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유하] 세상의 모든 저녁

일루젼 2012. 2. 1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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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저녁 (양장)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유하
출판 : 민음사 200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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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민음사 판본으로 읽게 되었다.
결과론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순서로 읽게 되어 정말 기쁜 일이다.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사는 것이 그저 고달프고, 모든 게 귀찮고 싫은 그런 순간이었다.
 
큰 기대 없이 펴든 시집이 속삭여주는 단어들이 몽롱한 머리에 너무 좋아서,
고개를 가로저어가며 같은 줄을 몇 번이고 읽고 다시 읽은 시집이었다.
문구들마다 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움 하나로 폐허를 견디는 것은 나의 일일 뿐]

[환멸은 나무 껍질 같아서 떼어내면 다시 새살이 돋는구나]


'아, 이런 게 시지!!!'

하고 만족하고 돌아왔으니, 참으로 좋은 때에 만난 좋은 책이었다.
앞으로 갈수록 점점 더 좋은 글들, 덮으면서 마음 속 깊이 기뻐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리라 생각하면 무척 설렌다. 
내가 읽을 것들이 무한에 가깝게 존재한다는 것은, 두려우면서도 황홀한 일이다.



[구름의 운명]

푸른 보리밭을 뒤흔들며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처럼 만져지지 않는 사랑이 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지나간 바람은 길을 만들지 않으므로 상처는 늘
송사리 눈에 비친 오후의 마지막 햇살
그 짧은 머뭇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탱자나무 꽃은 온통 세상을 하얗게 터뜨리고

산다는 것은 매순간 얼마나 황홀한 몰락인가
육체와 허공이 한 몸인 구름,
사랑이 내 푸른빛을 흔들지 않았다면
난 껍데기에 싸인 보리 알갱이처럼
끝내 구름의 운명을 알지 못했으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 1]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 라이도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젖은 노을 속으로 가는 시간]

비가 세상을 내려앉히면
기억은
노을처럼 아프게 몸을 푼다
부리 노란 어린 새가 하늘의 아청빛 아픔을
먼저 알아 버리듯
어린 날 비 오는 움막이여
왜 노을은 늘 비의 뿌리 뒤에서
저 혼자 젖는가
내 마음 한없이 낮아
비가 슬펐다
몸에 달라붙는 도깨비풀 씨 무심코 떼어 내듯
그게 삶인 줄도 모르고
세월은 깊어서
지금은 다만 비가 데려간
가버린 날의 울음소리로 비 맞을 뿐
아득한 눈길의 숲길, 말들의 염전
시간은 길을 잃고
나그네 아닌 나 어디 있는가
추억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쥐어짜
빗방울 하나 심장에 얹어 놓는 일이여
마음이 내려앉아 죽음 가까이 이를 때
비로소 시간의 노을은 풀어 논 아픔을 거두고
이 비의 뿌리 한 가닥
만질 수나 있을 것인가





덧.
이 시인 유하가 영화감독 유하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비열한 거리', '쌍화점', '하울링'의 감독.
솔직한 심정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잠시 말을 아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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