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천선란] 이끼숲

일루젼 2023. 8. 1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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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천선란
출판 : 자이언트북스 
출간 : 2023.05.02 


       

예약해 두었던 걸 완전히 잊고 있다가 알림을 받고 화들짝 놀랐다. 가끔 틀림없이 했던 듯한 일은 하지 않았고, 한 기억이 없는 일이 행해져 있곤 한다. 건망증은 때때로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끼숲>을 읽는 동안 여러 작품들이 떠올랐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지구 끝의 온실>, <에반게리온> 등등.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몫을 해내고자 울고 웃고 절규하며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것들은 읽어낼 수 있는 눈에만 보인다. 그렇기에 전체는 언제나 고요하다. 꿈틀거릴 수 있는 것은 뿌리 끝의 생장점 뿐이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 

 

나는 <이끼숲>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여기에서 멈추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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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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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그 이름 자체도 의미심장하지만, 그가 VA2X 역시 오래도록 거부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때부터 두피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간지러움을 느꼈음을. 그리고 앞에서도 암시된 바 있지만 VA2X는 필시 중독성 물질일 것임을. 

 

줄기도 뿌리도 없이 커다랗게 펼쳐진 다섯개의 붉은 꽃잎과 흰색 반달무늬는 필시 '라플레시아(Rafflesia)'일 것이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인 '타이탄 아룸(Titan arum)'보다는 낮지만 라플레시아도 대략 30도 전후의 온도로 꽤 따뜻하다. 두 종 모두 환각물질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소마의 상태를 고려하면 그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보는 것은 가장 달콤한 꿈이다. 

소마가 부디 끝까지 깨지 않기를 바란다. 

 

즐겁게 읽었다.  

      


 

   만약 네 앞에 아몬드가 있어. 
근데 이게 독이 있는 야생 아몬드인지,
독이 없는 아몬드인지 몰라. 

그럼 너는 어떡할 거야? 
그 아몬드를 먹어볼 거야?

 

 

 

 

 

 

- 본 적 없는 장면은 상상을 부풀리기에 좋은 효모였다. 마르코는 인간의 유전정보를 떼어다 똑같은 인간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뱃속의 태아처럼 배아세포로 시작한 아이가 세포를 늘리며 세포의 주인과 똑같은 인간으로 자라는 것인지, 만들어둔 외형에 심장과 뇌를 넣어 단번에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조각조각 나눠 만든 몸을 바느질하듯 엮는다거나, 만들다 실패한 것은 분쇄기에 한 번에 갈아버린다거나. 어떤 상상이든 결국 인간의 몸을 조립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 '되도록 연구소 사람들한테 먼저 말 걸지 마. 그쪽에서 말 걸어오고, 친하게 굴 때까지 참아. 가끔 경비원이 말을 건다고 회사에 항의하는 연구원들이 있어. 근무 태만이라고. 마찬가지로 자기들끼리 떠드는 말도 함부로 듣지 말고. 뭐, 들리는 걸 어떻게 하냐고 묻고 싶겠지만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생각해.' 
마르코는 커커스의 말을 떠올리며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세뇌했다.

 

- "목소리를 아바타한테 파는 거야?"
하지만 연구원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또렷하게 마르코의 귀를 파고들었다.
"값이 비싼 게 있는데 그게 목소리를 완전히 넘기는 거라더군."

"목소리를 다 녹음하고 난 뒤에 목소리를 판 인간이 더는 그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발성기관을 망가뜨린다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연구원이 "으" 하고 질색을 했고, 마르코도 그 소리에 맞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런 짓들을 왜 해? 왜 팔고, 왜 사는 거야?"

마르코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마르코는 귀를 더 기울였다.
"세상에 하나뿐인 아바타한테는 세상에 하나뿐인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목소리는 전부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원하는 목소리를 돈을 주고 빼는 거지." 

 

- '욕망이란 원래 증식하는 거니까.'
마르코는 적당히 포근하게 몸을 짓누르는 모래의 무게를 느끼며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세상은 점점 다양한 걸 팔기 시작했으니까. 

 

- 음성언어적 소통 외에도 발언의 방식은 다양했으니 반드시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장 VA2X를 사 먹을 돈이 없다면 마르코도 머리카락을 자르듯이 기꺼이 목소리를 팔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다짐이나 의견도 그 상황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마르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공 해변에서도 입을 꾹 닫고 있었던 것이다. 

 

- 보통 열다섯 살이 되면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마련된 집으로 갔다. 그 집이란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배정되는 집을 말했다. 지하 도시 특성상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주거용 건물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인구가 늘어 포화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십 년 간격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집을 배정했는데, 이는 부부의 출산 계획을 위원회에 전부 보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쯤 아이를 가질 거라는 계획서에는 자산 규모 역시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는 자산 규모가 기준을 넘지 못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게 십 년 동안 태어날 아이의 숫자는 정해졌다. 그 정책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예정 없이 태어난 갓난아이를 데리고 가 어떻게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도망친 부부가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도.  

 

- 톨가가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한 지 꽤 되었지만, 마르코는 여태껏 톨가에게 직접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물어본 적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 톨가는 마르코의 손톱을 깔끔하게 잘라주고, 밤을 큐티클 부위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톨가는 이런 게 중요하다고 했다. 호감을 느끼는 건 한순간이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엄청나게 사소한 기준을 여러 차례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더러운 손톱 때문에 청결에 직결되는 부분에서 탈락하면 전망이 좋지 않다고 했다. 마르코는 손톱이 반듯하게 잘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B45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소리는 곧장 외이도를 타고 흘러가 심장으로 떨어졌다. 악기의 음률은 잘게 분열되어 몸 전체로 퍼졌다. 꼭 은희의 목소리 같았다.

 

- 그때 테이블 위로 은희가 시킨 음료가 나왔다. 파랑과 초록,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여 있고 그 안에 흰 점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마치 밤하늘을 떠다 만든 듯한 음료에 마르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료가 있을 수 있다니, 마르코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바다눈이야."
은희가 말했다.
"이 음료 이름."

 

- 자신과 이곳에 온 걸 후회하는 걸까? 막상 둘이 오니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자신은 재미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 그 질문의 문장을 다 완성시키기도 전에 장내가 어두워지며 연주가 시작되더니 은희가 노래를 불렀다. 그 청량하고도 탁한 음성. 부드럽게 휘감기면서 까슬까슬한 잔여물을 남기는, 깊고 편안하며 동시에 처량하고 쓸쓸한 목소리가 꽉 채웠다. 재즈 바 안을, 그리고 마르코의 몸을. 

