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솜숨씀] 솔직한 척 무례했던 너에게 안녕 -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

일루젼 2023. 8. 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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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솜숨씀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20.09.01 


       

구간들을 조금씩 꺼내 읽고 있다. 읽기 전에는 '언젠가 읽어야 할' 마음의 짐이었다면,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새로운 짐이 된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라지만 적어도 '읽어보고 선택했다'는 겨자씨처럼 작은 떳떳함을 위해 오늘도 책탑을 쌓는다.

 

사실은 읽지 않고 대거 처분해 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쌓여 버렸다. 다시 살 때는 이전에 처분한 책들 중에서 절판된 책들을 구하느라 더욱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그래놓고서도 읽지는 않다 보니 점점 쌓여가는 책의 무게만큼 몸과 마음의 부채도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이 내가 계속 미뤄온 '언젠가 누릴 즐거움'이었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가장 읽고 싶은 책, 읽으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책만 읽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책은 '읽기 전'까지는 찾을 수 없다. 정말 재미있어 보여서 집어 들었는데 나와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별로다 싶었는데 읽다 보니 인생 책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아니다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능력이다. 이미 시작했어도 지금의 내게는 와닿지 않는다 싶으면 바로 포기할 수 있는 힘. 매 순간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와 애정. 그리 내키지 않는데도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해냈다'를 느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일과도 같다. (물론 때로는 그런 우직함이 독서 근육을 길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책탑을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목적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제목과 본문이 조금 다른 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편안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자신과 결이 잘 맞지 않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을 닮은 이들과 마음을 교류하기를 선택했다.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닮은 이들과 있을 때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다만, 누군가의 무례는 받아들이는 이의 기준에서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나와 잘 맞지 않았던 너에게 안녕'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관계를 정리할 때 꼭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어서 정리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이어야만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러한 내려놓음의 끝은 결국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돌아온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만의 무게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자 동시에 나에게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오늘도 중얼거려 본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니까. 너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닐 수도 있지. 나는 나니까.  

         


   

-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매번 웃고 또 줄곧 생각했다. 시트콤 속 박해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고 싶은 말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면 인생에 스트레스 같은 건 없겠다고. 하지만 현실의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며 이불을 차다가 결국 엉뚱한 데서 그동안 참아온 감정을 터뜨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나문희에 가깝다. 

 

- 나문희가 난감한 얼굴로 '호구마'라며 실수처럼 내뱉은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건 호구처럼 마냥 착하지도 않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는 박해미 같은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착한 주제에 어설프게 못되기까지 한 사람들에게 나는 '호구마'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호박도 고구마도 아닌 정체불명의 호구마처럼 애매한 사람. 조금 더 솔직하자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 돌이켜보면 인간관계에서 늘 엉뚱한 노력들을 해왔다. 내 본모습은 숨긴 채 주변에 완벽하게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욕먹고 싶지 않아서 착해 보이려 노력하고, 거부당하고 상처받을까 봐 스스로를 쿨한 사람으로 포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진짜 나는 희미해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나만 남았다. 버럭 화를 내고 뒤돌아서자마자 혹시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 사람에 대한 콩깍지가 조금씩 벗겨진 건, 삼십 대에 들어서고 나서다. 관계에 일희일비하고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겨우겨우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 단순함이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줄이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에게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 잘라내는 일, 이건 어쩌면 편집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산책이나 일을 마친 뒤 마시는 맥주 같이 중요한 것의 분량을 늘리고, 불필요한 야근이나 모임처럼 하찮은 건 과감하게 생략하는 작업이 인생에 좀 필요하지 않나.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려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내가 나다울 수 있도록 온전히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한다.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를 힘겹게 끌어안고 갈 필요는 없다. 

 

- 인간관계에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만 상처받고 끝나는 노력보다는, 실제로 노련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노련함은 테크닉, 즉 기술의 문제이며 기술은 대개 연습량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다 싶은 관계는 확실하게 거절하고 감당할 만한 관계는 기꺼이 책임을 지는 연습.  

 

- 솔직함이라는 포장으로 무례함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도 그랬다. 책상은 늘 깨끗하고 가방 속에는 필요한 것들이 제자리를 정확하게 차지하고 있었으며 칼 같은 일정 관리에 일 처리도 확실했다. 인간관계 또한 어찌나 깔끔한지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일상이 부러웠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상처를 받는 것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

- 반면 나는 만사에 일희일비하는 인간, 책상이나 가방 속은 혼돈의 끝을 보여주며 일은 마감이 눈앞에 닥쳐야 겨우겨우 마무리했다. 인간관계도 깔끔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과 복닥거리며 지내다가 상처받아 울고 있을 때면 그녀가 하는 말이 있었다. 
"사람은 아흔아홉 번 잘해주고 한 번 못해주잖아? 욕을 바가지로 먹어. 근데 아흔아홉 번 못해주다가 한 번 잘해주면 엄청 감동받아서 그다음부턴 나를 대하는 눈빛부터 달라진다니까." 

 

- "알고 보면 좋은 애야.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의외로 여리고 속도 깊은 걸."


- 지난 십여 년간 내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온 방식이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 알고 보면 여린 사람 등 그동안 내가 관계를 이어온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조심성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이 우선인 사람들이었다.

- 최근 들어 나는 그런 유의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타고나기를 수줍음 잘 타고 내성적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데다가 욕먹기도 싫어해 모든 사람에게 잘하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랄까, 나는 이제서야 겨우 내가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걸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데 쏟아부을 체력도, 시간도 이젠 없다. 무엇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도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일 따위 더는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낮부끄러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 나를 나답게 만드는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실컷 좋아할 수 있도록 그 밖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더는 지름길이리라. 
싫은 사람은 싫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기. 

 

- 매일 아침 다짐한다. 남을 험담하는 데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어떤 대화는 한참을 웃고 떠들고 난 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더부룩해지고 나를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회가 밀려온다.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말을 뱉었다는 죄책감, 왠지 모를 미안함. 그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출처 없는 남 이야기를 전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하면 후회하는 마음이 눈덩이처럼 데굴데굴 굴러 거대해진 채가슴에 얹힌다. 

