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야코프 뵈메] 야코프 뵈메의 고백 - 신과 악마의 투쟁

일루젼 2023. 2. 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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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야코프 뵈메 / 조미나

원제 : The confessions of Jacob Boehme

출판 : 누멘 
출간 : 2009.10.30


       

이전에도 여러 저작에서 인용된 문장들을 보았으나, <모든 것의 이름으로>를 읽으며 지금 꼭 읽어보고 싶어져 구해 읽었다. 다만 내가 관심이 있던 '서명 이론'은 <The Signature of All Things>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이 책은 그보다는 뵈메가 환상 속에서 보고 이해한 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열렬한 어조로 토로하는 내용이다.

 

역자와 이블린 언더힐이 머리말에서 서술한 바와는 달리 지혜의 소피아에 대한 내용은 그리 강조되어 있지 않았다. 원문을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인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지혜의 성모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다. 성자를 통해 성모에게로 이끌려 올라간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뵈메에 따르면 그는 이런 내용들을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경험해서' 느낀 것이라고 하는데, 카발라적 구조와 도마복음의 문장이 많이 보인다.

 

빛. 진동. 전자의 배치. 표면의 접합. 접촉.

 

무언가와 닿아있는 무언가는, 서로를 서로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17세기 경건한 기독교 신비주의자이자 비전가인 야코프 뵈메(1575-1624)의 저술서인 <야코프 뵈메의 고백>은 뵈메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보게 된 초월적인 계시를 가능한 한 그대로 적으려 애썼으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는 겸허하고 신실한 신의 계시에 대한 고백서이다.

 

- 뵈메의 이름은 그동안 신비 시인 예이츠를 꾸준히 연구하는 동안 늘 필자의 관심 속에 맴돌았다. 20세기 현대시의 아버지이자 기독교 영지주의의 예언자적 시인으로 불멸의 장미인 '여성 원리(The Feminine principle)'인 소피아(Sophia)를 노래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예이츠의 기독교 영지주의 선조들이라 할 수 있는 임마누엘 스웨덴보르그, 윌리엄 블레이크와 더불어 야코프 뵈메는 예이츠의 신비주의와 기독교 영지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 뵈메는 일찍이 여성 신성의 원리인 성모 소피아의 부름을 받은 자신의 경험담을 서술하였다. 뵈메는 영적인 환영 속에서 성모 소피아의 지고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한 선택받은 기독교영지주의 사상가로서 참된 신앙의 길잡이로서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는데 그의 존재적 가치가 있다.

 

- 평소에 예이츠를 통해 알게 된 남녀양성구유의 신으로서 우주의 신에 대한 확신은 동양의 우주 원리인 음양 사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확신해 왔는데, 이번에 뵈메의 서적을 통해서 그 역시 성령의 인도로 성모, 즉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신봉해 온 성모 소피아를 생생하게 체험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 성모의 지고의 사랑과 권능을 뵈는 숨은 '진주'에 비유하거나 '철학자의 돌'에 비유하면서 성모의 절대적 권능과 그 사랑의 숭고함을 역설하였다. 뵈메의 여성 원리인 소피아의 역설을 통하여 새삼 많은 다른 신비가들과 신비시인 예이츠에게 끼친 뵈메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 제3장부터 계속해서 뵈메는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고, 따라서 신 또한 천상에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상에 거하고 인간의 육신 안에서도 거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는 신은 단지 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혈육으로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 예로 성육화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들면서 따라서 인간의 몸은 신의 성소라고 한다. 즉, "말씀이 인간이 되고 신이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 이처럼 천상이나 지옥은 물론 신 역시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차원에 거할 뿐이다. 제4장에서도 거듭 신의 영역인 천사들이 거하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면서 천상의 세계는 이 세상에 공존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단지 지옥에서는 천국을 보지 못하고 두 세계는 서로 너무도 별도의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뵈메는 세상을 물질계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천상계 세 차원으로 나눈다. 물질계는 천국과는 너무도 다르고, 아스트랄계는 물질계와 천상계의 중간세계로 세 번째 차원인 신성한 천상의 세계로부터 생성되었다. 그곳에는 사랑과 분노가 서로 맞서 싸우고 있다. 이 두 번째 차원에는 이 세상의 일곱 샘의 성령들이 있고, 인간 안에서처럼 만상과 모든 피조물 안에도 내재해 있다. 성령은 두 번째 차원을 지배 통치하며 신성한 세 번째 차원의 세계에로의 탄생의 길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뵈메는 거듭해서 천국이 별도의 먼 곳이 아닌 만상에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물질계에서는 세 번째 차원의 천상계를 알거나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아스트랄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의 샘은 천국을 닮고 타고난 근원을 이해한다고 설파하며, 천상계에는 육신이 아닌 영체로서 존재함을 강조한다.

 

- 뵈메는 육신 안에는 신의 권능과 성스런 심장이 있고 우리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모든 육신의 왕이자 주님으로서 그의 육신과 더불어 신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여 육신에 바탕을 두고 계신 신의 세계를 설파한다. 타락한 육신은 신성을 감지할 수 없으나, 그러나 만상에 천국이 있다고 한다. 다만 차원이 서로 달라서 물질계인 현 세상에서 영계를 볼 수는 없으나, 사람들 중에는 아스트랄 영체로서 천국이나 지옥에 입성하여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조미나

 

 


 

- 뵈메는 수년 동안 자신의 내부에 그 비전을 품었을 때 많은 저술된 명작들을 섭렵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들 작품들은 거의 확실히 발렌타인 웨이겔과 그의 제자들의 저서들과 다른 연금술이나 신지학의 저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반 정도 이해된 이들 연구들의 결실은 뵈메의 무수한 애매한 문체를 더하는 점성술적이고 연금술적인 상징주의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많은 비전가들처럼 흔히 말의 암시적 자질에 대해서, 그리고 말의 감지에 대해서 말을 이용하면서 뵈메는 언어를 환기시키는 힘에 유달리 민감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야기란 먼저 그리스 단어로는 '사상'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그는 극도로 흥분하여 "나는 순결한 천상의 성모를 보았네!"라고 외쳤다. 우리가 아마도 뵈메의 연금술적 상징과 그의 생애의 굉장한 마법에 대한 말들에 대해 환기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역할 때문이다. 

 

- <아우로라>의 필사본 한 권이 괴를리츠의 프리마리우스사제인 그레고리우스 리치터의 수중에 들어갔고, 뵈메는 그의 비 정통파적 교리로 말미암아 폭력적인 공격을 당했고 심지어 당장 추방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마침내 뵈메에게 마을 체류는 허락되었지만, 저술 행위는 금지되었다. 뵈메는 5년 동안이 법령에 복종했다. 갱신을 위한 투쟁하던 암울한 이 시기에 뵈메는 권위에 대한 존중과 자기표현을 위한 절대적인 필요성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의 견해들이 알려지게 되면서 그들은 뵈메를 불러 많은 핍박을 가했다. 이것에 대하여 뵈메는 "날마다 싹트고 꽃피는" "수치, 치욕, 불명예, 비난"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는 교육받은 계층의 사람들, 특히 신비철학과 신비주의의 지방 학도들로부터 찬양자들을 얻었다. 

