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고혜경]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 우리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 이야기

일루젼 2023. 1. 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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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혜경
출판 : 한겨레출판사 
출간 : 2010.07.31 


       

본격적인 노동절을 맞이 하기 전에, 잠시 환기할 겸 제주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나름대로는 기분 전환도 되고 즐거웠던 여행이었는데,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는 일정 중 하루를 묵게 된 북스테이에서 만난 책이다.

 

'설문대할망'이 반가워 집어들고 보니 나름대로 구면인 '고혜경' 저자였다. 꿈과 융 심리학에 관한 책에서 만났었는데, 제주 신화와 여신 숭배로 만나게 되니 느낌이 새로웠다. 사실 제목은 '할망'으로 되어 있지만, 세계적인 신화 속의 여신과 제주 신화 속의 설문대할망, 그리고 거신(거인) 숭배와 잠-무의식 성찰을 아우르는 방대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여신이 남신에 우선한다는 해석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보다는 무성적 존재로부터의 유성적 분리라고 보는 편인데, 특히 순서상으로도 차이는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서양적 해석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여신을 창조신으로 하는 신화도 있으나, 남성 원리의 발출이 여성 원리의 수렴으로 이어지며 남성이 먼저 나타났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발출과 수렴은 언제나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극과 극의 분리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며, 사실상 세가지 상태의 중첩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최상단의 삼각형은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발출의 길은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내면의 부름과 직관에 순응하는 방향이므로 순수한 바보의 길이며, 

수렴의 길은 '자신의 의지대로' 형상을 부여하고 창조하는 방향이므로 원소를 다루되 수렴하는 마법사의 길이다. 

 

이 두 길에는 실상 순서가 의미있지 않으므로 0이며, 또한 수렴의 순간 형상을 부여받은 것들은 이미 다음 계로 하강하였으므로 2이고 3이다.

 

저자는 그보다는 잊혀져 가고 있는 '여성적 힘'에서 시작해 '밤/잠/비가시적 존재'로 이어지는 '무의식'에 집중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마주할 수 있어야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 또한 상처를 마주할 수 있어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그 순간 그에게 가장 유의미한 해석일 것이므로, 타인과의 비교나 평가는 필요치 않다. 내부적 인정으로 충족되는 삶은 외부적 인정에 목을 매지 않는다. 따라서 타인의 해석이 자신에게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현재 그것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므로 흘려보내주면 된다. 그것을 애닯게 여기는 자는 자신 안에 그 부분이 억눌려 있음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애닯다. 

 

모든 단계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거기에는 고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충실하게 단계를 감각한 뒤, 새롭게 변화할 뿐이다. 

다만 선택의 순간이 필요하다면, 의지대로 행함이 수렴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 갈림길일 것이다.  

 

 


   

 

그러나 '착한 길'이 언제나 옳은 길일까?
자신의 본성과 반하는 '옳은 길'이란 없다.



- 세계의 다양한 신화의례는 결국 전 인류와 전 지구를 아우르는 단일 신화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전 세계의 신화를 '하나의 신화' (mono-myth)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 문화, 영성 안에 숨겨져 있는 신화는 우리가 한 세계에 살고 있고 또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하나'(One)가 분리되어 각자 고유하게 보이는 '여럿'(many)으로 나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에 대해 직관적으로는 감을 잡지만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불완전한 느낌과 분리된 상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각 문화권마다 고유한 신화의례를 고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각기 다양하고 신성한 신화나 의례를 통해 깊어진 이해력을 얻어 본래의 '하나'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 선하고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대변하는 어머니 상이나 아버지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내어놓는 지고지순한 딸 이미지는 있었지만, 힘과 지혜를 두루 겸비하며 섹시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온전한 여인/여신의 이미지는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없었다. 이 새로운 이미지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자극했나 보다. 어쩌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이 준비되었기에 드라마에서도 이런 여성상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미실은 남신시대에 살아남은 몸과 힘은 없고 선함과 자비심만 있는 반쪽짜리 여신이 아니라 인류 초창기의 어마어마한 여신(the Great Goddess) 이미지와 참으로 닮았다. 우리의 무의식이 우연히 미실을 선덕이란 가장 지혜로웠던 여왕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래 여왕/여신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기에 미실을 여왕으로 알아보았으리라. 

 

- 이런 조건이 소위 '원시인'에게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번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주장을 상기하게 된다. 그는 이들이 현대인보다 덜 지적이거나 덜 세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생활했다고 말한다(레비-스트로스, <신화와 의미>). 어쨌든 이들은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지능이나 기술면에서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을 최근 고고학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길쌈이라는 인류 최초의 공예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인류사에 등장했다는 증거도 제시하고 있다.

 

- 길쌈의 탄생은 우주 진화사의 대혁명이다. 자연에서 문명으로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선사시대 길쌈 연구의 전문가 엘리자베스 바버(Elizabeth J. W. Barber)는 길쌈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긴 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물 짜기(netting)나 바구니 짜기(plaiting)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베를 짜는 모습을 연상해 보면 날실은 베틀에 단단히 고정하고 씨실은 한 올 한 올 날실의 위아래로 부드럽게 흘러 다닌다. 그러나 동물의 털이나 머리카락 혹은 천연섬유처럼 자연에서 채취한 원상태로는 길이가 짧아서 길쌈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길쌈을 하자면 먼저 물레질이 필요하다. 물레질은 중심점이 있고 거기서부터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원형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 창조란 만물의 근원인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 가늘고 긴 한가닥의 실을 자아내는 일인데, 창조할 때마다 우리는 물레를 돌리는 여신을 만나 여신이 무의식에 이미 마련해 놓은 것들을 의식의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 세계의 신화와 민담에는 물레를 돌리는 여신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들의 이미지는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원천을 상기시켜 온전성을 획득하려는 근원적인 갈망을 자극한다. 

 

- 우주를 길쌈하는 일은 신들의 영역에 속했다. 자연히 길쌈은 신의 예술이고 신성한 행위이다. 세계의 신화에 물레질하는 여신과 베를 짜는 여신은 수없이 등장한다. 물레질이나 길쌈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존재들 역시 신이거나 신과 같은 존재들이다. 파괴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러시아의 대표적인 여신 바바 야가(Baba Yaga)의 집은 물렛가락 위에 놓여 있어서 춤을 추듯 끝없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미국 인디언 호피족의 거미 여신(Spider Woman)의 집은 땅에서부터 실같이 고운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른다. 나바호족의 창조여신인 변화의 여신(Changing Woman)은 만다라같이 둥글게 돌아가는 춤을 끝없이 추고 있다. 그리스에서 공예의 여신이자 인간에게 문명을 전해준 아테나 여신은 길쌈에서 자신과 경쟁을 하려 드는 인간 아라크네의 무례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여신을 모욕한 벌로 거미가 되어 죽을 때까지 실을 잣고 베를 짜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 중국의 고대 신화 <원가>에서는 황제가 치우와의 전쟁에 승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잠신(蠶神)으로 알려진 여신이 말가죽을 걸치고 양손에는 황금색과 흰색의 실타래를 들고 하늘에서 내려온다(위앤커, <중국의 고대신화>). 그리고 가죽의 양끝을 잡아당기자 누에로 변하여 명주실을 무한정 토해냈다는데, 잠신과 말가죽의 이 기묘한 연결은 일본 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 일본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는 길쌈하는 여신이다. 베틀에 앉아 천을 짜고 있을 때 하야스사노오노미고토(速須佐之男命)가 집의 용마루에 구멍을 내고 얼룩말의 가죽을 거꾸로 벗겨 떨어뜨리자 아마테라스가 놀라서 베틀 북에 음부를 찔린다(김화경, <일본의 신화>). 또 다른 민담에서도 말과 잠녀의 이런 기묘한 연결을 찾아볼 수 있다. 한 남자가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자 그의 딸이 아버지를 찾으려 애태우다가, 말에게 아버지를 찾아 데려오면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말의 노력으로 아버지가 집으로 되돌아오지만 처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게다가 차마 딸을 말에게 줄 수 없는 아버지가 그 말을 죽여버린다. 그러자 죽은 말의 가죽이 처녀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 잠신과 말가죽의 거듭되는 관계는 수수께끼 같다. 그 실마리를 누에나방의 생태에서 찾아보자. 누에나방은 알에서 부화되어 먼저 누에가 되는데, 누에는 자라서 고치로 변하고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나방이 된다. 누에나방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평생 탈바꿈을 하는데,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뱀과 나비와 더불어 대표적인 변형(transformation)의 상징이다. 가죽을 뒤집어쓰고 벗는 묘사는 탈피와 변모의 신화적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말가죽일까? 알에서 나온 누에의 검은 털이 많은 모습을 보고 말가죽을 뒤집어썼다고 연상한 걸까? 중국 민담에서 누에를 '말머리 모양의 벌레' 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모양새로 인해 말을 연상했을 것도 같다. 누에의 돌출된 입모양과 갓 태어났을 때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인 이미지는 말의 얼굴과 털가죽으로 덮인 몸을 연상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일본 신화에서는 누에와 남성 성기의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말과 잠녀의 결합이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타협점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아직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겨둔다.) 

 

- 다리는 원형적 이미지이다. 물리적인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에도 존재하는, 물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다. 땅과 하늘은 무지개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밤하늘의 은하수는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주고, 인간의 우뇌와 좌뇌도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자연에서든 인간의 내면에서든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다리가 존재한다. 다리라는 원형에는 연결과 확장을 향한 인간의 염원이 담긴 듯하다. 

- 다리는 통과의 자리이자 동시에 시련의 자리이기도 하다. 심리학적으로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연결되지 않은 채 심연의 골짜기 위에 걸려 있다. 분명 변화나 혁명은 두렵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늘 이 두려움보다는 미지에 대한 동경이 더 컸다.

 

- 영토의 확장이라는 가시적인 세계의 변화보다는 각자 내면의 세계로 다리를 놓으라는 뜻이 아닐까? 의식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마야의 베일로 가려진 세계에서 참나의 세계로 이어지는 할망과 인간의 거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여신과 남신의 창조에 큰 차이가 있다면, 남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반면 여신은 유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예로 "빛이 있으라" 같은 말씀, 혹은 추상적인 아이디어로 창조하는 것이 남신의 방식이라면, 여신의 창조는 물질로부터 물질이 탄생한다. 설문대할망의 창조과정 역시 이 주장에 무게를 더한다. 

 

-  똥을 누어 생산하는 이러한 방식을 학자들은 '항문 출산(anal birth)'이라 부른다. 신화에는 항문 출산의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먼저 파푸아뉴기니 서쪽에 위치한 섬 세람(Ceram)에서 전하는 <하이누벨레(Hainuwele)>신화이다. 코코넛 나무즙과 사람의 피가 섞여 탄생한 하이누벨레는 출생부터 그러하듯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매일 똥으로 귀중품을 낳기 때문이다. 중국 도자기나 징같이 값비싼 물건들을 똥으로 생산해 내서 아버지를 순식간에 부자로 만들어준다(캠벨, <신의 가면>).

 

- 레비-스트로스가 오랜 시간 현지에서 조사한 페루 북서부의 지바로(Jivaro) 인디언의 창조신화에도 항문 출산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지바로의 아추아(Achuar) 부족 신화인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간극이 점점 멀어지고 낮과 밤이 구분되는 창세의 시점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너무 놀란 여인이 여기저기 똥을 누기 시작하는데, 여인의 똥 무더기가 도자기를 굽는 흙, 누웨(nuwe)로 변한다(레비-스트로스, <질투하는 도공>). 

