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캐롤라인 미스] 영혼을 위한 7단계 치유의 힘

일루젼 2023. 2. 16. 04:20
728x90
반응형

저자 : 캐롤라인 미스 / 정현숙

원제 : Anatomy of the Spirit 
출판 : 드림엔
출간 : 2020.08.15 


다시금 거의 일주일간 일에 매여 지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활기차게 보냈고, 심지어 즐겁기도 했다.

올해 먹을 초콜릿은 이번 주에 다 먹은 것 같다.

 

책 자체는 지난 주말에 다 읽었는데 차분히 앉아 있을 시간을 내지 못해 지금에서야 리뷰를 쓴다. <윤회>의 에드가 케이시를 읽고 바로 연이어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타인의 상태에 관한 에너지 리딩, 직관 리딩에 관한 내용이 이어져 즐겁게 읽었다. 저자 캐롤라인 미스는 인간의 '상태'란 그의 영혼에 축적된 '모든 것의 표현'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개인이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 생각, 선택 등이 종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의 건강 상태라는 것이다. 또 때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고 한다. 

 

저자는 그것을 7차크라와 10세피라, 그리고 7성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생명의 나무를 양 기둥을 짝지운 7층위로 접근해서 세 개념을 모두 이어서 풀어가는데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층위의 개념 자체는 개인적으로 람타의 책을 읽을 때 생각했던 것과 합치되는 면이 있어 인상 깊게 살펴보았다.   

  

캐롤라인에 따르면 누구나 직관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계시', '음성' 같은 형태는 아닌 경우가 많으며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군가는 꿈이나 주변에서 우연히 접하는 메시지에서 안내를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다루기 힘든 내면의 충동으로, 또 누군가는 질병이나 벗어나기 힘든 고통으로 이끌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코 형벌이나 단죄가 아니며, 그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인도라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런 내맡김과 신뢰가 자기 치유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싶었던 포인트들이 상당히 다양한 것에 비해 대부분이 개인들의 사례를 통해 제시되어 있어 몇 문장으로 모두 정리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책은 개념적인 접근보다,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점이나 어려움을 영성적인 시각에서 접근해보고 싶으신 분들께 더 맞을 것 같다. 혹은 대체의학이나 영성에 관심은 생겼으나 조금 가볍게 읽어보고 싶은 책을 찾고 계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던져볼 다양한 질문들을 접한 것에 의미를 두고 읽었다. 또 욥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읽혔는데, 이전에는 그것이 순종과 믿음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공동창조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삶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 상황을 '원하는 대로' 그려내 바꿀 힘 또한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욥은 공동창조가 아닌 순응의 길을 선택했다고 느껴진다. 

 

계속 같은 지점이다. 

지금은 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끝. 

 


   

 

워크숍을 시작할 때마다 참가자들에게 하는 말을 
지금 여러분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가슴으로 정확하고 진실하게 느끼는 
'바로 그것', 
그것만을 행하라!

 

 

- 여러분은 기독교의 성사, 카발라(유대교의 신비주의 -옮긴이), 차크라(우리 몸에 존재하는 에너지 관리 체계 -옮긴이)에 담긴 형이상학적 의미를 통합한 이 힘의 도움을 받아 영원한 탈바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아는 것, 지식은 힘이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지식이야말로 개인적인 힘의 비밀을 여는 열쇠다. 

 

- 세계 4대 종교에 담긴 우주적 진실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는 신성이 있는데, 이 신성은 일곱 단계의 힘으로 생물학적 체계에 갇혀 있다. 이 일곱 단계의 힘이 발현되면 인간은 개인의 힘에서 벗어나 더욱 세련되고 초월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 노먼 실리 C. Norman Shealy 미국통합의학협회 창립자 겸 이사장심리학 연구 및 임상 교수포레스트 전문심리연구소

 

 

- 마지막으로, 나의 작업과, 특히 이 책을 지지해 준 여러분 모두를 포옹한다. 이 책 <영혼을 위한 7단계 치유의 힘 Anatomy of the Spirit>의 메시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봉사할 것이다. 오늘 내가 이 책에 덧붙이고 싶은 메시지는 여러분 영혼의 해부를 위한 것이다. 성사, 생명의 나무, 차크라를 연구할 때, 그 영향을 단지 여러분의 몸이나 정신에만 국한하지 마라. 스스로를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선택- 사소한 하나의 선택일지라도, 그 선택은 창조 그 자체와의 계약이라는 것을 이해하라.

 

- 그러나 나는 새로 드러난 나의 인식 능력에 현혹되었으며,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건강을 계속 진단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내게 떠오른 인상은 주로 사람들이 당면한 건강문제와 여기에 관련된 정서적·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사람들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도 분명히 보였다.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역사를 말해주는 온갖 정보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에너지는 그 사람의 영혼이 확장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지식, 이를테면 우리의 영혼은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우리의 사고와 정서를 표현하고, 나아가 가장 구체적인 세상사에서부터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사실 따위를 하나하나 깨닫기 시작했다. 얼마나 덕을 베풀며 살았는지에 따라 사후에 우리의 영혼이 위로 뜨거나 아래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배운 적이 있지만, 내게는 이제 우리의 영혼이 그 이상이었다. 영혼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끼어든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인 의식의 힘이다.

 

- 이 경험에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우주의 가장 친밀하고도 궁극적인 '계획'에 직면하여, 절반은 두려움으로, 절반은 겸허함으로, 제3자의 처지에서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늘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인간의 단순하고 합리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리 신성한 존재라 할지라도 도대체 어떤 시스템이 작동해서 모든 인간의 욕구를 잊지 않고 챙기다가 금전적인 도움보다 치유를 바라는 기도에 우선권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삶의 모든 순간이 크나큰 가치를 지니는 이 신성한 장관에 나는 아직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어떤 극적인 첫 번째 사건을 계기로 직관적인 능력이 내 삶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 능력은 나의 내면에서 쉽고도 자연스럽게 깨어났다. 성인이 되었을 때, 대다수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본능에 계속 반응하면서 늘 직관적으로 긴장해 있었다. 여러분 역시 본능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를 평가하지만, 여러분의 평가는 이미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이전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사람에 대한 판단이다. 이와는 달리, 내 직관의 놀라운 점은 이전에 전혀 연관되지 않은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나는 사전접촉을 싫어한다. 그런 지식이 있으면 내 직관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쓰면 쓸수록 직관은 점점 더 정확해졌다. 늘 약간의 신비함이 남긴 하지만, 이제 직관은 내게 거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어느 정도까지는 직관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지만, 사실 나는 내가 그런 능력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인생이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았을 때 느낀 깊은 좌절감과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호기심이 결합한 나머지 직관이 극단적으로 계발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의학적 직관이 단순히 내가 뭘 잘못 먹었기 때문에 계발되었을 가능성도 물론 반반이다. 신이 역사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게 되었다.

 

-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을 더 깊이 연구할수록, 우리의 몸이나 삶에서 '닥치는 대로' 무의미하게 창조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정서적·영적 스트레스와 특정한 질병의 연관성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물질의 핵인 인간 에너지 시스템의 해부학, 그러니까 우리 영혼의 해부학 ... 

 

- 이 책에서 나는 심오하고 유서 깊은 고대의 몇 가지 영적인 전통, 이를테면 힌두교의 차크라, 기독교의 성사, 카발라의 생명의 나무 등이 육체와 영혼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해석한 새롭고 현대적인 시각을 원용할 것이다. 이슬람의 풍부한 가르침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는데, 그것은 결코 이슬람의 진리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유대-기독교나 힌두교,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살아보았으나 이슬람의 전통 속에서는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슬람의 지혜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진리를 통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볼 수 있도록 배우면서, 여러분은 직관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자기 영혼을 더욱 잘 이해하고 이끌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 "그는 어떻게 자기가 죽을 걸 알죠? 병이 들었나요?"
"아, 그거! 그가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갔지. 병을 고치는 사람이 그의 에너지를 보았는데, 바로 그 에너지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말해준 거야."

"병을 고치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미래를 다 알지요?"

라첼은 내 '무식'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라첼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을 모를 수 있지? 자기 영혼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기 영혼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어?"

 

- 그녀는 덧붙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 영혼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가지. 오래전에 병을 고치는 사람이 내게 말했어. 걸음을 제대로 걷지 않으면 한쪽 다리가 곧 부러질 거요. 그 말이 몸뚱이에 붙은 다리를 뜻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어. 내가 다른 여자가 있는 남자를 원했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거야,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안 봤어. 더는 그 사람을 볼 필요가 없었던 거라고나 할까. 물론 사랑했으니까 힘들긴 했어. 그렇지만 정직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내 영혼이 아픈 걸 어떻게 하나? 한동안 여길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땐 똑바로 걸을 수 있었지.” 

 

- 라첼은 반은 러시아인이고 반은 아타바스카 인디언인데, 알래스카가 미국땅이 되기 훨씬 전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했다. 자신의 배경과 아타바스카 인디언의 영적인 전통에 대한 라첼의 짧은 설명이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벽에 걸린 담요를 좀 보게나. 그 담요는 아주 특별해. 아타바스카 문화에서는 담요 만드는 사람이나 노래 만드는 사람,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일을 하는 게 대단한 영광이야. 누가 노래를 부르려면 그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노래에는 만든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거든. 만약 자네가 담요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담요를 다 만들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해. 그때까지는 담요를 새로 만들지 못한다네. 만약 자네가 죽을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라첼은 이 대목에서 '죽을 필요'라고 말했다), 자네를 대신해서 그 일을 마치는 데 동의한 누군가와 의식을 치러야 하지. 죽기 전에 자기 일을 미처 끝내지 않은 상태로 남겨둘 수는 없으니까. 그건 자기 영혼의 한 부분을 뒤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야."

 

- 그해 가을 알래스카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영혼은 함께 오지 못했다. 그 둘을 다시 결합시키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라첼을 만나기 전에는 영혼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행하고 만나는 모든 사건과 사람 속에 우리 영혼을 그려 넣는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삶의 선택이 내 영혼을 표현하고 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몸과 마음의 치유에 대한 라첼의 이야기는 우리가 상징적 통찰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때는 몰랐지만, 라첼과 함께 보낸 그 오후야말로 내가 의학적 직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발단이었다. 

 

-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끝내고 노먼 박사와 함께 있던 중, 나는 원격으로 사람을 진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사과 하나를 깎고 나서 내게 물었다. "얼마나 잘 보시오?" 별로 확신은 없다고 하자 그가 다시 물었다. "뇌종양을 알아볼 수 있겠소? 어떤 사람의 몸속에 생기고 있는 질병을 볼 수 있소? 그냥 저 사람은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필요 없소. 그 정도는 나도 볼 수 있으니까요. 엑스레이 찍듯이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오." 나는 아직 초심자라서 정확도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전화하겠다며, 환자가 생기면 내 도움을 받겠다고 했다.

 

- 이 일을 시작으로 나는 노먼 실리 박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내 평가에 대한 박사의 무덤덤한 반응이야말로 사실상 굉장한 '축복'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당시에 만일 박사가 나의 '기술'을 꾸준히 확인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나는 박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무진 애썼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내 진단의 정확도는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사의 초연한 태도 덕에 나는 환자를 분석할 때 객관적이고 명료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저널리즘 교수에게 배운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것처럼,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초연한 태도가 중요하다. 직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가 자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뷰자 주 :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를 통해 의심이나 불안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본다.) 

 

- 이듬해, 노먼 박사는 내가 해부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환자를 평가하기 위해 몇 번 더 전화를 해왔는데, 환자들을 겪으면서 내 기법은 점점 더 정확해졌다. 신체기관의 애매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대신, 특정 질병의 정확한 파동과 위치를 금방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질병과 신체기관은 고유한 '주파수' 혹은 진동 양상을 갖고 있었다.

