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서영]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일루젼 2023. 5. 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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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서영
출판 : 알마
출간 : 2020.05.30 


       

딱히 순서를 정해두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순한 맛에서 매운맛 순으로 읽어나가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이건 다소 거리가 멀지 않나 싶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러브크래프트 다시 쓰기, 혹은 비틀어 쓰기를 보여준 글이라고 생각한다. 

 

무지해서, 뭘 몰라서, 사로잡혀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이고 저며들어서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된 존재는 눈에 보이기 전에 먼저 감각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정반합'이다. 어디를 정으로 두고 어디를 반으로 둘 것인가, 어디까지를 경계로 삼아 합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다르겠지만.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가 불편하다면 다른 시각에서 비슷하게 표현된 글들도 불편했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책을 덮으며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저 인간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다른 이들도 그런 인식으로 나를 대해주길 바라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독한 환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껏 내가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경험하고 체득한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면, 애초에 내가 보는 세계는 한쪽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비록 내가 친근감을 느끼는 시각은 조금 다른 쪽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누군가의 말처럼, '전인적 시선'이라고 표현되는 시각은 사실 '남성의 시선'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선을 경험해 보는 것도,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찾아가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러브크래프트가 이용(?)된 것은 상당히 재치 있는 아이러니다. 

 


   

- 슬의 마음은 내려앉았다. 슬의 표정이 어떻건 그는 계속 그 농담을 하며 파스타를 휘적거렸다. 

 

- 그와 헤어진 건 그런 기분 나쁜 농담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헤어질 때가 되어서 헤어졌다. 좋은 추억들이 없진 않았을 텐데 그를 떠올리면 슬은 아랫배가 괜히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 "다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 새세계 본점 건물 보수라니, 어디를 어떻게 보수하려는 건진 몰라도 기회였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을 보수한다는 건 혹여 회사를 옮기게 된다고 해도 이력서에 세 줄은 쓸 수 있었다. 회사를 옮길 계획은 아직 없었지만 사람이란 축적하고 성장해야 하는 법이다. 

 

- 슬은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금 점검했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걸 알게 된 게 있다면 계약을 따낼 때는 정장이, 점검을 할 때는 작업복을 입는 게 더 프로페셔녈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높은 구두를 신거나 짙게 화장을 하는 건 금물이었다.

 

- 말수는 줄이되 허리는 펴고, 편안하게 대하되 너무 자주 대답해선 안 된다. 믿음을 주는 표정과 말투,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 여러 번 해온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새세계 백화점이라고 하니 자꾸만 입에 침이 말랐다. 

 

- 백화점은 오로지 '사게 해야' 하는 공간이다. 인간은 매료되어야 구매하고, 매료되려면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오로지 매료되게 하는 것에만 온 힘을 다 쏟아부어도 사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 공간에서 악취가 난다면 사람들은 상품에 매료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대단한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공간이 상품을 완성하는 법이다. 

 

- 편안하게 살게 하거나 일하게 하는 것보다 사도록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이야말로 '일'이었다. 온갖 종류의 보수를 해보았지만 슬에게 기분 좋은 긴장감을 남기는 건 공간을 지나가는 인간의 마음을 홀리는 일이었다. 시간을 잊게 만드는, 다음 상품에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공간은 이를테면 마법이었다. 

 

- 외주업체까지 찾아서 수리를 맡길 무렵엔 누구라도 맡을 수 있을 만큼 냄새가 진동하고 있기 마련이다. 빌라건 사무 공간이건 마찬가지였다. 금이 가 있다 싶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도록 금이 가 있고, 줄눈에 물 때가 낀다 싶으면 색깔이 다 변하도록 끼어 있기 마련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춥거나 어마어마하게 덥거나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웬만해서는 통째로 해결해 줄 업체까지 찾으려고 들지 않는다. 

 

- "냄새가요, 나다가 말다가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슬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좀 더 설명을 해줄 것 같았지만 의뢰인은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슬은 의뢰인에게 받은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김유림, 본점 관리1팀장. 적극적으로 수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른 사람이지, 윗선에서 수리를 하라고 해서 부른 건지 확신할 수 없는 정도의 직급이다. 

 

- "그냥 그렇게 던져도 돼요? 이유는 말을 해줘야죠."

"그러니까, 내 말이요. 근데 지금 거기만 그런 게 아니라..."

김 팀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우물쭈물 줄어들었다. 거기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업체 하나도 던졌었다는 뜻이겠지.

 

- 하수 처리 시설은 접촉폭기였다. 도심 한가운데서 흔히 쓰는 방식이다. 물속에 공기를 집어넣어서 분해를 촉진하는 방법이었다. 탄산가스가 빠른 시간 안에 줄어드어서 냄새가 빨리 사라진다. 그렇게 친환경적인 방식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편리하고 도시적인 방식이었다. 어쨌든 냄새가 날 방식은 아니었다. 

 

- 전화를 받은 김유림 팀장의 목소리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소리가 느려졌다. 어색함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명백히 알아달라는 웃음소리였다. 

