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무지(MOOJI) / 서상혁 / 신명은
원제 : Vaster Than Sky, Greater Than Space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20.07.24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각이 조화롭지 못한 경우가 존재한다. 지금 상황이 전혀 그렇게 느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사로잡힌 듯이 그 감각을 느끼며 굳어가는 기분은 일종의 '석화'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나는 이 상황/감각을 겪어본 적이 있어'라는 과거의 특정 순간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감정보다는 감각이다.
때로는 반대의 입장에서, 때로는 동일한 입장에서 재체험을 하게 된다. 뭔가가 해소되기도 하고, 여전히 괴롭기도 하다. 연결되는 경험은 최근의 것이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묘하게 느끼는 점은 그 경험들이 반드시 '강렬했던'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떠오르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고 지내던 것일 때도 있었고, 떠오른 뒤에도 '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내가 다시 감각했던 것은 내면적 '불일치'였다. 그에 대한 반응은 그 순간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되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 자주 떠오르는 경험들은 10살 근처다. 살아오는 동안 기본 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세부적인 취향이나 행동 양식은 몇 차례 크게 변했었는데 이 시기도 그런 시기였다. 당시는 가족 구성원의 변화와 거주지의 이동으로 이전까지는 매일 같이 뛰놀던 강변과 자연에서 멀어져 일종의 도심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던 때였다.
무지의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은 레너드 제이콥슨의 <지금 여기에 현존하라>와는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무지 또한 '에고'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이라는 표현이 레너드의 '에고'와 좀 더 유사한 느낌이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할 것을 강조하지만, 무지는 '나'라고 의식하는 '의식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할 것을 권하는 반면 레너드는 그 순간을 집착이나 판단 없이 온전하고 충만하게 '감각'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손가락들은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고, 그에 대한 표현의 차이일 뿐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다르다'고 느낀 부분은 에고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부분이다. 레너드의 경우 에고를 안심시키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포용적인 자세를 권했다면, 무지는 그것의 존재에 집중하지 말 것을 권한다. 둘 모두 '에고'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를 대하는 태도적 차이가 존재했다. 무지의 설명에 따르면 레너드의 지향점은 두 번째이며, 그 너머에는 그 모두를 포함하는 공간으로서의 참자아가 존재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레너드의 조언이 더 끌리는데, 여러모로 나는 아직 강한 에고적 상태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설명하는 에고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 건너야 할 심연과도 같다. 그것은 '없애야' 하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더 높은 차원에서 끌어올려지며 뛰어넘어야 할 환상이다. 신비주의에서는 이를 특정 마법적 존재로 보기도 한다.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주장하는 태도, 혹은 이상적 자신만을 긍정하는 태도 또한 이원적이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실제의 자신은 '내가 감각하는 자신'과 다를 수 있고, 그 순간의 '나' 또한 나임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자세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탈이기주의적 삶을 가능케 하리라 생각한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을 믿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곧 진리이기를 원합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직접 보고 이해하게 된 것은 자아탐구야말로 진리로 가장 곧장 가는 길이란 사실이었습니다. 자아탐구는 간단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집중력이 모자라서 오직 쉽고 단순하고 즉각적인 것에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30~40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인터뷰를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이 삶의 시기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게 나인 걸 난들 어쩌라고!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고!"라고 하며 자신을 어떤 고정된 존재라고 확신한다는 것 또한 말입니다. 언제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고 하더니 얼마 후에 또 인터뷰를 하면 "그런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는다.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그림이지요. 이 많은 정체성 중 누가 진짜 나일까요?
- 오늘 아침 정확히 7시 44분에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생각했던 것도 기억해 낼 수 없으면서, 열다섯 살 적 이야기를 하며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심하게 왜곡되기 쉽고 불확실한 기억을 딛고 서 있을 때가 많지만, 대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 자신에 대한 신념을 더 깊이 살펴보다가 마침내 그 신념들이 거짓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왠지 우리는 여전히 어떤 주어진 시점에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곧 나라고 확신합니다. 정체성이란 것이 원래 불안정하고 계속 변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너무나 자주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합니다. 시간에 얽매인 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곱씹으며 몸부림치는 마음말이지요!
- 우리는 항상 일관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참된 존재는 한없이 넓어서 제가 가끔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레게음악, 청량음료를 즐기는 것 모두를 넉넉히 품을 수 있답니다. 제가 어떻게 제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어요? 저는 유달리 종교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일 필요조차 없습니다. 어떤 존재가 될 필요도, 무엇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나 자신이어야 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의 개념마저 뛰어넘는 자유 말입니다. 나는 진실로 변치 않는 참자아입니다.
- 신념과 정체성이 마음속에 밀려 들어오기 전까지 삶은 얼마나 단순했던지요? 하지만 그 후, 본래 아름다운 마음의 영역은, 일상적이고 제한적인 개인의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화된 마음의 너머에는 더 높고 맑은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난 존재의 영역입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기쁨과 빛과 평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살아내야 할 삶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내가 곧 삶입니다.
- 우리는 인지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확인이 될 때까지 내면에서 계속 살펴보세요. '나'는 인지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존재합니다. 이것을 아는 의식으로서 머무세요.
-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깊이 감명을 받을 때까지 진리로 가는 여러 길을 탐험해 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무언가를 찾으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자리 잡는 느낌이 들 거예요. 비이원론과 불교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고, 또 다른 길에 끌릴 수도 있어요.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길에 전념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지 마세요.
- 제 말뜻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이 단지 그 노력을 '지켜보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은 우리 안에서 관찰되고 있습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모든 수행과 훈련을 삼켜버립니다. 어떤 수행법은 신체 또는 에너지 차원에서는 유익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수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바사나 vasana를 닦아내고, 차크라 chakra를 통과하고, 호흡을 조절하고, 푸른빛과 수정 등으로 오라를 정화하고 싶어 합니다. 마음은 분주하게 바쁜 것을 좋아하고 일을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마음은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참자아를 깨닫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생각은 버리세요. 이 생각은 함정이고 내가 개인이라는 느낌만 더 강하게 할 뿐입니다.
- 대개의 경우 우리는, 마음을 하인이 아니라 동업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우리의 모든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깨달음을 직접 가리켜 보이고 있지만, 마음은 그것을 회피하고 여러분을 계속 잠재우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은 자신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마음은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과 기억의 영역 속에 있는 것까지도 -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은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떤 현상이든지 다 삼킬 수 있으나 의식만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의식이 나를 삼켜버리기 때문이야."
-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정말로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상태로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하면 여러분은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려고 무척 애쓸지도 모릅니다. 정말 황당하게도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조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에 주의를 계속 기울이세요.
- 믿음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나아가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적 체험을 통해 깨달아지고, 느껴지고, 또 참이라고 입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당장 가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이미 여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우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생 끝에 받는 트로피 같은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진리를 현실로서 깨달아야 합니다.
- 마음은 바람과 같고, 우리의 참자아는 공간과 같습니다. 바람의 본성은 이리저리 부는 것인데 그러려면 공간이 필요하지요. 바람을 막는 무언가가 있어 바람을 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의 존재를 알 수 있어요. 공간 자체는 움직임 없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공간은 바람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바람은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요. 바람의 방향은 항상 바뀝니다.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느 쪽으로 불든, 바람은 절대로 공간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지켜보는 것이 참자아의 특성입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자아를 떠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깊은 깨달음 끝에 이것이 단순히 생각을 넘어서 앎이 되면 자유로워집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결코 참자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움직임은 본래 일시적인 것이에요. 우리는 '움직임'인 동시에 그 움직임을 경험하는 '멈춤'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감춰진 것'인 동시에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바로 말이죠. 무엇이 이를 방해하는 걸까요? 낡은 사고방식과 습관, 그리고 과거의 나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급진적일지도 모를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큰 모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라고 느껴질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이 많은 한편, 정작 본인의 힘은 별로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마치 갈증이 무척 나서 물을 동이째 들이켜고 싶은데도 손에 티스푼 하나 달랑 들고 샘터에 오는 격이지요.
-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제가 이미 참자아라고 얘기하는 건가요?"
그럼 저는 이렇게 답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 마음이 허튼 생각과 아우성으로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제가 참자아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아우성치게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분명 붓다는 아우성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거예요."
"붓다가 아우성치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를 그냥 무시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생각을 무시한다는 말이 어떤 생각을 멈추거나 억누르려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종종 삿상에서 사람들이 제게 하는 질문을 듣고 있노라면, 저는 그들이 아직 자기 자신을 개인으로 강하게 믿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예로 어떤 분은 과거에 자기가 잘못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계속 재생되는데 이게 어찌나 심한지 꿈에서도 계속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는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후회에서 벗어나길 원했지요. 그렇게 바라는 것은 이분만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똑같이 느끼지요. 하지만 "나는 삶에 붙잡혀 있고, 이제 이렇게 사는 것은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뿐입니다. 저는 개인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정체성을 의식하고 스스로에게 물으세요.
"무엇이 이 정체성을 의식하는 걸까? '내 이야기'를 의식하고 있는 그것도 뭔가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 개인의 이야기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다만 우리가 그이야기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바람에 그것이 우리 삶의 질을 크게 저하시켰음을 인정하세요. 아마 지금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차렸을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안의 무언가가 그저 '의식하고 있음'의 중요성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가리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의식함'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입니다.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자마자 여러분은 그 주의가 의식의 자리에서, 또 의식 속에서 관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 존재의 근원인데도, 의식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듯합니다.
- 우리 안에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바라볼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굳이 그 측면들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된답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 보는 법을 배우세요. 그러나 사건들을 해석하려는 경향은 경계하세요.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그저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에 불과합니다. 진짜 독은 이를 해석하려는 경향이지요. 즉,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언제나 개인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 이렇게 모든 일을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우리가 스스로 상처를 받도록 만듭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독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그것은 근거 없는 불평불만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하답니다. 그러니 단지 바라보세요. 바라보는 동안에 '이야기'가 흘러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의식할 뿐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 이 이야기의 요점은, 일의 결말이 어떨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이 잘못되었다고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저 고요히 있으며 삶을 믿는다면 - 하지만 기다리지는 않는다면 - 우리가 고요해질수록 사물의 실상을 더욱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가슴은 이러한 지혜에 대한 감사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 마음은 항상 조급하게 움직이며 때 이른 판단을 내리려 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물을 그릇되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사실 삶의 시련처럼 보이는 것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가능성을 열어주고, 우리가 더 좋은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아름다움을 더욱 깊은 의식 수준에서 음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런 삶의 풍파는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훌륭한 동기이자 촉매제이지요. 이 모든 것이 삶의 일부입니다.
