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려령] 트렁크

일루젼 2023. 7. 3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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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려령
출판 : 창비
출간 : 2015.05.29


       

아. 정말 좋았다.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굳이 풀자면, 쓱쓱 넘겨보던 피드에서 '공유-서현진 조합이 성공했다'는 내용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로맨틱 코미디도 정극도 잘 소화하는 둘이지만 색감이 좀 다르지 않나? 어딘가 우울한 느낌이 들어가야 잘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인데 좀 묘하네- 하고 생각하다가 무슨 드라마인지 찾아봤다. 넷플릭스 제작의 <트렁크>로, 원작 소설이 있다고 했다. 드라마는 못 보더라도 소설은 읽어볼 수 있지. 어라? <완득이>의 김려령 작가네? 

 

그때부터 살짝 진심이 되었던 것 같다. <완득이>를 재미있게 읽었었지만, 동시에 내게 남은 저자의 이미지는 청소년 성장물을 잘 쓰는 작가였다. 그런데 '김려령'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트렁크가 발견되면서 드러나는 기간제 배우자 서비스가 줄거리이고, 캐스팅된 배우가 서현진과 공유라고? 한 번에 정리되지 않는 의문증을 해결하려면 <트렁크>를 빨리 읽어야 했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은 저자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안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 좋네.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게 정말 좋네.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각 인물들에게 부여된 지나칠 정도의 리얼리티에 매력을 느꼈다. 이런 연들이 엮였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뿐이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각 개인들에게는 충분히 살면서 한 두 번은 겪고 듣고 볼 법한 이야기들 뿐이다. 어디선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 그래서 더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여행지에서 만난 예쁜 문일 수도 있는 문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안쪽의 끔찍함이 버거운 문들이 존재한다. 문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새이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나만이 아는 고통'을 모아간다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고통이 있겠거니 하며, 그것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이 적절하게 성숙해지는 길이 아닐까.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을 선택하고 아니고는 다른 문제지만.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 타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이에게는 타인의 호감이 자기애로 치환되어 받아들여진다. 타인의 불호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남는다. '왜?' 거기에서 발생하는 '거부에 대한 거부'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낳게 된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엄태성'이라면, 정상의 범주 내에서 보여주는 인물은 '진서연'이다.

 

일생에 한 번 뿐이고 그래야만 할 결혼을 '실패할 수는 없다'는 절박감, 자신의 선택은 '실수가 아니었다'는 오기는 너무나도 쉽게 관계를 질식시킨다. 처음이라 서투를 수밖에 없는데 반드시 성공적이고 완벽해야 한다. 인생에 첫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어야 할 것은 결혼 이외에도 많지 않을까. 이를테면, 탄생이라거나 죽음 같은 것들. 그마저도 간혹 두 번 이상 경험하는 이른바 기사회생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자식의 독립/취업/혼사까지만 참고 살다 이혼하겠다는 부부들도 존재한다. 나는 그들이 NM의 부부들보다 행복할지에 대해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원하는 기간만큼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회원의 입장에서 볼 때 NM이 나름의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근무자들을 위한 보호 시스템과 복지가 부족하다 싶긴 하지만.

 

물론 NM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필수적이고 완벽한' 결혼 제도에 대한 환상에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언제나 존재하는 선택의 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한 선택의 결과로 유지되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너무 피곤하다고? 그것도 그렇다. 그래서 수많은 형태의 삶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견딜 수 있는 선택들을 유지하고 있는 결과로써.

 

책을 다 읽은 지금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드라마 쪽이다. 예상되는 줄거리는 발견된 트렁크와 그 내부에 존재하던 서류 또는 사진들. 사라진/혹은 사망한 여주인공. 그녀를 찾기 위해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NM의 충격적인 결혼 서비스. 여주인공에게 집착하는 엄태성의 섬뜩한 스토킹과 그로부터 여주인공을 보호하며 계약 결혼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나가는 남주인공. 만약 이렇게 흘러간다면 드라마로서의 성공은 모르겠지만 원작의 영상화로서는 꽝이다. <트렁크>는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한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한정원의 '다시 만나면'은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음을 전제로 한 작별인사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느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안녕은 보통 그대로 완료다. 

 

한 권의 소설 안에 담긴 사랑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없는 흔들림과 혼란이 있고, 수없는 체념과 거부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경험하며 변화해 가는 - 혹은 그대로 완결 짓는 모든 것 또한 의미 있는 삶이다. 

 

정정된 이미지. 김려령 작가는 '성찰과 성장'을 아주 깊게 관찰한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다. 그리고 유머러스하고, 매력 있다. 

 

만족스럽게 읽었다. 

 

사족으로, 김 차장 역할을 누가 맡게 될지가 무척 기대되는데, 어쩌면 생략되거나 축소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안돼.

 


   

- 마지막 밤이다. 남편은 적당히 친절했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이런 남편만 만나면 직장생활 참 편하겠다.

 

- 오늘 낮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호가든 맥주로 김치냉장고 서랍칸을 채웠다. 깊이가 맥주키와 꼭 맞는다. 남편은 땅속보관 맛지킴으로 설정해 놓고 맥주를 무처럼 한 병씩 뽑아 먹는다. 

 

- 모의결혼도 없이 초혼을 일 년이나 허가하는 회사 방침은 잘못됐다. 검증 안된 초혼의 배우자와 살았던 동료 하나는 목숨이 경각에 달할 만큼 맞고 구조되기도 했다. 귀책사유가 남편에게 있어 환불이 전혀 없음에도, 중도파경 징계로 세 달치 월급을 감봉당했다. 여하튼, 천만다행으로 남편의 주정은 본 적이 없다. 술을 즐기지만 폭주는 하지 않았다.

 

- 회사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회원이 될 수 있으므로 신분은 확실할 것이다. 우리 회사의 이름은 W&L, 웨딩라이프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결혼정보회사로 웬만한 미혼남녀는 의무적으로 가입한다는 설도 있다. 나는 W&L의 VIP 전담부서인 NM(new marriage) 소속이다. NM이 단독으로 쓰는 사옥 삼층에는 보안상 일반사원들이 올라갈 수 없다. NM은 W&L의 한 부서로 위장했을 뿐, W&L이 숨겨둔 비밀 자회사다.  

 

- W&L 대표의 아내이자 부대표가 사실상 NM의 대표다. NM은 와이프팀과 허즈번드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나는 와이프팀 FW (field wife)로 현장근무를 하고 있으며 직급은 차장이다. NM은 미혼남녀를 연결하지 않는다. 대신 직접 아내(FW)와 남편(FH)을 보낸다.

 

- 그러나 베갯머리송사처럼 NM의 정보를 묻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회사는 NM 가입 후 첫 아내를 맞는 회원을 가장 예의 주시한다. NM의 첫인상이며 다음 행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때문에 너무 서투른 신입 FW나 능구렁이가 다 된 고참 FW는 배정하지 않는다. 노련하지만 때가 덜 탄 중고참 정도를 배정한다. 나와의 결혼이 괜찮았다면 또 다른 FW를 맞을 것이다. 나를 만난 뒤 NM을 탈퇴하면 경위서를 써야 한다. 슬쩍 남편의 의중을 떠봤다.    

 

- "결혼 괜찮았어?"
"생각보다. 당신은?"
"나도."
그렇구나. 서로 괜찮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나. 

 

- 그럴 때만 부부의 신뢰를 앞세워 남편의 작은 비밀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다. 아직 걸리지 않은 것의 스릴과 안도를 즐기는 남편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해준 것만도 어딘가. 남편이 내 위로 올라왔다. 열심인 건 알겠는데,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맨 정신에 안되면 주방에 넘치는 술이라도 이용하든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하니까 하나보다 하는 이 맥 빠진 움직임은 뭔가. 여하튼 굿바이, 행복하길.

 

- 할머니는 젊은 오빠를 좋아한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어깨도 주물러준다. 그러나 옆집 오빠는 멀쩡한 아들을 두고 왜 그런 곳에 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보. 아들 손잡고 가슴 설레는 어머니가 어디 있나. 

 

- 대충 계산해도 이미 천만 원 이상의 물건을 구매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개새끼가 비싼 장어를 처먹고 계산마저 할머니에게 미뤘다. 그래도 할머니는 젊은 오빠와의 심장 떨리는 데이트가 좋았다. 혈액순환제를 먹지 않아도 피가 잘 돈다고 했다. 맨날 집들이하는 집처럼 평생 다 쓰지 못할 휴지가 베란다에 쌓이는 이유다. 차라리 NM에 가입시킬까. 옆집 오빠가 끔찍하게 반대하는 재혼도 피할 수 있다. 젊은 오빠보다 더 젊고 멋진 FH가 상시 대기 중이다. 그런데 돈이 문제다. 집 좀 팔라고 할까. 재건축하면 집값이 엄청 뛴다는데, 피켓 만들어서 시청 앞에 서 계시라고 할까. 독신노인의 성욕을 책임져라! 젊은 오빠는 상상 속 섹스파트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곧 현실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젊은 오빠 새끼가 그렇게 밑밥을 뿌렸다. 우리 어머니한테까지 꿔서 갖다 준 돈을 받고도 입으로만 끝냈으면 인간도 아니다. 내가 할머니였으면 잘 때까지 그 돈 안 준다. 갖고 싶으면 제가 벗고 덤비겠지. 일 끝나고 몇 푼 쥐여주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의 연정이 문제다. NM이 단가를 내려 기간제 결혼을 대중화시키면 어떨까. 

 

-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놀 게 뭐 있냐. 한잔하고 자러 가는 거지."
사람들은 할머니가 혼자 있으면 과부가 청승 떤다고 하고, 그런 소리 듣기 싫어 함께 어울리면 남자라도 낚으려고 나온 사람처럼 수군거렸다. 입는 옷마다 한소리씩 거들고 화장까지 트집 잡았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꾸미고 다녀? 지들은 맨 얼굴에 홀딱 벗고 다니나. 그러면서 패션에 관해서만큼은 재야의 고수처럼 구는 무명님이 너무 많았다. 기왕에 그럴 바에, 할머니는 지들도 과부가 아닌 걸 원통해할 만큼 뜨겁게 살았다고 했다.

