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로셀라 포스토리노]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일루젼 2023. 3. 26.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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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로셀라 포스토리노 / 김지우
출판 : 문예출판사
출간 : 2019.12.20 


 

큰 기대가 없었는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도 무척 좋았는데, 스트레가 상 수상작들이 취향에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서의 섬>과 <60개의 이야기>를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일단 집에 쌓인 책부터 좀 읽고 나서)

 

참 신기한 일이다. 틀림없이 대부분 내가 고른 책들일 텐데, 쌓여 있는 책들을 훑어보면 완전히 낯설거나 조금도 끌리지 않는 책들이 섞여 있다. 내가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변한다고 말하곤 하는 이유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다르고, 또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같다. 어느 한순간의 판단이 영원히 옳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지만, 아무래도 첫 장을 읽으면서부터 두근거리는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기분좋은 설렘이 마지막 장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완전히 달랐다. 많은 소설들이 하나의 핵심적인 기승전결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나간다면, 이 소설은 공습처럼 조용히 폭탄들을 하나씩 터트린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에게 제각기의 삶과 이야기들이 있으므로 기승전결 역시 하나일 수는 없다는 듯이. 중심화자가 '로자 자우어'라는 여성이고, 독자들은 그녀가 보고 겪은 것들을 그녀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였고, 그녀의 삶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의 피와 삶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 피를 보는 건 괜찮아?"

       

제각기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변명 속에 숨었다. 그리고 몇몇은 살아남았고 몇몇은 사라졌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도, 대신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한 사람의 시점을 유지해 당시의 세세한 일상을 표현하면서도 연대기처럼 다양한 삶들을 녹여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범했고, 또 나름의 이유로 힘겨웠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비겁했고, 미워하지 못할 만큼은 선량했다.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고 지나갔던 장면들이 커다란 영향력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의 전율. 이 소설에는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강렬함이 여러 번 등장한다. 

 

중심화자가 베를린 출신의 독일 여성으로, 독일인이면서도 주변인의 입장 -그렇기에 더욱 한나 아렌트의 표현과도 같을 수 있는- 과 SS친위대와 히틀러의 입장을 오갈 수 있었다는 점도 그렇다. 물론 저자는 실존 인물의 인터뷰로 인해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약 화자가 달라졌었다면 기존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저작들과 큰 차이점을 못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화두는 결맞음이다.

책 자체는 상당히 만족스럽고 즐겁게 읽었다. 

끝. 

  

 

 


  

인간은 자신이 다른 이들과 별다를 것 없는 인간임을 완전히 망각해야만 살 수 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 어머니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라 했다. 어머니는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다. 당시 나는 베클린 브라운슈타인스트라세 10번가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히틀러는 없었다. 어머니는 교복 앞치마 끈으로 리본을 묶어준 뒤 내게 책가방을 건네면서 점심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주곤 했다. 집에서 나는 도통 입을 다물지 않았다. 가끔은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너무 수다스럽다고 했다. 나는 지나치게 비극적인 어머니의 말투와 걸핏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는 훈육 방식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숨이 가쁘도록 웃곤 했다. 어머니는 생존을 위한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킨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삶은 위험한 것이며 세상 어디에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헤르타와 나는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요제프도 달걀을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힘을 너무 세게 주는 바람에 들고 있던 달걀 하나가 깨져서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오렌지색 강물이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달걀 흐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달걀은 요제프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소리 없이 흙 속에 스며들 터였다.

 

- 헤르타는 관절병을 앓는데도 팔을 흔들고 있었고 요제프는 여전히 깨진 달걀을 들고 있었다. 나는 차가 커브를 틀어 시야에서 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맨땅 위로 자라난 쥐오줌풀꽃 덤불과 이끼가 껴서 새까매진 지붕 타일과 분홍색 회반죽을 바른 외벽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매일 아침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그 집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 광경을 다시 못 보게 되겠지.

 

- 라스텐부르크(지금의 폴란드 켕트신) 총통 본부는 그로스-파르치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곳은 숲 속에 숨겨져 있어서 항공 판별이 불가능했다. 요제프 말에 따르면 인부들이 본부를 짓기 시작했을 때 인근 주민들은 분주히 오가는 트럭과 화물차를 보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소련군 비행기는 벙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지만 우리는 히틀러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히틀러가 먹고,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여름이면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숙면을 방해하는 모기를 잡기 위해 몸을 뒤척일 것이다. 그 역시 간지럼이 생산하는 모순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모기에 물려 빨갛게 부푼 살을 긁어댈 것이다. 사람들은 모기에 물려 피부가 군도처럼 울퉁불퉁해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곳을 긁는 순간의 쾌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심 그 부위가 완전히 낫지 않기를 바란다. 

 

- 사람들은 그곳을 볼프스샨체, 즉 늑대소굴(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개인 동부전선 지휘본부)이라 불렀다. 늑대는 히틀러의 별명이었다. 나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처럼 무방비 상태로 늑대 배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냥꾼 무리가 군단을 이루어 히틀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히틀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나 따위는 기꺼이 희생시킬 것이었다.

 

- 나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관찰할 때처럼 식당을 둘러보았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었고 경비병들이 안뜰로 이어진 출구를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벽에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처음 등교한 날 어머니가 나만 홀로 교실에 남겨둔 채 떠나버렸을 때, 나는 어머니가 모르는 새 내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겼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위험하게 느껴져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무력하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아 마음이 울컥했던 거다. 나는 어머니가 모르는 나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어머니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배신 행위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실에 앉아 벽에 생긴 금이나 거미줄처럼 나만의 은밀한 것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다. 한없이 크게만 보이던 교실을 두리번거리다 걸레받이가 떨어져 나가서 비어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 하지만 크라우젠도르프 병영 식당의 걸레받이는 멀쩡했고 나는 그레고어 없이 홀몸이었다. 친위대원들의 군홧발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음식물을 씹어 삼키기를 강요하며 어쩌면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었다. 독은 쓰디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스파라거스 맛은 끝내줬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 엘프리데도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며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엘프리데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내 옷차림 때문일 수도 있었다. 헤르타 말이 옳았다. 내 체크무늬 옷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난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베를린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었다. 헤르타는 내게 도시 사람 티를 내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들 나를 고깝게 볼 거라고 했다. 엘프리데가 나를 고깝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나는 제일 낡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도 자주 입어서 그레고어가 유니폼이라고 부르던 옷이었다.

 

- 그 옷을 입으면 옷이 내 몸에 잘 맞는지 걱정하거나,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옷은 내 방패였다. 지금도 대놓고 탐색하는 엘프리데의 시선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어찌나 집요하게 옷을 쳐다보던지 체크무늬 패턴이 견디다 못해 천에서 뛰쳐나가버릴 것 같았다. 옷단이 풀어지고 신발 끈이 풀리고 이마 위로 파도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볼륨감마저 죽는 것 같았다. 나는 방광이 터질 정도로 연거푸 물을 마셔댔다. 

 

- 키다리 친위대원의 감시하에 우리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는 잘못 짚었다. 나와 엘프리데 사이에 흐른 것은 친밀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타인과 주변 환경을 가늠하고 있었다. 

 

- 나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1개월 전인 1917년 12월 27일에 태어났다. 뒤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셈이다. 어머니는 내가 썰매 안 이불에 꽁꽁 싸여 있어서 산타클로스가 나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마지못해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고 했다. 이제 막 일을 끝마치고 휴가가 시작될 참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배달 건 때문에 짜증이 났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산타클로스가 너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뭐냐."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그해 우리의 유일한 선물이었거든."  
 

- 내 아버지는 철도원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덕분에 우리 집 거실 바닥에는 항상 온갖 색상의 실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실을 바늘구멍에 쉽게 넣기 위해 실 끝에 침을 묻혔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따라 몰래 실을 빨았다. 어린 시절 나는 실이 혀에 닿는 느낌을 즐겼다. 실이 퉁퉁 불어서 작은 덩어리가 되면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뭉치를 꼴깍 삼켜버렸다. 실뭉치를 먹으면 정말 죽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임박한 죽음의 징조를 예측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이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나는 그 비밀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이제야말로 운명의 시간이 올 거라고 상상을 했다. 죽음과의 놀이는 그렇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지만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한 적은 없었다. 

