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일루젼 2023. 2. 1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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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류진
출판 : 창비 
출간 : 2019.10.25 


       

생애 첫 교통사고를 겪어보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부상자가 있었던 사고라 모쪼록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로 출근해서 정상 근무를 하면서 생각했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에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나를 계속해서 일터로 보내는 것은 누구인가? 먹고사는 일의 지난함과 신성한 노동의 보람과 기쁨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것들은 정말, 나의 마음가짐에만 달린 문제인가?

 

등등의 잡생각이 들어 조금 심란했다. 사고의 순간은 놀랍거나 무서웠다기보다는, 그저 현실감이 없었다. 실제로 경험한 순간이 아니라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기분과 느낌을 과거에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해리의 순간을. 

 

직전에 읽었던 <영혼을 위한 7단계 치유의 힘>에서 영혼이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 부족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거의 쉬는 날이 없던 2월의 스케줄 중 일부를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다. 일이 생겨도 휴가를 쓸 수 없으니 직접 대체근무자를 구하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내가, 근무를 마칠 때쯤이 되어서야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근무를 빼고 좀 쉬어야겠다고 말하니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현실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결심한 건 맞지만, 이렇게 바로 다사다난이 시작될 줄은 몰랐다. 뭔가 집중할 거리가 필요해 롤챔스 스프링을 봤다. 젠지가 무난하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2세트 광동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책을 읽었다. 

 

어떤 책은 내용 그 자체보다는, 그 책을 읽게된 시기와 상황에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내게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 회사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기 전에 예상했던 어려움은 이런 거였다. '이걸 왜 나한테 줘?' 하는 눈빛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만 청첩장을 주기로 했고, 줄까 말까 싶으면 안 주는 쪽으로 하객 명단을 만들었다. '왜 나는 안 줘?' 때문에 곤란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이 언니랑 나랑 이렇게 친했나 싶어 대화창을 올려보니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무려 삼 년 전이었다. 삼 년 동안 아무 교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재와 내가 하객 명단을 만들 때 세운 기준은 '이 사람이 결혼한다면 내가 기꺼이 결혼식에 갈 것인가?'였고 그 기준에 빛나 언니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첩장을 줄지 말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 언니, 안 그래도 이번 주 금요일에 동기들 몇몇 모여서 술 마시기로 했어요. 그때 나눠줄 테니까 와요.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도 볼 겸.

속뜻은, 너랑 나랑은 단둘이 볼 사이는 아니고 동기 그룹으로 묶어서 퉁 치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동기 모임에도 부를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다 이야기가 나오게 됐으니 오라고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눈치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금요일? 내가 금요일엔 선약이 있는데.
 

- 이토록 정신없는 사 개월을 보낸 끝에 가장 정신없는 청첩장 배포 단계에 와 있었다. 매일 점심 저녁으로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밥을 사야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남은 세부사항들, 이를테면 축가 MR 음원이라든지 답례떡 픽업 시간 같은 것들을 계속 체크해야 했다. 언니는 결혼식 일주일 전의 예비부부가 얼마나 경황없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말로 축하해 주고 눈치껏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고 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빛나 언니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 그 '사우 여러분'에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감으로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여기서 얼마나 버티면 사내 이동이 가능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 져서 회신 버튼을 눌렀다. 우선 '질문이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 뒤에 어떤 식으로 작성해야 정중하면서도 주제넘어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요란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동요가 파도처럼 일었다. 마치 도서관에서 갑작스레 정전이 되었을 때 같은 분위기였다. 백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층 전체가 낮은 수군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중간 "어떡해" 하는 탄식도 들려왔다. 

 