 

- 한적한 숲에 작은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살림과 식기로 혼자 살면 좋겠다. 쉬엄쉬엄 벽과 바닥에 페인트칠이나 하면서 그렇게 살면. 어디 그런 아담한 집 없을까. 내게 간절한 그것이 시정에게는 심드렁했나 보다.  
"찾아보면 산속에 버려진 집 많아. 운 좋으면 주인이 그냥 살라고 할 수도 있고. 문제는 다른 데 있어. 산속에 여자가 혼자 살아. 그러면 궁금한 사람들이 생겨. 슬쩍 한번 왔다가 호의로 대하면 나중에는 수시로 찾을걸? 그러다가 큰일 나." 
 

- "작품 좋죠? 시점 전환이 좋아요."
쇠막대 눈금자를 재료로 한 카누 작품이었다. 작품명이 '시간'이었는데, 나는 설명이 없으면 제목과 작품을 연결하지 못할 만큼 문외한이었다. 여자는 지적으로 보였으며 전시와도 관련된 사람 같았다. 그런 여자가 왜 하필 내게 왔는지 부끄럽고 난처했다. 미술작품에도 시점 전환이 있구나. 좋은 정보 주셨으니 그만 갔으면... 

 

- "잠깐만요."
뭔가 개운치 않은 부름이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부류의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넘치는 우아함으로 호박엿도 왕실 초콜릿처럼 먹을 것 같은 여자가 불편했다. 차라리 저기 형형색색 머리를 한 일본 관광객들과 합류하는 게 나았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좋다. 급한 대로, 일본인이시죠? 무작정 끼어들어, 무슨 일이세요? 물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저쪽으로 가자고 해야지. 나는 여자의 부름을 듣지 못한 척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여자가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아씨... 
"무슨 일이세요?"
"혹시 오늘 면접 봤어요? 우리 차 한잔해요."
내가 면접 의상을 지나치게 정석으로 입었던 것이다.

 

- 미술관 옆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장 취업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도 아닌데 '면접'이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홀리듯 따라간 것이다. 

 

- 그해 두산은 4연패를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SK에 내주었다. 이듬해와 똑같은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빌어먹을, 4연패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SK 비룡군단은 막강했다. 잘 던지고 잘 치고 잘 막고 팀워크가 좋았다. 

 

-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여자에게 출판사보다 더 진짜 같은 면접을 보았다. 인상이 좋다며 따라오는 종교단체 여자한테 걸린 것처럼 찜찜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동기대부분이 취업하지 못했기에 자존심 상할 것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W&L에 다니다가 기회 봐서 이직할 생각이었다. 일을 하고 있어야 이직이 쉽다는 선배들의 조언도 있었다. 여자는 흔쾌히 다시 만나주었다. 그리고 그때야 그녀가 NM 스카우터인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FW에 대해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 놀라 감각이 상실됐는지도 모른다. 기간제 배우자라니. 말을 바꿔봤자 4대 보험을 적용받는 고액 연봉 접대부 아닌가. 체계적으로 변형된 성매매. 씨발, 나를 어떻게 보고. 좋은 아이템 있다고 언론사 선배한테 찔러줄까. 잘되면 수습 자리 하나는 얻을 것 같았다. 충격! 유명 결혼정보회사의 맨 얼굴! 알고 보니 성매매 알선책! 

 

- "접대부 렌탈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회원은 섹스리스도 있고, 성생활이 불가능한 배우자도 있어요. 조금 다른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끼리 연결해 주면 되잖아요."
"마음만 맞는다고 되나요. 지불한 만큼 누려야죠."
"왜 저를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화류계 기질 없이 예쁘잖아요." 

 

- 한 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 "죄송한데, 제가 소개팅인 줄 모르고 나왔어요."
"백수라 싫은가 보죠?"
"아뇨. 지금은 누굴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스물아홉이면 튕길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냥 편하게 봅시다."
뭘까, 이 남자는. 알바 자리라도 하나 대고 큰소리치든가. 두둑하게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는 건가. 그럼 당장 떡집이나 차리세요. 시정은 성직자의 마음으로 저나 만날 것이지, 대가리가 홍해처럼 쩍 갈라진 새끼를 왜 나한테 보낸 것인가.

 

- "연봉은 얼마예요? 스물아홉에 차장이면 괜찮네요."
"이것도 농담이에요?"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요즘 취직도 잘 안되잖아요. 근데 스물아홉에 차장이라니까 좀 신기해서요. 당연히 정규직이겠죠?"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계산서를 들고 일어났다. 나는 이런 만남을 끝내고 싶을 때, 내가 계산한다. 싫은 남자가 사준 음식 먹고 싶지 않고, 소개팅을 빌미로 뜯어먹고 도망친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아까 식사비 내셨으니까, 여기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실래요? 솔직히 빠스따 값이 너무 비싸서 더치페이할 줄 알았거든요. 하하하. 이건 농담입니다." 

 

- 다음 날, 시정이 녹차 떡케이크를 만들어 왔다. 찜통에 쪄서 만들었지만 시중에서 파는 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단히 잘하는 건 없어도 일단 손댄 것은 곧잘 한다. 아마와 프로 사이에서 프로로 넘어갈 만하면 그만두는 게 문제다. 이 케이크도 그냥 집에서 먹기에는 놀랄 만큼 맛있어도 사 먹어야 한다면, 글쎄다. 

- "어제 너 먼저 갔다며?" 
"너무 참신해서 가까이하기 불편하더라."

"말이 왜 그래? 그 사람 생각보다 착해."

"생각해 봐야 착한 줄 아는 건, 착하지 않은 거야."

 

- 시정은 그의 어디에서 플라토닉을 봤을까. 장담컨대 분위기만 조성됐다면 모텔로 직행했을 인간이다. 손바닥으로 성욕을 가려라. 사람 만나는 거 참 힘들다. 어떨 때는 나도 퇴직하고 NM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다. NM 회원들의 탄력적인 선택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들은 필요한 조건으로 기간제 배우자를 선택한다. 일생을 건 결혼이 아니기에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 현장근무가 우선인 FW들에게는 지정된 책상이 없다. 부장급부터 개인 책상을 배정받는다. 푯말을 뒤집어 ON으로 바꿨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잠시 모니터 옆에 있는 히아신스를 본다. 파란색 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정교하게 만든 조화다. 자리를 비울 일이 많아 생화를 놓을 수 없다.  

(리뷰자 주 : 파란 히아신스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다. 그것을 조화로 꽂아두었으니, NM의 모토와 완벽히 일치한다. 세심하다.)

 

- "얘가 임신 확인하고 케이크까지 준비했어."
"자기는 좋아서 그랬을 텐데, 상처받았겠어요."
"로망은 짧고 의무는 길다. 좀 쉬고 내 책상으로 와. 경호업체 목록 뽑아놨어."

 

- 얼마나 오랫동안 빈자리였는지 운영체제 업데이트만 몇 시간 걸릴 지경이었다. 업데이트 과정을 지켜보며 현장에 나가 있는 FW에게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신문 좀 보시라고요. 저희 다른 거 보고 있어요. 아무 문제없다. 써비스로 뭐 주나요? 이런 대답이 오면 체크해 둔다. 문제 발생 소지가 있으니 주시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거 보면 스포츠 신문은 공짜죠? 하고 되물으면 폭력과 관련한 문제다. 세 번 이상 전화 연결이 되지 않으면 구조대가 방문한다. 문제 회원은 대략 삼 개월 안에 본색을 드러낸다. 그 이상을 참지 못한다. 한 FW는 구조대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FW와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데 남편이 너무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의심을 품은 구조대가 출동했을 때, 그녀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모든 소지품을 빼앗기고 방에 갇혀 구조요청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특이사항이 없었다.   

 

- 하지만 구조대가 출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기간제 부부가 모두 행복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음 선택이 있기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예상과 다른 배우자를 만나면 각방을 쓰기도 한다. 
 

- 박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메신저를 띄웠다. 
[밥 먹으러 가자.]
그런데 박 과장의 대답보다 상무가 먼저 나를 불렀다.
"노 차장,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나왔는데 회포를 풀어야지."

[차장님, 저 마쳐야 할 차트가 있어서 지금 못 가요.]
저게 어디서 머리를 쓰고 있어. 점심마저 상사를 모시고 먹어야 하다니. 억지로 끌고 갈까 보다. 다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 별수 있나. 상무는 내가 책임진다.  

(리뷰자 주 : 과장에게는 차장도 상사다. NM의 내근 장면은 수많은 것들을 암시한다. 거절하는 이와 책임지는 이의 대비는 이후의 복선이 된다.)  

 

- 나는 두 팀을 오가며 서류 심부름을 했고, 김 차장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허물없이 대하는 유일한 선배다. 지금 나와 직급이 같은 것은 약간의 반골 기질 때문이다. 회사가 내심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을 훅훅 드러내고, 중도파경으로 인한 징계로 승진심사에서 탈락한다. 차장으로 정년퇴임하는 게 목표인 사람 같다. 

-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결혼을 하는 걸까요?"
"법적 결혼을 하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거든. 상대한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순탄하게 끝낼 수가 없어.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싫은데 더 큰 이유가 있나. 통통한 발이 곰발로 보이기 시작하면 사는 게 괴롭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은 거야. 그런 면에서 합리적이긴 한데 끈끈한 정은 없지."

"자발적 비혼인 거네요."

"또는 모든 걸 감수하더라도 청혼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지 못했거나. 결혼에 반대하는 대다수가 기혼자야. 자기는 제도 속에 들어앉아놓고, 해보니까 별로더라 하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몇이나 끝내고 나올 거 같아? 뭐라고 하는 건 아냐. 뛰쳐나와서 뒷일을 수습하는 게 결혼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거든. 그냥 살아야지 뭐."

 

- 회사 게시판 보면 수시로 직원 뽑으니까, 탐나면 알아봐라. 기.

