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일레인 페이젤] 성서 밖의 예수

일루젼 2023. 1. 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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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일레인 페이젤 / 방건웅 / 박희순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1989.06.30 


       

출간된 시기를 고려했을 때, 다소 읽기가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무척 수월하게 읽었다. 심지어 꽤 재미있었는데, 영지주의의 종교관과 정통파의 종교관을 몇 가지의 '핵심 질문'을 기준으로 비교하며 분석하는 저자의 필력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물론 몇몇 부분에서는 약간의 비약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마침 <나그 함마디 문서>와 연이어 읽게 되어 동일한 텍스트가 자주 등장했는데, 역자가 다르니 같은 문헌이었을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췌문들도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어 있어서,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는 표현은 종교사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저서들을 읽을 때마다 왜 내가 영지주의적 설명에 깊게 끌리는지 이해할 수 있어 즐겁다. "너 자신을 알라"는 분수를 알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앎으로서 그를 통해 지각되는 '세계'를 알라는 말이었다. 자신을 통해 보편 진리를 깨달으라는 가르침, 영지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는 위에서부터 헤아려야 하는 머리와 아래에서부터 헤아려야 하는 하늘이 있다. 새벽별은 아들이 되어 7번째 에온으로,  어머니는 아들의 위에 위치하여 그를 다음 계의 아버지께로. 어째서 석류가 휘장의 무늬가 되었는가? 가죽과 성소의 휘장과 옷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째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8번째 에온으로 가는가?

 

개인적으로는 여기저기에서 조각으로 얻었던 지식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이해의 폭이 깊어진 기분이다. 

 

모든 것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빛은 언제나 모든 이의 속에 존재하니 침묵 속에서 구하라. 

빛으로 이루어진 몸에서 다시 빛으로 이루었을 때, 입었던 옷을 자유롭게 벗어던지고 작은 얼굴을 통해 어머니께로 향하라. 

 


   

- 제임스 M. 로빈슨 교수가 엮은 책인 <나그 함마디 문고 The Nag Hammadi Library>는 모든 독자들이 구하기 쉽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대체로 그의 책에 있는 번역을 따랐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명료성과 일관성, 또는 설명을 위해 번역 용어를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두 텍스트(text)의 경우에는 <나그 함마디 문고>가 아닌 다른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 이 자료에 실려 있는 다른 말씀들은 동정녀(童貞女)로부터의 탄생이나 부활과 같은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을 순진한 오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복음서들과 함께 묶여 있는 <요한 외경(外經) Apocryphon of John>(글자뜻 그대로는 '비밀의 책')의 첫머리에는 예수가 그의 제자 요한에게 가르친 '침묵 속에 숨겨진 신비와 사실들(the things)'을 밝히기 위해 쓴다고 되어 있다.

 

- 나중에 무하마드 알리는 텍스트의 일부를 불태우거나 버렸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들은 놀라운 것들로서,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 복음서들을 모아 놓은 것을 포함하여 기독교 시대의 초기 수세기 동안에 씌어진 52종의 텍스트들인 것이다. 

 

- <도마 복음서>와 <빌립 복음서> 이외에도 발견물에는 '보이지 않는 위대한 영(spirit)의 성스러운 책(sacred book)'이라고 씌어 있는 <진리복음서 Gospel of Truth>와 <애굽인 복음서 Gospel to the Egyptians>가 포함되어 있다. 

 

- 무하마드 알리가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한 것은 약 1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보다 더 오래된 사본(寫本, manuscript)의 콥트어 번역본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원본(原本, originals)들 자체는 신약 성서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씌어졌으며, 도레스, 푸에흐, 그리고 퀴스펠 등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도마복음서>의 그리스어 원본의 극히 일부는 고고학자에 의해 이보다 50년 전에 발견되었었다.

 

- 발견물들이 씌어진 연대(年代)는 거의 확실하다. 연대 추정이 가능한, 가죽 묶음을 두껍게 하는 데 쓰인 파피루스와 콥트어 번역본(Coptic script)의 파피루스를 분석한 결과, 서기 350~4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원본의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 원본의 일부는 적어도 서기 120~150년보다 이전에 씌어진 것인데, 정통파인 리용 Lyons의 주교(主教) 이레네우스 Irenaeus가 서기 180년에 이단자(異端者)들이 "실제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음서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당시에 그러한 복음서들이 널리 -갈리아 Gaul에서부터 로마, 그리스, 소 아시아에 걸쳐서- 읽혀지고 있다고 불평하는 글을 쓴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사본들을 조사하던 학자들은 일부 텍스트들에 실린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구약 성서의 <창세기>와는 매우 다르게 기록된 것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어 <진리의 참 증언 Testimony of Truth>에서는 뱀의 관점에서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문헌에서는 뱀이 신적 지혜의 본질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여기에서 뱀은 지식을 공유(共有)하도록 아담과 이브를 설득한다. 반면에 '주님 (the Lord)'은 그들이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 빈틈없이 애쓰면서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들을 낙원(樂園, Paradise)에서 추방한다. 신비스럽게 이름이 붙여진 <천둥, 완전한 마음 Thunder, Perfect Mind>이라는 또 다른 텍스트에는 여성신(女性神)적인 권능(feminine divinepower)의 목소리로 읊어진 비범한 시가 실려 있다. 

 

- 따라서 이들 여러 가지 텍스트들은 비밀 복음서(secret gospel), 시(詩),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의사(疑似) 철학적인(guasi-philosophic) 묘사로부터 신화(神話), 마술(魔術), 그리고 비법(秘法) 수행 지도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왜 이 텍스트들은 묻혀 있었고, 또 거의 2천 년 동안이나 잊혀진 채로 있었을까? 이 텍스트들이 초기 기독교 신앙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에 금서(禁書, banned documents)로 탄압받고, 또 나그 함마디의 낭떠러지에 묻히게 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 그러나 남부 이집트에서 누군가, 아마도 발견지 근처에 있었던 성 파코미우스 Pachomius 수도원의 수사(修士)가 금지된 서적들이 불태워 없어지지 않도록 항아리 속에 감추었고, 이것이 거의 1600년 동안 묻혀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들을 쓰고 유포시킨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저작(著作)에서는 유태의 유산(遺産, heritage)과 명백히 관련있는 기독교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책들에는, 나중에 '가톨릭 교회'로 불리게 된 집단을 구성했던 2세기의 '다수파'들에게는 숨겨졌고 비밀이었던 예수에 대한 전승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 적혀 있다. 

 

- 그러나 '영지(靈知)'는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지식이 아니다. 그리스어에서는 과학적 지식 또는 반성적(反省的)인 지식("그는 수학을 안다.")과 관찰이나 경험에 의해 아는 것("그는 나를 안다.")이 구별되며 후자가 '영지'이다. 영지주의 교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영지'에는 직관적 (直觀的)인 과정에 의해 자신을 아는 것이 포함되므로 우리는 이를 '통찰(洞察, insight)'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nature)과 운명(destiny)을 아는 것이라 했다. 

 

- 영지주의 교사였던 테오도투스 Theodotus가 소아시아에서 쓴 (140∼160년) 글을 보면, 영지주의 교인은 다음을 이해하게 된 사람을 뜻한다. 

우리가 누구였고,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지,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 어디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는지, 탄생이란 무엇이고, 다시 태어남 (rebirth)이란 무엇인지.

- 그러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을 안다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 '영지'의 비밀이다. 다른 영지주의 교사였던 모노이무스 Monoimu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창조물(創造物), 또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들을 찾지 말아라. 너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찾아라. 나의 하느님, 나의 마음, 나의 사고(思考), 나의 영혼, 나의 육체라고 말하고, 그 자신의 모든 것들을 만드는 네 자신 속에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라. 슬픔, 기쁨, 사랑, 증오의 근원들을 알아라. 네가 이러한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너는 그를 '네 자신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 또 이 저작들의 다수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라는 신약 성서의 등장 인물들(dramatis personae)과 똑같은 인물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충격적이다. 

- 첫번째로 정통파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창조주와 인류 사이에는 깊게 갈라진 틈이 있으며 하느님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쓴 영지주의 교인들의 일부는 이를 부인하면서,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自我, the self)와 신성(神性, the devine)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 두번째로 이 텍스트들에서 '살아 계신 예수'는, 신약 성서의 예수와는 달리 죄와 회개에 대해서가 아니라 허상(虛像, illusion)과 깨달음(覺, enlightenment)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는 인도자로서 온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깨달음에 이를 때, 예수는 더 이상 영적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며, 그 둘은 동등(同等)하게 되거나 일체화(一體化)되기까지 한다. 


- 세번째로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主)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믿고 있다. 곧 예수는 그가 구원하기 위해 왔던 나머지 인류로부터 영원히 다른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 <도마 복음서〉에는, 도마가 그를 인식하자마자 예수는 그에게 그들의 존재는 똑같은 근원(source)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러한 가르침은 - 신과 인간의 동일성, 허상과 깨달음의 관계, 주(主)가 아니라 영적 인도자로 표현된 교회의 창설자 (founder) - 서양적이라기보다 동양적이지 않은가? 일부 학자들은 만약 이름을 바꾼다면, <도마 복음서>에서 살아 계신 예수가 말한 바를 '살아 계신 부처(living buddha)'가 말한 것으로 적절하게 바꿀 수 있다고 제시했다. 힌두교나 불교의 전승(傳承)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끼쳤을까? 

- 영지주의가 활짝 꽃피었을 당시는(서기 80년~200년) 그리스-로마 세계와 극동 지역 간의 무역로가 열리고 있었던 중이었고, 불교 포교사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서 포교(布敎)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225년경)가 인도의 브라만 교도들(Indian Brahmins)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전승을 이단의 원천들(sources)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인도인들 가운데 브라만 교도로서 철학자인 체하는 이단이 ... 있었는데, 살아 있는 동물과 요리된 음식물을 먹지 않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한다. ... 그들은 하느님은 빛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보는 빛과 같은 것이 아니고 더구나 햇빛이나 불빛과 같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설교를 하시나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영지)으로 표현되며, 현자(賢者)는 영지를 통해서 자연의 숨겨진 신비를 인지(認知)한다.

- 이러한 암시들은 그 가능성을 시사하나,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비슷한 전승들이 다른 시기에, 다른 문화권에서 생겨날 수도 있으므로, 위와 같은 생각들이 양쪽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발달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종교들을 서로 다른 흐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2천 년 전에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 이단자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싫어하는 겉모습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단자는 참된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참된 믿음(true faith)'을 정의하는가? 누가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부르며,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것은 우리 자신들도 자주 경험하는 문제이다. 

 

-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초대(初代) 교회는 달랐다. 모든 종파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단순하고, 보다 순수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알아보기 위해 초대 교회를 돌이켜본다.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그들의 돈과 재산을 공유했으며, 똑같은 가르침을 믿었고 같이 예배했으며, 사도들의 권위를 존경했다. 자신을 최초의 기독교 역사가라고 밝힌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황금시대가 지나자마자 갈등과 이단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 최근 몇몇 학자들은 영지주의의 발전의 원동력을 영지주의의 문화적인 기원의 견지(見地)에서가 아니라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에서 찾았다. 그랜트 R.M. Grant 교수는 서기 70년경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에, 전통적인 종교적 견해들 - 유태교와 기독교 - 이 산산히 부서진 데 대한 반발로서 영지주의가 나타났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퀴스펠은 영지주의가 종교적 신화에 투영(投影)된, 거의 보편적인 '자아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요나스는 영지주의를 특별한 종류의 철학적 세계관의 하나로서 설명하는 유형학적 도표(typological scheme)를 제시하였다. 한편 영국 학자 도드 E.R. Dodds는 영지주의를 신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작들(writings)을 쓴 운동으로 특징지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 Hebrew University의 교수로서 유태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제르솜 스콜름 Gershom Scholem은, 신비주의적인 사변(思辨, speculation)과 의식(儀式, practice)이 영지주의에 포함되어 있다는 데 도드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영지주의가 발전하던 때와 같은 시대의 랍비 집단 내에서의 비교적(秘敎的, esoteric)인 경향에 대해 추적하면서, 스콜름은 그들을 '유태 영지주의' 형태라고 부른다. 