 

- 훗날 마르코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누워 스페이스 스카이를 바라보던 밤, 은희의 노래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고래의 울음 같았어. 영상 자료실에서 혹등고래 울음을 들은 적이 있는데, 꼭 그 소리 같았어. 대답해 주는 고래가 근처에 없는데, 혼자 계속 우는.' 
그날 마르코가 바라보던 스페이스 스카이의 밤하늘은 컴컴한 심해 같았고, 빛나는 별은 잘게 부서진 은희의 목소리 같았다. 

 

- "지금 대타가 필요해서, 출근해야겠는데. 바쁜가?"

 

- 뚝, 끊긴 전화를 들고 마르코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바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마르코는 내일 아침 근무였다. 지금 가서 곧장 자도 여섯 시간을 채 채우지 못한 상태로 일어나야 했다. 팀장이 그걸 모르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팀장은 모든 직원의 근무 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마르코는 그만큼 급한 사정일 거라 생각하며, 오래 잡아두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 마르코는 영문도 모른 채 새벽 꼬박 일했다. 낮에 쉬지 못했으므로 서서 졸기도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출근을 위해 한 시간 뒤에 일어나야 하는 일정이었다. 씻는 시간도 아까웠고 침대에 누우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마르코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인 뒤 도로 출근했다. 

 

-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대타 출근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처음 몇 번은 바쁘냐고 물어보던 팀장도 어느 순간부터는 일방적으로 근무를 통보했다. 경비 직원 삼십 명이 파업 중이라는 소식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회사에 임금을 올려달라 협상 중이라고 들었는데, 마르코는 아직 입사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았고 계약된 금액이 제때 알맞게 들어왔으므로 그 파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 이곳에서 일한 지 삼 년 이상 된 사람들이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파업은 오래가지 않을 터였다. 이렇게 다른 근무자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길게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 평소보다 업무량이 많아져 잠자는 시간도 줄었다. 식사 시간에는 밥 대신 잠을 청할 때가 더 많아졌다. 먹은 게 제대로 없으니 위가 아팠고, 가끔 근무를 서다 코피가 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운동 수업에서도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 하지만 이 즐거운 흐름이 끊긴 건 월급날이었다. 마르코가 초과 근무와 심야 수당을 합산해 계산했던, 삼백사십 듈보다 백사십 둘이 부족했다. 마르코는 자신의 계산이 틀렸던 건가 싶어 다시 계산해 봤지만 역시 적게 들어온 게 맞았다. 마르코는 이해되지 않아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팀장을 찾았다. 

"이번 달은 어쩔 수 없었어. 초과 근무가 너무 많으면 노동 심의에 걸려. 그래서 일단 걸리지 않게끔 근무 시간을 잘랐는데, 걱정하지 마. 나머지는 다음 달에 보너스로 들어갈 거야." 

 

- 팀장의 말은 절반 정도 사실이었다. 다음달 월급에 지난달에 받지 못한 수당이 더 들어왔지만, 문제는 백사십 둘이 아닌 오십 듈 정도만 추가로 들어왔고 그달에 했던 초과 근무 수당은 끼어들지도 못한 상태였다. 팀장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어차피 받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유난스럽게 보채냐는 말도 덧붙이긴 했지만 마르코는 꼭 자신이 돈을 더 달라고 떼쓰고 있는 것 같아 더 묻지 못했다. 

 

- 한편으로는, 일하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월급이 많아져 좋기도 했다. 어서 빨리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파업이 끝나고 이전처럼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모아둔 돈으로 친구들에게 먹을 만한 음식을 사주고, 은희와 함께 재즈바에 가서 이번에는 자신이 음료를 사고 싶었다. 그때까지 마르코는 이 모든 것이 금방, 별 탈 없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 "인간 복제는 인간의 한계 같아. 그 한 사람을 온전히 살릴 수 있다면 아무도 인간 복제 따위는 하지 않으려 할걸. 인간은 영생에 실패했고, 뇌 정복에 실패했어. 전부 다 실패했어. 고작 똑같은 인간 만들고 땅이나 파고 있다니. 최악의 진화 아니니? 이런 세상인 줄 알았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건데. 너는?" 

- 은희가 웃으며 물었다. 마르코는 여태껏 인간의 발전과 진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태어나보니 이곳이었다. 마르코의 삶 전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선택권이 결여된 순간이 그때일 것이다. 탄생. 그것만큼은 마르코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하나의 감정만으로 삶 전체를 설명하는 건 마르코에게 어려웠다.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살고 싶게 했고,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죽고 싶게 했다. 살아가는 건 징검다리 건너듯이 원치 않아도 어느 순서에는 반드시 불행의 디딤돌을 밟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 은희의 일상은 그전으로 돌아왔다. 교대해준 동료에게 찾아가 작은 선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을 내며 은희를 욕했던 사람도, 은희 앞에서는 그럴 수 있다며 언제든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웃었다.

 

- "그래도 너는 요새 벌이가 좀 괜찮지? 일이 많아서."
지속되는 파업에 마르코의 초과 근무는 계속 이어졌다. 근무 시간을 맞춘다고 수당은 늘 다음 달로 이월되었지만 그래도 기존의 월급보다는 많은 금액이었다. 초과 근무도, 높아진 월급도 금방 적응되었다. 누군가의 일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 일도, 금액도 원래부터 마르코의 것처럼 느껴졌다. 금전적인 여유가 생겼기에 저축도 더 많이 했고 은희와 재즈 바 공연도 더 자주 갔으며 친구들에게도 기분 좋게 무언가를 사줄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는 숨구멍이 있는 그 삶이 꽤 만족스러웠고, 어느 한편으로는 이 생활이 계속되었으면 했다. 커커스를 보기 전까지. 자신이 커커스의 숨을 빼앗아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 커커스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고, 그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마르코는 어쩐지 그 자리가 묘하게 불편했다. 꼭 자신이 죄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식사를 끝내야 했다. 

 

- 뒤돌아 가는 커커스를 붙잡아 마르코가 물었다.

"선배는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커커스는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돌아가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니."

 

- 파업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내면 불이익이 없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고 싶은 질문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그 선택이 정말 본인을 위한 것이 맞느냐고도 묻고 싶었다. 선배는 점점 말라가고 있고,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자신에게 얻어먹은 것이 아니냐고. 돌아오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선배가 그럴수록 선배의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정말 이런 것들을 선배가 모르고 있는 것인지, 마르코는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 의문에 답을 준 건 유오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 다 잃을 것 같으니까.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큰 걸 지키기 위한 선택인 거지." 

 

- 마르코는 집에 가는 내내 커커스가 지켜야 할 더 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봤지만, 당장 굶지 않기 위한 것보다 큰 게 무엇인지, 그런 게 있기나 한 건지 싶었다. 

