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일루젼 2023. 8. 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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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2023.05.29


       

표지가 너무 매력적이라 선택했다. 이 책은 기존에 다양한 형태로 발표되었던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단편집으로, 문고본으로 개정 재출간하며 현재의 표지 일러스트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판과 동일한 표지이며 흰 토끼가 아니라 흰 쥐가 그려진 점이 눈에 띈다. (참고로 본문에서 앨리스가 쫓아가는 건 동일하게 흰 토끼다)

 

이번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 건 작가보다는 표지였다. 저자가 <자물쇠 잠긴 남자>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유명한 두 시리즈 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해서 오히려 선입견 없이 읽을 수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정신승리)

 

기존 작품들을 오마주한 단편들은 특유의 분위기뿐 아니라 기승전결의 중심이 되는 뼈대도 그대로 차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원작을 읽은 이에게는 참신하다기보다는 그리운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작가가 공을 들여 쓴 부분이 주로 일본어를 이용한 차음이나 파자 트릭이라, 번역서로 읽는 독자에게 '우와'하는 느낌까지는 주지 못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괴수의 꿈>. 꿈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여러 개의 꿈을 통해 제각기 다른 세계들이 하나로 중첩되는 느낌이 좋았다. 화자가 성장하며 꿈의 방향성이 점차 달라졌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제일 좋았던 건 '강의 신'이 등장하는 긴 꿈 부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가져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손에 넣기 전까지는 죽을 만큼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얻고 나면 아무런 감흥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들이 존재한다. 얻었을 때 더 빛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내가 이미 얻은 것들 또한 

  

끝.


   

- 이 책은 시리즈에 속하지 않는 중단편을 모은 것으로, 라디오 스크립트였던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활자로 옮긴 작품도 들어 있습니다. 테마를 받아서 쓴 글도 있고, 분량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쓴 글도 있습니다. 내용도 길이도 다양하고 책이 갖는 테마도 없어, 아리스가와 소설의 견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색채가 강한 작품부터 호러 스타일을 거쳐 본격미스터리로, 어느 정도 그러데이션을 이루도록 배열했지만 어떤 순서로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고 궁금하시다면 각 소설의 내력을 기록한 다소 긴 '후기'를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 에뮤가 "여기야"라고 대답했다.

"여기야 역?"
"아니야. '여기'라는 역이야."
 
- "여기서 전철을 타면 어디로 갈 수 있나요? 지도가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데 좀 알려주세요."

오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어딘가’로 갈 수 있어. 이곳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전부 '어딘가' 행이야."
 

- "그 '어딘가'는 저쪽인가요?"
닭이 벼슬을 푸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쪽도 '어딘가'지만 저쪽도 '어딘가'야. 어느 쪽으로 가도 '어딘가'에 도착해."

 

- "서로 반대 방향에 '어딘가'라는 역이 두 개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이상해요. 이름을 붙인 의미가 없잖아요."
에뮤가 경멸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이름이 같은 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네 이름을 말해봐. 앨리스? 시시한 이름이로군. 앨리스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너 혼자만 독점하고 있나?"

 

- "저 녀석들은 퇴물 사진 철덕들이야." 
오빠에게 들어서 사진 철덕이라는 표현은 알고 있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철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같은 철도 애호가라도 시간표 하나면 만족하는 오빠와는 다른 인종입니다. 
"퇴물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원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열차를 쫓아다니고 있었지. 필사적으로 따라다니다가 '아아, 새처럼 날개가 있다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는 소원을 품게 되었고 그러다 새가 되었어. 자기들은 '진화했다'고 기뻐했지만 새는 카메라를 다룰 수 없지. 그러다 어째서 새가 되고 싶었는지도 잊어버리고 결국 나는 것도 그만두었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지?" 
웃긴지 웃기지 않은지는 지금의 앨리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 "부탁이야, 알려줘. 나는 어떻게 하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고양이의 굵은 꼬리가 한 바퀴 빙글 돌았습니다.
"글쎄. 올 수 있었으니 돌아갈 수도 있겠지. 두 개의 세계가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니까."

 

- 여우 남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긴 한데 꼭 논리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 일이거든."
움직이지도 않는 '논스톱 열차'가 역에 서 있고, 열차가 걸음 속도보다도 느리게 달리고, 이곳에서는 논리적이지 못한 일들 뿐이라 앨리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말은 대부분이 논리적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일 텐데요.

 

- <선로 나라의 앨리스>

 

- 예상치 못한 범인을 지적했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토록 논리적으로 증명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훔쳤습니다. 왕관은 뒤뜰 연못에 던졌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 숙인 Z 대령. 단정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서 있기도 힘든지 가까운 기둥에 몸을 기댔다. 

 

- '우연히 참석한 파티장에서 도난 사건이 벌어지다니. 어찌 되나 싶었지만 무사히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려운 사건들을 수없이 해결해 온 Q의 체면을 유지했군. 어휴.' 
명탐정의 명성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탐정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의미로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 보랏빛 연기가 바람에 일렁거리며 밤의 어둠에 녹아들어 갔다. 
명탐정은 인기로 먹고사는 직업이기도 해서 위엄이나 신비한 분위기도 중요하다. 그것을 연출하려면 품이 든다. 그렇기에 담배와 함께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가득 차오른 보름달이 환했다.
가지를 펼친 나무들은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고, 잔디는 달빛으로 짠 카펫으로 변했다. Q 씨는 달빛 속 정원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루어왔던 일을 오늘 밤에야말로 실행하자. 이렇게 아름다운 밤이라면 전부 멋지게 풀릴 테니까. 