 

- 내 유년시절은 입속에 감추어놓은 1 페니히 동전이었다. 동전의 짭짜름하고 톡 쏘는 맛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눈을 감고 혀로 동전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밀면 밀수록 동전은 당장이라도 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나는 동전을 목 안으로 최대한 밀다가 갑자기 뱉어버렸다. 내 유년시절은 베개 아래 쌓아둔 책들이자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전래동요이자 광장에서 하던 술래잡기 놀이이자 크리스마스에 먹는 슈톨렌 케이크이자 동물원 소풍이었다. 남동생 프란츠의 요람에 얼굴을 들이밀고 그 애의 조그만 손을 이빨로 꽉 물었던 날도 내 유년시절의 일부였다. 그때 동생은 빽빽대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원래 갓난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그렇게 울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한 짓을 눈치채지 못했다. 

 

- 내 유년시절은 비밀과 잘못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 비밀을 지키는 데만 열중해서 다른 사람들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유 가격이 수백 마르크에서 나중에는 수백만 마르크까지 폭등하는 동안에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대체 어디서 우유를 구해오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경찰 몰래 식료품 가게를 습격해서 먹을 것을 구해오는 건 아닌지 걱정해 본 적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우리 부모님도 베르사유 조약(1차 세계대전 후의 연합국과 독일 사이의 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국방력에 제약을 받고 연합국에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급하게 된다)을 치욕스럽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미국을 증오하는지, 아버지도 참전했던 그 전쟁 때문에 독일이 전범국 취급받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버지는 프랑스 군인과 함께 구덩이 속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결국 시체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었다. 

 

- 온 독일이 상처투성이던 그 시절, 아버지는 직장에서 돌아와 유노 담배를 태우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고 어머니는 입술을 쏙 집어넣고 실 끝을 빨았다. 그럴 때 어머니의 코가 거북이 코처럼 보여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내 동생 프란츠는 팔꿈치를 구부려 손을 귓가에 올린 채 요람 속에 누워 꾸벅꾸벅 졸았다. 앙증맞은 손가락은 보드라운 손바닥 안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일말의 가책도 없이 내 방에 틀어박혀서 내가 저지른 잘못과 숨겨야 할 비밀을 하나하나 장부에 적어 내려갔다. 

 

- 처음 크라우젠도르프에 끌려온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식당에 찾아온 주방장은 우리에게 식품영양학 관련 서적을 나눠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맡은 임무가 엄중하다면서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오토 귄터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우리는 친위대원들이 그를 크뤼멜, 그러니까 '부스러기'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작고 깡마른 체구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우리가 병영에 도착할 때면 그는 이미 주방보조들과 함께 아침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우리는 그가 준비한 음식을 바로 먹었지만 히틀러는 전선 소식을 보고받은 후 오전 10시경이 되어서야 아침 식사를 했다. 우리는 11시쯤에 히틀러가 점심에 먹을 음식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기 시간이 지나면 친위대원들은 우리를 일단 집으로 바래다주었다가 오후 5시에 히틀러의 저녁 식사 음식을 먹이기 위해 다시 데리러 왔다. 

 

- 하지만 내게는 책이 위안이 됐다. 인간의 소화과정을 외우는 것이 유용해서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내게 책에 나온 도표와 표는 오락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예전처럼 지적 욕구가 생겨나면 잠깐의 착각이겠지만 내 정신이 아직은 멀쩡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이렇게 공부하다 보면 히틀러의 창자를 염탐하는 것 같거든." 나는 뜬금없이 명랑한 어투로 말했다. "대충 계산을 해보면 언제 히틀러의 괄약근이 열릴지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아." 
"더러워."
더러운 게 아니라 인간적인 거다. 아돌프 히틀러 역시 음식을 소화하는 인간 아닌가.
"그래, 교수님께서는 강의를 마치셨나요? 그냥 여쭤보는 거예요. 그래야 박수라도 쳐드리죠." 

아우구스티네가 말했다. 까만 치마를 입고 각진 어깨를 가진 여자 말이다. 경비병들은 우리를 조용히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한때 교실이었던 식당의 원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하는 주방장의 의도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미안해." 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도시에서 공부를 했다는 건 모두 다 알고 있어."
"쟤가 무슨 공부를 했던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울라가 끼어들었다. "그래봤자 지금은 우리랑 똑같이 여기서 음식을 먹고 있잖아. 적당량의 독으로 간을 맞춘 맛있는 음식 말이야." 울라는 그러더니 혼자 키득거렸다. 

- "병영에 그렇게 우아하게 차려입고 오다니. 참 잘하는 짓이야." 울라가 말했다. 그날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프렌치 칼라에 퍼프 소매가 달린 와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죽더라도 예쁜 옷을 입고 죽어야지. 그러면 수의를 마련할 필요도 없잖아."

"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만 해?" 레니가 항의했다. 

- 헤르타 말이 옳았다. 그 여자들은 내 외모가 눈에 거슬렸던 거다. 둘째 날, 내 체크무늬 옷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엘프리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 엘프리데는 연필을 담배꽁초처럼 입에 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겨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 "이 옷, 마음에 들어?"
울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너무 정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거의 파리 스타일이야. 괴벨스의 마누라가 억지로 입히려 드는 던들 스커트보다는 낫지." 울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쟤가 입고 있는 옷 말이야." 울라가 내 옆에 앉은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첫날 점심 식사를 마칠 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여자였다. 게르트루데는 울라의 말을 듣지 못했다. 

 

- "그래서 이 옷이 마음에 들어, 안 들어?" 내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울라가 마지못해 인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네게 이 옷을 줄게."
탁 하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엘프리데가 여전히 연필을 입에 문 채 책을 덮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야? 성 프란체스코처럼 다 보는 앞에서 쟤한테 옷을 벗어주려는 거야?" 엘프리데가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아우구스티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엘프리데는 꼼짝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울라에게 말했다. "원하면 내일 갖다 줄게. 갖다 줄게. 아니, 아예 세탁까지 해서 갖다 줄게."

 

- "우리에게 자선을 베풀려고 베를린에서 여기까지 오셨나 봐." 아우구스티네가 부추겼다. "생물학 강의에 기독교인다운 자선까지 베풀다니. 어떻게든 자기가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나 그 옷 갖고 싶어." 울라가 말했다.
"그럼 줄게." 내가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네는 혀를 찼다. 나중에 나는 아우구스티네가 못마땅할 때마다 그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말도 안 돼..."

- 줄을 서러 가는데 울라가 내 팔꿈치를 건드렸다. "고마워." 그녀는 내게 말하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엘프리데가 내 뒤에 와서 섰다. "여기는 여학교가 아니야, 베를린 토박이. 병영이라고."
"네 일에나 신경 쓰시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되레 내가 당황해서 뒷목이 따가웠다. "네가 가르쳐줬잖아, 안 그래?" 나는 도발이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왠지 엘프리데의 마음을 사고 싶었다. 그녀와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애송이 말이 맞아. 특별히 독의 종류별 중독 증상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지. 너는 죽을 준비를 하는 게 재미있나 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 그날 저녁 나는 울라에게 줄 와인색 원피스를 빨았다. 내가 특별히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울라의 호감을 얻고 싶어서 그 옷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 옷을 입은 울라를 보면 내 삶이 베를린에서 그로스파르치로 완전히 옮겨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베를린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옷을 울라에게 주는 것은 일종의 포기 행위였다. 

- 사흘 후 나는 잘 말려서 다림질한 옷을 신문지로 포장해 울라에게 내밀었다. 울라는 한 번도 식당에 그 옷을 입고 오지 않았다. 헤르타는 자기 옷 몇 벌을 내 치수에 맞게 고쳐주었다. 허리 품과 기장을 줄여주었는데 기장 수선은 내가 고집을 부려서 해준 것이었다. 내가 요즘 유행하는 기장이라고 하자 헤르타는 베를린에서나 그런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입에 시침 핀을 물고 있었지만 시골집 바닥에는 실밥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 나는 체크무늬 원피스를 직장에 다닐 때 입던 다른 옷들과 함께 그레고어가 쓰던 옷장 속에 넣어놓았다. 구두만은 계속 신었다. 헤르타는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어디를 가려는 거냐고 못마땅해했지만 구두를 신어야만 나답게 걷는 것 같았다. 전보다 걸음걸이가 많이 불안해진 듯했지만 그래도 그 구두를 신고 걸어야 원래의 내 걸음처럼 느껴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아침이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체크무늬 원피스가 걸린 옷걸이를 꺼내 들 때도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 섞일 이유도, 그들과의 공통점도 없는데 왜 나는 그들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애쓰는 걸까?