 

- 그 가운데 하나는 영지주의와 그리스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주로 이 관계를 예증하는 나그 함마디 텍스트들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로는 예를 들어 (한스 요나스 외에) 영국 학자 노크와 암스트롱 A.H. Armstrong이 있고, 미국 학자로는 예일 Yale 대학교의 벤틀리 레이톤 Bentley Layton 교수와 남 감리교 대학교의 해롤드 아트리지 Harold Attridge 교수 등이 있다. 그 반면에 콜롬비아 대학의 몰톤 스미스 Morton Smith 교수는 현재 마술(魔術, magic)의 역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마술적인 의식을 나타내는 자료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 두번째 연구 방향은 영지주의 텍스트들을 문학적으로, 그리고 형식 비평(形式批評, form criticism)의 견지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이 분야 연구의 많은 부분은 로빈슨과 쾨스터의 공저(共著)인 <초기 기독교 시대의 흔적들 Trajectories Through Early Christianity>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영지주의 텍스트들의 풍부한 상징성에 대해 탐구하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학자 타르듀 M. Tardieu는 영지주의 신화들을 분석하였으며, 쇼트로프 L. Schottroff 교수는 악(惡)의 힘에 대해 영지주의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그들의 많은 미국인 동료들도 영지주의 자료들의 문학적 분석에 이바지하였다. 퍼킨스 P. Perkins 교수는 양식(樣式, genre)과 비유적 표현(imagery) 모두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죠지 맥래 교수는 영지주의적 은유(隱喩), 신화(神話), 그리고 문학적 형식 등을 이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와 퀴스펠 및 피어슨 B.A. Pearson 교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유태교 안에서 전승되어 온 자료들로부터 일부 영지주의 신화들이 어떻게 끌어내어졌는가를 밝혔다. 

 

- 세번째 연구 방향은 (두 번째 것과 자주 겹치는데) 영지주의와 그 당시의 종교적 여건과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스콜름, 맥래, 퀴스펠, 피어슨(일부 이름을 들자면) 등은 일부 영지주의 자료들이 유태 전승을 광범위하게 참조한 것을 예시했고, 다른 사람들은 다음의 의문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영지주의 텍스트들이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 이러한 영지주의적 관념들은 정신분석학자인 융 C.G. Jung을 매혹시켰고, 그는 영지주의 교인들이 '마음의 다른 면' - 어느 정통파건 신봉자들에게 억제할 것을 요구하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생각들 - 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 왜 기독교 교회들은 이런 놀라운 견해들을 합의(consensus)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기독교 교리의 오직 유일하고도 진실한 형식으로서 확립하였을까? 전통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정통파가 영지주의적 관점을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반대했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왔다. 정통파들은 분명히 그랬으나, 새로이 발견된 영지주의 자료들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른 차원의 논쟁을 제시하고 있다. 곧 위와 같은 종교적 논쟁들에는 -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질문들 - 기독교가 조직적인 종교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그러한 발전에 반대가 되는 의미를 내포하는 관념들은 '이단'으로 이름 붙여지고, 묵시적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관념들은 '정통'이 된 것이다. 

 

- 반면에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여러 가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수준(spiritual level)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만남은 꿈속에서, 무아경(ecstatic trance) 속에서, 환상(vision) 속에서, 또는 영적 조명(靈的 照明, spiritual illumination)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정통파들은 이와 같은 모든 해석을 비난하였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단자이고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다시 말해서 육체적 부활의 교리는, 여러 교회들 위에서 독점적인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정당화하였다. 2세기부터 이 교리는 주교들의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입증하는 데 쓰여 왔으며, 이것이 오늘날 교황(敎皇)의 권위의 기초가 되었다. 부활을 다르게 해석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는 별로 주장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정통파보다 우위(優位)에 있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들은 이단자로서 비난을 받았다. 

 

-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권위는 아주 비상한 방법에 의해 강화되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기독교 운동 초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가 꽃피었다. 수백 명의 경쟁적인 교사들 모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서로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소 아시아에서부터 그리스,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에 이르는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지도력을 두고 여러 파들로 갈라져서 다투면서 저마다 자신들이 '진정한 전승(the authentic tradition)'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 이 영지주의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이었다는, 마가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상기시키고 있다(마가 16:9). 요한은, 예수가 부활하신 날 아침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보다 늦은, 같은 날 저녁에야 나타나셨다고 말한다(요한 20:11-19). <마리아 복음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환상(vision) 속에서 주님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환상을 보는 사람은 어떻게 그 환상을 보나요? 영혼(soul)을 [통해서]인가요, [아니면] 정신(spirit)을 통해서인가요?" 그는 환상을 보는 사람(visionary)은 마음(mind)을 통해서 지각한다고 대답하였다.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베드로 묵시록>은, 베드로가 "나는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지성적인 영(靈)이다."라고 설명하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은 무아경 속에서 보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영지주의 이야기에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경험하는 사람이 어떻게 공포(恐怖), 경외(敬畏), 비탄, 그리고 기쁨과 같은 강렬한 감정으로 반응하는지에 대해 자주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 작가들은 환상들을 공상(fantasies)들이나 환각(hallucinations)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직관으로 실재의 본질을 통찰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들을 존중하거나 숭배하기조차 하였다. 

- 한 영지주의 교사가 그의 학생 레지노스 Rheginos에게 보내는 편지인 <부활론 Treatise on Ressurection>이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부활을 환영 [Phantasia, 글자 뜻 그대로는 '공상'(fantasy)]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은 환영(apparition)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떤 것이다. 오히려 이 세계가 부활이라기보다는 환영이라는 것을 견지해야만 한다." 되어 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레지노스의 선생은 계속해서 불교의 스승처럼, 평범한 인간 존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고, 부활은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부활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의 드러남이며 ... 새로움으로의 이동이다(metabole, 변화·변형)."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생동(生動)하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곧바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실제의 당신은 죽어서 부패한 존재입니까? ... 당신은 왜 자신의 자아를 시험해 보고, 당신이 부활했는지 알아보지 않습니까?”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세번째 텍스트인 <빌립 복음서>도 부활을 글자 뜻 그대로 받아들인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비웃으며 똑같은 견해를 나타낸다. "먼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죽고 나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부활해야만 한다." 이 저자는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이 몸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물론 필요하다!"고 풍자적으로 말한다. 

- 영지주의 이론은 내적 환상을 통해 '주님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 자신의 권위가 열두 제자나 그 계승자들의 권위와 같거나 아니면 그것을 능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마리아 복음서>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정통파 집단의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마리아 -영지주의 교인- 가 스스로 꾸며낸 낯선 관념들, 꾸며낸 말들, 거짓말들을 정당화하고 신적인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 위해 주님을 본 척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정통파의 견해로는, 마리아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므로 지도자로서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보기로서 마리아를 택한 영지주의 교인들은, 그녀가 베드로에게 맞선 것처럼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장로와 감독들의 권위에 도전한다. 

 

- 그들에 따르면 정통파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다수파'에게 가르쳤던 공개된 비전(秘傳, esoteric)의 가르침에만 의존하는 반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더하여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비밀' 가르침도 전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 교사이며 시인인 발렌티누스 Valentinus는(140년경), 심지어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어떤 신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지적한다. 신약 성서의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너희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다시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마가 4:11)'

 

- 마태도 예수가 대중에게 말할 때는 오직 비유(比喩)로만 이야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예수는,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들[mysteria, 글자 뜻 그대로는 '신비들(mysteries)']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고 대답했다. 

 

- 영지주의 교인들에 의하면, 몇몇 제자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예수의 비전의 가르침을 비밀로 간직하였고,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되었다고 스스로 증명함으로써 '영지에의 입문(入門)', 다시 말해서 비밀 지식에의 입문자격을 갖추게 된 일부 사람들에게만 개인적으로 가르쳤다. 

-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숨겨진 신비'와 '비밀 지혜'를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가 '성숙한’ (고린도 전서 2:6) 사람으로 판단하는 기독교인들에게만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현대의 많은 정통파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뜻하는 것이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루돌프 불트만 Rudolph Bultmann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바울이 비밀 전승을 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언뜻 보기에 바울 역시 '영지주의 교인'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 최근에 로빈 스크로그 Robin Scroggs 교수는 반대의 견해를 표명하면서, 바울은 분명히 그가 비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초기의 영지주의 기독교인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었다. 로마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여행했던 영지주의 시인인 발렌티누스조차도, 그 자신이 바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테우다스 Theudas로부터 바울의 비밀 가르침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 그때 제자들이 그에게 우주의 비밀에 관해 물어 보자 '빛에서 나온 목소리'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Wisdom of Jesus Christ>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도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산에 모였을 때, "구세주(Redeemer)께서 그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강렬한 빛의 천사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그는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우주와 우주의 운명에 대한 '거룩한 계획의 비밀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 그러나 정통파와의 견해의 차이는 충격적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알아보는 보통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그리고 분명히 '육체적' 모습은 아니다. 그는 빛 속에서 이야기하는 빛나는 존재로서 나타나거나, 또는 그 자신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꾼다. <빌립 복음서 Gospel of Philip>도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과거의 그였[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고, [제자들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어 제자들 모두의 마음을 그들 모르게 매혹하셨다. 그는 자신을 [그들 모두]에게 나타내셨다. 그는 자신을 고귀한 사람에게는 고귀한 사람으로 ... (그리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비천한 사람으로 [나타내셨다.] 

- 예수는 덜 성숙한 제자에게는 아이로, 성숙한 제자에게는 지혜의 상징인 노인으로 나타난다. 영지주의 교사인 테오도투스가 말한 것처럼, "각 개개인은 다 같은 방법이 아니라 각자의 방법대로 주님을 알게 됩니다."  

- 기독교의 사도신경(使徒信經)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을 믿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신앙 고백이 원래는 이단자 마르치온 Marcion(서기 140년경)의 추종자들을 정통파 교회에서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 아시아에서 온 기독교인인 마르치온은, 정의(正義)를 요구하면서 그의 법(法)을 어기는 모든 이를 '벌(罰)하는 구약 성서의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가 선포한 아버지, 곧 신약 성서의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 사이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떻게 하여 모든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고통과 아픔과 질병을, 심지어는 모기와 전갈까지도 포함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마르치온은 이 둘은 서로 다른 하느님들(Gods)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 미국 학자 버거 피어슨 Birger Pearson이 지적한 것처럼, 이 저자는 뱀을 교사(敎師, Instructor)와 같은 느낌이 들도록 아람어(Aramaic)의 동음이의어 익살('뱀' – 헤와 hewya, '가르치는 것' - 하와 hawa)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영지주의적 설명에는 이브(하와 Hawah)를 포함하는 네 가지 방법의 동음 이의어 익살(pun)이 덧붙여져 있다. 곧 그녀는 아담을 유혹하는 대신에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가르친다. 

