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 없음의 과학 -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일루젼 2023. 2. 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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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리처드 도킨스 / 대니얼 데닛 / 샘 해리스 / 크리스토퍼 히친스 / 김명주 / 장대익

원제 : Four Horsemen
출판 : 김영사
출간 : 2019.11.08


즐겁게 읽었다. 초반부에 약간 감정적으로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문장들이 있었지만, 그 표현들은 목적이 약간의 조소이므로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함께 웃을 수 없어서 조금은 서글펐다)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쪽이다.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는 모습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다. 더욱이 불합리를 규정하고 배제하기 위해 자기 검열을 잊지 않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매우 우선 순위로 꼽는 덕목이기도 하다. 자신의 경험과 추론을 통해서 '참'으로 받아들여진 것만을 기반으로 삼겠다는 자세는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물질 요소의 집합을 하나의 정의 가능한 개체로 응집시키는 힘, 그 순간을 신이라고 칭하고 싶다. 무수히 흩어진 원소들을 '나'라는 개체의 DNA로 정렬시키고 그로부터 자기복제를 해나가게 만드는 힘. 같은 것끼리 모여들어 뭉치게 만드는 그 힘. 그러나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느냐거나 인격신의 존재를 확신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밝힐 것 같다.

 

(다만 창세기를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서 '우주의 탄생 순서'를 표현해낸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예수의 탄생이 아버지의 복제를 대리모를 통해 출산한 '처녀생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표현이 내재하고 있는 신비주의적 함의를 떠나서, 나는 이러한 상상들이 자유롭고 즐거운 편이다. 해서 한때는 나 또한 저자들과 함께 웃기도 했었음을 떠올릴 때,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오히려 과학자적인 입장에서, 특정 조건에서 재연이 가능한 가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참이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아직 조건과 변수를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뇌세포들을 흐르는 전하의 장난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렇다면 뭐가 어떻든 그것으로 끝이니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거기에는 좀 더 알고 싶다는, 나를 잡아끄는 힘이 존재한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고, 각자의 믿음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존재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어떻게 나는지와는 별개로, 저자들이 주장하는 '검증되지 않은 것을 덮어놓고 믿지 말라' '나의 오류를 상대에게서만 보지 말라' '더 나은 삶을 살라'는 메세지들은 누구에게나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메세지들이다. 길은 다양하나 도착할 지점은 동일하다. 

  

마침 이 책이 눈에 띄기도 했고, 다른 시각의 저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었다. 

즐거웠다.      

 


   

- 리처드 도킨스는 언젠가 "무신론자는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겨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꺼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치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꼭 그렇지 않다. 그동안 내가 만난 (자칭)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자인 나와의 만남을 즐겼고 힘을 얻어갔다. 나 또한 그랬다. 군중심리가 작동할 규모의 번잡함을 꺼리는 것일 뿐, 무신론자들도 함께 모여 서로를 토닥거려 주는 것을 즐긴다(물론 종교인들이 하는 정도의 빈도와 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함께 모인 무신론자들이 지구를 대표함직한 지성인들이라면 어떨까? 만일 도킨스, 데닛, 해리스, 히친스가 의기투합해서 뭉쳤다면?

 

-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지식인들이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되었는지부터 해명할 필요가 있다. 2001년 실시한 미국의 종교 정체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76.5%, 무종교라고 답한 사람은 13.2%, 유대교는 1.3%, 불가지론자는 0.5%, 무신론자는 0.4%였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합해도 1%가 넘지 않고, 그리스도교는 80% 정도나 되니 미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라 부르는 데 이이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2006년 9월의 갤럽조사 결과는 더욱 흥미롭다. 질문은 이랬다. "일반적으로 말해 당신은 미국인이 ___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항목에는 유대인, 아시아인, 여성, 흑인, 몰몬교인, 히스패닉, 무신론자, 동성애자가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을까? 1등부터 나열해 보면 여성(61%), 흑인(58%), 유대인(55%), 히스패닉(41%), 아시아인(33%), 몰몬교인(29%), 무신론자(14%), 동성애자(7%) 순이었다. 미국에서는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몰몬교인보다 낮고 동성애자보다는 조금 높다는 이야기인데, 다시 말하면 무신론자 대통령이 나올 가망성은 극히 적다는 뜻이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서라도 그리스도교인을 자처해야만 한다.     

- 장대익

 


 

-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과학으로 가보자.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답을 알면 안다고 말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데 쭈뼛거리지 않는다. 증거가 확실할 때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 물론 과학 철학자들은 사실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오류로 판명될 수 있으나 지금까지는 반증하려는 끈질긴 시도를 견뎌낸 가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고 동의하지만, 갈릴레오가 중얼거린 "지구는 돈다 eppur si muove"에 경의를 표하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지당한 말씀을 되새겨보자.

 

- 과학에서 '사실'은 '잠정적 승인을 보류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확인되었음'을 뜻한다.  

 

- 이것은 자만과 오만의 정반대이다.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양과 내용에 막대한 기여를 했으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것을 솔직히 말하는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와 달리 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이 지어낸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에 오만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고 있다. 

 

- 하지만 나는 무신론과 종교의 차이점 가운데 덜 명백한 점을 추가로 지적하고 싶다. 나는 무신론적 세계관이 지적 용기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 우리에게 난해한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의 이해가 영원히 미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질문들은 무엇일까? 19세기에 '복잡한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나 다양화했는가?'라는 의문이 첫 번째 난해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그 문제는 다윈과 그의 후계자들이 명확하게 해결했다. 나는 남아 있는 난해한 질문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뇌는 어떻게 주관적 의식을 만들까?" "물리법칙은 어디서 오는가?" "기본적인 물리상수는 어떻게 정해지고, 왜 그 상수가 우리를 탄생하도록 미세 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까?" "그리고 왜 아무것도 없는 대신 무언가가 존재할까?" 과학이 (아직)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학의 겸손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것이 종교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과학은 다음 세기에 이러한 난해한 문제들을 풀 수도 있고 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 -초인적 지능을 지닌 외계인의 과학도 포함해- 이 난해한 질문들에 답할 수 없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신학은 확실히 할 수 없다. 

 

- 조금 전에 나는 무신론적 세계관의 지적 용기에 대해 지적하겠다고 말했는데, 이제부터 그것을 '난해한 문제'와 연결해 말해보겠다. 왜 아무것도 없는 대신 뭔가가 존재할까? 우리의 물리학자 동료인 로렌스 크라우스는 자신의 저서 <무로부터의 우주>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가설을 제시했다. 양자 이론적 이유로 '무 Nothing(그는 일부러 대문자로 표기했다)'는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를 소멸시켜 무를 만들듯이 그 반대도 일어날 수 있다. 무작위 양자 요동으로 인해 물질과 반물질이 무에서 자연 발생하는 것이다. 크라우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무'의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말하는 '무'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극도로 단순한 상태이다. 우주 팽창이나 진화 같은 '기중기 crane' 설명(대니얼 데닛의 표현)의 토대가 될 수 있으려면 단순해야 하기 때문이다.

