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그렉 브레이든]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

일루젼 2023. 1. 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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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그렉 브레이든 / 김시현
출판 : 김영사 
출간 : 2021.07.20 


       

최근 읽고 생각하게 되는 내용들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내면적으로 정리된 것들과 일상적인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졌던 모양이다. 현실은 현실, 이상은 이상으로 나누어 접근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많다. 이를 '실천 가능'하고 '설명 가능' 선에서 분리되지 않게 합쳐나가는 것이 올해 내게 필요한 경험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올랐던 잡생각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양자쌍이 지구외 영역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이 양자의 '동시'는 감각적 시간선에서의 '동시'가 아니다. 몇 천 광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어나는 '동시'는 그 자체로 과거가 될 수도,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감각적 시간선에서의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 

 

두번째는 정말 호기심에서 나온 의문인데, DNA 염기서열의 A C G T 분포를 분석해보면 그 사람의 원소적 기질과 관련이 있을까? 이걸 실험해보려면 여러가지 의미로 정말 '미친' 연구자가 어디선가 연구비용을 끌어와야 할 것 같은데. 염기서열 정보는 쌓이고 있으니 조금 더 기다리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DNA가 알파벳과 매칭이 된다는 본문 내 설명이 있기에 불현듯 궁금해졌다.)

 

세번째는 가능태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해온 자유의지와 미래 예측에 관한 단상들은 이런 순으로 변해왔다.

 

제일 처음에는 이미 편집까지 끝난 영화의 본편이 과현미라면 거기에 더할 수 있는, 편집 사이 사이를 메꾸는 쿠키 영상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했었다. 같은 사건이 동일한 시간순으로 배열되더라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의지라고.

 

그 다음은 자유도가 높은 게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템이나 맵, 레벨과 퀘스트처럼 이미 고정적으로 정해진 변수값의 범위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시간과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시각화나 끌어당김이 동일 게임 내에서의 '구현'이라면 트랜서핑은 '게임 체인지'라고 생각했다. 

 

현재는, 여전히 게임 가설(가능성 수프)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 중첩성이 높은 현실이 실체로 구현된다는, 그리고 구현된 현실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상상이 이미 이론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조금 놀랐다. (사실 누군가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이미 다른 누군가가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인간 관계 같은 특정 조건 상황은 손패가 처음부터 고정된 카드게임과도 유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손에 든 '카드'는 시작부터 고정되어 있지만 게임의 '플레이'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경험에서 내가 경험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되 관계 자체는 '정해져 있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각자의 손패가 맞는 대상간에 '만남(매칭)'이 성립되게 되는 게 아닐까. 그걸 카르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그리핀과 스핑크스와 아이온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과 독수리와 사자와 소에 관해서. 본문과는 무관한데, 이상하게 읽는 동안 계속 떠올라 기록해둔다. 

 

<디바인 매트릭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의 내면과 외면, 생각과 감정과 건강 등이 환경과 교류와 사건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고 받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분리'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개의 거울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전까지는 외부는 내부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현재의 나'라고 여기고 살펴봤었다. 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과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고만 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는데, 그 경우는 일단 '장애물'에 가깝다면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이 부분을 이 책에서 설명해주는 '다섯 개의 거울' 개념으로 접근하면, 반영은 보다 다층적이며 상세하다. 내가 이해한 다섯 거울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거울은 '현 상태' 그대로이다.

두번째 거울은 '내가 거부하고 있는 것'이며, 세번째 거울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 둘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네번째 거울은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경험하고 다루는 연습을 통해 '변화'가 가능해진다. 

다섯째 거울은 '내가 괴리를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이 거울의 관찰과 인지를 통해 현재에 대한 허용과 모든 상태에 대한 자비, 이상적 추구가 모두 가능해지게 된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듯도, 너무 멀리 와버린 듯도 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모든 물질은 어떤 힘에 기대어서만 
발생하고 또 존재한다.

이러한 힘의 바탕에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마음 Mind 이 분명 존재한다.

이 '마음'이 곧 모든 물질의 매트릭스 matrix이다.

- 막스 플랑크, 1944년 -

 

 

 

- "과학은 자연의 궁극적 신비를 풀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논의해 보아도 결국에는, 우리 인간 자체가 (…) 우리가 풀려고 애쓰는 신비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Max Planck (1858~1947)

- "우리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의식을 이해하는 날, 우리는 우주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고 모든 칸막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 물리학자 아미트 고스와미 Amit Goswami

 

- "삶은 거울이기에 우리가 생각한 바를 우리에게 되비추어준다." -정신과학의 창시자 어네스트 홈즈(1887~1960)

 

- "왕국은 너희 안에 있으며 너희 밖에 있나니 ... 감추어진 것은 모두 드러나리라." - 나그함마디 문서 중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예수의 말씀  

 

- "너희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라. 그리하면 감추어진 것이 너희 앞에 드러나리라." - 도마복음

 

- "너희가 너희들 안에 있는 것을 꽃피우면 너희는 구원을 받으리라." - 도마복음

 

 

- 양자 역학 quantum mechanics의 아버지인 막스 플랑크 Max Planck는 위와 같은 말로 우주 만물을 잇는 에너지장 energy field, 즉 디바인 매트릭스 the Divine Matrix를 묘사했다. 

 

-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리의 세계 자체이며, 우리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자,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창조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다. 

 

- 디바인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담긴 그릇이자 우리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를 잇는 다리이며 우리가 창조해 온 것을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 입문자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승의 격려에 힘입어 단순히 벼랑 끝에 서는 것만으로, 그들은 그 끝을 넘어서는 놀라운 경지에 오른다. 이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그러한 발견을 통해 새로운 자유를 얻는다.  

 

- 그 가능성이란,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창조 세계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단순한 관찰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물질적 풍요, 인간관계, 경력, 우리의 깊디깊은 사랑, 위대한 성취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결핍감과 두려움으로 시달리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관조할 때, 그것은 곧 우리의 가장 진솔한(때로는 가장 무의식적인) 믿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주변 환경은 신성한 매트릭스의 신비로운 힘을 통해 빚어진 것이기에, 우리 자신의 믿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을 우리는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바로 그러하기에 의식 자체야말로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예술작품인 동시에 예술가이다. 

 

- "저 바깥에 우주가 존재하고, 우리 인간은 두꺼운 유리판에 의해 우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여기에 그저 관찰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낡은 생각이다." 이어서 휠러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한 20세기말의 실험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양자 세계를 통하여 미세한 입자를 하나의 전자로서 단순히 관찰하기 위해서라도 유리판을 산산이 부수어야만 하고, 그래서 저 바깥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관찰자라는 낡은 단어를 지워버리고 대신 참여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써넣어야 한다." 

 

- 이 얼마나 놀라운 대전환인가! 휠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달리 설명한다. 우리의 주변세상을 우리가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양자 물리학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전자처럼 미세한 물질은 우리가 단순히 쳐다보기만 해도, 아니 잠시 잠깐 그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만 해도 그 짧은 순간에 그것의 특성이 바뀌고 만다. 관찰 행위 자체가 창조 행위이고, 우리의 의식이 그러한 창조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 인간이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단순한 방관자가 결코 아니라는 휠러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 봄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 층위들 Levels of reality의 토대를 이루는 우주의 이치에 문을 활짝 연 것이 바로 이 이론이다. 즉 봄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더 높거나 더 깊은 층위의 우주라고 믿었다. 우리의 물리적 세계는 현실의 보다 미묘한 층위들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 그의 두 번째 이론은, 항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을지언정 우주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통합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 로렌스 방사선 연구소(현재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에서 초기에 실행한 연구에서 봄은 플라즈마 plasma라는 특별한 가스 상태의 원자를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입자들은 플라즈마 상태일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개개의 독립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인 양 서로서로 연결되어 움직였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봄이 1980년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선구자적 저서 <전체와 접힌 질서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의 토대가 되었다. 

 

- 보다 높은 이 층위가 바로 감추어진 세계이자 본래의 세계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안에서와 같이 밖에서도'의 이런 관점에 따르면, 패턴들은 패턴들 안에 담겨 있으며 크기만 다를 뿐 저마다 스스로 완전하다. 

 

-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인간의 몸이야말로 홀로그램의 아름다운 사례이다. 우리 신체의 어느 부위를 보든 DNA는 똑같은 유전자 코드를 갖고 있다. 머리카락이나 손톱이나 혈액 등 어디에서 채취하더라도 거기에는 DNA의 부분이 아닌 전체가 담겨 있다.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유전자 배열이 신체 부위에 따라 달라지거나 쪼개지지 않고 항상 똑같은 것이다. 

