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들개이빨] 나의 먹이 - 팍팍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

일루젼 2023. 7. 11.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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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들개이빨

출판 : 콜라주
출간 : 2022.03.24


       

이... 이건 뭐지...?

 

서너 페이지를 읽자마자 머리 위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함께 떠올랐다. 이건 대체... 그런데 재미있어...!!!

 

먹고사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은 적지 않지만, 자신의 식생활을 '먹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을 사용해 묘사하는 책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먹이'라는 단어에는 먹고삶의 절박함, 말 그대로의 필사적인 생존에의 몸부림과 약간의 병맛 유머가 적절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나의 먹이', '먹이'라. 

 

현재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직시하되, 성공을 위해 개선과 노력을 강조하기보다는 버텨내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의 자학과 사회 고발과 우스갯소리가 뒤섞인 문장들은 때로는 빵 터지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 무지근한 불편감을 느끼게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사는 거지만, 정말 죽지 않는 한에는 먹고살아야만 한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내가 느낀 것들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즐겁게 소비한 것으로 비춰지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지향점으로 비춰지고 싶지도 않다. 최근 읽었던 어떤 글들보다 인상적이었고, 신선했고, 놀라웠다. 음. 

 

강하게 추천하고 싶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관건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동안
죽지 않고 버티는 것. 

그러려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해야 합니다.


 

 

- <먹는 존재>라는 음식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 작품 덕분에 예상 밖의 돈과 명예를 얻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다소 애매한 규모의 기적이었습니다. 팔자를 고칠 만큼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거나 너무 찬란해서 눈도 못 뜰 지경의 명예를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밥집을 차렸는데 3년 내내 파리만 날리다가 4년 차에 겨우 먹고살 만큼의 손님이 들어오게 된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 비눗방울 같은 기쁨과 흥분 그리고 돌덩이 같은 근심과 불안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가며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다행이다. 이제 살았다. 여기서 더 열심히 노력하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멋지게 살 수 있겠지. 이런 희망찬 의욕이 솟구치다가도, 갑자기 두렵고 우울하고 불안해져 모든 걸 팽개치고 달아나고만 싶어 졌습니다. <먹는 존재>의 성공에 내 인생의 운을 몽땅 써버린 것 같다. 이제 그보다 더 나은 물건은 못 뽑아낸다. 앞으로 나를 기다리는 유일한 이벤트는 작품 하나만 반짝 남기고 사라진 작가들의 공동묘지에 파묻히는 일뿐이다. 기쁨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절망의 산사태가 온 마음을 덮쳐버렸습니다.

 

- 결국 저는 웃고 박수 치고 "와~ 정말요?"만 하릴없이 반복하는 방청객이 되었고, 그 기계적인 반복조차 점점 뜸해져 존재감이 희미해지다가, 모임이 마무리될 쯤에는 완벽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습니다.

 

- 나의 퇴물됨에 대한 선고문과도 같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나름 애를 써서 이것저것 그려보았지만, 모든 연재처에서 거절당했습니다. 미칠 듯한 위기감에 히트한 웹툰들을 찾아보다가, 그만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흥미진진하고 그림도 예쁘던지. 이런 작품을 만들려면 죽도록 노력하거나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도 환생도 다 귀찮았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 이도저도 아닌 저로서 그냥 가만히 누워, 늘어진 빤스처럼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허송세월을 반복했습니다. 2018년, 2019년, 2020년... 서서히 수입이 줄어들었고 얼마 남지 않은 일감은 언제 끊길지 모를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약 없는 보릿고개가 찾아온 것입니다.

 

- 먹고살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좌절의 연속.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습니다. 아아,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파티장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복에 겨운 상태였는지를, 그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 그런데 말 나온 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전부터 계속 신경이 쓰여서요. 보리가 얼마나 훌륭한 식량입니까? 꽁보리밥 좋잖아요? 보리차 맛있지 않습니까? 무려 맥주의 원료입니다? 업고 다녀도 모자랄 보릿자루가 무엇 때문에 말 한마디 못 하는 한심하고 답답한 인간의 대명사 취급을 받게 된 겁니까? 밥벌이 고민은 고민이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 그 유래를 한번 찾아봤습니다. 

- 연산군의 폭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 몰래 역모를 꾸미다가, 방구석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는 낯선 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기절초풍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집주인이 옆집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누가 그 위에 갓과 도포를 얹어놓는 바람에 다들 그것을 염탐꾼으로 착각하고 놀란 것이었다. 

- 뿜었습니다. 와 세상에, 처음 알았어요. 목숨 걸고 나라를 뒤집으려는 이들이 갓 쓰고 도포 걸친 보릿자루를 보고 어이씨 깜짝이야! 하고 놀라 자빠지는 장면이라니. 제 심장이 다 쫄리는 동시에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역모 멤버였으면 라디오 <두시탈출 컬투쇼>에 사연을 썼겠어요. 갓과 도포를 엉성하게 걸친 채로 찌글찌글 주저앉은 보릿자루, 본의 아니게 모두를 뒤집어놓으셨다! 멋지지 않습니까?  

 

- 곱씹을수록 이거다 싶었습니다. 줄임말도 귀여워요. 
꿔보.


- 어차피 남은 인생 대부분을 싫어도 꿔보로 살게 생겼습니다. 멋쟁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살판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꿔보의 숙명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전 세계의 뛰어난 두뇌들은 첨단 기술을 총동원해서 자신들의 머릿속 세계를 하나라도 더 현실로 끄집어내려고 미쳐 날뛰고, 매력적인 육체들은 자신들의 복제된 이미지로 온 세상을 도배하고, 저같이 게으른 대충이들은 그들이 짜놓은 판에서 닥치고 휩쓸려 다닐 뿐, 허둥지둥 구독료를 바치고 동태눈깔로 광고를 클릭하면서요.

 

- 너무 부럽고 열받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누차 말했듯 저는 이럴 때 늘 화내고 질투만 했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몸과 마음 이곳저곳에 병이 났습니다. 오랫동안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몸과 마음을 축내지 않고 지갑을 지키는 최적의 생존 전략으로 그만한 게 없다. 욕구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 모두가 나를 돌아보고 흠칫 놀라는 그날을 기다리며.

 

- 관건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동안 죽지 않고 버티는 것. 
그러려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해야 합니다.

