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신지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RHK)
출간 : 2020.04.10
일상이라는 단어는 어떤 시간을 지칭하는 것일까.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 사이의 어떤 익숙함? 휴일을 맞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지는 여유와 느긋함? 차림새는 달라지지만 매일 한 끼 이상은 먹게 되는 식사?
'일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개개인들이 떠올리는 것들은 모두 다를 것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에게 '일상'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당연하게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이 있었다면 어제도 있었을 것이므로. 일상이란 그 시간들을 잇는 어떤 공통점일 것이므로.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과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함께 경험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분 좋은 편안함과 공감일 때, 그 책은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내게 <평일도 인생이니까>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뜨거웠다. 한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주로 술에 관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들은 공통적으로 '항상' 소중하게 살라는 메시지였다. 평창 올림픽에 참가해 숙소에 꽂아둘 꽃을 사는 사람들, 여행지의 숙소에서 금세 자기 자리를 만들어 내던 동행, 금토일이 아니어도 의미 있는 나의 시간들-. 내게는 이 이야기들이 모두 특별한 때,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읽혔다.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은 모든 순간이 '살아있는' 시간들이다. 그것을 누군가의 시선과 잣대로 편집해 '이 부분은 들어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언젠가 변하고 말 가치관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있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평일'을 인생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서 발견했다.
그저 매 순간을 그 순간의 나로서 '조금 더 충만하게' 보내고자 하는 작은 노력.
그래서 매 순간 새롭게 찾아오는 그다음을 설레는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
그것만이 유의미한 것 같다.
- 김신지.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로 오늘만 사는 '맥덕'이 되기로 다짐했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
- 오키나와 노인들의 장수 비결은 80퍼센트만 먹고 80퍼센트만 최선을 다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인즉슨, 지금부터 덜 먹고 덜 애써야 할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아무도 알려 준 적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데. 그동안 내 수명을 깎아 먹는 방식으로 살아온 것만 같아 억울할 정도다.
- 내가 더 이상 낮잠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은, 집안 사정이 나아지고 스스로 돈을 벌게 된 이후의 일이다.
- 그러니 잘 모르겠다. 그 시절의 나에게 오키나와 할머니의 장수 비결을 들려주었다면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스물두 살이던 그때, 지금처럼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유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면 좀 더 느슨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뭐라도 열심히 했어야 했으니까. 열심히 사는 것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 지금의 내가 '덜 열심히'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저 나이를 먹어서인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지, 글을 쓸 때 부러 더 느슨해서 매력적인 사람인 척 하려는 허영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전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 서른 이후 나는 속으로 자주 중얼거려 왔다.
'그래, 그렇게 되면 참 좋겠지. 하지만 너무 애쓰지는 말자. 이 모든 건 결국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들이야.'
애먼 데 애쓰다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주 그렇게 되뇌어야 했다.
- 열심을 덜어 낸 자리에서 자주 물었다. 애매한 재능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무난하고 야망 없는 사람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괴로운 건 왜일까?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왜 자꾸 남의 삶이 부러워질까? 내가 나여도 정말 괜찮은 걸까?
- 질문이 너무 크거나 멀어 보일 때면 발밑을 본다. 오늘의 인생을 잘 살아 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나'라는 사람을 데리고 일상을 잘 건너고 싶어서 여전히 연습 중이다. 무난한 재능으로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 나가는 방법을, 주말만 기다리는 대신 평일의 고단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방법을, 덜 애쓰고 더 만족하는 하루를 사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
- 언젠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쓴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그때 작가님들은 웃다가 의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우리는 그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누군가가 힘든 얘길 꺼낼라치면 유행어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어마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바보맹키로..."
- 그러니 이 모든 건 결국 마음의 문제다. 스트레스가 전화를 걸어오면 나는 그냥 안 받을란다.
- 이 와중에 야망의 시대를 무사히 건너기 위한 아주 단순한 방법을 발견했는데, 바로 지금을 호시절이라 여기는 것이다. 호시절이란 무엇인가. 삶의 낙이 있는 게 호시절이다. 야망 없는 이들이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선 가끔 삶의 의욕이 샘솟는 순간이 필요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날씨 좋은 어느 날 노천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삶에 대한 의지가 불끈 솟곤 한다. 딱 그런 정도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마시려면 역시 열심히 일해야겠어!"
- 그 정도의 '열심히'가 좋다. 그 정도의 열심히는 실천도 할 수 있고 기분도 좋으니까. "이 맛에 산다" 하는 순간이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스몰 픽처.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야망가였다.
자, 그럼 각자의 길을 갑시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대개 '하다'와 '되다'를 혼동하는 데서 온다. 어느 독립영화 감독을 인터뷰할 때다. 보통은 영화를 하고 싶으면 시험 쳐서 영화과 진학부터 하던데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덜컥 월세 보증금 빼서 영화부터 찍었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은 영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거겠죠. 하고 싶으면 어떤 식으로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되고 싶어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성공한 누군가를 동경하면서요."
-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중에서
- 스물다섯에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가 신세 한탄이나 하며 매일 글쓰기로부터 도망치던 내 책상 앞에 붙여 주었던 쪽지가 있다.
"작가란 오늘 아침 글을 쓴 사람이다."
-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세계였다. 단지 오늘 아침 일어나 글을 쓰면 되므로. 물론 늦된 내가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지만. 그리하여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더라도, 매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이경미 감독의 책 <잘 돼가? 무엇이든>엔 이런 문장도 나온다.
'내가 좇고 있는 목표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면 빨리 그만두겠다, 고 수시로 다짐한다.'
- 나는 이 말에도 동그라미를 쳐 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에 대해 가져야 하는 유일한 태도가 아닌가 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든 아니든, 그 일이 나를 정말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세상에 나를 망치는데도 버텨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란 건 결코 없으니까. 일을 하며 그 정도까지 불행해진다면 그렇게 얻은 성취감이나 돈으로 아무리 퉁을 쳐 봐야 퉁이 안 될 테니까.
- 과거의 서러움은 그렇게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결핍이,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그런 것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지도.
- 생계만 있는 삶 말고 그저 시간을 누릴 줄도 아는 삶, 나는 오로지 그런 삶을 갖고 싶었다.
-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어린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으로 자라. 내 행복은 내가 책임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른으로 사는 기쁨은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 망했다. 다 망했어. 나는 되는 게 없어.
이럴 땐 후회를 입 밖으로 내뱉어 옆에 있는 사람도 함께 후회하게 만드는 게 내 특기다.
- "괜찮아, 가는 길인데 뭐. 이것도 여행의 일부라면 일부지."
강은 가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한다. 수시로 기우뚱거리는 나를 대신해 시소 위에서 그때그때 앞으로 두 칸, 뒤로 한 칸씩 옮기며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말을, 듣고 나면 늘 이 상황이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기게 하는 말을.
- 강의 말을 곱씹는 동안 생각했다. 이 세 시간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고. 지금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나의 주말, 나의 토요일이었다. 엄연히 내 인생의 세 시간이고.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이런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 언제부턴가 버스 안에서, 기차 안에서,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힘들어하게 되었다. 그건 아마 견디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일 거다. 예전의 나는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시간을 그 나름대로 보낼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자꾸 비좁아진다. 어쩌면 과정보다 도착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른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목적지에만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인생을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으로 구분하고, 나머지 날들을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이라 치부하지 않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삶의 시간이 다 그렇다.
- 출·퇴근하며 입버릇처럼 "빨리 토요일 되면 좋겠다"라고 하는 순간 평일은 인생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그건 참 이상한 말이다. 그럴 때 우린 월·화·수·목·금요일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주말에 도착하기 위해 버리는 날들?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싶은 벌칙 같은 시간?
- 행복한 순간 앞에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아까워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식으로밖에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그 외의 시간들을 하찮게 대할 때, 우리가 버리고 있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인생인데도 그동안 숱한 평일을 인생에서 지우며 살아오고 있었던 나처럼.
