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8.08.29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과 <진실의 10미터 앞>을 읽었다. <부러진 용골>을 먼저 다 읽었지만, 아직 감상이 정리되지 않아 베루프 시리즈이기도 한 <진실의 10미터 앞>의 리뷰를 먼저 쓰기로 했다.
<진실의 10미터 앞>은 <안녕 요정>과 <왕과 서커스>의 다치아라이 마치가 등장하는 단편집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모두 <안녕 요정> 이후, 즉 성인이 되어 기자로서 생활하는 다치아라이를 보여준다. 모두 같은 주인공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 세 작품을 '베루프 시리즈'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왕과 서커스>에 등장했던 과거 회상 장면 때문이었다. 회사 동료의 자살과 '정말 몰랐어?'라는 질문을 회상하며 얼어붙는 다치아라이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잔인하다면 잔인한 호기심이다- 하지만 이 책에도 해당 내용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내용은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았거나, 정식으로 발표된 적은 없는 비하인드인 모양이다. 그 일화가 기자로서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가치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 - 일종의 트리거로 작용했다고 생각되어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상당히 아쉽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진실 10미터 앞>은 꽤 재미있는 책이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끝을 꿰뚫어 보고서도 그것들을 차분하게 확인해 나가는, 오히려 끝을 알기에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다치아라이의 모습을 주로 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려낸다. 그녀의 언행이 비약적이어 보이는 이유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다만 마지막 이야기였던 <줄타기의 성공 사례>만큼은 여러모로 와닿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이 어째서 논란이 될 수 있는지, 끓여놓은 물이나 팩우유, 두유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지 등의 의문들이 마지막 해명을 읽으면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일본은 생수가 보편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그마저도 '운'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남은 요네자와 호노부에 관한 인상은 음식과 지역색 같은 세세한 특징들, 즉 디테일에 강한 작가라는 점. 그래서인지 시대나 배경이 확실하게 정해진 <흑뢰성>이나 <부러진 용골> 등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작가 스스로는 독자에게도 공정한 단서를 노출시키는 '본격'을 지향하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심리 트릭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렇게 결말을 정해두고 글을 쓴다는 점에서 -사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치아라이에게 조금쯤은 작가 자신을 투영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적으로는 무척 즐겁게 읽었다.
일본의 사회적 문제들을 '공정한 시각'이라는 관점에서 다뤄보고자 한 점도 높이 산다.
베루프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끝.
- 역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는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는데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상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을 때, 뒤에서 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 "늦지 않아 다행이야."
약속 상대, 후지사와 요시나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다운재킷은 지퍼도 잠그지 않았고 셔츠는 단추가 하나씩 밀려 있었다. 뻗친 머리카락은 살짝 번들거렸고 턱도 수염 자국으로 퍼랬다. 벌건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떠 있었다.
- 후지사와는 내가 속한 <도요 신문> 오가키 지국에 올해 배속된 신입이다. 카메라맨으로 채용되었지만 <도요 신문>에서는 카메라맨도 최소 일 년은 기자 경험을 쌓아야 한다. 내가 교육 담당이긴 한데 배속 후 반년 넘게 지난 지금은 그도 자기 업무를 갖고 있다. 처음처럼 늘 데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다.
- 하야사카 마리는 벤처 기업 퓨처스테어의 홍보 담당이었다. 사장 하야사카 이치타의 여동생으로, 이치타가 회사를 차릴 때에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회사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텔레비전이나 주간지에서 마스코트처럼 다루었다. 애교 넘치고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면 미소를 흩뿌리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면 사회자의 심술궂은 질문에도 완벽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퓨처스테어의 경영이 악화되자 당연히 미디어 노출도 줄어들었다.
- "저는 만나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이야. 정말 착한 사람."
"다치아라이 씨가 솔직하게 칭찬하다니 별일이네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 "그런데 왜 다치아라이 씨하고 제가 하야사카 마리를 취재하러 가는 겁니까?"
나는 후지사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 부끄럽지만 어제는 일이 바빠 뉴스를 확인하지 못해서. 제가 뭔가 얼빠진 소리를 했군요."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싸늘한 시선을 던지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그 정도로 바빴는데 바로 다음날 출장에 끌고 가는 게 미안했다. 고개를 저었다.
- 퓨처스테어는 삼 년 전 창업한 신흥 기업이다. 매일 장을 보기 힘든 고령자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일용품이나 의약품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사장 이치타는 창업 당시 26세. 젊은 사장이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신기했는지 비즈니스 잡지에서도 뜨겁게 다루었다. 이치타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정보 혁명은 복지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이치타의 예상은 적중했다.
- "전에 언니가 그랬어요. 잡지와 텔레비전에서 언니 이미지를 멋대로 만들어내려고 했다고요. 아니면 고작 십 분 얘기한 걸 부풀려서 멋대로 언니의 '본심'으로 꾸몄다고요. 하지만 다치아라이 씨만은 달랐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다치아라이 씨하고 얘기해 보니 인터뷰 질문에 대답한 것뿐인데 자기도 몰랐던 생각을 끌어내주었다, 다치아라이 씨만이 진심으로 언니 얘기를 들어주려고 했다고 기쁜 얼굴로 말했어요. 다치아라이씨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예요."
- 그 인터뷰는 기억하고 있다. 정말로 그 인터뷰 기사를 하야사카 마리가 읽었던 걸까? 부족함은 없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고마워요. 마리 씨는 자기가 관심 몰이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퓨처스테어 사업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거라 믿고, 아슬아슬한 질문이나 요구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면서 항상 밝게 웃었어요. 저는 하야사카 마리 씨가 마음에 듭니다."
- "호토 먹어본 적 있어?"
"... 아뇨, 없습니다."
"뭔지는 알아?"
"이름만 들어봤어요. 어떤 음식인데요?"
"야마나시의 명물이야. 난 은근히 좋아해. 오늘 점심은 그걸로 할 건데 후지사와는 못 먹는 음식 있어?"
후지사와가 딱딱하게 말했다.
"오늘 안에 나고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요. 역 안에 뭔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을 텐데요."
"꼭 호토를 먹어야 해. 후지사와도 취재로 출장 갈 때 있잖아. 지역 명물에는 별로 관심 없어?"
"경우에 따라서 다르죠. 오늘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 자전거를 타고 있던 것은 청년이었다. 얼굴이 보였다. 늠름하고 단정한 얼굴이다. 약간 곱슬머리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추워서 그런지 얼굴이 꽤 벌겠다.
- 테이블 역시 가무잡잡하니 윤기가 도는 골동품이었다. 나무젓가락이 담긴 대나무통과 작은 양념통이 있었다. 메뉴를 펼쳤다. 명조체로 음식 이름이 죽 적혀 있다. 사진은 없다. 호박 호토가 맨 앞에 실려 있었고, 그 외에 고명이 다른 호토가 몇 종류 있었다. 메뉴를 보면서 후지사와가 물었다.
"그래서 결국 호토란 게 뭡니까?"
"밀가루 요리."
"빵 같은 건가요? 호박빵?"
"완전히 달라. 보면 알아."
- 호토 외에도 토속 요리가 많았다. 말고기 회에 고슈 지방 와인, 여름 한정 계절상품으로 복숭아 셔벗,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식 세트도 종류가 다양했다.
"돼지고기 생강구이나 치킨커틀릿 정식도 있네요."
정식 세트에 나오는 흰밥은 추가 요금을 내면 조개장을 넣어 지은 영양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조개장도 고슈 특산품인데, 기억에 따르면 분명 재료는 전복이었다. 추가 요금 몇백 엔에 정말 전복밥을 내줄까? 메뉴를 뚫어져라 보았다.
-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고, 식사 시간만이라도 일 생각은 잊도록 하죠."
나는 메뉴에 있는 '포도 돼지 스테이크'가 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었을 뿐인데... 포도 돼지 스테이크에도 흰밥은 나오지만 정식 세트는 아니었다.
- "다치아라이 씨는 설명도 없이 일을 쭉쭉 끌고 나가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죠."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
- 후지사와가 걸쭉한 국물로 꽉 찬 뚝배기를 들여다보았다.
"푹 삶은 우동으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나는 한껏 미소를 지으려 했다. 의식해서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웃고 있다는 걸 모른다.