 

- 가늘고 길게 생존하고자 하는 야심 찬 꿔보는 필히 채소와 친해져야 합니다. 저렴합니다. 칼로리가 낮습니다. 비타민, 미네랄, 식이섬유가 풍부합니다. 지속 가능한 저전력의 삶에 완벽히 부합하는 식량입니다. 많이 먹읍시다. 

- 여기서 제가 말하는 채소는 동네 마트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녹색 잎과 버섯을 뜻합니다(버섯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지만 말 없고 움직이질 않으니 일단 식물 친구라 해둡시다). 같은 채소라도 종류와 판매처에 따라 상태가 천차만별입니다. 뿌리와 열매로 가면 맛있어지고, 열량이 높아지고, 놀랍도록 비싸집니다. 고구마·연근·사과·포도, 이런 건 벌써 집어 들 때의 마음가짐이 잎채소와 달라지죠. 긴장이 빡 됩니다.

 

- 농부는 손이 큽니다. 특히 채소 식재료는 최소 단위가 집채입니다. 냉장고에 필사적으로 밀어 넣어보지만 결국 다 못 넣습니다. 작디작은 제 집에서 추가적인 저장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여기서부터는 부동산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넓은 땅에 대형 냉동고며 저온 창고를 갖다 놓고 온갖 식재료를 다 때려 넣고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따라서 최대한 많은 양의 채소를 가급적 빠르게 배 속에 넣어야 합니다.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요? 음식물 쓰레기는 무게만큼 돈을 내고 버려야 합니다. 먹을 게 쓰레기가 된 것도 원통한데 거기에 돈까지 쓴다? 산신령 쌈 싸 먹는 소리 하지 마십쇼. 먹이는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 이쯤에서 채소의 치명적인 단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맛이 없다는 것이죠. 사실 채소의 보관과 섭취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보관 기간 짧고 핏물과 기름기로 설거지를 힘들게 하고 상한 걸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동물성 식재료에 비하면요. 그럼에도 고기보다 채소를 썩히는 일이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맛이 없다! 그러니 빨리빨리 먹어치우질 않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썩혀버리는 겁니다. 제가 찾은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초장기 보관 프로젝트 : 끓는 물에 채소를 데칩니다. 데친 채소의 압축률은 매우 뛰어나죠. 숨이 푹 죽은 채소를 건져서 비닐 팩에 담아 냉동실에 착착 넣으면 끝. 거의 냉장고 수명만큼 보관 가능합니다. 이렇게 만들어둔 채소압축파일들은 그때그때 녹여서 무쳐 먹거나 밥에 비벼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 먹습니다.

 

- 2) 맛있게 만들기 : 행복은 밀가루에 있다+튀기면 신발깔창도 맛있다는 두 속설을 동시에 써먹읍시다. 밀가루 (또는 튀김·부침가루) 반죽을 묽게 만듦 → 채소를 잘게 다져 반죽과 섞음 냄비에 넣고 튀기면 채소튀김, 프라이팬에 부치면 채소전 완성. 이 방법으로 집채만 한 채소를 사흘 만에 해치웠습니다.

- 참고로 방법 2는 처리 효과는 탁월하나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튀김을 하고 전을 부치는 건 미친 짓입니다. 뒤처리가 쉽고 깔끔한 게 채소의 멋진 점인데 식기에 밀가루 칠갑을 하고 사방팔방 기름을 튀기다니요. 이렇게 귀찮고 비합리적인 조리법은 꿔보의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저는 방법 1을 애용합니다. 아, 방법 3도 있었네요. 날로 먹기.

 

- 고백건대 가장 많은 채소를 먹었던 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혐오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왕돈까스 접시에 채소만 수북이 담아 세끼를 때웠습니다. 누군가가 공들여 요리한 값비싸고 맛있는 고칼로리 음식을 입에 넣을 자격이 내겐 없으니 원형 그대로의 채소로만 연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채식을 일종의 자학 내지는 형벌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왜곡된 인식이 제가 평생토록 갈망하던 신체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빠지고 변비가 완벽하게 해소된 것입니다. 비만과 변비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저주로 여겼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아, 채소만 맨날 두 근쯤 때려 먹으면 살이 빠지는구나. 창자가 제대로 일하는구나. 

 

- 몸이 가벼워지자 매일이 상쾌하고 그림의 떡이었던 프리 사이즈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게 됐습니다. 불안도 자기혐오도 덩달아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신이 났습니다. 여기서 더 가벼워지면 불안과 자기혐오도 먼지처럼 가벼워져 멀리 날아가버릴 것 같았습니다. 

 

- 쉽게 지치고 피곤하고 우울해졌습니다. 이마 주름과 팔자주름이 사인펜으로 그은 것처럼 깊게 패였습니다. 겁이 날 정도로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습니다. 관절 여기저기가 아팠습니다. 추위를 견딜 수 없게 됐습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위아래 이가 딱딱 소리 내며 부딪치는 게 만화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갑자기 잇몸 전체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습니다.

 

- 사실 이것은 채식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극단적 절식 혹은 편식의 부작용에 가깝다고 봅니다만, 어찌 됐든 강한 신체적 고통이 지속되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이 와중에 알게 된 사실. 소가 풀만 먹고도 우람한 근육을 키울 수 있는 비결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타고난 네 개의 위장과 그 안에 서식하는 미생물 그리고 되새김질입니다. 먹은 풀이 입-식도-네 위장을 종일 들락날락하는 동안 미생물이 그 풀을 발효시켜 당분, 아미노산, 지방산 등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위장이 꼴랑 하나뿐이고 되새김질도 못 하는 데다가 기특한 미생물 친구도 없는 우리는 부지런히 돈을 벌어 단백질과 지방을 사 먹어야 합니다. 젠장. 

 

- 그런데, '날씬함'이 바람직한 가치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정말 없을까요? 3초 정도는 의심할 만하지 않습니까? 왜 저는 석기시대 비너스 같은 몸이 될까 봐 불안에 떠는 겁니까? 답을 뻔히 알고 하는 질문, 참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 살찌면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살찐 사람을 좆되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미친놈들에게 꼼짝없이 나의 존엄을 훼손당하게 됩니다. 중학생 때 길 가다가 살쪘다는 이유로 맞아본 적이 있습니다. 남자 고등학생이 주먹으로 제 머리를 세게 때리고 낄낄대며 지나갔죠. 그런 봉변은 단 한 번만 당해도 영혼이 구겨집니다. 더 큰일은 이 세상이 변태라는 것입니다. 때린 놈을 혼내줄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때리게 만든 쪽을 미워하고 괴롭히며 노는 쪽이 세상의 취향이더란 말입니다. 어떡합니까. 변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저도 변태가 되어야죠. 