- 벚나무는 꽃이 지고 난 뒤 사람들이 무슨 나무인지도 몰라주는 나머지 세 계절을 버리며 살까? 그렇지 않다. 나무는 나무의 시간을 살 뿐이다. 벚나무는 한 철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인생은 수많은 월화수목금토일로 이루어져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그 주말 나는 꽉 막힌 도로에서 봄의 한나절을 지켜보았는지도 모르겠다.
- 평창 동계 올림픽 때 경기장 주변 꽃가게의 매상이 올랐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시상식용 꽃을 근처에서 구매하기 때문인가? 기사 제목을 보고서 혼자 이런저런 짐작을 했는데 이유는 의외였다. 외국에서 온 선수들이 숙소 방에 꽂아 둘 꽃을 사기 때문이란다. 신기록을 내거나 메달을 겨루러 와서는 이 무슨 낭만 타령인가 싶어 너무 좋았다. 그런 사람들은 잠시 머무는 이곳을 결코 대충 대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곳을 임시로 머무는 곳, 금세 떠날 곳, 그러니까 원래의 삶에는 포함시키지 않을 곳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들은 일상과 비 일상을 나누어 어느 한쪽을 홀대하는 대신 지금 머무는 곳에서도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걸 안다.
- 기억해 두고 싶은 말이다. 그냥 좋아지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 관심을 가져야 좋아진다. 그게 방이든, 일상이든, 삶이든.
- 그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편하게 머물고, 어떤 디테일들을 좋아하는지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낸 뒤 스스로에게 조금씩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 아무거나 먹고 아무 물건이나 곁에 두고 아무렇게나 하루를 여닫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것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고 오늘은 한 번 뿐이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 그렇게 보내는 일상이야말로 단단히 네 다리로 버티고 서서 나라는 사람을 지탱해 준다.
- 그런 와중에 어느 날 술의 신이 나타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필름이 끊겨서 어젯밤 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 날 숙취가 전혀 없는 삶.
vs.
필름이 안 끊겨 끝까지 즐겁게 마시지만 다음 날 숙취가 죽도록 심한 삶.
- 선택이 가능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고민이 아닌가. 우리는 둘 중 뭐가 더 나은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얘기했다.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을 보아서인지 내심 상대방의 옵션이 탐나긴 했다.
"아니, 숙취를 왜 안 느껴?"
"아니, 필름이 왜 안 끊겨?"
약간의 존경과 질투를 담아 서로를 바라보며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 <구해줘! 홈즈>는 옳았다. 한여름의 이사는 '당분간은 절대 이사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지만, 장소를 옮기는 것만으로 일상이 환기되었다. 그건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들며 한동안 삶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던 내 뒷덜미에 누군가 시원한 손바닥을 올리며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다르게 살 수도 있다고, 다른 풍경을 보고 싶다면, 그냥 한 발자국을 더 떼 보면 된다고. 오래 방치해 먼지 쌓여 있던 일상에 다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기분이었다.
- 살던 대로 사는 건 편한 일이었지만, 정말 내게 가능한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을까 생각하면 마음은 다른 데를 가리키곤 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가만히 두면 곧잘 무기력해지고, 좀처럼 모험심이 없는 편인 나는 살아가면서 종종 어떤 선택들을 합리화하곤 했다. '이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저쪽에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접는 동안 포기해 온 숱한 기회들과 다른 즐거움들이 있었을 것이다.
- 무엇보다 이 집은 내게 새로운 다짐을 주었다. 좋아하는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어쩔 수 없다고,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라고, 나 자신을 위해 더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쉽게 부여해 주었던 변명에서 벗어나 내가 좀 더 좋아할 수 있는 삶을 꾸리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번 이사처럼 내가 건너가 보려 하지 않았던 한 발자국 앞에 있을지 모르니까.
- 참, 이사의 교훈은 하나 더 있다. 무언가를 계속 좋아한다고 말하면, 삶이 점점 그리로 가까워진다는 것. 이 집에 두 번째로 방문한 친구는 테라스를 보더니 외마디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말이 씨가 된다니까!" 그 말이 축하치곤 너무 격렬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나무 타령, 테라스 타령을 해 대더니 이 집이 너한테 걸어왔나 보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런 거라면, 좋은 것들에 대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말을 많이 해야지. 그 말들이 내 곁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될 때까지. 말은 씨가 된다니까, 언젠가 싹 틔우게 될 말을 아주 많이 해 버려야겠다.
- 이렇게 돌아다니다가는 오전 열한 시쯤 이미 하루치 체력이 바닥나고 말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스케줄이었다.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이란 원래 늦잠 자고, 부은 얼굴로 조식을 먹고, 씻고 나서 '오늘은 뭐 할까' 중얼거리면 어느덧 정오인 그런 게 아니었나. 우리 우정이 무사히 유지된 건 그동안 해외여행을 같이 떠나지 않은 덕분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하지만 앞으로도 여행은 각자 하자는 내 말에 친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 좋은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에게 맞는 여행이 있을 뿐. 다만 동행이 있을 경우엔 서로의 여행 스타일이 맞아야 더 즐거운 여행이 되는 건 사실이다. 미리 짠 촘촘한 스케줄에 따라 하루를 쓰고 노곤한 피로 속에 잠드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만큼 부지런히 걷고 보고 먹어 줄 동행이 필요하다. 반대로 느긋하게 쉬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어서 일어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채근하지 않을 동행이 필요하겠지.
- 한때 화제가 되었던 한국식 MBTI(짜장 vs 짬뽕, 부먹 VS찍먹, 물냉 vs 비냉, 밀떡 vs 쌀떡, 참고로 내 경우는 짜찍비밀이다)를 여행에 적용해 본다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
이왕 가는 여행, 꼼꼼히 정보를 찾고 미리 동선을 짜는 '계획형' vs. 여행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제맛이라 생각하는 '즉흥형’
일찍 일어나 조식을 챙겨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형' vs. 밤늦게까지 재밌게 놀고 늦잠을 푹 자는 '저녁형'
남는 건 사진뿐이므로 추억 남기기에 몰두하는 '사진형' vs. 사진 대신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는 게 낫다 여기는 '경험형'
먹는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맛집형' vs 먹는 것은 그럭저럭 중요하지 않은 '끼니형'
- 나 같은 경우 '즉저경맛'형에 가깝다. 물론 실제 여행에는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겠지만.
(리뷰자 주 : 오, 크로스. 거기서 조금 더 가서 휴양지 선호형이기도 하다.)
- 처음엔 '그래도 되는구나' 하는 걸 알았고, 나중엔 '그래 보니 좋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루에 한 가지만 하는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게.
- 아무 계획이 없는 것보다는 내겐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어떤 장소에 대해 너무 모르고 가면 아깝게 놓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좋아했을 것이 분명한 작은 가게, 어떤 마을, 근사한 풍경을 정보가 없었던 탓에 지나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나라는 여행자에게 얼마만큼의 준비와 여유가 적당한지를 점차 알아 갔던 것 같다.
- 지금의 나는 이런 여행자다. 비행기와 숙소는 미리 예약해 두고, 그 밖의 일정은 되도록 현지에서의 나에게 맡겨 둔다. 떠나기 전에 틈틈이 즐거운 맘으로 여행지의 정보를 찾아보긴 하지만 계획을 짠다기보다 내가 가면 좋아할 곳과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곳을 파악해 두는 정도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고 기념사진을 남기지도 않는 타입의 나는 사람들이 쇼핑과 기념사진을 위해 많이 찾는 곳에 굳이 갈 필요를 못 느낀다. 그 대신 '어딜 가면 가장 느긋한 마음(이 맛에 여행하지! 싶은 상태)으로 머물게 될까'를 찾아본다.