 

- 기원전 6세기 중엽의 에트루리아 부족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그중 '지오콜리에리의 무덤'(Tomba dei Giocolieri)라 부르는 곳이 있다. 이 무덤에는 특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미지이다. 한 남자가 관목 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는 장면이다(슈타인그라버, <시대의 보물>). 무덤에 똥 누는 장면이라니, 고대인이 낙서를 한 것일까? 아니면 죽은 자에 대한 경멸과 조롱을 표하려 했던 것일까? 그러기엔 무덤은 너무 엄숙한 자리이다. 기원전 6세기면 오늘날처럼 염료가 발달한 것도 아니기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선사시대 상징 전문가인 크리스티나 버그렌(Christina Bergren)은 선사시대 예술에는 의미 없이 찍은 점이나 선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그렸기 때문에 획 하나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덤 속에 똥을 누는 이미지를 그려 넣은 의도는 무엇인가? 

 

- 신화적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무덤은 곧 자궁이다. 무덤 안의 삶이란 큰 어머니, 즉 궁극의 집인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자리가 삶의 종착지는 아니다. 태어남과 자람과 죽음과 거듭남이라는 생명의 주기에서 거치는 하나의 단계이다. 이 단계, 즉 어머니 몸속으로의 여정을 신화학자들은 '네키야(nekiya)'라고 하는데, 세계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힘겨운 시련으로 묘사한다. 죽음의 고통이 따르는 험난한 여정이지만 새롭게 태어나길 꿈꾸는 영웅이라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기도 ... 

 

- 신의 징벌이든, 더 나은 창조를 위한 불가피한 절차이든, 대홍수는 기존 세계의 파괴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대파국과 대창조가 동시에 맞물린 우주적 드라마이다. 그런데 할망의 오줌 홍수신화에서는 바빌론, 유대, 그리스 등 서양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죄로 인한 신의 징벌'이라는 도덕적 관념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태동하기 전에 형성된 신화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도덕관에 지나친 비중을 두지 않는 신화권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 호주 원주민 티위(Tiwi) 부족 신화에는 몸집이 거대하고 검은 창조여신이 등장하는데, 태양의 여신 혹은 해 할망(Sun Woman)이라고도 불리는 이뭉가(Imunga)이다. 이뭉가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거북의 형태로 땅을 거닐기 시작하자, 여신의 뒤로 만물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여신이 뒤를 보아 창조한 결과로 강과 하천과 섬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은 머리 황새가 나타나 거북 형태의 여신을 쪼아 죽여버리는데, 이때 여신의 몸에서 오줌이 나와 바닷물을 짜게 만들었다(IASSC, <세계의 기호학>). 

 

- 에스키모의 창조신화에도 오줌 바다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창조주는 갈가마귀 한 쌍이다. 이 창조주는 세상을 창조하면서 오줌을 누는데 이것이 바다가 된다. 북미 인디언 코디악(Kodiak) 부족의 창조주 역시 갈가마귀인데 태초의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창조된 여자가 침을 뱉자 그 침이 육지의 물이 되고, 오줌을 누자 바다가 탄생한다. 여기서는 조물주의 오줌이 아니라 조물주가 창조한 여인이 눈 오줌이 바다를 만든다. 북미 남서부 대평원의 인디언 유마(Yuma) 부족의 바다 창조 또한 오줌으로 이루어지며, 루이시노(Luiseno) 인디언의 경우도 땅의 여신(Earth Woman)이 오줌을 누자 바다가 만들어진다. 

- 남서부 대평원 후아니노(Juaneno) 부족에게도 바다의 기원은 오줌이다. 이 종족의 신화에서는 지렁이 오줌이 바다로 변하는 게 특이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오빠가 땅의 누이와 혼인을 해서 여러 자녀를 두게 된다. 어떤 이유에선지 자녀들의 몸에 독이 퍼지는데 해독을 위해서 지렁이 오줌으로 탕약을 만들어 조개 속에 담아둔다. 이때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인디언의 대표적인 트릭스터인 코요테가 사고를 친다. 실수로 탕약을 걷어차 엎질러진 지렁이 오줌이 바다가 되고, 탕약의 건더기인 지렁이는 물고기로 변한다. 

- 가까이 필리핀의 서사시에도 오줌 바다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장 오래된 민간 서사시로 알려진 <일로카노(Illocano)>인데, 설문대할망과 겹치는 내용이 있다. 우선 등장인물이 거대하다.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기 전에 앙갈로(Angalo)와 아란(Aran)이라는 태초의 인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거인이다. 앙갈로의 머리는 하늘에 닿고 마닐라에서 한 발짝을 떼면 비간에 닿는다고 하는데, 이는 제주 여러 곳에 흔적으로 남은 거대한 할망 발자국뿐 아니라, 한라산이 무릎 밑에 온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할망의 이미지와도 맥이 통한다. 이 거대한 앙갈로와 아란이 태초에 평평했던 땅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자 산과 언덕이 생겨나고, 깊이 파여진 구덩이에 오줌을 누자 바다가 탄생한다. 
 

- 이런 유의 이야기는 일본에도 전해진다. 후지 산의 기원설 중, 산이 매일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임산부가 서서 오줌을 누면서 "매일 저렇게 커지면 어쩌지?" 했더니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에 산 대신 섬이 등장하는 '떠내려오다 멈춘 섬'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일본 민담엔 말하는 것과 오줌을 누는 것이 결합되어 있는데,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자면 상황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말로 표현되기 전에는 머릿속에 익지 않은 생각들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이게 입 밖으로 나온다는 표현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나오는 탄생 과정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 말은 무형이지만 소리의 상을 만드는 소리 창조라고도 볼 수 있다. 말을 내뱉는 것은 혼돈에서 창조로 의식전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산스크리트어나 히브리어의 경우, 말 자체가 신성한 힘을 지닌다고 인식하고 있고 만트라를 일 때도 그 언어를 그대로 암송한다. 전 세계의 비슷한 민담들에서도 말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보편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제주의 전통 가옥에서 정지(부억)를 들여다보면, 제일 안쪽 벽면 앞에 솥이 여러 개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솥은 술이나 떡을 만드는 행사용 솥부터 밥솥, 국솥 등 크기에 따라 네댓 개가 나란히 화덕 위에 앉혀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화덕은 네모꼴 현무암 세 개를 품(品) 자 모양으로 배열해 놓았는데, 난방과 취사가 분리된 제주라 화덕을 벽에 부착할 필요가 없고 바닥에 돌을 세 개씩 세워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천상 할망의 삼발 화덕이다. 제주에서는 화덕으로 사용하는 돌을 가끈돌이라 부른다. 깨끗한 돌을 신중하게 골라 화덕으로 사용하는데, 이 가끈돌 위에 부엌의 신 조왕이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진성기, <제주의 전통문화>). 

 

- 조왕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은 제주민의 강한 믿음이고 오늘날도 여전히 지켜진다. 제주에는 신들의 교체 시기가 있어서 해마다 한 번씩 제주 일만 팔천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 전까지 공백기를 신구간이라 부른다. 제주에서는 이 기간에만 이사를 하는데, 이사할 때 특별하게 다루는 물품이 솥, 화로, 요강, 체, 푸는 체이다. 이 물품들을 옮기고 나면 이사를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진성기,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

 

- 이들을 잘못 다루면 제주식 표현으로 '동티가 난다'고 하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얻거나 불운이 닥치는 것이다. 동티에 대한 두려움을 다르게 표현하면, 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물건은 함부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믿음이고, 결론적으로 이 물품들은 신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조심하고 귀하게 다루어야 함을 부정적인 톤으로 강조하는 표현이 '동티가 난다'이다.

 

- 지금도 제주에서는 이사할 때 심방(제주의 무속인)에게 의뢰해서 적절한 날과 시를 받는다. 그런 다음 이 물품들을 새 집으로 옮기는데, 이사 간 집에서 불을 때서 첫 밥을 하는 시간도 심방과 상의하는 경우가 많다. 새 집을 지어서 갈 때도 맨 먼저 솥을 놓아 밥부터 해 먹는다. 솥을 옮기는 과정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데, 옮기다가 문지방 위에 솥을 놓으면 해롭다고 믿는다. 또 장례 때는 솥에 영정이 비치면 솥이 깨어지므로 밥 하는 사람이 솥을 가마니로 덮고 그 위에 앉아 솥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한다.

 

- 평상시 밥을 할 때도 금기가 따른다. 밥을 푸다가 주걱을 솥뚜껑 위에 올려놓으면 조왕이 화를 낸다고 하고, 밥 푸다가 솥을 두드려서도 안 된다. 제삿날 조왕한테 생선은 올리면 안 되고, 아이를 낳고 3일 동안은 화덕에서 재를 끌어내지 말아야 한다고도 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제주민들은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부엌 한구석에 쌀을 한 대접씩 떠놓는데, 연유도 모르고 선조들의 습관을 따라 하는 것이지만 예전에 조왕을 섬기던 흔적이라고 지역 민속학자가 설명해 주었다. 이 금기들은 제주민의 신앙과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무형의 유산이므로, 외지인에겐 다소 생경하고 낯설다.   

 

- 이 이야기는 본래 굿의 본이 되는 <문전 본풀이>의 내용이다. 문전 본풀이는 문전신과 두 아내인 조왕할망과 측도부인의 기원을 풀어내는 신화이다. 여기서 문전신은 남선비이고 문전어멈은 예산국인데 이 둘이 혼인을 하여 일곱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미역을 따러 배를 타고 나간 남선비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내 예산국이 남편을 찾아 나선다. 남선비를 찾고 보니 노일제대 귀일의 딸과 배에서 살림을 차렸다. 노일제대 귀일의 딸은 찾아온 예산국을 유인해서 물에 빠뜨려 죽인 다음, 예산국으로 가장을 하고 남선비와 함께 일곱 아들이 사는 집으로 돌아온다. 곧 이 일곱 아들을 죽이려는 묘안을 짜내는데, 배가 심하게 아프다고 꾀병을 하며 병이 나으려면 일곱 아들의 간을 먹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내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남선비는 칼을 갈아놓고 아들들을 기다리나 막내아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노일제대 귀일의 딸에게 형들의 간 대신 산돼지 간을 먹이고, 결국 이 악한 여인뿐 아니라 여인과 한통속인 아버지를 물리친다. 마지막에 남선비는 도망을 치다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어서 주목지신이 되고, 노일제대 귀일의 딸은 변소로 도망쳐 목을 매 변소의 신인 측도부인이 된다. 그리고 일곱 형제들은 도환생꽃을 얻어 물에 빠져 죽은 어머니를 살려낸 후, 그동안 물속에서 추위에 떨었으니 조왕할망이 되어 하루 세 번 더운 불을 쬐면서 살아가라 한다(장주근, <제주도 무속과 서사무가 역락>). 제주 무가에 등장하는 조왕할망의 기원이다. 
 