- 에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왜 에고만 꼭 집어서 말씀하시나요? 에고도 비에고도 존재도, 비존재도 모두 허상이잖아요. 모든 것은 단지 마음과 참자아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 아닌가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에고적 마음(egormind)이라고 믿는 한, '다른 모든 것들'은 강한 현실감을 갖게 됩니다.
- 궁극적으로는 오직 지고의 브라만이 존재할 뿐이며, 우리는 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것', 즉 브라만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단지 지적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서 진정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원하지만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다들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에고를 넘어서는 것 말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요. 여전히 자신이 에고 상태로 있어도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확신을 마음에 품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진정한 자유란 '에고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린 이들도 있습니다.
- 많은 이들이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지요.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살펴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답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점점 더 많은 핑계를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달의 표면에 어두운 점들이 있다고 해서 달빛이 약해지지는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 내면의 실재가 발하는 빛 속에서 피상적인 에고적 마음은 그 매력을 잃게 됩니다. 훨씬 더 아름다운 빛이 우리의 세계를 비추므로 에고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됩니다.
-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잠깐 맛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열림의 순간을 체험했고 그것은 정말 경이롭게 느껴지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것이 닫히는 느낌을 받아요.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열려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그들은 저를 찾아와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하면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데 남은 걸림돌이 무엇이든 그것을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림과 닫힘의 느낌은 그 가치가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열림이 주는 큰 기쁨과 조화로운 느낌, 닫힘이 주는 개인적이고 답답한 느낌은 둘 다 더 깊은 곳에서 목격되는 현상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런 목격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바로 그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 즉 열림과 닫힘, 들어감과 나감, 오고 가는 것과 같은 느낌들은 전부 변하기 마련이나 오직 목격자만은 불변하지요.
- 많은 구도자들이 자유로운 느낌을 얻었다가 잃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본질상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여전히 자신을 가리키는 잣대로 쓰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변화무쌍한 것들을 지켜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지요.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현상을 보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또 '누구 혹은 무엇으로서' 지켜보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깊이 사로잡혀서 이러한 인식의 근원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지나 오감을 통해 받는 인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수반되는 느낌과 몸의 반응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식의 일부이지요.
- 참자아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결코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도 이를 해낸 적이 없어요. 부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참자아란 그냥 우리 자신일 뿐이며 아무 노력 없이도 영원히, 늘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에요. 사실상 참자아 안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일'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동은 변하지 않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고 목격되기 때문이지요.
- 열리고 닫히는 느낌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이를 이용해서 이미 참자아인 여러분이 나는 아직 참자아가 아니라고 계속 느끼게 할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주장하겠지요. "네가 진짜 참자아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하지 않을 테지!" 열림과 닫힘의 경험은 더 넓은 지켜봄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 현상적인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비현상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닫힘이라는 반대극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열림과 닫힘의 너머에 있습니다.
- 때가 되면 우리는 개인이라는 감각이 현존 속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현존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개인이라는 느낌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지요. 이는 마치 뱀이 집에서 빠져나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머리는 마당으로 나갔지만 꼬리는 아직 집 안에 있습니다. 그 뱀이 알아서 밖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세요. 이제는 온도가 맞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뱀은 더 이상 집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개인적 감각은 아직 남아 있기는 하나 서서히 문밖으로 나가 그 영향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에요. '기다리는 사람' 또한 마음의 한 측면입니다.
- 에너지와 주의를 개인성이 아니라 오직 참자아에만 기울이세요. 만일 우리가 개인이라면 우리는 개인성의 감각과 그것이 벌이는 어리석은 짓들을 지켜볼 수 없을 거예요. 개인이란 느낌은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는데도 일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들에 대해 보고하지요. 그러나 모순되게도, 일관성을 가지려고 분투하는 그것은 원래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관성을 가지려고 한다면 개인성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일관성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입니다.
- 우리는 자신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얻게 될 개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이미 여기에 있고, 개인이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 신비의 베일이 이제 벗겨지니 정체성에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마세요. 정체성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그것은 더욱 진짜같이 보입니다. 그것이 실재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임을 아세요. 그것은 스스로 실재하지 않습니다.
- 이것이 바로 마음이 우리의 에너지와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구가 전기 없이 빛날 수 없듯이 말이지요. 우리의 주의와 정체성, 관심과 신념을 통해서 생각은 그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여러분은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힘은 언제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생각이 스스로 살아 있는 듯 보일 것입니다.
- 얼마 동안 생각은 계속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생각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수반된 생각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한 국가의 고통을 치유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믿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생각을 살아 있게 하고 그로 인해 큰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힘이 없습니다. 관객들이 자리에 앉아야 연극배우가 무대에 오르듯, 생각은 그 생각을 인식해 줄 여러분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생각 자체는 지각력이 없으므로 스스로 생각할 수 없어요. 따라서 생각은 스스로 '생각하는 행동'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행동'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생각들이 '생각하는 자'라는 또 하나의 생각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즉 그 연극과 결과물에 관심이 있는 '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 우리를 괴롭게 하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도 그 자체로 의미나 힘을 갖진 못합니다. 그 생각에 - 조건화, 습관, 신념, 인식 등으로 -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 특정 생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행동에 빠져들어가게 되면 그 생각 - 연극의 관찰자 - 또한 어느 틈에 연극의 일부가 되어버리지요.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아는 그 존재는 연극이라는 비눗방울 속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폭넓은 의식의 영역 속에서, 의식 그 자체로서 우리의 주의가 생각과의 동일시로 끌려들어 가는 것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립의 영역 안에, 즉 지켜보는 중립의 자리에 머무세요. 이것이 참자아입니다.
- 허구와 실재를 구별하는 심오한 체험을 한 후에, 우리 마음은 내가 이 발견을 해냈다고 뽐내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몇 명의 지인들보다 더 좋은 관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밖에 나가 잡담을 한다거나 하찮은 일에 얽히는 것은 에너지를 잃게 만듭니다. 이것은 다시 허상에 빠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우리는 마음의 유혹에 굴한 것이며, 이렇게 유혹에 빠짐으로써 자신을 분열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그 깨달음의 기운과 결실은 우리에게서 떠나고 말지요.
- 성스러운 곳에서조차 소음을 일으키려 하며 우리 또한 거기에 끌어들이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악의가 없더라도 그런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깊은 깨어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저 고요히 있고 싶어 합니다. 개인성이 늘상 부리는 허튼수작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누구와의 접촉도 피하지요. 그들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말로 떠들기에는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 마음이 내면 깊은 곳의 근원과 하나가 될 기회가 주어졌다고 느낀다면, 가슴 안에서 절대자의 현존을 느낀다면, 카페에서 노닥거리거나 인터넷을 뒤적거릴 때가 아닙니다. 집에 가서 이 하나됨 속에 거하세요. 가슴속 진리의 부름에 '네'라고 답하세요. 이런 자세를 가지세요. "저에게서 에고를 없애주소서. 그리고 제 마음이 당신과 하나 되게 해 주소서. 신성한 현존이여, 저를 비우사 당신으로 채워주소서. 저는 진리 앞에 다만 '네, 네, 네'라고 답할 뿐입니다."
- 진정한 '바라봄'으로의 도약을 이루고도 습관적이고 에고 중심적인 생각에 이끌려 그 보물을 헛되이 쓴다면, 그것은 아직 자신이 찾아낸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유는 공짜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값싼 것은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진리를 얻고자 하는 염원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자유를 부르짖고 있고, 우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다른 뭔가가 우리 주의를 분산시키고 우리를 저지합니다. 우리는 이 거짓말쟁이 구렁이를 베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힘없는 작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로서 충분히 이런 것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힘이 있지만 아직 이 힘의 대부분은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알아차리고 되찾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존재 전체를 진리 앞에 데려오세요.
- 영적인 구도자들은 자주 저를 찾아와 진리탐구에 전념해온 이래 그들이 겪은 황홀하고 짜릿하고 인상 깊은 체험에 대해 논평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깊은 체험을 했을 테고 이제는 그 체험이 그들이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다른 사람들과 이 발견을 공유해도 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자아탐구나 영적 여정이 깊어짐에 따라 어떤 은사나 재능이 주어지거나 더 두드러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누군가를 안아주었더니 갑자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식이에요. "감사합니다. 제 어깨를 낫게 해 주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지요. '와! 내가 치유의 은사를 받았네. 나는 치유자가 될 운명이구나.' 아니면 갑자기 천사처럼 고운 목소리로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어 그 재능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픈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가 선택한 것은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노래를 하게 된다면, 노래해도 좋고 말고요. 순수하고 즐겁게 노래하세요. 그것이 다른 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노래하는 것을 의식의 첫 페이지 머리기사로 올리지는 마세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심오하다 할지라도 모두 현상일 뿐입니다.
-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심오하다 할지라도 모두 현상일 뿐입니다. 개인적인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그것은 마법이라든가 우리가 중요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한 재주를 얻으려고 영적인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다. 나는 자유를 택할 뿐이다.' 끝까지 가되 자유 이외의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마세요.
- 한 위대한 요기니 yogini(여자 요가 수행자)가 산속 깊은 동굴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겠다는 일념으로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명상을 하는 도중, 홀연 지극히 아름다운 무지갯빛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 빛은 최고의 화가가 그려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한 색으로 일렁였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꽃보다도 섬세하고 눈부셨으며, 마치 살아 있는 듯 그 모습이 시시각각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감탄했어요. '이것은 정말로 기이하고 놀랍고 아름답구나.' 그러나 곧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내 본질일 리는 없어. 나는 여기서 이 색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자 그 화려한 형상이 춤추듯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 자아탐구는 더 이상 탐구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끝이 납니다.
- 존재의 영역, 순수한 현존의 영역에서 살기 시작할 때, 또는 적어도 이런 실재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일상을 점차 개인성이 아닌 현존 가운데에서 보내게 됩니다. 어찌 보면 개인이란 잠깐 왔다가 그대로 지나가는 작은 그림자와 같아요. 개인성에 너무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는 이 개인을 없애야 해!"라며 초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책하는 것 또한 개인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이런 낡아빠진 레퍼토리는 뻔한 데다가 별것 아닌 일이 될 것입니다.
- 생각을 무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무시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어떤 정체성도 껴안지 마세요. 그냥 생각을 무시하세요! 그저 텅 비어 있으세요. 이것이 쉽고도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이야기 속 수도승처럼 있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답니다. 그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초연했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었지요.
