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권
출판 : 동아시아
출간 : 2021.10.15
신나게 읽었고, 머리가 좀 아팠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미분 수식들은 더는 친숙하지 않았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수식들도 되짚어보고 싶었는데, 중반부터 증명 및 유도는 '맞겠지'라는 믿음으로 흘려 읽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을 무엇에 관한 책이라고 말해야 할지 꽤나 고민스럽다. 가장 명쾌하게 표현하자면 '양자역학'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겠지만,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빛이 질량을 가진 고체가 되는 과정, 별이 만들어낸 원소들이 날아와 움직이는 탄수화물 복합체로 전해지는 과정,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과 엔트로피, 자유 의지와 운명에 관해서까지 설명해 나간다.
다시 말해 양자역학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물질의 생성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광자나 전자가 질량을 얻게 되는지, 그렇게 무거워진 입자들은 어떻게 모여 특정 성질을 지닌 원소가 되는지는 무척 흥미롭다. 또한 미시계에서의 전자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파동함수적 확률로서- 따라서 모든 선택지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중첩과 간섭에 의해 특정 선택지로 모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자는 '선택'할 필요가 없다. 또한 반드시 다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관측을 통해 파동함수가 붕괴할 때에만 측정이 가능하므로,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전자를 고정시키는 것은 관측자다.
또한 고정된 법칙을 통해 '모든 변화값이 계산-예측 가능한' 생명 게임에서도 결과적으로 어떤 패턴이 나타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이는 파동 함수에서 위상 변화가 자유로운 것과도 연결되어 '자유 의지'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자유 의지란 특정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태를 지칭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 같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물리학이 지배하는 거시계와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계의 경계가 흐려지며 감각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과학서를 읽으며 또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생각이나 감정이 뇌의 뉴런 사이를 오가는 신경자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특정 조건하에서 구체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같은 것끼리 모여 뭉치게 만드는 힘 -그리고 그 힘을 구성하는 요소- 에 관한 것들을 읽을수록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대중서로서의 간결함과 즐거움, 교양서로서의 명확함과 깊이를 두루 갖춘 책이라고 생각한다.
즐겁게 읽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 근본 물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의 이론'을 가끔 언급한다. 이것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입자를 분류하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이론을 이야기한다. 입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표준 모형'은 이것의 상당 부분을 정립하지만 시공간 그 자체의 구성 요소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즉, 우주 안에 있는 물체들의 이론은 있지만 그것을 우주 자체의 이해와 융합시키지 못한 상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론이란 세상의 양자역학적인 묘사를 의미한다는 입장이 이 책에 여러 번 강조되어 있고, 그런 과학적 체계의 근본적인 성질을 설명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 김민형,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 소장, <수학이 필요한 순간> 저자
모든 것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전자의 파동은 공명을 일으킴으로써 원자를 안정시킨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을 기술하는 파동 함수는
직접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실제로 측정 가능한 것은 파동함수가 아니라 확률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바로 이 사실이 힘의 원리를 제공한다.
- 이렇게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전자는 원자핵 속으로 얼마나 빨리 떨어질까? 놀라지 마시라. 고전역학 classical mechanics 및 전자기학 electromagnetism (기반한 계산에 따르면, 전자는 약 10 피코초 picosecond, 즉 1,000억 분의 1초 만에 원자핵으로 떨어진다.) 대재앙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물론이고, 우주도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원자를 구할 수 있을까?
- 답은 바로, 앞서 언급한 파동-입자 이중성이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어떻게 원자 안에서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궤도'를 돌 수 있는지 알려준다. 아니, 사실 전자는 궤도를 돌지 않는다. 궤도는 순전히 고적역학적인 개념이다. 실제 전자는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서 진동한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러한 전자의 파동이 공명 resonance을 일으킬 때 원자가 안정적인 상태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해준다. 비유적으로, 전자의 파동은 전자가 마치 구름처럼 원자핵 주변에 퍼져 출렁거리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전자의 구름이 공명을 일으키면 원자가 안정화되는 것이다. 참고로, 실제 물리학자들도 때때로 전자의 파동을 '전자구름 electron cloud'이라고 부른다.
- 잠깐, 그런데 공명이란 무엇인가? 공명의 한 가지 예로, 유리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적절하게 소리를 내면 유리병 전체가 흔들리며 소리가 증폭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각각의 유리병마다 '고유 진동수 natural frequency'라고 불리는 특정한 진동수가 존재한다. 따라서 공명이란 유리병 입구로 흘러 들어간 소리의 진동수가 유리병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면 유리병이 크게 흔들리는 현상이다. 참고로, 공명을 일으키는 소리, 즉 파동을 '정상파 standing wave'라고 부른다.
- 정리하면, 원자란 원자핵과 전자가 만들어 내는 공명 현상이다. 하나의 원자 속에 여러 개의 전자들이 들어 있다면, 모든 전자가 협동하며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원자는 안정화된다.
-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양자역학은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것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해, 입자는 그 자체로 점과 같지만 그것의 위치는 파동처럼 공간에 퍼져 있다. 이러한 파동을 기술하는 함수는 '파동 함수 wave function'라고 한다.
- 파동함수는 입자가 주어진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알려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확률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언뜻, 이는 양자역학의 한계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한계 덕분에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우리 우주가 놀랍도록 아름다워진다.
- 무슨 이야기인가? 우리 우주에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이 있다. 바로 중력 gravitational force,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다. 중력은 일상에서 느껴지는 가장 친숙한 힘이다.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앞서 원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짧게 언급했다. 아직 중력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증명되지 않았지만, 이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은 모두 하나의 원리에 의해 기술된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바로 게이지 대칭성 gauge symmetry의 원리다.
- 거칠게 말해, 게이지 대칭성의 원리란 바로 앞서 언급한, 파동 함수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측정 가능한 것은 확률뿐이라는 원리다. 약간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파동함수가 존재하되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원리다. 게이지 대칭성의 원리가 근본적인 힘의 원리를 정확히 어떻게 제공하는지는 앞으로 이 글을 통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잠깐,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사실, 게이지 대칭성의 원리가 완벽하게 유지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질량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게이지 대칭성은 깨져야 한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깨져야 한다. 참고로, 게이지 대칭성의 자발적 깨짐을 전문적으로 '힉스 메커니즘 Higgs mechanism'이라고 한다. 게이지 대칭성의 자발적 깨짐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우주의 모든 물질에 어떻게 질량을 주는지도 앞으로 이 글을 통해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양자역학은 참으로 묘하다.
- 하지만 파동함수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질량을 가지려면, 파동함수가 단순한 확률이 아니라 복소수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결론적으로, 양자역학은 파동함수의 존재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부터 우리 우주를 지탱하는 모든 힘과 질량의 원리를 준다.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지만 놀랍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의 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자, 운반자로서의 로봇이다."
이 말은 매우 비정하게 들릴 수 있으나, 어찌 보면 묘하게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소임을 다한 것이다.
- 철학과 종교가 아닌 과학은 이 질문에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까? 거칠게 말해서, 과학은 '왜 why'가 아닌 '어떻게 how'를 묻는다. 즉,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 재미있는 것은 '어떻게'를 계속 묻다 보면, 점점 '왜'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어떻게 유전되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전자다. 그러고 나서 과학은 유전자가 개별 생명체의 형질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묻는다. 답은 DNA다. 그다음으로 과학은 DNA가 애초에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른바 '생명의 기원 origin of life'이라고 불린다.
- 이렇게 '어떻게'라는 질문의 사슬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결국 무엇을 만나게 될까? 우리는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 quantum mechanics을 만나게 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파동 wave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파동이면서 입자 particle다. 참고로, 이러한 현상을 전문적으로 '파동-입자 이중성 wave-particle duality'이라고 부른다. 파동-입자 이중성과 같이 이상한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나타나는 것일까?
- 그런데 선택하지 않고도 각각의 길을 걸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 실제로 그 모든 길을 다 걸어가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놀랍게도, 양자역학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인간을 비롯해서 우주의 물질은 모두 미시적인 스케일에서 보면 원자와 같이 작은 입자들의 조합이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입자들의 동역학을 기술하는 물리 이론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 세계의 입자들은 주어진 모든 길을 한꺼번에 걸어갈 수 있다.
- 여기 기로에 선 전자가 있다. 전자는 얼마 전에 전자빔 총 electron beamgun에서 발사되었다. 그리고 전자는 이제 2개의 얇은 틈이 세로로 뚫린 벽에 도달했다. 전자는 2개의 얇은 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통과해야 한다.
- 아니, 그렇지 않다. 전자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 약간 시적으로 말하자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전자는 기로에 난 길을 모두 걸을 수 있지만, 걸었던 길들에 대한 '기억'은 서로를 간섭하며 전자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확률에 영향을 끼친다.
- 자, 이로써 우리는 사람과 전자가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는지 알게 되었다. 잠깐, 이 당연한 깨달음을 이제야 얻게 되었다고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면 듣는 이는 아마도 황당해할 것이다. 사람과 전자는 당연히 다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당연하지만은 않다.
- 이때 재미있는 사실은 두 분신이 만나서 소멸하는 바로 그 자리에 원래의 전자가 나타날 확률이 반드시 1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확률은 두 분신이 차고 있는 양자 시계의 파동 함수 초침에 의해 결정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전자가 나타날 확률은 그것의 파동 함수 초침의 길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다시 나타나는 전자의 파동 함수 초침은 어떻게 결정될까?
- 조금 전문적으로 다시 말하면, 전자가 스크린에 도달했을 때 그 위치를 검출하는 것은 '측정 measurement'의 한 종류다. 양자역학에서 측정의 물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표준적인 해석이 있는데, 바로 코펜하겐 해석 Copenhagen interpretation이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무엇이든 물리적으로 측정하는 순간, 파동함수는 붕괴된다 collapse. 우리가 파동 함수의 초침이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측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측정을 하는 순간, 파동함수는 붕괴되고 만다.
- 그런데 파동함수는 도대체 무엇으로 붕괴되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진짜 재미있어진다.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으로 붕괴되는지는 측정의 성질에 따라서 좌우된다. 즉,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 예를 들어,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스크린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한다. 이 경우에 파동함수는 전자가 스크린의 각 위치에 나타날 확률을 주고 붕괴된다. 위치가 아니라 다른 물리량을 측정한다면, 파동함수는 각 측정값이 발생할 확률을 주고 붕괴된다. 잠깐만! 우리가 어떤 측정을 하는지에 따라 측정의 결과가 달라진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양자역학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하지만 그럴수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 뉴턴의 운동 법칙 Newton's laws of motion이 지배하는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정밀기계처럼 정확한 인과관계로 연결된다. 우리의 선택도 이러한 정확한 인과관계의 일부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저 미리 결정된 선택을 수행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한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다만, 모든 사건은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최종 결과는 확률로만 주어진다. 어찌 보면, 우리는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택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는 확률론적인 세계관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이 확률적일 뿐이라면, 선택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 그런데 잠깐, 우리 인간은 모든 선택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술하지만, 우리는 미시 세계에 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작은 입자들이 존재하는 미시 세계와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는 거시 세계의 경계는 어디일까? 언제 양자역학의 세계가 끝나고 고전역학의 세계가 시작될까? 더 나아가, 언제 고전역학의 세계가 끝나고 통계역학 statistical mechanics의 세계가 시작될까?
-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자유의지가 존재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만약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 이런, 우리는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은 이렇게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닌 듯하다. 이 질문들은 뒤에서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래도 굉장히 중요한 질문 하나는 생각해 보고 넘어가자.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입자들은 미시 세계에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언뜻 생각해 보면, 출렁거리는 파동은 단단한 물질을 만들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출렁거리는 파동이 어떻게 단단한 물질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파동이 단단한 원자를 구성할까?"
- 사실, 철보다 무거운 원소는 별 바람을 통해서 우주로 방출되는 것보다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우주로 방출된다. 먼저, 철이 생성되려면 별의 질량이 커야 한다. 철의 핵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중력 수축과 핵융합 팽창을 거칠 정도로 물질의 양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거운 별의 중심에 철이 만들어지면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는 그보다 더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별의 중심부에서 중력 수축을 막을 수 있는 핵융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별은 이제 대규모로 중력 수축을 일으키고, 종국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온도와 압력으로 인해 폭발한다. 이것이 바로 초신성 supernova의 폭발이다. 즉,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모두 초신성이 폭발한 결과다.
- 정리해 보자. 우주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는 기본적으로 빅뱅으로 생성된 수소와 헬륨을 바탕으로, 별이라는 용광로에서 만들어진다. 별에서 만들어진 원소들은 별 바람을 통해 우주로 서서히 퍼져나가거나, 초신성의 폭발로 우주에 흩뿌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원소들은 적절하게 모여 우리 몸을 구성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 무언가 낭만적이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서로 다른 원소는 무엇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원소는 탄소, 수소, 산소다. 물론, 수소와 산소는 물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대부분은 탄소와 물이다. 그리고 탄소와 물은 서로 아주 다른 물리화학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탄소의 핵, 수소의 핵, 산소의 핵은 각각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만 서로 다를 뿐, 모두 크기가 매우 작고 밀도가 굉장히 높은 단단한 점과 같다. 핵 안에도 내부 구조가 있지만, 보통 우리가 아는 원소의 성질은 핵의 직접적인 성질이 아니다. 그보다 원소의 물리화학적 성질은 전자가 핵 주변에서 어떤 궤도를 도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원소의 물리화학적 특성은 전자가 핵 주변에서 어떻게 양자역학적으로 공명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 핵은 전자들을 붙잡은 다음에야 진정으로 원소가 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원자 속에서 전자가 어떻게 양자역학적으로 공명하는지를 알아보자.
- 원자 속 전자들은 서로 거의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의 에너지 준위는 전하량이 보정된 수소 원자의 에너지 준위를 전자들이 낮은 에너지부터 높은 에너지까지 차곡차곡 채워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보편적인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잠깐, 원자의 보편적인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지닌 성질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
- 사람은 축축한 탄소 덩어리다. 사람의 몸 대부분이 물과 탄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을 빼버리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탄소 덩어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탄소를 잘 이해하면 사람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탄소와 다른 원자들을 적절히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물질의 상태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레고 몇 조각으로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고 유한한 픽셀들로 무수한 이미지들을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탄소를 잘 이해한다고 해서, 탄소와 다른 원소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원소 없이 순전히 탄소만으로도 성질이 전혀 다른 물질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흑연 graphite과 다이아몬드 diamond.