 

-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거울 속에 비친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오 면 분노는 낙담으로 변했다. 나는 체크무늬 원피스를 다시 어두운 옷장 속에 집어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 예전부터 눈가에 내린 다크서클은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내 운명을 예견하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나는 평생 그런 다크서클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지금 그 피로의 흔적이 다시 내 얼굴에 나타난 순간 나는 교내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후에 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에게 기하학 숙제를 베끼게 해 주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상사를 사로잡은 비서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여자만 남았다.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 내 운명이 격랑에 휩쓸린 것은 1943년 3월의 어느 밤이었다. 그날 밤도 공습경보가 울렸다. 경보는 늘 그랬듯 신음 소리처럼 시작해 조금씩 가속도가 붙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울려댔다. "일어나렴, 로자. 폭격이 시작됐어." 어머니가 침대에서 내려와 내게 말했다. 

- 그들은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사이였다. 동갑내기들은 학교도 같이 다녔기 때문에 적어도 안면은 트고 지냈다. 엘프리데만 빼고. 엘프리데는 그로스파르치 출신도 인근 지역 출신도 아니었다. 레니는 시식가로 끌려오기 전까지 엘프리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엘프리데도 나처럼 이방인이었지만 그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네마저 감히 엘프리데는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게 텃세를 부리는 것은 내가 베를린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내 마음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욕구는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엘프리데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고 엘프리데 역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엘프리데의 차가운 태도는 왠지 모르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 나는 엘프리데도 나처럼 평온함을 찾아 시골로 도망쳐왔다가 바로 잡혀 들어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발된 것일까? 처음 버스에 올랐을 때만 해도 열렬한 나치 추종자들이 깃발을 흔들며 군가를 부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당에 대한 충성심이 선택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광신도'들은 예외지만 그렇다면 가장 가난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만 추린 걸까? 먹여 살려야 할 아이가 딸린 여자들만 실제로 여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레니와 울라 그리고 엘프리데는 예외였지만, 그들은 나처럼 딸린 아이가 없었지만 그 여자들의 약지에는 결혼반지도 없었다. 반면 나는 결혼 4년 차였다. 

 

- 그레고어는 내게 자기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꿈을 계시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나를 놀리곤 했다. 그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우울한 편지를 쓴 것이다. 잠깐이지만 나는 전장이 내가 알던 그레고어와 전혀 다른 남자를 내게 돌려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레고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린 시절 그가 꿈을 꾸던 방에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그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한때 그의 것이었던 물건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그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혼 시절 셋방에서 같이 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 그레고어는 한쪽 팔을 쭉 펴서 내 손목을 잡은 채 모로 누워 자곤 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의 손을 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읽곤 했다. 그레고어는 가끔 자다가 흠칫 놀라곤 했다. 그럴 때면 그레고어는 용수철이 달린 장치처럼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휘감았다가 스르르 놓았다. 지금 그레고어는 누구에게 매달리고 있을까? 

 

- 어느 날 저녁, 침대에 누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소련군들이 독일에 오면 잔악하게 굴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독일군도 소련군 포로에게는 유별나게 굴었거든. 영국군 포로나 프랑스군 포로는 적십자의 원조를 받고 오후에 공놀이를 해. 하지만 소련군 포로들은 자기들과 같은 소련군 소속이었던 군인들의 감시하에 참호를 파야 하지."
"동료 군인들이 감시를 했다고?”
"그렇다니까? 빵 한 조각, 수프 한국자 더 주겠다는 꾐에 넘어가서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어." 그레고어가 불을 끄며 말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한 짓을 똑같이 되갚기라도 하면 정말 끔찍할 거야."


- 내가 잠을 자지 못하고 한참을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자 그레고어가 나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닌데, 당신은 몰라도 되는데. 이런 사실을 아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날 밤 나는 그레고어가 깊이 잠든 후에도 잠들지 못했다.

 

-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해." 내 말에 테오도라는 성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 예전처럼 다시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라의 적대적인 행동에 우울해졌다. 원래부터 잘 통하던 사이도 아니니 특별히 우울해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랬다. 사실 시식을 하는 다른 여자들 중에서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테오도라를 두고 새 친구가 생겨서 좋겠다며 나를 은근히 놀려대는 아우구스티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만든 음식도 아닌데 맛있다고 칭찬을 늘어놓는 레니도 다르지 않았다. 예기치 못하게 생긴 새로운 직업만 빼면 내게는 다른 여자들과의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히틀러의 시식가가 되고 싶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신도인 테오도라의 적대감에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평소보다 더 주눅이 들어서 주방을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아차 하는 새 팔목을 데고 말았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화상 부위 피부가 쪼그라드는 모습을 본 테오도라는 의도적인 침묵을 중단하고 내 팔을 잡더니 수돗물을 틀었다. "상처 위로 냉수를 흐르게 해!" 다른 주방보조들이 각자 일을 계속하는 동안, 테오도라는 행주로 상처 부위를 닦아준 뒤 감자 껍질을 벗겨서 그 위에 생감자를 한 조각 올려주었다. "이렇게 하면 염증이 가라앉을 거야." 엄마 같은 그녀의 태도에 순간 마음이 애틋해졌다. 

 

- 주방 한구석에 서서 감자조각을 팔목에 대고 있는데 크뤼멜이 수프에 뭔가를 던져 넣고는 혼자서 키득거렸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검지를 입술에 댔다. "고기를 아예 끊으면 건강에 안 좋아." 그가 말했다. "내가 준 책을 자네도 읽었지? 그런데 그 고집쟁이는 도무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그래서 몰래 수프에 돼지기름을 넣은 거야. 이 사실을 알면 화가 나서 펄펄 뛰겠지만 눈치챌 가능성은 거의 없지." 크뤼멜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번 살이 찐 것 같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끝이야. 내가 뭘 만들어줘도 먹지 않아." 
그릇에 밀가루를 붓던 테오도라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정말이야. 아무것도 안 먹는다니까?" 크뤼멜이 테오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바르크 치즈를 곁들인 스파게티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입에 대지도 않아. 바이에른식 사과 파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 한번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손도 안 대. 평소에는 마감 회의가 끝나고 저녁 티타임마다 매일 그 파이를 먹는데 말이야. 그렇게 독하게 다이어트를 해서 2주 만에 최고 7킬로그램까지 감량할 수 있는 사람이야." 

 

- 시식가들의 급여는 노동자들의 평균 급여보다 높았다. 따라서 그들이 내게 이런 요구를 하는 이유는 우유가 꼭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러는지 물었다면 아마도 아우구스티네는 정말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공정성의 문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네는 내가 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하는지 되물을 것이다. 물론 나는 테오도라에게 부탁해 보라고 대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네는 테오도라가 거절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네는 왜 내가 자기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우리는 친구 사이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처음부터 알아챈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친구가 되는 걸까? 동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뒤로, 아니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예측할 수 있게 된 뒤로는 그들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와 달라 보였다. 학교나 직장처럼 하루 중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억지로라도 함께 있다 보면 친구가 되는 법이다.  

- 내 뒤에는 엘프리데가 있었다. 그녀는 보통 내 뒤에 섰다. 우리는 항상 동작이 제일 느렸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적응력이 부족해서였다. 우리가 아무리 제도에 순응하려 해도 제도는 나와 엘프리데를 품기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크기가 안 맞거나 호환성이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부품 같았다. 하지만 요새를 세우기 위한 재료는 한정적이니 저들도 싫든 좋든 우리에게 적응해야 했다. 
엘프리데의 숨결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베를린 토박이, 함정에 빠진 거야?" 

 

- "여기서는 각자 자기 일에만 신경 써야 한다는 걸 깨달은 줄 알았는데?" 내 얼굴에 와닿는 엘프리데의 숨결이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 그의 동료 중에는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잃은 화가가 있었다. 그는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게 될지도 몰랐다. 화가는 나치와 유대인을 똑같이 증오했다. 남편의 동료 중에는 나치의 광적인 추종자도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도 유대인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총통이 허락하지 않는 한 베를린은 결코 공습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 집 건물이 폭격됐다는 소식에 그의 신념이 무너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레고어의 전우는 모든 것이 히틀러의 계산 속에 있다고 말하고 다녔고 남편은 자기와 같은 부대 소속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전장에 나가면 모두가 한 몸이 된다고 했다. 그레고어 역시 그들과 한 몸이었다. 그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무한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그레고어의 '살 중의 살'은 내가 아니라 그의 전우들이었다. 
 
- 그레고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정말로 인간을 창조한 신과 동일한 신이 저질스러운 똥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신이 있다면 소화작용의 혐오스러운 결과물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똥이란 정말 변태적인 발명품이야. 이는 곧 신이 변태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 "잠이 안 와서요."
"내가 미안하구나." 헤르타가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둘 다 몽유병 환자 노릇을 하게 생겼구나." 

 

- '나는 몽유병 환자 같은 확신을 가지고 정확하게 내 갈 길로 나아가고 있다.'
라인란트를 정복한 후 히틀러가 한 말이다.