 

- 흥미롭게도, 이는 과거의 지혜 전통에서 설명하는 세상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BC 5000년경에 작성되었다는 고대 인도의 베다에서부터 BC 2000년경의 사해 두루마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테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은 보다 높은 영역이나 더 깊은 실재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The Songs of the Sabbath Sacrifice'로 알려진 사해 두루마리의 최근 번역본에서 번역자들은 다음 한 문장으로 내용을 축약한다.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크고 궁극적인 실재계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디바인 매트릭스는 거대한 우주 스크린처럼 작용하여 우리의 감정과 믿음이라는 비물리적 에너지(우리의 분노, 증오, 사랑, 연민, 이해 등)를 삶이라는 물리적 매체 안에 투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 준다. 영화관 스크린이 필름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든 아무런 판단 없이 비추기만 하듯이,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리의 내적 경험과 믿음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아무런 편견 없는 표면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 다소 무섭게 들릴 수도 있다. 디바인 매트릭스를 의도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고하게 한다. 적어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이 인생에는 있는 것이다. 

 

-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지혜 전통들에 따르면, 디바인 매트릭스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따로 있다. 이 언어는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나열도 아니고, 손짓 발짓 같은 몸짓 언어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매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의 언어이다.

 

- 현대 과학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겪을 때마다 우리의 신체 역시 pH 지수, 호르몬 등이 화학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랑, 공감, 용서와 같은 '긍정적' 감정과 증오, 판단, 질투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존재를 확인하거나 부정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감정은 우리 신체 내부뿐만 아니라 우리 신체 외부의 양자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 인간의 DNA는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감정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에 영향을 주는 DNA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감정과 DNA의 관계는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한다. 그 영향력은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 고대의 영적 전통에서는 우리가 하루하루 매 순간 삶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선택을 내린다고 본다. 매분 매초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고갈시키는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살찌우거나 말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충만한 삶을 선사할 깊은 호흡을 할 수도 있고, 메마른 삶을 선사할 얕은 호흡을 할 수도 있다. 다른 이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고 모욕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각 선택을 내릴 때마다, 우리는 초공간적이고 홀로그램적인 의식의 힘을 통해 삶의 시공을 뛰어넘는 영향을 끼친다. 우리들 각자의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집단적인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발견이다. 
 

- 일련의 실제 사례들은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들이 실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도 진실한 믿음을 보여준다는 분명하고도 아이러니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그중에는 반려동물이 자신의 몸 상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변화나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는 놀라운 일화도 포함되어 있다.  

 

- "우리는 정말 하나로 이어져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과연 얼마나 갖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에서부터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 가능성의 '수프 soup'에서 비롯된다. 각각의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낸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각자의 믿음에 따라 우리는 더없이 암울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막대한 기쁨의 순간들에도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다. 이 순수 에너지를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며, 그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이것이 열쇠이다. 세상이 시작되는 곳, 즉 디바인 매트릭스의 순수 공간에서, 우리는 현실의 건축가로서 어떤 일이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법보다 질병을 피하는 법에 집중하고, 평화롭게 협동하는 법보다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법에 골몰하며, 무력 충동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는 법보다 신무기를 개발하는 법에 열광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살아남기 위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누구도 진실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이제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다른 길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그 지혜 보유자에게 물었다. 

"그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지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되찾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해 냈습니까?" 

 

- 그때, 태양이 협곡 너머로 가라앉으며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볕에 그을린 얼굴의 사내는 내 앞에 서서 그 질문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가 속삭였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길을 잃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조상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을 기록할 이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그 존재가 인정받도록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다. 예를 들어, 불교 경전에서는 제석천이 머무는 곳을 '삼라만상을 잇는 그물망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다. "저 멀리 제석천의 궁전에는 어느 솜씨 좋은 장인이 걸어놓은 아름다운 그물망이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 있다." 호피 인디언의 창조 신화에서는 먼 옛날 거미 할머니가 텅 빈이 세상에 나타나 우리 세상이 지금의 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미 할머니가 한 첫 번째 일은 세상 만물을 잇는 커다란 거미망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만물을 잇는 우주적 에너지장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이 에너지장을 에테르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테르는 공간의 본질이자 '신들이 숨 쉬는 공기'로 여겨졌다.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불, 공기, 물, 흙에 이어 창조의 신비로운 제5원소라고 믿었다. 훗날 연금술사들 역시 세계를 묘사하며 에테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현대과학이 탄생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상 위대한 지성인들 중에는 에테르의 존재를 믿은 이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도 했다. 그들은 물리학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에테르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대 과학의 아버지인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은 17세기에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투명 물질을 에테르라고 칭했다. 신체 감각은 물론이고 중력 역시 이 에테르로 인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입증해 보일 기계장치가 당대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에테르가 살아 있는 영 a living spirit이라고 생각했다.

 

-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쌍둥이 입자는 분리되어 있기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신비로운 연결을 '양자 얽힘 quantum entangl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니콜라스 기신 Nicholas Gisin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점은, 얽혀 있는 양자들이 마치 하나의 존재인양 행동한다는 것이다. 쌍둥이 광양자들은 지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그중 하나가 변화하면 나머지 하나도 자동적으로 똑같이 변화한다."  

 

- 우리 인간은 지나가면서 우주를 실제로 창조하고 있고, 또 이미 존재하는 것에 뭔가를 더하기도 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은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존재들일뿐 아니라, 우주를 형성하는 에너지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고, 의식이란 우주를 만든 근원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포포닌 박사는 미국 학회를 방문하는 중에 이들 실험을 되풀이해 보이고는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의 위대한 연구 'DNA 유령 효과 The DNA Phantom Effect'가 의미하는 바는 포포닌 박사의 말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논문 서문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이 발견이, 대체 의학에서 목격되는 치유 현상을 비롯한 '미묘한 에너지 현상'의 토대를 이루는 메커니즘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보통 우리는 매일 수십 명은 물론이고 때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물리적으로 접촉할 때도 적지 않다. 그저 악수를 나누느라 서로 손을 대기만 해도 피부 세포가 떨어져 나가 내 DNA가 상대방에게 남는다. 상대방의 DNA 역시 나에게 남는다. 그렇다면 세포의 DNA가 살아 있는 한 우리 둘은 서로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연결은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결의 강도는 우리가 이 연결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 샘플 제공자가 어떤 감정을 겪을 때 분리되어 있던 DNA가 그 감정에 반응한다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감정을 실어다 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실험은 너무 단순해서 쉽게 간과해버린 놀라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개념이란 다름 아닌 애초에 감정은 운반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굳이 샘플 제공자에게서 머나먼 곳의 샘플까지 이동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샘플 제공자의 감정이 이미 DNA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감정은 생기는 순간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게 된다.  

 

- 과학계는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를 찾고자 하고, 우주의 경계를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과학계는 영원히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양자계를 아무리 깊이 파고들고 드넓은 우주를 아무리 멀리 탐험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는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창조해 버린다. 참여하는 우주란, 정확히 어떤 우주일까? 우리 의식이 정말 우주에 변화를 가한다면, 실제로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놀랍기 그지없다. 

- 카리브해의 어느 섬 출신으로 이름이 네빌이라고 알려진 20세기의 한 비전가는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우리의 능력을 가장 잘 묘사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 하지만 달리 생각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뉴욕과 워싱턴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사람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좋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우주 만물을 잇는 단일한 에너지장이 존재하며, 디바인 매트릭스가 실험을 통해 입증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들과 우리는 나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이다.  

 

- 우리에게 미워하고 두려워하라고 가르쳤던 국가 지도자들에서부터 우리의 마음을 울리며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나라의 여러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긴밀히 이어져 있다. 우리의 현실을 만드는 인큐베이터인 의식의 장을 통하여 치유는 고통이든, 평화는 전쟁이든,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여러 의미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의 더없는 치유와 생존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네빌은 우리와 우리 주변 세상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수수께끼의 핵심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자기 자신의 의식 상태 이외에 다른 원인들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는 우리가 참여하는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레 제기되는 실제적인 의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과연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그 대답은 실로 간단하다. 우리가 어떤 변화를 원하든, 우리는 그 변화를 창조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 

 

- 그 사람이 밝힌 비결은 네빌과 만난 후 단순히 회복되기를 빌기보다는 '이미 치유되어 건강하다'는 가정하에 살았다는 데에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마음속 깊은 꿈을 일상의 현실로 만드는 비결이 있다.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으며, 기도는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휠러가 '참여하는 우주'라고 말한 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 결과를 향해 노력하는 것과 결과를 성취한 양 생각하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꿈을 향해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목표나 이정표를 정해두기는 하지만, 마음속에서 우리는 꿈을 '이룬'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꿈을 향해 '다가가는' 상태에 있다. 소망을 달성한 '모습을 그리며' 이미 소망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라'는 네빌의 가르침이 그토록 강력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그 비결은 사부님이 매트 위의 한 지점에 이미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고 생생하게 느끼신 것에 있다. 그 순간에 사부님은 명상으로 만들어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 속의 사슬을 사부님 스스로 부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사부님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깨달은 바로는 그러했다. 

 

- 네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미래의 꿈을 현재의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 이 같은 비과학적 표현은 너무나 간단하여 오히려 진실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는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해준다. 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소망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것'뿐이라는 말의 간단함에 부디 현혹되지 않길 바란다. 참여하는 우주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창조의 힘을 발휘하기가 왜 그토록 어렵게만 여겨지는 것일까? 