- 어떤 분들에게는 이렇게 다듬어지는 과정이 마치 장갑을 뒤집어 벗을 때처럼 느껴집니다. 즉 손바닥 부분은 밖으로 나왔지만 손가락 끝은 아직 빠지지 않은 것이지요. 완전히 빼내기 위해서 우리는 약간 힘을 줘야 합니다. 아니면, 뱀이 허물을 벗을 때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허물이 거의 다 벗겨지긴 했는데 아직 꼬리 끝에 남아 있어서 이를 매달고 다니는 상황 말이에요. 그런 경우, 뱀은 거의 붙어 자란 나뭇가지 두 개를 찾아내어 그 사이를 통과함으로써 허물을 완전히 떼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영적 수행이 이런 나뭇가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많은 것들을 떠나왔지만, 우리에겐 아직 껌처럼 딱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이지요.
- 한동안 의식은 '구도자'의 이름표를 달고 다닙니다. 구도자의 목표는 현존, 즉 순수한 존재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도자 자체가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우리는 현존의 영역에 있게 되지요. 현존은 개인이 아닙니다. 현존은 어떤 특정 종교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영적 수행을 해야만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현존의 자리에서, 더 깊은 실재를 여러분께 가리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해서 낡은 허물을 벗겨내려 하는 그 사람 자체도 현상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러니 허물을 벗고 있는 그 사람을 너무 중요시하지 마세요.
- 우리는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 나의 단점, 고치기 힘든 습관등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대상에 말려들어간 목격자'까지 포함하여 이 '모든 것'이 보이는 현상임을 알아차리고 나면, 더 이상 그것들 각각을 개선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 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특히 주의하세요. 그때 바로 교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야, 내가 해냈어!' 그렇게 개인이란 독이 다시 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하게 성심을 다해 헌신으로 진리에 임할 때, 무언가가 우리를 보호하며 우리와 동행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은총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은총은 늘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한 실재이며, 궁극적인 진리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습니다.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가린 장막을 거두어 나 자신을 최면에서 깨우고 실재를 자각하는 일일 것입니다.
-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할 것입니다. 자유는 결국 에고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제껏 자각하지 못했을 뿐,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던 참자아로 되돌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무엇이 되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우리는 '뭔가가 되기'를 그만두고 참자아 안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싸움이 시작되지요. 허나 이 적대적인 세력을 제압하는 일은 밖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싸움은 에고의 조건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상대로 하는 내면의 장대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그것을 그린 화가와 싸우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참된 실재는 어떤 싸움에도 가담하고 있지 않습니다. 싸움은 꿈속에서만 일어나며, 싸우는 사람 역시 그 꿈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싸움에 휘말려 있지 않은 참된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이지요.
- 여러분께 도움이 되도록 저는 이 기본적인 사항 하나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우리에게 매우 강한 저항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정체성의 구속에서, 또 마음의 한계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할 때 그 저항은 흉측한 고개를 쳐들고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 이러한 저항에 직면할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마음의 횡포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적인 저항은 나타나기 마련이에요. 그것을 옳게 해석하길 바랍니다. 즉, 그것을 실패가 아니라 배탈 났을 때 하는 설사 정도로 여기세요. "감히 네가! 더 이상 가까이 오면 본때를 보여줄 테다!"라는 식의 병적인 경계심으로 제압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에요.
- 실제 상황이 다음과 같을 때 그런 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심리적 마음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을 때 삶은 이미 우리 약점을 손에 꽉 쥐고 있고, 우리가 자유에 가까이 갈 때마다 이를 쥐어짜서 우리가 곧바로 사과하게 만듭니다. "알았어! 거기에 가지 않을게! 자유를 찾아다녀서 정말 미안해! 자유라는 게 나한테는, 어쨌거나 내 이번 생에서는 당치 않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어!" 이렇게 말하고 나면 심리적 마음은 우리를 놓아주겠지요. 그리고 우리 삶은 그냥 괜찮을 것입니다.
-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 그냥 괜찮은 삶.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중 누구도 그저 근근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여기에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자체이고, 동시에 우리 삶의 목격자입니다. 이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태도를 갖추세요.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마음이 아닌 현존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신은 내면으로부터 우리에게 입맞춤을 보내고 있습니다.
- 그것은 삶의 일부이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언가가 계속해서 깊어집니다.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조건화가 약간 남아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압도하거나 숨 막히게 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쪽으로는 에너지가 거의 흐르지 않게 되지요.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Sri Nisargadatta Maharaj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인간적 본성이 운명에 따라 펼쳐지도록 둔다. 나는 언제나 나로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태도입니다. 절로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지나치게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드라마와 카르마가 전개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고, 그러면서도 지켜보는 원리 그 자체로서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무언가가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적절히 반응할 것입니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매 순간 우리는 삶을 발견해 간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어제 여러분은 오늘이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정말 그 예상 그대로 하루가 흘렀나요? 우리 삶 속에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절묘한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삶의 모든 기적들, 예를 들어 버스 옆자리에 앉는 사람들, 길을 가다가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 등을 떠올려보세요.
- 여기서 삶을 순리에 맡기라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기차에 탔는데 누가 내 호주머니를 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가정해 보지요. 여러분은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어요? 아니지요!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에요. 누가 내 호주머니를 털고 있어서 화가 난다면, 화가 나게 그대로 두세요. 그 소매치기의 발을 콱 밟고 싶다면, 그 행위 또한 삶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 무엇을 해야 할지 미리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일들은 단지 저절로 생겨나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둘러앉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막상 때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때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려는 반응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준비해두는 것과 같습니다. 때가 되어 그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거기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분위기가 있어서 우리가 신중하게 준비한 말들은 그 살아 있는 힘 앞에서 죽어버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 또는 정체성에 휘말려 있을 때 으레 나타나는 일이에요.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과 서로 따로 노는 것이지요.
- 삶은 이런 식의 계획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약간의 계획은 필요하지만, 그런 '실용적 마음'에서는 '심리적 마음'의 악취가 나지 않아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강박적인 생각들이지요. 나는 어때야 하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건가?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적절한 식으로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쓰이는 의미로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고 말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 가슴에 중심을 잡고 있어서 삶은 매 순간 더 새롭고 자연스러우며 직관적이게 됩니다. 삶은 원래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지 거친 야생의 존재가 아닙니다.
-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면 삶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조언을 따른다면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은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것이며 현상을 현상으로서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켜봄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갖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고, 나는 그저 나로서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현상에 대한 계산과 해석, 평가와 판단으로부터 주의가 거둬지고 우리는 자기 자신 속에서 다시 머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때로 '이 모든 것을 목격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마음은 선뜻 다시 가슴속으로 잠기게 될 것입니다.
- 삶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본이 쓰이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대본을 고수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삶에 절대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단지 삶을 순리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직접 삶을 설계하려 하거나 - "내 삶은 이래야 해!" - 자신이 원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으리란 것을 압니다.
- 삿상이나 자아탐구를 통해서 자유를 맛본 후에도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사실 마음에 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 정체성과 그로 인한 좋은 일과 나쁜 일 전부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 성취하고 싶은 꿈들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삿상에 참석했던 한 여성분은 나쁜 일들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위대한 작가나 전문 성악가가 되는 것처럼 여전히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다고 했지요. 진리를 위해서 이러한 꿈들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으며 계속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 이 점을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저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여러분이 여러분 삶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멋진 하늘 풍경을 만끽한다거나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 또한 좋은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쁨 가운데 창조되었는데 우리가 왜 이를 좋아하면 안 되겠어요? 아무렴, 이 세상을 즐기세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제대로 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다만 개인성이나 정체성에 중독되지는 마세요. 심지어 나쁜 일처럼 보이는 것들에도 감사하는 이런 태도는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나쁜 일'이라고 부르는 일들도 지대한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탁한 물과 같은 허상을 꿰뚫어 보게 하여 우리가 더욱 존재 깊이 잠기도록 해주기 때문이지요.
- 우리가 세상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진리와 대립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자체적으로 진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원성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정체성과 욕망, 또 영성과 멋진 삶은 양립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일 뿐이에요. 참자아는 이미 우리 안에 무위의 공간, 의식의 공간으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삶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리탐구는 "좋아, 나는 이제 참자아가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 삶 속의 활동들은 다 그만둘 거야"라는 입장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 어떤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숲속에서 수도승으로 살지만 자신의 공양 그릇에 완전히 얽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강한 정체성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자기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비난할 것입니다. 항상 진리의 발견을 뒤로 미룰 것이고, 이러한 미룸은 내면에 강한 이원성의 느낌을 자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성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한, 참자아를 만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참자아도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서 욕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욕망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한, 우리는 자유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 불변하는 의식으로서 우리 자신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면, 그 충만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타인이나 세상을 대하고 있을 때 뿐만 아니라 홀로 있을 때도 현존 속에 머물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가 감사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와서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을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왜인지 저 또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우리는 여전히 영성과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순수한 가슴으로 느끼기에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느긋하게 있는 그대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음미하는 대신에, 때로는 이상적인 삶을 그려보곤 하지요.
- 여러분의 가슴 안에 살아 있는 진리를 세상과 타협하려 하지마세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또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의 내적 스승인 절대자가 우리 가슴 안에 있으니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차분히 내면을 바라보고 그 일체 속으로 들어가세요.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하나' 안에서 움직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궁극적으로 자유의지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 좋은 것이지요.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기에 선택이란 불가능하다고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감각 속에서 살아가게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은 이 책을 읽겠다는 선택을 했어요. 예, 그것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시작된 움직임이었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우주적 힘에 의해 인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의식에 닿았을 때, 여러분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느낀 것이지요.
-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지요. "만약 제가 예정되어 있지 않은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신이 그것을 막아설 것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맘대로 언제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어요. 그것은 제 선택입니다!" '내가 선택한다'는 감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만일 '내가 선택한다'는 감각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갑갑하고 숨 막혀서 죽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면, 운명이 어쩌고 하는 말들은 다 잊고 계속 그 감각을 즐기세요. 그런 경우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생각에 너무 많이 빠지기보다는 그저 느낌에 따라 선택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 그러나 삶을 점차 직관적으로 대하게 될수록,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와 신의 의지가 더불어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 혹은 마음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의식의 표현이에요. 그러니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은 방식인지 염려하지 마세요.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런 느낌 속에서 가능한 한 좋은 선택을 하세요. 하지만 내가 굳이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면, 취향과 선입견과 판단 없이 그저 삶과 함께 흐르는 이 방식을 즐기세요. 그런 에너지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행복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심한 것이 아니라 그저 괜찮을 뿐이에요. 더 위대한 조화와 하나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내적으로 계속 성숙해 가다가 실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이 대신해서 선택해 주는 것도 아님을 ...
