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히가시노 게이고] 외사랑

일루젼 2023. 8. 1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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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원제 : 片思い かたおもい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22.09.27


다양한 색조의 그라데이션. 멀리서 볼 때는 특정한 색조로 보이던 부분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인다. 주변색으로 인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녹색으로 보였던 색은 배경색을 바꾸면 갈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 '진짜' 색이란 말인가? 

 

팬톤칩으로 개별 색만을 살펴본다면 어떨까. 각각의 칩에는 제각기 다른 이름과 색조가 있다. 유사한 색들끼리 붉은 계열, 푸른 계열로 묶을 수야 있겠지만 완전히 동일한 색은 아니다. 

 

모든 구분에는 경계구역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의 혼란과 고통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외사랑>이다. 

 

2001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최근 발표작보다는 예전 작품인 <백야행>이나 <환야> 같은 사회 풍조에 관한 관찰이 깊게 녹아있다. 그럼에도 20년 전 소설이라는 느낌이 거의 없는 것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혼란이 비슷한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글 자체가 시대를 타지 않게 잘 쓰여졌기 때문일까. 지금이라면 소설 속 인물들의 고민에 하나씩 라벨링을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트렌스젠더 헤테로섹슈얼, 트렌스젠더 호모섹슈얼. 적어도 자신을 '무엇'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되었다는 위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스스로가 감각하는 성별과 신체적 성별이 일치하는 경우를 시스젠더, 그렇지 않은 경우를 트렌스젠더라고 칭한다. 젠더적 구분을 원치 않는 경우는 에이섹슈얼로 젠더 구분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는데, 양성애자인 바이섹슈얼과는 다르다. 신체적 성별은 여성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남성이라 생각하며, 여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사람은 트렌스젠더 헤테로섹슈얼로,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호모섹슈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는 트렌스젠더 호모섹슈얼과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을 구분할 수 있는가? 신체는 남성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정상적'인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로 보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문 내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런 모순 -이미 실재하는 현상이지만 '정상'과 '평균'에 세뇌된 시각에서 보자면 모순인- 적인 상황들을 소개한다. 다만 여성 신체의 트렌스젠더 위주로 등장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는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양한 여성'으로 맞추고 싶었기 때문일까? 혹시 피해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정신적 괴로움과 혼란은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범'해 보이는 이들도 다 각각의 고민과 혼란, 사정을 짊어지고 있다. 그것의 주제가 무엇이냐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여성/남성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미쓰키가 내외면이 일치하는 여성인 리사코보다 '이상적인 아내'에 가까운 모습을 더 잘 수행하기도 한다. '이상적인 조합'이라 여겨졌던 데쓰로와 리사코의 결합은 '이상적'이지 않다. 이런 것이 '평범'이라면 '정상'은 없다. '00'은 이래야 해,라는 틀 속에 자신 또는 상대를 끼워 맞추는 순간 관계는 질식한다.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부분도 있다. 현재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에스프레소샷이 아닌 드립커피에 우유를 추가해 마시는 카페오레를 더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넣는다거나, 블랙 커피에 우유를 추가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순간 액상 프림처럼 포션 형태로 된 건가 싶기도 했는데... 그걸 드립 커피에도 넣어마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카페오레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일본은 드립커피가 한국보다 더 보편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내 취향은 드립 블랙 or 플랫화이트.) 

 

안면인식도 그렇다. 전 국민이 모든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하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검색해 본 바로는 사건 기록 없이 무조건 등록하는 국가는 한국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이에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다만 한국에서는 비전과자도 지문으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20년 전이라 가정하더라도) 충분히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참고로 일본은 방문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모든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하지만 자국민들의 경우는 등록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는 안면 등록이 보편화되어 있고, 홍채 등록도 시행하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은 신원 확인 수단으로 치아 기록이라거나 다른 보조 장치가 없는 것인가?) 

 

<외사랑>은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소설로 읽는 편이 더 즐거우시리라 생각한다.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았고, 의미 깊은 대사도 많았다. 즐겁게 읽었다. 

     


   

- "꽃꽂이 가문의 수장이 엄청나게 큰 홀을 만들었는데 그 준공식을 겸한 파티가 열려서. 그 파티 모습을 어디 잡지에 싣는다고 촬영하러 갔어." 

 

- "여자는 결혼하면 교제 범위가 완전히 바뀌는구나." 스가이가 말했다.

"남자도 바뀌지." 마쓰자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카오 녀석, 오늘도 결석이잖아. 결혼한 뒤로는 영 어울리질 않네. 완전히 집 밖에 모르는 남편으로 변신했나 봐."

 

- 술자리는 10시에 끝났다. 왕년의 미식축구부원들은 가게 앞에서 해산했다. 예전에는 2차, 3차까지 갔는데 이제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가정이 있어 시간과 돈 모두 자신만을 위해 쓸 처지가 아니었다. 

 

- "아내가 좀 바꾸래."

"나를?"

그렇다며 스가이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끄덕였다. 

 

- 미쓰키는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술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놀란 둘을 냉소하는 듯도, 자기 모습을 조소하는 듯도 했다. 그녀가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반대로 데쓰로는 숨을 삼켰다. 

 

- "그건 뭐지, 잘못 태어난 이상한 사람 얘기 아닌가."

 

- "설명이 필요해. 하지만 두 가지는 이해해 줬으면 해. 첫 번째는 이 얘기가 거짓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 두 번째는 나란 놈의 고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나란 놈..."

데쓰로는 미쓰키가 내뱉은 단어를 따라 읊조렸다. 사정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 서모스탯이 동작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향기로운 냄새가 감돈다. 커피메이커를 켜뒀다는 사실을 깨닫고 데쓰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색한 침묵 속에 셋은 커피를 마셨다. 데쓰로와 스가이는 우유를 넣었는데 미쓰키는 블랙으로 마셨다.

(리뷰자 주 : 커피메이커에서 만든 커피에 넣었다면... 카페오레로 봐야 할 것 같다.)

 

- "그게 다 연기였어?" 스가이가 물었다.

"다 연기였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어. 여러모로 어려워. 이런 인간의 심리란 복잡하거든. 잘 모를 테지만."