"호토는 면을 반죽할 때 소금을 넣지 않고 면을 삶은 물에 간을 해서 국물이 걸쭉한 게 가장 큰 특징이야. 보니까 알겠지? '우동 같은 음식'이야."
일회용 젓가락을 시원하게 가른 후지사와가 호토 면을 집어 올렸다. 굵은 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아, 맛있네요."
- 청년이 역시나 말없이 두고 간 포도 돼지 스테이크는 두툼하게 썬 고기를 철판에 구운 요리였다. 한입 크기로 잘려 있었다.
"포도... 돼지 스테이크."
한 번 더 요리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후지사와가 손길을 멈추고 눈길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다치아라이 씨,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뭐가?"
"그거, 돈육 스테이크잖아요. 돼지 스테이크가 아니라. 돼지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는 보통 돈육 스테이크라고 하지 않나요?"
"... 아아."
그럼 포도 돼지로 만들었다고 포도 돼지 스테이크라고 쓴 건가. 이제야 알겠다.
"그런데 포도는 왜 붙여?"
"모르세요? 와인을 만들 때 나오는 포도 껍질 같은 걸 먹여서 키운 돼지예요. 맛있다던데요."
"그런 건 알면서 호토는 왜 몰라?"
"그거야말로 모르겠습니다."
- "역시 다치아라이 씨는 업무 기본 상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게 좋겠어요."
후지사와는 뚝배기에서 시금치를 집어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역자 주 : 일본에서 사회인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로 보는 '보고, 연락, 의논'을 뜻하는 일본어의 첫 글자를 따면 시금치를 뜻하는 '호렌소'가 된다.)
- "뭐, 있을 법하네요. 아부를 잘하고, 비위를 잘 맞춰주고, 그런 의미로 '말을 잘한다'고 했겠지요. 구체적인 직업으로는..."
"직업으로 연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유흥업계 남자라든가."
"오호."
후지사와는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나는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서 말했다.
"다만 거기서 이상한 점은 하야사카 마리와 그 남자는 도움을 받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관계일 뿐이었다는 사실이야. 과연 그 도움을 계기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눠서 말을 잘한다고 평가할 정도로 남자가 마리를 칭찬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유미에게 전화한 시점에서 마리는 혼자였어."
- 조개장을 넣은 영양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냥 조개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이 났다. 전복은 아니었다. 아마 가리비 쯤...
- 새삼 다시 보아도 일본인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는 외모였다. 나이는 스무 살 안팎, 어쩌면 십 대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보았다.
- 어째서 자전거 주인은 문이 열리면 당연히 부딪힐 자리에 뛰어든 걸까. 나는 그 점이 의아했다.
"이 가게 주차장은 넓어서 보통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장소예요. 어쩌면 그 자전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문이 열릴 줄 몰랐던 게 아닐까. 택시 문은 운전사가 기계 조작으로 연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승객인 우리가 문을 잡지 않은 걸보고 아직 열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 게 아닐까."
조금 짬을 두었다가 말했다.
"다시 말해 일본의 택시에 익숙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침묵이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하야사카 마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페르난도의 눈길에서 그는 뭔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어쩌면 정보료를 요구할 우려도 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략적인 교섭보다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성실함이 유효하다고 직감했다. 이런 직감은 잘 맞는다.
- "같은 이유로 찾고 있는 겁니까?"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아니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전혀 다를 바 없 ...
- " ...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저는 그 사람들에게 마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고통을 전하고 싶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아닙니다."
겨울의 한기를 목덜미에 느끼면서 말했다.
"본인에게 책임이 없는 일까지 뭉뚱그려 비난받고 있는 하야사카 마리에게 뭔가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그걸 중개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싫다고 한다면 그대로 돌아가겠습니다."
페르난도는 내 말을 믿었을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뭐라 중얼거렸다.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다. 일본어였을지도 모르지만 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 <진실의 10미터 앞>
- 사방으로 튄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 방송이 더 빨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세상에 이토록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죽음이 또 있을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다른 사람까지 휘말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테고, 바다에 뛰어들어 인근 주민들을 수색에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철을 세우고 죽는 건 폐를 끼치는 인원의 단위가 다르다. 그런 최후가 최선이라니 가정교육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
- 전철은 플랫폼 중간쯤 접어들었을 때 사람을 치고 그대로 십여 미터나 달렸다. 차량에는 피가 진득하게 묻었을 테니 그걸 치우는 데도 돈이 든다. 생각에 따라서는 그 비용은 의미 있는 지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 행위를 스스로 관리할 수 없는 사람이 일찌감치 사회에서 퇴장해 주었으니까.
- 저녁 무렵의 러시아워를 맞이한 기치조지 역 플랫폼에는 나직하게 수런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이 4번 플랫폼에서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우회 루트를 찾아 플랫폼에서 나가려는 사람들이 느릿느릿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하고 있다. 이 도시에서 투신 사고는 드물지 않다. 모두들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 익숙하지만 다들 똑같이 눈썹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고 있다. 아마 지금 선로 위에서 찌부러져 있을 인간은 멀쩡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짜증 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 어째서 인간은 짜증 나게 만드는 쪽과 짜증 낼 수밖에 없는 쪽으로 나뉘는 걸까. 교육 문제가 크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역시 부전자전이라는 영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러먹은 부모가 글러먹은 아이를 키운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또 글러먹은 아이를 키운다. 그렇게 늘어난 글러먹은 인간이 사회기반을 좀먹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멀쩡한 사람이 그 부채를 떠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되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이 연쇄를 저지하려면 타인에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인식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깊이 인식하고 세상을 발밑부터 개선해가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 자각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행동력을 갖추고 있다.
- 가장 먼저 달려온 역무원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인지 어디론가 가버렸다. 플랫폼에서는 호기심 많은 몇몇 사람들이 전철과 플랫폼 사이의 좁은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체는 전철 밑에 깔려 있지만 그래도 팔이나 뭐가 떨어져 있지 않을까 찾는 것이리라. 저열한 행동이지만 무서운 것일수록보고 싶은 호기심 자체는 해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투신 사고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저러다가 차츰 자기가 탄 선두 차량이 생각 없는 사람을 치더라도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것보다 그 이기적인 행동에 짜증을 내게 된다.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예정이 어긋났다고 전화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랫폼을 떠나가는 가운데 한 여자가 플랫폼 가장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발밑에 내려놓은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여자의 뺨은 붉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거기에 뚜렷하게 드러난 비열함에 오한이 들었다. 평범한 구경꾼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았다. 저 여자는 기뻐하고 있다. 됐다. 해냈다. 좋은 장면을 만났다. 그런 속마음이 느껴지는 불쾌한 얼굴이다.
- 여자는 가방에서 먼저 작은 수첩을 꺼냈다. 펜도 꺼내더니 뭔가 적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순식간에 페이지가 몇 장이나 넘어갔다. 손가와 전철, 손목시계에 눈길을 던지며 여자는 메모를 해댔다. 이어서 여자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정지한 전철 아래쪽을 어떻게든 찍어보려고 몸을 내밀었다. 셔터를 눌렀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는 태평한 전자음이 소란 속에서도 희미하게 몇 차례나 들렸다. 시체의 일부, 손목이나 뭔가가 보이는 걸까?
- 여자는 긴급 정차한 차량의 바로 몇 센티미터 앞까지 다가갔다. 차량 안에는 승객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투신 사고'때문에 문이 닫혀 승객들은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어떤 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플랫폼을 보고 있었다. 그건 플랫폼에 남아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전철 운행을 기다리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험악한 시선이 난반사하듯 엉킨 플랫폼에서 그 여자는 남의 눈은 전혀 개의치 않고 휴대전화만 조작하고 있다. 마치 자기만은 그래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 이십 대쯤 됐을까? 학생은 아니다. 뭐랄까, 풍파를 겪은 분위기가 학생다운 면모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구깃구깃한 티셔츠에 무릎이 닳아 찢어진 낡은 청바지를 걸친 게 복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멀쩡하게 차려입을 줄 모르는 사람은 대개 상식도 없다. 발밑에 놓인 가방도 검은 나일론 가방으로 아무리 봐도 싸구려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있고 짓눌린 시체를 들여다보려는 얼굴은 아까보다 발그스름했다.