 

- 회사 생활은 참 우습다. 성공적으로 끝난 업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면서 누군가 실수한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쉴 새 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칭찬받을 일은 한 달이 지나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반면 욕먹을 만한 일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만천하에 알려진다. 메일에서 오타 하나라도 발견되면 메신저에 단체방에 올라온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노란 불이 바쁘게 깜빡인다. 캡처한 이미지를 주고받고 몇 달 전 잘못까지 들추며 한껏 빈정거리는 말이 오간다. 

- 가장 싸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이고, 가장 쉽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집단은 특정인을 헐뜯으면서 견고해지기도 한다.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협업하는 것보다 외부에 적을 하나 만들어놓는 것이 서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암묵적인 룰인 듯하다.

 

- 욕먹는 사람과 욕하는 사람의 대결. 누구 하나가 퇴사해야만 악순환이 끝날까? 아마도 누군가를 욕하는 사람은 상대가 없어지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을 또 찾아내지 않을까. 가뜩이나 꼬투리 잡는 건 쉽고 칭찬하기는 어려운 회사 생활에서 험담이라는 일에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은 맞장구치지 않는 것이다. 험담에 동의하지 않을 것. 동요하지 않을 것. 동참하지 않을 것. 어떤 대화에서는 대답하지 않을 것. 

- 묵묵부답이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험담으로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짓 대신, 혼자서도 스트레스를 잘 풀 수 있어야 한다. 화내고, 불만을 소리 내어 말하는 에너지는 뒷담화가 아닌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

 

- 첫 회사에 힘겹게 들어갔는데 망했다 싶을 때, 이런 곳에 오래 있어봤자 도움이 1도 안 될 것 같을 때, 내가 꿈꾸던 직장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충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대하기 딱 좋은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좋은 기회가 오는 건, 어떤 일이든 정성껏 임했을 때였다. 어차피 신입에게는 재밌고 중요한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등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 능숙하게 반복되는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나만의 업무 시스템' 혹은 '중요하지 않아 보여서 남들은 대충 넘어갔지만 신경 써서 하니 예상외로 좋은 결과물이 나온 일'처럼 한 끗 차이가 다른 상황을 만들고 좀 더 나은 나를 만든다.   

 

- 아무리 거지 같은 회사, 답답한 팀장 밑에 있다 해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마침내 성과를 냈을 때 느끼는 충만한 기쁨은 성실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덤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해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거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는 것. 더 노력하지 않은 과거의 나를 탓하지 않고,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며 현재의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다.

- 물론 진짜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길로 가겠다고 한번 마음먹었다면, 인생, 노빠꾸 Noback다. 

 

- 축하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나이 들수록 남의 일에 순수하게 기뻐하기란 그야말로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특히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못해 보이는 누군가가 눈에 띄는 성취를 이뤄내면 정말로 배가 아파질지도 모르니까. 속이 꼬인 사람들끼리 그저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라는 둥 뒤에서 한껏 멸시하며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런 대화는 어떤 면에서 짜릿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질투와 시샘이 편협함과 만나 무시와 멸시라는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욕으로 모두가 대동단결하는 기괴한 현장을 맞이하고 있자면 솔직히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제일 부끄럽고 무서운 순간이다.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내 안의 악의와 비겁함인 것이다. 

 

- 기쁜 일에는 축하를, 슬픈 일에는 위로를 전한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걸 하지 못해 심사가 배배 꼬인 사람이 되지는 말자. 주변에 인색해지지 말자. 오늘은 비겁했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내일은 비겁해지지 않을 용기를 낼 것이다.  

 

- 회사에서 맡은 일들은 대체로 재밌는 편이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협찬을 요청하거나 전혀 관심도 없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할 때는 나 자신이 좀 안쓰러웠다. 구차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을 몇 달 동안 연달아 처리할 때는 살이 5킬로그램씩 빠졌다. 나는 사람 대하는 일에 유난히 서툴렀던 것이다. 싫어하기도 했고. 

 

- 나는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덜 불행하기 위해 나에게 쿠폰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 열다섯 개의 친절 도장을 찍는 나만의 사회성 쿠폰, 일주일 안에 베풀 수 있는 친절을 최대 열다섯 번으로 설정한 쿠폰이다. 커피 쿠폰처럼 도장을 다 모으면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 한 잔처럼 한 번의 공짜 친절 같은 건 물론 없다. '우리 가게에 열 번이나 와주셔서 감사하니 이번 한잔은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또 애용해 주십시오'라며 어떻게든 단골을 만들어보겠다는 카페 사장님과 다르게, 나는 '내가 이번 주에 이미 열다섯 번이나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뭘 더 바라는 거야. 배은망덕하긴' 하며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다. 

 

- 더군다나 나라는 사람에게 사회성 쿠폰을 선물하게 된 데에는 '관계를 정리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딱 열다섯 번의 친절이라면, 누구에게 쏟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 초대한 지인에게 알은 체하며 인사했다가 돌아온 답변은 내 귀까지 빨개지게 만들었다.
"와줘서 고마워. 근데 이름이?"

- 일명 '이름이' 사건은 행사에 같이 가준 김 선배에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다는 전설. 최근에 <오케이 라이프>의 오송민 작가님을 만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소연했더니 그가 해준 말이 있다.
"삼십 대는 관계를 덜어내야 하는 나이예요." 

- 맞다. 인간관계에도 미니멀리즘이라는 게 필요하다. 인맥 관리라는 걸 해보겠다고 어설프게 나갔던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나를 갉아먹는 것이 되었다. 통상 인맥이라든지 네트워크라든지 하는 것들은 나의 성공, 나의 행복과 하등 상관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고, 표면적인 관계보다는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는 깊은 관계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만나고 헤어질 때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 관계가 있는 반면 만나고 헤어질 때 뼛속까지 영혼이 충만해지는 관계가 있다. 후자 쪽에 내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다. 그런 관계라면 나만의 사회성 쿠폰 속 15회의 친절을 모두 바쳐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

 

- 프랑스에서는 연인들끼리 팍스 PACS를 맺는다고 한다. 시민연대계약이라는 의미의 팍스는 결혼하지 않아도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파트너십 제도인데 이들은 서로를 남편, 아내 대신 파트너라고 칭한다. 파트너라니, 가족 간에 서로를 지칭하는 이보다 더 평등한 말이 있을까. 