 

- "아름다운 밤이네요."
F 양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 이렇게 아름다운 달밤은 드물다.

 

- <명탐정 Q 씨의 휴가>

 

- 나는 괜찮다. 
잡담을 하는 사이에 순서가 돌아왔다. 플로어 담당 직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명단에 쓴 대로 풀네임으로. 
"미도리오카 패밀리콜라 신스케 님 두 분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광고주가 붙은 이름에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극히 소소한 아르바이트지만 생활비에 분명 보탬이 된다. 
빨리 일자리를 찾아 평범한 미도리오카 신스케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다. 그때까지 광고주가 붙지 않은 이름을 눈부시게 느끼리라. 

 

- <눈부신 이름>

 

- 구석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호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실업자라 지갑 속에 몇 푼 없었습니다. 낭비는 할 수 없지만 힘겨운 일상을 잠깐이라도 잊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 "저 요술사 어쩌고 하는 쇼를 보시는 거지요? 어떤 내용인가요?"

어려운 사정에 돈을 내는 거니 너무 시시한 내용이면 곤란합니다. 사전 지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구경이지요."
안경을 쓴 통통한 남자가 작게 대답했습니다.
"유명한 마술사인가요?"
"알 만한 사람은 안다고나 할까요. 풍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샌드 백작은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며칠이나 걸려서 멀리까지 보러 간 적도 있답니다."
"열심이군요."
"이 마을에는 2년 만에 오는 데다가 개최 일정은 겨우 사흘뿐이에요. 놓칠 수는 없지요. 어젯밤에도 왔고, 내일도 올 생각입니다. ... 만약에 가능하다면."

 

- 그렇게 말하고는 가버렸습니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젊은 남자는 결심했습니다. 지갑 속을 확인하고 텐트로 향했습니다. 

 

- 그때 행복해 보이는 커플이 방금 전의 안경 쓴 남자에게 뭔가를 물었습니다. 재미있는 쇼인지 물었겠지요. 안경 쓴 남자는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는 함께 보지 않는 게 나아요."
젊은 남자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하기야 그는 '저것을 보고 싶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커플은 '보고 싶은데, 재미있나요?'라고 물었겠지요. 

 

- 샌드 백작의 붉은 눈동자가 고요한 장내를 천천히 둘러봅니다. 손을 들거나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부끄럽다거나 움츠러든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젊은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쇼에는 몇 번이나 보러 온 단골손님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원자가 많을 법도 한데요. 
"희망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남녀 조수가 객석 사이를 돌아다녔지만 모두 눈을 내리깔고 몸을 움츠렸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긴장감이 장내를 지배했습니다. 그 분위기에 짓눌려 젊은 남자는 무릎이 덜덜 떨렸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겁을 먹고 이가 딱딱 부딪혔습니다. 

 

- 그는 이해했습니다. 단골손님들은 이 공포를 맛보기 위해 되풀이해 요술사의 쇼를 보러 오는 것이었습니다. 
고문 같은 시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 요술사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상자에 어떠한 속임수나 비밀 장치도 없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남자를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꼭꼭 닫혔던 커튼이 활짝 열리기까지 고작 2초, 그사이에 남자는 회백색 조각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믿기 어려운 광경에 박수도 환성도 일지 않습니다. 
그러자 요술사는 지팡이를 휘둘러 조각상을 쳤습니다.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가 모래로 변해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물처럼 무대에 퍼져나갔습니다. 

- 쇼는 끝났습니다.
젊은 남자는 영혼의 뿌리가 마비된 듯한 상태로 텐트에서 나왔습니다. 입을 여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공포의 여운에 잠겨 그는 내일도 쇼를 보러 오기로 했습니다. 안경 쓴 남자는 이제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 <요술사>

 

- 어렸을 때부터 종종 괴수의 꿈을 꾸었다. 
고질라가 바다에서 나타나 거리를 파괴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하거나, 거대한 날개를 펼친 라돈이 머리 위를 지나가 그 날갯짓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꿈을 꾸면 공짜로 영화를 본 것처럼 득을 본 기분이었다. 

 

- 처음 꾸었던 꿈은 인상이 강렬해 지금도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다. 꼭 그것뿐만 아니라 괴수가 나오는 꿈은 전부 기묘하리만치 똑똑히 머릿속에서 재생할 수 있었다. 물론 잠에서 깨면 바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꿈이니, 오리지널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되풀이해 이미지를 덧칠하는 것이겠지만.

 

- 낮은 처마를 나란히 맞댄 낡은 주택들, 변변한 가로등도 없는 초라한 동네였다. 나는 거기서 나고 자란 소년이라는 설정이었지만 부모 형제나 친구처럼 현실 세계에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가정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꿈에서 묘사해주지 않아도 적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거리 풍경으로 자연히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일본이었지만 실제로 사는 시대와는 차이가 있는지 건물도 사람들도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간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용서를, 강의 주인님.' 

 

- 다음 도전자가 나타나기까지 또 수십 년은 걸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서글퍼졌다. 