- 언니가 보낸 메일의 내용은 "넵! 알겠습니다! 그런데 신입도 지원이 되나요?"였고 놀랍게도 그게 전사원의 메일함에 일제히 도착해 있었다. 공지 메일의 발신자 아이디는 everyone이었다. 그게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사원에게 보내는 전체 메일용 계정이라는 건,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수신자의 아이디가 everyone인 메일 작성 창이 여전히 열려 있었고 내가 적은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글자 뒤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하얀 바탕 위에 커서가 점멸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회사 전체를 휩쓸고 있는 이 수군거림의 주인공이 빛나 언니가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아찔했다. 나는 두 칸 정도 떨어진 빛나 언니의 자리를 건너다봤다. 언니는 자리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고 있다 해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 나 언니가 말한 선물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아무것도 안 받고, 나도 언니 결혼식에 안 가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언니는 자기 결혼식에 나를 초대할 생각인 것 같았다. 아마 그러려고 선물을 주겠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갖고 싶은 선물'이라. 너무 막연한 단어였다. 얼마짜리를 골라야 하나. 언니랑 내 사이는 축의금 오만 원 정도의 사이였다. 딱 기본 금액.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오만 원 선에서 살 만한 게 있나 둘러봤다.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오긴 했다. 칠만 원짜리 무드등을 사달라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사만 원짜리 토스터를 받자니 왠지 억울했다. 한참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문득, 이걸 왜 내가 검색하고 있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아가 치밀었다. 돈으로 주기 싫으면 주지를 말든가, 굳이 선물을 하고 싶으면 자기가 센스 있게 오만 원 한도 내에서 적절한 선물을 알아서 골라 오든가. 고민해서 적당한 걸 고르는 것도 일인데 그걸 왜 나한테 외주를 주고 있지? 나는 홧김에 쇼핑몰 창을 다 닫아버렸다. 

 

-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사람들과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남자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 있으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해 보일지, 한 번쯤 생각을 해볼 텐데. 나라면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라는 거, 최대한 떠올리지 못하게 할 텐데. 매일 오 분씩 지각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오 분 동안일을 더 하거나 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그냥 오분 일찍 일어날 텐데. 나라면 머리를 좀 짧게 자를 텐데. 

 

-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 원을 내면 만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 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 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 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구재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 그래서 쟤가 화가 났구나, 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결혼 준비하는 내내 지겹게 봐온 눈빛이었다.  

 

- 잘 살겠습니다

 

- "그래서 내가 자신 있게 얘기했죠. 네, 이 카드를 쓰면 포인트를 두배로 적립해 줍니다. 그랬더니 회장이 이러더라고." 
"뭐라고요?"
"그래? 그게 그렇게 강력한 유인이 되나? 사람들이 포인트를 그렇게 좋아하나?" 
"다들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죠. 그래서 또 자신 있게 대답했지. 네, 좋아합니다!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글쎄요."
"그렇게 좋은 거면 앞으로 일 년 동안 이 차장은 월급, 포인트로 받게."

 

- 거북이알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에피소드는 사내에서 반년 정도 회자될 작은 규모의 사건이라는 거였다. 일 년짜리, 오 년짜리, 십 년 내내 구전되는 더한 사건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 "원래 내가 받았어야 하는 건 포인트가 아니라 돈인데... 사실 돈이 뭐 별건가요? 돈도 결국 이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죠." 
"어떻게요?" 
"포인트를 다시 돈으로 바꾸면 되는 거잖아."

 

- "우리 회사는 소규모잖아요. 그래서 개발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랑도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하거든요. 열명도 안 되는데 트러블이 생기면 여기는 피할 수도 없는 곳이잖아. 매일 봐야 하니까. 그래서 어떤 소셜함, 이런 것도 중요하거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릴 수 있겠어요?" 
그때 케빈은 카이스트 레고 동호회에서 삼 년 동안 총무일을 했던 경험을 예로 들며 자신의 사회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나는 대표 옆에 투명인간처럼 앉아 있다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카이스트, 레고, 총무. 그 어느 하나도 사교적으로 들리지 않는데. 총무가 아니라 회장이라면 또 몰라. 내성적인 개발자는 대화할 때 자기 신발을 보고 외향적인 개발자는 상대방의 신발을 본다더니. 이 세계에서 레고 동호회란 대체 뭐란 말인가. 크레이지 파티광쯤 되는 건가. 

 

- 케빈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내 손에 들린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 다스베이더 트랜스포메이션을 보고 한번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레고박스를 내밀면서 말했다. 
"미리 생일선물이에요."
머리로는 이걸 받아도 되나,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손은 레고 박스로 향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에 오류가 생긴 로봇 같았다.

"혹시, 이미 가지고 있는 건 아니죠?"
"아뇨, 없는 거예요. 안 그래도 사려던 건데..." 
배와 양손 사이에 박스를 끼워 넣고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케빈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 "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케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건 아니니까."
케빈의 시선이 내 운동화 쪽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화단에서 풀쩍 내려와 바닥에 두었던 쇼핑백에서 캡슐커피머신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거 탕비실에 놔둘게요. 같이 마셔요. 캡슐은 대식이한테 사달라고 하려고요."