-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구도자라면 모든 관계에서 진리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관계일지라도 가장 첫 번째로 두어야 하는 것은 늘 진리를 향한 사랑, 즉 자신의 참자아와 하나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보편적 사랑을 가슴 안에 굳건히 세운다면 다른 사랑의 표현들은 자연스럽게 뒤따라 흐를 것입니다. 그제야 여러분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진리를 향하는 가운데 올바른 자리에 놓일 것입니다.
- 가슴의 방식대로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관계 속으로 나쁜 에너지를 끌어들이고 이를 허울 좋은 이유로 그럴싸하게 꾸미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으로 자신을 가장하는 것은 참되지 않은 것입니다. 가식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수년간 불필요하게 고통을 겪으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고 있습니다.
- 한번은 어떤 구도자분이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명상을 하기가 불편하다고 상담을 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그분의 남편은 아내가 시간을 낭비하면서 가족들을 피곤하게 한다고 툭하면 투덜거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조언했어요. "자신의 진리를 굽히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내 가슴이 느끼는 대로 하기가 힘들어요"라고 말할 뿐이었지요.
- 저는 다시 말했습니다. "남편 앞에서 생쥐처럼 굴지 마세요!" 명상을 할 때 벽장 속에 숨어야 한다면, 기도를 할 때 "주여, 큰소리를 낼 수가 없나이다. 그랬다간 제가 매우 곤란해질 테니"라고 벌벌 떨며 속삭일 수밖에 없다면, 그건 대체 무슨 관계인가요? 이것은 그런 관계가 자신의 내적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관계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 가슴이 느끼는 대로 행동하세요. 가슴이 옳다고 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도 옳은 일이 됩니다. 혹 그 관계가 끝이 난다고 해도 말이지요. 눈물이 좀 날지도 모르겠지만 곧 내면이 다시 새로워짐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 때때로 사람들은 관계를 자기 삶의 최우선으로 삼는 경우에만 그것이 잘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저는 깨달았어요. 진리를 최우선으로 삼고 관계를 더 이상 떠받들지 않는 것이 더 건강한 태도입니다. 관계가 잘 자라려면, 그것은 막히지 않고 흘러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 의식 그 자체로서 하나가 될 때 만사는 흘러가지요. 항상 일들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이런저런 두려운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다면, 그것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관계 내에서 어떤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고 해도 그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이해하세요.
- 삿상은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며, 우리의 관계도 씻어줍니다. 우리는 '함께'라는 이름 아래 계속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이제 그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부분들을 상대방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진리 안에서 해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아름답게 기능할 수 있지요. '관계'라는 개념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혹은 관계가 변하지 않도록 애쓰지 않아도 말입니다. 관계는 언제라도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역동적인 표현은 변화무쌍합니다. 정말이지 이 영역에서 변화는 필수적이지요. 그러나 에고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그래서 본래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본래 유동적인 것을 고정된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 그러면 두려움이 엄습하여 꼼짝 못 하게 되지요. 이런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에 너무 깊이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 속에 확고히 서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순진하게도 상대방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 - 연인이 당연히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관념적인 사랑 - 을 손쉽게 이루어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이런 경우, 그 관계는 시험을 받기 쉽습니다. 현실이 이상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갈등이 뒤따르지요. 우리는 기운을 잃고 축 처져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전부인걸요. 우리는 함께 할 운명이라고요. 우리는 하나예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에요. 이쯤에서 우리의 파트너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테니까요. "하나라구요? 아니요, 엄연히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지요!"
-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신념은 영성과 안전거리를 두려고 하는 핑계일 수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들었다면서 영적으로 깊어지는 것을 모든 종류의 관계를 회피하는 구실로 삼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들에게 반려자의 존재는 아직 어떤 욕망이 남아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은 그런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이겠냐고 따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 삶은 욕망입니다! 순수한 욕망도 있으며, 그것은 의식 그 자체로부터 나오므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교리는, 옹졸하고 개인적인 존재 상태를 지속시키는 에고에서 비롯되는 이기적 욕망을 겨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리탐구의 초기 단계에서,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에고는 곧잘 위협을 느낍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에고는 생명줄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경우에 새로운 관계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주의를 빼앗으려고 마음이 일으킨 방해 공작인 것이 분명합니다. 진리 안에서 성숙해 감에 따라, 여러분은 그 차이를 구별하고 더 위대한 조화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진리를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현실의 인간적 유대 관계를 무시하는 어떠한 영적 이상과도 매우 다릅니다. 관계는 의식의 순수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정 진리에 기반한 관계를 맺을 각오가 되어 있으신가요?
- 만일 우리가 운 좋게도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친밀하다면, 아마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도전에 전적으로 “좋아”라고 기꺼이 응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과 그런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우 불편한 주제, 또 생각의 차이를 놓고 대화해야 할 때도, 항상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대로의 세상을 ..."
- 제가 말할 거리를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냥 여러분 옆에 와서 앉았듯이, 참자아도 삶도 정해진 바 없이 그저 펼쳐질 뿐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싶지 않습니다. 왜 알아야 하나요? 무엇 때문에요? 새롭고 신선해야 아름다운 법입니다! 저는 무엇에 대해 듣고 싶지도 않고,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있을 뿐'이고 바로 이것이 삶입니다. 어떠한 기법이 아니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켜보고 참자아를 깨닫는 데 주의를 집중한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 관계에 있어 단지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습니다. 관계가 진정으로 꽃피기 위해서는 그 안에 자유, 내적인 강인함, 투명함, 그리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관계는 우리가 얼마나 그것에 공을 들이는가에 따라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는 들인 노력만큼 보상이 돌아오거나 그것에 대해 말을 얼마나 하는가에 따라 잘 풀리고 안 풀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보통 서로를 멀리 밀어내는 결과를 낳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깊은 유대감인데,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노력'으로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결핍, 질투,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어떤 다른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관계 속에서 나타날 때, 그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살펴볼 복되고 길한 기회입니다.
- 관계에 관한 한, 지나친 의도는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하세요. 일단 이런저런 결핍에서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사랑받을 필요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는 어떠한 교만도 없습니다. 진실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필요조차 없는 내면의 공간에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곳은 더없이 고요한 곳이며 그곳에서 우리의 사랑은 열려 있게 되고, 넓어지고, 아름 ...
- 우리는 참자아라는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가슴으로부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눈이 맑아져서 신의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누군가를 편애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보편적입니다. 처음에는 끔찍하게 느껴지는 반응이 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모두 허상을 씻어내는 과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 마음과 에너지를 진리를 깨닫는 데 계속 집중하세요. 삶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회는, 그 강렬한 경험을 이용하여 고통받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이것은 냉소적인 접근법이 아니며 삶을 회피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주의를 되돌려 가장 고통이 심한 중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힘을 되찾는 것이지요. 늘 우리와 함께하는 그 힘 말이에요.
- 끈기 있게 이러한 탐구를 계속해 나간다면 여러분은 참된 의미의 비현상적인 발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고통받는 존재인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자신이 '의식'이라는 일종의 공간이고 그 안에서 이 같은 소음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인 의식은 그 소음에 관여하지도 않고 그 소음에 시달리지도 않지요. 이런 진리를 발견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가요!
- 여러분은 이 삶을 자신 안에 내재하는 참된 자유를 찾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니 아직 진리를 향해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과 발을 못맞춰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가세요. 더 위대한 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힘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들이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말이지요. 그저 가슴의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 계세요. 그러면 그 힘이 주위의 모든 사람을 움직일 것입니다
- 독신인 어떤 한 개인- 무엇이 문제일까요? '개인'이 문제이지, '독신'은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더욱 지혜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깨닫지 못하곤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내적 성장을 위해 쓰세요.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충만감을 얻으려는 경향으로도 나타나는 에고를 극복하세요. 에고에게 맡겨놓으면 우리는 절박한 심정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쉽습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참자아 안에 자리 잡는 데 잘 사용한다면, 그때 여러분에게서 나는 향기가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진리탐구를 그저 누군가의 마음을 끌려는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에고는 계속 모습을 숨긴 채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 자신의 시간을 존중하세요.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고 특히 한 부모 가정의 경우에는 더 심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하지 마세요. 단 5분의 시간밖에 없더라도 그 5분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절대자는 그 5분이 여러분이 가진 전부임을 알기에, 남들은 다섯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을 5분 만에 해내도록 하십니다. 제 말은,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는 거예요.
- 무언가가 우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산만해지지 마세요. 이 영적인 음식이 주어지면, 그것을 바로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지 마세요. 먼저 드십시오. 우리에겐 그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먹은 다음에 먹어도 괜찮습니다. 자신은 구석에 앉아 굶고 있으면서 남을 먹이려 하지 마세요.
- 그러나 무언가가 허구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의 얼얼함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그건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하는 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순수한 자아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입증해야 합니다. 노부인은 진짜 거기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허상일 뿐입니다.
-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왜 이게 아직도 사라지지않고 있지? 나는 왜 계속해서 환영에 빠지는 거지?"라고 말하지 마세요. 오히려 "왜 이게 계속 나를 귀찮게 하는 거지?"라고 묻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실재하는지 아닌지 살펴보세요. 항상 자신을 처량하다고 느끼고, 왜 이 고통이 멈추지 않냐고 징징거리며 불평불만하기 좋아하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아탐구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에 접어들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거의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그 목소리이기 때문이지요. 이 목소리는 그 어떤 가까운 사이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우며, 내게 도움을 주려는 듯이 들립니다. 실은 그 자신이 문제의 원흉인데도 말이에요.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 명 이상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 거짓 정체성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보다 큰 규모로 선행을 베풀겠다고 뜻을 세웁니다. 그들은 집을 팔고 먼 나라로 떠나서 사람들을 돕는데 전 재산을 쓰지요. 이것은 그들의 소명이고, 저는 이런 가치 있는 일을 응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런 인도주의적 활동에 강하게 끌리지 않는다면, 억지로 또는 죄책감을 동원해서 그런 의지를 쥐어짜 내려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시간을 쓰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고 '참자아를 찾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줘야지'와 같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지도 마세요. 삶이 저절로 펼쳐지게 하세요. 우주적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자신 안에서 느끼고, 그 흐름 속에 머무세요. 그것으로 충분하답니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되어 조금 실망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참자아를 깨닫고 나면 과연 기적을 행할 수 있게 되는지 우리는 정말 궁금했으니까요!
- 만약 어떤 이의 몸을 통해 기적이 나타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면,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난 사람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기적의 은총이 그를 통해 표출되려 할 때, 그는 자신을 통해 기적이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현존 바깥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들을 꼭 아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기적은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깨어난 마음의 힘이란 그런 것입니다.