 

- 리처드 도킨스

 

- 도킨스 : 우리 모두가 맞닥뜨려온 것 중 하나가 바로 공격적이다, 오만하다, 신랄하다, 날카롭다는 비난입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닛 :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비난을 들을 때마다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쓸 때 합리적 종교인을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고, 신앙심이 깊은 학생들에게 초고를 시험 삼아 읽혀봤기 때문입니다. 사실, 첫 번째 초고를 보고는 괴로워하더군요. 그래서 여러 번 손봤는데, 결국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어요. 지금도 걸핏하면 무례하고 공격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니까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상황임을 깨달았습니다. 헛짓이에요. 종교는 우리가 무례하지 않고는 반대 의견을 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만 궁리하고 있어요.  
도킨스 : 무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죠.
데닛 :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상처받았다는 패를 내밉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죠. 무례할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도킨스 : 말을 하지 말 것인가.
데닛 : 이러한 비판을 입 밖에 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 것인가?
해리스 : 금기를 깬다는 건 그런 거죠. 현재 종교는 합리적 비판의 장에 공식적으로 올려서는 안 되는 주제가 되었어요. 심지어 세속주의자, 무신론자 동료들조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건 사람들을 미신에 맡기는 거죠. 설령 그러한 미신이 아주 나쁘고 해를 끼친다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히친스 : 만일 제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면 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말할 겁니다. 글쎄요, 나는 사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마땅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늘의 초자연적인 독재가 없다면 우리가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할 것이라는 종교적 명제를 들을 때마다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상합니다. 
해리스 : 하지만 정말 기분이 상하십니까? 그저 옳지 않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요?
히친스 : 그렇지 않아요, 샘, 저는 무례죄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언론의 중재가 있다면, 우리도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억압받는 소수임을 내세우지 않고 기분 나쁘다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맞받아치는 데는 정반대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한편 우리를 비난하는 것을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다는 대니얼의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모든 진지한 종교인의 핵심, 급소를 찌르기 때문이죠. 예컨대 우리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많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고 아마 상처도 받을 겁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죠.

도킨스 : 종교가 받는 상처의 양과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이 받는 상처의 양을 비교해 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예술적 취향 같은 것에 대해서요. 음악에 대한 취향, 미술에 대한 취향, 정치에 대한 취향에 대해서도 무례할 수 있습니다. 딱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무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측정해보고 싶어요. 그것에 대해 실제로 연구해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축구팀이나 좋아하는 음악, 또는 어떤 것에 대해 무례한 발언을 하면서 얼마나 무례해야 그들의 기분이 상하는지 시험해 보는 거죠. 당신의 얼굴은 정말 못생겼다고 말한다거나... (일동 웃음) 그 밖에 또 뭐가 있을까요?

- 히친스 : 종교적 상징이 짓밟히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의 미적 성취 중 적어도 일부에 대해서는 감탄하는 마음을 공유합니다. 
해리스 : 우리의 비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모두 : 맞습니다.
해리스 :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반증되거나 도전받을 때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물리학자들이 이 세계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시도할 때 이성적인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현실을 표상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신경질적이고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반응하며, 결국에는 위험한 반응을 보입니다.
데닛 : 사실 그런 이야기를 예의 바르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해리스 : "당신은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데닛 :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당신의 노력과 재물을 단지 신화에 불과한 것을 찬양하는 데 바쳤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좀 더 부드럽게 해볼까요? "이런 일에 인생을 낭비했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본 적조차 없습니까?"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 해리스 : 여러분 중 한 분은 그런 비종교인의 태도는 잘난 척하며 생색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걸로 아는데요. 마치 교도소 개념과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그들의 신화 속에 안전하게 가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그 문제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 해답이 있는데, 그 점에서 제가 세 분과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무신론자가 질겁하겠지만, 저는 '영성'과 '신비' 같은 단어를 별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종교적 대화뿐인, 드문 경험의 범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은 종교적 대화에서만 이야기되기 때문에 미신으로 가득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수의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환각제를 복용했든, 1년 동안 동굴 안에서 홀로 지냈기 때문이든, 아니면 유독 신경계가 불안정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든 사람들은 자기 초월적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종교는 그러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한 경험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이죠. 이것이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금기가 된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의 일생일대 순간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적어도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도킨스 : 글쎄요, 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이런 이야기는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샘의 말대로 종교가 영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님을 보여주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정치적 우파에서 무신론자를 데려오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가치의 혼란이 생기는데, 그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다양성을 갖추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샘의 생각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그런 이야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도킨스는 "종교는 거짓이지만 사람들은 위안을 위해 그게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잘난 척하며 생색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옮긴이
 