 

- 물론 나의 이면에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이름을 떠맡듯 부여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숨어 있다. 사회가 제시하는 현명한 아내, 착한 며느리, 훌륭한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다. 육아에 헌신하느라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원망을 남편과 아이에게 쏟아내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남편과 양가어른들을 챙기느라 내 인생에서 나를 지우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지금 나를 이루는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친한 친구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복닥복닥 사는데 나 혼자 나이 먹고 외로움에 잔뜩 몸부림치다가 고독사하는 상상도 한다. 혼자 사는 여자는 한국 사회에서 정상으로 취급될 수 있을까. 결혼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사람과 잘 살 수 있을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도 괜찮을 수 있을까. 

 

- 아이를 낳고 보니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렸다고 말하는 지인이 있었다. 출산과 육아로 많은 기회를 놓친 대신 사랑스러운 아이를 가졌으니 만족한다는 그의 핸드폰은 아이가 엄마만 찾는다며 언제 오냐고 성화를 부리는 남편의 전화로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출산과 육아로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는 왠지 괴물 같다. 기회와 가능성을 잡아 먹히는 쪽은 왜 항상 이쪽일까. 

 

-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은 경이롭지만 결혼도 아이도 없는 내 삶도 마찬가지로 경이롭다.  

 

-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산다. 잊지 말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 

 

- 배우 이솜이 주인공(미소 역)으로 나오는 영화 <소공녀>를 보았는지. 영화 속에서 미소는 어느 날 집주인으로부터 월세를 올리겠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월세 때문에 담배와 위스키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단을 내린다.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를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한 것이다. 셋방살이하던 집을 내놓고 지인들을 한 명씩 찾아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하며 가사 도우미를 자처하는 미소의 당당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나라면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담배나 위스키 둘 중 하나를 포기했겠지. 

 

- 영화를 본 그해 연말, 나는 '올해의 인물'로 미소를 선정했다.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고, 마음껏 좋아할 줄 알며,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만큼 멋있는 게 있을까. 한동안 나는 난처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미소라면 어떻게 했을까?"

 

-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크림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발견했다. 턱 아래와 목 아래를 부드럽게 감싸는 캐시미어의 촉감과 검은색 코트 위를 멋스럽게 장식하는 크림색의 조화를 상상했다. 머플러를 두른 채 오른쪽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회사 출입문을 당당하게 열며 출근하는 나의 이미지를 최대한 빨리 갖고 싶었다. 저것만 사면 근사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얼른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가격을 확인하곤 멈칫했다. '아니 머플러가 이렇게 비싼 일이야?' 재작년에 산 체크무늬 머플러도 떠올랐다.  

 

- 며칠 동안 크림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한 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머플러가 담긴 택배 상자를 받는 꿈까지 꿨으니 말 다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카드값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돈을 이렇게 많이 썼을 리가 없다고, 카드사에서 전산 처리를 잘못해 오류가 난 게 분명하다며 지출 내역을 샅샅이 살폈다. 항목마다 편의점 간식과 야식에 지갑을 활짝 열어젖힌 과거의 내가 있었다. '이렇게 돈을 쓸 거였으면 머플러를 샀어야지!' 하고 후회하는 나. 그러면 늘어진 뱃살 대신 크림색 캐시미어 머플러가 내 곁에 있었을 텐데. 

- 사무치게 좋아하는 한 가지를 포기하고 어정쩡한 아홉 가지를 선택하는 꼴이 하찮게 느껴진다. 십만 원짜리 머플러는 비싸다며 사지 않고 만 원짜리 군것질을 열 번 하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어중간한 나머지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기 위해서는 내 삶에서 그저 그런 것들을 최대한 덜어내야 하는 것이다. 애매한 말과 행동으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선택을 한 다음 찝찝해하는 것도 이젠 싫다. 지겹다. 

 

-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닌 아홉 가지를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는 불편들은 고요히 감내하고 책임진다. 나를 적당히 거부하고 적당히 받아들이며 산다. 그건 어쩌면 나를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엄마는 늘 자세를 강조했다.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어깨는 쫙 펴고 아랫배에 힘을 팍 줘야 사람의 중심이 똑바로 선다고 말했다. 
"중심이 똑바로 서면 쓸데없이 뱃살이 찌는 일도 없고 사람이 커 보인다. 네가 가진 능력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티가 날 거야. 닫힌 문 틈으로도 꼭 새어 나오는 빛처럼 아무리 막으려 해도 티가 나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여기서 너의 무게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준단다." 

 

-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보다 가늘고 길게 산다는 말을 좋아한다. 얼핏 하찮아 보이는 규칙들이 생활에 미치는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하루 한 끼 정도는 직접 요리해서 먹기, 딱 십 분만 일찍 출발해서 약속 장소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가지런히 갠 속옷들을 서랍장에 일렬로 정리하기, 자기 전에 들을 음악 한곡을 고심해서 고르기처럼 적당히 부지런하고 적당히 게으르게 만들어가는 생활의 규칙이 차곡차곡 쌓인다.  

- 가늘고 길게 버티는 마음 아래에는 단단한 일상이 자리 잡고 있다.

 

- 적당한 인생만큼 지루하고 따분한 삶은 없으리라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적당히 가늘고 긴 일상이야말로 큰 행운이다. 하루하루 반복하고 싶은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무겁고 크고 지키기 부담스러운 규칙 말고, 적정선의 노력만 기울이면 충분히 이뤄낼 만한 심플한 규칙들로 하루를 채우다 보면 인생의 고달픔 따위는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역시 우리 딸이 최고야." 
K-장녀들이여, 이 말을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 착하고 예쁜 딸, 공부 잘하는 딸, 부모 말을 잘 듣는 딸, 가족을 보살필 줄 아는 딸. 그건 즉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며 반항하거나 엇나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다 가족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것이 도리라는 압박감에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도 하고 누구보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성장한 딸이란 뜻이다. 

