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니시자와 야스히코] 인격전이의 살인

일루젼 2023. 8. 1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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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이하윤
출판 : 북로드
출간 : 2016.05.01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된 책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발행연도는 2016년이었다. 아마 표지 디자인과 질감 때문에 더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2016년도 이미 7년 전이다)

 

어떤 느낌을 설정하고 싶었는지는 알 것 같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디스트릭트 9>이나 '51 구역' 같은 미스터리 하면서도 서구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주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격리공간 자체는 국가적 특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핵심 인물이었던 '재클린 터클'마저 전형적인 일본 여성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등 캐릭터들의 붕괴가 심하다. '인격전이'라는 설정상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게다가 주서술자가 되는 두 인물을 각각 깔끔한 영국식 영어,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한다고 설정해두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체감할 수 없었다. 원문에서도 해당 인물들의 대사가 일본어로 서술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정 인물을 설명된 대로의 이미지로 상상하기가 무척 힘들다.

 

몇 가지 의문점들도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쉘터(체임버)'에 동시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 경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 시점의 인물배치에 따라 전이가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공개된 배치도를 보면 입장 순서와 신체적 위치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해당 순서로 들어갔다고 가정한다면 재클린을 안고 있었던 에리오와 재클린의 사이에 랜디가 위치하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에리오의 서술을 확인하면 재클린을 내려놓으면서 바로 '스크린'이 발동하는 것을 느꼈으므로 그 사이에 랜디가 들어왔을 수는 없다.

(전제 조건으로 에리오는 언어적 소통이 원활치 않았던 이들보다 느렸어야 하고, 아무 부상이 없었던 랜디는 에리오보다도 늦었어야 한다. 만약 이 설정을 살리고 싶었다면 '자물쇠를 자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생각보다 랜디가 멀리 있었다'만으로는 부족하다. 말 그대로 이 가게는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도 꽉 찰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또한 3인칭 관찰자보다는 1인칭-전지적에 가까운 시점이라 다른 인물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거의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공개한 배치도만으로 '본격'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사망 순서 또한 인격전이 순서만으로는 검증할 수 없다. 

 

아직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기 직전에 완독한 책이 <외사랑>인데, 일본 저자의 작품을 연이어 읽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 소설들은 대개 섬세하게 짜여진 판과 어떻게든 납득이 되는 설명을 무척 중요시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읽기가 편하다. 수동적으로 따라가며 읽기만 해도 결국은 다 설명을 해주기 때문이다. 암시적이고 모호하게 남겨두는 결말은 무척 드물다. 추격전이 벌어지더라도 추격 자체의 묘미보다는 그 추격이 일어나게 되기까지 각 인물들과 상황들을 복잡하게 조합해 설명하는 형태가 주류가 되는데, 최종 설명을 생략하고 과감하게 열린 결말을 추구해 본다면 어떨까 싶을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느꼈지만, 일본 작가들에게는 <인격전이의 살인>이 그런 소설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박사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며 완전한 설명을 하지 않은 점을 거듭 '놀랍다'고 평한다. 

 

음... 완전한 스포가 될 것 같으니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멈춰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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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클린이 다른 인격이었더라면 훨씬 만족도가 높았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성별을 구분하는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점이 아무런 복선이 되지 못한다. 도중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는 하니 또한 맥거핀으로 끝나고 만다.

 

차라리 다른 인격이라고 본다면 끝내 손을 뗀다거나, 관계성의 전환을 제시하는 재클린의 모습이 훨씬 위화감 없이 잘 설명될 것 같다. 애초에 모두가 그날 아야를 처음 만났고, 이전에도 어떠한 접접도 없었다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알랭이었고, 그에게 맞춰주느라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르지 않나? 

 

오히려 이런 트릭을 구사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때 앞서 등장한 작은 단서들이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누구'였는지를 밝히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사건은 모두 종결되었고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데.

 

해서 <인격전이의 살인>은 내가 수정한 결론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끝.

 


   

 

 

 

- 마흔 살 안팎으로 보이는 나이, 모래색 곱슬머리, 레이저라도 쏠듯한 날카로운 눈빛, 그 자체로 무거운 문이라도 열 수 있을 것 같은 매부리코, 축구 선수도 곁에 서면 파리해 보일 정도로 탄탄한 거구에 드라큘라 역할에 딱 어울릴 법한 입체적이고 박력 있는 얼굴. 우람한 외모를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 같은, 결코 사회심리학자로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 사실 아크로이드 박사는 정신과 의사가 되거나 아동상담센터를 열겠다는 꿈을 가지고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그 모든 일이 괴물 같은 용모 때문에 좌절되었다.

 

- 아직 서른 살이 되지 않은 듯한 백인 남자는 여자들처럼 찰랑거리는 금발을 흩날리고 있었다. 처진 눈에 늘 경박스러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그는 이목구비가 잘생겼는데도 한 끗 차이로 사내답지 못한 용모였다. 그 역시 레슬러처럼 억센 체구였지만, 아크로이드 박사 옆에 있으면 표정의 무게부터 차이가 났다. 