- 사춘기에 접어들자 유행도 지나가 괴수에서 그만 졸업한 줄 알았는데 몇 번이나 꿈을 꾸었다. 
초등학생 때는 꿈에 이런 게 나왔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지만(방금 전 강의 주인에 대한 꿈은 상대가 싫어하든 말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다) 중학생쯤 되면 그럴 수도 없다. 바보 취급당하지 않도록 잠자코 혼자만의 기억에 담아둘 뿐이었다. 
너무나 무서워서, 잠에서 깨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던 적도 있다. 중간에 꿈이 끊겨서 아쉬워했던 적도 있다. 

 

- 그녀에게는 끔찍한 비운이다. 고통스러울 테고, 무의미하고 영웅적이지도 못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게는 최고의 죽음 아닐까? 

 

- 어느 게 나의 위장이고 창자인지, 어느 게 그녀의 내장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그 얼마나 참혹하고도 화려하며, 그 얼마나 특권처럼 감미로운 죽음일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 여기서 죽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녀 위로 엎드려 가녀린 두 어깨를 감싸고 흉측한 괴수의 형상을 띤 사신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각오를 굳히자 공포와 저주에서 풀려나 온몸의 근육이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녀를 터널 안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환희 속에서, 황홀하리만치 달콤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지만 내 이기심에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 미안했다. 애초에 내 꿈에 불려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미안해. 

- 소리 없이 사과한 순간, 이것이 꿈속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 함께 짓뭉개진다는 망상이야말로 중요한 테마였다. 성애를 포함한 생에 대한 희구와, 그와는 상반되는 죽음의 충동.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섞여 고양된 정점에서의 소멸. 현실의 인생에서 어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 몽상만큼 행복할 수는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프로이트 박사라면 터널 안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전철에도 성적인 함의가 있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 횟수는 줄었지만 스무 살이 넘고 30대가 되어서도 괴수의 꿈을 꾸었다. 놈들의 끔찍한 파괴로부터 도망쳤던 것은 기껏해야 20대 중반까지로, 현실에서 성공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점차 꿈의 내용은 변해갔다.

 

- 대담하고도 치밀한 비전을 그리고 있고, 그것을 실현할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이 자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꿈에 등장하는 괴수는 역할이 계속 바뀌었고, 나는 겁에 질려 우두커니 서 있거나 도망 다니던 입장에서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쪽으로 바뀌었다. 괴수 시점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환은 다양한 의미에서 너무나 유쾌했다. 

- 최신식 초고층 빌딩이나 다리, 철도를 파괴하면서 아깝지만 재건 작업은 훌륭한 공공사업이라고 변명하는 한편으로, 낡은 가옥이 밀집한 서민 구역은 아무 저항 없이 파괴할 수 있었다. 이런 지역은 불태워버리고 합리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새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세가 붙어 주저하지도 봐주지도 않았다.

- 꿈속에서 무의식이 해방되어 비정해진 것은 아니다. 나는 깨어 있을 때 더욱 비정하다. 스스로를 위해 분골쇄신해 온 것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내가 고생한 이야기를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고, 그 찬란한 성공에 갈채를 보내며 '자수성가의 신'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어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나는 평생 가난한 자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무기력함을 끝없이 증오하니까. 

 

- 차기 총리 자리에 앉으려는 내가 도쿄, 요코하마는 물론 오사카에도 나고야에도 대지진이 오기를 바란다고 표명하면 모두들 경악하겠지. 결함투성이인 대도시를 이상적인 형태로 개조하려면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똑똑한 사람은 다 알 텐데. 천문학적인 액수에 이른 국가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적절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완벽한 계획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리하는 입장의 약자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순간이 올 때까지 현명하게 침묵하고 있다. 

 

- <괴수의 꿈>

 

- 심각한 고민을 가진 사람 눈에는 그냥 어리광으로 보일 것이다. 얼마나 운 좋은 팔자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꾸지람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머리로는 그런 줄 알아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누가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명확한 불행의 꽃다발을 받는 게 차라리 나았다. 

 

- 나는 영화나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고 소설도 읽지 않는다. 나와 인연 없는 극적인 경험이 넘쳐나서 짜증 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사랑은커녕 동료와 함께 역경으로 가득한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일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은하를 가로지르는 황당무계한 SF라면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니 편하게 즐긴 적도 있지만. 

- 극적인 경험.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가슴 설레는 순간, 영혼의 연소, 마음이 녹아드는 황홀과 도취와는 무관한 채로 나태하게 살다가 언젠가 죽는다. '그게 어때서, 오히려 풍파 없는 인생에 감사하며 작은 행복을 찾으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려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분수에 맞지 않는 묘한 자존심 탓이다. 사회의 구석에서 조용히 살다가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가 그 정도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만스러웠다.

 

-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다 쓸 수 없다. 
아깝다는 감정이 일었다. 이런 성찬을 남겨도 되는 것일까? 어떻게든 하고 싶다. 

 

- 나는 그런 엄청난 짓을 할 능력을 얻었다. 모두가 혼비백산할 만한 복수를 하고 저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 만화에 나오는 악마의 모습이 머리 위에 나타나 실실 웃기 시작했다.
양심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렸지만 처음부터 패배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약했다. 말려도 어차피 할 거잖아, 그런 느낌이다. 

