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지나 서미나라 / 강태헌
원제 : Many Mansions
출판 : 파피에
출간 : 2020.11.03
즐겁게 읽었다.
삶이 한 생으로 맺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가설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사람에 따라, 또 시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성에 깊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 끝없는 지난함'을 종결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전부터도 다소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끌리긴 했었지만, 이런저런 두려움이 컸음에도 관련 영역들을 조금씩 시도해 봤던 것은 '그래야 끝난다'는 감각이 있어서였다.
지금에 와서는 '끝'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에 가깝게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절망보다는 나름대로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정도로 가벼워지기도 했다. 망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라고 생각한다-
<윤회>는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보시는 게 좋을 책이다. 이 책은 저자 '지나 서미나라'가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 사례들을 연구하여 엮어낸 카르마와 환생에 관한 설명들이다. 내 경우에는 내면적인 모순과 갈등, 이상적인 자신과의 합치에 관한 어려움과 실망에 관해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느낌을 위해 그런 과정이 필요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호오포노포노'에서 설명하는 '모든 것은 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라는 설명이 무겁게 느껴지셨던 분들께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언젠가는 모두가 완성될 것이므로, 그 과정 중에 있는 이들은 상대적인 비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도야와 주변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다.
다만 저자의 설명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하는 그에 대한 단상들이다. 해당 도서를 완독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써보는 내용들로, 저자나 케이시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1. 당시 그리스도교는 윤회 사상을 강조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근거는 전혀 댈 수 없다. 개인적으로 예수는 인도 사상을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윤회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미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국민적인 믿음이 존재하던 동양과는 달리, 앞으로 교인들이 겪어야 할 고난들을 예상했으나 피할 수 없으리라 보고 강조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의 삶과 선택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그런 경험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건 아닐까. 해서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혹은 종교적 유사함으로 흡수되지 않도록 윤회를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2. 자신을 징벌하는 것은 자기 자신 - 다시 말해 자신의 죄의식이다. 내가 생각하는 카르마는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있어 '그른 행위'를 해서 '교정'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적 저항과도 유사하다. 자신의 마음에 생긴 거리낌을 무시해서 생긴 저항을 '이해'하기 위해 다각도에서 체험하게 해주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선업도 악업도 수레를 돌리지만, 그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저자의 설명과는 반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한 행동은 카르마를 낳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무지의 상태에서 본능에 따른 것은 '죄'가 아닌 것이고, 설사 쌓인다고 해도 미미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생겼는데도 그것을 무시한 행위는 -알면서도 저지른- 직접적인 저항, 즉 반동 작용이 생길 것이다.
3. 인간만이 아니라 수많은 것들은 축적의 힘을 통해 자신을 구현한다. 땅에서부터 자라난 식물, 그것들이 쌓여 태어난 동물, 그 모든 것들을 취하며 태어난 인간이라는 흐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광물들 또한 가없는 시간 속에 축적된 것들이 형상으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도 자신의 안에 받아들인 것들 -음식, 생각, 관계, 감정- 이 쌓여 현 상태를 이루고, 또 다음 상태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믿어서 힘을 줄 것인가'에 대해 항상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우선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이상점을 정해야 한다.
4. 결혼은 매우 신성한 행위이며 일종의 창조의 행위이다. 이는 '나'를 내려놓고 더 큰 '나'로 결합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모든 생명이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매 순간 행하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든 순간 모든 것은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있다. 호흡을 통해 산소를 취하고 내놓는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부패나 발효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나'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호흡' 또는 '소화'이지만 내 쪽이 자연에 흡수된 상태일 때는 '부패'가 된다. 무엇을 '나'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양쪽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결혼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내려놓고 의도적으로 '우리'로서의 '나'인 결합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창조 행위이라고 생각한다.
5. 다시 부연하자면, 결국 부정적인 카르마의 근원은 스스로의 죄의식이다. 그렇기에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진정으로 돕는 방법은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는 기꺼이 나서되, 그렇지 않을 때는 심상의 힘으로 그들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성취한 모습을 끊임없이 그려주는 것이다. 이는 어른이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되 가장 필요한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네빌 고다드의 가르침이 가장 강하게 와닿는다.
6. 개인적으로 더 깊게 생각해보고 싶은 바는 선업의 고리이다. 선행의 카르마 역시 지속적으로 굴러간다. 만약 그것이 진보의 방향이라면 모든 이들이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은 어떠한 의미가 되는가? 모든 것의 중심이자 모든 것은 동이되 정이다. 해탈을 미룬 보살들은 '모든 시간이 정지하기 직전'에 다른 지점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동력을 제공해주고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등등의 잡생각들을 하며 읽었다.
이제는 나보다 반짝이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스스로의 모순을 느끼며 괴로운 순간에는 그것을 '인식했음'을 감사하기로 했다. 아예 모를 때는 그것을 조율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겠지만, 불합치를 감각했다는 것은 '선택이 가능한' 순간이 있었던 것이니까.
사실 이 생각들이 처음 떠오른 것들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훨씬 체감적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잘 실천이 되지 않아서 괴로웠다면, 이제는 '지금은 못했다'일뿐 '나는 못한다'는 아니라는 걸 믿는다. 누군가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으리라는 감사함과 믿음이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라거나 '그렇게 한 존재들은 어떻게 한 걸까'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안 되던 것이 되는 순간의 감각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꼭 그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이런 감각을 다른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잊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바꾸지 않는 한 방향성은 당신을 반드시 그 자리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카르마다.
- 케이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삶의 궁극적 문제에 관한 그러한 추상적인 의문은 여태까지 그의 마음에서 전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종교 교리를 그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교회의 가르침을 철학이나 과학 또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 본다는 따위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상한 잠, 곧 최면 상태에 자기 자신을 들게 하는 것은 오직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고결한 소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능력 속에 병을 진단하고 치료해 주는 것 말고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라머스가 처음이었으며, 그것은 당장 케이시의 상상력을 일깨웠다. 케이시의 리딩은 그때까지는 주어진 문제에 해답을 주는 데 실패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라머스가 제기하는 의문에 해답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 당시 라머스는 점성학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만약에 점성학이 올바른 학문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인간과 우주의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바르게 분석하고 체계를 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이 케이시의 투시 능력을 이용한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3년 10월 어느 날 오후, 케이시가 데이턴의 한 호텔방 침대에 누웠을 때, 그에게는 라버스의 몸속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호로스코프(Horoscope, 天圖)를 살펴보라는 암시가 주어졌다. 케이시는 최면 상태에 들자마자 짤막하게 요약된 말로 라머스의 호로스코프를 말했다. 그리고 그 리딩이 거의 끝나갈 무렵 뭔가 약간 모호한 말투로 더듬더듬 "그는 한때 승려였다."라는 묘한 말을 했다.
- 그때의 리딩이 라머스의 호기심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로 인하여 라머스의 호기심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케이시가 눈을 떠보니 라머스가 흥분하여 방금 케이시가 한 말의 의미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었다. 만약 윤회가 사실임이 증명된다면 그것은 철학·종교 및 심리학에 관한 현대 사상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라머스는 외쳤다. 만약 케이시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리딩을 해 준다면 윤회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점성학과 윤회는 어떻게 연관될까? 그것들은 인간의 삶과 성격 및 운명을 어떻게 설명해 줄까?
- 그 리딩에 따르면, 점성학에는 어느 정도의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태양계는 끊임없이 진화해 가고 있는 영혼에 대하여 일련의 경험을 제공한다. 인간은 이미 이 세계에서의 온갖 경험과 또한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의 의식 경험을 번갈아 갖게 된다. 이런 차원들에 대하여 점성학은 예로부터 그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행성의 이름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현재 전해져 있는 점성학은 다만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정확하지는 않다. 그 까닭은, 첫째로 윤회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로 그것은 이름과 점성학적 영향이 인간의 선 조직(腺組織)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의 그 이전의 경험을 통하여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하는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머스는 점성학 지식을 두루 섭렵했지만 그 두 가지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 케이시는 이런 모든 것을 한낱 공상처럼 여겼지만, 그 자신도 호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에 라머스가 청하는 대로 리딩을 계속했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은 만약 리딩 도중에 케이시에게 '호로스코프'에 대하여 좀 더 적절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한다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면 중에 다음과 같은 형식의 암시를 하게 되었다.
당신 앞에는 'X라는 곳'에서 'XX년 X월 X일에 태어난 XX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현세에서의 이 사람의 현재적(顯在的) 및 잠재적(潛在的) 성격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이 사람과 우주와의 관계, 그리고 이 사람과 우주의 모든 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해주십시오. 또한 전생에서의 때와 장소와 이름, 그 각각의 전생에 있어 이 사람의 인간적 성장을 도운 것과 그것을 지연시킨 것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 그로부터 리딩은 전생에서의 그 개인의 상태를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말해주게 되었으며, 이런 리딩과 그때까지의 각 개인의 육체와 건강 상태를 말해주는 리딩을 구분할 필요가 생겨, 전생이나 성격을 말해주는 리딩은 '라이프 리딩(Life-reading)', 육체와 건강 상태를 말해주는 리딩은 '피지컬 리딩(Physical-reading)'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이프 리딩과 피지컬 리딩을 하는 방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모두 같다.
- 어떻게 이 사랑의 원칙이 다른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과 모순된다는 것인가? 붓다는 일찍이 "그대 스스로가 남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느끼는 행위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이것은 의무의 으뜸이라. 자기가 당했을 때 고통을 느끼는 그런 행위를 남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고 힌두교 성전은 가르친다. 힌두교나 불교도 사랑의 법칙과 윤회라는 영적 진화의 법칙 사이에 아무런 분열이나 모순도 인정하지 않는다. 힌두교나 불교는 오히려 윤회의 법칙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두 법칙 사이에 모순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 케이시는 그래도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10세 때 성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 후 해마다 한 번씩은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체계적으로 읽어나가곤 했다. 그런 동안 한 번도 윤회라는 말이나 생각에 부딪친 적이 없었다. 왜 성서는, 아니 예수는 윤회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글쎄요. 예수는 아마도 말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요."라고 라머스는 말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가 대중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많은 것을 제자들에게는 말해주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설령 예수가 보다 일반적인 말로 윤회를 설했다 해도 그의 가르침의 기록은 몇 세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져 왔으며, 또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왔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순수하게 우리들에게 전해져 있지는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서에는 한 군데, 그가 제자에게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재생임을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17장 12~13절). 예수는 윤회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이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 정통 그리스도교는 차츰 윤회와는 관계가 없는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떻게 정통파가 언제나 바르게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선택하거나 거부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부들의 행적을 연구해 보면, 그들 가운데 다수가 윤회를 긍정했고 공개적으로 설교했음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오리게네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플로티노스 등 예수가 살았던 때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가 제자들에게만 은밀히말했던 가르침을 -이것은 먼 옛날부터 밀교(密敎)로서 전해진 것이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 배우고 전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 처음에 케이시는 이런 정보가 나오는 것이 라머스가 윤회를 믿고 있어서 케이시의 마음에 그런 암시를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사실이 그런 의혹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선 라머스는 최초의 리딩 때는 암시의 말 가운데서 윤회라는 말은 쓰지를 않았다. 그가 부탁한 것은 호로스코프였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 "사람은 자기가 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말씀하시듯 악의를 품고 그대에게 오는 사람을 좋게 대해주어라. 그러면 그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을 보상할 수가 있다."
- 전생에서의 옳지 않은 심리의 결과로 현생에 나타났다고 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그런 해설의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설해 주는 말이 아주 진지하고 적절했기 때문에 그 말들에는 큰 설득력이 있었다. 철저한 그리스도교인의 사고방식과 윤회 사상과의 이 기묘한 결합에는 아무런 과학적인 힘이 없으며 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에게는 무의미한 말들일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결정적인 무게가 있었다.
- 다음으로 추구한 것은 그런 정보들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최면 상태에서 케이시의 마음이 끌어낼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 둘 있다는 것이었다.
- 그 하나는 라이프 리딩을 의뢰한 개인의 '무의식의 마음'이다. 리딩에서 말해준 설명에 따르면, 무의식의 마음은 각 개인이 거쳐온 모든 경험 -이 세계에 태어난 이후의 경험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일체의 과거 경험- 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 태어나기 이전의 기억은 대개 근대의 정신 요법 의사들에 의하여 끌어내어지는, 말하자면 마음속 뚜껑 아래의 무의식보다 더 깊은 자리에 들어 있다. 그리고 무의식의 마음속으로는 의식하는 마음보다 동등한 무의식의 마음이 들어가기가 쉽다. 이것은 뉴욕거리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는 데는 땅 위를 달리는 전차보다 땅 밑을 달리는 지하철로 가는 쪽이 더 쉬운 것과 같다. 이런 메커니즘에 따라 케이시의 마음은 최면 상태에 들면 다른 사람의 무의식 영역과 쉽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 설명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묘하게도 무의식의 마음의 존재와 내용에 관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발견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일치한다. 그런데 리딩을 통해 주어지는 정보의 두 번째 원천에 대한 설명은 다소 환상적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 아카샤란 산스크리트 말이다. 이것은 전자기적(電磁氣的)이고 영적인 짜임새인 우주의 근본적 질료인 에테르를 가리킨다. 이 아카샤 위에 우주가 시작된 이래의 모든 소리·빛·운동·상념의 기록이 인상(印)되어 있고,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이 기록이 있기 때문에 투시가나 점술가들이 과거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먼 과거의 일이라도, 그리고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기록이 영원히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아카샤는 마치 녹음기와 촬영기처럼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 그 진동으로서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 각자에게 원래 갖추어져 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기관의 감성에 의하여 그 기록을 읽을 수 있는데, 다만 라디오를 들을 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의식의 파장을 아카샤에 기록된 인상의 파장과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 이 아이는 현세에서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어떤 층에서는 과거에 남에게 가한 무자비한 형벌의 기억이 끈질기게 이어져 있어, 아직도 자신이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줄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암시는 그의 그런 마음의 심층에 도달하여 그의 죄가 사회봉사나 친절로 이미 보상되었거나 보상될 수 있음을 보증해 주었으며, 그 결과 더 이상의 상징적 복수는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 아이는 그 이후 잘 순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해 주고 떠받들어 주었으며, 그는 자연스럽게 남의 앞에 서서 이끄는 훌륭한 학생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내향성이 깨끗이 극복되었고, 존슨 오코너의 '인간공학 연구소' 테스트에서는 완전히 적응성을 갖춘 외향적 성격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성격 변화는 어느 정도는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받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케이시 덕분이라고 그의 어머니는 말한다. 부모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 16세인 소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남들에 대한 넓은 관용성이다. 남들에게서 어떤 성격적 결점을 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는 거기에 대한 어떤 심리적 해명 내지 변명을 찾아내어 준다. 그의 과거의 편협성이 -그것 때문에 현생에서 육체적 결함이 생겨 상징적인 보복을 받았다- 적극적인 관용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함에서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육체적 카르마는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리뷰자 주 : 나는 내향성을 교정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스스로 편안해하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보았을 때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 리딩에 따르면 그의 전생은 프랑스 궁정의 풍자가(家)였는데, 궁정 안에서의 동성애 스캔들을 타고난 풍자적 재능으로 폭로하기를 특히 재미있어했다. "남을 심판함은 바로 자기의 죄를 심판함이다. 왜냐하면 남을 헤아리고 심판할 때 자기도 그와 같이 헤아림을 당하고 심판받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리딩은 말했다.