"삼층은 스펙이 좋아야 한다면서요. 여동생이 W&L에 잠깐 다녔거든요. 월급도 짜면서 실적만 올리라고 하니까 열받았나 봐요. 걔가 삼층은 아무나 못 간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능력이 좋나 봐요?"

생각보다? 승.
"시정 씨 말 들어보니까, 인지 씨가 나한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얼굴도 이만하면 됐고, 능력도 있는데, 내가 굳이 찰 이유가 없죠. 튕긴다고 값이 더 올라가는 거 아니니까, 대충 만납시다."
개새끼가 진짜. 나는 손짓으로 고개 좀 숙여보라고 했다. 전.
"사람이 말을 하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냐 죽고 싶어? 시정이 그 썅년한테 가서 말해. 자꾸 쓸데없는 말 지껄이면 모가지를 그어버리겠다고, 알았어? 넌 말이야, 능력도 없는 게 재수까지 없어. 일 없으면 집에서 조용히 떡이나 쳐라. 핸드메이드, 응?"
나는 밥그릇을 들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

 

-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막말이면 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엄태성은 일주일째 회사 정문 앞으로 출근하고 있다.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길 바라는 것 같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여자 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인데, 가능하다면 저 말부터 뿌리째 뽑아버리고 싶다. 도끼도 도끼 나름이지. 열 번 이상 거절한 뒤 받아들였다면 포기 아닌가. 포기로 한 사랑이 과연 행복할까. 차라리 그 도끼로 내 목을 쳐라. 그 때문에 상무가 민감해졌다. 
"자꾸 눈에 띄게 행동하면 안 좋아."
여기는 남녀관계에 대한 관심을 직업병으로 가진 곳이다.

 

- 그 호기심이 NM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들에게 얼굴을 각인시켜 이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언제 어느 곳으로 출장 나갈지 모른다. 우연히 이웃으로 만나, 어머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나를 흘긋흘긋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 나는 왜 저 남자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처음 보는 순간 분명 뭔가 감지됐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철렁했던 그 포인트를 잡을 수가 없다. 헤어진 뒤에도 내가 그에게서 도망쳤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줄 수 없는 떡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만드는 남자다.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양새인데, 나는 왜 소름이 돋는 걸까. 매일 아침 쌀가루를 체에 내려 찜통에 찌고 완성된 떡을 상자에 넣을 테지. 그런데 그것이 왜 내게는 아침마다 숫돌에 식칼을 갈아 상자에 넣는 것처럼 느껴질까. 사람이 싫으니 별 끔찍한 망상을 다했다.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더 끌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   

 

- 선이 곱고 얼굴도 희다. 부잣집 둘째 형이나 잘 사는 교회 오빠 같은 좋은 얼굴을 가졌는데 그에 맞는 격이 없다. 당신은 입을 열지 마세요. 입을 열면 실체가 드러납니다. 가면을 입에 써야 합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외모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얼마나 쉬운 인생인가. 머리 좋은 사람들이 미적분을 척척 풀어내듯, 저 얼굴로 까다로운 여자들에게 척척 다가갔겠지.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나처럼 골치 아픈 여자를 자꾸 찾아오는 이유도 뻔하다. 여동생이 W&L에 다녔었다. NM의 실체와 전혀 다른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모호함이 상상을 더욱 부풀렸을 테고, 자신을 계속 노출하면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당신 예상대로 됐지요? 이제 조금 투덕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사귀는 단계를 밟을 것 같은가요? 
"여자 그렇게 만나는 거 아닙니다." 

 

- 찰나도 함께하고 싶지 않은 남자다. 상무는 피해자들과 그를 싸잡아 비난했다.
"병신들은 왜 이상한 데다 자존심을 거나 몰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사랑하니까 병신 만드는 것. 상무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나도 그런 여자들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미련한 사랑을 했다고 병신으로 몰면 안 되지 않나. 사기를 목적으로 접근한 사람을 무슨 수로 피하나. 욕하려거든 엄태성만 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그들은 피해자들이니까. 

 

- 이상하다. NM에서 만나는 별종들은 어지간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참게 되는데, NM 밖에서 만나는 별종들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 슬쩍 어머니를 본다. 너무나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인다. 점점 타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내 눈에는 남보다 더 남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둔 단란한 부부로 보이겠지. 오빠와 내가 이혼을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차라리 나는 허울뿐인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가 더 행복해 보인다. 우리 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곤이 쌓인다. 졸리다. 

 

- 오빠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쇼핑백을 내려놓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미루적거리다가는 어머니의 정갈한 아침상을 받아야 한다. 절에서처럼 침묵하는 식사자리가 불편하다. 나는 대충 씻고 썬크림만 바른 뒤 곧장 신발을 신었다. 이제 한동안 보지 못할 딸을 위해 일찍부터 아침을 준비했을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도리가 없다. 사람이 불편하니 음식마저 그러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차장까지 나와 배웅했다. 아버지가 어제 장에서 산 반찬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 이 유니크한 섹스는 대체 뭘까. 그러고는 곧 혼절하듯 내 위로 풀썩 쓰러졌다. 다양하고 과감해졌는데 꽉 차지 않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면서 왜 자꾸 좋으냐고 물을까. 당신은 내가 빨다 말다 빨다 말다 하면 좋겠어? 나는 자신의 신기술에 만족하고 나자빠진 남편을 두고 화장실로 갔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이 결혼에 진지한 걸까? 

 

- "여보, 당신 밖에서 한 결혼 어땠어?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일단 물었으니 된 걸로 치고. 그냥, 내가 행정 처리된 것 같았어."
매번 음주측정기를 부는 것 같고, 도로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때문에 달리다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나쁜 의도가 아니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따지면 공익을 거부하는 꼴이 돼버렸다. 늘 비슷한 패턴의 다툼이었다. 그러면 안 되잖아. 안되지. 근데 왜 그래? 몰라. 잘못한 건 알아? 알아. 근데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해? 동거 때도 비슷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뒤 벌어지는 설전과는 매우 달랐다. 나는 법적으로 당신을 교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그 느낌이 너무 강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런 것을 매우 힘들어했다. 

 

- "결혼 이후에는 모든 삶이 관여당해. 심지어 국가가 헤어지는 것까지 관여하잖아. 둘이 합의했는데 왜 법원을 가야 하지? 혼인신고처럼 파혼신고 하면 안 되나? 그러면 앞다퉈 이혼할 줄 아나 봐. 나라가 나서서 이혼하라 해도 하지 않을 사람들은 절대로 안 해. 이혼대책으로 같이 살 배우자를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대책이 없으니까 일단 막고 보는 게 아닐까? 아, 결혼 그거 되게 피곤하네."
"내 경우 그랬다는 거지. 왜? 결혼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어?"

"글쎄. 그래도 아프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건 남편 아닐까?"

"제일 늦게 나타나서 싸우는 부부도 상당하지."

남편이 마른 가지를 똑똑 부러뜨려 페인트 통에 넣으며 피식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 "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안에서 보니까 더 좋네요. 건평이 꽤 되겠는데요? 직접 살려고 지은 집이죠? 외져서 팔 땐 고생 좀 할 것 같은데."
엄태성은 내 물음과 상관없이, 이 집의 마감재와 마당 활용도에 대해 잠시 떠들었다. 그대로 두었다. 말도 안 되는 천연덕스러움에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내가 정상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완력으로 내쫓아도 다시 웃으며 나타날 사람이다. 유부녀였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나 역시 내 뒤를 밟은 것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에 잘잘못을 따져 더 피곤하게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 "생각을 많이 했는데도 막상 말하려니까 복잡하네요. 횡설수설해도 이해해 주세요. 어, 네, 떡 강좌에 나갔어요. 거기 사람들하고 차도 마시고 그랬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죠. 왜 여자가 괜찮다고 소개해주는 여자는 다 이상하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 내가 그랬어요. 농담이었습니다. 근데 시정 씨가 발끈하더라고요. 너무 아까워서 아무한테도 소개해주기 싫은 친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소개받는 여자가 제일 별로더라, 했죠. 조금 옥신각신하다가 인지 씨를 만났습니다. 옆에서 부추기기도 했고요.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내 몸이 감지했던 두려움을 이제 알 것 같다. 자기 자장 속에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 막을 뚫지 못한다. 나의 심각한 거절이 그에게 먹히지 않는 이유다. 일인극처럼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이 듣고 동의하며 행동한다. 내게 남편이 있는 것도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단순 관객이므로 그의 연극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공감능력이 없어 매우 일방적이다.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서 행동하므로 무례라는 것을 모른다. 싸워서 될 일도 아니다. 이 정도면 싸이코다. 웃자고 할 때 쉽게 쓰던 말인데 실체를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 "근데, 퇴사한 건가요? 아니면 삼층 직원은 재택근무도 가능해요? 대답 안 할 거지요? 언제는 대답한 적 있나요. 근데, 나 사기꾼 아니에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싫어하느냐 이 말이죠. 왜 그런 겁니까? 보자마자 싫어하는 경우는 뭐죠? 내가 뭘 했습니까? 따지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아, 그 떡 한번 볼래요? 흑미가루로 테를 둘렀더니 얌전해 보이고 좋더라고요."

- 왜 싫어하냐고. 어떻게 말해줄까. 존재가 그냥 싫은데,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 그때는 수긍할까. 보편적인 합리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 아닌가. 설혹 싫은 이유를 제거한다 해도 좋아질 사람이 아니다. 끔찍하다. 시간을 끌 만큼 끌었는데 구조대는 왜 아직 소식이 없다. 이 업체가 출동이 늦다더니 정말 심각하다. 어서 빨리 이 남자 좀 끌고 나갔으면, 현장으로 엄태성 난입, 맥주를 챙기면서 상무에게 구조문자를 보냈었다. 그런데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 "그 남자한테 관심 좀 주지 그랬어." 
"사생활 좀 존중합시다."
남편이 어느 틈에 단단해진 성기를 내게 밀어 넣으며 마당에서의 약속을 지킨다. 한 남자가 싸이렌도 울리지 않는 응급차에 실려 갔다. 당분간 무연고자 신분으로 요양병원에서 지낼 것이다. 그곳에서 중증 환자가 될지도 모른다. 억울할 겁니다, 엄태성 씨. 이들은 당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소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나올 수도 있다. NM은 그가 밖에서 하는 모든 말을 헛소리로 만들 것이다. 좋아? 응. 그는 남편을 이토록 흥분시킨 오늘의 이벤트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처음 내가 거절했을 때 그냥 떠났으면 안 됐을까. NM의 구조는 직원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철저히 회원을 위한 써비스다. 회원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오늘 남편은 미쳤다. 좋아? 그래. 