 

- 독극물에는 무지해도 독이 얽힌 범죄는 이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1940년대 제국은행 독살 사건, 1960년대 나바리 독 포도주 사건, 1980년대 중반 투구꽃 보험금 살인부터 1990년대 와카야마 독극물 카레 사건까지 신문 사회면 기사라면 유명한 사건은 상세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깜빡거렸다. 내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벌어진 청산 콜라 무차별 살인 사건이다. 당시 온 일본이 전율했다는데 나와 같은 세대에서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그것이 클로즈업된 이유는 사건에 사용된 것이 청산계 독극물이었기 때문일까? 

 

- 진리를 하나 발견했다. 승부에 전혀 재주가 없어 고배만 마셔왔지만 이기려 하지 않으면 게임을 즐길 방법이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 욕설을 퍼부으려다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후회가 아니라 반성이다.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물에 욕설을 퍼부어왔을까. 자신의 미숙하고 모자란 부분을 남 탓, 사회 탓, 나아가서는 운명의 탓으로 여길 뿐, 결국 진지하게 살지 않았다. 어차피 불운한 처지라는 생각에 괘씸한 짓을 잔뜩 저질렀다는 자각도 있다. 나라는 존재는 철저히 불성실하고 오만하고 나태한 남자로, 결국 청산가리를 사용한 무차별 연속 살인이나 상상하는 꼬락서니. 그런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면 불평할 처지가 못 된다.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다니, 늦어도 너무 늦다.

- 몸속에서 무언가가 화르르 타올랐다. 현기증과 구토가 덮쳐온다. 숨을 쉴 수 없다. 의식이 아득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반성을 곱씹으며 고통에 감싸여 나는 떠난다. 
마지막 순간, 막이 내리기 직전에야 이 어리석은 자의 마음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알아줄 이는 아무도 없다.

 

- <극적인 폐막>

 

- 그건 어쩔 수 없다. 미로는 원래 저도 모르는 사이 출구에 도착하는 법이다.
"오른쪽이면 오른쪽, 왼쪽이면 왼쪽 벽에 손을 짚고 걸어가면 언젠가 미로에서 나갈 수 있다던데요.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볼까요?"
내 제안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탈출법이 다 통하는 건 아니야.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이 미로 바깥쪽에 접해 있으면 괜찮지만 어느 한쪽이 안쪽에 있으면 통하지 않아."
"출발 지점은 미로 안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도착 지점이 미로 안쪽이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만약 그렇다면 벽 밖으로 나가지 못하잖아요?"
"거기에 가면 벽 밖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지."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방법이 없어. 묵묵히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
"전진하고 있으면... 다행이지만요."


- 그만 불평이 흘러나왔다. 
너무 말도 안 되고 부조리하다. 이건 무슨 벌일까? 항상 청렴하고 올바르고 아름답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평범하고 얌전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무심한 말로 남을 상처 입힌 적도 있었겠지. 유혹을 못 이기고 나쁜 행동을 한 적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두드러진 잘못을 저지른 기억은 없다. 어째서 이런 꼴을...

- 꺾이려는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가 밝고 구김살 없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될 거야'라고 말했다. 이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그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지. 아직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 <출구를 찾아서>

 

- 20면상은 굵은 철창 안쪽에서 교도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조롱하듯 가벼운 말투입니다.
"자네도 힘들겠어. 달아날 생각 없는 내게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계속 서서 교대 시간까지 감시하다니 얼마나 지루할까? 뭐, 일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고생이 많다고 말해야겠지?"
교도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절대 대화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그래도 20면상은 아랑곳없이 오른쪽 발목을 문지르며 수다를 그치지 않습니다.
"자네는 선발된 우수한 교도관이겠지? 빈틈이 전혀 없어. 우락부락 근육질은 아니지만 젊고 힘도 넘치고 몸짓도 날랠 것 같군. 게다가 그 호루라기를 불면 순식간에 동료들이 우르르 달려올 테니, 해도 너무하지. 이번만큼은 천하의 괴인 20면상도 두 손 들었어..."
 
- "... 그건 그렇고, 세끼 꼬박꼬박 주는 이곳에서 잠시 요양이나 할까 해. 계속 일만 하느라 휴가가 그리운 참이었거든. 아침부터 밤까지 신문을 받는 게 번거롭지만 그 정도는 어울려줄 수 있지. 졌다고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 자네를 방심하게 만들려고 서툰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방심하게 만들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하고 교도관은 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방 안에 있는 남자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습니다. 

 

- "입도 벙긋 안 하네. 자네는 정말 재미가 없군. 하지만 나는 자네가 좋아. 수많은 교도관들 중에서 제일 좋아."
그 말을 끝으로 20면상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마음에 걸렸지만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되묻지는 않습니다.

 

-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인 선수가 16개의 금메달을 획득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알 리가 있나. 그 정도 따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지."

 

- 그럴 리는 없지만 고바야시 소년은 아케치 선생님이 악의 길로 빠져서 20면상처럼 되면 큰일이겠다고 몰래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20면상이 마음을 바꾸어 탐정이 되어준다면야 다행히 균형이 맞을지도 모르지만요. 