 

- 일의 기쁨과 슬픔

 

- 지훈 씨는 왜 어디 안 가요. 

나는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입력했다가 백스페이스를 재빨리 눌러 그 말을 지우고 이렇게 다시 썼다.

후쿠오카 티켓이나 알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거기 가면 가이드도 해주고 밥도 사준다는 사람이 있긴 한데.

지유 씨는 메신저로 한참을 크크크, 하고 웃었다. 실제 웃음소리와도 비슷했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동그란 이마에서 이어지는 콧등, 웃을 때 그곳에 주름을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연이어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지유 씨를 웃게 만들었다. 동시에 노트북으로는 후쿠오카행 티켓을 검색했다. 마침 다음 날 오후 두 시 출발인 비행기가 있었고, 어쩐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결제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결제 완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잠깐 주저하긴 했는데, 전 여자친구 중 한 명이 그 항공사의 국제선 승무원이어서 그랬다. 망설임은 사소했고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했다. 어차피 일본까지는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혹시 만나더라도 껄끄러운 건 금방 지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기준으로 항공사를 하나씩 제외하고 나면 탈 수 있는 비행기의 종류가 얼마 남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출발시각과 도착시각이 찍힌 항공권 결제 완료 화면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지유 씨에게 바로 전송했다.

 

- 지난달에 내가 뭘 썼더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읽는 사람이 존재했어?

"그 영화를 정말 그렇게 보신 거예요? 따지고 싶은 게 있어서 벼르고 있었거든요."
"혹시 어떤 부분이..."
"마지막 문단이요.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보편적인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라고 쓰신 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지유 씨는 백분토론에 출연한 시민 대표처럼 말했다.
"하하, 그러셨구나. 제 해석도 존중해 주세요."

- 지유 씨의 요청으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사내 까페에서 잠시 토론했다. 사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오가는 대화 속에 놓인 공기의 흐름이랄지, 기운이랄지, 그런 것들만큼은 언제든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지적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었고 그건 분명 화학적 교감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긴 대화 끝에 내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라고 했다. 나는 어깨 위로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인정."

그리고 대화 중에 캐치해 낸 정보를 활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동갑인 것 같은데, 친구 할까요? 회사 친구."

 

- 나는 내가 무언가 기대하면서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하면 아이는 절대 낳지 말고 시바견을 키우래요." 
"어쨌든 일단 결혼을 하라는 거네."
"가만 보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아요."
"맞아요."

 

- "마음 자체가 중요한 거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유 씨는 또다시 백분토론 패널처럼 말했다.
"그 마음이, 저도 반 정도는 있었던 거니까. 그리고 그게 우리 모두에게 동시에 있는 상태로 잠시 스쳤던 순간이 있었던 거니까.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요. 지훈 씨가 자존심 상해할 일도 아니고."

 

-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뭐야.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만 수화기에 남아 울렸다.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어떻게, 계속하시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외투 자락을 내려다보고 단추를 잠그면서 무심히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누가 봐도 완벽하게 일을 해낸 사람의 은근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 도움의 손길


- 온라인상에 글을 쓸 수 있는 곳은 넘쳐났다. 입력창이 뚫려있는 곳이면 어디든 누구든 배설하듯 글을 토해낼 수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가 들어갈 수 있는 구멍, 그곳에 되는대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면 그대로 활자가 단어가 문장이 되었고 일초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며 노출되었다. 스스로 혹은 누군가 치우기 전까지 그 글은 어떤 형태든 어떤 내용이든 서버 어딘가에 화석처럼 박혀 썩지 않고 고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여자는 그것들을 억지로 캐내고 남김없이 치워버려야 했다. 