- 뵈메의 어휘들은 이제 매우 다양해졌고, 뵈메의 사상은 헤일 수 없는 토론의 결과로 더욱 확고해졌다. 1619년에 다시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집필은 그들과의 지난 토론에 따른 영향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시 집필을 시작한 기간과 그의 죽음 사이 5년 동안에 뵈메는 모든 주요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그 다량의 작품들은 우리는 그 작품들 속의 잦은 모호성과 반복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 심령이 분노를 품고 '저자의 손'을 종종 이끌었던 것을 입증한다. 어떤 경우에는 난해한 특이 사항들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인 예술적 기교로 씌어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뵈메의 첫 번째 혼란스럽고 압도된 실재에 대한 직관은 서서히 보다 명확한 비전으로 전환되어 갔기 때문이다. <아우로라>가 그의 힘찬 지성 안에서 '아름다운 밝은 날'로 변한 것은 '신의 심원함 속에 웅크리고 감싸여서' 그가 보았던 것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뵈메 사상의 많은 요소들에 기여했다. 이리하여 강한 도덕적 이원론인 회개하지 않은 본능의 '어둠의 세계'와 은총의 '빛의 세계' 사이라는 사도 바울의 대립론, 삼위일체 이론, 그리고 부활 이론과 뵈메가 종종 신지학적 감성 속에 사용한 일반적인 그들 교의적 상징들이 전개되었다. 뵈메는 때때로 환상적인 언어와 이미저리를 사용했을지라도 여전히 성경에 정통하였다. 마침내 뵈메가 숙고하여 읽은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신비가들과 연금술사들은 그에게 그의 철학의 생생한 자료들을 많이 안겨 주었다. 

- 그의 시대의 연금술은 여전히 일부는 물질적으로 일부는 초월적 의식으로 인지되는 것으로 사색하는 정신이 애호하는 노리개였다. 뵈메의 후기작품의 주제인 '서명 이론'은 실천의학의 길잡이로서 여전히 중요하게 수용되고 있다. 즉, 박제된 악어가 실험실에 매달려 있고 두꺼비와 거미들이 조심스레 증류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자의 돌을 추구하는 영적인 연금술사들을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완벽성과 인간성이 '위대한 업적'의 진정한 본질이었다. 이 '연금술적 과학' 안에서 화학과 마법과 신비주의들은 이상하게 혼합되어 뵈메에게 분명히 강한 호소력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끼친 그 영향은 항상 행운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 16세기의 보다 천부적인 신비 작가들, 특히 실레지안의 개혁가 카스퍼 슈웬크펠드와 발렌타인 웨이겔에 대한 뵈메의 빚이 훨씬 더 컸다. 확실히 뵈메는 웨이겔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가 친밀했었을 파라셀수스의 세 계명인 자연계와 아스트랄계와 영계의 총체로서 인간의 세 가지 측면의 삶과 신의 근원의 세 원리를 채택하였다. 웨이겔을 통해 뵈메는 위대한 14세기의 독일 신비가들에게서 그의 계보를 추적한다. 왜냐하면 쟈포의 성인다운 목사는 타울러의 작품에 몰입하였고, 기독교 신비주의의 진주인 <독일 신지학>을 편집했다. 그러므로 뵈메의 경우는 단절된 영적 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많은 자료들에 식상해 있었다. 그가 체득한 모든 지식은 그의 내적인 삶의 용광로 안에서 융화되고 재창조되었다. 그 결과는 연금술사가 수은과 유황과 소금으로 만드는 철학자의 흰 돌처럼 독특한 새로운 창조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흰 돌이 생겨나는 요소들을 무시함으로써 어떠한 경외도 흰 돌에 표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신비가들의 경우처럼 뵈메의 실재에 대한 구도는 숫자 셋이 기본으로,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와 접목되는 흥미로운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다. 본질상의 우주란 '신의 경이로운 작품 속에서 그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 개의 세계로 구성된다. 자연이 없거나 이를 초월하면 '영원한 선'(善)은 '영원한 존재자'로, 곧 신(神)의 심연이다. 즉, 절대자에 대한 플로티노스적인 정의는 에크하르트와 그의 학파를 통해 뵈메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세 개의 세계들은 초월적 합일이 자기 표출의 달성을 통해 현현하는 삼위일체이다. 뵈메는 그 세 세계를 불과 빛과 어둠의 세계로 나누어 부른다. 세 세계는 상호 배타적인 영역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의 다른 세 양상이다. 세 세계에 의해 우리는 세 양상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상호 서로의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 모두는 우리가 사는 감성의 외적 세계를 산출하는 그들의 역할이 있다. 

- '불'은 창조를 향한 영구적인 활기찬 신의 의지이고, 끊임없는 삶이고, 다가오는 물질세계에 대한 영감을 주는 갈망의 탄생이다. "무엇이든지 다가오는 것은 불을 수반함에 틀림없다." 즉, 성부의 자기 현현이다. 한 세대의 격렬함 속의 주된 불 또는 샘으로부터의 신성한 에너지의 현현을 통해 상반된 한 쌍이 나온다. 즉, 갈등과 악과 영구적 자연 자체인 분노의 '어둠의 세계'와 그 자체가 영원한 영(靈)인 플라톤의 '이성', 즉 기독교 신학에서의 성자인 지혜와 사랑의 '빛의 세계'가 함께 발현한다. 

 

- 어둠의 세계는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삶의 질을 나타낸다. 즉, '회개하지 않은 본성'은 뵈메에게 환상이 아닌 끔찍한 사실이었다. 정해지지 않은 비정상적인 투쟁의 영역이고 물어뜯고, 증오하고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오만한 자아의 의지를 지닌 영역이다. 빛의 세계는 모든 확고한 선과 미의 세계이다. 다가오는 불길의 충동의 성향을 지닌 존재의 상태이다. 그것은 말씀이거나 '신의 의지와 구별이 되는 신의 심장'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 지속하고 우리가 신성으로 부르는 모든 가치들이 그 내부에 내재해 있다. 그 빛 안에는 '모든 권능과 색상과 미덕의 영원한 근원'이 있다. 다시 여기에서 우리는 뵈메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들 중의 하나인 플라톤 학파의 선조를 감지한다. 이 빛의 내부와 그 안을 관통하여 불길 같은 생명력의 원시적인 투쟁들이 승화되어진다. 즉, 그의 타이타닉적 열광은 '사랑과 기쁨의 욕망'으로 변천된다. 그 어둠은 그것에 필수불가결이다. 왜냐하면 '반대가 없는 무'는 스스로 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거주하는 육신에 따른 이 외적 세계는 불과 빛의 창조물이다. 불의 양상으로 간주된 어둠세계의 존재의 분리를 무시하면서 뵈메는 때때로 이 육적 질서를 세 번째 신성의 원리 또는 성령의 영역과 '주님과 생명의 부여자'로서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주님과 생명의 부여자에게는 플로티노스식의 영혼 또는 '세계의 영'과 매우 밀접한 직위가 부여되었다. 뵈메에게 이 외적 세계는 '선과 악, 잔인함과 사랑스러움'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는 사랑과 분노가 함께 맞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생명력은 불에 상응하고 성령의 생명력은 빛이 된다." 우주와 인간의 삶과 같은 그 일은 '구원'의 본질로 그 불같은 근원 - 활기찬 본질의 본래의 물질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미(美)로부터 오는 빛의 도래이다. 이 영구적인 본질적 어둠에서 영적인 빛에 이르는 생명의 영구적인 솟아오름은 뵈메에 따르면, 때로는 '구세주의 새로운 탄생', 때로는 '백합의 성장'으로 불린다. 이것은 신의 절대성의 승리에 찬 자기 깨달음으로 항시 일어나는 일이다.

