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은림, 박성환] 뿌리 없는 별들

일루젼 2023. 5. 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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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은림 / 박성환
출판 : 알마 
출간 : 2020.04.30 


 

잠을 자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이란,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식물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 수 없다에 가깝다. 태양빛이 없는 동안 활동을 정지하거나 낮과는 다른 활동을 하는 식물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쪽이 '잠'에 가까운지 정의하기는 힘들다- 

 

식물적인 삶이란, 다른 종에게 보다 무해한 삶일까? '해롭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기준으로 할 때 정의할 수 있는가? 

 

은림 작가의 <우물 속의 색채>는 <랩걸>이나 <모든 것들의 이름으로>가 생각나는 글이었다. 모두 주화자가 식물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세 작품 모두 추천하고 싶다. 각기 다른 색깔과 매력을 뿜어내지만, 모두 상당히 매혹적인 작품들이다.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도, 공동 저술도 아닌데 두 작가의 글을 한 권으로 묶어 발표한 이유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는 두 분 모두 익숙지 않은 작가이기에 - 은림 작가의 글은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서 읽었을 터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 특정 관계성이 있는 분들인지는 알 수 없다. 공제인 <뿌리 없는 별들>에서 유추하건대, 분량적인 측면과 두 작품 모두 외계에서 온 -식물에 가까운- 생물이 테마임을 고려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을 모두 읽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합본에 관해서는 조금 미묘하다. 

 

익숙한 것들이 달라지면 기존의 세계와의 마찰이 일어난다. 평이한 것들,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이어서 찾아오는 변화는 새로운 익숙함에 맞춰지는 새로운 환경이다. 보다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 사람, 일로의 변화. '나'라는 감각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그전까지의 자신은 어딘가 까마득히 낯설다. 

 

그 변화의 한 가운데- 그 정점에 선 외로움에 집중한 상태로 읽었다. 

좋았다.  

 


   

- 은림 :  소설가, 편집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오컬트 카드 제작자.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런두런하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멈췄다. 나는 침묵이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들리는 기이한 착각 속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바닥에 깔린 산 공기가 바싹 나를 끌어당겼다. 등 뒤에서 버스가 떠나는 동시에 버스 안의 목소리들이 다시 커졌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외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익숙함에 진저리를 쳤다. 치마를 입고 교실 문을 열 때, 바지를 입고 학회장 문을 열 때 모두가 싸늘하게 말을 멈췄고, 내가 지나가면 한바탕 뒷말이 쏟아졌다. 그때의 얼린 바늘 같은 공기에 비하면 지금 산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는 차라리 포근했다.

 

- 나는 마을 어귀에 닿을 때까지 오래된 산길을 혼자 걸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뒤돌아볼 만큼 괴괴하고 음산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농밀해지는 서늘한 나무 향기, 낙엽 더미 아래서 크고 작은 벌레들이 바스락대고 꿈틀대고 팔딱대는 소리, 긴 꼬리가 나무껍질을 스치는 소리가 익숙하게 귀를 자극했다. 

 

- 입안이 뻑뻑했다. 시원한 맥주가 간절했지만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 어떤 취급을 당할지 뻔했다. 

 

- 남자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상상도 못 할 사고들이 여자들에겐 너무 쉽게 일어났다. 나는 인적 없는 산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배낭 속에는 휴대용 담요도 있었다. 채집 여행에서 노숙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새벽녘 찬이슬만 피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 이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 나았다. 

 

- "여행객이우? 혼자?"

노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염려를 받는 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난 신중하게 대답했다. 

"곧 일행들이 올 거예요. 제가 조금 먼저 도착했어요."

거짓말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저는 식물학자예요. 거기 기형식물들이 산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식물들을 연구하려고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학자이고 교수라고 말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많이 만났다. 지나치게 열광하는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나은 태도는 모든 것이 보통인 양 말하는 거였다.