 

- 선생님에게 드릴 새 커피를 끓이고 있을 때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아케치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인 선수가 딸 금메달은 저도 16개가 맞을 것 같아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 그 말을 들은 탐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문질렀습니다. 
"역시 고바야시 군은 남달라.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군. 나도 느낀 바를 솔직히 말하지. 일본의 금메달은 16개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네." 

- "... 선생님은 미래인이신가요?"
"아니지. 자네도 미래인이 아니지만 역시 알고 있잖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 "굉장히 비상식적인 말이지만 진지하게 들어봐.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 답이 딱 한 가지 존재하거든. 미래인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거야."
"미래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저희를 조종한다는 거예요?"
"가령 자네나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고 미래의 작가가 과거를 무대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쳐. 그럼 어떻게 될까? 가령 2020년에 사는 작가가 쓰는 이야기라면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이 딸 금메달 수도 알고 있을 테고, 두 번째 도쿄 올림픽 개최도 과거에 살고 있는 우리 입을 통해 알려줄 수 있지. 올림픽 개최는 몇 년 전에 결정되니까 2015년쯤에 살고 있는 작가도 쓸 수 있겠군."
"선생님도 저도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니, 그런 말은 못 믿겠어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미래를 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아마 20면상도 알고 있겠지."

- "우리가 소설 속 등장인물..."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고바야시 소년은 뺨과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자기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미래인 F>

 

- "위대한 선인, 오귀스트 뒤팽이나 셜록 홈스도 귀인이 조심성 없이 쓴 러브레터를 되찾기 위해 애썼지. 명탐정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책무를 다할 수 있어 조금 기분이 좋군. 커피를 부탁하네."


- 문제의 편지는 지성과 품격을 갖춘 미모의 국민 여배우가 쓴 것이었다. 공표되면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모양이다. 그것이 비열한 공갈범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제 위험은 사라졌다. 

- 그런 줄 알았는데 Z 선생이 입가에 불온한 미소를 머금었다.
"파격적인 보수를 약속받았지만 읽어보니 당치도 않은 금액이야."


- 아아, 남몰래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선생은 천재적인 명탐정이지만 윤리관이 결여되어 있어, 때때로 조사로 알아낸 의뢰인의 비밀을 악용하려 든다. 

 

- 새로 끓인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Z 선생은 "응?" 하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소파에서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자업자득입니다, 선생님."
그리고 테이블 위의 편지를 보았다. 발신인은 나의 여신. 결코 손이 닿지 않을 곳에 있는 여성이지만 일방적으로 연심을 바칠 수는 있다.
소리 없이, 나는 말했다.
'당신을 지켜냈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이 살인이, 제가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 <도둑맞은 러브레터>

 

- 7시 반이 가까워지자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져서 시오리는 계산대 안에서 종이로 북커버를 접고 있었다. 전기스탠드를 그린 판화가 인쇄된 디자인도, '하나타니도 서점'이라는 서체도 고풍스러워서 마음에 든다. 가게 자체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굳이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 문고본을 채워 넣던 점장 아사이 히로시와 시오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185 센티미터가 넘는 점장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두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긴 줄 안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시오리가 설명하자 아사이는 유난히 길고 가느다란 목을 긁적이며 피식 웃었다.
"두 사람 다 너무 착각이 심해."

- 점장은 또 어딘가 염세적인 미소를 지었다. 접객업을 하는데 밝은 미소를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점을 보완하듯 목소리는 아주 달콤하다. 라디오에서 분위기 있는 음악을 소개하면 인기를 끌 것 같다. 

 

- "지난달 저희 집 법회에 오신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지 않았는데요."
유마가 그렇게 말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모두 두드리는 건 아니야. 유마 씨네 집은 종파가 뭐지? 정토진종인가? 목탁은 천태종이나 선종, 정토종에서 독경할 때 두드리거든." 

 

- "할머님 제삿날이었던 거 아닐까? 33 주기나 37 주기였을지도 몰라. 설마 50 주기는 아니겠지." 
그런 주기로 법회를 올리나? 점장도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아 젊은 나이인데, 박학하다.
'나는 독서는 안 해'라고 말하면서 책에 대해서도 굉장히 박식하다. 서점 직원이 상품 내용에 정통할 필요는 없으니 그저 얕고 넓은 지식이 있으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사이 히로시라는 이름을 실천하고 있다. 

 

- "'또 이런 비싼 책을 사다니!'라고 혼났을 때 변명하기 쉬우니까 그랬겠지.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너무 싸서 그만' 이런 식으로." 
추리라기보다 거의 억측이었지만 나름 논리적이었다.
"그보다 시오리 씨, 부탁이 있어. 만화책을 담당해주지 않겠어? 여기서 아르바이트한 지 아직 3개월밖에 안 됐지만 시오리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 "미스터리 마니아니까 문고본이 더 재미있긴 하겠지만."

"마니아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열성적인 팬 수준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빠졌으니 팬 경력은 4년이다.