솔직히 잘 몰라 데쓰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다른 친구들은 검은색 반바지 수영복만 입는데 왜 나는 위도 가려야 하냐고. 게다가 색깔도 빨강 아니면 분홍. 그런 옷은 평소 치마를 입는 여자애들이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가. 늘 바지만 입는 나는 남자애들처럼 검은색 반바지를 입어야지." 미쓰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짧은 머리를 만졌다. "내가 여자로 취급되는 데 위화감을 느낀 가장 오래된 기억이야. 그 후로는 어머니와 하염없이 실랑이했지. 치마 입어라, 입기 싫어. 여자애답게 놀아라, 그러고 싶지 않아. 머리에 리본을 달아라, 안 달아."

 

- "우리 어머니는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머릿속에 부모와 자식의 이미지가 아주 명확하게 있었고, 그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남편이나 아이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책망하는 성격이었어. 아마도 외동딸이 이상한 개성을 지녔음을 알아차리고는 일찌감치 교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초조했을 거야."

 

- "철이 들면 말이야, 아이라도 이래저래 눈치를 보잖아.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울고 있으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연기했어?"

"그렇지. 싫어도 치마를 입고 내키지 않아도 여자애들과 놀아. 말투도 걔들을 따라 하고. 그렇게 하니 어머니도 안심하고 집안도 편안했지.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은 늘 품고 있었어."

 

- "뭐랄까, 영, 확 이해가 안 된다. 내게 히우라는 늘 여자였는데 이제 와 아니라니..."

"진짜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 "놀라긴 했는데 역시 그랬구나 싶기도 하다."

"알고 있었어?" 스가이가 눈을 부릅떴다.

"알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어. 미쓰키가 실은 남자였다는 것은 몰랐어. 하지만 우리와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은 했어. 줄곧 말이야.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그래서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린 느낌이야."

 

- "언젠가 알 일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얘기해도 되잖아?"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말하면 날 놔두고 그냥 갈 거야?"

"그건 약속 못 해. 내용에 따라 다르지."

너무하다고 화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미쓰키가 보인 반응은 전혀 달랐다. 미쓰키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얘기를 들으면 QB는 아마 나를 더 붙잡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얘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이번에는 데쓰로가 생각에 잠길 차례였다.

 

- "그게 히우라를 위한 일이야."

"응. 더 얘기해 볼게. 네게 폐를 끼치진 않을 거야."

그러자 스가이는 겸연쩍은 듯 뺨에 난 수염을 문질렀다.

"옛 동료니까 도와주고 싶긴 한데, 살인사건은 좀 그래. 우리는 대출도 있고 둘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해서 말이야."

"여러모로 힘들지? 나도 알아. 부인에게 안부 전해줘." 

 

- 스가이의 마음은 충분히 안다. 그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상식적이라고 해야 할까. 우정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이다. 

 

- 지금도 이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수입이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격려하며 여유 있는 쪽이 없는 쪽을 보완하는 형태로 각자의 토대를 단단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무렵이 가장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리 원고를 써도 돈이 되지 않고 하찮은 일만 맡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사코와의 관계만 놓고 보면 분명 그때가 가장 충실했다. 그녀가 당당한 사진작가가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언젠가 둘이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수없이 그녀에게 말했고 그 말에 거짓은 조금도 없었다.

 

- 각자가 성공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할 때 양쪽 모두에게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문제라 여기지도 않았다. 대화가 줄고 시간을 공유하는 기회가 준 것은 그저 바쁘기 때문이라 여겼다. 전보다 일을 우선하는 것도 그만큼 책임 있는 자리를 얻은 대가라고 해석했다. 

 

- 싱크대에 산처럼 쌓인 식기가 데쓰로의 머리에 떠오른다. 계절은 6월이었다. 장마철에 들어간 때라 그날도 가는 비가 내렸다. 산더미 같은 그릇은 둘이 교대로 쌓은 것이다. 이 무렵 둘은 이미 함께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의 내용도 시간대도 완전히 달라졌으니 당연했다. 식사는 주로 반찬가게에서 사 오거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니까 일반적인 가정보다 그릇을 더럽힐 일도 적었다. 그래도 찬장의 커피잔, 유리잔, 작은 접시 등은 싱크대로 옮겨졌다. 데쓰로는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우울해졌다. 산더미 같은 그릇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아마 리사코도 똑같은 기분으로 그 산더미 같은 그릇을 봤을 것이다.

 

- 가사 분담에 특별한 규칙은 없었다. 시간이 나는 사람이 보면 하자는 식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둘 다 한가하지 않았다. 아니, 객관적으로 전혀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설거지할 정도의 시간은 아마 둘 다 있었으리라. 

 

- 누군가 같이 치우자고 했으면 아무 문제없었다. 하지만 데쓰로도 리사코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자기가 더 힘들다는 오만한 생각이 있었다. 

 

- 긴장의 끈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끊어졌다. 오랜만에 둘이 집에 있을 때였다. 데쓰로는 티백 홍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사용한 컵은 찬장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하나였다. 그것을 본 리사코가 격노했다. 어제 자신이 씻어놓은 찻잔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용한다고 안 될 것도 없잖아."

"함부로 말하지 마. 자기는 절대 설거지 안 하면서."

"너도 안 하잖아."

"하지만 그 찻잔은 내가 설거지한 거라고. 오늘 쓰려고 씻어둔 거라고. 그걸 맘대로 쓰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알았어. 자기가 설거지한 게 아니라면 앞으로는 못 쓴다는 거지? 그럼 내가 설거지한 것도 쓰지 마." 

데쓰로가 일어나 쓰던 찻잔을 일단 씻었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 맨 위의 것에 손을 댔다.

 

- "당신이 쓴 것만 설거지해." 리사코가 말했다. 데쓰로가 돌아보니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내가 쓴 그릇은 그냥 둬."

"당연하지." 데쓰로는 내뱉듯 그렇게 말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 실제로는 어느 게 자신이 쓴 것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대강 반 정도의 그릇을 더러운 상태로 놔뒀다. 그 그릇들은 몇 시간 뒤에 찬장에 돌아가 있었는데 이전과는 다른 칸에 놓였다. 어느 것이 자신이 설거지한 것인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 이 습관은 정착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사용한 것을 바로 씻는 게 규칙이 되었다. 그때의 쓸데없는 싸움은 곧 화해로 이어졌으나 데쓰로에게 그 기억이 강하게 남은 것은 그날 일이 모든 것의 조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자주 어긋나면서 그때까지는 같다고 믿었던 가치관이나 인생관에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 그녀도 망설였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성공할 기회를 그냥 놓아버리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한 발 앞서 스포츠 평론가라는 지위를 확립한 데쓰로의 마음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는 가정에서 안정을 기대했으나 그가 몸을 쉬이는 장소는 도무지 가정이라 불릴 수 없는 곳이었다. 

