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리틀타네 / 망고로아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출간 : 2023.07.05
6월 말, 평소 좋아하던 <리틀타네의 슬기로운 생활> 유튜브 채널에서 책 출간 소식을 접했다. 출간 즉시 읽고 싶었지만, 현생은 언제나 내게 지연 기간을 덧붙이곤 한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7월 안에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
어느 날 추천 피드에 뜬 영상으로 알게 된 '리틀타네'는 여러 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직 한창 사회생활을 할 나이에 돌연 귀촌을 결심한다거나, 남들은 꺼려할 법한 강화스티로폼 돔집을 사서 수리해 나간다거나, 사람을 쓸 여력이 없다며 직접 벽돌을 날라 깔다가 '으악!' 하더니 깔았던 벽돌을 다시 모두 제거하는 삽질을 한다거나, 훌쩍 영국으로 몇 달간 떠났다가 돌아온다거나 하는 등등.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자신만의 삶에 대한 가치관을 고수하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저자의 유쾌한 무대포 정신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해당 채널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구독자 수가 폭발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이렇게 책도 쓰고 강연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나도 괜스레 뿌듯해진다. 외부로부터의 인정은 필요치 않다며 시작한 자신만의 삶이었지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듯한 사랑을 받는 모습이 보기 좋다.
묻어가고 싶어 하는 (사실 맞다) 것 같지만 나름대로 비슷한 시기에 관심이 가던 삶들을 실제로 살아가는 또래 (겠지...?) 의 모습을 보는 시간은 꽤 행복했다. 그리고 그가 발표한 <이렇게 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를 다 읽은 지금은, 이제는 슬슬 대리만족이 아니라 내 삶도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당장 무언가를 확 바꿔야겠다는 식의 결심은 아니다.
그저 오래도록 '시간만 생기면' 하고 미뤄왔던 것들에 조금씩 관심과 애정을 주는 것.
나 자신을 가장 존중하는 선택과 행동을 해나가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제로'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은 이미 익숙하게 살아오던 일상 속에서 잠시의 틈새으로도 가능하다. 소소하다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대대적이라고 가치가 커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마당을 뒤덮어버리는 잡초는 '키우기로 결정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음. 이건 조금 멀리간 것 같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변화를 불러온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삶을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제각각의 모습들이 훨씬 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래도 된다'는 믿음에 힘을 실어본다.
'규격화'된 삶이 딱히 더 행복하지는 않았다면, 나에게 맞는 다른 환경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 조금씩 뿌리를 뻗어가는 것.
하루하루의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 서두르지 않아도 꽃은 핀다.
- 처음 시골로 내려온 건, 실상 삽질에 지쳐서였다. 삽질을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나는 유난히도 아무런 성과 없는 일들을 해온 것 같다. 우물을 한 백 개쯤 팠으려나?
- "도전하세요! 열정적으로 사세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서른이 되기 전까지 이력서 한 장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구령에 발맞춰 어찌나 구르고 달렸던지.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말했다.
"열심히만 하지 말고 잘해야지, 잘!"
- 그러고 보니 도전하는 청춘으로 살면서 난 늘 부지런히 노력만 했을 뿐, 그 결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경험은 이력이 되지 못했다. 한 번도 대충 산 적이 없는데, 공인된 문서로 증명할 수 없는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나이가 되도록 뭘 하고 살았냐는 말에 "뭘 하고 살긴! 열심히 살았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 그래, 누구나 다 열심히 산다. 뜻대로 잘 안 돼서 그렇지.
- 난 더 이상 타인에게 나를 증명하는 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다가 나가떨어져 굴러들어 온 곳이 여기, 시골집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그런데 어라? 나, 또 삽을 들고 있네? 지금 이 상황,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맞나?
- 끝이라고 여겼던 이곳에선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사회로부터 은퇴하는 마음으로 내려온 곳에서는 제2의 인생이 펼쳐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간의 삽질로 만들어진 수많은 우물에 물이 조금씩 고이고 있었다.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나의 바다는, 이렇게도 만들어지는 것이었나 보다.