 

- 모두 타당한 법칙이지만, 양자 물리학의 방정식이 입자들의 실제 존재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양자 물리학의 법칙들은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일단 그곳에 간 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실하게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저 입자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설명할 뿐이다. 입자가 어디에 있을 수 있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고, 그 특징은 어떠할 수 있다는 정도에 그친다. 이 모든 성질은 어느 것이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하고 변화한다. 이런 것들은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바로 이 법칙들이 설명하고 있는 그 입자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입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된다. 

 

- 양자 물리학이 우주에서 우리가 갖는 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삶, 우리의 몸은 양자적 가능성 quantum possibilities의 세계에서 선택된(혹은 상상된) 그대로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가 세계나 삶이나 몸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양자적 가능성 중 오직 하나만이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실재가 된다. 예를 들어, 나의 가라테 사부님은 자신이 한 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선택해 상상했고, 이 때문에 아무도 그를 옮길 수 없었다. 

 

- 다른 두 해석의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펜로즈 역시 다양한 가능성이 양자 준위 quantum level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하나의 특정 가능성을 우리 현실에 '묶어두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에서 전혀 다르다. 펜로즈는 다른 영역들의 양자 가능성이 물질의 형태를 띤다고 주장한다. 모든 물질에는 중력이 있으므로 각 가능성은 저마다 중력장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하나의 가능성이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할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모든 가능성이 영원히 지속될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얻기란 불가능하므로, 결국 양자 가능성들은 가장 안정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합쳐진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 장점 : 이 이론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인슈타인 이론과 양자 이론을 분리시켰던 한 요인인 중력을 처음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중력을 현실을 존재하게 하는 핵심적 힘으로 본다는 것이다.

- 단점 : 펜로즈 해석(하나의 단일한 의견으로 상정할 수 있다면)의 가장 큰 단점은, 그를 비판하는 과학자들은 이 이론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양자 이론은 여전히 하나의 이론에 머물러 있으나 지금까지 양자실험의 결과를 예측하는 데는 100% 성공해 왔다. 따라서 현실을 설명하는 데 그럴듯한 이론이 이미 나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펜로즈의 해석은 그것과 함께 중력의 요인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이론들이 간과한 부분이다.

 

-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때조차도 현실을 바꾸곤 한다. 네빌의 글에서 그 남자의 의사는 진단을 내리며 (한 가지 현실을 선택하며) 특정 결과를 기대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선택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의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음으로써 특정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러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그의 몸은 새로운 믿음에 반응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나면, 대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하죠? 아무리 봐도 병색이 완연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미 치유되었다고 믿을 수 있죠?'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환상 너머를 보려는 우리의 의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 "당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에 대해,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하루에 열네 시간에서 열여섯 시간 동안이나 기도문을 읊거나 종이나 징이나 목탁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당신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통역가가 주지 스님의 대답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당신은 우리의 기도를 본 적이 없지요.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지 스님은 발아래에 깔린 묵직한 모직 법복을 여미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가 우리의 몸 안에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을 보았을 뿐이지요. 느낌이 곧 기도입니다!" 
 

- 우리의 감정 emotion과 느낌 feeling은 우리의 현실을 이루는 것들에 영향을 준다. 외부 세계의 원자, 전자, 광양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 언어이며, 이는 밖으로 내뱉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느끼는 느낌이다. 우주의 양자 힘 quantum force과 소통하는 것은 감정의 언어이다. 디바인 매트릭스가 인식하는 언어는 바로 우리의 느낌인 것이다. 

 

- "자비심이 세상 만물을 잇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종 대답이었다. 그랬다! 티베트 불교의 심오한 요소와 관련하여 10분 동안 열정적으로 대화한 끝에 내가 얻은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다.

 

- "자비심은 우주의 힘입니까, 인간의 경험입니까?"
스님의 시선이 내가 방금 전에 바라보았던 천장 쪽으로 향했다. 스님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여덟 살에 절에 들어온 이후 배운 지혜를 돌이켜보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당시 그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불현듯 스님이 고개를 내려뜨리고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답은 짧고도 강력했으며 대단히 이치에 맞았다.  
"둘 다입니다. 자비심은 우주의 힘이자 인간의 경험입니다."

 

- 아람어로 기록된 고대의 기도문인 사해사본을 최근에 번역한 글을 보면, 고대 유대의 신비주의적 종파인 에세네파는 무엇이 현실을 만드는 가에 대해 티베트의 스님과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번역은 또한, 왜 그러한 가르침이 그토록 모호하게 보이는지에 대한 신선한 단서도 제공해 준다. 신약성서 원본을 재번역한 결과, 지난 몇 세기 동안 원저자의 표현과 의도가 너무도 자유롭게 해석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흔히 말하듯 '번역의 과정에서 많은 것이 사라진' 것이다. 

 

-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를 원본과 비교해 보면, 핵심 사항이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구절에서 볼드체로 강조한 곳이 바로 빠진 부분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직접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되리라. 너희가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 그러니 속셈을 조금도 감추지 말고 구하고, 이미 응답받았다는 느낌에 흠뻑 젖어라. 너희가 열망하는 것들로 에워싸여, 기쁨으로 충만해져라."

- 이 구절들은 우리의 '느낌'이야말로 우리 의식에 명령을 내리고 집중하게 하는 언어라고 말하는 양자 법칙을 상기시켜 준다. 삶을 바꾸는 '느낌의 언어'란 특정 시간에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내면의 존재 상태인 것이다. 

 

- 디바인 매트릭스가 인지하는 언어가 감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 느낌이나 다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이 사람의 감정과 저 사람의 전혀 다른 감정이 얽히고설켜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 되고 말 것이다. 자비심은 우주의 힘인 동시에 우주와 소통하는 인간의 경험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자비심을 가지려면 특정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판단이나 에고 ego 없이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디바인 매트릭스와 효율적이고도 깊이 있게 소통하려면 이것이 필수이다. 

-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열망이 강할수록 그렇게 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은 오히려 더욱 위축되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에 에고가 곧잘 끼어들기 때문이다. 에고가 끼어드는 일이 없다면 그렇게까지 변화를 바랄 리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알 정도로 의식이 성숙해짐에 따라,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도 그 중요성이 덜해지는 것 같다. 

- 집착 없이 자유롭게 힘을 가지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그럼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회복을 위해 명상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기도하는 이들이 곧잘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런 모든 행위는 분명 좋은 의도에서 하는 것이겠지만, 거기에는 사랑하는 이를 낫게 하겠다는 집착이 포함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기적적 회복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치유가 일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치유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가 이미 일어났다면, 그토록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없다.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질병에 걸린 현재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 아람어 번역본은 우리에게 이미 응답받은 느낌에 흠뻑 젖으라고 하고 열망하는 것들로 "에워 싸이라"고 하고, 그래서 "기쁨으로 충만해지라"고 말한다. 이는 양자물리학 실험과 고대 종교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치유, 풍요, 평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미 주어진 것처럼 먼저 진심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이것들은 현실이 될 수 있다. 

-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마다 실험 참가자들은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중동 지역에 배치되었다. 실험 참가자들이 평화로운 상태에 잠겨 있는 동안 테러율, 범죄율, 응급실 이용률, 교통사고율이 모두 감소했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이 명상을 멈추자 통계 수치는 다시 치솟았다. 이러한 실험은 과거의 발견을 재확인해 준다. 인구의 아주 작은 비율이 내적 평화를 누리기만 해도 그 평화가 주변 세계에 투영되는 것이다.

 

- 요일, 휴일, 심지어 달 모양의 변화까지를 변수로 고려했지만 언제나 일관된 결과가 나왔고, 덕분에 주변 세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최소 몇 명이 내적 평화를 경험해야 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수치는 바로 인구의 1%의 제곱근이었다. 이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율로, 더 많은 이가 참여할수록 더 뚜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선구적 저서 <언어, 생각, 그리고 현실 Language, Thought, and Reality>에서 워프는 호피 인디언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호피 인디언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사라지고 공간은 변형된다. 그리하여 호피 인디언들에게는 서구인이 직관적으로 믿거나 뉴턴 역학에서 말하는 균질하고도 동시적인, 시간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호피 인디언은 시간, 공간, 거리, 현실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만물이 살아서 서로 이어져 있으며, '지금' 생겨나고 있는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 호피 인디언의 언어는 그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 워프는 말한다. "언어의 투사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의 단일한 파도를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끊임없이 물결치며 변화하는 움직임의 표면'이다. 반면 호피어에서는, 바다의 현재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바다가 "파도치고 있다"라고 말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워프의 말을 빌자면, "호피 인디언은 왈랄라타 walalata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수의 파도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의미로, 우리가 '저 파도를 보라'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파도치는 바다의 한 지점으로 상대방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우리에게는 기묘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는 호피 인디언들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을 정확히 드러내준다."