 

- "계약된 월급은 꼬박꼬박 받고 있어.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렇게 하겠다고 서로 합의한 거잖아. 그런데 갑자기 임금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 거는 회사에서도 당황스러운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유오는 잠잠히 들었다.
"회사가 원청한테 얼마를 받든, 이미 입사할 때 이 돈을 받겠다고 약속했잖아. 회사는 그걸 지키고 있고. 일 년만 버티면 임금 인상도 있다고 했어. 적어도 십일 퍼센트씩 매해 오를 거라고. 다들 그걸 약속했으면서 막무가내로 그렇게 일을 안 하면 어떡해?" 
"마르코."
유오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마음에 쫓길 필요 없어."
"나는..."
"그래, 너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게 맞아."

마르코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었다.

"둘 다 감당이 안 되면?"
"그럼 깔려도 조금 덜 아픈 걸 택해야지."

"깔리고 싶지 않아."

"그럼 두 문제로부터 완전히 도망치는 방법도 있지."

"그것도 그다지 끌리지 않는걸."

"답은 하나다! 더 고민해 보기. 일 시작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 선택을 유예하는 것이, 유오의 말처럼 마르코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마르코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꿈을 꿨다.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는데 누가 뱉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났을 때는 몸이 땀으로 범벅되었고, 월급이 입금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계약한 월급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고 근무 시간보다는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 
 

- 먹지도 않을 땅콩 껍데기만 하염없이 까던 의주가 조언했다.

"너를 너무 노출시키지 말라고. 구독자가 많아졌잖아."

"나도 노력해. 근데 방송인데 말을 안 할 수는 없잖아."

"목소리로 알아보는 거야?"
치유키가 깜짝 놀라 물었다.
"뭐, 나도 듣다 보면 목소리나 말투 같은 게 귀에 익어서 알아보는 경우가 있어. 이상할 건 없지. 그걸 스토커처럼 찾아다니는 애들이 이상한 거지. 너무 걱정하지 마. 조만간 그만할 거야. 형이랑 같이 그만두면 어떨지 이야기 나누는 중이야." 
톨가는 친구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의주도 더 말을 얹지 않았다.

 

- 할라는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뚝뚝 눈물을 흘리다가 곧장 악을 쓰듯 울부짖었다. 분주했던 마르코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할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위로해주지 못했다. 본능이 안 것이다. 곧 할라가 내뱉을 말의 불길함을, 모두가 느낀 것이다. 우리는 할라를 위로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저 울음이 곧 본인들에게도 전염될 거라는 걸. 
기어코 우리는 함께 웃지 못할 거라는 걸.

 

- 마르코는 새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번에도 일 년 단위로 갱신되는 계약이었다. 새 계약서에 서명하며, 마르코는 은희가 이 상황을 알았을지 궁금했다. 알았기에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일까. 그날 할라가 가져온 소식은 회사의 부도 소식이었다. 회사가 새로운 이름으로 재설립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썼던 계약서는 이전 회사의 계약서였으므로 필요 없는 종이 쪼가리이지만 새 회사는 하루아침에 회사를 잃은 근로자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 전부를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전 회사와 약속했던 임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못 박았다. 마르코에게는 일 년 전과 다를 것 없는 새 계약서만이 남았다. 항간에는 새 이사장이 이전 이사장과 아는 사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친척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새 회사에 불만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논리 앞에 굴복하지 않을 노동자는 없었다. 마르코도 그랬다. 

- 뱉지 못한 말은 미련처럼 사어가 되어 마르코의 걸음걸음마다 눈처럼 떨어졌다. 

 

- "정말 좋지 않아? 요즘 이 사람 인기 엄청 많아. 어디서 그런 목소리를 구했는지 모르겠어. 왜? 아는 목소리야?"

 

- <바다눈>

 

 

- 의주야, 그거 아니? 엄마는 사실 나를 살리려고 했다는 걸. 그런데 문득 똘망똘망하게 눈뜨고 있던 네가 아빠의 눈에 밟힌 거야. 너한테도 기회를 주자고 했지.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어.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한 명을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무르고 착한 사람들이었지. 나는 멍청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은 고심 끝에 가장 머저리 같은 방법을 떠올려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하는 거였어. 내 목숨은 엄마에게 네 목숨은 아빠에게. 

 

- 너도 알겠지만 엄마는 가위바위보를 참 못해. 첫판에 무조건 가위를 내는 사람이잖아. 아빠는 그 법칙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의 목숨은 아빠 손에 달려 있었던 거야.

 

- 아빠는 주먹을 냈어. 그게 끝이야. 너는 살고, 나는 죽었어. 너와 나의 차이는 그것뿐이야. 그냥, 네가 자주 까먹는 것 같길래 말해봐. 

 

-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고작 그까짓 게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감정들이 비선형적으로 마구 번져나가 주체가 안 돼. 그러니까 이 방법은 아주 가끔 써.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하긴 너는 증오가 뭔지 모를 수도 있겠다. 비꼬는 건 아니고, 너는 원래 감정의 폭이 크지 않잖아. 
 

- 인과관계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애초에 말수가 적고 만사무심한 성격으로 태어난 건지, 아니면 내 눈치를 보고 자라느라 그렇게 큰 건지. 전자면 부럽고 후자면 미안해. 하지만 동시에 전자면 화가 나고 후자면 속이 후련해. 한 사람이 완전히 다 가질 순 없잖아. 정말로, 우리는 하나인 척 굴지만 하나가 아니니까. 머리가 두 개고, 팔이 네 개고, 심장이 두 개고, 다리가 네 개인데 어떻게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니? 등을 맞대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각자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 많잖아. 

 

- 오늘처럼 네가 피곤하다고 입을 꾹 닫고 자버리면 나는 네가 뭘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네 소매에 묻은 소스의 흔적, 머리카락에 희미하게 묻어 있는 냄새, 신발에 끼어 있는 흙... 그런 것들로 추측할 뿐이야. 어제는 네 신발 밑창에서 짠맛이 났어. 해변에 갔다 왔지? 하긴 너는 늘 네 친구들과 해변에 다녀오면 뻗어 자더라. 너의 그 친구들, 어쩌면 내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그 친구들. 

 

- 네가 그랬지. 우리는 등가가 아니라고. 너를 뽑아낸 자리에 내가 심어지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말라고. 네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이겠지만 나한테는 어떻게 들린 줄 아니? '탐내지 마. 의조야, 내 거 손대지 마.'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내 귀에는 들렸단다. 너조차 깨닫지 않은 마음이. 어쩌면 네가 평생 모를 수도 있는 네 진심이. 