 

- 나는 공중을 나는 꿈을 자주 꿨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땅에서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떠 있으면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와 건물 벽 쪽으로 내 몸을 떠밀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장애물을 피해 날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 순간 마법은 풀리고 내 침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응어리진 공기 방울처럼 목 안에 맺힌 채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땅에 떨어지기 바로 직전에야 '도와줘, 프란츠!' 하고 소리를 쳤다. 

 

- 무슨 일이야? 내가 누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처음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렇게 물어주던 동생은 나중에는 짜증을 내며 일어나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다. 

 

- 나는 그것을 유체이탈이라고 불렀다. 프란츠나 부모님 앞에서는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혼자만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은 그레고어와 함께 있을 때 그런 적도 있었다. 그레고어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나를 안아줬고 나는 그에게 유체이탈이 일어났다고 속삭였다.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레고어는 내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꿈을 꾼 거야. 그가 말했다. 

- "난 마녀니까. 몰랐어?" 베아테가 말했다. "나는 별자리점도 칠 수 있고 손금도 읽고 카드점도 볼 줄 알아." 
 

- 심장이 원래 박자를 놓치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만둬." 엘프리데가 쏘아붙였다. "어쩜 그렇게 항상 눈치가 없어?" 
그러고는 엘프리데는 자리를 떴다. 그녀를 따라가 입안에서 맴도는 고맙다는 말을 내뱉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아 그냥 아우구스티네 옆에 앉아 있었다. 
"히틀러에게 복채를 청구해 봐." 울라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여자들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웃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 베아테가 주머니에서 까만 벨벳 주머니를 꺼냈다. 베아테는 주머니 입을 묶고 있던 줄을 풀고 타로카드 한 묶음을 꺼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야?" 레니가 물었다. 
"카드도 안 가지고 다니면 마녀가 아니지." 베아테가 말했다.
베아테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바닥에 카드를 펼쳐놓았다. 자기만 아는 기준을 따라 천천히 집중해서 카드를 움직였다. 먼저 카드를 몇 장 뽑아서 바닥에 뒤집어놓더니 다시 카드를 섞고 또다시 카드를 몇 장 뒤집었다. 아우구스티네는 그런 베아테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뭐가 보여?" 울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레니는 감히 물을 생각을 못 했다.  

- "잘됐다, 레니!" 여자들은 장난으로 레니의 팔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살짝 밀치기도 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봐. 잘생겼어?"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모두들 살아남는 데 온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저러는 것도 다 살기 위한 거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럴 수 없었다. 

- "이제 당신 차례예요. 로자." 마리아가 말했다. "당신 음색이 너무 좋아요." 
마리아가 미처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첫 두 소절만 부르다 멈추는 바람에 나는 노래를 이어 불러야 했다. 천장이 높은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내 목소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몇 달 전부터 나의 행동에서 내가 분리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흡족해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내가 그녀의 친구로 선택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성의 연회장에서 눈을 감은 채 나는 젊은 남작부인의 불안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게 본인이 원하는 것만 시키고 있었다. 

- 그레고어는 내가 온종일 노래만 부른다고 했다. 도저히 못 듣겠어, 로자.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물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아, 그레고어. 물에 뛰어들었는데 가슴 위에 무거운 돌이 얹혀 있다고 생각을 해 봐.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그 돌을 치워주는 것 같아.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길게 호흡하지 못했던가. 

 

- 나는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지 묻는 눈빛으로 나와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은 아우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레니가 올라와 베아테와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라가 레니에게 헤어스타일을 바꿔보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미용사 놀이에 재미를 붙인 듯했다. 베아테는 이틀 전 히틀러의 별점을 봤다고 했다. 새 타로카드를 못 구해서 요즘은 별자리를 읽기 시작한 거다. 베아테 말이 히틀러의 별자리가 안 좋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그에게 안 좋게 돌아갈 거라고 했다. 여름부터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레니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경비병 중 한 명이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입을 벌렸다. 이제 우리를 건물에 가두고 고백을 강요하겠지. 나도 모르게 벤치 팔걸이를 꼭 잡았다. 하지만 그는 포효하듯 큰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경비병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팽 풀었다. 

(리뷰자 주 : 히틀러가 실제로 점성술에 크게 의지했었다는 점도, 그와 관련되었던 폭탄 사건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도록 잘 녹여냈다.)

 

- 여러 사람이 죄를 저지를 때는 눈 딱 감고 해치워야 한다. 어차피 죄책감은 빨리 사라질 테니 말이다. 집단적 죄책감은 형태가 모호하지만 수치심은 개인적인 감정이다. 

 

- 아이를 낙태한 날 밤, 하이케가 내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을 때도 나는 치글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알몸으로 헛간에 누워 나는 철도원이었던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던 남자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모한 데다 고집불통이라고 했다. 내가 히틀러를 위해서 일한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 어쩔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망자의 왕국에서 돌아와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원칙을 깨고 내 뺨을 갈길 것이다. 우리는 나치가 아니다. 아버지가 말할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손으로 뺨을 가린 채 울먹이면서 나치가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정치와는 상관없어요.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한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죄부가 없다, 로자.  

 

- 네겐 면죄부가 없다, 로자. 아버지가 반복할 것이다. 
12년 동안이나 독재 체제하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독재에 순응하는가?

-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변명이다. 나는 고작해야 내가 씹어 삼키는 음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음식을 먹는 무해한 행위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200 마르크를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수치스러워할까? 높은 급여를 받으며 호식을 하는 이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할까? 그들도 나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에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할까? 나는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내게 아버지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재판관이었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치글러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도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런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 인간 ...  

 

- 아우구스티네는 잠시 문에서 떨어져 나와 그녀를 바라봤다. "맞아, 하지만 네 친구를 좀 봐." 아우구스티네는 턱으로 테오도라를 가리켜 보였다. "테오도라는 샐러드와 치즈를 먹었고, 로자는 토마토 수프와 디저트를 먹었어. 그런데도 둘 다 기절했잖아." 
 
- 하이케는 다시 일어나 아우구스티네 쪽으로 가더니 나무로 만든 문짝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대신 고함을 쳤다. "나는 아프지 않아요. 독을 먹지 않았다고요. 내 말 들려요? 나가게 해 주세요!" 


- 소름이 끼쳤다. 하이케는 방금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만 거다. 모두 똑같은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똑같은 운명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에 따라서 우리 중 몇몇은 죽을 것이고 몇몇은 살아남을 것이다. 
의사라도 보내주었으면. 자기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레니가 말했다. "그러면 살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의사가 정말 우리를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저들은 우리를 살리는 데 관심이 없어." 엘프리데가 몸을 일으켰다. 돌처럼 딱딱한 얼굴이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저들은 우리를 살려주려는 게 아니야. 우리가 무슨 독을 먹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지. 내일 우리 중 한 명의 시신 부검해도 원인은 밝혀질 거야." 
"한 명으로 충분하다면 왜 우리 모두 여기 갇혀 있어야 해?" 레니가 말했다.

 

- 레니는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 말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자는 의미라는 것을 몰랐다.
레니는 어떤 기준으로 희생양을 선택할까? 몸 상태가 가장 안 좋은 사람? 먹여 살릴 자식이 없는 사람? 이곳 출신이 아닌 사람? 아니면 단순히 자기랑 안 친한 사람? <케이크를 구워라> 노래라도 불러서 운명을 결정하려나? 

 

-  그는 나를 화장실에 데려가주지도 않고 내 이마를 적셔주지도 않고 내 얼굴을 닦아주지도 않았다. 그는 내 남편이 아니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없었다. 내가 죽어가는 동안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오직 그의 목숨을 지키고자 범인을 찾으려고 크뤼멜과 조리사들과 주방보조들과 경비병과 총사령부에 주둔하는 친위대원 전체와 인근 음식 공급업자들과 다른 지방의 공급업자들을 심문했을 것이다. 그라면 식량을 운반한 기차의 기관장들까지 심문하고도 남았다. 그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것이다. 

 

- 그는 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썩은 헤이즐넛 같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다 손으로 눈가를 마사지했다. 어쩌면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조금 있으면 주방장이 올 거다." 그가 말했다. "임무를 계속해야지." 

- 자기 비밀을 우리와 공유하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자기 자신도 잊고 싶은 일을 우리가 알고 있어서 도리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는 듯했다. 베아테의 마녀놀음에 언제나처럼 회의적인 아우구스티네 역시 아이들을 핑계로 자기 집에 남았다. 치글러를 혼내주자. 베아테가 말했다. 효과가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재미있잖아. 베아테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 "뭘 하려는 거야?" 레니가 조금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치글러에게 고통을 줄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타인의 불행을 빌면 언젠가는 그 불행을 되돌려 받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결국 레니는 자기 걱정을 하고 있었다. 