 

- 며칠 쉬고 난 뒤 소피아 Sophia [글자 뜻 그대로는 '지혜']는 죠 Zoe [글자 뜻 그대로는 '생명']에게 이브라고 불리는 그녀의 딸을 아담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로서 보냈다. 이브가 낙담해 있는 아담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말했다. "아담 살아나요! 땅 위에 우뚝 서요!" 그녀의 말은 즉시 실현되었다. 왜냐하면 아담이 일어서자, 그는 즉시 그의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를 보고, "당신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을 '생명체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living)'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통치자의 본질>에서 이브는, 물질적인 상태에 불과했던 아담을 일어나게 한 인간의 영적 본질(spiritual principle)로 묘사되어 있다. 

 

- 요즈음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를 형이상학적인 이원론, 또는 심지어 다신교(多神敎)와 비슷한 말로 생각한다. 이레네우스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히브리 경전의 근본적인 생각을 서투르게 모방하는 것은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Clement of Alexandria는 "일원론적(monadic) '영지'"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자료들에도 또한 발렌티누스 파(派) 영지주의가 가장 영향력 있고 세련된 형태의 영지주의 가르침이며,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장 위협적이었던 이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 <발렌티누스 파의 해설 Valentinian Exposition>은 하느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단자(單子, Monad)로 살고 계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 분은] 침묵 속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 ... 그런 까닭으로 결국 [그분은] 단자[이시었으며 ] 그분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 이 비밀 전승이 나타내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순진하게 창조자로, 하느님으로, 그리고 성부로 숭배하는 분이, 실제로는 진정한 하느님(true God)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발렌티누스에 따르면, 클레멘스와 이그나티우스가 하느님에 기인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 실제로는 '창조자(創造者, creator)'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 발렌티누스는 플라톤처럼 그리스어의 '조물주(造物主, demiurgos)'라는 용어를 쓰면서, 창조자는 보다 높은 권능(higher powers)들의 도구로서 일하는, 보다 작은 신성(lesser divine)이라고 말한다. 그는 설명하기를, 하느님이 아니라 조물주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하고,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행동하고, 법을 만들고 이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며, 한마디로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설명한다. 발렌티누스가 제공하는 비전의 전수를 통해 지원자들(candidates)은, 창조자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그의 모든 요구 사항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영지주의 교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창조자가 그 자신의 무지(無知)로 말미암아 권능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나는 하느님이고, 다른 하느님은 없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지'를 얻는 것은 신적 권능의 진정한 근원을 -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의 '심원’ -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근원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동시에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영적기원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진정한 아버지(Father)와 어머니(Mother)를 알게 된다.

 

- 이 '영지' - 통찰 - 를 알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救援, redemption) [apolytrosis, 글자 뜻 그대로는 '해방(解放, release)']이라고 불리는 비밀 성사(聖事, sacrament)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영지'를 얻기 전에는 지원자가 조물주를 진정한 하느님으로 잘못 알고 숭배하였지만, 이제는 구원의 성사를 받음으로써 조물주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의식에서 그는 자신의 독립(independence)을 선언하면서, 그가 더 이상 조물주의 권위와 심판의 영역(sphere)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는 것에 속한다고 조물주에게 말한다.

- 주교로서 이레네우스는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위협을 인식하였다. 전수자의 조물주에 대한 관계를 극적으로 바꾼 구원의 의식은, 동시에 전수자의 주교에 대한 관계도 바꾸었다. 전에는 주교가 '하느님을 대신해서' 통치하고, 명령하고, 심판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신자는 '하느님 자신을 섬기듯이' 주교에게 복종해야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러한 구속은 아직도 조물주를 두려워하고 따르는 순진한 신자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영지'는 최소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학적인 정당화(正當化, justification)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수자들은 이제 주교들을 조물주의 이름 아래 세상을 통치하는 "지배자들이고 권력자들"이라고 본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주교들이 조물주처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 전수받지 못한 사람들 - 에게 합법적인 권위를 행사한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주교의 명령과 경고, 그리고 위협들은 조물주 자신의 경우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한다. 

 

- 지원자들은 '영지'에 입문함으로써 영적 권위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이제 그는 성직자 계급 체계의 권위가 조물주에게서 - 성부로부터가 아니고 - 유도된 것을 안다. 클레멘스 같은 주교가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경외하라."거나 또는 "당신이 주님을 모시고 있다고 고백하라."고 명령하거나, 이레네우스가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경고하면,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신자들에 대한 조물주의 권능과 지상에서의 대표성들(earthly representatives)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재차 확인하려 하는 그들의 노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나는 하느님이며, 다른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조물주의 어리석은 주장에서, 영지주의 교인들은 공동체에서 독점적인 권능을 행사하려는 주교의 주장을 감지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라는 신의 경고에서, 영지주의 교인들은 주교의 권위를 능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교의 질투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 '영적(pneumatics, 글자 뜻 그대로는 '영적인 사람들')' 집단의 구성원들은 집회를 어떻게 진행했을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만날 때는 먼저 모두 제비 뽑기를 한다고 말한다. 제비 뽑기에서 뽑힌 사람들은 누구든지 간에 한 사람은 '사제'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지명되었고, 다른 사람은 '주교'로서 성사를 주고, 다른 사람은 예배를 하는 동안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은 즉흥적으로 영적 지도를 하는 '예언자(豫言者, prophet)'로서 집단에게 연설을 한다. 이 집단이 다음에 만날 때는, 제비 뽑기를 다시 하므로 각 역할을 맡은 사람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이러한 의식(practice)은 매우 다른 권위 구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었다.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점차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고 있었을 때, 영지주의 기독교인 집단은 그들 사이에서 그러한 구별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의 구성원을 교계제도의 '서열들(序列, orders)' 대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나누지 않고, 그들은 엄격한 평등의 원리를 따랐다. 모든 전수자들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똑같이 제비 뽑기에 참여하였고 누구든지 '사제', '주교', 또는 '예언자'로 뽑힐 수가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매번 집회마다 제비 뽑기를 했기 때문에, 뽑기에 의해 정해진 구별조차 영원한 '계급들(階級, ranks)'이 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 가장 중요한 것 - 그들은 이 의식을 통해서 인간에 의한 선택이라는 요소를 없애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 20세기의 관찰자들은, 영지주의 교인들이 이것을 무작위(無作爲)에 의한 기회에 맡겨 버린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것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관할하시기 때문에 제비 뽑기에서 뽑히는 것은 신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의식들은 테르툴리아누스로 하여금 '이단자들의 행위'에 대한 공격을 촉진하게 만들었다.

 

- 테르툴리아누스는 특히 '이단자들 가운데 여자들이' 권위의 직위(職位)에 남자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여자들이 가르치고, 토론에 참석하고, 악마를 쫓아내고, 치료한다." 그는 여자들이 세례조차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였는데, 이것은 여자들이 주교의 역할도 했다는 것을 뜻했다! 

- 이레네우스는 주교로서 엄숙한 심판을 공표하고 있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전승의 두 가지 원천, 하나는 공개되고 다른 하나는 비밀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레네우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승에 두 가지 원천이 '있다'는 것에 그들과 동의하지만, 하느님이 한 분인 것처럼 둘 가운데 하나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교회가 그리스도와 그의 선택된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통하여 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하나는 사탄에게서 온 것인데, 베드로의 가장 큰 적으로 사도들의 영적 힘을 사려고 해서 베드로의 저주를 받은 영지주의 교사 시몬 마구스 Simon Magus(글자 뜻 그대로는 '마술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드로가 진정한 계승의 머리이듯이, 시몬은 잘못 되고 악마의 영감을 받은 이단자들의 계승으로 요약된다. 곧 그는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이다.

 

- 고대 근동(近東)지역에서 신봉되던 다른 여러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권능에는 여성적인 신성이 없었으며, 또한 그는 어느 누구의 신적인 남편이나 연인도 아니었다. 그는 대체로 왕, 군주, 주인, 심판자, 그리고 아버지 같은 남성적인 통칭으로만 특징 지워질 수가 있다. 유태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여성적 상징이 없다는 점은, 신에 대한 여성적 상징이 풍부한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걸친 세계의 다른 종교적 전통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오늘날 유태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신학자들은, 절대로 성별(性別)을 나타내는 용어로 하느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를 볼 때나 기도할 때 매일 사용하는 실제적인 언어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곧 유태교나 기독교 관습 아래 자란 사람으로서 신은 '남성'이라는 뚜렷한 인상을 마음속에서 지운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지만, 당연히 그녀가 신인 것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느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는 해도, 그녀는 하느님 아버지와 동등한 자격으로서의 '하느님 어머니(God the Mother)'가 아니다!

- 물론 기독교는 하느님에 대한 유태교적인 묘사에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용어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세 신적인 '위격(位格, Person)들' 가운데성부와 성자는 남성적인 용어로 묘사되었고, 세번째 성령은 정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중성적인 용어인 프네우마(Pneuma)로서 무성(無性)을 시사한다. 초기 기독교 역사[교부학(教父學, patristics)으로 불리는 분야, 곧 '교회의 아버지들'에 대한 연구]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마복음서>의 결론 부분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여자들은 구원 (Life)의 가치가 없으니까 마리아를 떠나 보냅시다."라고 그들 [제자들]에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나 자신은 그녀를 남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인도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 역시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 있는 영(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남성으로 만드는 여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글은 남성들이 공동체의 정통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반면, 여자들은 자신들을 남자들과 동화(同化)시킬 때만 참여가 허락된다는 종교적 수사(修辭, rhetoric)의 전제를 단순하게 나타내고 있다.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다른 텍스트들에는, 이러한 '이단적인' 자료들과 정통파 것과의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나 있다. 곧 영지주의 자료들에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데 성별을 나타내는 상징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 텍스트들이 어머니 여신에 대한 오래된 이교도 전승들의 영향을 보여 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텍스트들의 대부분은 분명히 유태의 유산(遺産)과 관계가 있는 독특한 기독교인의 언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텍스트들의 많은 부분은 하느님을 일원론적(monastic)이고 남성적인 존재로 묘사하지 않고,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이원론적인 하느님(God as a dyad)으로 말하고 있다. 

 

- 이 텍스트들은 신적 어머니(the devine Mother)의 특성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텍스트들 자체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의 주요한 특성을 가려낼 수 있다. 

- 첫째로 몇몇 영지주의 집단들은 신적 어머니를 원초적인 한 쌍의 짝(part of an original couple)으로 묘사한다. 교사이자 시인인 발렌티누스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은 묘사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신성(神性)을 양성(兩性, dyad)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곧 양성의 한쪽은 표현할 수 없는 이(the Ineffable), 심오한 이(the Depth), 최초의 아버지(Primal Father)로 되어 있고, 또 다른 한쪽은 은총(Grace), 침묵(Silence), 모태(母胎, the Woomb), 그리고 '온전자의 어머니(Mother of the All)'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 발렌티누스는 그리스어 단어들의 문법적인 성별에 따라 침묵을 여성으로, 아버지를 남성으로 표시하면서, 침묵이 아버지를 적절히 보충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근원(Ineffable Source)의 씨를 받아서, 어떻게 모태처럼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를 조화롭게 짝 맞추어서 신적 존재의 모든 발현을 잉태하는지를 설명한다.