 

- 어떤 사람들은 피터의 사례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치유에 도움을 준 신에게 특별히 은총을 입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은총이 없이는 결코 좋아질 수 없었으리라는 뜻이다. 피터의 사례가 분명히 하나의 사례인데도 아직도, "무엇이 기적을 일으켰을까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세포 조직에는 우리의 태도와 신앙 체계, 지극히 정교한 에너지 주파수 또는 '은총'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진동 패턴이 있는데, 우리는 부정적인 집착으로부터 스스로의 영혼을 되찾아와서 그와 같은 '은총'을 활성화할 수 있다. 

- <기적 수업 A course in Miracles>이라는 책에는 "기적은 당연한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피터의 치유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에너지를 회복한 것이다. 예컨대, 만약 여러분이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고 하루에 7킬로미터씩을 달린다고 해도, 인간관계가 뒤틀려 있거나 직업을 혐오하거나 부모와 매일 싸운다면, 질병에 걸리거나 혹은 질병에서 회복되는 기운을 방해하는 행동 양상 때문에 에너지 또는 '힘'을 잃게 된다. 반면에 만약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며 부정적인 믿음에서 에너지를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양이 사료를 먹고 살아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이어트나 운동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조건이 다 완벽해도 위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있다면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또 영적인 의식을 갖는 일에 매달린다고 해서 건강이 '보장된다'는 뜻도 아니다. 여러분이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육체적·영적으로 고양된다면, 자기 인생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어떤 질병에 걸렸을 때 그 치유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 제1부 2장에서는 세 가지 영적인 전통을 종합하여 이를 바탕으로 인간 에너지 체계의 새로운 모델을 소개했다(이 모델은 분명히 '정통적인' 의학을 보완해 줄 것이다). 세 가지 전통이란, 차크라에 대한 힌두의 가르침, 기독교의 7대 성사가 갖는 상징적 의미, 유대 신비주의의 가르침이며 카발라의 주된 텍스트인 <조하르 Zohar>(14세기경에 성립된 유대 신비주의 경전옮긴이)에 적힌 열 가지 세피라 sefira(또는 생명의 나무)의 신비적인 해석을 말한다. 일곱 차크라, 기독교의 7대 성사, 생명의 나무는 모두 인간발달의 일곱 단계 혹은 보편적 영성의 길 혹은 조지프 캠벨이 말한 영웅의 여행에서 거치는 일곱 가지 핵심 단계를 상징한다.  

 

- ... 고통에서 도망치는 삶을 보호하거나 격려해주지 않는다. 무수한 영적 가르침은 모두, 영적 교훈인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도록 권한다. 직관적인 능력을 개발하면 우리는 본래 우리의 경험에 내재한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직관을 계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식적인 방법이란 없다. 명상 혹은 어떤 재능이나 운동을 통해서 계발하는 사람도 있다. 직관의 능력은 영적 생활양식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직관의 능력은 생존 기술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내성적이거나 명상적인 태도를 유지하면 직관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객관성은 자신이 받은 인상을 해석해서 상징적인 영성의 맥락으로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나는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의 차이점을 구별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배웠다. 정확한 직관의 척도는 얼마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느냐에 달렸다. 명확한 느낌에는 그와 관련된 감정 에너지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느낌에 감정이 개입됐다고 느껴지면, 그 느낌은 오염된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읽히는 사람으로서는 '읽어주는 사람'이 받은 인상에서 어느 정도 감정적인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 내게는 느낌이 귀로 들리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미세한 전자의 흐름을 함유한 빠른 정신적 이미지와 같다. 어떤 사람의 몸을 읽을 때, 나는 에너지 센터에 초점을 맞추고 이미지가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약 5초 후에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계속 펼쳐진다. 그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 시간이 걸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10분도 안 걸린다. 때로는 잘 읽히지도 않고 도울 수도 없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지는 추측만 할 뿐이다.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느낀 적도 두어 번 있었는데, 자기 결혼이 왜 실패했는지를 묻는 것처럼, 그때마다 내가 말해줄 수 없는 지극히 특수한 종류의 대답을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너무 지쳤거나 마음속에 개인적인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을 때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을 읽으려면, 우선 그 밑에 흐르는 원리부터 공부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느 정도 치료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 책은 여러분이 자신의 직관적인 능력을 탐구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인 개념과 일련의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려면, 육감의 반응을 믿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 첫 번째 원칙: 자기가 살아온 역사가 바로 자신의 몸이다. 에너지 의학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인간관계가 각 장과, 행, 구절에 들어 있다. 삶이 펼쳐지면서, 우리 몸의 건강은 강함과 약함, 희망과 절망을 실어 나르는 살아 숨 쉬는 전기적 진술이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우리 몸의 생물학적 시스템 안을 여행한다. 어떤 생각은 몸 전체에 반응을 일으키는 깊이 박힌 탄환과도 같다.

 

- 명확한 직관을 위해서는 자신의 인상을 존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인상을 검증해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직관의 능력을 어마어마하게 훼손한다.

 

- 치유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로잡힌 자들에게 치유는 엄청나게 무서운 도전이다. 무엇보다 치유는 혼자 하는 일이다. 아무도 자신을 대신해 치유해 줄 수는 없다. 도울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치유를 위해 해방시켜야 할 아픈 기억이나 경험을 어느 누구도 대신 해방시킬 수 없다. 수동적인 힘의 본성이 바로 '집착으로 가는 힘'이기 때문에, 사로잡힌 자들의 온몸은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과녁에서 자신을 떼어놓거나 해방시키는 쪽과는 반대로 자신을 몰아간다. 그들은 기존의 의학 치료에 맞춰져 있다.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수동적인 한, 기존의 의학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치유 형태다.

 

- 부인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놀랄 정도로, 조지는 그 개념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관념에서 떨어져 나오기만 하면, 그 관념이 더는 제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우주로 흐르는 미묘한 우리 에너지의 흐름에 기여하는데, 이와 같은 에너지의 흐름은 다시 인간 의식의 영향력에 감응한다. 모든 창조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담긴 선택의 힘을 관리하는 일은 인간 경험의 핵심이다. 모든 영적인 가르침은 선택하는 힘이야말로 영혼을 물질로, 말을 육신으로 전환하는 역동적 체계임을 깨닫도록 하는 영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선택은 창조 그 자체의 과정이다. 

- 우리의 선택이 영혼을 사건으로 물질화한다는 사실은 주요한 영적 전통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교훈이 모두 같은 이유와도 같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선택하라. 당신이 하는 모든 선택이 곧 영적인 힘의 창조 행위이며, 그러한 창조행위의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선택은 그 뒤에 있는 천국의 충만한 힘을 가진다. 그리하여 겨자씨만 한 믿음만으로도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행한 선택은 믿음의 에너지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신비로운 측면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선택의 결과를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차크라의 첫 번째 교훈은 선택이 가진 역설적인 본성이다. 즉 옳게 보이는 것이 틀리게 되고, 좋은 듯한 일이 나쁘게 끝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잘 돌아갈 때 꼭 혼란이 일어나 일을 망치게 된다.

-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2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통제해 볼 마음이 생기게 한다. 반면, 2차크라의 교훈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통제력이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에너지로 이루어진 존재다. 하지만 물리적인 세계는 통제될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 내면의 반응,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 제대로 선택했는가? 우리는 단 하나의 올바른 선택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삶 그 자체인 변화의 리듬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처럼 평화와 안정, 사랑, 건강을 영원히 확보해 줄 단 한 사람이나 단 하나의 사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시 영역 너머에 있는 더욱 확실한 힘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만다. 진리는 바로 이 역설적인 양면성의 본성에 내재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우리의 힘은 선택의 동기에 있다. 

 

- 2차크라의 과제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동기를 배우면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내용을 배울 수 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가? 우리의 선택은 믿음의 에너지나 두려움의 에너지 둘 중 하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결정의 결과는 그 믿음이나 두려움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와 같은 선택의 역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스스로 내린 결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 워크숍에서 직관을 지도하면서, 나는 참가자들에게 내면적인 수련과 명상수행을 가르쳤다. 그러나 명상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직관을 계발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에 한 워크숍을 통해 굳이 직관을 계발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미 직관에 접하고 있었다. 문제는 자기가 가진 직관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이 워크숍에서 모든 참가자는 직관을 예언 능력과 혼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직관이 미래를 예견하는 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관은 예언하는 능력도 아니고, 재정적인 손실이나 고통스러운 관계를 피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즉각적인 순간에 에너지 데이터를 이용해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다. 에너지 데이터는 주어진 상황과 관련된 정서적·심리적·영적 구성요소들이다. 그것들은 '미래'의 어떤 장소에서 오는 신비한 정보가 아니라, 삶의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재료의 집합이다. 대부분 직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우리를 불편하고 우울하게 만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가 마치 갑자기 모든 감정으로부터 절연된 것처럼 백지상태가 된 다음에 직관적 정보의 존재를 알게 된다. 

- 다른 워크숍 참가자들 역시 자신의 본능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직관을 안내가 아니라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딱 들어맞는 한 번의 직관이 인생을 완전한 조화와 행복으로 재정립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직관의 안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소리를 따른다는 뜻이 아니다.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스스로 침체되거나 불행에 처한 상황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지고 선택하도록 이끌어주는 주체임을 깨닫는 자기 존중 의식을 치를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 존중 의식이 없는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직관적인 충동을 따를 수 없다. 모든 명상 훈련이 그렇듯이, 직관이 제공하는 안내를 따를 용기와 개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직관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안내는 행위를 요구하지만,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개인적인 안락함과 안전으로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반면, 우주는 우리가 얼마나 배웠는지에 따라 우리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안락함과 안전을 성공의 범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직관적인 안내를 두려워할 따름이다. 직관은 천성적으로 가끔 불편하면서도 새로운 배움의 순환 주기로 우리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 그녀는 왜 자기가 명상하는 동안에 이런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직업적인 상담은 전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뭘 하고 사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받는 영적인 인도가 오로지 영적인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대답했다. 나는 직업도 삶의 일부니까 영성의 일부라고 반박했다. 그녀는 그런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명상 중에 당신이 어디서 살아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받은 인상 중에 최악의 직관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그건 쉬워요. 디트로이트 중심지로 가서 다시 교사로 일하는 거예요. 사실 저한테는 악몽 같은 일이거든요." 나는 말했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그렇게 해보겠어요. 그거야말로 나를 인도해 주는 좋은 가르침 같은데요." 

- 치유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직관을 계발하는 데 자기 존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에도, 나는 치유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신뢰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나는 신뢰를 자기 존중이나 개인적인 힘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자기 존중의 정도가 낮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믿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삶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이다. 

 

- 각 단계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 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각 단계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성격이나 윤리, 도덕성, 자기 존중에 대한 특별한 도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왜 비밀을 지켜야 하는지 혹은 왜 탐닉에 빠지는지, 내가 실수하고도 왜 남을 원망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왜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우리 내부에 어떤 부끄러움을 품고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소양에 긍지를 가지고 편안해질 필요가 있다. 자기 성격의 한계도 알 필요가 있다. 스스로 얼마나 많은 부분을 타협하는지, 어디서 선을 그을 건지, 아니면 선을 그을 건지 말 건지까지 알아야 한다. 자신을 위한 정체성을 만드는 일은 자아 발견의 기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물려받는 것과는 상관없다. 자아 발견의 첫 단계는 변혁이다.

 

- 1단계 변혁 : 자기 존중의 관념을 계발하는 것은 하나의 큰 변혁 행위이며 몇 가지 작은 변혁을 요구한다. 집단적인 사고에서 분리되고 자기 자신의 권위의식을 확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가족이나 동료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집단 에너지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 어려움의 강도는 구성원과 함께 개별적인 상황에 반발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행위도 작은 변혁에 들어가는데, 이는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영적인 성숙도는 한 사람의 의견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런 의견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진실과 용기로 측정된다. 용기란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 억지스러운 고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학은 2차크라에서 나오는 힘의 게임이다. 