-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하루에 한 가지만 하는 계획을 세운다. 오늘은 친구가 추천해 준 식당에 가야지. 오늘은 숙소 해먹에 누워 종일 책맥을 해야지. 오늘은 해안가 언덕에 가서 사진을 찍어 와야지. 그 정도의 느슨한 계획이 좋았다. 나머지 시간들을 자유롭게 비워 둘 수 있으므로, 아직 오지 않은 우연들을 기다릴 수 있으므로. 여백으로 비워 둔 시간엔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의 하루에 동행하게 된다거나,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저녁때 열린다는 공연에 초대받는다거나 하는. 일정이 빽빽했다면 아쉽지만 거절했을 일들, 그리하여 내게 남을 리 없었던 추억이기도 했다.
- 나도 나를 겪어 봐야 안다.
- 내가 이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 부분이나 이런 것을 좋아할 거라고 예상한 건 종종 빗나가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된 '여행하는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곳을 많이 들르는 데 큰 관심이 없고, 마음 편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서울에서의 일상이 이미 빽빽한데, 여행을 하면서까지 그런 시간을 살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 정한 스케줄에 쫓기는 기분을 느끼며 바삐 움직이는 것도 싫었다. 그런 나를 조금씩 알아 가면서 점차 내가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여행을 찾아간 셈이다.
- 가끔은 여행지에서 너무 한가로운 나를 보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본전은 뽑아야지" 하며 걱정해 주는(?) 여행자들을 만난다. 나로선 이왕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더욱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여행에서 '본전을 뽑는다'는 게 대체 뭘까? 뭐가 본전일까?
- 여행에 얼마를 들였든, 어디를 가든, 진짜 본전이란 건 내가 만족하는 선을 말할 것이다. 내가 즐겁고 행복했던 여행이라면 그게 바로 본전을 찾은 여행이다. 그러니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좋아할 필요도, 어떤 방식으로 여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만족은 오롯이 나의 것, 추억도 오롯이 나의 것.
- 여행은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일상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지만, 여행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구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가 중요해지고, 그 방식이 각자의 여행 스타일을 만든다.
- 그래서일까. 여행을 거듭할수록, 여행이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이번 삶이 이미 출발해 버린 한 편의 긴 여행이라면,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 걸까? 일단 남들 가는 데를 다 가 보는 부지런한 여행과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천천히 찾아보는 여행.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추억을 많이 남기는 여행과 한 군데 머무르며 오래 기억할 추억을 만드는 여행.
-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을 찾는 건,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들처럼 여행하려는 사람은, 사는 것도 남들처럼 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것은 여행이 내게 알려 준 유일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남의 여행을 곁눈질하는 대신, 나의 여행을 하라는 것.
- 책의 시작 부분에 넣은 사진을 찍었던 카페도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어느 노천카페 옆을 지나치다 나무판자 위에 적힌 "Do more of what makes you happy."라는 문장을 맞닥뜨리고 꼭 내가 하는 여행을 가리키는 말 같아 카메라 셔터를 눌렀었다. 당시 머물렀던 숙소의 근처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같은 골목을 몇 번이나 왕복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가게가 없어지기라도 한 걸까? 결국 실례인 줄 알면서도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러 들르던 카페의 주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물어보았다.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던 나무 간판을 기억하느냐고. 그는 친절히도 그 카페라면 얼마 전 위치를 옮겼노라며 문밖으로 나와 길을 짚어 주었다. 그가 알려 준 대로 찾아간 곳은 놀랍게도 내 가 머물던 숙소의 바로 앞! 등잔 밑도 이런 등잔 밑이 따로 없었다.
- "내 생각도 그렇구나. 내일은 아주 특별한 일을 해야 돼. 에펠탑에 올라가 볼까?"
"지베르니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내일 지베르니에 가면 좋을 텐데."
"같은 일을 두 번 할 수도 있단다. 그게 아주 특별한 일이라면 말이다."
-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 정원에서> 중에서
- 블룸 할아버지와 리네아가 나눈 이 대화는 워낙 좋아해서 몇 번이나 인용한 적 있다. 그건 그만큼 지금 나의 삶이 이 문장 위에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좋았던 장소에 두 번 가는 일, 쉬운 듯 보여도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행에서라면 더더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 같은 장소에 두 번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한다.
- 요즘 내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이미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는 시간. 여러 곳에 가는 것보다 한 장소에 제대로 머무르는 일. 거기 좋았잖아, 또 가 보자,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좋다. 다시 가서 다시 좋아하는 일이 좋다. 읽었던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다른 곳에 밑줄을 긋고, 이전엔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을 발견하는 일이 좋다. 그런 독서는 꼭 천천히 하는 식사 같다.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밥을 물에 말아 급하게 넘기는 게 아니라, 한 숟갈을 제대로 뜨고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는 식사.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느낀 것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는 기분이 든다.
- 그동안 내가 '효율'이라고 믿어 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 갈 때마다 지도 앱을 켜서 최단 거리, 최소 시간을 재어 보듯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경험에도 효율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한 권을 빠르게 읽어 갖게 된 여분의 시간으로 다음 책을 읽으면 만족할까? 묻다 보면 답은 늘 같은 곳을 가리킨다. 시간은, 경험은 결코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 어린 시절의 나는 남들의 속도에 맞춰 급히 밥을 먹다가 곧 잘 탈이 나던 아이였다. 이젠 내 식대로 꼭꼭 씹어 소화시키고 싶다. 좋은 풍경도, 좋은 책도, 좋은 시간도. 읽은 책을 다시 읽고, 갔던 곳에 다시 가면서 살고 싶다. 인생의 기회비용이 그런 데 있다고 믿지 않게 된 후로 나는 잘 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김연수 작가는 평생 가장 좋아하는 책 백 권을 업데이트한 다음, 일흔이 넘어서는 그 책들만 반복해서 읽다가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백 권은 좀 많은가? 살아가는 게 열 권의 진짜 좋은 책과 열 군데의 진짜 좋아하는 여행지를 알아 가는 일이라면, 어떤 경험도 어떤 시간도 기꺼울 수 있을 것 같다.
- 사전에서는 제철을 '알맞은 시절'이라 풀어쓴다.
알맞은 시절.
제철, 이라 부를 때보다 어쩐지 더 마음의 정확한 지점에 가 닿는 표현이다.
- 장마가 지나면 수박은 싱거워진다. 때를 지나 너무 익은 과일은 무르기 시작한다. 지금은 무엇을 하기 알맞은 계절인지, 과일 가게 앞에 서서 골똘히 고민할 때처럼 눈앞의 일상을 바라보고 싶다.
- 바쁜 건 나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의 여유가 없으면 이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들만 보일 때에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반갑게 건네오는 인사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상대방이 하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게 되고, "우리 언제 볼까" 물어오는 친구의 메시지에 시간을 맞춰 날짜를 잡을 마음의 여유도 없어진다. 지친 채로 퇴근하면 밥을 지어 먹을 기운 같은 건 이미 회사에서 다 써 버린 것 같다. 아무 배달 음식이나 시켜서 끼니를 때우고 정리되지 못한 어수선한 방에서 잠이 든다. 생활은 그렇게 방치되고 오늘 치의 기쁨은 내일, 내일 아니면 주말, 그도 아니면 언젠가 찾으면 되겠지, 여기게 된다. 모든 건 '바쁜 일'을 처리하고 난 뒤로 밀려난다.
그런 상태가 나쁜 게 아니면 뭐겠는가.
- "원래 내가 안 이랬는데, 왜 이러지."
지금의 내가 별로일수록 어쩐지 그런 말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나 원래는 이런 사람 아니야, 나중엔 달라질 거야. 비록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그러니까 언제라도 이 상황, 이 일을 벗어나기만 하면 좀 더 나은 내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면 일과 나는 자꾸 가까워지는데 나는 나와 자꾸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이 되어 가만히 누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아, 네가 거기 있었지'하고 나를 알아채는 기분이 드는 걸까?
- 이대로 바쁜 나로 나쁘게 살 수는 없었다. 매일 등 뒤에서 일거리가 쫓아오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 일에 쫓기며 뛰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것도, 그러다 보니 결국은 '내가 뭐 하러 이렇게 뛰고 있었더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정말이지 다 싫었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상을 회복하고 싶었다.
