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요네자와 호노부] 부러진 용골

일루젼 2023. 7. 14. 03:33
728x90
반응형

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출판 : 북홀릭
출간 : 2018.01.20


       

다 읽은 후 일주일 정도를 생각해 봤는데, 마땅히 정리되는 바가 없었다. 

 

<부러진 용골>에서 상황을 해결하고 매듭짓는 이들은 여성과 소년, 종기사 같은 소외된 인물들이다. 다양한 남성상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초반부터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빠른 계산속이라거나 다정한 여관 주인의 줄대기 같은 '사회적 필요성'에 의한 이중성을 꼬집는다.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는 노쇠하여 이른 죽음을 맞았고, 식견이 뛰어나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더 깊게 해석할 수 있던 마법 기사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갇혔다.

 

어쩌면- 지금의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현 상황이라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그 내부의 논리가 아닌 외부의 여성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메시지. 나는 그것이 수도원과 결혼을 포기하고 성에 남기로 한 아미나 에일윈의 결정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누구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관습, 그것을 넘어서서라도 진실에 닿기 위한 몸부림. 어쩌면 저자는 그런 것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생각이 이곳저곳을 떠돈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부러진 용골>의 캐릭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거리감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생각도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셜록처럼 상황을 빠르게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젊은 듯하지만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성숙함, 신념을 기반으로 한 적절한 선의 다정함. 팔크 피크존과 토르스텐 타르카일손. 너무나도 매력적인 인물상들이다. 

 

이제껏 읽어본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나 단서를 흘리는 스타일 같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의 소설들이 이미 결정된 현실을 바탕으로 그 설정과 디테일들을 '이용해서' 상황을 만들어나갔다면, <부러진 용골>은 그 기본 설정틀부터 짜올라왔을 때의 매력을 잘 보여준 소설이었다. 비록 작가조차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초반부터 심증을 품을 수밖에 없게끔 전개되었더라도...

 

모든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선택,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 있다면.

용골은 부러지리라.     

 


   

- "오늘이 딱 그런 날이지. 잠시 못 뵈었는데, 아버님은 안녕하신가?" 
나는 잠깐 망설였다.
"잘 지내시는데, 요새는 그다지 작은 솔론에서 나오시질 않아요. 방에 틀어박혀 계시는 날이 많죠."
"흐음."
한스의 서글서글한 얼굴에 순간 약삭빠른 표정이 떠올랐다 금세 사라졌다. 그는 시원시원하고 배포도 큰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배를 장만했을 리는 없다. 
"... 영주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지도 모르지. 아미나는 올해 몇 살이지?" 
"열여섯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나. 나도 벌써 늙은이가 다 됐군. 시기가 시기니만큼 영주님도 생각이 많으시겠어."
"그러시겠죠. 별로 걱정하지는 않아요. 그보다."

 

- 나는 시나몬을 넣은 설탕과자를 좋아했다. 값은 조금 비싸지만, 사르르 녹을 것처럼 달콤하고 신비한 향기가 난다. 잉글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과자는 솔론 섬을 오가는 배들이 얼마나 먼 곳에 다녀왔는지, 얼마나 먼 나라에서 온 상인과 그곳에서 거래를 했는지, 아득한 바다 저편을 연상시킨다.

 

- "금방 눈이 올 텐데, 멀리는 못 갈 거예요." 
"멀리까진 아니고 런던에 가볼 생각이야. 올해 슈롭셔 양모가 질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이미 늦었겠지만 그래도 가보려고."

"런던?"
나는 무심결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괜찮겠어요? 리처드 폐하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들었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계속된 잉글랜드의 왕위 다툼은 리처드 폐하가 왕위에 앉으며 겨우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폐하는 즉위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자금을 긁어모아 십자군을 편성하더니 동방의 성지를 향해 떠나버렸다. 지금 잉글랜드에는 왕이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스는 나의 불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겼다.
"왕위 다툼이 제일 심했던 때에도 런던이며 브리스톨에 갔던 몸이야. 걱정 마시죠, 꼬마 아가씨. 만일 돌아오는 길에 솔론에 들르게 되면 선물을 사다 줄게."

"됐어요. 괜찮은 물건이면 직접 살게요."

 

- "알겠어요. 순례자 같은 행색이라고 했죠?"

"두 명이야. 하나는 팔크 피츠존이라는 이름이고, 함께 있던 일행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꼬맹이였어."
야스미나가 볼일을 마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하다. 나는 혼자 사이먼 도드의 가게로 갔다. 


- 사이먼 도드의 가게는 시내 한가운데, 어시장 광장에 인접해 있다. 솔론 사람들에게는 술과 식사를 대접하고, 뭍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묵을 곳도 제공한다. 다른 여인숙도 있지만, 환경이며 음식모두 사이먼네 가게가 제일 낫다. 그만큼 숙박비도 비싼데, 한스가 사이먼의 가게를 알려줬다는 걸 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순례자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 사이먼의 가게에 들어가려니 다소 마음이 무거웠다. 사이먼은 경비병들과 달리 날 보면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챙겨준다. 그런 대접에 응하는 것도 영주의 딸인 내 역할이라 할 수 있지만, 사이먼은 너무 노골적이다. 세금을 감해달라 청할 작정인지, 다툼이 일어났을 때 편을 들어달랠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환심을 사면 그만큼 이익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무엇보다 말이 많다. 
 

- "아, 미안합니다." 
머리 위로 시원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망토를 두른 남자가 보였다. 
원래 하얀 망토였던 모양이지만 때가 타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수도사인 줄 알았는데, 허리에 검을 찬 걸 보니 아닌 모양이다. 키가 매우 크다. 볕에 그을린 얼굴은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지저분했다. 갈색 머리는 어깨에 닿을 만큼 길다. 턱에 난 아물지 않은 흉터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온화한 분위기와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었다. 겉보기에는 서른쯤 되어 보이지만, 스물다섯이나 서른다섯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 "경비병이 어디 있는데요?" 
"지금은 마늘 장수에게 세금을 걷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팔크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허나 경비병은 잠자코 지나갔다. 이 아가씨의 말이 거짓이라면, 경비병은 반드시 한 마디 하러 왔거나 상사를 부르러 갔을 게다. 하지만 말없이 넘어갔어. 이 아가씨는 영주의 딸이고, 경비병은 그걸 알기 때문이지." 

 

- "경계심이 많아서 나쁠 건 없다. 허나 그다음은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거라."
어리석어서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도 아니고, 내가 영주의 딸임을 알았던 것도 아니었다. 팔크는 눈 깜짝할 새에 내 신분을 알아챈 것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 그리고 그가 말한 논리라는 단어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일까? 

 

- "그렇군요. 말씀대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하지만 팔크는 왠지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계집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기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도 역전의 용사답다. 

 

- "이곳 영주님이 용병을 모집하십니까?"

"아, 모르셨습니까. 저는 기사님이라고 하셔서 그 때문에 오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방금은 로스에어가 실수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일인데. 팔크는 나를 보았다.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 "잉글랜드 말은 어디서 배우셨소?"
"어머니가 잉글랜드 출신이십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쪽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많아서 절로 입에 익더군요."
콘라트는 말을 마치고 씩 웃었다. 자신이 단순히 검을 휘두르고 말 타는 데만 능한 사내가 아님을 암시하려고 구태여 상인과 교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 나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는 아니다. 기사는 약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보수를 대가로. 기사 콘라트 노이돌페르는 솔론의 번영을 듣고 돈이 될 만하다 싶어 한달음에 달려왔으리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컨대 그 역시 기사라는 신분의 용병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찾는 이는 다름 아닌 용병이다. 양자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저주받은 살인 마술. 그 마술은 사라센인들 사이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며, 마술을 쓰는 암살자는 이교도 중에서도 이단자로 취급받습니다. 대항할 방법이 없었던 형제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현혹되어 점차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의 일입니다. 위기에 봉착한 형제단은 정예를 엄선하여 밀명을 내렸습니다. 사라센인의 마술을 연구해 그 비술을 역이용함으로써 암살자에 대항하라고. 처음에는 불가능하다 여겼지만, 서책과 그곳 토박이들에게 배움을 청하고, 조직을 빠져나온 사라센인 암살자를 매수한 끝에 마술 훈련은 수년 만에 성과를 거뒀습니다." 
팔크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악마의 덫에 걸려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며 상념에 젖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 애달픔이 묻어났다.
"그들은 어느샌가 그 마술에 매료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적의 기술을 배운 것에 지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힘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했고, 그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마술을 사용하면 어떠한 정적이든 쉬이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 사라센인 암살자에게서 기독교인을 지켜야 할 기사가 어느샌가 사라센인의 마술로 동족을 죽이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분명 끔찍한 타락이지만, 있음직한 일이다. 