- "그 점을 높이 사서 부탁하는 거야. 한 장르에 정통한 사람은 완전히 낯선 다른 장르의 책도 금방 이해하거든. 그만둔 사카가미 군도 만화책을 맡기 전에는 문고본을 담당했어." 
"어, 그렇게 만화책에 빠삭했는데요?"
"만화책을 오래 담당한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사카가미 군에게는 문고본을 맡겼어. 본인은 '저는 유명 작가 이름도 제대로 몰라요'라고 걱정했지만 두 달 만에 책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지. '이 작가는 그 만화가 같은 포지션이로군' '이 신인 작가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 만화가로 치면 그 사람인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보자'라는 식으로, 만화라는 분야 전체를 이해하기 때문에 소설의 하위 장르나 거기서 또 갈라진 장르도 확실하게 분류할 줄 알았고, 출판사별 특징도 빨리 파악했고, 시들해지는 작품도 빨리 알아봤어. 표지 소개 글도 보지 않고 '이 작가, 컬트 쪽 같네요'라는 말을 하는 거야. 표지 디자인으로 판단했던 것 같아."  

 

- "물론 본인에게 의욕이 없으면 안 되지. 그리고 알맹이가 없는 어중간하고 얄팍한 만화광도 서점 직원으로는 도움이 안 돼. 문고본을 확실하게 담당해 주었으니 사카가미 군이 정말 만화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 
"하아... 그런가요?" 
바꿔 말하면 만화책을 제대로 관리 못하면 시오리는 알맹이 없는 어중간하고 얄팍한 미스터리 팬이라는 뜻이다.

 

- "그럼 부탁할게. 중간에 이만 빠지지 않도록 신경 써줘. 전권을 사려는 손님을 놓치게 되니까 이가 빠지면 절대 안 돼."

 

- '이 정도 되는 서재가 있으면 좋겠다. 대부호가 되면 가질 수 있을까? 서점을 가진 부자 얘기는 못 들었는데, 책만 읽으면 돈을 못 번다는 뜻일까? 그럴지도.'

 

-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어 봤자 죽을 때까지도 다 읽지 못한다.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은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저 정도일까, 하고 가게 한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통학용 전철표로 요금을 더 내지 않고도 중간에 내려서 다닐 수 있는 게 편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편한 일은 아니었다. 계속 서 있어야 하고 은근히 바빠서 쫓기는 기분이 들 때가 많지만 책에 둘러싸여 책을 만질 수 있다는 게 즐겁다. 원래 독서를 좋아하는 시오리였지만 지금은 서점 중독에 가까웠다. 

 

- "같은 책을 두 권 샀는데 한 권 환불받을 수 있을까요?"

역시 예상이 맞았다.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내성적인 성격인지 겨우 그 말을 하는데 힘들어 보였다.
"똑같은 걸 사서요."
베스트셀러는 못 냈지만 소수의 열렬한 팬이 있는 작가의 책이었다. 손님은 두 권의 책 사이에서 두 장의 영수증을 꺼냈다.
"둘 다 이 가게에서 샀어요. 이게 증거예요."

 

- "'가급적 초판을 팔겠습니다'라고 확약할 수도 없고, 오히려 중쇄 쪽이 새 책이라 깨끗하기도 하고. 그 점은 정중히 현실을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쭉 곁에서 듣고 있던 유마가 팔짱을 끼고 어른스럽게 중얼거렸다.
"세상은 요지경이네요."
"가게 안은 무대야. 매일 즉흥 드라마가 펼쳐지지."

 

- 그런 아사이를 보고 있으려니 나카지마 아쓰시의 <명인전>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천하제일 활의 명수가 되려는 조나라 기창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거기에 등장하는 선인 같은 노스승이 '불사지사'라는 신기를 사용한다. 맨손으로 화살을 쏘는 시늉만으로 날아가는 솔개를 떨어뜨린 것이다. 아사이는 '부독지독'을 터득한 것 같다. 

 

- "내일은 일기예보에서 날씨가 험하다고 했으니 위험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정리하고 돌아가도 돼."
꽤나 마음을 써준다. 

 

- 어떤 POP였는지 점장을 도와 문고본을 정리했던 시오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문신이 이야기하는 18개의 몽환, 이야기의 만화경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겠습니까?'라는 문구였다. 점장에게 "애독서인가요?"라고 물었더니 "차례밖에 안 봤지만 재미있을 것 같던데"라고 했다. 참고로 표지에 적힌 소개문은 이러하다. 더운 날에도 아랑곳없이 울 셔츠의 가슴과 손목 단추까지 꼭꼭 채운 거한. 그는 온몸에 18개의 문신을, 18개의 비밀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 깊은 밤, 달빛을 받으면 문신의 그림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18개의 이야기를 연기하는데...

- 괜히 읽고 싶어지는데... 
그건 그렇고 사라진 POP의 수수께끼가 문제다.
"만화경처럼 컬러풀하고 신비한 느낌의 POP였지요. 굉장히 예뻤으니까 손님들이 탐나서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네요."

 

- "서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책을 사지 않고 읽을 자유는 있지만 그런 행동은 상식을 벗어났어요. 남이 열심히 만든 걸, 남이 열심히 팔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 POP도 도요시마 씨가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데."
"목소리가 커. 매장에 들리겠다."

-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도 돈을 쓰기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 사람 자체가 어지간히 인색한 인간이겠지." 
독설이다. 시오리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대신 화를 내주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오리는 덩달아 빈정거리고 말았다.
"점장님은 돈을 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없어서 책을 안 읽는 거군요."

 

- '아차. 말이 심했어.'
간이 철렁했지만 아사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야. 우리 집은 제본소거든. 그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물질로서의 책에 관심이 있었어. 작은 우리 공장에서 완성되어서 차례로 반출되는 책을 보는 사이 책에 애착을 품게 되었지. 책이 흘러가는 강 건너편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야."