 

- 마찬가지로, 시간은 호피 인디언의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워프의 연구 결과, "미래라고 부를 만한 단어가 전혀 없고, 현재와 과거 사이에 그 어떤 구별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 역사적이고 물리적인 우주란 '나타난 것들'로서, 감각으로 접근 가능했던 것이나 가능한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피 인디언은 '지금' 있는 것과, 예전에 있었던 것을 같은 단어들로 표현한다. 앞장에서 다루었던 양자가능성에 관한 논의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시간과 언어에 대한 관점은 완벽하게 이치에 들어맞는다. 호피 인디언은 이미 선택된 가능성들을 묘사하되, 미래는 열린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다. 

 

- 이러한 지연된 선택 실험 delayed-choice experiment의 결과에 따르면, 시간은 우리 세계(물리 준위)에서와는 달리 양자계(에너지 준위)에서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현재의 선택이 과거의 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결정할 수 있다면 '사건이 이미 일어난 후에 그 특성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고 휠러는 주장한다. 이것은 시간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 엄청난 기능성의 문을 열어준다. 우리가 오늘 내린 선택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 느닷없이 돌풍이 불어닥치더니, 눈이 쓰라렸다. 나는 문제의 지역을 응시했다. 특이해 보이는 것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내가 말했다. 
"금방 느끼지 않았나?" 그가 반박했다. (…)
"뭘요? 바람요?"
"그냥 바람이 아냐."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한테는 바람처럼 여겨지겠지. 바람밖에 모르고 있으니."

-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인디언 주술사인 돈 후안은 제자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미묘한 실재를 일깨워준다. 인류학자인 카스타네다는 자신의 책 <익스틀란으로의 여행 Journey to Ixtlan>에서 고대 주술사의 비전을 기록으로 담던 중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지각이라는 필터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세계는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 모두에서 동시에 살아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인지 필터를 통해 사랑과 우정과 재산과 건강을 과거의 경험이 구축한 틀에 끼워 맞추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틀이 먹히기는 하겠지만, 과연 실제로 얼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우리는 자신의 경험이 가르쳐준 것에 기초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서 배운 지혜에 따라 행동하려고 애쓰곤 한다. 더 큰 풍요나 더 깊은 관계, 더 성공적인 직업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비슷한 경험 때문에 기회가 눈앞에 있어도 애써 외면해 버리곤 한다. 

 

- 우리와 세상 만물과의 연결이 이토록 깊다면, 나날의 일상 속에서 그 연결성의 증거를 볼 수 있어야 마땅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날마다 보고 있으나 그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 가구며 카펫이며 모든 것이 최신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도 호텔 방이 '집'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집에서의 편안한 느낌은 세계와 우리를 조화시키는 미묘한 에너지의 미세한 조율 덕분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평형공명 equilibrium resonance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저마다 어느 정도씩은 차에서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우리가 매일 쓰는 가전제품까지) 모든 것과 공명 상태에 있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주변 사람과 환경과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안이나 주위의 무엇인가가 변했을 때 그 변화가 우리 삶에 뚜렷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 "설마 우리 둘 사이의 긴장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건 아니죠?"
"저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주파수가 통하고, 세계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경험한 에너지를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때로는 미묘하게 나타나지만, 이번 경우에는 집 전체가 두 분 사이의 긴장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던 거지요. 수천 년 동안 감정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어 온 물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강력하며 분명한 메시지인지요! 자.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 이 사례는 우리가 우리 삶의 거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머니와 나는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는 법을 배웠고, 그 언어를 실생활에 적용할 만큼 신뢰하였기에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수술 후 완쾌하셨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도 건강하게 잘 계시며, 6년째 암이 재발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코리의 폐에 있던 점들은 어머니의 수술 후 저절로 사라졌다. 코리는 어머니와 하루하루 기쁨을 함께하며 건강하게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 이와 같은 '공시성 synchronicity'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연결성의 원리는 오늘날 완전히 파악되고 있지 못하며, 앞으로 50년을 더 연구한다 해도 여전히 불가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매일의 사건은 풍요로운 언어가 되어 우리의 더없이 내밀한 비밀들을 밝혀줄 통찰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삶 자체가 우리의 깊은 믿음을 비추어주는 세계에서는 진실로 비밀이란 것이 거의 있을 수 없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뜻밖의 모퉁이가 우리를 어떤 길로 이끌어갈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는 언어를 우리가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일 것이다. 

- 세계는 날마다 우리의 깊이 숨겨진 자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처럼 우리의 개인적 거울은 우리의 가장 진실한 확신과 사랑과 두려움을 비추어준다. 세계는 강력한 (종종 문자 그대로의) 거울이지만, 똑바로 직면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삶은 우리 믿음의 근원적 실상을 더없이 정직하게 드러내며, 때로 이러한 반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 두려움은 우리 문화에서 많은 가면을 쓰고 있다. 우정과 경력에서부터 사랑과 건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루어가는 모든 것에서 두려움은 핵심적 역할을 하며 거의 날마다 우리의 삶에 패턴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이러한 패턴은 심지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삶의 표면에 강력한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경험과 맞닥뜨릴 때, 우리가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사실은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너무 깊고도 원초적이어서 쉽게 간과되곤 하다가도 어느 순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곤 한다. 

- 이 책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미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이 특정감정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고, 왜 그러는지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얻었으리라.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누군가 당신의 인생과 과거에 대해 묻는다면, 마음의 치유에 도움이 될 만한 적절한 대답을 스스로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완벽한 대답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인생에 배어든 단일하고도 심오한 패턴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 내가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아준 보호자의 '부정적' 패턴에 대해 묻는 설문지에 답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부정적 패턴만 묻는 것은, 삶에 기쁨을 주는 긍정적 패턴으로 인해 덫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상황은 거의 대부분 부정적 감정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그 경험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 일에 대해 왜 그런 식으로 느끼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를 바꿀 수는 있다. 

- 우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은 바로 보편적 두려움이다. 두려움의 보편적 패턴은 그 표현이 너무나 미묘하고, 기억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그것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교묘하게 가면을 씌우곤 한다. 끔찍한 추억은 일부러 입에 잘 올리지 않으나 언제나 머릿속에 남아 있듯이, 우리는 집단적인 과거의 상처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형태로 둔갑시키는 데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해 왔다. 우리는 우리의 크나큰 두려움들을 감추는 일에 어찌나 선수들인지, 사실상 우리에게 상처를 남긴 원래의 원인은 잊혀지고 남은 것은 억압된 감정의 행동화뿐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 남편이 떠나버린 여인이나 슈퍼마켓에서 엄마가 잠시 사라진 아이가 왜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반응하는지를 몰랐듯이, 우리 역시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고 있다. 두려움에 가면을 씌운 탓에, 우리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상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더 이상 엉뚱한 곳을 쳐다볼 수가 없게 된다. 가면을 벗어버린 그 강력한 순간으로 약간만 깊이 들어가도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르며, 세 가지 기본 패턴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혹은 세 패턴 중 몇 가지가 결합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세 가지 패턴은 다름 아닌 분리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저평가의 두려움,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2004년 '신의 코드 the God Code'의 발견과 모든 생명의 DNA를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 알파벳들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메시지는, 위의 주 기도문 번역을 지지하는 듯하다. 1세기의 신비주의 서적 <세페르 예치라 sepher Yetzirah>에 남겨진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DNA를 이루는 각 요소가 이 알파벳들의 한 글자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DNA 요소에 이들 문자를 대입시키면, 우리 몸의 DNA의 첫 번째 이 사실은 위대한 지성적 존재가 우리 몸 안을 비롯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고대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 DNA는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읽힌다. "몸 안의 신/영원성 God/Eternal within the body". 

 

- 우리가 의식적으로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두려움을 품게 되면, 이는 우리 몸 안에 감정적 치우침을 유발한다. 이러한 경험을 두고 우리는 종종 "감정이 북받치다" 혹은 “민감한 곳이 건드려지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무엇인가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상황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한 주장을 펼치게 된다. 이는 어떤 두려움이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일깨워줄 관계를 우리가 만들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이런 '북받침'은 우리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북받침이 클수록 두려움도 그만큼 깊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 따라서 분리와 버림받음의 두려움을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는 전혀 뜻밖의 순간에, 그것도 더없이 부적절한 때에, 그러한 두려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직업이나 우정에 있어서 당신은 '버리는 사람'인가, '버림받는 사람'인가? 당신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언제 알아차리는가? 마지막 순간이 닥쳐서야 알아차리는 유형인가? 완벽하게 '좋은' 결혼이나 직장이나 우정이 아무 이유나 경고도 없이 어느 날 눈앞에서 산산이 무너진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관계가 깨지고 실패할 때, 당신은 얼마나 상처를 입는가? 그런 상처로 인해 정신이 황폐해져 버린 경험이 있는가? 
 