- 히친스 : 그런데 그들은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개념을 좋아해요. 그러면 지킬 것도 없기 때문이죠. 만일 모든 사람이 부활을 목격했고, 우리가 그 일로 구원받은 것을 모든 사람이 안다면 우리는 불변의 믿음 체계 속에서 살면서 감시당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어서 매우 기쁩니다.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요. 한편 믿는 사람은 한 치의 의심도 남지 않도록 그것이 완전하게 증명되기를 원치 않는데, 그렇게 되면 양심과 싸울 일이 없고, 영혼의 어두운 밤도 없기 때문입니다. 
해리스 : 어떤 책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의 저서 중 하나에 대한 서평이 정확히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품고 있는 얼마나 무신경한 기대인가. 모든 사람이 증거가 확고해야만 믿는다면 세상에 마법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 프랜시스 콜린스의 말이었어요. 
히친스 : 제 친구중에 옥스퍼드 성당 참사회 위원인 존 펜턴은 만일 성당이 '토리노의 수의의 사실성을 입증한다면 자신은 성직을 떠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일동 웃음) 교회가 그런 일을 한다면 거기에 있고 싶지 않다는 거죠. 제가 출판 기념홍보 여행을 떠났을 때 공교롭게도 첫 주에 제리 폴웰이 죽었습니다. 놀라운 우연이었죠. 게다가 테레사 수녀가 무신론자로 커밍아웃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동 웃음)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어느 것도 믿게 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고해 신부와 선배들에게 자신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존재를 느낄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미사와 성체 의식 중에도 말입니다. 예삿일이 아니죠. 그녀가 받은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건 좋은 일입니다. 훌륭한 겁니다. 당신은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고난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당신도 갈보리 언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논증을 당해낼 재간은 없습니다. 믿지 못할수록 믿음을 더 증명하는 것이라니요. 
해리스 : 믿지 못할수록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고요.
히친스 맞습니다. 고뇌, 영혼의 어두운 밤 자체가 증거입니다. 이는 정말로 '겹치지 않는 교도권'인 거죠.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과 논쟁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데닛 : 우리는 크리스토퍼가 지금 하고 계신 대로 하면 됩니다. 즉,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오래전에 생겨난 이 흥미로운 수법들을 봐. 순환 논리이고, 자체적으로 동력을 얻고,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지." 이렇게 말하고는 그들과 논쟁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수법들에 맞닥뜨리면 주제가 무엇이든 타당한 사고방식이 아님을 지적하기만 하면 됩니다. 같은 수법을 사용해 명백히 사기인 것을 지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실제로 재미있는 것은 사기꾼들도 비슷한 수법을 쓴다는 겁니다. 그들은 똑같은 형태의 논쟁 같지 않은 논쟁, 불합리한 추론을 사용하고, 믿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당신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패를 꺼내 듭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상기시킵니다. 여기에 새로운 수법은 없어요. 이런 수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한 겁니다. 
히친스 : 가짜 특수 효과를 생산하는 것도 수법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사기임을 가리키는 결정적 증거는 기적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인슈타인도 우주에서 영적인 힘을 느꼈어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말의 요지가 기적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죠. 자연의 질서에는 변화가 없는데,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그가 실제로 뭐라고 말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해리스 : 모든 종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리가 하는 것과 같은 비판을 합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의 사이비 기적, 사이비 주장, 확신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서 사기 수법을 포착합니다. 아주 쉽게 포착하죠. 모든 기독교도는 <코란>이 창조주의 완벽한 말일 수 없으며,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데닛 : 수준 높은 신학은 우표 수집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우 특수한 일이죠. 극소수 사람만이 그걸 합니다. 
도킨스 : 그래서 영향력이 거의 없죠. 
데닛 : 신학자들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일반인은 모르는 매우 난해한 세부 사실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죠. 그들이 속한 종교는 이런 신학자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약간은 외부에 알려집니다. 하지만 항상 일반 대중이 소화할 수 있도록 부풀려지죠. 왜냐하면 그들이 글로 적어놓은 것은 제 경험상으로는 눈이 감기고 머리가 빙빙 도는 우리 생활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매우 미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친스 : 오,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일동 웃음) 여기서 앨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를 칭찬하게 될 줄이야. 그는 리처드를 공격하면서 우리가 항상 들어왔고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이 믿는 것을 바로잡아주었죠. 그동안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고 말했다고 알고 있었죠.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저도 방금 확인해봤는데, 출처는 확실하지 않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죠. (일동 웃음) 세밀한 점을 구별하는 정신훈련에 매우 유용합니다. 다시 말해, 믿기지 않으면 지어냈을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누가 지어내겠냐는 거죠. 그것은 실제로 논쟁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가 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들은 이메일 또는 편지를 엉뚱한 주소로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 도킨스 : 학계의 신학자, 주교, 교구 사제들은 우리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혹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우리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한 일에 대해 설교할 때 마치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면허라도 받은 것처럼요. 하지만 그것이 허구임을 그들은 알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요. 그런데도 신자들, 그들의 '양들'에게는 아담과 이브가 마치 실존했던 것처럼,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이 아담과 이브가 실존했다고 생각합니다.  
데닛 : 이 설교자들 중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것은 이론적 가설이다. 사실이 아니라 매우 멋진 은유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일동 웃음) 
도킨스 : 그래 놓고 나중에 그걸 꼭 말해야 아느냐는 암시를 던지죠.
데닛 : 맞아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 말하지 않을 겁니다.

- 해리스 : 또 한 가지는 자기들이 어떤 계기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무신경함을 비난하고, 우리가 종교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이 온건파는 자신들이 왜 온건주의자가 되었는지는 시인하지 않아요 온건함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명제 전부 또는 그 절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거예요. 원인은 과학과 세속 정치로부터 강력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죠. 

데닛 : 그리고 비판자들의 무신경한 직해주의(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해리스 : 종교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권한을 잃었는데, 온건주의자들은 무슨 논리인지 이것이 믿음의 승리라고 주장합니다. 믿음은 스스로 계몽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실은 외부로부터 계몽되었고, 과학에 침범당했어요.

  
- 히친스 : 그런데 이런 사람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러는 겁니다. 그건 진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고무줄 논리이죠. 그러고는 우리가 의심하면, 런던 지하철에서 동료 시민들을 날려버린 사람들과 똑같은 근본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비양심적이 죠 따라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무시한다는 비난에 개의치 않습니다. 솔직히 선택의 여지가 없거든요. 저는 농담을 잘하는데, 어떤 농담에는 뼈가 있습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 그것을 억누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데닛 :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게 좋다고 보십니까? 저도 여러분처럼 교회 관료들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들은 교회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신도들은 그만큼 모르죠. 왜냐하면 더 알면 안 된다고 가르치니까요. 저는 신도의 믿음을 조롱하는 것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들이 지도자들에게 모든 것을 양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지도자들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죠. 누군가 '최종 책임을 진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설교자들입니다. 성직자, 주교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창조론 문제를 예로 들어보죠. 만일 근본주의 교회에 다니는 누군가가 창조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칩시다. 그 교회의 목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죠.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눈감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많은 부분을 우리가 존경하고 권위자로 간주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으니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그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저는 그가 그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도들과 달리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직업상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킨스 : 신도들의 무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높은 데서 내려다보며 생색내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목사나 전도사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히친스 : 맞습니다. 여러분과 리처드가 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저는 확인해보지 않고 받아들일 겁니다. 물론 대개는 확인할 수도 없지만, 여러분이 이미 충분히 확인했을 것이라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주교가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제게는 바보짓을 하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다. 

 

- 히친스 : 어떤 종교인도 아인슈타인처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옳다면,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아프리카 서해안에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아주 작은 오차범위 내에서 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예언은 이런 식으로 입증된 적이 한 번도 없죠. 누구도 어떤 가설에 자신의 평판을, 이를테면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걸지 않아요. 
도킨스 : 어떤 "양자 이론의 신비는 삼위일체 또는 성변화變의 신비와 같은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리처드 파인먼이 말한 두 마디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첫째, 리처드 파인먼은 "당신이 양자 이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양자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양자 이론이 무척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죠 둘째로, 양자 이론의 예측은 실험을 통해 북미 대륙 면적을 머리카락 한 올 크기의 오차범위로 예측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입증됩니다. 즉, 양자 이론은 정확한 예측으로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설령 코펜하겐 해석의 신비는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전환한 예측은커녕 예측을 내놓으려고 하지도 않죠

 

- 데닛 : 노엄 촘스키는 이 세상에는 '문제'와 '신비'라는 두 종류의 질문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질문이고 신비는 그렇지 않은 질문이죠. 우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인정하는데, 과학에는 신비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문제, 난해한 문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존재해요. 어떤 것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을 미화하는 것은 과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히친스 : 이 때문에 우리가 이 대담에서 '난해주의'와 '난독화'같은 전통적 용어들을 기꺼이 되살려야 합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것들이 지적인 사람들을 멍청하게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리처드를 공격하는 또 다른 책을 쓴 존 콘월은 저의 옛 친구이기도 한데,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파시즘에 대해 지금까지 출판된 최고의 연구서 중 하나를 썼어요. 그런데 리처드의 책을 비판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죠. 도킨스 교수는 확신하기 전에 먼저 삼위일체에 대한 책들,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한 무수히 많은 책을 봐야 한다고요. 그런데 종교서가의 책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요점은, 삼위일체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겁니다. 