- "형제단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이 싸움을 언제까지 계속할지. 그들을 이미 추방된 자로 간주하고 싸움에서 손을 떼느냐, 혹은 그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남김없이 절멸시키느냐. 형제단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찍이 암살기사들이 걸어온 길을 더욱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을 뜻했습니다."

 

- "기사 피츠존이여. 요컨대 귀공 역시 기사이자 마술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 "이것은 암살기사의 인도를 요청하는 트리폴리 백작의 요청장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건네받는다 한들 아버지는 글을 읽지 못한다. 오히려 팔크가 글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사이자 마술사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 "내가 충성을 맹세한 군주는 트리폴리 백작이 아닌 잉글랜드 국왕이네. 물론 백작의 요청은 존중하겠으나, 확답은 줄 수 없네. 그대가 붙잡으면 뜻대로 해도 좋지만, 혹 우리 측에서 그 암살기사를 붙잡으면 어쩔 텐가?" 
"그럴 경우에는."
요청장을 니콜라에게 건네고 팔크는 살며시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제 검과 명예를 걸고 암살기사를 고발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용기를 확인하려는 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 만일 팔크가 솔론 영주가 붙잡은 암살기사를 고발했을 경우, 재판이 아닌 결투로 시비를 가리게 되리라. 팔크는 목숨을 건 일대일 승부를 요청하는 것이다.
용감한 사내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아버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네. 하지만 그전에 다시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게야.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 내 병사들은 전쟁 준비로 정신이 없네."
그것은 팔크를 향한 온정에서 비롯된 말이었으리라. 암살기사 문제는 팔크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 아버지는 팔크의 말에 거짓과 과장이 없는지 꿰뚫어 보려는 듯, 잠시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감정해왔다. 정면으로 그 눈빛을 받고도 당당한 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팔크는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이내 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하지만 팔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에드릭입니다."

"어떤 자인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저와 같습니다. 유감이지만."

말을 마친 팔크는 망토를 휘날리며 작전실에서 나갔다.

 

- 나는 가급적 시장과 언쟁을 벌이지 않으려 애썼다. 왜냐하면 내 말은 곧 에일윈 가문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브의 험담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 보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주의 권능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마술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제가 만난 마술사는 모두 어린애 장난 같은 잔꾀를 부리는 곡예사였기 때문입니다. 콘월의 농노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저희 눈은 못 속입니다. 진정한 마술은 어두운 숲 속에만 존재할 뿐, 주님의 축복이 내린 기독교인의 도시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나는 웃음을 참으려 배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시장이 그런 말을 꺼낸 까닭은 자명했다. 말과는 달리 보네스는 마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안(사람이나 물체에 재앙을 가져오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눈 및, 그 힘의 행사나 작용을 말한다 - 옮긴이)이나 저주를 접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도의 도시에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안도하는 건 어리석은 자들 뿐이다. 보네스는 나 역시 마법을 두려워한다고 믿고 그런 말을 꺼냈으리라. 나는 미소 지으며 "곧 배가 출발할 거예요."라고만 말했다.

- 보네스 시장은 진정한 마법은 어두운 숲 속에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물론 사실이 아니다. 저주도, 마법도 바로 우리 곁에 있다.

 

- 나는 바닥에 놓은 랜턴을 들었다. 
"그럼 내일 봐. 아버지가 이기길 바라지만, 당신의 운명이 좋은 쪽으로 향하기를 빌게."
"고마워. 승리의 영광 있기를, 그리고 너에게 신의 축복이 있길."

 

- 랜턴이 순간 철창 너머를 비추었다.
어둠 속에 나타난 토르스텐은 처음 만난 그날처럼 젊고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 토르스텐 타르카일손은 저주받았다.
그는 잠들지도 죽지도 못한다. 먹고 마시는 기쁨도 박탈당했다. 아픔을 느끼지도 못한다고 한다. 예전에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다. 칼로 베고 찔러도 피를 흘리기는커녕, 목을 베지 않는 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저주받은 데인인. 그것이 그의 정체다.

그는 늙지 않는다. 손톱도, 머리칼도 자라지 않는다. 음식도 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작은 솔론 탑에 갇혀있다. 어쩌면 최후의 심판 날까지. 

 

- 보네스 시장은 진정한 마법은 어두운 숲 속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저주도, 마법도 바로 우리 곁에 있다.

 

- "그래, 이제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됐구나." 
"기꺼이 제 의무를 다하겠으니, 망설이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자랑스러운 딸이다. 에일윈 가의 이름을 짊어질 자격이 있어. 여자인 너에게 피비린내 나는 옛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와 그게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미나, 너도 의아하게 생각했겠지. 왜 이 솔론이 데인인의 표적이 됐는지."

 

- "그렇다. 하지만 전장은 솔론이 아니었다. 네 조부가 건재하셨던 무렵,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룬의 비술을 익힌 수도사로, 저주받은 데인인들의 침략을 예언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네 증조부가 하신 일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일찍 접한 덕에 방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솔론과 마찬가지로 에일원을 노린다. 내가 자진해 미끼가 되어 싸우기에 적당한 땅으로 그들을 유인했다. 결전의 땅은 홀란트 북쪽 바덴 해에 위치한 텍셀 섬이었다."

 

- "아버님은 저주받은 데인인이 지금 당장 쳐들어오리라 생각하시나요? 종소리가 사라졌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몇 달, 몇 년 후의 일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그들은 이미 왔다."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화롯불을 받아 푸른 보석이 빛났다. 녹주석이 박힌 황금 단검. 아버지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우리에게 적만 있는 건 아니다. 아군도 있지. 오랜 세월이 지나 텍셀 섬의 종소리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을 때, 저주받은 데인인이 부활해 솔론에 재앙을 가져오려 하면 경고의 표시로 이 단검을 에일윈 가의 당주에게 보낸다. 지난날 맺은 약속이다. 하지만 수백 년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내 눈으로 이걸 보게 될 줄이야." 
"앞서 말씀하신 그 룬 마술을 부리는 수도사인가요?"
"아니다. 그는 이미 주의 부름을 받았다. 또 다른 든든한 아군이다. 솔론의 수호자라고 해두자. 언젠가 네게도 소개하는 날이 오겠지."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에일윈 가의 열쇠 꾸러미는 내가 물려받았다. 새언니에게 줄까 했지만, 오빠인 애덤 일가는 큰 솔론에 살아서 아직까지 열쇠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영주관에 있을 때는 항상 허리춤에 열쇠를 매달아 놓는다. 나는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다. 
 

-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한 명이라도 병력을 아껴야 할 때잖아요. 용병들과는 아직 정식 계약을 맺지 않았으니, 그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알면 달아날지도 몰라요." 
오빠의 미덕 중 하나는 권세욕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 말이 옳다. 알았어. 살인자는 너한테 맡기겠다. 이국의 기사에게 청하든 청하지 않든, 네 뜻대로 하거라. 난 병사들을 통솔하마." 

 

- 팔크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짤막하게 말했다.
"유감입니다."
그 한 마디로 그가 나를 위로하거나 격려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적과 싸워야만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역시 조금 괴로웠다. 나는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으며 말을 짜냈다. 

 

- "아미나 아가씨.”
팔크는 끈기 있게 나를 타일렀다.
"제가 아는 건 모두 말씀드리죠. 하지만 진실한 자는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당한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간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 "그나저나 이 쉬르코는 무척 호화롭구나. 금실로 자수를 놓다니. 가장자리에 달린 건 무슨 털이지?"

"다람쥐 털이 아닐까요?"
"얼토당토않은 소리. 영주의 옷에 다람쥐 털이라니. ...하지만 왜 이런 옷을 입고 있었을까."

 

- "지금 니콜라가 준비하는 건 저희가 사용하는 마술의 일종입니다. 암살기사의 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술이 망자에게 어떠한 흔적을 남긴다는 점은 밝혀졌습니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마술은 가공한 유리를 통해 빛을 비춤으로써 망자에게 달라붙은 그 얼룩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죠." 
"그 마술에 이름이 있나요?"
"그냥 '리터 Ritter의 어두운 빛'이라고만 부릅니다.”