 

- "참고할게. 그나저나 유 대리, 임신은 경험 미숙으로 돌려보겠지만, 이런 파혼은 징계수위가 높아서 감봉은 각오해야 할 거야." 
"네. 그런데 좀 빨리 리스트에 넣어주시면 안 될까요?"
"왜? 내근하면서 좀 쉬어."
"살 집이 없어요."

- 살 집이 없다. 유 대리 얼굴을 보지 못하고 검지로 소주잔 주둥이만 문질렀다. 집안의 생계 때문에 이 일을 하는 FW는 거의 없다. 얼굴에 가난과 고난이 밴 사람은 스카우터가 걸러낸다. 단순 성매매로 알고 온 사람들은 거의 NM 결혼기간 중 파경하고 퇴사한다. 일반 직장인보다 연봉은 높지만, 그렇다고 텐프로 여성들과는 비교도 안되니까. 바로 돈이 들어오는 맛도 없다. 매달 급여통장으로 입금되는 월급을 기다려야 한다. 그마저 자유롭게 쓸 수 없다. 계약기간 동안은 회원의 아내로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백이면 백만큼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일일이 캐묻고 싶지 않다. 

 

- "할머니,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젊은 오빠랑 혹시 그..."

"잤지. 내가 들인 돈이 얼만데."
다행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그렇다. 

 

- "자는 건 좋은데 그 정에 빠지면 안 된다. 아니다 싶으면 딱 끊어. 질질 끌려다니면 너만 고생해. 한번 자면 서방처럼 구는 놈도 많으니까 조심하고. 불쌍해서 자주는 건 안된다. 그거는 뭣도 절도 아녀. 몸 보시는 하는 게 아니라고. 알겠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돈하고 사랑은 똑같애. 없어도 지랄 많아도 지랄이야. 한 백 명 만나면 든든할 것 같지? 하나 깊이 만난 것보다 더 헛헛해. 적당히 만나고 길게 사랑해라. 자꾸 갈아치운다고 더 좋은 놈 안 나타나. 총천연색이 한 가지 색보다 선명하지 못한 법이다. 알아듣냐? 나는 왜 너만 보면 불안불안한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조금 더 술을 마셨고, 나는 조금 더 울었다.
"근데, 한 가지 색이 지랄 맞으면 후딱 버려라. 알겠지?"

 

- 별수 있나. 사는 거 그냥 보여주는 거지. 나는 너무 꾸민 티가 나지 않도록 연보라색 원피스에 흰 카디건을 걸쳤다. 곧 초인종이 울렸다. 남편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재빨리 얼굴에 파우더를 바르고 마당으로 나갔다. 남편이 소개하는 첫 지인이다. 어, 그런데 김 차장이다. FH 김 차장 부부가 왔다.   

 

- 들고 온 피크닉박스를 보니 갑작스런 초대는 아닌 것 같다. 아내가 서너 살 연상으로 보인다. 짧은 머리에 잘 어울리는 맑고 깨끗한 피부를 가졌다. 억지로 나이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잘 꾸몄다. 예쁘다. 세련된 막내이모 같다. 카키색 목도리를 대충 돌돌 말듯 두르고 코트를 손에 들었다. 나는 처음 보는데, 처음 온 집이 아닌 것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인사했다. 정서연.

 

- 남편과 김 차장은 이미 낯을 익힌 것 같다. 깜짝 이벤트라기에는 나만 조금 뻘쭘한 상황이다. NM 부부간 교류금지 조항은 없다. 그래도 나만 모르게 일이 진행된 건 살짝 유감이다. 김 차장과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어쨌든 손님이니 일단 화색으로 맞았다. 연말이라도 낮에는 포근한데 이 지역은 밤낮으로 춥다. 서연이 외투를 입지 않아 더욱 한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서둘러 안으로 들였다.  

 

- "저 트리 좋다. 직접 만든 거지?" 
"심심해서 만든 건데, 전구가 조금 모자랐어요."
"저대로 좋아. 손맛이 느껴져. 하하하."
트리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신경이 온통 주방으로 쏠렸다. 오븐에 고기를 굽나 보다. 약간 들뜬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남편은 없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눈을 트리에서 떼지 않고 나직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잘하면 스와핑 하겠어요."
"그건 진짜 부부들이나 하는 거고, 우리가 하면 그냥 집단섹스야."
"나 모르게 무슨 작당을 한 거예요?"
"아직 모르나 보네? 저 둘이 부부였잖아."

김 차장이 트리를 보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동갑끼리 동거 삼 년 결혼 삼 년 그리고 이혼, 전구는 뭐로 붙인 거야?"
"케이블 타이요. 남편이 거의 다 했어요."

 

- 그런 사이였구나. 친구와 부부 사이쯤에 놓인 관계, 서연이 먼저 NM에 가입하고, 나중에 남편에게도 권했다고 한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저런 관계가 가능할까. 내가 좀 촌스러운 걸까. 만일 실제 아내였다면 그냥 두 분 계속 행복하세요, 하고 서둘러 빠져나갔을 것이다. 저런 특이한 인연에 들러리 설 생각 없다. 쉽게 정리될 관계가 아니다. 아직 놓지 못한 어떤 끈의 지지부진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외도 이상의 언짢은 만남이다. 우연한 만남도 거슬리는데 대놓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면? 댁들이나 실컷 처잡수세요, 하고 떠났을 것이다. 그나마 김 차장이 와서 조금 낫다. 어떤 전조처럼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나더니 오늘 이 집에 떡 나타났다. 우린 또 무슨 인연인가. 남편이 여보, 하고 불렀다. 음식이 다 차려진 모양이다. 그래, 즐기자. NM이 아니면 또 어디서 이런 진풍경을 보겠나. 

 

- 서연이 케이크와 쿠키, 사인분의 양고기 스테이크를 준비해 왔다. 그것을 남편이 만든 음식들과 함께 차렸다. 애피타이저와 메인, 디저트가 한꺼번에 놓였다. 번거롭게 음식 때문에 누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 화끈하다.  

 

- "동거할 때도 결혼했을 때보다는 안 싸웠을 거야. 우린 결혼이 안 맞아." 
서연이 과거는 과거일 뿐 구질하게 굴지 않는 사람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자신이 매우 세련된 줄 아는 여자의 촌스러운 행동이다. 남편은 서연의 물음에 일일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잔이 비면 술을 채워주고, 음식을 흘리면 냅킨을 챙겨주었다. 그녀가 여보, 하면 잠깐 봤다가 곧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자 김 차장이 서연을 타박했다. 
"당신은 왜 남의 남편한테 여보 여보 그래?"
"버릇이 됐나 봐. 인지 씨, 미안해요."
웃어야지 별수 있나. 서연 씨, 애매하죠? 남편 끼고 와서 전남편 아내를 보기가 썩 좋지는 않죠? 남편을 여전히 독점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요. 손님이면 손님처럼 구세요. 주인 행세하지 말고. 그래야 당신이 이깁니다. 

 

- 끝장낼 듯 내달리는 연주가 압권이다. 메탈리카 3집. 눈물이 나려 한다. 고3 때 우연히 심야 라디오에서 듣고 음반을 샀었다. 빌어먹을 <오리온>! 서부에 관심도 없고 메탈리카 멤버가 그쪽 출신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막연한 서부적 서정에 심장이 멎었다. 내 귀에는 기타 연주가 뚜거덕뚜거덕 말발굽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단호하면서 치열하고 애절했다. 어떻게 한 곡에 다 담았을까.  

 

- "듣고 내려오세요. 맥주 준비해 놓을게요."
"좋죠. 금방 내려갈게요."
주방이 깨끗하다. 청소는 남자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 힘도 좋고 꼼꼼하다.
"여보, 올라가 봐. 서연 씨가 어떤 음반 찾던데?"

"어떤?"
"메탈리카 LP?"
"갔다 올게. 아, 당신도 혹시 메탈리카 좋아하나?"
"레드 제플린 좋아해."

- 남편이 가볍게 웃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편을 서연에게 보냈다. 저 장소는 나보다 남편이 더 잘 어울린다. 서연이 남편과 공유했던 추억을 내게 되새김질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도 밉지는 않았다. 얄밉기는 해도 이해 가능한 선이었고, 기본적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품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래,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지? 양고기 스테이크가 맛있어서 내가 인심 쓴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김 차장에게 건넸다. 

"저 두 사람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우리 먼저 해요."

- 현장에 함께 있는 기분이 묘했다. 김 차장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우습지만, 저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만나는 것도 우습다. 할리우드냐. 앙숙보다야 낫지만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맛이 없다. 동거 삼 년. 결혼 삼 년. 나머지는 친구. 참 다채롭게 산다. 남이 하는 건 다 해보고 나머지는 내 갈 길 간다, 그거지? 나쁘지 않네. 이혼을 꼭 누구 하나 작살난 뒤에 할 필요는 없으니까.

 

- 누군가에게 넌 이혼할 만해, 소리를 들으려면 지옥에서 굴러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다른 부부 이혼의 심사위원이 되어 항목 별로 심사한다. 외도, 폭력, 가사노동, 육아, 수입, 잠자리 거부 등등 매 항목 점수를 매긴다. 그 정도면... 얼마나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인가. 그 정도의 기준이 얼마일까. 밥그릇 싸이즈가 같다고 먹는 양도 같나.

 

- 법적 승인보다 주변인의 승인이 더 까다롭다. 승인받지 못해 그냥 살다가 목이라도 매면, 이번엔 사후 심판자가 등장한다. 그 정도였으면 진작 나왔어야지 미련하게.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느니, 저 커플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이것들이 얼른 안 내려오고 뭐 하는 건가. 방음 잘된 방에서 그 거장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NM 혼인규정 알아 몰라? 외도하면 파경인 거 알지? 위약금으로 결혼비용 날려볼래? 왜 이렇게 안 내려와 나의 심판이 두렵지도 않은가. 