- 히친스 :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게 많이 있다고 기꺼이 말합니다. 홀데인'이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우주는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위대한 새로운 발견들이 나올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발견을 보겠지요. 하지만 이 세계에는 엄청난 양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이 저들과 우리의 큰 차이죠. 신자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건 우주에 마음이 존재한다는 입장으로 이신론이라고 하고, 우리가 반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그 마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 데닛 : 믿음이라는 패를 내놓는 겁니다. 예컨대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기독교도이고, 우리는 기독교도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그뿐이다." 이 시점에서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최대한 점잖게 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좋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이 토론에서 빠져야겠다.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임할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선언했으니까." 
히친스 : 좋습니다. 제가 딱 원하는 걸 말씀해주셨네요.
데닛 : 변호할 수 없는 견해는 내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패를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적힌 것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말로 변호하고 싶다면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성경>에 적혀 있다는 말 자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한 겁니다. 그것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해리스 : 그것은 다른 신앙의 이름으로 행할 때는 그들도 용인하지 않는 수이죠.

 

- 히친스 : 여기서 세 분 모두에게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저보다 현명한 분들이니까.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반증할 수 있다고 말하는 빅터 스텐저의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데닛 : 어느 신을 말하나요? 그 책을 읽지 않아서요. 
히친스 : 어떤 신이든 관계없습니다. 창조하거나 감독하는 신이고 분명한 것은 개입하는 신입니다. 아주 포괄적이죠. 제 입장은 항상, 우리는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야 하므로 확신하는 사람은 토론이 무르익기 전에 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빅터 스텐저는 현재 우리가 신의 존재는 반증된다, 즉 증거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신의 존재는 흥미로운 명제라고 생각했을 뿐이거든요. 우리 의견이 불확실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 제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죠. 

해리스 : 제가 생각하기에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의 가장 큰 약점은 텍스트에 대한 기초적인 주장, 즉 <성경>은 '전지전능한 신의 완벽한 말'이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허약한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종교인의 인식론적 기준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의존하죠. 만일 <성경>이 마법의 책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사라질 겁니다. <코란>이 마법의 책이 아니라면 이슬람교는 사라질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책들을 보고 “이 책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눈곱만큼이라도 있는가? 외바퀴 손수레를 새로운 기술로 여긴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문장이 한 문장이라도 있는가?"라고 자문한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아니요”일 겁니다. 만일 <성경>에 DNA와 전기, 그 밖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것에 대해 적혀 있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고 그런 지식의 원천에 대해 합리적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겁니다. 

 

- 히친스 : 디네시 디수자는 우리의 적 중에서도 상당히 학식 있고, 박식하고, 많이 배운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저는 조만간 그와 토론할 예정입니다만, 아무튼 그는 자신의 새 책에서 사람들이 흔히 조롱하는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으라"는 구절이 있고 몇 구절 뒤에 태양과 달과 별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것은 빅뱅과 일치해요. <성경>의 말이 맞은 거였어요. 

도킨스 : 애썼지만, 감명 깊지는 않네요. 
히친스 : 은하 이전에 빅뱅이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일동 웃음)
해리스 : 제가 <종교의 종말> 맨 끝에 실은 긴 주에서 이런 정신자세를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어떤 텍스트에서도 마법 같은 선견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죠. 서점의 요리책 코너로 가서 아무 요리책이나 펴고 레시피를 찾아요. 아마 깊은 프라이팬에 새우를 살짝 구워 해초를 곁들이는 요리였을 거예요. 그런 다음 그 레시피에 대한 신비로운 해석을 떠올리는 거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도 사소한 점들을 연결해 지혜를 발견할 수 있어요.

히친스 : 마이클 셔머가 <성경>에 숨겨진 암호인 '바이블 코드'로 바로 그런 일을 했죠. 정말 잘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제 날짜의 신문 헤드라인을 쓸 수도 있습니다. 

 

- 도킨스 : 저는 우주 상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상적이라는 개념이 그런 상황에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빅터 스텐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적 지능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창조적 지능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죠.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 우주 상수를 미세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지적인 지능이라면, 그 자신은 훨씬 더 미세 조정되어 있어야 하고... 

 

- 해리스 : 저는 종교적 믿음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논증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즉 믿음을 비판하는 것이 나쁜 짓임을 암시하는 논증을 찾고 있습니다. 
도킨스 : 그쪽이 훨씬 쉽습니다. 예컨대 누군가는 모든 사람이 거짓을 믿는다면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라고 주장하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겠죠. 
데닛 : 아, 그런 말씀이군요.

 

- 데닛 : 물론 있습니다. <주문을 깨다>보다는 자유의지에 관한 책인 <자유는 진화한다 Freedom Evolves>를 쓸 때, 저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견해와 매우 흡사한 의견을 표현하는 비판자들과 계속 맞닥뜨렸습니다. 즉, 자유의지는 중요한 개념이라서 만일 우리가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포기한다면 사람들은 책임감을 잃을 것이고 우리는 혼돈에 빠질 거라는 주장이었죠.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시선을 돌리고,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쟁점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 세계에 미치는 여파라는 범주에서 이 문제에 대해 솔직히 생각해 봤습니다. "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만으로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사실을 분명히 표현해도 될까?" "그것이 세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나는 입을 다물고 주제를 바꾸어야 할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열심히 생각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 두 권의 책을 내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대로 진행해도 세상이 안전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킨스 : 그것은 책을 내는 데 고려해야 할 점이지, '이것은 참인가 거짓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동기가 있는 비판자들이 흔히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것은 정치적으로 몹시 불쾌하기 때문에 참일 수 없다"라고 말하죠. 

 

- 히친스 : 백인과 흑인의 지능에 대한 '종형곡선'이 아이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하게 되죠. "이제 어쩌지?" 다행히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해리스 : 제가 그 문제를 떠올린 곳을 말씀드리면요. 확실하지 않지만 <LA 타임스>의 사설 논평 면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이슬람 집단이 서유럽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과격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담론에서는 믿음을 매우 존중해서 이슬람 집단이 서유럽에서와 같이 고립되어 불만이 들끓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릅니다만, 사실이라면 잠시 생각해보게 될 것 같습니다.