 

- 노인은 나무를 몇 개 더 넣고 공기가 잘 들어가도록 몇 번 뒤적인 후 쇠로 된 문을 닫았다. 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서 안의 불꽃이 넘실대는 게 가끔 비쳤다. 나는 배낭과 기름통을 들여놓고 주전자를 찾았다. 따뜻한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노인은 커다란 솥을 꺼내 물을 담고 낙엽을 몇 줌 뿌렸다. 물이 끓자 부드러운 향기가 온 집 안에 흘러넘쳤다. 노인이 넣은 이파리는 시골에서 찻잎 대용으로 쓰는 말린 감잎이었다. 

 

- 노인은 문지기였다. 노인이 지금껏 계속해온 일은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일었다. 

"저기 별이 떨어졌다우."

 

- "글쎄요, 꼭 쓸모 있어야만 연구 가치가 있는 건 아니어서요."

쓸모가 있어서 존재하는 생물은 없다. 만약 쓸모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쓸모를 결정하는 건 누굴까.

 

- 나는 시시콜콜한 이웃 이야기와 가족사가 몽땅 버무려진 진흙탕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조심스레 걸러냈다. 노인은 운석 안쪽이 갓 잡은 짐승의 내장처럼 뜨겁고 번들대며 기묘한 광채가 흘렀다고 했다. 실험실로 가져간 암석 표본도 밤새 뜨거운 열과 빛을 내며 실험 기구를 녹이고 사라졌다. 나라면 분명 연구를 계속하려고 다시 표본을 채집하러 갔을 텐데 그 뒷이야기는 없었다. 그 실험을 했던 교수들 중 누구도 학교에 남아 있지 않았고 현재의 행방도 묘연했다. 

 

- "우리가 텃세를 부린 거 아니냐고? 모를 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있는 그런 거 있잖우? 당장 먹고사느라 밭을 매고 여물을 쑤다가 머리를 들면 문득 깨닫는 싸한 거, 숨 쉬지 않는 것이 지켜보는 섬뜩한 느낌. 잠자리에 누우면 발치에 고이는 이상한 적막 같은 거 있잖우. 거기에 그런 게 있수. 온갖 화려한 색채로 산 것들을 현혹하면서 말이우."

 

- 나는 노인이 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들은 유령이나 기현상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미지가 풀리면 인간의 지성이 높아졌다. '그것'들의 모양과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반복되는 생태, 작용, 혹은 동작과 반응을 찾아내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관념의 존재를 현실로 불러내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수 있다면, 아컴의 황무지에 서린 기이하고 섬뜩한 존재에 이름을 붙여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다면 분명 달라지리라. 

 

- 그 일을 노인이 하려고 했었다.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앞치마의 얼룩처럼 그 '기이한 날'의 기억에 대해 이도 몇 개 안 남아 새는 발음으로 우물우물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늙은 여자였고, 그의 목소리로 인해 어떤 중요한 정보도 '쓸데없는 수다'로 치부되었다. 그래도 노인은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말들이 닳고 닳아 황무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될 때까지. 밤의 어둠도 빛이 바래는 아컴의 회색 지평선처럼 희미해질 때까지. 누군가는 듣기를, 듣고서 다가오지 않기를, 소중한 생명과 시간과 인생을 하루라도 낭비 없이 보존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에겐 사람들의 주의를 끌 권위도, 이름을 명명할 학식도 없었다. 

 

- 만약 노인이 허드렛일을 하지 않고 오롯이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우리 사이에 빨랫감이나 설거짓거리나 식사 준비가 아닌 오롯한 차 한 잔만 있었다면 그의 말에 더 무게가 실렸을까? 손이 비는 시간은 노동을 끝낼 수 있는 일부만 전유할 수 있다. 

 

- "빛을 봤어요. 애가 반짝이는 이상한 풍선 같은 걸 불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물고기 부레를 떼서 종종 그런 장난을 치거든요. 그런데 그 작은 풍선이 애를 쭉 빨아들였어요. 정말이에요."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봤어요." 그 말을 할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까맣게 커지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사라진 그 순간에 있는 것 같았다.

