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2018.08.30
'리뷰는 나중에 몰아서 써야지'라고 생각하면 읽는 동안에는 마음이 편안하다. 아무래도 당장 생각해 보고 싶은 포인트라거나, 아직 결말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겼던 의문 같은 것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대신 전체적인 인상이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이 나는 것들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활어회와 숙성회 같은 느낌이랄까. 한국에서는 식감이 살아있고 시각적 자극이 강한 활어회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근육이 풀어지고 감칠맛이 깊어지는 숙성회의 부드러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걸 삭히는 단계까지 가면 또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는 나름대로는 꽤 공을 들여 읽게 된 책이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을 읽던 도중이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전 시리즈를 끊김없이 읽고 싶어졌다. 바로 확인해 보니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만 제외하고는 준비가 되어 있어서,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만 구하면 되겠다 싶어 소속 도서관으로 상호대차를 걸어두었다. 이송요청한 도서관도 가까운 편이라 하루면 충분할 터였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하나는 내가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에 <매스커레이드 이브>까지 다 읽어버렸다는 것. 둘은 <매스커레이드 나이트>가 다음날 오후까지도 승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 해서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을 찾아 아직도 기세가 식지 않은 폭염을 뚫고 원정을 다녀오게 되었다. 하루이틀만 기다리면 대출이 가능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 구매하면 다음날에는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 당장 읽고 싶은 마음에 져버렸다. 다른 읽을거리도 많은 사실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정이었다.
개인적으로 <매스커레이드> 시리즈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세부 장르가 존재하는데, 이 시리즈는 히가시고 게이고의 유명작들과도 한국에서 주로 흥행하는 추리소설 장르와도 궤를 달리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스테리 소설이나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드라마가 가미된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되려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다. 사건에 숨겨진 기발한 트릭이나 작가와 독자가 함께 범인을 추리해나가는 두뇌게임적인 요소가 적기 때문이다. 환상소설이나 괴기소설의 기괴한 분위기도 없고, 사체나 사건상황이 깊게 묘사되는 그로테스크함도 없다.
(이쯤에서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히가시고 게이고의 소설들 중에서도 특히 이런 분위기 -추리보다 서사에 집중하는 듯한- 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해서 <매스커레이드> 시리즈는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반복되는 의문의 범죄' 같은 형식이 아니다.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존재하지만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건이자 일상이다. 물론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역시 별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던 장면이 복선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건'이 중심에 존재하느냐,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이 중심에 존재하느냐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이 시리즈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삶'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본다. 사건의 전에도, 후에도 자신만의 삶이 있고 그것을 살아나가는 인물들. 특정 사건을 위해서만 창조되지는 않은, '살아있는' 인물들.
각 권 사이에 몇 년 단위의 시간 간격이 있는 것도 시리즈의 맛을 더한다. 시간의 흐름이 인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지난 이야기에서 경험한 일로 인해 바뀐 가치관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발표 시기상 상당한 텀이 존재하는 시리즈라 기다려준 독자들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좋아하는 작품과 함께 나이들어 간다는 건 때로는 그 자체로 감동적인 일이 되기도 할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각 권은 그 자체로 기승전결이 완결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해서 가능하면 시리즈 전체를 읽는 것을 추천드린다. 개별 권으로 충분히 매력이 있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변화해 가는 인물들이 상당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스커레이드 나이트>에서의 나오미보다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이나 <매스커레이드 게임>에서의 나오미 쪽이 더 마음에 든다. <나이트>에서는 아무래도 프런트가 아닌 컨시어지라는 특수 데스크를 맡고 있어서인지 조금 캐릭터가 변한 느낌이 있었다. '고객의 요구사항에 어떻게든 응대하고 만족시킨다'라는 호텔리어로서의 대신념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 자체가 업무가 되어버려 자신의 신념에 따른 주체적인 선택을 보여줄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우지하라라는 인물 또한 매력적이었고, 이전 작품과 동일하지 않은 구도로 구성하고자 한 의도 자체는 좋았다.
특히 엔딩만 놓고 본다면 네 작품 중 <나이트>의 엔딩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제일 중의적으로 해석되는 엔딩이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미리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멈추시길 바란다.
내부에서 바라본 시선과 외부에서 바라본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 또한 현관이나 우지하라의 표정 등을 언급하며 이 점을 강조했는데,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싱글이나 트윈이 아니라 더블로 예약했다는 사실이 눈에 걸렸다. 특히 전작에서의 식사자리가 이번작 극초반에 제안한 식사자리와 겹쳐지며 묘한 뉘앙스를 띠게 되는데, 인도어 식사를 제안한다는 건 거의 확실한 사인이라 볼 수 있다. 인상 깊은 것은 그 제안에 대한 대처다. 예약상황을 모를 리 없는 입장에서 내일밤을 제안한다는 것은, 오늘은 고객이지만 내일은 아니라는 부드러운 거절인 것이다. 하지만 또 완전한 거절로는 들리지 않는 매끄러움이 일품이다. 제안자 역시 그렇게 헤아렸는지 건승을 기원하다가, 한 번 더 오퍼를 시도한다.