- 원주민들의 신화에서는 죄와 벌 같은 윤리 개념은 약한데, 불을 훔치는 도둑의 역할을 대개 동물이 맡기 때문이다. 주로 새, 그중에서도 가장 가볍고 조그맣게 빛나는 벌새가 불을 훔친다. 예로 지바로 인디언 신화를 들 수 있다. 이 종족에겐 나무를 비벼서 맨 처음 불을 생산한 인물이 있는데 이름이 타키아(Takkea)이다. 뭇 새들이 불을 훔치려 시도했지만 불가엔 언제나 타키아가 지키고 있다가 새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구워서 먹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타키아의 아내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자신의 주변을 윙윙 맴도는 벌새를 만난다. 아내는 새가 너무 추워서 그러는 줄 알고 따뜻한 집 안으로 들여놓는데, 그가 눈길을 다른 곳에 돌리는 사이 벌새는 꽁지에 불을 붙여 달아난다. 벌새는 꽁지에 붙인 불을 마른 나무둥치에 옮겨 붙이고 이 불을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가진다. 

- 호주 원주민의 불 신화에서도 벌새가 불을 훔친다. 태초의 시간(Dream time)에 코이멀(Koimul)이 나뭇가지 두 개를 비벼서 불을 만들어내는데, 이 불을 혼자만 간직하고 불 만드는 법을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느 날 벌새가 날아들어서 코이멀이 쥐고 있던 볼 만드는 나뭇조각을 훔쳐내서 인간에게 넘겨준다. 벌새의 꼬리에는 길고 빛나는 깃털이 있는데 이 깃털은 벌새가 불을 인간에게 넘겨주었던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 한다(엘리엇, <세계의 신화>). 

 

- 독일 동부의 밴드 족의 신화에서는 황새가 이 역할을 했고, 원주민들은 지금까지 황새를 숭배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태초에 사람들이 태양에서 불을 가져다달라고 청하자 황새는 불이 있는 남쪽 나라까지 날아가 불을 물고 온다. 황새 주둥이가 붉은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한다. 몽골에서는 온몸이 새까만 제비가 이 역할을 하고, 남미 인디언 신화엔 머리에 붉은 장식을 한 딱따구리가 불 도둑이다. 

 

- 벌새, 황새, 제비, 딱따구리 등의 공통점은 불과 같이 가볍고 가변적이며 위로 올라가 사라지는 공기의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민첩함 또한 불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몸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이나 모양도 불과 연관된다. 그렇다고 새만 불을 훔친 것은 아니고 북미 인디언 신화엔 코요테가, 남미 인디언들 사이엔 표범이 불도둑이다. 이들 역시 민첩하고 간교하고 장난스러운 트릭스터들이다. 

 

- 훔쳐낸 불을 인간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나무 속에 넣어 보관했다는 흥미로운 신화도 있다. 분명 인간이 불을 소유하는 문제를 해결한 뒤에 발생한 신화일 텐데, 이 신화는 뜨겁지도 불같이 생기지도 않은 나뭇가지를 마찰하면 불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하고 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역할도 한다. 아이다호 부근의 인디언 네즈 퍼스(Nez Perce)의 신화에는 비버가 불 도둑이다. 
 
- 아이누 불 신화에서는 불을 훔쳐내는 게 아니라 인간이 불을 만들 수 있도록 신이 도와준다. 이들에겐 불이 곧 신이다. 맨 처음 신은 백양나무를 키워서 인간에게 불을 피우라고 주는데, 마찰하자 연기만 나고 불이 잘 붙지 않아 포기한다. 그다음에는 당드룹나무를 준다. 이번엔 불이 잘 붙는다. 아이누 족은 이렇게 만든 불을 카무이 후치(Kamui-huchi)라 부르는데, 이 말은 할망 신이란 뜻이다. 이들은 카무이 후치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며 다른 신에게 기원할 것이 있어도 불 할망을 통해서 기원한다. 우리나라의 조왕처럼 이 할망은 불 자체뿐 아니라 불을 보듬는 화덕의 신이자 집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 태양 여신이 화덕을 만드는 돌을 직접 다듬어서 내려주니 여인들에게는 가장 신성한 선물이다. 이 대목은 특별히 깨끗한 돌을 골라 가꾼돌로 사용하라는 제주의 솥덕 이미지와 겹치는데, 솔덕의 돌은 예사롭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고대 몽골의 화덕도 그 모양새가 설문대할망의 솥덕과 닮았다. 돌 세 개를 받쳐서 화덕으로 쓰고 이를 툴룩이라 한다. 몽골에서 화덕은 가정의 중심이자 생명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들은 절대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고, 집에서 불씨를 꺼뜨리는 걸 나라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과 동일시했다. 화덕을 지키는 불의 여신을 걸럼트 에흐(Golomt Eh), 불 어머니라 부르는데, 집안에 불이 있으면 자손과 가축이 번성하고 번영과 평화가 유지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불을 숭상하고 화덕을 중시하다 보니 화덕 주변에 금기가 따를 수밖에 없다. 칼로 불을 찔러서는 안 되고, 화덕 주위에서 장작을 패서 걸럼트 에흐를 화나게 해서도 안 된다. 불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더러운 것들을 불에 태우지 않는다. 신발이나 속옷을 불 가까이 두면 안되고, 집안의 불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도 꺼리고, 화로의 왼쪽으로 도는 것을 금한다. 화로에 대한 몽고인의 믿음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들이다(이안나,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 서구에서도 가정의 불과 화로를 지키는 신은 여신이다. 슬라브의 불의 여신 베레기니아(Bereginia, Berehynia), 리투아니아의 가비야(Gabija), 폴란드의 마트카 가비아(Matka Gabia),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프리그(Frigg) 모두 각 나라들의 조왕들이다. 그밖에 로마의 베스E타(Vesta)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베스타의 지위는 특별했다. 베스타를 그리스의 헤스티아와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비중이나 특질에 크게 차이가 있다. 베스타는 고대부터 내려오던 여신으로 추정하는데, 불의 신이자 화로의 신이고 가정의 신이다. 신화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대단히 적어서 많은 부분이 신비에 싸여 있다.

 

- 그러나 베스타 여신에 대한 숭배는 특별했던 듯하다. 로마의 배꼽이라는 시내 정중앙에는 베스타의 불이 연중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해마다 3월 1일이면 묵은 불을 없애고 새 불로 교체하는데, 베스타는 따로 신전이 있는 게 아니라 땅에 둥근 원이 있고 그 안에 신성한 불을 보존한다. 이 불은 특별히 선별된 베스탈리스(Vestales)라는 여사제들이 지키고, 6월이면 베스타 여신을 숭배하는 축제가 거행되었다. 베스타는 로마의 가정에서 가장 주요한 여신이라 베스타 숭배는 특별히 여인들 사이에 성했는데, 베스타 신전이 로마의 중심이듯 각 가정의 화로가 그 집이 중심이었다. 중심이 이토록 강조되었던 것은 가족이나 도시나 나라의 구심력 때문이다. 현대 가족 문제 역시 구심력 부족이 원인인데, 각 가정마다 베스타 여신이 거주하는 자리가 있는지 또 그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 할망의 솥덕은 네모난 가끈돌 셋으로 이루어졌다. 네모나서 솥을 앉히자면 넷이어도 되고 둘이어도 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셋인가? 위에서 이미 몽골의 툴룩이 돌 셋의 구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눈여겨보았다면 박물관에 있는 고대의 향로나 솥들은 대개 다리가 셋인 것을 알 수 있다. 제사 때 사용하는 향로도 다리가 셋이고 할머니들이 차를 끓이고 숯불을 담아두던 청동화로도 다리가 셋이다.  

 

 

- 해와 달은 매일 지평선 아래에서 천정인 위로의 여정을 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몸으로 생명의 주기를 체현하는 여성은 일생 소녀, 여인, 할망으로 변형한다. 탄생과 성장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주기도 셋이고 연대기적인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 셋으로 나뉜다. 우리 신화에는 유독 3이 많이 등장한다. 단군신화의 천부인 세계와 무리 3천, 인간 세상의 360가지 일, 게다가 호랑이와 곰이 동굴에 칩거하는 기간도 삼칠일이다. 선덕여왕이 했다는 예견도 셋이고 제주 심방의 무구도 셋이라 삼명두다. 제주 본풀이에는 3이 기본 패턴처럼 반복된다. 대별왕 소별왕의 수수께끼가 셋이고, 아버지 천지왕이 어머니에게 건네준 박 씨도 셋이고, 무조는 삼 형제이고, 죽은 자를 살리려는 축수도 세 번 하고, <삼공본풀이>의 주인공 감은장 아기는 셋째 딸이고, 혼인하는 신선비도 셋째 마퉁이이다. 한 가지 상징이 여러 번 반복해 등장하는 것은 '의미의 강화'를 뜻한다. 

 

- 거대한 할망이 퍼질러 앉아 한 손으로 바다의 물을 떠 넣고 솥덕에 불을 지펴 밥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서양의 매부리코 마녀가 두꺼비를 넣고 끓이지 않더라도 이는 신기한 마술, 연금술이다. 야생의 불을 안전하게 보듬고 능숙하게 다루어 날것의 자연을 짓고 날 상태의 인간을 빚어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성숙하고 사회화된 모습으로 무르익혀낸다. 

 

- 자궁에 생명이 잉태되어 새 탄생이 이루어지듯, 솥 안으로 들어가는 날것은 무엇이든 불이라는 뜨거운 열정과 탈바꿈의 에너지로 무르익어 거듭 태어난다. 따라서 조리란,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출산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어머니 원형 본연의 모습이어서 조리가 여신의 창조행위라는 게 너무도 마땅해 보인다. 

 

- 켈틱 신화 중에 유사한 이미지가 있다. 구이트노(Gooyithno) 왕에게 엘핀이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왕자가 연어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자 연어 대신 가죽 바구니 하나가 걸려 올라온다. 천재적인 마법과 지혜의 소유자 구이온이 속임수를 써서 태초의 여신 세리돈의 몸속으로 들어가 임신을 시키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여신이 가죽 바구니에 담아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다. 엘핀은 바구니 속의 아이를 보고 감탄해서 "탈리에신(Taliesin)"이라 외치는데 켈틱어로 '빛이 나는 아름다운 이마'라는 뜻이다. 탈리에신은 태어나자마자 두 번 태어난 자신의 운명과 지혜에 대한 노래를 읊조린다. 그는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그러하듯 날 때부터 온전한 지혜의 소유자이다. 그물에서 건져 올려지는 탄생 과정과 탄생한 아이가 보일 기묘한 지혜와 마법들은 탈해 이야기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 탈해라는 이름에는 '거듭남'이라는 변형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우주적인 알로 태어난다.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것은 대표적인 변형의 이미지인데 그에게 변형은 죽어서도 계속되는 듯하다. 탈해는 죽으면서 거듭남이나 영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자신의 뼈를 잘 안치하라고 명한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사냥족 신화의 바탕이 엿보인다. 실제 탈해는 죽어서도 여러 번 신라 왕들의 꿈에 나타난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고도 하고 문무왕대에 나타나서 "토함산에 안치하라"고도 한다. 다른 일화를 통해 탈해 왕에 대한 탐색을 더 해보자. 

 

- 신라에 나타난 탈해는 먼저 토함산에 올라가 쓸 만한 집을 하나 찾는다. 반월 모양인 호공의 집이다. 탈해는 집마당에 숫돌과 숯을 묻어두고 자기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이라 주장하여 호공의 집을 빼앗는다. 이는 잘 알려진 일화인데, 이 대목에서 탈해가 대장장이였거나 대장장이 계열의 자손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대장장이란 땅 속에 묻혀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금속을 풀무질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는 사람이다. 땅 속의 광물질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산파의 역할이라면 물이 아닌 땅 속으로 드리우는 낚시와 같다. 고대에는 대장장이를 무당과 더불어 신성하게 여겼고, 칭기즈 칸을 비롯하여 탈해처럼 세계의 신화에 대장장이가 왕이었던 예는 빈번하다. 