- 이사를 오자, 나는 아침잠을 이기지 못하던 나약한 인간에서 하루아침에 혼자만의 아침 시간을 갖는 차분한 사람이 되었다. 그저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동안 스스로를 나무란 세월이 미안할 정도였다. 30년을 살아 봐도 도무지 안 되는 일이 있다면(그게 겨우 '일찍 일어나기'지만...) 그걸 못 한다고 비난하기보다 환경을 바꿔 주면 되는 거였다.
- 그 후로는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낸다. 눈을 뜨면 거실로 나와 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5분 정도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내려서 책상 앞에 앉는다. 창밖으로 오늘 날씨가 어떤지, 집 앞의 나무들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공원 초입에 오늘은 어떤 트럭 장수가 와 있는지 바라본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마음속으로 찬찬히 정리하고, 저녁엔 무엇을 해 먹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용히 머물 때의 나를, 나는 비로소 좋아할 수 있었다. 알람이 아닌, 내 의지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기분도 들었다.
- 요즘엔 저녁 시간도 추가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혼자테라스로 나가서 평소 제일 좋아하는 향(친구가 '이것은 마치 홍대 어딘가에 있을 법한 지하 1층 구제 옷가게 향'이라고 말하는)을 하나 피워 놓고, 그 향이 다 타기까지 앉아 있는 시간을 보낸다. 2, 30분 정도 될까. 처음엔 가만 앉아 있기가 좀이 쑤시기도 했는데 이젠 편하다. 기억해 두고 싶은 장면을 날마다 하나씩 발견하기도 한다.
- '힐링'이란 말은 아무리 봐도 낯선 단어처럼 느껴져서 그냥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거기 앉아 있을 때면 '힐링'이란 단어의 생김새가 만져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쉬고 있구나, 나는 회복되고 있구나, 나는 충전되고 있구나, 하고.
- 겨우 숨 고르는 법을 익혀 가는 나는 이제 '시간'을 잘 고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먹을 점심 메뉴를 고르고, 커피 종류를 고르고, 내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것처럼 내가 보낼 시간도 나를 위해 잘 고르는 사람이.
-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내가 그토록 긴장하는 이유는 잘하고 싶어서였다. 잘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거기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한심해할 것 같은 마음, 쓸모도 없는 말을 늘어놓는 나를 보며 저런 게 작가라니 실망할 것 같은 마음, 그러니까 그 자리에선 나를 어떤 식으로든 평가할 거란 두려움이 있었다. 동시에 그런 나를 가장 혹독하게 평가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내성적인 게 아니라 그건 어쩌면 대단한 자의식인지도 몰랐다.
- 그래왔는지 모르겠다. 사는 것마저 '잘'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등바등 스스로를 들볶았는지도.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잘 살지 않고 그냥 살아도 되는 거였는데. 무엇보다 제대로 사는 인생이라니. 그런 건 없는데도.
- 태어나길 피곤하게 태어난 나로서는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것만 익혀도 인생이 훨씬 가벼워질 것 같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 그럴 땐 역시 내겐 너무 청심환 같은 맥주를 한잔 마시고 생각해야겠다.
뭘 또 잘하려고 해, 그냥 해도 돼.
- 그런데, 도망이 과연 나쁜 걸까? 애초에 왜 도망을 나쁘다고만 말하는 걸까?
- 도망이 왜 있는데? 위험한 걸 피하라고 있는 건데.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도망치는 게 맞구나.
- 원래도 없었지만 나는 내가 또 우리가 끈기가 좀 없었으면 좋겠다. 부당하게 힘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스스로를 소진하는 것을 끈기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어디 갖다 붙여도 괜찮을 만큼 접착성이 약한 존재들이면 좋겠다.
-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먼저 한 선택을 번복한다고 해서 내 삶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스스로가 자리를 잘못 찾은 스티커같이 여겨진다면, 떼어서 다른 데 다시 붙이면 되는 일이다.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다음 기회가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우울해져서 그 여행을 스스로 망치지만 않으면 된다. 그게 어디에서 무얼 하든, 비 오는 날을 잘 여행하는 방법일 것이다.
- 물론 지금도 어느 날 갑자기 해탈한 듯 남이 부럽지 않거나 나라는 존재만으로 충만해 사는 게 즐겁고 그렇진 않다. 다만 그 시절의 어리고 서툰 나를 돌아보면 말해 주고 싶다.
'부러워해도 돼. 다만 거기 너무 오래 시간을 마음을 쏟지는 마.'
- 남과 나를 비교하느라 스무 살을 캄캄하게 보낸 나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1. 부러울 만한 건 부러워하자. 남에게서 더 나은 태도를 배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건강한 부러움은 인정.
2. 남을 부러워할 시간에 뭐라도 하는 게 낫다. 부러워하며 앉아 있어 봤자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주진 않는다.
- 누군가의 어떤 점이 부럽다는 건, 내겐 없는 무언가를 결핍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부분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게 낫다. 건강한 몸매가 부러우면 운동을 하고, 지식이 부럽다면 책을 읽는 식으로. 남을 의식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제자리에 머물지만, 그것을 나에 대한 집중으로 돌리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뗄 수 있다.
- 남이 아닌 나한테 집중하는 것. 그 어려운 일을 우리는 해내야 한다. 요즘같이 앞다퉈 SNS에 크고 작은 행복을 전시하는 시대에는 거의 수련이 필요한 일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남을 부러워할 시간에 차근차근 내가 되어 가는 게 낫다. 그러다 보면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때뿐, 나에겐 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어른은 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 스무 살을 지나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건 이제부터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소리니까.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나인 걸 인정하고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니까. 그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른 쪽으로 한 뼘 더 가까워지는지도.
- 어떻게 보면 지나간 시절이란 건, 밤새 쓴 편지 같은 것이다. 분명 당시엔 온 마음을 다해서 써 내려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단어들만 골라 쓴 편지였는데도 다음 날 보면 볼이 확확 달아올라 찢어 버리고 싶어지는. 그 시절 나의 마음이, 나의 최선이 나중에 보니 그랬다.
- 중요한 것은,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어느 시기가 지나야만, 우리는 과거의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나 있을 '그땐 내가 정말 왜 그랬지' 싶은 기억들. 그것은 곧 '지금의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는 늦은 후회이고, 지금의 나에게 과거의 내가 저지른 과오를, 서투름을, 비겁함을 알아볼 눈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거를 돌아보며 부끄러워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뒤집어 보면 그것은 그 시절로부터 우리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지질함이 지질함인 줄도, 비겁함이 비겁함인 줄도 알아보게 되었고, 나 자신을 훼손하지 않는 더 나은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서로의 '구남'에 낄낄댈 만큼 여유도 생겼다.
- 실수와 후회로부터 매번 배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지금의 우리는 후회로 빚어진 인간들이다. 그 모든 실수와 후회들이 우리를 우리이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스러워진다. 스무 살의 나를 부끄러워하는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 잡지 에디터 생활을 하며 그동안 인터뷰이로 만난 소설가나 영화감독들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해 줄 때가 있었다. 지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초기 작품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선선히 인정하며 말하곤 했다. 그 작품은 지금 보면 부족함이 너무 많이 보여 부끄럽다고.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내 작품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뜻이므로, 다행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말했던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보태고 있는 이들이었다.
- 우리의 스무 살도 그렇게 여기면 어떨까. 그 시절은, 지금 와서 보면 의욕만 넘쳤을 뿐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초기작 같은 거라고. 그때는 누가 말해 줘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저절로 보이는 걸 보니, 그사이에 나도 한 뼘 정도는 성장했나 보다고.
- 물론 과거를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성장'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과거의 못난 나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절의 내가 고군분투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낯부끄러운 초기작이라고 해서 내 작품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그때의 나에게도 수고했다고 말해 줄 일이다.
- 그러니 흑역사 앞에 끊임없이 부끄러워지는 스스로에게 말해 주어야지. 알면 됐어. 그게 너야.