수치를 모르는 인간의 얼굴이다.
- 플랫폼 밖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늘어졌다. 다시 한번 방송이 나왔다.
"위험하니 전철에서 물러나십시오!"
이번에는 명백히 그 여자를 향한 경고였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지만 눈썹을 찌푸리고 좌우를 둘러보더니 인파로 가득한 플랫폼 어딘가에 있을 역무원을 향한 것인지 휴대전화를 높이 들어 올렸다. 마치 촬영이 모든 일에 면죄부라도 되는 것처럼.
- 여자는 내 귀에 들릴 만큼 크게 혀를 찼다. 제지하는 방송에 짜증을 내는 게 분명했다. 황당무계했다. 이 여자는 누가 봐도 '짜증 내는' 쪽이 아니라 '짜증 나게 만드는' 쪽의 인간이다. 이기적인 행동으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을 짜증 나게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여자가 극히 당연한 역무원의 경고에 짜증을 내다니, 참으로 뻔뻔하다.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인간이 어쩌면 이리도 많을까. 이런 인간이 자기는 무슨 특권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 여자는 잔소리를 듣지 않을 만큼만 뒤로 물러나 녹음을 재개했다. 목소리가 겨우 귀에 들어왔다.
"오후 6시 42분, 사건 발생, 피해자는 즉사 장소는 4번 플랫폼, 6호차 정차 위치 부근 45분, 경찰은 도착하지 않음. 현장에 특별한 혼란 없음. 저녁 러시아워 때라 여파가 큼."
-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피해자의 생사 여부는 아직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죽겠지만 경찰에서 공식 발표를 한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다. 물론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 없이 대충 해댄 소리이리라.
보기 흉한 광경이었다.
- 여자는 휴대전화를 재빨리 열고 귀에 댔다. 흥분한 표정은 당장이라도 전화 상대에게 낭보를 전할 것처럼 보였다. '투신사고'가 그렇게 기쁜가?
- 그 직후였다.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서 환희가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긴장이 나타났다. 주위 온도가 내려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웅크린 채로 꼼짝도 않고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살짝 좌우를 둘러보더니 내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가 일어섰다.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웃는 표정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익힌 듯한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온다. 수백, 수천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역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작았지만 어째선지 똑똑하게 들렸다.
"사람을 선로에 밀어 떨어뜨린 감상은 어떠십니까?"
그 순간, 뒤에서 누가 어깨를 붙들었다.
- 누가 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빳빳한 셔츠에 핀 스트라이프 재킷을 걸치고 수수하다기보다는 지나치게 무난한 짙은 남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또한 사람은 지저분한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 차림이다. 어깨에 걸친 나일론 가방도 실용성만 따진 우악스러운 디자인, 얼굴에는 선크림이나 겨우 발랐을까.
- 나와 그녀, 두 사람의 길이 겹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로 냉대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용건 없이 만나는 사이는 아니다. 오늘 그녀가 내 맨션을 찾은 것도 온전히 일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이 다치아라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어디까지나 자료를 건네주려고 빈 시간에 만난 것뿐이다. 그 후 이런 사건에 얽힐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 "지금 건 자살이 아니야. 사고 아니면 살인이야. 좀 도와줘." 그녀는 세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역무원을 불러올 것. 또 하나는 그녀를 주목하고 다가오는 인물이 없는지 관찰하고, 만약 있다면 디지털카메라로 얼굴을 찍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일을 마치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줄 것.
- 들어보니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피해자가 타고나서 전철이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욕지거리와 문을 걷어차대는 소리에 내가 품은 감정은 아주 희박하기는 했지만, 살의와 흡사했으니까.
- "내가 묻고 싶은 건 어째서 네가 취재하는 시늉을 하니까 범인이 다가왔는가 하는 점이야."
그 질문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전철 안에서 주변에 민폐를 끼친 사람을 플랫폼에서 떠미는 정의로운 사나이에게 주위 사람들의 불편도 생각하지 않고 취재하는 기자는 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일 거 아냐. 얼굴을 보러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
- "게다가 처음에 '사건'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는 내가 범행을 목격했을까 봐 걱정도 되었을 거야."
"그래도 만약 범인이 오지 않았다면?"
다치아라이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좀 민망하고 끝나는 거지. 그냥 허탕. 이 직업에는 흔한 일이야."
- "내가 범인을 꾀어내려고 이 사건 취재에 나섰다는 말, 믿어?"
그녀는 확실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세월에 걸친 인연은 충분히 긴 인연이다. 아무리 복잡한 인간이라도 깊은 마음속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은 나는 끄덕였다.
"그렇게 믿어."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체념의 미소였다.
"하지만, 봐."
그녀가 가리키는 것은 취재하는 시늉을 하는 자기 옆얼굴이었다. 디지털카메라의 작은 화면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희색을 드러내며 음성 녹음기를 쥐고 있다.
"비열한 표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은 거잖아."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무엇보다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일부러 지을 셈이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랬을까? 눈앞에서 사건을 맞닥뜨린 걸 기뻐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이해하면서도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과 그 업에 대해 나는 언제나 무력했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 다치아라이는 카메라를 조작해 내가 찍은 사진을 지웠다.
"지울 거야?"
"응. ... 찍어준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피의자 체포에 관여한 이상 이 사진은 기사로 쓸 수 없어."
"그렇다고 지울 필요는 없잖아."
훗날 어떤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다치아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남아 있으면 어디서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돼. 언제까지고 그런 유혹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항상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 <정의로운 사나이>
- "아니, 그건 아니야. 코디네이터를 수배해서 알려주려고."
"코디네이터?"
-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출장 취재를 할 때, 현지 사정에 밝은 취재 코디네이터를 수배하는 일은 종종 있다. 그들은 사전에 취재 허가를 받아주거나 효율적인 이동 노선을 짜주거나, 해외 취재의 경우에는 통역도 겸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중하게 특집 기사를 다룰 경우의 이야기고, 이번과 같은 돌발 사건에서 코디네이터가 붙은 적은 없다.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에 지원이 붙으면 내 역량을 의심하는 것 같아 영 찝찝하다. 하지만 낯선 땅에 들어가는 데 길 안내만이라도 해준다면 솔직히 고맙긴 하다.
- "까다롭긴 해도 영리한 녀석이야. 자네가 주도권을 쥐고 잘해봐."
-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운 취재인데 괜한 짐까지 짊어진 기분이었다. 기자도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이 있다. 나는 프리랜서와 함께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옛날에 입만 산 프리라이터가 증거 없는 기사를 쓰는 바람에 호된 꼴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치아라이 마치의 기사를 읽은 적은 없지만 월간으로 옮겨간 선배가 "진짜 일하기 거북한 상대야"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어떤 의미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 쓰루 마사타케 씨, 다치아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고인이 된 두 사람이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수배하려는데 어떠신지요. 제 전화번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이 프리랜서를 만나는 게 조금 기대되었다. '사망한 두 사람'이나 '죽은 두 사람'이 아니라 '고인이 된 두 사람'이라고 쓴 게 괜히 기뻤던 것이다. 자리에 몸을 묻고 회신 메일을 썼다.
- "정말 현직 교사하고 약속을 잡았다고요?"
"예."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하고 얽힌 사건이 발생하면 교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무원 중에서도 상당히 방어적인 부류라 취재에 응하지 않는다. 교감이 창구가 되고 교사들은 입을 모아 "교감이 말할 겁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것이 평소의 패턴이다. 그것은 아이를 지키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그들 교사 스스로가 학교 밖의 세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몇 번씩 찾아가 얼굴을 익히고 잡담을 거듭해도 겨우 한두 마디 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상대다.
- 하지만 다치아라이는 시신 발견 이튿날에 두 건이나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 오호라. 선배가 '일하기 거북하다'고 평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 문득 쳐다보니 다치아라이가 쥐고 있는 노란 봉투에서 또 한 장의 사진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시선과 말로 운을 떼어보았다. 3분의 1 정도 보이는 그것은 어떤 노트를 찍은 사진 같았다. 이 일에 얽힌 노트류라고 하면 유서가 틀림없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몇 번이나 유서를 낭독해 주었지만 실물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치아라이는 매정했다.
"아아, 이건 나중에."