 

- 세상의 모든 첫째는 부모가 거듭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라는데, 나 또한 맏이의 굴레를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첫째에게 주어지는 평균 이상의 기준과 기대치를 맞추느라 자기 검열에 최적화된 인간으로 컸으니. 
 

- 호시노 겐, 아라가키 유이 주연의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는 해고당하고 백수가 된 주인공이 구직 포비아에 시달리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다.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인정받고 싶다.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일까? 다들 누군가가 필요로 해주길 바라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여러 마음을 조금씩 포기하고, 울고 싶은 마음을 웃어넘기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선택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실망시킬까 봐 슬프게 만들까 봐 노심초사하며 부모의 눈치를 자주 살피는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아직까지도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바보 같은 걸까?  

 

- 도망치는 건 부끄럽다. 하지만 도움이 된다. 
맞다. 애써 정면 승부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이 답일 때도 있는걸. 말 잘 듣는 착하고 예쁜 첫째 딸이라는 역할은 그만 내려놓고 전력을 다해 도망가야겠다. 
이제 나는 부모를 실컷 실망시키고 싶다. 

 

-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옆에 다가와 '뭘 고민하고 그래, 다 맛있는데' 하는 얼굴로 "뭐 드릴까?"라고 묻는 노포의 장인들. 맛에 대한 믿음을 '무심한 태도'로 대신하는 노포 장인에게서 배우는 건 딱 하나다. 잘하는 것을 오래 할 것. 

 

- 잘하는 것을 오래 할 것. 잦은 포기와 실패를 반복하는 내게 이 말에 담긴 뜻은 좀 특별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과로 진학할지 문과로 진학할지를 결정할 때, 대학에 들어가기 전 전공을 정할 때, 취업 준비를 할 때, 건망증이 심한 팀장이 저지른 실수를 뒤집어써서 퇴사를 고민할 때, 심지어 지금까지도 나를 자주 시험에 빠뜨리는 질문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 잘하는 일을 해야 하나요?"

일생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듯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유난을 떨며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게 만드는 질문.

 

- 종로의 얽히고설킨 골목을 걷고 또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김귀엽 할머니가 이름과는 달리 아주 시크하게 고추김밥을 툭툭 썰어 내주시는 분식집이 있다. 오후 세 시부터 떡볶이 딱 한 판만 만들어 40인분만 팔고 미련 없이 문을 닫는 곳. 떡볶이 마니아들에겐 입소문이 자자한 곳. 김귀엽 할머니가 만드는 고추김밥의 매운맛은 클래스가 다르다. 그동안 먹은 매운 라면, 매운 돈가스, 매운 치킨이 그냥 커피면 김귀엽 할머니의 고추김밥은 티오피. 어묵 국물은 거들뿐이다. 

 

- 협소한 테이블 앞에 앉아 고추김밥을 돌돌돌 말아 칼로 툭툭 자르는 할머니의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맛에서는 어떠한 타협도 없으리라는 단단한 마음새가 엿보인다. 오후 세 시에 만든 떡볶이 한 판이 동나면 깔끔하게 문을 닫는 한결같은 심지까지. 

- 그러고 보면 노포 장인들의 내공이 쌓인 음식들이 하나같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간결한 맛'이 아닐까?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비결은 아무리 생각해도 힘주기가 아닌 힘 빼기의 영역에 있는 듯 보였다. 역시, 잘하는 것을 오래 하는 데 화려한 기술이나 편법 같은 건 필요 없다. 오로지 '힘을 줘야 하는 데 힘을 주고, 힘을 빼야 하는 데 힘을 뺀다'일 뿐. 간결하지만 깊은 맛은 힘을 줬다가 빼는 순간, 즉 치고 빠지는 타이밍에 나온다. 

 

- TV 인터뷰에서 "내가 실컷 쉬고 나면 손님한테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지. 내 몸이 편하면 아무래도 신경 써서 해주니까. 내 몸이 피곤하면 아무리 한다고 해도 정성스럽게 못 해요"라고 김귀엽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가게를 운영할 때도 쉬어야 할 땐 쉬고 일해야 할 땐 일한다. 과연, 치고 빠지기의 영역인 것이다. 

 

- 내 인생에도 치고 빠지는 타이밍의 맛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지 잘하는 일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낼모레 90세를 앞둔 우리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늘 같다.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쓰지 않겠냐잉, 사람 죽으란 법 없고, 계속하다 보면 어떻게든 살길이 나타나는 법이제. 다 지가 허는 만큼 지 팔자 타고난당께."

- 그러면서 지갑은 크게 열수록 그만큼 돈이 들어오니, 이번에는 이 늙고 힘없는 할미에게 지갑 한번 크게 열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까지 덧붙이신다. 용돈 달라는 말씀을 이토록 민망하지 않고도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잡아 말할 줄 아는 할머니. (어느새 지갑을 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손주의 신뢰와 용돈을 동시에 얻어가는 지혜의 왕.

 

- 좋아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오기도 하고(좋아하던 일이 싫어지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잘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잘하던 일이 좋아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이든 잘하는 일이든 우직하게 가다 보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꼼수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힘을 줘야 할 땐 힘을 주고, 힘을 풀어야 할 땐 힘을 풀면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인생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잘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든가, 잘하는 일을 좋아하든가, 둘 중 하나인 게 속 편하고 좋습디다."

 

- 일의 목적이나 방향을 상세히 설명해 줬다면 나 또한 빠른 시간 내에 잘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상사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왜 알려주기를 한결같이 성가셔할까. 일을 알려주는 건 귀찮아하면서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를테면 자기 친구가 어느 대기업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거나 자기가 술을 얼마나 잘 마시는지 같은 걸 떠벌리는 건 또 엄청 좋아했다. 

 

- 회사에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 따로 있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 사람 따로 있다. 

 

- 일하는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스승 같다. 작가든 디자이너든 마케터든 서점 관계자든 인쇄소 기장님이든 옆자리 편집자 동료든 능력이 의심스러운 상사든. 누구든, 배울 건 빠짐없이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 배우지 않아야 함을 배운다.

