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연] 매일을 헤엄치는 법 - 이연 그림 에세이

일루젼 2023. 5. 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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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연
출판 : 푸른숲 
출간 : 2022.07.20 


       

 

 

 

<겁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10가지 방법>. 

 

내가 처음으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고 느끼게 해 준 영상이었다. 나도 저런 식으로 종이 위에 선을 긋고, 색을 입히고, 내가 보는 것을 남들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진심 어린 부러움을 느끼게 해 준 영상.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의 손끝을 훔쳐 보며 생각했다. 

'나는 저건 안 될 거야.'

나의 위치는 그리는 자가 아니라 감상하는 자라고 생각했고, 그나마도 선과 면과 색보다는 활자의 세계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 번도 괴로워한 적이 없었다. 잘 그리고 싶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랬던 내게 그림이란 걸 그려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선물한 것이 추천 영상에 떠 있던 <겁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10가지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울림이 내게만 전달되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일을 헤엄치는 법>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그 영상을 계기로 일주일 만에 급속도로 채널이 성장하고 있다며 경악하는 저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순간 즈음을 나 또한 함께 했다는 것이 어쩐지 찡했다.) 

 

처음 그 영상을 본 뒤로 실제로 미술을 배우고 그림을 그려보기까지는 거의 3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한 순간'이 그 지점에 존재했기에 결국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두려움 없이 원하는 것을 그려볼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게 즐겁다는 것도.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무슨 색을 쓰고 물감은 어떤 걸 쓰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영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손만 보여주고 목소리로는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연이 좋았다. 어쩐지 '시키는 대로' 그리라고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 사람처럼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면 자신만의 그림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 조금이라도 직접 그림을 그려본 지금은 이연의 지난 날들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잘 될' 이를 알아본 나 자신의 안목(?)을 칭찬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 당시의 내 모습과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삶을 헤엄치는 법을 말하는 <매일을 헤엄치는 법>을 읽는 동안, 나 또한 나의 과거들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자의 표현에 동의한다. 다시 돌아가라면 너무 지질하고 힘들었기에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결국 다시 하라고 해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믿는다. 그 모든 것들의 가장 최신 버전인 지금의 내가 가장 좋다. 

 

'내가 내가 되기까지의 길이 너무도 멀었다.' 

 

그 길의 어느 어두운 지점에 서있을 이들에게. 

그 길을 모두 다 걸어 지금은 스스로와 함께 걷는 이들에게.

 

이 책을 함께 읽자고 권하고 싶다. 

 


   

- 2018년,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해 긴 시간 디자이너로서 일해오던 회사를 나왔다. 손에 쥔 것은 용기뿐이었기에 가난하고 외로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는 한 해를 보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기회를 가져다준 그 해 사계절의 기억을 엮어 첫 번째 오리지널 그림 에세이 <매일을 헤엄치는 법>을 그리고, 썼다.

 

- 현재는 1인 회사 '이연 스튜디오'의 대표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소속되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개개인이 남이 아니라 진정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자,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 강연자로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인생을 헤엄치는 법을 나누고 있다.

 

- 2018년, 스물일곱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화마에서 나를 구해줄지도 모르는 스프링클러를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막아버리는, 이상한 망상에 시달리는 겁이 많은 사람. 

 

- 한 TV 프로그램에서 박동신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인간은 척추동물이지만 마음은 갑각류와 같아서, 껍데기를 벗어던진 가장 약해진 그 순간에 비로소 성장한다."

 

- 내게는 2018년이 그런 시기였다. 한평생 사회라는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자라온 내가 모든 소속을 벗어던지고 오직 내 이름만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다. 치열한 1년을 보내고 나는 끝내 살아남았다. 너절해진 집에서 5년간 머물다 떠나는 날 매트리스를 치워보니 바닥 색이 노랗게 변해 있었다. 매트리스를 받침대 없이 놓은 탓에 통풍이 되지 않아 변색된 것이다. 이사를 도와주던 친동생이 그런 말을 했다. "누나는 악성 세입자였을지도 몰라." 

 

- 나는 이 5평 공간을 지긋지긋하게 여겼지만 이곳은 나를 온전히 견뎌내 주었다. 껍데기를 벗어던진 가재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지켜주는 비좁고 어두운 바위틈처럼 말이다. 

 

- 나의 20대는 가난하고 치열했기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다시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제 와서 지난날을 말하냐고? 세상이 씌운 껍데기를 버리고 바위틈에서 진정한 자신을 탐색하려는 이들이 분명 여럿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나도 그 시절을 지나 지금 이 모습이 되었다고,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될 거야."