 

- 뵈메는 우주를 끓는 솥에서 영구적으로 기본적인 금속들이 천상의 황금으로 증류되는 광대한 연금술적 과정으로 본다. 대우주와 같이 소우주인 인간도 그러하다. 뵈메 역시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연금술사들의 '위대한 과업'은 연금술사의 내적 세계 안에서 이룩되어야 하고, 그는 불과 빛의 갈등인 그 '고뇌'를 수용해야만 한다. "만일 인간이 천상의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아와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 투쟁은 불가피하나 승리는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모든 세 세계의 본질을 지니고 있고, '신의 모든 권능으로 빚어진' 까닭이다. 모든 의식 안에는 영구적인 빛의 '반짝임'이 있다. 내가 올바른 사람을 만났을 때 뵈메는 말한다. "거기에 나는 세 세계가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빛과 어둠의 문지방으로 스스로를 포기했을 때마다 그 생명은 똑같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모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흔들리는 그 호형(弧形)은 지옥과 천국의 차이만큼 넓은 것이다. 불 -고뇌, 노력,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불은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은 자신의 분리된 어둠의 불, 자기중심적 열망은 죄의 근원이다- 과 신의 완벽을 향한 부단한 의지의 신성한 불을 위한 자기 포기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 어둠의 불은 불멸의 과정에서 소용돌이를 이루고, 다른 하나는 어둠의 요소들을 빛으로 전환하면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드러나는 틈새를 치유하는 우주적 과업에 대한 에너지와 사랑의 저장에 기여한다.

 

- 뵈메는 말한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 안에 신의 불을 지필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그 세계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의 단 한 가지 목적은 이를 망라하면서 모든 정통한 실재를 보도록 타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만상은 그 의지의 지도 하에 있다. 즉, "우리를 만드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다."

 

- 그에게 우주는 최우선의 종교적 실체이다. 불같은 에너지, 성장과 변화를 향한 욕구들은 중대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신의 생명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뵈메의 우주에 대한 비전은 영적 체험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뵈메는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뵈메는 "천국과 지옥은 현재 만상에 만연해 있고, 신의 사랑이건 분노이건 간에 그것들을 나타내는 것은 단지 그 의지의 전환점이다."라는 것을 깨달아서 영적인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극을 받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부단한 생성과 고뇌에 찬 열망이 우주적인 삶과 인간의 삶 둘 다를 그 한계로 이끌어 가야만 할 때 그 자체로 되돌려져서 불꽃같은 자기 탐식의 욕망, 즉 '고뇌의 쳇바퀴'인 연금술의 과정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뵈메가 '혼란'이라고 부르는 그 조건을 초래한다. 이 '혼란'은 지옥의 본질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자의 중심의 천국에서 그 행위에 의해 나타나는 빛의 욕구에 자아의 무릎을 꿇는다. 왜냐하면 "천국은 오로지 침묵의 사랑이 운행하고 의지가 담긴 영원한 존재자의 현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 뵈메는 이전에 자신이 실질적인 기독교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그의 종교는 생동력 있는 진행 과정이고 단순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뵈메는 동시대에 기독교 정통파들이 구세주가 한때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에는 만족하지만 역사적인 그 이념의 수용이 누구도 구원할 수 없었다는 것에는 불만을 품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단순한 역사적인 신인류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영적 연금술의 '위대한 과업'의 왕이다. 기독교 역사는 단지 '아이의 요람'일 뿐이다. 그 요람의 틀에는 재생의 법칙이 영구적으로 드러나고, '천상의 인류'인 영원한 빛의 세계의 시민이 시간의 유한 세계로 불려 나온다. 이는 뵈메가 "명목 뿐이고 입으로만 말하고 행함이 없는 기독교인들도 한때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발견했을 법한, 그래서 그런 역사를 거쳐서 본질로 흡수되었을 수도 있는 것을 우리는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선언인 이 모음집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뵈메가 쓴 글은 그의 충만한 경험에서 온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뵈메의 내적인 삶과 '신비적' 비전 사이의 연관성이 얼마나 밀접한가를 볼 수 있다. 즉, 지대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영구적인 갈등상은 실재에 대한 그의 직관적 지식을 적절히 조정한다. 

 

- 그의 헌신적 완수는 모든 경건한 신비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그의 헌신적 사상으로부터 의식의 다양한 변화를 달성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타인들에게 경이감을 주는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시험하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대는 다른 감정과 사고와 이해를 지닌 타인을 신속히 보고 느끼리라. 나는 내가 경험을 통해 알고 깨달은 바를 말하노니, 이는 병사가 전쟁터에서 싸우는 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 성령 안에서 말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성령이 자신과 함께 하며 누구든지 성령을 따르고자 하고 진리가 어떠한지를 알고자 애쓰는 타인들의 모범으로서 나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쓴다"라고 뵈메는 거듭 언급했다. 

 

- 이블린 언더힐 

 


 

- 예술은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지만 올바른 철자법의 이해에 따라 정확하게 어떤 시간을 엄수하도록 고려하는 것도 아니라, 성령의 지시에 따라 명령된 모든 것들이 종종 성급히 스쳐 지나갔다. 그러므로 많은 언어에 대해서 철자법이 요구될 것이고, 어떤 곳에서는 한 단어를 위한 대문자가 요구될 것이다. 저술가가 그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손이 때로는 흐트러졌다. 내가 보다 정확하고 편견 없이 확고한 태도로 글을 쓸 수 있었을지라도 그 흐트러진 연유는 이 때문이 아니라 종종 타오르는 불이 너무도 신속하게 지나가서 필자의 손과 펜은 그 말씀을 재빨리 받아 써 내려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불은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서둘러 왔다가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적도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서술할 수 없다. 단지 주님이 내 안에 몸소 드러내신 정도에 따라서 내가 알도록 허락해 주신 것만을 서술할 뿐이다. 


- 신의 신비에 대해 그 어느 것도 내가 알고자 한 적이 없으며, 하물며 그 신비를 모색하거나 발견하는 방법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의 신비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의 상태에 있었다.

 

- 그러나 내 안에서 때때로 마치 어린 새싹처럼 그 본연의 실체가 열렸다. 그것은 열두 해의 기간을 두고 나와 함께 하면서 그 신비가 이른바 육성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저술의 외부적인 형태로 불러오기 전에 나는 강한 자극이 내 안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의 외적 원리로 썼던 것을 무엇이든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악마를 극복했을 때, 내 영혼에 천상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러면 영혼은 외적으로 육신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원천적 샘 속에서 신과 천상의 절대자를 본다. 그곳에서는 감수성에 젖어서 혹은 두뇌의 사고 속에서 빛의 섬광이 솟아오르고 있고, 그 안에서 성령은 그윽이 응시하고 계신다. 천사들 또한 그러하듯이 인간은 신의 모든 권능으로부터 그리고 신의 일곱 영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타락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의 운행은 그 권능이 항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내부에서 항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신성이 인간 내부에서 용솟음친다 해도 진실로 신성이 빛난다 할지라도 타락한 육신으로는 신의 존재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 

 

- 성령은 죄악 속의 육신에는 깃들 수 없고 불빛의 섬광처럼 발산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돌을 마주 부딪칠 때 나오는 순간적인 불꽃이나 섬광과 같다. 그러나 그 섬광이 심장의 분수 속에 포획되면 성령의 샘의 일곱 영 안에서 성령이 일어나서 아침노을이 붉게 비치는 새벽과 같이 인간의 뇌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그 빛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고 상대방을 느끼며 냄새를 맡고 맛보며 듣는다. 마치 전능하신 신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심과 같다. 

 

- 여기에서 성령은 신(神)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신 안에서는 가깝고도 먼 모든 것이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은 천상에서처럼 성스런 정신의 몸 안에서도 세 가지 특성을지닌다. 

- 신으로부터만 나의 지식은 오며 그 밖의 다른 누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이 되는 것보다 더 나은 다른 어느 것을 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영혼 안에서 주님은 그것이 확인되게 하시고, 나는 주님 안에서 확고히 믿고 전적으로 의지한다.