 

- 해리스 : 여기서 두 가지 쟁점이 만납니다. 하나는 '우리가 달성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을까? 또 하나는 불행히도 무신론 관점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누군가를 설득해 종교적 믿음을 포기하게 할 수 없다는 신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게 완전히 공허한 활동일까요? 사상 전쟁에서 우리가 실제로 이길 수 있을까요? 제가 받은 이메일을 토대로 판단하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을 잃은 사람들, 사실상 설득되어 신앙을 버린 사람들에게 꾸준히 이메일을 받고 있습니다.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린 지푸라기는 우리가 쓴 책 중 한 권이거나, 어떤 다른 추론과정, 또는 그들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자신들의 종교가 말하는 것의 양립 불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내재된 모순, 또는 우주에 대해 밝혀진 사실과 자신의 신앙 사이의 모순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은 몇 분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나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들은 사실에 직면해 미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도킨스 : 일전에 학식이 높은 생물학자와 논쟁을 했어요. 그는 뛰어난 진화 해설자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죠. 제가 말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비결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당신의 합리적인 논증 전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런 다음에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했어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했어요. 공격적으로 들릴 정도였죠.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결정적 한 방이었죠. 그런 말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그 말을 일종의 변명투가 아니라 단호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히친스 : "북아메리카에 살면 '윌리엄 제임스'를 읽어야 한다". "타인의 주관적 경험을 판단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부류로부터 그런 말을 항상 듣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경험을 판단하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한 일이죠. '그 사람한테 사실이라면 왜 그걸 존중해주지 못하냐는 논리인데, 그런 논리는 어느 분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인이 받은 인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 데닛 : 시인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자신에게나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배신으로 간주할 테니까요. 게다가 오랫동안 속아왔음을 인정하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죠. 그 모든 믿음을 포기했다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내게끔 도울 방법을 찾고, 믿음을 포기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는 겁니다.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겠죠. 식구들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요.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독려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킨스 : 맞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앙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것은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이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뇌를 분리하는 그 어려운 일을 잘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샘이 말했듯이 그런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이걸 믿고, 주중에는 그런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 완전히 모순된 것을 믿어요. 사실 신경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봐요. 그런 식으로 분리된 뇌를 지니면 안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데닛 :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불안정합니다. 어쨌든 리처드의 말대로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 잘 삽니다. 그렇게 하는 비결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겁니다.
도킨스 : 하지만 어떻게 그런 모순을 안고 살 수 있죠?
데닛 :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겁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거죠.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기억하기 쉬운 문구를 개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게 바로 데닛, 도킨스, 해리스, 히친스가 말하는 우주적 전환이구나. 알겠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아차리게 하는 거죠.
히친스 :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인지 부조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약간은 그렇게 생활하죠.
데닛 : 인지부조화를 감내한다는 말씀입니까?
히친스 : 아뇨, 그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무브온 MoveOn.org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미국 정부는 야만적이고, 군국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다른 나라를 침입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금을 냅니다. 그것도 꼬박꼬박 내죠. 또 자식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합니다. 항상 활동가로 살지는 않는 거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믿는 것의 10퍼센트만 진실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항상 행동하기는 불가능하죠. 예컨대 1950년대에 미국의 반공 극우단체인 존 버치 협회 John Birch Society 회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어요. 눈만 뜨면 백악관은 크렘린이 운영하고 있다는 헛소리를 믿었죠. 하지만 식료품을 사러 가야 하고 일도 해야 합니다.
해리스 : 맞아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도킨스 : 뭘 믿든 간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죠.

- 도킨스 : 하지만 추론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종교에 맞서 싸워 이기면 우리는 과학 또는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로 돌아가, 그것에 대해 논쟁하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논쟁거리가 무수히 많고, 그것은 실제로 논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히친스 : 앞으로도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생물학 법칙 덕분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신의 계획 덕분이라고 말하는 상황은 계속될 겁니다. 
도킨스 : 글쎄요, 그건... 
히친스 : 어느 관점을 취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두 견해 중 한쪽만 타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까요? 반대쪽 견해와 대조해야죠 그래서 그 반대쪽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 해리스 : 유사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는 마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히친스 : 맞습니다.
해리스 : 모든 문화에는 마녀에 대한 믿음, 마법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법은 도처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결코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시도하는 사람이 바보다.' 또는 '변증법의 문제로만 시도할 수 있을 뿐이지만, 마법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법은 거의 예외 없이 사라졌습니다. 제 말은...
히친스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법은 근절할 수 없고 오히려 잡초처럼 퍼집니다. 대개는 애니미스트와 기독교도의 손에서 퍼지죠.
데닛 : 서양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해리스 : 저는 노골적인 마법을 말씀드린 겁니다. 의학 이전에 존재했던 저주의 마법 말입니다.
히친스 : 그걸 제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해리스 : 근본적으로 제거했다고 생각합니다.

도킨스 : 어쨌든 크리스토퍼, 당신은 그걸 제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까?
히친스 : 지금 위카 Wicca 추종자들이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게 해 달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 해리스 :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마녀가 의료 행위를 침범하고 있다는 주장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 의학과 침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진짜 마법, 중세 마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히친스 : 저는 실제로 그것을 할 뻔했는데요. <워싱턴 포스트>에는 날마다 별점이 실려요.
해리스 : 별점은 또 다른 문제예요.
데닛 : 네, 점성술은 약한...
히친스 : 점성술은 이 토론에서 뺍시다. 점성술은 근절되지 않을 거예요.
데닛 : 좋습니다. 그런데 점성술은 근절될 필요가 없습니다.
도킨스 : 그런데 크리스토퍼, 당신은 그것이 근절될 것인가와 근절되기를 원하는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논박할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근절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위트를 갈고 다듬기 위해. 
히친스 : 맞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데닛 : 그런데 근절을 고려하는 대신 진화역학자의 방식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비병원성의 진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해로운 종류를 제거하고 싶다. 저는 점성술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척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레이건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점성술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약간 겁이 났지만,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점성술을 중시하는 미신은 비교적 해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도 점성술의 지위로 강등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 히친스 : 제 대답은 이미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리처드는 동의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거짓 위안이 없으면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 사람들이 믿음을 포기하면 자신에게나 저에게나 좋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버리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면 저는 논쟁 상대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내 말만 잘 들으면 교회를 끊을 거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군요. 여러분은 아무도 믿음이 없는 세계를 기대한다고 말하시겠습니까? 
도킨스 : 네,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점성술이든 종교든 저는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사고하고, 증거를 들여다보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점성술이 해롭다는 게 아닙니다. 점성술은 아마 해롭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자기가 어떤 것을 증거 없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 세계에서 사는 것, 왜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별과 천문학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반면 모든 일을 좀스러운 점성술로 환원하는 것은 궁핍한 일이죠. 종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곳입니다. 반면에 정령, 초자연적 창조자, 초자연적 간섭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죠. 미학적 이유로 믿음을 없애고 싶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친스 : 그 생각에 열렬히 동의합니다.
데닛 : 하지만 우선순위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일단 정도가 지나친, 가장 해롭고 불쾌한 것을 제거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목표로 삼으시겠습니까? 가장 짜릿한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슬람교를 봅시다. 이슬람교를 최대한 현실적으로 살펴보죠. 개혁된 합리적인 이슬람교는 정녕 불가능할까요?
도킨스 : 지금의 잔인한 이슬람교는 실제로는 최근에 나타난 현상 아닌가요?
데닛 :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할걸요. 