 

- 이 추운 날씨에 몇 번씩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데 미안한 기색도 없다고 투덜대며 슬은 사무실을 나섰다. 막상 거리에 나서 보니 하늘은 오랜만에 청량하게 맑았다. 겨울 하늘은 가을 하늘과는 또 다른 산뜻한 맛이 있다. 습기 따윈 하나도 없이 건조해서 햇빛도 얼음장처럼 깨끗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종소리가 섞인 음악이 들려왔다. 겨울다운 소리들이었다. 

 

- '왜 주차장을 안 만들었지?'

새세계 백화점 신관에는 지하 6층까지 주차장이 있었다. 하지만 본관에는 오직 승용차 두 대 놓을 자리가 옥내에 있을 뿐이었다. 리모델링을 할 때도 주차장을 새로 짓진 않았다. 지하에 주차장이 없는 대형 백화점이라니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신관에 도착할 때까지 슬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백화점들을 다시 꼽아보고 있었다. 

 

- "아, 그럼 그때는 바닥 공사를 한 거네요?"

"네."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시면 되겠다."

웃으면서 사이좋게 김 팀장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슬은 가져온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저렇게까지 건축 문서를 기밀로 다루는 경우는 사람이 죽었다거나, 돈 문제가 석연치 않다거나, 아래에 비자금이라도 숨겨놓았을 경우밖에 없지 않을까. 

 

- "올라오는 臭味가 심하여 㡷面을 原하게 하는 工事를 試行."

 

- "金개봉을 따라 바닥 안쪽을 들여다 본 中本은 그 자리에서 發作을 하여 세부란스(舊濟衆院)로 移送."

 

- 더로울 오자와 재앙 재자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앞 글자는 생전 처음 보는 글자였다. 슬은 인터넷 자전을 열고 마우스로 삐뚤빼뚤 글자를 따라 그렸다. 암컷 빈이었다. 빈오재. 뭔진 모르겠지만 여하간 바닥을 따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소리였다. 

 

- 그때, 발아래에서 찰박 소리가 났다. 

찰박? 날 리가 없는 소리였다. 대리석으로 된 백화점 구석에서 찰박?

 

- 세면대 조명은 고객용 화장실보다 훨씬 밝아서 피부결에 잔머리까지 환하게 보였다. 직원은 슬의 얼굴을 보곤 심드렁하게 다시 손을 씻기 시작했다. 너무도 서늘한 직원의 표정에 괜히 주눅이 들어 슬은 세면대로 시선을 내렸다. 직원의 손은 언제 피로 물들어 있었냐는 듯 깨끗하게 씻겨나간 상태였다. 심하게 손을 다친 줄 알았는데 손을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분명 피가 많이 묻어 있었는데... 아, 그제야 슬은 생리 중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직원은 이미 손을 다 씻고 대충 치마에 남은 물을 문지르면서 화장실을 나서고 있었다. 해명할 기회도 없이 슬은 남이 생리하는 데다 대놓고 피 묻었다며 설레발친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 슬도 대충 손을 씻다가 거울 아래쪽에 반짝이는 반사판이 있는 걸 발견했다. 반사판에는 음각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눈물을 흘린 직원은 반드시 얼굴을 체크하고 나올 것."

직원용 화장실이 세면대만 밝은 이유가 이거 때문이라면 좀 너무했다. 반사판을 씁쓸하게 보다가 슬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 신경을 써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원래 냄새가 나는 건지 이제 헷갈릴 지경이었다.

 

- 새세계 백화점에서 잡은 회식 장소는 천장이 높은 고깃집이었다. 어쨌든 새세계 백화점이니까. 팀원들이 약간 들뜬 표정으로 메뉴판을 훑는 걸 보고 슬은 그럭저럭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듬 한우가 7만 4,000원, 저것까진 아니라고 해도 뉴질랜드산 갈비가 4만 4,000원. 저거 정돈 시켜주겠지. 

 

- 모든 이야기는 김 팀장과만 하다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하 부장이란 사람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뵙네요. 하재홍이라고 합니다."

슬도 명함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 하 부장과 대각선에 앉으면서 재빠르게 김 팀장을 찾았다. 왼쪽 끄트머리 쪽에 앉아서 아예 하 부장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있는 걸 보아하니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하 부장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하 부장이 큰 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기 오삼불고기 대자로 다섯 개 주세요!"

흠칫 놀라서 하 부장을 봤는데 하 부장은 전혀 동요 없이 껄껄 웃었다.

"여기가 이 근처에서 아주 소문난 오삼불고기 맛집입니다." 

 

- 자리에 돌아오니 사람들은 슬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직원들과는 얼떨결에 멀리 떨어져 앉은 슬은 그냥 자기 앞에 있는 오삼불고기만 하염없이 씹었다. 옆자리의 다한도 마찬가지였다. 슬은 천천히, 하지만 야무지게 움직이는 다한의 손을 보면서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워낙에 매출을 잘 뽑다 보니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다들 열외로 봐주는 모양이었다. 