 

- 비록 천국의 천사가 이를 일러 준다 할지라도 내가 전적으로 그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다. 하물며 그것을 어찌 전부 수용할 수 있으랴. 나는 분명코 그것이 그런지 아닌지를 항상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태양은 내 영혼 안에서 스스로 일어나고 있으므로 나는 내 안의 태양을 가장 믿는다. 

 

- 그 단호한 열망에 휩싸여 있었을 때 나는 맹렬한 공격과 강한 폭풍과 습격으로 신과 지옥문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내 자신이 그에 대해 내 인생이 모험을 하도록 결의를 다지고 선과 예비된 권능을 보다 많이 확보하였고(이는 확신컨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내 영혼은 지옥문을 뚫고 들어가서 심지어 신의 내적 세계로 입성하여 그곳에서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포옹하듯이 신의 사랑 속에 내가 안겼다. 

 

- 그러나 내 이성으로는 신의 심오한 차원들을 즉시 이해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내가 신을 정확히 이해하기까지는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그 권능을 펼치어 신과 결합한 생기 있고 영적인 영혼은 주님의 뜻을 잘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동물의 육신은 그것을 단지 섬광처럼 언뜻 스쳐볼 뿐이다. 이 순간 영혼이 영적 세계로 입성한 상태로 성령에 의해 들림을 받아 영혼이 육신을 이탈한다. 그러나 육신은 즉시 다시 봉쇄된다. 불길이 부싯돌에 의해 지펴지듯이 신의 분노가 자극이 되어 영혼이 그 권능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기를 낳으려 하나 낳을 수 없어서 산고(苦)로 신음하는 여인처럼 그 육신의 지식은 사라지고 이리저리 오가며 괴로워하고 고민하게 된다.

 

- 그리하여 영혼은 동물적 육신과 함께 하면서도 한때나마 주님의 달콤함을 맛볼 때도 있게 된다. 그 이후로 영혼은 지속적으로 신의 달콤함을 갈구하고 목말라한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상반된 신의 분노의 권능 안에 거하는 악마 때문에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고뇌해야 한다. 그에게는 결투와 전쟁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내 영광을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안위를 위해서 쓰는 것이다. 내가 가는 좁은 다리 위로 나와 함께 걸으려는 그가 지옥의 문과 신의 분노와 맞닥뜨렸을 때, 그 앞에 그들이 스스로를 나타냈을 때 갑작스레 낙담하고 혼란스러워서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만 육신을 가지고 좁은 이 다리를 건너 저 멀리 초록빛 풀밭이 있는 신의 분노가 도달치 못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 내가 여기에 쓰는 것이 참된지 아닌지 의구심을 갖거나 의문을 품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의 문이 그 영혼 앞에 열려 있고, 그 빛 속에서 영혼은 그 두 차원으로 밀고 들어가 그 두 차원의 세계를 주시하고 입증하며 검토하기 때문이다. 악마가 내게서 빛을 빼앗지는 못해도 종종 이 육신의 물질계로 그 빛을 감추어서 아스트랄체가 근심과 곤궁 속에 빠져서 마치 감옥에 갇힌 듯이 된다. 

 

- 사도 바울 역시 이곳으로 왔으므로 자신이 아스트랄계 안에 거함으로써 난관이나 방해 없이 그 빛을 기꺼이 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분노가 육신의 차원 안에 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거기에서 타락을 견디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일 분노가 아스트랄체에서 말끔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그는 신처럼 되고 신과 같이 모든 만상을 알게 될 것이다. 

- 이 생(生)에서 이제 겨우 영혼은 단지 신의 빛과 함께 연합하는 권능을 펼치는 법을 알았을 뿐이므로 그 영혼은 아스트랄체로 다시 완벽하게 신의 빛을 되돌려 올 수는 없다. 사과가 진실로 사과나무의 자식이라도 과실로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향기와 맛을 다시 나무와 대지에 되돌려 놓을 수 없듯이 사람의 본성도 이와 같은 것이다.

 

- 성자 모세는 이 빛 안에서 너무도 높고 깊어서 영광스럽게 되고, 투명하고도 밝은 아스트랄체로 말미암아 그의 얼굴 안의 육신계는 투명하게 되고 광채가 나며 영광에 감싸이게 되었다. 성자 모세는 아스트랄체 안에서 완벽하게 신의 빛을 보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분노의 벽이 그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스트랄체의 전 우주의 본성조차도 신의 빛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신의 심장이 모든 만상에 거하시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해도 신의 혼불은 감추어져 있다. 

 

- 그대는 자연의 물질계 안에 신의 분노가 어떻게 감추어져 있고 내재해 있는지를 직시한다.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가 그 분노를 일깨우지 않는 한, 그들의 권능을 육신계의 분노와 연합하도록 드러내지 않는 한 잠 깨울 수 없다.

 

-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지옥에 떨어져 버리라고 비난한다면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가 뜻한 대로 될 것이다. 사람은 자신 안에서 분노의 불을 일깨우고, 만일 그 분노의 불이 타오른다면 그 후에 신의 분노와 지옥불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그대의 불이 꺼지고 나면 그대는 어둠 속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분노를 일깨운다면 그다음 그 신의 분노가 그대 안에서 불타오르게 되리라. 

 

- 심지어는 돌 안에도 불이 들어 있다. 만일 그대가 돌을 치지 않는다면 그 불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만일 돌이 서로 부딪치면 불이 발생하고, 그 불 곁에 인화물질이 있다면 불이 활활 타올라서 대화재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불은 인간 속에도 내재해 있는데 그대가 분노의 불을 켜지만 않는다면 그 불은 그대 안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 사랑과 분노가 서로 다투고 있다. 여태까지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인지해 간다. 왜냐하면 아스트랄체가 육신에게 생명을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은 아스트랄체와 영계 사이에서 생성되는데, 이는 생령과 영혼의 차원으로 불리며 영혼으로 말미암아 그 세계는 전인적인 완벽한 인간만큼이나 위대하다. 

- 그 육신계는 세 번째 차원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아스트랄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영혼의 샘은 천국을 닮은 타고난 근원을 이해한다. 활기차고 영적인 사람은 천국으로 밀고 들어가서 신에게로 나아가 신과 거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인적인 인간도 천국의 신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다.

 

- 인간은 분노와 죄악으로부터 전적으로 순수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심연의 경계들은 신의 중심 앞에서 아주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사랑과 분노가 서로 다투고 있다. 이제 사랑과 분노들이 서로 반목하는 곳인 두 번째 차원인 아스트랄계는 육신의 영혼이고, 그 영혼의 중심에 있는 천계의 영혼이다. 

 

- 악마는 분노가 최대로 도달할 수 있는 한 이 경계의 절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악마는 이 차원 안에서 어떻게 다른 영역이 그의 근원을 갖는지 알 수 없다. 이 사랑 속에 거하는 아스트랄체의 다른 영역은 불타는 분노의 수용체를 쥐고 있는 천국으로 모든 악들과 함께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의 심장부에서 나와 분노와 싸우고, 신의 분노의 격렬함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성전으로 일어나는 천국에 성령님이 계신다.

 

- 이 천국 안에서 천사는 우리들 사이에 거하고, 악마들은 다른 영역에 거하고 있다. 이 천국 안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분노로 인해 고통을 겪고 혹독한 구타와 유혹과 박해로 수많은 고통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시간을 고통과 압제 속에 살아간다.  

 

-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은 모든 사랑에 속한 영역인 아스트랄계 속의 자연 안에서 일곱 영(靈)과 연합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죄악을 범하면 사망과 분노의 영역에 속한 악마의 포로가 된다. 