 

- 근데 이 얘기를 왜 했지. 아, 손질하던 아보카도에서 짱돌만 한 씨앗을 꺼내다가 그만. 크고 실한 것이 그 미친놈 뒤통수에 힘껏 던져주면 딱 좋겠네요. 

 

- 견과류만 해도 비싸지만 약간 곡식 같은 구석도 있고 하니 어찌어찌 생필품이라고 우겨볼 여지가 있겠으나, 아보카도는 불가능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사치품입니다. 이렇게 헛바람이 들면 꿔보 노릇 못 하는데, 장기간의 금욕생활에 좀 지쳤던 것 같습니다. 네, 1원 한 푼에 벌벌 떨며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만 소비하는 생활이 이제는 지겨웠고, 삶을 쓸데없이 윤택하게 만드는 것에 피 같은 돈을 날려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보카도는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부유한 성공 인생의 상징이었습니다. 

 

- 생각해 보면 아보카도를 알게 된 순간부터 맹목적인 동경이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 과실의 존재 방식이 신기하고 흥미롭고 좋았습니다. 왜 이렇게 거대하고 기름진 열매를 맺는 전략을 택했을까. 당분보다 비계를 만드는 게 훨씬 에너지가 많이 들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나무는 이렇게 과감한 진화의 길을 걷게 된 걸까. 생긴 것도 귀티 나고 이뻐가지고.

 

- 아닌 게 아니라 인스타그램에서 아보카도를 검색하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진들이 주르륵 뜹니다. 정말 아보카도만 보면 이상하게 공들여 촬영하고 싶어 집니다. 풋풋한 연두색과 따뜻한 병아리색 물감을 한데 짜서 부드럽게 섞은 듯한 과육과 가운데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흑갈색 씨앗의 그 회화적인 색감 앞에서는, 없던 예술혼도 어떻게든 긁어모아 불태우게 됩니다. 가히 식물성 지방계의 독보적인 마성의 힙스터 뮤즈라 할 만합니다. 

- 도대체 익는 건지 마는 건지 죽어라 딱딱하게 굴어서 사람 속을 태우다가 하루아침에 최고의 상태를 반짝 보여주고 서둘러 썩어버리는 그 지랄 맞은 숙성 타이밍 또한 아보카도의 치명적 매력을 더합니다. 

 

- 플라스틱 캡슐을 까고 또 까는 아이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뽑기 중독 상태인 것입니다. 멀쩡한 연두색 과육을 기대하며 온 동네의 싸구려 아보카도를 쓸어 모으고는 한알 한 알 까봅니다. 정작 그 과육의 맛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쪼는 맛에 미쳐가지고. 
 

-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아보카도 중독임을 확신하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타고 가던 승용차가 30미터 아래 절벽으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몇 초간 돌처럼 굳어 있다가, 아무 옷이나 잡히는 대로 꿰어 입고 동생이 알려준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가는 동안 '30미터' '승용차' '추락' 따위를 포털 검색창에 절박하게 쳐 넣고 또 쳐 넣었습니다. 대부분 사망 사고였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의료진과 구조대원들 사이로, 눈을 감고 누운 엄마가 보였습니다. 달려가서 염소 같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습니다. 힘겹게 눈을 뜬 엄마, 저를 보며 말합니다. 
"배낭 안에 버섯이 있는데, 살짝 데쳐서 물기를 꽉 짜놔라."

 

- 네??
아니 유언을 이렇게 하시면...

 

- 다행히도 버섯 보관법을 유언으로 삼을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첩첩산중의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엄마를 태운 차는, 23미터쯤에서 커다란 자작나무에 걸려 멈춰 섰다 합니다. 목뼈에 금이 가고 팔과 갈비뼈가 와장창 부러지긴 했지만 의식은 정상, 기타 치명적인 부상 없음. 

- 구조대원 중 한 분이 엄마더러 종교가 뭐냐고 묻더랍니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 죽는다고. 말마따나 신이 굽어살핀 기적이었습니다.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엄마의 모습에 안도하며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나니 그제야 기운이 쭉 빠져서, 한동안 누가 밟고 지나간 연탄재 같은 꼴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때 퍼뜩,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미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8개 5,000원." 황토색 골판지에 매직펜으로 휘갈겨 쓴 가격표. 집에서 황급히 뛰쳐나와 전철역에 들어가기 직전, 노점상에서 발견한 떨이 아보카도의 값이었습니다. 도착 후 그 노점상에 달려가서 아보카도 1만 원어치를 사들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유독 물렁한 놈 하나를 시험 삼아 따봤습니다. 고맙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연두색 과육. 숟가락으로 크게 한 입 떠먹었습니다. 입안을 크림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희미하고 어정쩡한 기름의 맛. 여전히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더군요. 엄마가 죽다 살아난 당일에 떨이 아보카도를 사 먹고 앉아 있는 제가 미친년이라는 거. 도박에 빠지면 에미 애비도 몰라본다더니 이게 딱 그 짝이 아닌지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앞으로도 저는 썩 맛있지도 않은 이 열매, 아보카도에 대한 기이한 집착을 영영 놓지 못한 채 벌게진 눈으로 싸구려 떨이 물건을 낚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 초조해 죽겠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갇힌 소심하고 무력한 영혼이 도망칠 곳은 뻔합니다. 영화, 드라마, 웹툰으로 대표되는 허구의 세계. 즉 저의 '나와바리'에 돈이 몰려드는 거죠. 

- 명색이 만화가인 저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업자로서의 본능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야, 내 쪽으론 물 안 들어와. 돈과 인기는 결국 또 근면하고 감각 있는 멋쟁이들이 쓸어갈 거야. 기대를 버려.' 네, 정확히 제 예측대로 됐습니다. 