- 니콜라는 랜턴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검은 유리는 빛을 투과시키지 않았다. 팔크는 랜턴을 향해 손을 올려 뭔가를 뿌리는 시늉을 세 번 반복했다. 뜻밖에도 그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해서, 도저히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동작에서도 세련된 기운이 묻어났다. 불현듯 지금까지 보았던 자칭 마술사들을 떠올렸다. 사기꾼은 무언가를 보여주기 전에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반면, 소수의 진짜 마술사들은 긴 사설을 늘어놓지도, 보는 이를 애태우지 않고 쾌히 자신의 재주를 피로한다. 팔크 역시 거창한 의식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랜턴 위로 손을 내밀어, 아버지 위로 빛을 발하지 않는 랜턴을 가져갔을 뿐이다. 

 

- "암살기사가 직접 아버지에게 마술을 걸었나요?"
"그 부분은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마술 중에는 막대기를 독사로 바꾸어 목표물을 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경우, 희생자를 죽이는 건 뱀이지 암살기사는 아니죠. 그러나 마법으로 만든 뱀은 시신에 마법의 흔적을 남깁니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뒤집어쓴 피해자의 피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일반 살인 사건에서 피를 뒤집어쓰는 건 가해자지만, 마법의 흔적은 희생자에게 남습니다."

랜턴을 치우자 녹색 얼룩은 다시 사라졌다. 니콜라가 작게 속삭였다.
"스승님. 녹색이란 건..."
보아하니 저 랜턴의 불빛을 받아 나타난 빛의 빛깔로 마술의 종류를 판별하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가슴에 떠오른 녹색 빛을 본 팔크와 니콜라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팔크는 격앙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명령했다.

 

- "네. 암살기사의 마술은 모두 사람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겁한 술수입니다. 이 마술은 암살기사가 점찍은 인간의 피를 입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피를 은으로 만든 단검에 발라, 납 그릇에 채운 포도주에 담급니다. 그러면 피의 주인은 가엾게도 암살기사의 앞잡이... '미니온'이 됩니다." 
"조종당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지는지 팔크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기사가 말에서 내려 의당 말을 돌보듯, 수도사가 종소리를 듣고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듯, 농부가 가을이 되면 농작물을 수확하듯 ... '강제된 신조'의 희생자인 '미니온'은 살인을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로 인식하고, 지식과 역량을 총동원해 표적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어버리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눈앞에 아버지의 시신이 없었다면 믿지 못했으리라. 

 

- 팔크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다,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기사의 악행은 상세히 들으면 들을수록 불쾌해질 뿐입니다. 모르시는 편이 좋습니다." 
"기사 피츠존, 이건 나에게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싸움입니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은 설사 불쾌하다 해도 들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팔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아무래도 제가 아가씨를 과소평가했나 보군요. 사과드립니다. 하면 저희 성 암브로시우스 병원형제단이 지금까지 겪었던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 "분명히 네 생각이 옳다. 암살기사의 수법은 대략 파악하고 있지만, 이번에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암살기사가 아니지. 늘 하던 대로 생각해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까지는 잘 짚었다. 하지만 그건 너는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병원형제단의 누구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마술에 통달했다. 사라센인의 마술은 물론, 유다의 카발라 마술과 그리스의 고대 연금술도 배웠다. 하지만 네가 말한 켈트의 드루이드 마술은... 글쎄, 자신이 없구나. 룬 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해야겠지. 세상은 넓다. 설령 할 엠마가 마자르인의 마술을 사용한다고 치자. 나는 그런 마술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팔크는 침묵으로 니콜라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설령 누군가 마술사라 해도, 또 어떠한 마술을 사용했더라도, '미니온'이 바로 그자이거나 혹은 그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이유가 존재할까요?"
"미니온의 인격을 바꿔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격을 유지한 채 살인을 그가 해야 할 일이라 세뇌시키는 '강제된 신조'의 특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 에이브는 아버지를 섬기는 종기사였고, 그를 기사에 서임하겠노라 약속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과연 오빠가 아버지만큼 에이브에게 마음을 써줄까. 떠나기 전에 에이브가 한 말은 오빠에게 자기 이야기를 잘 해달라는 소리다. 다른 기사들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솜씨를 갈고닦아, 병사들에게도 존경받는 에이브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만일 오빠 역시 마찬가지라면 오랜 수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보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서임은커녕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에일윈 가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에이브가 그런 사태를 우려하는 건 당연하다. 

 

- 나도 그와 같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같은 것을 보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만일 그의 눈에만 비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니콜라가 우려한 대로 마법에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팔크가 말한 확실한 증거를 모아 그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 나는 이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답답하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다.

 

- 검은색과 하얀색 타일이 번갈아 깔린 바닥, 높은 천장과 태피스트리, 커다란 난로와 섬세한 장식이 달린 벽난로. 이 홀은 아버지가 특별한 손님과 만나는 자리이자, 때로는 격식 없는 연회를 열던 곳이기도 했다. 이볼드 사무스는 그 한가운데에 레벨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붉고 푸른 체크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었는데, 먼지가 잔뜩 붙어서 꾀죄죄해 보였다. 하지만 손에 든 레벡은 만질만질하게 닦아서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이볼드는 나를 보자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저 같은 게 아는 게 있겠습니까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아는 대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태도는 공손했지만 제 할 말은 막힘없이 다 했다. 아직 젊지만 많은 마을과 도시, 영주관과 귀족의 성에서 경험을 쌓아왔으리라. 방심할 수 없는 사내다. 나는 일부러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 "제 아버지 울프릭은 영주님의 젊었을 적 모험에 동행했습니다. 영주님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 모험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문서로는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모험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주를 섬기는 이에게는 차마 들려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주관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이는 예배당 전속 사제뿐이니. 아버지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성직자를 동일시했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서 영주님은 제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모험은 성공했고 아버지는 그 모험을 한 편의 발라드로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영주님은 그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아버지에게 상으로 은화와 루비 메달을 내리셨습니다." 
이볼드의 어조가 점차 운율을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공연하며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때도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지 않았습니다. 노래의 정당한 소유권은 에일윈 가에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뜻이죠?"
"제 아버지 울프릭의 노래는 영주님과 저주받은 데인인의 싸움을 노래한 곡입니다."
이볼드는 '저주받은 데인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아버지의 딸인 나조차 어제까지 서쪽 탑에 있는 토르스텐이 유일하다 생각했는데. 그는 저주받은 데인인에 대해 알고 있다.
"영주님은 당신과 부하의 무용담이 길이 칭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여 아버지의 노래는 영웅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저주받은 데인인을 물리칠 전술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셨습니다. 먼 훗날, 그들이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에일윈 가의 후예들에게 전술을 남기기 위해 제 아버지를 시켜 노래를 만들게 하신 겁니다. 어제 영주님께서는 아버지를 찾으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직접 노래를 듣고 먼 옛날의 유물이 되어버린 전술을 떠올리기 위해. 둘째는, 울프릭에게 싸움을 들려주고 노래에 새로운 장을 더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볼드는 말을 끊고 나를 보았다.

"만일 영주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대를 이어 싸워 나갈 자손들에게 이 노래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 어젯밤 나는 에일윈 가가 저주받은 데인인과 영원토록 끝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일족의 숙명을 토르스텐 타르카일손이 불사의 저주에 걸렸듯 우리 일족도 저주받았다. 아버지는 그 저주에 대항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볼드에게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싸움은 애덤 오라버니가 지휘할 거예요. 당신이 노래를 들려주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그제야 이볼드는 소년다운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레벡을 끌어안고 말했다.
"저도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영주님은 '에일윈의 이름을 잇는 자손에게'라고 말씀하셨지, '당주에게'나 '사내에게'란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아가씨에게도 들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미천한 몸이지만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제 노래를 들어주시겠습니까?"

 

- 우리는 의자에 앉아 발라드를 듣게 되었다. 팔크와 니콜라가 나란히 앉고, 나는 이볼드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볼드는 작은 의자에 앉아 레벡을 허벅지 위에 옆으로 눕혔다. 왼손으로 레벡을 잡고 오른손에는 활을 들었다. 레벡을 이렇게 켜는 사람은 처음 봤다. 
"잉글랜드에서는 모두 그렇게 켜나요?"
"어떻게 말입니까?"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켜냐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봤던 레벡 연주자들은 모두 턱과 어깨 사이에 놓고 켰어요."
이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개는 그렇게 연주하지만, 그러면 노래를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 아."

 

- 팔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 음유시인도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그는 지금 아미나 아가씨에게 필요한 것이 눈물임을 알고 있었던 게야."