 

-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크로이드 박사 뒤를 황급히 쫓아가는 데이브의 얼굴에서 경박한 웃음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똥구멍을 '청소'당하는 것쯤이야 일상이잖습니까." 
"한심하기는. 자네가 내 아들이라면 입을 비누로 빨아줬을 거야. 그게 요즘 젊은것들 풍조인가? 다른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똥구멍이라는 말을 쓰는 거?" 

 

- "다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그럼 핀홀스터 양은 박사님의 죽마고우입니까?"
"알았네, 알았어. 나도 앞으로 그녀를 진저라고 부르지 않겠네.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건 딱 하나야. 왜 여기서 나간 지 하루밖에 안 된 내가 오늘 또 저런 검사를 받아야만 하느냐 말이지. 물론 업무상 엄격하게 체크할 필요는 있겠지. 하지만 좀 더 융통성 있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융통성 있게?" 
"융통성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니까 얼굴을 아는 사람은 검사 항목 몇 개를 제외한다든가."

"그랬다간 곧바로 여기가 스파이 소굴이 될걸요. 잊으셨습니까? 저렇게 체크를 하는데도 작년에 어느 나라의 첩보원이 잠입했잖아요. 카메라까지 숨겨서."
"그건 나도 알아. 그 성가신 놈. KGB인 줄 알았더니 M16 이중스파이였다는."
"M16이 아니라, SIS입니다."
"그게 그거지." 

"같은 영국이라도..." 군사첩보부와 비밀정보국의 차이를 설명하려던 데이브는 생각을 바꿨다. 작년에도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똑같은 설명을 줄줄이 늘어놨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뭐, 비슷한 기관이긴 하죠."

 

- 피험자에게서 중대한 사항이 발견되었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지만 보나 마나 별것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단한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크로이드 박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이 '세컨드 시티'의 기능은 애초에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결론이 난 사항이었다. 그런데도 미합중국쯤 되는 나라가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세컨드 시티'의 기능을 군사 · 첩보 활동에 이용할 수 있다고 아직도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 그래, 이것도 전부 음모다. 원래대로 하면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지금 아크로이드 박사는 특기인 치킨 요리를 만드느라 바빠야 했다. 요리하는 틈틈이 맥주를 마시고 어린 조카들과 함께 모노폴리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 '스위치 서클' 지하에 있는 그 '체임버(chamber)'는 이름 그대로 원형이다. 약 80평방미터쯤 되는 이곳은 물론 단순한 원형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인류의 예지를 초월한 신비로운 '역장(力場)'이 지배하는 '체임버'다. 언제부터 이 캘리포니아 주 농경지 밑에 있었는지, 그리고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외계인이리라. 이 프로젝트 관련자들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암묵적 합의가 바로 이것이었다.

 

- 실제로 외계인 같은 엉뚱하고도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면 이 '체임버'의 수수께끼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인격과 육체를 분리해서 바꿔버리는 기능의 수수께끼 말이다.  

 

- 예를 들어 A라는 백인과 B라는 흑인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문제의 '체임버'에 들어간다. 그러면 A와 B는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동으로 '스플릿 스크린(split screen)'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것에 막혀 방 안쪽과 입구 쪽으로 갈라진다. 갈라졌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인격이 바뀌어 있다. 즉, A라는 백인 육체에는 B라는 흑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고, 반대로 B라는 흑인의 몸에는 A라는 백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 물론 악용한다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인격 교환의 비밀이 절대 다른 나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특히 공산주의 모 대국에는 오직 세계의 경찰, 우리의 양심적인 미합중국만이 이 기능을 장악하고 전 세계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라도.

- 이것이 WASP 제국 신보수주의자들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이 기능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성과 기술을 가진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라고, 모럴머조리티들이 엉뚱한 자만에 빠지는 것도 자유다. 또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소련의 서기장 인격과 CIA 스파이의 인격을 교환하는 금지된 방법을 미국이 쓴다고 해도, 그것은 '악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이용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자유다. 

 

- 그러나 아크로이드 박사는 이렇게 우스운 이야기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상이 다른 적국에게 이 비밀을 지켜봐야 아무 의미 없다. 심지어 전 세계에 알려서 화젯거리로 만들어도 전혀 문제없다. 어차피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인격 교환의 비밀을 밝혀내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소련의 과학자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밀로 한다 해도 언젠가는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게 마련이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 아닌가.