- 세상을 창조한 유일자가 세상을 보살피게 두세요. 그 유일자는 말합니다. "나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심지어 현재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춤사위이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펼쳐지고 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나요? 아니면 온 세상의 무게를 자신의 양어깨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땅만 쳐다보고 있나요?
- 여러분은 아틀라스가 되어 어깨 위에 세상을 짊어질 수도 있고 나타라지처럼 존재의 춤을 출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그 무엇과도 동일시하지 않고도 말이지요. 작은 가위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려고 하지 마세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형태로 자신의 삶을 가지치기하지 마세요. 분재가 되지 말고 우람한 참나무가 되세요.
- 그들이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그 장면은 변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다나 sadhana, 수행, 성찰, 명상을 통해 대단히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풉니다. 파파지 님 또한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파파지 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파파지 님, 인류는 언제 성장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잠재력을 실현하게 될까요?" 파파지 님은 "인류(mankind)가 친절한 사람(kind man)이 될 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친절할까요? 그저 머리로만 알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한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좋은 품성은 깨어난 마음속에서 저절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나뉘지 않는 단 하나의 참자아를 깨닫게 되면, 좋은 품성들을 일부러 계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 품성들은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잔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단지 내 몸, 성격, 문화적 조건화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잔혹한 일들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그런 것들의 집합이라고 믿는 한, 그에 걸맞은 이기심이 계속 표출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사랑의 진정한 반대말은 이기심이겠지요.
- 여러분은 "현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리인가!" 하고 감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규정해 주는 기준점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뼛속까지 오싹해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진리로부터 돌아설 것입니다. '이건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도 모르게 될 거야.'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방해하려는 에고적 마음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 참자아로 되돌아와서 그 참자아 의식에 계속 주의를 집중함에 따라, 우리는 삶을 좀 더 무심하게 경험하게 되고 일어나는 일들을 훨씬 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며 그리 깊게 영향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지만, 에고적 마음까지 동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듣기'는 그냥 저절로 일어나게 되지요. 때때로 어떤 말이 강조되어 들릴 것이고 그에 대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어떤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수련하여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존할 때 그 자발적인 힘이 스스로를 표현할 뿐이지요.
- 모든 존재는 이러한 상태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존재들은 이 '나는 존재한다'는 현존 상태마저 넘어서길 원합니다. 왜 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상태를 넘어서길 원할까요?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현존 상태조차도 여전히 진정한 우리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현존은 꽃이 내뿜는 향기와 같습니다. 이 현존의 감각을 지켜보는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조차도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 형용할 수 없는 무엇, 즉 절대 속으로 푹 잠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꽃은 아무도 찾을 수 없지요.
- 여기에는 무엇을 소유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순수한 상태로 있습니다. 삶과 싸우지 않게 됩니다. 인종이나 종교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달의 차고 기욺, 행성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다른 행성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사람들은 우리를 참된 인간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우리 자신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느라 바쁘지 않습니다. 미래를 추측할 필요도 없고, 과거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밤과 낮은 더 이상 중요한 개념이 아닙니다. 사실상 이제 모든 개념은, 제 아무리 훌륭한 개념일지라도 우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 마음은 여전히 모든 일, 심지어 매우 일상적인 일에 쓰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더 이상 예전의 방식대로 기능할 수 없지요. 마음은 지고함을 섬기게 되고 그저 선한 일만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왕국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스스로의 바라봄 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면, 모든 것이 바로 '나'입니다. 일시적인 현상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속성 둘 다 말이지요.
- 제가 이 이야기를 잊지 않는 이유는 저 또한 이 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슴 안에서 이 삶은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진리를 위한 것이라고 결정하면 이 위대한 힘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 위대한 힘이 우리 안에 앎이 자리 잡도록 도와줍니다. 우리의 삶은 진실로 밝아지고, 새로워지고, 강해집니다.
-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축복입니다.
- 그의 얼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기와 빛은 곧바로 제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펼쳐보고 난 제 반응은 '어휴, 이게 뭐야?!'였어요. 책 속에 적힌 그의 말은 제가 느끼기에는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너무나 지성적이어서 저는 인쇄 실수로 책표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진은 그토록 깊은 평온함, 고요, 평화를 발하였건만, 그때의 저는 그 책에 적힌 자아탐구에 관한 간결한 지시를 잘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 결국 저는 라마나 님의 책을 덮어 내려놓았습니다. 그 대신 같은 서점에서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은 바로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기독교 전통에서 자랐지만, 힌두 성인 스리 라마크리슈나 Sri Ramakrishna의 지혜는 대단히 보편적이어서, 제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켰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은 달콤하고도 황홀하게 제안을 깊이 울렸습니다. 이것은 시기적절한 만남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겪고 있던 심오한 체험을 확인해 줄 누군가와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헌신(bhakti)의 성자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자기인식(jnana)의 길, 즉 비이원론의 관점으로 봐도 완전히 해탈한 현자였습니다.
- 1993년, 인도에 가고 싶은 충동이 제 안에서 일어났고, 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제가 인도로 가려는 유일한 목적은 스리 라마크리슈나가 기거하며 가르침을 전했던 콜카타 Kolkata 부근의 다크쉬네스와르 Dakshineswar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밖에 몰랐습니다. 제겐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과 같은 여행안내서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때 영적으로 매우 순진했어요. 구루 guru라든가 명상, 영적 여정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지요. 비이원론에 관해서는 더더욱 무지한 상태였고 말입니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그리스도와 라마크리슈나의 신성한 사랑뿐이었습니다.
- 오늘이 되기까지 저는 콜카타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운명은 저를 파파지 Papaji라는 애칭으로 주로 불렸던 스리 푼자 Sri H.W. L. Poonja 스승님에게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라마나 마하리쉬의 직계 제자인 파파지의 은총과 현존을 통해서야 비로소 스리 라마나의 가르침을 읽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 그 후 몇 년이 지나 무지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에게 다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평화로우니 그냥 잠시 곁에 앉아 있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탐구 중에 품게 된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힘이 무지 안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났고, 처음에는 소규모의 비공식 모임으로 시작된 것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 즉 삿상 satsang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 여러분이 지금 들고 있는 이 책은 이러한 공동작업의 결과입니다. 자아탐구의 확연한 빛과 지혜를 통해 여러분이 참자아를 깨닫는 데 이 책이 귀중한 지침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 책은 마음으로 읽을 책이 아닙니다. 무지의 가르침과 통찰은 절묘하게 단순하고, 그 가르침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언어를 초월한 곳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기법이나 수행법을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자아탐구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 자신의 영원한 얼굴을 인식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지 자신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성찰은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가리킬 때의 표현법, 영향력, 직접성에 우리가 신속히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무지는 유연하고도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이미 진리 그 자체이지만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우리가 진리를 직접 내면에서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줍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 문장 또는 단락의 정확한 의미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 대신, 단어들의 에너지가 평가하고 해석하는 마음의 간섭 없이 가슴속에 존재 속에 스며들어갈 수 있도록 두세요. 그러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입니다.
- 이러한 이해가 자라나고 무르익을 수 있도록 책의 '주요 가리킴(pointing)'들은 책 전체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반복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가리킴은 매우 간단하여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소중히 간직해 온 관념들을 버리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 있지요.
- 무지는 이 책에서 많은 주제를 다루지만, 사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할 때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자주 강조합니다. 따라서 가르침이나 배움보다는 발견과 직접적 체험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바로 이해되지 않거나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부분이 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당분간은 그대로 두고 열린 마음으로 계세요.
- 그보다는 깊이 공감이 가는 글귀가 있을 때, 시간을 들여 그것에 푹 잠기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내면에서 무르익도록 그냥 두세요. 무지는 우리 모두에게, 단 한 가지 가리킴만으로도 그것이 마음속 깊이 이해되고 동화된다면, 우리는 본향(참자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 이 책은 무지의 지혜와 통찰력이 풍성하게 담겨 있고 그가 발하는 진솔함, 사랑, 유머감각으로 가득합니다. 또한 무지가 즐겨 이야기하는 예화 및 명확한 자아탐구 지침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무지와 그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고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최종적인 이해에 다다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불안정한 느낌보다는 진정한 존재 자체의 안정된 느낌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기르세요. 존재의 안정감과 친숙해지세요. 텅 빈 느낌에 익숙해지세요. 그것은 해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참자아를 그렇게 존중함으로써 여러분은 큰 기쁨과 평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존중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잘못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이 사라질 것이므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윈윈 win-win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요? 참자아의 아름다움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과연 이 세상의 열매는 그렇게 달콤한 것일까요?
- 이것은 강대한 실재이며, 이것의 잠재력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하듯이, 우리의 주의를 내면의 고요한 공간으로 되돌리는 간단한 단계를 거쳐 우리는 그 잠재력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철없는 태도를 버리고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유한하지만 불멸의 존재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몸이 아직 따뜻할 동안, 이 육신의 삶을 여러분의 영원한 존재를 재발견하는 데 쓰십시오.
- 진심을 담아 하는 삿상에는 무언가 심오한 면이 있습니다. 삿상은 단순히 정신적인 무엇도 아니고 정보의 뭉치도 아닙니다. 무슨 연유인지 머릿속 잡음이 잦아들고 가슴이 그 빈 자리를 채웁니다. 침묵 중에도 고요하게 우리 자신을 대변해 주는 영성과 삶에서 함께 동행하는 것 같지요. 무언가가 내면 한가운데에서부터 빛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빛나는 자'라고 불렸던 이유랍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과거에서, 의도에서, 욕심에서,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질 때 이것은 빛을 냅니다.
-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거길 왜 갔을까? / 내가 거길 왜 안 갔을까?'
-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리지요. 그러면 시간도 안 걸리고 아무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간의 영역의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낮도 밤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영원불변하며 때 묻지 않은 의식이며 그 안에서 경험 전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드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우리는 평안함 가운데 잠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참자아 속,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을 직관적 현실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자신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삶이, 어떻게든 저절로 진행되는 연극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란 모두 그저 '그러함(Is-ness)'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제가 이러한 깨달음을 나누는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을 어리둥절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저 존재하는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긴 합니다만, 일상 속에서는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저는 밤에 잠자리에 누워 순수의식과 마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살아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분들께 아직 진리가 명확하지 않은 한, 저는 진리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언젠가 여러분은 몸이 우리의 본질이나 실존에 결코 제약도 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제약은 한낱 꿈일 뿐입니다. 갈등이나 곤경처럼 보이는 것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은 이 신비롭고 위대한 의식입니다. 모든 것은 마법 같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평범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런 이원성의 영역을 넘어 순수한 관찰자, 즉 태어난 적 없는 의식으로서 살아갑니다.