- 약 2천 년 동안 서양의 도덕의식은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죄가 속죄된다는 '대속(代)의 교리'에 바탕을 둔 신학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 그가 인류에게 준 엄청난 영향을 볼 때 회의적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고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그렇게 고귀하고 자비롭게 살다가 죽었음은 인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진보에 따라 우주의 모든 생명은 극미의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에 있어 하나의 중심 에너지, 곧 '신'이라는 공통의 유지력에 의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갈수록 뚜렷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하나의 거대한 중심인 태양에서 비쳐 나오는 광선처럼 모두가 그대로 신의 아들이다.
-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화제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이것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아틀란티스는 그 거대한 힘을 함부로 썼기 때문에 파멸했다."고 라이프리딩이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틀란티스에서는 전기 에너지나 심령 에너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최면술을 성욕의 만족이나 남을 강제로 노동시키기 위해 이용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극도의 타락에 빠졌다는 것이다.
-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당시의 인격적 타락은 전기나 심령학 또는 심리학의 지식이 고도로 개발되어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고는 완전히 보상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는 대식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최후로 판정하려면, 그를 다시 한번 맛있는 음식에 둘러싸이게 하여 그가 그 속에서 스스로 절제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남자가 매혹적인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성 안토니우스처럼 굳세게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성욕을 극복했다고 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의 과학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힘을 남용한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기회가 제공되었을 때 그 힘을 건설적으로 쓰지 못한다면 이기주의와 권력욕을 극복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 역사의 주기적(週期的) 진보는 20세기를 바로 그와 같은 시기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케이시의 리딩에 따르면, 아틀란티스 시대의 인간이 현대에 아주 많이 환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놀라운 과학 기술은, 첫째는 아틀란티스 시대에 이루어 놓은 업적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놀라운 발명 능력의 결과로서, 둘째는 그런 힘의 남용의 결과로 일어난 파멸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이기주의와 문명의 가면을 쓰고 자행하는 만행에 대한 새로운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는지를 판정하는 시험장으로서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볼 때, 알맞은 문화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필요성이 어떤 카르마가 어느 기간 멈추어지는 일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역사의 어떤 주기적 진행과 그리고 이 지구로 환생한 영혼의 무리와 그렇지 않은 영혼의 무리 간의 어떤 주기적 교체와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민족 내지 인종의 큰 물결이 이런 우주적 리듬을 띠는 '회귀의 법칙'에 따른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의 리딩 곳곳에는 그 큰 물결 속의 무리 및 그 무리 속의 개개인의 삶마저도 단지 어떤 정해진 리듬에 따라 기계적이고 숙명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말들이 있다. 한 영혼 또는 한 무리의 영혼들이 회전식 문처럼 자동적인 규칙성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다른 모든 창조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작동되며, 개개인 내지 그 무리는 스스로 나타날 때와 장소를 선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또, 만약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 또는 영혼의 무리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재능을 다듬고 가꿀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상대방 영혼이 환생하는 시기와 맞추기 위해 자기가 환생하는 시기를 지연시킬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는 더욱 복잡한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연기하는 기간이 아주 길어질 때는, 그 사이에그의 다른 측면을 진화시키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 어떤 카르마가 일시적으로 멈추어지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 하긴 그런 부정은 위대한 암시의 힘을 발휘하기는 한다. 또 정신력의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건강이 회복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이나 죄의 카르마를 말로 부정한들 실제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을 사는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꾀를 써서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질서를 세우고, 나아가서는 보다 높은 영적 수준에서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사실 물질은 '영(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에너지가 엉겨 붙은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물질은 낮은 수준의 진동을 하는 영(靈)인 것이다.
- 죄와 카르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윤회론에서 말한다면, 카르마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 작용하고 있는 카르마이든 멈추어져 있는 카르마이든 지불해야 할 부채나 배워야 할 교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근본적으로 불성실한 태도이다. 자기의 의무에 대해 그것이 물질적인 성질의 것이든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든, 얼버무리거나 기만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정이라는 정신적 곡예로 구성된 기만이라는 시도 속에는 바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암시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암시는 정신이 굳어지는 것과 죄의식이 응어리지는 것을 풀어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야뇨증이 치유된 소년의 이야기에서 암시가 죄의 잠재의식에 미치는 하나의 현저한 실례를 보았다. 그에게 상징적인 형벌을 주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자기는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그 자신의 의식이었다. 이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과 자기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의식이 그의 육체적 상태 및 인격에도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또한 알레르기의 경우에도 리딩은 암시와 최면술을 권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주어지는 암시가 부정적인 암시는 아니었다. 반대로 그 아이가 지닌 '영적 조화의 의식' 등 긍정적인 내용의 암시였던 것이다. 만약 정신 치료가 카르마에서 온 질병이나 절박한 카르마의 압박감 등을 치료해주려 한다면, 그 치료는 과거의 부채를 솔직히 인정하고 부채를 갚으려는 성의를 보이며 끝으로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윤회론자의 견해를 인정한다면, 인류가 영적으로 아직 미숙하며 따라서 인간은 각자 그 내생에서 유쾌하지만은 않은 카르마를 예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공포나 근심의 씨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하는 말이다.
- 첫째, '하루의 수고는 하루로 족하다'는 금언은 나날을 걱정함이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보내는 데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인생에는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각자에게 주어지는 운명은 정당한 것뿐이며 각자의 능력에 맞는 것이라는 든든한 안심감을 가지고 사는 데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결코 너무 무거워 도저히 견디지 못할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을 것이며, 그들의 종교적 신앙이 무엇이든 그 정신적 경향과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위선(善)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카르마 신앙과 무기력 사이를 연결시켜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교는 과거 및 현재에 있어 무수한 위선자를 낳았지만 위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카르마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대한 마음가짐은 우주의 다른 법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순종과 신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과연 어느 정도 순종하고 어느 정도 자기에게 지워지는 시련을 견디어 내야 하는지가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육체적 카르마에서 오는 괴로움인 경우에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 케이시 리딩은 이런 면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윤회의 법칙이 지니는 윤리적 및 실제적 의미에 관한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의 구체적인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는 케이시 리딩이 '육체적 카르마의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치료 방법 -만약 있다면- 을 말해주었는가?' 또한 '어떤 희망 -만약 있다면- 을 말해주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케이시 리딩은 모든 카르마의 신앙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신의 카르마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 카르마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리딩이 한결같이 격려해 주는 것이다.
- 그는 무엇 때문에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더욱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해서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대로 낫지 않는 편이 그를 위해서는 좋다. 마음가짐과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말과 행동에서도 그런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 지시한 대로 물질적 치료를 한다면 그는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감정과 정신과 목적과 의지를 바꾸어야 한다. 당신의 목적과 당신의 영혼이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어떤 물리적 치료법을 써도 완전한 회복은 바랄 수가 없다. 이 권고를 받아들이건 거절하건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이다.
- 이런 의미에서의 죄는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와 차별심 속에 있다. 이기주의나 차별심은 곧 자기중심이고 여러 가지 모양을 띠고 나타난다. 남의 마음이나 몸에 폭력을 가하거나 방종과 태만으로 자기 자신의 육체를 혹사하는 것, 또는 자존심이나 배타심 따위도 그로 인해 나타난다. 이런 모든 죄는 오직 하나의 근본적 오류, 하나의 근본적 오해, 하나의 근본적 망각 때문에 저질러진다. 즉 인간은 영이며 육체가 아닌 것이다. 죄는 바로 인간이 스스로를 육체라 오해하고 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가 육체라고 생각하는 그 망상이다. 그리고 이 망상을 깨는 가장 확실한 길은 이것을 부정하는 따위의 소극적인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영'이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과정을 거쳐서이다. 나는 영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으면 케이시 리딩이나 그 밖의 신비주의자들이 일컫는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할 수가 있다. 앞에서 본 실례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적 카르마의 거의 모든 경우에도 케이시 리딩은 한결같이 그 치유를 위해서는 당사자가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긍정·명상·기도·성전(聖典)의 연구·도덕의 실천·이웃에 대한 봉사 등으로 높은 의식에 이르라고 리딩은 매번 권고한다. 그러나 참된 성장은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가슴이 충분히 부드러워지고 맑아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런 것들을 실천해 본들 그것은 바울이 말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속이 빈 꽹과리나 다름없다. 수행(修行)으로는 그것들이 가치가 있으리라. 암시력(力)으로도 효과는 있으리라. 교육적인 경험으로서 그것들은 영혼을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리라.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 영혼이 아직 유치원 정도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실천이 그들을 당장 대학 과정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한평생 동안에 그리스도 의식의 알맹이인 그 일체를 포용하는 사랑을 획득하여 카르마의 부채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그는 그런 말만 하고 문제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 청년의 경우뿐만 아니라 비슷한 다른 경우에서도 가능한 물리적 치료법을 일러주고, 그 사람이 직접 해탈을 성취할 수 있건 없건 계속 자신의 병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 나가도록 이끌고 있다. 인내, 지구력, 불굴의 정신, 그리고 병을 앓는 가운데서 배우는 겸손과 친절의 미덕은 적어도 간접적으로 카르마의 부채를 갚는 일에 공헌할 것이다. 그러므로 리딩은 카르마에서 오는 괴로움을 수동적·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병의 치료라는 측면에서 리딩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리딩은 그 사람의 발달 단계에 맞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 요법에 대한 이해력이 아직 부족하거나 또는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정신 요법만을 권하는 따위의 일은 없다.
-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스킬로스가 2천 년 전에 "성격은 운명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그 역(逆)도 또한 참이라는 명제를 확인해 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예들은 오늘의 운명이 어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 여기서 예리한 윤회론자라면 반드시 생각하게 될 하나의 중요한 의문이 나온다. 그것은 '만약 가난이나 비천한 신분이 과거 생에서의 어떤 권력 남용에서 비롯된 카르마의 당연한 징벌적 결과라면, 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가령 아주 가난한 사람이 지금보다 더 나은 경제 구조 속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면 카르마의 목적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 가정은 누구나가 얻으려고 노력하는 최종적 조화의 상태입니다. 가정을 부디 당신의 본업으로 삼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가정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직업 양쪽에 매여 있는 사람도 조금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직업 가운데 최대의 것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회피하는 사람은 가정에 맞먹을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각 영혼이 궁극적으로 획득하기를 바라는 것, 즉 가정은 천국에 가장 가까운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가정을 천국과 닮게 하십시오. 지상의 가족들 사이에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가정은 인간과 창조주와의 관계에 가장 가까운 원형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정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몇 사람의 인격들이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상을 향해 어우러져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 재미있는 것은 남녀의 평등과 여성의 자기 결정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은 리딩 속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전체를 통하여 암암리에 드러난다.
- 병자에게 권해주는 피지컬 리딩의 치료법이 한 종류만은 아니듯, 모든 결혼에 단 한 가지 행동 방식만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바탕이 되는 심리적·영적 원리는 항상 같지만 그 원리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리딩은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을 하라고 권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드시 결혼을 하라고 권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직업이 첫째이고 결혼은 둘째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직업과 결혼 양쪽을 동시에 가지라고도 한다. 또는 주인 둘을 한꺼번에 섬길 수는 없으니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도 한다.
- 이러한 경우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리딩이 주는 조언이 항상 '무엇이 본인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주어진다는 것이 명백하다. 명성이나 돈·우월감·지위·자만심 따위의 이기적인 이유로 직업을 구하고 있는 경우에는, 리딩은 그 동기를 꿰뚫어 보아 그녀를 가정생활 쪽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리딩이 주는 조언은 가정의 신성함이라든가 가정에서의 부인의 지위 등에 대한 감상적인 또는 전통적인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동기와 목적이 활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기적인 활동은 항상 자기희생적인 활동보다 못하며 결혼과 가정생활은 그 성질상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인 직업보다는 훨씬 더 자기희생 쪽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재능이 있는 여성은 그 재능을 인류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쓰는 것이 참으로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 여성에게는 가정이나 남편, 가족들이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늦게 결혼을 하든가, 또는 만약 기질적으로 가능하다면 직업과 가정을 양립시키는 것이 좋다. 결혼 생활이든 독신 생활이든 모든 궁극의 목적은 영적 향상에 있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 모두 평등한 영혼이므로, 그 영적 진화에 가장 도움이 되는 상태라면 어떤 것이든 평등하게 기회가 주어져있는 것이다.
- 윤회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그것이 자유 의지를 확실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카르마와 환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잘못은 인생의 모든 일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 리딩에서는 결혼을 왜 권하지 않는지 일일이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 적절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도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완전히 개인의 자유이다. 리딩은 조언을 바라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단정적인 지시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은 어떤 것을 지도할 때에도 최상의 지도법이다.
- 처녀는 이어서 자신이 그 남성 이외의 사람과 결혼하면 그 남자와 결혼한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리딩은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만날 수가 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 쌓아야 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당신은 그것을 해내야 하므로, 하고 싶으면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선택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히 당사자인 개인에게 있다고 한다. 동시에 많은 경우 선택의 기준을 말해 준다. A가 "X가 저에게 맞는 상대일까요?"하고 물었을 때 대답은 "그것은 당신 자신이 결정할 일이지 남이 결정할 것이 아니다. 당신들 둘 사이에는 정신적·육체적 친화력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끌리는 힘도 있는가? 영혼이 영혼에 호응하고, 목적이 목적에 호응하고 있는가? 당신들의 이상은 같은가? 그렇지 않다면 조심하라."였다.
- 심리학자 융은 각 개인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며, 그 두 성 가운데 어느 한쪽이 영혼에서 우세할 뿐이라는 사실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육체가 자체의 성을 나타내는 성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반대의 성의 성기도 발육은 불완전하지만 갖추고 있는 것처럼 영혼 역시 어떤 발달 이전의 능력, 즉 지금은 활동을 멈추고 있는, 말하자면 이성에게 걸맞는 능력도 간직하고 있다. 융이 오랜 임상적 관찰을 통해 규명한 이 심리적 사실은 케이시의 리딩이 인간의 기원과 발달에 취하고 있는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 간추려 말해 본다면, 이 견해는 다음과 같다. 모든 영혼을 신은 무성(無性) 내지 중성(中性)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우주의 조직 구성의 원리 가운데 하나에 극성(極性)의 원리, 곧 성(性)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 물질에 깃들어질 때 그것은 극성의 법칙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양극성이 어우러진 상태, 곧 한 개체 속에 두 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차츰 두 성으로 갈라진 것이다. 초기 아틀란티스의 역사에는 성적 에너지를 남용함으로써 생겨난 기괴한 생물 형태의 예가 많이 있다. 현재와 같은 두 성으로의 분리는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과도적 상태에 불과하다. 이것은 아마도 영혼에서처럼 다시 두 성이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 것이다.