- 어쩌면 나는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살기 싫은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들은 확인의 과정이다.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일이 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 "그... 뭐야, 사회생활이라는 거, 나도 한번 해볼까?"
그때 난 뒷짐 진 채, 여유로운 척 휘파람 불면서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고 있었으나 불안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 남들이 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와중에 혼자 동떨어져 놀고 있는 꼴이라니. 이건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아닌 그냥 찐따였다. 내 멋에 취해 살아왔는데, 이래서야 조금도 멋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간의 신념과 이상을 버리고, 경주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경주마가 되어 레이스에 올랐다.
-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실에서 일하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남는 시간에는 자기 계발 모임에 참석했다. 숨 가쁘게 살아가며, 그런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 수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처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경주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도무지 결승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 같았지만, 경주는 계속됐고 경쟁 상대는 줄지 않았다. 그만큼 달리면 목에 메달 하나쯤은 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트랙 위에 있었고 지금껏 불태운 열정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불만을 토로해 봐야 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대학을 나오면 취업을 해야 되고, 그다음엔 결혼해야 되고, 애를 낳아야 되고, 승진해야 되고, 집을 사야 되고... 경주를 멈출 수 없는 이유만이 줄줄이 땅콩처럼 이어졌다.
- 희한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남들하고 발맞춰 살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스스로 경기장에 돌아왔다. 그러나 10년이란 긴 시간을 쏟아붓고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청춘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번 생은 망할 것 같았다. 초조와 불안, 긴장, 불만, 우울이 돌아가며 찾아왔고, 결국 내 몸이 먼저 기권을 외쳤다.
-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그에 대한 미련으로 언제 또 뒤를 돌아봤을지 모른다. 겪은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나는 다시 원점에 섰다.
- 여전히 내게는 확고한 청사진도, 뚜렷한 삶의 목표도 없다. 확실히 아는 건, 그저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마음이 이끄는 대로.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내려놓고 어떤 비교 판단도 없이 이제 나는 스스로를 찾는 여정에 오르려고 한다.
인생은 길고, 어차피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니까.
- 한 번의 실패를 맛봤음에도 어쩐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입으로는 뭐라고 중얼거리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나 자신이 인터넷상의 사념체로 살아갈 운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 야망 가득한 내게 재기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타네야, 이참에 시골에 집 사서 전원생활을 하면 어때? 너 어차피 백수잖아! 마당 있는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네가 좋아하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살아봐."
-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유튜브를 안 하면 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찍어서 올려야 했다. 나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으므로... 얼마 뒤, 첫 영상 <초보 유튜버, 유튜브 시작과 동시에 2억 탕진>이 업로드됐다. 그렇게 유튜브 하겠다고 돌연 전원생활에 뛰어들어 버린 한 30대 여성의 가슴 아픈 기록이 시작되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의 백미는 8평 정도 되는 원형의 침실이다. 작업실로도 사용하고 있는 이 방은 전망이 좋고, 구조가 둥근 돔 형태라 깊은 밤에 간접 조명을 켜면 빛이 벽에 반사되면서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텐트처럼 빗소리가 타닥타닥 방안에 울려 퍼지는데, 침대에 누워 듣고 있자면 이게 바로 천연 ASMR이지 싶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 귀찮아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게으름뱅이가 자기 손으로 집을 고치고 있다니. 12년 전의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면, 며칠 버티지 못하고 부모님 곁으로 되돌아갔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못했을 일을 지금은 할 수 있는 건, 주도적으로 사는 즐거움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나의 힘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닫자, 더 이상 무엇도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나를 성숙하게 한 건 엄마의 잔소리도 어른들의 꾸지람도 아닌 나의 시골집이었다.
- 서울에서의 생활이 내게 편리함을 주었다면, 시골에서의 생활은 내게 여유를 선물해 줬다.