 

-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은 그녀에게 어머니로서, 그리고 '신비적이고, 영원한 침묵'으로서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예를 들어 마술사 마르쿠스는 다음과 같이 그녀를 은총(그리스어로 여성적 용어인 charis)이라고 불렀다. : "모든 것들보다 먼저 있었고, 이해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은총인 그녀가, 그녀 자신의 지식을 당신 마음 속에 채워 넣고 계속 늘리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 마음(nous - 남성)과 지성 (epinoia - 여성)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의 문법적 성별에 따라서 이 저자는, 이 권능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이원적인 것(duality)으로 발견되고 ... 이것이 지성 안에 있는 마음이며, 그것들은 이원적인 상태 안에서 또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될 수도 있지만, 양성적인 상태의 동일체 하나(one)이다."고 설명한다. 한 영지주의 교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각 개개인에게는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신적 권능]이 있다. ... 이것은 위와 아래로 나뉘어진 하나의 권능으로서, 자신을 생기게 하고, 자신을 성장시키고, 자신을 찾으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어머니, 아버지, 자매, 배우자, 딸, 아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 아버지, 통일체(unity),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히폴리투스, <모든 이단들에 대한 반박 Refutation of All Heresies>)

- 하느님에 대한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라는 영지주의적 묘사가 처음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것을 삼위일체의 다른 견해로 인식할 수 있다.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의 용어에는 영(靈, pneuma)이라는 중성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사실상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은 성별이 없어야 된다. 그러나 <비밀서>의 저자는 영(靈)을 나타내는 여성어인 히브리어의 루아(ruah)를 염두에 두고서 성부 및 성자와 결합하는 여성적인 '위격'은 성모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 다른 영지주의 교인들은 영원하고 신비스런 '침묵'과 '성령'에 덧붙여 신적 어머니의 세 번째 특징으로서 '지혜(Wisdom)'를 제안한다. 여기에서는 '지혜'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의 여성어 소피아(sophia)가 히브리어의 여성어 호크마(hokhmah)로 번역되어 있다. 초기 해석자들은 성서에 있는 글들 가운데 일부의 의미를 숙고하였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세상을 지혜로 만드셨다."는 구약 성서 <잠언(箴言)>의 문구를 들 수 있다. 지혜는 하느님의 창조를 '잉태한(conceived)' 여성적인 권능이 될 수 있는가? 한 교사에 의하면, 잉태(conception)라는 언어의 이중적 의미가 - 물질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잉태하는 권능이기 때문에 ... 사고(思考, ennoia)의 모습은 여성이다."

 

- 일부 영지주의 교인들은, <창세기> 1:26-27 이 양성적인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마르쿠스는 (앞서 어머니에게 드리는 그의 기도문이 나왔다.) 이 설명으로부터, 하느님은 양성적("우리 인간을 만들자")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대로(아버지와 어머니)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은 남성적 여성(masculo-feminine)'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와 같은 시대의 영지주의 교인인 테오도투스는(서기 160년경)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그들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라는 말은, "지혜인 어머니가 가장 잘 만든 작품의 구성 요소는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요소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신을 남성과 여성적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본성을 지닌 양성으로서 묘사하는 영지주의 자료들은 가끔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묘사를 한다. 
 
- 이 전반적인 관찰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하느님의 남성적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했던 세 이단적인 집단들인 마르치온 파, 몬타누스 파, 카포크라티아 파에는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기 200년부터는 여자들이 정통파 교회 안에서 예언자, 사제, 그리고 주교로서의 역할을 맡았다는 증거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 운동이 초기 단계에서는 여자들에게 놀랍도록 개방적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발전이다. 예수 자신은 여자들과 공개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유태교의 관습을 위반했고, 또 여자들을 그의 집단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였다. 

 

- 심지어 신약 성서의 누가 복음을 보면, 예수를 초대한 여주인인 마르타가,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가 하는 말만 듣고 자기는 그동안 혼자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그에게 불평을 했을 때 예수가 답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어찌 가만 두시나요? 마리아더러 저를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세요." 그러나 그녀를 두둔해 주는 대신에, 예수는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한다고 마르타를 나무라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누가 10:38-42).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성이 동등하다'고 인정하였으며, 전통적인 유태교인의 집회에서보다 더 넓은 활동 영역을 여성들에게 허용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부문에서의 동등성(同等性)을 옹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경향(ambivalence)에서, 바울에 의해 씌어졌든지 다른 이에 의해 삽입되었든지 간에, 고린도 전서 14장 34절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여성에 대한 이런 모순된 태도는 사회적 전환기라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알려진 세계에 걸쳐 흩어져 있던 교회들에 대한 문화적 영향의 다양함을 반영하고 있다.

 

- 그리스와 소 아시아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종교적인 예배, 특히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 Isis에 대한 예배에 참여했다. 지도적인 역할은 남성들의 것이었던 반면, 여성들은 봉사(奉仕)나 전문직에 참여했다. 어떤 여성들은 교육, 예술, 그리고 의학 같은 전문직을 택하였다. 이집트에서는 1세기까지 여성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비교적 진보된 해방의 상태를 누렸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귀족 계급의 일부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들과 같은 교과 과정을 제공하기 위해 교육 제도를 바꾸었다. 200년 뒤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는 초기에,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로마의 결혼 의식은, 점차 남자와 여자가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서약 아래 서로 결합하는 새로운 법적 형태로 변해갔다. 

 

- 프랑스 학자 제롬 칼코피노 Jerome Carcopino는 <여권주의와 풍기 문란 Feminism and Demoraliza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2세기까지 상류층의 여자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을 자주 주장했다고 설명한다. 남성 풍자가들은 문학, 수학, 그리고 철학 등의 토론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공격성에 불평하였고, 시를 쓰고, 연극을 하고, 음악을 즐기는 그녀들의 열정을 비웃었다.  

- 그 당시 로마 황제의 통치하에서, 여자들은 극장, 운동 경기, 음악회, 파티, 여행과 같은 사회적인 생활을 남편과 함께, 또는 남편 없이 어디에나 참여하였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운동 경기에 참여하였고, 심지어 무기를 지니고 전장에 나가기도 하였으며 ... 그리고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였다. 반면에 유태 공동체의 여자들은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공공(公共)의 예배, 교육,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2세기 이전의 여자 기독교인들의 대외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2세기의 대다수 기독교 교회들은 중간 계층과 함께 여성의 평등을 향한 움직임을 반대하였는데, ...

 

- 서기 200년이 되면서 기독교 공동체들의 대부분은 디모데오 Timothy에게 보내는 바울의 가짜 편지를 정전으로 승인했는데, 이 편지는 바울의 견해 가운데서 반여권주의(反女權主義)의 요소를 강조, 그리고 과장하고 있다. 

 

-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는 제멋대로 구는 고린도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자들은 남편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초기에는 예배를 볼 때 기독교인 남자들이 여자들과 함께 앉았지만, 2세기 중엽 - 정확하게는 영지주의 기독교인들과 싸우고 있을 때 - 정통파 공동체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모여 앉는 유태식 집회 관습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2세기 말엽이 되면서 그들은, 여자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고, 여자들이 계속하여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집단들을 이단이라고 낙인찍었다. 

-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인 요한네스 라이폴트 Johannes Leipoldt는 헬레니즘화된 많은 유태인들이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 유태인의 전통을 따르는 방향으로 교회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가 인정하는 것처럼 "이것은 그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변화 그 자체는 사실인 것이다."

 

- 몰톤 스미스 Motron Smith 교수는, 그 변화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범위가 하류 계층에서 중류 계층의 사람들에게로 확대된 결과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갖가지 일을 해야 했던 하류 계층의 여자들에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오늘날 근동 지방에서는 오직 중류 계층의 여자들만이 베일을 쓴다.) 

- 정통파나 영지주의 텍스트들을 보면, 이 문제가 폭발적인 논쟁점이었음이 시사되어 있다. 양쪽의 견해 모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한 사도들의 원래의 견해를 밝힌다고 선언하면서, 사도 시대에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는 논쟁적 기술에 의존하여 문헌을 기록하였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빌립 복음서>는 남자 사도들과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경쟁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가장 친한 동료이고 신적인 지혜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다. 

- 베드로와 마리아 사이에 일어난 또다른 논쟁이 <신앙의 지혜 Pistis Sophia>에 실려 있다. 베드로는 마리아가 예수와 대화를 거의 독점하고, 또 베드로와 그의 형제 사도들의 정당한 우선권을 바꾸어 놓는다고 불평한다. 그가 예수에게 그녀를 조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즉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뒤에 마리아가, 자기는 감히 베드로에게 자유로이 말하지 못하겠다고 예수에게 고백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베드로가 나를 망설이게 해요. 나는 그가 여성들을 증오하기 때문에 두려워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예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누구든지 신이 말하도록 정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위와 반대되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는 의심스러운 '사도'의 편지들이나 대화들로 응수하였다. 물론 가장 유명한 예들은 위에서 인용된 바울의 가짜 편지들이다. 디모데 전·후서, 골로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이름으로 쓴 디도서에서는, 여자들을 고려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한다는 입장에서 감독을 선출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  감독은 집회에서 아버지의 모습이어야만 한다. 감독은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든 면에서 [그에게] 복종하는 남자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교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 교회의 교인들이 적절히 종속되도록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 행전 Ats of John>은 (나그 함마디 자료들보다 먼저 발견된 몇 개밖에 안 되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고 가장 유명한 영지주의 텍스트 중의 하나로서, 정통파의 계속되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조각조각난 단편적 형태로 살아 남았음.) 예수가 전혀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곧 인간이 지각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을 적응시킨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였다는 것이다. 

  - <요한 행전>은 야곱이 한 번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해변가에 서 있는 예수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하고 있다. 야곱이 요한에게 그를 가리켰을 때의 광경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나[요한]는 "어느 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는 저 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바다를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 형제여, 당신은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곳에서 있는 잘 생기고, 매력 있고, 명랑하게 보이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형제여."라고 말했습니다. ...

 

그는 다시 나에게 <머리가> 벗어진, 나부끼는 수염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으나, 야곱에게는 수염이 막 자라기 시작한 젊은이로 나타났다. ... 나는 전의 그의 모습으로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 그러나 그는 때로 추한 모습의 작은 남자로 나에게 나타났고, 그리고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 제여, 나는 당신에게 또다른 영광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때때로 내가 그를 만지려 했을 때, 나는 물질적인 단단한 육체와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 내가 다시 그를 느꼈을 때, 그의 실체(實體, substance)는 비물질적(immaterial)이고 영적(incorporeal)인 것이었습니다. ...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요한은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지만, 예수는 아무 자국도 남겨놓지 않았고 눈도 전혀 깜박이지 않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요한에게 예수의 본성(本性, nature)은 영적이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그는 우리를 모두 모아 놓고, "내가 그들에게 넘겨지기 전에, 우리 모두 아버지에게 드리는 찬송가를 부르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맞이하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서로 손을 잡아 원(圓)을 만들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은 중앙에 서 계셨다. ... "내 말에 아멘이라고 대답하거라."라고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고 다음에그는 신비스런 성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아래와 같다.

"춤주는 자는 우주에 속해 있다." - "아멘"

"춤추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 "아멘"

"이제 네가 나를 따라 춤을 추면, 너는 말하고 있는 내 안에서 네 자신을 볼 것이다. ...춤추는 너는 내가 하는 것을 생각하라. 바로 너의 것이 내가 겪으려 하는 사람의 수난(受難, passion)이다. 아버지가 나를 로고스 Logos 로서 너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너는 네가 고난 받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어떻게 고난을 겪는가를 배워라. 그러면 너는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때 그 환상은 요한에게 '빛으로 된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나는 앞으로 그들이 나에 관해 말할 어느 고난들도 겪지 않았으며, 내가 춤을 추면서 너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던 고난(suffering)까지 겪지 않았다. 이것을 나는 신비로 불려지도록 하겠다"고 설명한다.