 

- 그러면 탈해의 어머니일 수도 있는 고기 잡는 여인-여신과 야장의 왕 탈해의 관계를 한번 이어보자. 이 두 직업은 신화를 크게 농경/채취와 사냥/수렵으로 이분해볼 때, 주로 사냥계열 신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탈해가 고기를 잡아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점도 농경 계열은 아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고대신화가 잘 보존된 제주 신화와 신앙민들의 믿음에 이 문법을 대입해 보자. 

 

- 제주에서 어부들이 섬기는 서낭신은 도깨비 신이다. 도깨비는 풀무의 신, 야장의 신이며, 이 신의 주요한 상징은 불이다. 이에 반해 농경계 신들의 주요 상징은 물이다. 불로 대별되는 도깨비 신은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놀이를 좋아하는 반면, 물로 대별되는 농경계 신들은 일관되고 성실하다. 탈해에게서 보이듯, 야장계 신들에겐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다. 오늘 땅에서 사라지면 내일 하늘에 별자리로 계속 존재한다는 식이다. 반면, 농경계 신들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 여기서 잠시 하루방의 휘저음, 그리고 시바 신의 파괴력에 눈을 돌려 집중해보자. 문명화된 사람들에게 꽤나 곤혹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가 없다면 세상은 어떠할까? 정체, 고요, 변화 없음. 이 상태를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협적인 태풍이 공기를 정화하고 대기를 순환시키고 지구상의 온도를 조절하는 순기능을 하듯, 한꺼번에 유출되는 엄청난 리비도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기능도 한다. 문제는 편향될 때 일어나고 균형이 상실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 두르가와 시바의 이미지처럼 할망과 하루방도 하나가 둘로 분화되고 둘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우주의 근원적 에너지 흐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 본래의 온전한 상태는 할망일까, 하루방일까? 이는 예민한 뇌관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신이라면 자동적으로 하늘님 아버지를 생각하거나, 곧 남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채색된 필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한번 과감한 도전을 해보자. 

 

- 고고학자 김부타스는 오래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들을 직접 발굴하고 유물의 메타언어를 해석했다. 고고-신화학(archeomythology)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세계의 6대 주요 사이트 발굴을 이끌면서 고고학, 비교종교학, 민담연구, 언어학 등의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유물들의 코드를 읽어낸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기의 메타언어를 이해하여 여신 전통의 문법체계를 판독해 낸 것이다. 그 결과물이 <여신의 언어 (Language of the Goddess)>라는 책이다. 김부타스의 해석과 결론은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다.  

 

- 그렇다면 하루방은 왜 등장한 것일까? 하루방이 등장해야만 가능한 이미지로 신화는 펼쳐진다. 거대한 남근으로 바다를 요동치게 만들자 놀란 고기들이 달아나는데 달아난 자리가 할망의 하문 속이다. 그렇다면 고기란 무엇을 뜻하며, 왜 하필 하문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할망의 거대한 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이미지는 생경스럽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쭉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들을 김부타스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노골적인 이미지가 기원전 700~675년 경 보이오티아(Boeotia) 지역 항아리에 그려져 있다. 아르테미스라 불리는 새의 날개를 가진 여신이 짐승들을 날개 아래에 거두는 듯한 자태를 보인다. 그리고 굳건한 인상을 주는 여신의 하체는 똑바로 서 있다. 그런데 여신의 양다리 사이 정중앙에 커다란 물고기가 한 마리 들어 있다. 하반신 전체가 항아리 모양인데, 물고기가 곧게 서 있고 물고기의 머리가 자궁의 윗부분에 가 닿는 듯하다. 그리고 이 여신의 하반신 전체를 선명한 두 줄의 선이 감싸고 있다. 마치 물결무늬 치마를 입고 있는 듯한데, 하체가 물속에 있거나 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설명을 해주는 듯하다. 

 

- 이 아르테미스 여신 그림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미노안 시기에 자궁을 연상시키는 양쪽에 귀가 달린 둥그런 항아리 몸체에 물고기가 그려져 있거나, 또 자궁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석관에 물고기로 장식한 경우도 있다. 김부타스는 물고기와 자궁이 함께 연상되는 이런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그물망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고, 상호 연관성이 있는 교집합으로 '물고기 - 그물망 - 물'의 조합을 읽어낸다. 그리고 여기서 "이 시기엔 물고기의 물과 자궁 속의 물이 상응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그런데 하루방이 할망의 창조물이라면 둘, 셋, 넷 아니면 물고기수만큼 많은 하루방을 만들어도 될 텐데 신화에서 하루방은 한 명뿐이고 할망과 하루방 한 쌍만이 등장한다. 자연은 본래 이원성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둘은 하나 됨을 열망하고 하나는 다시 독자적인 둘로 갈라서려는 욕구가 되풀이되는 과정에 우주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바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서 있는 두 신의 긴장감, 서로를 향하는 엄청남 집중과 끌림이 음양의 마력이고 우주에 중력처럼 작용하는 모양이다. 떨어져서는 하나 됨을 열망하고 합이 된 하나는 다시 둘로 나뉘려는 과정에서 끌림이라는 매력적인 에너지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나 보다. 

 

- 앞서 낚시는 무의식의 물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낚아 올리는 풍요로운 의식화 작업이라고 했다. 아직 형체가 없는 뭔가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 형과 상을 얻게 되는 것이 낚시의 본질이라면, 할망의 몸에서 태어난 하루방은 그 자체가 낚시의 산물이다. 여기서 남근으로 상징되는 남성성의 이미지가 태동할 뿐 아니라 하문으로 상징되는 여성성도 그 이미지와 역할이 구체화된다. 그리고 하문으로 들어가 잉태되는 물고기는, 세상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의식의 낚시는 계속될 것이고 그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 즉 의식에서 신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약속 같다. 

 - 어마어마하게 과장된 존재, 즉 거인 이야기가 가장 발달한 곳은 단연 고대 유럽의 페이건(pagan) 전통이다. 보통 이교도라고 번역하는 '페이건'이라는 단어는 편견으로 채색되어 있다. 본래 이 말은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땅을 존중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던 그리스도교 이전의 다양한 토착신앙을 뭉뚱그려 단순화시킨 단어가 페이건이다.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통 중에서도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아일랜드, 독일에 이르는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신화의 거인들이 우리에게 친숙하다.

 

- 세계 신화에서 거인들은 대개 거인군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각자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는 예외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특질이 잘 분화되어 있다. 이 지역에 등장한 태초의 거인 이미르(Ymir)는 원시적인 수프 같은 물에서 탄생한다. 단순하게 전쟁의 신으로 알려진 오딘(Odin)도 거인신이고, 오딘의 아내 린다(Rinda), 아들 토르(Thor)와 보르(Bor) 모두 거인이다. 돼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프레이(Freia)도 거인신이다. 그 외에도 바우기 (Baugi), 앙그리보다(Anglibotha) 등 북유럽의 거인신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 북구 신화와 중첩되는 부분이 많은 켈틱 신화에서도 거인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화에서 고대 아일랜드는 거인들이 다스리는 땅인데 이들이 포모리안(Formorian)이다. 우두머리는 발로르(Balor)이고 아름다움 그 자체인 베빈(Bebhinn)도 거인이다. 고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아일랜드를 묘사할 때, 여왕이 다스리고 거인이 사는 땅이라고 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신비에 싸인 땅이라는 의미와 미개한 나라라는 비하의 의미가 동시에 내포된 표현일 것이다. 

 

- 거인의 흔적은 중세 신화에도 남아 있다. 12세기 트리스탄과 이졸다 신화에서 주인공 트리스탄이 이졸다를 만나는 계기가 바로 거인과의 전투로 입은 치명적인 상처 때문이다. 그 거인이 마법사인 아일랜드 여왕의 동생이고, 천하무적이라고 알려진 몰홀트(Morholt)이다. 반면 독일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통이 전혀 다르다. 게르만 신화에서 거인들은 그저 한 무리의 거인일 뿐이다. 구체적인 이름도, 특질도 드러나지 않는다. 

 

- 그렇지만 거인이 서구 신화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중국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반고(盤古)도 거인이다. 이미르나 티아멧처럼 반고의 조각난 몸 한 토막으로부터 세상이 태어난다. 유사한 이미지를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프루샤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한국의 무속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가>에서는 거신 미륵의 신체에서 세상이 탄생한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거인 이야기가 전하는데 대표적으로 고려왕조를 창조했다는 여성 거인 이야기가 있다. 제주와 신화적으로 비교대상이 되고 있는 오키나와에는 거인 아만추가 있는데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처럼 하늘을 떠받쳐 올리고 있다. 그 밖에도 중국의 소수민족인 포랑족, 부이족, 러바족 등에도 거인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 신화 속 거인들은 한결같이 대단히 오래된 옛 존재들이다. 주로 창조신화에 등장하는데, 신화에서는 "세상이 막 태어나던 시기, 거인들이 살았다" 라고도 하고, "세상이 태어나기 전부터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라고도 묘사한다. 거인을 현 세상의 탄생 질서 바깥의 존재들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신비에 싸인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주로 북구 신화에서 거인들은 신보다 먼저 태어났고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고 한다. 거인들이 살던 시기는 천지가 창조의 가능성으로 잉태된 상태였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태어나고자 하는 기운들이 용트림을 하던 엄청난 역동의 시기,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을 것이고 이 시기에 살고 있었던 거인들은 천지에 가득한 이런 동력을 체현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 고대의 신화들은 이런 초기 영성을 이미지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은 긴 머리털로 뒤덮여 있고 수염이 뻣뻣하게 곤두서 있고 건장한 두 다리는 뱀의 몸통으로 되어 있다. 힘은 천하무적이고 몸집은 거대하다. 동화에서 만날 법한 덩치 커다란 아저씨 모습은 아니다. 한마디로 야성, 원초적인 힘, 땅의 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게다가 온몸을 땅에 밀착하고 살면서 인간에게 묘한 불편감을 주고 겨울이면 죽음의 세계,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뱀의 이미지만큼 땅적인 원시성, 즉 무의식 자체를 제대로 묘사한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 몸 전체를 뒤덮은 털은 동물적인 야성과 야생의 힘을 더욱 강조하고, 사방으로 뻗은 수염과 나무뿌리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길들일 수 없는 힘과 무질서에 방점을 찍어주는 듯하다. 그리스뿐 아니라 다른 신화권의 거인도 만만치 않다. 고대 아일랜드를 다스렸다는 포모리안의 경우, 인간의 몸통에 염소 머리를 가진 존재이다. 이렇게 염소-인간 합체에 팔도 하나, 다리도 하나이고 눈도 하나다. 동물과 인간과 자연이 한 덩어리로 뒤섞인 거대한 비정형의 존재인 셈이다.