 

- 이런 종류의 내면적인 강함을 계발하고 나면, 아주 작은 정도라도 내면의 성찰과 자기 탐구가 더욱 수월해진다. 이런 식으로 점차 부족이나 집단의 마음을 우리 자신의 내면적이고 직관적인 안내자로 대체하게 된다. 이 과정이 일단 시작되면 그다음의 자연스러운 단계는 '혼란', 즉 자아의 폭발이다.  

 

- 2단계 혼란 : 새로운 만남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내면의 자아에게 묻는다. '내가 다른 무엇을 믿고 있는가? 다른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을 더 알고 싶다. 새로운 상황에서, 정보는 우리의 육감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일정한 느낌을 받는다. 이 단계, 즉 혼란의 단계에서 우리는 외부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우리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키는지 알아본다. 이러한 자가진단은 신과의 관계나 우리 삶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싶도록 우리를 이끌 때가 많다. 그러나 우선 자가 진단의 결과를 조절할 힘을 부여하는 내면적인 활력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 워크숍에서 내가 자기반성에 대해 질문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별로 많이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괄호 밖으로 벗어나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르겠어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러면 내 대답은 뻔하다. "그럼, 지금 생각해 보세요!" 왜 이런 반응이 일반화되어 있을까? 자아의 지식은 선택하고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것인데, ... 

- 3단계 나르시시즘 : 안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감각을 강하게 계발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에너지를 주는 경우가 많다. 머리 모양을 바꾼다거나 새 옷을 입는다거나, 아니면 새로운 체형을 만드는 것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그러한 변화들이 우리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킨다. 상처를 입기 쉬운 이 단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부족이나 집단으로부터 커다란 비판에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나르시시즘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우리의 경계를 다시 설정할 근간을 제공한다.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에게 좀 더 중요한 내면의 변화를 따르도록 준비하게 한다. 
 
 - 게리는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밝혔다. 가족들도 알고 있는지 물었더니, 아직은 아니라고 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자기 존중의 단계를 성취해 나가는 중이지요. 원하는 대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면, 곧바로 제가 원하는 만큼 강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존재의 네 번째 단계, 즉 진화의 중요성을 담은 말이다.

 

- 4단계 진화 : 자기 존중을 계발하는 마지막 단계는 내면적인 단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서 오는 에너지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과 존엄성, 신념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진보한 사람들이다. 간디, 테레사 수녀,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은 이러한 자기 존중의 단계를 성취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물리적인 여건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 여건은 영혼의 힘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 이 세 사람은 우연히도 자기 발전의 어떤 단계 동안 나르시시즘의 범주에서 사고했다. 예컨대, 테레사 수녀는 초기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의 비전이 다른 수녀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는 이유로 두 개의 종교집단에서 거의 쫓겨날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 시기 동안, 테레사 수녀는 자기 일에 골몰하고 자기애를 갖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깊은 영적인 묵상의 시기를 지나 때가 무르익었을 때 자신의 직관적인 안내에 따라 행동했다. 간디나 만델라처럼, 그녀도 진화의 단계에 들어선 것인데,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개성이 수백 만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원형적인 힘인 페르소나(에고를 제거함으로써 도달하는 집단의식-옮긴이)로 변화하게 된다. 당신 자신의 영혼이 명령을 내릴 때, 세계가 그 힘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 이 여행이 비록 네 단계로 이루어졌다 해도 자기 이해와 독립, 자기 존중을 계발하는 데 간단한 절차는 아무것도 없다. 3차크라는 우리가 아직 마주할 준비가 안 된 두려움과 비밀뿐 아니라, 개인적인 야심과 책임감, 장단점에 대한 존중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가끔 개인적인 갈등으로 마음이 찢어질 듯한 커다란 전율과 함께, '채워지기 위해 먼저 비워지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죽어 ...

 

- ...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상처 입은 아이'는 자기가 가진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에 신성을 기껏 상벌을 주관하는 존재 정도로 본다. '상처 입은 아이'는 고통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경험의 내부에 영적인 통찰력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처 입은 아이'처럼 생각하는 한 우리는 조건이 달린 사랑만을 하게 되고, 상실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 문화는 전반적으로 상처와 희생을 강조하는 데서 치유를 향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처의 힘에 빨려 들면 우리는 이 부정적인 힘을 어떻게 내보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상처 입지 않고 스스로 강해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의 문화는 아직 상처에서 벗어나 영적인 성인기로 진입하지 못한 4차크라의 문화다.

 

- 여기서 얻는 교훈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4차크라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심장 내부로 들어갈 때, 우리는 아래쪽의 세 차크라, 특히 부족적인 마음의 친숙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나의 최우선은 가족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거나 '아내가 지금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직업을 못 바꾸겠다'는 등의 습관적인 개념의 보호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럼, 나는?'이라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 가지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출입문 앞에 서게 된다. 그 질문은 수년간 스스로 억눌러 왔지만 잊히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자신을 위한 새로운 길을 결정하는 정서적 자료를 이끌어내는 주문과도 같다. 어쩌면 부족적인 마음의 보호 속으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편하게 해 줄 위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 우리는 다른 누구와의 관계나 다른 어떤 사물과의 관계도 아닌, 오로지 우리 자신과 관련되는 정서적 본성을 발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만만찮은 임무를 시작해야 한다. 주요한 역할을 맡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든 혼자든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조화롭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내 강점은? 나는 스스로 의지가 되는 사람인가? 내 약점은? 지금 하는 일을 나는 왜 하는가?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것이며,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갈 만큼 충분히 강한가? 그리고 나 자신의 정서적인 욕구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가?' 

- 이런 질문들은 부족적인 마음의 질문들과는 다르다. 부족적인 마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강할 수 있는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의지력, 차크라의 상징적인 도전은 의지의 성숙을 통해 진보한다. 즉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권위를 가진다는 부족적인 인식으로부터, 오직 나만이 나에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을 거쳐, 진정한 권위란 신의 의지에 나 자신을 결합시키는 데서 온다는 최후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 5차크라는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뜻하는 헤세드의 생명의 나무 및 신의 정의를 표현하는 게부라의 생명의 나무와 일치한다. 이들 두 생명의 나무는 신성한 의지의 균형 잡힌 본질을 나타내는 신의 오른팔과 왼팔이다. 이 두 생명의 나무는 신성이란 자비로운 것이며, 오직 신만이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판단할 권리가 있음을 함축한다. 헤세드의 생명의 나무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사랑을 담아 말해야 함을 일깨우고, 게부라의 생명의 나무는 경의와 성실을 담아 말해야 함을 일깨운다. 고백성사는 5차크라와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는 모두 의지력을 사용하는 방법에 책임이 있음을 상징한다.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행위의 결과로 받았을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소명'으로부터 영혼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된다. 

 

- 신성한 진리 5차크라는 영적인 카르마의 선택과 그 결과의 중심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택, 우리가 갖는 모든 생각과 느낌은 생물학적이고 환경적이며, 또한 사회적이고 개인적이며 전체적인 결과다. 우리는 생각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으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은 에너지가 뻗어나간 영역 전체에 걸친다. 실제로 우리가 에너지의 결과를 볼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오로지 개인적인 의지를 신성한 의지에 복종시키는 신의 진리에 의해 살고 있을 때만 이런 종류의 통찰력에 접근할 수 있다. 5차크라의 영적인 교훈은, 신성한 권위를 믿는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행위가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우리의 생각과 태도 또한 더 높은 안내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익을 얻는다. 임사체험을 한 어느 여성은, 자신의 모든 선택이 삶 전체에 에너지 상의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평생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을 다시 보게 되었으며, 그 선택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과 자신의 삶 전체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자기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옷을 선택하든 직업을 선택하든, 하찮다고 해서 신성이 무시하는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피스를 살 때 그녀는 그 구매 행위에서 나오는 즉각적인 에너지의 영향을 보았다. 그 옷의 제작과 유통에 관계된 사람들로 이어진 긴 사슬이 그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앞서 안내를 청한다. 

 

- 행동 뿐 아니라 사고와 믿음의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정직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거짓말의 결과는 뚜렷하다. 완전한 치유인 진실은 우선 자신에게 정직하라고 요구한다. 

 

- 정직해지지 못하는 무능은 용서하지 못하는 무능만큼 심각하게 치유를 방해한다. 정직과 용서는 '과거'의 에너지 차원으로부터 우리의 에너지, 즉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킨다. 5차크라와 이 차크라의 영적인 교훈은, 개인적인 힘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위를 하면 가장 비싼 에너지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선택할 때조차 일반적으로 에너지의 결과는 원치 않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이러한 뜻밖의 기습은 신의 안내를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시대적으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더 큰 선택의 힘을 갖기 위해 돈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는 선택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힘 있는 사람에게 기준을 두면, 개인적인 의지를 신성한 의지에 복종시키는 일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울 것이다. 

- 5차크라의 정수는 믿음이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고, 어떤 이념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념에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며, 두려움을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에 우리 에너지의 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다. 에너지를 내맡긴 결과,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삶 전체는) 그 결과 속에서 조직된다. 우리의 믿음과 선택의 힘은 창조의 힘 그 자체다. 우리는 이번 생에서 에너지가 물질로 변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릇이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삶에 내재하는 영적인 임무는,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두려움을 믿는지 신성을 믿는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적인 이끌림 때문이든 육체적인 질병 때문이든, 이 질문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도대체 내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누구지? 왜 모든 것이 내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는 걸까?' 하고 묻게 된다. 세속적인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게 된다. 계획에 없던 사건이나 인간관계, 질병 등은 우리의 개인적인 힘이 위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 다른 어떤 '힘'이 작용하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져야 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목표는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 한계를 자각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삶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 예전에는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길잡이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일을 하거나 여기 살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고, 모든 게 다 괜찮아."

 

- 만약 영적인 통찰력을 사용해서 삶을 오롯이 영적인 여행으로만 볼 수 있다면, '복종'의 지점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비참한 상황에서 회복되고 난 후, 신이 다 알아서 해줄 것으로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성을 체험했다고 한다. 저의 뜻이 아닌 '당신의 뜻대로'라는 이 기도가 필요한 전부라면, 왜 우리는 그것을 그토록 두려워할까?

 

- 우리는 신성한 의지를 인정함으로써, 즉 우리의 의지를 더 위대한 의지에 복종시킴으로써, 물질적인 안락을 주는 모든 것에서 분리되는 상황을 여전히 끔찍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의지로 신성한 길잡이에 맞선다. 이런 경우는 신성한 의지를 자기 안으로 들여오기는 했지만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워크숍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직관적인 길잡이를 추구하면서도 그 목소리가 심각한 말을 들려줄까 봐 두려워한다. 

- 물질적인 삶과 영적인 길이 하나이며 같은 것임을 기억하라. 물리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건강한 육체를 간직하는 것만큼이나 영적인 목표에 유익하다. 건강한 몸과 영혼은 모두 신성한 안내자를 따라 삶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념과 신뢰로 행동한 결과다. 신성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의 즐거움과 안락함에서 해방된다는 뜻이 아니라, 물질적인 환상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5차크라의 영적인 에너지는 우리를 복종으로 이끈다. 헤세드의 생명의 나무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넘칠 수 있게 인도하는 위대한 신성 에너지(사랑)를 매개로 5차크라로 옮겨가게 한다. 사랑의 가장 위대한 행위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일을 자제하게 한다는 점이다. 판단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실수임을 기억해야 한다.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지혜를 얻고 두려움을 이긴다. 게부라의 생명의 나무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는 데서 풀려나게 한다. 그리고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더 장대한 영적인 그림의 일부임을 믿게 해 준다.