- 그대는 또한 어떻게 그대가 이 세계 속의 모든 곳인 천국과 지옥 안에 거하고, 그 천국과 지옥 사이의 지대한 위험 속에 거하고 있는가를 직시한다. 그대는 어떻게 천국이 성자 안에 있는지 보고, 그리고 그대가 서 있는 곳과 걸어 다니거나 누워있는 곳 어디에서나 천국이 있는 것을 바라본다. 만일 그대 영혼이 신과 협력한다면, 그대는 신의 일부로서 천국 안에 있고, 그대의 영혼은 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양 떼들은 내 안에 머물고 아무도 나로부터 그들을 끌어갈 수 없노라라고 말씀하셨다.

 

- 이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그대는 또한 분노에 관한 한 모든 악마들 사이에서 지옥에 항시 그대가 어떻게 거하는지 직시하리라. 그대는 단지 눈만 뜨게 된다면 경이로운 세상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서게 된다면 그 둘 다 보지 못하고 매우 좁은 다리 위를 걷게 될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수차례 아스트랄 영체로서 천국 저 멀리 들어가서 황홀경을 맛보았고, 사람들이 말한 대로 이 생애에서 천국과 지옥의 문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산 육신과 함께 지옥에 있는지를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였다. 그런 진실이 단지 무지와 무분별함 때문에 경멸당하고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언한 대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 단순한 사람은 신은 무에서 만상을 창조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가 땅 위의 심연과 더불어 지상을 주시할 때, 그는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신은 거기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사람은 항상 제 스스로 신은 별들과 법칙과 더불어 창공 위에 홀로 거하신다고 상상한다. 어떤 영혼은 신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온다는 의미로 본다. 그리고 그의 육신은 여기 지상이나 지상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의견이나 논리를 단지 서적이나 박사들의 글들을 통해 읽어 왔다. 그리고 식자들 사이에서 바로 이것들에 대한 많은 의견들과 논쟁과 논란이 있어 왔다. 

- 이런 일들은 내가 자족하듯이 이해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까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에 한한 것이다. 

- 신의 현존은 바퀴와 같아서 그것으로 많은 바퀴들이 하나의 바퀴에서 또 다른 바퀴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가면서도 지속적으로 함께 돌아간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그 바퀴를 주시하면, 그는 무척 경탄하면서 그 바퀴의 회전으로부터 즉시 그것을 생각해 내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퀴를 보면 볼수록 더 그 바퀴의 형태를 배우게 될 것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그는 그 바퀴에 대해 더 큰 갈망이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계속 그것을 보면 볼수록 더욱더 놀라움을 금치 못해 그것을 충분히 주시하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비록 그 영혼은 바퀴를 보고 모든 곳에서 그 바퀴의 형상을 기꺼이 잘 이해하겠지만 심령은 그 바퀴가 휘돌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영혼이 처음 이해된 그 형상을 다시 볼 수 있는 때가 오면 그 영혼은 꾸준히 더 많이 배우게 되고 그 바퀴 안에서 항상 사랑하고 기뻐하며 그 바퀴를 변함없이 더욱더 갈구하게 될 것이다. 

 

- 만일 그대가 영혼 안에서 육신의 죽음을 벗어난다면 그 숨은 신을 보게 될 것이다. 유한한 육신은 생명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서 스스로가 빛의 생명을 적절히 받아들이거나 품을 수 없다. 그러나 신 안의 빛 중의 생명이란 육신 안에서 일어나고 그 신의 빛을 알고 이해하는 천상적이고 살아있는 육신인 또 다른 육신이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난다.

 

- 지상의 신비를 보라, 지상이 신비를 불러오듯이 그대도 신비를 불러와야 한다. 지상은 신비를 불러오는 육신이 아니라 그 신비스런 육신의 어머니이다. 그대의 육신이 영혼의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머니의 것인 것과 같다. 그 둘의 내부인 지구와 그대 육신 속에서 신의 투명한 신성의 빛이 숨겨져 있고, 그 빛이 방출되어 스스로 그 종류대로 제 각각 모여서 한 몸을 이룬다. 어머니처럼 아이도 그러하다. 인간의 아이는 육신에서 나온 아스트랄계에서 태어난 영혼이다. 대지의 아이는 풀잎이고 식물이고 나무이고 은과 금과 모든 미네랄 광석이다. 지상 밖으로 풀잎과 식물과 나무가 자란다. 대지 속에는 은과 금과 모든 광석 종류가 나온다. 지구의 저 멀리 심연 속에는 권능과 선의 경이로운 형상이 펼쳐 있다. 

 

- 이제 그대는 아마도 내가 이교도적인 태도로 글을 쓴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귀 기울이고 주시하라! 뛰어난 분별력으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그러한지를 관찰하라. 내가 이교도적인 태도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사랑 안에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나는 이교도가 아니라 만상의 주이신 전능하신 한 분의 참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 그 심오한 별무리와 원소들과 대지를 그대가 주시한다면 그대의 눈으로 그 광채로 빛나고 투명한 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주님은 거기에 계시고 그들 안에 주재하시지만 그대는 그대의 눈으로 첫 사망을 본 후로 분노의 신을 보고 이해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사고를 들어 올려서 신이 계신 곳에 대해 숙고한다면 그대는 사랑과 분노가 서로 맞서서 움직이는 그 아스트랄계를 이해할 것이다. 신앙심에 의해 이 통치하는 성스런 곳을 지배하는 신께 가까이 이끌려 갈 때면 그대는 그의 신성한 가슴 안에서 그 주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 경지에 도달하고 난 후 그대는 스스로 천국과 지상과 별들과 원소들이 되시는 신과 같이 된다. 

- 진실로 모세는 신께서 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말에는 많은 의견들이 분분하다. 나 또한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모세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고 모세의 말에 더 세련되게 덧붙인 것도 아니다. 그 베일은 내 눈앞에 여전히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로 말미암아 많은 장애를 받았지만 그 진주를 발견했을 때 모세의 얼굴을 보았고 모세가 그것을 정확히 기술한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 이제 그 질문은 이렇다. 무엇이 신의 형상인가? 신을 주목하고 숙고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 질문에 대한 광명을 얻을 것이다. 신은 동물적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아마도 신이 거하시는 곳으로서, 신의 이미지이고 그 유사물이다. 

- 신은 영이시다. 세 원리들이 주님 안에 있고, 그 근원과 권능은 어둠과 빛과 이 세상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이 세 형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드셨고, 그 자신의 형상과 유사한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신께서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을 창조한 형성의 권능은 대지의 모체로부터이고, 그 대지의 모체로부터 세상은 생성되었다. 주님이 인간을 창조한 물질은 천상의 모체로부터 나온 별들의 본질과 원소들로서, 지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 이제 영혼은 아버지인 신 자신처럼 성자는 영원한 어둠과 영원한 빛으로, 두 개의 문에 서 있으면서 두 원리를 접한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천상에 있을 것이고, 성자를 품으신 아버지이신 신의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 영혼은 신의 심장의 형용할 수 없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영혼은 신의 모든 말씀으로 양육된다. 이 말씀들은 영혼의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 신성한 지혜이신 성모님은 나를 어떤 불행에 빠지게 하지 않으시겠노라고 내게 언약을 주셨다. 성모님은 지혜의 성자 안에서 나를 도울 것이다. 나는 성자를 강하게 부여잡아야만 하고, 성자는 나를 낙원의 성모님께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지혜가 거하시는 내 본래의 왕국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모험을 할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엉겅퀴 가시덤불을 헤쳐가리라. 나는 성모님이 내게 현현하셨을 때 성모님의 신성한 언약에 의지하며 성모님은 내 모든 슬픔을 엄청난 희열로 바꾸어주셨다. 한밤중 내가 산에 놓일 때 모든 나무들이 내게로 쓰러져도 모든 폭풍우와 강풍이 내 몸을 후려쳐도 적그리스도가 나를 삼키려고 아가리를 크게 벌려도 성모님께서 몸소 오셔서 나를 위로하고 그분께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 그대는 물을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 세대입니까? 또는, 어떻게 인간 속에서 그것이 일어납니까? 귀 기울이고 직시하며 그대 마음을 닫아 두지 말라. 그대 마음을 권능과 호화로움을 수반하는 이 세상의 영(靈)으로 가득 채우지 말라. 그대 마음의 중심을 잡고 전적으로 이 세상의 영을 모두 쳐부수어라. 그대 마음을 친절하신 사랑의 신에게 복종케 하라. 