 

- 이 어눌한 조합은 물질과 무의식의 집합체이다. 분화나 질서가 태어나지 않은 창조의 중간단계에 등장한 피조물 같다. 이러한 힘과 공포와 비정형의 이미지가 시사하는 바는, 생명의 가능성과 엄청난 잠재력으로 뭉쳐진 태초의 혼돈, 즉 심리학적으로 본능의 에너지와 야성의 힘 자체이다. 의식 개입이 이루어지기 전, 처녀적인 자연 자체를 체현하는 존재가 거인인 것이다. 그래서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기 전에 거인을 먼저 창조하는 경우가 있다. 이 신화들에서 거인의 존재는 낙태나 파괴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흔한데 조물주가 자신의 창작품이 흡족하지 않아서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창작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실패의 경험과도 같다. 이 경우 거인은 미완의 피조물인 것이다. 

- 우리 개인의 내면에서도 원형적 에너지가 의식으로 유입될 때 가공할 만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상황에 놓여 있는 당사자는 압도하는 힘을 체험하지만 아직 그 정체나 질서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라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 통제나 조절이 불가능한 힘의 회오리에 휩싸여 두려움과 혼돈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뿐이다. 의식이 탄생하는 산고인데, 골리앗 같은 압도하는 힘 때문에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 신화권마다 거인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지만 이들이 보이는 공통된 특질은 태초의 존재라는 점 외에 몸 크기에 걸맞은 엄청난 식욕, 어마어마한 배설, 그리고 통제 불능의 탐욕이다. 이 모두 일차적인 본능인데, 거인의 주 관심거리는 몸 아랫부분에서 올라오는 본능 충족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를 하고, 설문대할망도 예외가 아니다. 360 설사, 바다를 채우는 오줌발, 엄청난 크기의 옷을 요구하는 등 세계의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맥을 같이한다. 할망의 특질은 압도하는 파괴력 자체라기보다는 인간과 내기도 하는 친근하고 사교적인 면모에 있고, 이런 면에서 그리스나 켈틱 신화에 등장하는 통제불능의 야성의 거인보다 훨씬 진화한 창조 거신이다. 

 

- 본질적으로 거인은 순수한 감정적 리비도를 체현하는 인물이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이 위협적인 힘을 악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설문대할망의 창조/파괴력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선과 악 혹은 질서나 파괴라는 개념이 태어나기 전의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도덕관을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단견일 뿐이다.   
     

- 인간을 잡아먹고 파괴를 일삼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여 순수 악처럼 보이는 거인의 이미지는 태초의 거인보다는 후대에 변형된 경우가 많다. 자연과 야성, 본능처럼 길들여지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광적인 두려움만 강조되어 거인의 이미지가 조악하게 전락한 것이다. 여기 물질과 몸과 자연을 억압한 유일신 종교가 한몫을 하였을 것이다. 

 

- 거인으로 체현되는 순수 리비도는 분명 위협적이다. 그렇지만 이 힘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경우, 그 힘은 기적을 가능케 한다. 예전에는 성인이나 현자들이 거인을 부려 천길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사원을 지었다고 하고, 인간이 들어 올렸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석문화의 유산에도 옛날 옛적 거인들의 작품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뒤따른다. 이를 사실이냐 아니냐로 단정하려 든다면 호기심에 초를 치고 상상력에 찬물을 쏟는 것이리라. 

- 인간의 범위를 이성적 틀에 가두는 대신 무한히 열어보면 상상의 실체(imaginal reality)가 가능의 범위로 들어온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상상의 세계'의 존재인 거인들이 현대인의 꿈에는 명백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칼 융의 일화에 거인이 인간에게 어떻게 조력하는지, 그리고 불가능이 어떻게 가능케 되는지에 대한 선명한 사례가 있다. 융이 <심리학적 유형>이라는 책을 쓸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 어마어마한 자료 수집이 끝났는데 막상 글을 쓸 수 없어 고통을 겪는 중에 꿈에 거인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전 인류에게 나누어줄 물건을 가득 싣고 항구로 들어온다. 이 선박이 항구에 정박해 배에 있는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 거대한 선박을 끌어당기기 위해 우아하고 섬세한 하얀 아랍 말이 항구에 매여 있다. 말이 배를 끌어당겨 정박을 시켜야 하는데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 그때 군중을 헤치고 빨간 머리의 거대한 붉은 거인이 나타난다. 거인은 단숨에 도끼를 내리쳐 흰 말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밧줄을 끌어당겨 선박을 항구에 정박시킨다."

 - 이 꿈을 꾸고 융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한달음에 쏟아내듯 책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우아한 백마가 상징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글쓰기로 할 수 있었던 작업은 아니었나 보다. 붉은 거인으로 상징되는 불같은 열정과 휘몰아치는 에너지로 단숨에 몰아 쓴 이 책이 꿈에서 묘사하듯 전 인류의 의식 진화를 위한 선물이 되었다. 거인이 지닌 순수 리비도는 인간과 협력할 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는다(폰 프란츠, <그림자>) 이제 리비도 자체를 단순히 선악으로 구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의 이미지를 반추하고 또 모방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죽음이 창조주의 이미지에 포함되면,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불편감도 자연스럽게 완화될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현대인이 죽음 때문에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죽음을 삶의 대척점에 두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삶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래서 삶을 연장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느라 죽음을 수용하기나 이해하려는 여력은 남지 않는다.      

 

- 그런데 죽음이 삶의 적이나 실패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고 수용한다면, 그리고 삶의 반대가 아니라 탄생의 대극에 두어 '탄생-성장-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주기로 본다면 죽음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 친숙하지 않은 신의 이미지를 성찰하면서 죽음, 또 조물주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이 탐색해 보자. 

 

- 죽음의 상징적인 의미를 반추하기 위해 먼저 꿈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음부터 생각해 보자. 꿈속에서는 빈번히 죽음이 등장한다. 특히 성장이 빠른 어린아이들일수록 죽음과 관련된 꿈을 자주 꾼다. 꿈세계에서 죽음은 가장 대표적인 변형, 즉 탈바꿈의 상징이다. 기존의 존재가 죽어야 새로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급격한 성장이나 변화의 순간에 죽음이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 꿈은 가장 기다려지는 꿈이기도 하다.  

 

- 이처럼 정신적으로 큰 획을 그을 만한 전환의 시기에는 꿈에 죽음이 등장하고, 이때 죽음의 의미는 거듭남이다. 설문대할망 신화는 제주민 집단의 꿈이다. 따라서 할망의 죽음은 제주민의 커다란 성장, 즉 진화를 의미한다. 이는 할망으로 대별되는 제주의 자연이 더 이상 거대하거나 압도하는 위협이 아니고,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연에 미치는 인간의 힘은 커지고 할망의 영향력은 줄어들면서 정복, 개발, 탐사라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이 대치했을 것이다. 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렇게 변한 새로운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 신화의 한 기능이기도 하다(엘리아데, <신화와 실재>). 

 

- 성장하는 동안 어린이는 거듭거듭 부모가 죽는 꿈을 꾸고, 현실 속에서는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점차 독립된 성인으로 탈바꿈해간다. 이때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분리로 인한 독립과 자유를 느끼지만 동시에 분리 불안이 뒤따른다. 제주민들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 할망은 가없이 뚫어져 있는 심연의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할망의 몸은 무의식의 물에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이것으로 할망의 삶은 끝나는 것일까? 고대 여신 전통의 유적들은 한결같이 죽음이 위대한 생명 주기의 한 부분임을 강조한다. 죽음이 있으므로 탄생과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비로소 생명의 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지구상의 생명은 탄생과 성장과 죽음을 되풀이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지기에 지구상의 생명은 절멸하지 않고 영원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 고대의 무덤이나 장례의례는 한결같이 무덤은 '자궁'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무덤의 위치나 배열, 그리고 부장품이나 벽화에까지 거듭거듭 재생의 에너지를 강조하고 강화한다. 앞서 할망의 똥 이미지에서 다룬,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무덤 벽에 똥 누는 장면을 그려 넣은 사례 또한 똥이 지니는 재생의 힘을 믿기에 무덤(자궁)에 그려 넣어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하려는 의도였다고 했다. 

 

- 삼라만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심리학에서도 리비도는 절대 정체되지 않는다.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 끝없이 탈바꿈을 할 뿐이다. 할망의 몸을 분해하는 죽음의 물은 곧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다에서 낚시를 하던 할망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아이러니한 사건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탈바꿈의 과정이다. 
 
- 할망은 제주 우주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할망의 몸이 곧 제주였던 것이다. 하늘 지붕을 덮고 바다 요람에 누운 할망이 제주 삼라만상의 꿈을 꾸어왔던가? 태초에 할망이 꾸었던 근원적인 꿈은 무엇일까? 북미 인디언은 '꿈꾸지 않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믿는데,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도 태초에 할망이 꾸었던 꿈의 일부인지 모르겠다. 

 

- 신화에서 할망의 머리가 제주 북단에 이르든, 가운데 솟은 한라산을 베고 누워 있든 할망은 남북으로 길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고 묘사를 한다. 잠을 자는 할망의 이미지 자체가 얼마나 특이하고 귀한가? 신학적 정의로 창조는 태초에 신들이 하던 행위이고 이 행위로 인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물주 할망이 한 처음에 행한 잠 역시 창조행위이다. 자연히 신을 닮은 인간이 밤마다 잠을 자는 행위는 이 자체로 신성하다. 잠자는 신의 이미지에 이토록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할망의 잠이 창조행위를 멈추고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 자체가 창조행위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잠뿐 아니라 잠을 자는 시간에 대한 우리들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혁명적인 이미지이다.  

 

- 하루의 반은 밤이고, 생애의 3분의 1은 잠을 자며 보낸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하는 단일 행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잠이다. 그런데 밤과 잠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역사시대 이후 인류가 매진해온 주 방향이 낮으로 밤을 정복하고 불을 켜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는 잠을 자는 시간이란 낮 시간의 왕성한 활동이 정지되는 시간일 뿐이며, 비생산적인 시간이고 낭비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전환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잠은 줄여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 그런데 효율과 생산이라는 산업화된 가치체계가 아니라, 기나긴 진화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136억 년 우주의 진화사에서 두뇌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진화의 꽃이라는 인간이 일생 동안 이토록 많은 시간을 잠을 자도록 진화해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낮의 관점으로 밤과 잠을 다루다 보니, 잠 자체의 존재론적인 가치나 의미는 놓쳐버린 셈이다.

 

- 밤과 잠과 어두움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할망 신화의 마지막 이미지로 의식적인 탐구가 상대적으로 미미한 밤과 잠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다. 기존에 익숙한 낮의 시각으로 밤을 빛의 관점으로 어두움을 탐색하는 대신 밤과 잠 그 자체의 의미를 더듬어보려 한다. 잠을 자는 행위를 조물주 할망의 창조행위로 간직하고 신화적으로 밤과 낮의 자리를 뚜렷이 구분해 온 제주와 제주민이 꽃피운 문화가 이 막막한 도전에 길잡이가 되어주리라.

 

- 제주에 어두움이 드리우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낮은 가시적인 존재들이 활동하는 시간이고 밤은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깨어나 활발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에게 비가시적인 존재란 뜬금없고 생소한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이전의 제주민들에게 이들은 명백히 살아 있는 실체였다. 비가시적 존재란 현대식 표현으로 영과 영혼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인데, 제주민들은 예민하게 이 존재들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 이런 존재들을 형상화하여 고유한 이름과 이야기를 부여한 것이제주의 18,000 신들이다. 이외에 각 집의 요소요소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신들도 비가시적 존재에 속한다. 그리고 미처 이야기가 만들어지거나 신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한 원혼들이나 잡신도 포함된다. 따라서 제주 우주는 보이는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시적인 존재와 비가시적 존재들이 공존하고, 이 둘은 적절하게 시공간을 분할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이들의 리듬에 의하면 밤은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활동을 하는 시간이므로, 어두움과 함께 영과 영혼의 세계가 펼쳐진다. 