- 겨울 - 

 

- 내가 사는 이 세계는 말이야. 멀리서는 평화로운 온실처럼 보여. 맞지 않는 온도에 나는 이토록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지.

 

- "퇴사하면 뭐 할 거야?"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 기분이 이상하다. 

"짐이 적네."

나는 예전부터 여기를 떠나고 싶었나 봐.

 

- 확신이 없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책임질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 인간은 필요한 무언가가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필요 없는 게 삶을 어지럽혀서 괴로운 거라고 생각해.

"이럴 때는 청소가 필요해."

퇴사도 다르지 않다. 삶에서 조금 큰 청소를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담담해진다.

 

- 공원에 산책을 갔는데 나무 사이 벤치 한편에 숲속 도서관이 보였다. 그것은 낡은 지붕을 가진 나무 책장이었다.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모양새로 닫혀 있었는데 설마 그냥 열릴까 싶어서 쓱 만져봤더니 아무런 열쇠도 필요 없이 스르르 열렸다. 시민의 양심에 의해 운영되는 작은 도서관이었던 셈이다. 책장 속 책들은 전부 햇빛에 색이 바래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 도서관에 관심 없는 것을 증명하듯 책의 상태는 대체로 꽤 온전했다. 책등을 쭉 살펴보다가 데일 카네기의 <카네기 인생론>이 꽂혀 있어서 꺼내 들었다.

 

- "너는 데일 카네기가 되어라. 다른 사람의 한계에 신경 쓰지 마라. 너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다."

 

- 우리는 자기 자신일 뿐이기에 남이 될 수 없고, 그것만으로도 몹시 충분하지만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 디자인을 6년이나 하고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디자이너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다. 언제나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흉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래도 나름 대기업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으니 흉내치고는 잘해온 셈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피로는 온전히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그 피로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각뿐 아니라, 나만 진짜가 아니라는 부끄러움에서 왔다. 이따금 동료들에게 디자인이 재미있냐고 물었다. 디자인을 잘하는 동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디자인이 너무 재미있다고. 그 대답이 내게는 너무나 슬프게 들렸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디자인이 재미없었다. 

 

-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도 지금의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타인의 코골이를 듣는 대신 혼자서 이기적인 숙면을 취하고 싶고, 누군가와 생활공간을 나누기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방에서 일관된 컨디션으로 지내고 싶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결혼이라는 건 영영 나의 일부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런 일이 너무 겁나는 사람이다.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을 정도로 내게는 그런 미래가 두렵다. 남들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혼율과 출산율이 줄어드는 사회 행태를 보아하니 결혼이라는 게 꼭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내가 되는 일'은 더욱이 아니라는 예감이 든다. 

 

- 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다. 흉내를 그만두고 내가 나일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 이 시간에도 회사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 증거의 일부였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회사에 소속될 필요는 없던 것이다. 그때부터 질문이 조금 더 날렵해졌다. '그러면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 외부에 소속이 없는 것에 너무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가 만든 세계가 생각보다 잘 맞을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이연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 일들을 하면서는 단 한순간도 흉내를 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 그런 일을 하면 된다. 남들 보기에 멋진 일을 흉내 내는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맞는 재미있는 일을 해나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나에게 소속된다는 건 그런 일이다. 

 

 

 

 

- 라디오레드의 노래 'Creep'을 들으면 꼭 내 이야기 같다. "Fuckin' special"한 사람도 찌질이 시절이 있었을까?

"나도 몇 번은 누군가에게 반짝여 보였겠지."

 

 

 

- 타인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삶을 사느라 몇 개의 계절을 보낸 건지. 

'내게로 오는 길이 너무도 멀었다'

"늦어서 미안."

"기다리고 있었어."

 

- 이게 내게는 꽤 큰 모순으로 느껴졌다. 사회생활을 하며 세계는 전보다 넓어졌는데 정작 하루의 반은 아주 고립된 채로 지내게 된 것이다. 쏟아지는 세상의 요구만큼 그에 흔들리는 내면의 소리도 점점 커졌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 우는 내 얼굴을 보며 마음속의 내가 슬퍼하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를 달랬다. 미안. 앞으로는 자신의 말을 더 많이 듣고, 존중하고, 사랑해 줄게.

 

- 그 이후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진심을 다해 물었다.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 행동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 먹는 음식과 습관이 바뀌었다. 슬픔이 점점 옅어지고 생기 있는 미소가 돌며, 나는 나다워졌다. 