 

-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인 다른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러한 역설들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다.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부활론>에 따르면, 예수가 '사람의 아들'인 한에 있어서는, 그는 나머지 다른 인간들처럼 인간으로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므로 그의 안에 있는 신적인 영은 죽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고난을 겪는 것과 죽음을 초월했다. 

 

- 그러나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인간'이었으며 따라서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역사적이고 문자적(literal)인 사건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들은 신경(信經) 안에 신앙의 중심요소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라는 간단한 말을 포함시켰다. 

 

- 교황 대(大) 레오 Leo the Great는 (447년경) <요한 행전>과 같은 저술들을 '금지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불에 태워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각종 외고집의 온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단 집단에서 이 텍스트를 계속 베끼고 숨겼기 때문에, 300년 뒤에 열린 두 번째 니케아 공의회(公議會) Nicene Council에서는 "누구든 [이 책을] 베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들을 불에 태워 없애 버려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지시하는 판결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 리용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와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한 이그나티우스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 진정한 '영지'는 사도들의 교리와, 전 세계에 걸친 교회의 예로부터의 체계(systema), 그리고 주교들의 계승에 의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인격에 있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을 전수해 왔다. 이레네우스는 오직 이 체계만이 그가 절대적인 권위라고 인정하는 사도들의 저술들 - 무엇보다도 신약 성서의 복음서들 - 의 '기둥과 기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것들은 거짓이고 믿을 만하지 못하며, 사도들의 것도 아니고, 아마도 이단자들에 의해 씌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가톨릭 교회만이 사람으로 태어나, 고난을 겪고, 죽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육체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인 한 분의 하느님을 주장하면서 '아주 완전한 교리 체계’를 제공하고 있다. 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생명이 문이다. 다른 것들은 도둑 들이고, 강도들이다." 

 

- 반대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 짓는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교인들의 이해 수준과 그들 서로 간의 관계의 질(質)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 묵시록>은 "깨닫게 되어 ...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거짓과 진리를 구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영지']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속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도 않고 '물 없는 운하'와 같은 주교들과 부제들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형제애의 지혜와 ... 함께 속한 사람들과의 영적 우애'를 나누고 있다. 

 

- ‘하늘의 교회'의 그러한 천상의 광경들(ethereal visions)은 정통파 자료들에 실려 있는 지상으로 향하는 교회의 모습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왜 영지주의 저자들은 교회를 구체적인 용어가 아니라 환상적이고 상상적인 용어들로 묘사할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영지주의 교인들은 사회적인 관계에 대하여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별로 관심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칼 안드레센 Carl Andresen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 대한 최근의 방대한 연구서에서, 영지주의 교인들은 교회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발달에만 관심을 쏟았던 '종교적인 유아론자들(唯我論者, solipsists)'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자료들은, 이들 영지주의 교인들이 각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의 질(質)이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정확하게' 정의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정통파 저자들은 실제 현상(status guo)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용어로 교회를 묘사했다. 곧 그들은 '예배를 보러 모인 사람들의 실제적인 공동체'가 교회였다는 것을 긍정했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무지하고, 오만하며, 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에 맞섰으며, 그 이상의 자격 제한도 없이 '교인들의 전체 공동체가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 말씀은 일련의 해답들을 주는 것이 아니고, 찾는 과정에 전념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에, 네가 가야만 하는 길들에 대해 찾고 구하라." 이성적인 영혼은 다음과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들의 것을 혹시라도 받기 위해 자기의 마음으로 보고, 자기와 가까운 혈족으로 인식하고, 뿌리에 관해 배우기를 ...

결과는 무엇일까? 저자는 영혼이 만족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찾는 데 지쳤던 이성적인 영혼은 하느님에 관해 배웠다. 그녀는(영혼은) 질문하며, 육체적 괴로움을 참아내며, 전도사들을 따라 여러 곳을 지치도록 다니며, 불가사의한 존재에 관해 배우면서 노력했다. ... 그녀는 쉬고 있는 그에게 쉬러 왔다. 그녀는 신부방에서 쉬었다. 그녀는 배가 고파 잔치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


- 영지주의 교인들은 영혼의 길을 따른다. 그러나 영지주의 교인이 아닌 기독교인들은 '찾지 않는다.'

이들 - 무지한 사람들 - 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 묻지 않는다. ...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부름을 듣지만 어디서 불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설교 중에 "제가 가서 예배를 해야 하는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지도 않았다

 

- 질문도 없이 그들에게 말해지는 가르침을 단지 믿고, 그들 앞에 제시된 예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만약 그들 자신의 구원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즉시 그에게 트집 잡아 침묵을 지키게 한다. 

 - 둘째로 이들 '적(敵)'들은 자신들이 영혼의 '목자'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영혼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육체를 가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영혼의 목자이며 영혼을 부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이 그들에게는 숨겨진 다른 방법을 안다는 것을 몰랐다. 영혼의 이 참된 목자는 '영지'로 영혼을 가르쳤다.

 

- 감독(poimen, '목자')이라는 공통적인 용어를 써서, 저자는 분명하게 성직자의 구성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영혼의 참된 목자인 그리스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닿아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 목자인 체 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교회란 보이는 것(그들이 관장하고 있는 공동체)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곧 교회는 영적인 사람들만을 포함한다는 것도 몰랐다. 오직 그리스도와 영지주의 교인 자신들만이 그들이 누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더욱이 이들 '영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성적 행위를 즐기며, 이교도들처럼 일반적인 사업에 종사했다.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영지'를 얻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비난했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중상할] 때도 그들에게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저주할 때도 우리는 그들을 무시한다. 그들이 우리를 면전에서 모욕할 때도, 우리는 그들을 쳐다보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사업에 종사하지만, 우리는 배고픔과 갈증 속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 영지주의 자료들은 다른 종교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세주와의 대화>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에게 똑같은 질문을("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했을 때, 그는 "네가 닿을 수 있는 곳, 그 곳에 있으라!"고 대답하셨다. <도마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들이 어디로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지 "빛의 사람 안에 빛이 있고, 그것은 온 세계를 비춘다. 만약 그가 비추지 않으면, 그는 어둠이다."고 말했을 뿐이다. 어떤 조직을 정통으로 인정하기는 커녕, 이 말씀들은 자기 자신에게,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내적 능력인 '안에 있는 빛'에 주의를 돌리라고 한다. 

 

- 물론 위에 간단히 설명된 비교는 다소 단순하다. 발렌티누스의 추종자자신들은, 요한복음에 있는 많은 구절들과 이야기들이 그러한 해석에 적합하다고 확신을 갖고 논증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 같은 기독교인들은 결국 요한복음이 (특히, 아마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 다음의 순서로 실렸을 때) 생겨나고 있는 교회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도 있다고 결정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조직됨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더라도 교회의 기본적인 조직 구조를 지지하는 한, 서로 모순되는 많은 관념들과 관례들을 그 안에 수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3세기와 4세기에 수백 명의 가톨릭 기독교인들은 고독, 환상, 그리고 황홀한 경험을 통해 종교적인 통찰을 추구하는 금욕적인 형태의 자기 훈련을 받아들였다.

[수도승(monk 또는 monastic)과 같은 용어들은 '고독' 또는 '독신자(獨身者)'를 뜻하는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왔는데, 이러한 용어들은 <도마 복음서>에서 영지주의 교인을 묘사하는 데 자주 쓰인다.] 

 

- 그 선택된 집단의 실재에 내재하는 인간의 원형(原型, archetype), 또는 영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숙련되었다고 생각했던' 발렌티누스의 일부 추종자들은, 하느님이 안트로포스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냈다는 교사 콜로르바수스 Colorbasus의 말에 동의했다. 이레네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의 최초의 아버지이고, 최초의 시작이며, 근본적으로 불가해(不可解)한 것을 '안트로포스'라고 부른다. ... 그리고 이것은 위대하고 심원한 신비이며, 다시 말해 모든 것들 위에 있고, 다른 모든 것들을 그 품 안에 포용하는 권능을 ‘안트로포스'라고 부른다.

-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 이유 때문에 구세주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곧 안트로포스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창조자를 얄다바오스 Ialdabaoth(이 이름은 분명히 유태교 신비주의에서 유래했지만, 여기서는 창조자의 열등한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부르는 세트 파 영지주의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자 얄다바오스가 영적으로 오만해져 자기보다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랑하면서, "나는 아버지이고, 하느님이며 내 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설명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얄다바오스. 모든 이의 아버지인, 근원적인 '안트로포스'가 너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트로포스'이며, '안트로포스'의 아들이다.
 

- 다른 발렌티누스 파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인간들이 종교적인 표현을 나타내는 모든 언어를 창조했기 때문에, 사실상 인류는 신의 세계를 창조했다. " ...그리고 이 [안트로포스]는 정말로 모든 것 위에 있는 하느님이다." 

 

- 많은 영지주의 교인들은 19세기의 심리학자인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Ludwig Feuerbach의 "신학은 실제로 인류학(Anthropology)이다."라는 말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물론 이 용어는 '안트로포스'에서 연유된 것이고 '인류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영지주의 교인들에게는 '영혼(psyche)'을 탐색하는 것이 공개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추구하는 종교적 탐색이 되었다. 

 

- 급진적인 영지주의 교인들처럼 자신의 내면의 방향을 탐구하는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인 조직체들을 그들의 진보에 방해가 된다고 거부한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교회를 발렌티누스 파 사람들처럼 필요한 '구원의 방주(方舟)'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면서도 종교적 조직체들에 기꺼이 참여한다. 

 

- 영지주의 기독교인들과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정반대로 정의한 것 외에도, 인간의 상태도 매우 다르게 진단했다. 정통파는 인류를 하느님과 분리시키는 것은, 인류와 하느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과 인간의 죄라는 전통적인 유태의 가르침을 따랐다. 신약 성서에서 죄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한 '하마르티아(hamartia)'는 궁술(弓術)에서 따온 것인데, 글자 그대로의 뜻은 '표적에서 빗나가다.'이다. 신약 성서의 자료들은, 우리가 지향하는 도덕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에 시달린다고 가르친다. 곧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

 

- 그들 자신의 자아를 모르는 채이므로 그들은 '뿌리'가 없다. <진리 복음서>는 이러한 존재 상태를 악몽(惡夢)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 사는 사람들은 '많은 환상들'에 사로잡혀 '공포와 혼돈, 불안정과 회의, 그리고 분열'을 경험한다. 그래서 학자들이 '악몽의 우화(nightmare parable)'라고 부르는 글에 따르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살았다. 

 

- 그들은 잠에 빠져 혼란된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 그들이 도망치고 있는 곳이 (있거나), 또는 힘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쫓겨오고, 혹은 다른 사람을 세게 때리고 있거나 아니면 얻어터지고, 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또는 날개가 없는 데도 공중으로 날아간다. 어떤 때는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조차 없는 데도 사람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것 (같고), 또는 그들이 이웃의 피로 얼룩져 왔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이웃들을 죽이고 있다.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겪고 깨어나면,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있었던 그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무지를 옆에 놔두고, [무지의 작용 결과들]을 한밤의 꿈처럼 흘려버리는 사람들의 상태이다. ... 이것이 무지한 상태에 있을 때는 잠들은 듯이 행동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지식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 '망각의 피조물'로 무지한 채로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취(fulfillment)를 경험할 수 없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러한 사람을 '결핍 속에 있다'(성취의 반대)고 말한다. 결핍은 무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지한 채로 있다가, 지식을 얻게 되면, 그의 무지는 저절로 없어진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없어지듯이, 결핍도 성취하는 가운데 없어진다. ...
 