 

- "왜 처음 이상한 일이 있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달아나지 않았어요?"

 

- 나는 그 질문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특히 약한 자들에게 더 사납게 달려들었다. 

 

- "가보니까 정말로 먹을 게 있는 거예요. 너무 배가 고파서 좀 상한 것 같아도 아무거나 먹었어요. 그다음엔 좀 골라 먹었고... 나중에는 영 못 먹겠다 싶었지만 다른 작물이라도 거두자 싶어서 씨앗을 동냥했어요. 새로 난 것들은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괜찮은 작물을 거두었단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까 여기도 좀 나아지겠지 하고 그냥 기다렸던 거 같아요. 우리 같은 사정인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 "그때 애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나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의 눈에 다시 열기가 떠올랐다.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삶을 견디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그를 미치게 하는 거 같았다.

"거기 뭔가 있어요. 내 말을 안 믿어줄 거 같았어요. 그래서 이걸 가져온 거예요. 요정이겠죠? 요정이 애들을 데려가기도 한다잖아요? 뭘 주면 제 아이를 돌려줄까요?"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시골뜨기였고, 알 수 없는 모든 일을 미신으로 믿고 있었다.

"이게 왜 이상한지 알아볼게요. 마의 황무지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는 못 미더워하면서도 보자기를 넘겨주었다.  

 

- 직업상 여행이 잦은지라 일행이 아닌 남자들과 가까이 그러나 말을 걸 수는 없는 미묘한 거리를 유지해 그들과 일행인 양 딴 남자들의 눈을 피하며 다니는 것에 능숙했다. 하지만 서로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았다. 여인숙에 기름 한 되를 빌리러 온 노인과 내가 서로의 난처함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잠금장치조차 변변치 않은 여인숙에서 내가 무슨 사고를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남자들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섬처럼 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우리는 여자들만이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를 도왔다.   

 

- 집 구석구석에 고인 어둠이 비틀린 화덕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 불길과 뒤엉켜, 검고 노랗고 가끔 주홍색으로 반짝였다. 노인의 이야기와 여자의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얽히고 섞여서 꿈으로 변했다. 연구실에서 오팔처럼 빛나는 돌덩이를 실험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 동안 실컷 괴롭힘 당한 돌덩이는 슬그머니 생명이 꺼져 사라졌다. 나훔네 떨어진 운석은 그냥 돌이 아니라 별이 낳은 알이었다. 그 속에서 소중하게 품어지던 존재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껍질이 까이고 잘려나가 태어나지도 못한 채 흩어져버렸다. 

 

- 다음날 새벽, 나는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이야기였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채로 깨어났다.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우물 속에서 물비늘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등에 고인 땀방울이 선득하게 식었다. 오염된 우물에 기름이 흘러든 걸까? 목덜미를 문지르며 돌아서는데 크게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우물물 가장자리만 반들반들 빛났다. 나는 약간 겁먹은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 나훔네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노인은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꺼렸다. 입담을 즐기는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더욱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말한다. 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 어느새 해가 지고 바람이 술렁대고 있었다. 우물 너머 말라빠진 단풍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비비며 어두워지는 하늘에 시커먼 상처 자국들을 그었다. 공기의 밀도가 그물처럼 촘촘해지며 사방을 짓눌렀다. 뭔가가 오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시간, 싹이 트고 꽃이 벌어지는 것처럼 극적이고 농밀한 순간이 시작되는 걸 본능이 감지했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이라는 조건이 갖춰지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삐거덕 열린 것 같았다. 

 

- 버섯갓은 광대버섯처럼 알록달록한 점무늬가 있는 반투명한 금빛이었고, 진주알 같은 몸체는 어두워질수록 투명해지며 찬란히 빛났다. 황홀한 빛이 말간 버섯기둥 속을 맥동하며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오색 물고기 같기도 하고, 크고 아름다운 오팔 같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채집 도구를 꺼내 들었다. 