- 케이시 파일에는 남성적인 여성이 전생에서는 실제로 남성이었음을 말한 예가 무수히 있다. 전생에 남성이었기에 남성적 특성을지니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결혼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것은 결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때로는 아이를 낳는 능력을 방해하는 것 같다. 아이 낳기가 어려운 여성 또는 전혀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이 성전환을 했다는 예도 최근에는 많이 나오고 있다.
- 오페라 가수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전생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 오페라 가수는 전생에서도 그녀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하고 묻는 그녀에게 리딩은 "당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처리하시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현대 심리학은 사랑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정신 분석가들에게 사랑은 고작 성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갓난아기에 대한 왓슨의 훌륭한 실험이 있고부터 심리학은 사랑을 세 가지 정당한 인간 감정 중의 하나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을 우주의 적극적인 힘으로서, 또한 신의 본연의 모습으로서 즉 만물의 궁극적 본성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간 악을 녹여 없애는 영묘한 만병통치약으로서 인정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심리학이 이 말을 쓰기가 쑥스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신중한 -만약 그것이 신중함이라면-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 어버이는 자식에 대하여 우월적인 지배 의식이나 선망적인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부모로서의 알뜰한 사랑의 정과 그것을 초월하는 통찰의 균형 -이것이야말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가장 이상적인 태도이다- 은 모든 인간, 모든 영혼이 평등하게 창조되어 있다는 근본적 진리를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케이시 리딩이 즐겨 쓰는 표현에 따르면, 부모란 "생명이 흘러 영혼이 육체로 깃들어지기 위한 물길"이다.
- 큰 문제를 일으켜 결과적으로 본인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본다. 그러나 신은 마음 속을 보신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은 현생에서 이런 불행을 짊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죄를 보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과거에 신의 법칙을 가지고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 현생보다 더 전의 삶에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만약 이 사람이 사랑의 행위를 배우기 위해 지금보다도 더 적당한 기회가 앞으로 두 번의 삶에서 연속적으로 주어져도 여전히 냉담하다면, 그런 태만의 죄는 다음번에는 그 자신의 육체에 어떤 고뇌를 가져올 만큼 큰 것이 되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는 뭔가 구체적인 모양의 불행을 그 자신이 짊어지고 나올 것이다. 이러한 인과의 연쇄에 대해서는 리딩의 어디에서도 분명한 말은 없다.
- 영혼의 불멸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대개 미래라는 한 방향으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4차원 물리학이 제시하는 '무시간(無時間)'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비추어 보면 그런 견해는 아무래도 불완전하다. 과학적 고찰은 차치하고 이 문제를 종교적 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혼은 본래 영원이며, 따라서 만약 영혼이 불사(不死)라면 그것은 또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미래에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 과거에도 영원히 존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로 구획하는 생물적 경계는 단지 영원한 비물질적 영혼의 겉모양 내지 그림자에 불과하다.
- 이런 견해를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초기 그노시스파 그리스도교에서는 인정했었다. 많은현대 시인들이 이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아마도 영국의 계관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영혼 불멸송 Intimations of Immortality>일 것이다. 태어남은 단지 수면이요 망각이라는 워즈워스의 감각은 고대의 예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다. 인간이 지니고 태어나는 영혼은 어딘가 다른 곳에 그 배경이 있으며 먼 곳에서 오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전생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해 왔다.
- 개인이 과거에 노력하여 획득한 인격의 균형은, 무엇보다도 직업을 잘 지도해주는 말이 담긴 리딩에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미 많은 리딩 속에서 연속의 원리가 개인의 태도, 흥미, 성격의 특성 등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보아 왔으며 ...
- '미의 신전'은 일종의 학교 내지 대학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지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대학과 달리 인간의 전체적인 인격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예술과 과학이 모두 학생들의 정신과 육체의 미를 가꾸어 내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학생들은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나라 및 다른 나라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된다. 이것을 '신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모든 교육이 종교적 및 영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인간의 일곱 차크라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훈육상의 초점이 있었다고 하는 리딩의 말은, 이 교육 기관의 구성과 교과 과정이 철저히 초자연적 지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암시해 준다. 영적 기초 위에서 직업 지도를 하는 것이 미의 신전의 많은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예술이나 종교를 통하여 직업 상담이나 인격 도야 등에 관심을 쏟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거기서 교사나 학생으로 있었던 사람들의 환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교육 분야의 훌륭한 저서인 <이상(理想)의 학교>를 통해 보리스 보고슬로프스키가 말한 원대한 교육 사상은 고대 이집트의 지혜와 많은 점에서 아주 흡사하다.
- '희생의 신전'이란 말하자면 병원과 같은 기관으로, 여기서는 아틀란티스에서 전해졌을 전기 치료법이 외과 수술과 육체의 온갖 증상이나 불구를 치료하는 데 쓰였다. 여기서는 육체의 완성과 인종의 개량이라는 이상을 지도 원리로 삼았으며, '신전'이라는 이름 역시 종교적 및 영적 원칙에서 운영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 다음으로, 어떤 매우 인기 있는 마사지치료사의 전생에서의 직업 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4회의 과거생이 밝혀졌는데, 그중 3회의 생애에서의 직업이 현생의 그것과 관련이 있다. 전생에서 그는 미국 초기의 의사였고 인디언들과 친밀한 교류가 있었다. 그런 교류를 통해 그는 자연 요법과 약초 요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리딩에 자주 나타나는 설명을 보면, 전생에 아메리카 인디언과 친했거나 인디언이었던 사람은 현생에서도 자연을 사랑하고, 손으로 물건 만들기를 좋아하며, 자연적인 생활과 치료법에 강한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전전생에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로마에서 목욕장과 마사지실의 감독 노릇을 했으며, 그 전의 삶은 페르시아에서였는데 그때의 직업에 대해서는 리딩이 말해주지 않았다. 다시 그 전의 인생은 기원전 13000년경 이집트에서 살았고 그때 직업은 미라 만드는 일이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에게 인체의 내부 구조, 여러 가지 약초, 향료, 갖가지 화장품의 효과에 관한 지식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 그는 먼 과거생부터 거듭거듭 보석을 다루어 왔으면서도 보석의 참 가치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장식용으로, 그리고 수집이나 매매에 유리한 상품으로 다루어 온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리딩이 둘째의 흥미로운 사실에 주의를 돌리도록 해 준 것이다. 즉, 보석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진동의 특성 때문에 병을 고치는 효과와 자극을 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 케이시 파일에는 이 사람에 대한 리딩을 해 준 1944년 이전에, 어떤 종류의 돌이나 보석 및 귀금속 등을 그 진동의 영향력 때문에 이용하라는 권고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리딩이 권하는 돌이 그 사람의 탄생석과 일치한 일은 없다. 보석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돌이나 원소들이 각각 그 나름의 원자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은 자주 해주고 있다. 육체의 원소도 본질은 원자 에너지이다. 어떤 돌이 어떤 사람에게 맞는가는 ...
- 이미 살펴본 두세 가지의 예에서도 명백하듯이, 욕망은 그 강도에 있어 카르마와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영혼은 어떤 능력이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다 보면 그런 능력이나 성질을 원하게 되는 것 같다. 예수가 설교를 하고 병자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감화를 받아 예수와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킨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케이시 리딩은 말한다. 이런 욕망의 힘은 그 후 연속적으로 여러 번의 삶을 통하여 설교를 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획득하도록 그 사람의 마음을 몰아세운다. 때로는 이런 욕망이 어떤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은 갖지 못했다는 불쾌한 열등감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어떤 원인에서 그런 욕망이 나오든, 욕망이란 영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그것은 온갖 계기를 이용하여 차츰차츰 특정의 형태와 방향을 취하면서,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부모와 환경을 선택하여 그 새로운 성질과 모습을 완성하려고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그 때문에 도리어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 하고 헤매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재능이 풍부한 젊은이들이 그 풍부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인생 목적을 갖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의외로 많은 것이다.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올바른 첫걸음은 말할 것도 없이 본인의 재능 목록 -재능이 다양하든 아니든- 을 만들고,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해주는 아주 현명한 대답이다. 그들은 인간의 재능을 측정하는 정확한 기준을 고안해 냈다. 케이시 리딩은 이런 점에 대해서는 별로 세밀한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에 대한 상담에 응하는 심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대개 그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능력을 암시해 준다.
- 그러나 어떤 직업을 딱히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나 또는 특별한 조언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리딩이 말해주는 조언의 기본, 곧 직업 선택의 기본적 철학은 아주 명확하다. 이 철학의 중심 개념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당신의 이상(理想)과 당신의 내적인 인생 목표를 정하시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도록 노력하시오."이다.
- 이상을 세운다는 것은 케이시의 '적응의 철학'에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다. 더구나 그것은 직업의 자발적인 결정에서 특히 필요하다. 리딩은 사람이 자기의 이상을 분명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종이 한 장에다 육체적·정신적·영적이라는 세 가지 항목의 난을 만들고, 그 각 항목의 난에 자신이 열망하는 가장 높은 목표를 써넣으라고 리딩은 자주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본다.
당신의 문제나 당신의 이상을 분석할 때 그저 마음속에서 생각만 하지 말고 종이에 써보시오. '육체적'이라고 쓰고 줄을 긋고, 다시 '정신적'이라고 쓰고 줄을 긋고, 끝으로 '영적’이라고 쓰십시오. 각 난에 '영적'부터 시작하여 -왜냐하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은 먼저 영적 개념에서 오기 때문에- 당신의 영적 이상을 써넣으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지, 붓다인지, 마음인지, 물질인지, 신인지, 그밖에 무엇이든 당신에게 영적 이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써넣으시오. 다음으로 '정신적'이라는 항목에 당신 자신의 일이나 당신의 가정·친구·이웃·적·상태·조건 등에 대하여 당신의 영적 개념에서 나오는 이상의 정신적 태도를 써넣으시오. 그다음에 당신의 물질적인 이상은 무엇인지를 써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기 자신을 분석해 나갑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즉시 응용해 나가시오. 먼저 무엇보다도 당신의 이상을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종이에 써보십시오. 다음에는 마음먹고 그림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상당히 훌륭한 기술자이니 그림을 잘 그릴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화상을 그려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자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요? 또한 남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이상적 이미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당신의 정신적 이상은 무엇인가요? 물질계에서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결국 리딩은, 인간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다양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인격의 참된 완성과 참된 자기 훈련은 명확한 목적의 확립을 거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직업은 이와 같은 기본적 개념 위에서 선택해야 한다.
- 직업 선택에 관한 케이시 철학의 두 번째 개념은 "남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노력하라."이다. 무엇을 하면 인류에 봉사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결국은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모든 사람들을 지도하는 원리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끝내는 자기 자신을 인류라는 육체의 세포로 보게 되어야 한다. 서로 싸우는 국가의 세포가 아니라 인류 그것의 세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웃에 대한 봉사는 신에 대한 최고의 봉사다."라는 말은 리딩이 거듭 강조하는 말이다. "당신들 중에 가장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오."라는 말도 리딩이 자주 되풀이하는 말이다.
- 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를 당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육체·마음·영혼을 그 에너지와 당신의 동포에게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 이 원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는 경제적 안정이라든가 명성이라든가 세속적인 성공 따위가 봉사라는 목표 앞에서는 제2차적인 것으로 돌려진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은 수레가 소를 따라오듯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다방면의 재능을 지녔기 때문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13세 소년이 케이시에게 "제가 어른이 되어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하려면 저의 어떤 소질에 따라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대답은 이러했다. "경제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라. 단지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금전상의 이익은 그 사람이 자기의 재능을 남들을 위해 쓰면 결과로서 반드시 얻어지는 것이다."
-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부인이 또 있다. 그녀는 61세이고 어떤 나라 외교관의 아내이다. 오랫동안 동양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예술과 종교를 연구해 왔다. "어떻게 하면 제가 인류에게 가장 봉사할 수가 있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 "그날그날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봉사하십시오.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위대한 일을 하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주어진 기회나 특권을 활용하는 사람이 큰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회를 활용하면 보다 좋은 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남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쓰는 것은 자연히 늘어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참된 가치를 발휘하면 주님이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 예술이나 과학 또는 정치 분야에서 어떤 업적을 이루고 싶은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릇된 근시안적 물욕 때문에 기가 꺾여 나태해지고, 목표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삶과 노력이라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의 인생에서 시작된 것이 다음 인생에서 열매를 맺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회는 지금의 인생 뿐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현생에서 위대한 음악가가 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런 생각 때문에 음악을 완전히 단념하고 만다면, 그것으로 그의 재능의 성장은 멈추어져서 다음에 태어났을 때 해야 할 일을 많이 만들어 놓는 결과가 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말속에 요약되어 있는 선견지명을 응용한다면 그의 무기력은 해소되고, 그 에너지는 올바른 방향에 쓰일 것이다.
- 한편, 반대로 윤회론에 의하여 펼쳐지는 거대한 발전의 전망에 취한 나머지 도리어 그 정열을 나날의 생활과 실천에 쏟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접신론자 인지학자 중에는 영적 진화가 작동되는 우주의 법칙을 열심히 연구하다가, 자기 자신의 영적 진화가 그런 법칙을 아는 것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여행 안내서 연구는 몰두하지만 스스로 여행은 가지 않는 사람과 같다. 추상적 개념만이 그들의 동인(動因)이 되어 버려 막상 뭔가 실제로 성격을 개선한다든가 또는 인류에 대해 뭔가 유익한 봉사를 해야 할 때가 되면 어쩔 수없이 그 무능을 노출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 접신론자나 인지학자만이 아니다. 햄릿 이전부터 비행동성(非行動性)은 철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 케이시 직업 철학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세 가지 원칙에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원대한 우주적 전망과 흠잡을 데 없는 건전한 상식이 슬기롭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물론 윤회의 지식이 정신의 균형을 어지럽힐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우주적 관계 부여의 틀과 일치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나 모든 결심을 보다 건전한 것이 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긴 윤회론을 처음 접하여 그 원대한 전망이 펼쳐지는 것을 처음으로 바라보면 자칫 마음이 부풀어 올라 착실한 상식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케이시의 직업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이런 오해를 예방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개념이 아무리 드넓어져도 자기완성은 여전히 매일매일 조금씩 쌓아 올려야 하는 느린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만 한다.
- 또한, 환경이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사람의 내적인 눈뜸의 단계에 꼭 맞는 것임을 케이시 리딩은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설사 현재의 환경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의 진정한 소명 실천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해도, 그것은 그가 걸려 넘어질 돌이 아니라 그의 디딤돌인 것이다. 외적인 환경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런 환경의 장애 요소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꾸준히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리딩은 말한다.
이것을 아십시오. 어떤 처지에 있어도 그것은 당신의 진보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나날의 공동생활 속에서 여기에서 하나, 저기에서 하나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인격이 도야됨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림으로써 집은 지어집니다. 말로 그리고 나날의 조그만 행위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면서, 그 지식과 잠재능력 및 참 목적의 완전한 성취를 향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가 끊임없이 전진적 실천을 통해 봉사하려고 마음먹는다면 환경은 필연적으로 변화하여, 다음 단계의 방법, 다음 기회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조금씩 착실히 쌓아 나가십시오.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미리 걱정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전체 건축물은 신이 만드는 것이니까요.