- 이미 깊은 감화가 일어났고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하느님의 실로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했고 이는 제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교회를 떠난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의심이 나기도 했지요. 어쩌다가 그 교회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제게 "아니? 무지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린 것이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그랬나?' 하고 저 자신에게 물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고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느꼈어요. 저는 예수님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늘 제 마음속에 살아 계십니다.
- 그럼에도 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항상 저를 인도하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지금돌이켜보면, 제 삶은 저절로 풀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인도자는 저를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지 결코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자는 저를 보살피시어 제가 자라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내 안에서 발견하세요. 부처님은 불교도가 아니었고 예수님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습니다. 근원으로 가세요.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걸음도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요. 이 진리를 깨달으세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영성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전히 누리고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 되는 영성의 핵심에 서서 말입니다.
- 그래서 저는 내면으로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는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는 것은 내면의 참자아입니다. 심리적 정체성이 좀 저항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를 인내한다면, 나 자신이 바로 기쁨과 평화와 자유의 근원이라는 궁극적인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한번은 기도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어느 부인이 찾아와 제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분 말씀이 예전에는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기도의 힘을 전적으로 믿었답니다. 그런데 자아탐구를 시작한 뒤로는 기도할 때마다 일체감이 약해지고 이원성의 느낌이 더 강해진다는 거였어요. 그분은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과 그 대상인 하느님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자아탐구를 하면서 오직 하나의 ...
- 만약 행동 그 자체가 현존 상태를 깨뜨린다고 잘못 믿어버리면, 우리는 행동하기를 꺼리기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행동은 단순히 '내 존재'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고 있고, '내 존재'는 관찰자로서 그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행동 때문에 우리가 방해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행동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지요.
-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제가 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건가요?" 이에 대한 제 대답은, 우리가 참된 존재 안에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참된 존재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개인이 아닐 거예요. 그러나 아직 개인이란 감각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그 감각은 계속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현존감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 "내 '존재'라는 게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는걸. 차라리 딴 걸 하는 편이 낫겠어." 그 감각은 이렇게 말하고는 잠들 때까지 '옴 나마 시바야' 만트라를 읊조릴 것입니다. 지칠 때까지 성스러운 산을 오를 것입니다. 그러고는 내려와 추워질 때까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경건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다시 싫증이 날 때까지...
- 개인이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한, 그는 무슨 일이든 결국 싫증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면 - 지금 당장 해볼 수 있습니다 - '내가 존재한다'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어요. 사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것 자체가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미 마음의 속임수에 넘어간 거니까요. 우리 자신이 바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 날마다 우리의 의식은 세 가지 상태를 돌아가며 반복합니다. 깊이 잠든 상태, 꿈을 꾸는 상태, 그리고 깨어 있는 상태가 그것이지요. 우리는 깨어 있는 상태를 '우리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삶과 우리의 모든 경험,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까지도 모두 깨어있는 상태의 내용물이자 연극일 뿐입니다.
- 자, 여러분 이름이 존이라고 해봅시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루 24시간 내내 존일 수는 없어요. 깊이 잠들게 되면 '내가 있다'는 느낌마저 잦아들고 그와 함께 육체와 마음에 대한 의식도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깊은 잠 속에서 우리는 이슬람교도도, 기독교인도, 힌두교인도 아니고 여자도, 남자도 아닙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것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깊은 수면 중에도 어떤 미묘한 형태의 의식이 남아 있어야만 하겠지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깊은 잠을 즐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이 숙면 상태에 들기 위해서 최고로 좋은 매트리스를 사기까지 하니까요.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현존 상태 - 우리 몸속에서 빛나며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자아내며 편견 없는 관찰자로서 현상계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의식 - 조차도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점들을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른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깨어 있는 상태의 의식 자체도 일종의 현상임을, 즉 바라봄의 대상임을 몸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상태로부터도 또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 깨어 있는 상태, 즉 우리 일상의 삶은 의식의 극장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생'이라고 불리는 연극의 한 배우로 무대에 서지요. 우리의 삶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상영되는 이 연극에 속해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알람이 따르릉 울리면, 불이 켜지고 연극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침 5시 59분의 깊은 잠 속 자신이 누구였는지는 질문하지 않지요. 그냥 '나'라는 느낌이 생겨나고 우리는 어쩐지 그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아, 맞아. 내가 또 여기에 있군. 나는 중역이고, 오늘 중요한 회의에 가야 해. 나는 이걸 해낼 수 있어." 온종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웃고 울고 두려워하면서 지내지만, 동시에 연극을 구경하는 관객처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한 자신을 지켜봅니다.
- 우리는 정말로 삶이라는 연극의 배우이면서 동시에 청중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우리 본연의 자리가 이 모든 것을 떨어져 지켜보는 관찰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지켜보는 것이 참자아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참자아 속에 자리 잡게 된 이들이 이해하게 된 사실이지요. 순수한 참자아 의식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또 '너'와 '나'라는 느낌을 계속 경험하지만, 이제는 그 이원성의 느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 매일,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가리켜 저는 '현존'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개인 그 자체는 이 현존 안에서 목격되지요. 많은 영적 수행, 혹은 사다나 sadhana는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상태를 다시 자연 그대로의 현존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 사실 그것은 어떤 단계가 아니라 비현상적 깨달음이지만 - '내가 존재한다'는 자연스러운 느낌마저도 궁극적으로 목격되는 대상(현상)이 됩니다.
- '내가 존재한다'는 '상태 아닌 상태'를 뛰어넘어, '내가 존재한다'는 현존마저 관찰의 대상이 되는 영역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무언無言의 진리 속에 있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 실재이지요.
- 이 두 마리의 새는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새는 우리의 역동적인 자아, 즉 세상사에 관여하고, 과거와 미래가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자아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내 가족, 내 자녀, 내 일 등의 감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측면이지요. 두 번째 새는 우리 안에서 깨어 지켜보는 의식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 같은 몸 안에 있지만 아무것도 조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저건 좀 걱정스럽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고요하며, 그저 있으면서 넓은 시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나뭇가지를 스치며 부는 바람과 하늘도 바라보지요. 모든 것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 처음에 첫 번째 새는 둥지를 짓고 있는 게 곧 자신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새는 두 번째 새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고요히 있을 수 있게 되면 바로 두 번째 새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됩니다. 사실 두 번째 새는 첫 번째 새의 더 깊은 측면일 뿐이에요. 첫 번째 새의 마음이 두 번째 새와 통합되면 하는 일마다 더욱 은총이 따릅니다. 하나 된 느낌, 즉 일체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한 조화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런저런 일들을 해나가겠지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강박 관념과 두려움, 또 통제의 필요성이 따라붙지 않게 됩니다. 그저 삶이 그리하기를 원하니까 그 일이 일어날 뿐이지요.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우리를 도와주는 것만 같습니다.
- 두 번째 새는 개인의 상태에서 현존 상태로 관점이 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모든 관심이 다 일상생활에 쏠린 나머지 그 일상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첫 번째 새와 같습니다. 분주히 둥지를 짓느라 두 번째 새, 즉 더 깊은 위치의 자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새 말이지요.
- 두 번째 새, 즉 관찰자의 자리로 오세요. 그러면 삶을 일구려고 바삐 움직이던 자신이 할 일은 다 하면서도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행동은 알아서 잘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 즉 에고의 느낌은 희미해질 것입니다. 행동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에요.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우리의 자아상도 그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참자아는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참자아는 제3의 상태입니다. 즉, 참자아는 그림 속의 또 다른 새가 아니라 앞서 얘기한 두 마리의 새들이 나타나고 관찰되는 공간 그 자체입니다.
- 여러분이 제가 가리키고 있는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그리고 조금만 더 느긋해진다면, 매우 평온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생활 속 우리 행동들은 단지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람은 "나는 이 나무를 흔들 거야"라고 말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해'라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도 그냥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아직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 단 한 가지 실수가 다른 백 가지의 실수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 자문관은 대답했습니다. "괜찮사옵니다, 폐하."
"일주일간 갇혀 있었는데 어찌 괜찮다는 것이오?"
왕이 묻자 자문관은 답했어요.
"폐하께서는 한동안 말을 타고 멀리 달리기를 고대하고 계셨지요. 그리고 소인은 항상 폐하의 곁에 있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와 동행했다면 아마 식인종이 우리 둘 다를 붙잡았을 테고, 폐하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대신 저를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갇혀 있던 것이 좋은 일이지요."
- 진정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분들은 제게 어떻게 하면 개인성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제 골치를 아프게 하는 이 에고가 없어지게 도와주세요. 이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에고를 없애기보다는 '넘어서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유령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유령이 단지 허깨비일 뿐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유령에 겁을 먹지 않게 되지요. 가령 사막을 걷다가 문득 신기루를 보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저 멀리 야자수에 둘러싸인 샘에서 물이 퐁퐁 솟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와! 우리는 신나서 달려갑니다. 하지만 결코 그 샘에 다다를 수는 없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신기루를 믿고 안 믿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신기루는 사막을 거쳐가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신기루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은 우리 눈앞에, 곧 닿을 것처럼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기루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것의 실체를 보고, 그것이 허상임을 알아차릴 수는 있습니다.
- 하지만 그는 본래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니에요.한 번만 더 해볼 수 없을까요?" 그는 현명하게도 마음의 저항에 굴하지 않겠다고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함께 자아탐구를 했고 그는 마음을 열고 마침내 자신의 참된 존재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 우리 안의 무언가가 진리가 아닌 것에 상당한 에너지를 투자해왔습니다. "나는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긴 정말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진리와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잠깐만요. 10분만 있다가 다시 올게요. 다른 데 가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10분, 열 시간, 아마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안의 뭔가가 진리와 마주 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진리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습니다.
- 진정한 구도자는 자신이 어떤 자세와 동기를 가지고 삶을 살고 있고, 또 구도를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기회를 잡으세요.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자아의 본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심리적 마음의 한 부분이 자신이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할지 모르는 어떠한 살펴봄도 꺼린다는 것이지요.
- 삿상의 에너지장 속에 깊이 잠기세요. 그럼으로써 우리 존재 안에,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서 머물고 있는 위대한 힘을 더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이 계속해서 불쑥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그런 두려움에 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자연스러운 참자아의 공간을 알게 되면 에고에 쉽게 매료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에고에 기울던 주의를 돌려 현존 속에 머물게 할 수 있습니다. 주의가 에고를 향하지 않으면 에고는 힘이 쇠약해지고 권위를 잃게 됩니다. 만약 일시적인 것들에 매혹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줄곧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약간은 그것에 감정적인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마음은 계속 문가에 앉아 기다리며 칭얼댑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먹이를 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어요. 에고와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해가 되는 연인 관계와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제 끝났어. 어서 가버려!" 그러나 막상 그 자리를 뜨고 나서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지요. '음, 어쩌면 내가 너무 서둘렀는지도 몰라.' 그래서 에고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잘해보자."