 

- 데쓰로는 보통 모범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아내의 이미지를 리사코에게 요구하는 자신을 자각했다. 착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남편이 편안하게 지낼 환경을 만들어주는 아내 말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남자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아내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그녀가 좌절하기를 기대했다.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기를 꿈꿨다.

그리고 2년 전, 그 일이 일어났다. 

 

- 리사코가 한동안 해외에 가 있겠다는 말을 꺼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친구 여성 작가와 둘이 르포를 찍고 오겠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가겠다는 곳을 듣고 데쓰로는 깜짝 놀랐다. 유럽에서도 가장 긴박한 상황에 놓인 지역이었다. 

"책은 나랑 같이 내자고 하지 않았어?"

그의 말에 리사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은 스포츠 전문이잖아."

"곧 스포츠 이외로도 분야를 넓힐 생각이야."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미안하지만 이번 기획은 당신과는 할 수 없어. 가제도 정했어. 여성이 본 전쟁이야." 

 

- 이런 의견이 의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리사코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쉽게 찬성하기는 어려워. 너무 위험해."

"하지만 누군가는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전쟁 상황을 알지."

"네가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하고 싶어."

 

- 리사코는 물러날 기미가 전혀 없었다. 데쓰로도 큰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망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다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는 그러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사코는 착착 준비를 시작했다. 

 

- 데쓰로도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일말의 불안을 안고 있었다.

 

- 그런데 사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 데쓰로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잘못 들었거나 농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아님을 그녀가 뿜어내는 공기로 명백히 알 수 있었다.

 

- 그는 반쯤 미쳐 소리치며 따졌다. 왜냐고. 내게 묻지도 않고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멍청하게, 무슨 생각이냐고. 그녀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알았으나 분노와 욕설을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우성치는 동안 그녀는 죽은 벌레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후로 둘은 각방을 쓰게 되었다. 

 

- 데쓰로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좋았냐는 마음도 여전히 있다. 뭐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나. 그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인가.

결국은 자신 역시 낡아빠진 꼰대들과 같은 부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입으로는 아내의 자립을 바란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강한 저항감을 품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캐묻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 스키 여행을 가자는 리사코의 제안에 일단 나카오가 찬성했다. 데쓰로는 미쓰키 일이 있어서 조금 망설였으나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미쓰키도 동의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신경쓸 필요 없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 "두 이야기만 놓고 보면 모순이라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나로서는 논리적이라고 생각해." 리사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쓰키 앞에 섰다. "교도소에 들어가면 소중한 것을 다 빼앗겨. 소용없어지지. 미쓰키의 뜻도 사상도 무시돼. 그런 상황과 미래를 막기 위해 잠시 가짜 모습을 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해." 

 

- 미쓰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 가짜 모습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그건..." 리사코는 조금 망설인 뒤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어. 상황을 봐야지."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는 소리네."

데쓰로는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꺾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다.

"그거 너무 이상하잖아?"

"이상하든 아니든 그게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미쓰키가 내뱉듯 말했다.

"그 현실을 바꿔볼 생각은 없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취급이나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미쓰키가 그렇게 초조해할 이유도 없잖아."

"그런 일이 그리 쉽게 되진 않잖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까 내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히우라의 사고방식이야. 네 말은 꿈같은 이상론이고."

 

- 리사코는 드디어 그를 바라봤다.

"그 정도는 알아. 그래서 미쓰키의 의사를 존중해. 하지만 육체를 바꿔 상황에 맞추려는 것은 타협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는 게 내 본심이야. 아까 말했지? 진심을 얘기해 달라고. 그리고 하나 더 얘기하자면." 다시 미쓰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자의 몸을 지님으로써 미쓰키가 품은 초조함과 분노는 많든 적든 여성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 마음이 여자라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고. 그저 익숙할 뿐이지. 그리고 포기하고 살 뿐이야."

 

- 그녀가 토해낸 연기가 너울너울 공중을 맴돌았다. 전원의 마음을 표현하듯 공기는 하얗고 뿌옇다. 

"리사코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었어. 내 모습을 보는 것은 타인만이 아니야. 이 세상에는 거울이라는 게 있어." 미쓰키가 말했다.

"그 거울을 보는 눈도 왜곡되었다는 생각은 안 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리사코의 입술이 흠칫 움직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 "그건 아무래도 안 될 거야.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하야타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녀석은 일을 선택할 거야."

 

- "그 최신 방법이라는 것도 Y염색체를 지닌 사람을 찾아내는 겁니다. 바르셀로나 때부터 도입했죠. 그런데 진성 반음양인 사람은 Y염색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검색해도 여자로 나올 겁니다."  

(리뷰자 주 : "In fifteen cases of true hermaphroditism mosaicisin has been found with Y chromosome material present in at least one cell line: XO/XY" (HIRSCHHORN ef cil., 1960; MILLER et d., 1960; BROWN et ul., 1964). 진성반음양은 Y염색체가 발견될 확률이 있다. 성염색체의 비분리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여성이 아니란 말인가. 호적상으로는 여성이고 본인도 여성이라는 자각이 있는데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부조리하지 않나. 도핑이 비열한 행위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진성 반음양 선수들이 남성 호르몬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 자신의 특수한 능력에 불과하다. 그리고 스포츠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자들의 싸움 아닌가. 육상계에는 스프린터는 길러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최고의 육상 선수가 될 소질은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정해진다는 뜻이다. 

 

- 두 경우 모두 염색체가 XY이므로 성별 검사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명백하게 여성이고 사회적으로도 여성으로 인정된다. 본인들도 어떤 위화감 없이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식한다. 

 

- "정말 불합리한 얘기죠. 게다가 지금은 그런 선수에 대한 구제 조치가 있다고 해도 일단 이상한 눈으로 봅니다. 그야말로 인권의 문제죠. 성별 검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남성 호르몬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그 영향을 받는 사람은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나름대로 명확한 구분이라 할 수 있겠으나 정말 이것만으로 성을 나눌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남녀라는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남녀 구분은 애매한데 거기에 억지로 선을 그으면 온갖 모순이 발생하는 게 당연하죠. 왜 그렇게 일정한 선을 그으려 하는 걸까요? 근본적으로 남녀는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겠죠."