 

- 물지 않는 입. 아니다. 어쩌면 그 입은 나를 배신하고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이제 괜찮아." 엘프리데가 손가락을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피 흘리다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죽을까 봐 그런 게 아니야. 놀리지 마."
"그러면? 오싹해서 그래? 도시 사람이 겁을 먹다니 실망이네."

"미안해."
"나를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거야?"
"나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형편없는 사람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엘프리데가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턱을 도발적으로 치켜들었다. "정말이지 건방지단 말이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지난번 일은 끔찍했어."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 끔찍했지. 하지만 그런 일은 또 일어날 수도 있어.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엘프리데가 말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숨으려 해도 결국 죽음은 우리를 찾아낼 거야." 엘프리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채혈할 때 나를 바라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나는 엘프리데의 눈빛에 위안을 받았다. "나도 두려워. 너보다 더." 

- 아무도 모르는 야밤의 외출은 일종의 반항 행위였다. 그 고독한 비밀 속에서 나는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내 삶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연에 운명을 맡겼다. 

 

- "그럼 안녕."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나오기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모자를 고쳐 쓰며 나갈 채비를 했다. 

 

- 여름이 되자 나는 종종 남작 부인의 초대로 성을 방문했다. 나는 오전 일을 마친 후 저녁에 버스가 나를 다시 태우러 올 때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성에 들르곤 했다. 친구라면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우리는 정원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떡갈나무 그늘 아래 요제프가 심어놓은 카네이션과 작약과 수레국화꽃 사이에 앉아 우리는 음악과 연극과 영화와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제프는 꽃들을 일렬로 심지 않고 한꺼번에 풍성하게 심어놓았다. "자연은 질서 정연하지 않으니까요." 마리아가 꽃을 그렇게 심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마리아는 내게 소설책을 빌려주었고 나는 몇 시간이고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마리아를 위해 책을 다 읽고 나서 소설에 대한 내 느낌을 정리한 다음 돌려주곤 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의 내 삶에 대해서 묻곤 했다. 나는 소시민적 삶의 전형인 내 과거에 대체 흥미로운 점이 뭐가 있을까 의아했지만 마리아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열광했다. 그녀는 매사에 호기심이 많았다. 

 

- 마리아는 집 안에 가구가 너무 많아서 숨이 막힌다고 했다. 물론 다소 과장되고 과시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자연을 사랑했다. 한 번은 이런 농담을 한 적도 있다. "나중에 크면 정원사가 되어서 원하는 것을 다 심을 거예요." 마리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해하지는 말아요. 요제프는 훌륭한 정원사예요. 그런 분이 곁에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지만 언젠가 올리브나무를 심어보자고 했더니 기후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지 뭐예요.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이탈리아에 다녀온 후부터 뒤뜰을 올리브숲으로 가꾸는 것을 꿈꾼답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로자? 올리브나무는 정말 멋지지 않나요?"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기쁨에 전염됐다. 

- 마구간 앞 비포장 길에 들어서니 남작부인과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셋 다 옆에 말을 한 마리씩 끼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기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가녀린 상체를 꽉 조이는 작은 조끼 덕분에 원래도 아담했던 몸이 더 날씬해 보였다. 

 

- "저도 채찍이 있지만 쓰지는 않아요.” 미하엘의 형인 외르크가 말했다. "눈빛만으로도 말을 순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외르크는 이제 겨우 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정복의 법칙은 어릴 때부터 배우는 법이다.

 

- "말 한번 타볼래요, 로자?" 남작 부인은 승마를 시키고 싶어서 죽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한번 타봐요!" 아이들도 덩달아 흥분해서 말했다.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승마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타봐요, 로자, 재미있어요." 미하엘과 외르크가 내 주변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당연히 재미있겠지. 하지만 나는 말을 탈 줄 몰라."
그 애들 기준으로는 말을 탈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부탁해요, 로자 아이들이 원하잖아요. 우리 조련사가 도와줄 거예요." 
마리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를 실망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파티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처럼 오직 남작 부인이 원했기 때문에 마구간에 들어갔다. 말 배설물과 말발굽과 땀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로스-파르치에 와서 나는 동물 냄새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다가가자 말은 고개를 들고 코를 힝힝거렸다. 착하지, 마리아가 말 목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조련사가 내게 등자를 가리켜 보였다. "이 안에 발을 넣어보세요, 자우어 부인, 아니, 왼발부터요. 자, 이제 내게 몸을 기대고 살살 몸을 일으켜보세요." 하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다가 뒤로 고꾸라졌고 조련사가 그런 나를 붙잡아주었다. 미하엘과 외르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 마리아가 아이들을 야단쳤다. "친구에게 예의 없게 굴 거야?"

어머니의 말에 후회가 됐는지 미하엘이 말했다. "내 조랑말을 타볼래요? 이 말보다 더 작아서 괜찮을 거예요."

그러자 외르크도 맞장구쳤다. "우리가 올라가게 도와줄게요." 그러더니 다가와 내 종아리를 밀어주었다. "힘내요!"

미하엘도 조르르 쫓아와 힘을 보탰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마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마한 치아를 활짝 드러내며 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벌써 땀이 났지만 그들의 즐거움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말은 여전히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 "재밌어요?" 남작부인이 물었다. 
나는 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마리아가 내게 승마를 권한 것은 친절한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와 그들의 차이는 더 명확해졌다. 

 

- 우리는 정자에 앉아서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홀짝였다. 가정교사들을 따라갔던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엄마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마리아는 승마복 차림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그녀의 우아함을 해치지 않았고 마리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남작부인은 당연히 내가 그레고어 때문에 슬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비탄에 빠진 아내답게 언제나 그레고어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런 내 처지를 상기시킬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웠다. 

- 그레고어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정말 아니었다. 그레고어는 내 일부였다. 내 팔다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걸을 때 다리 움직임을 생각하지 않고 빨래할 때 팔의 움직임에 집중하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그레고어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몰랐지만 내 삶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학교에 내버려 두고 집으로 가버렸을 때도, 어머니한테 선물로 받은 새 만년필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랬다. 그때 나는 누군가 내 만년필을 훔쳤거나 실수로 자기 필통에 집어넣어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동무들의 가방을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가 사준 놋으로 만든 새 만년필을 잃어버렸는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내 침대를 정리해 주고 스웨터를 개주었다. 나는 내 실수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다.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조금 덜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 "언젠가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지라도요." 마리아가 말했다. "불쌍한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를 생각해 봐요. 작년에 그의 차가 튀니지의 지뢰밭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모두들 그가 장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물론 한쪽 눈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건강하잖아요." 
"한쪽 눈만 잃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오른손도 잃었죠.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도요.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에요. 난 클라우스의 아내인 니나에게 항상 말했어요. 제일 잘생긴 남자를 차지했다고요." 
나는 마리아가 자기 남편도 아닌 남자에 대해서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놀랐다. 그렇다고 뻔뻔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리아에게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매사에 열정적일 뿐이었다. 
"클라우스와는 음악과 문학을 논할 수 있어요. 당신처럼요."

 

- 마리아가 말했다. "어렸을 때 클라우스는 음악가나 건축가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열아홉에 군대에 입대하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재능이 뛰어났는데. 그가 전쟁에 반대하는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들었어요. 전쟁이 너무나 길어진다면서요. 클라우스는 우리가 전쟁에 패할 거라고 생각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언제나 책임감 있게 전투에 임했죠.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언젠가 내게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구를 읊어준 적이 있어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죠. '말없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만이 신의 도움을 기다릴 자격이 있노라.' <밤베르크의 기사> 마지막 구절이에요.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죠. 뭐든 혼자 해결하려 해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니까요?" 