- 역병의 시대에 돈이 어디로 흘러갈지를 딱 맞혔고(웹툰을 많이 볼 것이다) 역시나 소수의 멋쟁이들만 떼부자가 됐습니다(플랫폼 사업자, 스타 창작자). 아빠와 동생은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제 업계의 호황을 제 것으로 착각하는 듯했습니다. 금광 앞에 곡괭이까지 들고 섰으니 이제 금만 쓸어 담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 반나절은 지났겠지 하고 시계를 보면 한 시간도 안 지났고 전체 밭의 극히 일부, 그러니까 피자로 치면 30분의 1조각 만을 겨우 작업한 상태죠. 남은 30분의 29조각을 둘러보면 그 광활함에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좋고 싫고의 차원을 넘어 그냥 얼른 탈출하지 않으면 죽겠다 싶습니다. 목, 허리, 팔다리 안 쑤시는 데가 없는 농부들이 절절히 이해가 가고, '농사나 지어야지' 같은 몰상식한 관용구가 존재하는 세상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어찌 감히 '나' 따위를 붙입니까. 신성하고 가혹한 이 농사라는 이름 뒤에. 

 

- 하지만 버겁고 두려워 피하고만 싶었던 농사의 세계에 다시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의 신보다 더 지독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죄책감에 미쳐버린 K장녀입니다. 이른 아침, 저는 호미를 들고 엄마의 고구마밭에 섰습니다. 간병에서 도망친 죗값, 고구마로 치르리라! 
 
- 왜 고구마가 감자보다 비싼지를 농부로서 체감했습니다. 감자의 형태는 대개 균일합니다. 동글동글하죠. 비교적 얕게 묻혀 있고요. 쑥쑥 잘 뽑힙니다. 생산자 입장에서 균일함은 정말 고마운 덕목입니다. 다루기 편하니까요.

 

- 그런 면에서 고구마는 아주 속 썩이는 농산물입니다. 당구공 같은 것, 참외 같은 것, 구렁이 같은 것, 김장 무 같은 것... 생김새도, 묻힌 위치도 제멋대롭니다. 땅 위에 반쯤 드러나 있어 쉽게 잡아 뽑히는 기특한 놈과 끝도 없이 땅을 파내려 가게 하는 골칫덩이가 뒤섞여 있습니다.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엉뚱한 데서 두더지처럼 불쑥 튀어나옵니다. 어쩔 수 없이 호미로 고구마를 찍는 사고가 생깁니다. 고구마가 상처 나면 골치가 아픕니다. 찍힌 자국에서 뽀얀 진액이 흘러나오는데, 여기에 흙이 엉겨 붙으면 칼로 긁어도 잘 안 떨어지는 고약한 딱지가 됩니다. 그런 게 또 잘 썩고요. 크고 잘생긴 최상품 고구마를 호미로 콱 찍어버렸을 때의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심장에 호미가 박히는 심정입니다. 

- 언제 갑자기 고구마가 튀어나올지 몰라 조심조심 호미질을 했습니다.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는 호미질은 손목과 무릎을 갈아먹었고, 뭔가 다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행위는 정신력을 팍팍 깎아먹었습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저는 완전히 탈진해 나자빠졌습니다. 아직 절반도 못 캤는데요. 분했습니다. 머리에 손전등을 달고 밤새도록 작업하려다가, 아차! 굶주린 밤의 불도저, 멧돼지의 존재를 깜빡할 뻔했습니다. 고구마에 환장한다죠, 멧돼지가. 깔끔하게 단념하고 다음 주를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고구마는 여러 개고 목숨은 하나이기에.

 

- 고구마 수확은 정확히 몸을 움직이는 만큼 일이 진행되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결과물이 존재하며, 남은 업무량이 얼마만큼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대단한 안정감을 주는 프로젝트죠. 게다가 발전하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럽게 일 못 하는 저마저도 고구마를 10킬로그램, 50킬로그램, 100킬로그램쯤 캐고 나니 일이 늘더라니까요. 고구마의 위치에 대한 예지력이 높아지고 호미질에도 요령이 생겨, 막판에는 대부분의 고구마를 흠집 하나 없이 캐낼 수 있었습니다. 유능한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건 없습니다. 자아도취 마약에 빠지니 작업 속도는 더욱 빨라졌죠. 

 

- 약 60킬로그램의 고구마를 제 몫으로 나눠 받았습니다. 혼자서는 썩기 전에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크고 잘생긴 것들을 골라 지인에게 선물했습니다. 뜻깊은 작업이었습니다. 흔히 농작물을 자식에 빗대곤 하죠. 아닌 게 아니라 땅속 깊이 박힌 왕고구마를 캐낼 땐 정말 갓난애를 받아내는 기분이 듭니다. 자식 같은 내 고구마. 아무한테나 못 줍니다. 

- 내 새끼 천덕꾸러기 만들지 않고 존중하며 찌고 삶고 굽고 튀겨줄 사람을 엄선했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기분 묘했습니다. 내가 평소에 누구를 진정 아끼고 신뢰하는지가 고구마로 인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따금 그들로부터 이렇게 맛있는 고구마는 처음 먹어본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고구마처럼 따끈한 기쁨에 목이 메었습니다. 자식이 칭찬받으면 이런 기분인가요. 내 고구마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목숨도 바칠 수 있겠다고까지 생각한 저 자신에게 흠칫 놀라고 말았네요.

- 육체노동을 통해 소박한 성취감을 자주 경험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는 것. 이렇게 교과서적인 모범 활동으로 일상을 꽉 채워본 건 처음이었는데요. 행복했습니다. 남은 인생 이렇게만 살아도 성공이겠다 싶을 정도로요. 구겨진 자존감이 펴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더군요. 고구마 농사의 힘입니다. 

- 요즘에는 틈만 나면 저도 모르게 내년 농사 계획을 짜고 있더군요. 내년엔 이렇게 밭을 갈고, 저렇게 고구마를 심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개선하고... 참 나. 누가 보면 전문 고구마 농사꾼인 줄 알겠어요. 농사짓느니 차라리 만화를 그리겠다며 도망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새는 만화 한 컷을 그리느니 고구마를 하나라도 더 캐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갈 기셉니다. 아주 적당히 하고 고구마를 소재로 한 만화나 구상해 봐야겠어요. '고구마 게임?' 혹시 또 모르죠.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쳐서 넷플릭스에 드라마라도 만들어질지. 

- 그나저나 근래 들어 부쩍 심상찮은 예측이 자주 들립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인류는 곧 최악의 식량난을 겪게 될 것이고, 각국의 중요 산업으로 농업이 급부상한다는 것이죠. 이미 빌 게이츠 같은 글로벌 큰손들이 농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농토를 마구 사들이고 있답니다. 이것을 미래의 진정한 멋쟁이는 농부가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중에서 주식도 되고 간식도 되고 식이섬유 풍부하고 맛도 좋은 건강 탄수화물인 고구마 농부가 멋쟁이 중 최고가 될 거라 믿어도 좋을지요? 모쪼록 이번에도 저의 예측이 적중하길 바라며, 부엌도 모자라 침실에까지 굴러다니는 고구마 무더기에서 주먹만 한놈 두어 개를 골라 쪄 먹습니다. 
나만의 고구마 파티. 아, 진짜 너무 맛있다! 