 

- 이처럼 아크로이드 박사가 CIA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매형의 백부 되는 사람이 현재 CIA 국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희화적인 의미에서 아메리칸드림 신봉자였다. 남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오직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성공이자 출세라고 믿었다. 실제로 CIA를 나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 물론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대놓고 하버드대학교 외에는 대학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대학을 나온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상관없다. 다만 이런 어리석은 프로젝트에 강제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아크로이드 박사는 말하고 싶었다. 지방의 작은 대학 강사를 하며 유유자적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데, 출세 못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척에게 큰일을 주었답시고, 마치 은혜라도 베푼 사람처럼 구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A라는 백인과 B라는 흑인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두 사람 사이에 일단 인격 교환이 '성립'되었다고 하자. 즉, '육체A'(=정신B)와 '육체B'(=정신A) 상태가 되면 둘은 두 번 다시 원래 육체에 '정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A'(=정신B), '육체B'(=정신A) 상태가 '고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비극적(때로는 희극적인) 상황을 구제할 방법이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 아크로이드 박사 팀이 '매스커레이드(masquerade)'라고 이름 붙인 이 현상은 피험자 두 사람 중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문제는 이 '매스커레이드'가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지, 그 주기와 법칙성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하루 만에 바뀌기도 하고, 반년이나 유지될 때도 있다. 
 

- "무슨 뜻이긴 무슨 뜻이야. 이게 다 그저 해프닝일 뿐이라는 거지.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돼. 육체와 인격이 분리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착각이야."
“현대 과학으로는 무리라는 뜻인가요?"
"미래 과학도 마찬가지야."
"그건 모르죠. 과학은 진보하니까요."

- "자네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고 있네. 전공은?"
"정신분석학입니다. 프로이트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죠."
"프로이디안(Freudian) 말인가?"
"그런 셈이죠. 융보다는 납득할 만하니까요."
"그렇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자네는 명백하게 자신의 입장을 착각하고 있어. 하필 자신의 연구 대상을 과학적으로 해명, 혹은 체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지." 

 

- "원점으로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인격과 육체를 분리하는 작업은 바꿔 말하면 인격을 실체화하는 기술이 존재한다는 뜻이야. 그렇지 않으면 인격 교환은 불가능하니까. 알았나? 이게 문제야. 기본적인 복습을 해보면, 심리학에서 항상 대립하는 두 가지 흐름이 뭐지?" 
"실체론과..." 박사가 어떤 논리로 자신을 무너뜨리려는지 이미 파악한 듯 진저는 울상을 지었다. "반응론입니다."

 

- "좋아. 실체론의 대표적인 예는 뭐지?" 
"관념은 실체이며 정신은 용기라고 하는, 영국 연합심리학입니다."
"반응론은 어떤가?"
"F. 브렌타노의 작용심리학, W. 딜타이의 양해심리학, 흔히 말하는 신 프로이트 학파의 K. 호나이와 E. 프롬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역시 프로이디안답군. 반응론은 구체적인 이름까지 술술 나오는 것을 보니." 

 

- "아주 흥미로운 얘기로군. 그럼 자네가 실체론에 찬동할 수 없는 이유를 간략하게 말해보게."
"실체론은 결국 생리학적 실체라는 것을 내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액체 성분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그 사람의 기질이 결정된다. 가령 우울한 기질인 사람의 경우 멜랑콜리아라는 액체 성분이 많다고 주장하는 실체론적 심리학자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 실체론적 심리학이 갈 곳은 대뇌생리학, 신경생리학, 극단적으로는 베르니케의 뇌기능국재론 등입니다. 하지만 이들 학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생리학적인 접근으로 인간의 마음을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착오가 발생하는 거죠. 왜냐하면 결국 생리학이 보강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특정 자극으로 결정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자기 존재를 단순히 조건반응체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렇게 해서는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 "즉 인간의 자아는 실체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한 과학적으로 체계화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융의 학설에 찬동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
"네. 융은 '아키타이프(archetype, 원형)'가 집단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으로 봤어요. 즉, 무의식이라는 것을 실체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죠. 리비도를 오르곤 에너지라고 부르면서 실제로 집적기까지 고안해서 대기 중에 있는 양을 측정하려 한 W. 라이히와 다를 게 없죠." 


- "좋아, 자네는 실체론적 심리학을 부정하고 반응론을 지지하는군. 즉 인간의 행동 원리를 대인 관계에 따른 반응에서 찾고, 자기 존재가 여러 자아의 상호 인식에 의해 성립한다. 그게 자네가 견지하는 입장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묻겠네. 그게 과학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요. 형이상학의 일종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학은 아닙니다."

"그렇지. 어때? 결론이 나온 것 같은데. 우리는 인격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포착할 기술이 없어. 그런데 이 '세컨드 시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정신을 실체화, 즉 과학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구현된 기술이지. 형이상학으로 접근하는 기술밖에 없는 우리가 그런 물건을 무슨 수로 해명하겠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물과 기름이잖아. 따져보면 '세컨드 시티' 프로젝트는 공기의 오염을 천으로 닦으려고 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핵심을 벗어난 시도야. 처음부터 불가능한 논의였다고.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거야. 인류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진보하든 상관없어. 처음부터 다루는 차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까."  

 

- "박사님과 핀홀스터 양이 반응론 파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쪽 세계관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인간관이라고 해야 하나, 그쪽이 옳고 실체론이 틀렸다고 확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인격이나 자기 존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반응론이 옳다는 건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상관없네, 데이브. 하지만 딱 한 가지, 내가 실체론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근거를 들어보지. 그건 말이야, 인간이라는 생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실체로 보는 데는 아무런 저항이 없는데, 스스로의 마음을 실체로 보는 것은 부정한다는 사실이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길을 걷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자네에게 갑자기 소리쳤다고 하지, 아무 이유 없이 마구 화를 내는 거야. 자, 이때 자네라면 어떻겠나?"
"당황하겠죠."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겠죠. 어지간히 다혈질이라는 생각도 하고." 