 

- 남작부인은 내 손을 놓고 음료를 마저 마셨다. 한참 동안 말을 쏟아내고 나니 목이 말랐었나 보다. 그때 하녀가 생크림과 과일을 올린 케이크를 들고 왔다. 마리아가 가슴을 쳤다. "난 정말 한심해요. 먹성이 너무 좋아요. 매일 단 걸 먹어야 한답니다. 대신 고기는 안 먹어요. 그나마 낫죠?" 
그 시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흔치 않은 습관이었다. 히틀러 빼고 내 주변에 의도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나는 히틀러와 실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를 위해 일하고 있었지만 그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 "그를 만날 때마다 예언자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보랏빛에 가까운 눈동자는 사람을 자석같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죠. 그가 입을 열면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층이 변하는 것 같아요. 히틀러처럼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나는 이 여자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이 여자 방에서 뭘 하고 있나? 어째서 얼마 전부터 자꾸만 원치 않는 곳에 오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이런 상황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걸까? 어쩌다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고 나만 혼자 살아남게 된 걸까? 적응력은 인간 최고의 능력이라지만 적응을 하면 할수록 내 인간적인 면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들이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며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개구리 뒤를 부질없이 쫓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들은 내가 차르트를 부를 때처럼 가볍게 혀를 찼다. 왕자에게 걸린 마법을 풀고 결혼하기 위해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정하게 개구리들을 불렀다. 어렵게 개구리 한 마리를 손안에 넣고 기뻐 날뛰던 친위대원들은 아차 하는 순간 개구리를 놓쳐버리고 다시 붙잡으려다가 넘어져서 진흙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 그렇지만 그날 밤 그들은 운이 좋았다. 히틀러 덕분에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개구리들을 다시 볼프스샨체 근처에 풀어놓은 후 친위대원들은 개구리들에게 울어보라고 재촉할 것이다. 좀 울어봐. 부탁이니 좀 울어보렴, 예쁜 개구리야. 총통은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고 드디어 잠자리에 들 것이다. 

 

- 알베르트는 내 배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배가 그의 옆얼굴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나는 작은 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잠을 자지 않았다. 헛간은 우리들의 은신처였다. 모든 범죄자에게는 은신처가 있는 법이다. 

- 오늘 밤 늑대는 잠들지 못한다. 그는 동이 틀 때까지 쉬지 않고 떠들어댈 것이다. 그의 친위대는 한두 명씩 곯아떨어졌다. 고개를 꾸벅이다 턱을 받치고 있던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면 탁자 위에 올려놨던 팔꿈치가 흔들리지만 그래도 끝까지 고개를 받친다. 한 명만 자지 않고 그를 보살피면 된다. 오늘 밤 늑대는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으려 한다. 긴장을 풀지 않으려 한다. 잠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얼마나 많은 이가 다시 눈을 뜨리라 자신하며 눈을 감았다가 잠들고 말았던가. 잠은 죽음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믿을 게 못 된다. 

- 이제 그만 자렴. 늑대의 어미가 그에게 말한다. 그녀는 멀쩡한 한쪽 눈으로 그에게 윙크를 해준다. 그날 밤 그녀는 남편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검푸른 광대뼈를 좋아했다. 취했을 때는 더 그랬다. 쉿!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그만 편히 자렴. 내 작은 아기 늑대. 하지만 늑대는 그때 이미 경계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배신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위해를 가할 원수는 어디든 있다. 제 손을 잡아주세요.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 곁에 있어주세요. 친위대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가루약 효과가 나기를 기다린다. 총통이 쓰러지듯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친위대원은 총통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총통은 입을 벌린 채 젖먹이 아이처럼 잠이 든다. 드디어 친위대원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 총통이 쉬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 

- 죽음이 잠복해 있는 가운데 총통은 홀로 남았다. 죽음은 통제불가한 현상이다. 정복할 수 없는 적이다. 무서워요. 뭐가 무섭다는 거니, 내 새끼?  

 

- 우리는 레니 덕분에 더 친해졌다. 레니는 에른스트의 관심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자기도 그를 좋아하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거절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듯 그의 욕망에 순응했다. 레니는 희생자 역할에 딱 어울리는 아이였다. 겁 많은 성격만 아니라면 우리 중에서 시식가에 가장 적합했을 거다. 

 

- 따지고 보면 치글러를 대하는 내 태도도 레니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이면 헤르타가 나를 탐색하는 것 같았고 요제프는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식당에서는 엘프리데가 내가 체크무늬 옷을 입었던 날과 똑같은 눈초리로 나를 뜯어보았다. 마지막으로 그 옷을 옷장에서 꺼냈던 게 언제였더라? 엘프리데는 내가 지금까지 잘 숨겨온 진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내 자신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속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면 식당에서는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 접시에 포크가 딸그락 부딪히는 소리, 조르르 물 따르는 소리, 탁 하고 유리컵을 나무 탁자에 올려놓는 소리,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 쩝쩝거리며 음식을 씹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새들의 노랫소리와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열린 창문을 통해 멀리서 들려오는 트랙터 털털거리는 소리. 소리만 듣고 있으면 연회장에라도 와 있는 느낌이다. 죽지 않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해야만 하는 인간의 욕구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 내 앞에는 제복 차림의 경비병들과 장전된 무기와 우리가 갇혀 있는 새장의 철장이 보인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원래대로 무미건조하게 울려 퍼진다. 그 모든 것은 억눌린 무엇인가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나는 소리다. 나는 전날 밤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목이 물어뜯긴 쥐 시체를 생각했다. 더 이상은 거짓말을 못 할 것 같았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 거짓을 결혼 지참금처럼 가지고 다녔다. 나는 사람들이 내 비밀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 것이다. 나는 항상 긴장한 상태로 살았다. 

 

- "하이케가 원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왜 그랬을까?" 
"열일곱 살짜리 아이 아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엘프리데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함께 숲을 빠져나오면서 하이케가 고백했으리라.
"그 둘 아직도 사귀고 있어." 엘프리데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엘프리데의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헛간 문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불안에 떠는 알베르트와 차르트의 송곳니 사이에 있던 죽은 쥐 생각이 났다. 나는 힘겹게 엘프리데에게 물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 말은 누구든 자기 행동에 대한 핑계를 찾을 수 있다는 거야. 모든 일에 핑곗거리는 있어."

- 엘프리데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기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하이케는 제일 친한 친구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을 거야. 왜 하이케가 우리 앞에서는 안 부끄러워하는지 알아? 우리가 덜 소중하기 때문이야." 
엘프리데는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더니 왼편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하이케는 베아테가 진실을 알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한 거야. 베아테가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가끔은 진실을 아는 것도 부담스럽잖아. 그래서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거겠지. 어쨌든 하이케는 운이 좋아. 혼자서 비밀을 간직하지 않아도 되니까." 
엘프리데는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엘프리데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게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와 짐을 나눌 수 있다. 엘프리데는 베아테와 다르니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이케보다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쩌지?
그래도 상관없다. 엘프리데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엘프리데는 죽은 쥐가 불운의 전조가 아니라고 말해줄 거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을 믿을 것이다. 

- 엘프리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병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게 신호를 보낸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내가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닌가? 그 반대인가? 네 비밀을 고백하지 말아 줘. 네 공범이 되고 싶지 않아. 

- 엘프리데의 치마가 종아리 중간에서 펄럭였다. 발끝과 발꿈치의 움직임에 따라 종아리 근육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나는 엘프리데의 꼿꼿하고 위엄 있는 자태에 매료되었다. 처음부터 나는 엘프리데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엘프리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엘리데의 발자취를 뒤쫓아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경비병에게 달려가 말했다. "저도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 내 경우에는 눈앞에서 체포됐던 아담 보르트만 수학 선생님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다. 당시 그는 내게 제3제국과 이 지구와 신이 저지른 죄악의 모든 희생자를 상징했다. 

- 치글러는 공포에 익숙해지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숨도 못 자고 침대에 앉아 밤을 꼬박 샐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포에 익숙해질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식들을 포함한 그 누구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자기가 미쳐버릴까 봐 두려워 전근을 신청했다. 그의 상관인 최고돌격지도자는 실망했을 것이다. 건강 문제가 있어도 언제나 전진하며 한 번도 후퇴하지 않았던 치글러가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힘러 친위대장에게 누가 이 소식을 전해야 하나? 자네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는데. 자기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걸세.

 

- 치글러의 피는 소리 없이 혈관을 흐르는 대신 그에게 속삭인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소리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때면 피가 포효하는 소리에 잠 못 이룬다. 결국 치글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근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속삭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심장은 망가져서 고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결함이 있던 건 고칠 수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그러니 그런 속성을 역이용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 크라우젠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알베르트 치글러 중위는 자신이 영원히 중위로 머무를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기 실패를 보완하고 싶은 마음에 겉으로는 자신을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해 준 엄격한 태도를 취해도 실은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던 어느 밤 우리 집 창가로 와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 수년 동안 나는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비밀 때문이었다고 믿었다. 그가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나 역시 듣고 싶지 않았던 그의 비밀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내 남편도 치글러만큼 알지 못했다. 우리는 겨우 1년간 같은 지붕 아래 살았을 뿐, 그 후 그는 전장으로 떠나버렸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잘 안다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상대방의 경계를 허물기를 열망하는 이방인 사이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서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의 사랑이 살아남지 못한 것은 비밀 때문이 아니라 제3제국의 몰락 때문이었다. 