 

- 나카하라의 말처럼 남녀를 나누는 것은 사실상 극히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는 비단 스포츠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 "나는 네 추억을 찍어두려는 게 아니야. 사진작가로서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네 몸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 둘의 움직임과 표정은 완벽하게 공명했다. 한 사람의 기분이 고양되자 상대에게도 전염되고, 그 상대가 발하는 분위기에 스스로 더 도취하는 순환이 일어났다. 둘을 형성하는 세계에 다른 이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이 방은 원래 리사코가 암실로 쓸 계획이었다. 데쓰로는 작업실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카페에서 원고를 쓰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일이 늘어나자 집에서 집필할 필요가 생겼다. 잠깐 빌릴 생각으로 책상을 들여놓고 일했다. 얼마 후 책장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캐비닛이 놓였다. 둘 사이에 별다른 대화도 없이 자연스럽게 데쓰로가 이 방을 점령했다. 리사코가 아직 사진작가로서 자립하지 못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셈이 되었다. 

 

- 리사코가 이런 상황을 대놓고 불평한 적은 없다. 그러나 가끔 현상한 흑백 필름이나 사진을 말릴 때가 있다. 데쓰로는 현상되는 사진이나 필름을 볼 때마다 그녀가 '난 허락한 적 없어' 하고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 '잘했네. 데스크톱이라도 사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데쓰로가 새 컴퓨터를 샀을 때 리사코가 한 말이 떠올랐다. 밖에서 일할 기회가 많은 데쓰로가 데스크톱을 살 리 없는데도 그녀로서는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 '괜찮잖아.'

기억 속의 미쓰키가 속삭였다. 

 

- "상대에 따라 모습을 바꾸겠지. 상황에 따라 노인임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모르지. 불리하면 입 다물고."

"경찰 지시일까?"

"아니, 그건 아냐.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아.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본심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나이가 주는 지혜와 본능이겠지."

 

-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어.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 물론 여러모로 힘들 테고 책임도 무겁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할 거야."

"맞아. 각오는 필요해. 신문기자가 됐을 때 스스로 정한 게 있어. 진실을 전하기 위해 무엇을 잃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 잃을까 봐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인터셉트를 두려워하면 터치다운 패스는 못 하는 것과 같아." 

 

- "알고 있겠지만, 내 일은 숨겨진 것을 폭로하는 거야. 그것이 어떤 인간에게 상처가 될 것인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아.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이 숨기려 하는 것도 폭로할 수밖에 없어."

데쓰로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하야타의 말에 있었다. 

 

- "너무 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QB처럼은 될 수 없어."

"나처럼 되지 않아도 괜찮잖아. 네게는 너만의 이상적인 남성상이 있을 테니까." 데쓰로가 웃으며 말했다.

미쓰키는 고개를 들고 데쓰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진지한 빛이 그 눈 속에 있었다. 데쓰로는 몸을 살짝 뺐다.

"내가 말 안 했나?" 미쓰키가 물었다.

"뭐?"

"옛날에, 말했는데."

 

- 미쓰키는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눈을 두 번 깜빡이고 다시 데쓰로를 바라봤다.

"내게 QB는 이상적인 남자야.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몇 초 후, "앗!"하고 작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밤이다.

 

- "그날 밤 일, 생각났어?"

"아, 응." 데쓰로는 대답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일에 관해 QB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게 낫다고 생각했어. 아니었어?

""아니, 덕분에 살았어." 미쓰키는 팔짱을 끼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해. 그런 짓을 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 "QB가 되고 싶었어." 미쓰키가 툭 내뱉었다. 데쓰로는 미쓰키의 옆얼굴을 봤다. 미쓰키도 그를 바라봤다.

"그 얼굴과 그 몸, 그런 목소리가 갖고 싶었어. 만약 그렇게 태어났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

"좋은 인생이란 보장은 없어."

"좋은 인생이야."

 

- "이유는?"

"서로를 위해서,라고만 했지. 고스케는 원래 그런 성격이잖아. 상대가 헤어지자고 한다 해서 꼬치꼬치 이유를 묻거나 비참하다며 달려들지 않을 사람이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네. 그게 끝이었어."

데쓰로는 그 녀석답다고 생각했다.

 

- "농담하는..."

"누가? 내가? 히우라가?"

리사코는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는 의외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가 미쓰키의 마음을 몰랐을 리 없다. 

 

- "남자가 바뀌어야겠네요."

여성 편집자의 말에 베테랑 여성 프로 허슬러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도 변해야지. 상대가 남자라고 눈빛을 바꿔서는 안 돼. 그런 점에서 나도 아직 멀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냐 여자냐 이런 얘기를 시작하니 이야기가 시시해지네. 나는 얼른 그런 것에서 해방되고 싶어. 물론 당구에서 말이지만."

마지막은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 기사 내용은 남자와 함께 당당하게 싸우는 여성 허슬러가 될 것이다. 다쿠라 마사코가 보면 이런 기사가 제일 문제라고 하겠지. 

 

- 데쓰로는 집 근처까지 와서 단골 밥집에 들러 굴튀김 정식과 맥주를 주문했다. 최근 몇 개월이나 리사코가 만든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 "다른 사람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어엿한 인간이니까요. 장래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 "하지만 왠지 이건 다 아니다 싶었어요."

"뭐가 아닌데?"

"결국은 다,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고 마음대로 규정하고 자신과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남자가 무엇인지,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요."

"너는 가지고 있니?"

"일단은 있어요."

"들려줄래?"

"내게 남녀는 나 이외의 인간이에요. 다들 남자 아니면 여자로 나뉘어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나누는 것에 의미 같은 건 없어요." 

 

- "신경 쓰지 마세요. 죽고 싶었던 때는 많았지만, 정말 자살하려고 한 것은 한 번 뿐이었어요. 그때도 식칼 날이 무뎌서 실패했고."

담담한 말투였으나 모래가 내려 쌓이듯 데쓰로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무쓰미는 너무 떠들었다 싶었는지 벽시계를 봤다. 데쓰로도 따라서 보니 약속한 10분이 훨씬 지나 있었다.