- 혹은 반대쪽에 속할 수도 있다. 당신은 사랑이나 직업이나 우정이 아직도 견고해 보이는 때에도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정말 완벽한 [     ]야.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그만두어야 해. 그래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이런 종류의 시나리오가 당신의 삶 속에서 연출된 적이 있거나, 지금 연출되고 있다면, 당신은 깊이 뿌리 박힌 분리와 버림받음의 두려움에 절묘하게 가면을 씌워 사회적으로 무사히 넘어갈 방법을 터득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이러한 관계의 패턴을 되풀이함으로써 당신은 두려움의 고통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방법은 어쩌면 평생 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충 방식은 고통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당신이 창조주의 온전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인류의 보편적 두려움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원대한 꿈이 있음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루기 불가능하다는 의심을 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회의한다. 내가 살면서 이런 기쁨을 누릴 정도로 훌륭한 존재란 말인가? 왜 그러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서구의 유대-기독교 전통 속에서 자라난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이들에게서 우리 자신이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우리는 성인들이나 천사들만큼 선한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자란 많은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품기에 이른다.  
 
- 2,000년 전 예수의 삶은 편집되고 압축되고 가려 뽑혀져 우리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고귀한 인생으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예수의 삶과 비교당하며,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면 사후에 크나큰 고통을 받게 된다는 훈계에 길들여지게 된다. 보다 가벼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냉소적 질문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너는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예수 그리스도라도 돼?" "대관절 어떻게 거기로 갈 건데? 물 위를 걸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이러한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대부분 웃어넘기고 말겠지만, 그런 말들이 우리가 삶의 커다란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 당신이 설령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이런 암시를 믿고 있을 수 있다.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 모두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성취에 대한 기대와 우리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기쁨의 정도, 그리고 관계의 성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건강하게 오래 살 자격이 내게 없다는 두려움을 갖는다면,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그러한 낮은 자존감의 두려움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나타난다. 

 

- 예를 들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나 "더 나은 것을 위한 디딤돌인 셈 치지 뭐"와 같은 말로 합리화하면서, 진심으로 원하지도 않는 관계를 계속 끌고 간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다정한 파트너와 삶을 함께하고는 싶지만..."이나 "내 재능과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은 아니지만..."과 같은 말을 하며, 소망을 이루지 못한 핑계를 댄 적은 몇 번이나 있는가? 이와 같은 시나리오가 당신의 인생에서 연출되었다면, 이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교묘한 가면을 스스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다. 당신의 개인적인 관계나 직업적인 인간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핵심 믿음에 대하여, 또 치유가 요구되는 당신의 믿음에 대하여 스스로 상기할 수 있게 된다. 

 

- 어느 문화나 사회에서든, 각 개인은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충분히 훌륭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다. 가족과 공동체와 직장에 대한 우리의 기여도가 인정받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이 존경받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때로 우리는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는 충격적인 느낌에 휩싸이기도 한다. 

-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바탕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감정적 생존의 대가답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상상적 가치와 일치하는 시나리오를 실제 삶 속에서 그대로 연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들 각자는 누구나 위대한 일을 달성하겠다는 꿈과 희망과 열망을 갖고 있지만, 이를 이룰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스스로 자기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 당신의 신뢰 수준이 너무나 깊어서 '위대한 그것을 알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었던 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여기에서 묻고 있는 것은, 보다 위대한 자아가 될 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강한 신뢰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 살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은 거의 누구나 갖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우리 몸이 스스로 지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저녁 뉴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정당화시키고 심지어 영속시켜 주는 사례를 날마다 보면서 살아간다. 전 세계에서 자행되는 테러, 살인, 폭행에서부터 우리가 개인적으로 겪는 배신과 배반, 늘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받는 무수한 건강 관련 주의사항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이 행성은 실로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 궁극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안전감은 자신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안전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상황과 모든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의 지성을 믿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만약 대답이 '아니오'라면, 왜 그런지를 물어보자. 누구 혹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세상이 안전하지 않으며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 당신은 삶의 과정을 믿고 있는가? 우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화구를 당신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졌을 때, 당신은 즉각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 곧장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떠한가? 

 

-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끔찍한 일들은 확실히 현실의 일부이지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그런 일들이 우리 현실의 일부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믿어야 한다.   

- 우리는 디바인 매트릭스가 존재하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 삶에 반영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그 변화가 우리의 건강과 직업과 인간관계에 반영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따라서 두려움의 악순환이라는 불합리한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분명하다. 

 

- 우리의 '부정적' 경험의 뿌리는 세 가지 보편적 두려움 중 하나로(혹은 셋 중 몇 가지)가 결합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버림받음, 낮은 자존감, 신뢰부족이다. 

 

- 변화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 악순환을 무너뜨리고 디바인 매트릭스가 반영할 수 있도록 다른 무엇인가를 매트릭스에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 않는가? 간단해 보이지만 거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이다. 내면의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외부 세계에서 커다란 전투를 치르곤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전투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의 내리기 위한 투쟁이다. 

- 신뢰하지 말아야 할 갖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열쇠로 단단히 잠긴 감옥 밖으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루하루의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믿을 수 있는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아무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믿음을. 

 

-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리의 경험을 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으로 창조한 세상 속의 우리를 비추어주는 양자 거울이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는 우리의 내밀한 믿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때로 우리의 거울이 너무도 뚜렷하여, 우리는 말한다. "그렇구나! 이렇게 된 것이구나."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미묘한 현실이 거울에 비추어져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 양자 거울은 깊은 상처의 치유를 돕기 위해 우리 삶의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정과 느낌을 유발하곤 하는데, 대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우리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기쁨과 사랑 역시 비추어준다. 하지만 기쁨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것은 좀처럼 드물기에, 순수한 기쁨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삶의 심오한 교훈을 촉발하는 방아쇠로 작용하지 않는다. 

 

- 인간관계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이다. 뼈아픈 배신에서부터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절망적 시도까지, 모든 인간관계는 (직장 동료이든 학교 친구이든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이든) 우리 자신에 대한 뭔가를 보여준다. 이 메시지를 이해할 지혜를 갖는다면, 우리는 삶에 고통을 초래하는 자신의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 

 

-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산골에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 상호 교감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호작용 가운데 우리의 깊은 믿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왜일까? 우리를 비추어주는 세상의 거울은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거울은 언제나 우리를 비춘다. 누구도 이 거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울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디바인 매트릭스는 투영되는 그대로를 비추는 중립적 거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이다. 아니, 이렇게 묻는 편이 옳으리라. 나는 내가 디바인 매트릭스로서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있는가? 
 

- 20세기에 마음의 과학을 창시한 어니스트 홈즈 Ernest Holmes는 말한다. "삶은 거울이기에 우리가 생각한 바를 우리에게 되비추어준다." 많은 고대 전통들은 이러한 연결성을 인식하고, 신과 하나 되는 길로서 관계의 반영을 소중히 여겼다. 예를 들어, 1945년 나그함마디 마을에서 발견된 콥트 교회, 영지주의 문서, 에세네파의 복음서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 거울을 직면하게 된다. 항상 거울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거울을 알아차릴 때는 어떤 순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영적 전통들은 고통을 치유하려면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허용하게 하는 패턴을 파악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삶 속에 버티고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다면, 그러한 두려움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패턴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관계의 다섯 거울>

첫 번째 거울 : 그 순간을 비추는 거울

두 번째 거울 : 그 순간에 우리가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세 번째 거울 : 상실의 거울

네 번째 거울 : 영혼의 어두운 밤의 거울

다섯 번째 거울 : 가장 위대한 자비의 거울

 

- 관계의 거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배우는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보통은 가장 분명한 거울부터 인식하며, 차츰 더 깊고도 미묘한 거울의 힘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 가장 분명한 것에서부터 가장 미묘한 것에 이르기까지의 순서대로, 관계의 다섯 가지 거울을 살펴보자. 각 거울은 최소의 시간에 최고의 치유를 이끄는 암호 방정식이다. 과학적 연구들은 우리가 과거의 사건에 대해 느끼는 방식을 바꾸면 현재 우리 신체의 화학 상태가 바뀐다는 것을 입증했다. 우리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가 주변 세계에 반영되는 우주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관계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인식하고, 디바인 매트릭스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 ...

 

- 너무도 미묘한 패턴을 반영하고 있기에 그때까지는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다섯 거울 중 첫 번째 거울로 그 순간의 나 자신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이후로 다른 관계들을 통해 보다 강력하고 미묘한 거울들을 인식하는 토대가 되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자기 계발서들은 주변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료의 분노에서부터 연인의 배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리의 깊은 믿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패턴은 종종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티거와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직원들은 자신이 나의 믿음을 비추어주고 있다거나 내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패턴을 비추어주고 있다고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우리들 사이의 역학 관계를 통해서 나 자신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 인생에서, 그것은 통제의 거울이었다. 이러한 반영은 몇 시간이나 며칠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바로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나의 행동과 그들의 반응 사이의 연결성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각적인 피드백이 이 거울에서 내가 배우게 된 것의 핵심이었다. 

 

- "너의 경쟁자는 곧 너의 거울이다. 그는 너의 개인적 거울로서 그 순간 네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그가 너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봄으로써 그가 너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는 종종 떠올렸다. 그러다 무술 시합에 대한 이 가르침을 사람들의 일반적 행동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다 1992년, 나는 그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는 경험에 얽히고 말았는데, 바로 그때 관계의 두 번째 거울을 깨우치게 되었다.  