 

- 우리의 상황에 대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반부이며, 우리의 상황을 바꿀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신이 정한 시간에 '예'라고 말하는 것이 후반부다. 고백의 행위는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로부터 영혼을 바로잡는 것이다.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우리의 영혼이 부정적인 사건과 생각에 얼마나 많이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 고백은 단순히 그릇된 행위를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의식만이 아니다. 에너지의 용어로 말하면, 고백은 우리가 예전에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던 두려움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음을 인정하는 행위다. 상징적으로 볼 때, 고백은 우리의 영혼을 과거의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 패턴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부정적인 일과 믿음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세포 조직, 나아가서 삶 전체에 독소가 된다.

 

- 카르마는 우리가 행하는 선택의 에너지인 동시에 물리적인 결과다. 부정적인 선택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선택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계속적으로 반복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일단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배워서 긍정적인 선택을 하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은 부정적인 선택에 더는 집착하지 않으므로, 그런 부정적인 상황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 서구 문화에서 이런 종류의 카르마에 대한 가르침은, '가는 것은 다시 온다' 또는 ‘무엇에서도 도망칠 수 없다' 등과 같은 사회적인 격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백의 행위에는 우리가 지은 업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실수를 깨닫게 하는 의미가 있다. 에너지의 용어로 설명한다면, 고백은 우리의 영혼을 고통스러운 배움의 순환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에 편입되도록 방향을 전환하게 만든다.

 

- 우리의 마음과 몸, 영혼의 건강에 대한 고백은 너무도 본질적인 것이어서 개인적인 영역에 힘을 준다. 수세기 동안 우리 문화에서는 정서적인 에너지는 빠른 의사 결정 능력을 약화시키고, 정신적 에너지는 감정의 영역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수세기 동안 이러한 분리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이 만난 이후로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사람을 조화로운 인간으로 재규정하게 되었다. 머리와 가슴이 서로 분명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게 된다. 머리가 앞서면 정서적인 모든 정보를 적으로 돌리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고통받는다. 그리하여 모든 상황과 관계를 통제하려 하고, 정서를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싶어 한다. 가슴이 앞서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머리가 앞서든 가슴이 앞서든, 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게 되면, 내면의 안정감이 아닌, 두려움이나 헛된 목표인 통제의 욕구가 의지를 움직이게 된다.

 

- 이처럼 머리와 가슴의 부조화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지게 한다. 에너지로 말하자면, 내면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탐닉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이나 명상과 같은 비교적 건강한 행동까지도 고통이나 개인적인 통찰력을 피하는 데 이용된다면 일종의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훈련이 의식과 무의식의 마음 사이를 가로막는 고집스러운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내를 받고 싶지만 제발 나쁜 소식은 아니면 좋겠어요." 이런 식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길잡이'를 따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정신적으로는 변화를 원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환의 기회가 올 때마다 늘 변화를 두려워하는, 끝이 안 보이는 순환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 이 악순환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과 가슴의 합일된 힘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고정된 틀 속에 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고정된 틀 속에 있으면,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정확하게 안다고 해도 겁에 질린 나머지 그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삶의 반복되는 악순환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제가 아닌 내일을 목표로 하는 강력한 선택이 필요하다. '더는 이런 취급을 받기는 싫어'라든가 '단 하루도 이 상태로 머물긴 싫어 떠나야겠어!' 결정은 머리와 가슴 양쪽의 에너지를 통합하는 힘을 발휘한다. 삶은 이렇게 강력한 수준의 선택에 내재한 권위의 결과로 즉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 비록 절망적일 만큼 슬픈 순간이 잦다 해도, 삶에서 익숙한 것들과 결별한다는 것은 확실히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안전이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거듭남을 느끼면서 다른 쪽 끝으로 헤엄쳐 나올 때만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가 두렵다고 무작정 안전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더욱 심각한 내면의 고통만을 맞이할 뿐이다. 

- 아일린 캐디는 북부 스코틀랜드에 있는 영적인 공동체 핀드혼의 설립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하느님의 안내를 믿고 그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변화와 도전으로 가득한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첫 남편과 다섯 아이의 곁을 떠나 피터 캐디라는 남자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안내를 받았다. 이 안내를 따르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은 힘겹게 지냈다. 피터가 기혼이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결국 피터는 아내와 헤어지고 아일린과 결혼했다. 그리고 북부 스코틀랜드의 포레스에 있는 다 기울어져 가는 어느 호텔의 경영을 맡았다. 이들 부부는 자녀를 셋 낳았는데, 아일린이 안내받은 내용대로 피터는 이 싸구려 호텔을 별 네 개짜리 일류 호텔로 바꿔놓았다. 안내의 목소리는 아일린에게 전남편과 낳은 다섯 아이와도 결국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안내는 정확했다.

 

- 약속한 7년이 지나자, 작물은 정상적인 크기로 돌아왔다. 아일린은 피터에게 더는 안내가 없을 것이며,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둘의 관계를 긴장시켰으며, 피터는 자신을 안내해 줄 또 다른 길잡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어딘가로 향해야 했다. 혼란이 왔고, 아일린은 낙담했다. 결국 피터는 공동체를 떠나고, 아일린과도 헤어지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피터와의 결별로 망연자실해진 아일린은 하느님의 안내를 따른 대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한동안 의문에 휩싸여 지냈다. 

- 아일린은 자기가 겪은 투쟁과 절망, 이혼까지도 '신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아일린은 자기가 받은 '안내'를 따르면서도, 실제로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갈등 속에서 보냈다. 그녀는 안내를 그리스도 '의식'이라고 표현했는데, 전적인 믿음과 신뢰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일린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영적인 소명이었다.

 

- 이제, 아일린은 하느님의 힘이 항상 자기를 이끌어주는 자기 내면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녀는 봉사의 길에 전념하고 있는데, 그 보상은 실로 엄청나다고 느낀다. "나에게는 원형적인 의미의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가족인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름다운 집, 내 모든 아이와의 사랑이 넘치는 관계, 신과의 친밀함이 넘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지요." 

 

- 아일린과 그리스도 에너지의 결속은 현대식 신비주의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녀의 삶에는 옛날의 영적인 길과 현대의 영적인 길을 모두 담겨 있었다. 옛날 방식이란, 영적인 지도자가 사람들과 신 사이의 중개자로 있으면서 어려움을 감수하고 고독한 성찰을 하는 것이다. 현대적인 길이란 모두가 영적인 공동체 안에 사는 것이다. 아일린은 시련과 축복, 그리고 하느님의 안내에 대한 보상으로 살고 있다. 그녀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 

- 신성한 안내에 직면해 우리가 인간적인 의지를 놓아버리면 위대한 통찰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힘든 일을 겪을 수도 있다. 우리는 결혼이나 취업 같은 삶의 여러 대목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경험한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권능과 하나가 된 후, 그 결과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아직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복종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한 욥의 이야기를 보자.

 

- 결국 하느님은 욥에게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하느님이 욥에게 물으셨다. "내가 이 땅을 만들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아침을 오게 하거나 새벽을 오게 한 적이 있느냐?"

(리뷰자 주 : 개인적으로는 욥이 맞았던 시험은 '순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동 창조'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믿음 위에서 그는 따르는 자가 될 것인지, 이끄는 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 우리가 직면하는 도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낳는다. 나를 위해 마련된 신의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신의 의지를 어떤 임무나 일, 우리 자신을 위해 축적하는 힘의 수단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의지는 영혼의 본질과 신의 본질을 배우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영혼을 바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의지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살려는 선택이다. 

1. 판단하지 않는다.
2. 모든 기대를 버린다.
3. 모든 일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다. 

4. 우리 삶에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영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힘들더라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신과 인간의 차이를 아는 지혜를 갖는다.

- 초연함에 대해 강의하고 나면, 사람들은 초연함이 너무 차갑고 비인격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초연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 대니의 에너지를 평가한 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자, 그는 "영업직인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요. 시골로 이사해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가꾸고 목수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러한 변화가 가져올 결과를 이야기했다. 그는 회사에 매인 몸이었고 그룹의 핵심 분야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둔다면 이 모든 관계가 끝장날 것이었다. 대니가 말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머리에서 판매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싶었지요. 자연과 같은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연이 저한테 월급을 주지는 않겠지요. 여태껏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지금 나는 이 느낌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나는 그가 이미 '안내'를 받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러면 자기 느낌을 따름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었다. 

 

- 대니는 기꺼이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벗고 새로운 삶을 포용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느낌을 따르고 직업도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세상 속에서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 역시 날려 보냈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름으로써,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내면의 현실을 스스로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바깥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 이것이 우리가 의식화되는 방법, 신비가 솟아나게 하는 방법이다. 즉 하나를 행동에 옮기면 또 다른 신비가 따라온다. 그 과정을 중단하면 생명력에서 점점 더 멀어져서 보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개인적인(이 경우 '개인적'이라는 말은, 일상적인 개념 외에 인간의 영성이 발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초자연적이거나 신비적인 영성의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에만 눈떠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옮긴이) 마음에서 초연한 마음으로 진보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 그녀는 '위험 신호'를 인식하기 전의 생활을 떠올리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준 그 신호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살아왔는지 놀라워했다. "의식이 없는 삶은 바로 무의식적인 삶이지요. 자기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겁니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음식, 옷, 돈 따위만 생각하고 살아요. 그런 삶은 우리가 세상에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생각해 볼 기회를 전혀 안 주지요. 그런데 일단 그런 의문이 생기면,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은 항상 또 다른 진실로 향하게 합니다." 

 

- 노여움과 고통, 격분 등은 치유 과정을 방해하거나 완전히 중단시킨다. 치유에 대한 의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반대로 내면적인 힘이 없으면 질병은 몸을 마음대로 망가뜨린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건강과 질병의 의학적인 모델 안에 의식의 힘을 주저 없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게 한다. 많은 사람이 질병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고, 자신들의 태도와 생활 스타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회복과정을 인간의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 진단하기를 배우기 전, 사람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다가 일단 자신을 파악하고 나면, 이미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 느낌을 지워버렸다고 말한다. 직관적인 안내는 몸이 힘을 잃고 있음을 경고하므로,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두려움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은 내면으로 향할 수 있게 되어, 마음과 정서적인 자료들을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일치되는 과정 내지 생각과 느낌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방법이다. 치유는 머리와 가슴의 합일을 요구한다. 특히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일상적인 선택에서 느낌을 과소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 그의 대답은 내가 읽은 내용과 똑같았다. 티베트 스승들은 인터뷰할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관심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다는 바로 그대로였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소걀은 아마도 나의 마음을 읽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 무엇이며, 내 질문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고 있겠지!'  

 

- "그분은 점성가들을 불렀어요. 함께 앉아 당신의 천궁도를 펼쳐보라고 하셨지요. 지상의 에너지로부터 당신의 영혼을 거두어들일 완벽한 시간대를 특별히 유념해서 찾아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분의 영혼은 특별히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떤 형태의 에너지 결과도 일으키지 않고 떠나고 싶어 하셨지요. 선생은 그러한 일을 모를 수도 있겠군요. 어떤 영혼이 지구를 떠날 때는 전체 에너지장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아주 강한 영혼이 떠나게 되면, 지구에 미치는 영향도 굉장히 극적이지요."

 

- "결국 점성가들이 그분의 죽음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시간대를 찾아냈어요. 그러자 그분은 떠나는 그날, 그 시간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지요. 그날, 제자들과 함께 명상을 하고, 제자들을 축복한 다음, 눈을 감고 몸에서 영혼을 해방시키셨습니다." 