 

- 그러다 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음식 중에 빵을 집중적으로 폭식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심한 다이어트 강박의 경험자라는 겁니다. 빵을 생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심한 다이어트 후 집착이 생겼다는 고백은 빵 폭식자들 사이에서 상식이 될 정도로 흔한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빵일까, 제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봤습니다. 다이어트에 돌입하면 탄수화물부터 끊죠. 자연히 결핍만큼의 욕구불만이 생깁니다. 이를 해소하지 않고 억누릅니다. 욕망이 폭주합니다. 더욱 세게 억누릅니다. 정신을 놔버립니다. 금기 중에 제일 무시무시한 금기를 박살 냅니다. 바로 정제탄수화물 대마왕, 빵 폭식이죠. 밥 한 공기면 충분히 채워질 욕망을 웨딩케이크 몇 판을 먹어도 모자란 괴물로 키워버린 겁니다. 숨도 못 쉴 지경까지 빵을 먹고 혈당이 치솟을 때면, 빵이란 음식의 쾌락 요소만을 똘똘 뭉쳐 만든 기획 상품이자 식품공학의 쾌거-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쾌락 물질 - 음식의 탈을 쓴 마약 · 허상 · 신기루· 거품 · 비눗방울 따위의 관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 금욕 생활을 때려치우고 빵의 세계에 뛰어들자 급속도로 심신이 피폐해졌습니다. 빵을 먹는 것이 점점 제 몸과 통장에 저지르는 자학 행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돈 쓰면 안 되는데! 가난한 뚱보가 ... 

 

- 음식에는 안중에도 없이 떠드는 부류와, 대화에 참여는 하지만 시선은 줄곧 음식에 고정된 부류가 있죠. 전 무조건 후자입니다. 음식은 언제나 제 집중력을 쪽 빨아갑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으면 난감해지죠. 두 개의 강렬한 존재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 멘탈이 박살 나고 맙니다. 그래서 그 박살 난 멘탈로 어떻게 했느냐. 조칠성의 모든 말을 간신배처럼 따라 하며 비위를 맞췄습니다.

"아, 토마토 진짜 좋아요." "맞아요. 토마토 진짜 좋죠." "월남쌈은 정말 회화적인 음식이죠." "그쵸. 회화적이죠." "표고버섯은 별로예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표고가 참 별로죠." "...."

 

- 기분 탓일까요. 조칠성의 얼굴에 슬쩍 경멸 어린 표정이 스친 듯했습니다. 하긴 그럴 만했죠. 매력 없는 연애 상대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자아 잃은 열성팬이니까. 영혼 없는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십니다. 만남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대화는 점차 생기를 잃었고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속이 바짝바짝 탔습니다. 조칠성은 명백히 저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내 모든 표현력과 유머 감각을 끌어모아 조칠성을 웃기고 감탄하게 해야 하는데, 나의 비범함에 무릎 꿇게 해야 하는데! 그 조바심이 저를 더욱 뻔하고 매력 없는 열성팬으로 만들었습니다.

 

- 동태눈깔로 먼 산을 바라보던 조칠성. 자기도 답답했던 모양인지 제 눈앞에 휴대폰을 내밉니다. 고양이 사진입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외쳤습니다. "와아 귀여워!" 아 뭐야. 좀 더 독창적으로 반응했어야지! 다행히 조칠성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집니다. 제 새끼 칭찬받은 자 특유의 따사로운 학부형 미소. 그 미소에 저는 힘을 내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품종묘는 아닌 것 같고..." 조칠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습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왜 이렇게 지껄였지? 남의 집 애 족보 따위엔 전혀 관심 없거든요.  

-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동물의 품종이란 주인이 말해주면 그런가 보다 하고 까먹는 아무래도 좋을 정보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조칠성에게 특별한 인간으로 각인되고픈 뜨거운 열망에 뇌가 구워져서 오작동을 일으킨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어떠한 재치도 독창성도 없는 품종 같은 단어를 입 밖에 낸 이유가 설명이 안 됐습니다. 근데 뭐 말한 놈의 입장을 설명해 봐야 뭐 합니까.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뻔한 변명이나 늘어놓을 것을. 중요한 건 언제나 들은 자의 해석과 대응이지요. 

 

- 품종묘 발언 이후, 조칠성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제게 벽을 쳤습니다. 말은 안 해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인종차별자 취급한다는 것을. 내가 인종차별자라니?! 굉장히 신선하게 억울했지만, 없는 말재주에 섣불리 해명을 시도했다가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 같아서 하나 마나 한 말들로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다 헤어졌습니다. 그게 조칠성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 어차피 이제 조칠성과 사귀기는 글렀으니, 기발하고 독특하고 골 때리는 평생 못 잊을 단 하나의 존재로서 그의 기억 속에 뿌리를 콱 박아버리자. 그것만이 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아니 실은 그렇게라도 비참함을 잊으려고 발악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문득 사진 속의 개 밥그릇에 시선이 닿았습니다. 육식을 혐오하는 그가 사랑하는 육식동물들을 위해 정성껏 차려준 다른 동물의 살점. 심사가 확 뒤틀렸습니다. 

 

- 그만하자. 여기서 더 추해지면 끝장이다. 고기들을 전부 냉동실에 쓸어 넣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쓴 채로 밀려드는 회한과 수치심, 무력감 등등을 한동안 곱씹었지요. 그러다 지겨워져서 유튜브를 켰습니다. 기발하고 독특하고 골 때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관종들의 지옥탕. 때마침 추천 영상으로 먹방이 뜹니다. 아이고야. 웬 남자가 거머리와 지렁이를 먹네요. 그렇습니다. 하드코어 식재료를 먹고 시선을 끄는 것도 이미 레드오션이 될 대로 된 현실. 처음부터 저에게 승산은 없었습니다. 설령 이 멍청한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자가 되어 조칠성에게 불멸의 또라이로 기억된다 한들, 제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 행복의 기준을 남에게 두면 불행 뿐이라는 지당한 자각이 그제야 겨우 들었습니다. 내 페이스대로 느릿느릿 평화롭게 맥반석 타조알이나 만들어 먹기로 했지요. 반짝 신이 났습니다. 흐흐, 이거 꽤 기발한 발상 아닌가? 맥반석 타조알 만들기! 그러다 어딘지 석연치 않은 예감에 검색해 보니, 세상에. 그마저도 벌써 누가 3년 전쯤 유튜브에 올렸더군요. 아아 유튜브, 과연 없는 게 없는 인류 최대의 기행저장소.