이유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전사가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 즉 미공개 사진인 것 같았다. 다치아라이는 노란 봉투를 가방에 도로 넣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아까 산 건 편지지였나요?"
"예. 필수품인데 거의 떨어져서."
- 갑작스러운 사태에 직면하면 당사자는 여유를 잃고 만다. 그런 상황에 취재를 요청해 봤자 나쁜 인상만 준다.
그럴 때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라면 상대도 마음이 차분해졌을 때 읽을 수 있고, 이쪽도 잘 다듬은 내용으로 설득할 수 있다. 물론 예민한 신경을 자극할 때도 있지만 한 통의 편지가 최소한의 위로가 되어, 그걸 계기로 입을 열 때도 있다.
"좋은 게 있던가요?"
"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게 그렇지요."
"남자분도 쓸 수 있는 편지지 여분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이걸 쓰세요."
- 다치아라이가 가방에서 꺼낸 편지지는 전통 한지 같은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확실히 남자가 써도 위화감이 없고, 무엇보다 품격이 있었다. 괘선 폭이 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줄 간격이 좁으면 글자가 작아져 편지지를 꽉 채우기 때문에 처음 만날 취재 상대에게 보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고맙습니다. 이거 좋네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 이런 편지지를 여분을 포함해 휴대하는 다치아라이에게 흥미가 생겼다. 보아하니 아무리 많게 잡아도 삼십 대 초반, 아마 아직 이십 대이리라.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또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 "... 그것도 아직 모릅니다."
서늘한 감각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구와오카가 찔렀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가능성이라는 면에서는요."
-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쓰루 씨, 아직 사인도 발표되지 않았어요.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경찰이 발표하기 전에는 모든 게 불분명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극단적이다. 이토록 자제를 요구하는 건 다치아라이가 뭔가 알고 있기 때문일까?
-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텔레비전보다 먼저 새로운 정보를 얻은 다치아라이의 수완에 대한 감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하는 의문, 만약 내가 주간지 기자가 아니라 텔레비전 관계자나 신문기자였다면 특종을 한발 먼저 보도할 수 있었을 거라는 답답함, 그리고 희미한 불쾌감... 뭐, 질투이리라.
- "아뇨. 적린이 성냥 소재인 줄 알고 있지만 황린이라는 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 "역시... 그것밖에 없어."
다치아라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알코올 때문인지 뺨이 발그레했지만 그 눈은 어디까지나 이지적이었다.
- 취재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다. 하지만 방침은 이쪽에서 정하겠다는 말로 그녀를 묵살하지 않았다. 나는 이 프리랜서에게 같은 사건에 임하는 전우 같은 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제안이라면 진지하게 들을 가치가 있다.
"뭡니까?"
"내일 오후 3시부터 시간을 비워두세요. 아마 막바지가 될 겁니다. 정보는 모아보겠지만 만약 취재가 불가능해질 것 같으면 12시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 유익한 취재가 가능하다면 기꺼이 시간을 비워둘 수 있다. 오사카 취재는 한발 늦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배짱을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치아라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 어떤 취재를 상정하는 겁니까?"
하다못해 그 정도는 알아야 시간을 낼 수 있다. 그런 뜻을 담은 질문이었지만 다치아라이는 냉담했다.
"그것도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제대로 안 풀릴지도 몰라서."
그리고 오늘밤은 더 이상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는 듯이 다시 자작으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 나는 신칸센 열차 안에서 편집장에게 들은 다치아라이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까다롭긴 해도 영리하다.'
확실히 그녀는 그런 느낌이었다. 오사카 쪽은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로 하고 내일은 한마디가 부족한 이 파트너에게 걸어보자.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맥주를 비웠다.
- 신문이나 텔레비전 기자에게 아침과 밤은 승부 시간대다. 유력한 정보원이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대를 노리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이동 도중에 따라붙어 코멘트를 부탁할 때도 있고, 정치가나 경찰 간부 자택에 무턱대고 찾아가는 일도 드물지 않다. 흔히 야간 기습, 새벽 출동이라고 부르는데, 취재의 기본이다. 하지만 주간지 기자는 그러는 일이 거의 없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똑같은 정보를 잡아도 소용없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텔레비전은 점심 뉴스 전까지, 신문은 늦어도 다음날 조간에 맞춰 어느 정도 취재를 마쳐야 하지만 주간지는 며칠의 여유가 있다. 심야와 새벽 취재는 속도를 중시하는 매체에 맡기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만큼 상세히 조사하고 틀을 갖춘 기사를 쓴다는 게 주간지 기자의 긍지다.
- 아침 뉴스로 내보내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사실이니 놀랍지는 않았다. 주간지에서도 일반적인 독자는 자극적인 이야기에는 관심을 쏟는 한편, 정말 비참한 일에서는 눈을 돌리려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리라.
- "동향이라니? 뭐라도 잡았나?"
"예."
아직은 아무것도 잡은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한껏 허세를 부릴 때다. 나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저녁에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보내드릴 수 있을 겁니다."
- 편집장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그 침묵은 무엇보다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허세가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이다. 이윽고 한심하다는 듯 쓴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도권은 자네가 잡으라고 했잖아. 홀랑 이용당하기는. 별 수없는 녀석이네."
"하아..."
"뭐, 그것도 자네 판단이지. 알았어, 맘대로 해 봐. 오사카에는 요코타를 보내지."
요코타 씨는 지난주 이틀 연속으로 철야를 했다. 쉬게 해주고 싶지만 이제 와서 내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못 된다.
"잘 부탁드립니다."
- 다치아라이의 눈 밑이 약간 거뭇했다. 어제는 회의 겸 늦게까지 잔을 기울였는데 그 후에도 일을 한 걸까? 아니면 오늘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 그녀가 말한 막바지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나카세 고등학교는 '고이가사네 정사'의 중요한 무대지만 지금까지 취재로 그곳을 방문할 기회는 없었다. 어제가 일요일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 직접 가 취재하는 건 언제나 위험만 따를 뿐 성과는 적다. 학교 부지 안으로 들어가면 당장 신고감이니 학생들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통학로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상식에도 불구하고 다치아라이가 선택한 취재지가 학교라는 사실이 나는 놀랍지 않았다.
- "아아, 아뇨, 교문 앞에서 세워주세요."
고등학교 정면 맞은편에 작은 신사가 있었다. 도리이에 하치만 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거대한 삼나무가 몇 그루나 뻗어 있어 어둑한 경내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다치아라이는 학교 건물을 등지고 신사로 들어갔다. 석판 바닥에 숄더백을 내려놓고 가방을 열자 예상대로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디지털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
- 다치아라이가 바닥에 웅크리고 카메라 본체에 커다란 렌즈를 끼우며 말했다.
"어제는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죄송했어요."
"아뇨..."
자기도 설명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나?
그녀는 고개만 뻗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온 이유는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과대평가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고 짐작 가는 구석은 있었다.
- <고이가사네 정사>
- 무직 남성, 고독한 죽음. 65세 전 연금 수령 어려워 비관했다.
공교롭게도 전국에서 독거노인의 고독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도쿄에서 한 명, 오사카에서 두 명, 히로시마에서 한 명.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집에서 죽은 사람들이 발견되었다. 언론은 도리사키 시의 사건도 연이은 죽음의 일환으로 다루었고, 선정적인 몇몇 캐치프레이즈로 묶어 다른 사건들과 한 덩어리로 취급했다. 개중에서도 도쿄에서 죽은 노인의 일기를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세상과 정부가 얼마나 냉정한지 절절히 기록한 일기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구청 직원이 도와주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라는 글귀는 텔레비전에 반복적으로 나왔다.
- 얼마 후 다가미도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상의 이목을 별로 끌지 못했다. 다소 난해한 데다 감정적인 불평불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조만간 죽는다. 바라건대 이름을 새기는 죽음을 맞고 싶다.
- 드물게 그런 한 줄을 보도한 언론이 있었지만 "고독하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다니 가련하다" 정도의 해설을 붙이는 데 그쳤다.
- "다가미 씨를 발견했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교스케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삼켰고, 그만큼 죄의식이 쌓여갔다. 이런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한밤중에 이불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 다행히 그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뉴스는 풍화한다. 기타큐슈 시에서 국제환경회의가 열리자 언론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대번에 세상은 이름도 없는 죽음 따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교스케는 김이 빠질 정도였다.