- 이 세상의 쾌락을 염원하지 말고 극복하도록 그대의 목표를 신실하고 강하게 세워라. 이 세상은 그대의 집이 아니고, 그대는 이 세상의 나그네이며 감옥에 갇힌 죄수임을 묵상하라. 감옥의 열쇠를 쥔 주님을 외쳐 불러라. 순종과 정직과 겸손과 순결과 진실 안에서 주님을 향해 몰입하라. 이 세상 왕국을 지나치게 추종치 말라. 그 왕국은 그대의 열망 없이도 그대에게 아주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신의 지혜이신 순결하신 성모님께서 그대 마음의 드높고 깊은 곳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며, 그대를 심연의 문 열쇠를 쥔 그분에게로 이끌 것이다. 그대는 그분 앞에 서야만 하고, 그러면 주님은 그대에게 힘이 되고 활기를 되찾게 하는 천상의 만나를 먹도록 내려주실 것이다.

 

- 그대는 강해져서 아침의 계명성처럼 심연의 문을 부술 것이다. 비록 그대는 한밤중에 여기에 포로가 되어 있지만, 새벽의 광선은 거듭난 새 마음과 새 영혼을 지닌 그대를 따스하게 환영할 천사들의 환희와 함께 순결하신 성모님이 기다리며 서 계시는 낙원을 비춰 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그대는 어두운 밤 동안 그대의 육신으로 헤쳐가야만 할지라도 내 숭엄하신 성모님은 그대를 여전히 도와주실 것이다. 

 

- 그것을 잘 보고 그대 마음과 분별력을 닫아 두지 말라. 그대 마음이 말할 때 돌아보라. 그러면 지혜의 신께 부름 받은 것을 알게 되리라. 즉시 돌아서서 얼마나 단단히 굴레의 집에서 그대 영혼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지 그대가 머무는 곳에 대해 묵상하라. 그대 영혼이 떠나와 방황하는 곳으로부터 그대 영혼이 떠나온 곳으로 어떻게 그 영혼이 다시 돌아가야 할지 그대의 본향을 찾으라. 그러고 나서 그대가 지혜의 신의 권고에 따른다면 그대는 이승 이후뿐만 아니라 거듭난 이승 안에서도 그대 자신 안에서 지혜와 매우 의미 있게 대면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 필자가 어떤 영으로부터 이 글을 썼는지 알게 될 것이다.

 

- 비록 이 세상에서 그대는 위대한 명예와 영광과 풍요를 얻지 못했어도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라.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이다. 그대는 내일 그대가 죽음에 이를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대는 일순간의 세상의 명예를 좇아서 그리도 경쟁하고 싸워야 하는가? 차라리 낙원의 나무를 갖도록 애써라. 그 나무를 그대가 가져가면 나무의 성장과 그 과실로 인해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 오! 그 영혼의 권능이 낙원에서 성장하고 꽃 피어나서 그곳에서는 찬미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대의 욕망에 따라 과실들이 끊임없이 성장하며 뻗어나가고, 공포도 시기심도 슬픔도 없이 서로 사랑하며, 모두가 다른 형태와 아름다움으로 기쁨에 젖는 곳인 성삼위일체가 충만한 곳을 영혼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축복받은 지복이 아니겠는가? 

- 사랑하는 마음이여, 그대가 이런 식의 욕망을 지녔다면, 그리고 그 욕망을 획득했다면 그대는 지대한 신실함을 활용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음이 없이 입술로만의 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그 지복을 얻을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목적과 이성 모두를 함께 하여 하나의 의지와 결단력과 그대의 혐오감으로부터 돌아서기 위한 욕망을 가지고 그대의 마음을 모아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사고를 신과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선으로 묶어 두어야만 한다. 그러면 그대는 그 지복을 얻을 것이다. 

 

- 아무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그는 경험을 통해 그 보석을 발견했다. 그것은 가장 귀한 손님이다. 그 보석이 영혼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매우 경탄스러운 승리가 있을 것이다. 신랑이 그 사랑하는 신부를 안듯이 낙원의 찬미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오! 유한한 육신이 그 소리에 전율하고 무서워 몸을 떨 ...

 

- 이것은 옳지 않고 잘한 일이 아니라고 이른다. 그러나 육신은 그것을 가져야 우리가 살게 될 것이므로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악마는 자신을 아주 교묘히 잘 은신시켜서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한다. 자신의 타락의 양상이 그 기독교인에게 잘 식별되지 못하는 동안 스스로 육신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타인들의 죄악상을 꾸짖고 있는 한 진정한 기독교인을 악마는 사악한 곳에 빠뜨리고 죄악에 빠뜨릴 때, 그런 양상이 악마의 걸작품이 된다. 

 

- 신의 율법과 인생의 방식은 우리의 가슴으로 쓰여진다. 인간의 추론에 있지 않고 어떤 역사적인 의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선한 의지와 선한 행위 안에 있다. 그 의지는 우리를 신 또는 악마에게로 이끈다. 그 의지는 그대가 구원이 그 안에 존재치 않는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 이교도와 회교도는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있는 그대만큼이나 신과 가까운 이들이다. 만일 그대가 신성치 못한 그릇된 의지를 그대의 행위에 수반한다면, 그대 역시 신에 대한 갈구도 의지도 없는 이방인만큼이나 신의 부재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만일 회교도가 열광적으로 신을 추구한다면 비록 그가 어둠 속에 거한다 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우리 동료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아직은 그들이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는 그 자녀들과 더불어 신께로 나아간다. 신에 대한 추구는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에 관한 한 모두가 장님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열망을 신(神)과 선(善)에게로 돌리고 신을 열망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신과 우리의 의지 안에서 거듭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 안으로 신을 받아들인다.

- 그대는 기독교인이라는 그대의 칭호를 자랑삼는가? 진실로 그에 걸맞게 그대의 담화를 하라. 아니면 그대는 단지 그 의지 안에서나 행위 속에서 이교도일 뿐이다. 그의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은 그는 채찍을 많이 맞아야 한다. 그대는 두 아들에 관한 일화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알지 않는가? 그 아버지가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그 일을 하라고 하자 그 아들은 그러겠노라고 했다. 다른 아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가서 그 일을 하지 않았으나, 둘째 아들은 "아니요"라고 거부하고는 가서 그 일을 했다. 그의 아버지 뜻대로 한 것이다. 순종의 이름하에 있던 그 아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런 한 아들이거나 또 다른 아들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의 서약 안에 있다. 우리는 "예, 우리가 그 일을 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지 않은 이들은 유익을 주지 않는 하인들로 아버지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이다. 또한,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분별을 잘하지 못한 회교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면, 이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누가 그들을 재판관에게 내몰겠는가? 아버지의 심장에 있는 성자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성부를 경외한다면 그들도 성부의 심장에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심장을 초월한 그 어떤 신도 없기 때문이다. 

 

- 그대는 내가 그들이 하던 대로 계속하도록, 그들이 소경 상태로 있도록 그들을 고무시킨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그대가 소경임을 보여준다. 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은 그대여! 그대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만 그대도 역시 타인들에게서 똑같이 판단받는다는 것을 알라. 그러므로 그대는 의도적으로 그대 신의 심판을 자신에게로 불러오는 것이다. 