 

- 피곤해 죽겠네요. '특별하고 독창적인 나'라는 허상에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착을 놓으라는 스님들의 설법 영상이 추천 목록 최상단에 뿅 뜨네요. 네 의식의 흐름 따위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듯.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당해낼 수가 없어요. 사랑도, 먹방도, 유튜브 알고리즘도. 으, 징글징글해! 전 여기서 나갈게요. 승패와 무관한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꿔보의 삶이 역시 제일입니다.

 

- 아, 냉동실의 고기들은 거리를 떠도는 육식동물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 지금까지의 먹이는 어쨌건 '음식'이었습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에너지가 되는, 말하자면 생필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생필품. 없으면 하루도 못 살지만 늘 곁에 있는 것은 욕망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물이나 공기랑 딱히 섹스하고 싶진 않잖습니까? 네네. 피를 태우고 살을 깎아먹는 국가가 허락한 마약, 합법적인 것 중에 가장 매혹적인 물질, 영양학적 가치가 0에 수렴하는 깡통 칼로리의 제왕, 술과 겁도 없이 몸을 섞기 시작했다는 얘기지요. '빵 중독이 웬 말이냐 이왕 망칠 몸, 중독계의 정통 클래식 알코올 중독으로 가버리자!'라는 느낌으로. 
 
- 타고난 술꾼은 아니었습니다. 달고 부드러운 것만 찾는 어린애 입맛에 알코올은 쓰고 역겹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깔루아밀크라는 칵테일을 만났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에게나 허용된 특권인 줄 알았던 칵테일이 눈앞에 놓여 있다는 흥분감은, 첫 한 모금에 당혹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는 맛이잖아, 이거!  

 

- 유지방과 설탕의 단맛,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는 맛. 거기에 알코올 특유의 날카롭고 치명적인 독극물 향이 슬쩍 섞여 들어가니, 그렇게 관능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끝도 없이 마시고 싶더군요. 깔루아밀크. 제 음주 인생의 이유식입니다. 

- 음주인으로서의 깜찍한 첫발을 내디딘 후, 한동안 초심자답게 달콤한 술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KGB나 머드셰이크 같은 거. 엄청 먹고 다녔지요. 말이 음주지 엄밀히 말하면 청량음료에 중독된 초딩의 행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설탕의 단맛에 취해 술을 먹는, 사실상 초장 맛으로 회 먹는 수준의 음주였죠. 하지만 곧 알코올 자체의 맛, 그 얼얼하고 화사한 풍미를 즐기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찾는 술의 당도는 낮아지고 도수는 높아졌습니다. 무한정 높아질 줄 알았던 선호 도수는 18도 언저리에서 그쳤습니다. 발효주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도수가 18도라죠.  

 

- 가격도 무시 못 합니다. 발효주 코너는 다채로운 싸구려 술의 천국입니다. 먹다 보면 금방 배불러서 많이도 못 먹어요. 싼값에 취기도 얻고 배도 채울 수 있다, 가성비에 집착하는 꿔보에겐 눈이 번쩍 뜨일 얘깁니다. 더 맛 좋고 비싼 술이 세상에 많고 많겠지만 그 맛 끝끝내 모르고 죽어도 좋습니다. 아니, 모르고 죽기를 바랍니다. 한번 높아진 입맛은 절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만큼 저를 두렵게 하는 저주는 없습니다. 없는 살림에 입만 고급이면 깡통 찹니다. 최저가와 최고가의 격차가 엄청나게 큰 주류의 세계에서 철딱서니 없이 그랬다가는 빛의 속도로 패가망신합니다. 술 처먹는 것도 괘씸한데 거기서 또 맛있는 걸 밝힌다? 곤장 맞아야 됩니다, 진짜. 
 
- "이건 술을 부르는 메뉴네요." "해장하러 갔다가 국물한술 뜨고 바로 소주 주문했습니다."

여럿이 모인 식사 자리나 온라인의 맛집 리뷰에서 이런 평을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됩니다.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식적인 맞장구를 치곤 하지요. 술 마실 때 안주 필요 없거든요, 저는. 밥 먹을 때도 술 생각 안 나고요. '전국민 인생조합'으로 자리 잡은 치맥에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야 치킨, 맥주, 둘 다 미치도록 사랑하죠. 다만 둘의 조합이 과연 세간의 호들갑만큼 그렇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가가 의문이라는 겁니다. 막걸리에 파전도, 삼겹살에 소주도, 뭔가 정략결혼 해놓고서 금슬을 과시하는 쇼윈도 부부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술만 먹는 게 좋습니다. 속 버릴까 봐 오이, 양배추, 샐러리, 견과류 약간을 마지못해 곁들이는 정도. 그러니까 저에게 안주는 위장 보호용 건강식품으로 기능할 때 최고의 의미를 지닙니다.

 

-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저는 OO랑 XX는 꼭 같이 먹어줘야 한다는 속칭 '국룰'적 정서에 꾸준히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먹어줘야 한다는 표현부터가 벌써 뒷걸음질을 치게 합니다. '줘'라는 저 글자에서 남의 설렁탕에 다짜고짜 깍두기 국물을 부어놓고 이게 제대로 먹는 거라며 껄껄대는 자들과 비슷한 악취를 느낍니다. 식당에서 제시하는 조합에도 자주 저항합니다. 어지간하면 패스트푸드점에서 세트 메뉴 안 시킵니다. 햄버거 단품만 먹습니다. 샐러드에서는 소스를 빼고 돈까스 정식에서는 밥을 빼고 짜장면에 나오는 단무지 반찬 안 먹습니다. 커피만 마시거나 케이크만 먹습니다. 홍어도 굳이 삼합이란 프레임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 수육 따로, 김치 따로 먹습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먹으려고 이것저것 겹쳐 먹는 행위가 저는 불편합니다. 이 불편함에 강력한 정당성을 더하는 건 가격입니다. 세트 메뉴보다 단품이 무조건 한 푼이라도 더 쌉니다. 
 