- 윤회의 개념에 따른다면 어떤 노력도 결코 헛되지 않다. 만약 카르마가 나쁜 짓을 한 것을 징벌함에 있어 공평한 엄격함으로 임한다면, 그것은 건설적인 노력을 한 것을 보상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공평한 엄격함으로 임할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절망 따위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떠한 순간에도 사람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며, 그 미래의 기초를 닦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표면적인 장애에 굴복하여 소극적인 태도가 되어 버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런 마음의 태도는 가로의 인생관, 곧 수평적 인생관에서 유래된다. 바꾸어 말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평면적 차원에서 자기와 남을 비교하는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론에 따르면 유일한 참된 인생관은 세로의 인생관, 곧 수직적 인생관이다. 젊은 사람들과의 비교는 불쾌할 뿐더러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을 능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진보란 남들과의 상대적 관계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서의 진보인 것이다. 이것이 진리임을 정말로 인식한다면 현생에서 자기와는 다른, 어쩌면 더 유리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속을 썩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경쟁이란 유물론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영적 사실에 있어서는 보다 낮은 자기 자신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 필연적으로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선망(望)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머슨이 "인간에게는 각자가 진보해 나가는 길목에서 남을 부러워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온다."고 한 것은 윤회의 지식으로써만 완전하게 이해되는 진리를 말한 것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어떤 능력이 바로 그 사람이 과거에 노력한 결과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능력·사랑·명성 등 남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것을 자기가 갖출 만큼 필요한 노력을 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기 것이 된다.
- 현재의 문명이나 영적 이해의 단계에서는 흔히 선망의 감정이 동기가 되어 다른 동기로는 도저히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선망으로 인해 악의·증오·비난·중상·원망 및 그와 유사한 저속한 감정으로 이끌리게 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누군가 다재다능한 사람을 보면 대개의 경우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이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드러내려고 노력한 결과 여러 분야에서 상당히 훌륭한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한 분야에서만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보다 더 크게 부러운 법이다. 그런 사람은 그 다재다능함을 통해 남들이 찬양해 주기를 기대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칭찬의 말을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사람은 남들에게서 강한 적의와 미움을 산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남들이 가진 가치에 대한 주장을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모든 재능은 어느 것이나 인간 누구나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된다면, 부러워하는 감정은 엷어지고 정말로 다재다능한 인간이 이 세상에 늘어날 것이다. 우주의 영적 질서는 이 세계의 어떤 경제 구조처럼 가지지 않은 다수의 희생 위에서 가진 소수가 나온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모든 자질은 그것을 이기적으로가 아니라 순수하게 쓰기만 한다면 누구나가 평등하게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 나아가 직업 능력이란 노력에 따라 발달하는 것임을 안다면, 선망이라는 괴리감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칭찬이라는 일체감을 증대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가 현생에서는 다른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 발휘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다른 사람이 표현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인 것이다.
- 예컨대 자신이 현생에서 떠맡은 의무 때문에 가정 살림에만 갇혀 있는 여성이 마음속으로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동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발레 장면을 보거나 신문에서 무용가들의 우아한 모습을 보거나 하면, 무용이 아니라 살림에만 매달려 있는 운명이 매우 원망스러운 순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2~3세기쯤 지나면, 또는 그전에라도 무용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부러워하는 감정은 사라지고 대신 자기가 무용가가 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소원하는 바를 표현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없는 감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니라(Tat twam asi)'라는 우파니샤드의 격언은 여러 면에 인용되지만, 그 직접적인 의미의 하나는 인간의 모든 종류의 재능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잠재 능력이 꽃 피어나고 있음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삶을 거듭해 갈 때마다 직업적 능력이 성장한다는 설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세 번째의 중요한 결과는, 실망은 선망과 마찬가지로 별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영혼이 형상의 세계에 갇혀 있는 한, 거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욕구불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국화의 가련한 모습 속에 나름대로의 한 조각 거룩함이 깃들어 있는 한, 그것은 달리아가 아니라 들국화이어야만 한다. 백합은 장미의 선명한 색채를 동경하며 바라볼지도 모른다. 장미는 또 장미대로 백합의 우아한 선을 감탄하며 바라볼지도 모른다. 있는 모든 것이 각각 그 자체로서 완전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형상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와는 반대로 욕구불만은 선망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중요한 심리적 작용이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면 우리는 같은 의미에서 '욕구불만은 창조의 어머니'라 할 수가 있다. 거기에서 노래가 지어지고, 약이 발견되고, 대륙 탐험이 시작된다.
- 19세기 영국의 정치가 겸 소설가인 불워 리턴이 그의 이상향을 문학이 없는 나라로 묘사했을 때 -왜 그런가 하면 욕구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전혀 없다면 남의 고민이나 만족에 대하여 읽거나 쓰고 싶다는 욕구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뜻깊은 하나의 가능성을 꼬집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욕구불만은 증기 기관처럼 인간의 에너지에 여러 가지 모양을 부여하는 경로의 구실을 한다. 인간의 에너지라는 것은 그냥 멋대로 분산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결코 어떤 모양을 이루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상계의 다른 모든 실제와 마찬가지로 욕구불만도 그 자체의 유익한 면과 해로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특질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예술 형태를 창조하도록 부추긴다면 욕구불만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의 균형을 잃게 하고 생명력이 내부에서 침체되게 한다면 욕구불만은 나쁜 것이다. 직업력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연속되는 것이라는 믿음은 이 후자의 욕구불만의 나쁜 면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에서 피정복 민족에 대해 전제적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오만한 경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생에서 빈민가에서 절름발이 아이로 태어나 그 오만함이 일단 정지되고 반대로 관용과 동정심을 어느 정도 가꾸게 된다. 그러나 이 정도의 교정으로는 아직 완전치 않다. 때문에 현생에서는 두 가지의 모순되는 욕구가 의식 속에 잠재해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인간성 속에는 오만과 관용의 두 가지 태도가 번갈아 나타나며 겉으로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 사람 자신도 차츰 그런 모순을 깨달아 갈 것이다. 그러다가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사상이 그의 마음속에 싹트게 된다면, 그는 보다 의식적으로 과거로부터 이월되어 있는 오만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억제하려고 투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 이렇게 모순을 자각하는 것, 어떤 성격적 경향이 가장 바람직한가를 분별하는 것, 그리고 대립되는 성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등이 뿌리 깊은 갈등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런 경우들을 면밀히 살펴 나가면 누구든지 "먼저 당신이 사는 목적을 정하시오."라고 리딩이 거듭해서 권고하는 까닭을 갈수록 뚜렷이 알게 된다. 이것은 과연 극히 건전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 평범하고 유치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신중하게 끝까지 음미해 본다면, 이 평범한 말의 뜻이 인격의 통일과 조화를 향해가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문제보다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일단 이상 내지 목표가 정해지면 항해에 필요한 나침반을 가진 것과 같다. 즉 그것은 무의식의 마음속에 있는 어떠한 모순되는 생각의 소용돌이라도 다스리고 조화시키고 초월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 투쟁은 어쩌면 빛과 어둠의 투쟁, 영과 육 또는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해 본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심층에 들어 있는 과거의 생각과 행위가 갖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힘과 계몽된 의식과의 싸움인 것이다.
- 한 인격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상이 그 영혼이 이 세상에 육체 인간으로 태어난 근본 목적 -초의식적 목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과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의식적으로 설정한 이상 -그것은 진화의 목적에 맞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혼이 초의식적으로 정한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 조지 엘리엇의 인격의 고결함과 적극적인 친절성을 아는 사람은 누구도 그녀가 잔인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성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사람의 눈을 믿는다면, 그녀의 표정에서는 이따금 냉담하고 교활한 무의식적인 잔인성이 엿보였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윤회론자의 해석은 눈에 띄게 친절하고 고상한 이 여성의 무의식층에 전생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어떤 냉담하고 교활한 잔인성의 충동이 박혀 있음을 암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는 엘리엇의 의식적인 인생 목적은 아마도 책을 쓰고, 인류에 봉사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책임감을 일깨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얼'이라 할까 '영원한 자아'라 할까, 아무튼 그녀의 초의식적인 인생 목적은 그런 어떤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 그러므로 초의식적인 인생 목적이 삶의 중심적 통일 원리이고, 이것이 한 인격이 선택한 표면적인 목적과 거기에 연관되는 모든 외적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견해가 충분히 받아들여진다면, 전기 작가는 개인의 삶의 정확한 연대기적 기술이나 그 개인이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인간성 묘사 이상의 것에 관심을 돌릴 것이다. 그리하여 한 인격으로서의 의식적 인생 목적과 아울러 그 초의식적 인생 목적까지 찾아내는 일이 전기를 쓰는 첫째 과제가 될 것이며, 둘째로는 주인공이 그런 인생 목적을 선택함으로써 그 생애로 집중되는 카르마의 힘을 가려내는 일일 것이다. 전생에서 이월된 갖가지 욕구의 상호 작용을 캐보는 것은 주인공의 성격의 모순적인 구성 요소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전기 작가 자신이 투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는 주인공 생애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주인공의 인격의 구성 요소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앞에서 하나의 보기로써 살펴본 카르마의 원리에 대해 철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전기 작가와 그 일에 대한 이러한 개념 부여는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인간의 성격 분석이나 지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물론 해당된다. 그러나 윤회론자가 보는 초의식적 인생 목적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적 인생 목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정신분석가가 생각하는 무의식적 인생 목적은 대개 차별적 성격, 즉 자아가 그 자신의 안전이나 자기 보존을 위해 품고 있는 이기적이고 유물적인 목적이지만, 초의식적 인생 목적은 영성의 획득과 영적 교훈을 배우기 위한 것이어서 결코 유물적이지 않다. 만약 한 인격이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내적 목적을 자각한다면, 의식적 인생 목적과 초의식적 인생 목적이 같아져서 그의 진보는 훨씬 빨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그 인격은 인생이 주는 경험에 그다지 저항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무의식의 심층에는 때로 서로 모순되는 충동이 있다는 것은 윤회론적 심리학에서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어떤 영역들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중인격 및 다중 인격이라는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서구 사회의 심리학자들은 이 문제에 흥미를 갖지만,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명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케이시 파일에는 이런 종류의 이상 성격 예가 전혀 없기 때문에, 케이시가 여기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줄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데이터들에 비추어 보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가능성 중 하나가 인격 변화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속적으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사후(死後)에 빙의된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사람의 전생에서의 기억이 비정상적으로 솟아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자의 가능성을 추론하는 것은, 정신 이상자 가운데에는 케이시가 빙의 현상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경우가 조금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들은 부분적이고 또한 매우 독특한 빙의 현상인데, 어떤 조건 하에서는 완전한 빙의, 다중성 빙의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데이터는 없다. 후자의 가능성, 곧 전생의 기억의 습격은 하나의 생에서 다음 생으로 충동이 이월된다는 현상에서 말하는 것이다.
- 이런 사람은 누군가와 토론을 하다가 열기가 올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성질이 근본적으로 잔인하다는 따위로 비난한다면 굉장히 노여워할 것이다. 그는 그런 비난은 전혀 믿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경멸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뭔가 심상치 않은 환경에 놓임으로써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던 잔인성이 실제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남을 지배하려는 충동과 세상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신앙 따위는 모두 뭉개버리려는 맹목적인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뜻밖의 자기 인식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몸서리칠 것이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이상주의가 일부 특수한 사람들에 대한 비정한 적의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바로 토론 상대가 평했듯이 근본적으로 잔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상주의와 그런 노력이 모두 자기기만적 위선 행위인가 하고 스스로 의심하게 될 것이다.
- 이런 발견은 심리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고 매우 까다로운 문제이다. 그 때문에 자신이 흔들리고 스스로의 성실성을 의심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모든 노력이 마비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이런 내성적 고뇌가 인간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격상의 편차가 자기의 과거생에서의 온갖 경험에 따름을 이해한다면 불안은 사라진다. 이런 마음의 양상을 납득하게 되면 마음속의 분열도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런 들쑥날쑥함을 고르게 다듬을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평온하게 깨닫게 된다.
- 사실 인생의 괴로운 경험은 모두 그런 들쑥날쑥함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주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다. 결국 모든 특성은 영혼의 온갖 영역에 견주어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번에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학교가 1주일에 5일, 1년에 9개월만 수업을 하는 것은 그래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속의 보상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보상하기 위해 여러 생애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특성이라든가 동인 등의 심리학 용어로 말할 것인지, 아니면 케이시 리딩이 쓰는 충동이라는 말로 부를 것인지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충동의 편차나 각 충동 사이의 알력 또는 그 불완전한 교정 등등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나 남에 대한 이해도 엄청나게 깊어질 것이다.
- 인간의 성격을 예리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인격의 드러나지 않는 천박함과 배반의 나락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약탈적인 지배욕 또는 얼음 같은 냉담함이 엿보인다. 젊음이나 미모, 부나 지식이나 관능의 만족 따위와 형식적인 상냥함으로 만족하고 있는 개성은 자기 내부에 이런 악덕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개성을 지탱해 주는 외적 안정성이 흔들려 무너져 내리면 인격은 자기 내부에 깊이 박혀 있는 사악한 것이 드러남을 보고, 그것을 보상하기를 강요하는 운명에 다소곳이 따르게 된다.
- 괴로운 경험이 생기면 사람들은 '나는 이런 꼴을 당할 것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고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나 자기는 죄가 없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부모를 죽이고 재판을 받을 때 죄를 고백하면서 '저는 고아입니다.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한 어떤 프랑스인의 논리처럼 우습기만 하다. 개성은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고아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자기가 지어 놓은 죄 때문인데도 말이다. 그는 틀림없이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다. 아니면 불행이 그에게로 닥칠 턱이 없다. 자기 내부에 잠재해 있는 악이 파동적으로 불행을 끌어오지 않으면 불행은 절대로 찾아들지 않는다.
- 성격의 변화는 삶의 변화와 유전의 -그것이 전쟁이든 질병이든 홍수와 같은 외적 재난이든, 또는 미묘한 내적 갈등이나 투쟁이든- 계몽적인 목적이다. 심리학이 진화의 나선형 계단 위에 서서, 이 모든 인생의 부침(浮沈) 속에 들어 있는 목적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진보를 이룩하리라. 마찬가지로 종교 실천자들 -승려든 목사든 랍비든 바라문이든- 도 삶의 내외적 작용에 대해 철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이 그에게 인생 비극의 의미를 물을 때, 그들이 과학적 기반 위에서 수학 방정식같이 명쾌하고 세밀한 설명을 하여 위안을 줄 수 있으려면 말이다.
-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원인은 전생에서 야만인이었을 때 벌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적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나올 것이다. 즉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한 행위에 대해 어찌하여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적 의무를 다했을 뿐인데 왜 징벌을 받아야 하나?