 

- 그러고 보면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 하지만 웬만해선 경험하지 말자. 독이 득이 될 때가 있긴 한데 굳이 독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생의 답! 

 

- 경력이 수십 년 차인 드라마 작가를 만났다. 첫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작가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헤어질 땐 '언니, 사랑해요'라고 속으로 고래고래 외쳤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 같다. 

 

- 작가님은 미팅 한 시간 동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촌철살인의 조언들을 위트까지 겸비한 언변으로 짧고 굵게 해 주셨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Next is never" 다. 방송계에서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말이 바로 이것이라는데, 가령 어느 PD가 "다음에 같이 작업해요"라고 한다면 그건 앞으로도 당신과 일할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PD 한테 연락이 올 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면서 희망을 품는 순진한 사람들이 꼭 있다는 것이다.

 

- 방송국 사람들 참 잔인하네,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작가님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의도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해. 안 그럼 당한다?"

어리바리하면 눈뜨고도 순식간에 코도 베어 가고 눈알도 뽑아 간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소름이 돋았다.

 

-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두 번째는 "돈 없는 남자의 정절은 믿지 않는다"였다. 듣자마자 박장대소에 물개박수를 치면서 격하게 동의하던 와중에 이어진 말도 결코 잊지 못한다. 안간힘을 쓰며 이 바닥에서 결국 살아남았지만, 일에 대한 애정과 그에 마땅한 보수가 없었다면 자신도 진작에 때려치웠을 것이라는 이야기. 수십 년 넘게 드라마 대본 작업을 반복해 온 사람의 말이었기 때문일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 의지가 꺾일 때 이 말을 종종 떠올린다. 오래오래 좋아하고 싶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오래 해 먹어야겠다고 다시금 의지를 다잡는다. 내 인생의 홈런은 바로 롱런이다. 

 

- 수개월이 지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백수 생활을 청산했다. 신입사원이 되고 나니 백수였던 내가 왜 백수 시절을 순도 100%로 즐기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시종일관 간사하다. 출퇴근이 반복되는 삶이 한때는 즐거웠고 한때는 너무 괴로웠다. 

 

- 아닌 게 아니라 입사 후 몇 년간은 어린 여자애라는 이유로 은근한 무시와 질타를 받기도 했기 때문인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몇 살이냐, 직급은 없느냐부터 시작해 공부 좀 더 하셔야겠다고 비아냥거리거나 계약서에 사인 안 해줄 건데?라고 능청맞게 웃으며 사인하는 선생님들은 왜 하필 다 중년 남자였던가. 내가 어리고 여자라서 이따위 대우를 받는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남자동료와 같이 간 미팅 자리에서는 다들 한결같이 공손하고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며 머릿속에서는 대환멸 파티가 폭죽을 터뜨렸다. 테이블을 확 엎어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출입문을 열고 당당히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현실은 입으로는 웃고 있으나 눈으로는 레이저빔을 쏘는 중. 

 

-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얼른 삼십 대가 되길 바랐다. 머리는 싹둑 '똑단발'로 자르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옷차림을 하는 등 어려 보인다거나 여성스러워 보일 만한 여지는 최대한 제거했다. 많은 사람이 의외로 너무 쉽게 상대방의 겉모습에 속아 넘어간다는 걸 아주 잘 안다

- 일 자체만으로 괴롭고 싶다. 나이나 성별 같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정말이지 나이나 성별로 고통받는 단계는 넘어서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저절로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갔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역시 존버가 답이었던 걸까. 

- 속으로 삼키고만 있지 않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사과하지 않고,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또박또박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그건 분명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 화를 정확하게 낸다. 정확하게 고르고 고른 단어로 나를 설명한다. 그러면 상대도 알아준다. 화를 내는 것도 결국 관계 맺기의 한 부분인 것이다. 화를 참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를 낼 때 정확한 언어로 나를 표현하면 타인도 자세를 고쳐 앉고 귀 기울여 들은 다음 제대로 된 사과를 한다.  

 

- 불과 십여 년 만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초능력의 영역이라고 나는 자주 이야기했다. 그런 내게 엄마는 버릇처럼 말했다.

"바라는 게 있으면 입이 닳도록 자주 소리 내어 말해줘야 해. 그래야 진짜로 이루어져."

 

- 떠버리처럼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게 아니라 말한 만큼 실제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 있는 기적이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뒤로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소리 내어 희망을 이야기하며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 하지만 이제 나도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 천지라는 사실을 잘 아는 어른이 되었다. 노력이 우리를 얼마나 배신했는지도 너무 잘 안다. 최선을 다하면 실패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라던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노력한 만큼 후회하기 때문이다.  

 

- 며칠 전 퇴근하면서 맥주를 사 들고 휘적휘적 집으로 향하던 길. 집 근처 곳곳에서 푸르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덩치 큰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럽지만 그 초록초록함에 놀랐다. 내가 시시한 어른이 되는 동안 이곳의 나무들은 이십삼 년 동안 덩치를 키우고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젊고 아름다운 지금 이 순간의 초록력 같은 것은 내팽개친 채 여전히 가능성 없는 일(이를테면 성공적인 연봉 협상이나 복권 당첨)에 쩔쩔 매면서 실패와 실망에 자기 파괴를 일삼았다. 
 
- 식물들은 계절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균형을 천천히 잡아나가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그들 또한 혹서나 혹한 대비에 자주 실패하고 자주 성공하며 매년 진화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저 푸른 나무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뿌리를 단단히 하고 이파리를 풍성히 만드는 과정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치열한 생존 싸움인 건 식물에게나 나에게나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이십삼 년 된 아파트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눈앞의 계절에 집중해 힘껏 반응하고, 나는 먼 미래의 불확실한 성공만 바라보며 지금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맹신하다 이대로 망할지도 모른다. 