- 울라가 내 머리를 만져주러 와 엘프리데와 레니와 함께 차를 마신 날,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 헤르타는 엘프리데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아이야. 요제프가 파이프 안에 담배가루를 넣고 누르며 말했다. 

 

- 모두들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냅킨이나 접시 가장자리에 올려놓고 두 손을 배 위로 가지런히 모았다. 엘프리데 역시 포크 끝에 파이 조각이 남아 있는데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포크를 다시 집어 들더니 파이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접시에 남은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엘프리데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엘프리데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겁이 없는 척했다. 그 누구도 엘프리데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친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치글러는 엘프리데가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 "오늘의 주인공은 나야, 베를린 토박이." 엘프리데는 이렇게 말하고는 중위를 향해 걸어갔다. "가자." 치글러의 말에 엘프리데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랐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날이었다.

 

- 엘프리데가 사라진 후 나는 긴장성 분열증 상태였다. 레니를 증오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용서할 수도 없었다. 내 눈에 레니는 고작해야 사고를 치고 혼날까 봐 걱정하는 어린아이 정도로만 낙심한 듯 보였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생각 좀 해보고 말하지 그랬어. 나는 레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우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낮은 소리였지만 나는 그 소리마저 참기 힘들었다. 엘프리데는 그보다 더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고 나는 고요함을 원했다. 

- "무슨 일이니?" 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파울리네는 가냘파 보이는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남자는 발을 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나야." 그 순간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 "아니야, 당신 동생은 원래 이상했어."

"그래?"
"그렇다니까, 로자. 몇 년 동안이나 가족들에게 편지 한 장 안 보냈잖아."
"그랬지. 프란츠 말로는 그때 자기는 독일과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대.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독일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빠져서 성까지 바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미국이 참전하자 잡혀갈까 봐 매일 불안에 떨어야 했으니까." 
"그래. 나도 알아. 그 논란의 음식 이름이 뭐였더라? 기다려 봐..."
"논란의 음식? 아! 사워크라우트!"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사워크라우트를 리버티캐비지(자유 배추절임 Liberry Cabbage이라는 뜻으로 미국 병사들이 독일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이름을 바꿈)로 바꿔 불렀대. 적어도 프란츠 말에 의하면 그래."
"맞아, 사워크라우트." 그도 함께 웃는다.

- 그레고어가 기침을 한다. 가래가 잔뜩 낀 깊은 기침 때문에 그레고어는 고개를 들어야 했다. 머리라도 받쳐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았다. "도와줄까?" 
하지만 그레고어는 목을 가다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당신 동생이 보낸 전보 기억해?"
그는 기침을 하는 데 익숙했다. 지금 그는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 ... 

 

- 나는 바닥에 엎드려 엘프리데의 옷을 끌어모아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옷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엘프리데의 체취를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새 그녀의 체취를 잊었던 건지도 모른다. 

- 누군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고통은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감정이다.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보고, 다시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못 견디는 자기 자신 때문에 힘든 거다. 고통은 이기적인 감정이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하지만 엘프리데의 옷 무더기 위에 쓰러져 있다 보니 그녀에게 일어난 거대한 비극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것은 고통마저 무뎌질 정도로 너무나도 엄청나고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다. 엘프리데에게 일어난 비극은 온 우주를 꽉 채울 정도로 팽창해서 모든 고통을 압도했다. 인류가 어떤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 나는 내 피를 보지 않으려고 엘프리데의 검붉은 피를 바라봤었다. 다른 사람 피를 보는 건 괜찮아? 엘프리데가 내게 물었었다. 

- 갑자기 산소가 모자랐다. 나는 몸을 일으켜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엘프리데의 옷을 줍기 시작했다. 옷을 탈탈 털어서 옷 주름을 편 다음 제자리에 걸어놓았다. 엘프리데가 돌아올 것도 아닌데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방 정리를 했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빨래를 개켜서 옷장 서랍 안에 넣고 침대시트를 매트리스 위에 곱게 접은 뒤 운 나쁘게 화를 입은 베개 모양도 잡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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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마고 뵐크 Margot Wölk와 관련된 짧은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하던 여자들 중 살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뵐크 여사는 평생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함구하다가 아흔여섯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기사를 읽자마자 나는 뵐프 여사와 그녀가 겪었던 일에 대해서 조사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뵐크 여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낼 생각으로 그녀의 집 주소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몇 달 후 여사의 베를린 집주소를 알아냈을 때, 나는 그녀가 얼마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대신 나는 대체 왜 그 이야기가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그 결과 이 소설을 쓰게 됐다. 

 

- 우리는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갔다. 몇 시간 동안 복도에 서서 기다리느라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기다란 원목 식탁이 있었고 식탁에는 이미 우리를 위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포갠 채 가만히 있었다. 내 앞에는 하얀 도자기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 이제 겨우 오전 11시밖에 안 됐는데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팠다. 시골 공기 때문도, 버스 여행 때문도 아니었다. 배 속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밀려오는 허기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수년 동안 허기와 두려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 접시가 코앞에 놓이자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머리가 울리고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안면 홍조가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 내 앞에는 버터로 볶아 맛을 낸 줄기콩 요리가 놓였다. 결혼식 이후 버터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구운 파프리카 향이 코를 자극했다. 음식이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접시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맞은편 소녀의 접시에는 완두콩과 쌀로 만든 요리가 놓였다. 

- "먹어!" 방 한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유보다는 강하고, 명령보다는 부드러운 어조였다. 우리들 시선에 담긴 욕구를 읽어낸 듯했다. 우리는 입을 살짝 벌렸다. 호흡이 빨라졌다. 다들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일어나, 고맙지만 오늘 아침 집에서 키우는 닭들이 관대하게도 달걀을 많이 낳았다고, 오늘은 달걀 하나면 충분하니 차린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보았다. 나까지 꼭 열 명이었다. 적어도 최후의 만찬은 아닌 것이다.

 

- 주께서 내게 식탁보도 없는 원목식탁에 상을 차려주셨다. 열 명의 여인들을 위해 아헨 지방에서 만든 도자기 그릇 열 개를 식탁 위에 올려주셨다. 행여나 베일이라도 쓰고 있었다면 침묵의 서약을 한 수도원 수녀들처럼 보였겠지. 

 

- 처음에는 다들 음식을 조금씩 입속에 집어넣었다. 어쩌다 초대받은 그 사람의 점심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음식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이 음식은 애당초 우리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순전히 우연히 이 음식을 먹게 된 거다. 음식은 식도를 따라 미끄러져 배 속에 뚫린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음식물로 채우면 채울수록 구멍은 점점 더 커졌고 구멍이 커질수록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저트로 나온 아펠슈트루델(여러 겹의 페이스트리 안에 사과와 건포도를 채운 디저트)이 너무나 맛있어서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맛있어서 파이를 점점 더 큰 조각으로 잘라서 입속에 욱여넣고 쉴 새 없이 씹어 삼켰다. 그러다가 목이 메는 바람에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가다듬었다. 

 

- 친위대원들은 우리를 둘씩 짝지어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들여보냈다. 나머지는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학생들이 쓰던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혈밴드로 내 팔을 꽉 조이더니 검지와 중지로 찰싹 때렸다. 채혈을 함으로써 인간 모르모트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첫날이 일종의 환영식이자 리허설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공식적인 시식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셈이다. 

- 주삿바늘이 혈관을 찌르는 순간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 옆에는 엘프리데가 있었다. 그녀는 주사기가 자신의 피를 빨아올리며 점점 더 짙은 색상의 피로 차오르는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나는 내 피를 못 쳐다본다. 그 진하디 진한 액체가 내 몸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사기 대신 엘프리데를 바라보았다. 데카르트 좌표처럼 흔들림 없는 그녀의 자세와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엘프리데는 분명 미인이었지만 아직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와닿지 않았다. 내게는 그녀가 풀리지 않은 수학 문제처럼 느껴졌다.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엘프리데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엘프리데는 산소가 모자란 듯 콧구멍을 한껏 부풀렸고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날 저녁 자우어가의 화장실에서 나는 내 오줌에 배어 나오는 아스파라거스 냄새를 맡으며 엘프리데를 생각했다. 아마 엘프리데도 변기에 앉아서 나와 같은 냄새를 맡고 있을 터였다. 히틀러도 볼프스샨체의 벙커에서 나와 같은 냄새를 맡고 있을 터였다. 그날 저녁 히틀러의 오줌과 내 오줌에서는 같은 냄새가 났다. 