 

- "내 생각이 짧았어." 미쓰키는 벗어버린 옷을 내려다봤다. "내게는 아직 쓸 가면이 있었어. 여자가 되어버리면 주위가 받아들여주지."

"하지만 자신을 속이면 소용없을 것 같은데."

미쓰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비겁했어."

 

- "리사코가 QB와 사귄다는 게 알려졌을 때는 모두의 부러움을 샀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이렇게 티격태격하다니."

 

- 하지만 하야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마음을 리사코에게 알리지 않았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한다며 로얄 코펜하겐 찻잔을 선물했다. 그것은 지금 장식장 안에 놓여 있다. 상류계급의 손님이 오면 쓰자, 리사코는 장난처럼 그렇게 말했다.

 

- "하게 둬. 요리는 좀 자신 있거든."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데쓰로의 말에 채소를 썰던 미쓰키가 칼질을 멈추고 말했다. "그 사람이 그래?"

"그렇지 뭐."

 

- "한심한 고민?"

"남자나 여자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했나 봐. 그런 것을 초월해 사는 사람도 있는데."

스에나가 무쓰미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냥 장단을 맞출 수는 없어 침묵을 지키자 미쓰키가 돌아보며 웃고는 말했다. "오늘 밤은 좀 마시고 싶네. 같이 마셔줄래?"

"오케이." 잔을 들었다. 

   

- "이제 어쩔 셈이야?"

데쓰로는 주위를 둘러본 다음 대답했다. "물론 찾아내야지."

"어떻게?"

"어떻게든 할게.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나는 쿼터백이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여자애가 있어도 괜찮지 않냐는 식으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학생 중에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요란을 떠는 게 이상했죠. 그 후로도 아내는 여러 번 상의했는데 제대로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실 당시 제게 집은 그저 잠자는 곳이었습니다. 젊고 야심이 있어서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온갖 연구 모임과 공부 모임에서 활동했습니다.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날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바쁘다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 게 그리 비난받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일본인을 일개미라 부르던 시대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남자들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죠. 자신의 가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교육자라니." 
그는 한숨을 쉬고 찻잔을 봤다.
"맥주라도 마실까요? 목이 좀 마르네요."

 

- "존 머니라는 사람을 압니까?"

"존 머니요? 모릅니다."

"성의 자기의식을 출생 후 환경 등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일테면 남자애라도 여자애로 키우면 자신을 여자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 "성 의식을 조종하려 한 것은 마찬가집니다. 나는 요즘도 종종 두려워집니다. 내가 가르쳐온 많은 아이에게 미쓰키에게 한 것과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도 없지만."

 

- "그 애는 계속 연기한 겁니다. 우리 부부는 그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아무 말도 안 했고요. 연기든 뭐든 여자처럼 있어주기만 하면 좋겠다는 게 본심이었죠. 그러다가 그게 연기가 아닌 날이 오면 좋겠다고 기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날은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 "미쓰키는 말이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인형 같은 얼굴이었죠. 표정이라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인형이 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둘의 얘기가 살짝 달랐어요." 가오리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떻게요?" 데쓰로가 물었다.

"뭐랄까, 사랑하는 방식이..." 그녀는 적절한 표현을 고르지 못해 곤란해했다. 그러자 리사코가 말했다.

"친구는 여자끼리의 사랑이었는데 가오리 씨는 달랐군요."

"맞아요. 그거예요."

 

- 처음에 부모는 그녀의 고백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남성이 되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계속된 딸의 주장을 듣다 보니 그런 뜻이 아님을 깨달았다.

 

- "이면의 이면은 표면... 인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게 뭐야?"

"아니야. 생각하다 보니 이상해서. 가령 사에키 가오리가 동성애자였다면 마음은 남자이니 남자를 사랑했을 거야. 하지만 외모가 여성인 사람이 남자를 좋아하는 거니까 사회에서는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졌겠지. 동반 자살에 이르게 된 두 사람의 고민은 저마다 다르고 심각했어.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가지 고민을 다 가지고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어. 그러니까 이면의 이면은 표면이라고."

"여자는 남자의 이면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남자가 여자의 이면이어도."

"그런 말이 아니야. 남자와 여자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라는 거지?"

"아니야?"

"나는 아닌 것 같아.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고 할까?"

 

-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남극과 북극 같다고 했어."

 

- "이렇게 마음을 연 것을 보면 사진작가를 정말 많이 신뢰하나 봐요. 아니, 신뢰만으로는 부족해요. 거의 연애 감정에 가까운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죠. 그래서 여성 사진작가라는 말을 듣고 이해가 됐어요. 이 사람은 그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군요."

아이카와의 통찰력에 데쓰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 "역시 마음은 남자란 말인가요?"

"남자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동시에 여성이기도 하죠. 이 초연한 표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남자이자 여자이기도 하다?"

"제 추측입니다. 하지만 맞을 거라 자신해요."

"무슨 소립니까? 이 사람은 자기 마음이 남자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본인이 자신의 마음을 모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우리 같은 인간은 더 그래요." 

 

- "당신은 아까, 평범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나 물어볼게요. 평범한 여성이란 어떤 여성인가요?"

"그야 육체가 여성이고 마음도 여성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육체가 여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염색체가 XX라고 정의할 수 있죠. 실제로는 예외도 있는데 그건 일단 보류하죠. 다음으로 마음이 여성인 것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걸까요?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걸까요? 로봇보다 인형을 좋아하고, 야구모자보다 리본을 다는 걸 좋아하는 걸까요?"

"그런 게 단순히 환경이나 관습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여성적인 성격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 "인간의 특성에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럼 질문할게요. 당신이 말하는 평범한 여성이란 마음이 100퍼센트 여성적인 것만으로 채워진 사람일까요? 남성적인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실격인가요?"

"아뇨. 그렇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여성적인 부분이 많은 사람을 일반적으로..."

"많은지 적은지는 너무나 정성적이면서 주관적이에요.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결정하죠?"

 

- "만약 취재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기묘한 질문이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일단 이런 가게에 와서..."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러면 취재 대상을 쉽게 찾겠죠. 우리는 비슷한 사람끼리 연결되어 있으니 비슷한 고민을 지닌 인간을 덩굴처럼 낚을 수 있죠. 그러나 그런 방법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그런 식으로 취재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벽을 깬 사람들뿐입니다. 이곳에는 자주 새로운 사람들이 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사실은 남성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벽을 하나 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남성으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또한 벽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가게에 나와 손님을 상대할 때도 극복해야 할 게 있죠. 게다가,"

아이카와는 검지를 세웠다.