 

- 종종 누군가 이런 참견의 댓글을 단다. '당신은 너무 기준이 높아서 연애하기는 힘들 거야.' 

상관없다. 연인쯤이야 없어도 된다. 지금의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연인이 없는 스스로를 반쪽으로 여기지 않고, 나 혼자만으로도 온전한 충만을 느낀다. 또 솔직히 이런 자신감도 있다. 나처럼 혼자서도 당당하고 선명한 사람이 정말로 매력적이라는 확신. 그리고 염려와 달리 항상 인기가 많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 별안간 선생님이 내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숨이 찰 때는 산소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이산화탄소가 몸속에 많은 거니 도리어 내뱉어야 해요."

아. 어쩌면 내 삶도 뭔가가 부족해서 숨이 찬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내가 뱉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덜어내야지. 내 안에 가득한 이산화탄소를.

 

 

 

"나의 다정은 후천적이야."

- 봄 -

 

 

- "기억력은 머리가 똑똑한 거랑 관련 없을지도 몰라. 오히려 다정함에 기반하는 거 아닐까? 왜, 너처럼 사소한 일이라도 기억을 잘하는 사람들 있잖아."

머리는 좋지만 무심히 다 잊는 사람도 있고.

 

- 사실은 그를 위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칭찬이 마냥 좋았다. 그런 멋모르고 배운 다정과 지나고 보니 다정으로 기억되는 일들. 

 

- 마음의 온기. 나의 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천적이다. 받은 사랑에서 배웠다. 

 

- 다정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그런 나도 전에는 다정에 의식적인 훈련을 필요로 했는데 현재는 자율신경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딱히 큰 자각 없이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 평범한 사람이 다정해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그리고 다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 감사하게도 나는 다정한 사람들 속에서 자랐고, 후에는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두 가지 행운을 모두 얻게 되었다. 이것을 나는 후천적 다정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천적으로 다정을 익히고 다듬는 것 같다. 

 

- 다정은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받기 전에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거나 낯 뜨겁고 부끄럽다. 하지만 자꾸 받다 보면 그게 얼마나 따듯하고 좋은 건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걸 알게 해 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고 싶어 진다. 그렇게 다정을 나누는 것이다. 강형욱 훈련사의 이 말이 좋았다. "강아지에게 용서를 해주세요. 용서를 받아본 강아지가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게 돼요."

 

- 나는 10대를 그림을 그리는 데 다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과 사랑에 빠졌다.

"더 멋진 선을 긋고 싶어."

좋은 선을 긋기 위해 훈련의 일종으로 연필을 쓰지 않았다.

'그림을 자꾸 지우다 버릇하면 그림이 늘지 않아. 절대 실수하면 안 돼.'

그렇게 5년, 지우개를 안 쓴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 왜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나는 다시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 내가 죽으면 시신 처리는 어떻게 할까?

나는 땅에 묻히고 싶지 않다. 

세상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필요하다. 

 

- 내가 그리우면 그림이나 일기를 찾아주면 좋겠다. 그것들 역시 진정 나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 영화 <코코>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죽은 후, 이승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되면 그 영혼은 망자의 땅에서도 영영 사라지고 만다. 

 

- 그래서 그림 말고도 목소리와 글 등 아주 많은 것들을 남기고 있다. 그것들이 종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예쁜 흔적으로 남길 바라는 욕심이 있다. 그게 내가 세상에 머물렀다는 증거가 된다. 

 

- 인간으로서 솔직한 소망을 풀어놓자면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오래 기억되고 싶다. 그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다. 내게 산다는 의미는 기억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작품을 만든다. 나의 조각을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그 조각이 사람들 마음속에 남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 수영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단순하다.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다. 힘을 주는 구간과 힘을 빼야 하는 구간을 잘 구분해야 한다. 

물을 잡을 때는 힘을 빼고, 물을 밀어낼 때는 힘을 준다.  

 

- 마침 첫 회사의 퇴직금을 털어서 간 여행이었다. 퇴직금으로 월세를 내도 부족할 판에 포르투갈에 와서 세상의 끝을 기어코 맨눈으로 보고 있다니. 

 

- 회사는 안 다니지만 뭐라도 열심히 해보려고 수영을 배우는 등 그래도 다닐 때 못지않게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 애가 하다 하다 유럽의 최서단까지 온 것이었다. 그 사실이 이 아득한 바다만큼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다. 