- 그것은 지당한 의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부분적으로는 이미 제11장에서 말했다. 즉 카르마를 결정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동기이며, 말이나 글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더하여 사회적인 죄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사회의 관습이 최종적인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 죄를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궁극적 의미에서 남을 노예로 삼거나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잘못이라면 -고대의 지혜는 남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이 절대적인 악이라고 한다- 그런 사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는 셈이다. 적극적으로는 죄가 없다 할지라도 소극적으로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는 만약 그 사회 구성원들이 그런 관습이 갖는 도덕적 의의를 자각하고도 악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더더욱 커질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런 조건 하에서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다면 그들의 죄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 종족 간의 싸움에서 어쩌다 포로가 된 적의 눈을 부젓가락으로 찌르는 따위는 분명히 잔인한 행위이다. 만약 그런 일을 맡은 사람이 그런 잔인한 행위를 스스로는 하기 싫지만 종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다면 아마도 그가 카르마의 징벌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내심으로 그런 행위를 시인하고 있었다면, 즉 그런 관습의 잔인성과 상통하는 잔인성을 그 자신이 지니고 있다면 그는 카르마의 원인을 지어 놓게 될 것이다.
(리뷰자 주 : 나는 반대가 더 적절하다고 느낀다. 그의 내면은 그것을 원치 않는데 행동한 쪽이 더 큰 카르마적 반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즐거이 행했다면 그 또한 반대 입장에서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경험을 하게 되었을 수 있겠지만, 이 예시는 당시에 스스로 죄의식을 가졌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했기에 스스로를 벌하고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본다.)
- 이 문제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훌륭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카르마의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행동 윤리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아주 훌륭한 논문이다. 그 주된 논점은 다음과 같다. 행위 그것은 개인적 관심을 갖지 않고 초연히 있는 데에 미래의 카르마를 지어 내지 않는 비결이 있다. 사랑조차도 냉정한 사랑, 중립적인 사랑, 집착이 없는 사랑, 애정이 있는 무관심 등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새로운 굴레를 만들어 놓는 것이 된다.
- 만약 예의 맹인 바이올린 연주자가 적의 눈을 찌르는 의무를 현자가 모든 일을 할 때와 같은 희생정신으로 한다면, 그리고 스스로의 잔학한 지배욕을 만족시키는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한다면 카르마는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즉 그가 실제로 카르마의 결과를 받고 있는 이상, 그는 사회적 관습으로 강제된 그 직무상의 행위와 같은 수준에서 심리적으로 긍정한 죄를 저질렀음이 틀림없다고.
- 윤회를 믿는 사람 가운데는 인과관계가 모두 과거에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즉 그런 사람은 현재의 불행이나 질병은 전생에서의 어떤 죄의 결과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인과 관계는 아주 가까운 과거에 있을 수도 있고 먼 과거에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그 원인의 종류 내지 단계도 육체적인 것, 감정적인 것, 정신적인 것, 윤리적인 것 등 모두 다르다.
- 이 병은 태아 때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의 죄도 아니고 본인의 죄도 아니며, 이 사람이 현생에서 인내와 성실이라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보기 흉한 불구의 몸 때문에 우울해지고 비관하여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사가 마음에 따라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하지만 이렇게 모든 지당한 논리를 다 늘어놓아도 이 해결은 뭔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이런 입장으로만 산다면, 인간은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단자(單子, monad)'처럼 각기 다른 단자의 진보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속에만 들어앉아 있으면서, 우주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궤도를 좇고 있는 창문 없는 조그만 캡슐이 되고 만다.
- 철학에는 무위(無爲)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무위는 냉담이나 태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사슬 속에 본질적으로 있는 필연성을 보는 능력에서 나온 무위이다.
- 이 무수한 리딩에서 한결같이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첫째, 인생의 과학적인 하부 구조는 동양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카르마의 법칙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바탕인 사랑과 봉사의 삶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곧 어떤 사람이 전생에서 어떤 행위 또는 죄를 저질렀건 그가 카르마의 법칙에서 나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 때문에 곤경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남의 괴로움에 대해 냉담한 것이 스스로 카르마의 징벌을 끌어오는 원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남을 도와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리뷰자 주 : 단, 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와야 한다. 그가 직접적으로 요청한 바가 없다면 네빌이 알려준 방식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와 타인은 자기가 배워야 할 모든 교훈과 미덕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실험장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타인이 배워야 할 미덕을 배우는 실험장이다. 앞의 말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선행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따위의 착각이나 자만에는 빠지지 않게 될 것이며, 뒤의 말을 인정한다면 스스로 겸손과 위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남의 결점이 나에게 고통을 주듯 나의 결점은 남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도 나의 결점에서 뭔가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미묘한 문제가 갖는 또 하나의 측면은, 인간의 의지는 절대 자유이며, 역사는 세밀한 점까지 숙명론적인 의미에서 모조리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이다.
- 카르마의 작용 또한 에너지의 운동이다. 인간의 의식에 의하여 어떤 외계의 대상에 부딪치도록 이끌린 에너지는 고체를 관통하는 X선처럼 그 대상을 곧바로 꿰뚫는데, 그리고 나서도 그것은 여전히 원운동을 계속하여 전혀 에너지의 감소 없이 마침내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고양이에 대한 인간의 친절한 행위는 고양이에게 객관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 행위의 에너지는 그대로 운동을 지속하여 마침내 친절한 행위로 그 사람에게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잔혹한 행위는 대상에 객관적 결과를 낳아 놓지만, 그리고 나서도 계속 원운동을 하여 결국 출발점인 그 사람 자신에게 잔혹한 행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이 원리는 단 며칠만이라도 생활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되는 사실이다. 만약 남에게 행한 나의 모든 행위가 원운동을 하여 시발점인 나에게로 돌아옴으로써 끝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일으킨 어떤 운동 곧 행위는 바로 그 행위 성질 그대로의 징벌을 받고, 또 어떤 행위는 놀랍도록 직접적으로 고귀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카르마의 개념은 참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 내세우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에 과학적 근거를 주기 때문이다. 폴 브런턴이 서양 문명의 안전과 존속은 카르마 사상이 대중의 마음속에서 부활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카르마의 지식은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인생 문제에 대한 원만한 해결, 즉 미신이 아니고 조잡한 유물론적 해결이 아닌 진리적 해결을 주는 것이다. 카르마 사상은 인간에게 인내와 모험에의 용기를 준다. 인간은 정적이 아닌 동적 체관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있다. 어떤 순간에서 하는 어떤 행위도 새로운 과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며, 새롭고 보다 풍요로운 운명을 창조하는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창조자이다. 카르마는 인간의 자기 설계와 자기 창조의 한계를 나타낸다. 그런 동시에 카르마는 인간의 해방자이며 벗이다.
- 먼저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행위가 변해야만 한다. 비판적이고, 보복적이고, 거만하고,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태도여서는 안 된다. 이기적이고, 경솔하며, 반사회적인 행위여서도 안 된다. 외적인 고난은 그 사람의 마음과 얼의 부족한 특성을 개발하고 끌어냄으로써만 해결되는 것이다.
- 당신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중단은 없습니다. 우리는 진보하거나 퇴보하거나 어느 한쪽입니다. 인생은 연속적이며, 그 의식 상태나 존재의 진동율의 변화 때문에 다만 그 겉모양이 변화할 뿐입니다.
오늘의 그 사람의 상태는 며칠 전, 몇 년 전, 몇만 년 전의 그 사람의 경험이 낳은 결과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연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물질적으로 나타나건 다른 의식 영역에 나타나건 모두 같은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배우고 이해하십시오. 첫째는 인생이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구분된 시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시간입니다. 구분된 공간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공간은 하나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온갖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의 힘밖에는.
이 세계에는 불변의 영적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씨 뿌린 것을 무엇이든 거두어들입니다. 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이웃을 대접하듯이 장차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대접받게 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전체 내지 중심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단지 다른 삶에의 탄생이며, 우주의 중심을 향하여 한 사람이 이동해 가는 경험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과거에 했던 행위들을 상기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것들을 보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생활하십시오. 당신이 아주 조금 법칙을 어겼다 해도 그것은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15·16·17장을 읽으십시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살 곳이 많다'는 대목을 1분이나 1시간이 아니라 며칠 동안에 걸쳐 지그시 생각해 보십시오. 살 곳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집에는 살 곳이 많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집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육체를 말합니다. 그것은 궁전입니다. 그 몸에는 많은 살 곳, 많은 궁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육체는 어떤 때는 대저택으로, 어떤 때는 보통 집으로, 또 어떤 때는 조그만 오막살이로 몇 번씩이나 지상의 경험을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육체적·정신적·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건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며, 당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결코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누군가에게 학대받고 있다는 따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스스로 씨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거룩한 존재의 한 표현이며, 당신의 건강은 당신 자신 속에 있는 거룩한 존재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소망의 나타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이런 진리를 생활하도록 하십시오.
자기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아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십시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이 낫습니다. 겨우 1 달란트를 받아서 그것을 그저 감추어 두기만 한 사람, 꾸중을 들은 것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마저 다시 빼앗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마태복음 25장 15-30절)
카르마의 법칙·영적 법칙·형벌의 법칙·사회의 법칙, 그 밖의 여러 법칙을 아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지식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과(因果)를 회피하기 위해 지식을 쓰고 있는가, 남들을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끌기 위해 지식을 쓰고 있는가, 아니면 남들에게 법칙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식을 쓰고 있는가...
운명 곧 카르마는 영혼이 깨달은 바에 따라 무엇을 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남들도 모두가 당신과 꼭 같은 권리를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그가 학문적으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해도. 무엇을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은 죄악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아는 것을 정의의 신의 영광을 위해 쓰도록 하십시오.
지식은 겉옷처럼 몸에 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상으로 삼은 것을 향한 내적인 성장이어야만 합니다.
창조적 에너지 속에서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마음속이 기쁨과 즐거움과 평화와 조화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신의 나타남이며, 그 사람의 인생은 그가 창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의 나타남입니다. 당신은 쓸데없는 잡담을 모나지 않게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웃는 능력을 잃는 사람은 기뻐하는 능력도 잃습니다. 그리스도의 생활 원리는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웃었습니다. 그이는 갈보리로 가면서도 웃었지요. 그림에는 별로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이는 웃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했던 것입니다.
익살을 알아볼 줄 아는 능력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십시오.
자기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거나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최선이 되도록 살고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는 모두 항상 완전하고 최선의 것을 베풀어 주는 신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각자의 영혼은 결국 자기 자신의 행위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회피할 수 있는 문제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닥친 문제에 지금 부딪치십시오.
- 자신의 영혼이 우주적 에너지와 하나이며, 따라서 우주적 에너지를 나누어 지니고 있는 다른 모든 영혼과 같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마땅히 인간은 육체적·정신적·영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실천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입으로만 봉사하거나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다. 행위가 성실의 척도이고, 참된 성장의 수단이요, 방법이다. '생명 없는 지식은 죄악'이라는 뜻의 말이 리딩에는 거듭해서 나온다.
- 만약 이런 존재의 원리들의 속내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어떤 환경이나 상태에 있건 인내심이 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내는 단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멍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
- "기뻐하라!"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과 불가분의 명령이다.
- 적극성이나 인내심과 더불어 기쁨과 일종의 초연한 태도도 지녀야 한다. 밭에 씨를 뿌리고 싹이 트고 있는지 궁금하여 파헤쳐 보는 따위로 결과를 빨리 보려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씨를 일단 뿌렸으면, 물만 잘 주면 신이 적당한 시기에 싹을 트게 해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수를 받기 위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고 조화의 법칙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 또한, 우리는 역경이 사실은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경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머지않아 영혼의 필연적인 힘은 그것을 안에서 끌어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끌어내도록 마음먹는 쪽이 더 좋은 것이다.
- 즉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생각을 다하여, 너희의 주 신을 사랑하라."와 "네 몸처럼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 두 명령은 신학적으로는 흔해 빠진 말이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모든 우주의 법칙의 알맹이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중심이 되는 창조적 에너지의 존재를 긍정한다면, 또한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완전성을 자각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진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지식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예지의 말로 요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위대한 창조적 에너지와 그 다양한 아름다움, 그리고 그 우주적이고 자비로운 목적을 사랑하라. 당신이 그것과 하나가 되고, 당신의 존재 모든 면에서 그것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 만약 카르마의 보복의 법칙이 어떤 일에서든 남의 자유 의지나 행복을 침해했을 때는 그대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게 작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지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당신은 자기의 행복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의 행복도 사랑해야 한다."
- 지나 서미나라 박사가 쓴 이 책 <윤회 Many Mansions>는 1950년에 발행된 이후 1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있는, 윤회와 카르마에 관한 최고의 책이다. 물론 에드가 케이시의 아들로서 가진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근거인 2,500여 회의 케이시 리딩과 함께 서미나라 박사의 설명은 아주 극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 1901년 이후 케이시는 그의 투시력으로 의학적인 진단을 시작하였으며, 1923년 오하이오 주 데이턴에서 처음으로 리딩 도중 윤회관해 말한다. 한 남자가 몸이 아닌 호로스코프를 봐달라고 요청했는데, 케이시는 그런 부탁은 처음 받아보았다. 그는 최면상태에서 무심코 더듬거리며 "태양계의 영향으로 받은 충동보다도 전생에 그가 가졌던 충동, 재주, 그리고 능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주제에 대하여 계속 말하면서 "그는 한때 승려였다.”라고 하였다.
- 이 리딩은 나중에 케이시의 가족과 친지들이 '라이프 리딩'이라고 부르게 되는 단초가 된다. 케이시는 이런 리딩의 각각에서 현재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항들을 분명하게 끄집어내면서, 전생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게 된다. 그때 그는 이름, 날짜, 장소, 그리고 재주와 약점, 능력 등에 관한 특징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을 언급하였다. 때로는 깊은 무의식 단계에서 전생에서 끌어올린 기억의 결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문제점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이런 리딩들을 분석하기 시작한 서미나라 박사는 버지니아 비치에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정통 심리학의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서미나라 박사는 리딩을 받은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사례를 분석한 기록뿐만 아니라, 업(業)의 기억에서 명백하게 특이한 능력이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실음으로써 책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 휴린 케이시
- 이런 무수한 실험과 증명에 따라 인간은 차츰 예로부터의 권위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과학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태도이며, 여기서 현대인의 회의가 생겨난 것이다. 잇달아 나온 발견들이 여태까지 인간이 품어 온 편협한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령? 누구도 정령을 본 사람은 없다. 영혼? 누구도 영혼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이 원형질(原形質) 속에 들어있는 것인지, 또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송과선(소) 속에 박혀 있는 것인지, 영혼의 불멸? 누가 저승에서 와서 말해 준 적이 있는가? 천국? 망원경으로는 천국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우주는 거대한 기계, 인간은 원자의 우연한 배열과 그것의 자연의 진화로 이루어진 작은 기계, 괴로움은 생존 경쟁을 피할 길 없는 인간의 필연적 운명, 그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찾아볼 수 없다. 죽음은 육체의 화학적 분해이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등등.