 

- 수시로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본인이 무례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무례한 줄 모르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전형적인 심보 고약한 유형이고 후자는 타고나기를 눈치가 없는 유형이다. 어느 쪽이든 살면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희한하게 언제 어디서든 꼭 한 번씩은 만나게 된다. 내 주변에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뻔뻔하게 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한때는 '나한테 몰염치한 인간들을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게 있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 "똥파리가 왜 그렇게 꼬이는지 알아? 네가 똥이기 때문이야!"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 현이 농담인 듯 진담 같은 말을 던졌다. 현의 등짝을 때리며 야, 그럼 너는 내 친구니까 너도 똥이냐 하고 꽥 따져 물었지만 내심 나는 문제의 원인이 전부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물러터졌기 때문이야'라고 속으로 외치며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비난의 화살이 완전히 엉뚱한 데를 향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에게 문제가 많아서 이상한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는 줄 알았는데 실은 자기 처지만 우선시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 것뿐이다. 인간관계에 서투른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자기 비난을 할 필요는 없다. 

- 인간관계에도 약육강식이 존재한다.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 앞에서는 알게 모르게 조심하게 되고, 착하고 무던한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푼다. 강한 상대에게는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강하다는 '강약약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강약약강 타입이 되고 싶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 부러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고 싶지도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이럴 땐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바라봐야 한다.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책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밀어내는 절차를 간략하게 만드는 것이다.

 

- 인간관계 단순화 방식 중 하나는 버럭 리스트 만들기다. 버럭 리스트는 '상대방이 OOO 할 때 버럭 화를 낸다'는 목록인데 상당히 효과가 좋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동생에게 양보하라'는 주입식 가정교육을 받은 맏딸로서 적재적소에 화를 내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채, 그저 참고 참다 엉뚱한 타이밍에 분노를 폭발시켜 주변 사람들을 자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버럭 리스트가 나에게 특히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이유다. 어떨 때 화를 내는지 반복하여 상대방에게 인지시키면 나중에는 알아서 조심한다. 
  
- 버럭 화를 낸다고 썼지만 실질적으로 나는 침묵을 애용한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라고 한마디 한 다음 굳이 근거를 들먹일 것도 없이 가만히 있다 보면 상대가 알아서 변명할 거리를 찾아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다. 원래 말이 많을수록 불리한 법이다. 만에 하나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말한다.  

- 인간관계에서 밀당 같은 기교는 덜어내고 단순함을 늘린다. 단순할수록 정신 건강에 좋다. 단순화하는 데에는 버럭 리스트처럼 나만의 원칙을 세워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무척. 

- 하루는 아이스 카페라테가 정말 맛있는 카페에서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왠지 처녀자리일 것 같았는데 역시"라는 말을 들었다. 예상치 못한 별자리 덕후의 등장이다.
혈액형 성격 유형이나 MBTI, 타로, 사주 같은 걸 신뢰하지는 않지만 어째서인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에 대한 후한 평가가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결정을 내리고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지는 일이 우리를 더 나은 어른으로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 한결같은 나로 살아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 불현듯 우스워졌다. 퇴근 후방에서 혼자 이상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감자칩을 우걱우걱 먹으며 캔맥주를 들이켜는 게 진짜 나인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막춤을 추는 내가 진짜 나인가, 그것도 아니면 애절한 사랑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었다고 상상하며 거울을 보면서 눈물 즙을 짜내는 연기놀이를 하는 내가 진짜 나인가. (쭉 나열해놓고 보니 스스로가 너무 딱해서, 어느 모습도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진짜 내 모습이 어떤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이 사회에서 다양한 자리에 놓여 있고, 그에 마땅한 소임을 다해야 하는 여러 위치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 자신의 포지션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에는 관계를 구조 조정해 보는 것도 괜찮다. 단, 이때 '좋은 사람'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좋은 상사, 좋은 동료 대신 일 잘하는 상사, 일 잘하는 동료가 되자. 의사 전달과 업무 지시를 명확하게 하고 일처리를 빈틈없이 하는 것,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만 남지 말 것,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것, 때에 따라 다른 자아를 드러내는 내 자신이 어색하고 겸연쩍더라도 그러려니 할 것. 일하는 사람의 페르소나라고 생각할 것. 
 

- 대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는지 천방지축 어리둥절 엉망진창 돌아가는 하루를 보내는 나로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하기 어려울 일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만큼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자고 싶을 때 맘껏 자면서 충만하게 살고 싶다고 버릇처럼 말하던 나지만 실은 루틴이 있는 삶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간절히 원한 적도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한 하루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작고 소소한 습관들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일상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일정한 루틴을 가지고 매일 꾸준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돌발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 흔히들 성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의지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건 일관성이었다. 작지만 숙달된 습관 체인들이 맞물려 쉬지 않고 움직이며 슬럼프 따위 거뜬히 넘기기도 한다. 강하다는 건 이런 것 같다.

 

- 언젠가 창의적인 사람들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침 일기를 쓴다는 말을 듣고 솔깃하여 한 달 동안 혼자서 아침 일기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겠지 싶어 매일 저녁 아홉 시만 되면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했다. 저녁 아홉 시에 잠든 나는 평소 일어나던 아침 여섯 시 반에 눈을 떴다. 한 달 내내 그랬다. 결국 피부가 고와지고 컨디션만 왕창 좋아졌다는 웃기고 슬픈 전설.  

 

- 보이차를 끓이는 일은 복잡하지도 않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수기 물을 마시거나 생수를 사 마시는 것보다 훨씬 품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 외국어를 공부하려면 동사보다 형용사를 먼저 외우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여행 가서 현지인에게 무언가 물어봐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동사는 보디랭귀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반면 형용사는 몸짓으로 설명하기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도 충분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만큼 형용사는 우리의 일상을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아름답다, 쓸쓸하다, 슬프다, 행복하다 같은 형용사로 섬세하게 나를 표현하는 일은 내가 나와 관계 맺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아닐까. 

 

- 가끔 우리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이나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을 너무 쉽게 단순화해 버린다. 소설 <백의 그림자>에서는 사람이 아직 살고 있는 전자 상가를 철거하는 광경을 목격한 남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한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게 아닐까." 