- 네. 몸은 비록 당분과 알코올로 더럽혀졌어도 골수에 박힌 꿔보 근성 안 죽고 시퍼렇게 살아 있었죠.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덜 먹고 한 푼이라도 덜 쓸 궁리만 하는 사람에겐 놀자고 하기도 뭣하지 않습니까. 식당 측은 말할 것도 없이 싫어하죠. 이것저것을 꼭 같이 먹어줘야 하는 손님이 우르르 몰려와야 객단가가 확 올라서 매출에 도움이 되지, 저처럼 혼자 와서 싼 것만 골라 먹고 사라지는 얌체는 자영업자의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가슴 깊이 동경하는 것 중 하나가 소박하고 따스한 단골 레스토랑에서 사장님과 너스레를 떨면서 친구들이랑 진탕 먹고 마시며 웃고 즐기는 삶인데요. 그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제 성향상 그것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 처음에는 와- 취하는 거 왜 이리 좋지 알 게 뭐람 너무 신나 히히히! 이러다가, 문득 어떤 점을 깨닫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술이 유독 심하게 왜곡하고 마비시키는 것은, 제가 극심한 열등감을 느끼는 영역이었습니다. 

 

- 열등감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을 했습니다. 제 말에 흠칫 놀란 그들이 말합니다. 지가 열등감이 있는 걸 입 밖에 내는 인간은 처음 봤다고. 열이면 열 똑같은 반응에 제가 더 놀랐습니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들 열등감을 처리하고 삽니까? 혹시 나 빼고 다 열등감이 없나요? 설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게 국민병인 나라에서?!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곧 알게 됐죠. 나만 빼고 다들 묵묵히 잘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열등감을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하얗게 태워버리고, 누군가는 잘난 사람을 시기 질투하거나 해코지하며 열등감을 풀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방식이든 조용하고 은밀하게요. 후자의 못난이들은 물론 높은 확률로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적어도 그 음습한 에너지로 힘차게 제 무덤을 파는 열정만큼은 저보다 훨씬 우월하다 봅니다. 
  
- 한마디로 다 큰 성인들이 알아서 눈치껏 대소변 가리는 판국에 저 혼자 벌떡 일어나서 똥 마렵다고 소리친 꼴이었죠. 친구들의 반응이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하긴 저도 "내가 열등감이 있다!"라고 육성으로 내뱉는 인간은 저 빼곤 보지 못했고, 봤다 해도 딱히 해줄 말을 못 찾았을 겁니다. 민망해서 술을 마셨습니다. 친구들 중 제가 제일 빨리 취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제 주량에 열등감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사방에서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소울메이트니 베프, 절친, 뭐 그런 관계를 늘 꿈꿨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관계를 못 가져봤다는 뜻이죠. 친구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보셨듯 고민을 들어주고 적절히 주먹질도 해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다 10년 지기, 20년 지기입니다. 하지만 그 세월의 숫자는 분식회계장부의 부풀려진 매출 같은 것으로, 실제로 그들과 긴밀하게 보낸 시간은 턱없이 적습니다. 하나같이 저랑 성깔이 비슷해서 희한한 구석에서 예민하고 괴팍하고 1년에 한 번만 만나도 너무 자주 보는 것 같고 지나치게 질척대는 듯하고 금세 할 말이 바닥나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다가 어색한 침묵에 빠지기에, 6년 근 인삼 수확하듯 만나야지 서로 편합니다.

 

- 이 글의 대부분은 동네의 공립도서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꿔보 꿈나무 여러분, 도서관을 애용하십시오. 도서관은 꿔보에게 공짜로 책과 좌석과 콘센트를 내어주는 몇 안 되는 문명의 오아시스입니다. 흠이 있다면 전염병 시국으로 인해 건물 내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됐다는 거죠. 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 먹다가 매일매일 몇천 원 돈을 쓰려니 속이 쓰려서, 작업 5일 차부터는 도시락을 싸 들고 도서관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밝고 안전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편하고 청결한 벤치가 있는 공간을 찾아서요. 슬프게도 그렇게 환상적으로 쾌적하고 프라이빗한 무료 개방 장소는 없었습니다. 공원이나 놀이터의 후미진 벤치라도 발견하면 감지덕지였죠. 냉큼 달려가 자리를 잡고 비닐봉투에 넣어온 계란, 치즈, 견과류, 고구마, 콜라비, 아보카도를 꺼내 먹었습니다. 

 

- 하지만 동네 벤치의 한적함은 살얼음판처럼 불안정한 것이라, 식사만 시작했다 하면 반드시 행인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가 제가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튀어나오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끼니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등장해서 음식에 오롯이 집중하고자 하는 저를 동요하게 했습니다. 저 저 길바닥에서 뭐 처먹고 앉은 저 상것을 좀 보라지! 하고 삿대질하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거나, 뭘 먹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잘 안 보이면 가까이 다가와서 뭐 먹냐 왜 길에서 먹냐 맛은 있냐 꼬치꼬치 캐묻는다거나, 거 참 맛있겠다며 입맛을 쩝쩝 다셔서 이건 뭐 한입 먹여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고민하게 만드는 행동으로요. 

- 물론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액션을 하는 행인은 1,000명에 두어 명이 될까 말까 합니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없죠. 뭘 먹고 있는 자에게는 더더욱 접근을 꺼립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을 만든 민족답게요. 그러나 거대한 무관심의 군중 속에 부담스런 호기심과 친밀감을 품고 다가오려는 인간이 한두 명은 꼭 있기 마련이고, 개중에는 또렷한 악의를 품은 사람도 드물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희박한 확률만으로도 저는 체할 것 같아서, 다시 한낮의 방랑을 시작했습니다. 

- 보다 평온한 곳을 찾아 도서관 인근의 구석진 땅들을 쥐 잡듯이 뒤졌습니다. 작업 10일 차.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원하는 부동산을 만나게 된다더니, 마침내 완벽한 공간을 찾아냈습니다. 그곳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 공동묘지였습니다.

- 모니터만 봐도 구역질이 났습니다. 억지로 쥐어짜낸 문장들. 죄다 쓰레기 같았습니다. 일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집착해 온 음식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없을 수 있는가. 그럼요. 늘 없었잖아요. 이렇게 될 줄 몰랐단 말입니까? 말로는 음식을 사랑한다지만 실제로는 음식 문외한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았잖습니까? 단골 식당 없습니다. 자신 있게 소개할 맛집도 없습니다. 요리 못합니다. 배달음식 안 먹습니다. 수입이 줄면 식비부터 줄입니다. 미식가 아닙니다. 흙에 버무렸거나 썩은 것만 아니면 맛없는 음식도 대충 먹습니다. 먹은 게 변변찮으니 지식도 통찰력도 탁월할 리 없습니다. 