 

- 하지만 의주야, 우리는 등가야. 그걸 잊으면 안 되지. 너랑 나는 별 차이가 없어. 너는 바보 같은 부부 손에 우연히 선택받았을 뿐이야. 네가 가진 건 네가 잘났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이야. 그거 하나야.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을 나도 이룰 수 있었어. 네 말은 너무 가소로웠지만 나는 화를 내지 못했어. 내가 화를 내면 너는 집을 나가버릴 테니까. 다음에 오겠다면서, 금방 올 것처럼 말을 하고 며칠 동안 오지 않겠지. 너는 그러면 그만이야. 너의 한 시간이 나의 하루고, 너의 하루가 나의 보름인 걸 알면서도. 너는 자라면서 점점 뻔뻔해지니까. 머리가 커서 그래. 근데 나도 마찬가지거든. 뻔뻔해지고, 대범해지고, 강해지고, 비열해지고. 뭐든 괜찮아. 멍청해지지만 말자, 우리. 

 

- 아 참, 그러고 보니 이 편지를 읽으며 많이 놀랐겠구나.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는 거 몰랐을 테니까. 나도 많이 공부했어. 

 

- 배운다는 거 좋더라. 내가 그때 배우며 깨달은 게 뭔지 아니? 나는 언어에 좀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그리고 나는, 글자를 쓸 줄 모른다는 거. 

 

- 왜 나에게 언어를 알려주는지도 모른 채 그냥 배웠어. 근데 할 게 없으니까, 그걸 하지 않는다고 다른 걸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시간이 빨리 갔어. 살면서 그런 시간의 속도는 처음 느껴. 나쁜 점이 있다면 특정 시간이 빨라진 만큼 다른 시간은 지나치게 느려졌다는 거야.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지는 순간은 정말 고역이었어. 악을 쓰고 싶었어. 누구에게든. 

 

- 의주야, 너는 참 여러 사람에게 못됐다고 생각했어. 치유키를 알고 난 뒤에는 그 생각이 더 커졌어.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성격, 나 때문에 생긴 걸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딴은 간신히 찾은 숨 쉬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건 좀 나중에 말하자.  

 

- 내가 너를 왜 모르겠니? 의주야, 네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는 너를 훨씬 더 많이 알아. 너의 일거수일투족, 너의 습관, 네 친구, 네 마음마저...


- 내가 징그럽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너만은 나를 무조건 이해해야지. 네가 문턱을 넘은 횟수만큼. 웃기다. 그거 하나 넘지 못해 좁은 배관 통로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다니는 내 처지를 떠올리면 정말 웃겨. 배가 찢어지도록 웃고 싶어. 그러다 정말 갈기갈기 찢어지면 얼마나 좋으니.

 

- 그게 방법이야. 네가 끌어안는 거. 네가 더는 참지 않는 거. 네가 눈치 보느라 네 마음을 꽁꽁 뭉쳐 구석에 던져두지 않는 거.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이야. '환풍구 밖으로 나갈 수 있잖아?'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너는 눈치가 빠르니까. 너는 눈치를 먹으며 자랐으니까. 그게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니까. 

- 그러니 이제 그 선물을 다시 뺏어갈까 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릴 거야. 의주야, 네가 선택된 것은 멍청한 부모 덕이겠지만 내가 바깥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내가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건 네 탓도, 부모 탓도 아니야. 머리에 칩이란 걸 심을 생각을 한 머저리들이 죄란다. 그러니 더는 눈치 보지 마. 

 

- 의주야. 내 핑계는 이제 그만둬. 이 말을 너에게 꼭 해주고 싶었단다. 네 삶에서 나라는 이유를 계속 붙이지 마. 너는 꼭 네가 행복하면 내가 싫어하는 줄 알더라? 근데 사실 맞아. 아까까지는 그랬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이 마음이 또 언제 바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싸울 수 있어.

 

- 이 도시를 전부 날릴 수 있는 폭탄이 담긴 방을 찾을 거야. 아직 못 찾았거든. 그걸 찾게 되면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바로 터뜨릴 거야. 그때까지 삶을 즐기기를 바랄게. 그러다 만약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나가. 밖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니?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해도. 

 

- 그렇지만 의주야, 그러고도 내가 보고 싶어질 때는 말이야. 좁은 방안에 웅크려 앉아 거울을 봐. 그게 내 얼굴이야. 

 

- <우주늪>

 

 

- 즐거운 생각을 할까 해. 소용이 없더라도 말이야. 

- 방법은 간단해.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는 거지. 몸이 함께 기억하는 순간들. 예를 들어볼까? 건전지가 방전돼 알람이 울리지 않았던 그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음에도 몸이 개운함을 느낀 순간 나를 덮쳤던 서늘함. 약속 장소로 전속력으로 달리던 때 폐부에 가득 들어차던 팽팽한 공기, 스피커를 통해 들리던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스타카토처럼 끼어든 참새의 울음. 코를 통해 온몸에 퍼지던 인공적인 풀 냄새, 신발로 땅을 툭툭 내리찍으며 나를 기다리던 너를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과 미약하게 떨리던 몸. 긴장한 듯 멈춘 숨, 뜬금없이 달려가 너를 와락 끌어안아버리고 싶던 충동, 그걸 억누르느라 꽉 쥐었던 주먹,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처음 자각한 순간이야.

 

- 애꿎은 흙을 툭툭 차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너는 작게 핀 이름 모를 조형 꽃이 쓰러지지 않도록 흙을 모아주고 다져주고 있던 거였어. 나는 그걸 먼발치에서 바라봤는데도 마치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것처럼, 너와 나란히 서서 꽃이 쓰러지지 않길 바랐던 것처럼 떠올라. 그럼 나는 기억을 주무르게 돼.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끌어안아. 따끈따끈한 빵을 품에 안은 온도를 느껴. 웃기지 않니? 나는 네 온도를 몰라. 너를 끌어안은 적은 딱 한 번 뿐이고, 그때 너는 냉장고에 넣어둔 바게트처럼 차갑고 딱딱했는데 말이야.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 타고나길 외골수에 원칙을 고수하는 성격의 의주는 이런 성격 덕에 학교에서 자잘하게 일어나는 파벌 싸움에 끼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이런 성격 탓에 가끔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몇몇 아이는 자신들의 행위를 무책임과 집단 괴롭힘의 단초로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의주를 아니꼽게 바라봤지만 내가 의주와 친해진 건 의주의 그런 태도가 좋아서였다. 아주 잠시 의주를 섬겼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라기에는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웠으니까. 

 

- 의주가 기계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하는 짓이 꼭 감정 없는 로봇 같아서. 언젠가 이런 내 말은 들은 너는 푸하 웃음을 터뜨렸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멈추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의주는 그런 면이 있지. 하지만 기계 같다는 게 비인도적이라는 뜻이면 공감하지 않아. 의주의 기계 같음은 그런 거지, 보안이 설정된 메모장 같은 거. 의주는 먼저 묻지는 않지만 잘 들어주고,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굳이 도로 꺼내지 않고 또 누구에게 쉽게 내 이야기를 전달하지도 않잖아.' 