 

- 쉽고 편한 것을 경계한다. 생활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기술이 우리의 삶을 정말 윤택하게 만들어줄까. 복잡한 문제를 차별 없이 해결하는 능력,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잘 살기 위한 복지가 무엇인지 머릿속에 그려보는 상상력을 축소시키는 건 아닐까 의심한다. 느리고 불편한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쉽고 편리한 기술의 혜택은 정상이라는 범주안에 속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으니까. 섬세한 구별 없이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여성과 남성, 보수와 진보 등 이분법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집에서 직접 물을 끓여마시는 건 형용사와 닮았다. 살아가는 방향과 방식을 섬세하게 나눌수록 단단해진다. 나의 생활에 디테일한 요소를 한두 가지씩 더해주는 건 아름답고 쓸쓸하고 슬프고 행복한 삶, 즉 나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 롤 모델의 부재.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나를 불안 속으로 밀어 넣었던 감정과 질문은 롤 모델의 부재라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가부장제 위로 쌓아 올린 사회 시스템은 툭 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래성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 연애 문제나 사회생활 문제나 인간관계 문제 등에서 진짜 조언다운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건 '언니들'뿐이라고 생각한다. 핑클 언니 말고도 내가 사회에서 만난 언니들은 "저 사람 조심해라", "회식 자리는 굳이 2차까지 갈 필요 없으니까 1차에서 고기만 실컷 먹고 빠져라", "영양제는 이게 좋은데 공구하자"와 같이 살아가는 데 진짜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만 해줬으니까. 언니들의 조언은 늘 새겨들어야 한다. <캠핑클럽>이라는 예능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왔던 이유다. 

 

- 내가 좋아하는 건 집과 빵이다. 밤식빵 모양의 전원주택을 짓고 지난해 마당에 심은 금귤이나 블루베리로 잼을 만든 다음 직접 만들어 방금 막 구워져 나온 빵에 발라 새하얀 접시에 투박하게 담아서 올리브색 소파 위로 가져가 아무렇게나 앉는다. 빵을 먹으며 어제 읽다 만 책을 펼친다. 그리고 동네 카페에서 사 온 원두를 갈아 정성껏 내린 커피를 곁들이는 것이다. 그런 삶을 꿈꾼다. 하지만 전원주택은커녕 방 두 칸 딸린 내 집 마련도 상상하기 어려운 나는야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 매달 학자금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기도 빠듯한 출판사 편집자다. 

 

- 월요일은 빵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특히 마감을 앞두고 있다면 빵을 고르는 기준이 몇 배로 날카로워진다. 오늘 먹는 이 빵이 나를 오타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바라며, 어느 때보다 섬세한 손길로 빵을 엄선해 쟁반 위에 옮겨 담는다. 카스텔라, 머핀, 밤식빵을 고르는 날에는 우유를 같이 주문하고 크루아상, 바게트, 크림치즈 베이글을 고르는 날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같이 시킨다.  

 

- 한동안은 브라우니에 푹 빠져 있었는데, 맛도 맛이지만 브라우니의 탄생 비화가 머릿속을 맴돌아서이기도 했다. 뱅고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면서 깜빡하고 이스트를 넣지 않았다. 이스트가 빠진 케이크는 부풀어 오르지 않았으니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할 운명. 그런데 케이크를 버리기 직전 "생김새가 영 볼품없구먼" 하며 시큰둥하게 한 입 먹었는데, 쫀득하면서도 촉촉한 맛이 예상외로 훌륭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브라우니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스트를 빠트린 실수가 브라우니를 만들고, 당연히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던 빵이 새로운 메뉴가 되었다는 먼 옛날 누군가의 경험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던 내가 사실은 무척 맛있는 브라우니였다고, 아직 다른 누군가가 나의 쫀득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해주는 듯해서 빵을 먹을 때마다 위로를 받는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르고 폭신폭신한 다정함이다.

- 아빠는 술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조용히 한마디 뱉었다. 
"한 달 정도,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살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자주 하던 생각이고, 살림살이에 지친 엄마가 종종 소리 지르듯 했던 말이기도 했는데 아빠한테 들으니 새삼 낯선 단어, 혼자.

 

- 오직 혼자일 수 있는 자유에는 얼만큼의 가격이 매겨질까. 

 

- 눈치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혼자가 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얻기 위해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의 바람이 순진하다고, 영 시원찮다고 액정에 뜬 0의 개수만큼 계산기가 나를 비웃는 듯하다. 혼자인 기분, 혼자임이 가능한 공간은 어쩌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사치가 아닐까. 

 

- 하루 24시간 중 좋아서 하는 일이 차지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 컴퓨터 모니터를 가득 채운 보고서는 잠시 미뤄두고 머릿속에 엑셀 파일을 하나 열어 손익계산서를 작성해 보기로 했다. 나라는 사람의 올 한 해 손익계산서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익,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손해라고 치고 목록을 작성했다. 보나 마나 결과는 참담했다. 나를 더더욱 좌절하게 만든 것은, 득실을 따지기도 전에 내 하루가 너무 별거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 책 읽기,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기, 강아지랑 산책하기,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 마시기, 주말에는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기, 내 손으로 직접 채소 요리하기, 목공 배우기 등 하고 싶은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동안 출퇴근만 일삼고 있다는 사실에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 누군가는 이럴 때 꼭 퇴사를 한다지만 나는 때 되면 통장에 한 달 치 노동에 대한 보상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직장인의 삶 또한 놓칠 수 없는 사람. 월급도 받고 싶고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퇴근 후에 무리해서라도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엉망진창인 나의 손익계산서를 조금이나마 보완하려면 퇴근 전이나 후 삼십 분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 아침에 일어나 여유가 되면 보이차를 따르고 음악 한곡을 재생한 다음 명상을 한다. 대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곡이다. 아주 가끔 시티팝을 틀기도 한다.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복잡한 생각을 비워내는 훈련을 한다. 명상하면서 보통 하는 생각은 "그래서 오늘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이..."다.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명상이라기에 애매한 무언가를 마친다. 

 

- 경기도에서 서울로 왕복 세 시간 출근하는 일은 처음엔 무척 고달팠지만 그 또한 어느새 적응이 된다. 처음이 어렵지 어떻게든 다 된다.