 

- 손안에 닿는 버섯의 촉감은 어린 동물처럼 보드랍고 미온해서 자르는 순간 붉은 피가 뚝뚝 흐를 것 같았다. 다행히 피가 아니라 금빛 수액이 잘린 부분에 살짝 고였다가 사라졌다. 안에 맥동하던 색채도 같이 꺼졌다. 마치 동물이 죽은 것 같았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일부를 잘라낸다고 생명이 완전히 꺼지는 일이 드물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 '그 마음을 나두 아우. 우리는 모두 닥치고 살아왔지. 무슨 말을 해도 우리 말은 지나가는 수다고 과민하거나 미쳤거나 아무튼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만 들으니까.'

 

- 햇살이 어둑한 부엌 벽에 긴 빛과 그림자를 그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기울어진 부엌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오래 꿈을 꾼 거 같았다. 빛나는 씨앗들이 하늘을 떠다니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씨앗들은 창가에도 소복이 쌓여 집안을 들여다보면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들어와서 어쩌자는 걸까. 

 

- 환각 효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말의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세상에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미지가 존재한다. 그걸 인정하는 건 연구자로서의 겸손이었다. 

 

-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 괜찮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바로 그 말 때문에 내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으며 괜찮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 "거기서 뭔가 가져왔어?"

올드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내 뒤에 펼쳐진 배양 접시가 몹시 든든했다. 

 

- 변화에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고, 생명체처럼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것들은 더욱 더디다. 나는 철저한 인내와 끈기와 성실로 무장하고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미세한 변화를 기록했다. 

 

- 올드본은 내가 연구하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한 가지에 집중하면 미친대. 자궁에서 미치게 한다잖아."

그는 히스테리의 어원에 대해 혼자만 아는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물론 모두 가정에 불과하고 이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당장 이익이 눈에 보이는 실험에만 열광한다. 오염 물질의 변이에 대한 실험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고 내 이력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절망이 검은 늪처럼 밀려왔다. 

 

- 어느 밤엔가는 유리병 속에 내가 갇혀 있었다. 주위에 똑같은 유리병들이 기둥처럼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내 다른 몸뚱이들이 들어 있었다.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나였다. 내 몸들 중 하나가 물을 마시면 그 물맛을 다른 병 속의 모든 내가 알았다. 칼로 일부를 잘라내면 고통도 모든 내가 알았다. 병 하나의 내가 고통스럽게 죽으면 다른 병 속의 나도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진짜 죽음처럼 모든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전등을 껐다 켠 것처럼 잠깐의 소멸과 각성이 지나간 후, 한동안은 시야가 좁아지고 뭔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하지만 곧 그마저 엷어져 그냥 다시 온전한 내가 되었다. 나이면서 모두이고 모두가 나인 느낌은 마치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아주 이상하지만 퍽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연구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제출한 논문이 누락되거나 공동 연구에서 내 이름이 빠져 있는 일들이 있었다. 범인을 색출하면 순수한 장난이라고 치부되는, 불이익을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한 사고들이었다. 그 후로 나는 남들은 피하는 모든 마무리 작업을 떠맡아 최종 제출을 하고, 남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접수 확인과 이름 등재 확인을 몇 번이고 해야 했다. 모든 일이 남들의 세 배였지만 경력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 분노와 절망이 뒤엉킨 나무뿌리처럼 가슴에서부터 팔다리로 퍼져나갔다. 그 뿌리가 닿는 곳마다 체온이 사라지고, 입안에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운 숨이 나왔다. 아무도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나와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실과 정의란 그들만의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아니었다. 

 

- 엄마는 무명의 화가로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숲이나 아무 데도 없는, 별들 저편 구름 속에 돋아난 나무와 꽃과 덩굴과 뿌리로 숲을 그리곤 했다. 엄마의 그림을 매혹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선명하고 기괴한 초록을 거북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하지만 피부에 돋은 솜털 끝까지 아주 예민해져서 냄새와 온도와 질감을 구분하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예리하게 선과 면과 색깔과 명암을 감지할 수 있었다. 눈에 안 보이는 감정이나 기분, 냄새와 소리는 직접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안 보이던 걸 보게 되는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살아남은 것들이 그렇듯 나도 새로운 몸에 재빨리 적응했다. 이 몸이 진짜 '나'인지, 나란 존재가 생각과 기억에 머무는지 육체에 머무는지, 변이한 를 이전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정의해도 되는지, 과연 나라는 건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은 잠시 미뤄두었다. 지금은 이전의 나와 변이한 내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 이 몸이 뭘 할 수 있고 뭘 못 하는지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롭게 배워야 했다. 