 

- 칼끝이 번개처럼 팔크의 가슴을 찌른다. 
"아!"
실제 상황이 아닌 줄 알면서도 무심결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니콜라의 칼끝이 그 자리에 멈췄다. 어쩌면 팔크의 망토에 닿았는지도 모른다. 오른팔을 뻗어 칼끝을 겨눈 채 동작을 멈춘 니콜라, 의자에 앉아 니콜라를 바라보는 팔크. 
이것이 어젯밤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일까.

 

- 이내 팔크가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덤비라 했지, 죽일 기세로 덤비란 말은 안 했다."
니콜라가 검을 내렸다.
"조금 일찍 멈출 생각이었는데... 검이 무거워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이런 장검은 영 다루기 힘들어요."

 

- "저희의 사명은 암살기사의 척결입니다. 암살기사에게서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저희 본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아가씨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아무리 다해야 할 의무라 할지라도, 깊은 슬픔에 빠진 몸으로 제가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점은 깊이 감사드립니다만, 저희에게 협력하는 건 암살기사의 적이 되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다른 누구보다 아가씨를 지켜야 합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종사가 둘이라면 다른 한 명에게는 애덤 님을 지키라 명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니콜라밖에 없습니다." 
팔크는 아버지를 지키는 것은 제 사명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덤이 아니라 나를 지키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자신에게 협력했기 때문이다. 신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줄곧 이성적이었던 그 눈빛에 괴로움이 깃든 것을 보았다.
물론 나에게, 아니, 에일윈 가에 그를 탓할 권리는 없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프랑스 말을 할 줄 안다는 얘기 말이야. 너와 기사 피츠존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부 알아들었거든.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 그 말이시군요."
니콜라는 짤막하게 대꾸하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걸 신경 쓰실 분이 아니거든요."
"네 말이 맞아. 그는 고결한 사람이니까."
그러자 니콜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의 이야기를 하는데 종사가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다니.
"고결. ... 맞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니?"
"스승님은 품위 없게 행동하지는 않으시니까요."
말을 마치더니 퉁명스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분은 단순해서 비열하게 굴지 못하시는 것뿐이에요."

 

- 그렇게 말하자 어린 종사는 나를 휙 돌아보며 스승의 만행을 고발하는 제자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아뇨, 스승님은 닭 한 마리에 20드니예를 달라면 주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토실토실하게 살찐 닭이라고 해도, 그 가격이 말이 됩니까!"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 역시 닭 한 마리에 20드니예를 달라면 그러려니 하고 값을 치를지도 모른다. 하물며.
"팔크는 동방에서 왔잖아. 닭 값을 어찌 알겠어."
그러자 니콜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닭 값을 몰라도 바로 옆에서 토끼를 5드니예에 파는 걸 보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겠습니까. 제가 비싸다고 충고도 했고요. 그리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스승님이 혼자였다면 이 솔론섬까지 배를 얻어 탈 수 있었을까요? 솔론에 도착하고 나서도 사이먼의 여인숙에 묵을 수 있었을까요? 만일 혼자 힘으로 가능했더라도 얼마나 뜯겼을지 저로서는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저도 말이 과한 줄 알았는지 니콜라는 고개를 돌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방에서는 시중을 드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스승님이 단순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일 테죠. 제 생각에 그분은 시를 짓고 마상시합에 출전해 아름다운 숙녀를 부인으로 얻어 즐겁게 사는 삶이 어울립니다." 

 

- 한마디로 팔크는 에드릭을 없애기 위해 그런 평온한 생활을 전부 버렸다는 뜻이리라. 여행으로 단련된 팔크의 몸을 보면 니콜라의 말만큼 고생을 모를 것 같지는 않다. 트리폴리 백작령에서 이 솔론까지의 여정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으리라. 열 명의 사람이 함께 떠났더라도, 그중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아 목적지에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여로다. 

 

- "아깝게도 눈앞에서 놓쳤습니다. 암살기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추죠. 의뢰인은 원고인 사제가 틀림없다 생각하지만,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패배죠." 
말을 마친 니콜라는 나를 보며 몇 마디 덧붙였다.
"제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린 건 에드릭이 아닙니다. 다른 암살기사죠. 그러니 트루아에서 녀석을 처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주님이 변을 당하신 건 아닐 겁니다."
나는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를 안심시키려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 너도 나와 같구나."
그러자 그는 살짝 눈을 돌렸다.
"제 아버지는 일개 결투사였습니다. 감히 영주님에 비할 바가 아니죠."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모두 같지 않겠는가.

- "제가 아가씨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은,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울 생각이시면 뜻대로 하시라는 말뿐입니다. 저는 아가씨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저와 아버지의 검을 걸고 맹세합니다." 
나는 에일윈 가의 여식이지만 나를 위해 싸우는 기사는 한 명도 없다. 아버지의 기사들은 이제 오빠의 기사다.
하지만 지금 이 퉁명스런 소년이 날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해 주었다. 그는 나의 첫 기사다. 기념할 만한 첫 기사니 조금 더 키가 컸으면 좋았겠지만.

그 사이에 종치기가 종루에 올라간 모양이다. 희미한 열을 띤 밤공기 사이로 조과의 종이 울려 퍼졌다.

 

- 어느샌가 구름이 짙어져 밤하늘을 뒤덮었다. 
달빛도 지상에는 닿지 않는다. 거리는 어둠에 휩싸여 황량한 광야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육지와 바다의 구별조차 어려운 어두운 밤, 우리는 두건을 푹 뒤집어쓰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니콜라가 든 랜턴이 주변을 비추었지만 너무 약해서 금방이라도 어둠에 빨려들 것 같았다. 이런 어두운 밤에는 도적도 나다니지 않으리라.  

 

- "그것은 '도둑의 밀초',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갓난아이의 손으로 만든 물건입니다."
"... 설마." 
"아뇨, 콘라트가 직접 묘를 파헤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과연 재료가 무엇인지 아는지조차 의심스럽더군요. 산파가 사산된 갓난아이를 판다는 얘기도 있고, 도굴꾼이 묘를 파헤치는 거라는 얘기도 있지만, 모두 소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도둑의 밀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만, 꼭 밀랍으로 만든 초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촛대입니다. 정당한 주인이 아닌 사람이 사용하면 평범한 촛대지만, 소유자의 손 안에서는 마법의 도구가 되죠."
"마법. ... 사라센의!"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라센 마술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콘라트가 암살기사라는 뜻이 아닌가. 팔크는 흥분한 나를 달래듯 말했다.
"그건 게르만의 마술입니다. 마녀들이 즐겨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암살기사의 마술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저주도 마법도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설마 그 기사가 마법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니.
"당장은 믿기 어렵지만 당신의 말이니 틀림없겠죠. 대체 어떤 마술이죠?" 
팔크는 턱을 쓸며 말했다.
"불을 붙인 초를 들고 있는 동안, 소유자의 모습을 감춰준다고 합니다."

(리뷰자 주 : 내가 알고 있던건 'hand of glory'. 미묘하게 다르다.)

 

- "그렇습니다만, 성급히 결론을 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도둑의 밀초'에는 소유자의 모습을 감추는 것 외에도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불을 켜면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죠. 그리고 일단 심지에 불꽃이 붙고 나면 소유자는 촛대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한쪽 손에 촛대를 든 채로 초가 다 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만,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겠죠."
팔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말해줘요."
"그럼 송구스럽지만. ... 그 불을 끌 수 있는 건 신선한 모유뿐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콘라트의 수하들이 접촉한 창부 중에 모유가 나오는 여인은 없었습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표를 내는 게 외려 더 부끄럽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썼다.
"그렇군요. '도둑의 밀초' 자체가 갓난아이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딱히 놀랍지도 않네요."
팔크가 창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는 오늘 밤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내 호위를 니콜라에게 맡기고 홀로 시내로 향한 것이리라. 어린 니콜라를 그런 곳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팔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다를 건너는 게 가능하다. 믿기 어렵지만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솔론 최대의 비밀일 터. 입장상, 아가씨가 그 비밀을 밝힐 수는 없으실 테니 제가 직접 확인하려 합니다." 

말을 마친 팔크는 랜턴을 들었다. 윙윙대는 바다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그는 다정한 어조로 니콜라에게 말했다.
"다녀오마."
"혹시 떨어져 바다에 빠져도 전 모른 척할 겁니다."
얄밉게 말하는 니콜라를 향해 살짝 미소 지은 뒤, 팔크는 천천히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해마다 어김없이 몇몇 도적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큰 솔론과 작은 솔론을 잇는 해협으로.