 

- 해리스 : 예술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예술로 환원되지는 않아요. 우리는 박물관에 가서 순수한 형태의 동정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같은 무신론자들은 종교인의 가짜 주장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제가 보기에 그런 태도를 보고 종교인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히친스 : 지당한 말씀입니다. 종교인이 세속 세계가 더럼대성당이나 샤르트르대성당 같은 건축물을 지은 적이 있느냐는 논증을 꺼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아니면 종교적인 그림이나 음악 중에서도... 
데닛 : 바흐의 음악.
히친스 : 바흐여야 하죠.

 

- 해리스 :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일요일에 교회가 텅 비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신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인 것 같고요.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종류의 교회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상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종류의 의식. 저는 우리 삶에는 신성함을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전제로 하지 않아야겠죠. 저는 심오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친스 : 물론입니다. 
해리스 : 무신론자인 우리는 이 영역을 도외시하는데. 그래서 때로는 가장 미치광이 같은 적들조차 우리보다 현명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사이드 쿠틉 같은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정말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죠. 그는 오사마 빈라덴이 가장 좋아한 철학자로, 1950년경에 콜로라도주 그릴리에 나타나 미국에서 1년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미국인이 하루 종일 영화배우에 대해 잡담하고 담장의 울타리를 다듬고, 이웃의 자동차를 탐내며 시간 보내는 것을 보고, 미국 또는 서양은 하찮은 일에 몰두하고 너무 물질적이라 틀림없이 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의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것으로 해석할까 봐 염려스럽지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죠. 대부분의 사람은 하찮고 끔찍한 것에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죠. 저는 그것이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 도킨스 : 샘, 그 점은 이미 지적했고 우리도 동의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은가란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저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보고 싶지 않군요.

히친스 : 그럼요, 절대로요!

도킨스 : <성경>을 모르고는 문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술을 이해할 수 없고, 음악도 이해할 수 없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이유 때문이죠. 역사적 이유는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 가서 기도하지 않더라도,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지, <성경> 구절들이 무슨 뜻인지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해리스 : 단지 그뿐인가요? 조상의 무지에 대한 역사적 이해?

도킨스 :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몰두할 수 있어요. 등장인물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지 않고도 소설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히친스 : 우리는 시아파의 회교 사원도 폭파하지 않습니다.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성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안티고네>에서 소포클레스가 제시한 이유로, 불경함과 신성모독에 대한 자연적 저항감이 있죠. 교회를 파괴하고 유대교 예배당을 불태우고, 서로의 회교 사원을 폭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부터 지적한 것이지만, 우리가 음악의 메아리, 시와 신비가 사라진 텅 빈 세계를 바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우리 중 누구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 히친스 : 우리가 좀 더 시간을 들여 이런 점을 지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의 쓸쓸한 황야를 초래하는 것은 성전, 종교 분쟁, 신권정치이지 바람직한 세속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요. 따라서 세속주의는 '믿음 같은 것'의 존속을 단지 허락하고, 내버려 두고, 감내하고, 생색내며 봐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면에서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보다는 제 생각을 잘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군요. 
해리스 : '믿음 같은 것'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데닛 : 믿음과 얼마나 비슷한 것을 말씀하십니까?
히친스 : 세상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이죠.
데닛 :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해리스 : '대니얼 데닛은 이것을 믿는다',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 해리스 : 우리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 데닛 : 저는 악이 애초에 창조의 일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즈텍 문명의 믿음과 관행은 눈감아줄 수없지만, 그들의 건축과 문화의 다른 측면은 경외심을 품고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행과 (웃음) 믿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도킨스 : 저는 영국 라디오 프로그램 <데저트 아일랜드 디스크 Desert Island Discs>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사막의 섬에 가져갈 음반 여덟 장을 골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제가 고른 음반 중 하나는 바흐의 <나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 Mache dich, mein Herze, rein>였습니다. 아주경이롭고 신성한 곡이죠.
데닛 : 아름다운 곡이죠.
도킨스 : 제게 질문한 여성은 왜 제가 이 음악을 가져가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음악의 아름다움은 의미를 알 때 더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과 같죠.

 

- 도킨스 : 우리는 소설에 몰입할 수 있어요. 소설을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죠. 하지만 이 사람이 존재했음을 믿어야 한다거나, 지금 느끼는 슬픔은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도킨스 :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을 겁니다. 
데닛 : 그건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책만이 아니라 수많은 책의 문제이죠. 사람들은 책을 안 읽어요. 그들은 서평만 읽고 무슨 책인지 판단합니다. 
히친스 : 우리는 조만간 크리스마스 전쟁을 다시 치르겠군요. 오늘이 벌써 9월의 마지막 날이니. 그 모든 것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 겁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이런저런 쇼에 나가 크리스마스에 대해 토론할 때마다 저는 말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베고 그것을 금지한 사람은 올리버 크롬웰이었다고요... 크리스마스가 신성모독이라고 말한 것은 미국 원리주의자들의 조상인 청교도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도킨스 : 네, 바미얀석불과 같은 맥락이죠. 

히친스 : 여러분은 자신의 전통을 존중합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저는 크롬웰이 여러 다른 면에서도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실은 이교도 축제입니다.

 

- 히친스 : 크리스마스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인이 즐기던 술잔치입니다. 그러면 왜 안 되죠? 
데닛 :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히친스 : 저는 동지 축제를 다른 사람들만큼 좋아합니다. 
데닛 :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캐럴 파티를 열고 거기서 노래를 합니다. 온갖 가사가 적힌 온갖 노래를 부르는데, 세속적인 것만 있지는 않죠
도킨스 : 그러면 왜 안 되나요?
데닛 : 그건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재예요.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환상적입니다.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죠! 믿지 않아도 모든 대목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도킨스 : 랍비 누버거 맞습니다. 그녀는 제가 뉴칼리지에 선임연구원으로 있을 때 감사 기도를 드렸는지 물었어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물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건 단순히 예의의 문제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화를 냈어요. 제가 감사 기도를 드린 게 위선이라는 겁니다. 제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죠. "당신에게는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 기도는 역사가 있는 라틴어 관용어구이고, 나는 역사를 인정할 뿐입니다." 철학자 앨프리드 에이어도 감사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거짓은 말하지 않을 테지만,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일동 웃음) 

- 해리스 : 미국 국민 대다수는 이슬람의 순교 교의가 오싹하고, 전혀 자비롭지 않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기 쉽고,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죠. '페트리접시에 영혼이 산다'는 믿음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들조차, 즉 미국인의 70퍼센트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의 혜택을 알기 때문에 페트리접시에 영혼이 산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부에 초점을 맞추면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지만, 무신론의 방벽 위에 올라서서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고 말하면 90퍼센트의 이웃을 잃게 됩니다. 
도킨스 :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 관심사는 종교의 해악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사실 여부입니다. 이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느냐, 그게 사실이냐는 거죠. 제가 정말 신경 쓰는 것은 이 가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해악도 신경이 쓰이지만, 저는 모든 종교에 공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식의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요.