- 물론, 탄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물질은 온도와 압력 같은 외부 조절 변수가 주어지면 그에 맞추어 상태를 바꾼다. 그리고 고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특히, 원자들이 자발적으로 격자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격자 구조를 형성한다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
- 원자들은 실제로 액체나 기체 상태에서 아무 공간에 위치할 수 있다. 그러나 고체 상태에서는 '자발적으로' 자신들에게 걸맞는 격자 구조를 형성한다. 어떠한 것도 개별 원자에게 '너는 이곳, 너는 저기' 하고 명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격자 구조가 일단 형성되고 나면, 원자들은 그 구조가 허용하는 위치에만 머문다. 다시 말해, 공간에서 모든 위치가 동등하다는 성질, 즉 병진 대칭성 translational symmetry이 자발적으로 깨지는데, 이를 전문적으로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라고 부른다. 거칠게 말해, 탄소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사람이 될 수도, 흑연이 될 수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잠깐만! 우리가 아는 한, 우주는 결정론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곳에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과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예측되는 정확한 시점과 장소에 떨어진다. 다시 말해, 우주의 동역학은 물리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렇다면 결정론적인 우주에서 자발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혹시 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것이 장미, 여우, 어린 왕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각자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어떤 비밀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 전기장과 자기장을 스칼라 퍼텐셜과 벡터 퍼텐셜로 표현하는 공식을 다시 써보자.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공식에는 이상한 자유도가 하나 숨어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은 운동 방정식을 통해 입자의 동역학을 완벽하게 결정한다. 다시 말해, 전기장과 자기장이 주어지면 입자의 운명은 기계론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런데 이 공식에 따르면, 전기장과 자기장이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스칼라 퍼텐셜과 벡터 퍼텐셜을 어떤 범위 안에서 임의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이상한 자유도가 있다.
- 구체적으로, 자유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기장은 벡터 퍼텐셜의 소용돌이, 즉 회전이다. 이전 절에서 기울기는 회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벡터 퍼텐셜에 임의의 기울기를 더해도 그것의 회전, 즉 자기장은 변하지 않는다.
-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러한 전기장의 변화는 쉽게 무효화될 수 있다. 즉, 벡터 퍼텐셜과 동시에 스칼라 퍼텐셜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전기장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전문적으로 이렇게 스칼라 퍼텐셜과 벡터 퍼텐셜을 동시에 바꾸는 것을 '게이지 변환 gauge 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
- 정리해 보자. 입자의 동역학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리고 전기장과 자기장은 스칼라와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스칼라 퍼텐셜과 벡터 퍼텐셜에는 게이지 변환에 대한 이상한 자유도가 있다. 이 이상한 자유도는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맥스웰 방정식에 미처 제거하지 못한 군더더기라도 붙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군더더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 팃포탯의 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이 있다.
1. 선량함 : 절대로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2. 단호함 : 상대방이 배신하면, 단호하게 보복한다.
3. 관대함 : 상대방이 협력의 손을 내밀면, 관대하게 용서하고 곧바로 협력한다.
4. 명료함 : 상대방이 내 전략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현명한 선택, 즉 협력을 유도한다.
- 재미있게도, 이 네 가지 특징은 고득점에 속한 다른 프로그램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사실, 팃포탯이 우승한 이유는 이 네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진 유일한 전략이 바로 텃포탯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 갑자기 인생의 교훈을 배운 느낌이다. 착하게 살자. 하지만 나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하자.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사람이 다시 착해지면 관대하게 용서하자.
-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인생의 교훈이 모든 참여자가 단지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하다 보니까 저절로 얻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저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개체들이 자발적으로 선해졌다는 점이다.
- 이제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대회가 여러 번 열린다고 해보자. 이때 다음 대회 참여자는 이전 대회 참여자의 후손이다. 따라서 어떤 참여자가 이전 대회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번식을 많이 했다면, 그 참여자의 전략은 다음 대회에서 그만큼 비중이 높아진다. 이렇게 대회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고득점을 얻는 전략은 점점 더 많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게임 전략의 진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석하는 이론을 '진화 게임 이론 evolutionary game theory'이라고 한다.
- 하지만 양동이를 충분히 빨리 회전시킨다면, 물의 표면은 회전축을 중심으로 오목하게 파일 것이다. 왜 그럴까? 양동이에 담긴 물은 위치에 상관없이 골고루 중력으로 밑으로 당겨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뉴턴의 운동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괜찮다. 양동이에 담겨 회전하는 물의 관점에서, 중력이라는 힘뿐만 아니라 회전의 중심으로부터 물을 멀어지게 만드는 새로운 힘, 즉 원심력을 도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원심력은 물 표면이 오목하게 파인다는 사실에 뉴턴의 운동 법칙을 꿰어 맞추기 위해 도입한 가공의 힘이다. 그렇다고 원심력이 아무렇게나 도입된 힘은 아니다. 물의 관점에서 원심력은 실제로 존재한다.
- 하지만 양동이에 담겨 회전하는 물의 입장이 아니라, 외부에서 정지 상태로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 즉 관성 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을 도입하지 않고도 물의 표면이 오목하게 파이는 현상을 잘 기술할 수 있다. 물은 양동이의 회전과 물 분자 사이의 점성으로 인해 회전하게 되며, 이로부터 운동랑을 얻는다. 운동량을 얻은 물은 운동량의 방향, 즉 회전 운동의 접선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회전축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점점 밀려나는 것이다. 결국, 관성 좌표계에서 물의 표면은 새로운 힘 없이도 단지 운동 법칙에 따라 오목하게 파이는 것으로 관찰된다.
- 정리하면, 회전하는 물의 입장에서는 원심력을 도입하면 되고,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힘을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원심력과 같이 관성 좌표계가 아닌 상황을 뉴턴의 운동 법칙에 꿰어 맞추기 위해 도입하는 가공의 힘을 '관성력 inertial force'이라고 한다.
- 정리해 보자. 힘은 상호작용이다. 영화, 컴퓨터 시뮬레이션,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힘들과 같지는 않지만, 물리학에서도 힘은 상호작용의 다른 이름이다. 좋다. 음, 그런데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힘의 본질은 무엇일까? 조금 다르게 질문해 보자.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힘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 우주에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이 있다. 바로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다.
- 첫 번째 힘은 중력이다. 잘 알고 있듯이, 중력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게 하고, 태양을 은하계의 일부로 묶어주며, 더 나아가 은하계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거대 구조를 만들어 준다. 다시 말해, 중력은 우리 우주를 하나로 뭉치는 응집력이다. 반면, 빅뱅으로 시작된 우리 우주는 현재 가속 팽창 accelerated expansion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우주가 점점 더 빠르게 커지고 있 ...
- 첫 번째 입자의 방향으로 밀린다. 결국 두 입자는 광자 부메랑 던지기 놀이를 하면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발생한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 세 번째 힘은 약력이다. 3장에서 설명했듯이, 약력은 베타 붕괴라는 원자핵의 방사성 붕괴 현상에 관여하는 힘이다. 구체적으로, 베타붕괴에서는 원자핵 속의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면서 전자를 방출하거나,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면서 양전자를 방출할 수 있는데, 이때 관여하는 힘이 바로 약력이다. 그런데 사실, 약력은 전자기력과 같은 힘이다. 즉, 전자기력과 약력은 기본적으로 전자기약력 electroweak force이라는 동일한 힘의 서로 다른 단면들이다. '동일한 힘의 서로 다른 면'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 앞에서 배운 것을 떠올려 보자. 전기력과 자기력을 주는 전기장과 자기장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기장이라는 통합된 실체의 서로 다른 단면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전자기장은 맥스웰 방정식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방정식에 의해 기술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기력과 자기력은 전자기력이라는 같은 힘의 서로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자기력과 약력이 '동일한 힘의 서로 다른 단면들'이라는 의미는 이보다는 약간 더 복잡하다. 높은 온도에서 전자기력과 약력은 전기력과 자기력이 그렇듯이 하나의 통합된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똑같은 힘이다. 그런데 높은 온도에서 하나였던 전자기약력은 온도가 내려가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겪는다. 그러고 나면 전자기약력은 서로 다른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2개의 서로 다른 힘, 즉 전자기력과 약력으로 갈라진다.
- 네 번째 힘은 강력이다. 강력은 원자핵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힘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원자가 형성되려면 먼저 원자핵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일반적인 원자핵의 내부에는 중성의 전기 전하를 지니는 중성자뿐만 아니라 양성의 전기 전하를 지니는 양성자가 여러 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원자핵은 아주 작다. 이렇게 매우 작은 공간에 여러 개의 양성자를 욱여넣으면 엄청나게 큰 전기적 반발력이 생길 것이다. 전자기력만 있다면 원자핵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폭발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전자기력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을 서로 끌어당겨서 하나의 원자핵으로 뭉치는 강한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이 바로강력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원자핵을 하나로 뭉치는 힘은 강력의 자투리 힘 residual force인 핵력 nuclear force이다.)
- 먼저, 크게 보면 핵력의 작동 원리는 전자기력과 약력의 작동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핵력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파이 중간자는 입자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발생한다. 그런데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그 자체로 한 점과 같은 근본적인 입자가 아니라, 그 안에 구조를 가지고 있는 복합체다. 구체적으로, 양성자는 2개의 위 쿼크 up quark와 1개의 아래 쿼크 down quark로 이루어지고, 중성자는 반대로 1개의 위 쿼크와 2개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다. 참고로, 쿼크는 총 여섯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위 쿼크와 아래 쿼크 말고도 맵시 charm, 기묘 strange, 꼭대기 top, 바닥 bottom 쿼크가 있다.
- 이와 비슷하게, 파이 중간자도 쿼크의 복합체다. 구체적으로, 파이 중간자는 위 쿼크와 아래 쿼크가 입자-반입자 쌍을 이루어 만들어지는 복합체다. 참고로, 우주의 모든 입자에는 마치 쌍둥이와 같은 반입자 antiparticle가 존재한다. 입자와 반입자는 전기 전하가 반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물리적인 성질이 동일하다.
-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았을 때, 강력은 쿼크들이 글루온 gluon이라는 입자를 주고받으면서 발생하는 힘이다. 참고로 글루온은 원자핵을 붙여주는 접착제 glue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 붙여졌다. 따라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파이 중간자라는 매개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발생하는 핵력은, 양성자와 중성자와 파이 중간자 안의 쿼크들이 글루온을 서로 복잡하게 주고받는 상호작용인 것이다. 즉, 핵력은 강력의 자투리 힘이다.
- 여기까지 읽으며, 전자기력, 약력, 강력의 작동 원리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즉, 전자기력은 광자를, 약력은 W⁺, W-, Z보손을, 강력은 글루온을 주고받으면서 발생한다.
- 작동 원리가 이렇게 유사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힘을 기술하는 이론들이 모두 하나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게이지 대칭성의 원리다.
- 전자기력, 약력, 강력을 기술하는 이론은 모두 게이지 대칭성이라는 하나의 원리에 기반한다. 약력과 강력의 게이지 대칭성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전자기력의 게이지 대칭성과 동일하다. 따라서 전자기력의 게이지 대칭성에 집중해 보자.
- 독자들은 운명을 믿는가? 간단히 말해, 운명이란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운명은 물리학적 세계관과 매우 잘 맞는 관점처럼 보인다. 물리학에 따르면,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모든 입자의 동역학은 물리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우주의 운명도 초기 조건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계론적 세계관 또는 과학적 결정론 scientific determinism이라는 관점이다. 19세기의 프랑스 수학자였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Pierre Simon Laplace는 이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절절하게 표현했다.
"우주의 현재 상태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특정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리고 그의 지적능력이 충분히 강력해서 이에 대한 정보를 분석할 수 있다면, 그는 우주의 가장 거대한 천체와 가장 미세한 원자의 움직임을 단 하나의 공식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적인 존재에게는 아무것도 불확실하지 않고 미래가 마치 과거처럼 눈앞에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 여기서 언급된 지적인 존재는 오늘날 '라플라스의 악마 Laplace's demon'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실재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첫째는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의 운명은 파동함수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파동함수는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결정론적인 방정식에 의해 기술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양자역학도 결정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플라스의 악마가 특정 순간 모든 입자의 동역학을 기술하는 파동 함수를 알고 있더라도, 의미 있는 모든 물리량은 측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물리적인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전의 모든 정보가 사라지고 우주의 상태는 리셋된다. 우주가 어느 상태로 리셋되는지는 확률로만 결정되며, 파동 함수의 제곱이 그 확률을 준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는 1장에서 설명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물리적인 측정이 이루어지면 파동 함수는 붕괴된다. 적어도 측정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이전 상태의 정보는 모두 없어진다. 제아무리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우주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가질 수는 없다.
- 두 번째는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이는 제아무리 대단한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떤 순간에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우주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비롯한 우주의 전체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하기 때문이다.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방을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 결국 라플라스의 악마는 존재할 수 없다. 우주의 운명을 완벽하게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우주에는 예측 가능한 질서도 분명 존재한다. 열역학 제2법칙을 따라 전체적으로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더라도, 국소적으로는 질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소적인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이다.
-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이 열역학 제2법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복잡한 물질 구조를 지녀야 한다. 원자가 형성되어야 하고, 원자들은 분자 molecule로 결합해야 하며, 분자들은 응집물질 condensed matter로 결합해야 한다. 응집물질은 고도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결합에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힘이다. 힘의 근본적인 원리는 게이지 대칭성에 의해 주어진다. 그리고 게이지 대칭성은 파동함수를 전제한다. 따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자역학은 단순히 원자가 형성되는 공명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근본적인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원자 자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자역학은 응집물질과 생명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 잠깐! 앞서, 수소 원자의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얻은 결과가 보어 원자 모형의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보어의 양자화 조건은 방위각에 대한 파동 방정식과 관계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방위각에 대해 정상파가 형성되는 조건은 자기 양자수 m을 양자화시킨다. 그런데 실제로 에너지 준위를 결정하는 양자수는 자기 양자수 m이 아니라, 주 양자수 n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두 양자수가 참으로 묘한 우연에 따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이 묘한 기분을 뒤로하고,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수소 원자의 에너지 준위를 주는 공식을 얻었다. 수소 원자 속 전자는 이 에너지 준위 가운데 어느 하나에 위치할 수 있다. 전자가 가장 낮은 에너지 준위에 위치한다면, 수소원자의 상태는 가장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 상태가 바닥 상태다. 바닥 상태보다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상태는 일반적으로 '들뜬 상태'라고 한다. 자, 이로써 우리는 수소 원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좋다. 그렇다면 다른 원자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원자들이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규칙은 무엇일까?
- 물론 이렇게 개별적인 입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1번과 2번 전자의 위치를 바꾸어도 파동 함수가 기술하는 물리적 상황은 바뀌면 안 된다. 파동함수가 기술하는 물리적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앞에서 여러 번 보았듯이,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확률은 파동 함수의 크기의 제곱에 의해 주어진다. 파동함수의 위상을 임의로 바꾸어도(이것이 다름 아닌 게이지 변환이다), 확률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1번과 2번 전자의 위치를 바꾸기 전의 파동함수와 바꾼 다음의 파동함수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상황을 기술해야 하며, 이때 위상인자의 차이만 있거나 없어야 한다. 달리 말해, 위상 인자가 아닌 다른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 일반적으로, 전자를 포함한 모든 입자의 교환으로 발생하는 위상 0는 모든 입자의 위치에 의존하는 매우 복잡한 함수일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가장 단순한 두 가지 경우만 허용한다. 즉, 우주의 모든 입자는 입자 교환으로 발생하는 위상 인자를 +1이나 -1, 이렇게 둘 중 하나만 가진다. 입자 교환으로 발생하는 위상 인자가 +1인 입자를 '보손'이라고 부르고, -1인 입자를 '페르미온 fermion'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광자는 보손이고, 전자는 페르미온이다. 사실, 입자 교환으로 발생하는 위상 인자가 +1이 아니라 임의의 복소수인 경우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아직 실험적으로 관측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특별한 통계는 2차원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이 통계를 따르는 입자를 '애니온 anyon'이라고 한다.