- 이리하여 저 위대한 인물, 위대한 책, 위대한 교사의 권위는 밀려나고 우리 인간 자신의 오관(五官)의 권위가 대신 들어섰다. 분명히 과학은 현미경·망원경·X선·레이더 등을 통해 인간의 감각 영역을 확대해 주었다. 또한 이성은 수학과 반복 가능한 실험 기술에 의한 관찰을 조직화했다. 그러나 원래 과학이나 이성의 증명은 인간의 오관에 의한 증명이고, 과학의 기초도 인간의 눈·귀·코·혀·촉각, 곧 오관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들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나 또는 안다고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갈수록 회의가 나올 만큼 학문에 치우쳐 왔다. 우리가 이 당돌하고 오만한 오관으로 만들어낸 기구나 장치는, 얄궂게도 이 오관의 장치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에는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중명한 것이다. 전파·방사능·원자력 등 현대인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현상 몇 가지만을 예시해 보아도, 우리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과 에너지의 진동에 묻혀 있으며, 극히 미세한 물질 입자 하나 속에도 상상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식하도록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 레인은 케이시가 최면 상태에서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속기해 나갔다. 그리고 이런 일을 나타낼 적당한 말을 생각해 내기 어려워 이것을 '리딩(Reading)'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케이시가 사진사로 일하며 틈틈이 괴로운 사람들을 위해 질병을 진단해 주는 데 있어 가장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평상시의 케이시가 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고 의학 서적을 읽은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면 상태에서 진단을 할 때는 해부학이나 생리학 전문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한 케이시 자신도 가장 놀란 것은 자신이 최면상태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사람들이 실제로 병이 낫고 괴로움이 해소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아직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위장병이 좋아져 간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케이시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상상의 힘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또한 다만 우연일 뿐이고, 자기의 투시 능력이라는 것이 다만 자기 자신에게 관계가 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리딩을 시작한 초기에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 이와 같은 의구심은 불치병 선고를 받은 여러 사람의 병이 하나하나 치유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쌓이면서 차츰 해소되어 갔다.
- 케이시는 그의 호소를 받아들여 리딩을 해주기 위해 특별히 그들의 집까지 여행하기를 승낙했다. 당시 케이시는 경제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왕복 차비를 받았다. 이것이 케이시가 자신의 봉사에 대해 상대방에게서 받은 최초의 물질적 보수였다.
-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그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사교적인 단체나 친목 단체 따위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일관되게 살았던 것이다. 그는 세간의 주목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이 찾아올 때에도 화려한 신문 광고를 보고 오는 것보다는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권해서 찾아오는 것을 더 좋아했다.
- 초기에 케이시는 사진사로서의 직업을 계속하며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에, 리딩에 대한 보수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사진사로서의 직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약간의 보수를 받는 것은 무방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가난해서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도와주었다. 그는 사무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버지니아 비치에있는 -1927년에 그는 자신의 리딩에 나타난 지시에 따라 버지니아비치로 이사했다- 그의 편지 사본들이 이것을 확실하게 말해준다.그의 편지는 문법상의 오류나 철자가 틀린 곳이 많지만 이웃을 돕고 이끌어주려는 열의가 행간에 넘쳐 있었다.
- 그는 이렇게 봉사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줄곧 자기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회의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리딩을 의뢰받고도 어떤 때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의 능력이 그 자신의 건강과 정신 상태로 좌우되는 것이 명백했다. 그는 대체로 온화한 성품의 사람이었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때도 없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근심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그런 종류의 감정 상태는 분명히 그의 능력 발휘를 방해했다. 많은 경우 그의 리딩이 실패하는 것은 시간이 늦어서 암시를 여러 번 되풀이하거나, 또는 몸이나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였다.
- 그러나 그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자신이 준 리딩이 대상자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다고 항의를 하거나 자신이 지시한 대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낫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런 때에는 말로 또는 긴 편지를 써서 자기가 하는 일에 절대로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노라고 정중하게 사죄하곤 했다. 너무 분명치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리딩에 영향을 준 것 같다든지, 때로는 라디오 수신기도 그런 일이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수신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제 목적은 오로지 남을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도움을 받지 못하셨다면 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받은 돈을 그대로 돌려주곤 했다.
- 때로는 그런 사람도 몇 달 뒤에 "그 후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더니 당신이 말한 것과 똑같은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는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낫기는 했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하다고 불평을 하던 사람이, 그것은 식사나 약물, 그 밖의 치료와 정신적인 수련을 지시받은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실토하는 경우도 있었다.
- 아무튼 케이시는 자신의 리딩에 절대로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투시의 투명도와 정확도가 더더욱 높아져 갔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따금 생기는 실패나 부정확도 시간이 지나면서 뒤늦게 놀라운 치유 효과가 나타남으로써 뒤집히기 일쑤였다.
- 라머스는 건강상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 동안 케이시의 리딩 현장을 보고는 그의 투시 능력이 진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라머스는 박식하고 지적인면에서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보통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병든 사람의 간장 기능이나 고장난 소화기 작용을 꿰뚫어보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문제도 밝힐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지금까지의 인류의 철학 체계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진리에 가까이 이르렀는지, 인간 존재의 목적은 -만약 있다면- 무엇인지, 영혼 불멸이라는 가르침에는 어떤 진리가 있는지, 죽으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서도 케이시의 투시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 라머스는 이런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리딩을 해달라고 애타게 졸랐다. 당혹스럽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케이시는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라머스의 열정적인 질문에 대하여 케이시의 리딩은 라머스 자신의 과거 세(世)의 경험과 앞으로 그가 연구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문제에 대하여 더욱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 케이시는 라이프 리딩을 계속하면 어김없이 심한 현기증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현기증의 원인을 발견하려고 자기 자신의 피지컬 리딩을 해보았다. 그 결과 라이프 리딩을 할 때는 몸의 위치를 피지컬 리딩 때와는 반대로 머리는 북쪽으로, 다리는 남쪽으로 향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나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극성(極性)의 문제'라는 언급이 있었을 뿐 다른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 케이시 자신에 대한 라이프 리딩에 따르면, 그는 수백 년 전 이집트에 살던 위대한 신비력을 지닌 고승이었는데, 자아가 강하고 관능적이었기 때문에 파멸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 후 페르시아에 태어나서는 내과 의사였다. 그 무렵 사막 전쟁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 사막에 홀로 버려져 사경을 헤맸다. 그는 먹을 것도 물도 없이 3일 밤낮을 극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 지내면서 그 고통을 면하기 위해 육체에서 의식을 풀어놓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작가 잭 런던의 윤회 소설 <스타 로버 The star rover>에는 미치광이가 된 어떤 죄수가 이와 비슷한 노력을 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케이시는 육체에서 의식을 풀어놓는 시도에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현생에서 마음을 풀어놓는 능력을 지니게 된 바탕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생에서의 그의 모든 미덕과 결점이 솔직히 평가되고, 그것들이 모두 그의 과거생에서의 경험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생의 생애는 그의 영혼에게는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인류에 봉사할 기회를 얻었으며, 그리하여 과거의 오만하고 유물적인 생각과 관능적이었던 삶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들 모두에 대해서도 라이프 리딩을 했다. 어느 사람에 대해서나 개인적인 성격에 관한 솔직한 평가가 내려졌고 그것이 과거의 어떤 경험에서 연유하는지가 밝혀졌다. "전생은 네 번 다 과학자였다."라든가 "그래서 유물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다."라든가 "당신은 성질이 매우 급했다. 그 때문에 이집트나 영국에 태어났을 때에는 그런 성질로 말미암아 슬프고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생에서는 그것을 억제하기를 배우고 있다" 등등.
-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도 이와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예언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의 경우에도 명백했다. 뉴욕의 전화국 직원이었던 한 젊은 여성은 버지니아 비치로 보내 달라는 전보를 몇 번 거듭해 처리하면서 전보 내용에 호기심이 생겼으며 그리하여 케이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호기심은 자꾸 커져서 마침내 자신이 라이프 리딩을 받아 보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리딩은 그녀가 전화국 직원 노릇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했다. 그녀의 전생은 여러 번 모두 유능한 예술가였으므로 현생에서도 성공할 것이니 상업 미술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상업 미술이든 그 밖의 미술이든 무릇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리딩을 받고 나서 한번 시험해 보자고 미술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게 정말 훌륭한 재능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그녀는 상업 미술가로서 크게 성공했고 그러는 사이에 성격마저도 변해 버렸다.
- 최초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시자 케이시 그룹은 리딩이 주는 정보의 성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리딩에서 역사상의 어떤 특정 시대가 빈번히 나타나는 데 호기심이 끌린 것이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전생을 거의 일정한 틀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틀의 하나는 '아틀란티스-이집트-로마-십자군 시대-초기 식민 시대' 순서이고 다른 하나는 '아틀란티스-이집트-로마-루이 14, 15, 16세 시대의 프랑스 및 미국 남북전쟁 시대'라는 계열이다. 물론 거기에는 조금씩 다른 것도 있고 또 중국·인도·캄보디아·페루·노르웨이·아프리카·중미·시실리·스페인·일본 등이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리딩은 앞의 두 유형에 속하는 것이었다..
- 케이시는 그 까닭이 어떤 시대의 영혼은 보통 그 뒤의 생애에서도 함께 환생하기 때문이고 그 사이의 몇 세기 동안은 다른 무리의 영혼이 육체로 태어나, 말하자면 영혼의 무리들이 번갈아 지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공장 노동자들이 교대 근무제로 출근하는 것처럼 영혼도 질서와 리듬을 가지고 번갈아가며 지상에 나타나 진화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 지상에 있는 영혼들은 역사상 어떤 과거 시대에도 함께 생존했던 것이다. 또 가족 관계·우정·같은 취미 등으로 서로 친밀히 연결되어 있는 영혼들은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의 유대로 이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케이시에게서 리딩을 받은 사람들은 뭔가 그런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었던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 케이시는 평소 깨어 있을 때에는 그 육체적 의식의 파장을 아카샤 기록에 잘 맞출 수 없지만, 최면 상태에 들면 쉽게 맞출 수가 있는 것이다. 케이시는 최면 상태에 든 자신의 입에서 나온 여러 불가사의 한 말 가운데 이런 설명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확실히 알리고 여러 번 질문하기를 되풀이해도 항상 같은 설명이 어떤 때는 같은 말로, 또 어떤 때는 다른 표현과 예를 통해 나오곤 했다.
- 리딩에서는 여러 번 '아카샤 기록'을 '자연의 보편적 기억' 또는 '생명의 책'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 또한 아카샤의 실재(實在)에 대해 여러 세기 전에 가르쳐진 것을 말해 줄 때도 있었다. 인도의 다른 관념들, 예컨대 '물질'의 마야 Maya적 성격이라든가 비개체성(非個體性),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 교환 가능성, 정신 감응에 의한 사념(思念) 전달의 실재성 같은 것들을 최근의 물질과학이 증명하고 있음을 볼 때, 아카샤라는 개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 경우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그렇게 암시를 주기 시작한 첫날밤에 10년 동안 계속된 버릇이 딱 그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 만약 이 어머니가 이지적이고 정직한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조금 과장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법률가이자 지방검사였으며, 미신에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여성이 아니었다. 둘째로 주목할 점은 그렇게 놀라운 효과를 나타낸 암시가 밤에 오줌을 싸서는 안 된다는 뜻의 암시는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이의 육체적인 의식에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그 영적 의식이라고나 할 마음을 향해 암시가 주어졌던 것이다. 즉 그가 세일럼 시대의 전생에서부터 계속 지녀온 죄의식 -그것은 지금 신장 기능 장애로서 그의 몸에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을 향해 암시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직접 남을 물속에 담가 버리거나 또는 그런 형벌을 가하는 책임자였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 자신에게로 그 복수가 왔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라는 인물이 우리와 다른 것은 모름지기 그가 우리들보다는 그 중심인 태양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느낄 것이다.
- 또한 그리스도가 인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사건은 아니다. 비교종교학을 연구해 보면 다른 민족에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구세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구 문화에서도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인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 있다. 마치니, 볼리바르, 링컨, 성 프란시스, 젬멜바이스, 성녀 테레사, 그 밖의 수많은 남녀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노력이 면제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죄가 사해진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고,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만들어낸 것, 그리고 구원은 이 교리를 믿는 데 있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그것이라기보다는 일부 신학자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이다. 이것은 보상 내지 속죄의 책임을 자기 밖의 외적인 그 무엇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범죄이다. 이것은 구원을 자기 자신의 본질적 신성(神性)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 변혁에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남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에 의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속을 믿을 것을 요구하며, 믿지 않는 데에 대한 형벌은 영원한 저주라고 선언함으로써 정의감과 심리적 진실성을 어기고 있다. 물질과학·정신과학으로 단단히 단련된 20세기의 인간은 이런 교리를 그리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는다.
- 그 경직된 신학이 지니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틀림 없이 이 세계에서의 선(善)을 향한 위대한 세력이 되어 왔다. 더구나 오늘날 눈을 뜬 교회는 이미 그런 교리를 글자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또 신앙고백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절대 조건이라고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지녔던 태도의 찌꺼기가 과거와 같은 타협의 여지없는 엄격한 신학이 압도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 교회에서조차 아직도 남아 있음이 분명하게 보이며, 그리스도교계는 책임을 행위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맹목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돌리는 독단적 교리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 개인의 구원에 있어 근본적으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 카르마와 윤회의 법칙을 연구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고대의 지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이 빠진 빈혈중적 무기력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강장제 역할을 해 준다. 우리가 케이시의 리딩이 말해 준 카르마 법칙의 징벌적인 면을 이렇게 잔인하리만큼 샅샅이 들추어 보는 것은, 윤회의 진실성을 수긍하게 된 사람들을 공연히 겁먹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모든 사건 밑바닥에는 보편적인 정의가 있다는 확신 위에 세워진 희망과 낙천주의, 그리고 회복된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이다.
- 아득한 옛날, 대서양에 광대한 대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지리 및 문화적 증거와 더불어 아주 강력하게 주장되어 왔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는 아직 분명하게 인정되지도, 그렇다고 부정되지도 않고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를 말한 인물을 역사에서 찾아보면 먼저 플라톤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아틀란티스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한 자주 인용되는 지리적 증거의 하나는,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끊어져 3천 미터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을 끌어올렸을 때 붙어온 몇 조각의 용암(鎔巖)이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조사해 보면 그 용암이 바다 위 육지에서 경화된 것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 문화적 증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홍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비단 그리스도교의 성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원시 민족 신화나 종교에서 홍수 이야기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집트와 중미(美)의 언어와 건축이 양 대륙 사이에 아무런 교통수단도 없었음이 분명한 시대의 것까지도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종합적인 증거가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과연 그럴 것이라고 수긍하게 하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 아무튼 케이시의 리딩을 긍정한다면 아틀란티스는 명백히 존재했다. 케이시에 따르면 피라미드 속의 아직 열리지 않은 어떤 방이 언젠가는 이 아틀란티스의 역사와 문명에 관한 모든 기록을 밝혀줄 것이라고 한다. 그 기록들은 이 저주받은 대륙의 주민 일부가 기원전 약 9500년 무렵 제3차, 바로 최후의 대홍수에 휩쓸렸을 때 이집트로 피난을 하면서 가지고 간 것이라고 한다. 케이시는 또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비미니 섬이 옛날에 아틀란티스의 산봉우리였다고 한다. 그는 그 지점 해저에는 아틀란티스 시대에 태양 에너지를 모아 무한하게 동력을 공급해 주는 장치였던 수정이 설치된 놀라운 사원이 가라앉아 있다고 했다. 리딩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훨씬 높은 과학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다. 전기·라디오·텔레비전·비행기·잠수함·태양과 원자 에너지의 동력화 등 그들의 과학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해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것보다 훨씬 효율이 높은 난방·조명·수송 기술을 누렸던 것 같다.