사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은 됐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서울살이에 지친 젊은 여성이 고향 시골집에 내려와 자급자족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녀는 직접 키운 채소들로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밥상을 차리며 남부럽지 않은 일상을 꾸려간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도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멋진 인생을 꿈꿨다. 하지만 인생의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듯, 귀촌 후 처음 정리한 가계부에 적힌 금액은 충격 그 자체였다. 무려 400만 원을 써버린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돈 쓸 일이 별로 없는 시골에서는 내 쥐똥만 한 수입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현실은 참담했다. 돈이 줄줄 새고 있었다.
- 언젠가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내 사주가 '비가 내리는 산'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큰 산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 축축한 형세라나. 그래서 활동적인 직업을 가지고,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사주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 꼬였던 건, 늘 습하고 어두운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저하되는 체력만큼이나 성격은 우울해졌고, 그에 대한 울분은 보통 나 자신과 지금의 상황, 내 인생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정신 상태는 보통 건강에 그대로 반영됐다.
- 새벽에 잠들어 정오에 일어나기 일쑤였고, 밥도 허기가 지면 먹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사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내 성향에 거스르는 짓은 하나도 하지 않으니 행복해야 정상이건만,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대신 그 외의 모든 복합적인 감정은 다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건 분노였다. 당시 나는 늘 은은하게 열받아 있었다. 운동을 했다면 쌓인 분노를 조금이라도 건전하게 풀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 그런 기력은 없었다.
- 그래서 나는 덕질을 택했다.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면 분노가 해소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냥 화 많은 덕후가 되고 말았다. 다른 팬덤과 싸우는 건 물론, 우리 팬덤 안에서도 의견이 다른 팬을 만나면 내일이 없이 싸웠더랬다.
- 그즈음 엄마는 날 보기만 하면 이런 말을 했다.
"밖에 나가서 햇빛 쬐고 운동하면 그런 건 싹 다 낫는다."
-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흥, 고작 그런 방법으로 갱생이 가능하면 세상에 불행할 인간이 어디 있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던 것도 잠시, 내 몸은 나보다 먼저 돌파구를 찾아냈다. '죽음'이라는 돌파구를...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는 생활 습관 탓에 엉덩이에는 농양이 몇 번이나 재발했고, 탈모도 조금씩 진행됐다. 게다가 얼굴은 곧 죽을 사람처럼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방구석 탈출이 불가피했다. 나는 말 그대로 정말 살기 위해 시골행을 택한 것이다.
- "역시 엄마 말에는 틀린 말이 없다..."
시골로 내려오고 나서는 정말 단숨에 건강을 되찾았다. 그때까지의 병치레가 민망할 정도였다. 집 안을 돌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다 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 장소는 사람을 바꾼다. 저질 체력과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나는 이렇게 시골에서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건강해졌다. 낯빛도 돌아왔고, 농양은 이제 더는 재발하지 않는다. 급격하게 빠졌던 머리카락도 본래의 숱을 되찾아가고 있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삶의 리듬을 되돌리자, 몸의 균형은 물론 마음 역시 균형을 되찾았다.
- 예전에는 내 마음을 거스르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 자신의 응석을 항상 받아줄 필요는 없다는 걸. 내 마음 또한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 어떡하든 스스로가 무엇인가가 되어주길,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주길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게으름과 높은 이상 사이에서 난 오랫동안 자신을 소중히 하는 법을 찾지 못했다. 답은 간단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면 됐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하찮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섣불리 재단하지도 않는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나도 내 삶도 그 순간부터 달라진다.
-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남들 눈에는 답답하고 불편한 일상이 내게는 구원이었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 당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내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멋지게 재수에 성공해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이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이 바닥의 성공 루트를 탄들, 그 길 위에서 난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믿어준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인생을 통째로 헌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난 경로를 이탈했다.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이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도달하리라 믿고 싶었다.