그래도, 부끄러워서 다행이다. 지나간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어서. 삶은 여전히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을 테지만, 내가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것만은 기대해 볼 수 있어서.
- 그 시절의 나는 늘 '척'하며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원래의 그냥 그런 나로는 잘 살아 볼 자신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내게 필요한 척들을 했다. 친구가 많은 척, 뭐라도 재능이 있는 척,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만큼 밖에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척,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어서 나중에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 척.
- 돌아보면 그 아까운 시간 동안, 왜 그리 척을 많이 했던가 싶다. 그냥 좀 서투르고 별로인 나를 보여 주어도 되었을 텐데. 고만고만한 또래들끼리 만나 뭐 그리 괜찮은 척을 하고 싶어서. 명랑했다가 우울했다가 널을 뛰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가끔은 술에 취해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어 봤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다고 그들을 잃거나 나를 잃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이상하게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하나도 내가 아니었던 내가 거울에 비치는 기분이다.
- "너 방금 내 얘기 듣고 예은이가 그럴 만도 하다 싶었지?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얘기가 정답은 아니라도 사람마다 죄다 사정이란 게 있다는 거야. 그 사정 알기 전까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거. 예은이뿐만 아니라 강 언니도 그렇고 윤 선배도 그렇고, 너만 해도 그런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남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해도 너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어떤 거. 그러니까 남의 일에 대해선 함부로 이게 옳다 그르다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거짓말로 꾸며낸 사정에도 '그 사람이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 끄덕이는 우리가 현실에선 얼마나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마는지. 내가 보고 느낀 게 전부인 양, 상대방을 '그럴 만한' 전사(前史)도 없는 납작한 캐릭터로 여긴다.
- 갓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을 때 나 역시 은재만큼이나 어리숙했다. 집도, 동네도, 학교도, 친구도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가장 익숙한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나와 함께 다니며 타인을 쉽게 판단했다. 나는 뭐든 열심이고, 나는 생각이 많고, 나는 눈치와 예의를 갖췄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 보이는 누군가를 결론 내리기란 쉬웠다. 반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 구김살 없이 자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또 금세 부러워했다. 부러워하면서 그 부러움 때문에 미운 점을 꼭 찾아냈다. 어리광이 심하다거나 모르고서 하는 행동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식으로. "쟤는 왜 저럴까"와 "재는 참 좋겠다" 사이, 타인에 대한 판단이란 단지 그 둘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 이상한 것은, '나의 사정'은 그런 이유로 감추며 사는 우리가 다른 이에겐 그런 사정 같은 게 없으리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감추었듯, 그들 역시 감추어서 보이지 않는 것뿐일 텐데도. 내가 남에게 보이기로 마음먹은 모습만 보이듯, 상대방 역시 그럴 텐데도. 학교 앞에서 매일 술자리를 벌이며 별생각 없이 사는 듯한 K에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천생 외동인 J에게 그럴 법한 사연이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렇게 내가 느낀 대로, 나 편한 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분류해 놓은 다음, 좀처럼 그 결론을 수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그 사람의 이면이나 속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라고 마는 것이다. '너한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내가 너를 정말 몰랐구나' 하고.
- 그러니 우리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마치 전부인 것처럼 오해받고 있다고 속상해하면서, 상대에 대해서는 같은 오해를 반복하니. 나를 규정하듯 하는 말에는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불쾌해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그런 말을 서슴지 않으니.
- 그날, 햇볕 들던 단과대 앞에서 나를 서럽게도 서운하게도 했던 그 빚은 이제 다 갚았고, 나는 내 월급으로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가끔은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것에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네가?" 하고 되묻던 동기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건 어쩌면 의외의 반가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너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반갑다고, 나만 빼고 다들 적당히 잘 사는 것 같아 힘들었는데, 너도 힘들었었냐고. 어쩌면 그 친구가 4년간 말 못 하고 다녔을 그만의 사정에 대해서도.
- 그때의 경험이 살아가다 한 번씩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든다. 누군가를 어떤 종류의 사람에 쉽게 분류해 넣을 때마다, "그 사람 원래 그렇잖아" 하고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싶어 질 때마다 떠올린다. 모두가 '척'하며 살고 있을 어떤 부분에 대해.
- 하지만 모두와 일대일로 포장마차에 갈 순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고.
- 외로운 우리가 조금 덜 외로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상대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게 그토록 많은 일들이 겹겹이 일어난 것처럼, 그 시간들이 포개지고 포개져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렇다. 지금의 그를 이룬 크고 작은 일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종내는 우리를 끌어안고 울게 할지도 모를 사연이.
- 우리는 어떤 나이에도 늦을 수 없다.
삶의 어떤 시간에도 실은 늦게 도착한 적 없다.
지금에 이르러 내가 겨우 이해한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내 나이를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 나는 내 시간을 살아갈 뿐이니까. 내가 천천히 겪은 변화들, 내 시간을 살며 만난 사람들과 알게 된 경험들,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남을 함부로 부러워하지 말고,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그냥 내 나이'를 받아들이며 지금처럼 내 속도대로 걸어야지. 그거면 된다.
- 물론 쉽진 않다. 쉽지 않으므로 자꾸 생각한다. 내년의 내가 한 살 어린 올해의 나를 보며 '아, 그때 참 좋을 때였는데'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할 필요 없었는데'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하며 후회하지 않도록. 적어도 서른의 내가 스물의 나를 바라볼 때보다 마흔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볼 때 더 괜찮아진 나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시간을 살아 내고 싶다.
- 한 달 남짓 혼자서만 지내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람과 함께 여행 중이라는 것을. 그건 외롭고 적막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무언가가 조용히 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일이기도 했다. 창 너머 달처럼, 내 안의 비어 있던 어떤 부분이 차오르는 것을.
- 나에 대해서는 자꾸 잊게 된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깊은 밤,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생각한다. 나하고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혼자 있을 때 깃드는 고요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너무 많이 만나지 않고,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해야 할 말들만 한 뒤 다시 혼자로 잘 돌아오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혼자 있는 법 역시, 평생을 살아가며 배워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 안양에 있는 삼촌 집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수업이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일찍 돌아온 날이면 피로에 지쳐 개어 놓은 이불 위에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열심히 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열심히 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불에 쓰러져 선잠을 자다가도, 현관문 앞에서 삼촌의 열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열쇠 소리에 튕겨 오르는 용수철처럼 매번 그랬다. 안 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에 남아 있는 졸음의 흔적을 마른세수로 지우며 거실에 나가 인사했다.
- 낮잠을 자는 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 시간을 낭비하는 일 같았다. 새벽에 나가 밤이 이슥해서야 들어오는 부모를 두고, 부모에게 은혜를 갚듯 나를 기꺼이 거둬 준 삼촌을 두고, 내가 그리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삼촌은 나를 단 한 번도 나무란 적 없는데. 열심히든 부지런히든 어떻게 살라고 말한 적조차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 "여러분은 인생의 편도 티켓을 쥐고 있는 셈이에요. 인생을 허비하지 마세요."
호스피스 병동에 머문 환자들의 사진과 글로 이루어진 전시 <있는 것은 아름답다 Right, Before I Die>에서 마주친 말이다. 어떤 열심은 인생을 허비하게 만든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제, 그런 열심과 아닌 열심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이다.
- 무작정 열심히 살라는 말에 지치지만, 다 괜찮다는 말에도 전혀 괜찮지 않기 때문에. 진짜 대답은 내가 찾아 스스로에게 해 주는 수밖에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저녁도 못 먹었어. 요새 일이 너무 많아. 아, 스트레스 받아..."