 

- 그해 가을, 새로운 세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그들 덕분에 나는 어른이 된 후로 가장 강력하고도 고통스러운 관계를 맛보았다.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동일한 내용의 큰 깨달음을 주었고, 그 이후 내 삶은 영원히 달라졌다. 세 사람은 적절한 때에 제각각 내게 거울이 되어주었지만, 처음에 나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새로운 세 관계가 거의 동시에 내 인생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무엇인가가 그것도 커다란 무엇인가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이 세 사람은 거의 즉각 나의 인내심과 가치관과 결단력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미치게 만들려고 작당한 듯했다. 하나같이 싸움을 벌이고 반대 의견을 고집했다. 나는 잦은 출장을 핑계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한 채 해결을 미루었다. 다음 출장이 끝날 때까지 '좀 더 두고 보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 이들 세 관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실은 무엇일까? 그 옛날 무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이 세 사람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순간, 수많은 단어가 줄달음치며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몇은 삽시간에 사라졌지만, 몇몇은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내 네 단어가 다른 단어들 위로 또렷하게 떠 올랐다. 정직, 성실, 진실, 신뢰.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비추어주는 것이라면, 내가 부정직하다는 뜻이란 말인가? 내가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정직, 성실, 진실, 신뢰를 저버렸단 말인가?' 

 

- 그때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한 느낌이 밀려 올라왔다. 내 안에서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였다) 커다랗게 소리쳤다. "아니! 물론 나는 정직해! 물론 나는 성실해! 물론 나는 진실하고, 신뢰받을 자격이 있어! 이 네 가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것들이야." 

- 바로 다음 순간, 또 다른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처음에는 쏜살같이 지나갔지만, 점점 분명하고 확실해져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거울이 불현듯 수정처럼 맑아진 것이다. 내가 교묘하게 내 삶으로 이끈 이 세 사람은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보다 미묘한 거울이 되어주었다. 믿음과 생활방식의 충돌을 통해 나 자신을 보여주는 대신, 내가 비판하는 것들의 내용물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자질을, 즉 그들이 위반했다고 내가 느끼고 있는 자질을 나 자신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정직과 성실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어린 시절 이후 계속 축적되었을 것이다. 일순과거의 경험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바로 그런 자질의 부족으로 고통받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 이러한 자질에 관한 나의 의견은 긴 세월 축적되어 인식조차 하지 못하게 된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은행 잔액이 텅 비었다는 중차대한 상황은 내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 앞서, 관계들이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이끌어주었다. 바로 그날, 나는 미묘하고도 심오한 관계의 두 번 거울의 신비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비판하는 것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 당신은 당신의 거울을 알아보는가?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별 까닭 없이 짜증 나게 하고 심지어 미칠 것만 같게 만드는 그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확인하자. 그런 다음,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이들은 이 순간의 나 자신을 비추고 있는가?" 

 

-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 만약 그렇다면, '직감'처럼 즉각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이 '아니오'라면, 지금이 순간의 나보다도 더욱 깊고도 강력한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을 비추어주는 것이다. 그러한 거울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비판의 마음은 치유되기 시작한다. 

 

-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내 결론이 내려졌고,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거의 즉시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의 비판을 비추어주던 세 사람이 모두 내 삶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세 사람에 대하여 기묘한 '무감정'을 느꼈다. 그들을 내쫓기 위해 내가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나의 비판적 마음이 그들을 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더 이상 내 인생에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셋 다 나의 삶으로부터 사라져 갔다. 갑자기 전화와 편지가 줄었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들 생각도 점점 덜하게 되었다. 나의 비판이 자석이 되어 그러한 관계를 맺게 했던 것이다. 

 

- 이는 흥미로운 발견이지만, 며칠이 지난 후 더욱 흥미롭고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관계를 끝내려고 내가 의식적으로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관계가 된 것이다. 한 번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긴장되고 어색하고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전에는 공통의 화제가 되었던 것도 이제는 거북하기만 했다.

 

- 나는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이 깨달았다. 내 삶에서 멀어져 간 관계는 모두 위의 세 사람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인 것과 같은 패턴에 기초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비판이라는 패턴 말이다. 나의 비판은 그러한 관계를 나에게 끌어들인 자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견고하게 굳힌 접착제가 되었던 것이다. 비판이 사라지자 접착제 또한 녹을 수밖에. 이로 인해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나의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패턴을 인식함으로써 그 영향이 삶의 다양한 층위에 미치게 된 것이다. 

 

-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신뢰를 흑백논리식으로 생각했다. 누군가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상대방을 믿기로 했다면 완전히 믿어야 한다고. 나는 그러한 생각을 고집하려 했지만, 이들 세 사람 덕분에 상대방을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때로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보다 그에게 더 많은 신뢰를 주고, 더 많은 책임을 맡긴다. 나 역시 바로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 하지만 사랑, 연민, 보살핌은 우리가 기꺼이 나누어주는 만큼 우리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이들로 인해 잃거나 빼앗기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신뢰가 산산이 부서질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이 감정들을 잃어간다. 다시는 그런 상처를 받기 싫은 마음은 우리의 보호막이 되어 깊은 상처와 더러운 배신에도 우리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사랑과 연민과 보살핌의 문을 닫는 것은 깨진 항아리에서 음식이 흘러버리는 것과 같다.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과 감정을 교류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내용물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신뢰하여 우리의 삶에 들어오도록 허용했던 바로 그 경험들로 인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우리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 좋은 소식은, 이렇게 겉으로 텅 비어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기가 불가능하다. 우리 영혼의 일부이자 우리 본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결코 파괴될 수 없듯이, 우리의 참된 본질의 핵심 역시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저 안전을 위해 가면을 쓰고 숨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가면을 씌우는지를 알아낸다면, 치유의 지름길로 들어설 수 있다.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부분을 도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자기완성의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 그 친구는 어느 날 '느닷없이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식당에서 주문을 받던 웨이트리스일 수도 있고,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해주던 점원일 수도 있다. 사실 그날 그와 마주친 여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다. 어디에서든 그런 일이 일어나며, 패턴은 항상 똑같다. 그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빠진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설명에 의지한다.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하루에도 여러 번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남편을 너무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으며, 그 역시 아내와 아들을 더없이 사랑했다. 그가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은, 두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거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여인에 대한 그의 느낌은 너무도 강렬하고 불가해한 그 무엇이었다. 
   

-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 친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여인과 만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경력을 비롯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된 것일까? 

 

-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정직하다면, 흥미롭게도 이러한 만남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결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 다 분명 어떤 '느낌'을 느끼지만, 둘 중 하나가 이를 무시해 버린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벌어진다. 현실감을 잃고, 의식이 변화한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둘 다 의식조차 못할 수도 있다.

 

- 우리가 이런 경험을 했을 때, 사실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이러한 상황에 빠졌을 때, 무엇 때문에 그런 순간이 생기는지를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이는 우리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친구가 그러했듯이, 그 까닭을 모른다면 이는 혼란스럽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다! 사실 이러한 만남은 세 번째 거울의 신비를 보여준다. 

 

-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자기 정체성의 큰 부분을 타협한다. 그럴 때마다 사회적으로는 용납되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내면의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만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동기를 서둘러 끝내고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거나, 주류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인종적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상처와 분노의 감정을 억누름으로써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살아남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사례에 해당된다. 

-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신뢰와 자비심이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저버리는 것일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부모나 형제자매나 친구들에게 조롱당하기에 십상이니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배운다. 가족이 학대하더라도, 저항하기보다는 '굴복'하고 잊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사회인이 되면, 전쟁 동안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특별한 상황이라고 정당화하며 용인한다. 사람은 누구나 분쟁, 질병, 압도적 감정에 직면하면 자기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데, 이런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야 이해하기 시작한다. 위의 사례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비판하기보다는 거기에 잠재된 강력한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남기 위해 내어 준 우리 자신의 부분들이 있던 자리는 아직도 텅 빈 채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 특별한 빈자리를 채워줄 것을 항상 찾아 헤맨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면 곁에 머물고 싶어 진다. 그 사람의 어떤 면인가가 나의 내적 공허를 채워주고, 내가 완전한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앞에서 말한 나의 친구나 다른 사례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잃어버린' 부분을 찾으면,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그/그녀에게 끌린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믿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를 그들에게 그토록 매혹시킨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며, 그저 잠자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그러한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들에 덧씌운 가면을 벗기고 그것들을 다시 우리의 삶으로 통합해낼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러한 자질을 비추어주던 사람에 대한 자석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은 사라지게 된다.  
 
-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그들의 어떤 자질 때문이지 조건반사 때문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은, 세 번째 관계의 거울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느끼는 불가해한 이끌림과 열정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의 본질을 도로 되찾고 싶은 갈망이었던 것이다. 