 

- 밤에 대한 제주민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자료는 금기어들이다. 금기란 대개 특정 행동을 제약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 돼!' '큰일 나!' '조심해야 해!'라고 빨간 카드를 높이 치켜들어 경각심을 일깨우는데, 이 표현들은 언제나 그 이면에 자리한 무의식적인 힘을 가리키고 있다. 오금 저리게 어마어마한 신비 앞에서 금기는 '잠깐!' 하고 강한 쉼표를 찍어 한숨 돌린 다음, 서서히 정체를 파악하고 적응하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금기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 종교의 주요한 상징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나는 게 대체적인 수순이다. 

 

- 제주의 밤에 대한 금기는 어두움의 존재들, 즉 비가시적인 존재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가득하다. '밤에 쇳소리를 내면 귀신이 쫓아온다.' '밤중에 들어온 음식을 먹으면 해롭다.' 음식에 귀신이 붙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밤에 아이 옷을 널면 귀신이 붙는다' '밤길에 뒤돌아보면 귀신이 따라온다.' '밤에 빨래방망이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여자가 밤에 빨래하면 동네 총각에게 해가 간다.' '밤에 여우가 울면 나쁘다.' '밤에 베개를 세우면 도둑이 든다.' '밤에 얼레빗질을 아니한다' '밤에 변경 보면 무서움 탄다.' '밤에 빨래 널면 빨래 주인이 다음 생에 도둑질을 하게 된다.' '해 진 후에 되빡(바가지) 빌려주면 손해 난다.' '해 진 후엔 다리미를 빌리지 아니한다.' '해 진 후에 손톱, 발톱, 머리 깎으면 나쁘다.' 

 

- 금기의 내용들은 황당하고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일관되는 특질이 엿보인다. 어두움과 함께 활발하게 움직이는 귀신을 자극해서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고 철저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귀신이란 단어가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거울, 손톱, 발톱 등 영혼이 거주한다고 믿어 신성시하던 물건이나 신체 부위는 밤에 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혼이 있어 귀신으로부터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이 된다. 사물이 귀신과 가깝거나 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원시사고에는 나름의 확고한 논리가 있다. 
 

- 이 쇳소리와 관련된 청동제품을 살펴보자. 이를 신령하게 여겼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동경을 비롯, 방울, 요령 등의 청동제품은 예로부터 굿을 할 때 특별하게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청동제품은 곧 무속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이는 고대의 제정일치 시기부터 신성시했던 잔재들이 잘 보존되어 온 흔적이다. 

 

- 청동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무속 그 너머의 인류 보편성을 파악하게 된다. 달리 말해 청동은 원형적이다. 고대 왕이나 제사장의 무덤 부장품 중에는 청동으로 만든 거울, 면도날, 동검 같은 품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부장품은 청동기, 철기라는 새 문명의 도래로 인류가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무덤에서 나오는 면도날은 물러서 실제 면도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청동은 실용적 가치 이상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암시한다. 

- 청동은 인간이 빚어낸 것 중 빛을 반사할 수 있는 최초의 물질이다. 그 옛날 왕이나 제사장이 목걸이든, 왕관이든, 검이든 빛을 반사하는 뭔가를 몸에 지닌다는 사실은 그 존재가 빛의 힘과 연결되어 있음을 과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빛을 발하는 존재는 곧 신과 연결되어 있거나 최소한 신적인 힘을 지녔다고 믿었던 것이다.

 

- 또 땅에서 원재료를 캐내 불로 정하여 금속을 생산해내는 과정에 고도의 기술과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연금술의 상징성을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불을 마음대로 다룰 힘"(power over fire)이라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땅 어머니의 몸에서 새로운 물질을 태어나게 하는 산파의 역할, 불로 요리하여 빛을 반사하는 불변의 물질을 탄생시킨다는 점도 청동을 만드는 과정이 지닌 상징성일 것이다. 앞서 석탈해왕 이야기에서 언급했듯, 고대에 이런 힘을 지닌 대장장이는 왕이거나 왕과 같은 힘을 누리는 존재였다는 사실은 마땅해 보인다. 

 

- 빛을 반사하는 능력뿐 아니라 청동에서 나는 소리 또한 신체의 특정 부위를 자극한다. 특히 한국 무속에서 트랜스(변환의식) 상태를 유도하는 주요한 무악기가 청동제품이다. 언젠가 김금화 만신에 대한 책에서 방울을 치켜들면 그 팔로 신이 내리는 것을 감지한다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는데, 청동의 빛과 소리가 신들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엿보게 한다. 쇳소리를 내지 말라는 단순한 표현 아래에는 인류 초창기부터 가장 신성하게 여기던 '금속 - 연금 - 빛 - 신성'이라는 오래된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가치들은 시공을 초월해 집단의 기억으로 유증 되어 내려왔다

- 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귀에서 징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가 마귀의 장난이니 빨리 성호를 그으라고 하셨단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믿음에 따른 최선의 충고를 하셨다는 사실은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만큼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사랑으로 한 충고가 아들을 평생 고통스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은 어찌하랴. '징소리=무속마귀의 장난'이라는 단순한 공식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릴 때 가까운 사람, 특히 부모님이 주입한 어떤 '사실'은 아이들에게 불변의 '진리'로 자리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으로 주는 충고라 의심해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 그런데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 현상을 단순히 괴로운 상황으로 보지 않고 무의식의 호소로 본다면 어떨까? 일평생 '그게 아니야! 너는 본성을 거스르고 있어!' 라며 깨어나길 촉구해 왔다면? 귀에서 들린 징소리가 혹시 마귀의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해보았다면?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는 미사 중에 징소리를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금속으로 만든 종을 치는 것이다. 심리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궁극적으로 가장 평범한 것 또는 진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40년 이상 꿈 작업을 소임으로 받아 활동하는 제러미 테일러(Jeremy Taylor) 박사는 귀에서 울리는 징소리는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징후'라고 말한다. 마귀가 시험을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일찍이 이 사람의 소명을 말해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 금기 아래에 놓인 인류가 근원적으로 경외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이 현대인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또 꿈이든 무의식의 다른 표현이든 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는 무지나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끝없이 호소하는 음성이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 그렇지만 이성과 물질세계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끝없이 일어난다. 징을 치지도 않는데 징소리가 귀에 들릴 때, 쉬운 대응은 부인이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마귀의 장난이나 시험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현대인의 절대명제인 '눈에 보이는 것이 실체'라는 믿음 역시 또 다른 미신이나 맹신일 수 있다. 이 믿음을 숭상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들여다보자. 

 

- 헤라클레스는 지하세계의 '비가시적인 존재'들을 만나자 일망타진하기 위해 보이는 족족 방망이를 내리친다. 그런데 이 '존재들'은 신음소리를 내기는커녕 상처도 입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일찍이 지상에서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헤라클레스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금껏 힘으로 무찌르지 못한 것이 없었던 영웅은 자신의 자아보다 더 큰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급해진 마음에 불안과 초조함까지 가세해 더욱 맹렬하게 방망이를 휘둘러보지만 이 '존재들'은 미동도 않는다. 무진장이라 믿었던 헤라클레스의 힘이 거의 소진될 즈음, 보다 못한 헤르메스가 지하세계로 내려와 "네가 죽이려는 것은 이미지야"라고 귓전에 대고 속삭여준다.

 

- 물리적 실체가 없는 비가시적인 존재들 앞에서 헤라클레스는 무방비 상태다. 자아세계의 영웅에게 그 너머의 세계, 하데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이 안타까운 모습에서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현대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현대인이 헤라클레스를 여전히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는 '실체란 물질적인 세계, 가시적인 세계만을 의미한다'는 세계관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상도 하지 못한 세계에 노출된 헤라클레스의 대응은 어떠한가? 물질이 아닌 이미지의 세계를 만난 지상의 영웅은 상대를 모르고 자기의 한계를 모르니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극단의 불안과 당혹감으로 미쳐서 날뛸 뿐이다.  

 

- 그러니 이제 원시로 돌아가 귀신을 섬기자는 말이 아니다. 마법과 주술을 믿었던 인류 초창기를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빛과 이성과 합리를 숭배하면서 불가피하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보자는 것이다. 현대인이면 누구나 겪는 불안과 근심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이성과 명료함이 발달하면서 초래된 결과라 해석했다. 불안이 현대의 빛 숭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말인데, 신화학자 지네트 파리스(Ginette Paris)도 유사한 입장을 견지한다. 그녀는 불안과 우울을 현대의 상징이라 진단하면서 이미지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파리스, <정신의 지혜>). 
 

- 그런데 대입시험 꿈 이야기를 하면서, "가능한 한 떨어지고" "될 수 있는 대로 떨어지고"라는 표현을 되풀이한다. 차마 의식하지 못하는 간절한 진실이 얼떨결에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오는 프로이디안 슬립(Freudian slip)이다. 꿈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가려고 한다', '가야 한다', '그런데 갈 수가 없다'이다. 내가 이 꿈을 꾸었다면 나 자신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가야만 하는가? 어디로 가려하는가? 무의식이 간절히 떨어지기를 바라고 가급적이면 실패하기를 원하는 길을 왜 가야만 하는가? 
 
- 이 사람은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가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일은 누가 봐도 정의롭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선한 일이다. 그리스도교가 특히 강조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착한 길'이 언제나 옳은 길일까? 자신의 본성과 반하는 '옳은 길'이란 없다. 모차르트에게서 피아노를 떼 놓고, 미켈란젤로에게서 물감을 없애버린다면 이들이 빈민을 구제하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절대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전 인류를 구원한다 해도 '옳은 길'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이들이 '착한 길'을 따른다면 세상은 감동을 잊고 천재성이라는 보물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효라는 가치와 부모의 기대, 또는 종교적인 신념이 겹치는 경우라면 개인의 선택이란 정말로 어렵다. 이 상황에서 '나 하나의 희생으로' 라는 속삭임을 듣는다면 삶은 잿빛으로 변할 것이다. 진정한 희생은 가급적이면 멀어져야 할 길을 안간힘을 쓰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주변 사람을 일시적으로 실망시키더라도 '나만의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이 아닐까? 그게 모든 사람이 통과해야 할 인생의 시험일 것이다. 

- 무의식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을 땅에 붙여두려 애를 쓴다. '가야만 하는 길'을 걸으려고 고통받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내면의 소리, 무의식의 음성에 귀 기울이라고 최선을 다해 호소하지 않는가? 가야만 한다고 믿는 당위를 재고하지 않는 한 선택권은 없다. 진정한 희생이란 자신의 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나 사회의 준거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참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세상의 요구보다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면 분명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불안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정서인 두려움(fear)에도 눈을 한번 돌려보자. 두려움은 그 대상이 명확하다. 불안과 두려움의 차이를 명쾌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 제주로 돌아가보자. 제주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신이 있다. 무속의 18,000신 외에도 조왕신, 문전신, 측신, 성주신 같은 가신들, 그리고 조상신, 마을신, 잡신까지 있다. 제주민들은 귀신을 무서워하고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신이 많은 이유에 대해 민속학자 진성기 선생은 인간의 삶이 복잡다단하다 보니 그 모든 상황을 두루 반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신과 귀신이 많은 제주를 심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잘 분화되어 발달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제주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구체화되어있을 때, 사람들은 뭘 해야 할지를 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막연한 불안과의 본질적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신화는 각 신의 내력뿐 아니라 신을 섬기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기에 제주민들은 금기는 지키고, 신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행하고, 싫어하는 것은 피하면 된다. 그렇기에 두려움이 불안보다 훨씬 낫다. 