- "완성된 책을 보고 뭐가 적혀 있는지 상상하는 것도 즐거웠어. 그러다 보면 제목이나 책 분위기에서 내용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게 또 신나거든. 그 경지에 도달하면 일종의 쾌감을 느끼지. 방대한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봤자 바닷물을 컵으로 퍼내는 격이야. 그걸 허망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나는 바닷물을 퍼내지 않고 바람을 타고 즐기는 길을 선택했어. 지금 하는 일은 성격에 잘 맞아." 

- 시오리는 책을 무척 좋아하고 친구 중에도 독서가가 많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다른 인종이라고 느낄 때도 있었다. 독서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줄 뿐이라고 믿었지만 요즘은 문득 의문이 드는 순간도 없지 않다. 때로 독서는 사람을 편향되게 만든다. 자기 신념이나 쾌락에 따른 도서만 선택하면 마음이 좁아지는 경우도 있다. 자기 안에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아사이는 처음부터 그런 덫에서 자유로운 곳에 있었다. 저런 경우도 독서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 "날카롭군. 보통 손님은 아니겠지. 그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다니, 시오리는 안달이 났다.

"뭐예요?"

"사신."

 

- "아직 나도는 정보는 없지만 경쟁사가 생길 거야. 거기하고 일대일 승부가 되겠지."
"기쁘지 않네요."
"새로운 가게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오픈하고 반년 뒤에 상점가에 오래전부터 있던 작은 서점이 문을 닫았어. 후계자가 없어서 그랬다지만 우리 가게의 영향도 있었겠지. 나중에 어떤 가게가 들어와도 우는소리를 할 처지는 못 돼."

 

- 회색 양복의 남자는 오픈을 검토하는 서점 직원으로, 경쟁사가 될 이 가게를 조사하러 왔을 거라는 게 아사이의 추측이었다.
모든 책장을 일일이 살펴본 것은 상품 구성을 보기 위해. 개점 직후와 폐점 직전에 물건을 산 이유는 영수증 번호로 손님 수를 파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나 POP를 체크한 것도 어떤 가게인지 알기 위한 정보 수집이다. 판매대 바닥을 들여다본 것은 다른 책을 깔아놓은 건 아닌지 확인해서 신간 배수를 헤아리려는 목적이라고 했다. 

 

- "경쟁사에서 보낸 사자라 사신이라고 하신 거예요?"

"사신이라는 건 농담이야. 시오리 씨를 겁주려고 무섭게 말해봤을 뿐이야."
처음 들었을 때는 간이 철렁했다.
"진짜 사신은 아니지.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가는 손님을 빼앗기고 말 거야. 그래서 가게가 망하면 역시 사신이 맞지."

 

- <책과 수수께끼의 나날>

 

- '다음, 사오토메 유나. 당신, 무슨 목적으로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지? 지성도 감정도 없는 곤충이 본능대로 잎사귀를 먹듯 사법시험 공부만 하고, 법의 정신은 눈곱만큼도 배우지 않았지. 대학에서 한스 켈젠의 법철학은 듣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범죄 수준의 의료 과실이나 중대한 노동재해 사건도 태연히 덮을 수 있는 거겠지. 당신을 보고 있으면 변호사가 '악의 먹이사슬'에서 정점에 서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목숨으로 갚도록.' 
사오토메의 안색은 창백했다.

 

-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셨다고 그랬죠. 대단합니다. 변호사와 검사라니, 문무겸비네요. 아버님은 검도 사범이라도 하셨던 건가요?"
"아버지도 변호사야."

"부녀가 문무겸비로군요."
"검도도 법률도 억지로 배운 거야. 변호사라고 해도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라, 열혈 인권 변호사였지. 권력에 맞서길 어찌나 좋아했는지, 자아도취에 빠져 이상을 논했어. 자기만족의 재료로 삼으려고 고통받는 약한 사람을 찾아다녔지. 신이 나서 침을 질질 흘리며 그렇게 자유주의를 표방했으면서 딸에게는 독재자였어. '무조건 내 말대로 해'라서 그 틀에서 벗어나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는 무관용. 관용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자기만 현명하고 옳다고 맹신하는 자칭 자유주의자에 흔한 타입이야. 언젠가 딸이 현실을 알고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변호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우습기 짝이 없지. 목숨이 위험한 때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불효녀가 한 번만 덴스케의 말을 빌려 아버지께 말해주고 싶네. 꼴좋구나!" 
우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 "중요한 일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섬에 가잖습니까. 그 김에 저를 태워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남의 사정은 생각도 않는 말투였지만 어째선지 반감은 들지 않았다. 평소의 오모토였다면 '누구를 태우든 내 마음이다!' 하고 버럭 고함을 쳤을 텐데, 상대의 관록에 기가 눌린 데다가 그 누구라도 다스릴 수 있을 듯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신비한 설득력이 있다. 

 

- 갈 때야 어차피 가는 길이니 서비스해 줘도 되지만 돌아올 때 마중을 와달라고 하면 뱃삯을 흥정해야 한다. 
"돌아오는 편은 가보고 결정하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라 오모토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승낙했다. 