 

- 여자가, 그것도 농부의 아내처럼 신분이 낮은 여자가 책이나 신문이나 논문 같은 공적 문서에 좋은 방향으로 이름을 남기는 일은 드물었다. 여자가 학자로 이름을 남기는 일도 드물었다. 세상은 여자들이 기록을 남기는 데 협조적이지 않았다. 나는 젊거나 늙었거나, 미혼이거나 기혼이거나, 명예롭거나 아무 명예도 없거나, 뭐든 간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워지지 않도록 계속 적고, 계속 말하고, 전할 생각이었다. 

 

- "할 수 있는 걸 하려고요. 못 하게 되면 어쩔 수 없고요. 살펴보고 기다리고 기록하는 게 학자의 의무니까요."

갑자기 노인의 색깔이 달라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혼란스럽게 뒤엉켰고, 긴장의 냄새가 났다. 

 

- 노인의 목소리가 얼음 조각처럼 바닥에 떨어져 차갑게 쌓였다. 그는 기억 속 그 시간 그 자리로 돌아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우. 내가 본 게 뭔지도 몰랐고. 꿈이 아닌가 생각했수.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고."

 

- 뿌리를 타고 올라오는 지독한 공포에 나무들은 미쳐가고 있었다. 발이 있다면 달아났으리라. 하지만 나무들은 그냥 거기서 온몸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색채의 공포를, 뿌리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온 둥치를 휘젓고 마침내 가지 끝에 불똥처럼 맺힌 죽음과 파괴와 혼돈과 절망을 그 나무들은 견디었다. 

 

- "근데 그 빛이 당신에게도 있구려."

 

-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계획도 연구도 저축도 승진도 없이, 그저 해가 뜨면 팔다리 머리 솜털 끝가지 뻗고, 비가 내리면 온몸의 땀구멍을 열어 들이켜고 곤충들이 찾아오는 순간을 기다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 일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 늘 결함투성이고 어딘가 불편하고 부정당하는 듯 느꼈던 몸의 모든 기능과 부분들이 그저 온전하고 단단하고 만족스럽게만 느껴졌다. 

 

- 무시무시한 일임에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 상태가 낯설지 않았다. 어차피 전에도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상실감이 크지 않고 슬픔도 깊지 않았다. 

 

- 우리는 말하지 않고도 의사를 소통했고, 마주 댄 촉수와 피부로 서로의 유기물을 교환했다. 그들은 나도 모르는, 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내 몸 안에 넣어주었다. 

 

- 불어오는 바람이 오색의 띠 같고, 땅속에서 흐르는 물길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사방의 이슬이 등불처럼 빛났다. 발밑에 바스러지는 흙과 아무렇게나 흩어진 바위가 아늑한 집과 유서 깊은 장대한 건축물인 양 그것들에서 각각 개성과 규칙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었다. 불안, 기쁨, 분노, 공포와 열망 같은 감정은 색색의 거품처럼 터졌다. 

 

- 몸을 움직이는 게 물속처럼 가볍고도 느릿했다. 공기의 밀도와 저항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숨 쉬는 것은 아주 상쾌했다. 전에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어려웠다. 뭐든 읽거나 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있으면 갑작스레 세상이 넓어졌다. 인간의 몸이 감지하지 못하거나 무디게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이 에는 다각적이고 공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하나였지만 동시에 여럿이었다.

 

- 그것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든 곳에 있었고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촘촘한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확 펼쳐진 것처럼 사방에 존재했다. 그게 였다. 