- 낮에는 머독이 노를 저어 건너는 해협, 조류가 용솟음치는 150야드의 바다로 그는 한 발짝씩 걸어갔다. 손에 든 랜턴은 유리 순도도 높고 불꽃도 활활 타오르는 고급품이었다. 하지만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그 불빛은 더없이 불안해 보였다. 금기인 자살을 꿈꾸며 죽음의 바다로 걸어가는 하나의 그림자, 내 눈에 그 광경은 그렇게 보였다.

 

- 11월부터 12월 사이. 일 년 중 북해의 해수면이 가장 낮아지는 시기다. 이유는 모른다. 북쪽 끝에 사는 용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이교도의 여신이 조화를 부렸다는 이야기도 들어봤다. 애당초 평소 수위와 그다지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기에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 
바다 사이로 길이 나는 건 11월의 보름 전후, 이레 동안만이다. 그 이레 동안만 조과의 종이 울리고 조수가 빠지면 달빛을 받은 바닷길이 파도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 그 광경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목격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겨울의 일곱 밤, 작은 솔론의 철벽은 무너진다. 길이라 해도, 실상은 여울목에 있는 바위가 살짝 물 위로 드러나는 정도라, 바다를 건너려면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이동해야 한다. 고작해야 몇 명, 혹은 뛰어난 용기를 가진 자만이 건널 수 있다. 
이 바닷길에 대해 아는 이는 얼마 없다. 사공인 머독조차 모른다고 들었다. 

 

- 팔크는 쓴웃음을 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와 에드릭 피츠존은 형제입니다. 제가 한 살 형이라는 이야기도 들으셨습니까?" 

 

- 역시 사실이었나.
"그건 아버님을 해친 범인이 당신 아우란 뜻이나 마찬가지예요! 기사 피츠존, 당신도 죗값을 치러야 해요!"
팔크는 말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나는 먼저 눈을 돌렸다. 그가 에드릭을 쫓아 오랫동안 여행했다는 사실을 아는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이내 그는 입을 열었다.
"법으로 따지면 그렇겠죠. 솔론의 법이 그러기를 요구한다면 따르겠습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냉정을 유지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 하지만 만일 제가 에드릭의 형이라서 그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시는 거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실은 내심 그런 우려도 있었다. 서로 적대해 다투는 형제는 그리 드물지 않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폐하와 왕제 존 전하의 예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아니, 대부분의 형제는 서로를 위하고 아끼지 않는가. 아무리 암살기사가 성 암브로시우스 병원형제단의 적이더라도, 진정 팔크는 에드릭을 처치할 수 있을까. 

- "에드릭은 마술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마술을 익힌 기사는 오로지 암살기사를 말살시키는 사명을 안고 행동하는 사냥꾼과 사라센 마술을 심도 깊게 분석하는 탐구자로 나뉩니다. 물론 에드릭은 탐구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시절 에드릭이 어떤 공적을 쌓았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다른 이들보다 출세는 빨랐다고 합니다."

형과 아우가 모두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오른 걸 보면 필시 우수한 형제였으리라.

 

- "아닙니다. 당시는 에드릭과 마주칠 가능성이 적은 소대로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무리 전락했어도 아우는 아우 만나서 제대로 싸울 자신이 없다고 말하자 쉽게 배속을 바꿔주더군요. 에드릭 말고도 토벌해야 할 암살기사는 많았으니까요. 그 후로 저는 전선에 투입되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늙은 암살기사의 숨통을 이 손으로 끊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 번째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암살기사는 스승 밑에서 마술을 배웁니다. 비밀이 누설되면 그 즉시 둘 다 목숨을 잃게 되기에 스승과 제자 사이의 결속이 유난히 강합니다. 사제관계가 끈끈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동지들도 있습니다. 마술을 습득한다는 건 곧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므로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갈 때마다 전우처럼 강한 유대감이 생겨난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결국은 타락한 자들이니 악마 숭배자들처럼 남색에 젖었음이 틀림없다는 뜬소문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자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스승을 잃은 암살기사의 복수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제가 죽인 그자는 에드릭의 스승이었습니다."

"그걸 알았나요?"
"몰랐습니다. 까맣게 몰랐죠. 하지만 에드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제가 배속을 바꿔달라고 청한 일을 알고 있었 ..."

- 그는 미소 짓더니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난 턱을 쓸며 말했다.

"아닙니다. ... 옛이야기가 길어졌군요." 

 

- "당신은 지금껏 수많은 싸움을 겪어왔겠죠. 턱에 난 그 상처 말고도 많은 부상을 입었을 테고요."
무공을 칭송할 생각으로 한 말이지만, 팔크는 어째서인지 쓴웃음을 지었다.

"이 턱의 상처는 조금 특별합니다."
"특별하다고요?"
"네. 니콜라에게는 대충 둘러댔지만, 프로방 장에서 술을 마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이런 상처가 나 있지 뭡니까. 술에 취해 주정뱅이와 주먹다짐이라도 했나 보죠. 다른 명예로운 상처도 많은데, 하필이면 제일 눈에 띄는 상처가 이거라니. 기사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팔크는 음울한 옛 기억을 떨쳐버리듯 유쾌하게 웃었다.

 

- "그런데 이 습격에서 그 소녀가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해독이 늦어 제가 죽었더라도 니콜라는 반드시 소녀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모르겠습니다.”
팔크의 입에서 처음으로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왔다.
"억측으로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이유를 아는 날이 오겠죠. 지금은 일단 발로 뛰어야 합니다."

 

- "그렇다. 제자는 죽었지만 에드릭은 아직 붙잡지 못했어."
"억지 부리지 마세요. ...그 몸으로 무슨, 아직도 사지를 떨고 계시잖아요."
나와 팔크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고, 가게 안이 워낙 어두워서 니콜라가 말하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팔크의 손끝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고, 무릎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아직도 핏기가 없었고, 11월인데도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독은 팔크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지만 그의 육신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 "효능은 뛰어나지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암살기사의 마술에 가깝다. 자주 마시면 동료들의 의심을 산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팔크는 병뚜껑을 열었다. 내가 있는 곳에까지 달콤하게 숙성된 꽃꿀 향기가 풍겼다.
"약효가 떨어지면 움직이지 못하지만, 하루 정도는 문제없겠지."

"겨우 하루 만에 에드릭을 잡겠다고요?"
"그래, 네 활약도 기대하고 있다."
팔크는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병에 든 약을 마셨다.
'산노인의 비약'이 정말 아픔과 피로를 없애주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니콜라를 납득시키기 위한 팔크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거짓이더라도 팔크는 암살기사를 쫓는 노력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니콜라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놓아둔 지게를 짊어졌다.
"효험이 굉장한데요. 그럼 출발하죠." 

 

- "무척 강했습니다."
니콜라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검술 실력도 대단했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제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다니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상대가 공격하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공격한다. 이게 싸움의 기본 동작 아닙니까? 하지만 엠마는 팔과 손목만으로 막아냈습니다."

"그걸... 강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 마치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잠시 걷다가 니콜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붙잡아 뒀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 팔크와 니콜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보니 그들 역시 추위에 떠는 듯했다.
하지만 영주관에 들어가 몸을 녹일 시간은 없다. 문 앞에 서서 몸을 움츠리고 손을 비비는 매슈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오전 당번인 모양이다. 날 보고 황급히 일어났지만, 그의 태도를 구태여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당번인 날에 주인이 죽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태만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런 자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아미나 아가씨, 지금 마침..." 
나는 매슈의 말을 끊고 명령했다. 
"가서 야스미나에게 전해요. 두건이 달린 망토를 준비해 서쪽 탑으로 가져오라고. 나와 기사 피츠존, 니콜라 것까지 세 벌이예요. 그리고 꿀을 넣은 따뜻한 포도주 세 잔도 함께 가져오라고 해요." 
질책을 면해서 마음이 놓였는지 매슈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영주관으로 들어가려 했다. 팔크가 그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 "스승님..."
스승의 몸을 염려하는 모양이었지만 팔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평소에는 이 계단을 랜턴을 들고 오르지만, 지금은 들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올라간다. 몇 번이나 빙빙 돌았을까. 토르스텐이 갇혀 있던 방에 도착했다. 두꺼운 문에 녹슨 자물쇠,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봐도 저주받은 데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서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포로의 몸으로 도주했다는 건 배신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아무도 없는 방을 보니 토르스텐의 빈자리가 새삼 사무치며 쓸쓸함이 밀려왔다. 이기적인 바람인 줄은 알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그라도 있어줬으면 했다. 

 

- "토르스텐 타르카일손은 지난 20년 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습니까?"
"그래요."
"홀로 말입니까?"
"네."
그는 방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저주받은 데인인은 마음도 굳센 모양이군요."