 

-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곁에 머물 사람은 네가 그 어떤 짓을 해도 남아."

맞는 말이다.

 

- '지나치게 사려 깊을 필요는 없어.'

'착하지 않은 것도 너야.'

'그런 너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 사는 건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일이라고, 누가 그랬었지.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심박이 빨라진다. 귀를 기울이면 이내 잠잠해진다.

 

-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별안간 대낮에 매트리스가 젖어버린 것이다. 응? 멀쩡한 매트리스가 왜 젖어?

 

- "이게 뭐예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 그때 '정상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때의 폭염과 세탁기, 에어컨 고장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간 가난했던 일상도 그때에 비하면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혼자 혼이 나간 사람처럼 되뇌었다. 

정상화... 정상화하고 싶어.

 

- 지금은 모든 것이 그때의 기준으로 보건대 정상을 넘어 사실은 호사스럽다. 세탁기에서 물이 넘쳐도 상관없다. 물은 베란다 배수로로 흐를 것이다. 에어컨이 고장 나도 괜찮다. 여차하면 호텔에 머물 수 있는 돈이 있다. 냉장고 전기가 끊겨도 괜찮다. 밥을 사 먹을 돈도 충분하다. 2018년에는 모든 게 안 됐다. 불행을 막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 '불행해도 언젠가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막연한 위로를 하고 싶지 않다. 가난은 확실히 겪어본 이만 아는 고통이고, 이건 말뿐인 위로 하나로 해결이 안 되는 슬픔이다. 그럼에도 위안 아닌 위안을 건네자면, 그건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득바득 이를 갈며 돈을 버는 편이 낫다. 그게 슬픔을 막는 방법이다. 다들 스스로를 가난 속에 머물러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어떤 슬픔은 단순히 가난 때문에 생긴다.

 

- 잘 나아가고 있는지 헷갈릴 땐 푸른 타일을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려본다. 

'나는 멈춰 있지 않아.'

그거면 된 거다.

 

 

 

- 고독의 밑바닥을 똑바로 주시하고자 한다. 외로워지라고, 지루해지라고, 슬퍼지라고 내버려 둔다. 

그러면 슬픔은 가라앉고 슬픔보다 가벼운 나는 곧 수면 위로 떠오른다.

 

 

 

 

- 나는 종종 힘든 일을 스스로에게도 비밀로 한다. 그중 한 방법이 일기장에 날짜를 적지 않는 것이다. 

비밀로 할까 말까?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기에 달렸다. 

 

- 한 가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음악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 그래, 애초에 그건 너무 거창한 일이지.

나는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지? 무슨 소용을 바라고 있지?

 

- 나는 부디 나 자신이 명료해지기를 바란다. 의미 없는 일에 미련을 두거나 타인이 바라는 모습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 "내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방금 어떤 표정이었지? 하고 떠올리면 눈앞에는 보고 싶은 장면을 뺀 나머지 풍경이 나를 감싼다.

 

 

 

 

- 온통 내 선택들로 이루어진 내 방을 구경한다. 

이런 사람이구나. 

 

- 얇은 카드지갑. 그토록 많았는데 다 치우고 남겨둔 여름과 겨울의 향수. 

적어지려고 노력했구나. 

 

- 취향이 엿보이는 책장. 심플한 찻잔. 

나를 설명하는 것들.

 

 

 

 

- 친구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잔가지를 잘 치는 거야. 가지가 너무 많으면 나무가 옆으로만 자라고, 방향을 잃거든. 나는 옆으로 커지는 나무가 아니라 높고 곧게 자라는 나무가 되고 싶어."

 

- 많은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나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그녀의 말에 모든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원하지 않는 잔가지를 잘라내자. 그러면 보인다. 내가 무엇을 나로 설명하고 싶은지, 어디로 자라고 싶은지, 어떤 모양의 나무가 되고 싶은지. 잔가지는 중요한 가지에 갈 영양분을 빼앗아간다. 그래서 요즘은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도 하지 않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지낸다.

 

- 아래는 내가 자른 잔가지 목록이다.

'출퇴근, 지나친 음주, 무분별한 악플, 인스타그램 중독, 스스로 향한 비난, 불평만 쏟아내는 사람들, 하기 싫은 광고...'

 

- 원리는 단순하다. 불필요한 것을 자르면 잔가지로 누수되던 에너지가 내가 원하는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한다. 

 

- 앞으로도 성실한 농부처럼 열심히 가지를 잘라낼 것이다. 이게 내가 삶이라는 정원을 돌보는 방식이다. 