 

- 개발자들도 최선을 다해 스팸 방지 로직을 만들었고, 스패머도 최선을 다해 글을 올렸고, 여자도 최선을 다해 글을 지웠고, 업주들도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쪽과 저쪽이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 애써 모른 척 구겨 넣었던 기억이 다시 빳빳하게 펼쳐졌다. 깜깜하던 방 안에 조명을 탁, 하고 켠 것처럼 이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 새벽의 방문자들

 

- 육 년 전 여름, 나는 핀란드의 탐페레라는 작은 도시를 경유했었다. 목적지는 아일랜드 더블린이었는데, 가장 싼 항공편을 찾다 보니 핀란드를 거쳐야 했던 것이다. 경유지인 탐페레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통유리창 밖이 대낮처럼 환했다. 처음으로 경험한 백야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먼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 젊은 시절에는 사진기자로 일했고 은퇴 후에는 사진작가로 활동했다는 것. 이년 전, 지병으로 쓰러진 뒤로 시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것. 더는 예전처럼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점은 슬프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오늘도 이렇게 친절한 숙녀분이 저를 도와-주고 있-죠."

 

- 그의 영어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이나 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다시 한번 말해주겠느냐고 되물어야 했는데, 노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역시 그랬다.  

 

- 공항 주변은 줄기가 새하얀 자작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온통 푸르기만 했던 땅이 착륙하면서 하얗게 변하던 순간을, 마치 벨벳의 결을 다르게 넘기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나는 나무 아래 벤치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 노인이 메고 있던 배낭에서 종이봉투를 꺼냈고 그 안에서 납작한 호밀빵을 집어 들고 내게 내밀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주는 걸 덥석 받아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잠시, 고소한 냄새가 허기를 돋웠고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마지막으로 기내식을 먹은 지도 반나절이 훌쩍 넘어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나는 빵을 받아 한 입 베어 물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쫀득한 속에 알갱이가 씹혔는데 그건 분명히 쌀이었다. 빵 안에 밥이라니. 그런데 이렇게 맛있다니. 처음에 노인이 같이 대기 시간을 보내자고 했을 때 살짝 귀찮다는 생각을 한 것이 미안해졌다. 노인은 말하는 것보다 더 느린 속도로 빵을 씹고 있었다. 

 

- 동창회 사이사이에 늘 부고 소식이 있고, 바로 그 이유로 참석 인원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껄껄 웃었다. 이번에는 노인이 내게 물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고 싶다고 했다. 노인은 어쩐지 크게 기뻐했다. 자기도 시력을 잃기 전에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 다큐에 빠지고 나서부터는 또래 친구들이 전부 덜떨어진 아이들 같아 보였다.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란이 의사에서 변호사로, 변호사에서 다시 건축가로 들쭉날쭉 매년 바뀌는 애들이 유치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휴, 쟤네는 '지구대기행'을 보기나 했을까. 만물의 인생의 진리를 알까 나 자신이 학교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져 우쭐했고, 동시에 따분했다. 

-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때만큼은 틀린 영어 문법을 쓰고 싶지 않아 오래오래 문장을 머리에서 굴리다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해 왔다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 "사랑에 빠졌-군요."

"네, 사랑, 아마도요."

노인은 나중에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면 꼭 핀란드에 다시 와서 오로라를 찍으라고 말하면서 다짐받듯 덧붙였다. 반드시 겨울에 와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처럼 밝은 백야에는 오로라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추운 겨울이 돌아올 때,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여있을 때, 꼭 이곳에 다시 들러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오로라를 떠올렸다. 발밑 아득히 자리한 별에서 이곳을 향해 쏘아 올린 듯한 빛의 기둥. 정지해 있는 듯하다 어느샌가 저 멀리 헤엄쳐 가는 색색의 빛줄기들. 
 

- 결국, 나는 학기 내내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막차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저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앉으려는데, 창틀에 붙여둔 오로라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답장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어영부영하다 보니 노인이 편지를 보낸 지도 벌써 반년이나 지나 있었다. 핀란드의 날씨는 추워졌겠지. 대낮처럼 밝기만 했던 날들도 다 지나가고 이제 온종일 어둡기만 하겠지. 그곳엔 오로라가 있을까. 노인은 내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까. 