"취재에 응하려 해도 스스로 젊어져야 하는 부분이 있죠.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런 여러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목소리에 불과해요. 최근에는 그런 종류의 논픽션이 많이 나왔는데, 모두 강한 사람들의 모습만 그려져 있어요. 마치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는 모두 정신력이 강한 사람인 것처럼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첫 번째 벽을 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 "뫼비우스의 띠를 아세요?"

"네." 데쓰로는 당황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카와는 손에 든 종이띠를 그에게 내밀었다. 만들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의 앞뒤와 같아요."

"무슨 뜻이죠?"

"일반적인 종이의 경우 뒤는 언제나 뒤죠. 앞은 영원히 앞이고요. 양쪽이 만날 일도 없어요. 하지만 뫼비우스 띠는 앞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면 어느새 뒤가 나와요. 즉, 양쪽은 연결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뫼비우스 띠 위에 있어요. 완전한 남자도, 완전한 여자도 없어요. 또 각자가 지닌 뫼비우스 띠도 하나가 아니에요. 어떤 부분은 남성적이지만, 다른 부분은 여성적인 것이 평범한 인간이에요. 당신 역시 여성적인 부분이 얼마든지 있어요. 트렌스젠더라 해도 똑같지는 않아요. 트랜스섹슈얼도 다양하고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 사진 속 인물도 육체는 여자인데 마음은 남자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다 담을 수 없어요. 내가 그러하듯."

아이카와는 담담하게 말하고 반응을 살피듯 데쓰로를 바라봤다. 그 눈에서 흔들림 없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제까지 극복해 온 고뇌, 맛본 굴욕의 크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 "오히려 치료해야 하는 건 소수를 배제하려는 사회죠."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수술도 호르몬 요법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하지만 무리일 수도 있죠."

 

-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배제하려 하죠. 아무리 성정체성장애라는 단어가 부각되어도 변하는 것은 없어요.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우리 마음은 전해지지 않을 거예요. 짝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죠."

 

- "북극과 남극이라는 비유도 나쁘진 않지만, 나는 아무래도 뫼비우스 띠가 더 정확한 것 같네요. 남녀는 이어져 있으나 어디선가 반드시 뒤틀려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 "잠깐만 기다려. 당신은 한가하니까 여기까지 왔겠으나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기다리는 게 싫으면 돌아가."

"아뇨.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언론을 싫어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믿지 않는 거야. 내가 뭐라 하든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 안에 가둬버린다고.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말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아."

"잘 알겠습니다."

 

- 혈액형 성격 진단을 믿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은 사람은 A, B, O, AB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일상에서 혈액형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혈액형이 달라도 인간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실은 네 종류만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성염색체에 사로잡혀 있을까. XX든 XY든 혹은 그 이외의 것이든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 

 

- "그다지 자신 있는 작품은 아닌데 이야기가 쉬워서 그런지 제일 반응이 좋아."

"어떻게 끝나나요?"

"그걸 알고 싶으면 연극을 보러 와야지."

 

- "왜 비밀로 하는 거죠?"

"그것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니까. 지금은 아직 일러."

 

- "나도. 모두 그런 사고방식을 지니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리사코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더니 입술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당신은 아마도 무리겠지."

"왜?" 욱해서 물었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잖아.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라고 해야 하나?"

"그건 아니야. 나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게 바로 남녀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야. 똑같이 생각하면 애당초 차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지."

"그렇게 말해도 현실적으로 차이가 있잖아. 그 차이에 따라 행동하는 게 그렇게 나빠?"

"니쁘다는 말이 아니야. 당신은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거지." 

 

- "하지만 말이야." 하야타는 버번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목소리로 나온 것만이 말은 아니지."

 

- 노즈에 마키코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미소가 비디오의 멈춤 버튼을 눌렀을 때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고 그녀는 곧 표정을 되찾았다.

 

- "카스트라토라니, 그 카스트라토?!"

 

- "그거, 잘 생각해 보면 아주 힘든 일이야. 보라고. 본래 자신의 과거를 전부 버려야 하잖아. 학력도 경력도 전부 백지로 만들어야 해. 그것만이 아니야. 과거의 지인도 친구도 가족도 친척도 다 잃고 말아."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그녀는 양손을 아래로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손에 넣은 것을 우리 탓에 잃으면 너무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잃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히우라를 찾고 싶을 뿐이야."

 

- "감사보다는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아요? 아니면 죽을 때까지 나를 그 세계에 들여놓지 않을 건가요?"

 

- "그야, 더는 진상에 다가가는 게 무서웠으니까."

 

- "알고 있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이 말해주기를 내내 기다렸지. 그때까지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어."

"그랬던 거구나."

 

- "우정 때문에?"

"그게 아니야.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원망하지 않는 것으로 우월감과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고?"

"참, 말 얄밉게 한다."

"말해야 했다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그렇게 해서 이겼다고 해도 내 실력이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데쓰로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해 왔다. 위로해 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당신과의 결혼을 보류해야 했어. 꿈을 버리는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는 상대와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네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리사코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 얘기해 주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지 않으니까 우리 생활이 불안해진 거야. 결국은 당신이 내게 원한 것은 마음을 허락한 상대도 아니고 좋은 파트너도 아니었어. 당신에게 아내는 이런 것, 엄마는 이런 것이라는 정의가 있고 그에 나를 맞추었을 뿐이지. 그래서 내 마음에 그런 대못을 박으면서 망설임이 없었어."

"대못?"

"아이 말이야."

 

- 그 말에는 강하게 반론할 수 없다. 임신으로 그녀를 집에 묶어두려 한 것은 사실이다.

 

- 그렇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 "여러모로 미안했어."

"이제 됐어.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야. 게다가 이제 다 끝났으니까."

 

- "이혼 원인이 뭐냐니, 용케 그런 걸 물어보네."

대화를 들었는지 리사코가 뒤에서 말했다.

"비상사태야. 예의를 차릴 때가 아니라고."

"나카오가 본가에 미주알고주알 보고했을 것 같지 않아."

"그야 30대니까."

"그게 아니라 그는 부모와 선을 긋고 사는 면이 있거든."

 

- "아아. 그런 거였군..."