 

- "그럼 다음에는 이런 가정을 해보세. 자네는 지금 하루를 끔찍하게 보내고 심신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어. 신경도 바스라지기 직전이지. 어젯밤에도 잠을 제대로 못 잤고, 직장에서는 안 좋은 일뿐이었어. 밥 먹을 틈도 없는 데다 아내하고는 냉전 중이지. 딸은 불량한 친구들과 번화가를 쏘다니고 있고."
"제 딸은 아직 두 살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해보자는 거야. 자네는 이미 임계점에 달해 있어. 눈앞을 가로질러 가는 검은 고양이를 보기만 해도 인내심이 뚝 끊어질 것 같다 이 말이야. 그러던 중 눈앞에 모르는 사람이 지나갔지. 우연히 그는 자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상사랑 무척 닮았어.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폭발하고 만 자네는 그 모르는 사람에게 마구 욕을 퍼붓고 말았지." 

"제가 그런 짓을 할까요?"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나?"
"그야 물론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바로 그거야.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괴상한 사람으로 보여도 그 행동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하지만 그런 복잡한 심리 과정을 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해. 남은커녕 때로는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아무튼 지금 자네에게 화풀이를 당한 사람이 자네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확실해. 이상한 인간도 다 보네. 어지간히 다혈질인 모양이야, 하고."
 
- "자네는 자신에게 소리친 사람을 어지간히 다혈질이라고 해석했어.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라고 말이야. 즉, 실체론을 채택한 거지. 반대로 본의 아니게 모르는 사람에게 소리를 질러버린 자신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 어리석은 짓을 했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불행하게도 복잡한 문제들이 쌓이다 보니, 하고 자기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해석하는 거지. 즉 반응론을 채택한 거야." 
"비유는 이해하겠네요. 자기 마음은 반응론적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사람 마음은 실체론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군요.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 하시고 싶으신 거죠?"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눈이라는 것은 사실 아까 핀홀스터 양이 잠깐 언급한 히포크라테스 시절에 비해 별로 진보하지 않았어. 확실히 현대에서 화난 사람을 가리켜 분노의 체액 성분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주장하면 아주 비과학적이라고 비웃음을 사겠지. 하지만 말이야, 체액 성분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실체론적으로 파악해 버리는 것이 우리 현실이야." 

- "자기 마음은 반응론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래. 그것도 학자가 말이야. 그게 바로 문제라고. 실체론적 심리학자 중 1명에게 물어본 적 있어. 당신은 자기 마음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느냐고. 자기 마음에도 일정 수준의 고정된 기질이라는 것이 있어서 정해진 자극에는 정해진 반응밖에 하지 않는다, 정말로 자기 존재를 일종의 조건반응체에 불과하다고 인식하느냐고 말이지."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렇다면 다행이지. 일관성이 있으니까. 문제는 다른 사람 마음은 얼마든지 객체화하면서 자기 마음만은 예외로 두는 자세야. 자기 자신만은 다르다는 듯이 말이지.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건 심리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야. 나는 실체론이 결국 학자들에게 신의 시점과 유사한 엉뚱한 특권 의식을 부여해 버리는 장애밖에 초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네, 핀홀스터 양."

 

- "외계인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가령 이 '세컨드 시티'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라고 하지. 그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과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원래 상호 인식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의 자아라는 것을 실체화하는 기술을 말이야. 그런 것은 외계인에게 맡겨놔야 돼. 우리가 손대서는 안 되는 거야." 
"우리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뜻인가요?"
"감당만 못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이런 환경에 있음으로써 자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게 더 걱정이야. 즉, 계속 그 '체임버'에서 교환되어 가는 인격을 지켜보는 사이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결국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리고 원래 부정했던 실체론적 심리학에 점점 중독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 "아까 핀홀스터 양하고 얘기했던 것 말입니다. 아무래도 박사님은 '세컨드 시티'의 기능이 원래 형이상학적 존재인 인간의 자아를 과학적으로 실체화하는 기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전제를 세우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것이 교환되려면 우선 그것이 실체화되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모든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정말 그럴까 싶어서요. 이 전제에 대해 박사님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놀랍습니다. 정말 이 전제에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의문의 여지가 있을 턱이 없지. 생각해 보게. 실체화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하나의 인격을 다른 몸에 이식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저야 전문적인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교환되기 전의 인격은 형이상학적인 거죠?"
"당연하지."
 
- "아닙니다. 그냥 이상한 생각을 해봤어요. 일단 실체화되었다면 그게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뭐?" 비웃으려던 아크로이드 박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보인다... 즉 실체화된 인격이 말인가?"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습니까? 물론 이건 문외한의 생각입니다만."