-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그대를 핍박하는 자들을 잘 대접하라고 이르신다. 주님은 비난하거나 경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온유해지는 법을 가르친다. 그대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교도는 그대가 신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을 닮은, 신의 형상을 지닌 진정한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의 부재 속의 우리가 아닌 우리 안의 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단계에 합당한 유일한 치료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숨겨진 사람 속의 신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에 대해 오로지 한 마음으로 열망하는 굳은 의지를 갖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그리고 별들과 원소들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신에게로 입성한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이성의 의지 안에서 우리는 별들과 원소들의 자녀들이며, 이 세상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의지로부터 나와서 신에게로 입성한다면, 성령은 우리 정신을 이끌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들로 만드신다. 그러면 또한 낙원의 화환이 그 정신에게 씌워지고, 정신은 이 세상 이후에 대한 이해 없이도 신의 자녀가 된다. 정신은 한때 그를 지배해 오고 세속적인 이성 안에서 그 정신을 이끌었던 이 세상의 지배자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 인간이여! 그대를 누가 이끌고 인도하는지 숙고하라. 영구적으로 끊임없음은 너무도 긴 것이다. 
 
- 그대의 요람에서 일어나라. 그대는 성모의 자녀이고, 그 자녀 이상이고, 그 집의 주인이고, 그 재산들의 상속자가 아닌가? 왜 그대는 고통에 빠져서 그대 하인들이 그대를 이용하게 만드는가? 그리스도는 "나는 세상의 빛이요 나를 따르는 자는 영원한 빛을 얻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를 연극배우들로 지도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자신이 되도록 지도하셨다. 심안의 눈으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보아야만 한다. 주님은 빛이므로 우리는 주님을 볼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볼 때, 우리는 빛 안에 거하게 된다. 주님은 계명성으로 우리 안에서 생성되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우리 몸의 어둠을 빛내신다. 

- 나는 그대에게 영원한 존재와 이 세상이란 인간과 같다고 선언한다. 영원은 그 자체와 같은 것을 탄생시킬 뿐이다. 그대가 인간의 존재성을 알았던 것처럼 불멸성도 존재한다. 영과 육 안에 있고 선과 악 안에 있고 기쁨과 슬픔 안에 있고 빛과 어둠 속에 있고 권능과 미약함 속에 있는 인간을 묵상하라. 만상은 인간 내부에 있고, 천상과 지상과 원소들도 있다. 또한, 세 양상의 신(神)도 계신다. 

- 오, 인간이여! 그대 자신을 찾아라. 그렇게 되면 그대는 스스로를 찾게 될 것이다. 그대 심안의 눈을 뜨고 똑바로 보아라. 이것은 숭고하고 귀중한 돌인 현자들이 발견하는 철학자의 돌이다. 오, 그대 찬란한 진주 왕관이여, 그대는 태양보다 더 빛나지 않는가? 그대와 같은 이는 없다. 그대는 그처럼 찬란하게 빛나지만 너무도 비밀스러워 이 세상 수천 명의 사람들 누구에게도 올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대는 탄생된다.

 

- 그리스도는 "구하라, 그러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고귀한 돌은 발견되어야만 한다. 게으른 이는 그것을 찾지 못한다. 그가 그 돌을 자신에게로 가져온다 해도 그 고귀한 돌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돌을 드러내는 이마다 모든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 돌의 미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 돌을 지닌 이는 그 돌을 멀리 하지 않는다.  

- 이승의 삶 이후에는 이곳에서 살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승의 영혼은 저승의 영혼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어서 사라질지라도 그 의지는 자신이 길러온 대로 사물을 수용할 것이다. 어떻게 그 영혼이 신의 낙원에서 천사들 앞에서 살아갈 것인가를 그대 스스로 숙고해 보라. 나는 진실로 내게 주어진 대로 그 일을 그대에게 경고한다. 

 - 말씀은 모든 사람의 삶의 등불로 어디에서나 스스로 열려있다. 오로지 이 말씀만을 원함으로써 혼령은 스스로를 포기한다. 그 혼령 안에서 신은 태어난다. 

 

- 외적인 세계를 신이라고 말하거나 전하는 말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육신이 신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대자연과 연합함으로써 스스로 강화된 육신은 말씀으로만 표출된다. 내적인 세계는 신이 거주하는 천국이라고 나는 선언한다. 영원히 말씀하시는 말씀의 운행을 통해 육신의 세계는 영적 세계로부터 표출된다. 그리고 시작과 끝으로 에워싸인다. 

- 영적인 세계는 영원한 말씀 안에 거한다. 불멸의 세계로부터 오는 지대한 신비로서 그 영원한 말씀은 권능과 색깔과 선을 지닌 지혜를 통해서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이 존재는 지혜 안의 말씀으로 호흡한다. 그 존재자는 그 자체가 세대의 권능을 가지고 있고, 영원한 말씀의 세대의 방식 이후에 스스로 형상을 이루며 내가 말하고자 한 바처럼 말씀 안의 지혜로부터 온다.

- 신에게는 가깝거나 먼 것이 없다. 혼과 몸이 상호 안에 있고 시간과 영원이 상호 안에 있듯이, 한 세계는 곧 다른 세계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은 하나이다. 영원한 말씀은 만상을 두루 지배한다. 말씀은 영원세계에서 영원세계로 작용한다. 비록 그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생각될 수 없어도 말씀의 효능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형성체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작용하는 말씀은 생명이다.

- 영원히 전하는 말씀은 신성한 이해와 소리이다. 사랑의 욕망으로부터 형상들이 발생한다. 즉,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연적이고, 창조적인 이해와 소리는 말씀 안에 있다. 일컬어진 바와 같이 주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인류의 빛이다. 

- 듣고 보기와 느끼고 맛보기와 냄새 맡기의 조화는 진정한 지적인 생명이다. 한 권능이 또 다른 권능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그 소리 안에서 서로 감싸 안는다. 그들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은 상호 깨어나 서로를 알아본다. 이 지식 안에서 영원한 지혜의 본질에 따라 형성된 참된 이해는 측량할 수 없는 무한심연으로, 그 현존은 만상에 널려 있다.

 

- 천사들은 주님의 영이 그분의 기쁨의 왕국에서 선율을 울리고 있는 신의 악기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이해의 영역 안에서의 불과 빛의 불꽃들인 천사들이다. 

- 우리는 신성한 천사들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환영에 불과한 육체적인 이성으로서, 이 세상의 영역을 초월한 별들 위에 거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로 천사들은 이 세계의 영역을 초월한 곳에 거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장소(영원한 세계에는 장소가 없지만)와 이 세상을 초월한 세계는 천사들에게는 모두 같은 것일 뿐이다. 

- 우리 인간들은 천사들이나 악마들을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주변과 우리 사이에 있다. 악마와 천사는 서로 가까이 거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다. 천국은 지옥 안에 있고, 지옥은 천국 안에 있다. 그러나 천국은 지옥에 현현하지 않는다. 악마가 천국에 들어가서 보고 싶어서 수만 마일을 찾아간다 해도 악마는 여전히 지옥에 머물러 있게 되고 천국을 볼 수 없다. 
  

 - 악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기쁨은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기쁨이 나타난다면 악은 기쁨 안에 영원한 말씀으로 존재하고, 말씀이 끝나면 자연과 더불어 악은 스스로 창조물 속으로 들어간다. 올바로 보고 이해한다면 누구든지 더 이상 어떤 것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는 신 안에서 살며 초월적으로 존재하여 신을 더 철저히 알게 될 것이고, 신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낮은 곳으로 찾아다닐 것이고, 신은 높은 곳에 홀로 계신다.
 