나카오는 예의 바르고 마음이 넓어 누가 실수해도 절대 나무라지 않는 남자였다.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컸으리라고 이제까지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구나. 친어머니가 어릴 때 집을 나가고 새어머니와 빨리 친해져야 해서 온갖 신경을 쓴 것이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그건 그렇고 졸업하고 10년이 지나서야 그의 처지를 알다니, 우리들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 "아니, 나도 방해하려는 건 아니야."

"알아. 하지만 세상에는 선의로 행동했는데 끝내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리는 일도 종종 있어. 너도 알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 "가끔 자신은 쉬메일에게 절대 속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과는 달라. 그런 녀석은 그저 그때까지 진짜를 보지 못했을 뿐이야. 완벽하게 변신한 사람도 있으니까."

 

- "완벽해서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모르니까 없다고 생각하지. 바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나카오는 그런 존재를 알아차리고 간파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대."

 

- "그래서 나도 요즘 가끔 생각해. 나카오가 했던 말을. 단순히 사물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보이게 한 것뿐이지, 내용은 하나도 좋아진 게 없지 않나, 하고 말이야."

 

- "앞서 가지 마. 당장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일단 내가 나갈게. 그게 다야."

"그게 다라니..."

"나, 반성해. 결혼에 관한 사고방식이 잘못돼 있었어. 서로 좋아하고 같이 있을 때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어. 더 많은 각오가 필요했어. 그야말로 목숨을 건 각오가."

 

- "이런저런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론이지. 반론이라도 있어?" 리사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론이라." 이런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해 봤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

리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맞혔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본심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녀의 제안에 찬성했다. 함께 생활하는 게 숨 막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부엌으로 가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때 설거지한 식기 가운데 찻잔 두 개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리사코가 갑자기 나가겠다고 한 이유를 생각했다. 

 

- "순간 의심했어. 설마 내 결심을 알고 일부러 안 던졌나 싶어서. 그럴 리 없지만."

"만약 그 결심을 알았더라도 봤으면 던졌을 거야. 틀림없이."

"그랬겠지."

 

- 데쓰로는 아주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비극적인 선수로 생각했다. 동료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며 사고를 숨기고 그 탓에 지고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청승을 떨었을 뿐이다. 멋대로 도취한 자신을 많은 동료가 지켜준 것이다. 

 

- 리사코가 '남자의 세계'라는 말을 끔찍이 싫어한 이유도 지금은 잘 안다. 그것은 자기애에 불과하다. 

"나 혼자 영웅 흉내를 내고 있었구나."

"그렇게 기죽지 마라. 그게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하잖아."

 

- "거기까지 얘기하라고? 너는 카드를 한 장도 안 꺼내고?" 데쓰로는 시커먼 커피에 우유를 넣고 저었다.

하야타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리고 몸을 젖혔다. 천장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계산이 오갈 것이다. 거기에 데쓰로가 왕년의 전우였다는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 "그렇게 놀라지 마. QB."

"히우라, 너 어떻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네가 호출했잖아. 나는 관람차로 끝내고 싶었는데."

 

- "응. 어차피 가오리 씨가 나타나면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게 하려는 거였잖아. 그러면 이게 더 간단하지."

 

- "어떤 친구? 지금 전화해 볼래? 휴대전화는 가지고 있겠지?"

리사코는 무표정이었다.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며 데쓰로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라고 생각해?"

"그걸 맞추면 다 얘기할래?"

"생각해 볼게."

"생각할 여유는 없어."

 

- "그 로열 코펜하겐을 받았을 때 네가 말했잖아. 웬만한 상류층 손님이 아니면 안 쓰겠다고."

 

- 다카시로 집안의 별장은 타일을 붙인 사각형 건물이었다. 세타가야의 집과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비슷해, 다카시로 집안사람들은 장소가 바뀌어도 생활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모양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길가에 오래된 쌀가게가 있어서 그 앞에 차를 세웠다. 배달이 많은 일이니까 현지 지리에 밝을 것이다. 

 

- "좀 그러네."

드디어 돌계단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두세 계단 정도 남았을 때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웰컴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운 친구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어릴 때 어머니가 내게 털어놓았어. 믿을 수 없었지. 처음에는 나를 놀리는 줄 알았어."

"무리도 아니지." 데쓰로는 동의했다.

"하지만 울면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어. 충격이었지. 하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아버지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아버지는 알고도 결혼했다고?"

"어머니 말로는 그 사실을 고백한 건 나를 낳고 난 다음이래.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거라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었어. 털어놓았을 때 아버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니까."

"대단한 분이셨네."

"글쎄, 정말 그럴까?"

 

- "그냥 무관심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 어쨌든 그건 그렇고 어머니의 고백을 들은 이후 내 남녀관은 완전히 변했어. 당연하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여성이 실은 남자라니까."

 

- "그런 대단한 게 아니야. 그저 평범한 사람과 달리 외모와 내면은 다르다는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버릇이 있을 뿐이야. 계속 그렇게 사니까 본질적인 부분을 조금쯤 알게 된 거겠지."

 

- "양면성이 있다는 말이야?"

 

- "그런 표현으로는 미쓰키의 복잡한 마음을 제대로 담을 수 없어. 알기 쉽게 말하자면 이래. 남자를 검은 돌, 여자를 흰 돌이라고 하자. 미쓰키는 회색 돌이야. 둘의 요소를 다 지니고 있지. 게다가 50퍼센트씩. 하지만 어느 쪽에도 포함되진 않아. 원래 모든 인간이 완전한 검은색도 하얀색도 아니야.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변화하는 그러데이션 속 어딘가에 있지. 미쓰키는 그 딱 중앙에 있고."

 

- "인간의 뇌는 아마도 불안정할 거야. 그날 컨디션이나 주위 환경에 따라 그러데이션의 위치가 조금씩 흔들리지. 나나 너도 날에 따라 여자 쪽으로 기울기도 해. 이때 95퍼센트 검은색이 90퍼센트 검은색이 되었다고 해도 영향은 별로 없어. 하지만 50퍼센트 검은색이 45퍼센트가 되면 얘기가 달라져. 하얀색이 10퍼센트나 많아지니까."

 

- "미쓰키 본인도 아마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있을 거야."

 

- "모르고 고통스러워하지. 자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여자라는 것에 위화감을 느껴 사실은 남자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직접 남자로 살아보니 역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겠지.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남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고 있어."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남자라고 단언했어."