- 이 조건에서 1번과 2번 입자의 위치가 같아진다고 해보자. 즉, r1=r2가 된다고 해보자. 이는 어떤 함수가 있는데, 이것과 이것에 음의 부호를 붙인 것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파동 함수가 0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2개 이상의 구별 불가능한 페르미온은 같은 위치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다름 아닌 파울리의 배타 원리다.
- 그런데 사실, 위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 잘 알고 있듯이, 어차피 입자는 한 점에 위치하지 않고 공간에 퍼져 있다. 따라서 입자를 교환한다는 것은 위치뿐만 아니라 입자의 상태를 구별할 수 있는 모든 물리량을 모두 교환한다는 것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파울리의 배타 원리가 말해주는 바는 관찰 가능한 모든 물리량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양자 상태'에 2개 이상의 페르미온이 함께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치가 아닌 관찰 가능한 물리량에는 무엇이 있을까?
- 전자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궤도 자유도 orbital degree of freedom 말고도, 스핀이라는 내부 자유도 internal degree of freedom를 가진다. 따라서 앞에서 1번과 2번 입자를 교환할 때, 사실 위치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스핀 상태까지 교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궤도와 스핀 양자 상태를 모두 교환하면, 파울리의 배타 원리가 만족된다.
- 정리해 보자. 전자는 페르미온이다. 여러 전자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기술하는 파동함수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를 만족한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에 따르면, 주어진 궤도 상태마다 스핀 업과 스핀 다운을 지니는 전자를 둘씩 채워 넣을 수 있다. 전자와 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있다면, 이 방식으로 모든 원자의 전자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방식은 대부분의 경우 꽤나 잘 들어맞는다. 물론, 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 원자 번호가 커지면 커질수록 원자의 전자구조도 복잡해진다. 여기서는 원자핵의 전하량이 큰 원자의 전자 구조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어지는 절에서 보겠지만, 전자와 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원자들의 결합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바로 격자 구조 때문이다. 원자핵들은 자유 전자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내부 전자들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고, 원자핵들과 내부 전자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특정한 격자 구조가 형성되는 토대를 제공한다. 격자 구조에는, 마치 바다의 물길처럼, 자유 전자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생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어느 길로는 가볍게, 다른 어느 길로는 무겁게 움직인다. 전자의 질량이 운동 방향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격자 구조 안에서 정의되는 전자의 질량을 '유효질량 effective mass'이라고 하는데, 전자의 유효 질량은 방향에 따라 크거나 작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질량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정의되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이 경우에 운동 에너지는 더 이상 운동량의 제곱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격자 구조 안의 자유 전자들은 아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 정리해 보자. 최외각 궤도의 전자들은 자유 전자가 되어, 원자핵과 내부 전자들이 형성하는 격자 구조 안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이러한 자유 전자들은 주어진 격자 구조를 최종적으로 안정화시키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 결국, 내부 전자와 자유 전자를 포함한 모든 전자는 격자의 형성에 제 나름대로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을 바로 '금속 결합'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유 전자들은 정확히 어떤 상태를 구성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격자 구조 안에서의 운동 에너지는 매우 복잡하다. 그럼에도 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있다면, 전자들은 마치 원자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격자 구조 안에서도 운동 에너지가 낮은 상태부터 높은 상태까지 차곡차곡 채워나갈 것이다. 전문적으로, 이와 같은 상태를 마치 바닷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전자들이 운동량 공간을 채운다는 뜻에서 '페르미 바다 Fermi sea'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질서 있는 격자 구조를 지닌 결정 안에서 자유 전자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페르미 바다를 이룬다.
- 페르미 바다에 관한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일까? 그렇지 않다. 아직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우리는 페르미 바다의 형성에 관해, 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기억해 보면, 공유 결합의 경우 전자들의 상호작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르미 바다에서 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있을까?
- 답을 말하면, 그렇다. 무시할 수 있다. 왜 그럴까? 먼저, 페르미 바다의 깊숙한 밑바닥에 자리 잡은 전자들은 쿨롱 상호작용이 있어도 거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전자들은 실제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페르미 바다의 깊은 밑바닥에서는 전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페르미 바다의 밑바닥에 있는 운동량 상태들은 이미 전자들로 꽉 채워져 있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에 의하면, 이미 채워진 상태에는 다른 전자가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페르미 바다의 밑바닥에 있는 전자들은 서로 거의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쿨롱 상호작용은 고작 페르미 바다의 표면과 가까운 곳에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 이제 페르미 바다의 표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자. 페르미 바다의 표면 위에 어떤 전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이 전자는 표면 아래의 다른 전자와 쿨롱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이 쿨롱 상호작용의 결과로, 표면 아래의 전자는 운동 에너지를 얻고 페르미 바다의 표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면 탈출한 전자가 있었던 운동량 상태는 비워진다. 결과적으로, 페르미 바다의 표면 위에 있는 전자는 페르미 바다의 내부에 빈 공간을 하나 만들고, 외부에 전자를 하나 만듦으로써 들뜬 상태를 일으킨다. 참고로, 페르미 바다의 내부에 생긴 이러한 빈 공간을 '홀 hole'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페르미 바다 안의 홀과 외부의 전자는 마치 거품처럼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들뜬 상태를 일으킨 원래 전자를 따라다닌다. 외부의 전자와 홀이 만드는 이러한 쌍을 전문적으로는 '전자-홀 거품 electron-hole bubble'이라고 한다.
- 그런데 이 전자-홀 거품은, 마치 작은 철조각들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처음에 자신을 만들어 낸 전자를 둘러싸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면 원래 전자는 전자-홀 거품에 완전히 가려져 거의 사라진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 멀리 떨어진 전자들끼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기전하가 없는 중성의 입자처럼 보인다. 결국, 전자와 전자 사이의 쿨롱 상호작용이 사라지고, 페르미 바다는 안정화된다. 질서 있는 격자 구조를 지닌 결정 안에서는 전자가 정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이는 자유 전자에게 정말 행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정말 행운이다. 페르미 바다가 안정화된다는 점은 응용 면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기·전자공학 전체가 근본적으로 금속과 반도체에서 전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물론 페르미 바다가 항상 안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이 무지막지하게 커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페르미 바다도 무너진다. 예를 들어, 마치 물이 어는 것처럼 페르미 바다도 얼 수 있다. 전자도 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자의 얼음은 '위그너 결정 Wigner crystal'이라고 한다.
- 앞 절에서는 고체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자연에는 고체만 있지 않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물질에는 고체, 액체, 기체, 이렇게 세 가지 상태가 있다. 물질이 이 세 가지 상태 사이를 오가는 것을 '상전이 phase transition'라고 한다. 쉽게 말해,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거나, 물이 끓어서 수증기가 되는 과정이 바로 상전이다.
- 어떻게 하면 상전이가 발생할까? 한 가지 답은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언뜻 쉬워 보이는 이 답은, 깊이 생각하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온도라는 개념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온도를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무질서도를 이해해야 한다. 온도는 기본적으로 무질서도를 조절하는 변수이고,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정량화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상전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엔트로피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항상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시간과 무질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이상한 관계에 놓여 있을까?
- 경도 문제에서 시간은 경도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시간은 곧 위치다. 상대성이론을 차치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은 이렇게 물리학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만약 시간과 공간이 정말로 비슷한 것이라면, 공간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시간에서도 앞뒤로 움직일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시간의 방향성은 도대체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 1. 세계는 빈 공간 void과 그 안에 존재하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2. 원자는 소멸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3. 모든 변화는 원자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 모든 현상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우연적인 것은 없다.
- 오늘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너무나 익숙한 관점이다. 현대물리학의 관점이라고 보아도 크게 손색이 없다. 하지만 볼츠만의 시대에는 원자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일종의 수학적 도구로 생각되었다. 원자를 맨눈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그보다 훨씬 더 유명한 '수학적인' 원자론, 플라톤의 4원소설에 가려져 거의 잊히고 만다.
- 플라톤의 4원소설에 따르면, 원자 또는 원소 element에는 네 종류가 있으며, 이 네 원소는 정다면체 regular polyhedron라는 수학적으로 안정적인 구조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불, 흙, 공기, 물은 각각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에 해당한다. 사실, 정다면체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앞선 네 가지 말고도 정십이면체가 있는데, 플라톤은 정십이면체가 빈 공간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비슷하게, 플라톤의 4원소설에서도 모든 변화는 물, 불, 흙, 공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의 4원소설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원자는 파동 함수가 안정적인 정상파를 만드는 조건으로부터 형성된다. 하지만 고대 이후, 플라톤의 4원소설은 실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일종의 비유로 받아들여졌다.
- 19세기에 이르러, 대다수 물리학자들은 물질이 원자와 같이 불연속적인 입자가 아닌 연속적인 매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원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주류 물리학자들은 원자가 그저 편리한 수학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대조적으로,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과 존 돌턴 John Dalton의 업적으로 인해, 대다수 화학자들은 이미 원자를 실체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보다 직접적인 증거를 원했다. 불행히도, 이러한 증거는 볼츠만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얻어진다.
- 정보는 무질서와 밀접하다. 잠깐,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관련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재미있게도 정보는 무질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를 깨닫고 정보를 다루는 체계적인 수학 이론을 발전시킨 수학자가 있었는데, 바로 클로드 섀넌 Claude Shannon이다. 정보 이론 information theory의 창시자로 알려진 섀넌은 1948년에 미국벨 연구소 Bell Labs에서 <통신에 관한 수학 이론 A Mathematical Theory ofCommunication>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출간했다. 당시 섀넌은 통신에 수반되는 정보의 양을 정확하게 정의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전화선을 이용해 어떤 정보를 전달한다고 할 때, 정보의 양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전화선과 같은 특정 통신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보편적인 정보의 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 사실, 상당히 철학적으로 들리는 섀넌의 이 질문은 실질적인 응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통신 요금은 전달되는 정보의 양에 비례해 부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요금부과를 위해서라도 정보의 양을 정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섀넌의 질문은 통신의 질적인 면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만약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의 양이 통신수단, 예를 들어 전화선이 허용하는 용량보다 크면 통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정보를 압축한다면 적은 용량의 전화선만 가지고도 동일한 내용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섀넌의 질문은 정보의 압축 기술에 관해서도 핵심적인 물음이다.
- 자, 이제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 정보의 양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꾸어 문제를 더 구체화해 보자. 어떤 사람이 문장을 전송한다고 하자. 문장은 문자의 나열이다. 편의상, 영어 문장을 생각하면, 문장은 'A', 'B', 'C', 'D'와 같은 알파벳을 순서대로 전송하는 것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제 앨리스와 밥이라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앨리스는 보통의 영어 문장으로 이루어진 편지를 전송하고자 한다. 반면, 밥은 재미로 알파벳을 무작위로 발생시켜 그 결과를 전송하고자 한다. 앨리스와 밥, 둘 중에서 누구의 메시지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직관적으로는 당연히 앨리스의 편지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정보를 전송하는 입장에서 보면, 밥의 메시지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 왜 그럴까? 앨리스의 편지를 구성하는 보통의 영어 문장에는 불필요한 중복 redundancy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통의 영어 문장에서는 알파벳 'Q' 다음에 거의 반드시 'U'가 나온다. 또한 'T'와 'H'가 연달아 나오는 경우, 즉 'TH'가 나오는 경우에는 그다음에 'E'가 나올 확률이 매우 크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완전한 문장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If u cn rd ths, u'd knw.
(If you can read this, you would know.)
- 섀넌의 분석에 따르면, 보통의 영어 문장은 75%의 불필요한 중복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앨리스의 문장은 내용의 손실 없이 적절하게 잘 압축될 수 있다. 반면,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밥의 문장에서는 각각의 알파벳이 나타날 확률이 모두 동일하며, 아무 중복도 없다. 우리는 밥의 문장에서 한 글자를 읽고 그다음에 어떤 알파벳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즉, 우리는 밥의 문장을 결코 압축할 수 없고, 밥의 문장은 통째로 전송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밥의 문장은 앨리스의 문장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정보의 양은 무질서도다.
- 그런데 무질서도는 엔트로피다. 따라서 정보의 양은 곧 엔트로피다. 이를 '정보 엔트로피 information entropy'라고 한다. 처음 들으면, 정보의 양이 무질서도라는 것은 직관에 반하는 듯하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차분히 생각해 보자. 정보는 놀라움의 정도다. 예를 들어, 내일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뜬다는 예측은 거의 아무런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럴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반면, 다음 주 복권 당첨 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한 예측은 엄청난 정보를 지닌다. 당첨 확률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한편, 무질서에는 질서가 없기에 이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즉, 놀라움의 정도가 크다. 따라서 무질서도가 증가할수록 놀라운 일들도 더 많이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무질서도는 놀라움의 정도이고, 곧 정보의 양과 같다.
- 정리해 보자. 우주는 시간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것은 정보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따라 우주에는 정보의 양이 점점 많아진다.
-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라플라스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우주의 운명이 인과관계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질서도가 증가하면, 우주의 운명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에서 벌어지는 온갖 놀라운 변칙들을 알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자, 그렇다면 엔트로피가 최대화된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 앞에서 보인 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모든 시스템의 미시 상태들은 볼츠만 분포의 확률에 따라 발생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볼츠만 분포를 아예 '바른 분포'라는 의미를 담아 '바른틀 앙상블 canonical ensemble'이라고 부른다. 잠깐, 이쯤에서 멈추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자. 미시상태가 발생할 확률은 그것이 가졌던 초기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그것의 에너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참고로, 온도도 전체 에너지와 관련 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 우리가 고전역학 및 양자역학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주어진 시스템의 동역학은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인과관계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초기 조건은 서로 다른 고전역학적인 궤도 또는 양자역학적인 상태를 야기한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시스템은 엔트로피가 최대화되어 결국 가장 무질서한 상태에 다다른다. 특히, 에너지가 고정된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최대화되면 미시 상태들이 발생할 확률은 바른틀 앙상블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바른틀 앙상블에 따르면,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고정되는 에너지를 제외하고 미시 상태들이 가졌던 초기 조건에 대한 모든 정보는 완전히 유실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 당연한 말 같지만, 태양계는 지구와 태양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태양계는 수성, 금성, 화성과 같은 행성들, 그리고 달과 같은 위성들을 포함한 여러 천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시스템이다. 태양계는 이른바 '다체 문제 many-body problem'의 대상이다. 다행히 다양한 천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모두 태양에 비해 질량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아서, 개별 천체의 동역학은 대부분 태양과 그 천체 사이의 2체 문제 two-body problem로 근사시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하게 위성의 동역학은 위성이 속한 천체와 개별 위성 사이의 2체 문제로 근사시킬 수 있다. 태양계 문제를 이렇게 몇 단계의 2체 문제로 근사시킬 수 있다는 점은 인류에게 큰 행운인데, 만약 태양과 천체들의 질량이 서로 비슷했다면 우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뉴턴의 운동 방정식이 주어지더라도 이를 풀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 사실, 이는 단순히 다체 문제의 해를 깔끔한 수학 공식으로 얻기 어렵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다체 문제의 해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며,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상하다. 다체 문제의 복잡성은 천체의 수가 아주 많을 필요도 없이 단 3개로 이루어진 3체 문제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3체 문제는 이른바 '카오스 chaos'라고 불리는 혼돈 현상을 보인다.