 

- 모든 길이 달빛을 받은 강물처럼 빛났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온갖 색채의 냄새가 파도처럼 펼쳐지고 생명이 다채로운 얼룩처럼 일렁였다. 밤벌레들은 허공에 떠다니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반딧불이는 찬란한 보석 샹들리에 같았다. 나는 꿀벌이 어떤 모습일지 어서 만나고 싶어졌다. 분명 날아다니는 등불처럼 찬란하고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매혹적인 소리와 향기를 풍기리라. 나는 변했다. 

 

- 나는 식물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쓸데없는 움직임으로 양분을 낭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식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간들의 무지일 뿐, 그들도 필요한 것을 위해 그들만의 속도와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고 이동했다. 지상에서는 빛과 바람과 향기와 소리와 진동 등 인간이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온갖 매개체로, 땅속에서는 밝은 뿌리 눈으로 곤충 냄새와 토양의 밀도와 성분을 감지하고 화합물을 뿌리거나 흡수함으로써 서로 소통하고 주변을 탐험했다. 

 

- 이 몸은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진화하고 있었다. 

 

- "엄마는 외할머니의 소설이 절판되자 판권을 회수하고 다시 팔지 않았어요. 세상에 남은 외할머니 책은 이게 전부예요."

 

- "기억과 역사를 공유해도, 서로 다른 몸과 정신이잖아요."

 

- 그는 잠시 책 모서리에 담배를 걸쳤다. 아슬아슬했지만, 둘 다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핏줄에 흐르는 시간과 기억의 강을 거스르는 중이었다.

 

- 그 둘은 유리병 속에 있는 각기 다른 자기 자신을 보는 것처럼 서로를 보고, 이해하고, 기억과 경험을 공유했고, 각자 행동의 결과를 수용했다. 둘은 때로 싸우기고 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이 가지는 내적 갈등들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 정도의 차이였다. 

 

- 나는 아까처럼 그 불이 두렵진 않았다. 두려움 없는 그의 일부가 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아까처럼 아무렇게나 담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내 일부가 그가 되었으니까. 

 

- 향기는 우리에게 아주 편리한 신호전달법이었다. 그걸로 우리는 소리 내지 않고도 아주 멀리 있는 개체에게까지 변질되지 않은 생각과 의식을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응축된 향기로 모두가 하나인 양 동시에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세상과 격리된 듯 외부의 자극은 멀어지고 감각이 증폭되면서, 영혼 깊은 곳에 뿌리 속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 "그럼 요즘은 어떻게 해?"

 

- "된다는 걸 알잖아."

 

- "싫어."

 

-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미지의 세상 혹은 우리가 태어난 태고의 세상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 "거봐, 괜찮잖아."

 

- 이자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 <우물 속의 색채>

 

 


 

- 박성환 : 제1회 과학기술창작문예에서 <레디메이드 보살>로 단편 부문 수상했다. 

 

 

- 마치 시간마저도 얼어붙은 듯이 우리가 아무리 전진해도 결코 바뀌지 않았고, 우리는 슬슬 천천히 뒤로 미끄러지는 빙판 위에서 헛되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몽상에, 악몽에,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러던 중 마침내, 서남쪽에서, 영원한 침묵에 잠겨 있는 산맥들 사이로 거대한 빛의 흐름-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중간중간 비상 피난처를 세우고 끊임없이 위치를 측정하며 꾸준히 남쪽으로 향했지만, 당시 썼던 일지들은 알 수 없이 토막토막 끊겨 있고, 기록된 좌표는 우리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북쪽으로 치우쳤으며, 숫자들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과장되거나 오류가 보인다. 우리는 분명히 스키를 타고 썰매를 끌었지만, 기록된 것으로만 보면 마치 비행기나, 그에 필적하는 기계적 도움을 받은 것만 같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남극을 향해 갔는데, 왜 좌표는 서북쪽으로, 고원의 가장자리로 치우쳐져 있는 걸까?  