- 자신에 대한 무지도 역시 자멸의 한 형태이다. <구세주와의 대화>에 의하면, 우주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소멸될 운명에 놓여 있다. 

불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그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에 타버릴 것이다. 먼저 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 부는 바람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면, 그는 바람에 날려갈 것이다. 그가 입고 있는 몸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몸과 함께 썩어 없어질 것이다. ... 그가 어떻게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이 어떻게 갈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 어떻게 또는 어디에서 자각(자아 지식)을 추구해야 할까? 대다수 영지주의 교인들의 두 번째 주요한 전제는 심리 치료의 경우와 같다. 둘 다 - 정통파 기독교와는 반대로 - 해방(liberation) 또는 파멸의 잠재력이 '영혼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데 동의한다. <도마 복음서>에서 예수가 한 말로 되어 있는 아래의 구절에 동의하지 않는 정신병 의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것이 너를 구할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 이런 통찰은 노력을 통해 점차로 나타난다. "네 눈앞에 있는 것을 인식하라. 그러면 숨겨진 것이 너에게 드러날 것이다." 

 

- 영지주의 교인들은 '영지'를 추구하는 것이 각자 내부의 저항과 싸우는 외롭고도 어려운 과정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영지'에 대한 저항을 잠자거나 술 취하고자 하는 - 곧 무의식 상태에 남아있고자 하는 - 욕망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나는 진리의 지식이다."라고 말하는) 예수는, 그가 세상에 왔을 때 다음과 같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 모두가 술에 취한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목마르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들의 마음은 눈이 멀어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영혼은 사람들의 아들들로 인해 괴로움을 받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텅 빈 채로 왔고, 또 텅 빈 채로 이 세상을 떠나려고 애쓴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단지 술에 취해 있다.

 

- 교사인 실바누스 Silvanus의 텍스트인 <가르침 Teachings>도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의식에 저항하도록 용기를 북돋운다.

너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잠에서 깨어라. 너를 어둠으로 채우는 망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라. ... 너는 왜 빛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둠을 추구하느냐? ... 지혜가 너를 부르고 있으나, 너는 어리석음을 원하는구나. ... 어리석은 사람은 ... 모든 욕망을 열망하는 길로 간다. 그는 삶의 욕망 속에서 헤엄치다가 침몰하였다. ... 그는 바람에 앞 뒤로 흔들거리는 배와 같고, 기수(騎手) 없는 고삐 풀린 말과 같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수가 필요하며, 이것이 ... 다른 무엇보다도 ... 너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

 

- <도마 복음서> 역시 자아 발견은 내적 혼란을 수반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찾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찾을 때까지 계속 찾도록 하자. 찾으면, 그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혼란에 빠지면, 그는 깜짝 놀라게 될 것이고, 모든 것들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면에서 발견되었던 '빛'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성의 빛'을 따르라고 공언했던 프로이트 Freud처럼, 대부분의 영지주의 자료들은 '육체의 등불은 마음'(<구세주와의 대화>에서 예수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구절)이라는 데 동의했다. 교사인 실바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의 인도자와 너희 교사를 데려 와라. 마음은 인도자이고, 이성은 교사이다. ... 너의 마음에 따라 살아라. ... 마음은 강하므로, 강해지라. ...  마음을 깨우치고 ... 네 안에 있는 등불을 밝혀라.

- 실바누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너 자신에게 노크하라. 그리고 똑바른 길을 가는 것처럼 네 자신에게로 걸어가라. 네가 그 길을 따라 걷는다면,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무엇인지 알도록 스스로 문을 열어라. ... 네가 스스로 무엇을 열 것이건 간에, 너는 열 것이다.

- <진리 복음서>도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자신의 것을 받고, 또 그것을 그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 이러한 방법으로 지식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안다.

- <진리 복음서> 역시 이것을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각 개개인은 '그 자신의 이름'을 받아야만 한다. 물론 그의 평상시의 이름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identity)을 말한다. '내적 지식의 아들들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권능을 얻는다. 영지주의 교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러니 마음으로부터 네가 완전한 낮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꺼지지 않는 빛이 네 안에 있게 된다. ... 왜냐하면 너는 앞으로 이끌려 내어진 이해(理解)이기 때문이다. 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 네 자신이 거부했던 다른 것들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말아라.

 

- 그래서 <도마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 (Kingdom of God)'가 특정한 장소인 것처럼 글자 뜻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는 "너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너에게 '보라,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면, 새들이 너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를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 '하느님 나라는 바다에 있다.'고 말하면 물고기들이 너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라."라고 말한다. 그 뜻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자아 발견의 상태라는 것이다. 

" ... 오히려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자신 안에 있고, 또 너희들 밖에 있다. 너희들이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들은 알려지게 될 것이고, 또한 너희들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들은 빈곤 속에서 사는 것이고 빈곤은 바로 너희들이다."

 

-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미래의 일로 잘못 생각하여 계속 질문했다.

제자들이 그에게  "언제 ...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벌써 왔으나,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대답하셨다. ... 제자들이 그에게 "언제 하느님 나라가 옵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기다린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라고 말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 퍼져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하느님 나라'는 변형된 의식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 한편 누가는 예수가 분명하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부 영지주의 교인들은, 인간의 해방은 역사상의 실제적인 사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기대했다. 비슷한 이유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다르며 또 그들보다 월등한 것으로 파악했던 정통파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가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를 자신들에게 약속된 왕이라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자료들은 예수가 선생님, 계시자(啓示), 영적인 스승의 역할을 취하면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을 자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서도 영지주의적 모델은 심리 치료적 모델에 가깝다. 두 모델 모두 지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단지 일시적인 수단으로써 일 뿐이다. 권위를 받아들이는 목적은 권위를 벗어나는 것을 배우는 데 있다. 성숙한 사람이 되면, 그는 더 이상 외적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에는 제자였던 사람이 그 자신을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인식하게 된다.

 

- 그러면 선생님 예수는 누구인가? <변자 도마서>에서는 그를 간단히 '진리의 지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마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제자들이 스스로 발견해야만 하는 경험을 확인해 주는 것을 거절했다. 그들이 예수께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하늘과 땅의 얼굴은 읽어내지만, 너희들 앞에 있는 사람은 알지 못했고,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실망한 제자들은 예수에게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말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 대신에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것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구나."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질문을 비판하였다. 

 

- <도마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가 온 곳으로 그들도 갈 수 있도록 그곳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가 답변을 거절하고 그 대신에 그들 자신 안에 숨겨진 자원들을 발견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똑같은 주제가 <구세주와의 대화>에도 있다. 예수가 선택된 세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마태가 그에게 '생명의 장소', 곧 그가 말하는 '순수한 빛’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는 "자신을 알게 된 [너희들] 각자는 그것을 보았다."고 대답한다.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예수는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 대신 제자들에게 자아 발견을 추구하도록 지적한다. 

 

- 예수가 비밀들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찾는 사람은 누구이며, 보여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 - 제자 - 또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마태가 예수에게 계속해서 질문하자, 예수는 자신이 답을 모르며 "너에게서 말고는 그 질문에 관해 들은 적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 따라서 자신을 알게 된 제자는 예수가 가르칠 수 없는 것까지도 깨닫게 된다. <진리의 참 증언>은 영지주의 교인들이 그 자신의 마음이 '진리의 아버지인' 것을 깨닫고 '그 [자신]의 마음의 제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의 침묵 속에서 그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을 혼자 힘으로 배운다. 결과적으로 그는 다른 어느 누구의 권위로부터도 그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그 자신이 모든 사람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내를 갖게 되고, 자신을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하며, 또한 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 실바누스 역시 '너의 마음'을 '인도하는 원리'로 간주한다. 자신의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상담자들 말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라. ... 그러나 [친구를] 얻게 되면, 너 자신을 그에게 맡기지 말아라. 너 자신을 하느님께만 아버지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맡겨라.

 

- '영지'를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영지주의 교인들은, 마침내 무엇보다도 사건들의 내적 중요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여기에서 또다시 정통파와 차이점을 보인다. 정통파는 인간의 운명이 '구원의 역사'인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선지자(先知者)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과 그의 실제적인 탄생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들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 모두는, 다소의 차이가 있더라도 역사적인 사람으로서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 있어 선지자들의 예언들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예언자들을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후렴을 계속 되풀이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황제에게 설득시키려 했던 유스티누스 역시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당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며, 사실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로서 지적하고 있다.   

 

- 그러나 <도마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선지자들의 예언들을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여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24명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서 말했고, 그들 모두 당신을 이야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너희들 눈앞에 살아 있는 존재는 무시하고, (단지) 죽은 자에 관해서만 말했다."라고 말씀하셨다. 

 

- 이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실제적인 사건들을 그들이 지각한 의미와 비교하여 이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영지주의와 심리 치료는 경험의 내적인 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언어의 비(非) 문자적인 중요성에 대한 매력을 같이 느끼고 있다. 

   

- 정신분석학자인 융 C.G. Jung은 발렌티누스의 창조 신화를 심리적 과정들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발렌티누스는 어떻게 모든 것들이 '깊은 곳', '심연' 속에서부터 - 정신 분석학적 용어로는 무의식으로부터 - 생겨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깊은 곳'에서부터 마음과 진리가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들로부터 '말(로고스)'과 '생명'이 나온다. 이것이 인류를 생기게 했던 말이었다. 융은 이것을 인간 의식의 근원에 대한 신비적인 이야기로 해석한다. 

- 정신분석학자는, 최초의 부부의 막내딸인 지혜가 어떻게 그녀가 사랑으로 해석했던 아버지를 알려는 열정에 사로 잡혔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이 신화의 계속되는 내용에서도 또한 중요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한계(The Limit)'라고 불리는 힘, '모든 것들을 지지하고 그것들을 보존하는 힘', 그녀를 정서적인 혼란에서 자유롭게 하였고, 그녀의 근원적인 곳으로 복귀시켰던 이 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알려고 하는 그녀의 시도는 그녀를 자멸로 이끌었을 것이다. 

- 발렌티누스의 추종자인 <빌립 복음서>의 저자는 경험적인 진리와 언어적 묘사와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이름 없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리는 세상에 있는 존재들에 이름을 부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는 상징들의 옷이 입혀져 있음에 틀림없다. 곧 "진리는 세상에 발가벗은 채로 오지 않고 형태들과 이미지들로서 왔다. 사람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이 영지주의 교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부활, 또는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적인 언어를 문자적인 언어로 잘못 이해하여, 이 모든 '일들'이 자신들에게는 외적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서는 각 단어가 구체적이고 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곧 사람이 "해가 되지 않고서 해를 보며, 하늘과 땅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보지만, 자신은 이것들 자체가 아니다." 

 

- 반면에 종교적인 언어는 내적 변형의 언어이다. 곧 신적인 실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보는 것이 된다."  

 

... 네가 영을 보았으면, 너는 영이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너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네가 [아버지]를 보았으면, [너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 네가 네 자신을 보면, 너는 네가 본 것이 [될 것이다.]