- 걸어가는데 익숙한 잉크 냄새가 풍겨왔다.
문득 교스케의 시야에 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길고 키는 훤칠하니 컸다. 짧은 검정재킷에 하얀 민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을 수도 있을 텐데 셔츠 단추는 두 개나 풀었고 청바지에 스니커를 신고 있었다. 두툼하고 우악스러운 검정 숄더백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있었다.
- 경험으로 알아보았다. 그녀는 기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직감은 옳았다. 눈앞의 여성은 교스케와 눈이 마주치자 똑바로 다가왔다. 달아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 둘러대려 했지만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치아라이는 교스케가 우연히 시신을 발견했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거짓말이 들통났다. 그에게 가장 뜻밖이었던 점은 다치아라이가 거짓말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작은 숨을 토해내며 교스케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그 사람을 지켜본 건 아니라서."
"그런가요?"
다치아라이는 낙담한 기색도 없이 다른 질문을 했다.
- "방금 그 질문은 뭐였어요? 아니, 뭐가 궁금한 거예요?"
다치아라이의 질문은 둘 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다치아라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다가미 료조 씨의 됨됨이지요."
"됨됨이라뇨?"
"어떤 성격이고, 뭘 소중히 여겼고, 어째서 고독하게 사망했는가. 그걸 조사하고 있습니다."
- 교스케는 조바심이 났다. 표면적으로 느낀 것은 반발이다. 눈앞의 여자는 죽은 남자의 흠집을 찾아내 돈을 벌려고 한다.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솟아났다. 다치아라이라는 기자에게서 비굴함은 보이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뻔뻔함도 없다. 혹시 태연해 보이는 태도로 그런 부분을 감추고 있는 걸까? 교스케는 알 수 없었다.
-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줄곧 가슴에 남아 있는 응어리를 떨쳐내려면 다름 아닌 다치아라이가 말한 '됨됨이'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교스케는 다가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웃에 살았지만 시끄러운 영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를 조금 더 안다면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 이윽고 다치아라이가 약간 말투를 바꾸어 말했다.
"별로 기분 좋은 경험은 못 될 거야. 마음 상하지 않으려면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마음이 상하다니. 왜요?"
"너도 꽤 시달렸잖아. 그런데 기자가 좋아?"
- 교스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취재를 받고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기자들이 직접적인 폐를 끼친 건 아니다. 하지만 좋으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다치아라이가 말했다.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상대를 찾아가는 것도 일이야. 하지만 권하지는 않겠어. 어쩔래?"
교스케는 남에게 미움을 받고도 태연한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른들에게 정말로 미움을 산 적도 없었다. 다치아라이의 충고를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답했다.
"갈래요. 부탁드립니다."
- 교스케는 정어리 쌀겨 조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쌀겨 조림이 도리사키 시 명물이라는 말도 금시초문이었다.
어째서 이 기사에 동그라미를 쳤을까? 교스케는 다치아라이라는 기자의 서늘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먹고 싶나?"
별로 어울리지는 않았다.
- "아버지가 차갑다고 생각했어요. 분명 다가미 씨는 불편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힘없는 사람의 필사적인 부탁이라면 들어줘도 되지 않나 싶었어요. 싸우기까지 했는데 아버지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넌 학교를 오갈 때 다가미 씨의 집을 살폈구나."
교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사람이 죽을 걸 알고 있었어요. 음식을 가져다주는 건 저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우노스케 씨가 범죄자라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갑작스럽게 다치아라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야!"
너무 강한 목소리에 교스케는 움츠러들었다. 다치아라이는 교스케를 똑바로 바라보며 절절하게 말했다.
"넌 몰랐어. 네가 의사야? 아니잖아. 다가미 씨를 겉으로만 보고 이제 곧 죽을 사람이라는 걸 알 수는 없어. 다가미 씨가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쇠약하다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어? 알았다고 해도 평소 말도 나눠보지 않은 사람에게 매일 음식을 가져가다니, 정말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아?"
-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스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 다가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분히 생각해. 만약 다가미 씨 요구를 들어줬다면 어땠을 것 같아? 그랬는데 다가미 씨가 죽었다면? 히노하라 인쇄의 현역 사원이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죽은 셈이 돼. 누가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겠어! 히노하라 교스케, 고개 들어!"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네 아버님은 널 걱정하고 계셨어. 다가미 씨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을 했다.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공포에 질려 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아들은, 너는, 다가미 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 그 녀석은 아직 어린애다, 선을 긋는 게 뭔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교스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소중한 거야. 그걸 지니고 있는 너는 정말 다정해. 하지만 다가미 씨의 부탁은 정상이 아니었어. 사람의 선의를 이용하려고 한 것과 다름없어. 그런 말에 언제까지고 사로잡혀서는 안 돼. 잊어. 잊는 수밖에 없어."
- 어느새 교스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못 해요. 어떻게 잊어요."
다가미 료조의 마지막은 히노하라 교스케에게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 되었다. 다치아라이의 표정에 아주 잠깐, 절망적인 비애가 비쳤다.
그 표정이 사라지자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늘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내가 결론을 내줄게. 똑똑히 들어, 그리고 기억해."
나직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영혼까지 닿을 것처럼 힘찼다. 그녀는 말했다.
- <이름을 새기는 죽음>
- "뭐 이상한 점이라도?"
"아니..."
나는 그만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말았다. 겨우 시선을 떼고 말했다.
"실례지만 너무 젊어 보여서, 당신이 다치아라이 씨라는 걸 아직도 조금 믿기 어렵군요."
다치아라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군요. 젊었을 때는 연상으로 보는 사람은 있어도 연하로 보는 사람은 없었는데..."
동양인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녀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제 동생은 당신이 긴 머리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 벌써 십오 년도 지난 일이네요."
그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손목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요바노비치 씨. 메일로 연락드린 것처럼 저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일을 마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몇 시에 어디에 있을지 지금 단계에서는 저도 모릅니다. 요바노비치 씨는 오늘 다른 예정이 있나요?"
- 정부 기관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다른 길이 없다. 일본에 온건 그 일 때문이지만 이 도시에는 오로지 다치아라이를 만나기 위해 왔다.
그녀는 내 여동생의 친구였다. 동생은 일본에 있는 동안 여러 일본인들과 친구가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녀는 특히나 흥미롭다고 평가했다. 그녀를 만나는 일은 내가 일본을 방문한 목적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다치아라이는 표정이 별로 풍부하지 않아 언뜻 보면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다치아라이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나 싶어 당황하거나, 아니면 일본인에게 잘못된 인상을 품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다치아라이의 표정이 빈약한 건 그녀의 버릇 같은 것이고 사실은 무척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다치아라이의 쌀쌀한 태도에는 그녀의 친구들조차 당혹스러워했다는 말도 들었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치아라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점은 들은 바와 같았다.
- "이 도시는 산이 두 면을 감싸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면도 바다에 접하고 있어 대단히 방어하기 쉬운 지형입니다. 때문에 일본에 내란이 있었던 시기, 대략 16세기경에는 유력한 전사의 일족이 이 도시를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현재 그 일족의 흔적은 거의 없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신전이 꽤 유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길은 이대로 똑바로 가면 그 신전까지 이어집니다. 신전에서 모시는 건 하치만이라는 전투의 신인데, 일본인은 싸움과 별 상관없이 신전을 찾습니다. 신전에는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공물이 많습니다. 가장 많이 바치는 건 에마라고 하는 신성한 그림이 그려진 판자인데 무척 저렴합니다. 그 신전은 이 도시 주민들의 마음의 안식처로 소개되는 일이 많은데, 사실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다치아라이가 이런 설명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니 왠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말했다.
"다치아라이 씨, 도시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동생은 아마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제가 일본에 온 건 업무 때문이고, 이 도시에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 그러신가요."
"그리고..."
다치아라이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익살스럽게 말했다.
"제가 지루해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치아라이가 처음으로 입가를 살짝 누그러뜨린 것처럼 보였다.
- "대학 도서관에서 발생한 화재를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친구 중에 연구자가 있는데 그 친구 말에 따르면 그 도서관에는 대단히 귀중한 고문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도, 특정 분야의 학자들에게도 그 화재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파괴로 기억장치를 잃는 슬픔은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눈을 내리떴다.