- 1880년대 프랑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 Henri Poincare는 3체 문제의 해 가운데 계속 발산하지 않으면서도 주기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 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해는 초기에는 매우 규칙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에너지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3개의 천체가 우주 공간을 아무런 패턴 없이, 즉 무작위로 모두 훑고 지나간다고 말해준다. 그렇다. 이는 에르고딕 가설이 맞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카오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다. 다시 말해, 초기 조건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오류가 시간에 따라 극도로 증폭되어 결국 최종 궤도를 예측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참고로, 이렇게 오류가 증폭되어 예측이 불가능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리아프노프 시간 Lyapunov time'이라고 부른다.
- 대기의 대류 운동을 기술하는 로렌츠 방정식 Lorenz equation에 따르면, 기상 현상은 며칠 정도만 지나면 혼돈에 빠진다. 다시 말해, 기상현상의 경우에 리아프노프 시간은 단 며칠이다. 이것이 날씨를 일주일 전에 미리 예측하는 것이 그다지 의미 없는 이유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런 특징은 '나비 효과 butterfly effect'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이 별명은 앞선 로렌츠 방정식을 제안한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 Edward Lorenz 가 1972년 제139회 미국과학진흥협회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에서 진행한 강연의 제목에서 나왔다. '브라질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키는가?'
- 다행히도 태양계의 경우에는, 리아프노프 시간이 약 수백만 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머지않은 날에 태양계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행동할 확률은 매우 낮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우리는 카오스 이론에 기반한 에르고딕 가설을 통해 바른틀 앙상블을 뉴턴의 운동 방정식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 앗, 잠깐! 아무리 카오스가 초기 조건에 민감하다고 해도, 입자의 궤적은 여전히 초기 조건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다시 말해, 초기 조건을 무한히 정밀하게 알아낼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우주의 운명은 인과관계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우리가 양자역학을 같이 생각하면, 양자역학의 오묘함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 하지만 모든 기계식 시계는 결국 멈춘다. 비단 기계식 시계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즉 엔트로피가 최대화되어 열평형에 도달한다. 시간의 방향이 엔트로피의 최대화를 향한다면, 이는 우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 깨진 유리병은 다시 하나로 조합되지 않으며,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 활기차고 젊은 우주는 서서히 늙어간다. 우리 모두는 필멸할 운명이다. 이렇게 엔트로피가 최대화되어 우주의 모든 것이 멈추는 결말을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 heat death of the universe'이라고 한다. 즉, 바른틀 앙상블은 곧 죽음이다.
- 하지만 필멸할지라도, 우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유리병이 깨지려면 먼저 유리병이 있어야 한다. 물이 엎질러지려면 먼저 물이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한다. 즉, 국소적일지라도 먼저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는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달리 말해, 낮은 엔트로피를 지닌 상태가 존재하도록 어느 순간 시스템의 초기 조건이 국소적으로 재설정된다는 의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 창발, 즉 나타남 emergence 덕분이다. 기계식 시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자면, 어느 순간 어떤 것이 시계태엽을 다시 감는 것이다. 이렇게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향으로 초기 조건이 재설정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창발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태엽을 감는 것이 시계 바깥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태엽을 감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시계다.
- "나는 당신네 인간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보았지. 오리온성좌의 어깨에서 불타던 공격선들. 탄하오저 입구 근처, 어둠 속에서 빛나던 C-빔들도 보았고. 이 모든 순간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마치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군?"
<블레이드 러너>의 줄거리에 대해 자칫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죽음을 앞둔 로이의 독백이 전달하는 메시지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로이의 독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질문에 대해 <블레이드 러너>가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분석해 보자. 레플리컨트들은 사진에 집착했다. 레이철도 가짜이기는 하지만 오래된 가족사진에 집착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진이 품고 있는 기억에 집착했다.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변화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레플리컨트들은 인간성을 얻기 위해 변화의 기록이 필요했다. 이 결론을 보다 큰 틀에서 해석해 보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다. 성숙하는 것은 로이가 데커드를 살려주는 것과 같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 안타깝게도, 이 멋진 해석은 한 철학자에게 빚지고 있다. 1927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빛나는 프랑스의 사상가, 바로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이다. 베르그송은 그의 대표작인 <창조적 진화 Lévolutioncréatric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한다는 것은 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존재는 창조적 진화다. 달리 말해, 존재는 진화할 때만 지속 duration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시간의 흐름은 지속이다.
-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와 같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안드로이드는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인공 생명 artificial life 은 가능한가?
- 튜링은 '현대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튜링 기계 Turing machine라는 개념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튜링이 튜링 기계를 발명한 이유는 20세기 초에 드러난 수학의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 있다. 구체적으로, 1900년을 전후로 수학의 기초인 집합론 set theory에서 여러 심각한 모순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수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다비트 힐베르트 David Hilbert는 수학을 완벽하게 무모순적인 체계 위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힐베르트의 주장에 많은 수학자들이 동의했으며, 그로 인해 촉발된 수학자들의 움직임은 실제로 수학 체계를 정비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움직임을 '힐베르트 프로그램 Hilbert's program'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다음을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완전성 completeness : 모든 참인 수학적 명제는 증명 가능하다.
2. 일관성 consistency: 참으로 증명된 임의의 수학적 명제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3. 결정 가능성 decidability: 어떤 수학적 명제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 있는 방법, 즉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 결론부터 말하면,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실패했다. 먼저, 완전성과 일관성은 괴델 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 incompleteness theorem에 의해 부정된다. 구체적으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제1정리와 제2정리로 구분된다. 괴델의 제1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어떤 수학적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에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수학 명제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따라서 수학의 완전성은 무너진다. 괴델의 제2 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어떤 수학적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 일관성도 무너진다.
- 그렇다면 임의로 주어지는 입력 정보에 대해 튜링 기계는 유한한 시간 안에 계산을 끝마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결정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셈이다. 참고로, 이 질문을 '정지 문제 halting problem'라고 부른다. 사실, 튜링 기계도 바로 이 정지 문제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튜링이 발견한 답은 부정적이었다. 다시 말해, 임의로 주어지는 입력 정보에 대해 튜링 기계가 계산을 끝마칠 수 있을지 아닐지는 결정할 수 없다. 여기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튜링의 증명이 지닌 핵심 내용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 임의로 주어지는 입력 정보에 대해 계산을 끝마칠 수 있을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튜링 기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논의의 편의상, 이 튜링 기계를 'H'라고 하자. H에 입력 정보와 그것의 구동 프로그램을 집어넣으면, H는 주어진 입력 정보에 해당하는 계산이 유한한 시간 안에 끝날지 아닐지, 즉 정지되는지 무한반복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 이제 H의 판단 결과에 따라 다음과 같은 작업을 실행하는 보조 장치를 붙인다고 하자. 이 보조 장치의 역할은 H의 판단 결과를 거꾸로 뒤집어서 출력하는 것이다. 즉, 계산이 정지된다는 결과가 나오면 무한반복된다는 출력을 하고, 무한반복된다는 결과가 나오면 정지한다는 출력을 하는 것이다. 보조 장치를 포함한 튜링 기계 전체를 'H+'라고 하자. 이제 H+를 구동하는 프로그램을 H+의 입력 정보로 집어넣어 보자. 자,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H+의 내부에 있는 H는 H+가 자신의 판단과 반대로 행동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H가 이 함정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즉, H가 판단하기에 H+가 정지된다는 출력을 한다면 보조 장치에 의해 H+는 실제로 무한반복된다는 출력을 할 것이다. 반대로, H가 판단하기에 H+가 무한반복된다는 출력을 한다면 보조 장치에 의해 H+는 실제로 정지된다는 출력을 할 것이다. 모순이다. 따라서 귀류법에 의해, H라는 튜링 기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틀렸다. 즉, 정지 문제는 결정 불가능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튜링 기계는 수학의 근본이 생각보다 굳건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그렇다면 튜링 기계는 우리에게 재앙일 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튜링 기계는 현대 컴퓨터의 바탕이다. 특히, 튜링 기계를 이용하면 원칙적으로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기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자기 복제를 수행하는 작업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폰 노이만이 상상한 인공 생명은 원칙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튜링과 폰 노이만이 살았던 시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당시 기술로 실제로 자기 복제하는 기계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갈증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까?
- 폰 노이만은 생명의 핵심이 물리적 실체를 넘어서는 일종의 논리적 구조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아는 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소에 기반한다. 탄소는 수소, 산소, 그리고 다른 몇몇 원소들과 결합해 생명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탄소 화합물을 만들어 낸다. 거칠게 말해, 생명은 탄소 화합물이다.
- 그런데 생명체는 꼭 탄소 화합물로 만들어져야 할까? <코스모 Cosmos>의 저자로 유명한 칼 세이건 Carl Sagan 은 생명체가 꼭 탄소 화합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을 탄소 우월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우주의 다른 곳에서는 생명체가 탄소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규소 silicon나 게르마늄 germanium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규소나 게르마늄은 원소 주기율표 periodic table of the elements에서 탄소와 같은 족 group에 속한다. 이른바 '탄소족 원소'라고 불리는 이 원소들은 최외각 에너지 준위에 전자를 4개씩 가지고 있다.
- 자, 그렇다면 탄소가 아닌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생명체는 어떤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물리적 실체를 넘어서는 생명을 지배하는 논리적 구조는 무엇일까?
- 폰 노이만은 그러한 논리 구조를 찾기 위해 그의 친구 스타니스와프 울람 Stanislaw Ulam과 함께 생명을 모사하는 수학 모형을 개발했다. (참고로, 울람은 수소 폭탄의 개발자로 유명하다.) 이 수학 모형은 셀룰러 오토마타, 즉 세포 자동 장치 cellular automata다. 간단히 말해, 셀룰러 오토마타는 바둑판과 같이 셀 또는 칸으로 나뉘어 있는 격자 위에서 펼쳐지는 동역학적 모형이다.
- 구체적으로, 격자 위 각 셀은 초기 시간 t0에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상태들 중 하나를 할당받는다. 다음 시간 t에 각 셀이 가지는 상태는 초기 시간 t0에 그것 주변의 다른 셀들의 상태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매 순간 각 셀의 상태는 그 직전 시간의 주변 셀들이 지닌 상태에 의존하면서 동역학적으로 변화한다. 주어진 셀의 상태가 주변 셀들의 상태에 정확히 어떻게 의존하는지는 튜링 기계의 행동 표와 비슷한 일종의 규칙으로 상황에 맞추어 프로그램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격자 위의 각 셀은 t0, t1, t2, t3 등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함수로 계속 변화한다. 폰 노이만이 처음 제안한 세포 자동 장치는 무한한 크기의 바둑판, 즉 2차원의 사각 격자 위에서 각 셀이 29개의 상태를 가지는 모형으로, 폰 노이만은 이 모형을 사용해 실제로 자기 복제하는 세포 자동장치를 구현했다. 좋다. 그런데 29개의 상태는 조금 복잡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셀의 상태가 변하는 규칙은 훨씬 더 복잡하다. 조금 더 단순한 모형은 없을까?
- 다행히도, 세포 자동 장치의 표본이 있다. 바로 영국의 수학자 존 콘웨이 John Conway 가 창안한 생명 게임 game of life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 게임은 생명을 모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콘웨이의 생명 게임은 2차원 사각 격자 위에서 벌어지며, 각 셀의 상태는 두 가지 상태, 삶과 죽음, 또는 0과 1 가운데 하나다. 각 셀의 상태는 그 셀을 둘러싼 셀 8개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생명 게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규칙을 따른다.
1. 생존 주변에 2개 또는 3개의 셀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셀은 다음 단계에서 살아남는다.
2. 사망 주변에 4개 또는 그 이상의 셀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셀은 인구 과잉으로 다음 단계에서 죽는다. 비슷하게, 주변에 0개 또는 1개의 셀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셀은 고립으로 다음단계에서 죽는다.
3. 탄생 주변에 정확히 3개의 셀이 살아 있다면, 죽은 셀은 다음 단계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 독자들은 생명 게임에서 어떤 패턴들이 생길 것으로 기대하는가? 그 답을 말하자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패턴이 생길 수 있다. 먼저, 패턴은 안정한 패턴과 불안정한 패턴으로 나뉜다. 그리고 안정한 패턴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로 구분된다.
1. 정물 still life : 아무 변화 없이 고정된 패턴. 예를 들면, 블록 block이 있다.
2. 진동자 oscillator :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면, 깜빡이 blinker가 있다.
3. 우주선 spaceship : 모양은 진동자와 같이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지만 위치가 변하는 패턴, 예를 들면, 글라이더 glider가 있다.
4. 총 gun : 패턴의 핵심 부분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으나 우주선을 계속 생성하는 패턴. 예를 들면, 고스퍼의 글라이더 총 Gospers glider gun 이 있다. 고스퍼의 글라이더 총은 30단계에 한 번씩 글라이더를 발사한다.
- 반면, 불안정한 패턴은 예측 가능한 경우와 예측 불가능한 경우로 구분된다. 먼저, 예측 가능하면서 불안정한 패턴은 복잡한 진화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안정된 패턴을 형성하는 것으로 예측되는 패턴이다. 예를 들어, R-펜토미노 R-pentomino라는 패턴은 겨우 5개의 살아있는 셀로 구성되지만, 1103 단계가 지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패턴에 안착한다. 한편, 예측 불가능하면서 불안정한 패턴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안정된 패턴을 띠는지, 또는 결국 안정된 패턴을 갖기는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패턴이다. 보다 세련되게 표현하자면, 이러한 패턴은 카오스 현상을 보인다.
- 문제는 불안정한 패턴의 운명을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다름 아닌 정지 문제다. 즉, 콘웨이의 생명 게임은 결정 불가능하다. 더 구체적으로, 생명 게임은 튜링 기계의 일종이다. 안정된 패턴은 튜링 기계가 정지하지 않고 무한히 돌아가는 상황이다. 모든 셀이 죽는 패턴은 튜링 기계가 정지하는 상황이다. 튜링의 증명에 따르면, 우리는 초기에 주어진 패턴이 무한히 돌아갈지, 아니면 정지할지 미리 알 수 없다.
- 이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생명 게임의 규칙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규칙은 완벽히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패턴의 동역학도 완벽히 결정론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패턴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뉴턴의 운동 법칙이 완전히 결정론적이어도 우리 우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생명 게임에 따르면,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은 결정론적이지만 생명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묘하게도, 생명 게임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준다.
