 견딜 수 있는, 인체라는 장치의 '미션 크리티컬'인 셈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기관의 정지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마다, 그 사람에게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찰해야 한다. 인체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장기 중 하나로서 오랫동안 훌륭하게 제 몫을 해왔으며, 재생 활동이 필요 없을 만큼 견고한 세포로 이뤄진 장기가 어째서 고작 몇십 년 만에 동작을 멈춰버리는 것일까?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다른 요인이 있지 않고서야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 이 법칙은 '긍정적인' 믿음뿐 아니라 '부정적인' 믿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감사와 공감, 사랑같이 생명 친화적인 감정은 혈압 강하나 '유익한 호르몬의 분비, 면역력 강화 등 건강에 이로운 조건을 형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노여움과 미움, 질투, 분노 같은 생명에 해로운 감정은 불규칙한 심장박동, 면역력 저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의 증가 등 유해한 조건을 유발한다. 
 

-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천상의 천사와 지상의 천사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천상의 천사는 자신이 천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랑에 빠진다. 고통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 열린 마음이다. 우리가 쓰라린 상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순수성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실제로 천사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천사이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공감하는 마음뿐 아니라 화내고 분노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 사해문서의 저자들은 틈새 공간에서 힘이 비롯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에세네 평화의 복음>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모든 기적이 숨겨져 있다"고 전한다. 다른 전통들과 마찬가지로,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틈새 공간으로 들어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 에세네 복음이 으뜸으로 여기는 가르침이다. 특히 에세네 복음은 기도하기 전에 어떻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가장 먼저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판단과 두려움, 상처를 멈춰보라고 복음서는 권한다. 마음이 이렇게 중립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상처받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혼탁한 판단이 아니라 건강함과 명료함을 기도에 실을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도가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의식 상태에서 '신의 마음'과 나누는 성스러운 대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도마복음>의 해당 부분에는 예수가 평생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한 말, 특히 삶과 죽음, 불멸에 대해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속성을 지닌, 이른바 '존재의 나무들'을 언급한다. 
"그것들(나무들)을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 축복할 때는 어떤 상황에서든 세 가지 대상 혹은 세 부류의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 예외는 늘 있겠지만, 우리는 대개 고통받는 사람, 고통의 원인, 그리고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을 모두 축복해야 한다. 이제 각각의 대상을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1. 고통받는 사람 축복하기 : 우선 축복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상처를 입고 고통받는 사람이다. 9·11 테러나 베슬란 인질 사건처럼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형 사건의 경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실감을 경험한 피해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2. 고통의 원인 축복하기 : 사람들은 이 대목을 가장 어려워한다. 하지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유발하며 분신처럼 아끼는 것을 내게서 앗아간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하는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은 고통의 원인을 축복하는 것이 제2의 천성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3. 고통을 목격한 사람 축복하기 : 축복을 할 때 흔히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통을 초래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결과를 인지하는 사람 역시 존재한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민간인과 무고한 어린이들의 학살, 여러 사회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학대 행위, 관계의 단절과 가정의 해체가 초래하는 결과와 화해해야 한다. 
 

- 축복의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만한 자기만의 장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아래의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해보자. 
"나는 (          )을 축복한다."
빈칸에는 고통을 당하고 있거나 고통을 당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나는 (          )을 축복한다." 
이번에는 고통을 준 사람이나 사건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되도록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고통을 목격한 나를 축복한다."

 

- 죽은 멀린을 축복했다. 녀석이 내 삶에 선사한 모든 기쁨을 생각하면서 녀석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거기까지는 쉬웠다. 그러고 나서 코요테들을 축복하기 시작했다. 특히 멀린의 생명을 앗아간 코요테들을 축복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곧 코요테와 미묘한 친밀감이 들기 시작했다. 코요테는 내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멀린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코요테다운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축복하면서 자연이 때로는 왜 그리 잔인해 보이는 건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축복을 마음 안에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세 번 반복하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온기가 일더니 점점 몸 전체로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차오르면서 이내 격렬한 울음이 터졌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더는 축복할 기운이 남지 않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축복했다. 그날 나는 축복의 의식을 완성했다.