- 그 끝이 가깝든 멀든 모든 인생에는 끝이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안주하려 하는 것 같다.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거스르며, 자꾸만 제자리에 고여 있길 고집하는 것이다. 행여라도 원래 가진 것보다 못한 것이 쥐어지진 않을까, 손해를 보진 않을까. 변화는 귀찮고 두렵기에 무수한 핑계를 대며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 이렇게 일상을 보내며, 이 공간에 애정을 쏟고 있지만 또 다른 변화의 시기가 온다면 나는 그것을 주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지난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기에, 열심히 살아냈다면 그다음은 새로운 걸음을 옮길 차례라고 생각한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만 새로운 것이 손에 주어질 테니 말이다.
- 그러니까 버티긴 뭘 버텨, 그냥 사는 거지.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순간들도.
-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그들의 착각이 매우 즐거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바라는 것 없이, 온전히 나를 위하는 인도 친구들의 순수한 호의가 나도 몰랐던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해 주는 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인도에서의 1년, 나는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재미있는 추억을 쌓았다.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난 삶은 나로 하여금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자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내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바라보며 여태 나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전부가 아니었고, 옳다고 믿었던 건 내 주관적 견해에 불과했다. 잃으면 큰일 날 것 같았던 것들은 없어도 큰일 나지 않았으며,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막상 겪으면 별일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 곳에서 바라본 내 삶은 그리 잘못되지도 위태롭지도 않았다. 나는 아마도 잘 살아가고 있었다.
- 지금의 난 그때의 아팠던 시간이 암흑기가 아닌 '작전 타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너무 맹목적으로 달린 것은 아닌지, 정말 이 방향이 맞는지, 왜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작전 타임을 가진 덕분에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작전을 짤 수 있었다.
- 그리고 이후 경기는 다시 재개됐다. 어쩌면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울린 건 경기 종료 휘슬이 아니라 작전타임 휘슬이 아니었을까? 넘어졌다고 경기가 그대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런 시간들은 언제나 실패가 아닌 변화의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넘어진 것이 다행인 순간들이었다.
-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왜 인도로 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사는 철없는 아이였고, 매번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게 필요한 건 타인의 인정이 아니었으니까. 내 인생을 이해해야 하는 건 나였고, 용서해야 하는 것도 결국 나였다. 그렇게 난 먼 길을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초년이 실패가 아닌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 한국어를 잘한다고 한국에서 내 꿈이 이뤄지지 않듯, 미국에서도 영어를 잘한다고 없던 꿈이 생기거나,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나는 더 이상 공부의 목적을 찾을 수 없었다.
- '칼어스 Cal Earth'라는 곳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때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TV에서 칼어스 커뮤니티를 접한 나는 첫눈에 '이거다!' 싶었다. 그곳은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해전쟁 후에 남겨진 잔해들로 집을 짓는 법을 가르치는 캘리포니아 소재의 흙집 커뮤니티였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함께 흙집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가슴이 설렜다.
- "환영합니다. 당신은 이곳에 온 최초의 한국인입니다."
졸업을 6개월 남기고 시애틀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온 이상한 한국인. 그게 바로 나였다. 목적지는 캘리포니아의 도시 ‘헤스페리아’에 위치한 칼어스. 이곳은 이란 태생의 미국인 건축가이자 작가, 교육자인 네이더 칼릴리가 성인 루미의 정신을 본받아 설립한 흙집 커뮤니티다. 네이더 칼릴리는 개발도상국에서 전쟁 혹은 자연재해와 같은 비상 상황을 마주했을 때 견고한 안식처가 되어줄 돔집의 건축법을 고안했다.