- 제주뿐 아니라 귀신이나 정령에 대한 감각이 발달한 중세유럽이나 영과 영혼의 세계의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원주민 사회에 불안감이 훨씬 덜하다는 점은 재고해 볼 일이다. 현대사회는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며 신화를 억압했다. 신화를 억압하면서 신화를 태동시키는 상상력이 위축되었다. 상상의 산물인 신들이 축출되면서 세상은 물질로 전락했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면서 어두움의 존재들이 사라졌다. 이미지가 죽은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이미지를 대치하면서 삶은 풍요로운 경험으로부터 유리되었다. 

 

- 누군가는 현대가 이미지 부재가 아니라 이미지 과잉의 시대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잡지, 신문광고, 심지어 거리에도 이미지가 넘쳐난다.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지는 사실적인 그림이나 의도된 시각적 묘사가 아니라 감정적 진실을 담아내는 이미지를 말하는데, 이 이미지는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체험(felt experience)을 수반한다.  

 

- 물질만을 실체라 인식하던 눈을 내면세계로 돌리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정신이 내면의 극장에 투사해 놓은 이미지들을 성찰하는 것은 영웅의 비전보다 훨씬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힘을 뽐내고 승리를 만끽하며 강함을 입증하는 데 익숙한 영웅이 자신의 상처와 약함과 한계를 수용한다면, 정복자가 아니라 탐구자나 구도자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이 전환은 기존 세계의 죽음을 의미하는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 지하세계나 죽음의 세계는 현대인에게 낯설다. 이 세계에 대한 신화적 지도를 비교적 자세히 제공하는 문화권으로는 티베트, 그리스, 고대 이집트가 먼저 떠오른다. 티베트에서는 육체적인 죽음 직후에 경험하게 될 현상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제공한다. 그리스에서는 이를 하데스라는 신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알려지지 않은 부의 세계라 부른다. 또 고대 이집트인의 간결한 묘사가 이 지점에 도움이 된다. "지하세계에서는 입으로 똥을 누고 똥구멍으로 밥을 먹는다." 이 은유적 표현은 지하세계에서는 의식세계의 가치나 이념이 완전히 전복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 지상에서 칭송의 대상인 영웅 헤라클레스의 힘과 의지와 용기가 지하세계에서는 똥으로 간주되고, 그의 상처와 회환과 두려움과 트라우마가 영혼의 공양이 된다. 심리학은 지하세계의 양식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존중한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를 깊이 성찰하면 한 사람의 고유한 본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의 초기에 일어나는 트라우마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뿐 아니라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 기억은 트라우마에서 탄생하고, 트라우마에서 한 사람의 역사가 비롯한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존재감이 심어지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심리학적인 시각이고 밤의 비전이다. 의식의 관점에서는 지우고 도려내야 할 트라우마이지만 밤의 비전으로는 영혼에 새겨진 표식으로 살면서 거듭 되돌아가서 자기가 누구인지 성찰하는 자리가 된다. 

- 이 지점에 혼동이 발생한다. 참나를 발견하는 자리는 내면세계이니 눈을 안으로 돌리라고 인류의 모든 현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불안과 우울, 공허감을 위한 해결책도 내면에 있다 한다. 그런데 기존의 종교나 영적수련을 하는 곳에서는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매달리지 말고 '지금 이 자리' 에만 집중하라고 한다. 쉼 없이 두려움과 욕망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마음을 넘어서라며, 그 너머에 고요한 평화의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이 평화와 지복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과 심리학의 주장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 심리학에서 상처는 다루어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 내면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다루는 것이라고 본다. 힐먼 같은 급진적인 심리학자는 한발 더 나아가 상처를 존중하라 한다. 한쪽은 꿈을 무시하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꿈이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며 자기 탐구의 좋은 도구로 활용한다. 한쪽은 상상력을 잠재우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상상력의 약화가 현대인의 트라우마라고 한다. 이 두 상반된 입장이 내게도 오랜 난제였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영감을 주는 심리학자 힐먼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힐먼은 영과 영혼의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입장인데, 이 구분이 지금 다루는 질문과 직접 연관이 된다.  

 

- 이분법적 사고에 젖은 현대인에게는 외부세계의 반대가 내면세계이다. 정신(psyche), 영(spirit), 영혼(soul)이라는 개념도 뒤죽박죽 섞여 있다.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실체로 간주하는 현대인에게 내면세계, 즉 영과 영혼의 세계는 실체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라클레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명화되었다는 현대인과는 달리 원시적인 삶을 유지하는 부족민들에게 실체는 물질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영혼은 일상의 실체이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을 잃는 것이다. 영혼을 잃으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죽는다고 믿는다. 현대인에게는 다소 생소해 보이는 개념이지만 잃어버린 과거와 현재 사이에 고리 역할을 해주는 제주 문화에서 도움을 받아보자. 

 

-  영혼에 대한 개념은 특별하다. 제주민에게 영혼은 몸 안에 거주하다가 몸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잠을 잘 때는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믿는데, 몸을 떠난 영혼의 여정이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잠자는 사람 얼굴에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금기는 얼굴에 그림을 그려놓으면 빠져나간 영혼이 다른 사람인 줄 알고 돌아오지를 못해 그 사람이 죽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영혼은 머리 정수리를 통해 빠져나가는데, 잘 때 말고도 심한 충격으로 놀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는다. 이럴 때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례를 하는데 이를 '넋드림'이라고 한다. 

 

- 임종시에도 영혼은 몸을 떠난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삼혼을 믿는데, 혼이 셋으로 나뉘어 하나는 염라대왕에게 가고 다른 하나는 무덤에서 뼈를 지키고 나머지 하나는 집안에 사자를 기리는 자리에 3년간 머물다 구름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 

 

- 이에 대해 전 인류의 영적 스승, 달라이 라마가 하신 아름다운 표현이 있어 소개한다. 

"영혼은 깊고 그늘진 골짜기에 거주한다. 어두움 속에서 태어난 무겁게 늘어진 꽃들이 거기서 자란다. 강물이 끈적끈적한 시럽처럼 흐르고 이 강들은 거대한 영혼의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반면, 영은 눈 덮인 산꼭대기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수 그리고 빛으로 현란한 꽃들이 있는 높은 곳에 거주한다. 생명은 드물고 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곳이다... 영은 고즈넉한 황량함에 대해서는 곱씹지 않는데 음울처럼 절대적 고립감에도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높이에서 영과 영혼은 멀리 떨어져 있다. ...산에 오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적인 신성이 영과 결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영과 영혼의 관계나 특질에 대해 이보다 더 시적이고 투명하게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을 산꼭대기의 영성, 영혼을 골짜기의 영성으로 시각화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해진다. 영은 불처럼 공기처럼 가볍고 빠르게 위로 향한다. 짙게 푸른 눈빛 같고 서늘한 칼날 같다. 영혼은 물처럼 서서히 아래로 흐르고 끈적끈적한 깊이와 무게가 있다. 영의 찬란한 빛이나 밝음과 대조적으로 영혼은 캄캄한 밤과 연관된다. 영이 남성적이라면 영혼은 여성적이다.

 

- 심리학은 영혼에 관한 학문이다.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단어는 본래 나방을 뜻하는 'psyche' 에서 나왔다. 나방은 꿈, 상상력, 판타지, 이미지와 관련되는 밤의 피조물이다. 어두움 속의 미로를 탐색하듯, 시럽 같은 강물이 바다의 깊이로 흘러들듯 느리게 모퉁이를 감고 돌며 순환적인 사고를 한다. 반드시 경험 안에서 성찰을 한다. 물처럼 어떤 장애물에도 유연하게 순응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열어간다. 다양성이 약속하는 풍요를 찾는 것이다. 원시 부족이나 제주민은 영혼을 확고한 실체로 인식했다. 이들처럼 영혼을 몸 안에 거주하다 죽음 후에도 사는 불멸의 존재로 규정하는 대신, 사물을 바라보듯 다루어보면 어떨까?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들의 언어 습관에는 이미 이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 잠을 자는 조물주의 이미지가 오늘 이 시점 우리에게 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잠을 자는 할망의 머리는 최북단을 향하고 있다. 이는 죽음의 방향이고 궁극에 영혼이 회귀하는 방향이다. 매일밤 인간도 창조주 할망이 처음에 그러하였듯 잠을 잔다. 이는 궁극적인 고향이자 우주의 자궁으로 회귀하는 연습이다. 

- 어쩌면 우리는 매일 밤 만물의 원천인 우주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지만 의식의 그릇이 이 경험을 담아낼 만큼 크지 않아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잠의 깊이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의 그릇을 키워가는 것이 이 오랜 진화의 방향이 아닐까? 오래 잠을 자던 여신이 현대인의 의식으로 깨어나고 있다. 여신과 함께 우리 앞에 펼쳐질 깊이와 신비와 아름다움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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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시대 전, 인류 초창기의 오랜 시기 지구상에 존재했던 전한 여신의 이미지를 찾는 것이 '고대의 여신전통'을 접한 후 내 삶의 화두였다. 그리고 그 토대를 만들어준 사람은 고고신화학자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였다. 그는 인류가 종교적인 감성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래 오랜 시기 동안 '신들은 여신이었다'라는 이론/가설을 제시하면서 인류 초창기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전쟁과 위계가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 지구를 중심에 두고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존중하며 감정의 결을 연마하여 자비심을 기르고 뭇 생명의 그물망을 보호하는 땅의 영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 생명에 대한 감성과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시급히 깨어나야 할 때이다. 김부타스는 일찍이 지구상에 이런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 

 

- 암흑으로 뒤덮인 천지에 여명이 깃들면 세상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태초에 천지가 하나의 검은 덩어리였다가 시루떡 금 가듯 갈라졌다는 제주 무가 천지왕 본풀이」의 한 대목처럼,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순간 암흑으로 채워진 천지가 바다와 공기, 물과 하늘로 갈라지고 지형은 그 윤곽을 또렷이 드러낸다. 어두움이 서서히 밀려나면서 밤새 식었던 공기는 푸르른 기운으로 청정해지고, 그러다 수평선 위로 붉은 띠가 등장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동그란 해가 고개를 내밀어 어느새 우뚝 솟은 일출봉 위로 성큼 올라앉는다. 