 

- 절망에 잠겨 하염없이 동네를 걸었습니다. 한 달 넘게 발길을 끊었던 도서관을 둘러보고, 옆 동산의 공동묘지에 올랐습니다. 코 없는 석상을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엉?! 그런데 묘지가 통째로 없어졌네요?! 눈 씻고 찾아봐도 무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자손들이 다 파갖고 갔나? 아뇨. 알고 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무성하게 자라난 칡이 묘지 전체를 뒤덮은 것이었습니다. 석상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네요. 파도처럼 제 앞을 가로막은 칡넝쿨 때문에. 아무래도 인류가 멸망하면 우리의 부동산은 몽땅 칡한테 먹힐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 최후의 승자는 결국 칡이 아닐까요? 땅에 깊고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 저 오만방자한 인간이 스러질 날을 묵묵히 기다리는. 와! 이제 보니 칡, 세계 최강의 꿔보잖아요? 그 끈기와 강인함을 본받기 위해 칡즙이라도 짜 먹어야 하나 생각하며 터덜터덜 산을 내려왔습니다. 

 

- 마감일이 코앞에 닥쳤고 본격적인 원고 독촉이 시작되었습니다. 야단 났습니다. 쓰레기고 나발이고 일단 뭐든 써서 넘겨야 했습니다. 다시 도서관에 갔습니다. 뭐라도 쓰자, 뭐라도 쓰자. 네 시간 뒤. 문장 세 줄을 쓰고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비틀비틀 옆 동산에 올랐습니다. 기세가 한풀 꺾인 칡넝쿨 사이로 무덤과 비석과 석상의 대머리가 보였습니다. 석상 앞에 철퍼덕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안녕, 잘 지냈니. 난 좆됐단다. 글이 안 써져 죽고 싶구나. 그나저나 너는 코가 날아갔는데도 참 사람 좋게 웃고 있네. 내 등 뒤에 누워 있는 놈은 심지어 죽었잖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뒈진 놈과 코 베인 놈 앞에서 배부른 소릴 잘도 지껄였네. 알았어. 반성한다. 잔말 말고 글 쓸게. 근데 그거 아니? 이 고구마 진짜 맛있다!" 

- 네. 도시락으로 싸 간 고구마가 꿀맛이었는데 자랑할 데가 없어서 석상에 대고 했지요. 제 자랑을 들은 걸까요? 참새 한 마리가 포로로 날아와 석상의 정수리에 앉더군요. 고구마를 조금 떼어주니 온몸으로 반색하며 화다닥 삼킵니다. 10초도 안 되어 서너 마리가 더 날아왔습니다. 조각낸 고구마 한 줌을 휙 던져줬습니다. 날개 춤을 마구 추며 뒤엉키는 참새들. 클럽인 줄 알았네요. 다섯 마리, 여섯 마리, 계속 날아듭니다. 어느덧 묘지는 온통 참새 판이 되었고, 저는 노망 난 백설공주처럼 크하하 껄껄껄 웃으면서 사방팔방 고구마를 뿌렸습니다. 식사량은 줄었지만 무척 즐거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 순간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자발적인 욕구가 생겼거든요. 도서관에 돌아가서 참새와의 만찬을 가볍게 기록했습니다. 이때부터 글쓰기가 조금 편해졌던 것 같아요. 석상 붙잡고 수다 떨듯, 힘을 빼고 아무거나 써보기로 했습니다. 
 
-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팠기에 콜라비를 조심스레 또 한 입 씹었죠. 와자작!!! "어디서 깍두기 씹는 소리가..." 등산객 차림의 중년남녀가 제 쪽을 흘끔거리며 말했습니다. 젠장. 콜라비는 야외에서 혼자 먹을게 못 되는구나.  

-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묘. 마지막 아수라장도... 뭐 그럭저럭 재밌었어. 

- 1) ...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아주 그냥 징글징글하게 먹이 타령을 하겠구나.

2) 글쓰기란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로구나. 하지만 가장 저렴한 도구로 가장 적은 근력을 들여할 수 있는 창작 활동, 대단히 꿔보적이지 아니한가.

3) 도서관 짱. 공동묘지 짱. 이불 밖 세상에 이보다 더 꿔보에게 친절한 공간은 있을 수 없어. 

- 따라서 저는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고 다시 돌아와 비석 앞에 앉아서, 빨리 뭐라도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게으르고 재능이 없을까, 허구헌 날 이렇게 실용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감정 과잉의 글만 써서 어떻게 먹고살까, 하고 수치심과 열등감과 자학으로 점철된 넋두리를 코 없는 석상에게 늘어놓으며 계란·고구마·아보카도·견과류 따위를 주섬주섬 꺼내 먹을 것입니다. 아주 가끔 크림빵과 막걸리를 사 먹고 짜릿한 문명의 쾌락에 황송해하면서요. 

- 쓰고 보니 이만하면 엄청 복 받은 인생이네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먹이(쏠쏠 시리즈 2)
만화 『먹는 존재』 시리즈의 들개이빨이 첫 에세이『나의 먹이』. 언제나 먹는 것에 진심인 작가가 저전력의 삶에 걸맞은 ‘꿔보 라이프’를 들고 나타난 것. 그는 음식에 사로잡혔던 과거에서 벗어나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며 열등감에서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었다. 온갖 자극이 넘쳐나는 요즘, 우리에게 허황된 욕망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는 한 만화가의 먹이 타령을 들어보자. 욕망이 들끓는 시대에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남들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나만 여기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질 때면 ‘꿔보’를 돌아보자. ‘꿔보의 도’란 무릇 남에게 신경을 끄고, 나 자신에게도 신경을 끄고, 열심히 일하되 힘들면 때려치우고,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쓰고, 가공의 맛을 멀리하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을 꾸려간다면 어느새 자기혐오는 옅어지고 알고 보면 모두가 자신만의 꿔보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공도서관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리며 방구석에서 최저가를 검색해 장을 보는 만화가는 오늘도 성실하게 꿔보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언제고 다시 솟아오를 그날을 묵묵히 기다리며.
저자
들개이빨
출판
콜라주
출판일
202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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