 

- 물론 '체임버'의 모니터 기록에 실체화된 인격이 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건 당연하다. 인격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 인간의 자아(인격)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실체화된다 해도 가시 상태가 될 리는 없다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눈에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느냐는 순수한, 어떤 면에서는 유치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 "눈에 보이지 않고 통상적인 시간과 공간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실체화'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요?"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실체화 같은 단계를 전혀 거치지 않고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차피 우리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라면요." 

 

- '교환' 시스템에서 자아의 실체화라는 수순이 불가결하다는 전제가 틀렸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몸서리칠 만큼 수치심이 몰려왔다. 진저에게 상처를 주었던 말들이 그저 생각이 모자란 것일 뿐 아니라 출발점부터 완전히 틀린 것이었던 셈이다. 그녀에게 실체론적 심리학자의 악영향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냐고 하다니.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 실체론에 필요 이상으로 현혹되어 있었던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단 말인가. 

 

- "무엇보다 위치가 안 좋아요. 영화관 바로 옆이잖아요.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영화관 안에서 가볍게 먹을 것이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겠죠. 쇼핑몰에는 카페테리아가 쓸어 담을 정도로 많으니까요."

 

- '정말 싫다. 왜, 왜 당신이란 사람은 늘 이런 식이야? 농담이랑 진담도 구분 못하고...'
농담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대꾸해 줄 걸 그랬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는 결단력 없는 남자라고 비난하더니, 막상 결단을 내리자 이번에는 농담도 구분 못하냐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경멸과 혐오에 찬 그녀 앞에서 그저 무방비하게 망연히 있을 뿐. 

 

- 어쩌면 그 남자도 알아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자신은 그저 미유키의 일인극에 놀아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녀가 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 그래서 아야는 더욱 우쭐했던 것이다. 이 가게에 있는 점원과 손님들에 대한 폭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이 극단적인 형태로 증폭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깔봄으로써 자신이 아주 잘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리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보통 사람들은 그런 폭언을 그녀처럼 당당하게 내뱉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  

 

- "잠깐만." 바비가 남부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 가게를 나가려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아이스티 값 두고 가."
"당연히..." 노래하듯 선율을 붙이면서 여자가 돌아왔다.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표정이었다. "주고 가야지. 얼마죠?"

"백 달러."
"백 달러면..." 어지간히 웃긴 모양인지 여자가 키득거렸다. 남자를 다룰 줄 아는 웃음이었다. "이 가게도 사겠네."

 

- "당신한테 거들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끼어들지 마. 성가시니까."
남부 남자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그처럼 차갑게 구는 여자가 있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워하던 남부 남자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의 표정이 떠올랐다. 바비와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욕망이 싹 가신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좋은 기회가 어디서 굴러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아주 음험한 눈빛이었다. 

 

- 귀찮게 하지 마라. 확실히 그런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녀를 쫓아다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러나 왠지 석연치 않았다. 쫓아다녔다고 하면 마치 내가 미유키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던 것 같다.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고 피해만 끼친 사람 같지 않은가. 스토커나 다름없이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랬던가. 

 

- 분명 그녀는 그렇게 암시했다. 이건 테스트라고, 당신이 내게 어울리는 남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테스트라고 말이다. 
아니, 역시 내가 오해한 것 같다. 그녀의 진의를 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미유키는 나의 행동력에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 나는 메시지를 잘못 읽은 것이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그건 말 그대로 안녕을 의미했다. 

 

- "음, 겨우 인연이 끝났나 했더니, 나 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박사님이라고 불린 거한은 투덜투덜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려는 선생님 같았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위압하는 자리에 익숙한 듯, 그 말씨와 태도 하나하나에서 마치 생선이 비늘을 두른 것처럼 자연스럽고 침착한 박력이 배어 나왔다.   

 

-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모두 죽었어. 적어도 사회적인 존재로서는 소멸하고 말았다는 거야. 원래의 삶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운명을 부디 잘 받아들이면 좋겠군."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인지, 문득 묘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딱 하나 있지 않은가? 원래의 나로 돌아갈 방법이. 
 

- 즉, '서클'의 멤버가 사망하면 그 '공석'을 건너뛰고 슬라이드 전이가 계속된다. 박사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 "민주주의는 무슨 얼어 죽을 민주주의, 엿이나 드시지. 안타깝게도 말이야, 이전 대선에서도 난 공화당 후보를 찍었다고."  

 

- 냉장고를 여는 듯한 소리가 라운지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까지 들렸다. 
"오, 미켈롭에 무스헤드까지. 꽤 좋은 맥주들을 채워놨구먼. 정부 기관 놈들 예상외로 보통내기가 아닌데. 오호, 게다가 샴페인까지 딱 준비해 뒀어." 

 

- "이후 여러분의 모든 생활을 미국 정부가 지원해 줄 거다.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 즉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는 몸이 되고 말았으니 당연한 조치지.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다. 6명 모두 반드시 함께 살 것.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 격리될 것. 안타깝게도 여러분에게 선택권은 없다."