- 생명 게임이 작동하려면 어찌 되었든 초기 패턴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튜링 기계의 경우라면, 초기 정보를 담은 테이프가 있어야 한다. 이 초기 패턴이나 정보는 인간이 입력한 것이다. 기계 학습에서처럼 기계가 자체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경우에도,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 이제 튜링 기계를 벗어나 질문해 보자. 진짜 생명은 어떤 초기 정보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이 초기 정보는 누가 입력한 것일까?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은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다시 한번 던져보자. 6장에서 보았듯이, 우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국소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향으로 초기 조건을 재설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초기 조건을 재설정하는 것일까?
답은 우주 바깥에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대칭성을 지닐 수 있다. 시간의 병진 대칭성은 에너지 보존 법칙 law of conservation of energy을 수반한다. 시간의 병진 대칭성이란, 시간의 기준을 바꾸어도 물리법칙에 어떠한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1만 년 전 과거의 물리법칙은 지금 이 순간의 물리법칙과 완전히 동일하며, 1만 년 후 미래의 물리법칙과도 완전히 동일할 것이다. 우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이용해 미래에 벌어질 많은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
- 일반적으로, 공간이나 시간과 같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변수에 대해 대칭성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응해 보존되는 물리량이 존재한다. 이는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되었는데, 바로 뇌터의 정리 Noether's theorem다. 참고로, 이 정리는 독일의 수학자 에미 뇌터 Emmy Noether에 의해 발견되었다.
- 그런데 대칭성은 자발적으로 깨질 수 있다. 그리고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진 다음에는 새로운 '질서'가 발생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로,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간의 병진 대칭성이 깨지면 고체가 발생한다. (참고로, 시간의 병진 대칭성은 잘 깨지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공간의 회전 대칭성이 깨지면 자석이 발생한다. 이제부터는 자석의 예를 통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자세히 분석해 보자.
- 자석이란 무엇인가? 자석이란 고체 안에 있는 작은 자석들의 집합이다. 이 작은 자석들은 기본적으로 전자의 스핀이 자기 모멘 Emagnetic moment를 지니기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물질이 일상적인 크기의 자석이 되려면, 이 작은 자석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스핀이 한 방향으로 정렬해야 한다. 이는 마치 행군하는 군인들이 발걸음을 칼같이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간의 모든 방향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개별 스핀의 입장에서는 아무 방향이나 가리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스핀들은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한 방향으로 정렬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스핀들의 상호작용이 원거리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각 스핀이 그것과 가장 인접한 스핀들하고만 상호작용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상호작용은 가장 인접한 스핀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면 에너지를 낮춘다. 즉, 개별 스핀은 자신에게 가장 인접한 스핀들하고만 방향을 정렬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이때 멀리 떨어진 스핀들과는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다.
-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 멀리 떨어진 스핀들은 어떻게 서로 방향을 정렬할 수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개별 스핀은 그것에 가장 인접한 스핀들과 방향을 정렬한다. 물론, 그 스핀들도 그것들에 가장 인접한 스핀들과 방향을 정렬한다. 이렇게 스핀들의 정렬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전체 시스템의 스핀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정렬하게 된다.
- 이렇게 에너지만 고려하면 스핀은 항상 정렬된다. 하지만 시스템은 주어진 에너지에서 엔트로피를 최대화하려고 한다. 6장에서 보았듯이, 온도는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균형을 맞춘다. 즉, 시스템은 온도가 낮으면 에너지를 낮추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온도가 높으면 엔트로피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결론적으로, 온도가 어떤 임계 온도 critical temperature보다 낮으면 스핀들이 정렬해서 자석이 발생하고, 그보다 높으면 스핀들이 개별적으로 무질서한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자석은 사라진다.
-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있다. 온도가 임계 온도보다 낮아져 스핀들이 정렬될 때, 실제로 정렬되는 방향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공간의 모든 방향은 동일하다. 즉, 공간은 회전 대칭성을 지닌다. 그런데 스핀들이 한 방향으로 정렬한다는 것은 회전 대칭성이 깨진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회전 대칭성이 외부 요인 없이 자발적으로 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다.
- 대칭성은 자발적으로 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간의 회전 대칭성이 깨지면 자석이 발생한다. 특별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믿기 힘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물리법칙 가운데 절대로 깨지지 않을 듯한 보존 법칙이 하나 있다. 바로 전하량 보존 법칙 conservation law of electrical charge이다. 근본적으로, 전하량 보존 법칙은 게이지 대칭성의 결과다. 따라서 게이지 대칭성이 깨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런데 있을 법하지 않은 이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 이 현상은 초전도 현상 superconductivity으로 알려져 있다.
- 초전도 현상이란 무엇인가? 전기 저항이 정확히 0이 되는 현상이다.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물질인 초전도체 안에서는 전류가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영원히 흐른다. 어떻게 이렇게 이상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밀접한 다른 현상, 바로 초유체 현상 superfluidity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 헬륨은 보통 기체다. 이러한 헬륨도 온도를 충분히 낮추면 액화된다. 그런데 액체 헬륨의 행동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엄밀히 말해, 헬륨은 헬륨-4와 헬륨-3라는 2개의 동위원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 가운데 헬륨-4가 액체가 될 때 초유체 현상이 나타난다. (헬륨-3도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초유체 현상을 보인다.) 초유체 superfluid는 초전도체와 비슷하게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예를 들어, 액체 헬륨-4를 그릇에 담는다고 해보자. 보통의 액체라면 액체 헬륨-4는 그릇 안에 가만히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액체 헬륨-4는 보통의 액체가 아니다. 그릇은 어찌 보면 액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벽이지만, 초유체인 액체 헬륨-4의 흐름은 어떠한 장벽으로도 막을 수 없다. 약간의 요동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흐르기 시작하면, 초유체는 그릇의 안쪽 벽을 타고 올라가 그릇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다. 이렇게 그릇의 안쪽 벽에 생기는 초유체의 얇은 필름을 '롤린 필름 Rollin film'이라고 한다. 그리고 입구가 좁은 병에 담긴다면, 초유체는 아예 분수처럼 분출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분수효과 fountain effect'라고 한다.
- 초유체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보손이 따르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Bose-Einstein statistics 때문이다. 헬륨-4는 보손이다. 보손은 온도가 충분히 낮으면 시스템 안에 있는 모든 보손이 에너지가 가장 낮은 단 하나의 상태로 응축 condensation 될 수 있다. 이때 주목할 점은 파동 함수의 위상까지 단 하나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큰 수의 보손들이 위상까지 고정된 단 하나의 상태로 욱여넣어지는 현상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Bose-Einstein condensation'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단 한 가지 상태의 가짓수는 1이다. 따라서 초유체는 엔트로피가 정확히 0인 상태다. 초유체는 거시적으로 큰 수의 보손들이 아무런 요동 없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흐르는 유체인 것이다.
- 다만, 초유체 현상이 생기려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과 더불어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초유체에 속한 보손들이 외부 장애물과 충돌했을 때 들뜬 상태가 되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상태를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초유체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유체와 비슷하게 에너지가 가장 적게 드는 들뜬 상태는 소리, 즉 음파 sound wave다. 따라서 외부 장애물이 음파를 발생시킬 정도로 자극하지 않는 이상, 초유체는 아무 문제 없이 한 덩어리로 흐를 수 있다.
- 초전도체 현상은 초유체 현상과 비슷하다. 따라서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려면, 전자들이 한 덩어리로 응축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전자는 보손이 아니라 페르미온이기 때문이다. 페르미온은 페르미-디랙 통계 Fermi-Dirac statistics를 따른다. 즉, 페르미온은 하나의 양자 상태에 1개씩만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전자들은 각각 자신의 양자 상태를 차지하고 다른 전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밀어내려고 한다.
- 그런데 바로 이 파동 함수의 위상이 초전도체에서는 하나로 고정되어 더 이상 바꿀 수 없게 된다. 즉, 게이지 대칭성은 초전도체에서 깨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게이지 대칭성이 깨지면 전하량 보존 법칙이 무너진다.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입자의 개수와 파동 함수의 위상 사이에 위치와 운동량 사이의 불확정성 원리와 비슷한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즉, 파동 함수의 위상이 하나로 고정되면 입자의 개수가 확정되지 않는다. 결국, 초전도체에서는 전하량이 보존되지 않는다. 놀랍지 않은가? 이어지는 절에서는 이토록 놀라운 초전도체를 기술하는 이론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앞서 게이지 대칭성의 깨짐은 전하량 보존 법칙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그런데 게이지 대칭성의 깨짐은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게이지 대칭성의 깨짐은 우리가 존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낸다. 바로 질량이다.
- BCS 이론은 평균장 이론이다. 그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자. 초전도체는 쿠퍼 쌍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하면서 발생한다. 그런데 BCS 이론에서는 쿠퍼쌍이 형성되자마자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이 발생한다. 결국, 초전도체가 발생하는 임계 온도는 임의의 전자 2개가 결합해 쿠퍼쌍을 형성하는 온도다. 이는 어떤 전자가 쿠퍼 쌍을 형성하면, 나머지 모든 전자가 동시에 서로 짝을 찾아 정확히 똑같은 쿠퍼쌍 상태를 이룬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쿠퍼 쌍이라는 평균적으로 잘 정의된 상태를 중심으로 모든 전자가 동일하게 행동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이징 모형의 평균장 이론에서 질서 변수라는 잘 정의된 스핀의 평균값을 중심으로 모든 스핀이 동일하게 정렬하는 것과 비슷하다.
- 그런데 쿠퍼 쌍의 밀도가 유한해지면 매우 특별한 일이 발생한다. 빛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무거워지는 원리가 그 유명한 힉스 메커니즘이다. 사실, 힉스 메커니즘은 원래 하나의 힘이었던 전자기약력이 전자기력과 약력이라는 두 힘으로 갈라질 때 관여하는 원리로 4장에서 이미 암시되었다.
- 그런데 게이지 대칭성의 깨짐,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앞 절에서 초전도체가 게이지 대칭성을 깨뜨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초전도체 안에서는 게이지 보손이 질량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정말 그럴 수 있다. 초전도체 안에서는 게이지 보손의 대표 주자, 광자가 질량을 가질 수 있다. 즉, 빛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빛이 무거워진다는 것은 빛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빛이 멈춘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빛의 속도는 빛이 질량을 가지지 않을 때만 일정하다. 빛이 무거워지면 빛도 멈춘다.
- 아직 끝이 아니다. 이쯤에서 더욱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사실, W+, W-, Z 게이지 보손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모든 페르미온의 질량도 궁극적으로 힉스 입자와 상호작용 함으로써 얻어진다. 결론적으로, 게이지 보손과 페르미온을 망라하는 우주의 모든 입자는 힉스 입자로부터 질량을 얻는다. 힉스 입자는 정말 별명대로 '신의 입자 god particle'인 것이다.
- 지금까지 이 책에서 설명한,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생각해 보자.
1. 양자역학은 파동 함수의 공명을 통해 원자를 안정시킨다.
2. 양자역학은 게이지 대칭성을 통해 힘의 원리를 제공한다.
3. 양자역학은 카오스와 결합해 열역학 제2법칙을 발생시킨다.
4. 양자역학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우주의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다.
- 결국, 양자역학은 우리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준다. 구체적으로, 파동 함수의 존재는 그 자체로 힘의 원리를 제공한다. 이 힘을 통해 입자들은 원자를 이룬다. 그런데 원자가 안정되려면 파동 함수가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파동함수가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은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파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된다. 파동함수가 공명을 일으켜 안정된 원자들은 한데 뭉쳐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로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파동함수가 공명을 일으켜 안정된 원자들은 한데 뭉쳐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로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 그러나 물질은 처음 만들어진 상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물질은 항상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언뜻 보기에,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의 존재를 방해하는 악당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가 단순히 결정론적으로 행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 그런데 여기서 양자역학이 묘하게 개입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근본적으로 양자역학이 카오스와 결합해 발생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열린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원리를 만나 실제로 구현된다. 자발적 대칭성 깨짐은 새로운 질서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이 새로운 질서는 고체와 자석과 같이 국소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향으로 초기 조건을 재설정한다.
-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묘한 일이 또 한 번 발생한다.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게이지 대칭성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게이지 대칭성의 자발적 깨짐은 힉스 메커니즘을 통해 우주의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다. 질량은 입자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그동안 슈뢰딩거 방정식을 쓸 때 아무런 의심 없이 질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다. 물론, 질량은 고전적인 뉴턴의 운동 법칙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질량의 존재는 그리 당연하지 않았다. 다행히 양자역학은 질량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다시 한번, 양자역학은 우리 존재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준다.
- 운명은 단순히 결정론이 아니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 결정론의 반대말은 자유의지다. 그러나 운명이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운명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착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와 관련해 17세기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실수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지만, 그것을 결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와 다르게 과학적 결정론이 자유의지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이 책에서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운명이란 단순히 결정론이나 자유의지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교차점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누구나 그렇겠지만, 생각해 보면 내 인생도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교차한 결과다. 특히, 이 책을 쓰는 동안 이를 더없이 깊이 경험했다. 마치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처럼, 이 책에서 이야기한 주제들이 그동안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되돌아보면, '바로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흐름이 바뀌는 기로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때가 여럿 있었다.
- 양자 컴퓨터의 가능성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리처드 파인먼이었다. 파인먼은 1981년 MIT에서 개최된 '계산의 물리에 관한 학회 Conference on the Physics of Computation'에서 '컴퓨터로 물리 시뮬레이션하기 Simulating Physics with Computers'라는 강연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나는 고전적인 이론만 가지고 수행하는 모든 분석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연은, 젠장, 고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자연에 대해 모의실험을 하고자 한다면 양자역학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와, 이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주 대단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 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는 <진화와 땜질>이라는 에세이에서 작은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현대 과학은 큰 질문에 대한 집착을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하면서 진전했다는 것이다. 그 전략 중 일부가 '왜'를 캐묻는 질문을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고, 박 교수는 이 방법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일찍이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존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개한다.
- 김민형,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 소장, <수학이 필요한 순간> 저자
- 어떻게? 양자역학이 가진 아름다움의 핵심은 놀랍게도 파동 함수 자체가 확률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파동함수는 평범한 숫자로 이루어진 함수가 아니다. 여기서 '평범한 숫자'는 바로 실수 real number를 의미한다. 파동함수 자체가 확률이라면, 파동 함수는 0과 1 사이의 실수일 것이다. 그런데 파동함수는 실수뿐만 아니라 허수 imaginary number라는 숫자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허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상상의 수'다. 허수가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제곱했을 때 음수가 되는 기묘한 성질 때문이다.
- 다시 말해, 파동 함수는 실수와 허수라는 두 수로 이루어진 함수다. 이렇게 실수와 허수 성분을 가지는 특별한 수를 복소수 complexnumber'라고 부른다. 복소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복잡한 수'다. 그리고 확률은 복소수인 파동 함수의 실수와 허수 성분을 각각 제곱한 후에 합한 값이다.