 

- 이쯤에서 비밀 하나만 털어놓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너도 의주에게만 털어놓은 비밀이 있는 걸까, 궁금했어. 몹시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억이 나. 너와 의주, 둘이서 나만 모르는 어떤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까 봐 밤이 되면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였어. 나도 알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내 곁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인 너희 둘의 관계를 시기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는 걸,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니 너는 모를 거야. 
 

- 두 사람이 나에게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는 악몽으로 몇 달을 시달리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이 마음이 사그라들었어. 내 안의 두려움이 드디어 날 놓아준 거야.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건 의주의 말대로 최악이야. 

- 어쨌거나 의주는 기계가 좋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은 넘겨짚고 추측하다 잘못되는 경우가 많지만, 기계는 틀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아주 가끔은 정말 위급한 순간을 막을 수도 있다고. 기계의 마음을 추측하는 게 무엇이냐고 내가 묻자 의주는 소리와 상태에 집중하는 것이라 했다. 오늘따라 소리가 조금 이상하거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진동이 느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품을 뜯어 안을 살핀다. 살짝 녹이 슨 작은 나사까지도 발견해 내는 의주를 볼 때마다, 의주를 둘러싸고 있던 무심하고 냉소적이라는 말들이 틀렸다는 걸 느낀다. 의주는 누구보다 세심하고 다정하다. 그렇기에 나는 의주의 말을 믿는다. 

 

- 땅콩의 다른 명칭은 낙화생이다. 지상에 노란 꽃을 피웠다가 그 꽃이 떨어질 즈음 씨방 자루가 땅을 파고들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가 땅콩이기 때문이다.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야만 자랄 수 있는 땅콩은 땅속이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삶은 예전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꽃처럼 느껴진다. 

 

- '생아몬드에는 아미그달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있어. 이게 몸에 들어가면 시안화수소를 만드는데 그게 청산가리랑 똑같아. 그래서 청산가리의 냄새가 아몬드와 비슷하고. 그러니까 아몬드는 사실 인간이 먹지 못하도록 생겨난 거지.' 
나는 기함한다. 먹지 못하도록 진화한 생명의 보호막을 무참히 뚫고 씹어대는 옛날 사람들의 무자비함에 역겨움을 느끼면 그 애가 수습하듯 말을 덧붙였다. 

 

- '진화에서 인간이 더 강했던 거야. 강해서 많아진 것뿐이고. 절대적인 숫자가 많아지니 자리를 더 차지하게 된 거지. 무엇이든 똑같아. 그게 이기적으로 보여?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게 인간뿐일까? 살기 위해 다른 식물의 몸을 휘감고 올라타서 광합성하기에 우위를 차지해 다른 식물을 천천히 말라 죽이는 덩굴식물도 있대. 다른 식물을 죽이며 자란다고 해서 교살 식물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어. 식물도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라. 살기 위한 경쟁은 언제나 잔인할 수밖에 없어.'

 

- 어떤 본능 같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안의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과 감각이 그 애에게서 풍겨오는 어둠과 이별의 기운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거라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둘러싸여 현실을 담아두기에만 급급했던 내가 원망스럽다.

 

- '소마, 만약 네 앞에 아몬드가 있어. 근데 이게 독이 있는 야생 아몬드인지, 독이 없는 아몬드인지 몰라. 그럼 너는 어떡할 거야? 그 아몬드를 먹어볼 거야? 안 먹어? 궁금하지 않아?' 
독을 품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으므로 독을 닮은 맛 역시 정말 달콤했을 텐데.

 

- '나는 먹어보고 싶어. 내가 먹는 아몬드는 독이 없을 거라고 믿어. 나는 운이 되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그런 기회가 오면 내가 먹어볼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마. 내가 먹어보고 너한테 설명해 줄게.' 

 

- 역시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모르겠지, 아몬드의 맛.

 

- 여섯 번째 초인종이 울리며 나는 그쯤 눈을 뜬다. 문을 열어줘야 할까. 그러는 게 맞는데, 그러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의지의 부재는 내 탓이 아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므로. 그러니 하염없이 억울해지고, 화가 나는 거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무작정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에 함께 휩싸인다. 소리를 지를까. 그래, 소리를 지르자. 

 

- "그러니까 문 좀 열어줘. 그전에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처음 듣는 것처럼 낯선 마르코의 목소리에 그날의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나에게 어디냐고 묻던 의주의 떨리던 목소리. 침착하기 위해 애쓰느라 몇 번이고 삼키던 숨.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로 의주는 나에게 그 애의 죽음을 알렸다.

 

- 나는 이제 타인의 낯선 목소리가 무섭다. 낯선 행동이 두렵다. 문득 지금이라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의주에게 내가 먼저 화를 냈더라면 없던 일이 됐을지도 몰라. 확인하기 전에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직 죽음을 듣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런 생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 그 애가 못마땅했다. 그건 특혜라기보다 신체 보험 같은 것이었고, 작업 도중 불의의 사고로 인한 신체 훼손, 절단, 괴사 등을 인지하고 동의했다는 뜻이며 신체를 이식할 수 있는 클론이 있으니 사고에 대한 별다른 소송이나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순히 말하자면 또 다른 몸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 두 명인 것보다 온전한 한 명이 낫지 않아?

- 나는 따져 묻는다. 누구나 다치고, 누구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만, 대부분이 그런 불행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적지 않은 확률로 어떤 이들은 평생을 탈없이 보내다 눈을 감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불쑥 찾아오는 불안이 뭔지를 모르지. 언제나 나를 짓누르고 있는 불행의 무게를 모르지. 그 애가 나에게 그 덩어리를 선물해 주기 전까지 나도 몰랐으니까. 안겨준 덩어리를 떨떠름하게 들고 있다가 나는 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덩어리는 집요하게 나를 쫓아왔고 어느 순간에는 너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치울 수가 없었다. 그 애는 그렇게 나에게 불안을 선물했다. 나는 사랑을 줬는데. 

 

- 페이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영웅담처럼 들렸다. 영웅은 언제나 숭배받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페이 할머니처럼 되겠다고 뛰어들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이야기도 같이 털었다. 나도 그랬고, 의주도 그랬고, 톨가도 그랬고, 치유키도 그랬고, 마르코도 그랬는데 그 애만 달랐다. 그 애만 심장이 뛰었던 거다. 영웅과의 만남을 추억으로 두지 않고 그 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던 거지. 