 

-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가 남극에서 가져온 낡은 일지와 기록들과, 나 자신의 기억과 악몽들로부터 당시 이야기들을 조금씩 복원해 보겠다. 이것은 결코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 것이나, 그렇다고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밤의 꿈, 혹은 밝은 대낮의 백일몽들은 모두,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기억과 기록으로 해명되지 않는, 해명할 수 없는 진실의 일말을 함축하고 있다.

 

- 오히려, 어쩌면, 이성의 궁극적인 기능은 우리의 자아가 낮 시간 동안, 밤에 목격한 세계와 우주의 진실로부터 안전해지도록 우리가 목도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편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재단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세계의 실재에서 애써 눈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그렇더라도, 나는 진실인 꿈을 선택하겠다. 

 

- 베르타는 얼음 표면 바로 아래를 바싹 파내서 온실 유리처럼 투명에 가까운 지붕 아래 남극의 태양이 곧바로 비치는 온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곳을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불렀다...

 

-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우리의 기지, 수다메리카 델수르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모여 벤조를 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 몇몇은 줄곧 베르타의 온실 가운데 우리가 옮겨 심은, 외계로부터 날아온 듯한 남극의 길고 축축한 바다나리 줄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남극점에 도착했다. 어제, 아니, 오늘, 아니, 내일? 페피타가 왜 여기 있지? 우리는 벌써 남극점에서 기지로 돌아온 걸까? 탁자 위에는 기다란 외계의 바다나리가 눕혀져 있고, 후아나가 메스를 들고 표본을 해부하려 한다. 

 

- 왜 아기를 가진 게 불쌍한 거지?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테레사가 물었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내가 말한다. 아마 딱해서 그런 게 아닐까? 임신한 줄도 모르고 이 험한 곳까지 따라왔으니?

테레사가 항의한다. 난 따라온 게 아니야. 나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에 온 거라고. 물론, 아기가 생긴 줄은 나도 몰랐지만!

 

- 남자들은 항상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르고 가르고 쪼개서 무엇인가 알아보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세상의 본질은 미지로 물러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은 심고, 생육하게 두고, 지켜보고 이해한다... 불쌍하다고 해서 동정한 것은 아니었다. 한 생명으로 또 한 생명을 꾸리는 일은 힘들고 고된 일이다. 우리들 중 몇몇은 그것을 겪어서 알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동정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감정은 공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공감은 낯선 이, 미지의-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감이다. 

 

- 혹한 속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가운데 그녀가 천정의 별들을 향해 가지와 잎을 활짝 펴고, 우리는 그 주위에 둘러앉아 그녀가 부르는 우주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도 있다. 과연 그게 꿈이었을까?

 

- 우리의 문자가 평면 위에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2차원적인 것이라면, 이들의 문자는 공간 속에 높이와 둘레, 부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베르타가 말했다. 중국인들이나 이집트인들의 그림 문자처럼? 완전 원시적인데? 그렇지 않아. 테레사가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반박했다. 우리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갖게 된 건 시간과 공간의 한계 때문이었어. 남자들은 추상적인 것들을 더 우월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아. 추상적인 건 궁색의 결과야. 절제를 고상한 것으로 숭상하는 것들도 모두 남성들의 이데올로기로 인한 산물이지. 감각적인 것, 풍요롭고 구체적인 건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들에 비해 열등한 게 아니야. 결국은 매체의 분량 차이일 뿐이지. 봐, 이 이미지들이 과연 문자로 축약된 우리들의 역사보다 더 열등한 걸까? 오히려 우리가 더 빈약한 것이 아닐까?

 

- 물론, 노예의 논리에 따라 스스로를 주류 백인 남성에 동조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끌어다 뒤집어씀으로써(전문용어로 동일시를 통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환상과 환각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거부했다. 그럼으로써 별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 전해주는 우리의 잊힌 옛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종족의 기원에 대해, 그럼으로써 현재 우주 안에서의 우리 종족의 정확한 위치와 지위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그 모든 것이 다만 환상일 뿐이었을까? 영원한 빙원 한가운데서 의미 없이 흩날리던 눈송이들 몇 개처럼? 