 

- 편지 생각만 하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했다. 다음 날 치를 시험은 성적의 칠십 퍼센트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이 과목은 반드시 A를 받아야 평균 학점의 소수점 앞자리가 바뀐다. 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집중해야 해. 나는 빠른 속도로 엽서를 떼어냈다. 엽서의 뒷부분이 죽, 찢어졌다. 동그랗게 말아놨던 테이프가 창틀에 그대로 붙어 있었고 그 위에 하얗고 얇은 종이의 흔적이 남았다. 나는 편지 봉투를 꺼내 오로라 엽서를 다시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 그래, 사실 내가 답장을 해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잖아. 받은 거 자체로 의미가 있고, 또 노인은 벌써 나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늦은 거 좀 더 한가해지면 답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편지에 대해서는 되도록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천천히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통장과 여권을 들어내고 그 아래 깔렸던 노트 두 권과 책 한 권을 또다시 들어냈다. 그리고 맨 아래, 핀란드 노인이 보냈던 편지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 탐페레 공항 


 


 

- 장류진의 소설은 말한다.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 원을 내면 만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잘 살겠습니다> 28면)

 

이 세계는 정확히 움직인다. 주는 만큼 돌려받는 곳. 딱 한 만큼 대가를 치르는 곳.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에누리 없이 계산되는 곳. 합리적인 인간을 상정하고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삼아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장류진의 소설에 기본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세계다. 이 철저한 시스템 안에서 생존해야 하는 개인은 일, 사랑, 돈, 취미, 인간관계, 젠더 폭력을 고민하면서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이를테면 성차별적인 회사 구조에서 입사 동기와 결혼한 여성 직장인(<잘 살겠습니다>), 스타트업 회사에 다니며 '워라밸'을 찾는 '사실상의' 막내 사원(<일의 기쁨과 슬픔>), 백화점 매니저로 일하며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무자녀 기혼 여성(<도움의 손길>)이 그런 이들이다. 이 작고 평범한 개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복잡한 그물망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물음에서 장류진의 첫 번째 소설집이 시작된다. 

 

-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 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 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감정에 침잠해 있기보다는 가볍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 개인들은 특별하게 빼어나지도 눈에 띄게 뒤처지지도 않는다. 이들은 대단한 환상을 품게 하는 커리어 우먼이나 거대한 구조와 싸우는 정의로운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명민하게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이 시대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  

 

- 인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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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많아서 다 먹을 수 있으려나 몰라." 
그러더니 날 한번 바라보고 무구하게 웃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언니랑 마주 앉아 있을 때면 곧잘 느끼게 되는 감정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갑갑증이 나기 시작했다.  

 

- 빛나 언니는 뭐랄까, 전혀 언니 같지 않았다. 키도 늘씬하게 크고 눈도 크고 입도 큰 화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묘하게 애 같은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직장 생활에 어울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리고 저 길고 긴 머리. 어떻게 좀 안 될까? 일반적인 긴 머리가 아니라 거의 엉덩이까지 올 정도로 기이하게 긴 머리였다. 보고 있으면 머리가 저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사람들은 빛나 언니를 '총무과 라푼젤'로 불렀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고데기로 머리를 펴고 출근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새우튀김을 입에 문 언니의 입술에, 머리카락에, 윤기가 자르르르... 나는 빨리 식사 자리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 키보드 밑에 깔려 있던 흰 봉투를 발견한 건 빛나 언니와 한정식을 먹고 두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책상을 닦으려고 키보드를 들지 않았으면 아마 계속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봉투를 열자 "우리 결혼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카드가 나왔다. 빛나 언니의 청첩장이었다. 이게 뭐야, 밥도 안 사고 그냥 이렇게 던져놓고 간 거야? 청첩장이 무슨 피자집 전단이야? 나는 원래 빛나 언니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축의금도 오만 원 정도 낼 생각이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정식으로 시간 내서 청첩장을 준다면 분명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쯤 되자 더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라면, 나라면 정말 이렇게는 안 해. 손에 쥐고 있던 텀블러의 뚜껑을 열어 청첩장 위에 세차게 내려놨다. 뚜껑에 묻어 있던 커피가 새하얀 청첩장 위에 동그란 형태로 번졌다. 나는 텀블러에 남은 아이스커피를 얼음째 씹어 마셨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 구재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응, 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냥 내가 내줄게." 
나는 구재를 가만 쳐다봤다.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모르고 있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도 자신의 연봉을 누설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모아둔 재산과 연봉을 공개해야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족오락관 찍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 셋, 하던 그 순간 나는 구재와 내가 외치는 숫자의 앞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만 원. 정확히 천삼십만 원 차이였다. 나보다 세전 기준 천삼십만 원을 더 받는 구재는 당연히, 모아놓은 돈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구재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자 자기도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이년 동안 백오피스에 있어서 그랬나 봐."