 

- 그 애는 지상 탐사대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상 탐사대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는 데다, 선발 조건이 까다로웠다. 그 애가 담당 교사에게 지상 탐사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위험하다는 말로 위로하려던 교사의 방식은 역시 틀렸다.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말해주고, 지상의 식물은 책에 나와 있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줬어야 했는데. 과거는 우주와 같아서 우리는 걸어 그곳에 갈 수 없고, 네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별과 같아서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실망만 가득할 거라는 걸. 

-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무의 뿌리에라도 가닿으려던 그 애의 마음을 무엇으로 꺾을 수 있었을까 싶다.

- 지상에서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으로도 건물이 부식된다고 했다. 그래서 바닷가 근처에서 해풍을 맞으며 산 건물은 빨리 삭는단다. 땅밑도 마찬가지다. 온갖 미생물이 아주 빠르게 건물의 단단한 외벽을 분해한다. 더욱이 지상의 변화에 따라 토질도 변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보수를 해줘야 하고, 더 단단한 곳으로 계속해서 공간을 만들어 뻗어나가야 한다. 신대륙을 개척하는 마음이라기에는 모험보다 피난에 가깝고, 외행성을 탐사하는 마음이라기에는 도전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 적어 안쓰럽지만.

 

- 삶을 확장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겠다는 건 예측 불허의 위험이 가득한 어둠을 헤집는 일인 것이다.

 

- 하루에도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비록 사고는 숫자로 집계되지만, 그 숫자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지만 말이다. 

 

- 그런 사람이었던 나는 어느새 그 숫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되었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제야 알았던 것뿐이다. 층별 광장마다 있는 건설 사고 카운트 전광판은 만들어진 이래로 단 한 번도 '0'이었던 적 없단 사실을. 나는 언제나 그 애가 전광판에 뜬 '1'이 될까 봐 무서워하면서도 그 상상을 끊임없이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 이 년 넘게 그 무전을 들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다. 사고를 당해 죽은 노동자 중, 누구도 제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모두 얼른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뿐이니까. 

- 그래서 누구도 남은 이들에게 한 줄의 말조차 내뱉지 못했다.

 

-  손가락이 잘리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게 되었지. 하지만 손가락을 도로 붙인다고 해도 손가락이 잘렸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잘린다. 손가락을 붙인다. 이 두 사건은 서로 합치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고, 덮을 수 없다는 걸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걸까? 무엇보다 클론이 죽음 앞에서는 무용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클론 제작 동의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그걸 봤는데, 그 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서명을 했다. 그 글자는 아주 조그맣게 쓰여 있어서 나에게만 보였던 걸까? 

 

- 믹서에 넣어 갈듯이, 사람도 재료로 같이 갈아버리는 거라고. 너의 안전을 미리 신경 써주는 것보다 클론을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이제 더 쉽고 싸서 그런 것뿐이라고. 그렇게 화를 냈지만 정작 나는 그보다 더 큰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무전을 들으며 불안해했으면서도 나는 내심, 그게 너는 아닐 거라고 믿었던 거다. 철석같이. 

 

- 무모하고 위험한 건 싫다. 따분할 만큼 평온한 일상을 원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게 평화의 기본 조건이라는 걸 그 애를 좋아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서 이제 다시 따분한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 먹먹한 슬픔을 덮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불처럼 잘 포개어 옷장에 넣어둘 수 있을 줄 알았어. 가끔씩 꺼내 덮었다가 언제든 접어 넣을 수 있게. 비록 지금은 그 무게에 눌려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 어느 날 그 애는 식물이 들려주는 행성 여행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이 행성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행성과 전혀 다를 것이라고. 지구 대기를 통과한 태양의 광자가 밤의 유성 쇼처럼 보일 수도, 바람의 소리가 교향곡처럼 들릴 수도, 소리의 파동이 해일처럼 밀려올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어떤 나무의 하루는 아침이 겨울이었다가, 동이 틀 무렵 봄이었다가, 한낮에 여름을 지나고 해 질 녘 겨울에 닿을 수도 있었다. 또 이 행성이 아주 작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뿌리 박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식물은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이 행성을 돌고 있으니까. 

 

- '식물은 뿌리를 박은 상태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개체일 거야. 씨앗과 꽃가루를 동물과 바람이 옮겨주잖아. 지구 반대편까지도. 이보다 아름다운 협력은 없을 거야.'

 

-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의주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받고 싶지 않아서 한참을 망설였더니 화면이 어두워졌고, 끊긴 전화를 보자 어쩐지 이 모든 게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장 다시 울리는 전화를 보고 직감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처절해지겠구나.

 

- 아직도, 왜 그렇게까지 최악이었어야 했을까 생각한다.

 

- '네가 악몽을 꾼 이유구나. 너는 꿈에서 나무였던 거야.'

'나무는 병든 게 아니야.'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 애가 말했다. 그 애가 나무였었기에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나무는 복수하기 위해 자살한 거야. 인간들을 몰아낸 거지. 이 행성에서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던 거야. 자신을 찾아오던 새와 다람쥐, 뱀, 그리고 나비와 벌이 더는 오지 않음에 분노를 느낀 거야.'

- 그 애가 악몽을 꾸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무의 치열한 복수극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 인간은 그렇게 지하로 쫓겨난 거야.

 

- 나는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그 애가 내 팔을 붙잡아 도로 앉혔다. 쉿, 쉿.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스피커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진 나뭇잎 사이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톨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허리랑 어깨 좀 펴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걸 꾹 참으며 그 애와 나는 조용히 톨가를 응원했다. 
'톨가 발치에 있는 저 꽃, 저거 토마토 꽃이거든. 토마토 꽃의 꽃말은 사랑의 결실이야.' 

- 그 애가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였고, 톨가가 디에고를 끌어안았다. 그 애는 토마토 꽃이 사랑을 이어준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꼭 그 애가 주문을 건 것처럼 느꼈다. 아주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느끼게 하고, 사랑을 이뤄지게 하는 그런 모든 것을 다 부릴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닐까.

 

- 어쨌거나 나는 디에고를 끌어안던 톨가의 단단한 팔을 기억한다. 그 팔은 톨가가 만든 최초의 울타리다. 모험만을 꿈꾸던 톨가가 만든 오두막. 그곳에는 디에고가 있다. 이제 톨가는 태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부터 집을 지켜야 한다.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겠지.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외골수가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 그러니 톨가의 결정에 아무런 서운함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톨가가 함께한다고 하지 않음에 안도한다. 같이 간다고 했으면 화를 냈을 거야. 디에고를 나처럼 만들 순 없으니까.


- 그와 동시에 우리를 말리려는 톨가의 마음도 이해한다.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고, 나였다면 톨가보다도 더 격렬하게 말렸을 것이다. 새삼 톨가의 침착함에 감탄한다. 