말하자면 '유령'으로 어딘가 남모르는 곳에서 은둔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6명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CIA의 감시가 붙을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사태이니, 우리의 인권 따위는 발톱의 때만큼도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인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활할지, 예를 들어 주택 형태와 기후, 그 외의 환경적인 조건은 어느 정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에 불과하지만, 의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CIA 녀석들이 여기 다시 오기로 한 것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 그때까지 6명이 희망 사항을 정리해두라는 지시가 있었다. 우리 6명이 사회적으로 '말살'된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듯이. 적어도 그 전제하에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현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걸어온 삶과 가치관까지, 모든 것을 버리라고 강요한들 순순히 그럴 수 없었다. 

 

- 미국의 ELS 교육 방침은 정확한 읽기와 쓰기보다 학급 토론에 중점을 둔다. 실전 능력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주된 평가 방법은 얼마나 많이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성적인 일본인은 몹시 힘들게 마련이다. 나댄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내세우는 훈련이 먼저 요구된다. 그러나 착실한 사람일수록 이것이 어렵다. 정확한 발음, 정확한 문법으로 말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른 학생들이 발언권을 빼앗아 가버린다. 선생님은 일일이 구제해주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말하는 것이 점점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읽고 쓰기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으로 역효과를 낸다. 

 

- 정확한 읽기와 쓰기, 어휘 등에서 분명 몇 배 뒤처졌던 유럽계와 라틴계 학생들이 자기보다 높은 성적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로 자존심은 박살 나고 만다. 여기서 앞으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서라도 말을 많이 하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 이미 그 시점에서 첫 번째 난관을 돌파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말이다. 

 

- 그러나 방향 전환을 못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함정에 빠져버린다. 바로 자기기만이라는 이름의 덫이다. ELS는 내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해주지 않아, 공평하게 보자면 내 지식이 더 뛰어나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 데이브는 약간 틈을 두었다.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어를 잘하는군요. 몰랐다면 나 역시 당신을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착각했을 겁니다. 그 정도 영어 실력을 갖추기까지 대략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죠?"
"8년 정도요."
"예를 들어 당신이 영어를 전혀 못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앞으로 일주일 안에 지금과 같은 수준의 회화 실력을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게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러니까 완전히 제로(0)에서 시작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학습 기간은 단 일주일입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유포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 조직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특수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일주일 안에 원어민과 다름없는 회화 실력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믿을 수 없어요."
"나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그 방법으로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습득할 때까지는요."
무언가 반론하려던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데이브가 무엇을 암시하려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내가 간접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였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 "당신은 우리 정보망과 수사 능력을 일반 경찰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틀 만에 모든 것을 조사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하지만 실제로는 이틀이면 조사하고도 남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파일을 작성할 수 있죠."
"일반인의 정보까지 말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일반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원래 들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다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현명함'을 인정했는지, 데이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아까부터 듣자 하니, 당신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건 모르는 거야. 물론 나는 무차별 살인 같은 멍청한 짓은 하지 않지만, 나머지 5명은 모를 일이지. 평소에는 정상인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냉혈하고 극악무도한 인간인지도 몰라.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근거가 어디 있지?" 

 

- "게다가 가족들한테 일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할 정도라면 더 열심히 일해서 비행기를 타거나, 하다못해 암트랙을 이용하는 게 어떠신지. 아무리 공짜로 얻은 주유권이 있다고 해도 아넷 헤이븐의 알몸 때문에 일부러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몇십 시간이나 타고 올 정도의 열정이라니, 눈물 없이는 말할 수가 없네요." 
쿠당탕,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자빠진 '재클린'(=랜디)은 황급히 팔걸이를 잡았다. 원래 커다란 에메랄드그린 눈동자가 익어서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한 과일처럼 커졌다. 겁먹은 것이었다.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당황한 모습이 무엇보다도 데이브가 꿰뚫고 있는 정보의 정확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런 오점이 폭로되었다고 해서 누구도 '재클린'(=랜디)을 야유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야유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이 CIA 남자가 우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그렇게 겁먹고 있었다. 

 

- "오늘 밤 '매스커레이드'가 일어나면 당신이 잘해 주겠지. '샐러리맨' 씨. 아니야? 아니면 저 변태 할아범에게 당하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걸, 다름 아닌 당신이." 
"네, 네 몸이잖아." 뜻밖에도 비명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 "이런 건 정신적 피해가 더 큰 문제일걸." 

 

-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뭘?"
"저 여자의 행동 패턴 같은 거."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여자 말이야, 겉보기만큼 성격이 나쁜 것 같지 않아."
"저게 성격이 나쁘지 않다면 이 세상 모든 여자가 테레사 수녀겠네."
"모르겠어? 저 아저씨가 잠든 후로는 저 여자가 당신을 일본인 키드라고 안 부르잖아."

 

- "그러니까 랜디 편에 붙고 싶다? 하지만 변태 영감이라고 부르면서 그 사람한테도 시비를 걸잖아."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거야. 자기가 조금이라도 당신 편에 서는 듯한 행동을 보이면 그 아저씨의 일본인 혐오를 부채질할 뿐이니까. 자기에 대한 악의가 쌓일 수는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저씨 편에 완전히 붙어버리면 이번에는 경계선을 넘어 친한 척할지도 모르잖아. 저 여자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어.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 안 가리고 시비를 거는 거야. 하지만 실상은 힘의 균형을 제대로 계산한 행동이 아닐까 싶어." 