 

- 출근하는 직장인의 정체성을 뒤집어쓰기 전에 차 한 잔을 마신다거나 음악 한곡 정도 듣는 시간을 가지는 건 중요하다. 나라는 작은 개인에서 맡은 바 임무를 해내야 하는 직장인으로, 미션에 충실한 직장인에서 다시 나라는 작은 개인으로 돌아올 때 쉼표처럼 찍어주는 이 짧은 시간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인 일을 처리하느라 지치고 힘들었단 이유로 나라는 사람이 내 생활에 지워지지 않도록, 나를 단단히 만드는 일이다. 
 
- 보이차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면, 마무리는 향하나를 태우는 것. 퇴근 후 샤워를 한 다음 몸 구석구석 보디로션을 발라준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고 선풍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방에 들어가 아껴둔 인센스에 불을 붙인다. 나그참파라는 이름을 가진 향인데,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적격이다.  

 

- 나는 인적이 조금 드문 시간에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산책길에도 러시아워가 있어서, 그 시간대만 조금 피해도 여유롭게 걷기 좋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산책의 즐거움은 하루 동안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되새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실수해서 창피했던 장면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 돈은 왜 이렇게 없는지, 멋진 삶에 대한 동경, 가족과 친구들과 웃음을 터뜨렸던 식사시간 등. 

- 그러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가뿐해져 있다. 아마도 천천히 두 다리를 움직이면서 내 몸의 걸음걸이와 마음의 걸음걸이가 비로소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기 때문 아닐까.

 

- 산책을 하겠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몸과 마음의 속도는 쉽사리 비슷해지지 않는다. 벚꽃이 피고 지거나 가을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출퇴근하느라 고개를 돌릴 여유도 없이 바쁘게 걷다 보면 몸은 저 멀리 나아가 있는데 마음은 한참 뒤에서 따라올 생각을 않는다.  

 

- 매일 밤 산책길에 걱정, 불안, 질투같이 무용한 감정들은 전부 내려두고 기쁨, 즐거움, 행복, 감사함 같은 것만 몸에 새겨오는 기분이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좌우로 백 번씩은 힘차게 흔들었을 것 같다. 

 

-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책방 무사의 주인이기도 한 요조가 한 팟캐스트에 나와서 자작시한 편을 나른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창문 안으로 쏴 쏟아지는 햇살을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로 비유한 시였다. 그때부터 당산철교 위를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짝짝짝짝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받는 기분이 든다. 

 

- 노력했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결국 '내 탓'이 되어버리는 것도 보통 짜증 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시행착오는 되도록 겪지 말고 요령껏 사는 삶을 바란다. 요령 부리면 잔머리만 굴린다고 욕하고, 요령 부리지 않으면 미련하다고 욕하는 직장 상사가 호시탐탐 옆에서 혼낼 구멍을 찾고 있지만...

 

- 최선을 다하되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 
나만의 원칙이다. 성공과 실패에서 벗어나 지금의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는 마음'은 나에게 작은 위로를 전해준다. 나를 잃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척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나를 무너뜨릴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건 일상의 균형, 마음의 균형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 천문학을 전공했다는 삼십 대 중반의 언니와 대화를 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언니는 노래 안 했다고요? 대체 왜? 아니 그거 완전 재롱 잔치 같았던 거 알지? 근데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노래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요!"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내게 천문학 언니는 똑 부러지게 한마디 내뱉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해.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사람들 앞에서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아." 

 

- 이제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게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말하던 언니의 나이가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매일 다짐한다.

-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오류가 난 프로그램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관계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일은 참 오묘해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어긋날 관계는 끝끝내 어긋나고야 만다. 서로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과도 갑자기 서먹서먹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계기는 결정적일 때도 있고 아주 사소할 때도 있다. 

- 그래서 인간관계를 무척 특별하다고 과장하거나 혹은 별것 아니라고 축소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 없고, 인생은 무조건 독고다이라며 무심한 척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놓쳐서도 안 된다. 확실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한정된 내 애정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잘 쓸 줄 아는 수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동안 축적한 데이터를 통해 마음의 오류에 대처하는 나만의 노하우다. 

 

- 먼저, 호의를 베풀 땐 돌려받을 것을 셈하지 않는다. 이건 모두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인데 내가 좋아하는 관계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내 사람', 즉 나라는 인간의 영역 안으로 거리낌 없이 넘어와도 전혀 상관없는,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나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바친다. 상대에게 준 만큼 그대로 돌려받아야 한다는 식의 계산은 이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애정과 시간을 쏟고, 거기서 오는 기쁨을 조건 없이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된다. 나의 안전 구역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 그건 언젠가 관계가 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할지라도 미련이나 후회 같은 건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다음,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불편한 인간관계가 있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갖는 이 이상하고도 뒤틀린 심리가 무엇인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 답이 나온다. 인간의 감정이 무척 복잡하고 이해 불가능해 보이지만 어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은 의외로 굉장히 단순하다.  
 

- 시기, 질투, 증오, 서운함, 불안함, 자존심 등 이름 붙여주면 그다음은 쉽다. 시기, 질투라는 이름이 붙은 관계는 피한다. 증오, 분노라는 이름이 붙으면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내버려 둔다. 서운함, 불안함, 자존심이라는 이름이 붙을 땐 용기 내어 솔직해진다. 

 

- 마지막으로, 투명하게 사랑하고 정확하게 미워한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어떤 기준을 벗어나 지나칠 정도로, 맹목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도록 아낀다. 같이 있으면 내가 소모되는 기분이 들거나 필요할 때만 나를 찾고 이용만 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굳이 어정쩡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 왠지 모를 께름칙한 느낌은 직관에 가깝고, 직관이란 우리가 살면서 쌓아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경고음이다. '저 사람은 너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는 유형이야!' 하며 마음속 안테나가 바짝 곤두서는 것이다.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나를 내던지고 기어이 거절당해 속상해하고야 마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  

-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마음의 오류가 개선되지 않을 땐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하든 그와 무관하게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는 일들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정 힘들어서 못 참겠다 싶으면 소중한 사람들이 내어준 나만의 안전 구역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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