 

- 그래, 그게 맞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왜 이년 동안 거기에 있었을까. 이력서에 빼곡했던 내 모든 경력이 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못해서 그랬나. 그런데 시켜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까. 무엇보다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연봉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야 할까. 구재가 일을 잘해서?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딱 천삼십만 원어치만큼?  

 

- 잘 살겠습니다

 

 

- 자기가 잘못 고쳐놓고 맨날 나보고 확인하란다. 천재 개발자 맞나? 일단 속는 셈 치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케빈이 의자를 다시 책상 방향으로 돌리며 또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루보프 스미르노바가 연주하는 <환상소품집, Op.3-멜로디>를 들었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분노가 서서히 사그라들고 갑자기 긍정적인 마음이 되었다. 내일은 글렌 굴드, 모레는 조성진을 들을 것이다. 나는 우동마켓에 들어가 거북이알이 팔고 있는 캡슐커피머신 판매 글에 문의 댓글을 남겼다. 

 

- 일의 기쁨과 슬픔

 

-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그간의 불운을 이제야 보상받는 건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우선 료칸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본 영화에서나 보던 다다미방이었고, 작지만 아늑한 분위기였다. 방 한편에 있는 옷장 안에는 지유 씨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무늬의 유카타 한벌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갑자기 꽃무늬로 갈아입어야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시키는 대로 갈아입고 옆방으로 갔다. 반쯤 열려 있는 문에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좌식 테이블에 두 사람분의 밥상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각자의 나베가 작은 화로 위에서 끓고 있었고 대충 둘러봐도 스무 가지가 넘는 음식들이 빼곡했다. 

 

-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못 먹을 뻔했어요. 지금이 마지막 타임이라."

그녀가 서리가 하얗게 낀 잔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방에서 이렇게 먹는 줄은 몰랐어요."

내가 말했다.
"지훈 씨, 진짜 일본 처음 와봤구나." 

그녀가 웃었다.

 

- 지유 씨와 밥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모든 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눈앞에 유카타를 입은 그녀. 그리고 그녀와 나누는 대화. 맞아, 나는 이 대화를 늘 그리워했었다. 예뻐서 지유 씨를 좋아한 게 아니었지만 지유 씨는 결과적으로 예뻤다. 사실 예쁜 여자는 많다. 어디에나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여태껏 만났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지유씨는 사실 눈에 띄는 축도 아니었다. 경험적으로 예쁜 여자는 지루했다. 하지만 지유 씨와는 그렇게 오래 알아왔는데도 단 한순간도 무료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말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그 어떤 관계에서도 감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지유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녀가 내뱉는 말의 호흡과 나의 호흡이 잘 어우러져 특유의 리듬감 같은 게 생겼다. 우리는 존대와 반말 유쾌와 재치, 다정함과 짓궂음을 카드 패처럼 번갈아 내놓으며 놀았다. 그녀는 잘 웃었고 또 잘 놀렸다. 공수에 모두 강했다.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 여러모로 한결 편해졌고, 이제야 비로소 혼탕을 문제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 역시, 하고 나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온천에 왔을 뿐이다. 침착하자. 지유 씨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나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재빨리 빼고 물속으로 들어가 탕의 오른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 "그냥, 한국에는 계속 있기 싫더라고요. 누구랑 사냐, 남자는 있냐, 결혼은 했냐. 그런 거 일본 사람들은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아서 편해요.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 도쿄에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생활방식이 익숙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과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혼욕하는 거 알아요? 난 그래서 혼욕이 자연스럽거든요. 친구들 초대하면 온천은 꼭 데려오는데, 혼탕은 다들 어색해하더라고요. 독일에서는 사우나도 다 같이 들어갔는데. 어릴 때는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어요."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스스로 매니저의 지위를 부여한 유미는 아직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는데도 작은 클럽의 섭외전화는 자기가 받아서 거절했고, 큰 클럽이더라도 주말이 아닌 평일 공연은 가지 말자고 했다. 유미는 이제 장우가 유스케에 나가고 국제적인 록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서는 일만 남았다며 장우가 이미 록스타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장우는 유미를 만났던 평일의 클럽 공연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공연장이 미어터질 듯 꽉 찬 관객들을 보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자신이 서고 싶은 위치에 각자 띄엄띄엄 서 있는 관객들을 보며 공연하는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장우가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이 더 높은 밀도로 한 사람에게 가닿는 모습.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관객이 고개, 어깨,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이 무대에서 온전히 다 보이는 것도 좋았다. 유미가 최후의 관객이었던 그날도, 공연 내내 발목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는 모습을 지켜봤다. 장우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유미의 발목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 장우는 돈사장의 제의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냉장고송은 장난처럼 만든 곡이었다. 그런 멜로디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고, 어디에나 있었다. 코드 진행도 사실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팝송의 일부를 그대로 갖다 쓴 것이었다. 단지 우스꽝스러운 가사와 허접스러운 유튜브 영상 때문에 유명해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장우는 아직도 음악을 앨범 단위로만 듣는 사람이었다. 장우에게 앨범은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생명력을 지니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심지어 장우의 가방에는 아직도 씨디 플레이어가 들어 있었다. 물론 휴대폰으로 듣는 일이 더 많았지만 그럴 때에도 장우는 무조건 앨범 전체를 다운 받아 들었다. 그게 음악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디지털싱글은 책을 원하는 장만 찢어서 가지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겨졌다. 장우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저는,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아무래도 음악을 딱 한곡만, 그것도 음원이나 스트리밍으로만 듣는다는 게 아직까진 영 납득이 안 가서."
그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냉장고송은 음원으로 내놓을 만한 곡도 아니고요. 그냥 웃자고 만든 거예요."
돈사장은 예상 밖이라는 듯 난감해했다.
 