- 앗, 여기서 질문 하나. 확률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라면 파동함수는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 확률이라는 단 하나의 수만 있으면 되지, 왜 굳이 파동함수라는 두 수가 필요한 것일까? 왜인지는 아직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우리 우주가 현재 우리가 아는 형태로 존재하려면 확률과 파동 함수, 둘 다 필요하다. 확률만이 측정 가능할지라도, 파동함수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근본적인 힘의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 세 가닥의 희망의 끈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남자를 살렸지만, 그가 섬을 탈출하자 이내 과거가 되어버린다. 먼저, 첫 번째 희망의 끈인 애인 켈리는 남자가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해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딸을 낳아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켈리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가정을 버릴 수 없었다. 남자도 켈리의 새 삶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희망의 끈은 과거가 된다.
- 두 번째 희망의 끈은 남자가 섬을 탈출하는 도중 사라진다. 배구공 윌슨이 남자가 섬에서 지내며 마치 살아 있는 친구인 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지만, 그가 섬을 탈출해서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중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남자는 윌슨을 건지기 위해 뒤늦게 바다로 뛰어들지만, 윌슨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떠내려간 뒤였다. 윌슨과 그는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 다행히 마지막 세 번째 희망의 끈은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다르게 미래가 된다. 남자는 켈리와 헤어진 다음에 천사 날개가 그려진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상자 겉면에 쓰인 주소로 찾아간다. 텍사스의 외진 황야에 홀로 서 있는 어느 집의 마당에 천사 날개로 만들어진 다양한 미술 작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남자는 상자와 함께 짧은 메모를 남긴다. '이 상자는 제 인생을 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척 놀랜드.'
- 집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척은 기로에 선다.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서 어느 길로 갈지 지도를 펴고 고민한다. 이때 한 여자가 트럭을 타고 다가오는데, 그녀는 척에게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척은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여자는 기로에 나 있는 길이 각각 어디로 이어지는지만을 설명하고 떠난다. 그런데 떠나는 트럭의 뒷면에 천사 날개 그림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척은 기로에 나 있는 길들을 하나씩 쳐다보다가 여자가 향한 길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
-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이들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이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의 내용이다. 사람은 누구나 척처럼 어느 순간 기로에 서게 된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기로에 무작정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갈림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걸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길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중요하다면,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앞서 말했듯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입자는 파동이다. 즉, 입자는 그 자체로 점이지만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확률은 전 공간에 퍼져서 파동처럼 출렁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전자는 파동 2개로 쪼개져서 얇은 틈 2개로 난 서로 다른 두 길을 모두 걸어갈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경로를 이동한 2개의 파동은 결국 멀리 떨어진 최종 목적지인 스크린의 한 지점에 도달한다. 스크린은 일종의 전자 검출기로서 전자가 도달하면 그 위치에 점이 찍힌다. 이 실험의 이름은 '영의 이중 슬릿 실험 Young'sdouble slit experiment'인데,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의 목적은 스크린에 검출되는 전자의 패턴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패턴이 관찰될까?
- 검출되는 전자의 패턴은 전자가 스크린의 해당 위치에 도달할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잠깐 생각해 보면, 전자는 얇은 틈에서 출발해 최적의 경로를 따라 스크린에 도달할 듯하다. 즉, 전자는 스크린에서 바라볼 때 얇은 틈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에 가장 높은 확률로 도달할 것 같다. 그렇다면 전자의 패턴은 그 위치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갈수록 서서히 옅어지는 모습으로 관찰될 것이다. 즉, 그림 2의 위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패턴이 정말 이렇다면 그다지 재미없을 것이다. 실제 실험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른바 '간섭 interference 패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간섭이란 무엇일까?
- 물리에서 간섭이란 2개 이상의 파동이 서로 만나서 새롭게 생성되는 파동의 진폭이 원래 파동들의 진폭의 합보다 작아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파동은 출렁거림이다. 그런데 출렁거림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보가 필요하다. 하나는 출렁거림의 세기, 즉 진폭 amplitude이고, 다른 하나는 출렁거림의 길이, 즉 파장 wavelength이다.
- 반면, 스크린의 어느 한 위치에 도달했을 때 2개의 파동이 지나온 경로의 길이의 차이가 파장의 반정수 배가 되면, 새로운 파동의 진폭은 정확히 0이 된다. 즉, 전자가 이 위치에 도달할 확률은 정확히 0이 된다. 이를 '상쇄 간섭 destructive interference'이라고 부른다. 상쇄 간섭에서 새로운 파동의 진폭이 0이 되는 이유는 부분 파동들의 출렁거림이 어느 하나는 상승하고 다른 하나는 하강해 서로를 정확히 상쇄하기 때문이다. 보강 간섭도 아니고 상쇄 간섭도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파동의 진폭은 최댓값인 부분 파동들의 진폭의 합과 최솟값인 0 사이의 어떤 값이 된다. 결과적으로, 스크린 위에는 전자가 많이 발견되는 보강 간섭 영역과 적게 발견되는 상쇄 간섭 영역이 마치 줄무늬 띠처럼 서로 엇갈리며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전자의 간섭 패턴이다.
- 예를 들어, 마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Ant-Man and the Wasp>를 생각해 보자. 이 영화에서 앤트맨은 축소되어 원자의 크기보다 작은 세계, 이른바 '양자 영역 quantum realm'에 이른다. 영화에서 양자 영역은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모든 것이 요동치는 신비로운 세계로 그려진다. 관객으로서 양자 영역을 표현하는 영화적 상상력과 그것을 시각화하는 기술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물리학자의 입장에서는 영화적 한계를 명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앤트맨을 비롯해서 양자 영역에 도달한 여러 등장인물들이 크기만 작아졌을 뿐 거시 세계에서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 물론, 양자 영역에 도달한 모든 등장인물을 양자역학적인 존재로 표현하면 아마도 영화적으로 어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그들이 양자 영역에서도 고전역학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즉, 영화에서는 양자 영역이라는 신비로운 세계가 있지만, 그 세계에 다다른 사람들이 양자역학의 법칙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양자 영역에서 사람도 전자와 똑같이 파동처럼 행동해야 한다.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악당 역을 맡은 고스트는 거시 세계에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파동함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다음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동 함수가 과연 무엇이기에 전자가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 전자는 벽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앞에서 다가오는 2개의 얇은 틈 중에서 어떤 틈으로 빠져나갈까? 급하게 선택하려는 순간, 전자는 자신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전자는 이제 어떤 틈으로 빠져나갈지 고민하지 않고 자신을 2개의 분신으로 쪼개는 '파동 분신술'을 시도하기로 한다.
- 파동 분신술의 특징은 전자의 분신들이 만들어지는 순간, 모든 분신도 각각 그들만의 양자 시계를 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양자 시계도 복제된다. 단, 파동함수 초침의 길이는 줄어든다. 구체적으로, 이 상황에서 두 분신이 차고 있는 양자 시계 속 파동함수 초침의 길이는 원래 길이의 정확히 2분의 1로 줄어든다. 왜 하필 1/2일까? 파동 함수 초침의 길이의 제곱이 확률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분신이 존재할 확률은 원래 전자가 존재할 확률의 정확히 2분의 1. 즉 절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동함수 초침의 방향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분신의 파동 함수 초침은 동기화 synchronization 된다. 즉, 두 분신의 파동함수 초침의 방향은 정렬된다. 이제, 전자의 두 분신은 각자 다른 얇은 틈을 무사히 빠져나와 자유롭게 날아간다. 두 분신의 파동함수초침도 제각기 잘 돌아간다.
- 하지만 불행하게도, 계속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다. 거대한 스크린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빠져나갈 틈도 없다. 스크린에 부딪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스크린에 도달하면 분신들은 서로 만나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소멸된 자리에는 다시 원래의 전자가 나타난다.
- 통계역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많은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물질 상태를 통계적으로 기술하는 물리학이다. 통계역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열 heat, 더 근본적으로는 무질서 disorder를 이해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입자들이 많아지면 무질서의 정도가 증가한다. (물리학에서 무질서의 정도는 엔트로피 entropy라는 개념으로 정량화되는데, 엔트로피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 통계역학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는 거시 세계다. 내친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생명은 통계역학이 지배하는 무질서한 세계의 어느 지점에서 나타날까? 생명은 언제 지능 intelligence을 획득할까? 그리고 지능을 획득한 생명체는 언제 자유의지 free will를 지니게 될까?
- 중심 온도가 올라가면, 수소들은 서로 결합해 헬륨으로 바뀌는 핵융합 nuclear fusion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생성된 열은 복사선의 형태로 방출되면서 중력으로 인한 수축을 막는데, 어느 순간 중력에 의한 수축과 핵융합에 의한 팽창이 서로 균형을 맞춘다. 이렇게 수소를 태워서 헬륨을 만드는 핵융합 과정은 우리에게도 필수적이다. 태양이 바로 이 방식으로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태양과 같은 별을 이른바 '주계열성 main sequence star'이라고 한다.
- 그런데 핵융합 과정은 언젠가는 끝난다. 타버릴 수소가 바닥나 버리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중력에 의한 수축이 다시 시작된다. 중력 수축은 다시 별의 중심 온도를 높이고, 어느 순간 새로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핵융합 반응은 새로운 원소가 생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식으로 별은 중력 수축과 핵융합 팽창 사이의 일시적인 균형과 그것의 반복적인 붕괴를 통해 점점 더 무거운 원소를 생성해 낸다.
- 무거운 원소는 별의 대기층을 구성하다가 결국 일종의 바람의 형태로 우주로 방출된다. 이렇게 별에서 방출되는 원소의 바람을 '항성풍 stellar wind'이라고 부르는데, 순우리말로 번역하면 '별 바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별 바람은 별 주변에 구름과 같은 행성상성운 planetary nebula을 만들어 낸다.
- 참고로, 가장 낮은 에너지를 가지는 상태를 '바닥 상태 ground state'라고 하고, 바닥 상태보다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상태를 일반적으로 ‘들뜬 상태 excited state'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양자화된 에너지를 지닌 상태를 통칭해서 '에너지 준위 energy level'라고 부른다. 그런데 에너지는 정말로 이렇게 띄엄띄엄 있는 것일까? 에너지가 정말 양자화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1913년, 닐스 보어 Niels Bohr는 수소 원자 안에서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치 발머가 그랬듯이 아무런 물리적 근거도 없는 가정을 하나 떠올렸다. 보어의 가정은 바로 각운동 angular momentum이 플랑크 상수의 정수 배로 양자화된다는 것이었다.
- 참고로, 보통의 운동량이 직선 운동의 세기를 재는 물리량이라면 각운동량은 회전 운동의 세기를 재는 물리량이다. 수학적으로, 각운동량은 회전 중심으로부터의 거리 r과 운동량 p=mv의 곱이다. 여기서 m은 전자의 질량이고, v는 전자의 속도다.
-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하나 있다. 보어는 엄밀한 이론적인 근거 없이 순전히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꼼수'를 고안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과학자들이 언제나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한 끝에 어떤 발견에 이른다고 여기기 쉽다. 물론 이런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근거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물리적인 직관만으로 혁신적인 발견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어의 가정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 이제 보어의 가정이 정말로 전자의 에너지를 양자화하는지 알아보자. 수소 원자 안에서 전자의 에너지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전자 자체의 운동에 의한 운동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와 원자핵이 서로 끌어당기는 전기력 electric force에 의한 위치 에너지 또는 퍼텐셜 에너지 potential energy다.
- 막간의 일반물리학 강의, 운동 에너지와 퍼텐셜 에너지란?
운동 에너지의 의미는 직관적이다. 속도가 빠를수록, 즉 운동의 세기가 강할수록 운동 에너지는 커진다. 구체적으로, 운동 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퀴즈: 왜 그럴까?)
- 반면, 퍼텐셜 에너지의 의미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퍼텐셜 에너지는 '위치 에너지'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아무 속도 없이 주어진 위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에너지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위치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는 뜻에서 '잠재된 potential' 에너지다. 예를 들어, 우리가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다고 해보자. 롤러코스터는 레일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의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차의 운동을 이용한다.
-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파동-입자 이중성 이론을 쓰면 보어의 양자화 조건을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즉, 보어의 양자화 조건은 다름 아닌 전자의 파동이 원형 궤도 위에서 출렁거리며 공명을 일으키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공명이란, 파동이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는 현상이다. 그리고 공명이 일어나려면, 1장에서 설명했듯이, 일종의 보강 간섭이 일어나야 한다.
- 영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보강 간섭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자. 먼저, 2개의 얇은 틈이 세로로 뚫린 벽에 도달한 전자는 2개의 분신으로 쪼개진다. 그다음 전자의 두 분신들은 2개의 서로 다른 경로를 지나 스크린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서로 만난다. 이때 분신들은 소멸하며, 그 위치에는 원래의 전자가 다시 나타난다. 원래의 전자가 나타날 확률은 두 분신들이 차고 있는 양자 시계의 파동 함수초침의 합에 의해 결정된다. 분신들의 파동 함수 초침의 방향이 서로일치하면, 보강간섭이 일어나고 확률은 증폭된다.
- 자, 이제 원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파동이 원형 궤도 위에서 출렁거린다. 파동은 원형 궤도의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동은 분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간섭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형 궤도에서 보강 간섭이 일어나는 조건은 무엇일까?
- 만약 열에너지를 온전히 다 쓸 수 있다면, Q2=0이고 n=1, 즉 효율이 100%가 된다. 그런데 1824년에 프랑스 물리학자 니콜라 카르노 Nicolas Carnot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르노 이후에 정립된 사실이지만, 열에너지의 비율 Q2/Q1은 가장 이상적인 경우에 온도의 비율 T2/T1과 같다. 여기서 T1과 T2는 각각 열원과 열 배출구의 온도다. 참고로, 열과 온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엄연히 다르다. 구체적으로, 열은 입자의 무질서한 요동에 의한 에너지이고, 온도는 그러한 무질서한 요동을 조절하는 변수다. 온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6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 다시 말해, 아무리 엔진을 잘 만들어도 그 이상의 효율로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최고의 효율로 작동하는 엔진을 '카르노 엔진 Carnot engine'이라고 부른다.
- 여기서 이익이란, 앞에서 설명한 형량의 마이너스 개념으로 일종의 보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참여자 A와 B가 모두 협력을 선택하면 각각 3점을 얻는다. 반면, A와 B가 모두 배신을 선택하면 각각 1점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협력을 선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배신을 선택하면, 협력한 사람은 0점을 받고 배신한 사람은 5점을 받는다. 분석을 통해 알고 있듯이, 개인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 즉 내시 균형은 둘 다 배신을 선택하고 각각 1점을 받는 것이다.
- 다음은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대회에 실제로 제출되었거나 가능한 전략의 일부다. (대회는 두 번 개최되었는데, 제출된 프로그램의 수는 첫 번째 대회의 경우 14개, 두 번째의 경우 63개였다.)
1. 모두 배신 전략 :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모두 무조건 배신한다. 이 전략은 배신하는 것이 단발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최선의 선택이므로, 계속 반복해도 좋은 전략일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 전략이 실제 대회에 제출되지는 않았다.