- 그 친구는 자신이 살면서 잃었거나 버렸거나 빼앗긴 본질을 다른 여성들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서도 그런 본질을 보았겠지만,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그는 너무도 많은 본질을 잃어버린 탓에,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던 그는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만 그 느낌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함께 있을 때 너무도 좋았기에 각 만남이 행복을 위한 기회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아내와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가족을 버릴 거냐고 묻자, 그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생활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는 그였지만, 가족을 잃게 될 위험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불가항력적인 느낌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 사람은 누구나 물리적, 정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 순간 필요한 자신의 부분을 교묘하게 포기해 버리곤 한다. 그러고는 자기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남은 부분에 대한 믿음에 몰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기도 전에 타협을 해버리고 일어난 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 CEO는 군대의 고위간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치러야 했던 개인적 비용에 대해 물었다.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하셨습니까?"

 

- 이 질문에 고위간부는 군대에서 여러 단계의 진급을 걸쳐 펜타곤에 입성하고, 이후 다국적 대기업들에 권위를 행사하는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보기 드문 허심탄회한 대답에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체제에 내주어야 했지요. 진급할 때마다 나의 부분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죠. 그러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나 자신을 너무 많이 내주어 남은 것이 별로 없더군요. 기업과 군대가 나를 소유하고 있었죠. 나는 더없이 소중한 것들을 내주었어요, 아내와 자식과 친구와 건강을요. 그리고 대신 힘과 부와 권력을 얻었죠." 

 

- 나는 그의 솔직함에 놀랐다.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슬퍼하긴 했어도 지금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똑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이와 비슷한 일을 한다. 대부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 첫눈에 불타는 사랑에 빠져든다면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뭔가 드물고도 소중한 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니까. 당신이 찾고 있던 부분을 가진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상대방도 같은 이유로 당신에게 끌리는 경우가 잦다! 상황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면 대화를 나누어보라. 눈 맞춤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이야기라도 좋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 사람에게서 나는 내가 잃거나 포기하거나 빼앗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 거의 즉각 대답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깨달음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 이후 줄곧 곁에 서성거리고 있었던 내면의 소리일 수도 있다. 한 단어나 짧은 구절의 대답이 들리는 순간, 그 의미를 몸이 저절로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다. 혹은 단순히 나 자신에게서 사라진 아름다움을 그 사람에게서 인식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순진한 모습이나 슈퍼마켓 복도를 걸어가는 우아한 동작, 혹은 업무를 척척 처리하는 자신감, 혹은 단순히 빛나는 생명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주침은 겨우 몇 초간 지속되며, 길어야 몇 분이다. 그 짧은 순간, 우리는 찰나의 기쁨과 흥분을 느끼는 기회를 누린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으나 잠들어버린 그 무엇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상대방을 통해 얻는 것이다. 

 

- 그러한 순간적인 만남 속에서 친숙함을 과감히 인정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상실의 거울은 날마다 마주치는 무엇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참된 본성을 우리에게 비추어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완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완전성을 찾고 있으며, 완전성을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성직자에서부터 선생님까지, 노인에서부터 젊은이까지, 부모에서부터 아이까지, 누구든 그러한 느낌을 자극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느낌을 통해,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가 간절히 찾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우리라고 믿고 있는 우리의 가면 안에 숨겨진 채로 우리와 더불어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인간적이다.  

- 제럴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가 그중 한 가지를 묘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의 거울로, 흔히 '영혼의 어두운 밤 Dark Night of the Soul'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 하지만 바로 그때, 균형의 거울인 영혼의 어두운 밤이 닥쳐왔다.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을 때, 제럴드는 사실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 주도 안돼, 그의 새 연인은 그들 관계가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고 선언했다.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망연자실 홀로 남겨졌다. "내가 그녀를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을 했건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죠?" 그는 한탄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와 친구와 직장을 버렸다. 즉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 머지않아 그는 자신이 맡은 일까지 엉망으로 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의 경고와 형편없는 업무 평가를 받고 결국 해고되기에 이르렀다. 제럴드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연인, 새로운 일자리, 더 많은 수입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인생의 절정에서 뛰어내려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꿈은 모두 사라졌다. 제럴드는 나를 찾아와 계속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토록 완벽하게 보였건만 어떻게 이토록 엉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나와 만났을 때, 제럴드는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을 잃은 뒤였다. 그렇게 된 이유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는 완전함을 느꼈기에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새 삶을 시작했다기보다는 더 나은 것들이 빈자리를 채워주리라는 판단하에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안전을 꾀했던 것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탓에, 그는 감정적으로 가족을 떠난 뒤로도 오랫동안 물리적으로 가족 곁에 머물렀다. 완전함을 느꼈기에 직장과 친구와 연인을 떠나는 것과 빈손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 곁에 머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 보다 나은 것이 생길 때까지 현 상태를 고수하는 것은 어느 관계에서든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결과를 맞을지 모르는데 괜히 풍파를 일으키기가 두려워서 그렇게 하기도 한다.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패턴은 패턴이다. 직업이든 연애든 생활방식이든, 우리는 사실 행복하지 않음에도 주변인들에게 솔직히 말할 수가 없어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패턴에 빠질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잘살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속으로 변화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그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몸서리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패턴은 부정성을 축적시킨다. 우리의 참된 감정은 긴장, 적대감, 때로는 무관심으로 변장한다. 우리가 직장과 집에서 하루하루를 헤쳐 나아가는 동안, 정작 우리의 감정은 그곳을 떠나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이다. 상사나 연인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과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는 이를 합리화하고 타협하고 기다린다. 그러다 어느 날 쾅! 하고 일이 벌어진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 갈망했던 그것이 별안간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내일이 없을 것처럼 그것을 향해 뛰어든다. 

 

- "당신에게 있어 이 시기는 최근에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한 때가 아닙니다.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것은 일자리나 가족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더없이 강력한 동지가 되어줄 수 있는 힘이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막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완전히 치르고 나면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고대인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부르던 시기에 들어선 것입니다." 

- "'영혼의 어두운 밤'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를 의미합니다. 보통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때에 경고도 없이 불쑥 시작되지요. 당신의 내면이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당신은 그런 상황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며 균형 잡혀 있다는 것은 사실 변화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신호이지요. 변화를 향한 유혹은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품고 있던 열망이라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도약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유혹이라면, 새로운 연인 같은 것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인간관계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종의 촉매이지요."

- 삶이 우리를 어떤 길로 내몰든 우리에게는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음... 오늘은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영혼의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야겠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본능 때문에라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어두운 밤이라는 커다란 시험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때에 우리에게 닥쳐온다.  

- 삶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때에 정확히 가져다준다. 우리가 수도꼭지를 돌려야 컵에 물을 채울 수 있듯이, 감정이라는 연장통이 가득 차야 삶의 수도꼭지는 변화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영혼의 어두운 밤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인생을 이렇게 이끈 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의 스위치를 켰기 때문임을 안다면 한결 위안이 되리라. 하지만 알든 모르든,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에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 

- 영혼의 어두운 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경험하고 치유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은 저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달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무시무시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럴드는 홀로 남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반면 그에 앞서 내가 상담했던 여성은 '홀로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온갖 관계에서 그 두려움을 맛보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제럴드는 과거의 연애와 우정과 일자리에 대해 말하면서,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각 관계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여겼다. 사실 이들 관계는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그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볼 수 있도록 해준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패턴을 치유하기는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했기에,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분명한 형태로 그의 인생에 나타났다. 결국 그의 인생은 그가 스스로 두려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그를 이끌어갔다. 
 

- 우리는 살면서 여러 차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기도 하지만 대개는 첫 번째 밤이 가장 힘들고 또 험난하다. 이는 종종 변화의 가장 강력한 동인이 된다. 자신이 왜 이토록 상처받는지를 일단 이해하고 나면, 이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어두운 밤의 표지판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저절로 말한다. "아! 이 패턴을 알아! 그래, 확실히 '영혼의 어두운 밤'이로군. 그럼, 내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 더 큰 의문은 이것이리라. 우리는 그녀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는 비교의 기준으로 무엇을 사용하는가? 삶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가?

 

- 나는 강연회에서 종종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러고는 교육, 사랑, 직업, 스포츠와 같은 영역에서 자신의 성취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단한 도표를 그려보라고 권한다. 점수는 '아주 훌륭함'에서부터 '아주 나쁨'까지 네 단계로 나뉜다. 여기서 핵심은 도표를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종이에 뭐라고 쓰느냐보다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 종이에 뭐라고 썼든, 대개는 자기 자신이 완벽에는 못 미친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평가할 때, 자신들의 경험 밖에 있는 무엇인가와 비교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도 가혹한 비평가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다섯 번째 거울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자비(공감대)의 거울로 알려져 있다. 이 거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비의 거울, 곧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였는가를 비추어 준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울을 통하여 삶의 매 순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전함을 자비심으로 허용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보든, 우리가 실제로 어떤 성취를 이루는 아무 상관없이 진실이다. 자신이 달성한 성과의 훌륭함을 깨닫기 전까지, 각 경험은 그저 더도 덜도 아닌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여긴다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최선을 다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데도, 우리는 다른 무엇과 자신의 성과를 비교하려고 든다. 직업이든 연애는 성적이든, 기대했던 결말을 맺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항상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다음번에는 달리 행할 수 있다. 디바인 매트릭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의 외모와 능력과 성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우리의 현실 세계에 반영한다. 이를 명심한다면, 우리 삶의 깊은 치유 역시 우리의 위대한 자비의 실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이다.