 

- "그런 해석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어. 그 여자는 그야말로 단순히 성격이 더러운 여자인지도 몰라. 하지만 좋게 해석하면 이쪽의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잖아. 안 그래?"

 

- "오히려 잘 아는 상대라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일본인이라 해도 죽이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날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아직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즉 자신에게는 아직 상대가 하나의 인격으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서, 평소에는 느낄 법한 정서적 저항도 전혀 들지 않고, 의외로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 검도에서 말하는 청안의 겨눔세, 즉 상대의 왼쪽 눈을 향해 병을 빈틈없이 들이밀면서 '나'(=재클린)는 슬금슬금 '재클린'에게 다가갔다. 

-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 관계를 묻는다면 모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지. '치킨 하우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어차피 단역이야? 당신의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단역이라면..." 나는 왠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런 표현을 쓴다면 할 수 없지. 내가 당신 인생에 있어 단역인 것과 마찬가지니까."
"주제를 바꾸지 마."

"바꾼 게 아냐. 내가 요전에 말한 것을 가지고 이 문제를 토론하고 싶은 거라면, 그건 잘못이라는 뜻이야. 나는 분명 내가 객체화되는 것, 즉 단역 취급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고 했어. 그런 당신이 이번에는 그 네 사람을 객체화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죽음을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저 내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고 판단한 것뿐이지. 그 판단 자체를 단역 취급이라는 표현으로 묶어버릴 수는 있어. 하지만 객체화하고는 완전히 달라." 

 

- 물론 '나'(=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런 반론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나의 결백을 논리적으로 어떻게 증명하면 좋을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 지금까지 나는 늘 마음을 사로잡힌 여성 앞에서 자학적이었다. 비하할 대로 한 다음 파멸을 맞는 것이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내 안에 뭔가 여유 같은 것이 생겼다.

 

- 그런 여유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 즉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나는 일방적으로 미유키를 나쁜 여자로 몰아갔다. 자아도취에 빠진 그녀의 연애 드라마 시나리오에서 나는 단역이자 희생자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방금 인식한 대로, 나는 여자 앞에서 자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말고는 다른 관계를 맺지 못했다. 어쩌면 미유키가 나를 배신한 건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부추기고 몰아세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 괴기 영화의 주인공 같은 박력 넘치는 얼굴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자네도 경험해 보는 게 어떤가. 이왕이면 여자의 모든 삶을. 자네, 출산이란 말일세, 아주 장렬한 '체험'이라고."

- "...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바뀌었거든. 그대로 내가 겪었지.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꽤 귀중한 체험이었어. 자네가 아무리 남존여비 사상을 가졌다 해도 두 번 다시 여성을 경시할 마음이 들지 않을걸. 한 번 경험해 볼 것을 추천하네."
"사,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절대 경험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게 일단 실체화되지 않는 한 그것을 교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자네의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지. 물론 실체화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를 수도 있어. 하지만 전이 과정으로 실체화되는 것이라면 눈에 보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자네의 지적으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지. 즉, 어쩌면 형이상학적인 상태로 인격이 전이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애초에 '교환'이나 '전이' 같은 발상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네."

 

- "실질적으로는 바뀐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바뀐다는 표현이 근본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야."

 

- "이 머리에 들어있는 것은 누구의 뇌라고 생각하나?" 
"그건... 물론 재클린 터클의 뇌겠죠?" 
"맞아. 지금 여기 '들어' 있는 건 틀림없이 토마 에리오라는 일본인의 인격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뇌가 여기 '그녀'의 몸으로 옮겨왔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거든. 머릿속에 든 건 어디까지나 원래 그녀의 것이야. 그런데도 여기 있는 '인격'은 에리오의 것이지. 이 모순된 상황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자네는 알겠나?" 
"저는 모릅니다. 뇌가 일시적으로 미친다든가, 그런 것밖에..."

"그게 정답일세."

 

- 박사가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데이브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박사는 아주 진지했다.
"이건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해. 그때 아내와 내가 했던 토론을 떠올려보게. 인간의 자아란 실체가 아니야. 복수의 자아가 상호 확인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지?" 
"말하자면 대조적인 것이다, 그 말이군요."
"잘 아는군. 예를 들어 자네가 데이브 윌슨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나? 그건 자네와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람은 분명 데이브 윌슨이라고 서로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거야. 그 공동의 '착오'에 의해 자네라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지. 물론 자네뿐만이 아니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그래." 

 

-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가 자네는 데이브 윌슨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자네라는 인간은 사회적으로 바꿔 말하면 인간으로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 자네를 포함해 모두가 자네를 데이브 윌슨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네는 자네로서 존재할 수 있어." 