히친스 : 저는 모든 종교가 똑같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이죠.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똑같이 위험합니다.

도킨스 : 거짓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분명 똑같이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히친스 : 잠재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도킨스 : 잠재적으로는 그럴 테죠. 맞습니다.
히친스 : 정신 능력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독보적 영장류로 만들어주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결사적으로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언제나 치명적이죠.

 

- 히친스 : 저에게는 아미시파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전체주의적 시스템에 따라 통제된다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 해리스 : 팔레스타인에 신경 쓰지 않았다면, 유대교 이주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불러들이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테죠 분쟁의 불씨가 없었을 거예요. 땅에 대한 소유권 분쟁일 뿐이었겠죠. 양측 모두 잘못이 있지만, 20만 명의 이주자가 잠재적으로 세계적 분쟁을 촉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이주자들이 알아크사 A1-Aqsa 사원을 파괴할까 봐 신경 쓰는 10억 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친스 :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유대교도들의 꿈이죠. 그들은 세계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신성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도 그보다 더 이상하고, 비합리적이고, 꼴사나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견해가 그러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으로도 문명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고, 그 싸움에서 문명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이 분쟁이 핵무기 교환 없이 끝나기만 해도 천만다행일 겁니다.
해리스 : 이 대목에서 연결되는 아주 좋은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웅대한 바람은 무엇이고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식들의 살아생전에 무엇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걸려 있다고 보십니까? 
데닛 :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목표에 닿을 수 있을까요?
해리스 : 비판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요? 실질적으로 밟을 수 있는 단계들이 있을까요? 만일 10억 달러가 있다면, 사상의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이 책의 원제는 <네 기사 Four Horsemen>이다. 이른바 '신무신론'을 이끄는 네 사람을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기사에 빗댄 말이다. 신무신론이라는 용어는 네 기사가 자신들의 입장을 기존의 무신론과 철학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쓴 저서들의 내용 및 영향에 대한 언론의 논평에서 나왔다.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 공격 이후 비슷한 시기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네 기사의 저서들(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은 과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신앙이라는 금기를 건드림으로써 열띤 논쟁을 일으켰다. 그 책들은 2004년에서 2007년 사이에 나왔고, 이 모임은 2007년 그 열기 속에서 성사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안타깝게 사망하면서 이 역사적 대화는 네 사람이 함께 모인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 이 기념할 만한 이벤트의 매력은 사회자도 사전 계획도 미리 약속한 의제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흘러간다는 데 있다. "이런 식의 흐름에 맡기는 대화가 제3자에게도 재미있을까"라고 리처드 도킨스는 겸손하게 묻지만,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대담이 아닌 만큼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편으로 보이고, 대부분의 쟁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하지만 4중주의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매력을 더하듯이, 네 기사는 공통의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합주의 묘미, 대화의 묘미인 셈이다. 게다가 즉흥 연주라니. 

 

- 종교 논쟁의 중심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그런 근본적인 주제보다는 B급 주제들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반박당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데 왜 종교인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까?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다른가? 과학은 과연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때때로 겪는 신비로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김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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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다섯 권의 베스트셀러가 이른바 신무신론 운동의 선봉으로 유명세를 그리고 몇몇 진영에서는 악명을 떨쳤다. 그 책들은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과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2006),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2006), 내가 쓴 <만들어진 신>(2006),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7)이다. 한동안 샘, 대니얼, 그리고 나는 '삼총사'로 불렸다. 그런 다음 크리스토퍼의 저서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네 기사로 확장했다. 우리는 언론에서 붙이는 이러한 명칭에 책임이 없었지만 관계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공모하지도 않았으며, 조직적으로 총을 든 적도 없다. 하지만 함께 묶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아얀 히르시 알리, 빅터 스텐저, 로렌스 크라우스, 제리 코인, 마이클 셔머, 앤서니 그레일링, 댄 바커 같은 존경받는 저자들과 기꺼이 함께했다.

 

- 2007년 9월에 무신론자국제연합 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의 연례회의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연고지인 워싱턴 D.C.에서 열렸다. 로빈 엘리자베스 콘월이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재단을 대표해 네 기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계기로 공동대담을 준비했고, 우리 재단의 전속 촬영기사가 그것을 찍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아얀 히르시 알리가 다섯 번째이자 유일한 여성 기사로 참석해 '삼총사'에서 '네 기사'를 거쳐 '지혜의 다섯 기둥'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네덜란드 국회의원이던 아얀이 긴급히 네덜란드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빠져서 아쉬웠고, 2012년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무신론대회 Global Atheist Convention에서 공동 대담이 다시 성사되었을 때 그녀가 생존한 세 기사와 합류하게 되어 기뻤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참석으로 그날의 대화 주제는 어느 정도 이슬람교로 옮겨갔다.  

 

- 히타이트 사람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아 우리아의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신은 그를 용서했지만 무죄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그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을 죽였다(<사무엘하> 12장 13~14절). 무고한 아이에게 너무 심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는 부분적 처벌인 연옥을 암시하는 유용한 은유처럼 보이고, <가톨릭 백과사전>의 저자들이 이것을 간과할 리 없다. 연옥 항목에서 '증명 proots'이라 부르는 세부 항목은 흥미로운데, 그것이 일종의 논리를 사용한다고 표명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라는 게 어떤 식인지 보자.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신학 교수들이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고? 