2. 모두 협력 전략 :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모두 무조건 협력한다. 착해도 너무 착한 전략이다. 그리 성공적일 것 같지 않은 전략이다. 당연하게도, 이 전략도 대회에 제출되지 않았다.
3. 팃포탯 Tit-for-Tat 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 : 처음에는 항상 협력한다. 이후에는 상대방이 이전 단계에서 했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이전 단계에서 배신하면 다음 단계에서 배신함으로써 보복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다시 협력하면 다음 단계에서 협력함으로써 용서한다. 선제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팃포탯은 기본적으로 선한 전략이다. 하지만 배신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보복하는 철두철미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용서함으로써 협력을 도모한다. 의도가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는 전략이다.
4. 그러저 Grudger 또는 뒤끝 작렬 전략 : 그러저는 텃포탯처럼 처음에는 항상 협력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협력하는 한 계속 협력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한번 배신하면 그 후로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무조건 배신함으로써 보복한다. 그야말로 뒤끝 작렬이다.
5. 다우닝 Downing 또는 통계적 판단 전략 : 처음에는 협력한다. 이후에는 이전 단계에서 상대방이 했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협력 가능성을 확률로 계산한다. 이 확률에 따라서 협력 가능성이 50% 이상이면 협력하고, 그 미만이면 배신한다.
6. 테스터 Tester 또는 기회주의자 전략 : 처음에는 배신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즉, 적당히 몇 번 배신해 보고 상대방이 보복하는 패턴을 관찰한다. 상대방이 만만하다고 판단되면 가혹하게 착취한다. 반면, 상대방이 강경하게 보복한다고 판단되면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7. 트랭퀼라이저 Tranquilizer 또는 장기적인 사기꾼 전략 : 처음에는 착한 척하며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충분히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되면 어느 단계부터는 확률이 25%가 넘지 않는 선에서 가끔씩 먼저 배신한다. 보복이 들어오면 다시 착한 척하며 얼마간 협력한다. 그러면서 다음번에 배신할 기회를 노린다.
8. 자비로운 팃포탯 전략 : 기본적으로 팃포탯 전략이지만, 용서에 조금 더 관대하다. 즉, 상대방이 배신했을 때 곧바로 보복하지 않고 기회를 몇 번 더 준다. 한 가지 방법은 상대방이 처음 배신했을 때는 일단 협력함으로써 용서하지만 두 번 연달아 배신하면 보복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상대방의 배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확률로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5%의 확률로 용서하고 95%의 확률로 보복한다.
9. 랜덤 Random 전략 :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때때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상대방이 내 전략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 이 가운데 어떤 전략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까? 놀랍게도, 액설로드의 시뮬레이션 대회에서 두 차례 모두 우승한 전략은 팃포탯이었다. 팃포탯은 이미 첫 번째 대회에서 우승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 대회의 참가자들도 팃포탯이 유력한 우승 후보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팃포탯을 넘어서기 위해 수정된 프로그램들을 여러 개 제출했다. 언뜻 팃포탯의 선함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때때로 배신하면 이익을 더 증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팃포탯을 이기지는 못했다.
- 자, 이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엘리베이터가 정지해 있다가 갑자기 상승하면 우리는 바닥으로 당겨지는 힘을 느끼게 되는데, 이 힘은 엘리베이터의 가속 운동에 의해 발생하는 관성력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관성력과 중력을 구분할 수 없다. 중력이 갑자기 강해졌다고 해도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속도에 의한 관성력과 만유인력을 일으키는 중력의 차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실제로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는 물리학의 매우 심오한 발견으로 이어졌는데,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이다. (이 책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궁금증을 느끼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 절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을 설명할 것이다.)
- 뉴턴의 제3법칙은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뉴턴의 제3법칙은 흔히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불리는데,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작용하면 두 번째 물체가 정확히 같은 크기의 힘을 첫 번째 물체에 반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힘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항상 두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에서도 힘이라는 용어 대신 '상호작용 interaction'이라는 용어가 훨씬 더 자주 사용된다.
- 앗, 잠깐. 그렇다면 지구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만큼 우리도 지구를 잡아당기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정확히 같은 힘으로 잡아당긴다. 다만, 지구는 상대적으로 질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지구의 가속도는 거의 0이다. 즉, 지구는 거의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질량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기 때문에, 지구가 당기는 힘에 크게 반응한다. 그럼에도 서로 잡아당기는 힘은 정확히 같다.
- 참고로, 강력을 기술하는 양자 이론을 '양자 색역학 quantum chromodynamics, QCD'이라고 부른다. 양자 색역학에 '색 chromo'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쿼크와 글루온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세기를 결정하는 결합 상수 coupling constant 가 세 가지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결합 상수를 구분하려고 비유적으로 빨강, 파랑, 초록이라는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 중력이 없는 우주정거장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하고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무중량 상태다), 바로 물방울을 공중에 띄우는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물방울은 완벽한 구면을 형성한다. 이제 이 물방울을 톡 건드려 보자. 그러면 물방울의 구면이 출렁거릴 것이다. 구면이 출렁거리는 모양은 고속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면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고속 비디오카메라에 찍힌 구면은 어떻게 출렁거릴까?
- 일반적으로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출렁거린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어떤 출렁거림은 유독 오래 살아남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구면 위에서 오래 살아남는 출렁거림을 '구면 정상파 sphericalstanding wave'라고 부른다. 특히, 구면 정상파는 수학적으로 구면 조화함수 spherical harmonics라는 매우 잘 알려진 함수에 의해 기술된다.
-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상에서 구현 가능한 예도 있다. 바로 라이덴프로스트 효과 Leidenfrost effect로, 이 현상은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물을 뿌리는 경우에 발생한다. 소량의 물을 끓는점보다 훨씬 더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갑자기 떨어뜨린다고 해보자. 그러면 프라이팬에 닿는 물의 아랫부분은 빠르게 끓면서, 물과 프라이팬 사이에 증기로 이루어진 단열층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증기단열층은 물방울을 공중으로 띄우고, 프라이팬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때 물방울의 모양은 마구 출렁거린다. 당연하게도,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물방울은 우주 공간의 물방울과 비슷하게 출렁거린다.
- 수소 원자는 원자 이론의 출발점이다. 수소 원자를 이해하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수소 원자를 이해하려면, 수소 원자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수소 원자의 해밀토니언만 하더라도 아주 복잡해 보인다. 복잡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없을까? 어떤 면에서 수학은 기호 놀이다. 변수만 잘 찾으면 복잡해 보이는 방정식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방정식을 간결하게 정리하면 많은 경우에 방정식도 쉽게 풀린다. 앞서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밀토니언이 복잡해 보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변수 3개, 즉 x, y, z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x, y, z로 이루어진 좌표계를 '데카르트 좌표계 Cartesian coordinate system’라고 부른다. 자, 그럼 혹시 x, y, z가 아닌 새로운 좋은 변수를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그럴 수 있다.
- 단순한 눈속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좌표계에서 표현된 라플라시언을 새로운 좌표계, 즉 r을 포함한 변수들로 구성된 새로운 좌표계에서 표현해야 한다. 이 새로운 좌표계는 바로 구면 좌표계 spherical coordinate system다. 구면 좌표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구면 좌표계란 3차원 공간 속의 한 위치를 반지름 radius, 편각 polar angle, 방위각 azimuthal angle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편각과 방위각은 각각 지구 표면 위의 한 위치를 규정하는 변수인 위도 latitude와 경도 longitude에 해당한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지구 표면 위의 한 위치는 2개의 각도, 즉 위도와 경도로 규정된다. 먼저, 위도는 적도 equator를 기준으로 주어진 위치가 얼마나 북쪽이나 남쪽에 위치하는지를 말해주는 각도다. 경도는 북극과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연결하는 대원 great circle, 즉 본초자오선 prime meridian을 기준으로 주어진 위치가 얼마나 동쪽이나 서쪽에 위치하는지를 말해주는 각도다. (참고로, 현재 쓰이는 본초자오선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본초자오선과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편각은 위도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적도 대신 북극을 기준으로 삼는다. 즉, 북극의 편각은 0도이고, 적도의 편각은 90도이며, 남극의 편각은 180도다. 방위각은 경도와 정확히 같다.
- 고체 물리 solid Istate physics라는 분야가 있다. 도체, 반도체, 부도체 insulator, 초전도체 superconductor와 같이 질서 있는 격자 구조를 지닌 결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물리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고체 물리에서 실제로 연구하는 주제는 액체의 성질일 때가 많다. 고체의 주요 성질을 결정하는 전자가 페르미 바다를 이루기 때문이다. ('페르미 바다'는 다른 말로 '페르미 액체 Fermi liquid'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구 표면에서 임의의 위치는 위도와 경도를 알면 정확히 결정할 수 있다. 문제는 위도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경도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위도는 낮이라면 정오에 태양의 위치를 이용해서, 밤이라면 북반구의 북극성, 남반구의 남십자성의 위치를 이용해서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위도는 지구의 자전축이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경도의 경우에는 본초자오선, 즉 북극과 그리니치 천문대를 연결하는 대원이라는 기준 자체가 임의적이기 때문에, 정확히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 그런데 재미있게도, 시간을 정확히 알면 경도를 알 수 있다.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지구가 등속도로 자전하며 매시간 정확히 15도씩 회전한다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예를 들어, 우리가 탄 배에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각과 정확하게 동기화된 시계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동기화된 시계가 말해주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각은 정오이고, 우리 배의 현지 시각은 오전 9시라고 하자. 참고로, 현지 시각은 현재 위치에서 태양이 중천에 도달하는 시각을 정오의 기준으로 삼아 결정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배가 현재 위치한 곳의 경도를 알 수 있다. 바로 서쪽으로 45도다. 따라서 문제는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된다.
- 시계를 만드는 데는 주기적으로 진동하는 물체가 필요하다. 시계는 기본적으로 진동의 주기로 시간의 단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진동하는 물체는 무엇일까? 바로 진자 pendulum다.
- 진자시계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면, 진자시계에는 먼저 태엽과 같이 시곗바늘을 회전시키는 에너지원이 있다. 만약 태엽이 풀리는 속도가 매우 일정하다면, 비율이 적절하게 조정된 톱니바퀴 gear들을 태엽에 직접 연결해 시곗바늘을 돌리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태엽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일정하게 풀리지 않는다. 따라서 톱니바퀴의 회전 운동이 일정한 속도가 되도록 정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진자가 중요해진다.
- 구체적으로, 태엽의 힘으로 회전하는 톱니바퀴는 탈진기 escapement라는 장치를 통해 진자에 연결된다.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탈진기의 역할은 톱니바퀴의 회전 운동과 진자의 주기 운동을 결합하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네를 생각해 보자. 이때 진자는 그네이고, 태엽은 그네를 미는 사람이며, 탈진기는 그네와 그네를 미는 사람 사이에 있는 연결 고리, 즉 그네를 미는 사람의 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네를 미는 사람이 그네를 손으로 미는 것과 비슷하게, 회전하는 톱니바퀴는 탈진기를 통해 진자에 충격량 impulse을 가함으로써 진자를 밀수 있다.
- 탈진기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밀린 진자가 자리로 되돌아올 때까지 톱니바퀴가 회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네를 미는 사람이 그네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멈추어 서 있는 것과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그네를 미는 사람의 행동이 그네의 고유 진동수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회중시계와 같이 작아졌으며, 무엇보다도 진자 대신 평형 바퀴 balance wheel의 주기 운동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도위원회는 해리슨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행히,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 George III 가 해리슨을 만나 직접 시계의 정확도를 검증하겠다고 약속했다. 곧 왕실에서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해리슨이 주장한 정확도가 얻어졌다. 이후 제임스 쿡 James Cook의 해상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이자, 조지 3세는 특별재정위원회를 열어 해리슨에게 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비록 경도위원회에게 경도상을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해리슨은 진정한 의미에서 경도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았다. 시간을 정확하게 재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한 사람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 루트비히 볼츠만 Ludwig Boltzmann 만큼 비극적인 삶을 산 물리학자도 많지 않다. 볼츠만의 비극은 원자론 atomism에 기인한다. 지금은 믿어 의심치 않는 진리가 되었지만, 볼츠만이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며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주류 물리학자들은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볼츠만은 자신의 원자론이 주류 물리학계와 철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고, 결국 1906년 스스로 목을 매었다. 물론, 원자론을 볼츠만이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원자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 레우키포스 Leucippos와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 Democritos를 만나게 된다.
- 운명의 장난인지, 물리학계에 원자론을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논문은 볼츠만이 자살하기 1년 전인 1905년에 완성되었다. 1905년은 물리학에서 매우 특별한 해인데,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특수 상대성이론이 출간된 해이며, 그에 못지않은 다른 두 가지 업적이 출간된 해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1905년은 '기적의 해 Annus Mirabilis'로 불린다.
- 첫 번째 업적은 광전 효과를 양자화된 빛의 알갱이, 즉 광자로 설명한 것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에 관한 이론은 1900년에 제안된 막스 플랑크 Max Planck의 흑체 복사 blackbody radiation 이론과 함께 양자역학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여겨진다. (재미있게도, 아인슈타인과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에 반기를 들며 양자역학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 두 번째 업적은 브라운 운동 Brownian motion을 입자의 동역학으로 설명한 것인데, 원자론을 물리학계에 안착시키는 데 이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브라운 운동이란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 R. Robert Brown이 1827년에 발견한 것으로, 물에 떠 있는 꽃가루의 작은 조각들이 수면 위에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현상이다. 당시에는 브라운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꽃가루가 지닌 특별한 생명력 때문에 브라운 현상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다른 학자들은 물 분자가 불규칙적인 열 운동을 하는데, 이러한 물 분자가 꽃가루 조각과 충돌하기 때문에 브라운 운동이 발생한다고 추측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러한 주장을 정량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원자론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통계역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 뉴턴의 운동 방정식이 기술하는 고전역학에 따르면, 입자의 초기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입자의 궤적은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우주에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무질서가 항상 존재한다. 무질서는 완벽한 궤적을 방해하고 불규칙한 요동을 일으킨다. 언뜻 생각하기에, 불규칙적인 요동은 어떠한 예측도 불가능하게 만들 듯하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에 관한 이론은 불규칙한 요동도 정량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인다.
- 아인슈타인은 어떤 주어진 입자가 그 주변에서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분자들과 충돌하면서 어떻게 움직여 나아갈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입자의 운동은 분자들과 충돌할 때마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릴 것이다. 이런 경우, 개별 입자의 특정한 궤적보다는 여러 개의 비슷한 입자들의 위치가 통계적으로 어떤 확률 분포 probabilitydistribution를 따르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
- 결국, 정보 엔트로피는 맨 앞에 붙는 볼츠만 상수를 제외하고는 볼츠만의 엔트로피와 완전히 똑같다. 사실, 정보 엔트로피에 볼츠만 상수를 붙인 형태의 엔트로피 공식은 섀넌에 앞서 깁스 Josiah Willard Gibbs라는 통계물리학자에 의해 제안된 바 있다.