 

-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잡힐 거야." 
한참 뒤에야 톨가가 입을 연다. 의주가 웃는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땅콩통을 다시 들어 흔든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나갈 구멍이 있긴 있다는 거구나. 너는 그걸 알고 있고."
의주는 무엇이든 잘 꿰뚫어서 탈이다. 톨가는 반박하려다가 이내 수긍해 고개를 끄덕인다.

 

- 차라리 다른 친구들이 조잘조잘 떠들다 까무룩 잠이 든 후에도 혼자 깨어 하염없이 스크린 위의 별을 보고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마르코는 별자리의 정확한 이름도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게 반드시 그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충분한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 여름밤, 톨가의 말을 물꼬 삼아 나눴던 대화가 그랬다.

'가짜야, 전부. 별이란 건 없어.''

 

- '합리적인 의심이네. 실제로 본 적 없으니 알 리 없지.'
의주가 톨가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가 행성이라는 것도 알 수 없는 거 아냐? 확인해 본 적 없으니까 잘 만들어진 우주선일 수도 있지.' 
나는 상상을 덧붙였다.
'우주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아? 우리 우주 본 적 없잖아'

 
- '잘 만들어진 월패드 세상일 수도 있지. 어차피 이 세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며?'
 

- '너무 아름다운 건 의심해 보는 게 좋아.'
톨가가 훈수를 두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 '저번에 유오가 그러지 않았나? 식물은 아름다운 것일수록 독을 품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그럼 저것도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다고 의심해 봐야지. 너희는 정말 지상의 하늘에 저런 별이 반짝였을 거라 믿어? 저런 하늘을 두고 인간이 전쟁을 벌였다는 건 영 앞뒤가 안 맞아. 종일 하늘만 쳐다보며 별을 탐구했어도 모자랐을 거야.'

 

- '응, 온실에 식물이 가득한 걸 확인하는 거야. 그럼 숲이 있다는 거니까.'
'숲이랑 별이랑 무슨 상관이야?'
유오의 대답에 치유키가 물었다.

'그렇게 다양한 개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지되는 숲이 있는데, 별이 없겠어?'

 

- "우리 다시 다 함께 별을 볼 수 있는 거지?"
톨가가 묻는다.
그 별은 진짜가 아니고 다시는 다 함께 볼 수도 없지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 좋아하는 것을 대할 때 사람들의 표정은 이토록 닮아 있구나. 나는 그게 부러웠던 것 같다. 여태껏 한 번도 저런 표정을 지어본 적 없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는 쓸쓸함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애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키머러를 질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둘 다일 수도 있지. 그 애를 좋아하고 난 뒤부터는 대개 감정들이 서로 엉겨 붙어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철새들은 때가 되면 다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거. 따뜻한 곳을 찾아 계속 날아다니는 거지. 새들의 눈에는 방향을 알 수 있는 단백질이 있대. 지구의 자기장을 통해 방향을 감지한다는 거야. 모든 생명이 각자 자신만이 가진 방식으로 지구를 살고 있었어. 인간이 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지.' 

 

-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숱한 대화를 나눠왔던 키머러에게 상대방의 작은 행동, 약간의 목소리 변화, 시선의 이동 같은 것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손님을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친구인지 애인인지, 아니면 짝사랑 상대인지 따위를 미약한 변화로 알아채는 것이다. 그건 시간을 통해 체득한 능력인 셈이다.

 

- '소마, 너도 이제 이해할 거라고 믿어. 친절하지 않게 찾아오는 감정들이 있다는 거. 굴복하면서도 정복해야만 하는 그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느라 온 기력을 다 쓴다는 거. 사랑은 정말 체력이 필요한 일이야, 여러모로.'
나는 온몸으로 동감했지만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 한 번 토닥일 때마다 그 손짓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는데 그게 '괜찮아'인지 '울어도 돼'인지 '이해해'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것들의 덩어리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뒤, 키머러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네 탓이 아니야.'
그건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키머러의 말은 내 귓가를 맴돌다 흘러가버렸다. 안다. 나를 짓누르는 것이 비단 슬픔뿐은 아니라는 걸 나는 그 순간에도 알았고 몇 날 며칠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도 알았지만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를 짓누르는 것이 온전히 슬픔뿐이어야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키머러는 그의 몸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말해주지 못했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은, 평소에 설준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뜻으로 느껴질 터라 키머러는 그런 자신의 관심이 설준에게 부담이나 징그러움으로 다가갈까 두려웠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 순간의 내가 또렷해, 소마.'

 

- 키머러는 그 애의 죽음이 나에게도 같은 형태로 남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 머리카락이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건 키머러의 능력이니까. 초조해하고 망설이던, 무언가에 골몰하고 후회 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 '그 사람을 살리고, 불쾌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거야.'

 

- 하지만 꿈속의 나는 망설이다 끝끝내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현실의 나와 다를 것 없는 선택을 한다. 붕괴 조짐을 목격했다는 통화를 들어놓고서, 너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알아차릴까 두려워서 그 불길함의 징조를 애써 무시했다. 책상 밑으로 내렸던 내 손과 함께. 

 

- '하지만 소마,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살리지는 못했을지언정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해. 그리고 그게 맞아.' 

 

- 그렇지만 정말로 키머러가 그 말을 믿고 산다면 나를 안고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리 없다고, 키머러도 매번 그걸 실패해서 나를 빌미로 다시 또 주문을 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 입안의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졌고, 나는 이제 그 애를 생각하면 내 목을 조르고 싶다. 

 

- 나는 문에 어른거리는 물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사방이 푸른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을 향해 뒤돈다. 

 

- 나는 친구들에게 별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걸 알아. 겁을 조금 주고 집에 돌려보냈을 거야. 그래야만 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직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은 너의 책임 매니저도 그냥 집에 돌아갔는데, 어떻게 친구들이 벌을 받겠어?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고,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는걸.  

 

-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너를 왜 데리고 왔느냐고 물었지. 다 알면서도 묻는 거였어. 정말 몰랐다면, 나와 네가 누구인지부터 물었을 거야. 그래서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어. 내 마음을 재단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결국 그 애의 죽음은 그렇게 한 줄로 남을 것이다. 8월 17일 13시 11분 23초경 T7-033 구역 지반 붕괴로 노동자 한 명 사망. 그 줄에는 그 애의 이름도, 그 애의 삶도, 그 애가 알고 있던 식물에 관한 지식도, 그 애의 그날 저녁 약속도 담기지 않는다. 그런 것의 집합이 그 애이지만 죽음은 간략하고 명료하다. 멀리서 보면, 별것 아닌 한 줄이 된다. 그 애를 사랑했던 사람만이 그 한 줄을 뜯어먹고 살 것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선과 선 사이에 촘촘히 박힌 삶을 그리워하면서. 