 

- 정신 차려, 우르술라! 기지가 뭐가 어쨌다는 거야? 여기는 빙하 한복판이라고!

 

- 도대체 뭐라는 거야? 기억에 의하면 - 어느 기억일까? 과거의 기억? 미래의 기억? 책에서 읽은 기억? 페피타나 조에 모두 카를로타의 제2팀에 속해 있었다. 속해 있다. 속해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팀인 돌로레스나 후아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왜 이리 추운 거지? 

 

- 기억은, 시간은, 별들의 바다나리 주변 동심원이 그렇듯이 우리 주위를 둘러싼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궤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남극 대륙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있는 것일까? 용광로에서 돌은 철이 된다. 차가운 극점에서 사람들은, 우리 여자들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 나는 아무 곳에도 다녀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곳을 다녀왔다. 명심하라.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는 진실이어야만 한다. 아니, 이 둘 사이에는 무수한 진실이 있다. 진실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 우리는, 우리 인류는 시간이 선형적이라고 생각하지 -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모든 역사 교과서의 연대표들은 기본적으로 1차원적이야. 선형이지. 하지만, 만약에, 그,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불쌍한 것의 두뇌가 인식하는 시간이, 마치 그녀가 베르타의 온실 안에 모사한 것처럼 3차원적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었다면?

 

- 모든 것이 다만 확률, 가능성의 정도의 문제였다면? 별들의 바다나리가 가로지르는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확률적으로 펼쳐져 있으나, 다만 우리가 그중 가장 좁은 일부분에 불행하게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그러나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 이야기의 수많은 다른 가능성이 무수히 가능해진다면? 

 

- 진실일 수 있을까? 사실일 수 있을까? 그것은 진실이었던 걸까? 사실이었던 것이었을까? 

 

- 그녀의 다른 자매들은 또 우리 인류에게 어떤 지혜를 나눠줄 수 있을까? 우리가 미처 다 듣지 못했던, 우주의 신비로운, 잊힌, 별들 사이의 노래를... 

 

- <공감의 산맥에서>

 

 


 

- 나는 주인공이 여성이길 바랐고, 러브크래프트의 주인공인 백인, 남성, 비장애인, 도시에서 태어난 인물들을 반대편에 두고서, 작가가 혐오하고 두려워한 미지와 맞서고 싶었다. 미지의 것,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기득권이다. 아무것도 쥔 것이 없는 자들은 언제나 변화와 혁명을 꿈꾼다. 그들에게는 현재가 공포다. 

 

- 러브크래프트를 읽고 또다시 써보면서 내 앞에 펼쳐진 건 현저한 내 안의 혐오와 공포였다. 그것들을 털어내고 마름질해 보기 좋게 만드는 과정이 무엇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너무 외로웠던 한 남자를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솔직히 털어내고 아름다운 미지와 공포로 채색할 수 있었던 힘에 경외를 느꼈다. 

 

- 러브크래프트는 흉폭하고 낯설고 더럽고 무섭고 기이한, 온갖 부정적이고 껄끄러운 것들을 시커먼 무의식의 기저에 두지 않고 말끔한 종이 위에 수놓아 빛을 쪼였다. 나는 내 더럽고 무지한 생각들을 차마 온전히 마주하기도 어려웠다. 정말 두려운 것은 미지를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알고 싶어 하지조차 않는 나였다. 

 

- 은림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공감의 산맥에서>는 러브크래프트의 장편 <광기의 산맥>에 등장하는 탐험대가 도착하기 전에 어슐러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탐사대가 먼저 다다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 짧은 단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1994년에 여성사에서 출간된 판본을 인용했습니다. 

 

- 박성환 

 

 

 

  

 

 

 
뿌리 없는 별들(Project LC.RC)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 인간의 깊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적이며 남성 중심적이기도 한 그의 낡은 관념은 전복적 시각으로 다시 썼다.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한 작품들은 오늘날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저자
박성환, 은림
출판
알마
출판일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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