 

- 축복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바뀌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나는 강연 도중 청중에게 뉴스를 시청하는 습관이 바뀐 분은 손을 들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모든 사람이 갈수록 뉴스를 덜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 우울해지고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본 뒤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그런 상황에 부닥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우리 자신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소화하는 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 당신에게도 축복의 은혜가 찾아오기를! 곤경에 처한 당신에게 축복이 친구가 되어주기를! 

 

- 아름다움은 인간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경험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이 신비한 힘과 길고도 기이한, 때로는 위험한 춤을 춰왔다.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 담긴 옛이야기 들은 천상의 강력한 천사들이 타락한 이유를 새로이 창조된 여성, 즉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에서 찾고 있다. 

- 초기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닦은 예언자 에녹은 <에녹서 The Book of Enoch>에서, 지상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거부하지 못해 타락한 천사가 200명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을 이끌었던 우두머리 천사들'이 누구인지 밝힌다. 샘야자 Samyaza와 라무엘 Ramuel, 투렐 Turel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완벽주의자들'은 생명이 유한한 여자들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능은 영원한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을 압도했고, 그들은 관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후대의 성경에는, 델릴라라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가장 힘센 남자 중의 하나인 삼손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여인이 배신함으로써 삼손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 역사는 우리와 아름다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역사에는 아름다움의 힘과 유혹,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우여곡절,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은 욕망, 아름다움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녹아 있다. 우리는 가장 매혹적인 경험인 아름다움을 정의하고자 골몰해 왔다. 아름다움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걸까? 

 

- 가장 쓰라린 상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찾아 영혼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선현들의 위대한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지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날마다 선택을 할 때마다 이 경험과 저 경험을 비교하지 말고, 오직 그 순간 우리 앞에 놓인 것에 집중하고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이로써 더 위대한 아름다움을 삶 속으로 끌어당기는 씨앗을 심는 것이다.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을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과 자꾸 비교하다 보면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게 된다. 나바호 인디언의 전통에는 이 원칙이 담긴 단순한 경구가 있다. 
"아름다움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기를!"

 

- 내 친구는 매일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집에서 일터로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데, 많은 야생동물이 도로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새벽녘과 해질녘에 죽는 일이 흔하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이렇게 기도를 올린다. 
"큰 생명체도 작은 생명체도 오늘 하루 다 무사했습니다."

- 너무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믿는다. 세상 만물은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 그리고 무엇을 느끼느냐에 반응한다. 내 친구는 생명체를 위해 기도한 몇 년 동안 출근길에 야생동물이 출몰해 사고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동물이 도로 옆을 지나가거나 그의 차가 지나가기 직전이나 직후에 나타난 날은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날이다.

- 또 다른 친구는 출장을 갈 때마다 비슷한 기도를 올린다. 비행기를 타든 택시를 타든 직접 운전을 하든, 그녀는 무생물체를 포함한 모든 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지성에 감사하며 길을 떠난다. 예를 들어, 비행기가 이륙하는 동안 ...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 미국, 독일, 스페인… 9개 언어 출간 ★ ★ 노틸러스 북어워드 금상 ★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왜 그렇게 많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 아마존 독자 UN, 〈포춘〉 500대 기업, 주요 대학들이 찾는 과학자이자 영성가 그렉 브레이든의 대표작. 수많은 아마존 독자가 ‘인생 책’으로 꼽은 글로벌 스테디셀러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이 새로운 번역과 편집으로 국내 독자들을 만난다. 인류의 95%가 우주를 창조한 신비로운 힘의 존재를 믿고 그것에 ‘말을 걸기’ 위해 기도를 한다. 우리는 소망을 말하며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많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무엇이 기도이고 무엇이 기도가 아닐까? 아메리칸인디언의 지혜부터 티베트불교까지, 양자물리학부터 프랙털기하학까지,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허문 20여 년 탐구로 밝혀낸 기도의 모든 것. 기도를 둘러싼 의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도 실증적인 대답. 우리가 잃어버린 기도의 핵심과 반드시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이 책에 담겼다.
저자
그렉 브레이든
출판
김영사
출판일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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