- 어떤 사람들은 에고와 쉽게 결별합니다. 바삭한 과자를 탁 부러뜨리듯 쉽사리...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에고가 뜨겁고 끈적거리는 녹은 치즈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그걸 다 떼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요. 점차 우리는 에고의 소셜미디어를 덜 들여다보게 되지만, 진짜로 끝내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질문하지요. '내 마음에 대한 집착을 꼭 완전히 버려야만 하나?'
-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한 참자아를 발견하게 되면 진리가 아닌 것을 버리기가 쉬워집니다. 헛된 즐거움들을 포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결코 삶의 낙, 재미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지요. 그리고 어느 때가 되면 분명해질 거예요. 내가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그 즐거움을 실은 한 번도 누렸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는 단지 그것을 가지면 행복과 만족을 얻을 것이라는 마음의 거짓된 약속이었을 뿐이에요. 그리하여 마음의 목소리는 차츰 희미하게 들리게 됩니다.
- 제가 여러분께 생각을 멈추라고 권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그런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거진 풀숲에서 파리채로 날파리를 쫓는 것과 같습니다. 쫓아내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날파리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억이나 걱정, 그 밖의 여러 생각들을 꼼짝 못 하게 가둬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날파리는 윙윙 날아다니게 내버려 두고, 다만 주의를 의식 그 자체로 돌리세요. 생각이 뛰놀게 내버려 두고, 의식으로서 머무세요.
- 우리는 우리가 받은 조건화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피상적인 수준에서 남아 있으면서 얼마간의 영향을 계속 끼치겠지요. 그러나 그런 조건화는 더 이상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습니다. 평생 담백한 음식을 좋아해 왔는데, 어느 날 깨어보니 갑자기 엄청 매운 카레가 먹고 싶다거나 하는 일 또한 없을 거예요!
- 이 삶은 우리가 자신의 힘과 신성한 본성을 되찾을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소식이에요. 어디에 매이거나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유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내면을 지켜보고 삿상을 함으로써 우리는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조건화의 힘이 우리를 너무도 오랫동안 최면에 걸리게 했으나 이제 우리는 그 마법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마법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요? 그저 이 가리킴을 따르면 됩니다. 의식으로서 머무세요.
- 제게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한두 시간 정도만 만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다시 만날 때면, 저는 그분들이 1년 전 그들 안을 채웠던 생각의 소음들을 더욱 깨끗이 비워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은 공간으로 조용히 자신들을 비워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보이는 면'이 아닌, '보이지 않는 면'에서 매력을 발견합니다. 개인적 감각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우리의 현존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현존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이 현존일 때, 저는 여러분을 보게 됩니다.
- 옛날에 예쁜 돌들을 캐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가던 광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당나귀를 타고 밥벌이를 하러 다녔어요. 때로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곡괭이로 바윗돌 파내는 작업을 몇 시간이고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자수정이나 석영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흥분에 휩싸여 감탄을 하곤 했어요. "세상에! 이것 좀 봐!" 그러고는 그 원석을 가방에 담았지요. 그의 일과는 오전 중 선선할 때 몇 시간 동안 바윗돌을 파내고서 잠시 나무 밑에서 쉬며 빵 한 조각과 물로 요기를 하고는, 다시 해가 질 때까지 고된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 어느 날 그는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잠깐 쉬고 있다가 갑자기 쿵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하늘에서 갑자기 천상의 보석이 날아와서 그의 앞에 떨어진 것이었지요. 그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는 몸을 굽혀 보석을 주워 들었어요. 그 반짝이는 보석은 엄청나게 컸고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천상에서 온 보물이었어요. 자세히 살펴보아도 티 하나 없이 완전히 투명했습니다. "흠, 이게 뭘까?"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 잠시 후 그녀의 귀에 최상의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고운 가락에 율동적이며 영혼을 어루만지듯 더없이 환희로운 음악이었지요. 누가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음악을 작곡하진 못해!' 그러나 더 깊은 의식의 목소리가 그녀를 상기시켰습니다. '이 음악은 아름답지만 내 본질일 수는 없어. 나는 지금 여기서 이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그러자 그 음악은 사라졌습니다.
- 다음에는 밝게 빛나는 천상의 존재들이 하늘에 나타나더니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온기와 신성, 또 순수함을 느꼈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천상의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가 추구하는 목표일 수는 없어. 나는 여기서 이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자 그 존재들은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마음은 가슴속에 완전히 잠기게 되었습니다.
-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일체감과 경이로움이 자라나면서 실제로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상태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몇몇 진실한 경험들을 하게 될 수 있고, 그 경험들은 그 시점의 의식 수준에 꼭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 번의 경험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설익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음은 "바로 이거야! 내가 해냈어, 할렐루야!"라고 외치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마음은 우리가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할 거예요.
- 그리고 그 경험이 일단 지나가고 나면 - 경험의 영역, 시간과 변화의 영역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지요 - 마음은 오히려 이를 우리가 영적 여정에서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증거로 삼으려 들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더 깊은 곳에서는 이것이 그저 또 다른 목소리일 뿐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경험한 것을 뽐내는 목소리와 그것을 해석하는 목소리 둘 다 실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더 깊은 의식으로부터 나옵니다.
- 여러 감흥들에 근거해 어딘가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 개인성의 차원에 있습니다. 개인은 진리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며 이런 생각에 휘말리곤 하지요. '우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건 정말 아름다운 경험이었어. 이건 내가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뜻인 게 틀림없어.'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경험들과 그것이 전하는 통찰을 감사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고 가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마세요.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빼앗겨, 그런 아름다운 경험조차도 바로 우리 안에서 일어날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참자아는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저는 때로 이것을 '상태 아닌 상태', '느낌 아닌 느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떤 상태나 느낌보다도 무한히 더 넓습니다. 어떤 특정한 느낌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흔한 착각이지요. 정말로 진리가 어떤 특정한 상태라면, 혹은 특정한 느낌만을 강요한다면, 이는 무한한 것이 제한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참자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저 있으세요. '어떻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어떤 기법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히 현존하는 무언가를 깨닫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 한편 우리의 평온한 수도승은 정원을 아름답게 정돈하고는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어요.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금세 깊은 명상에 잠기었습니다. 곧 악마들이 내려와 그를 둘러싸고는 그의 모든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이 거의 투명해질 만큼 명상에 깊이 몰입한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어요. 어느 순간에는 그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악마가 명상에 빠져들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악마가 서둘러 그를 흔들어 깨워야 했지요. "이봐!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위험하다네!" 그 악마는 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 몇 시간이고 악마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 또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갑자기 정원에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정원에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흔들렸습니다. 수많은 잎사귀가 이리저리로 흩날리기 시작했고, 우리의 수도승이 정성껏 정돈한 구역에도 작은 나뭇가지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잎사귀들은 곧 바람에 흩어졌지만 그 잔가지 하나만은 깔끔한 정원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 즉시 수도승은 한쪽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본 뒤, 벌떡 일어나 눈에 거슬리는 가지를 치우려고 바위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 잔가지를 짜증스럽게 던져버리고는 아주, 매우 조심스럽게 모래를 다듬은 후 다시 가부좌 자세로 돌아갔지요. 이에 모든 악마가 서로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아하!"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 악마들은 나무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고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사방팔방으로 날리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악마들은 모래 위에서 춤을 추어 엉망진창으로 뒤엎었습니다. 당황한 수도승은 화가 나 고함치며 이 용납할 수 없는 난장판을 허둥지둥 바로잡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어찌나 평정을 잃었던지 투명했던 몸이 거의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기까지 했지요. 그렇게 악마들은 수도승이 니르바나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로막았고, 그 후 마계에서 영응으로 환대를 받으며 마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답니다.
- 여러분의 잔가지는 무엇인가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주의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나, 이건 정말 끔찍한데! 그렇다면 집착을 모조리 없앨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경계도 해야겠구나. 내 안을 쉬지 않고 청소해야겠구나.'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계속 개인으로 있기를 고집할 때에만 해당하는 일입니다. 개인 자체가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잔가지가 있고 없고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개인성에서 비롯되는 내적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됩니다.
-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마음의 거센 공격이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의 공격은 때로는 이야기 속 잔가지와 같은 뚜렷한 계기가 없어도 올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공격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만약 내면에 그러한 폭풍이 일면, 자아탐구를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때 무엇이 계기인지 알아내려고 애쓰지 마세요.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세요. 그것은 '누구'에게 중요한 걸까? 누가 신경을 쓰고 있나? 누가 아직도 그런 정체성을 지니고 있나? 그리고 에고가 아직 어디에 숨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세요.
- 수도승은 거의 완전히 자유로웠으나 아직 약간의 집착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왜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지를 드러내기 위해 잔가지가 정원에 떨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자신을 개인이라고 여기는 한 이런 식의 관찰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자아탐구가 언제 필요치 않게 되는지는 묻지마세요.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자아탐구는 즐거움이 되며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그것은 마음이 바라는 방식, 즉 누군가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식의 결말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 충분한 돈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왜인지 그곳에서도 더없이 자유로웠고 사람들도 점차 저를 내버려두기 시작했지요. 몇 년이 지나자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저와 삿상을 하기 위해서 브릭스턴으로 오기 시작했지만, 정작 저희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어느 날, 저는 어느 상가 sangha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삿상에 오지 않는데, 제가 왜 아직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오지만 여기 사람들은 오지 않아요. 제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것은 사실 꼭 나쁜 일이 아니에요. 덕분에 적어도 여기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옳아! 정말 좋은 일이구나! 여기서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아무 커피숍에나 앉아 있을 수 있으니까. 그건 참 좋은 일이지.'
- 궁극적으로 선택이란 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는 양쪽 모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택을 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선택을 회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선택을 했기 때문에, 혹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는 종종 조건화, 습관, 두려움, 조바심 때문에 선택하거나 선택을 회피합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선택이라는 것을 매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지요.
- 의식이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유희를 즐기고 싶을 때, 그것은 선택한다는 감각을 가진 개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처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인의 상태로 있을 때 우리는 경험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 느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충동적으로 선택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고, 꼭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닥치면 혼란과 불안함에 빠지기도 하지요.
- 이제 어느 정도 내면이 맑아지고 공간이 생겼다고 느끼는 사람들조차도 어느샌가 사적인 드라마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그 이야기가 순식간에 의식의 기사 1면을 차지하는 일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모든 초점은 다시 상대에게 맞춰지게 되지요. 그것이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든 달래려는 것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든. 이런 마음의 폭풍 속에서 진리는 잊혀집니다.
