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필립 빌랭] 포옹

일루젼 2012. 2. 13.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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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필립빌랭 / 이재룡역
출판 : 문학동네 200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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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의 맨 뒤 역자의 글을 읽다보면 '필립 빌랭'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최초 발표만으로도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글은, 몇 년 뒤 '필립 빌랭'의 '포옹'이, 그것도 '아니 에르노'와 거의 유사한 문체로 발표되면서 다시 한 번 큰 논란에 휩싸인다고.

이 책 역시 80page 정도의 길지 않은 글이었다. 마침 도서관에서 바로 읽고 있던 터라, 그 자리에서 연달아 포옹을 읽었다. 세상에. 
아니 에르노가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A에 대한 자신의 절절함을 토로했다면... 필립 빌랭은 그냥 대놓고 아니 에르노인 A.E.에 대한. 혹은 그녀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즐겨 읽었던 '단순한 열정'.
그 책을 읽고 그녀에게 보낸 팬 레터로부터 시작된 그 둘은 33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어떤 관점에서는 교수와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입장조차 뛰어넘어 약 5년간 (글 내에서 기간이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발표된 바로는)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열정'의 A를 떨쳐내지 못하였고, 또 너무 어렸다.
그의 문체는 남자 에르노라고 불린다고 했는데, '단순한 열정'과 역자가 다른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확실히 아니 에르노의 글이 훨씬 매끄럽다.
닮긴 했는데... 조금 부족하게 닮았어. 미안하지만 좀, 어색하게 흉내낸 느낌에 가까울 만큼.

그녀의 글로 논문을 쓰고, 암송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달달 외워버린 탓일까.
어느 순간 자신이 그녀처럼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고 말하던 소설 속의 그처럼.

나는 그의 토로를 듣는 동안 조금 불편했다.
그가 회상한 과거들 속의 그의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피곤했다. 
그의 심정에 공감하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 관찰하는 입장에 머물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자문을 통해.
이 글을 A.E.에게 헌정하기 위해 부러 문체를 흉내냈던 것이 아닌 듯 하다는 걸 알게된 순간.

나는 뭐라 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의 다음 작품 역시도. 이 글 이후로도. 그는 남자 아르노라고 불리운다고 했다.
그것이 그가 원해서이든, 원치 않는데도 어쩔 수 없었든.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색깔과 문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리고 기존의 어느 누군가의 색깔이 덧씌워져 그 아류로 불리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이 슬퍼서. 

그제서야 그가 너무 애절해졌다. 
뭐. 사실 그의 글인 '포옹'은 지나간 과거 토로와 그들이 어땠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닥 애절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에 대한 '에니 아르노'의 반응은. 
궁금한 만큼 알고 싶지 않다. 지독한 불쾌감과 분노에 휩싸였을 수도 있고, 자신이 행했던 행적이 있는 만큼 안타까움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실화가 항상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던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과 '필립 빌랭'의 '포옹'은, 각자의 화살표가 다른 곳을 가르키고 있을 지라도. 
꼭 함께 읽어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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