 

- 며칠 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김 차장을 만났다. 출장 중 약속은 되도록 회사 근처로 잡는다. 그래야 갑자기 아는 사람을 만나도 회사 핑계를 댈 수 있다. 잠시 서로의 근황을 묻고, 새로울 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회사 관련 사담을 나눴다. 김 차장이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쉽게 꺼내질 못한다. 
"선배, 저한테 할 말 있죠?" 
"그냥 바람 좀 쐬라고 불렀지. 그날 피곤해 보이더라."

- 김 차장은 우리 직업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우리는 NM 회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조력해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자인 것이다. 맞춤형 결혼 기술자. 그런데 그날은 내가 썩 매끄럽지 못했나 보다. 혹시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데 마땅히 할 말이 없다. 

 

- "힘든 건 힘들다고 할 때도 됐잖아. 중도파경도 처음이 힘들지 해보면 별거 아냐."
"아직은 괜찮아요." 
"다행이다. 일이 재밌는 사람은 없겠지만, 즐길 줄도 알아야지."

 

- 김 차장은 매우 능동적이다. 만난 배우자를 재빨리 파악해 새로운 결혼을 설계했다. 어지간한 마찰은 웃어넘겼지만, 지나치게 독단적인 배우자면 바로 짐을 쌌다. 파경 전문 FH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는 상대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장근무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회원이 NM 결혼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만족도만 유지한다. 자신의 존재를 뒤이은 동료가 희석해 주길 원한다. 결혼제도 부적응자, 자발적 결혼설계자, 통념적 차원에서 결혼이 불가능자들을 위한 합리적 결혼 씨스템으로 삶의 질을 높인다는 회사 설립 취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그만큼의 임무만 한다. 당장의 목마름으로 자판기에서 뽑아낸 배우자 같기도 하다.

 

- 일회성 관계가 누적될수록 공허함이 쌓인다. 재결합은 매우 드물다. 보통은 새 배우자를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점점 쾌락에 빠지는 회원도 있다. 이 관계의 태생적 취약점이다. 회사는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의 하나로 회원들에게 주의를 요구하지만, 뒤로는 매우 요긴한 마케팅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회원이 계속 늘고 있는 것으로 보아 NM은 지금보다 더 체계적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점점 힘에 부친다. 나를 싹둑싹둑 잘라서 파는 것 같다. 피곤하다. 우리에게도 안식년이 필요하다. 

 

- "내 와이프가 별스럽긴 하지. 그래도 그렇지, 뭘 그렇게 경계해?"
"제가요?"
"질투했잖아."
"언제요?"
김 차장이 씨익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질투하나. 조금 얄미웠을 뿐이다. 그래도 회원님이니까 미소는 잃지 않았다. 일 생기면 내가 불리한데 싫은 티 내서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런데 김 차장은 내가 할 써비스를 남편이 했다고 한다. 서연의 요구를 적당히 받아주면서, 이제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선도 확실하게 긋더라고. 전에 우연히 같이 식사했을 때도 그런 모습을 읽었다고 했다. 

- "나는 친구라고만 알고 나갔는데 전남편이라는 거야. 공동명의로 된 점포 때문에 만난 거였더라고. 와이프가 이혼하고도 흐지부지 놔둔 걸 네 남편이 와이프 단독명의로 확실하게 정리했어. 그랬더니 와이프가 서운해하는 눈치더라. 네 남편이 선물이라고 하더라고. 선물이라는데 어쩔 거야. 그러더니 집사람하고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가겠다고." 
"집사람이요? 저요?"
"너겠지."


- "재결합했다고 하더라. 그게 넌 줄은 몰랐어. 하여간, 그 얘기 듣고 와이프가 갑자기 파티를 하자고 했어. 재결합한 걸 보니까 괜찮은 여자 같은데 소개해 달라고. 좀 충격이었나 봐. 재미로 권했더니 진짜 좋아하는 거지. 그러니 눈이 안 돌아?"

 

- 자기가 권해놓고 충격은 무슨. 남편이 나도 좀 느끼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여자를 일층에 두고 이층에 박혀 사는 건 뭔가. 혼자 잠들었다가 잠결에 옆에 누가 있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째 서연을 한방 먹이려고 한 재결합 같기도 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는지 궁금했는데, 김 차장이 알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랐다고 한다. 얘가 쟤 친구고 쟤가 얘 친구다. 보통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유치원 동기들인데, 유치원으로 벌써 신분이 갈리는 동네였다. 얘네 부모가 쟤네 부모하고 연결됐고, 쟤네 부모가 얘네 부모하고 연결됐다. 불편한 관계가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 유연한 자세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다. 악감정이 쌓이면 다른 관계망에 구멍이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서로 주의한다. 

 

 

- "참 피곤하게 사네요. 서연 씨는 집에서 어때요?" "

"희귀 성격이야. 당사자가 미치고 환장하겠는 진심을 보여."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장 그날 파티만 해도 그래. 너 힘들지 않게 자기가 직접 요리해서 갈 거래. 그런 사람한테, 굶더라도 당신이 가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어떻게 말해? 순진한 건지 영리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사실은 나도 진심인지 가지고 노는 건지 헛갈리더라고요."
"화는 나는데, 묘하게 선한 마음이 읽혀서 화도 못내 가슴이 답답해."
"맞아요. 그럼 이번에도 파경이에요?"
"타이밍을 못 잡겠어. 할까 싶으면 또 괜찮아 보여. 네 남편도 나처럼 우물쭈물하다 겨우 이혼했지 싶어. 어쨌든 지금은 후련할 거다. 하하하."

 

- 커피를 계속 리필하면서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술 없이도 몇 시간을 떠들 수 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연인이라고 해도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동료다. 손 한번 잡아본 적 없고 집 한번 바래다준 적 없는 사이인데, 연인보다 더 연인처럼 긴 얘기를 나눈다. 밤늦은 회식으로 택시 타고 집에 가야 할 때, 여자라고 먼저 태워 보낸 적도 없다. 방향이 다르다며 길을 건너가 먼저 온 택시를 타고 간다. 그렇게 행동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다. 딱 이만큼인 관계가 좋다. 김 차장이 없었다면 회사생활이 너무 아팠을 것 같다.

 

- 제자리 뛰기로 보드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이때 아니면 언제 또 눈에서 굴러보나. 그런데 이 스키장은 중급자 코스가 왜 이리 긴가. 얼마 못 가 남편이 움찔할 정도로 심하게 넘어졌다. 괜찮지 않을 게 빤하니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 충돌방지요원처럼 가만히 뒤따를 뿐이었다. 그래도 몇 번 넘어진 효과가 있었다. 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매끄럽게 내려오면서 살랑살랑 보드도 흔들어본다. 그렇지. 무릎과 허리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편이 폴도 안 쓰고 따라온다. 여유는, 강사냐? 중앙으로 나오며 좀 더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의도치 않은 활강을 했고, 나 때문에 깜짝 놀란 스키어가 씨발, 하고 길을 비켰다. 남편이 이번에는 폴을 쓰고 따라왔다. 선수급의 완벽한 자세였다. 마치 조깅화를 신은 것처럼 스키가 몸에 딱 붙었다. 만난 이래로 가장 섹시하다. 여하튼, 잘 타는 남편은 알아서 타라고 하고, 앞에 좀 비켜주세요! 외치며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눈 하나 튀지 않고 내 앞에 가뿐히 정지한 남편이 잘 타네, 하며 웃는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중급자 코스를 두어 번 더 탔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상급자 코스로 갔다가 쪼그라든 심장으로 겨우 내려왔다. 역시 상급자 코스는 쉽게 넘볼 곳이 아니었다. 

 

- 그러니까 당신이 누구의, 누구의, 누구 친구라는 거죠? 네. 제가 바로 누구의, 누구의, 누구 친굽니다. 이렇게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는 각자 세계에 이미 충분하지 않나. 우리는 어느 추운 날 우연히 만나 체온을 조금 나눈 사이 정도로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만기파경을 하면 이제 다른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지금 너무 뜨거우면 평범한 다른 체온에는 추위를 느낀다. 얼른 말을 돌렸다.  

"당신 메탈리카 좋아한다며?"
"내가?"
"아냐?"
"메탈리카는 서연이가 좋아하지. 나도 레드 제플린을 더 자주 들어."

- 그렇구나. 아씨... 짠하게 진짜. 나를 통해 자신을 환기시키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 이혼에 합의했을까. 아프다. 그냥 남편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쾅쾅 틀어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남편이 서연을 떠올렸겠지. 그런데 추억은 다 아름다울까. 애써 잊으려는데 내가 자꾸 음악으로 상기시켜, 남편이 미치고 환장하면 어떡하나. 사막을 헤매다 겨우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달려갔는데, 그곳에마저 서연이 아지랑이처럼 아롱아롱 흔들리고 있다면? 쉿! 역시 오아시스는 신기루인가 좌절하겠지.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 다 참 거시기하다. 가만, 그럼 잘만 킹은 또 뭔가. 남편을 위한 잠자리 팁인가. 
  

- 무어라도 언짢다. 뭔데 남의 부부 잠자리까지 관여하나. 남의 부부가 아니라는 거지. 전 부인께서 내게 섹스를 허락하셨다. 환장하겠네. 회원님께 달려가 따질 수도 없고. 열받아도 참아야지 별수 있나.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니 한쪽이 비참해질 수밖에. 그래서 사람들이 악착같이 좋은 자리에 서려고 하나보다. 대체 두 사람은 어떤 부부생활을 한 걸까. 잠자리 기술을 보면 그런 거장을 들먹일 만한 사람은 아닌데. 살짝 떠봐야겠다.

 

- "여보, 맥주 할래?"
"좋지."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내왔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경력이 쌓일수록 회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사측과 매우 긴밀하다. 우리 한 명쯤 갈아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괜히 일이 꼬이면 위약금을 물고 퇴사해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명치를 압박하는 갑갑함을 견딜 수가 없다. 이런 갑갑함은 혜영만으로도 벅찼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먼저 맥주로 목을 축였다.