-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자세를 낮추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씨디가 꼭 있어야겠다면, 찍어줄게. 많이 안 찍으면 되니까." 
그거야 한 백장 찍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대신 냉장고송 한곡만 들어 있는 씨디가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누가 노래를 앨범 단위로 듣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요즘은 뭐든지 유행이 금방금방 지나간다고, 지금이야 냉장고송이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지만, 곧 잊힐 거라고 했다. 묻히기 전에 바짝 당겨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 "아직 눈 뜨고 있는데요." 
수의사가 보리의 사체를 수습하며 말했다.
"원래 죽을 때 눈을 감고 죽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많이들 놀라세요." 
그리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원하시면 꿰매드려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장우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네, 해주세요."
의사가 건조하게 말했다.
"비용은 삼만 원입니다."
장우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삼만 원이 든 흰 봉투를 꺼냈다. 수의사가 능숙한 솜씨로 보리의 눈꺼풀을 꿰맸다. 의사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바늘땀이 찍혔다. 보리의 눈이 감겼다. 보리는 그제야 편안해 보였다. 

 

- 다소 낮음

 

-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어 책장 위를 집게손가락으로 훔쳤다.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서랍장 손잡이 위를 훑었다. 역시 깨끗했다. 여기는 웬만큼 꼼꼼하지 않고서야 챙기기 쉽지 않은데. 서재를 나와 아직 옷방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욕조와 세면대의 수도꼭지가 새것처럼 반짝였다. 나는 허리를 굽혀 욕조 바닥에 손가락을 대고 힘주어 문질렀다. 뽀득, 소리가 났다. 아, 이번에는 진짜 마음에 들어 지난 한 달간의 고민이 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옷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나가 현관 앞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척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 가사도우미를 불러볼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건 이 집에 이사 온 뒤부터였다. 우리 부부가 이사 온 네 번째 집이자, 결혼 칠 년 만에 우리 명의로 마련한 첫 번째 집이었다. 그동안 남편은 정유사에서, 나는 백화점에서 때마다 착실히 승진했다. 매니저 직급에도 남들보다 빨리 올랐고, 해마다 높은 액수의 인센티브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신도시의 스물여덟 평짜리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었다. 지은 지 오 년밖에 되지 않아 비교적 깨끗한 아파트였지만 우리 부부의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를 다시 했다. 전셋집에서는 아무리 취향껏 살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베란다에 조립식 타일을 깔거나 시트지로 싱크대를 리폼하거나 하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바닥은 예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헤링본 스타일로 결정했다. 디자이너가 작은 평수에는 헤링본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그걸 고집했다. 대신 벽지와 몰딩의 색을 화이트로 해서 집을 넓어 보이게 했고 가구는 아이보리와 그레이만으로 구성해 통일감을 주었다. 타일 하나조차도 모양, 색깔, 크기와 질감 모두 내가 원하는 대로 골랐다. 백화점에서 리빙 제품 바이어로 일하면서 내 눈은 이미 잔뜩 높아져 있었다. 나는 무엇이 '진짜'인지를 알았다. 새집에 놓여 있는 물건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인 게 없었다. 침실 조명은 며칠씩 해외 사이트를 뒤져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설치했다.