- 그의 리딩 기록은 3페이지에 이른다. 먼저 의학적 용어로 증상에 대한 병리학적 설명이 있고, 이어서 인간의 몸에는 자연 치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말하고, 다음으로 그 병이 카르마에서 오는 것이므로 마음가짐을 바꾸어 미워하는 마음과 적의를 의식에서 완전히 없애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아주 자세한 치료법을 말해주고 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이 사나이는 다시 리딩을 받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편지에 의하면, 처음의 리딩에서 말한 대로 치료를 했더니 곧 회복의 징조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4개월 동안은 상태가 호전되어 가더니 다시 역전되어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신적인 면은 노력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치료에 관한 지시만을 지켰던 것이다. 두 번째 리딩은 분명히 이런 그의 태도를 나무라고 있다.
그렇다. 이 몸은 전에도 본 일이 있다. 육체적으로는 점점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 병은 카르마에서 온 것이다.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육체적 이상에 대한 물질적 치료 효과는 나타나 있다.
-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고 증오·원한·부정한 탐욕·질투가 남아 있는 한 또한 인내·이웃사랑·친절·온화함이 아닌 그 무엇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한 치유는 기대할 수 없다.
-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의식의 내용과 인생에 있어서의 영적 목적을 바꾸면 치유될 가망이 있다고 한 말이다. '무엇 때문에 낫고 싶은가?' 하고 리딩은 솔직히 묻고 있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더욱 이기적인 생활을 하려고?' 그렇다면 차라리 낫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 노골적인 질책의 말속에는 깊고 넓은 인간관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단지 개체의 일시적 이익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 잘 주무를 것. 마사지는 지시된 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귀 아래 유양돌기(乳樣突起)와 이어지는 부분은 조심해서 주물러야 한다. 이상 두 경우에 있어서는 리딩이, 의식과 성격의 변화가 육체적 카르마에서 온 질병 회복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르마의 목적이 도덕적 교육에 있다고 한다면, 카르마를 바탕으로 한 치료법을 쓰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카르마가 바로잡아 주는 죄란 신령을 화나게 했다는 식의 미신적·원시적 의미에서의 죄도 아니고, 원죄주의자들이 말하는 죄도 아니며, 중세 왕조 시대나 청교도 시대의 도덕에서 말하는 죄도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심리적인 의미에서의 죄이다. 보편적으로 정의되는 죄이며, 보편적으로 우주법칙에 따르는 죄이다.
- 케이시가 리딩에서 쓰는 말은 그리스도교에서 쓰이는 용어가 많은데, 그것은 아마도 케이시 자신이 그리스도교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의식하는 마음에 그리스도교적 표현과 견해가 젖어 들어 있기 때문에 최면 상태에 들어 초의식(超意識)에서 말하는 것도 그 스크린을 거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케이시가 불교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역시 불교라는 문화 환경에 적응하여 불교적 용어를 썼을 것이다.
- 영적 의식인 그리스도 의식의 성취는 카르마의 결과인 엄격한 복수를 해소시켜 주는 '은혜의 법칙'이다. 영적 의식은 카르마가 작용하게 된 원인인 오류를 무효화한다는 의미에서 법칙을 성취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나는 법칙을 파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영적 의식을 통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의식의 성취는 결코 쉽지 않다. 리딩은 말한다.
- 신의 힘을 의식하는 삶에 이르는 데 있어 지름길이란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의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성취하려는 소원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영적 진리를 생활화하지는 않고, 뭔가 외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이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기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경향을 흔히 볼 수 있다. 문에 이르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이른바 영능자나 점성가, 예언가 등이 어떤 말을 하건 정신 치료에는 지름길이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충동은 느낄지 모르지만 충동으로 의지를 지배할 수는 없다. 삶이란 자기 자신의 안에서 배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밖으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다. 배워 나가는 것이다.
- 알렉시스 카렐이 그의 저서 <인간, 그 미지의 존재 및 루르드에의 여행>에서 기술한 증언에 따르면, 깊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는 루르드의 성천(聖泉)에서 암이나 그 밖의 불치병이 즉석에서 치유된 예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치유가 일어나는 사실을 살펴볼 때, 그런 정도의 신앙이나 마음의 태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도 같은 치유가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 같다.
- 뼈 아픈 궁핍의 교훈을 배워야만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불의(不義)가 그들이 경험해야 할 궁핍을 존재케 하는 역사적 시기와 장소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동시에 남들의 운명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태만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남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자기의 먹이로 삼는 사람은 적극적인 범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포에 대한 이 두 가지 죄는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이해에 잘못이 없다면, 윤회론은 동포를 속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되지 않는다. 윤회론이 첫째로 강조하는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영혼이 완성에 이르기 위한 법칙과 조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또 사회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자비'가 궁극의 목적이며, 사랑이야말로 개인의 진화를 조정해 주는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유일한 용제(溶劑)이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윤회론의 견해에 따른다면 무의식의 마음은 밑바닥이 열리게 되어 있는 상자처럼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정신분석가, 특히 칼 융 같은 사람은 정신 현상의 불가해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심층 영역이 존재할 필요가 있음을 예측하고 '집단적 무의식' 또는 '인종적 무의식'이라는 일종의 집단 내지 인종적 경험의 기억 전부가 저장되어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어떤 인종이나 집단에 속한 모든 개인은 거기서부터 기억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런 집단적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이란 개인적인 것이고 마음의 무의식 층을 거쳐 과거생에 연결되어 있다는 설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적어도 '개인 기억설'은 기억이 창고에 쌓여 있는 곡식 같아서 누구나 꺼낼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는 주장보다 설득력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집단 경험이라는 현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미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 또는 인식 작용이라 해야 할 것이다.
- 마치 사람이 오늘의 자신을 내일의 자신에게로 전해주듯이, 자신이 이미 몇 번씩 원시인으로 태어나 살았으니 원시적인 충동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일찍이 정글의 공포와 인간의 잔혹하고 이기적인 행위로 위협을 받았으니 그가 아직도 불합리한 공포나 이유 없는 걱정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이 과거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을 싫어하거나 사랑하거나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니, 현생에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불합리하게 보이는 사랑이나 증오를 느낀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의식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요소가 이상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공포증 아닌 다른 형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꿈을 몇 번씩 꾸는 데 대해 케이시 리딩이 전생의 경험에 의거하여 설명한 예가 몇 개 있다. 그중에 가장 흥미로운 예는 어떤 부인의 경우이다. 그녀는 이렇게 질문했다. "왜 저는 어릴 때 세상이 몽땅 무너져 내리는 꿈을 그렇게 여러 번 꾸었을까요? 그 꿈을 꿀 때마다 시커멓고 불길한 구름이 보였는데요." 이에 대해 리딩은 그것이 그녀의 아틀란티스에서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전생에 종교가의 아내이자 의사였는데 아틀란티스 대륙의 그 무서운 침몰을 몸소 겪은 것이다.
- 케이시 파일에는 빙의와 관련된 예가 몇 개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대개 어떤 전기 치료나 기도 또는 명상을 권하고 있다. 이런 모든 예들은 정신 이상이라는 비극적인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케이시 리딩이 정신 의학과 정신분석 측면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무의식의 영역을 확대한다는 데에 있다. 앞에서 본 몇 가지 경우에서는 그 내용의 소극적인 면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무의식'은 단지 공포나 혐오가 도사리고 있는 암흑의 지하실 이상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그것은 기억의 저장소이기는 하지만 선과 악, 양쪽 모두의 기억 저장소이다. 실제로 케이시 리딩은 그것을 '육체의 마음'에 견주어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기억 속에는 확실히 장애적인 요소가 되는 것도 있지만, 아울러 쓸모 있고 유익한 요소가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무의식을 통하여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의 마음과 교류하면서 육체의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는 얻어지지 않는 지식을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 그녀에 대한 라이프 리딩은 결혼을 하기 전에 어린이를 돌보는 일 등 뭔가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만약 이 사람이 결혼 생활을 통해 자기의 향상을 도모하려 한다면 그러기 전에 먼저 어린이의 사회적·물질적 행복을 위해 뭔가 공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람은 결혼 생활에서 실망을 하고 좌절해 버릴 것이다."라고 리딩은 지적했다.
-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경우도 있다. 그것은 어떤 재능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경우인데, 연애를 하게 된 이 여성도 결혼과 직업을 양립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리딩은 단호한 부정이었다. "이 사람은 결혼이나 무대 어느 한쪽에서 성공할 자질이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그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리딩은 말했다.
- 카르마의 인연이 있어도 결혼을 권할 수 없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런 인간관계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그 사람이 현생에서 배우고 해결해야 하는 경우, 다음은 두 사람 중의 어느 한쪽 또는 두 사람 다 영적으로 아직 지불할 수 없는 경우. 즉 그 문제에 대처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 그리고 하려는 결혼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너무나 극단적인 형벌이 되거나 또는 그 형벌이 저지른 죄에 맞지 않는 경우, 끝으로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을 결혼 생활보다는 독신생활을 통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경우이다.
- 두 극성의 하나하나, 곧 남성과 여성에는 각각 그 전형적 성격이 있다. 적어도 현대와 같은 문화기에서는 전형적 남성 및 여성의 속성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완력·공격성·적극성·지배욕·냉정 등은 남성의 속성이고 복종심·수동성·온순·친절 등은 여성의 속성이다. 여기서 가령 어떤 영혼이 남성의 육체든 여성의 육체는 어느 한쪽에만 연속적으로 여러 번 깃들어 그 성에 따른 일련의 특성을 너무 높이 발달시킴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 우리는 이런 좋은 예를 히틀러가 들고 나온 나치의 철학과 행동에서 볼 수 있다. 나치가 이상으로 삼은 초인(超人) 인간상은 초인이라기보다는 초남성(超男性)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온순함·아름다움·너그러움·따뜻함·인내 등을 희생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사람이 다시 남성으로 환생한다면 이미 지나치게 남성 쪽으로 기운 경향을 더욱 강화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매우 불균형하게 발달시킨 남성적 성격을 지닌 채로 여성으로 환생한 것은 바로 심리적 교정을 시도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 발달의 불균형은 내부와 외부, 특질과 육체 및 사회가 그녀에게 기대하는 여체(女體)로서의 역할을 서로 대조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 '이런 비극은 불가해한 신, 그러나 의로운 신의 뜻'이라는 해석을 따르든가, 아니면 '이런 비극은 신의 불공평과 무자비의 증거이다. 신 같은 것은 없는 우주 멋대로의 장난이다'라는 태도를 취하든가 둘 중 어느 한쪽일 텐데, 그녀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그녀가 아직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근본적 교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즉 완전한 사랑은 공포를 소멸시킨다는 교훈이다. 그녀는 이기적이고 유물적인 인생관을 넘어서야 한다. 물질적인 공포 따위는 느끼지 못할 만큼 남편을 사랑하고, 그녀를 어머니로 택할지도 모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을 사랑하고, 그녀 자신 속에 있는 거룩한 창조의 원리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 그 육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인 영적 존재가 들어 사는 집이 된다. 잠시 동안은 그들은 말할 줄도 모르는 무력한 존재이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알뜰히 돌보아 주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이 일이 우리를 희생과 사랑으로, 가장 깊고 따뜻한 정으로 이끌어 준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소유나 지배로 발전하지 않는 한 그대로 좋은 것이다. 칼릴지브란은 그의 시 예언자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
생명의 그리움의 아들이며 딸이다.
당신을 거쳐서 오지만 당신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다.
당신과 더불어 있지만 그래도 당신의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살아 있는 화살로서
내쏘아지는 활이다.
사수의 손 안에서 당신은 기쁨을 위해 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수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것처럼
든든한 활도 사랑하고 있으므로 ...
-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성한 의식을 가지고 결혼 관계에 들어가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결혼 관계란 분명히 성적인 관계이다. 즉 케이시 리딩의 견해는, 성적 행위는 그 자체에 있어 신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라는 힌두교의 견해와 일치한다. 불행하게도 옛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은 본래 죄라고 함으로써 성에 심리적 그늘이 드리워지게 했다. 창세기의 그 상징적 이야기를 그릇 해석했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고 여겨 온 것이다. 결혼식이 성적 관계를 합리화해주기는 하지만, 아이는 죄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인체에 감추어져 있는, 신에게서 주어진 자연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일그러진 관념은 그것이 주는 심리적 영향이 매우 크고, 억압이라든가 죄악감 및 그 밖의 아주 심각하고 뿌리 깊은 갈등이 생겨나게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말은 자유연애나 성적 방종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성의 창조력이 신에게서 주어진 특권임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러움 없는 육체적 사랑은 인간이 지상 생활에서 갖는 가장 거룩한 경험이다.
- 그리고 케이시의 데이터로 미루어볼 때, 영혼이 육체로 들어오는 것은 탄생 직전이나 탄생 직후 또는 탄생과 동시인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태어나서 24시간이 지나서야 영혼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들어온 영혼이 마지막 순간에 바뀌는 일도 있다. 생명의 알맹이인 영혼 없이 육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기본적인 윤회론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별로 모순이 없다. 신비학자들은 육체를 '수레'라고 부른다. 이 말에서 연상되는 유(類)를 써 본다면, 운전기사가 아직 차에 오르기도 전에 자동차는 이미 완성되어 있고 그 자동차의 시동이 걸려 엔진이 이미 돌아가고 있는 경우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 속에 들어와 그 활력의 원천이 될 것이 아직은 들어와 있지 않아도 육체가 조직으로서 완성되고 그 유기적 생명 작용이 이미 일하기 시작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유추에 의한 추론(論)이 그대로 단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케이시 리딩에서 여러 번 이상과 같은 단정적인 설명을 보았고, 한편 생명의 과학적 정밀성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케이시에게 "영혼이 들어올 때까지 육체는 무엇으로 살아 있는 것인가요?"하고 당연한 질문을 했다. 대답은 모호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 "정령(精靈)입니다. 물질의 정령, 곧 물질의 원천은 신이니까요." 이것이 대답이었다.