 

- "그냥 궁금해서. 격리는 심했네."
"사람을 문 개는 죽이는 거야."
"농담이지? 불쌍하잖아."
"불쌍한 개는 사람을 물어도 되나?"

- 엄태성과 내가 어떤 관계든 남편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집에 함부로 난입한 들개였으니 난폭한 포획에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참 알 수 없는 남자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온도 차가 크다. 그들이 누구든 나는 너까지만. 남편의 친절에는 단호함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흥분하지 않는다. 저토록 차가운 말조차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한다. 차를 타고 싸파리를 관광하는 사람 같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야생 인류가 신기한 모양이다. 그래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지 않나. 

 

- "직급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올라갈수록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일이 많아져. 골치 아프게 먼저 알 필요 없잖아."
"난 부장 될 일 없으니까 몰래 보는 것도 괜찮겠네. 회사 통하지 않고 갈 수 있는 방법 없을까?"
"아주 없진 않겠지. 가고 싶어?"
"당신 괜찮으면."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믿는 거야?"
"내 남편인 만큼만."
"바람 한번 쐬고 오자."

 

- 남편이 맥주를 치켜들고 건배를 했다. 나도 살짝 들어 건배를 받았다. 건배. 나는 처음부터 엄태성이 싫었다. 거절하고 또 거절하다가 내 거절이 먹히지 않는 상대임을 알았을 때, NM의 손을 빌렸다. 그가 회사로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선의로 해석했었다. 외로운 너에게 좋은 사람이 돼주려고 해. 선의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도 싫었다. 선의를 도구로 거절하기 불편한 행동을 하는 사람 역시 싫으니까. 선의로 배수진 치고 가두는. 제 손바닥의 선의가 상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줄 아는. 싫다.

 

- 직업의 은폐성 때문에 과민하게 받아들인 면도 분명 있다. 물론 지금은 선의의 행동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알았으니 그가 사라진 것에 안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다. 왜 나를 싫어하는 거예요? 그의 말이 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연극적 쾌활함도 마음에 걸렸다. 맞으면서도 억지로 웃는 아이 같았던.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됐을까.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기다리겠지. 차라리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는 이 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납득할 수 없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 "사람 하나 구하려고 합니다."
"어디에 쓰시려고?"
"당장은 산장이나 지키게 할 생각입니다. 삼십 대 초반의 얌전한 남자, 되겠습니까?"
"나이를 맞춰야 되나 보죠?"
"사정이 그렇습니다."

원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찻잔을 들었지만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 사람 장사. 이 사람들, 이런 대화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눈다. 개 한 마리 필요합니다. 어떤 용도로 쓰시게?
"하나가 있기는 합니다만, 글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볼 수 있습니까?"
"같이 가봅시다."

 

- 숨 쉴 때마다 찬 기운이 내장까지 스미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차냄새 지독한 사무실에 남는 것보다 나았다. 택시에서 내린 곳에 서서 소담 농원을 보았다. 저 예쁜 문 뒤에서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너무 깊게 들어갔다. 예쁜 문만 봤어야 했다. 남편은 원장이 무척 자랑스러워하던 차를 들고 나왔다. 거래가 잘 성사된 모양이다. 엄태성은 일주일 뒤에 데려가기로 했다고 한다. 얼마인지 묻지 않았다. 내 귀로 사람의 가격이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없었다. 농원 아랫길로 걸었다. 산 중턱 작은 공터에 편의점이 있다. 소담 농원 앞에서 사진을 찍던 두 여인이 호빵을 먹고 있다. 한적한 겨울 여행에 행복해 보인다. 이 여행을 기록한 사진을 SNS에 올리겠지. 우연히 찾은 예쁜 문이랍니다. 여행의 묘미죠. 겨울 여행 부러워요. 저 여인들에게 원장에게서 받은 차를 주면 어떨까. 또 사진을 찍어서 올리겠지. 대박! 아까 사진에 나온 소담 농원 차를 선물 받았어요! 숙소에서 따뜻하게 한잔. 부럽죠?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두렵다. 내가 아는 소담 농원과 그녀들이 알고 있을 소담 농원이 너무 다르다. 볶고 자르고 포장해서 파는 게 차만이 아니었다. 다른 건 다 팔아도 사람은 남겨두면 안 될까? 같은 감각으로 같은 통증을 느끼는 존재들 아닌가.  

 

- 어떻게 기도원을 찾게 됐는지, 그런 거래는 어떻게 알았는지, 대략 이런 순으로 얘기할 줄 알았다. 처음부터 장미숙이라는 이름이 불쑥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은 처음부터 경호원들을 의심했다고 한다. 어떤 경호업체도 그런 식으로 약을 쓰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마취가 필요한 경우라도, 침낭 사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거였다. 게다가 비무장 민간 여성이 지휘했다. 대체 그런 경호가 어디에 있나. 그 소란에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태연했던 남편이 실은 전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꽃에 급급했다. 상무가 온 것도 그랬다. 나는 그저 NM이 감출 게 있어 상무가 동행했을 거라 생각했다. 여하튼 남편은 먼저 W&L과 계약한 경호업체를 찾았다. NM이 제공하는 써비스이기에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뒤 그 업체 사람 하나를 사서 W&L과 관련된 신고사항을 확인했다. 연간 몇 건의 신고가 전부였고, 그날은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곧바로 상무의 뒤를 캤다. 여전히 실무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밑에서 올라오거나 위로 올려야 하는 보고를 제 선에서 적당히 처리할 수 있는 위치다. 회사의 빈틈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려 들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 "무슨 교육?"
"제빵 기술을 가르치는 건 아니겠지."
사께가 목에 한번 걸렸다가 내려갔다. 어느 해외 토픽 기사처럼 말하는 남편도 사께를 삼키기 힘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끄떡끄떡 그렇구나 하고 들었다. 원장이 자기 아버지였대도, 어, 아버지야,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 같은 사람에게 놀란 표정은 호들갑스럽다. 이제 경호업체도 신뢰할 수가 없다. 출장 전 상무에게 올렸던 서류가 우스워진다. 상무가 뽑아준 리스트에서 그녀가 체크한 특이사항을 보며 작성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한 것인가. 

 

- "왜 그렇게 친절해?"
"혹시 알아? 나중에 은혜라도 갚을지."
"은혜는 친절한 사람한테 갚지 않아. 두려운 사람한테 갚아. 친절한 사람한테는 입으로 갚고, 두려운 사람한테는 몸으로 갚는 거야." 
"되게 현실적인 말인데, 씁쓸하다. 몰래 사라지면 어떡하지?"
"갈 길 간 거잖아. 여기까지만 해. 지금도 과해. 대체 어디까지 해주려고 그래? 왜 자꾸 손을 내밀어? 가라는 거야, 오라는 거야? 친절하지도 마. 할 일 했을 뿐이니까."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인정을 사랑으로 받으면 어떡할 건데?"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아니게 행동하라고. 여자들 조심해야 해. 친절하면 넘보고 싶고, 착하면 건드려보고 싶어져. 그래서 화내면, 이제 나쁜 년 되는 거야. 그게 과한 친절의 부작용이지. 가자." 

남편이 먼저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저 남자, 시원한 듯 참 쓰다.

 

- 남편의 예명을 여전히 모른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한 일부러 캐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작업은 철저히 작업실에서만 한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니 별말은 없지만, 그는 내가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집으로 누굴 부르지도 않는다. 방음 처리된 이층 작업실에서 없는 사람처럼 혼자 일한다. 우연히 스치며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주식 관련한 금융 쪽 일도 하는 것 같다. 휴대전화를 세대나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 번호는 어떤 전화기에 들어 있을까. 매사에 서두르는 기색이 없어 그저 태평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어떤 규칙에 따라 시간을 분배해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이 없는 자의 무료함이나 배배 꼬인 태평함이 아니다. 

 

- 지금은 좀 쉬자, 하는 것처럼 여유 시간을 차분하게 즐겼다. 나와는 평범한 일상을 원했다. 나는 그것을 노련하게 받아줘야 했다. 프로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깔끔하게 해내야 한다. 내 직업은 프로 아내다. 남편은 B시에서 돌아온 뒤 삼일째 밖에서 밤샘작업을 하고 있다. 작곡가이자 디렉터로 누군가의 신곡을 준비하고 있다. 쏟아지는 신곡 중 어느 것이 남편의 작품인지 나는 모를 것이다. 매우 예민한 작업 같은데 B시를 다녀오고도 일이 손에 잡히다니. 신기한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남편의 일을 계속 모르는 상태로 이 결혼을 마치려고 한다. 훗날 어떤 노래만 듣고 남편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결국 나를 위해서라도 그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됐다.  

 

- 내가 코팅지에 사진을 끼워 건네주면, 시정이 기계로 코팅했다. 우리는 손발이 잘 맞는다. 아버지 등산 동호회 앨범도 같이 만들었다. 시정이 코팅된 남편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의심했다. 분위기가 회사원 같지 않다고.

 

- 부장 정도면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히고 억누른 흔적이 얼굴에 남는다. 그것에 성과가 입혀지고 정치적 관록이 붙는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세를 빠르게 인지하고,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고개 숙일 때와 들 때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무 이상 간부들과 달리 여전히 실무 전쟁을 치른다. 업무상 접대 자리에도 많이 나간다. 우리가 당신을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지는 않아, 하는 인식을 주기에 적당한 위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사장님이 출장 중이시라, 전무님이 워크숍 때문에, 이런 말을 먼저 한 뒤 술을 따라야 하는 부장의 심정이 어떨까. 빨리 주제 파악하고 알아요, 알아, 하고 넘어가는 상대를 만나면 좀 낫다. 그런데 부장씩이나 나왔는데도 똥물 마시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꼴값들을 만나면, 부장의 애환이 쑤욱 올라온다. 회사 급 떨어지게 왜 이래. 윗분들 보고 싶으면 더 크고 와라. 위로는 리더십을 의심받고 아래로는 원망과 무능함으로 공격당하기 일쑤다. 대표와 이사진이 대거 출동하는 망할 송년회자리에서는 간부면서 간부 아닌 취급을 받고, 평사원이 아님에도 평사원인 기분으로 술잔을 받는다. 남편의 얼굴에는 이런 노고가 묻어 있지 않았다. 시정이 그것을 읽었다. 직장생활이라고는 다 합해도 이년을 못 채운 애가 잘도 안다. 노년까지 공기업 이사로 맹활약했던 아버지 영향인 것 같다. 