"... 그 슬픔은 당신이 훨씬 깊이 이해하시겠지요."
- "혹시 보험 회사에서 일합니까?"
다치아라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실례, 어디라고 하셨죠?"
"보험 회사."
그녀는 훌쩍 입가를 누그러뜨리더니 지금까지 보여준 차가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무척 인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 것 같다. 동생은 다치아라이의 이런 얼굴을 보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따스한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치아라이는 감정의 표출을 부끄러워하듯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틀렸습니다. 당신 추론은 합리적이지만 저는 보험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제 일은 조금 더..."
그녀의 유창한 영어가 한순간 흐트러졌다. 나는 그녀의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 "요바노비치 씨, 말씀드릴 기회가 없어 죄송했습니다. 제 직업은 기자입니다."
- 다치아라이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택시가 떠나간 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엿새 전, 열여섯 살 소년이 세 살 여아를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조사하고 기사를 써서 잡지에 팔 생각입니다."
- 그렇게 말하더니 다치아라이는 시선만 돌려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귀중한 시간이니 관광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자 햇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 그녀가 관광을 권하는 이유는 대충 알겠다. 하지만 아이가 아이를 죽인 사건은 확실히 비극적이기는 해도 드문 일은 아니다. 나는 비참한 사건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걸음을 뗐다.
- "요시코의 진술에 따르면 아파트 예비 열쇠는 요시카즈에게만 줬다고 합니다. 그는 범행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해 안 되는 점이 있다면 물어보세요."
다치아라이의 설명은 대단히 명료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녀가 이 사건에 아무런 사심 없이 일상적인 업무의 하나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 "현관은 거의 정확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군요."
혼잣말인 줄 알았지만, 다치아라이가 혼잣말을 한다면 당연히 일본어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업무 중에도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저 아파트의 평면도를 조사해 뒀습니다. 현관에서 부엌을 지나 하나 있는 방까지 일직선 구조입니다. 현관 정반대 쪽에 베란다로 나가는 유리문이 있을 겁니다. 이웃은 그 유리문 너머로 요시카즈의 범행을 목격했습니다."
- 나는 물었다.
"그걸 알면 뭐가 어떻게 됩니까?"
"사건 당일 날씨는 종일 맑았습니다. 목격자가 본 요시카즈는 저녁노을 속에서 가린에게 나이프를 내리꽂았다는 뜻이 됩니다. 목격자 여성의 시야는 붉게 물들어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다치아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 세밀한 묘사를 거듭하면 보다 독자가 열광하는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원고 단가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평판이 높아지면 다음 일을 얻기 쉬워지지요."
- "다치아라이 씨, 당신은 어째서 기자가 됐습니까?"
그녀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잊어버렸습니다."
- 차들이 뒤엉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건축 자재를 잔뜩 실은 트럭이 도로를 막고 아까부터 우회전 타이밍을 재고 있다. 검정색으로 통일한 택시 안은 시원했지만 외부와의 기온차가 너무 커서 썩 좋지는 않았다.
"당신은 아까 제가 자본주의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는데..."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요. 가령 당신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치아라이 씨, 당신은 어떤 식으로 본인의 직업을 정당화합니까?"
- 그녀는 내 질문에 경솔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더니 마지막에는 고개를 저었다.
"정당성을 묻는 질문은 대단히 무겁습니다. ... 저는 조사하는 걸 좋아하고, 남보다 잘하기도 합니다. 그걸 먹고사는 수단으로 쓰고 있을 뿐이지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건 아닙니다."
- 그 말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마도 거기에는 언어를 초월한, 어떠한 미묘한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와 그녀는 문화적 배경이 너무나 다르고, 또한 둘 다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대부분의 경우 마음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도구라고 할 수 없다.
- "적어도 당신은 자기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 아시겠지만 저는 당신이나 당신 직업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실례지만 누구나 다른 사람이 집안을 들여다보면 싫어합니다. 말하자면 당신 직업은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 "그 견해는 당신의 개인적 경험과 상관있습니까?"
다치아라이의 목소리는 무척 차분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요바노비치 씨, 만약 그게 당신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떤 경험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당신에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 내가 먼저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원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은 필요 없었다. 그것은 옛날 일이고, 이미 잘 정리된 체험이었다. 나는 좌석에 몸을 깊이 묻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당신 동업자들도 잔뜩 찾아왔습니다. 서유럽에서, 미국 대륙에서, 물론 아시아에서도. 저는 처음에 그들이 우리를 구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역사가 가져온 결과를 세상에 알리고, 공정한 평화를 되찾도록 도와줄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국의 세 건달들 중에서 한 사람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세 사람은 모두 많든 적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고 모두가 건달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 동업자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자연히 밝혀지는 법이라고. 그게 신의 섭리라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한쪽이 악인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왔던 겁니다."
- 다치아라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들은 결론을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조금 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 우리를 구해준 캐나다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엔기 밑에서 우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최대한 공정하려 했고, 우리에게 음식과 연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당신의 동업자들이 준비해 둔 결론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 캐나다인은 공정하려고 노력한 탓에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당신들 때문에 파멸했습니다. ... 실례, 그들 때문입니다. 원래 그런 일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정당화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다치아라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마치 내 이야기를 듣기는 했나 싶을 정도였다.
- "제가 조사하는 사건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당신을 향한 제 대답입니다. ...들어주시겠어요?"
나는 잠자코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클립으로 모서리를 집은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 "요바노비치 씨는 '오타쿠'라는 일본어를 아십니까?"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치아라이와 나누는 이 대화가 섬세하고 미묘한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이럴 때 잘 모르는 어휘를 뻔뻔히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다치아라이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어째십니까?"
"그 표현을 사용하면 상황을 간단히 전할 수 있지만 저는 사용하지 않는 쪽이 더 좋습니다. 이 어휘는 표찰 labeling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마쓰야마 요시카즈는 다시 말해 특정 소수파의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꼭 성도착증과 직결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고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 나는 다치아라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끼어들었다.
"아마도 여러 문화권에서 대단히 자주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편견일 테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가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물론 정말 단순한 편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본능을 자극하지 않는 취미가 과연 있을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다치아라이는 작게 끄덕이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마쓰야마 요시카즈의 방에 어떤 물건들이 있었는지, 그의 책장에는 어떤 책이 있었는지 전부 드러났습니다. 냉정하게 볼 때 그것들은 유별나게 양이 많거나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취미와 범죄를 연결 지었습니다."
-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다치아라이가 일관되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당신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아는군요?"
"문제?"
그녀는 그렇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 약간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 수기가 공개되었다는 겁니다. ...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공되지 않은 채로 공개되어 버린 게 문제입니다."
- "이건 마쓰야마 요시카즈 본인이 쓴 게 틀림없을 겁니다. 피의자의 육성이지요. 그리고 요바노비치 씨, 정보를 다룰 때 가장 피해야 할 일은 당사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일입니다. 방금 전 당신은 진실은 언젠가 자연히 밝혀진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진실이란 그렇지 않으면 곤란한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당사자의 이야기는 물론 필요합니다. 당사자의 말이 빠진 르포르타주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가공이 필요합니다. 말을 깎아내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덧붙일 때도 있습니다. '사태에 정통한 인물의 담화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르포르타주에 우리 스스로의 말을 포함시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이 수기는 그런 가공을 거치지 않았어요. 날것 그대로입니다. 이런 건 위험합니다. 공개된 게 문제라고 말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다시 말해서, 하고 웅얼거리다가 겨우 덧붙일 수 있었던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그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까?"
아마도 내 부족한 이해력 때문이겠지만 다치아라이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요. ... 사실을 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 "마쓰야마 요시카즈는 나이프를 자기 손의 기능을 확장시켜 주는 도구라고 썼습니다. 도구를 인체 기관의 연장으로 파악하는 건 상식적인 인식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리고 사회적 기능을 도구로 파악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면 요바노비치 씨, 당신은 우리가 하는 일을, 인간의 어떤 기관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나는 그녀에게 시험받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질문의 대답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눈이지요."