"어마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아니 무슨 스트레스가 전화인가. 안 받을라 하믄 안 받게. 역시 걱정해 주려고 전화해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만국엄마들의 화법이 있는가 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스트레스'라는 단어에 이상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병원 진찰실에 앉아 "원인이 뭘까요?" 물었더니 의사 선생님이 "요새 스트레스 좀 받으셨죠?”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줄 때, 갑자기 내 눈에만 보이는 인숙 씨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나타나 말하는 것이다. "어마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 어쩌면 인생은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부모가 보았을 때 '별다른 것이 되지 못한 삶'을 사는. 70점짜리 재능은 자라지 않았고 별다른 것이 되지도 못했다. 그럴 때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해 나갈 수 있을까? 오랫동안 나는 이 질문을 품고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 쓰는 일을 좋아하지만 늘 한 발짝 물러선 자세로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찾는 게 나을까?" 고민하기도 했고, "그래도 넌 좋아하는 일 하잖아"라고 말하는 친구들 앞에서 변변한 매력 발산도 못 하고 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이 짝사랑에 대해 설명하지 못해 답답해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난 뒤, 내가 닿은 물이란 이런 세계다. 무엇이 되려고 하기보다 무엇을 하는 게 더 중요한 세계.
- "제가 젊었을 때의 제 젊음을 생각해 보면, 좋은 건 알겠는데 늘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뭔가 늘 달떠 있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제게 젊음은 그런 편이었어요. 지금은 그 젊음을 겪어 낸 후의 또 다른 평온함도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마 앞으로도 내가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또 다른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고요. 그것을 기다리는 일이 참 좋습니다."
- '또 다른 무엇.' 아직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렇다면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우리들의 진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중에서
- 내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홍)화정 씨는 언젠가 발리 여행을 떠나 이런 만화를 그린 적 있다. 복층 숙소에서 동행은 1층을, 자신은 2층을 썼는데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가니 누가 봐도 그 사람 자리다 싶은 공간이 생겨 있었다고. 그림 속 좌식 탁자 위에는 작은 캔들과 수첩, 펜과 연필등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 앞 벽면엔 두 장의 엽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자리의 주인은 아마도 이 분위기를 닮아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그냥 자기 짐을 풀어놓는 것과 그 사람의 동선과 패턴이 느껴지는 건 좀 다른 일인데, 동행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고, 자기가 뭘 좋아하고, 뭘 하면 편안한지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어떤 '자리'를 구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같다고.
- 몹시 그렇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건 여행에서도 반드시 루틴을 유지해야 해서 자기가 쓰는 드라이어나 입욕제를 챙겨 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다. 어디서든 자신의 자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 짐도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빈손으로 도착하더라도 현지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닮은 공간을 꾸려 낼 수 있을 테니까.
- 지나는 주변으로 향기를 남기듯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반경을 만드는 사람, 어디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을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네 개의 다리가 흔들림 없이 균형을 이루는 의자처럼. 어떤 울퉁불퉁한 삶의 표면 위에서도 결국 안정감 있게 서고 마는 그런 의자처럼.
- "한국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온전히 내 집이 아니니까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무엇이든 관심을 가져야 좋아져요. 청소도 열심히 하게 되고 무엇을 두면 예뻐질까 머리를 쓰게 되는 거죠. 그럼 어떤 향기가 나면 좋겠다, 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고요."
- <VENUE> Volume. 2 중에서, 공간 디렉터 최고요
- 잠시 머무는 곳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는 것.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사는 대신 일상에 소소한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그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인생을 대하는 태도라 생각하면 그리 작은 차이는 아니다. 하루 꼬박 여덟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책상을 자기답게 꾸미는 사람이 있고, 2년 계약의 전셋집을 자기 취향대로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 마감도 없고 근심도 없는 홀가분한 백수의 몸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를 때 나는 얼마나 설렜었나(가장 신나는 여행을 하려면 사람은 퇴사란 걸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우리는 내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매일 밤 술을 참 열심히도 마셔 댔다. 술 마시고 할 얘기란 시덥잖은 것밖에 없었으므로, 하루는 과연 우리 둘 중 누가 술꾼으로서 더 나은가로 이야기가 뻗어 간 적도 있다.
- B와 나는 주량이 비슷했다. B는 과음을 하면 필름이 자주 끊기는 편인데 대신 숙취가 전혀 없었다. 숙취란 게 무엇인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다는 그녀의 말간 얼굴을 보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맙소사! 그런 인생이 있다니! 나는 몇 번이고 되물었다. 진짜 숙취를 모르냐고. 다음 날 속이 막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근육이 다 녹은 듯하고, 만사가 귀찮은 와중에도 '어제 내가 왜 그랬지, 미쳤지 미쳤어'하며 하루 전의 나를 맹렬히 비난하는 그 마음을 정녕 모르냐고. B는 정말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술은 그냥 마시면 맛있고 즐거워지는 음료라는 것이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숙취가 없다면 술이 나쁠 게 무언가! 고전적인 조건반사 이론에 따르자면, 그녀에게 술은 부정적 신호로 저장될 게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물론 필름 끊긴 상태에서 흑역사를 생산한다면 다른 문제지만, B의 흑역사라고 해 봤자 용눈이 오름에서 술에 취한 채로 굴러 내려온 전적이 있다는 게 전부였다. 그 정도야 뭐 애교로 봐줄 만한 주사였다.
- 반면 나는 과음을 해도 필름이 잘 끊기지 않는다. 그 때문에 내가 멀쩡한 줄 알고 계속 마신다는 게 함정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속이는 셈이다. 아니야, 너 괜찮아. 더 마셔. 어허, 어딜 집에 가. 이렇게 재밌는데. 마셔, 마셔. 오늘만 산다! 짠! 언제쯤 멈춰야 하는지 브레이크가 없는 술꾼인 셈이다.
- 그리고 이튿날, 어김없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린다. 하루 동안 누구보다 심각한 참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다. 어제 왜 그랬을까. n번째 잔에서 그만 마셨어야 했는데. 기분 좋게 마시고 기분 좋게 집에 와서 기분 좋게 출근하기로 해 놓고선. 앞의 두 개는 됐는데 마지막이 왜 안 된 걸까.
- 이토록 괴로운 숙취를 겪고서도 인간(=나)은 왜 또 술을 마시는가. 그것은 내 인생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다음날 고생할 걸 뻔히 알면서 왜 '적당히'를 넘어서는가. 나는 붕어인가. 숙취에 시달릴 때 후회를 거듭하며 이제 다신 술 못 먹겠다 싶다가도 그날 저녁이 되면 왜 또다시 마실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인가. 몹쓸 마셔러블 상태. 나는 왜 나를 이렇게 쉽게 용서하는가.
-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이 생각 회로 역시 술을 대할 때의 나의 자세와 비슷해 내적 하이파이브를 불러일으킨다.
-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중, 이름도 '공원 속의 주점’ 줄여서 '공주'라 부르는 술집 앞을 지날 때였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 맥주잔을 거하게 부딪치는, 마음만은 쾌남이 되어 있는 아저씨들을 보다 강이 문득 말했다.
"술 마실 땐 왜 저렇게 즐겁나 몰라. 다음 날 즐거움까지 미리 당겨 써서인가."
!!!!
그래서였구나. 즐거움을 가불해서였다. 여러분, 제가 드디어 숙취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다음 날 느낄 것까지 미리 당겨 쓰니 오늘이 안 즐거울 수 없고, 다음 날이 되면 이미 하루치 즐거움을 써 버렸으니 즐겁지 않은 게 당연한 거였다. 숙취를 나무랄 게 아니었다. 나는 순리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치로 할당된 즐거움을 당겨 썼으면서 다음 날도 즐거우려 하면 그게 도둑놈 심보지.
- 강은 전혀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을 텐데, 나는 이미 혼자 신이 나서 머릿속이 바빠졌다. 옆에서 들뜬 기운이 압력밥솥처럼 칙칙폭폭 거리자 눈치 빠른 강은 '이 주정뱅이가 또...'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마땅히 해야 할 대사를 내뱉었다.
"좋아! 그럼 내일치 즐거움을 당겨 쓰러 가 볼까?"