- 현존에 뿌리내린 관계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까닭은,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특히나 열정적이고 재미있는 관계를 위해서는 강한 개인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온전히 발견할 자유와 공간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요? 물론이지요. 우리가 진리에 우선순위를 두고 실재 속에, 그 실재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야말로 그 관계는 진정 꽃 피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참으로 드넓고 깊고 현명하여, 우리 삶의 모든 면을 생기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 상대방에게 매달리거나 관계라는 개념 그 자체에 매달리지 마세요. 서로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관계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자신의 힘을 되찾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딱 맞는 짝을 만나 그에게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때를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참자아 의식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의 방식을 존중함으로써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첫째로 그 밑바탕에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꽉 막혀 있지 않고 공간이 넉넉히 있다면, 그 관계는 매우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이 진리를 존중할 때면 분별력이 좋아져서 재빨리 진리인 것은 받아들이고 진리가 아닌 것은 버리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스승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각자의 에고를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인정하지만, 단지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일부러 져주지도 않습니다. 자기 느낌을 방어할 필요도, 지나치게 중요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가슴 안에서 떠오르는 진리를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한 아름답게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 삿상에 왔던 한 부인이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제 남편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매우 슬프네요." 진리를 따르는 동시에 누군가와 사랑하는 관계 속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맹점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려움에 찬 목소리를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하나됨에 나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자칫 잘못하다간 내가 점점 사라지다가 '반려자'라는 말이 무의미한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르니까." 그런 근거 없는 가정 때문에 자유와 진리로부터 뒷걸음질 칠 건가요? 흔히 사람들은 조건화된 개인성이 해체되면 자신이 알고 있던 삶이 의미를 잃고 말 거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제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저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죠? 제게 더 이상 개인성이 없다면 삶에 대한 제 열정은 어떻게 됩니까?" 사실, 삶의 이런 측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식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분열의 원인으로서는 사라지지만, 순수한 자아의 표현으로서 재발견될 것입니다.
- 인도에서 우리는 신성한 커플들 - 라다 Radha와 크리슈나 Krishna, 시바 Shiva와 파르바티 Parvati, 시타 Sita와 라마 Rama - 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관계가 영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관념은 단지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할 뿐 얼마든지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런 균형은 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균형으로 인도하는 것은 진리이지요.
- 우리 가슴이 활짝 열려 있다면 관계는 더 좋아집니다. 우리는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아빠가 됩니다. 더 좋은 종업원, 더 좋은 사장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아집니다. 이때 마음은 이 자연스러운 평정 속에 거하는 것이 재미없고, 따분하고, 지나치게 진지하고, 돌부처처럼 무감각해지는 일이라고 빈정댈 거예요.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불성 안에서 우리는 저절로 가장 생기 있고, 가장 유연하고,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덕목들을 애써 계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결핍을 채우려고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난 사람도 여전히 허기를 느끼고 음식으로 이를 달래고 싶어 하지만, 그는 어떤 것에도 깊이 집착하지 않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독신으로 살 바에야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사는 편이 더 낫다고 굳게 믿습니다. 독신인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하는 역할이 과연 있기나 하겠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물론 있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신'인 어떤 한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자아로서 단일한 존재이지요. 그것으로 계십시오.
- 어떠한 삶의 표현에도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독신주의자이건, 연애 중이건, 결혼했건 아니면 이혼했건 간에,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어느 날 저는 좋은 친구처럼 보이는 두 남성 사이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지, 이 사람은 제 전 남편이고, 이 사람은 곧 제 남편이 될 사람이에요." 바로 그런 게 삶이지요!
- 어떤 관계가 여러분의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 관계는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며, 꼭 그 사람과 함께여야만 내가 괜찮을 것이라는 절박함에 지배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러한 허상에서 벗어난 뒤일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관계는 진정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 많은 기혼자들은 잠시 동안 독신이고 싶어합니다. 저는 오래된 커플들이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이 분명 관계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별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더러 라스베이거스로 곧장 놀러 가거나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홀로 있는 가운데 평화를 발견하고,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지요.
- 종종 가족 내에서 필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변하길 기다리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마세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변하면, 사람들 안의 무언가가 그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술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속임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에너지 시스템이 통째로 다르게 움직입니다. 이제 우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빛, 새로운 앎과 지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더욱 밝아지고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룻밤 사이에 다 변하지는 않겠지만, 상황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의 눈에 엄마가 신으로 보일 것입니다! 내면의 무언가가 알아차릴 것입니다. '잠깐만, 신이 우리 집으로 와서 엄마 안에 머물고 계시잖아.' 규칙이 바뀐 것이지요.
- 우리는 도전에 응해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가슴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엄청난 힘이 와서 돌아가는 상황을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상황 자체가 그런 변화를 갈구하는지도 모르지요. 파파지 님을 만나러 왔던 한 아가씨의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 이 아가씨는 종종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냥 그 남자에게서 도망쳐 인도로 갔어요. 거기에서 파파지 님을 만났고 한동안 함께 지냈지요. 그러다가 결국 중요한 가족행사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을 전부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그녀의 가족들과 왕래하고 있었고, 그녀가 곧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는 파파지 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고향에 가야 하는데 남자친구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워요. 제가 한마디도 안 하고 떠났기 때문에 정말로 마구 두드려 팰지도 몰라요."
- 파파지 님은 말씀하셨지요. "아니야. 아니야. 가거라. 모든 게 괜찮을 거야." 그녀는 그 말을 믿고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착륙할 무렵이 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짐을 찾아서 세관을 통과할 때에는 불안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때 그녀는 저 멀리에 있는 남자친구를 발견했고,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걷다가 나중에는 뛰어서. 그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가족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남자친구만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엎드리더니 그녀의 발을 잡고 거기에 자기 머리를 조아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두려웠으나 남자친구가 일어나자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이러는 거예요?"
-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을 보니 너무 행복해서 당신을 껴안으려고 달려갔어. 그런데 당신에게 다가갔을 때, 어떤 힘이 나를 바닥으로 밀더니 당신 발에 내 머리를 대게 하더라고!"
- 제가 이 이야기를 잊지 않는 이유는 저 또한 이 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슴 안에서 이 삶은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진리를 위한 것이라고 결정하면 이 위대한 힘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 위대한 힘이 우리 안에 앎이 자리 잡도록 도와줍니다. 우리의 삶은 진실로 밝아지고, 새로워지고, 강해집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축복입니다.
- "내가 그렇게 말했니?"
"예, 그러셨어요."
"이런, 내가 잘못했구나!"
- 어머니의 반응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제 마음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어머니가 말은 거칠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몰랐었습니다.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만큼 편협한 분이 아니셨어요. 사납게 비판하는 겉모습 뒤에는 큰 겸손함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사실 정말로 부드러운 뭔가가 있었지요.
- 이렇게 하여 저와 제 어머니의 관계는 개선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오랫동안 어머니는 여러 자식 중에서 저를 가장 편하게 여기셨어요. 어머니가 편협한 말을 하며 어리석게 굴 때면 저는 어떤 두려움과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꼬집었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위선자예요!" 그러면 어머니도 웃곤 하셨습니다.
- 어쨌든,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렇게 변했음에도, 지금도 저는 계단을 오르다가 다섯 번째 계단에 이르면 이따금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 솟구치곤 합니다. 뭔가에 붙잡힌 듯 몸이 얼어붙습니다. 그러면 곧장 이런 느낌이 따라붙지요. '아, 괜찮아, 휴... 이제 사라졌어.' 그것은 재빨리 몸을 빠져나갑니다. 왜냐하면 저는 다시 촉발된 그 속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어머니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그때 당시의 어머니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이미 다른 분이셨습니다.
- 많은 기억들이 이와 똑같은 오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삶이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고통이 이런 것들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은 눈덩이처럼 엄청나게 불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웃음보를 터뜨릴 거예요. 우리 기억의 상당수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인식이 바뀌면 본질적으로 과거도 바뀌게 됩니다.
-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우리는 이를 인지하고 나서 옆으로 제쳐놓아야 합니다. 옛 기억에 잠겨서 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로는 어떠한 이득도 볼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 계단 같은 것이 우리가 참자아가 되는 것을 가로막나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다섯 번째 계단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나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다섯 번째 계단은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 충격적인 기억은 마음속에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자라나려면 우리의 관심과 믿음이라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물을 들이부어왔지요. 이제 물 주기를 멈추세요. 심지어 '그건 나쁘니까 없애 버려야 해'라는 생각조차도 양분이 됩니다. 그러니 그저 잊어버리세요.
- 여러분의 참자아를 기억하세요. 우리는 지금 존재합니다.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참자아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참자아는 현재형입니다. 참자아는 기억이 아닙니다. 참자아 안에서 기억이 재생되고 있을 뿐이지요. 이 모든 것, 이 모든 이야기가 참자아 안에 있지만 참자아는 늘 그대로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늘 그대로인 존재입니다.
- 한 부인이 삿상에 와서 남편과 사별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남편의 유언장에는 서류상으로는 자식에게 집을 물려주지만 아내가 여생을 그 집에서 편히 보낼 수 있게 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엄마를 내쫓았다는 것이었어요! 자기 아들에게 쫓겨나다니, 여러분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기껏 애지중지 길러놓았더니 자기 엄마를 길거리로 내쫓다니요! 그래도 그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슬픈 일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건들은 자신이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그 엄마 되는 분의 마음이 올바른 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는 이 경험을 바람직하게 이용할 것이고 언젠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할 것입니다. "삶이시여, 제 아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에 감사합니다. 저를 제 집뿐만 아니라 제 삶으로부터 쫓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직 꼬마였을 때 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상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무게로 허리가 너무 굽은 나머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그의 이름은 아틀라스 Atlas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인도에서 나타라지 Nataraj라고 불리는, 시바 Shiva 신이 세상의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거 정말 좋군!"이라고 말했답니다.
- 우리가 눈을 제대로 뜨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환상 또는 이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도시, 마을 할 것 없이 어디에서나 ...
- 우리는 개인에서 현존으로의 전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현존에서 절대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노력으로도 절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우리는 언제나 참된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여러분께서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몇 마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이 진리를 알아가는 동안, 즉 개인에서 현존을 거쳐 마침내 절대에 이르는 동안, 각 단계마다 우리 등 뒤에서 닫히는 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전체를 알게 되지요. 한때 여러분은 알파벳을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영어를 술술 적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과거를 돌아보며 "ABC 공부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알파벳은 계속 거기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알파벳을 알고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또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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