 

- "하지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은 거의 없지. 이곳에서의 죽음은 더더욱. 도시의 유지를 위해 모두가 삶의 반을 노동에 쏟아 삶을 위해 삶을 버리는 거야. 평생 쳇바퀴 속에서 달리는 거지.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죽음뿐이야. 원래는 지구의 유기체가 하던 일을 이제 인간이 하는 거란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계속 돌려야만 해. 그럼 죽음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니? 쳇바퀴를 벗어나 자유로 나가는 일. 어때? 좀 부러워지지 않니?"  

 

- "다 유별나게 억울하고 슬프면 도대체 일은 누가 해? 언제 일을 하느냐고!" 

 

- "여기는 다 똑같아. 다 균일하게 태어난다고. 누가 더 불행하고 불리한 것 없이 같은 수준의 삶을 사는데 어떻게 더 억울할 수 있겠어? 나는 그런 엄살이 정말 싫어. 슬프다고 핑계 대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정신재활이 필요하지. 자기 연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지." 

 

- "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을 못 믿는 표정이네. 고작 흔적을 지운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없던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거지? 되고말고, 사람은 원래 그렇게 잊히는 거란다." 

 

- 세상에 없던 존재가 되는 건 두렵지 않은데 친구들마저 나를 잊을까, 그건 좀 무섭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이 나를 잊을 것 같지 않다. 만에 하나 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은가?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그만인 것을.

 

- 그러다 넘어지겠어
그 애가 옆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 여기서 넘어지면 죽어, 조심해.
그 말을 듣자 허탈함에 웃음이 터진다. 그 말은 언제나 내가 건네던 말이다. 나한테 말을 거는 그 애가 진짜 그 애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 애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내가 했던 조심하란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부탁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진 않았을지 걱정된다. 

 

- 그건 어차피 내가 아니잖아. 숲을 보여줘 봤자 무슨 소용이야? 나는 이미 죽었는데. 그러니까 돌아가.
사라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침대에 누워, 보고 싶다고 내내 생각했던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왜 이제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악을 쓴다. 그 말들은 내가 몰랐던 나의 무의식처럼 느껴져 징그럽다. 계단에 메아리처럼 퍼지던 내 목소리가 잠잠해졌을 즈음 나는 그 애를 두고 묵묵히 걸어 올라간다. 

- 나를 잊고 마냥 행복할 수는 없어? 
그럴 방법은 없다. 드문드문 행복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잊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다면 마냥 행복할 수 없다. 내가 행복할 방법은 딱 하나다. 애초에 그 애가 죽지 않는 것. 

 

- 식물은 죽지 않아, 소마. 
그 애의 말에 나는 또다시 이상함을 느낀다. 나에게 해준 적 없던 말이다.

- 끊임없이 순환하며 새 모습으로 계속 재탄생해. 하지만 그건 식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행성의 시스템이야. 모든 생명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씨앗처럼 뿌린다는 걸, 비록 나는 없더라도 내 삶은 이 행성 전체에 퍼져 다른 생명을 꽃피우게 한다는 걸 잊지 마. 미안해.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말뿐이야. 그래도 기억해 줘. 이 말을 너한테 꼭 해주고 싶었어. 흙이 무너지던 순간에 말이야. 

- 다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던 그 애가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컴컴한 어둠뿐이다. 그 애를 불러보지만 대답 대신 숨소리가 들린다. 산소호흡기에 뿌연 숨을 내뱉는 그것의 숨소리다. 문틈으로 빛과 함께 새어 들어온 바람이 가지런한 그것의 머리카락 한가닥을 흔든다. 

 

- 흰색 반달무늬가 박힌 커다란 꽃을 본다. 땅에 붙은 꽃에는 줄기와 잎이 보이지 않는다. 다섯 장의 커다란 꽃잎 가운데 동그란 공간이 있고, 그 속에서 악취가 풍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 애는 꽃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긴다고 했는데 지상에 살았던 인간들에게는 이 냄새가 향긋했던 걸까. 숨을 참고 한 걸음 더 내딛지만 나는 곧 주변에 이와 같은 꽃이 한가득,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피어 있는 것을 본다. 냄새 탓인지 기침이 심해진다. 피곤함을 느낀 순간 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진다. 업혀 있던 그것은 다행히 커다란 꽃잎이 받쳐준 덕분에 비스듬히 땅에 떨어진다. 쉬었다 가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다. 몸에 힘이 들어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 나는 눈을 감는다. 손등이 간지럽다. 또 벌레가 지나가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만져보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다. 

 

- 그러다 네가 나를 꽉 끌어안는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안아본 적이 없어서 나는 이게 꿈인 걸, 꿈에서 또 깨닫는다. 여전히 너에게서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른다. 왜 부르냐고 묻지만 내 말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른다. 소리는 점점 내 가슴과 몸을 떨게 하는 진동으로 전해진다.  

 

- 가까이 다가온 그것의 몸에는 푸릇푸릇한 이끼가 붙어 있다. 그것이 내 옆에 앉는다. 

 

- 나는 이제야 안다, 유오는 따끈따끈하구나.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나는 추위를 느끼며 유오의 품에 파고든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지만 나는 유오의 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린 호흡을 뱉는다. 

 

- <이끼숲>

 

 


 

- 하지만, 지하 도시의 생활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단순히 그들이 추방된 인류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곳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진 세계로 거대한 하나의 판옵티콘과 같다. 

 

- 경제 활동이 불가피한 이유는 'VA2X' 때문이기도 하다. VA2X는 "하루에 한 알" "지하 도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모두들 밥은 먹지 않더라도 이 약만큼은 사 먹는다는 점에서 VA2X는 인식 칩과 함께 사람들을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복용을 오랫동안 중단하면 환각, 정신 분열, 우울증 따위의 정신 질환이 발생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약을 복용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일인지, 아니면 약이 복용자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와 같이 인간에 대한 강력한 제재로 위원회는 도시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의 유형은 오직 한 가지다. 지하 도시 전체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 그렇기에 지하 도시에 자본주의의 논리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다

 

- 게다가 사고 위험이 있는 직업의 경우에 클론을 만드는 것 또한 그렇다. 이는 일종의 "신체 보험"으로, 클론을 제작할 경우 사고가 발생해도 "별다른 소송이나 피해 보상을 요구"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하지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구한다는 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막는 것인데 나는, 우리는 언제나 일이 일어난 뒤에야 그곳이 위험했음을, 우리가 위태로웠음을, 세상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안다. 항상 먼저 간 이들이 남은 자들을 구한다. 

 

- 모두가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즐기고, 모든 걸 누리고, 마음껏 행복했으면 한다. 누군가의 행복과 즐거움에 그 어떤 위험도 없길 바란다. 

 

- 이런 말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다 바라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 이 행성에 우리가 머무는 동안, 부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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