- 전세 계약을 두 번 연장해 이전 집에 5년째 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집이나 동네에 대해 더는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곳에만 있는 작은 즐거움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집은 우리에게 '필요한' 집이었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린 집은 아니었다. 모아 둔 돈은 적었고 각자 출·퇴근하기에 적당히 멀지 않은 곳을 고르려다 보니 오피스가 밀집한 지역의 빌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거지로 조성된 동네가 아니어서인지 방 컨디션에 비해 전세금이 비싸진 않았으나, 주말이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평일 동안 일하다 떠나는 곳에서 주거를 한다는 건 좀처럼 이곳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곳이 전셋집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원한 임시 거처처럼 여겨졌다.
- 하지만 익숙한 건 금세 편해졌다. 편해졌으므로 우리는 이사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 비용과 새로운 집을 알아보고 이 집을 빼는 데 드는 피로를 생각하면 그냥 살던 대로사는 것이 나았다. 살던 대로 사는 것. 어쩌면 거기에 함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랬다. 언젠가 김애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으며 산다" 했을 때, 저 문장을 뜰채로 떠 올리듯 괄호를 치며 혼자 생각한 적 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안 굴러가는구나! 근심만 하고 배짱이 없어서...'
- 어쩌면 이번엔 배짱을 선택해서 뻑뻑한 바퀴 같던 내 인생이 한 바퀴쯤 구른 것인지도 몰랐다. 내내 무기력에 빠져있었다면 알지 못했을 행복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지쳐 있는 나를 데리고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한다는 걸 여기 오니 알겠다. 원하는 것을 원하고만 있지 말고, 스스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도.
- 물론 이런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사를 감행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이사가 다 끝나고 난 뒤 거실 바닥에 누워 매미 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러나곤 했다. 나는 그 생각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창밖으로 넘실대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단번에 결정을 내렸는데, 그건 바로 저 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나 보다고. 이번에는 귀찮음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내가 좋아할 게 분명한 즐거움을 선택한 거라고.
- 그리고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펼쳐진 나무 우듬지를 보며 "좋다" 말하게 되는 집. 설거지를 하고 돌아설 때, 책을 읽다 고개를 들 때, 청소기를 밀면서 움직일 때 그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게 좋다. 비 오는 날 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에 다닥다닥 부딪치는 소리가 좋고, 거실에 앉아 있을 때도 건물 틈새로 노을이 지는 걸 볼 수 있어서 좋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물론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일이지만.
- 대만 여행을 앞둔 친구가 10분 단위로 설계된 나노 스케줄 표를 보여 주었다. 공항에서 내리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숙소 근처 명소들은 어떤 순서로 돌아다녀야 하는지부터 꼭 가고 싶은 맛집까지 동선을 따라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와, 이걸 다 할 거야?"
"그럼!"
"이 중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스트레스 안 받아?"
"받지, 당연히. 그래도 미리 알아보고 내 취향에 맞게 계획 짜는 게 난 좋더라. 낯선 데서 덜 불안하기도 하고."
- 이전에 한두 달 배낭여행을 떠났을 땐, 나 역시 바삐 돌아다니는 여행자 중 한 명이었다. 한국 사람들의 여행 스케줄이 빽빽한 건 휴가가 짧기 때문이란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정해진 시간은 짧고, 나중에 후회하게 되진 않을까 불안해서, 남들의 여행을 열심히 참고해 동선을 짜고 관광지를 방문하고 기념품을 산다.
- 하지만 긴 여행에는 다른 호흡이 필요했다. 부지런히 다니다간 금방 에너지가 바닥날 게 뻔했고, 당장 돌아갈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내일에 대한 계획이 그리 필요하지 않기도 했다. 마음은 점차 느긋해졌다. 숙소에서 만난 누군가가 오늘 다녀왔던 곳이 좋았다고 얘기해 주거나, 내가 다음에 가게 될 도시의 어떤 장소를 추천해 주면 그곳을 기억해 두었다가 슬렁슬렁 가 보곤 했다.
- 여행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라는 책을 낸 후 한동안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떠나기 전부터 '거기 가면 해야지' 마음먹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책에 실린 사진들을 찍었던 장소에 다시 한번 찾아가는 일이었다. 예전의 내가 기억하려고 찍어 두었던 풍경, 돌아온 후에도 종종 그리워한 풍경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있다면 무사한지 궁금했다. 내가 찍은 나무와 가게와 거리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덕분에 꼭 누굴 만나러 온 도시인 것처럼 나는 좀 들뜬 채로 골목골목을 걸었다. 오늘은 그 나무를 찾아봐야지. 오늘은 그 가게를 다시 찾아가야지, 혼자 약속하고 혼자 약속을 지키며 며칠을 보냈다.
- "왜긴, 장마 뒤엔 수박이 싱거워지거든. 지금 먹어야 제일 맛있어."
서울 촌놈인 강은(강은 신당동에서 태어난 떡볶이의 아들이다) 대체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장마철엔 원래 수박이 싱거워지는데? 수분을 잔뜩 머금어 당도가 묽어지고 마니까. 나는 알은체를 하며 한술 더 떴다.
"가뭄이 들면 마늘 농사가 걱정되고, 가을에 비가 너무 오면 벼농사가 걱정되고 그런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어쩌면 '제철'을 생각하는 감각은 시골에서 보낸 유년이 내게 심어 준 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가장 좋은 일도 있다. 딸기와 수박과 복숭아와 무화과와 홍시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또한 나는 3월은, 5월은, 8월은, 10월은 무엇을 하기에 제철인 달인지 생각한다. 달력에 적어 두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제철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일들을 즐긴다.
- 하지와 입추를 지나 거짓말처럼 매일 일몰 시간이 1분씩 짧아지는 요즘, 우리 집은 테라스가 제철이다. 테라스에 앉아 알맞게 식은 바람을 쐬며 맥주 한 잔을 기울일 때야 비로소 이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맹렬한 여름 해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공기가 천천히 식어가는 저녁, 캠핑의자에 앉아 나무 사이로 얼핏 얼핏 비치는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라디오를 크게 튼 채로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와 어쩐 일인지 슬리퍼 두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걷는 할아버지,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여자, 서로의 어깨를 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교복 입은 학생들. 좀 더 멀리 시선을 두면 나무 우듬지 위로 빼꼼 솟아 있는 다른 집의 옥상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가끔 옥상의 주인들이 나와서 이불 빨래를 걷거나 화분에 물을 주거나 상추를 뜯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적당한 온도로 살아 있는 계절이다.
- 촌스러운 머리를 한 채 주눅든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고, 거의 모든 일에 서툴렀으며, 그만큼 자주 남들 눈치를 보았다. 유일한 특기라고는 남들에게서 내게 없는 것을 찾아내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정말 그랬다. 대학 1학년은 거의 부러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았다니 놀라울 정도다.
- 선배들과 잘 어울리는 동기를 보면 '재는 어딜 가도 사랑받는 타입이구나' 싶어 부러웠고, 재치 있는 농담으로 대화를 이끄는 친구를 보면 '저런 센스를 타고나서 좋겠다' 싶었고, 누구의 자취방이 부모님이 얻어 준 'OO 오피스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환하고 안온할 그 애의 일상이 부러웠다. 선배들로부터 사랑받는 나를,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나를, 햇빛 잘 드는 고층 오피스텔에서 기지개 켜는 나를 상상해 보았지만, 그건 어쩐지 탕수육 머리를 한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도 마음은 수시로 캄캄해졌다. 저 애들은 어쩜 저렇게 할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선배는 동기든 알바생 친구든 누군가를 볼 때면 내게 없는 것들부터 보였다. 나도 아직 잘 모르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흐릿하니, 그저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에만 바빴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보지 않고(실은 무엇을 가진 줄도 모르고), 남이 가진 것만 보고 낙담하면서.