"하지만 눈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요바노비치 씨도 분명 아실 겁니다. 눈이란 사람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기 위한 기관입니다. 착각으로 점철되어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비추지 않아요. 결코 눈이라는 기관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보기 싫은 것을 차단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사실을 조정하고 주의 깊게 가공합니다. 그건 실제의 눈이 하는 작용과 같습니다."
- "결국..."
나는 천천히 말했다.
"사실을 밝히는 건 당신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눈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맛은 훌륭했지만 내 마음은 씁쓸했다.
다치아라이의 말은 낭만주의를 배제한 냉철한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빈약한 궤변이다.
과거 세상에서 최초로 전화 시보가 실용화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인은 이렇게 말했다. "시각은 라디오 시보를 기준으로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디오 시보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편리해졌습니다. 전화 시보로 조정하면 되니까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치아라이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 방향을 유도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들 아닌가?
- ... 나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다치아라이가 하는 말은 완전히 사실로 보였다. 나의 조국을 찾은 기자들은 진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다치아라이의 말은 그 구조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들과 그들의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 의해 진실은 우로보로스처럼 무한하게 생산되고 있었다. 그 뱀의 원 안에서 '언젠가 옳은 일이 전해지리라'고 믿었던 나는 말마따나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다치아라이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와 만찬을 함께할 마음이 사라졌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은 사람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십오 년 전의 다치아라이는 내 동생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하마쿠라 시 방문은 실패였음을 인정했다. 점심때가 지나자 습기와 배기가스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지독히 뜨거워져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저 육교를 건너가야 합니다."
다치아라이가 말했다.
"... 함께 가든, 돌아가든."
- 나는 그 뒤를 잠자코 따라 걸어갔다. 다치아라이는 내 실망감을 충분히 눈치챈 것 같았다. 아마도 자기의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예상했으리라. 그럼에도 굳이 그 말을 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착각하는 눈으로 존재하는 게 그녀의 긍지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 왜 그러는지 물을 기력도 잃어가고 있었지만 다치아라이가 갑자기 일본어로 뭐라 짧은 쾌재를 외친 이유는 궁금했다. 가까이 다가가보았지만 그녀는 내 존재를 잊은 것처럼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관되게 냉정했던 표정도 흥분으로 상기된 듯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묻자 다치아라이는 나를 돌아보더니 두세 번 크게 손을 흔들었다. 뭐라 말하려는 것 같은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한 번 크게 숨을 내뱉더니 표면상으로는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영어가 나오지 않아서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그만. 조금 더 교묘하게 숨겨놓았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고 숄더백을 열어 내용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 이 육교 난간 바깥쪽에 있는 걸까? 나는 잠자코 다치아라이가 보고 있던 것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치아라이는 내게 뻗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면서 언어를 영어로 바꾸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만약 지문이라도 묻혔다가는 상당히 복잡해질 뻔했습니다."
- 나는 기억력에 자신이 있다. 그 힘이 평소처럼 내 사고를 크게 도와주었다. 나는 내가 다치아라이와 나눈 대화 속에서 품었던 위화감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그녀가 이 하마쿠라 시를 방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치아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 "동생이 당신에 대해 했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내 조국의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다치아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다치아라이 씨, 당신은 공정하군요."
- "아닙니다. 가야 할 곳은... 불에 타버린 도서관입니다."
그 순간의 다치아라이 표정은 볼만했다. 그녀는 놀라면서 웃었고, 쑥스러워하면서 화를 냈다.
- 우리의 짧은 여행의 종착점일 도서관 터는 검게 그은 흔적에 무한한 예지와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 슬픔이 감돌고... 있지는 않았다.
-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을 하나로 뭉쳐서,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며 아무도 못 알아보도록 고백했습니다. 요바노비치 씨, 저는 요시카즈의 마음이 정말로 명료해 보입니다."
- 내게는 명료해 보이지 않았다. 어중간하고 모호한, 모순을 품은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본인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다치아라이가 타인의 고충에 특별히 예민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잡초들 가장자리에 부자연스럽게 아무 풀도 나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묻어둔 걸까요?"
"아마도."
"도구가 필요하겠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치아라이는 숄더백을 열어 안에서 원예용 삽을 꺼냈다. 이쯤 되니 나도 황당했다.
"그런 것까지?"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서요."
-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정말 공정했습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당신도 나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의 비유는 특이했습니다. 신전을 마음의 안식처라고 표현한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저건 심장이니, 저건 위장이니, 아마도 일본어로 흔히 쓰는 표현을 억지스럽게 영어로 바꾼 듯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당신의 영어는 지나치게 유창했어요. 저와 의사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니까요. 전부 제게 요시카즈의 의도를 추측하게 하려고 그런 비유를 쓴 거였군요."
다치아라이는 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들릴락 말락 하게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처음에는."
- 다치아라이는 어시장을 뭐라고 표현했던가? 그렇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도시의 위장이라고.
- 간선도로를 대동맥에, 어시장을 위장에 비유했을 때 기억을 잃은 뇌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기억'이라면 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전에 다치아라이에게 불에 탄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며 아무도 못 알아보도록 고백한다. 나는 그 심경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시 기능을 인간의 육체에 비유하는 사고방식은 주목할 만했다. 마쓰야마 요시카즈는 수기에 가족을 인간의 도구로 본다는 생각을 적어놓았다.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그 부분은 읽는 사람을 수기의 진의로 유도하는 열쇠였으리라.
- "그에게는 힘겨운 일이 되겠군요. 그는 공포로부터는 달아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누나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뭐, 열흘 정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열흘만 지나면 죄책감은 잊을 거라는 말인가? 물론 모든 죄책감은 언젠가 잊힌다. 하지만 열흘이라니 너무 짧지 않은가?
-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다치아라이는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잘 들으세요. 요바노비치 씨, 범인이 요시카즈라고 생각하는 건 여론입니다. 요시코라고 생각하는 건 요시카즈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구속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하지만 당신이 오늘 조사한 걸 기사로 쓴다면 그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눈이 됩니다. 마쓰야마 요시카즈 범인설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기사가 될 테니까요. 당신은 이 나라의 여론이 마쓰야마 요시카즈를 단죄하는 방향으로 기울었고, 그의 사생활까지 폭로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건 '눈'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치아라이는 옹고집으로 침묵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뭔가 말하려다가 삼키고 있다. 나는 조금 흐뭇해졌다.
- "어떻게 당신 직업을 정당화하느냐는 제 질문에 당신은 이 사건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답에 대한 해설도 해야 합니다. ... 하지만 당신이 말하기 힘들다면 제가 말씀드리지요. 다치아라이 씨, 착각하는 건 눈이 아닙니다. 눈은 렌즈에 지나지 않아요. 빛만 있으면 모든 걸 비춥니다. 만약 영상이 일그러진다면 그건 주변 근육 때문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차단되어 버린다면 그건 ... 뇌 때문입니다. 당신이 단순히 눈으로 존재하려 한다면 뇌에 충실해야겠지요. 뇌가 보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 당신 직업을 눈에 비유한 제 말에 당신은 동의하지 않았지요?"
"...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는 일이 눈의 연장이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다치아라이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 "당신은 불쾌했을 겁니다. 수기를 흘린 경찰은 그게 마쓰야마 요시카즈의 무죄 고백인 줄 몰랐습니다. 그걸 공개한 사람들 역시 그걸 알아보지 못했고, 누구도 요시카즈가 사면초가에서 쓴 메시지를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 수기를 그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증명하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설사 석방되더라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요. 이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수기가 존재했다는 건 사실이다'라고요. 하지만 그건 '눈'의 변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레스토랑에서 사실은 가공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아닙니까?"
- 다치아라이가 시선을 돌리고 뭐라 중얼거렸다. 일본어라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 일본어를 쓰다니 공정하지 않다. 다치아라이도 그 점이 부끄러웠는지 나를 흘겨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은 상태로 그 질문에 답하는 건 제게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 "당신은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 가련한 소년을 조금이라도 구해주려는 것 아닙니까?"
나는 깨달았다.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선명한 여름 햇살 속에서, 다치아라이의 안색에 홍조가 감돌았다. 그게 과연 하루종일 태양에 달구어져 그을었기 때문일까?
"다치아라이 씨, 제 동생은 당신을 잘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나서도 당신의 성격은 동생이 보았던 그대로 변하지 않았군요."