- 수레에 실어 나르고, 흙을 포대에 넣은 다음, 그것을 돔 형식으로 한 줄씩 쌓으면서 탬퍼로 두드리는 과정을 전부 다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그걸 주 6회, 하루 여덟 시간씩 반복한다고 생각해 봐라. 나는 강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다른 교육생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내 또래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서 동양인은 내가 유일했다. 교육생 중 가장 어렸고, 체구도 가장 작았다. 하지만 난 그들보다 작을지언정 전투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거쳐,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인도까지 다녀온 나는 '산독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독기 빼면 시체였던 나는 언제나 그들과 같은 강도의 노동을 하며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내가 눈앞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니. 아,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 그를 따라 웃었다. 자신의 성장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필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힘이 센지 몰랐지 뭐예요."
- 저녁에는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노래도 하면서 달구경을 했다. 강사와 학생 중에 히피들도 있었기 때문에 자연과 동물은 언제나 대화의 주된 주제였다. 어둠이 내린 사막의 고요함, 간간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스치는 바람소리. 모닥불을 쬐면서 우리는 웃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지구상 모든 것이 특별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늘에 뜬 달도, 타닥타닥 조용히 타는 모닥불도, 그곳에 앉아 있는 나 역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그들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감각들이다.
- 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그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얘기밖에는.
때로는 세상의 상식과 맞지 않는 일이 인생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기도 한다.
- 나는 그저 아름다운 정원을 즐길 생각뿐이었다. 미처 몰랐던 건 정원은 철저히 관리됐을 때만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손수 가꿔야 하는 땅은 그저 예쁘지만은 않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토끼풀 같은 잡초들이 잔디밭을 온통 집어삼켜 버린다.
- 이렇듯 이곳은 내가 노력한 만큼 변화한다. 처음 시골로 왔을 땐, 그런 당연한 이치가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부모님 집에서 대가 없이 누리던 편안함과 사회에서 돈을 주고 사던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대망의 공사 날, 나를 낳아준 무급 인력은 일이 생겼다며 바람처럼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엄마가 너처럼 백수가 아니라 미안하다! 파이팅!"
이런, 배신자! 정신 줄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이제 와서 공사를 무를 수는 없었다. 굴삭기 대여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돈을 더 주고 일꾼을 부를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 혼자 뛰는 수밖에 없었다.
- 결국 가난한 시골 노동자는 손수 벽돌을 날랐다. 계속 벽돌을 이고 지고 나르다 보면 삭신이 쑤시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문득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것이 1년 치 운동의 대신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면 된다. 어차피 운동으로 오는 근 육통과 증상이 크게 다르지도 않으므로...
- 가지런히 놓인 벽돌을 망치질해 가며 수평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예쁜 벽돌 길이 완성된다. 셀프 작업 치고는 상당히 깔끔한 모양새에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감격에 겨워 나의 작품을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벽돌 아래 비닐을 까는 걸 깜빡했단 사실을... 아뿔싸!
- 벽돌 아래에 비닐을 깔지 않으면 잡초는 금세 그 틈을 비집고 나올 것이다. 잡초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마당 전체를 뒤집어 엎었건만, 이러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었다. 뼈 아픈 실책에 내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실수를 했으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지. 한 번 해본 거 두 번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리플레이.
- 어렸을 때 난 레고 놀이를 좋아했다. 무언가 만들다가 마음에 안 들면 전부 부쉈다가 다시 만들기를 반복했다. 그땐 레고 놀이 자체가 좋았는데, 나이를 먹자 그 과정이 점차 지루해졌다. 여러 번 부수고 다시 만드는 대신, 한 번에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반복적인 과정은 시간 낭비로 여겨졌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곱 번 일어나는 건 개구리 왕눈이 같은 놈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나는 뭐든 완벽하게 성공이 보장된 일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 예를 들면, 성공할 가능성이 불투명한 일에는 일부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자신 없는 과목은 꾸준히 공부하기보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는 식으로, 이러면 시험을 망쳐도 내가 부족해서 망친 게 아니라,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망친 셈이 되니까. 나는 이 알량한 '정신 승리’를 내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라고 여겼다. 어떤 심리학자가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고, 그렇게 해석하는 편이 훨씬 멋있었으니까!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내가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한 일은 나를 상처 낼 수 없었다.