 

- 날씬한 허리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친위대원들은 울라를 보고 탐스럽다고 했다. 울라는 잡지에서 오려낸 배우들의 사진을 붙여놓은 공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따금씩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공책을 넘기곤 했다. 그녀는 권투 선수 막스 슈멜링과 결혼한 아니 온드라의 도자기처럼 매끈한 두 뺨과 일제 베르너의 보드랍고 도톰한 입술을 가리켜 보였다. 일제 베르너는 라디오 방송에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슬플 때는 노래를 불러요>의 후렴구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노래 가사처럼 노래를 부르면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독일 군인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울라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차라 레안더였다. 울라는 차라 레안더가 갈매기 날개 모양으로 눈썹을 그리고 곱실거리는 애교머리를 얼굴에 드리운 채 출연한 영화 <하바네라>(푸에르토리코 남자와 결혼한 스웨덴 여인 역을 연기한 차라레안더의 1937년도 작품)를 좋아했다. 

 

- "아녜요. 감사합니다. 아니,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을까요? 제게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깍지를 벗길 콩이 몇 킬로그램 있거든, 경비병들이 데리러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수고를 좀 해주겠나? 경비병들에겐 자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일러두지." 
크뤼멜은 자기 주방에 나를 혼자 내버려 두려는 것이다. 식재료에 독을 넣을 수도 있는데. 크뤼멜은 내가 그럴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는 듯했다. 그는 히틀러의 시식가이자 조리팀의 일원이며 자기처럼 베를린 출신인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시간이 갈수록 야위어서 다들 군복이 헐렁해졌겠지. 나는 그레고어가 군말 없이 통조림 음식을 씹어 삼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료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레고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할 때 힘을 얻었다. 

- 처음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것도 각자 무기를 옆에 둔 채 말이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다고 했다. 카드놀이를 하다가 다투거나, 너무나도 생생한 악몽을 꾸거나, 행군 중에 생긴 오해 때문에 말이다. 그레고어는 그들을 믿지 못했다. 그가 믿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하지만 자기 동료들과 정이 들고 난 후에는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 그의 동료들 중에는 라인하르트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벼룩만 봐도 벌벌 떠는 겁쟁이였다. 그는 자기와 세 살 차이밖에 안나는 그레고어가 친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그레고어에게 매달렸다. 나는 라인하르트를 똥싸개라고 불렀다. 베를린에서 받은 그레고어의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똥이야말로 신이 부재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는 가끔 사람들을 도발하기를 즐겼고, 건축사무소 사람들은 그런 그레고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그레고어였지만 똥을 신이 부재함의 증거라는 식의 말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기서는 모두 설사를 해." 그가 편지에 썼다. "음식과 추위와 공포 때문이지." 라인하르트는 임무 수행 중 바지에 똥을 싼 적도 있다고 했다. 군대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라인하르트는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 게다가 그는 친위대 장교였다. 그런 그가 히틀러의 음식이나 맛보는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금지된 일일 수도 있다. 

- 치글러는 왜 자기를 헛간으로 데려왔는지 내게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그는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것이 처음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의 귀에 입을 꼭 붙이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하이케가 낙태를 한 날 그녀의 딸에게 불러주었던 동요를 불렀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노래였다.

 

- 내 위는 도저히 음식을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들도 손으로 입을 막고 배에 손을 갖다 대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 치글러가 나가자 경비병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우리를 두 명씩 화장실로 바래다주었다. 돌아와 보니 식당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안뜰로 이어지는 프랑스식 창문도 어느 정도 열려 있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준비됐다. 총통이 배가 고파서 안달이 났나 보다. 그는 밤새 손톱만 씹어 먹었을 것이다. 아니면 불미한 사건에 기분이 상해서 식욕을 잃었을 수도 있다. 뱃속이 부글거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위염이나 고창鼓脹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경과민에 의한 반응이었을 거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쫄쫄 굶었을 것이다. 아니면 위급한 상황을 위해 벙커 안에 숨겨둔 만나(성경 속 여호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날마다 내려줬다는 기적의 음식)를 먹었을 수도 있다. 어느 밤 그만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 말이다. 아니면 그는 그저 굶주림을 참았을 것이다. 그는 뭐든 견딜 수 있는 인간이니까. 배고픔을 참으면서 자신의 굶주림에 동참한 셰퍼드 블론디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줬겠지. 

 

- 나는 그날 밤도 창가에 다가가지 못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해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왔다 해도 손톱으로 유리창을 긁지 않았다. 어쩌면 애당초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삐걱거리던 소리는 내 뼈에서 난 소리였을 것이다.  

 

- 그가 그리웠다. 뒤틀린 운명과 지키지 못한 약속들로 점철된. 그레고어를 향한 그리움과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치글러에 대한 그리움은 초조함에 가까웠다. 나는 베개를 부여잡았다. 면이 까칠까칠하고 불이 붙을 듯 뜨거웠다. 문제는 치글러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다. 그가 무뎌진 내감각을 깨운 거다. 나는 베갯잇을 물었다. 까칠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굳이 치글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와 사랑을 나눈 건 너무 오랫동안 사랑을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베갯잇 귀퉁이를 찢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송곳니 사이에 실 한 가닥이 걸렸다. 나는 어렸을 때처럼 실을 빨다 혀로 돌돌 말아 꿀꺽 삼켰다. 이번에도 나는 죽지 않았다. 알베르트 치글러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몸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 몸은 또다시 버림받고 또다시 홀로 남겨졌다. 

 

- "죽지 않았잖아." 치글러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그가 내 입에 키스하며 말했다. "살아 있잖아." 목이 잠긴 치글러의 말소리가 기침처럼 들렸다. 나는 마치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라고 말하듯 그를 어린아이처럼 쓰다듬어주고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나는 매일 밤 치글러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집을 나섰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대면할 때처럼 비장한 태도로 헛간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럴 때 나는 군인처럼 걸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는 무시해 버렸다. 다음 날에도 똑같은 질문들이 나를 다시 괴롭힐 터였지만 헛간에 들어가는 순간만큼은 그것들은 그물에 걸린 걸레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내 의지로 쌓아 올린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 치글러와 나는 연인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이유를 찾는 것은 너무 순진한 짓이다. 치글러는 그때 그곳에서 나를 봤다. 아니, 나를 발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나를 보자 차르트가 야옹거렸다. 차르트는 쥐를 한 마리 물고 있었다. 어찌나 꽉 물었는지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에서 쥐 대가리가 잘려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징그러워서 뒤로 물러섰다. 헤르타와 요제프는 없었다. 
"깜짝 선물이네?" 알베르트가 속삭였다. 그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녀석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결국 누군가는 눈치챈 것이다. 언제까지나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차르트는 우리의 비밀을 알고 쥐를 죽여서 가져왔다. 선물이 아니라 경고 같았다. 

- 알베르트는 나를 안으로 끌고 들어와 문을 닫고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안아주던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도 내심 놀란 듯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던 건 아닐 거다. 그가 두려워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나 때문에 두려웠던 거다. 그는 우리 관계 때문에 내가 고통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나도 그를 꼭 껴안았다. 나는 그를 돌봐주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순간, 어쩌면 우리의 사랑도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의 사랑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 은신처가 있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를 포옹함으로써 베를린에서 함께 자던 파울리네처럼 다시 고른 숨을 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감정일 수 없다. 아무도 그런 내 감정을 비난할 수 없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의 장편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로셀라 포스토리노의 소설로, 실제 히틀러의 시식가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던 실존인물 마고 뵐크의 고백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감별하기 위해 끌려간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범한 인간인 로자가 스스로 악을 행하는 자와 악의 없이 악한 임무를 수행하는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이야기는 1943년 가을 무렵부터 시작된다. 스물여섯의 로자 자우어는 베를린에서 폭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전장으로 떠난 남편 그레고어의 고향인 그로스-파르치에 홀로 오게 된다. 당시 그로스-파르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히틀러의 동부전선 본부인 ‘볼프스샨체(늑대소굴)’가 있었다. 적에게 독살당할 것을 의심했던 히틀러는 그 근처의 여성들을 모아 자신의 음식을 미리 먹어보게 했고, 로자는 그중 한 명으로 선택된다. 이렇게 소집된 열 명의 여성들은 매일 히틀러의 음식을 먹으며 하루에 세 번씩 음식이 주는 희열과 죽음의 위협을 함께 느끼는데……. 히틀러가 시킨 일을 하면 음식을 먹다 죽고, 히틀러를 추종해도 전쟁 종결 후엔 나치 추종자란 명목으로 죽어야 한다. 히틀러에 반대하면 그 역시 죽어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로자는 삶의 커다란 모순을 경험한다. 내가 살기 위한 일이 어떻게 모두 내가 죽기 위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결정할 수 없는 평범한 삶을 산 로자. 지금 이 시대에는 로자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저자
로셀라 포스토리노
출판
문예출판사
출판일
201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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