 

- "얼굴도 못 보는 다른 간부들 다 필요 없어, 일선에서는 부장이 호랑이야."
"말 돌리지 마. 그 나이에 이런 삘 나기 쉽지 않아. 이 남자 괜찮다."
"소개해줄까?"

"결혼 안 했어?"
"이혼했어."
"그럼 여자 많겠네. 관심 없어."
"이혼하면 여자가 많아지냐?"
"묘한 분위기가 있어. 이런 이혼남한테 여자 많이 끌리잖아."
시정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근엄하게 코팅만 했다. 왜 저러나. 

- 혜영은 도망치면서도 징징거렸는데 숨어서는 대놓고 울었다. 싫었다. 우리 여기 있어요. 하고 우는 꼴이었다. 뒤늦게 쫓아온 두 남자가 방송국 앞 대로에서 소리쳤다. 걸릴까 봐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상황에서 혜영이 계속 병신처럼 울었다. 비극적으로 가련해 보이는 과장된 울음에 따귀를 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 며칠 뒤 서로 사과했지만, 나는 어떤 불쾌감 때문에 혜영을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는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 싫었다. 나는 한번 싫어지면 그 마음을 되돌리기가 어렵다. 어떤 예쁜 짓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숨기지도 못한다. 혜영도 알았을 것이다. 착한 애였고, 클럽에서의 이상 행동도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싫었을까.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했다. 

 

- "혜영이가 날, 내가 널."
늦었다. 정리해야지. 코팅기를 만져봤다. 열이 다 내렸다. 전원을 끄고 코드를 뽑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우기고 싶다. 그런데 내 몸의 감각이 너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몸이 말한다. 알잖아, 왜 이래. 

 

- 솜씨 좋은 친구가 도와줬다고 짧게 말했다. 시정을 이 밀약의 세계로 깊게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선택한 NM 결혼에 왈가왈부할 생각 없다. 결혼제도가 긴 세월 검증된 삶의 형태라 하더라도 이들은 그것이 불편하다. 대안이든 쾌락이든 이 결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역으로 관습과 제도에 익숙한 것을 진부한 삶으로 조롱하는 듯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익숙함이 곧 진부는 아니며, 제도로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정의 사랑은 아직 관습과 제도를 뚫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성의 사랑을 조롱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드러내는 그들의 사랑을 부러워할 뿐이다.    

 

- 사랑을 어떻게 몇 개의 틀로 단정할까. 인간이 한오백년 살았으면. 그러면 남들처럼만 살다 죽는 일은 없을 텐데, 철회하고 방향을 틀 시간이 부족하다. 남들처럼 산 기억만 유전되고 다르게 산 기억은 억압으로 소실된다. 늘 처음인 양 부딪혀야 하는 시정의 사랑이 안타깝다. 그것을 내가 받아줄 수 없어 더욱 그렇다. 혹시 내게 아직 사랑이 남았다면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러지는 않을까. 글쎄. 그냥 보면 보잘것없는 것들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 자꾸 따라다닌다고 신고해도 간단한 주의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타날 때마다 문득 죽어버렸으면 했다. 마땅히 처분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계속 거슬렸다. 살인이 대단한 일로 벌어지는 게 아니구나. 탁 탁 탁 몇 번 긋다 어느 순간 확 불꽃이 이는 성냥처럼,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죽여버리리라 했다. 반복되는 거슬림이 내 살기를 건드렸다. 웃는 그의 얼굴에 자꾸 침 뱉는 여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왜 싫다는 사람을 찾아와 나쁜 여자로 만드는지. 순진한 걸까. 나이 먹고 너무 순진하면 젖병 빠는 노인처럼 징그럽다.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맞지 않는 우리가 만난 게 잘못이겠지요. 갑갑하다. 차창을 반쯤 내렸다. 

 

- "여보, 나는 왜 저 남자만 보면 화가 날까?"
"당연하지.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안되네요, 미안합니다. 죄송한데 나가주세요. 자꾸 사과하게 만들었잖아. 자기가 툭 쳐놓고 사과받는 사람이야. 사과와 거절이 얼마나 무거운 건데. 생큐, 오케이, 하고는 질이 달라. 사람을 푹 꺼지게 해. 진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가 구질구질하게 사과할 상황을 만들면 안 돼." 
남편을 본다. 나도 저때가 되면 저렇게 명쾌해질까. 멋있네. 
"이제 보니까 당신 잘생겼다."
"이쪽에서는 그런 말을 좀 듣지."

 

- 남편이 외부 녹음을 마치고 나머지 기술적인 작업은 집에서 하고 있다. 녹음이 차일피일 늦어져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다. 썩 만족한 녹음은 아니었나 보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가수가 그대로 굳어 전곡을 마치 한곡처럼 불렀다고 한다. 그래도 그쯤에서 녹음을 마친 건 그를 위해서였다고. 현재로서는 최선을 다한 그에게 독설로 비수를 꽂을 수는 없었다. 독설로 될 사람이 있고 안될 사람이 있다. 충언과 독설은 다르다. 독설은 자신의 견해를 앞세워 상대를 모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어머니의 경우처럼.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위치에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권력 과시의 카타르시스로 사용하면 최악이다. 독을 주고 약으로 만들라 하는 것은 우아한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 혹시 살아 돌아와 제 입에 더 센 독을 털어 넣을지 누가 알겠나. 살려줘. 당신도 약으로 승화시키세요.

 

- 그렇다고 남편이 되돌아올 독이 두려워 문제점을 보고도 그냥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한계보다 자신의 한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남자였다.  

 

- "나는 당신이 그렇게 볼 때가 제일 예쁘더라. 왜? 하고 툭 볼 때. 적극적이지도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아. 뭔가 태평해. 어떻게 그렇게 별게 아닌 왜를 하지? 긴장감이 전혀 없는 왜야."

무슨 헛소리야. 슬슬 돌기 시작하는 봄기운에 심신이 나긋해졌나. 왜는 그냥 왜지, 달라붙는 말이 뭐가 이리 많아. 청바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왜?"
"왜라는 말이 생각보다 되게 섹시한데? 한번 하자."

 

- 하하하하! 남편이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었다. 대체 그 가수가 뭘 어찌했기에 이렇게 실성했을까. 하면서도 웃었다. 얼마나 이상한지 거울 좀 보여줬으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남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주 경계를 넘는다. 전보다는 조금 더 나를 신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깊은 신뢰는 상대를 잡아당겨 한쪽으로 묶는다. 동등한 위치 따위는 없다. 먹거나 먹힐 뿐이다. 둘 중 누구의 아가리가 더 큰지는 자명하다.

 

- 줄까요 말까요. 나는 저 조잡한 신뢰의 떡밥을 덥석 물 생각이 없다. 고객님, 영원히 나의 등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 떡밥 치우세요. 물면 좋고 안 물면 마는 그런 떡밥은 매력이 없지요. 먹히는 한이 있어도 한 번쯤 물어보고 싶은 떡밥이라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 내가 백지수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전폭적인 신뢰를 밑밥으로 깐 올가미 같다. 주제파악해서 결정도 네가 책임도 네가. 하지만 생색은 내가. 두 번째 남편이 그랬다. 만기파경을 코앞에 두고, NM이 아니라 밖에서 몇 년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원하는 금액을 말하라고 했다.  
"말하자면 백지수표지."
"백억."

- 그리고 그 일은 무산됐다. 내가 제 그릇을 아는데 어디서 만수르 흉내인가. 부자가 뭔지 보여주고 싶었으면, 진흙길에 무빙워크는 못 깔아도 보도블록은 깔아야지. 그는 곧 제 결정을 철회하고 야유했다.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래?" 
"이 제안, 내가 했어?" 
"적정가라는 게 있는 거야."
"그러니까 간보지 말고, 당신이 나를 얼마짜리로 보는지 그냥 말하라고. 그럼 예스 오 노로 간단하게 끝낼 테니까. 뭐가 이렇게 질척질척해?"

 

- 리스크는 제시하는 쪽이 지고 갈 짐이다. 만일 내가 예상보다 적게 불렀다면 아니, 그보다는 더 받아야지 했을까. 그런데 그의 예상 금액은 말하기도 민망한 액수였다.  

 

- 도무지 속을 모르겠는 여자다. 주문한 해물 요리가 나왔다. 상무가 잠시 고개 숙여 일용할 양식에 감사기도를 했다. 샐러드는 양식이 아닌가. 그건 왜 그냥 먹었는데. 늘 그렇다. 상무는 기분 내킬 때만 기도한다. 나이롱 상무가 와인을 따르며 낮게 말했다. 

 

- 급이 다른 영역으로의 이동이며 현장근무 출신에게는 쉽게 나지 않는 자리였다. 에이스, 플래티넘, 블랙. 상무는 기본적으로 에이스와 플래티넘의 총책이지만, 플래티넘을 중점적으로 관리한다. 가장 높은 등급인 블랙은 부대표가 직접 맡고 있다. 그들은 극소수의 정재계 인물들이다. 이들의 배우자로 선정되면 별도의 교육을 받는다. 들리는 말로는 NM이 아닌 외부에서 일시적으로 조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다. 나는 블랙 회원을 만난 적이 없다. 에이스와 플래티넘은 우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등급별로 회원을 차별할까 봐 알려주지 않는다. 경험으로 짐작할 뿐이다. 소설가 남편은 에이스, 현재 남편은 플래티넘, 대충 그 정도.