 

- 프레드 호일의 <검은 구름>은 내가 지금껏 읽은 최고의 과학소설 가운데 하나인데(몹시 불쾌한 주인공에도 불구하고), 좋은 과학소설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재미있으면서도 정보를 제공하고, 실제 과학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검은 구름은 초인적 지능을 지닌 외계생명체로, 태양에너지를 먹기 위해 태양 주위의 궤도에 살고 있다. 과학자들은 결국 교신에 성공하고, 그때부터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소설의 절정에서 과학자들은 검은 구름에게 지식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물리학자들의 지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을 능가하듯이 검은 구름의 지식은 물리학자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다. 검은 구름은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지식을 전할 때 사용할 섬광 부호는 한 번에 한 사람을 겨냥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명석한 젊은 물리학자 데이브 웨이차트가 그 중책을 맡겠다고 자청한다. 결국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 채 뇌 과열로 숨진다. 이 소설 주인공인 천체물리학자 크리스토퍼 킹즐리에게도 더 오랜 씨름 끝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인간의 뇌는, 심지어 세계 최고 물리학자의 뇌조차 초인적 지식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검은 구름은 긴급한 임무를 띠고 은하의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막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주에는 난해한 문제 deep problem라는 딱지가 붙은 특정한 문제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모든 훌륭한 과학자가 그렇듯이 초인적인 검은 구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검은 구름이 떠나는 이유는, 몇 광년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 검은 구름이 난해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뒤로 더 이상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검은 구름은 그의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직접 찾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해법을 발견한 검은 구름은 죽었을까? 아니면 살아남아 오랫동안 찾아온 난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달할까? 독자는 그 이웃 구름이 웨이차트와 킹즐리를 죽인 치명적인 과열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인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 데닛은 적응적 형질을 차곡차곡 쌓아 정교한 생명체를 만드는 자연선택 메커니즘을 기중기에 비유한다. 이에 반해 창조론은 공중에 떠서 구조물을 만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계 장치인 '스카이훅 skyhook'에 비유한다. - 옮긴이 

 

- 크라우스의 '무'는 그 뒤의 세계에 비해 단순하다. 그리고 그 세계를 전개시켜 나간 과정들은 현재 대체로 잘 이해되어 있다. 알다시피 빅뱅, 우주의 팽창, 은하의 형성, 별의 형성, 별 내부에서의 원소 형성, 원소를 우주에 뿌린 초신성 폭발, 풍부한 원소를 가진 먼지구름이 지구 같은 암석 행성으로 응축되는 과정, 화학법칙과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그 법칙에 따라 생겨난 자기 복제하는 최초의 분자, 자연선택 ... 

 

- 그리고 무신론적 세계관에는 도덕적 용기도필요하다. 무신론자가 된 당신은 상상의 친구를 버리고, 당신을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하늘의 아버지라는 버팀목을 포기한다. 당신은 결국 죽을 것이고,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에게 무엇을 하면 될지 말해주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신성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지적 성인이다. 당신은 삶을 직시하고 도덕적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성인의 용기에는 위엄이 있다. 당신은 똑바로 서서 현실의 혹독한 바람을 맞는다.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따뜻하게 당신을 감싸줄 사람들이 있다. 과학 지식과 응용과학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위안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법, 도덕에 대한 문명화된 담론을 생산한 문화적 유산이 있다. 도덕과 삶의 척도는 지적인 설계 실제로 존재하는 지적인사람들에 의한 설계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경이롭고 기가 막히게 잘 해명될 수 있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지적 용기가 있다. 무신론자로서 당신은 당신이 살아갈 유일한 인생을 온전하게 살 도덕적 용기가 있다. 실재를 온전히 살고 누릴 용기, 그리고 당신이 왔을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떠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용기가 있다. 

 

- 방법은 '희생 양극 sacrificial anode'이 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위험한 동시에 종교적으로 들리지만,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선원과 어부, 그리고 배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고, 다른 명칭으로도 불린다. '음극화 보호'라고도 하고, 그냥 '아연'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희생접시'라고도 한다. 나는 희생 접시가 마음에 드는데, 충격적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여러분도 혹시 살로메의 접시 위에 놓인 세례 요한의 머리를 떠올렸는가?). 

- 청동이나 놋쇠 프로펠러를 장착한 철강 보트나 배를 소금물에 띄우면 일종의 배터리가 생성된다. 전자가 강철에서 그 합금으로 흘러 그것을 놀라운 속도로 부식시킨다. 완전히 새것인 단단한 놋쇠 프로펠러는 며칠 내에 구멍이 생기고, 몇 달 만에 파괴될 수 있다. 보호막을 칠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해법은 이것이다. 작은 아연 조각(다른 금속도 가능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연이 가장 좋다)을 강철에 붙이면(또는 스테인리스강 프로펠러축에 일종의 아연 너트를 끼운다) 문제가 해결된다. 작은 아연조각은 놋쇠나 청동보다 반응성이 크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질책을 받고(전류)', 자기 자신을 희생해 중요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부분을 보호한다. 1년에 한 번씩 거의 바닥난 아연 조각을 새로운 희생 양극으로 교체하면 된다. 

 

- 리처드 도킨스

 

- 이러한 성숙한 형태로 탈바꿈하는 데 이미 성공한 종파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리처드와 샘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르고, 우리는 의견 충돌이 생길 때 그것을 서로에게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의견 차이는 내가 아는 한상대를 존중하는 건설적인 것이다. 우리의 토론 기록에서 획일적 공통 신조나 정치적 이유로 은폐된 어떤 모순을 찾아내려는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만의 '믿음',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네 무신론자들은 우리 종교인들만큼이나 남을 불쾌하게 한다!"),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우리의 공통 교의란 진실, 증거, 정직한 설득에 대한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며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끊임없이 검증 및 수정되는 믿음, 분별력과 상식에 의거해 잠정적으로 옹호받는 믿음이다. 종교 전도자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가 옹호하는 입장이 타당하다는 증거를 대야 하는 '입증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코 《성경》이나 권위 있는 선언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 대니얼 데닛 

 

- 해리스 : <오줌 예수 Piss Christ>가 떠오르는군요.
히친스 :
네,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 그림에 코끼리 똥을 묻힌 작품이 그런 예죠. 실제로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를 포함해 일신론 이전의 사상가들과 신성모독에 대한 혐오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모독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죠.

  

- 알아크사 사원 :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의 유적. 이 사원을 둘러싼 벽 중 서쪽 벽은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곡의 벽은 1967년부터 다시 유대인이 관할했으며, 유대인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다. - 옮긴이)  

 

      

 

 

 
신 없음의 과학
과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신과 믿음, 종교적 가르침 영역 밖에서의 도덕과 영성에 대한 문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 등 다양한 주제로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신 없음의 과학』. 전투적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부터 전략적 무신론자 대니얼 데닛, 직설적 무신론자 샘 해리스, 성역파괴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까지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인 네 기사들이 펼치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위대한 지적 탐구를 만나볼 수 있다. 2007년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에서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날 나누었던 대화와 이후 진화된 사고를 담은 새로운 에세이를 한데 묶은 것으로, 그동안 논쟁해온 신과 종교에 관한 사상적 토대의 핵심을 명확히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모든 현상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우주를 만든 초자연적 창조자가 있는가? 《성경》, 《코란》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의 산물이란 증거는 무엇인가? 종교와 과학은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무언가를 타당한 이유로 믿는 것과 황당한 이유로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그동안 상식이라 불리던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개인의 성찰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지적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현대 무신론을 이루는 가닥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낱낱이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출판
김영사
출판일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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