 

- 그건 아니다. 저주받은 데인인이라 마음이 굳센 게 아니라 토르스텐의 마음이 굳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저주받은 데인인들은 본래보다 훨씬 일찍 해방됐다. 하지만 만일 100년을 기다려야 했더라도 토르스텐은 묵묵히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릴 것이리라.

 

- 탑을 내려오자 야스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벌의 망토와 따뜻한 포도주, 그걸 여자 혼자 가져올 수는 없다. 당연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으려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야스미나는 수레를 끌고 왔다.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눈 위로 바퀴자국이 보인다. 왜 수레를 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토르스텐 님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실 텐데, 다른 사람이 들어선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평소에는 둔한 아이지만 오늘은 올바른 판단을 했다. 
그전에 우리는 포도주로 몸을 녹였다. 야스미나가 눈치 있게 작은 통에 포도주를 가득 담아 온 덕에 마음껏 마시고 숨을 돌렸다. 

 

- 특히 탑 바깥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참이나 겨울 바닷바람을 맞은 니콜라에게는 무척 반가운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금도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뿔 모양 잔을 보물처럼 품에 안더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저런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다. 이내 커다랗게 숨을 내쉬더니, 니콜라는 포도주 표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사라센인들의 말입니다. 잉글랜드어로 말하기 불편하면 모국어로 말하자고 제안했는데 거절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알지만, 그 물음에는 영주의 딸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답해야 한다고 말하는군요." 
나는 십자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라센인밖에 모른다. 그런 까닭에 그들에게 공정함을 기대할 수 있을지 미심쩍어했다. 스와이드는 내 속내를 알아채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 그리스! 그랬구나.
저토록 정교하게 인간을 본뜬 동상을 만드는 건 신을 모독하는 행위다. 무의식적으로 기독교도가 만든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라센인의 작품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도들보다 훨씬 우상을 증오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스와이드의 표정은 두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중얼거린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짙게 배어 있었다.
"기독교도 치고는 제법 식견을 갖췄구나. 더구나 아라비아어까지 말하다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나도 마술을 배운 몸이다."
"네가?"
스와이드는 비아냥대듯 웃었다. 휑한 창고 안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독교도의 마술이라! 들은 적이 있다. 검으로 땅에 마법진을 그리고, 한껏 폼을 재며 팔을 휘두르며 이렇게 말한다더군. '신의 네 글자, 테트라그라마톤의 이름으로 시트라엘, 마란타, 타마오르, 파라우아와 시트라미, 너희 지옥의 왕을 소환해 명한다.' ... 이렇게 말이다."

 

-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틀림없는 주문이었다. 올바른 라틴어가 아닌 잉글랜드어로 외운 주문은 효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위스러운 말은 항상 사위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내 굳은 표정을 보고 스와이드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치도 않은 소리! 마신을 램프에 가두는 이야기와 비등한 헛소리지. 돼지기름으로 검을 닦는 자들이 마술은 무슨 마술. 진정한 마술은 그런 게 아니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것이지." 
하지만 팔크는 스와이드의 비웃음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런 마술이 만연한다고 들었다. 너는 비웃을지 몰라도 효과는 있다더군. 하지만 내 마술은 그런 게 아니다."
"호오. 어떻게 다르다는 거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팔크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성 암브로시우스 병원형제단의 기사다."
어깨를 들썩이던 스와이드의 동작이 뚝 멈췄다.

"... 오호라."
스와이드의 목소리에는 빈정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트리폴리에서 배신자를 쫓아 이곳까지 오다니. 허나 나는 알라무트 이단자들의 마술에 결코 굴하지 않는다. 다른 자를 찾아보거라." 

 

- "그럼 어쩌겠다는 거냐? 숨통을 끊어놓고 '리터의 어두운 빛'에 비추어볼 테냐?"
어두운 창고 안에 팽팽한 긴장이 가득 차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니콜라가 살며시 나와 스와이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긴장이 온몸을 지배한다.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 무거운 침묵은 이내 맥이 풀릴 만큼 쉽게 깨졌다. 팔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너를 처단하더라도 득을 보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니콜라도 본능적으로 알아챘는지 몸에서 힘을 빼는 것 같았다. 스와이드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게야. 무리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허나."
팔크는 내처 말했다"
“네가 진정 마술사가 맞는지 확인해야겠다. 지금 여기서 마술을 보여줄 수 있나?"
노골적인 도발이었지만, 스와이드는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소리, 돌을 금으로 바꾸기라도 하라는 거냐?"
"그런 어려운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허나 네가 마술사인지, 아니면 그리스의 유산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사기꾼인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 수색에 차질이 생긴다." 
스와이드는 잠시 팔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마치 다루기 힘든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이었다.
"네놈의 사정 따위 내 알 바 아니지만, 그걸로 만족할 테냐?"
그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집과 칼날이 모두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이국의 검이다. 사이먼네 가게에서 팔크를 습격한 암살자의 단검과 비슷한 형태다. 그 검으로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 스와이드는 바닥에 검을 내려놓았다.
"마술의 진수와는 한참 동떨어진 잔재주지만, 보는 이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하겠지."

-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팔크가 마술을 사용할 때도 그랬듯 스와이드 역시 거창한 주문은 외지 않았고, 악마나 정령에게 기도를 올리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리라 예정되었던 듯, 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속에서 춤추는 미세한 먼지가 보인다. 스와이드의 검은 그 빛을 향해 천천히 부상했다.
 
- 이만큼 도발하는데도 흥분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마술사라 자칭할 만했다. 스와이드는 조용히 말했다.
"원한다면 몇 번이든 보여줄 수 있다. 난 별것도 아닌 재주를 뽐내며 거드름을 피우는 기독교도 마술사와는 다르다. 허나 네 검을 쓸 수는 없다. 부정이 옮는다. 내 검을 못 믿겠다면 다른 걸 가져와라." 

그는 팔크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자, 이제 그만 나가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 "나중에 제멋대로 싸웠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되는 겁니다. 싸우라고 명하시면 싸울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콘라트의 고용주는 솔론의 영주다. 그저께까지는 아버지였고 지금은 오빠다. 고용주의 명령 없이 싸웠다가는 승리해도 독단으로 행한 일이니 보수를 줄 수 없다고 나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버지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고 오빠도 그런 말은 하지 않을 테지만, 콘라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을 의심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 "용사들이여, 잘 와주었습니다. 이 솔론을 지키기 위해... 에일윈의 이름을 걸고 부탁하겠습니다. 그대들의 힘을 빌려주세요!"
고작 열 명뿐이었지만 솟아오른 함성은 땅을 뒤흔들 만큼 컸다.하늘을 향해 쳐든 검과 창이 겨울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콘라트가 내 뒤를 이어 우렁차게 외쳤다.
"아미나 에일윈 아가씨의 명이시다. 크게 한탕 벌어보자! 잊지 마라, 녀석들을 죽이려면 반드시 목을 쳐서 떨어뜨려야 한다!"

용병들은 제각기 무기를 휘두르며 다섯 배가 넘는 적들을 향해돌격했다. 콘라트가 재빨리 말했다.
"머릿수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어시장 광장에서 승부를 걸어봐야죠. 아가씨는 물러나 계십시오."
"조심해요. 저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콘라트는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아가씨께 제가 할 말을 뺏겼군요."

- "아가씨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아까 창고 그늘에서 습격당했을 때를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콘라트와 그 수하들에게 싸우라 명했다. 남아서 그들이 여기서 적들을 막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말했다. 나만 도망칠 수는 없다. 게다가. 
"오라버니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럴 순 없어요!”

- 전장을 지키는 건 본디 오빠의 소임이다. 오빠가 아니더라도 기사 중 한 명이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생각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직 정식 서임도 받지 않은 종기사인 에이브에게 모두 떠넘길 수는 없었다. 전장에 영주인 에일윈 가의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건 크나큰 수치다. 지금 이곳에 에일윈 가의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아무리 두려워도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 나는 뒤돌아 팔크를 보았다. 그들은 나를 도망치게 하려고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들의 노력을 헛되게 하기는 싫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십니다." 
팔크는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곡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럼 저도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에이브, 나도 가세하겠네. 자네 지시에 따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이곳에서 적들을 막아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크는 니콜라를 향해 눈짓했다. 니콜라는 말없이 내 앞에 섰다.

- 엠마는 벌써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올라왔다. 파도 사이로 올라온 팔을 팔크가 잡아당기자, 곧이어 엠마의 얼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어느샌가 니콜라가 뒤에서 팔크를 붙들고 있었다. 스승이 바다에 떨어질까 걱정한 모양이다. 