 

- '영지'를 얻은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영지주의가 정통파 기독교에 대한 저항 운동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지주의는 초기 가톨릭 교회의 조직체와 같은 종류의 것이 발전되는 것을 은연중에 반대하는 종교적 전망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교회의 조직적인 구조를 - 주교, 부제, 신경, 정경, 또는 의식 -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 이 종교적인 견해는 영지주의와 정통파를 구별 짓는 것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심리 치료와도 구별 짓고 있다. 왜냐하면 심리치료 전문가들의 대부분이, 실제적인 존재를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의 탓이라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프로이트를 따르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 전문가들은 영혼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우주의 비밀들을 발견하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나 많은 영지주의 교인들은 많은 예술가들처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라는 내용의 우주적인 진리들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내적인 자각을 추구한다. <변자 도마서>에 의하면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을 안 사람은 그와 동시에 모든 것들의 심원에 대한 지식을 이미 얻은 것이다."

 

- 인간 경험을 탐구하는 사람이면 동시에 신적 실재를 발견한다는 이 확신은, 영지주의를 종교적인 운동으로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히폴리투스는 시몬 마구스가 각각의 인간은 거처하는 곳(dwelling place)이며, "그리고 그 안에는 무한한 힘 ... 우주의 뿌리가 거처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무한한 힘이 하나는 실재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잠재적인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힘은 "실제적으로가 아니고 잠재적으로, 각 개개인들 속에 잠정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 어떻게 이 잠재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용된 영지주의자료들의 대부분은, 제자들에게 지식을 찾으라고 말하는 잠언(箴言, aphorism)들만을 싣고 있지 어떻게 찾으라는 것은 싣고 있지 않다. 이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분명 자각(자아 지식)의 첫 단계이다. 그래서 <도마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달라고 요청한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우리가 단식(斷食)하기를 바라십니까?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자선(慈善)을 베풀어야 합니까? 무엇을 먹어야 할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증오하는 것을 하지 말아라. ..." 

그의 모순된 답변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언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 말고 있는가? 자기 제자들의 일부가 영지주의 교인들의 가르침에 이끌려 철학을 등지자 영지주의 교인들을 공격했던 신(新) 플라톤 파 철학자 플로티누스 Plotinus는, 그러한 신비적인 대답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플로티누스는 영지주의 교인들의 가르침은 프로그램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곧 "그들은 오직 '하느님을 바라보라!'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아무에게도 '어디서' 또는 '어떻게'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몇몇의 자료들에는 영적인 훈련 방법들이 묘사되어 있다. 나그 함마디 문고 가운데 가장 긴 텍스트인 <조스트리아노 Zostrianos>는, 한 영적 스승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지 말함으로써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있다. 조스트리아노는 첫째 자신으로부터 육체적 욕망들을, 아마도 금욕적인 수행 방법으로 없애야만 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명상으로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마음의 혼란'을 줄여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나 자신을 순수하게 만든 뒤에, 나는 완전한 아이를 보았다."고 - 신적 존재의 환상 - 말한다. 그 뒤에 그는 "나는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이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나의 영혼이 쉴 만한 곳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라고 말한다. 

 

- 그러나 그러고 나서 그는 "깊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영적 진보에 용기를 잃어 사나운 동물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반쯤 예상하면서 사막으로 갔다. 그곳에서 조스트리아노는 처음에 '영원한 빛에 속하는 지식의 전달자(傳達者)'의 환상을 보았고, 다른 많은 환상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계속 갔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 경험들을 설명한다. "너는 왜 주저하고 있으냐? 네가 찾아지고 있을 때 찾아라. 네가 이끌릴 때 들어라. ... 빛을 바라보라. 어둠을 피하라. 방황하여 파멸로 이끌리지 ..."

  

- 나는 본다! 나는 묘사할 수 없는 심원함을 본다. 오, 나의 아들아, 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 우주를 어떻게 [묘사하여야 할까]? 나는 [마음]이며 그리고 나는 영혼을 [움직이는] 다른 마음을 본다! 나는 순수한 망각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분을 본다. 당신은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본다! 나는 말하고 싶다! 두려움이 나를 억제한다. 나는 모든 힘들의 위에 있는, 시작이 없는 힘의 시작을 알았다. ... 오 나의 아들아, 나는 내가 마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보았다! 말로는 이것을 나타낼 수 없다. 오 나의 아들아, 제8천의 모든 것,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영혼들, 그리고 천사들이 침묵 속에서 찬송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인 나는 이해한다.

 

- 이를 보면서 제자 자신은 황홀감으로 가득 찬다. "오 나의 아버지, 나는 당신이 미소 짓는 것을 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그리고 우주도 즐거워합니다." 그 자신과 같은 그의 스승이 신성을 부여받는 것을 보고, 제자는 그와 함께 간청한다. "나의 영혼이 위대한 신적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은 우주의 스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요." 스승은 그에게 침묵 속에서 노래하고, 또 "네가 원하는 것을 침묵 속에서 요구하라." 

 

- 그가 찬양하는 것을 끝마쳤을 때 그는 소리쳤다.

 

"아버지 트리스메기스투스 Trismegistus!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은 환상을 봅니다. 나는 제8천과 그 안에 있는 영혼들, 그리고 제9천과 그 힘들에게 찬송가를 부르는 천사들을 봅니다. ... 나는 우주의 끝과, 시작의 시작에게, 인간이 추구하는 대상인 영원 불멸한 발견에 기도합니다. 나는 당신 영의 도구입니다. 마음은 당신의 활입니다. 당신의 권고는 나를 잡아당깁니다. 나는 나 자신을 봅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힘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 <이야기>는 스승이 제자에게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진보하여, 영원불멸 단독자(單獨者)'를 알 수 있게 되지만,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려고 지식을 얻으려 하는 어떠한 시도도 '네 안에 있는 무위(無爲, effortlessness)'를 방해한다. 대신에 입문자들은 '최초의 계시에 의해 갖추어지는 능력에 맞추어' 하느님에 대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러면 영적 진보에 필수적인 자신의 경험과 지식은 '부정적인' 형태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결국 영지에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 힘들은 그에게 "더 이상 찾는 [것을] 그만두고 가라. ...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라고 가르쳤다. 알로제네스는 '훌륭하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이것을 썼다고 말한다. 기도문의 여러 부분들, 성가들, 가르침을 포함하여 저자의 명상에의 몰입으로 더 강조된 입문자의 경험을 자세하게 설명한 이 텍스트는, 자신 안에 있는 신적 힘에 대한 지식인 자아 지식(자각)을 얻기 위한 입문의 실제적인 방법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그러나 영적인 훈련에 관한 영지주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원칙적으로 써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나 - 심지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씌어진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각 지원자들이 가르침을 받기에 적절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오직 말로만 가르치면서 그들의 비밀 가르침을 보존하여 왔다. 이러한 교육은 각 교사들로 하여금 각 지원자들에게 고도로 선별적이고, 개인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데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였다. 그 대신 각 지원자들에게는 몇 년씩 걸려도 정력과 시간을 배우는 데 전적으로 바칠 것이 요구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 파의 입문과 엘리우시스 비전 파(Eleusinian mysteries)의 입문을 빈정대며 비교하였다. 

먼저 그들 집단에 입문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긴 입문 기간을 요구하는데, 그들의 숙련된 학생이 되기 위해 5년 간 교육을 받을 정도이며, 이렇게 해서 전체 교육 기간을 길게 늘려 그들의 견해를 가르치고, 그리고 분명히 그들이 기간을 길게 늘림으로써 만들어낸 갈망에 비례하여 그들의 신비들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침묵의 의무가 따른다.

  
- 높은 수준의 불교(佛敎)의 가르침처럼, 이러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적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뿐이다. 비록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영지주의 가르침의 주요 주제들이,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여 가톨릭 교리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지만, 영지주의의 종교적 시각과 방법들은 대중 종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영지주의는, 신약 성서의 정경에 기초하여 통일된 종교적 시각을 나타냈고, 입문자들에게 신앙의 가장 간단한 핵심만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신경(信經)을 제시하였으며, 세례와 성체성사 같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의식을 거행했던 가톨릭 교회의 매우 효과적인 조직적 체계와는 필적할 수 없었다. 

 

- 교리와 의식, 그리고 조직의 기본적으로 똑같은 형태가 오늘날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에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없이 기독교 신앙이 살아남아서, 20세기 동안에 걸쳐 전 세계에 있는 수백만의 신자들을 끌어 모은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도 없다. 종교가 관념들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지만, 관념들만으로는 종교를 강력하게 만들 수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갖게 하고, 같은 연합체로 단결시키는 데 사회적, 정치적인 구조들도 관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신경에 담겨진 종교적 관념들이 ('전능한 아버지'이신 '한 분의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삼일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의 교회'에 대한 신앙까지) 정통파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일치한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 더군다나 역사가 자신들이 보통 지식인들이므로, 정통파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을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주요 동기로 간주되는 관념들이 (육체에서 이탈한 어떤 상태로)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 같은 '관념들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해석하였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그래서 매우 훌륭한 지성인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추상적인 사고를 즐겼으며, '이단자들과 철학자들이' 똑같은 질문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만드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왔는가? 악(惡)은 어디에서, 그리고 왜 왔는가? 테르툴리아누스는 (적어도 교회와 격렬하게 결별하기 전에) 가톨릭 교회가 이러한 질문들에 '진정한' 답변을 하였기 때문에 우세했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대다수의 영지주의와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모든 종파의 종교적인 사람들처럼 주로 종교적 경험의 표현이나 상징과 같은 생각들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한 경험은 모든 종교적 관념들의 뿌리와 검증(檢證)의 기반이 된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남성이었다는 생각을 달리 경험하기가 쉽다.) 영지주의와 정통파는 분명히 매우 다른 종류의 인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고 생각한다. 

 

-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악의 기원에 관해 알려고 했을 때, 그들은 우리들이 악이라는 용어를 주로 도덕적인 견지에서 해석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어인 카키아(Kakia)는(영어에서 '병(病)'처럼) 원래 '나쁜 것', 곧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신체적 병, 불행, 괴로움, 고통 같은 모든 종류의 재해를 의미했다.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이 카키아(Kakia)의 근원에 관해 추구했었을 때는 특히 두려움, 혼란, 슬픔 같은 정서적인 해악(害惡, harm)에 관해 언급한 것이었다. 

 

- <진리 복음서>에 따르면, 자기 발견의 과정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거나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고뇌와 공포'의 인간 상태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기원에 관한 발렌티누스의 신화는 죽음과 파괴에 대한 예견(豫見)을 영지주의 교인들의 탐구 과정에서의 경험적인 시작으로 묘사한다.  - "그들은 모든 실체가 공포, 아픔, 그리고 혼란(aporia, 글자 뜻 글대로는 '길이 없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의 세 가지 경험들, [또는 고통들]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 

- 특히 죽음과 소멸의 두려움 같은 경험들이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 안에 있기 때문에, 영지주의 교인들은 육체를 인간이 피할 길이 없이 고통으로 밀어 넣는 훼방꾼 같이 여기어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우주에 만연되어 있는 맹목적인 힘들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육체를 구성하는 것이 이 힘들이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해야 해방될 수 있을까? 영지주의 교인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주 안에 있는 인간의 자리(place)와 운명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 유일한 대답은 자신 안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으로 확신하면서, 영지주의 교인들은 강렬하게 개인적인 내면의 여행을 했다. 그 자신의 본성, 곧 인간의 본성 자체가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근본적인 실재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본질적인 자아 안에 있는 신성을 알게 된 영지주의 교인들은, 외적인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적 존재와 같아진 자신을 축복하며 기뻐 웃었다. 