- 여기서 kB는 볼츠만 상수이고, T는 온도다. 불행히도, 이 단계에서 B가 왜 온도의 역수로 주어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이 결론은 실험 결과와의 비교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B가 온도의 역수라는 점은 온도의 물리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에너지가 고정된 상태에서 엔트로피를 최대화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양을 최소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여기서 A는 일종의 에너지로서, 전문적으로 '헬름홀츠 자유에너지 Helmholtz free energy'라고 한다. 자, 이제 온도의 물리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온도는 에너지 E와 엔트로피 S사이의 균형을 조절하는 변수다. 게다가 라그랑주 승수가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시키기 위한 변수임을 기억하면, 전체 에너지와 온도는 다음과 같은 관계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 여기서 전체 에너지를 온도의 함수로 표현하거나, 온도를 전체 에너지의 함수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수 함수의 성질로부터, 온도를 올리면 전체 에너지가 증가하고 온도를 내리면 전체 에너지가 감소한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정리해 보자. 전체 에너지가 고정된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최대화되면,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미시 상태들은 다음과 같은 확률분포로 발생한다.
- 볼츠만과 그를 계승한 통계물리학자들은 바른 앙상블을 뉴턴의 운동 방정식으로부터 유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노력은 자연스럽게 에르고딕 가설 ergodic hypothesis로 이어졌다. 에르고딕 가설이란, 에너지 보존 법칙이 허용하는 한 어떠한 초기 조건이 주어지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임의의 입자의 궤적이 발생 가능한 상태들을 빠짐없이 모두 훑고 지나간다는 가설이다. 에르고딕 가설이 맞다면 바른틀 앙상블이 얻어지는 것이다.
- 언뜻 보기에는, 에르고딕 가설은 뉴턴의 운동 방정식과 양립할 수 없는 듯하다. 에르고딕 가설을 반박하는 가장 쉬운 예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고전역학적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이 문제는 정확히 풀리며, 그것의 해는 완벽한 주기 운동을 보인다. 이 경우, 지구는 에너지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태양 주변의 모든 공간을 무작위로 헤집고 다니지 않는다. 정해진 궤도를 정확한 주기로 운동할 뿐이다. 고전역학 수업에서 배우는, 깔끔하게 풀리는 문제들은 보통 이와 비슷하게 완벽한 주기 운동을 보인다. 에르고딕 가설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에르고딕 가설이 적용되는 예를 찾으려면, 깔끔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예는 놀랍게도 시야를 약간만 넓히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3세 문제 three-body problem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파동 함수의 근본적인 성질에 기인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절대음감을 가진 어떤 피아니스트를 상상해 보자. 절대음감은 주어진 선율을 들으면 그 안에 담긴 음의 진동수, 즉 음높이를 맞힐 수 있는 능력이다. (참고로, 이러한 능력은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푸리에 변환 Fourier transform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피아니스트는 오랜 시간 연주되는 단조로운 선율의 음높이를 아주 쉽게 맞힐 수 있는데, 이 선율이 단 하나의 진동수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 피아니스트에게 어려운 선율은 짧은 시간에만 잠깐 연주되고 끝나버리는 선율이다. 이 선율에는 무수히 많은 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즉, 선율이 연주되는 시간의 길이 At와 선율이 품고 있는 음높이의 다양성 Aw는 반비례한다. 달리 말해, 시간의 길이와 음높이의 다양성을 곱한 값은 어떤 양의 상수, 엄밀히 말해 1/2보다 크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인공 생명을 자기 복제하는 기계로 정의하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한 이가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로 꼽히는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이다. 폰 노이만이 자기 복제 능력을 인공 생명, 더 나아가 생명 자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겼던 이유는 어떤 개체가 자기 복제 능력을 갖추면 진화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들여다보자. 모든 복제 과정은 완벽하지 않다. 따라서 자신을 복제하는 과정에서도 때때로 크고 작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 진화란 다름 아니라 변하는 환경에 적합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킨 개체가 살아남는 과정이다. 자, 그렇다면 기계의 자기 복제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폰 노이만은 논리적으로 크게 3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추측했다.
- 자칫 그 중요성을 놓치기 쉽지만, 폰 노이만의 아이디어는 컴퓨터과학을 진보시킨 아주 중요한 발견이었다. 폰 노이만은 기계가 수행하는 작업(여기서는 기계가 스스로 복제하는 작업)과 이를 수행하는 기계를 구분했다. 다시 말해, 폰 노이만은 기계가 수행하는 프로그램 program과 기계 자체를 개념적으로 분리한 것이다.
- 폰 노이만 이전까지 컴퓨터는 고정된 회로로 이루어졌기에, 단 한 가지 작업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프로그램만 수정하면 일반적으로 어떠한 작업이라도 실행할 수 있다. 폰 노이만은 이러한 범용 컴퓨터의 구조를 발명한 것이다. 전문적으로, 이를 '폰 노이만 구조 von Neumann architecture'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폰 노이만의 이 아이디어는 컴퓨터에 관한 앨런 튜링 Alan Turing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다.
- 참고로 컴퓨터를 구축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논리 베리트는 NOT, AND, OR 게이트다. 그리고 잘 알고 있듯이, 컴퓨터는 이과 1로 이루어지는 이진법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컴퓨터는 1과 1로 이루어진 정보를 3개의 논리케이트를 사용해 적절하게 변경함으로 째 주어진 연산을 수행하는 튜링 기계다.
- 전자회로로 이루어진 현대 컴퓨터는 0과 1을 표현하는 데 전압을 사용한다. 즉, 0볼트는 0에, 5볼트는 1에 대응한다. 행렬 일에서 0과 1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보다도 창의적인 방법이 필요한데, 바르글라이더가 이용된다. 구체적으로, 고스퍼의 글라이더 좋은 10단계에 한 번씩 클라이더를 발사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발사된 글라이더가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지 않으면 0으로, 도착하면 1로 취급할 수 있다. 글라이더가 바로 신호인 것이다.
- 자, 이제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여러 개의 글라이더 종류를 적절하게 배치하면 NOT, AND, OR 게이트를 모두 구현할 수 있다. 이는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 즉 CPU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컴퓨터는 CPU 말고도 저장 장치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논리게이트를 구축할 때 쓰인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저장 장치도 구축할 수 있다. 참고로 이렇게 보편적인 연산에 필요한 또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을 '튜링 완전'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생명 게임은 튜링 완전하며, 현대 컴퓨터가 수행하는 모든 스킬을 할 수 있다.
- 특히, 생명 게임은 오늘날 각광받는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을 이용한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AI 알고리즘도 원칙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이는 생명 게임이 바둑에서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인공지능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의식 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강한 인공지능 strong AI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인공 생명을 진정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답할 수 없기에, 여기서는 그 대신 다음의 중요한 질문을 같이 생각해 보자.
- 비유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비유는 불가피하게 오해를 낳는다. 이제 비유에서 벗어나,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더 엄밀하게 이해해 보자. 그러기 위해, 우리는 통계물리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 모형 하나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바로 이징 모형 Ising model이다. 이징 모형은 겉으로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심오하다. 이징 모형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과 그것으로 야기되는 상전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으로 펼쳐질 논의가 상당히 수학적이고 기술적이지만, 이징 모형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5장에서 설명한 수소 원자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부디 끈기를 가지고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 이징 모형에서는 상황을 최대한 간단하게 하기 위해 스핀이 연속적으로 회전하지 않고 단지 위나 아래 방향만 가리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수학적으로 말해, 이징 모형에서 스핀은 s=±1이라는 2개의 값만 가진다. 이때 +1은 위를 가리키는 스핀이고 -1은 아래를 가리키는 스핀이다. 콘웨이의 생명 게임과 비슷하게, 이 스핀들은 격자 위의 셀에 놓여 있으며 가장 인접한 셀의 스핀들과 상호작용한다. 구체적으로, 이징 모형의 에너지, 엄밀하게 해밀토니언은 다음과 같다.
- 그런데 겉으로는 이징 모형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다른 모형에서, 임계 온도는 다를지라도 임계 지수가 이징 모형과 정확히 같아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상하게도, 모형의 세부 사항이 임계 지수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즉, 그 안에 속하는 모형들이 모두 같은 임계 지수를 지니는 일종의 보편적인 부류 universality class가 있다. 정리하자면, 상전이는 겉보기에는 굉장히 복잡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보편적인 성질이 숨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쉽지만 여기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물리학의 역사에서 매우 극적이고 흥미로운 장을 장식했다. 최대한 간략하게, 큰 줄거리만 알아보자.
- 이러한 보편적인 구조가 앞서 언급한 상전이의 보편적인 부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전문적인 물리학자는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상전이 이론의 이름을 아직까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이 척도의 변환에 관한 불변성과 이를 통해 상전이를 설명하는 이론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재규격화군 이론 renormalizationgroup theory'이다
- 초전도 현상은 믿기 힘들 만큼 이상하다. 이렇게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밀하고 창의적인 이론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미시적인 이론을 알고 있다. 바로 바딘-쿠퍼-슈리퍼 Bardeen-Cooper-Schrieffer, BCS 이론이다. (엄밀히 말해, 초전도체에는 고온초전도체 high-temperature superconductor라는 임계 온도가 높은 초전도체가 있는데, 고온 초전도체를 성공적으로 기술하는 이론은 아직 없다.)
- A는 전문적으로 '반대칭화 antisymmetrization 연산자'라고 한다. 반대칭화 연산자가 필요한 이유는 전자가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르기 때문이다. BCS 파동 함수의 핵심은 모든 쿠퍼 쌍의 파동 함수가 정확히 단 하나의 파동 함수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단 하나의 파동 함수는 크기뿐만 아니라 위상도 하나로 고정된다. 그리고 위상이 고정된다는 것은 게이지 대칭성이 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게이지 이론에 따르면, 전자기력은 광자를 주고받으면서 생기고, 약력은 W+, W-, Z 보손이라는 세 종류의 입자를 주고받으면서 생긴다. 그런데 앞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실 게이지 이론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숨어 있다. 바로 게이지 대칭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게이지 보손이 질량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 광자는 질량이 없으므로 괜찮다. 문제는 W+, W-, Z 보손이다. 약력을 매개하는 이 게이지 보손들은 질량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게이지 보손은 원칙적으로 질량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게이지대칭성을 깨뜨릴 수 있을까?
- "일종의 자기 부상 효과. 언어브타늄이 초전도체라서 그렇다던데..."
그렇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은 마이스너 효과인 것이다!
- 전자기약력을 전자기력과 약력으로 갈라지게 하는 힉스 메커니즘은 광자가 질량을 가지게 되는 마이스너 효과와 기본적으로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이다. 쿠퍼쌍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유한한 평균값을 가진 다음, 광자와 상호작용 함으로써 광자에게 질량을 줄 수 있다. 비슷하게, 힉스입자 Higgs particle라는 입자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유한한 평균값을 가진 다음, W+, W-, Z 게이지 보손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그것들에 질량을 줄 수 있다.
- 2,000만 루피가 걸린 최종 단계만을 앞둔 전날 밤, 자말은 경찰에 넘겨져 고문을 받는다. 퀴즈 쇼의 진행자가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사기를 자백받기 위해 고문하는 경찰에게 자말은 믿기 힘들지만 놀라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밀은, 그때까지 출제된 모든 퀴즈가 자말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어느 특별한 순간들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말의 어머니는 봄베이 폭동이 일어났을 때, 힌두교 폭도가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어머니가 죽는 모습에 충격받을 틈도 없이, 자말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폭도들을 피해 빈민굴의 좁은 골목을 내달리던 자말은 힌두교의 라마 신으로 분장한 어느 소년을 마주친다. 소년은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색으로 온몸을 칠하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활과 화살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백만장자 퀴즈 쇼에서 1만 6,000루피가 걸린 문제가 바로 ‘라마 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무슬림 신자였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말이 이 퀴즈를 맞힐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어머니가 죽던 그날의 아수라장에서 본, 그날 일어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어느 라마 신의 모습이었다.
- 모든 퀴즈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서로 얽혀 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극적이다. 다른 관객 못지않게 이 극적인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고, 나는 이 영화에 내가 왜 그토록 감동을 받았는지 스스로 곱씹어 보았다. 운명적인 것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처음에 자말의 운명은 여러 조각들로 쪼개져 그의 인생에 차곡차곡 복선으로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각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와 장소에서 한데 모여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렇게 복선의 도움으로 운명이 완성되는 이야기는 흔하다. 그렇다면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이야기가 그토록 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정말이지 아이러니하게도, 복선들과 운명 사이에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퀴즈 쇼의 출제 문제들은 무작위적으로 선정되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자말의 인생의 어느 특별한 순간들과 연결될 확률은 0에 가깝다. 정말 묘하다. 결국 우리는 완벽한 우연들이 모여 필연적인 운명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 이 상황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물리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즉,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초기 조건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이러한 결정론에 우리는 숨이 막힌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단어에는 숨이 막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보았듯이 오히려 감동을 받는다. 결정론은 숨 막히지만 운명은 감동적으로 느낀다는 것인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왜 그러는 것일까?
- 사랑 : 물리학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가장 큰 이유는 물리법칙의 불변성 때문이었다. 3장에서 물리법칙의 불변성과 사랑의 가변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역시 인생에서 몇 차례에 걸쳐 심한 사랑앓이를 했다. 그럴 때마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진정한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사랑은 법칙이 아니라 상태다. 물리법칙이 불변이어도 물질의 상태는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도 변할 수 있다. 다행히 여기에도 불변의 법칙은 있다. 사랑이 변하는 변하지 않든,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성숙한다는 점이다.
- 철학 : 어렸을 때 나의 꿈 가운데 하나는 철학자였다.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동안에도 그 꿈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학기에는 철학 수업을 듣기로 결심했다. 기본부터 착실하게 시작하고자, 철학 개론을 신청해 한 학기 동안 열심히 들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개론 수업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 근대 독일철학까지 주요 철학 사상의 기본 아이디어를 개괄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철학에 나름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철학적 생각을 깊이 해봤다는 자부심에도 불고하고, 형편없는 학점을 받았다. 철학자의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갔다. 그래서 철학 개론을 한 번 더 듣기로 했다. 새로운 개론 수업은 이전과 달랐다. 담당 교수님은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님이었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강의는 한 철학자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바로 베르그송이었다.
-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제 막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물리학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존재는 한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존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화한다. 이 과정이 지속이고, 지속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는 공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좌표로서의 시간, 즉 물리학적 시간 개념과 대조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아예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베르그송의 철학을 우연히도 거의 동시에 배우며, 시간의 의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의 산물이다.
- 여기서 쇼어의 알고리즘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쇼어의 알고리즘이 구현하려면 큐비트, 즉 2순위 양자 시스템의 위상을 정밀하게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즉, 양자 컴퓨터는 파동함수의 위상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것을 전제한다. 사실 쇼어의 알고리즘과 같이, 양자 컴퓨터는 응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전에 순수하게 과학적인 측면에서 먼저 제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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