 

- 이사 오고 나서는 한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집도 내 것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고른 내 것인데, 그런 집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이상한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잠들었다가도 쉽게 깼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일어나 침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 처음 와보는 것처럼, 손님의 시선으로 집을 둘러봤다. 무광의 골드로 포인트를 준 방문 손잡이와 날렵한 곡선의 싱크대 수전을 매만졌고, 세 겹의 셰이드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퍼져 나오는 루이스폴센의 펜던트 조명을 껐다 켰다 해봤다. 내가 신경 쓰고 힘준 것들을 하나씩 짚어본 다음에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도움의 손길 

 
- 렌즈를 사이에 두고 다가오던 그의 새까만 눈동자, 당신의 내부를 다 들여다보겠노라는 의지 같은 게 서려 있던 그 눈빛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여자는 방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침대에 모로 누워 현관문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다시 벌떡 일어나 먹다 남은 요구르트 뚜껑에 붙어 있던 동그란 스티커를 떼어 렌즈 위에 붙여버렸다. 

 

- 새벽의 방문자들 

 

- 납작한 종이 포장 위에 고딕체의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로 만든 핀란드산 자일리톨, 자작나무, 핀란드, 자일리톨. 거기 적혀 있는 단어들 때문인지,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서늘한 바람이 묻은 편지를 받은 것만 같았다. 열어보니 둥글넓적한 껌 여덟 개가 투명한 캡슐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중 하나를 눌러 은박포장지를 벗겼다. 껌을 입에 넣자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퍼졌고 귀밑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본 적 없는 이국'이라는 말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핀란드에 가본 적이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본 적 없다.

 

-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삼 개월 동안 더블린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머물 계획이었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는 설렘과 동시에, 이제 준비해 온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도가 교차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글쎄, 돌이켜보면 초라했다. 그래도 명색이 다큐멘터리 피디 지망생인데, 외국 한번 나가본 적 없다는 사실이 졸업학기를 앞두고서야 큰 결격사유처럼 여겨진 탓이었다. 취업박람회에서 진로 상담원은 내게 '취업전선에 뛰어든다'는 말을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말 그대로 전쟁이라면서, 나는 아직 거기에 뛰어들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준비운동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피디는 경쟁률이 높은 직종인데 내 스펙, 학교, 학점, 모든 것이 다 평범하다고 했다. 영어 점수는 높은 편이지만 요즘 이 정도는 많이들 가지고 있어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서.  

 

- 탐페레 공항

 

 

      

 

 

 

 
일의 기쁨과 슬픔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이후 단숨에 수많은 독자와 문단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장류진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웹사이트에 공개된 직후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누적 조회수 40만 건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을 포함해 주로 이삼십 대 젊은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8편의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회사에서 운영 중인 중고 거래 어플에 글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거북이알’의 정체를 알고자 만남을 가진 ‘나’, 카드회사 공연기획팀 소속으로, 유명 뮤지션의 내한 공연을 성사시키고 특진을 약속받았으나 개인 SNS에 공연 소식을 가장 먼저 올리지 못해 토라진 회장의 심술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대신 받게 되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영리하게 활용해 나름대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거북이알’의 기막힌 사연을 담은 표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담백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소설이다. 결혼식을 3일 앞둔 날, 3년간 교류가 없었던 직장 동기 빛나 언니의 연락을 받고 청첩장 약속을 잡게 된 ‘나’의 이야기를 담은 《잘 살겠습니다》에서는 빛나 언니의 독특한 캐릭터가 흥미롭게 그려지는 한편 주인공이 그녀를 지켜보며 심경 변화를 겪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애써 마련한 집을 더 잘 관리하기 위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하면서 각자 자신이 노동자이되 고용관계, 계층, 세대, 종교 등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화자와 아주머니의 독특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묘한 서스펜스가 돋보이는 《도움의 손길》 등 기민한 시각으로 발견해낸 이 사회의 단면들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
장류진
출판
창비
출판일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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