 

- 나는 소걀에게 그분이 병으로 죽기를 선택하셨는지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소걀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병이라고요? 어떤 병이 상관이 있겠어요? 우리 모두 우리의 에너지가 이 지상에 들어와야 할 가장 완벽한 순간에 태어나듯이, 이 지구를 떠나는 가장 완벽한 순간 또한 있습니다. 우리 스승은 병들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완전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질병으로 죽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육체가 몰락하는 고통을 허용하지 않고도 몸에서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 소걀은, 영적으로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신과 아무런 갈등도 없음을 아는' 수준의 의식을 얻은 상태이며, 그래서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선택과 같아지는 단계라고 말했다. 소걀의 말에 의하면, 그의 스승은 선택의 딜레마(어떤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낫다고 믿는 것)가 존재하지 않는 의식 상태에서 살았다. 모든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소걀은 깨달은 마음을 가진 삶과 죽음을 보여준 한 사례가 바로 그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 밤이 되자, 교수님은 우리를 깨워서 요가 자세(결가부좌)로 앉게 한 뒤 질문했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불교에서는 현상의 본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영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번 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심오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이었다. 교수님이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대답하는 내용의 질이 아니라, 우의의 사고가 어떤 특정한 흐름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사고의 유연성 여부였다. 만약 우리가 한 형태에 고착되어 다른 형태를 배제하고 있다면, 우리는 강의 내용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문화권마다 진리의 표현이 달라도) 모든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의 수준에서 똑같다. 교수님의 입장에서 의식화되었음을 뜻하는 정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즉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문화적인 형태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올리버는 대단히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언제부턴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가해 보았지만, 그 어떤 활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안내를 청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적인 스승을 친견할 수 있게 되었다. 10분 정도 만났는데, 그동안 이 영적인 스승은 그의 사명이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파리에서도, 로마에서도, 동양에서도 계속 기다렸다. 일급 호텔에서도 기다렸고, 리비에라에서 카푸치노를 홀짝거리면서도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기다리라'는 가르침이 헛된 것이라는 깨달음이 오는 순간, 그의 가슴은 텅 빈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그 스승의 가르침은 돈을 주고 사는 물건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뜻이었으리라. 말하자면 그는 영적인 의미로 '기다려야' 했다. 즉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더라면, 그는 답을 얻었을 것이다. 

 

- 여러 측면에서, '기다림'이나 사람의 자질을 바꾸는 영적 도전은 새 병원을 짓는 데 돈을 기부하는 것보다 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가 더욱 크다.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가치를 두는 데 익숙하지 않고, 건강한 영혼이 내뿜는 힘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다려서 무엇이 되기'라는 우리의 사명이 무용하게 보일 때가 더러 있는 것이다.

 

- '기다려서 무엇이 되기'는 '서품의 부름'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우리 영혼의 깨달은 부분에 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평화의 순례자'로 알려진 한 여성은 현관문을 열고 신을 받아들이는 이 영적인 과정을 잘 보여준다. 

- 진리의 본질을 지키면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준 가르침은 너무도 단순하다. 나는 쓰레기 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먹지 않는다. 나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곧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자신의 영혼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마음을 계발하는 일은 필생의 사명이다. 아주 구체적인 도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깊이 자리 잡은 환상과 두려움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밖으로 우리 자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과정은 우리의 삶에 수없이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의식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내면이 재구성되는 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경험했다. 영혼에 대한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일단 길을 떠나기만 하면 돌아오는 길은 없다. 

 

- 의식화에서 쉬운 단계는 하나도 없다. 나 자신의 삶은 선택의 행위에 담긴 더욱 심오한 의미, 그러니까 책임이 따르는 선택의 힘을 알기 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일은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훨씬 쉬워 보인다. 그러나 일단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오랫동안 속이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 나의 가슴은 부정적인 태도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세요.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쉽게 하는 명상과 쉽게 하는 운동을 찾아다닌다. 그런 수행법이 우리를 안갯속에서 꺼내줄 것이라고 믿지만, 의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답이 있기는 하되, 한마디로 쉽지 않다는 것이 답이다.

 

- 그냥 흘려보내라. 나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라. 그리고 의식 속에서 그 길을 찾아내려는 노력 자체가 삶이라는 자각을 받아들여라. 

 

- "저는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 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당신이 받은 느낌에 따를 필요는 있다고 믿어요."

 

- 길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운 기다림의 상태에 있다. 물론 이것은 필요한 과정이다. 그들의 일부는 자신의 삶에 신성한 의지를 받아들이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물질적인 차원의 모든 안락함(실제로는 안락함이 아니라 거기에 복종하고 있는 셈이지만)을 잃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직도 괴로움 속에 있다. 따라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우리의 개념으론 '잘'이 아니겠지만 신의 개념으론 확실히 '잘'이라 할 수 있는) 좀 더 심오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 그들은 기다리는 자세로 묶여 있는 것이다. 

 

-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캐리는 서품을 받은 길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안내하는 존재와 함께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늘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의식화를 향한 여행은 때로 이론이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다. 책이나 대화를 통해 이론적으로 의식을 추구하는 것은, 실제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으면서 약속의 땅을 얻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약속의 땅이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일시적으로나마 사람의 기분을 한없이 고양시킬 수 있다. '워크숍 중'에서 그와 같은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대화의 수준은 한없이 높지만,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삶이 그전과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우리의 마음에는 정보가 차고 넘쳐서, 더는 두 개의 인식 수준에 다리를 걸칠 수 없는 때가 온다. 장차 하게 될 일을 하라. 언제까지나 진리를 방문했다가 다시 환상으로 돌아오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어떤 지점에서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먼저, 위기는 대개 삶의 외부적인 조각들을 뒤섞는 것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무의미와 목적의 결여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출세나 승진, 결혼 또는 새로운 관계를 전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훨씬 더 심오한 갈증을 느낀다. 일상적인 해결책은 매력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목표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는데, 이들은 삶이 그 '의미'를 문 앞까지 배달해 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평불만인 사람들과 야심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인 위기로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뭔가가 깨어나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그들은 다만 그런 강한 욕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 새롭고 이상한 두려움은 영적인 위기의 두 번째 증상이다. 이 두려움은 버림받고 늙는 등의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아 또는 정체성의 감각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특이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7차크라의 에너지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 세 번째 증상은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헌신을 경험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인간의 욕구를 묘사하는 많은 심리학 책이 헌신이라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인간의 한계와 혼란을 초월하는 힘의 근원과 생물학상으로나 에너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즉 기적과 희망의 근원과 닿아 있어야 한다. 

 

- 헌신은, 의식적인 마음의 일부를 무의식적이고 영원한 자아에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신성한 존재에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짧은 만남이라 할지라도 이 존재와 그 무한한 힘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이 삶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데 도움을 준다.  

 

- "권능을 가진 기도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신께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신께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에게 바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을 신과 함께하는 행위입니다. 이것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기도는 '에너지 약'이 됩니다.

 

- 다음의 지침들은 우주적인 마음을 계발하고, 환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그 환상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의 힘을 이해하는 능력인 상징적인 통찰력을 성취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지침들을 적으면서, 나는 6차크라에 감응하는 호크마와 비나의 생명의 나무를 염두에 두었다. 이 단계들을 따르면 상징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신성한 논리의 차원에 이르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반성을 실천하라.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과 그 이유를 의식하라. 


 마음을 열어두라. 그리고 마음이 '언제 닫히는지'를 깨달아라.

방어란 새로운 통찰력이 마음의 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시도임을 인식하라.

바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모든 상황과 관계를 상징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석하라.

꿈을 통해 안내와 통찰을 받을 수 있도록 열어두라.

자기 연민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생각,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생각이라면 어떤 것이든 흘려보내라.

초연함을 익혀라, 특별한 결과를 만들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위해 가장 현명한 판단에 바탕을 두고 결정하라.

모든 판단을 자제하라, 사람이나 상황을 거슬러 판단하지 말고 사안의 크기나 중요성을 고려하여 판단하라.

 

어떤 상황의 사실이나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볼 수 없고 행동의 장기적인 결과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줄곧 더 높은 진리로 여겼던 것을 염두에 두라.

어떤 두려움에 영향받을 때가 언제인지 알라.

마음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여 그 두려움에서 즉시 벗어나라.

그런 다음 그 두려움의 영향을 약화시키는 쪽을 선택하라.

삶에서 성공이란 어떤 성취를 뜻한다고 믿는 모든 가치에서 멀어지라.

대신에 성공적인 삶이란 자아통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보고, 삶의 도전을 완수하는 능력으로 보라.

성공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에너지의 힘으로 시각화시켜라.

내면의 안내에 따라 행동하라.

그러나 내면적인 안내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잡아내려는 생각은 포기하라.

증거를 요구할수록 받을 수 있는 것은 더 적어진다.

현재의 순간에 모든 관심을 두라. 즉 과거에 살거나 미래를 염려하는 일을 자제하라.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을 더 굳게 믿어라.


  


이들 부정적인 양상이 영적인 상담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주고받는 그 사람의 내면적인 대화의 내용을 조사한다. 이것들은 흔히 하는 심리적인 물음이 아니다. 정신적인 장애와 정서적인 장애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의 목표를 파고드는 통찰력을 추구하기 위해 던져본 질문은 어떤 것인가?

신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내가 가진 두려움은 어떤 것인가?

영적인 맥락에서 평가했을 때,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적이 있는가?

어떤 영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는가? 

예를 들면, 영적인 길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믿거나, 

나처럼 영적인 길을 가지 못하는 다른 사람보다 신이 나를 더 잘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기도나 생각 같은 사생활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워서 다른 통찰력을 갖게 해달라고 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 어떤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자신의 영적 규칙들을 위반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치유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현재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깊이 신을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이 있는가?



 

자기 점검을 위한 물음



1. 명상이나 기도하는 동안, 내가 안내받기를 바라는 물음은 어떤 것들인가?

 

2. 이 물음들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답은 무엇인가?

3. 나는 신과 거래를 하는가? 신께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가? 

감사의 기도를 하기보다는 이러저러한 것을 달라고 기원하는 편인가?

4. 나는 특정한 영적인 길에 헌신하는 사람인가? 

아니라면 어떤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가? 

헌신을 바칠 대용물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들을 모두 적고, 나와 그 대용물과의 관계를 평가해 보자.

5. 나의 신이 다른 영적인 전통의 신보다 더 권능이 있다고 믿는가?

6. 나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서 신이 설명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경험들을 다 적어보자.

7. 신께서 갑자기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그 대답이 만약, "현재 시점에서는 너의 질문 속에서 얻도록 되어 있는 통찰력을 네게 줄 생각이 없다"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할까?

8. 명상수련을 시작했다가 그만둔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계속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9. 영적인 진리 가운데 거기에 준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10. 신성에 대한 영적인 관계가 내 삶에 변화의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기 때문에 신성에 가까이 가는 일을 겁내고 있는가?

 

  

 

 

    

더보기

 

- 유사 이래 인간이 품어온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의문은 '과연 내 인생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였다. 저자는 이 의문에 단순하고도 심오한 답을 제시한다. 우리의 목표는 자기 영혼의 이상에 어긋나지 않고, 삶의 모든 순간에 황금률을 체현하면서 모든 생각을 신성한 기도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절대 쉬운 길은 아니다! 

- 사람들이 꽉 들어찬 방에 들어갔을 때, 왠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드는 순간을 한번 생각해 보라. 더욱이 그 많은 사람 각자의 잠재의식에서 지껄이는 말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고, 그리하여 그들의 에너지와 건강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의 에너지 상태는 물론, 지력과 체력, 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모든 요소를 일일이 다 안다고 상상해 보라. 이렇게 자기 자신과 타인의 에너지를 관찰할 수 있는 도구를 전해주는 것이 이 책에 담긴 지혜이다.