 

- 부나 유명세로 등급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NM의 까다로운 심사로 분류된다. 에이스는 버려도 될 카드다. 시장성은 좋지만 난잡한 컴플레인도 많이 들어온다. 만기파경을 하고도 불만을 품고 혼인성사자금을 환불해 달라는 진상도 있다. 그러면 회사는 깨끗이 돌려주고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꺼져. 현장근무자를 노리개 취급하는 회원도 있다. 두건 이상 같은 보고가 올라오면 그때도 깨끗하게 돈을 내주고 자격을 박탈한다. 돈 좀 있나 본데 다른 데다 써. 너도 꺼져. 그러면 대부분이 처음에는 욕하다가 재가입을 위해 다시 NM을 찾는다. 재가입 조건은 더욱 까다롭다. 환불받은 돈의 두 배를 재가입비로 내야 한다. 그래도 감수한다. 그러므로 누가 갑인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 내밀한 합의를 타인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을 테니. 서연이 조금 더 아파 보여 마음이 좀 갈 뿐이다. 은근 순정파다. 남편을 끝내 자신의 남자로 간직하고 싶어 하다니. 김 차장은 그런 서연과 어떤 삶의 형태를 설계했을까. 중도파경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나 보다. 이제 모두 끝났다. 홀가분하다. 

 

- 두 번째 마지막 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엄태성과 관련한 일은 꼭 인사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거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늦은 밤 임신한 아내를 위해 순대를 사 온 정도의 느낌이었다. 때문에 나도 빨리 인사를 마쳤다. 어쨌든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화에서 타인이 빠지니 우리 둘만 남았다. 딱히 할 말이 없다. 

 

- "창고에 전구다발 챙겨뒀어. 올겨울에 혼자 심심하면 트리나 만들어." 
"왜 혼자일 거라고 생각해?"

- 왜 그랬을까. 남편을 맴도는 공허 때문인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집착이 없다. 오히려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나 카메라, CD 같은 물건에 애착을 보였다. 이 집이 남편의 안전가옥 같을 때도 있었다.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혼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쓸쓸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여보, 우리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땐 그냥 같이 살자." 
어머, 이 고객님이 또 재결합 신청을 하실 모양이다. 저기요, 고르는 재미가 당신한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술인 남편을 연이어 맞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예술인은 작품으로만 만나야 한다. 실제로 만나면 대단히 피곤하다.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까다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을 미치지 않게 하려면 어떤 미친 짓을 해도 가만히 둬야 한다. 생불이 돼야 한다. 그런데 또? 상무에게 숨겨둔 에이스 파일을 넘겨주라고 해야겠다. 잘 모르나 본데, 깜짝 놀라게 예쁜 현장근무자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 "왜 그런 말을 해?"
"자꾸 만나는 게 재밌어서. 우리 전에 클럽에서 만났잖아. 당신 수능 본 날."
잠깐, 잠깐, 잠깐! 이불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잠이 확 달아났다. 그날 나는, 거기 남자들이 다 떼로 미친놈들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 그 떼로 미친놈들 중 하나였다고? 

 

- 우리는 열아홉, 남편은 서른. 우리는 노는 게 뭔지 모르고 놀 때였고, 남편은 알고 놀 때였다. 혜영이 맹랑하게 다가와 춤을 춰도 웃어줄 수 있는 나이였던 것이다. 수능을 봤다기에 우리에게 맥주도 선물했다고 한다. 그랬나. 여하튼 그때 혜영이 나를 지목하며 수능 기념 첫 섹스를 부탁했다고 한다. 내가 많이 쑥스러워하니까 잘 부탁한다고. 매 시대 어른들에게 십 대는 매우 난해한 존재들이다. 조언이랍시고 끼어들어 훈시하면 십중팔구 꼰대로 몰린다. 가만두면 후회할 것은 후회하고 발전시킬 것은 발전시키며 제 위치를 찾아간다. 그러나 수능 기념 섹스는 너무 심했다. 수능의 더께를 첫경험으로 씻어내겠다는 의도는 지나치게 무모했다. 아무리 철부지라도 첫경험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됐다. 

 

- "얌전히 놀다 집에 가, 마."
남편은 그렇게 혜영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혜영과 함께한 또 다른 남자가 자꾸 나를 보는 것이 혜영이 같은 부탁을 한 것 같았다. 나도 이상했다고 한다. 친구에게 불편한 부탁을 한 애 치고는 너무 태평하게 놀았다. 부탁을 하러 다니는 애한테는 관심도 없고, 마주 보고 있는 애와 천방지축 장난만 쳤다. 수능 뒤의 홀가분함은 읽혔으나 성적 욕구나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저 애는 왜 저러고 다니나. 친구관계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가 위험해 보인 것만은 분명했다고 한다.  

 

- 그것이 재결합의 이유였다. 오래전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잠시 돌아가고 싶었단다. 동거와 결혼으로 한 여자의 남자가 되기 전의 자신으로, 힘들었든 괴로웠든 어쨌거나 지나온 날이므로 다시 견딜 필요가 없는 그때로. 아이러니하게 NM이라는 또 다른 결혼을 통해야 했지만 한 번쯤은 관망하며 즐기고 싶었다.

 

- 다시 만난 우리 인연도 남편을 자극했다. 엄태성이 나타났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내 위기 때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이 곁에 있는 것이다. 열아홉에 한번. 스물아홉에 한번. 

 

- "내 서른아홉에 또 나타나겠네."
"그땐 제발 다른 남자 옆에 있어줘."
"왜?"
"내가 해결하지 못할 일이면 쪽팔리잖아." 

 

- "그때 보내준 것까지 오늘 다 달려주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도 직업의식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을 텐데. 남편이 오늘은 정말 잘 달렸다. 거장의 영화를 비로소 마스터했나 보다. 막 이륙한 비행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멍하다. 안정된 비행고도로 올라설 때까지 rpm을 최대로 높인 듯한 내 몸으로 무엇이 들어온 것인가. 부드럽고 강렬하다. 몸에서 폭죽이 터지는 일이 가능한 거였구나. 사람 살려. 괜찮아? 응. 힘들면 쉬었다가 할까? 아니. 어머, 알비백. 남편의 등에서 날개가 펼쳐질 수도 있겠다. 이 천상의 섹스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연락처가 바뀔 것이다. 알면서 서로 묻지 않았다. 그런 거 없이 다시 만났듯 인연이면 또 만나겠지. 우리가 그런 인연이라면. 

 

- 상무가 회의실을 나갔다. 회사가 갑자기 박진감 있게 돌아간다. 사직서를 내면 나도 장 부장 쪽으로 가는 줄 알겠다. 시기가 참. 일 년만 더 다닐까. 일 년만 일 년만 했던 것이 벌써 칠 년이다. 세월 참 빠르구나. 나도 이 회의실에서 교육받았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입사했으므로 네, 알겠습니다, 수긍하며 교육받았다. 현장근무교육이라기에 방중술쯤 배우나 했다가, 상무의 뜻밖의 말에 조금 놀라기는 했다. 

"저쪽 팀에서 어떻게 스카우트했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스스로 접대부가 되는 순간 잘릴 거야."

 

- 회사의 질을 떨어뜨리면 바로 퇴사시킨다는 거였다. 접대부가 필요하면 각종 형태로 존재하는 업소를 찾으면 된다. 결혼이 그것과 다른 것은 섹스가 목적이 아닌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상무는 유독 그것을 강조했다. 
"제가 아는 선배는 그걸 목적으로 결혼했는데요."
"그렇다고 상주 접대부를 들였다고 하진 않잖아."


- NM의 결혼과 일반 결혼의 경계가 나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결혼은 막대한 돈을 필요로 한다. 그 댓가로 일정 기간 원하는 형태의 결혼생활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 상무가 처음부터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신입들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기에 그렇다. 어쨌거나 성관계가 존재하므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이 아주 심할 경우 첫 배우자를 섹스리스로 배정한다. 원하면 퇴사 때까지 섹스 없는 직장생활도 할 수 있다. 섹스리스 그룹은 따로 분류하는데 생각보다 회원이 많다. 간혹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할 경우에도 우리를 찾는다. 이성과 동거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동거보다 동성애를 더욱 혐오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섹스는 없다. 하지만 많은 현장근무자가 섹스리스 생활을 기피한다. 섹스리스로 살던 한 후배가 회사로 나와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 여하튼, 그런 교육이었다. 우리가 덜 상처받기 위한 교육. 집에 들어가서 우물쭈물하면 안 돼. 방금 시장에 다녀온 것처럼, 방금 퇴근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남편이 접대부를 고용한 것으로 착각하면 순식간에 눌러야 해. 여보, 이 창문 좀 빼봐, 같은 사소한 말이 가장 효과적이지. 너를 바꾸면 안 돼. 스무 살짜리든 백 살 노인이든, 지금 너의 모습을 선택한 거니까. 여기는 똑같이 배양한 배우자를 보내는 회사가 아냐. 그리고 절대 사랑하지 마. 그건 다른 곳에서 해라.  

 

- 주변 사람들은 늘 내가 만나는 사람만 중요시했을 뿐, 행복하니? 하는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연 내 불행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어쩌면 그런 무심함에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괜히 버럭버럭 화를 내서 나만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서른이다. 아직 서른에 대한 감각이 손에 딱 잡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뭐랄까, 어쩐지 유연한 탄력이 느껴진다. 왜요, 난 이렇게 사는 게 좋은데. 그땐 왜 이렇게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을까. 이제는 좀 잘 살아야겠다.  

 

- "번호 알면서 왜..." 
떡케이크. 한 뼘쯤 열린 문 사이로 떡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사람은 없고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떡케이크 상자뿐이었다. 나는 그게 궁금한 거야. 왜 내가 싫은지. 갈겨쓰지 않은 정갈한 글씨였다. 미친 새끼. 서둘러 문부터 걸어 잠그었다. 몸에 기운이 쏙 빠졌다. 허적허적 뒷걸음질 치다 발이 트렁크에 걸렸다. 본능처럼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다. 어떡하지. 전남편과 시정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에게로 가면 안전할까. 시정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구역질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 사위가 하얗게 뭉개지고 혼미한 고요가 찾아왔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고요가 그렇게 나를 덮치고 시야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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