 

- 뭐 어쩌겠어. 겨울이 영영 오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지도, 영생하고 싶지도 않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계절이 순환하는 것이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나는 것이니까. 너무 미리 슬퍼할 필요 없이 지금의 찬란한 녹음과 시간을 감사히 여기면 된다. 그게 삶의 허무를 줄이는 일이다. 대신 유한한 아름다움을 지켜보자.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그 가짓수가 적거나 수명이 정해져 있다. 

 

- 모든 것이 영원한 세상에 과연 아름다운 게 있을까? 아름다움을 누리는 만큼 허무는 그에 따르는 필수적인 감정이다. 의미로만 가득한 삶은 되레 무겁지만 않은가.

 

- 정말 상급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실력을 갖게 될까?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고통은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선택한 고통이라 생각하며 하염없이 수영을 했다. 

 

 

 

 

 

 

- 억울하게도 인간은 삶의 가치를 모를 때 가장 귀한 시간을 살게 되어 있다. 

삶도 수영과 같을까? 

저항을 줄이면 편하게 멀리 갈 수 있을까? 

바늘과 같은 유선형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땀과 노력이 필요할까? 

나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 

딴생각을 하면 그새 수영이 느려진다. 

 

- 강동원이 인터뷰 문장이 좋았다.

"저는 제가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잘할 수 있어."

나도 그런 믿음으로 수영을 한다. 

 

 

"나는 나를 지킬 거야."

- 겨울 - 

 

- 지금의 삶보다 나을 게 없는 회사라면 굳이 다닐 이유를 찾을 수 없다. 

 

- <그랑블루> 생각이 난다. 물 아래에 있으면 물 위로 올라갈 이유를 찾는 게 어렵다고.

 

- 지금 내 삶도 그렇다. 평온한 이 물 밑에서 생각한다.

굳이 저 위로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기도 하다. 그게 내 삶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 시절을 지금은 가장 값지게 느끼는 이유다. 돈이 전부였다면 이 시절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기는커녕, 마치 사라진 내 싸이월드처럼 삶에서 도려냈을 것이다. 

 

- 돈이 정말 전부라면 사람들은 돈을 꽁꽁 안고 살지, 그걸로 무언가를 교환해서 살 리가 없다. 세상에는 돈만큼 귀중한 것이 아주 많이 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슬픔을 막을 수 있고, 귀중한 무언가를 상당수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 이 시절에는 지금의 나를 아주 부러워했고, 지금의 나는 이때의 나를 종종 그리워한다. 

 

- 그리고 또 되돌아보면 너무 놀라운 게, 이 시절의 내가 경험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통찰력이 꽤 좋았다는 점이다. 이때의 내게 배울 점이 많다. 그중 하나가 기꺼이 실패하겠다는 마음이다.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실패를 전부 받아들이고 용서해 줄 마음을 먹었다. 

 

- 그 시절을 지난 후에 내가 얻은 것은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 돈이 없으니 직접 요리를 해 먹어서 요리를 꽤 잘하게 되었다. 가난한 시절에 곁에 머물러주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림 말고도 돈을 벌 수 재주가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5평 방이 끔찍하지만 월세 절약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다 해봤기 때문에 혹여나 실패해서 돌아간대도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나의 바닥이 거기였다. 내 삶의 심해에서 수압을 견디면서 나는 단단한 껍질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걸 젊을 때 해봤다는 것이 의의가 크다. 이렇게 살아도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20대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지질한 것이 용서된다. 

 

- 그때의 나에게 돌아간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잔뜩 펼쳐질 거야. 한 골목만 지나면 바로인걸. 훗날 너는 작가가 되어 서 이 날들을 책으로 엮게 된단다."

 

-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미련이 적다. 물건을 잘 버리고, 사람을 잘 끊고, 거절을 잘하고 남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 나와 달리 세상에는 거절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거절 특강'을 해보는 건 어떨까. 

 

- 하지만 가르쳐야 하는 건 거절이 아니다. 포기하는 방법이다. 

 

- 나는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나를 자주 선택하곤 한다. 

그게 별거 아닌 나의 비법이다.

 

- 이 길 위에서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것은 구겨지지 않은 나였다. 정해진 삶의 트랙에서 벗어난 내 모습이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고 꽤 반듯하다. 