 

- 초미립자를 연구하는 양자물리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이 진동임을 밝혔다. 인간의 DNA는 52~78기가 헤르츠(초당 수십억 회의 회전)로 진동한다. 과학적인 측정 장치들을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아직 특정인의 특정한 주파수나 에너지 흐름의 장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첫째는 생명 에너지가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생명 에너지는 항상 움직이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마음이나 에너지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 캐롤라인처럼 직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비밀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나도 25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직관 능력자들과 함께 작업했지만, 캐롤라인만큼 명쾌하고 정확한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 저자는 인체의 미묘한 에너지를 감지하고 인간이라는 전자기적인 존재가 말하는 언어를 읽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육체적인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와 현재의 감정 에너지가 무엇인지를 진단해 낸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신념 체계와 세포의 주파수, 에너지 체계의 균형을 뒤흔드는 깊고 쓰라린 체험이나 태도 등을 감지해 내는 것이다. 저자가 읽는 우리의 영혼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우리의 진정한 힘이다.

 

- 이 책에서 여러분은 자기 몸의 일곱 가지 힘의 중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중심들은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는 핵심적인 조정자다. 이 중심들은 변화무쌍한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생물학적 배터리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 역정이 곧 자신의 몸 그 자체다.' 설령 이 책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타인의 부정적인 에너지 때문에 활력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돈과 섹스, 외부적인 권위 등 잘못된 힘의 상징들이 우리를 좀먹지 않도록 자아 감각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직관을 발달시킬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인체의 일곱 가지 에너지 중심을 이해하는 흥미롭고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인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등 각 종교에서 바라보는 힘에 대한 관점을 통합하여 일곱 가지 영적 진실을 제시한다. 

 

- 이 책은 또한 대체의학의 본질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영적인 이상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동시에, 우리를 일깨워 자기 치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책을 준비하는 오랜 기간 저자 캐롤라인과 함께 지낼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이 책에서 얻은 지식 덕분에 나의 삶은 내가 꿈꾸던 것 이상으로 풍부해졌다. 캐롤라인의 지혜에 힘입어 여러분의 삶 역시 나처럼 무한히 아름다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 노먼 실리 C. Norman Shealy 미국통합의학협회 창립자 겸 이사장심리학 연구 및 임상 교수포레스트 전문심리연구소 

 


 

- 교인들은 세례의 성찬식을 한다. 일부 힌두교도들은 생후 며칠 또는 3년 안에 삭발뿐만 아니라 시만톤나야나 simantonnayana(베이비 샤워와 유사한 힌두교의식)를 시행한다. 삭발은 이슬람에서도 흔한 의식이다. 할례는 유대교 남성들에게 성스러운 의식이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유사한 의식은 "딸의 축하"를 의미하는 심챗 배트 simchat bat나 브릿 배놋 brit banot이라고 불린다. 전통마다 분명히 다른 점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생아가 육신을 받는 순간부터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고 은혜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이런 류의 의식들은 사실 내가 깨달은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강조하자면, 인간 생명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갓난아기를 은혜에 적응시키고, 부족이 그 아이의 생명이 가진 신성함을 인정하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 나는 가톨릭 신자로 자라면서 여러 해 동안 가톨릭 전통과 다른 전통들에서 행해진 많은 성스러운 의식들에 참석했지만, 나 자신의 영적인 삶이 신비적인 영성의 길로 옮겨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성스러운 의식이나 신성한 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내 안에서 일어난 심오한 변혁을 요약하는 유일한길은 내가 신에 대해 "글로 읽은" 것이 아니라 신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성은 내게 실제의 존재가 되었다. 이론도 아니었고, 더 이상 어림짐작만 할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비유하자면, 여성이 첫 아이를 낳을 때, 말로만 모성애 운운하다가 실제로 아이를 낳고 첫 아이를 안고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의 유대감을 느낄 때 경험하는 즉각적인 변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 경험은 모든 이론적인 논의들을 넘어선다. "수도원 없는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한 나의 길고 구불구불한 길은 이 책의 저술로 시작되었고, 그리고 아마도 그 이전에, 신비적인 운명의 순수한 실오라기만큼이나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이 책을 쓰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라고 믿는다.

 

- 다시 걷기 시작하려고 돌아섰을 때, 나는 뚜렷한 이유 없이 걸음을 멈추고 화이트보드를 응시했고,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다음 나는 이 내적인 감각을 느꼈고, "다운로드"가 내 존재 전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다운로드"가 내 지성과 연결된 것처럼, 계속 차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100만 분의 1초 안에, 나는 생명의 나무에 관한 세부사항처럼 의식으로는 알지 못하는 세부사항들을 포함하여 이 책의 내용이 될 모든 세부사항을 파악했다. 나는 내면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내면의 눈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보는 방식도 다르고 보는 것들도 다르다. 내면의 시각은 신비로운 자각이며, 새로운 깨달음을 동시에 모두 보고 알고 이해하며 흡수하고 파악하는 경험이다. 즉 여러분의 모든 감각이 현실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100만 분의 1초 안에 여러분은 무지의 상태에서 뭔가 깊고 심오하게 아는 것으로 변화한다. 신비로운 100만 분의 1초의 순간, 나는 차크라 시스템이 건강과 관련된 유일한 몸의 에너지 체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의 영혼이 고대 경전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도 표현된 신비로운 우주적 진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어마어마한 인식으로 폭발적으로 전환했다. 신성은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며 유기적이다. 생명의 모든 체계는 신성하지만 일단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신성하지 않다.

 

- 깊고 고요한 평온함이 나를 덮쳤다. 나는 방금 경험한 것에 충격을 받거나 흔들리거나 심지어 놀라지도 않았다. 전혀 나는 너무나 고마웠고, 신성한 친밀감을 다시 경험함으로써 경외감이 물밀 듯이 몰려옴을 다시 한번 느꼈다.  
 

- 신앙심이 더욱 돈독해지고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능력이란 결국 당사자를 수도원이나 정신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음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이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러한 인식이 뚜렷해진 이상 내 존재의 분열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비한 옛날이야기처럼 내 능력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능력을 받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에게 나를 평가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꼈다. 그러나 미래를 어떻게 계획하든 내가 느끼는 내 인생의 종착역은 '불행'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내 기술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를 극복하게 되었다. 암에 걸린 한 여자를 상담하고 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나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녀와 나는 출판사의 좁은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읽기를 마치고 말을 하기 전에 잠시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 전체에 암이 퍼져 있다고 할 참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이 엄청난 불행이 왜 자기에게 닥쳤는지 물어오겠지.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와락 짜증이 났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체념하고 막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무릎에 턱 얹더니 이렇게 말했다. “캐롤라인! 내가 아주 몹쓸 암에 걸렸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 그 듣기 싫은 질문에 맞닥뜨리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거의 고함을 치다시피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에너지 때문에 내 얼굴은 갑자기 붉어지고 말았다. 그 말은 나를 밀어젖히고 내 성대를 이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을 뚫고 나왔다. 나는 앞에 앉아있는 그녀를 더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동전처럼 조그맣게 쪼그라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머리에서 "꼼짝 말고 서 있어!"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어떤 목소리가 내게서 나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살아온 인생과 살면서 맺은 모든 인간관계를 죽 돌이켜봐도 되겠어요?"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겪은 모든 두려움을 함께 짚어볼까요? 그리고 이 두려움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지배하고, 더는 생명의 에너지가 당신에게 자양분을 줄 수 없도록 만들었는지 조사해 볼까요?" 이 '존재'는 그녀가 자기 삶의 모든 세세한 사항을, 그야말로 낱낱이 돌이키도록 이끌어주었다. 가장 사소한 대화까지도 기억했고, 혼자서 울어야 했던 엄청난 고독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으며, 아무리 작을지라도 의미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기억하게 해 주었다. 이 '존재'는 우리 삶의 그 모든 순간과 아울러, 그 순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정신적·정서적·창의적·육체적 활동은 물론, 심지어 휴식까지도 다 알고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은 기록된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태도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힘을 가져오는 근원이며, 따라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 직관과 더불어 일하면서 나는 질병의 정서적·심리적 원인을 규명해 왔다. 육체적·정서적 스트레스는 의심할 바 없이 특정 질병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른바 A형 사람들과 심장질환의 관련성 등은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그러나 내 통찰력이 특별하다는 것은 정서적·영적 스트레스 또는 불안이 모든 육체적 질병의 근본 원인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일부 정서적·영적인 위기는 특히 신체의 특정 부위에 발생한 문제와 상응할 때가 많다. 예컨대, 심장병 때문에 내게 온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살이에서 사랑을 거부당한 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요통이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암 환자들은 과거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나 풀지 못한 정서적 문제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으며, 혈액순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 간의 골이 깊은 갈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이유로 병들기도 하고 치유되기도 하는 같은 종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경험상 공통되는 정서적·심리적 문제도 공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포기와 상실, 배신의 느낌을 두려워한다. 분노는 기독교도나 힌두교도의 몸에서처럼 유대교도의 몸에도 독소지만, 반대로 우리는 모두 사랑에 저절로 이끌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든 문화권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 라첼의 집에서 나는 꿈인 듯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의 절반은 검은 성모상, 라첼이 차를 끓이는 러시아 주전자 사모바르, 러시아식 창문 커튼 레이스 등 러시아풍으로 장식되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절반은 작은 토템 막대, 벽에 걸려 있는 인디언 담요 등을 포함한 순수한 아타바스카(지금의 캐나다 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부족 - 옮긴이) 인디언 식이었다. 사모바르를 보다가 고개를 든 라첼은 토템 막대를 보고 있는 내게 말했다.  
"토템 막대를 읽을 줄 아시는가?" 
"아뇨. 이걸 읽으실 줄은 몰랐어요." 
"읽을 줄 알고말고, 토템 막대는 부족 수호신에 대한 영적인 말씀이지." 라첼은 말을 이었다. "여길 봐, 꼭대기에 있는 짐승은 곰이야. 곰의 영혼은 강하고 사냥감을 끝까지 쫓아가는 영리한 지혜를 가졌지. 하지만 절대로 살생을 위한 살생은 하지 않아. 자기를 지켜야 할 때, 아니면 힘을 되찾기 위해 오랜 잠을 자야 할 때만 사냥을 하지. 그 곰의 영혼이 우리 부족을 지키는 거야. 우리는 그 혼을 배워야만 해." 

 

- "이 담요가 거의 다 되어갈 때, 담요 만드는 사람의 꿈에 대영혼이 나타나서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어. 담요 만드는 여자가 대영혼에게 말했지. 지금 만드는 이 담요를 다 끝낼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안 되겠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러라는 대답이 들려왔어.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진 편이었지. 그녀는 담요를 완전히 끝내고 그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어. 바로 그녀의 영혼이 이 담요 속에 선하고 강하게 깃들어 있어. 그것이 내게 '힘'을 주고 있다네."

 

- 삶은 단순하다고, 라첼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 잘 보살피고 땅도 잘 돌보라고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거야. 그런 다음에는 우리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지. 그러면 '끝나지 않은 일'을 뒤에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해. 잘못된 일은 사과하고, 부족에서 맡은 책임도 다 넘기고, 우리의 시간을 자기네와 함께 나눈 데 대한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이지. 인생은 실로 그렇게 간단하다네."

 

- "내일 밤 의식에 갈 거야. 포틀래치 의식(북미 북서부 인디언 사이에서 선물을 나누는 행사-옮긴이)이야. 한 남자가 땅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그는 자기 물건을 전부 부족 사람들에게 나눠줄 거야. 기다란 접시 같은 데다 옷과 연장을 늘어놓으면, 우리 부족 사람들이 그의 소유물을 상징적으로 넘겨받게 되지.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가 부족에서 지고 있던 책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그의 영혼도 주어진 일을 마무리 짓게 되는 거야. 그러고는 우리 곁을 떠나지." 