"착각이라니, 하지만..."
"착각이지.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까. 여기 굴러들어 온 돌멩이가 확실히 돌이라는 광물이 맞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자네가 분명 데이브 윌슨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 

"저는 분명히 접니다."
"그래? 어떤 돌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여줘도 그건 분명히 돌이야. 하지만 자네와 초면인 사람이 자네를 보고 자연스럽게 데이브 윌슨이라고 인식하지는 않아. 그렇지? 당연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재가 상호 확인에 의한, 즉 상대적이라는 증거야. 무엇보다도 큰 증거지." 

- "나는 원래 '재클린 터클'로서 사회적으로 공동 인식되어야 할 개체인데도 자신의 뇌는 자신을 토마 에리오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다, 이런 뜻입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전이가 실질적으로는 전이도 뭣도 아니라 단순히 뇌가 자신의 정체성을 착각하고 있는 상태라면,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죠?"

 

- "우리가 체험한 바에 따르면 하나의 인격은 '매스커레이드'를 몇 번을 겪든 연속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그 이유는 대체 뭐죠?"
"예리한 지적이야. 확실히 그 말이 맞아. 이론대로 하면 '매스커레이드'가 일어날 때마다 동일 인격에는 그동안의 기억이 누락되어야 돼. 그런데도 실제로는 각자의 기억이 계속 이어지지. 그 점에 관해서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나는 너무 무책임하다고 불평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다만 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착각한다는 원리는 기본적으로 옳다고 믿네. 그리고 그 전제하에 동일인격의 기억이 연속되거나 착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다시 생각해 보면 당연히 어떤 가설에 도달하게 되지." 
"그 가설이란 게 뭐죠?"
"'매스커레이드'가 일어날 때 각자에게 필요한 기억이 '보충'되거나 동일 인격이 이중으로 출현하지 않도록 '조정'된다는 거야. 즉, '매스커레이드'는 획득된 형질이 아니야. '관제탑'이 그때마다 '역장(場)'을 발생시켜 간섭함으로써 일어나는 거지. 물론 간섭하는 방법이 종래의 물리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니까 거리나 차폐물 같은 것과는 일절 관계 없..."

 

- "'세컨드 시티'는 어차피 우리 인류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야. 기능을 제어할 수 없으니 말이야. 평화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건 20년 전에 이미 결론이 났네. 그런데도 이놈의 미국 정부도 진짜 끈질기다니까. 당장 이용하는 건 무리라도 혹시 미래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면서 저런 괴상한 형태로 '세컨드 시티'를 보존하고 있으니, 그것부터 틀려먹었어."    

 

- 듣기에 따라서는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한말은 아니겠지만... 안 돼, 또 '특기'인 자학적인 마음에 빠져들려고 했다. 반성해야 한다.  

 

- '재클린' (재클린)은 비웃듯이 얇은 입술을 도발적으로 끌어올렸다. 아, 그녀다운 얼굴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상대를 단호하게 거절하기 직전에 어깨를 으쓱할 때 가장 아름답다. 그렇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 사회자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이 훨씬 더 예쁘고 표정도 풍부하다. 하지만 목이 졸리면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처절한 아름다움은 도저히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단하다! 
작중의 열쇠인 아크로이드 박사는 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에 대해 어떻게 했는가.
'자세한 건 몰라'라고 그냥 '얼버무렸을 뿐이다.
이 점이 대단하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 "이건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전조가 틀림없어."
객관적으로 생각해면 불길함도 뭣도 아니다.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다가 말라버린 시점에서 그건 이미 최고 수준의 불길한 천재지변이며, 이미 한두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그러나 그 캐릭터의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끄덕이고 불길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해했나? 이 대단한 기술이야말로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고안한 필살기다.
이 발상의 파워야말로 굉장한 활력이고 교묘함이다.

 

- 다시 말하면 이 필살기야말로 어쩌면 소설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 아크로이드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인간의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해."
이런 환상. 그건 소설의 존재, 미스터리의 존재, 그 근원적인 문제와 너무나 흡사하다.

 

- 때때로 인격이 바뀌는 건 사실 의외로 간단하다. 


-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약 3초 간격으로 매스커레이드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다.

- 모리 히로시 

 

 

-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다. 아마도 학교에서 배운 사자성어들 중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어로는 'Put your self in my shoes'라고 하죠. 영어로 이 말을 쓴 사람은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만든 사람보다 좀 더 답답한 마음에 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 언어라는 도구로 의사소통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실제 내 입에서 나온 말, 상대가 들은 말, 상대가 그걸 해석한 말의 뜻. 의사소통은 이런 과정을 거치기에 처음에 내가 하고자 한 말이 상대의 머리에 100% 전달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봤는데, 보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표현력이 좋아서 하고자 하는 말을 잘 표현한다 해도 보통은 들은 말을 아전인수로 해석할 때가 많으니까요. 인간은 이기적인 생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리고 이렇게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면 한 번씩은 해보는 말이 있습니다. '내 입장도 한 번 생각해 봐.'  

 

- 이 책은 그런 말을 조금이라도 덜 하면서 살게 하기 위한 장치 때문에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 이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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