- 내 의지령은 이제 그리스도의 인간애 속에 있고, 그리스도의 영 안에 살고,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마른나무에 진액을 줄 것이다. 내 의지령은 그리스도의 숨결 안의 내 목소리로서 낙원에 새로이 찾아드는 봄인 그리스도의 목소리 안에서 신성한 호흡의 트럼펫 소리에 맞춰 일어날 것이다. 낙원은 내 안에 있다. 신이 모든 것을 소유하시더라도 그것은 신성한 세계의 존재자의 하나의 형상으로서 내게 드러날 것이다. 즉, 모든 색상과 권능과 주님의 영원한 지혜의 미덕은 주님의 형상 안에서처럼 내 안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나는 성스러운 영적 세상의 현현이 될 것이며, 주님이 내 목소리를 가지고 스스로 멜로디를 엮으시는 신의 성령의 도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분의 표출된 말씀과 목소리의 오르간이 될 것이다.  

 

- 인간이 스스로 낙담하여 공포에 빠짐으로써 영적인 일들에 대한 모든 슬픔과 고뇌와 공포가 혼(魂)으로부터 진행된다. 별들과 원소들로부터 나온 외적 세계의 영혼은 혼란스러워지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그 영혼은 스스로 존재하는 그 자신의 모태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련한 혼은 낯설고 부적절한 집인 이 세상의 영혼 속에 거주한다. 그곳에서 순결한 피조물은 모호하고 더럽혀져서 어두운 감옥인 그 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 그 혼은 신의 본질로부터 나온 마법적인 불의 근원인 첫 번째 존재 안에 있다. 그런 뒤 혼은 스스로 갈구하는 마법적인 영혼의 불이 되고, 그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영적인 미덕을 열망한다. 그리하여 그 혼의 생명의 불이 되고 혼의 근원인 갈망을 잠재운다. 

-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배고픈 혼은 탄생할 때부터 위대한 세계의 영혼과 그의 기질과 곧바로 연루된다. 심지어 이 세상 영혼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그 혼은 양육된다. 그 혼은 그 기질에 따라서 영적인 음식을 먹는다. 혼이 혼불을 켜는 것이다. 그 불의 연료는 그의 기질과 신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양육의 결과물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있는 무한한 다양성의 원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혼이 무엇을 먹든지 그에 따라 그곳에는 그 혼의 생명이 인도되고 지배되는 생명의 불꽃이 자라난다.

 

- 그 혼이 자신의 기질로부터 신의 사랑의 불꽃인 그리스도의 것인 천상의 실재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혼은 그리스도와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흐르는 그리스도의 권능의 불의 온유함을 먹을 수 있다. 

- 이처럼 그 혼이 신의 의지를 취하면, 그 혼은 세상의 육신의 본능적인 성향과 영혼에 따라 육신이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그 육신이 하도록 만든다. 그런 혼 안에서 그 기질은 지배되지 못한다. 혼은 외적 육신의 진동을 품는다. 그런 인간은 지속적으로 신을 갈망한다.

 

- 종종 그의 혼은 신성한 사랑의 본질을 먹고, 그 혼은 그에게 고양된 승리를 불러오며 신의 기호가 그 기질 자체가 된다. 그럼으로써 모든 육신이 영향을 받아 그것이 낙원의 경계인 것처럼 기쁨에 떨면서 신성한 감각의 수위로 들어 올려진다. 

- 이 황홀경의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의 육체적 상상력으로 명상하기 시작하는 명경대를 만드는 혼은 곧 이 세상의 영혼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본능에 뒤덮인다. 그리하여 그 혼은 지혜의 성모가 회개하고 처음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성령으로부터 나와 종종 세상의 더러움에 더럽혀지고 만다. 만일 혼이 진실하게 회개한 뒤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스스로 정화되어 새로이 거듭나면, 새로 태어난 아기로 신의 온유함의 사랑의 불과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 혼의 생명은 신 안에서 회복된다.

- 정신이 일단 깨달음에 이르면, 악마의 의지와 제안들을 지니고 있을 어떤 기질도 그 정신에게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우울함 속에서 유혹자가 단호하고 세차게 그의 요새를 폭풍우로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보다 더 명확히 깨닫게 될 것이다.

- 그 혼 스스로 절망하지 않는 한, 그 의미가 스스로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는 한, 그 악마는 감히 영적으로나 진실로 그 혼을 사로잡거나 건드리지 못한다

 

- 악마는 감히 사람을 파괴할 수 없다.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혼은 자유를 지닌다. 그가 악마를 거부하고 그 악마가 상담한 대로 하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죄악에 빠진 육신조차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 

 

- 그 근원에 의해서 그 안에서 그대는 신성한 지혜와 선과 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대는 기적의 신의 업적을 사랑한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그대의 형제를 사랑한다. 그대 자신의 미움 안에서 오직 그대가 미워하는 이유 때문에 악은 그대에게 달라붙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그리 될 것이며, 사랑 안에는 이기심이란 없다. 사랑과 이기심은 서로가 상반된 것이다. 사랑은 신성한 사랑으로(그 안에서 우리는 이제 대화를 나눈다) 모든 악의 이기심을 미워한다. 이 둘이 한 사람 안에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연의 필요에 의해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배척한다. 

 

- 지고한 사랑은 신처럼 드높다. 지고한 사랑은 그대를 신 자신만큼이나 지고하게 만든다. 그 사랑의 위대함은 신만큼 위대하다. 사랑 안의 가슴의 영역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은 신의 모든 창조와 같이 드넓게 영혼을 확대시킨다. 이것은 그 사랑의 왕관이 그대 가슴에 박힐 때 모든 언어의 범주를 초월하여 그대에 의해 경험되어진다. 사랑의 힘은 천국을 지지하고 지상을 지탱한다. 사랑의 미덕은 모든 원리 중의 원리가 되고, 모든 미덕 중의 미덕이 된다. 사랑은 모든 만상의 일꾼으로 자연과 초자연의 모든 힘을 통해 생동력 있는 에너지가 된다. 사랑은 모든 힘 중의 힘으로, 그 어느 것도 사랑의 전능함을 부리거나 저지할 수 없고 그 관통하는 힘을 막을 수 없다. 그대가 그 사랑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만상이 생성되고 만상이 영위해 나가는 터전인 샘터로 들어가서 그대는 신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왕이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침묵하라.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으나 지혜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될 보석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에 집중하라. 사랑의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자녀들에게는 지혜이다. 세상의 경멸을 받는 지혜가 신의 자녀들에게는 가장 고귀한 보물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혀로도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이것은 불타오르며 만상에 군림하는 사랑의 신이다. 사랑은 햇빛보다 더 밝다. 사랑은 달콤한 것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강한 것 중에서 가장 강하다. 사랑은 어떤 음식보다 자양분이 넘쳐나고, 어떤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며,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 더 즐겁다. 이 사랑을 얻는 이는 누구든지 지상의 어떤 왕보다 더 풍요로울 것이며, 어떤 황제보다 더 고귀하고, 세상의 모든 힘과 권능보다 더 강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야코프 뵈메의 고백(양장본 HardCover)
『야코프 뵈메의 고백-신과 악마의 투쟁』은 20세기 초의 신비주의 기독교 작가인 이블린 언더힐의 머리말이 첨부된 <야코프 뵈메의 고백서>의 총 17장을 간략히 살펴본 책이다. 이 책에서 뵈메는 신비주의 시인이며 기독교 영지주의의 신성한 여성 원리인 소피아를 위한 찬미시와 예언시를 남긴 예이츠와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저자
야코프 뵈메
출판
누멘
출판일
200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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