 

- 할 엠마는 잔교 위로 올라왔다. 투구는 벗겨지고 들고 있던 도끼도 온데간데없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그녀는 딱히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놀랄 만큼 많은 양의 바닷물을 토해냈다. 11월의 바다는 몸을 엘 정도로 시리다. 어서 불을 찍어 몸을 녹이게 하지 않으면 운 좋게 살아남은 영웅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물을 토해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항상 아버지를 만날 때조차도 제대로 얼굴을 닦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얼룩과 검댕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 지금,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금빛 머리채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푸른 눈동자, 뺨에서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얼굴에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검은 입술연지는 여전했지만, 지우고 대신 내 입술연지를 바르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우리라. 이것이 홀몸으로 저주받은 데인인 군단에 뛰어든 용맹한 전사의 맨 얼굴이라니. 

 

- "훌륭한 싸움이었소. 동방에서 수많은 전사들을 보아왔지만 당신만한 사람은 없었소.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팔크를 보고 놀랐다. 
"팔크, 엠마는 잉글랜드어를 못 알아들어요." 
"아닙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말은 통합니다."

 

- 저편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환영해 주었으면 좋겠다. 끔찍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그녀의 활약을 다른 용병들이, 누구보다 애덤 오빠가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려우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엠마를 영웅이라 인정했다면 누군가는 바다에 빠진 그녀를 구하려 했을 터다. 엠마는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마 인정받지 못하리라. 
그녀는 마자르인이니까. 
한마디로 아무도 그녀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 단 하나의 질문. 팔크는 약속대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스승님."
이내 니콜라가 걱정스레 부를 때까지 그는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의 목소리를 듣고 꿈에서 깬 듯 고개를 들더니 팔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어."

 

- 팔크는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어떤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냉철한 눈으로 말했다. 
"암살기사 에드릭에게 조종당해 영주님을 해친 자는 누구인가. 그건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가지고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니콜라가 잘 이해하도록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그건 너도 알 수 있을 터다. 아니, 꼭 알아야만 한다. 니콜라, 조그만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생각하거라. 너에게는 소질이 있다.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용기가 있다. 우리는 이성과 논리로 마술을 격파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해 보여라. 그리고 때가 되면 주저하지 말고 의무를 다하거라." 

 

- "저희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때로 타인의 비밀을 폭로합니다. 그럴 목적으로 마술을 쓰는 일도 적잖게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암살기사보다 더 해를 끼치기도 하지요. 저희의 사명을 완수하고 스스로를 제어하기 위해 저희는 진실을 밝힐 때마다 어떤 의식을 거행합니다." 

 

- 식사가 대강 끝나자 술자리로 옮겨 와인과 맥주, 벌꿀주가 주역으로 등장했다. 한껏 들뜬 오빠는 이볼드 사무스를 불러 오늘의 승리를 노래로 불러보라고 명했다. 이볼드는 공손하게 그 명을 따라 긍지 높은 솔론 영주 애덤과 그 기사들이 용맹스레 저주받은 데인인들을 향해 돌격하는 광경을 노래했다. 노래 속에서 그들은 아름다운 영웅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볼드는 승리의 장면을 '주름 한점 없는 서코트를 걸치고 거울처럼 깨끗한 검을 높이 들었다'고 노래했다. 기사들이 싸움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음을 비아냥대는 것이다. 하지만 홀에 모인 기사들은 음유시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신들의 영예를 칭송하는 노래에 취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다. 
 
- "좋아! 나의 용맹스런 전사들이여, 연회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오늘 밤은 곳간이 빌 때까지 마시고 취하라!" 
팔크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영주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 경사스런 연회를 방해하게 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꼭 영주님께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검붉게 변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손에 잡은 듯이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팔크와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오빠와 기사들이 뒤늦게 달려온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오빠는 그 사실을 지적당할까 내심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것을 감추듯 오빠는 한층 더 언성을 높였다. 
"피츠존 공,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구려. 동방에서 보고 들은 신기한 이야기라도 들려준다면 연회가 한층 더 흥겨워지겠군."

 

- "그렇습니다. 검을 손질하는 데 돼지기름을 쓰지는 않죠. 저는 올리브기름에 동방에서 나는 클로브 기름을 섞은 기름을 쓰죠. 솔론섬에서는 무엇을 쓰는지 모르지만, 금세 빛깔이 탁해지고 냄새도 역한 돼지기름을 쓰지 않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돼지를 만져본 적 없는 자, 사라센인 스와이드 나지르는 우리가 검이 녹슬지 않도록 돼지기름을 바른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지금까지 그걸 믿었습니다."

 

- "정확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마술사가 낭설에 현혹되다니."
"거들먹거리지 마라. 너희가 검에 무엇을 바르든 내 알 바 아니다!"
"허나 그 착각이 너의 무죄를 입증했다."

 

- 기사들은 둘째 치고서라도 병사들 중에는 엠마와 함께 싸운 자들도 있을 터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려는 자가 없었다. 오늘 싸움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건 엠마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할 엠마는 너무 강하다. 제 키보다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홀로 적선에 뛰어들어 일대일 승부로 적장을 베어버렸다.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그녀의 활약에 대한 질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있으리라.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때가 되면 주저하지 말고 의무를 다하거라. 
그것은 저주받은 데인인과의 결전이 끝난 뒤, 팔크가 니콜라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말이 평소에 자주 일렀던 덕목을 언급한 것인 줄만 알았다. 주께 감사하라 왕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처럼 제 의무를 다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콜라는 지금 그 말에 뭔가 비밀이 감춰지기라도 한 듯 거듭 그 말을 되뇌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니콜라는 이내 살며시 고개를 들어 팔크를 보았다. 
저편에 있던 팔크 역시 니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니콜라의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스승님. 대체 저한테 얼마나 더 귀찮은 일을 떠넘길 생각이십니까..."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눌한 발음의 잉글랜드어로 외쳤다.
"모두 멈춰요!"

- 내가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았기에 알아들은 것일까. 아니면 엠마가 잉글랜드어를 알아듣는다는 팔크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엠마는 나와 니콜라를 돌아보며 어두운 자줏빛 입술연지를 바른 입술로 미소 지었다. 
"눈이 밝구나."

 

- "이 섬에 갇혀 있던 포로가 주군으로 모시고, 전 영주님이 경의를 표했던 저주받은 데인인... 당신은 이볼드의 노래에 등장하는 '왕의 후계자'죠?"

 

- 나는 보았다.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 팔크는 웃고 있었다. 자애와 준엄함이 공존하는 눈으로 어린 제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저 눈을 안다. 그래, 그날 밤, 아버지가 나를 작전실로 불렀던 밤. 
총명한 딸아, 나를 그렇게 불렀던 아버지의 눈이다.

 

- 이내 그의 두 손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그는 마치 니콜라를 끌어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배에서 내린 밧줄은 부근에 있는 바위에 묶어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이는 할 엠마, 아니, 프레이야 라루스도티르다. 전투용 도끼와 쇠사슬 갑옷은 이미 배에 실었고, 이제 타기만 하면 된다. 그 푸른 입술에 살짝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토르스텐은 같이 가지 않나요?"
어제, 소란이 진정된 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샌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으니 서쪽 해안으로 와 달라는 편지가 내 방에 남겨져 있었다. 
"토르스텐은 기독교도에게 죄를 짓게 했어. 그 책임을 다하기 전까지 나한테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 이야기했어." 
야스미나, 그녀 역시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면 역시 토르스텐을 따라간 것일까.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두 사람 모두 사라졌으니, 야스미나가 죄를 저지르면서까지 토르스텐을 도운 까닭은 영영 알지 못하리라.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간다. 아마 주체할 수 없는 정열 때문이었으리라. 야스미나가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 프레이야는 저주받은 데인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항상 얼굴에 얼룩을 묻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척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얼룩을 깨끗이 닦아내고 하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태양 아래의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 "그날, 아버님이 작전실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건 당신에게 알리기 위해서였군요. 당신은 왜 오지 않았죠?”
"나는 할 말이 없었거든."