"잘 안 됐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걸."
- 영양가 없는 생각이라 해도 당장의 자존심을 채우는 덴 충분했다. 그렇게 난 오래도록,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랬던 내가 이곳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실수하면 다시 만회하면 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걸, 그 편이 넘어질까 두려워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백번 낫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인생이 과정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 엄마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 나는 참 다재다능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미술에서 유난히 소질을 보였다. 매일 화판을 메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네 살이 된 천재는 뛰어다니는 캥거루의 형태와 무게중심 등을 정확히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 경제적 효용을 검증하는 것이 일상이 되면서, 고작 열네 살 남짓한 나이에 벌써 집중해야 할 일과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림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계속 고민했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해외 근무로 벨기에의 국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렇게 고민이 되면 한번 제대로 배워보라는 엄마의 제안에 난생 처음으로 미술 학원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내가 찾은 시골 학원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선생님과 외국인 아이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난 그 학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진짜 천재를 만난 것이다.
-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잊은 지 오래지만,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 아이가 파스텔로 그린 늑대 그림. 그것을 보고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그건 아이의 그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아이의 그림에 모두가 감탄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여기서도 최고일 수 없는데, 저 넓은 세상에선 오죽할까?'
- 오만방자한 사춘기였다. 이길 수 없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긴 채, 그 길로 나는 그림을 포기했다.
- 그렇게 그림 따위는 잊은 채 어른이 됐다. 미술 대신 선택한 음악을 하느라 바빴고, 한국에서 인도로, 또 미국으로 바쁘게 이동하며 사는 동안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그림 세계에 발을 들일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던 스물여섯 살의 어느 날, 작업실을 같이 쓰던 언니가 내게 문득 물었다.
"내가 다니는 작가 모임에서 이번에 수강생을 새로 뽑는대. 지원서 내보지 않을래?"
- 뒤이어 2차 면접을 봤고, 신기하게도 난 좁은 확률을 뚫고 수업의 일원으로 발탁됐다.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림이 손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그림이 좋아졌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그림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10년 전에 꺼져버린 줄 알았던 열정의 불씨가 되살아난 것이다. 내 일상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갔다. 그림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림 실력에도 점점 탄력이 붙었다. 그림 그리는 걸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을 구해보고자 그림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그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철학이랑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웬 그림?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만 해야지 업으로 삼으면 안 돼."
- 하지만 애초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나에게 그들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난 계속해서 그림판을 얼쩡거렸다. 그렇게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데뷔했다는 결말이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냉정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재능도 많은데 열정도 있고, 노력까지 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 하지만 세상에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이 어디 흔한가? 야심차게 떠난 영국 유학은 성패만 두고 보자면, 실패에 가까웠다. 난 만화 속 주인공처럼 엄청난 멘토를 만나지도 못했고, 각성을 하지도, 천재성을 재발견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유학을 다녀오기 전과 후의 내 그림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딱 하나. 큰 물에서 노는 이들은 모두 넘치는 자신감의 소유자들이란 사실이다.(근데 이제 그 자신감의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 그들은 부족한 실력으로도 꾸준히 뭔가를 만들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좋아하는 걸 그렸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고, 남들의 인정을 좇지도 않았으며,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하고 있었다. 나에 비해 그들의 현실이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여러 걱정, 불안을 안고 있었고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렸다.
- 그들과 나의 차이라면, 그들은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였고, 나에겐 시작조차 어려운 일을 그들이 겁먹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으로 되는 일이었다.
- 때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슬럼프에 빠진다. 그건 아마 우리가 위만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느낄 때,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고 느낄 때, 내가 먼저 나를 평가하기 시작할 때 좋아하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은 1퍼센트의 특별한 사람들과 99퍼센트의 평범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1퍼센트의 사람들이 세상이 갈 방향을 정한다면, 그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건 99퍼센트의 사람들이라고.