 

- 인류 최초의 공예는 길쌈이다. 선사시대 여신상들의 흔적을 살펴보면 길쌈의 역사는 도자기의탄생, 농업의 시작, 가금의 사육 그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바버.『선사시대의 옷감』).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꼬아서 만든 식물 섬유'는 기원전 24870~26980년의 것이다. 기원전 300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Venus ofWiellendorf)의 올록볼록한 머리 부분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동물의 털로 짠 여신의 모자로 해석하고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기에 벌써 길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길쌈의 인류 진화사적 의미에 생각이 미치면, 이 놀라움은 충격으로 바뀐다. 길쌈은 동물의 털이든 식물섬유 자연에서 재료를 채취한 다음, 이를 씨실과 날실로 나누어 한 올 한 올 짜나가는 대단히 정교한 작업이다. 이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선행조건을 상상해 보면, 먼저 고도로 진화된 두뇌와 숙련된 손놀림이 전제되어야 한다. 게다가 자연 그대로의 삶의 유지나 생존을 넘어서 창조에의 본능 혹은 열정이 필요하다. 자연에서 실을 잣는 누에나 그물망을 짜는 거미의 지혜가 동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앞서 일화에서 탈해에게 집을 빼앗긴 호공은 허리춤에 박을 차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논리적 비약일 수 있지만 가능성을 제기하는 차원에서 논의를 발전시키자면, 호공이 씨앗을 간직하고 다니는 농경계열임을 암시하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탈해와 호공의 만남과 집을 빼앗는 탈해의 승리는 두 신화권의 충돌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여기서 탈해왕은 속임수를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는데, 이는 전형적인 트릭스터의 특질이다. 정직과 성실을 대변하는 농경계 신들과 달리 속임수, 변화무쌍, 재미, 놀이, 질펀함, 풍요가 트릭스터의 세상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물론 단언적으로 말하기에는 근거 자료가 턱없이 빈약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으로 제한된 자료들을 검토해 보는 것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 남근이 분명 발기한 남성 성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먼저, 남근은 자치권을 지니고 있는 기관이다. 자아나 초자아 등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거나 의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의식 차원을 넘어서는 자생적이고 내재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데, 이는 바로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무의식은 강인하고 속도감 있고 직시하고 관통하는 생명력을 지니는데, 무의식이 지닌 창조적 원리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남근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성적인 모드의 힘을 대변한다. 

- 또, 남근은 초월적이다. 조지 엘더(George Elder)는 “남근은 모든 다른 위대한 종교의 상징들처럼 신비한 신의 실체를 나타내는데, 이는 남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근은 단순히 남성의 성기나 발기한 기관 정도가 아니라 초월적인 힘을 상징한다. 시바 신 숭배자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명확한 듯한데, 이들은 시바 링감 자체를 곧 시바 신의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 우리나라 전역에 존재했던 남근숭배의 경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신의 이미지로 발달하거나 신화가 만들어지고 이를 경배하는 사원이 지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고등종교로 발달했건 원시적이건 남근의 신비한 힘에 대한 숭배는 언제나 종교적이며, 남근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 그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힘을 만나도록 해주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남근의 이러한 본질적 힘에 관해서는 신화와 민담에 자주 나타나는데, 지금 다루고 있는 설문대하루방의 이미지가 그 탁월한 예일 것이다. 

- 신화가 그려내길, 하루방이 엄청난 힘이 솟구치는 거대한 남근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바다 속이 삽시간에 대혼돈 상태로 돌변한다. 이로써 정체된 에너지가 서둘러 달아나는 물고기들처럼 숨 가쁘게 요동을 치기 시작하는데, 동적인 에너지가 위협적일 정도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 이미지에 선명히 드러나듯, 남근은 분명 리비도를 의미한다. 융도 이를 분명히 한 바 있다. "아무리 명백하게 드러난다 할지라도 남근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리비도의 상징이다” (융, 『리비도의 변형과 상징』). 융의 이런 현학적인 설명을 설문대 신화는 훨씬 힘 있고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 이 신화에서도 우리는 남근의 다양한 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신화에서 하루방이 불러 일으켜 바다를 온통 뒤집어놓은 리비도, 즉 생명의 에너지가 귀결되는 곳은 할망의 하문이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휘저어놓으면 가라앉는 자리가 있고, 혼돈이 있으면 고요가 있어야 조화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바다 이쪽 끝과 다른 쪽 끝에서 마주하고 있는 하루방과 할망의 이미지는 그 모습 그대로 자연의 두 대극적인 특질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원형적인 이미지인데, 유사한 이미지를 힌두의 시바 링감과 두르가(Durga) 여신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오랜 관상생활로 앞을 내다보는 눈이 발달했음에도 여태 침묵으로 일관해오신 분의 꿈인데, 이 꿈을 남에게 나눈 것이 바로 내면의 소리를 세상을 향해 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무의식은 왜 이 시점에 이런 꿈을 보내주었을까? 이는 개인적 의미를 넘어 우리 집단 전체를 위한 선물 같다. 가부장적 교회, 가부장적 현대, 편향된 남성성 중심 사회를 치유할 내면의 지혜, 즉 예언의 음성을 나누어주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개인의 신화이든 집단의 꿈이든 원형적 드라마는 시공을 초월해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하게 된다.
 
- 물장오리는 아무리 가물어도 절대 마르는 법이 없다는 한라산에 있는 화구호이다. 현재 천백고지에 위치한 습지와 거기에 서식하는 희귀 동식물로 인해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데, 예전에는 다른 이유로 제주민들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 제주의 선조들에게 물장오리는 소리만 크게 내어도 안개가 낀다는 영험한 자리였다. 신령한 힘이 깃든 곳이라 항상 경계하고 삼가서, 이곳에 오르기 전에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수많은 금기들을 지켰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안개가 일어 호수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버린다고 믿었다. 또 이 자리에서 축원을 드리고 혹 운무가 일지 않는다면 기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심방들은 이곳에서 산 돼지를 통째로 바쳐 제를 올리기도 했다. 한라산의 잦은 운무와 순식간에 돌변하는 일기로 인해 한 순간 자태를 드러냈다가 다음 순간 바람처럼 흔적을 감추어버리는 물장오리는 인간의 근접을 경계하는 듯하다.

 

- 『오즈의 마법사』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이런 판타지가 신화의 세계에서는 일상이다. 엄청 큰 것과 대단히 작은 것을 대비하는 현상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마도 이런 경향은 인류 초창기부터 시작된 듯하다. 이런 과장을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원시 모드의 추상 (a primordial mode of abstraction)이라고 한다. 두드러지게 과장된 인물이나 중요한 특질을 가진 대상을 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터너, 『의례의 인류학』). 

 

- 이 미륵님과 견줄 만한 거신이 다른 무가에도 등장한다. '고창학본 초감제」에 도수문장이라는 창조주가 등장한다. 도수문장은 한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땅을 짓눌러 천지를 분리하는데, 미륵님 이미지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묘사하는 듯하다. 이런 무가들 외에도 한국의 여러 구비문학은 거인신 이야기의 보고이다. 북구 신화처럼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을 거인의 활동과 연관 짓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 천신이 하늘과 땅 사이에 구리기둥을 세워 받쳐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의 무게가 엄청나서 기둥이 자꾸 내려앉자, 힘이 센 거인 장수더러 땅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으라고 명한다. 그런데 하늘 무게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장수가 한쪽으로 지고 있던 하늘을 다른 쪽 어깨로 옮기곤 했는데, 이때마다 땅에서는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 이밖에도 지금 우리가 탐색하고 있는 설문대할망과 흔히 동일한신으로 간주하는 거녀신이 한국 땅 전역에 산적해 있다. 우리 산천을 창조한 거대한 여신을 마고할미라 하기도 하고 마구할미, 노고할미 때로는 서구할미라 불렀다. 엄청난 크기나 창조양식을 볼 때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여신을 동일한 여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설문대할망을 제주의 마고할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같은 여신이다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각각의 이미지들을 신화가 태동한 그 자리에서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책은 제주와 설문대할망 신화에만 범위를 제한한다. 

 

- 다양한 거신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사실은 우리 신화에서 거인신의비중이 상당히 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우리 거신들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간 이유를 짐작케 하는 신화 조각을 바로 이 거대한 설문대할망의 죽음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신이 아니라 물에 빠져 익사한 신이기에 할망을 위한 굿도 사라지고, 신앙민도 없고, 점차 집단의 뇌리에서 사라져 묻혀버린 것은 아닐까? 할망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새겨보자. 

 

- 똥 누고 오줌 누고 밥 지어 먹고길쌈을 하는 할망은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초월적인 남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할망의 죽음 이미지 또한 낯설게만 여겨진다.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의 이미지에 너무도 익숙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미지를 음미해 보면 신의 이미지에 죽음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 언젠가 고르바초프 앨 고어 같은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이야기의 주제가 원자력에 집중되면서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해야 불을 더 밝힐 수 있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을 때였다. 참석자 중에 상대적으로 덜 저명했던 스윙 교수가 가만히 손을 들고 한마디를 던졌다. "어두우면 안 되나요?" 트릭스터의 순간포착은 빛보다 빠르고 천재성은 번개처럼 빛이 난다. 그 자리에 퍼졌을 썰렁한 기운과 스윙 교수의 천진한 미소가 함께 겹쳐진다. 

- 잠과 잠을 자는 시간은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다. 잠자는 동안인체에서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70년 정도이니 대단히 젊은 학문이다. 그간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보면, 잠을 자는 동안에 몸에 쌓인 피로가 풀릴 뿐 아니라 몸이 재생된다. 혈압은 낮아지고 심장박동은 느려지고 스트레스는 완화되니 자연히 몸이 이완된다. 이럴 때 성장호르몬 분비는 왕성해지고 면역 시스템이 정비되어 병이 치료된다. 뇌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져서 낮 동안에 입력된 기억들이 정리된다(한진규, 『잠이 인생을 바꾼다.).

- 잠을 자는 동안에는 인체가 활동을 멈추고 비생산적으로 시간을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몸과 신경이 이완되고 조절을 한다. 면역계가 재정비되고 체력과 에너지가 회복되고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만들어진다고도 한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조금씩 그 신비가 드러나고 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 인 체는 활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창조-재생-조절 작용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 그런데 주류의 문화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다. 잠을 자지 않는 도시' 란 문화적 강박을 집약하는 표현이다. 잠에 대한 무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공하려면 잠을 줄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수험생들 사이에 4시간 자면 대입에 성공하고 5시간을 자면 실패한다는 소리가 공공연하다.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470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20대 직장인의 평균 수면 시간이 6시간 20분이고, 직장인 둘 중 하나는 잠이 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아침에 눈을 뜨기가 어렵고, 자고 나도 몸이 무겁다고 호소한다. 불면을 모토로 하는 나라에 불면으로 고생하는 시민이 많은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 한국인은 늦게 자고 적게 잔다. 후진국형 수면패턴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인이 겪고 있는 정서불안과 신경증, 그리고 심각성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높은 자살률은 수면 부족이나 수면장애와 절대적인 연관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잠자지 않는 도시를 자랑거리로 내세울 게 아니라, 잠의 양과 질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 현대인의 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는 그리스도교 신의 이미지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를 만드는 데 가장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종교와 이념이 그리스도교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그렇다면 제주처럼 창조주가 창조행위로 잠을 자는 이미지가 포함된 문화권에서는 밤과 잠에 대한 태도나 잠 문화가 어떨까? 현대인의 편향된 태도를 되짚어보는 데, 또 건강과 균형을 회복하는 데 잠자는 신의 이미지가 간직된 제주 문화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민의 밤과 잠 문화로부터 한수 배워보자.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똥으로 황금빛 오름을 빚고, 오줌으로 바다를 만들었던 거인 여신 설문대할망 신화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수천년 간 제주 땅에 살아온 제주민들의 여신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를 수록한 책이다. 설문대할망에 대해 전문적으로 분석한 교양서로, 설문대할망의 신화를 통해 전쟁과 위계가 지배하는 남신의 창조신화가 아닌 평등과 평화, 그리고 상생의 구현이라는 제주민들의 오랜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저자
고혜경
출판
한겨레출판사
출판일
201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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