 

- 하나씩, 희미한 바람만 남기고 전부 떠났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은 그 비둘기가 떠난 자리에 찾아온 것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때의 이별을 기꺼이 축복이라고 생각해.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이연의 최신판이 언제나 마음에 들거든. 모든 기억과 경험들을 다 안고 있잖아. 지금은 곁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그 추억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관용을 베풀 수 있어. 곁에 머물러주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 구독자가 200명인 단란한 나의 유튜브 채널. 어느 날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림을 그릴 때 망칠까 봐 겁이 나요.'

나는 겁이 날 때 어떻게 했더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나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영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겁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10가지 방법>.

 

- "생각보다 반응이 좋네."

"뭐지? 조회수가 갑자기..."

그 한 편의 영상이 내 삶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 손이 떨리고 심장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갑자기 잘됐을 때 대처 방법'

이런 게 검색해서 나올 리가 없잖아!

나는 삶의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다.

 

- 불행이 한꺼번에 오는 것처럼 행운도 한꺼번에 온다.

 

- "언니, 저는 사실 유튜브를 계속하고 싶은데 이 회사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 회사, 꼭 들어가. 너는 거기 일주일만 다녀도 돼. 들어갔다는 게 중요해. 네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할 때도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게 너를 더 멀리 가게 할 거야."

 

- 울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작은 것을 지키려고 삶을 낭비하는군.

근데 그게 아깝지 않단 말이야.

 

 

물을 잔뜩 먹어도 괜찮다. 

나는 이제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이니까.    

 

 


 

 

- 2018년 11월, 이연 유튜브 채널 개설

- 2019년 3월, 스타벅스 커피 코리아 디자인팀 합격

- 2019년 5월, 10만 구독자, 실버버튼

- 2020년 7월, 구독자 40만, 퇴사

- 2020년 8월, <세바시> 출연

- 2020년 11월, 모나미와 컬래버레이션

- 2021년 3월, 첫 책 출간,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

- 2021년 10월, 첫 개인전

- 2021년 12월, <Let's draw> 드로잉 키트 론칭

- 2022년, 70만 유튜버가 되었다. 15평 개인 사무실이 있다. 수영 대신 자전거로 멀리 다닌다. 

 

 

- 대학을 다닐 때 졸업 작품으로 만화를 그렸다. 그때 다짐했다. '앞으로 다시 만화를 그리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때 그 책을 편집하면서 책도 만들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패키지 수업을 들을 때도 절대로 패키지 디자인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수강 신청 목록에 있는 영상 수업을 보면서 삶에서 영상을 만질 일은 없을 테니 이 수업도 듣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나를 비웃듯 나는 정반대로 살고 있다. 

 

- 정말 순수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나는 이 시절의 경험과 영감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용기가 될 거라 믿는다. 어둠 속을 묵묵히 걸었던 나의 27세 같은 시절이 여러분에게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현재일 수도 있다. 언제여도 상관없으니 그 시절의 나 자신에게 헌사를 보내는 것은 어떨지. 

 

- 몸이 아팠지만 수영 학원을 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나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잘 해낼 줄 알았어. 고마워."

 

- 언젠가 반드시 그리울, 찬란한 시절 속 당신에게 인사를 보낸다.  

   

 

 

 
매일을 헤엄치는 법
80여만 구독자에게 주체적인 삶의 태도와 자세를 전해온 독보적인 미술 크리에이터 이연의 그림 에세이 《매일을 헤엄치는 법》이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2018년, 제 삶을 되찾기 위해 퇴사를 감행한 스물일곱 살 이연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이연의 오리지널 캐릭터로 그려낸 첫 번째 책이다. 지금의 이연을 만들어준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찬란했던 1년을 담아낸, 그 어디서도 공개된 적 없는 이야기가 두 버전의 만화와 에세이로 펼쳐진다. 흑백 만화에서는 퇴사 이후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계절 흐름에 따라 전개되며, 블루 만화에서는 건강을 되찾으려 찾은 수영장에서 발견한 빛나는 삶의 태도와 성찰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를 보다 긴 에세이들로 자세히 풀어냈다. 왜 하필 그토록 외롭고 가난했던 1년을 되돌아보냐는 질문에 이연은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씌운 껍데기를 버리고 바위틈에서 진정한 자신을 탐색하려는 이들이 분명 여럿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나도 그 시절을 지나 지금 이 모습이 되었다고,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바른 자세를 잡는다면 누구든 매일을 헤엄칠 수 있다. 〈매일을 헤엄치는 법〉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바닥을 딛고 떠올라 저만의 방향으로 더 높이, 더 멀리 헤엄칠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전해줄 것이다.
저자
이연
출판
푸른숲
출판일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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