"... 저는 서른이 넘었습니다. 십 대 때와 같다는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친구로 둔 제 동생은 행복했을 겁니다."
- 나는 떠올렸다. 십오 년 전, 동생의 말을.
일본에 친구가 생겼다. 순진한 아이, 정직한 아이, 다정한 아이가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센도라 불렸던 소녀는, 굉장히 부끄럼을 타는 아이였다고 했다. 지금 그 부끄럼쟁이 소녀는 기자가 되어 긍지를 가슴에 품고도 쑥스러워서 그 긍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 ... 동생은 지금도 내 추억 속에 꽂힌 나이프 같은 존재다. 그녀의 추억은 언제나 불길과 잔해, 사라진 조국 유고슬라비아와 무력했던 내 모습을 동반하고 있다. 시간은 살아남은 자 위에 켜켜이 쌓였다.
"다치아라이 씨, 괜찮다면 예정대로 저녁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제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려주십시오."
"만약 당신이 제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다치아라이는 말했다.
"그녀의 추억을 위해, 기꺼이."
- 역을 떠나가는 열차가 보였다. 도쿄로 향하는 급행열차이리라.
-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 나는 전부터 도나미 부부를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잡화점으로, 나도 가게를 돕는다. 이 마을도 노인은 늘어나는데 상점은 차례로 문을 닫고 있다. 특히 시가지에서 떨어진 이곳 오사와 지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장보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미니밴을 사서잡화뿐만 아니라 식료품이나 의류도 다루는 이동 장사를 시작했다.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이 주변에서는 나름대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축에 든다. 보통 나는 가게를 맡지만 이따금 이동 장사에 대타로 나설 때도 있다. 도나미 부부도 미니밴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사곤 했다. 괴팍한 노인도 적지 않은데 그 부부는 늘 친절해서 살 물건이 없을 때도 만나면 "고맙습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바 씨는 우리 생명줄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왔다.
제발 그 두 사람은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작더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 머릿속으로 도나미 부부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가령 도나미 씨가 완고하게 피난을 거부하다가 고립되었다면, 조금쯤은 그러게 왜 말을 듣지 않았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시간에 폭우가 쏟아져 세 채의 민가 뒷산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누구 탓도 아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면 이해가 가지만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 "저게 왜 줄타기야."
확실히 구조대원은 와이어를 붙잡고 강을 건넜으니 줄타기라고 하면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지만, 나는 그 점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구출극이라는 표현의 '극'이라는 글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 도나미 부부의 세 자녀는 저마다 도시로 나가 가정을 꾸렸는데 오본에는 돌아오지만 정월에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아들도 후쿠오카의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결혼했다고 한다.
(역자 주 : 오본. 음력 7월 15일을 중심으로 죽은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일본의 명절, 최근에는 양력 8월 15일을 중심으로 치른다.)
- "감자칩?"
동료가 그렇게 말한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나는 한눈에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텔레비전에 비친 건 우리 가게에서도 파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콘플레이크, 헤이조 씨는 평소 장을 보러 가기 어려운 도나미 씨 부부에게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보존 기간이 긴 음식을 사주었던 겁니다."
- "깜짝 놀랐어요. 십 년쯤 됐나요?"
"그래. 많이 변했네."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 학창 시절에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피는 속일 수 없다고, 최근 몇 년 사이 갑자기 이마가 넓어졌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게 말하면서 다치아라이 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선배는 바닥이 넓은 큼직한 숄더백을 메고 무더위를 견딜 만한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길쭉한 눈, 작고 얇은 입술, 무엇 하나 기억과 다른 구석이 없었다. 십 년의 세월도 선배는 비껴간 걸까? 무심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 다치아라이 선배는 그대로네요."
그러자 그녀는 기억에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처하게도 말이야."
나는 용모를 말한 건데 다치아라이 선배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어쩌면 일부러 곡해했는지도 모른다.
- 다치아라이 선배는 대학교 한 학년 선배로 말수가 적고 모임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지만 만나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연구 모임에서는 한껏 쥐어짜였지만 아무리 독한 소리를 해도 악의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몸에 익은 '수동적 학습' 자세를 떨치지 못했던 나는 다치아라이 선배의 행동에서 대학에서는 '자발적 학습'이 기본이라는 걸 통감했다. 지금 하는 일에서 대학 때 배운 지식을 직접적으로 살릴 기회는 없다.
- 하지만 스스로 배우는 자세랄까,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 같은 것을 학창 시절에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을 다치아라이 선배에게 배운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설마 선배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침부터 이어진 육체노동의 피로도 잊고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닭 정도는 키우는 집도 있겠지만 목축을 전문으로 하는 집은 없을 거예요."
다치아라이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청난 속도로 펜을 놀렸다. 나는 문득 뒤늦게 선배가 뭘 알고 싶은 건지 궁금해졌다. 오사와 지구에 상점이 적고, 이동 수단이 부족한 고령자가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 현재 상황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유례없는 폭우가 덮친 직후에 이 주변에서 쇼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조사하러 왔을 리는 없다.
- "저. 그래서... 다치아라이 선배는 뭘 알고 싶은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
짧은 침묵 끝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부분이 있어. 하지만 그게 정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인지 조금 더 조사해 봐야 알 것 같아. 어쩌면 굉장히 단순한 문제일지도 모르고."
"도나미 씨가 산 콘플레이크에 대해 알고 싶은 거죠?"
그러자 다치아라이 선배는 당연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고 끄덕였다.
"그래."
"그럼 왜 그걸 판 건 너냐고 묻지 않는 거예요? 빙빙 둘러서 답답하게."
다치아라이 선배는 펜을 내려놓더니 손을 뻗어 천천히 입으로 찻잔을 가져갔다. 소리 없이 찻잔을 쟁반에 도로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걸 어떻게 묻겠어?"
"왜요?"
"생각해 봐."
그 말을 들으니 순간 학창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안일한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단골손님한테 뭘 팔았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넌 대답했을까?"
- 다치아라이 선배는 메모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폭우가 내릴 줄은 기상청도 예측 못 한 모양입니다. 이번에 구조 관계자에게도 이것저것 여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두 분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저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
- 다치아라이 선배는 산사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구조 활동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함으로써 두 사람을 격려한 셈이다. 단지 말투가 너무 냉정해서 선배의 마음은 도나미 부부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도나미 부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호한 대답만 했다.
"하아, 정말, 죄송해서..."
- 한 마디, 한 마디,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흘 동안 전국의 주목을 받고 구출 장면까지 생방송으로 나갔다는 이유로 부담을 느끼고 이렇게까지 움츠러들어야 하는 걸까? 나는 소방단원으로 도나미 부부를 구조하는 작업을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하지만 두 사람이 콘플레이크를 먹고 사흘을 버틴 사실은 텔레비전에 나가고 말았어. 실수로 그런 건지, 아니면 죄의식 때문에 우회적인 고백을 한 건지는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텔레비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몇 퍼센트는 나하고 똑같은 의문을 품었을 거라는 사실이야."
- "의문에 답하기 위해 기사를 쓰는 건가요?"
길쭉한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직업이니까."
- "어디에도 정보가 없으면 소문은 한없이 무책임하게 불어나. 내가 기사를 써봤자 영향력은 뻔하지만 어딘가에는 정보가 있다는 상황을 만들 수 있어. 조금은 다를 거야."
콘플레이크를 어떻게 먹었는지 아무도 기사로 쓰지 않으면, 도나미 부부가 콘플레이크를 먹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하라구치가에서 음식을 훔쳤다는 소문이 나도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 "이번엔 운이 좋았어."
"운?"
"그래."
- 할 말을 잃은 내 귀에 독백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질문으로 누군가가 고통받지 않을까, 최선을 다해 고민했다고 생각해도 마지막에는 역시 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 나는 언제나 줄타기를 하고 있어. 특별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어. 이번 일은 그저 운 좋은 성공 사례일 뿐이야.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 기자로서 질문하는 게 줄타기라면, 선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이나 기자로 살았는데, 모든 게 잘 풀렸을 리 없다. 선배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슬프게 했고, 몇 명이나 화나게 했을 테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비명과 욕설을 듣게 될 것이다.
- 다치아라이 선배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조금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만 가봐야 해. 오늘은 만나서 기뻤어. 안녕."
- <줄타기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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