- 라첼이 보여준 평온하고 담담한 태도, 특히 죽음을 말하는 침착한 이야기에 놀라서 나는 입이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 문화에는 온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라첼은 내가 이해하고 있던 모든 것, 특히 영적인 차원의 삶이나 신에 대한 개념 등과 같은 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라첼과의 만남은 소낙비처럼 갑작스러웠다. 사실, 라첼이 차와 함께 건네주는 진실을 원시적인 신앙에 불과하다고 치부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본능은 라첼이 나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신을 안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 창조의 에너지는 습관의 반복을 거부한다. 반복과 창조라는 이들 두 힘은,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서로 반목하면서,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도록 몰아세운다. 2차크라의 에너지는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에 대처하면서 정신적·신체적·영적 문제 내지 주제에 대한 창조적인 해결책을 얻는 데 필요한 주요 자원의 하나다. 이 에너지를 차단하면 발기불능이나 불임, 질 감염, 자궁내막증, 우울증 등이 나타난다. 또한 영적인 성숙도 방해받는다. 이는 마치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더 보고 싶지 않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삶을 배우는 과정과 상호작용을 하고 싶지도 않아"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창조의 에너지가 계속 흐른다면, 그 에너지는 우리 삶의 형태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더욱 많은 내용을 가르쳐줄 것이다. 

 
- 두려움의 목소리에 최면이 걸리면, 2차크라에서 에너지를 모아 오는 소순환小循環  창조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타락하기 때문에, 명철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말의 뜻도 그렇지만 상징적으로 보더라도, 2차크라는 탄생의 통로다. 신생아가 그렇듯이, 새로 태어난 아이디어가 자신의 에너지장을 갖고 생존하려고 발버둥 친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산시켜 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아이디어 또는 관계에 (그 아이디어나 관계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숨 쉬는 공간을 부여하기를 겁내는 사람들이 많다. 

- 예컨대 아이디어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할 때면 두려움에 휩싸일 수도 있고, 그 아이디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내가 낳은 아이디어이므로 내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모든 일과 사람을 내가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반응은 모두 '에너지의 질식', 즉 우리가 두려운 부모나 동반자를 숨이 막히도록 통제하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많다. 


- 쿤달리니 에너지는 심령과 육체의 서로 모순된 에너지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1차크라에 자리 잡고 있는 기단에서부터 머리의 '왕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크라 모두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척추 둘레를 휘감고 있다. 쿤달리니 요가에서는 이 에너지를 조절하여 쿤달리니를 체험하는 방법, 즉 성적인 에너지를 훈련시켜 영적인 황홀경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 쿤달리니의 영적 수행은 성적인 에너지를 육체적인 오르가즘을 통해서 정상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성적인 에너지가 척추를 타고 올라가서 마침내 신성과의 영적인 합일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 오르가즘과 같은 해방감에 포함된 깊은 명상의 순간에 변화된 의식 상태를 체험했다고 말하는 신비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 성적인 에로티시즘은 대개 오르가즘을 생성하고, 이러한 에너지 전압의 배출은 육체적·정신적·심리적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오르가즘은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모은 '에너지 파편'을 해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되, 좀 더 즐거운 방법 중 하나다. 운동과 창조 행위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에너지 해방법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를 배출하지 못하면, 이 에너지가 다시 우리 몸으로 와서 우울증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범위에 걸친 반작용을 일으킨다. 그래도 쿤탈리니 경험은 저절로 일어난다. 

 

- 어떤 남자가 결혼 생활 동안 사랑받을 거라고 기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동료의식만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이란 뭔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사건일 뿐,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축복'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 존중의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번에 하나씩 도전해 가면서 삶의 역경 속에서 이 자질을 획득하는 것이다. 

- 특히 3차크라는 물리적 몸의 경계에까지 공명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한가. 허약한가? 신체는 온전한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불구인가? 아름다운가, 보기 흉한가? 키가 너무 큰가, 작은가?' 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육체적인 장점이나 단점 모두 환상이며 단순히 삶의 받침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신체의 특징을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는 영적인 성인기로 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다.

- 사실,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물리적인 세계는 우리의 교실이다. 우리 각자에 대한 도전은 바로 이 교실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신체와 환경, 신념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힘을 주위의 물리적인 환영 속으로 새어나가게 할 것인가? 거듭 말하지만, 3차크라의 도전은 외부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스스로 자신의 힘과 자아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평가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3차크라의 도전을 생각해 보라. 물리적인 세계가 환영이라고 해서, 휠체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육체적인 문제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천사를 믿어?" "아, 그럼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됐어. 그다음에 나한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거야. LSD를 복용하고 유체이탈을 경험했어. 나 자신이 공기보다 더 가볍게 몸 위를 떠다니고 있는 걸 본 거지. 그리고 나는 수호천사라고 불리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났어. 천사가 내게 불평을 늘어놓았어. '루시, 루시! 당신의 수호천사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천사가 말했어.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보여드릴게요. 그러고는 나와 똑같이 닮은 또 다른 나를 가리켰어. 그 또 다른 나는 수천 겹의 고무 밴드로 완전히 묶여 있었어. 수호천사가 말했어. '저게 바로 내가 보는 당신 모습이에요. 저 고무 밴드 하나하나가 다 당신을 조종하고 있는 두려움이에요. 당신은 너무나 많은 두려움에싸여 있어서, 내가 하려는 얘기를 전혀 들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두려움에 완전히 조종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아무리 해주려고 해도 당신한테 들리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지요.'"

- "그런 다음 수호천사가 이렇게 말했어. '여기 가위가 있으니까, 저 고무 밴드를 다 잘라버리고 자유를 찾으세요.' 그래서 바로 그렇게 했지.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잘라냈어. 그러자 몸속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밀려들어오는 에너지가 느껴졌어. 수호천사가 말했지. '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지요?' 공기보다 가볍고, 평생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지. 웃음이 터져 나와 참을 수가 없었어. '당신은 지금 다시 몸속으로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보여드릴 게 있어요.' 수호천사가 이렇게 말했어."

 

- "천사가 내게 미래를 보여주었지. 관절염으로 완전히 병든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어. 왜 내가 이 상황을 견뎌야 하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더군. 그냥 내가 참아야 하는 거래. 하지만 천사는 내가 가는 길은 어디든 나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어. 그러고는 나를 몸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했어.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딸애한테 이야기해 주었지. 그리고 우리는 거의 두 달을 계속 웃어댔어, 그 뒤로 딸과 아주 가까워졌지." 

 

- 나는 가는 곳마다 루스와 동행해서 워크숍 참가자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루스와 그녀의 수호천사는 쌍둥이였다. 그녀는 신성 에너지의 비물질계가 형태와 물질로 이루어진 물질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믿음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장애를 점차 영감의 원천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한계는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이것은 네자와 호드의 생명의 나무, 우리의 '영적인 다리'의 영향이다. 

- 물리적 상황의 환영을 극복하고 영혼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을 재배열'한다. 우리가 매번 행하는 선택으로 우리는 사람을 현혹하는 물리적인 세계에 가깝게 가기도 하고, 영혼의 힘에 에너지를 투자하기도 한다. 일곱 차크라는 이 본질적인 교훈의 각기 다른 모양새 내지 현현을 뜻한다. 내면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몸, 건강, 마음, 영혼을 뒤덮고 있는 물리적인 세계의 권위를 제한하게 된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영혼을 강화하는 모든 선택은 에너지장 역시 강화한다. 그리고 에너지장이 강해질수록 부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경험에 연결되는 일도 적어진다. 
 

- 방문할 때마다 마거릿과 올리는 더욱 친해졌다. 올리의 '힘'은 마거릿에게 치유와 영성에 대한 책을 읽도록 이끌었으며, 그리하여 마거릿은 점점 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그녀는 부모님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 '정상적인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해서 '정상적인 것'만을 아이에게 가르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을 찬찬히 생각하게 되었다. 

 

- 마거릿은 자기 일생을 통틀어 가장 어두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올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 세계의 사고방식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를 다시 보든 안 보든, 올리와 무관하게 자신은 이제 이전처럼 치유와 영성을 생각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거릿은 계속 배우고 싶었고, 결국 남편에게 올리를 계속 돌보겠다고 말했다. 
 

- 의심할 바 없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커다란 고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거릿처럼, 성인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승화시켜 다른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기회로 이용할 수도 있다. 

 

- 제니스를 만나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녀가 자기 상황에 짓눌려서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울 만큼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명상이나 시각화 같은 에너지 기법들을 배워서 건강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대화 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몸속에 관을 집어넣었을 때, 제 몸에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편에게는 경제적인 짐만 되고, 제대로 된 아내 노릇도 못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병원에서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보게 되었어요. 그들에 비하면 제 상태가 별로 나쁘지 않다고 결론 내렸어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말했지요.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요."

 

- 제리는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해방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제 내면에 그런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거짓말쟁이와 사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나으니까요." 제리로서는 제인에게 도전하는 것이 엄청난 혁명이었다. 그 한 가지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있음을 배웠고, 꼭 해야 할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 게리라는 남자가 워크숍에서 이 과정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전에는 항상 낡은 청바지와 스웨터 따위를 입었는데, 갑자기 정장을 입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오랜 습관에서 이탈하는 위험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돋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변화를 자신의 개인적인 발달에 대단히 중요한 한 걸음으로 보았다. '선망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대상이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수수한 이미지를 고수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하는 친구들의 집단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 우리는 이러한 자기 탐구 형식의 질문을 쉽게 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대답들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전에 이런 유형의 자기 시험은 신비가나 예술가, 철학가, 그 밖의 창조적인 천재들만의 영역이었다. '자아'와의 만남은 인간 의식의 변형을 활성화한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와 신비가가 내린 자기 시험의 결론에는 육체적이고 초월적인 에로티시즘과 무아경의 고양된 상태뿐 아니라, 우울증이나 자포자기, 환각, 환영, 자살 기도, 극도의 정서적 혼란 등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 대가가 너무 크고 위험하므로, 영적인 깨달음이 재능 있는 극소수만을 위한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 그러나 1960년대의 혁명적인 에너지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그럼, 나는?'을 노래하게 만들었다. 그 뒤 인간의 의식에 대한 움직임은 우리 문화가 4차크라의 원형적인 출입문을 통과하도록 몰고 갔다. 그것은 심장의 비밀을 밝혀냈고, 성인 인격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의 세밀한 부분을 또렷이 드러냈다.

 

- 4차크라의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이혼을 증가시킨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4차크라의 개방은 결혼의 원형을 협력 관계의 원형으로변형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대다수의 결혼에서는 전통적인 결혼에서 요구하는 '자아'의 포기 대신 오히려 성공을 위한 강한 자아 감각을 요구한다. 

 

- 혼배성사의 상징적인 의미는 그 자신의 인격 및 영혼과 먼저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공적이고 친밀한 협력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혼의 증가는 4차크라의 열림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되었는데, 이 4차크라의 열림은 사람들을 먼저자기 발견으로 인도한다. 많은 사람이 결혼 생활의 파경에 대한 원인을 배우자와의 정서적·심리적·지적 욕구의 불일치로 설명하면서, 진정한 협력 관계를추구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 4차크라의 열림은 또한 건강과 치유, 질병의 원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바꾼다. 한때 질병은 본질적으로 아래쪽 차크라가 원인이 되어, 즉 유전적 특질과 세균 때문에 발병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발병의 원인을 유독성 정서·스트레스에서 찾는다. 치유는 정서적인 손상을 회복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전반적인 의학 모델은 심장의 힘을 중심으로 다시 형성되는 중이다.