- 이런 경우를 볼 때 우리는 하나의 강력한 추정을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남들의 괴로움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운명은 뒤에 그런 괴로움을 우리에게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잔인한 행위를 할 만큼 나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단테가 그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연옥에 던져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지만, 또한 자진해서 좋은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 남의 괴로움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아마도 미래에 자기 자신이 육체적 불구가 될 만큼의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어떻든 보다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지상의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동정심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이 괴로움을 받을 만큼의 죄는 아니기 때문에 불행한 아이의 어버이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자기가 낳은 아이의 참으로 볼 수 없는 몰골을 보아야 하는 괴로움을 통하여 불행한 어버이들의 고뇌와 인간의 의미를 이해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 그러나 그가 '우리는 길게 뻗친 영광의 구름으로서 온다'고 할 때 윤회론자는 그가 낭만적인 표현보다는 좀 더 심리학적 사실로써 노래해주었으면 하고 아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결국 영혼은 원래 신에게서 나오며, 따라서 신의 본래의 순수함과 광휘를 나누어 지니고 있으며, 그 초감각적인 한얼의 자리에는 과연 거룩한 빛과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산문적文的)으로, 보다 겸손하게, 그리고 보다 격려하는 말로 말해 준다면, 정신적 실상(實相)은 '길게 뻗친 영광의 구름으로서 온다' 라기보다는 오히려 능력과 무능력, 결함과 재능, 단점과 장점이 산처럼 쌓인 내용 풍부한 화물(貨物)로서 온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 적절한 전공 과정이 결정되면 학생들 개개인의 '라이프 실'이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그 사람이 과거에 이룩한 진보의 원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에게 자신이 사는 목적을 상기시키는 구실을 하는 장신구이다. 브로치와 같은 이것은 대개 원형인데 원을 3, 4 등분하여 거기에 그 학생이 어떤 충동이나 재능 및 영능을 획득한 과거생의 특정 장면이나 그것을 상징하는 도안들을 그려 넣기도 하고, 또는 그가 앞으로 획득해야 할 것들의 상징이 그려진다. 이 상징적인 문양을 명상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신의 가장 깊은 속의 자아로부터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일깨워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 그 사람과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 사이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20세기 후반쯤일 것이다- 이집트의 기록 보관소가 발견되면 이 브로치들 몇 개가 나올 것이라고 리딩은 말하고 있다.
- 어떤 젊은 여성의 경우는, 과거생에서 그녀가 '미의 신전'에서 세 가지 재능을 발휘했다고 리딩이 말해주었다. 명상과 치병을 위해 육체의 진동을 높여 주는 음악을 만드는 재능, 미용식을 만드는 재능, 라이프 실의 문양을 디자인하는 재능이다. 따라서 그녀는 현생에서 영양사나 음악가가 된다면 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리딩은 또한 그녀 자신이 명상을 한다면 이집트 시대에 영혼의 경력을 투시하고 라이프 실의 상징적인 문양을 생각해 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초의식적 능력을 개발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여성은 리딩의 조언을 실천에 옮겨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하여 성공했다. 또한 명상을 함으로써 라이프 실을 디자인하기 위한 적당한 원소를 판별하는 능력을 개발했는데, 그녀는 이 능력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 리딩은 직업으로서 화학, 수 치료(治療, Hydrotherapy), 음악 등과 아울러 전기 치료(Electrotherapy) 연구를 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 전기 치료는 물론 현대 문명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리딩이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틀란티스나 이집트에서 직업적으로 전기 치료를 했으니까 현생에서도 해보라고 권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재검토하게 된 것이다.
- 기원전 10000년경 3회에 걸쳐 아틀란티스 대륙이 침몰할 때 아주 많은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이집트로 피난한 것 같다. 이 사람들은 물론 그때 이미 고도로 발달했던 그들의 예술과 과학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고도의 문명을 재건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과학의 일부분들은 이집트의 문명과 융합했다. 따라서 리딩이 어떤 형태의 전기 치료법을 직업으로 권하는 경우에는 모두 이와 같은 흥미로운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기 치료란 현재의 문명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영역이지만, 고대에는 널리 알려졌던 직업적 영역이었음이 짐작된다.
- 먼 과거생에서 같은 직업이나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직업에 종사한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매우 강한 취미가 있을 때는 많은 경우 일찍이 과거생에서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견 새롭다고 여겨지는 직업도, 많은 경우 그것이 고대 아틀란티스나 이집트의 예술과 과학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얼의 역사 중에서 처음으로 어떤 직업 분야에 들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만약 과거에 그런 분야에 대한 흥미가 철저히 발달되어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능력이 개발되어 있다면, 그 분야에서의 성공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 케이시 파일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의 역사는 신중한 연구생각에 많은 의문을 일으킨다. 첫째로 발단(端)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윤회론이 영혼은 처음에 신에게서 나왔다고 할 때 그들을 당혹케 하는 문제이다. 애당초 무엇이 어떤 영혼은 어떤 직업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다른 영혼은 또 다른 직업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일까? 만약 인간의 영혼이 원래 신에게서 차별 없이 평등하게 방사되어 나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한 사람은 농업으로 향하고, 또 다른 사람은 상업으로, 공업 분야로, 음악 분야로, 수학 분야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 각자 속에 들어 있는 뭔가 개별적인 미묘한 요소가 개인마다 다른 직업을 선택하게 하는 것일까?
- 케이시 파일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또 다른 하나의 문제 곧 '영혼이 인생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어 나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는 상당히 납득이 가는 자세한 설명을 해 준다. 케이시 파일에는 이와 같은 전직(轉職)의 예가 많이 있다. 그중의 적당한 예를 분석해 보면, 이런 직업의 변화는 '욕망'과 '카르마의 법칙'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 인자로서 설명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지금 있는 곳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십시오. 하느님의 인도를 기원하십시오. 당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나는 어디서 일을 하고 싶다든가 하고 하느님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여,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나를 써 주십시오'하고 말하십시오.
- 이런 개념에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르게 된다. 즉 늙음이라는 인생 후반기의 특징인 체념이나 무기력 내지 자기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어졌다는 느낌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여기서 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생각하는 노년이라는 것은 하나의 미신적 관습에 불과하다. 케이시 리딩에 따르면 기원전 10000년 무렵의 이집트에서는 평균 수명이 100년 이상이었고, 올바른 식사와 바른 사고방식에 대한지식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노쇠를 나타내는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늦었으며, 또 그다지 심한 노쇠 현상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일견 과장인 듯한 이런 말을 확인하는 근대 과학의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에는 실험적 연구로서 먹는 것이 건강과 체력과 수명에 주는 영향에 대한 혁명적인 발견이 나오고 있어, 노쇠는 대부분 그릇된 식이 습관과 생활 방식, 사고 습관에 원인이 있다는 것, 또한 늙으면 쓸모가 없어진다고 늙기도 전부터 생각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끼거나 이미 젊은 사람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이 머지않아 정신신체 의학 측면에서도 실증될 것이다.
- 장차 사회가 어떤 형태로 바뀔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어면 연령에 이르면 임금 노동에서 은퇴한다는 관습은 젊음을 유지하는 지식이 더 많이 발달하기까지는 그대로 계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야 어떻든, 노인은 좀약과 함께 옷장 속에 넣어 버리는 철 지난 옷처럼 치워져야 할 인간이라는 따위로 스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적인 책임이나 직업적인 의무 때문에 전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능력이나 재능의 창문을 열어 나가는 데 조용히 시간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에 환생했을 때 누릴 내적 부의 기초가 닦인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또 이것은 땅에 보배를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배를 쌓아두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의 하나이기도 하다. 천국이란 해탈한 의식 상태를 가리키며, 보배란 정신적 능력과 영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의 성격에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모순이 있다. 첫째는 어떤 때는 은둔적이고 내향적이며 침묵·냉담·비사교적·학구적·초세속적인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아주 상냥하고 외향적이며 명랑하고 솔직하며 관능적이라는 것이다. 리딩은 이 기묘한 분열이 두 가지의 분명한 경험의 흐름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비사교적인 경향은 영국의 수도원에서 수도승으로 살았을 때 형성되었으며 명랑하고 솔직한 성질은 중세의 십자군 전사였던 전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성격상의 이런 이상한 이중성은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솔직하고 명랑하지만 내일은 냉담하고 무뚝뚝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까이 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 성격상의 둘째 모순은 분명히 충동의 불완전한 교정에서 생기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먼 과거생에서 이집트의 임금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 으스대고 오만한 태도, 의젓하고 자신만만한 행동거지 따위는 그 경험에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생에서 팔레스타인에 태어나 예수라는 이름의 목수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 위대한 스승의 인격은 그에게 엄청난 감명을 주었고, 그는 예수와의 교류를 통하여 사회봉사에 대한 강한 충동과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이성적인 믿음을 얻은 것이다. 그의 경우 현생에서 우세한 것은 이 후자 쪽의 충동이다. 그는 평생의 사업으로서 종교나 사회 봉사 분야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길을 택했다. 복음 전도의 새로운 방식을 세워 그는 지금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또 고민하는 사람들의 상담자로서도 아주 친절하고 진지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따금 저 이집트 시대의 사나운 오만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 성질이 팔레스타인이나 그 밖의 전생에서 반밖에는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잠재해 있는 모순된 성질을 깨닫고, 그는 지금 그것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을 계속하노라면 차츰 조화로운 사람이 되고, 아직 청산되지 않은 성질도 차츰 자기완성과 봉사라는 새로운 목표에 따라 향상되어 갈 것이다.
- 이런 경우를 보여주는 예로서 조지 엘리엇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모순되는 충동을 나타내 보인 좋은 예이다. 이 위대한 영국 작가를 동정적으로 관찰한 사람 가운데도 그녀가 몇 가지 뿌리 깊은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이가 많다. 여기서 그녀의 각기 다른 전기의 말을 인용해 보자.
조지 엘리엇은 반은 정교도이고 반은 이교도였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면이 그녀 안에서 어우러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늘 우울과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지 메러디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조지 엘리엇은 사포(그리스의 여류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길쭉한 코와 묵시록의 말 이빨 같은 뻐드렁니를 가진 그 얼굴은 동물성을 나타내고 있다."
늘 의자를 난롯가에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나긋나긋한 느낌의 여성스러움, 그 몸놀림이나 태도에서 엿보이는 매력적인 여자다움은 그녀를 만나는 행운을 얻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과 미소를 지니고 있으며, 목소리는 분명하고 성격은 매우 동정심이 풍부했다.
- 엘리엇의 초상화에는 달베르가 그린 것 말고도 버튼과 로렌스가 그린 것이 있다. 후자는 <아담 비드 Adam Bede>가 출판되고 나서 그려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어떤 사람은 후자의 초상화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 그림에는 그녀의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의 무한한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도 표현되어 있지 않고, 또 때때로 그 눈 속에 오가는 냉담하고 음산한 무의식적인 잔인성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이런 모순에 생각이 미치면 어떤 사람은 아마도 <나는 앉은 채로 세상의 모든 고뇌를 바라본다>라는 휘트먼의 시를 상기할 것이다.
나는 앉은 채로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루 본다.
온갖 고난과 치욕을 바라본다.
나는 스스로의 행위가 부끄러워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가슴에서 복받치는 아련한 흐느낌을 듣는다.
나는 어미가 짓눌린 삶 속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려 주저앉고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죽어감을 본다.
나는 아내가 지아비에게 학대받는 모습을 본다.
나는 젊은 아낙네를 꾀어내는 배신자를 본다.
나는 숨기려 해도 고개를 내미는 시새움과 일방적인 사랑의 뭉클거림을 느끼며, 그것들의 모습을 땅 위에서 본다.
나는 전쟁·질병· 압제가 멋대로 벌이는 꼴을 본다.
순교자와 죄수를 본다.
나는 바다에서 난파선을 본다.
또 뱃사람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일에 목숨을 걸고 나설 차례를 정하려고 주사위를 굴리는 모습을 본다.
나는 오만한 인간이 노동자와 빈민과 흑인에게 던지는 경멸과 모욕을 본다.
이 모든 끝없는 비열함과 고통을 나는 앉은 채로 바라본다.
- 휘트먼은 윤회를 믿었다. 이것은 그의 전기에서 알 수 있으며, 또 그의 시 속에서 분명한 증거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다. 그리고 끝없는 세상의 고뇌를 바라보는 그의 숭고하고 초연한 태도와 침묵 속에서, 모든 결과 속에 원인을 보고 온갖 원인 속에 결과를 보는 사람의 참된 예지를 인정할 수가 있다.
- 휘트먼의 이 시는 인간에게 필요한 고뇌를 눈앞에 볼 때 찾아드는 침묵의 무위, 그 무위의 예지의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휘트먼이 남북전쟁 때 싸움터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일에 몇 년씩 봉사한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이상하리만큼 고독한 인생은 그로 하여금 그 고독을 버리게 할 만큼 관대하고 자기 헌신적인 인생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의 세계관 전체의 표현이 아니라 다만 그 일부를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 그것은 하나의 기분이고, 멀리서 본 산꼭대기의 그림이며, 또한 아마도 그의 일상생활의 보다 활기찬 선율과 대조를 이루는 저음의 반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생은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무위의 인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미덕을 넘치게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무관심의 논리를 초극한 것은 실로 사랑이다.
-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 참 의미이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고쳐주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바쳐진 그리스도의 생애는, 괴로워하는 자의 죄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의 초의식적인 마음은 확실히 그리스도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마음에 고뇌를 지닌 자, 육체에 고통이 있는 자를 4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도와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그가 또 다른 모습으로 예증한 것에 불과하다.
- 이것을 알았기에 붓다는 인생의 변화 유전 속에서 고요히 말한다. "나는 법(法)으로 피난한다." 모든 법칙 속에 들어 있는 광대무변한 자비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설령 아무리 비인간적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주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는 그리스도의 말처럼 감동과 위안과 격려에 넘치는 말이다. 왜냐하면 계율은 주요 주는 계율이기 때문이다.
- 케이시가 없는 지금, 그 놀라운 투시를 통해 개인적인 조언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비슷한 경우에 주어진 그의 말을 잘 살펴보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케이시는 사람들의 고난의 궁극적 원인은 모두 그 자신 속에 있다고 한결같이 타이른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첫 번째 교훈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이 일으킨 문제이며 자기 자신이 보상해야 할 일인 것이다.
- 이것은 극히 단순한 교훈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은 무조건 인정하고, 자기의 성질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돌리기 마련이다. 아주 특수한 예외 말고는 우리는 자신의 성격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 무의식적 본능은 자기의 기질을 '완전'의 척도로써 적용한다. 불행하거나 불쾌하거나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면 자기만족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사물에 책임을 돌리거나 외부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불안해하는 것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눈길을 돌려, 어디에 자신의 결점이 있는지 또한 어디에 배워야 할 교훈이 있는지를 철저히 연구하게 되리라. 어려움이 무엇이든, 그것이 외로움이든 사나운 남편이든 정신박약인 자식이든 열등감이든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든, 자기 자신의 개혁만이 사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인생의 연속'이라는 표현 속에는 3차원적 관점에서 우리가 윤회라고 부르는 경험이 리듬 있게, 바꾸어 말해서 주기적으로 오간다는 뜻이 들어 있다. 삶은 환생의 법칙 아래 진행된다. 그리고 이 환생의 조건은 복잡하고도 정확한 카르마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 인생은 법칙 아래 진행된다는 명제의 당연한 결과로서 다음의 명제가 나온다. 곧, 우리의 현재가 어떠하든 그것은 우리가 발동시킨 원인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명제이다. 인간은 항상 그 자신의 참값어치만큼의 존재일 뿐이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현재도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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