 

- "... 지난날 나눈 약속이었지. 로렌트는 나를 구원해 주었어. 그는 몰랐겠지만, 내가 걸쳤던 망자의 옷을 벗기고 산 자의 옷을 걸쳐줌으로써 제정신을 찾게 도와주었지.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지만 로렌트의 아들은 나를 붙잡고 싶은 모양이야." 
오빠는 병사들에게 프레이야와 토르스텐을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만일 붙잡으면 아버지처럼 관대한 처분은 내리지 않으리라. 필시 목을 벨 것이 틀림없다. 아버지는 프레이야를 솔론의 수호신이라고 불렀는데. 그녀가 떠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솔론을 위기에서 구했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하지만 그 말에 프레이야는 금빛 머리채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일시적으로 물리쳤을 뿐이야. 그들은 반드시 다시 올 거야."

"알아요. 아버님께서도 불사의 몸을 가진 그들은 영원히 솔론 섬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 오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다. 저주받은 데인인이 또다시 쳐들어올 것임을. 그런데도 그는 프레이야를 적으로 간주했다. 오빠는 역시 내가 아는 오빠였다. 그는 영민한 군주가 아니다.
나는 바다 저편을 보았다. 저주받은 데인인들이 떠난 곳이자, 지금 프레이야가 떠나려는 저 바다를.

 

- " ...프레이야. 저주란 대체 뭐죠? 아버님은 당신이 이 섬을 침략해 저주받은 데인인들을 몰아냈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신들은 왜 저주받았죠?"
그러자 프레이야는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듯. 맑고 투명한 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100년도 넘게 살아왔다. 그 눈에 고작 열여섯 살 계집애인 나는 얼마나 아둔하게 비칠까.

 

- "그 이유는 로렌트도 알지 못했어. 진실을 알 각오가 되어 있니?"

프레이야에게 일족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면 나에게도 에일윈 가를 책임질 의무가 조금이나마 있다.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람이 분다. 북해의 파도가 솔론 섬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진다. 100년 전부터 그래 왔듯이.
프레이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일찍이 우리는 이 섬에 살았어. 어느 날, 일족의 배신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섬을 침략했지. 많은 동족들이 목숨을 잃었고, 우리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어. 살아남은 이들은 복수를 맹세하며 룬 마술의 힘을 빌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어." 
"복수를 위해 스스로 저주받는 길을 택했단 말인가요?"

"그래."
"배신자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복수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솔론 제도를 가로챈 데인인의 배신자, 제 동족들을 몰아내고 그는 이 섬에서 무엇을 하려 했을까?
분명 노예를 동원해 도시를 세웠으리라. 항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도시는 북해 무역의 중계지로 크게 번영했고, 배신자는 영주로서 군림했다. 
그러나 그는 도시에 살지 않았다. 견고한 작은 솔론에 영주관을 세웠다. 마치 꽁꽁 숨듯이, 데인인이라는 과거를 감추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잉글랜드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으리라. 

 

- "아니면 배신자의 후예를 남김없이 처단하기 전까지는 끝났다고 할 수 없나요?"
"그전에 내 손으로 끝낼 거야. 후손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으니까. 그렇지, 아미나 로렌트도티르?"

(리뷰자 주 : 로렌트도티르, 로렌트의 딸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 "그다음은 뭐, 스승님은 여러 모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거든요."

니콜라는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웃었지만, 그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 "미니온이 누구든 간에 밤바다를 건널 방법은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스승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외해서는 안될 인물을 제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병들이 그 바닷길을 알아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이 직감적으로 알아채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숨겨진 길입니다. 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스승님 외에 어느 누가 그런 길을 알아차리겠습니까? 그리고 알아낸 범위 내에서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알아챈 일을 스승님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 "제가 그러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 그 사람은 제가 반론하게 만들려고 그런 소리를 한 겁니다."

- 팔크가 엠마를 고발한 뒤,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제각기 홀의 양 끝단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크와 니콜라의 시선은 분명히 마주쳤다. 니콜라는 그때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스승님. 대체 저한테 얼마나 더 귀찮은 일을 떠넘길 생각이십니까'라고.  

 

- "자신이 '미니온'임을 알아챈 시점에서 스승님은 죽음을 결심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도에게 자살은 대죄이고, 패배를 인정하고 처분에 몸을 맡길 수도 없었죠." 
"어째서?"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니까요."

 

- 니콜라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암살기사들은 앞으로도 유럽에 흘러 들어올 겁니다. 성 암브로시우스 병원형제단도 그들을 쫓아오겠죠. 그런데 첫 사건에서 형제단이 패배해 버리면, 그 뒤를 잇는 기사들의 신용도 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했죠. '암살기사는 성 암브로시우스 병원형제단에게 이길 수 없다'는 원칙을 목숨 걸고 지키지 않으면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하니까요. 명예를 잃은 자신의 목숨을 끊고, 솔론에서 일어난 사건을 병원형제단의 승리로 끝맺음한다. 그걸 위해서는 스승님 자신이 암살기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귀찮은 일은 죄다 떠넘기고 갔어요."

 

- "대체 언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거야? 너는 순순히 그걸 받아들인 거니?"
그러자 니콜라는 한없이 지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합의한 적 없어요."

- "전부 그 자리에서, 스승님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밤중에 점원과 이야기했다는 거짓말을 어떻게 꾸며냈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그 감촉이 남아 있는 듯, 니콜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에 스승님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잘했다, 이제 어엿한 어른이라고. 정말 지독한 사람이에요. 받아들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저를 계략에 빠뜨린 거라고요.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겁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다.

 

-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재회라니요? 아가씨께서는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눈을 내리깔고 어제 일을 떠올렸다. 나는 용병들에게 싸우라 명했고, 니콜라의 말을 내 목소리에 담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오빠 애덤 에일윈이 못 미더운 사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속세에서 할 일이 많아서 신의 집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오빠가 성장할 때까지는." 
설령 그 때문에 평생 솔론에 묶여 살아야 할지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싸움에 몸을 던지는 니콜라에 비하면, 그런 각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부러진 용골. 니콜라, 유럽 어딘가에서 이 말을 듣거든 돌아와."
11월의 북해에서는 아주 드문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늘은 정말 출항하기에 제격인 날이다.
니콜라 바고와 프레이야 라루스도티르.
위기에 처한 솔론을 구한 두 영웅을 태우고 배는 북해를 향해 ...

 


 

- 미스터리의 다양성은 나를 매료시켰다. 다양한 스타일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특수 설정물이라 일컬어지는 놀라운 변화구들이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같은 시간이 반복되고,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에서는 죽은 자들이 활보한다. 츠지 마사키의 <천사의 살인>에서는 천사가 등장하고, 명부가 무대인 <데드 디텍티브>도 있다. 랜달 개릿의 <마술사가 너무 많다>의 세계에서는 마법이 횡행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반적인 세상과는 다른 논리를 도입해 그 특수 논리에 따라 미스터리를 구성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의욕에 찬 나는 지난 2001년 장편 집필에 착수했다.

 

- 내가 썼던 작품은 완전한 이세계를 무대로 한 판타지, 한마디로 하이판타지 미스터리였다. 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지금 이런 설정을 받아들여 줄까. 하이판타지를 선택한 것은 그 편이 더욱 미스터리에 부합하는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적 유희의 역할에는 충실할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웰메이드였다고 할까, 소설을 읽는 재미를 감소시켰음은 부정할 수 없다. 

 

- 고민 끝에 나는 무대를 이세계에서 12세기말 유럽으로 옮기기로 했다. 왜 이 시대를 택했느냐. 이 시대는 사자왕 리처드의 시대이자 살라딘의 시대이다. 이후 잉글랜드는 실지왕 존이 다스리게 된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셔우드의 숲에서 로빈 후드가 활약하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 하지만 내가 이 시대를 택한 것은 그들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니다. 미스터리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위대한 인물. 시루즈베리 수도원의 캐드펠 수도사의 흔적이 남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 2010년 10월 요네자와 호노부 

 

 

 

  

 
부러진 용골(양장본 HardCover)
일본에서 주목받는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미스터리 판타지 『부러진 용골』.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으로, 검과 마법이 통용되는 가상의 섬이라는 판타지적인 배경 속에서 본격 미스터리의 묘미를 선사한다. 런던에서 배를 타고 거친 북해를 사흘이나 가야 도착하는 솔론 제도. 그 섬 영주의 딸 아미나는 동방에서 온 기사 팔크 피츠존과 그의 종사 소년 니콜라를 만나 마술사인 암살기사가 영주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하지만 결국 영주는 자연의 요새로 불렸던 섬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수상한 용병과 기사들, 밀실의 옥탑에서 홀연히 사라진 불사의 청년, 그리고 봉인에서 풀려난 ‘저주받은 데인인’. 마술과 저주가 횡행하는 세계에서 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추리를 펼치는데….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
출판
북홀릭
출판일
2018.01.20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