 

- 5차크라는 우리 자신의 의지력을 둘러싸고 있는 도전과 신의 의지에 대한 느낌을 드러낸다.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는 '신의 손’에 우리의 개인적인 힘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다른 위대한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붓다도 이 의식 상태, 즉 신의 의지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합일에 대해 말했다. 
 

-  5차크라는 선택 능력의 본질을 학습하는 데 포함된 수많은 정서적·정신적 투쟁에 감응한다. 일단 질병은 5차크라와 연관된다. 선택은 우리 삶의 모든 세부사항에까지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질병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는 '당신께서 택하시면 따르겠습니다'라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두려움과 놀람의 주기적 순환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되면, 최상의 상태로 나타나는 ('신성한 참견'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 발생과 기적적인 우연의 일치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게 된다.

 

-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에밀리는 TJ를 가르치게 된 것이 스스로 원한 일이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그냥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생각을 했더라면 누군가를 돕겠다는 그런 제안을 절대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이다. 자기 성격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도, 그 순간 TJ를 가르치겠다고 말한 걸 보면, 틀림없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저절로 말하게 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듬해 가을, 학교로 돌아갈 때쯤엔 그녀도 TJ의 공부를 가르쳐줄 의도가 자신에게 분명히 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이유야 어쨌든, 에밀리는 길잡이를 인식하는 은총을 입었다. 다른 사람을 돌봐주기 시작하자마자,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은 줄어들었다. 그녀는 하늘이 모든 사람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산 증인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녀의 믿음은 한층 새로워졌다.  
 
- 그러한 변화에서 회복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늘 똑같이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서는 변화의 에너지가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기를 바란다.

 

- 심지어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 삶의 행복한 부분을 휩쓸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 우리의 외로운 순간들은 종말을 맞이하고 생의 새로운 부분이 시작될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는 항상 끝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진리를 약속한다. 

- 의식은 오래된 것을 해방시키는 능력이며, 모든 것은 가장 적절할 때 끝난다는 자각과 함께 새로운 것을 포용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변화 없는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사는 한 이 진리를 배우기 어렵다. 따라서 의식화된다는 것은 완전히 현재에 사는 것이며,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도 똑같은 내일을 맞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도덕경>이 충고한 대로,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와 함께' 흐르려고 노력한다. 똑같은 상태로 두려고 애쓰는 것은 무모할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 최상의 에너지를 투여하여 내일 경험하게 되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되 통제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다.

- 한 워크숍에서 나는 참가자 모두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한 남자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기가 매우 두렵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사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를 위해 원하는 일을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또 그의 삶에서 사업은 에너지의 바다가 아니라 한 방울의 에너지에 불과하며, 그 밖의 풍부한 창의력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에게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서 경영진이 자신을 해고한 사실을 알게 된 광경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자, 어떻게 반응하시겠어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에 마음을 멈추고 상상해 보니, 해고당하는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일할 직장이 마음을 끌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다. 

- 이것이 초연함의 의미다.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깨달음이 바로 초연함이다.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더 큰 역동성이 나와 함께 움직인다. 몇몇 사람이 나를 해고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그 환상을 믿는 쪽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당신을 사로잡아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아버리면 그 '음모'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진실이며, 초연함을 동반하는 상징적인 통찰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상이다.

-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하루아침에 "나는 오늘 의식화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이 만나는 신비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매체들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시험하는 관계와 사건을 계속해서 경험한다. 우리의 마음은 개인적인 혼란을 겪고 나면 왜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아가는지 의문을 품는다.

- 스콧과 헬렌은 환경 운동에 대한 공로와 자급자족의 생활을 추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땅으로 돌아가기'라는 삶의 방식은, 1930년대만 해도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 그들은 일종의 반역자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들은 손수 집을 짓고, 손수 기른 채소와 과일을 먹고 살았다. 70년 이상을 땅과 조화를 이루고 살면서, 1995년 죽는 날까지 헬렌은 그런 삶의 방식대로 살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환경을 존중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권유하는 철학적인 글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수많은 강의도 했다. 그중 하나가 <조화로운 삶 Living the Good Life>인데, 이 책에서 그들은 자연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생활 방식이 얼마나 이로운지 쓰고 있다. 신의 인과율이 지닌 더욱 위대한 순환에 대한 그들의 이상과 깨달음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있다. 

- 스콧은 100세가 되던 1980년 초에 죽었다. 헬렌이 내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 그녀를 사귀는 특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남편이 선택한 죽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스콧은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방식대로 더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스콧이 난로에 넣을 땔나무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나무를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더는 자기 임무를 다할 수 없고, 책임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이는 더는 음식을 먹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했지요. 그이가 음식을 끊고 침대에 누워 지내는 3주 동안 나는 그이 옆에 줄곧 같이 있었어요. 나도 그이에게 무슨 음식을 권하거나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지요. 스콧이 내린 그 선택의 깊이를 알았기 때문이었어요."

 

- 스콧 니어링은 오랜 시골 생활의 주제였던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죽기로 결심한 지 3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헬렌은 덧붙였다. "나 역시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을 즈음에 이르면, 서슴지 않고 같은 길을 가려고 합니다. 죽는 것은 전혀 두려워 할 일이 아니에요. 떠나기 적절한 때를 그냥 알아채기만 하면 되지요. 그리고 음식을 끊어서 시간에 협력하면 되고요. 그냥 몸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절대 그리 큰일이 아닙니다."  

 

- 만약 죽을 때가 왔음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인식에 기꺼이 협력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아마도 스콧은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살기 위해 노력했고, 오직 진실만을 따르겠다는 이상과 합치되게 산 결과, 숨을 거둘 시간이 왔음을 내면에서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입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질병으로 무너지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직관과 협력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온전한 의식을 가진 채로 떠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의식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식을 가지고 죽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의식적인 삶을 영위해 온 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 가운데 하나다

- 소걀 린포체는 저명한 스승이자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의 저자다.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성품 때문에 '웃는 린포체'라는 별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84년, 나는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알고 지낸 적은 없었지만, 티베트 스승들에 대한 책은 수도 없이 읽었다. 많은 티베트 스승은 시간과 공간의 일상적인 법칙을 초월해서 산다고 한다. 그중에는 공중부양을 한다든가 맨몸으로 한 시간에 50킬로미터를 달린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티베트 스승들은 '능력'을 증명해 보라고 직접적인 요청을 받을 때마다 항상 다른 스승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비껴간다'는 내용을 읽은 적도 있었다.  

 

- 지난 25년 동안 이 여성이 사용한 이름은 오직 하나, '평화의 순례자'였다. 그녀는 봉사의 길을 보여주는 기도만으로 겸손하고 심오하며 영적인 삶을 살았다. 52세에 그녀는 내면의 안내를 들었다. 평화를 위하여 전국을 걸어서 순례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서품식' 지시였다. 그녀는 말 그대로 윗도리만 걸친 채 빈손으로 걷기 시작했다. 쉴 곳이 정해질 때까지 걷고, 무엇이든 주어지는 것만 먹으며 걸었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주는 신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25년 동안 순례하면서, 평화의 순례자는 수십만 명의 사람을 감동시켰고, 그들은 또 신과 교감하는 그녀의 은덕을 입었다. 그녀에게 들은 두 가지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 '평화의 순례자'는 평생 '배움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외부적인 갈등을 겪고, 다음에는 내면적인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마침내 신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쳤을 때, 더는 갈등 없이 배울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고 말했다. '평화의 순례자'는 호크마의 생명의 나무의 정수인 다함없는 지혜의 근원, 그리고 비나의 생명의 나무의 정수인 신성한 이해와 이성이었다. 

 

-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피오 신부와의 15분 간의 약속을 위해 2년 반을 기다린 적이 있다. 신비주의 가톨릭 사제인 피오 신부는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이적을 보이는 '살아 있는 성자'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상처'인 '성흔'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대수롭지 않은 일화일 정도였다. 성흔은 젊은 사제였을 때 그의 몸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린이 그 신비를 만나기로 한 날, 그린은 먼저 피오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했다. 약속은 미사를 마친 후였는데, 그린은 피오 신부를 만나는 대신 교회를 떠나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가버렸다. 왜 약속을 어겼느냐고 묻자 그린은 대답했다. "나는 그분이 내 삶을 바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 그 내용에 공감한 퍼는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습관을 엄격한 치유 식단으로 바꾸었다. 은둔과 명상, 지고의 존재에 대한 헌신으로 마치 수도승처럼 생활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퍼는 매사를 낙천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희망이 생기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그는 자기 영혼을 현재의 순간에 둘 수 있도록 연습하고, 완수하지 못한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식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명상하는 동안 그는 의식의 초월 상태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놀라울 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퍼는 신비주의에 대한 책을 읽다가 자신이 경험한 초월 상태와 비슷한 신비 체험에 대한 내용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 다음 퍼는 자기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 무아경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체험했다. 그 상태에서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으며,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다'고 느꼈다. 그 후 퍼는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몸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사에게 가서 다시 혈액 검사를 했다. 아직도 에이즈 바이러스가 남아 있긴 했지만, 면역체계는 아주 건강한 상태였다. 죽음에 직면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충만하게 살아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이 영적인 수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의력도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 "얼마나 오래 살지는 저도 모릅니다." 퍼는 내게 말했다. "그러나 제가 이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이 바이러스가 저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하루하루를 더 충만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한테, 에이즈 바이러스 양성이 되는 것이 지금 알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저는 그 말에 동의하고 믿을 겁니다. 이 내면적인 충만함은 여태까지 경험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아십니까? 시한부 환자들이 오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신에게 벌을 받았다거나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만약 신께서 이것을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마음가짐을 배워야 함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갈등은 뚜렷하지만, 물리적인 질병을 넘어서 왜 자신의 영혼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신에게 이렇게 말할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예수께서 하셨듯이 제게 꼭 필요한 것, 즉 두려움을 없애고 용서하기 위해 그 은총을 잘 활용하겠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은총을 받아들여서 육체적인 질병을 몰아낼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 "기도를 통한 치유가 실제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질병보다 강하다고 느끼는, '은총을 주시는 신의 에너지'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입니다."

 

- "모든 질병이 치유될 수 있냐고요?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다 고쳐질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에 직면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질병을 참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을 때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음은 적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입니다. 죽음은 아마도 포기의 궁극적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가버린 사람들과 만나봐야 하는 이유지요. 그들은 분명히 우리가 도착할 때 환영 파티를 해 줄 겁니다." 

- "기도를 통한 치료의 신뢰도가 영적인 의식을 가진 뉴에이지 운동 덕에 더욱 높아지고 있냐고요? 그렇습니다. 권능을 가진 기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신과 연결되는 것을 뜻합니다."
 
 - "나를 만나고 돌아간 사람들은 신과 함께하는 기도의 삶을 스스로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에게 없는 힘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제가 보통 사람들보다 신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잘못이며 중대한 실수입니다. 개인은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는 단지 에너지에 '시동을 걸' 뿐이며, 운전은 각자의 몫입니다."

 

- 론의 일은 지금까지 항상 존재해 왔고 항상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치유의 한 가지 형태를 다시 드러내는 사건을 의미한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믿음을 통해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지상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목표는 환상을 초월하여 우리 영혼의 내면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으며, 그러므로 사랑과 지혜로 행동하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들에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 
 

      

 

 

 

 
영혼을 위한 7단계 치유의 힘
『영혼을 위한 7단계 치유의 힘』 은 〈에너지 의학과 직관〉, 〈신의 형상을 쫓아 창조되다〉, 〈1차크라: 부족의 힘〉, 〈2차크라: 관계의 힘〉, 〈3차크라: 개인적인 힘〉, 〈4차크라: 감정의 힘〉 등을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캐롤라인 미스
출판
드림엔
출판일
2020.08.15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