 

- 어느 오전, 지친 몸으로 1층으로 올라온 슬은 지하와 다르게 1층 조명이 너무도 맑고 깨끗해서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얼른 나가려고 마음먹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정다한 씨가 눈에 들어왔다. 웃는 얼굴에 천장처럼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해쓱해 보이던 얼굴은 환한 조명 아래에선 티가 나지 않았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미소에 얼떨결에 걸음이 멈췄다. 다한 씨는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일처럼 웃고 있었다. 

 

- 만면으로 웃으면서도 다한 씨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슬은 다한 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렇게 환한 얼굴로 하는 말은, 향기 나는 연필 끝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라든가 보드라운 벨벳 천의 끄트머리를 만지는 촉감, 초겨울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이 솜털 위에 포근하게 떨어지는 광경과도 같겠지. 슬은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다한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섰다. 환한 조명이 여기저기로 눈발처럼 흩날렸다. 

 

- "묘안석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캣츠아이라는 보석인데, 이건 그와 비슷하지만 좀 더 그레이드가 높은 호안석이라는 보석입니다. 호랑이의 눈을 닮았다고 해서 호안석이에요. 나비 모티브에 호안석을 넣으니까 마치 호랑나비처럼 보이죠? 실제로 숲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에요."

고객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다한이 내미는 대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에도 클로버가 있기는 한데, 보시다시피 색깔이 다릅니다. 이건 마더오브펄이라는 원석이에요. 조개 몸 안에서 생기는 진주 같은 건데, 이렇게 움직이면, 보세요. 무지갯빛 홀로그램이 나오는 것 같지요?"

"이건... 얼마예요?"

"가격은 이렇게 됩니다."

다한은 종이를 하나 내밀었고, 고객은 종이를 받고 몇 초간 고민하더니 다한에게 종이를 다시 내밀었다.

"네크리스까지 같이 주세요."

 

- 파리한 얼굴에는 오늘따라 파랗게 실핏줄이 올라와 보였고, 푸석한 머리카락과 피부 위로 그날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미소가 보였다. 분명 눈코입이 제대로 붙어 있었는데, 어쩐지 얼굴이 뒤집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눈코입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몸의 경계들이 무너지는 듯한 미소였다. 

 

- "우리가 죽인 우리로 구성된 절망의 신이시여. 우리의 절망과 고통이 고여서 드디어 이 자리에 임하셨군요. 어서,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 슬은 사고하는 자신과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이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었다. 분명 그 자리에 서서 다한과 촉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바라보는 눈이 이미 자신의 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시선도 돌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채, 이 불길하고 부정한 광경의 증인으로서 강제로 세워졌다. 이대로 영영 신체를 잃게 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점이 슬프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슬도 이 냄새의 일부라는 걸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소문을 전해준 이는 슬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슬은 그가 왜 소문을 전해줬는지도 알고 있었다. 슬이 결혼 소식을 전하자 너나없이 진심으로 축하해 준 것도 무엇 때문인지 뻔했다. 

 

- 발목이 보이는 드레스 하나와 머메이드 드레스 하나를 들고 슬은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어 걸어놓으면서 이 장면이야말로 모든 영화와 드라마에 늘 나오는 장면이라는 걸 생각했다.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남편 될 사람은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신부의 놀라운 아름다움에 대해 칭송하지. 로맨스가 들어 있는 모든 영화에는 반드시 나오는 장면이다. 이전에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가 환한 조명 아래서 백조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뻗는 히로인. 그녀를 지키는 히어로는 꿈결 같은 변신에 환호한다. 물론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내면이지만, 꿈결 같은 변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자. 고통들을 포근하게 느끼면서 슬은 두 번째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아마 준규는 두 번째 드레스에는 그렇게까지 큰 환호를 하진 않을 것이다.  

 

 


 

- 작년 여름, 오사카의 카이유칸에서 점액질의 신체를 드러낸 해양 생물들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상상해 왔던 '괴물'의 모습은 거기에 다 있더라고요.

 

- 러브크래프트는 호러 서사의 오랜 영감입니다. 인간보다 우등한 지적 생명체들은 오징어나 낙지처럼 촉수를 뻗어오고, 인간들은 자신의 하잘것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릴없이 절망하고 패배하지요. 인간이 제 나름대로 지식이랍시고 쌓아온 것들은 그레이트 올드 원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에서 크리처의 외모를 점액질의 신체 내부가 드러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흘러내릴 것 같은 안구, 끈적이는 피부. 혐오감은 위협감에서 옵니다. 점액질이 드러난 존재는 높은 확률로 '오염되었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 빈오재는 많이들 짐작하겠지만 애너그램입니다. 뻔한 애너그램이지만 맞춰주시면 작가로서 기쁠 거예요.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한국의 대표 SF 작가들이 오마주와 전복으로 다시 창조하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김보영, 김성일, 박성환, 송경아, 은림, 이서영, 이수현, 홍지운 그리고 최재훈 9인의 작가가 호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오마주하며 2020년 우리의 현실 속 공포와 경이를 그려냅니다.
저자
이서영
출판
알마
출판일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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