- 우린 꼭 무엇인가가 되지 않아도,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일 수 있다.
완벽하거나 특별하거나 독보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만의 세계에서 나만의 일을 하며 나만의 속도로 성장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인생의 끝에는 어딘가 도달해 있지 않을까? 먼저 인생을 살아낸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처럼 말이다.
-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더 이상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할 요량으로 문자의 내용을 마저 읽었다. 어라, 내가 잘못 봤나? 문자에 적힌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렇게 몇 번을 일의 자리부터 다시 헤아렸고,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들어 곁에 앉아 있던 동생에게 말했다.
"나 다시 취직할까...?"
- 시골집과 삶에 그만한 정성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게 만드는 그 이름, 돈이여. 부끄럽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맞다. 지인들은 날 보며 참 줏대 있게 산다고들 한다. 반 정도는 맞는 얘기다. 난 한번 결심하면 꿋꿋이 밀고 나가는 힘도 있고, 결국 끝까지 해내는 독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나조차 꺾어버리는 강적이 있으니, 그게 바로 돈이다.
- 소중한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을 때, 고민 없이 쓸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돈은 나를 효녀로, 또 좋은 친구로 만들어줬다.
- 세상에 나와 보니 돈의 위력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그것이 행복이든 미래든, 돈으로는 뭐든지 살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돈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젠장! 나는 돈에 훨씬 더 진심일 필요가 있었다.
- 그리하여 나는 20대 후반을 온통 돈 버는 데 썼다. 목표한 바가 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독기 넘치는 성격은 여기서도 한몫을 했다. 24시간 중 18시간을 일하며, 남는 시간에는 주식과 가상화폐에 손을 댔다. 그렇게 내 통장 잔액은 상당한 규모를 갖추게 됐고, 조금만 더 그렇게 일했다면 나는 정말 부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언제부터인가 내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건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늘 자신의 생이 영원할 것처럼 산다. 내일의 행복 같은 건,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음에도.
- 그래서 나는 지금을 살기로 마음먹고 도시를 떠났다. 바로 지금,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보다 인생을 잘 사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긴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똑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고 있었다. 누가 망각의 동물 아니랄까 봐. 인간의 기억이란 참 믿을 것이 못 된다.
- 결국 나는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다. 인생을 살다 보니, 그때는 맞던 것이 지금은 틀리기도 하다. 나 역시 한때는 내 모든 것을 걸 만큼 돈이 중요했지만, 이제 그보다는 나와 내 삶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안다. 내게 중요한 건 이제 돈이 아닌 주체적이면서 자유로운 삶, 아쉬울지언정 후회 없는 삶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정해주는 성공의 궤도에서 조금 벗어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 몇 년 전, 한 영화가 개봉했다. 그 느와르 영화는 관객 수 90만 명 정도를 기록하며 딱히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다른 의미에서 영화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대개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느와르 영화가 20~30대 여성을 주축으로 한 팬덤을 형성한 것이다. 그들은 영화의 상영관이점차 줄어들자 남아 있는 관에서 소위 말하는 'N차 관람'을 하고, 영화관을 직접 대관하는 등 주도적으로 영화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실제 관람은 하지 않으면서 좌석표만 구매해 매표율을 올리는 '영혼 보내기'까지 일삼았다.
(리뷰자 주 : 어라. 혹시 <공작>인가요?)
- 나는 이런 무용한 사랑에 그 누구보다 진심이다. 좋아하는 것은 끝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 영화도 처음에는 합법적인 루트를 통해 영화를 수차례 시청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팬들과 영화를 나노 단위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영화의 출연진과 제작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한 주연 배우에게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의 놀라운 끈기, 노력, 그리고 천재성! 내가 게으른 범재였던 탓일까, 나는 이 배우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누군가는 그게 무슨 부질없는 짓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생판 남에게 감정이입하며 대리 만족 할 시간에 자기 계발에 힘쓰는 편이 훨씬 유익하겠다 말하겠지.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내게 이것은 불가항력이다. 끝장을 봐야 속이 시원해지는 이 극단적인 마니아 성향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집이 긍정적으로 발현된 아이들은 훌륭한 예술가나 학자, 장인으로 성장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가장 쓸데없고 어디에도 내세울 수 없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푹 빠지는) 오타쿠가 됐다.