"그렇게 믿으려 하지. 자신조차도 속인 결과야."

 

- '단순히 사물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보이게 할 뿐'이라는 사가의 말이 데쓰로의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 말의 뜻이 이런 것이었구나.

 

- "우리가 해온 일이 도대체 뭔가 싶어. 미쓰키만이 아니야. 다테이시 스구루나 사에키 가오리도 마찬가지야. 정말 그렇게 한 게 옳았을까. 본질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먼, 무의미한 짓을 한 것 같아."

"설마 그 책임을 지겠다는 건 아니지?"

"책임을 지다니, 내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비밀을 지키는 것뿐이야. 목숨을 걸고서라도."

 

- "그래서 나를 불렀어? 설마 히우라를 어딘가로 데려가달라고?"

"안 될까?"

"안 될 건 없지만 조건이 있어. 너도 같이 가는 거야."

 

- "미쓰키가 그러더라. QB는 여전히 사령탑이라고."

"사령탑인 척한다는 소리겠지."

 

- "니시와키, 그때도 즐거웠어. 왜 인간은 변하고 마는 걸까? 게다가 나쁜 쪽으로. 성공하면 오만해지고, 실패하면 비굴해지지.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 "하지만 그건 자기만족이었고 현실 도피에 불과했어.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생각만 했던 때가 그리워."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 "히우라, 깼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쓰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가 목적을 달성한 것 같네."

 

- "얼른 가." 하야타는 데쓰로를 보지 않고 말했다.

 

- 그 탓에 얼굴 판별이 어려웠다. 

 

- 간자키 미쓰루의 이름으로 빌린 위클리 아파트에서는 사체와 일치하는 지문이 여럿 검출되었다.

 

- 엽서는 그린란드에서 보낸 것이었다. '안녕. 우리는 지금, 얼음의 세계에 와 있어요.' 그렇게 시작된 글이었다.

 

- "야, 그렇게 말하지 마. 상류계급에는 상류계급의 고통이 있는 법이야. 나카오는 그게 싫었겠지."

 

- "흠. 그러면 돌싱끼리 만나게 된 거구나. 둘 중 누가 고백했을까?"

"누구든 상관없잖아." 안자이가 마쓰자키의 등을 두드리고 그림엽서를 소중히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10여 년 넘게 품은 짝사랑이 이루어졌으니 행복하겠지. 지금은 일심동체처럼 느끼는 것 같더라. 녀석들이 행복하다면 우리의 공놀이도 의미가 있었던 셈이지." 

 

- 데쓰로는 안자이와 마쓰자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안자이는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 10여 년 넘게 품은 짝사랑. 정말 맞는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신이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짝사랑을 계속하고 있다. 

 

- "이것도 외국에서 왔어.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녀석 일도 참 힘들어."

 

- "자, 터치다운을 얻어 올게." 공항에서 그녀는 말했다.

"힘내."

"응. 최선을 다할 거야. 두고 봐." 그리고 말했다. "QB!"

두고 봐, QB라는 건가... 

데쓰로는 맥주를 다 들이켜고 초원을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 매년 11월 세 번째 금요일에는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마련된다. 데이토대학 미식축구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억을 나누는 것이다. 졸업한 지 10여 년이 흘러 3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이 시간만큼은 다시 20대로 돌아가 똑같은 화제로 서로를 놀리며 웃어댄다. 작년과 다름없는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쿼터백이었던 니시와키 데쓰로는 팀 매니저였던 히우라 미쓰키를 만나 놀라운 '비밀' 이야기를 듣는다. 


- 엄청난 비밀 고백에 이어진 살인사건. 동창의 놀라운 비밀을 놓고 과거 한 팀이었던 친구들은 저마다 고민에 빠진다. 눈앞의 적을 하나가 되어 쓰러뜨리던 동료들이 지금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다른 시점으로 일의 행보를 지켜보고 관여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진실 게임으로 빠져든다. 

 

- 1985년 학원 미스터리 <방과 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후 미스터리와 뜻밖의 진상을 둘러싼 작품을 써오며 야구(<마구>), 발레(<잠자는 숲>), 스키점프(<조인계획>) 등 다양한 소재에 도전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웃음의 요소를 듬뿍 담은 작품(<명탐정의 규칙>,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부터 인간의 어두운 일면이나 비정함으로 부조리한 운명을 이야기한 서스펜스(<백야행>, <환야>)까지 작풍의 폭도 매우 넓다. 어떤 장르를 선택하든, 아무리 특수한 세계를 다루든 미스터리의 정수는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 1999년 8월 26일부터 2000년 11월 23일까지 <주간문춘>에 연재한 <외사랑>은 이런 작가의 작품 세계 속에서 새로운 도전장을 던진 작품이다.  

 

- 작가는 SMAP의 <밤하늘 저편>을 듣다가 청춘의 잔상이 남은 30대 중반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써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치열하게 과거를 함께하며 서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 사이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저마다 처지가 달라지며 서로 다른 지점에 서는 상황을 바라만 봐야 하는 과정을 씁쓸하게 그린, 아픈 추억과 숨겨진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다.

 

-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빈치> 2001년 5월호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비밀>의 후속작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작가는 '외모와 내면의 차이'라는 키워드를 다시 한번 꺼내 들었는데, 이번에는 '아내와 딸' 대신 '남자와 여자'로 바꾸어 더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불변이라 여겨지는 성의 기준 사이를 오가는 인물을 중요한 위치에 배치해 스포츠 속의 젠더 문제를 비롯해 트랜스젠더, 반음양 등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사회의 인식이나 호적 등 법률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전하고 있다.

 

- 현재 발표되었다고 해도 여러 논의가 따랐을 주제를 2001년에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작가인지를 알 수 있다. 

 

- 특수한 주제 속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이 작가의 특기다. 젠더라는, 조금은 복잡한 개념을 다루면서도 우리 내면에 있는 남녀의 요소, 이른바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사회적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어른과 아이, 인종, 민족, 국가 사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에 여기서 던지는 작가의 질문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로 전환된다. 


-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싶은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으나 그 마음이 제대로 닿지 않아 안타까워하며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짝사랑을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수많은 반전과 놀라운 진실을 대면하며 숨 가쁘게 작품을 따라가다가 문득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이 작품이 우리의 이런 보편적인 쓸쓸함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민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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