진리의 복음은 진리의 아버지로부터 그를 아는 은총을 받았던 사람들을 위한 기쁨이다. ...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아버지, 완전한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이가 그 자신 안에서 그들을 발견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 안에서 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 그 과정에서 영지주의 교인들은 그들의 반대자들은 이들이 지나치게 과장하였다고 말하였다. - 인간 본성의 위대함을 축복했다. 태초에는 인류자체가 '모든 것 위의 하느님'이 되도록 밝혀져 있었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별들을 포함하는 비인간의 지적 존재들이 영원불멸의 영혼을 공유한다 - 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설명에 동의하는 플로티누스 Plotinus는, 영지주의 교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는 매우 좋게 생각하면서도 우주에 대해서는 매우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 영국의 학자 아더 달비 노크 Arthur Darby Nock가 말했던 것처럼, 영지주의 교인들은 비록 '사회에 대해 혐오를 나타내지 않으나, 내적 존재에 관해 집중하려는 열망으로' 기본적으로 고독한 길을 추구했다. <도마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이러한 고독을 찬양한다. "고독한 자들과 선택된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거기로부터 왔으니, 거기로 돌아갈 것이다." 

- 이러한 고독은, 직접적인 경험이 제일이라는 영지주의 교인들의 주장에서 말미암는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느 길로 가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할 수 없다. 영지주의 교인들은 그 자신의 길을 발견할 때까지, 잠정적인 추정으로서밖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지주의 교사인 헤라클레온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구세주를 믿게 되지만, '그들이 성숙해지면'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증언에 불과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에 '진리 자체'와 그들 자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 간접적인 증언을 - 사도들의 증언과 성서까지도 - 따르는 사람이면, 제자들이 예수에게 예언자들의 말을 인용했을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너희들 눈앞에 살아 있는 존재는 무시하고 단지 죽은 자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고 하신 꾸지람을 누구나 받을 것이다. 영지주의 교인들이 정말로 '영지'를 얻었다는 증거로 높이 평가했던 시, 환상, 이야기, 신화, 찬송 등은 오직 직접적인 경험을 기초로 하여서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이러한 성취와 비교하여 성취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멀어져 갔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족생활, 성적(性的) 관계, 사업, 정치, 평범한 직업, 또는 여가 생활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면, 영지주의 교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허상이라고 거부했다.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성(性)과 돈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거부했다. 성적 관계와 재물을 거부하는 사람이면 "그가 [사람의 아들]이 생긴 곳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발렌티누스 파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평범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독실한 불교도들처럼 이 모든 것들을 '영지'에 이르는 고독하고, 내적인 길의 부차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반면에 정통파 기독교는 다른 종류의 경험을 분명히 언급했다.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 영지주의 교인들보다 훨씬 더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두었다. 영지주의 교인들이, 악에 대한 인간의 최초 경험이 내적인 정서적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면, 정통파는 이것에 반대하였다. 

 

- 영지주의 교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 자체'인 자연의 질서를 거역함으로써 악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정통파는 악(kakia)을 주로 다른 사람에 가하는 폭력의 견지(따라서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견해)에서 해석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금한 모세의 율법 - 살인, 도둑질, 간통을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폭력 분노, 욕망, 증오 - 을 금하는 예수의 금지 사항의 견지에서 개정하였다. 

 

- 인간의 고통이 인간의 잘못에서 비롯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자연 질서를 긍정하였다. 곧 지구의 평원, 사막, 바다, 산, 별, 그리고 나무들은 인간을 위한 적당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정통파는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들을 '선'한 창조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하였다. 그들은 성(적어도 결혼), 출산, 그리고 인간의 진보를 믿고 긍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통파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부터 영혼들을 이끌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충만함'이 인간적인 경험 - 육체적 경험 - 을 성사화(聖事化)하려고 내려온 사람으로 보았다.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인간의 어떤 상태도 경멸하거나 피하지 않으셨고, 그가 인류를 위해 지정한 법을 자신을 위해 제쳐 놓지도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세대를 경험하면서, 아기를 위해 아기가 됨으로써 아기들의 죄를 씻어주셨고,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가 되어 이 나이의 어린이들의 죄를 씻어 주셨고, ... 젊은이를 위해 젊은이가 그리고 ... 노인들을 위해노인이 되셨기 때문에 ... 또한 같은 시대 노인들의 죄를 씻어 주셨고 그리고는 마침내 죽음 자체를 맞이하게 되셨다. ... 

- 자기 이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레네우스는, 예수가 30대에 죽었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전승을 수정했다. 예수가 노인이 됨으로써 노인들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레네우스는 예수가 죽었을 때는 50살이 넘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일상생활을 신성하게 만들었던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정통파 교회는 점차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겪어야 하는 주요한 일들을 인가(認可)하는 의식들을 발전시켰다. 곧 성체성사에서는 음식을, 결혼에서는 성을, 세례에서는 아이의 탄생을, 기름 부음에서는 병을, 그리고 장례식에서는 죽음을 서로 나누었다. 이러한 일들이 행해졌던 사회적인 모임은 공동체에서나, 가정에서나, 그리고 사회생활에서도, 모두 정통파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윤리적 책임이었다

 

- 교인들은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 사업상 속이고, 배우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이나 노예들을 억압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죄를 짓지 말라는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경고를 들었다. 심지어 이교도인 비난자들까지도,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죽은 사람을 묻어줌으로써, 빈민(貧民)들의 두 가지 주요한 불안을 완화해 주어 그들의 흥미를 끌었다는 것을 알았다. 

 

- 영지주의 교인들이 그 자신을 '천 명 가운데 한 명, 만 명 가운데 두 명'으로 보는 반면, 정통파 교인들은 자신을 평범한 인간 가족 가운데 한 사람, 그리고 보편적인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느꼈다. 헬무트 쾨스터 교수에 의하면, "정통파의 시금석(試金石)은 클럽이나, 학교, 교파, 또는 관련된 종교적인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교회'를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 3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었던 오리게네스 Origen는 그 자신이 이단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그가 하느님이 지식인이나 영적 엘리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는 정통파의 견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간단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레네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해가 하나이며, 전 세계에 걸쳐서 똑같은 것처럼 진리의 가르침은 모든 곳을 비추며,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친다. ...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설득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이것과 서로 다른 교리들은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 기독교의 전승 - 예수의 말씀들(어느 말씀들이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지만) - 에서 가장 초기의 것이라고 알려진 자료들을 살펴보면,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정통파의 형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중요성에 대해 아주 다양한 해석들을 생기게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독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신약 성서의 누가복음에조차도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이 실려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 예수는 그를 따랐던 사람들에게 그와 함께 하려면 모든 것을 - 가족, 가정, 자녀, 직업, 재산 - 포기해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모범으로서 자신의 가족을 거부한 집 없는 사람이었고, 결혼과 가정생활을 피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생명도 포함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주장했던 신비한 방랑자였다. 마가는 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는 감추고, 이 가르침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극소수에게만 가르쳤다고 말한다. 


- 그러나 신약 성서의 복음서들 역시 서로 매우 달리 해석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예수는 결혼을 축복하였고,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그를 둘러싼 어린이들을 좋아하였고, 열병(熱病), 중풍(中風), 실명(失明), 그리고 정신적인 질병 같은 가장 흔한 형태의 고통에 연민의 정을 느꼈으며,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음을 알았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는 신약 성서의 예수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상이한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아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대하고 영지주의 교인들이 선호(選好)했던 모습에 찬성했다. 

 

당신이 보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내가 보는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 당신의 예수는 모든 '인류'의 친구이지만 나의 예수는 눈먼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합니다. 당신의 예수는 나의 예수가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천국의 문은 나의 지옥의 문입니다. 당신과 나는 성서를 밤낮으로 읽지만 내가 희다고 읽는 것을 당신은 검다고 읽습니다. ... 이 잘못된 그리스도를 보며, 분노와 열정으로 나는 나의 목소리가 모든 나라에 들리도록 만들었습니다.  - <영원한 복음 The Everlasting Gospel> 

- 기독교를 혐오했던 니체 Nietzsch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썼다. 도스토예프스키 Dostovesky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을 교회에서 거부당한 그리스도, 물질적인 풍요로움, 사회적인 인정, 종교적인 확신 보다 자기 양심의 진리를 선택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 곧 당신을 자유롭게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원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대한 세트의 대속론 제2서>의 작가처럼, 이반은 정통파 교회가 사람들을 "그들의 자유의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유혹한다고 비난했다.

- 우리는 기독교가 형성되는 데 있어 자아 발견의 고독한 길을 택하였던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들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승인과 일상생활에서의 윤리적인 방향을 부여해 주었던 조직의 틀 사이에서 어떻게 갈등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조직의 모델을 자체 목적에 맞게 개조하면서, 4세기에 황제의 지지를 얻은 정통파의 기독교는 점차적으로 안정되고 지속적으로 발달하였다.

- 영지주의 기독교는 노크 Nock가 "보통 사람의 요구와 열망에 무의식적으로 부합되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말하는 정통파의 폭넓은 대중적 호소력이라는 관점이나, 또는 효과적인 조직력의 관점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정통파의 신앙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정통파 기독교의 생존을 보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의 성립 과정은 다른 모든 선택을 배제했다. 기독교 정통파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던 다른 대안들을 제시했던 영지주의는 기독교 전통이 빈약한 변두리로 밀려났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관심사들은, 땅속에서 흐르는 강처럼 억압된 상태로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러한 경향은 중세기(中世期)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단의 형태로 표면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 다음 종교 개혁과 함께 기독교 전통은 다시 새롭고 다양한 형태들을 드러냈다. 

 

- 이단자로 비난받았던 야곱 뵈메 Jacob Boehme와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죠지 폭스 George Fox 같은 급진적인 환상가들(visionaries)은, 어떤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영지주의의 전승을 몰랐던 것이 확실한데도 종교적 경험에 대해서 분명히 영지주의와 유사한 해석을 말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과 함께 나타난 대부분의 종교 운동들은 - 침례 교회, 오순절 교회, 감리교회, 성공회, 조합 교회, 장로 교회, 퀘이커 교회 - 2세기에 세워진 정통파의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 신약 성서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겼고, 형태와 해석은 달리 하였을지라도 대부분 정통파의 교리를 받아들 ...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들이 이 과정에 대해 우리에게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지금, 우리는 발렌티누스와 헤라클레온에서부터 블레이크, 렘브란트 Rembrandt,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Tolstoi,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일부의 창조적인 사람들이 왜 정통파의 칼날 위에 놓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모습 - 탄생,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 - 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변함없이 기독교적인 상징(象徵)들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파의 조직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에는 그들의 경험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성서, 사도들, 그리고 교회의 권위에만 전적으로 - 적어도 권위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있다면 무엇이 권위에 정통성을 부여하였는지 묻지 않고는 - 의존할 수가 없다. 

 

- 모든 오래된 질문들 -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서 날카롭게 논쟁되었던 근본적인 질문들 - 이 다시 전개되고 있다.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성들이 사제와 주교직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가? 그리스도는 누구였으며, 그는 어떻게 신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기독교와 다른 세계 종교들의 유사성은 무엇인가? 

- 내가 영지주의에 대한 토의에 이렇게 매우 열중했던 것은, 혹시 보통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나, 영지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옹호하려는 뜻이 아니며, 더욱이 정통파 기독교에 대항해 '영지주의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역사학자로서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야인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는 데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들이 새로운 면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발견물들은 커다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고 있듯이 역사학자의 임무는 어느 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를 탐구하는 것이며, 이 경우에는 기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시도이다.  

  

 

 

 
성서밖의 예수(믿는다는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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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일레인 페이젤
출판
정신세계사
출판일
198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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