-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정체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군가는 방황을 하고, 누군가는 자기 계발을 하며, 누군가는 취미 활동을 하고 누군가는 덕질을 한다. 이런 시기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때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 하고 싶다. 인생은 길고, 언제 변곡점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마냥 딴짓도 해보고, 개인적인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걸 사랑해보기도 하는 거다. 쉬어가는 구간에 자신의 삶에서 한발 떨어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인생 뭐 있어? 성급한 사람의 것이나 느긋한 사람의 것이나 인생은 죄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매 순간 똥줄 빠져라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
- 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지, 억울한 마음에 엄마에게 이유를 물었다. 엄마는 대답했다. 이제부터 엄마는 채식을 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너도 이제 밥상머리에서 고기는 찾지 말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다.
"사랑을 말로 하면 뭐 해. 실천해야지."
- 엄마는 인간과 동물과 자연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해치지 않으며 그들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자연은 거대한 생명 에너지로 이뤄져 있으며, 인간은 대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걸.
- 그리고 이 오랜 고민에 대한 답을 나는 의외의 곳에서 찾았다. 동생이 뉴질랜드에서 유학하고 있던 때, 휴가차 방문한 그곳에서 동생의 친구를 만났다. 우리처럼 이방인의 길을 택한 그녀는 자신의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행복이었다.
'행복하고 싶으니까 다른 생명의 행복도 존중한다.'
- 세상의 모든 동물들에게는 그들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흑인이 백인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듯, 동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행동과 생활 방식에 의해 초래된다면, 나 또한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존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있었고, 사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있었다.
- 나는 그런 당연한 이치를 간과하고 있었다. 평화는 그저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란 걸 나는 그때 알았다.
- 글 한 편 마쳤으니, 오늘은 코코넛 치즈를 잔뜩 올린 비건피자를 먹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해야지. 불량 비건의 맛은 언제나 달콤하다. 난 평화롭게 살겠다고 했지 건강한 비건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다...
- 머리로만 아는 건 지식으로 끝나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건 삶을 바꾼다.
- 사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지켜볼 것이고, 존중한다면 그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대하듯,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대하듯, 자연과 그 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대한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이다.
- 시골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이곳에서 나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며 몸을 움직인다. 인터넷 속의 지식과 사람들의 말, 도시의 넘쳐나는 정보와 무관한 나만의 경험을 쌓아간다. 그리고 난 그것을 통해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여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남의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게 맞는 환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맞는 땅을 찾으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꽃을 피울 수 있다.
- '놀고 싶다. 쉬고 싶다. 잠자고 싶다.'
뇌가 본능적으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놀고 쉬고 자는 것을 죄악시하는 세상이지만, 난 뇌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건 게으름뱅이의 소리가 아니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외침이었으므로.
- 난 항상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스트레스를 이겨내기에는 또 터무니없이 약한 개체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 더 이상 무리하는 건 나 자신에게 못 할 짓이다. 그것이 비록 경기장 이탈을 뜻할지라도 제 분수에 맞지 않게 달리다가 폐사하는 경주마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 대학교에서 철학과 수업을 들으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삶의 진리는 가장 단순한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철학자들의 공통된 가치관은 인간은 자유롭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쪼록 무리하지 않으며 내게 허락되는 만큼 천천히 걸어가는 것.
- 이렇게 난 오늘도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누구와도 다르게, 누구보다 느리게.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썩 잘 살아가고 있다.
- 나와 내 인생을 의심했던 모든 '나'에게.
"이렇게 살면 큰일 날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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