 

- 우리의 참된 본질에 대해 더욱 미묘한 비밀을 보여주는 다른 거울도 분명 존재하지만, 위의 다섯 거울은 우리의 삶을 가장 확실히 치유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디바인 매트릭스 안에서 창조자로서의 우리의 진정한 힘을 발견한다. 각 거울은 보다 높은 수준의 마스터가 되기 위한 디딤돌이다. 일단 이러한 거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삶의 어느 순간에 거울들 중의 하나를 인식했다면, 당신은 다음부터는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펼쳐지는 동일한 패턴을 쉽사리 알아보게 될 것이다. 

 

- 이는 홀로그램의 속성 때문이다. 한 관계의 패턴이 변화하면 같은 패턴을 지닌 모든 관계가 영향을 받는다. 
  

- 내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달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혼의 존재이기에 영적 경험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이 어떤 모습을 할지라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노력과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은 같은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믿음에서 보자면, 나날의 활동은 영적 진화와 분리될 수 없으며 일상 자체가 바로 우리의 영적 진화인 것이다! 

 

- 나는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이 순간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어쩌면 그가 가야 할 영적 길일 수도 있다고. 그는 예상치 못한 내 말에 흥미로워했다. 지금까지 그는 날마다 고독과 명상 속에서 살아야만 영혼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일상이라도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방식이야말로 바로 그가 탐험하고자 하는 영적 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예를 들어, 영지주의 작품인 <천둥 : 완전한 마음 The Thunder: Perfect Mind>에서 3세기의 여인은 자기 자신이 모든 사람 안에 이미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들의 화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창녀이자 성자이다. 나는 아내이자 처녀이며 내 아버지의 어머니이자 내 남편의 누이이니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나를 버리지 말 것이며, 나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니...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그대의 조언자로 삼지 못하고 증오해 왔는가?"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들 각자는 완전하고도 완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완전한 상태 안에서, 더 큰 완전함 안에 존재하는 치유의 더 큰 패턴들에 이르는 열쇠를 찾게 된다. 이러한 강력한 원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치유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경험과 감정을 촉매 삼아서. 

 

- 사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은 영화 속 장면과는 상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거나 빼앗겼을 때마다 한구석에 밀어둔 감정을 영화의 그 장면이 촉발한 것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킨 감정이 영화 속 인물보다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린 자아의 일부와 더 많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책이나 영화나 상황들 속에서 동일시를 느낀다. 이는 아픔의 순간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버린 것들을 우리가 여전히 인식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무의식적 방법인 것이다. 

 

- 우리의 삶은 다음과 같이 작동하는 것 같다. 우리들 각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체의 다른 부분들을 비추어준다. 이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안에서와 같이 밖에서도"라는 고대 신비학의 원칙을 떠올리게 해 준다. 물리학자 존 휠러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우주의 피드백 고리로서, 크기만 다를 뿐 똑같은 패턴을 끊임없이 되풀이 비춘다. 고대의 전통들은 이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위대한 치유를 발견하게 될 때까지 삶의 '경험'이 계속 순환한다고 믿는다. 치유를 발견한 다음에야 우리는 순환의 고리에서 해방된다. 힌두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제야 우리의 카르마가 끝나는 것이다. 

 

- 과거의 선각자들은 지혜와 연민과 신뢰와 사랑의 삶을 통하여 의식이라는 '운영 시스템'에 명령을 내리는 믿음의 '소프트웨어'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들로 우리의 현실을 '업그레이드'시켰던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런 기회를 가지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굳이 성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도록 하는 데에는, 흥미로운 분기점이 있게 마련이다.  

 

- 세계 평화를 선택하든 가족의 평화를 선택하든, 사랑하는 이나 자신의 치유를 선택하든, 그 원리는 똑같다. 감정, 느낌, 믿음, 기도로 현실을 프로그램하는 의식 컴퓨터로서 우주를 보게 된다면, 현실 창조의 각 단계를 보여주는 사용안내서 역시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역사에 자취를 남긴 깨달은 스승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구석구석 보여주고 알려주었다. 다음에 제시한 20가지 비결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모으고 간추려 변화를 이끌기 위한 논리와 행동을 단계별로 나열한 것이다.

 

- 이들 비결을 생각할 때면, 카발라의 세 번째 책인 <세페르 예치라 sepher Yetzirah>에 묘사된 일련의 파워풀한 지식이 떠오른다. 우주가 창조된 방식을 단계별로 설명한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우주 창조의 각 단계를 한 번에 하나씩 살펴보도록 이끈다. 덕분에 독자는 각 단계별로 그 힘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고대의 지침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을 시험하고 조사해 보라. 그 본질을 중심으로 삼아라." 

 

- 마찬가지로, 아래의 비결들 역시 하나씩 살펴보고 당신 자신의 삶으로 초대하기 바란다. 저마다 변화의 강력한 힘으로서 장점을 갖고 있다.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물고 늘어져라. 그렇게 모든 단계를 고찰하고 나면, 세계와 나 자신을 바꾸는 비결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 우리는 거의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지각을 가지고 있다. 안개에 싸인 고대의 기억 깊은 곳 어딘가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마술적이고도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성이나 논리의 경계를 넘어서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을 꿈꾸곤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어릴 적 우리는 기적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규칙을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기적적인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것들이 널려 있다.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
마침내 밝혀진 현실 창조와 만물 소통의 비밀 꿈과 소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늘 대기 상태에 있는 우주의 에너지 그물, 디바인 매트릭스! 〈해빙〉 〈시크릿〉 등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이 이를 현실 속에 적용하려 애쓰지만, 정작 잘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신의 기도와 소원이 실현되는 법칙, 이 세계가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원리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빌거나 무작정 노력했기 때문이다. 양자 물리학과 고대의 지혜 전통이 손잡고 밝혀낸 ‘디바인 매트릭스’의 존재와 ‘현실 창조의 20가지 법칙’은, 나의 마음과 세상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며 그러한 소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전작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에서 발견했던 내용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기도가 이루어지는 바탕인 ‘특별한 에너지장’ 즉 디바인 매트릭스의 정체와 놀라운 과학적 실험들, ‘응답받는 기도’의 숨겨진 원리와 구체적인 법칙들, 영적인 시야를 아름답게 넓히는 동서양 지혜의 말씀들, 그리고 저자가 전 세계를 발로 뛰며 만난 비범한 인물들의 이야기와 생생한 사례가 더욱 깊고 다채롭게 펼쳐진다. 14년간 전 세계 26개국 이상 주요 언어로 번역되면서, 끌어당김의 법칙과 양자 물리학의 숨은 의미를 언급하는 수많은 책에 근거와 영감을 제공한 그렉 브레이든의 글로벌 스테디셀러가 개선된 번역과 새로운 표지로 한국에 다시 선보인다.
저자
그렉 브레이든
출판
김영사
출판일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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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변화의 20가지 비결>

비결 1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이자, 만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이며, 우리가 창조한 것을 우리에게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비결 2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비결 3 우주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우주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비결 4 한때 하나였던 것들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든 아니든 항상 서로 이어져 있다.

 

비결 5 우리가 의식을 집중하는 행위는 곧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의식이 우주를 창조한다!

 

비결 6 우리가 어떤 변화를 원하든, 우리는 그 변화를 창조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

비결 7 우리가 의식으로 집중하는 것이 우리 세계의 현실이 된다.

비결 8 새로운 현실을 선택한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비결 9 느낌은 디바인 매트릭스와 '소통하는' 언어이다. 꿈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기도가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느껴라.

비결 10 아무 느낌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에고와 편견이 없는 느낌만이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비결 11 우리는 우리의 세계로서 우리가 경험하기로 선택한 것들과 삶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비결 12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물리법칙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비결 13 홀로그램인 ‘무엇인가’는 모든 부분에 전체를 담고 있다.

비결 14 우주적으로 연결된 의식 홀로그램은 소망과 기도가 우리 마음에 생겨나는 순간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 있음을 보장한다.

비결 15 우리 삶의 작은 변화는 의식의 홀로그램을 통해 세계의 모든 곳에 반영된다.

비결 16 집단의식의 변화를 '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인원은 총구성원의 1%의 제곱근이다.

비결 17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리가 우리 믿음으로 창조하는 관계의 세계를 거울처럼 되비추어 준다.

비결 18 우리의 '부정적' 경험의 뿌리는 세 가지 보편적 두려움 중 하나로(혹은 셋 중 몇 가지가 결합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버림받음, 낮은 자존감, 신뢰 부족이다.

비결 19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 안에는 우리의 참된 믿음이 그대로 비추어진다.

비결 20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기로 선택한 바로 그것들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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