 

- "그렇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히비키의 견해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지만 경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잘 들으세요, 경감님. 사실을 향해 '너는 어째서 사실인 것이냐'라고 항의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 살무사 다쓰라는 별명을 가진 경감은 놀라는 일에 지치기 시작했다. 사태는 자꾸만 혼란스러워지는데 이 탐정은 어디에서 어떻게 답을 찾아냈단 말인가?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줄거리는 실로 독창적이라, 미스터리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명작입니다. 그 지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기존의 아이디어를 조금 옆으로 밀어내기만 해도 독창성은 탄생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원형이 된 과거의 작품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밀실 살인." 

 

- "변호사 일을 하면서 인간의 신비한 심리 작용을 배우지 못했어? 그런 건 돈이 안 되니 생각해 본 적도 없나? 해킹으로 여기저기 침입해 알아낸 비밀 정보를 토대로 각국의 외환이나 가상화폐의 변동을 읽었을 뿐인데 기가 막힐 정도로 큰돈을 벌었어. 순진한 고등학생이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유학생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벌면 몇 년이 걸릴까 계산해 보고 무서웠던 적도 있지. 돈의 힘으로 손에 넣은 압도적인 자유에 취했던 시기도 있었어. 하지만 이 성공은 어떻게 생각해도 부조리하지. 빠른 행동과 교활한 꾀, 거기에 운이 더해진 것뿐인데 그런 커다란 부를 얻을 수 있다니, 인간 세상은 글러먹었어. 그래서 부정하고 싶었다." 

- "컴퓨터 공간에서 벌어들인 돈이 너무 많아서 현실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게 뭐야. 철학? 문학?"

"당신 표현은 빈약하기 짝이 없군."

"그런 세상을 정화하려고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자기주장을 고집할 뿐, 사실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철부지 만년 자유주의자 우리 아버지보다는 훨씬 훌륭할지 모르겠네. 순수하게 굉장하다고 생각해. 대성공의 정점에서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거네."

 

- "깨달음은 두 번 찾아왔어. 첫 번째는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편의점에서. 심야에 묵묵히 일하는 유학생 산토스 군을 보고 스스로도 업화의 불길에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한 방 먹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두 번째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었을 때. 이런 방법이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고 따라 해보고 싶었어." 
"그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위한 오락 소설이야. 당신은 거기서 엉뚱한 깨달음을 얻은 거야."
 
- "당신 계좌에 있는 몇백만 엔이나 될 가상화폐는 어떻게 돼?"
"어디로 갈지 다 정해놨어. 내일, 국내외 9백 곳 이상의 단체에 기부될 거야. 그 리스트를 작성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기에는 너무나 작은 금액이라 한심해. 이 세상에는 덴스케가 몇백 명은 더 필요해. 그리고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내 재산은 100억 엔 단위가 아니야. 겨우 그 정도였으면 허무의 나락에 빠지지도 않았어." 
"미쳤어."
"그걸 정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을까? 있다고 쳐. 내가 미쳤다면 그건 뇌의 기능이 이상을 일으킨 탓이지만 고칠 수 없지. 불치병에 걸린 거나 다름없어. 길게 얘기해 봤자 끝이 없으니 슬슬 끝낼게."

 

-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 블랙 유머 기조의 초단편 <눈부신 이름>은 일종의 호러라 할 수 있겠다. 스포츠 뉴스를 보면서 '요즘은 야구장 이름이 자꾸 바뀌어서 외우기 힘들어'라고 생각한 데서 탄생했다. <마이니치 신문> 간사이 판 석간에 게재되었으니 한정된 독자밖에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이다.

 

- <요술사>는 <시와 판타지>라는 뜻하지 않은 잡지에서 의뢰를 받아 쓴 단편. 다크 판타지도 괜찮다고 해서 의뢰를 수락했다. 스즈키 고지 씨의 멋진 일러스트와 함께 실렸는데 그 그림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야기 도입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편 <마술사> 초반부를 조금 흉내 냈는데 이왕 하는 거, 제목도 다니자키 작품과 비슷하게 붙였다. 

 

- <괴수의 꿈>은 전자잡지 <문예 가도카와>에 실린 뒤에 괴수를 테마로 한 오리지널 앤솔러지 <괴수 문예의 역습>(히가시 마사오 편저)에 수록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한창 괴수 붐이 일어서 괴수라면 좋아 죽는다. 괴수 소설을 쓸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으니 '내가 생각한 최강의 괴수'로 아수라장을 만들어볼까도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이런 형태가 되었다. 한정된 분량 안에서 '최강의 괴수'를 일정 수준 설득력 있게 쓸 수가 없었다. 작중에 다양한 생각을 담았는데 그중 하나가 '아타미에는 괴수가 잘 어울린다'라는 의견. 이 작품을 쓰기 직전, 아타미에서 하루 묵었을 때 호텔 창밖으로 경치를 바라보는데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극적인 폐막>은 오리지널 앤솔러지를 내려고 결성한 여성 작가 그룹, 아미 모임(가칭)이 편찬한 <독살협주곡>(주어진 테마는 독)에 기고한 작품. 나는 남성 작가라 그 모임의회원은 아니지만 고바야시 야스미 씨와 함께 게스트로 초청받았다.


 

 

 

<요술사>가 실렸던 호 by Google



junaida 일러스트 표지 by Google

 

スズキコージ, 이런 느낌의 화풍이다 by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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