- 몇 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청춘시대>는 진명, 예은, 지원, 이나, 은재 다섯 명의 하우스메이트가 셰어하우스에 살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그중 한 일화가 기억난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애인을 둔 예은은 우연히 그가 이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발견하며 둘 사이를 의심하게 된다. 그 후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사사건건 이나에게 시비를 거는 예은을 두고, 지원은 은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예은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엄청난 수재인 데다 예은보다 훨씬 예쁘고 키도 크다고. 어려서부터 모든 관심이 언니에게 쏠렸으니 걔가 좀 치여서 자랐겠느냐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 자존감 없는 애가 연애를 잘못하면 저렇게 되는 거라고.
"그렇구나. 예은 선배는 되게 좋은 집에서 되게 행복하게 자란 줄 알았는데. 어? 근데 예은 선배 외동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상한 듯 되묻는 은재에게 지원은 들켰다는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너 방금 내 얘기 듣고 예은이가 그럴 만도 하다 싶었지?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얘기가 정답은 아니라도 사람마다 죄다 사정이란 게 있다는 거야. 그 사정 알기 전까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거. 예은이뿐만 아니라 강 언니도 그렇고 윤 선배도 그렇고, 너만 해도 그런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남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해도 너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어떤 거. 그러니까 남의 일에 대해선 함부로 이게 옳다 그르다 하면 안 된다는 거야."
- 대학에서 새로 시작된 관계들은 소꿉친구나 동네 친구들과는 또 달랐다. 뭘 모르고서 친해졌던 어린 시절과 달리, 다자라서 만난 우리들은 적당히 사회적인 얼굴과 태도로 각자의 사정을 감출 줄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덤덤히 잘 살아가는 척'을 한다. 다들 그렇게 사는 듯 보이므로, 그러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므로.
- 복잡한 집안 사정을 털어놓거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기억에 대해 말하거나 어린애처럼 솔직한 감정을 보여 주는 일은 내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아 꺼리게 된다. 적당한 인간적 예의를 지키고, 농담을 주고받고, 시시콜콜한 연애 고민을 나누고, 같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매일 같은 수업을 듣고, 심지어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진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언어로 인사하는 것처럼 어렵기만 하다.
- 스무 살 시절, 우리가 바라본 서로가 과연 서로였을까. 그게 서른이 넘은 지금이라고 과연 다를까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척, 이대로도 괜찮은 척 옛날 얘기나 나눌 때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숱한 대화들과 그 대화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채 하지 못한 얘기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한다. 언젠가 친구가 말해 준 '좋아 보이기만 하는 인생은 있어도 좋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 예전에 술자리에서 "아무리 원수 진 사이여도 포장마차에 앉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종내엔 어깨를 끌어안고 울게 된다"는 얘길 들은 적 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젠 그것이 감춰진 사연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겠다. 말 못 할 사정을 마침내 말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게 되는 존재란 것도.
- 그렇게 몇 개의 식물을 떠나보내고 난 뒤, 깨달은 게 있다. 가만 되짚어 보면 꽃집 주인들의 말은 기계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란 게 아니었다. "겉흙이 완전히 마른 게 보이면 주세요." 그건 이 나무가 과습에 약한 편이므로 조금 건조하게 키우라는 말. "잎 가장자리가 쪼글쪼글해지면 물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물 주는 날짜를 딱 정해 놓기보다 계절에 따라 습도에 따라 달라지는 잎의 상태를 살피라는 말. "햇볕이 너무 강하면 붉게 변해요." 볕이 너무 세진 않은지 때때로 식물의 안색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말.
- 그 정도 관심도 못 기울이면서 나는 내가 식물을 키운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너무 목마르거나 햇볕이 뜨겁다고 내내 말을 걸고 있었던 식물을 모른 채 지나치면서.
- 예전엔 '마음이 있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옮겨 놓은 행동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돈 주고 식물을 사서 집 안에 들였으니 내겐 당연히 식물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었다. 아끼는 마음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사실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게다가 그 마음이란 건 궁색한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 때 꺼내 드는, '나만 알고 있던' 마음에 그칠 때가 더 많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 그랬다.
- 회사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근속 휴가를 받았다. 3년 근속하면 주어지는 한 달의 휴가. 언젠가 이 회사에 4년 차들의 줄 퇴사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무려 한 달이라니... 어쨌든 그 휴가를 바라보고 지난 3년을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대표님 눈 감아2), 직장인에게 이 정도의 방학이란 흔치 않으니까.
- 한 달의 휴가를 치앙마이에서 보냈다. 정확히는 치앙마이에서 열흘을, 작은 시골마을인 빠이에서 열흘을. 혼자 떠난 여행에서 모처럼 충분히 혼자 있는 시간을 보냈다. 티크나무로 지은 작은 집에서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났고, 아침이면 테라스로 나가 숙소의 고양이들과 함께 안개 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배가 좀 출출할 무렵이면 쪼리를 신고 쭐레쭐레 나가서 동네 레스토랑에서 50바트의 행복으로 맛볼 수 있는 현지식을 먹었다. 늦게 일어나 아점을 먹고 나도, 하루 해는 아직 길게 남아 있었다. 그럼 책 한 권과 카메라를 챙겨 상점들이 모여 있는 메인 스트리트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배가 고파지면 그날그날 당기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에 맥주 한잔을 곁들인 뒤 다시 숙소로 돌아오던 날들.
- 태국의 시골 마을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딱히 할 게 없었다. 놀 거리나 즐길 거리를 찾아 소란스런 바 Bar나 펍 Pub을 방문하지 않는 이상, 숙소에서 밤이 점점 깊어지고 더러 동네의 개들이 짖고 그러는 동안 창문 너머로 달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 "엄마 기능 시험 붙었다!"
소녀 같이 상기되어 있던 목소리. 그 후로 도로주행까지 엄마는 단번에 통과했고 무사히 면허를 땄다. 엄마 나이 쉰여섯의 일이었다.
- 나는 정말 축하한다고, 너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때만은 진심이었다. 이제껏 아무 기대를 않던 속마음이 팔딱팔딱 뛰는 게 느껴졌다. 마주 오는 차를 무서워하며 운전 연습을 시작한 엄마가 이렇게 한 번에 모든 것을 해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합격한 뒤, 100점짜리 시험지를 든 아이처럼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을 엄마에게 아빠는 무슨 말을 했을까. 축하한다고, 장하다고,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해 주었을까. 아마 그때도 다정스러운 말 같은 건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이 겸연쩍을수록 말은 더 그렇게 나갔겠지. 아빠는 늘 자신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엄마를 얼마간 나무라는 투로 말하곤 했으니까. 아빠를 나쁘게 말하는 거 같아 좀 그렇지만, 사실 그건 오빠와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엄마에게 "그러게, 난 엄마가 해낼 줄 알았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해낼 줄 전혀 몰랐는데 해냈다니 놀랍다는 심정으로 엄마의 운전면허 취득을 받아들였으니까.
- 엄마가 이런 일을 하다니. 그 마음속에는 늘 '엄마'는 이런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엄마는 휴대폰을 전화용으로 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 엄마는 자기 의견 없이 정치 뉴스를 받아들이는 사람, 엄마는 혼자서 멀리 갈 수 없는 사람, 엄마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 엄마는, 엄마는... '엄마'로 시작하는 모든 말은 늘 그렇게 한계의 벽에 부딪치곤 했다. 아빠와 오빠와 내가 더 다정한 가족이었다면, 우리가 엄마의 가능성을 더 믿어 주는 사람들이었다면 엄마는 진작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 엄마가 살면서 무엇이든 더 도전해 보았으면 좋겠다. 처음 운전대를 잡던 그날의 용기로 매번 두려움과 설렘을 주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계속계속 하며, 계속계속 그것을 넘어섰으면 좋겠다.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안 해 본 일, 내 인생과는 먼 일이라고 담쌓기만 했던 일,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해 보면서 엄마의 세상이 자꾸 넓어지면 좋겠다.
- 59년생 윤인숙 씨는 사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더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고, 지금보다 더 넓게 살며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좁은 삶에 갇혀 있기엔 너무 큰 사람이다.
그녀만 알고 가족들은 내내 몰랐던 사실. 어쩌면 그녀 자신조차 오래 잊고 있었던 사실.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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