어느 쪽으로도 깔끔하게 해석되지 않는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열린 결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이렇게 어떻게 해석해도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나면 오래도록 곱씹어 보곤 한다. 잔향처럼 남는 그 느낌이 좋다. 반드시 어떻게 결론지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즐거웠다.
- 유니폼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직장용이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호텔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것과 동시에 탈의실 로커에 넣어둔다.
- 착신 표시를 확인해 보니 신입 프런트 클러크 요시오카 가즈타카였다. 프런트 카운터 너머를 살펴봤지만 그의 모습은 없었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라고 나오미는 직감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프런트 클러크가 컨시어지에게 전화할 일이 없다.
- "조금 전에 여성 고객님이 체크인을 하셨는데 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십니다. 예약 때의 조건과 맞지 않는다고요."
나오미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꾹 참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으로 옮겨드리면 되잖아요. 이 시간이면 아직 빈방이 있죠? 그런 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뇨,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잠깐 이쪽으로 와주시면 안 될까요?"
- 나오미는 창가까지 들어가 커튼을 젖혔다. "아키야마 고객님, 이쪽으로 와서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아키야마가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머뭇머뭇하는 느낌으로 포스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정체는 풍선이었다. 어제 행사에서 쓰고 남은 흰색 풍선 헬륨가스를 주입해 포스터 바로 앞에 자리한 건물 옥상에 띄운 것이다. 그 숫자는 300개 정도였다. 물론 건물 관리회사에 허가를 얻었다.
"일부러 저런 곳에 풍선을..." 아키야마가 중얼거렸다.
"어떠십니까? 마침 계절이 계절이라서 저곳에만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나오미가 물었다.
아키야마가 크게 감동한 듯한 얼굴을 나오미에게로 향했다. 이 여자 손님이 제대로 눈을 맞춰준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 "정말 대단해요. 미안합니다, 내 사정만 생각하고 몰아붙여서."
"아뇨, 고객님께서 사과를 하시다니,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나오미는 살짝 손을 저었다. "저희야말로 고객님의 희망 사항을 여쭤봤으면서 그 의견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큰 폐를 끼쳤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부디 오늘 밤 이 방에서 마음껏 야경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는 금지. 호텔리어는 입이 찢어져도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새삼 몸에 스미도록 배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 총지배인실 앞에 가자 심호흡을 한 뒤에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라는 후지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머리를 숙이며 실례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사무실로 한 걸음 들어가 문을 닫고서야 총지배인의 책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와 똑같이 온화한 표정의 후지키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곁에 서 있는 사람은 숙박부장 다쿠라였다. 그 광경은 눈에 익은 것이지만 오늘은 또 한 사람, 나오미의 시야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옆의 응접용 소파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중반, 얼굴이 크고 턱이 가로로 길다. 얼핏 온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빛이 날카롭다.
나오미가 아는 인물이었다. 너무 잘 알아서 순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 이나가키가 마치 사냥감이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쓰윽 자리에서 일어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오미는 혼란스러웠다. 인사말조차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요시오카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금지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 흘러나오는 노래는 <원 핸드, 원 하트>였다.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나오는 음악이다. 슬로왈츠의 단골 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아, 리버스 체인지부터 시작합니다. 원투쓰리,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여성 강사의 구령에 맞춰 닛타 고스케는 열심히 스텝을 밟았다. 저도 모르게 발밑을 쳐다볼 뻔했지만 고개를 숙이는 건 금지사항이다.
"좀 더 팔을 넓게 펼치시고, 자세가 무너지지 않게. 네, 그렇죠, 좋아요."
- 버티컬 핸드 포지션으로 닛타와 손을 맞잡은 강사는 이 댄스교실을 운영하는 부부의 외동딸이라고 들었다.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서른을 앞둔 정도인 것 같았다. 눈도 입도 큼직큼직한, 화려한 용모의 상당한 미인이다. 새빨간 셔츠가 잘 어울렸다.
"아주 좋아요. 꽤 익숙해진 것 같은데요?"
"이제 겨우 몸이 기억해 주는 모양이에요." 닛타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강사님 덕분이죠."
- "아이, 그럴 리가." 상대는 미소를 지었다. "닛타 씨의 재능이에요. 개인 레슨 몇 번 받고 이렇게나 잘하시다니. 댄스는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라고 하셨죠?"
"아버지 직장 전근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부모님이 반강제로 배우라고 했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댄스를 못하면 제대로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면서."
"좋은 충고를 해주신 것 같은데요."
"여기 댄스교실 포스터를 보고 오랜만에 춤추고 싶어 졌는데, 오기를 잘했어요."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어때요, 다음에 식사라도 함께할까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닛타의 제안에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눈이 둥그레졌지만 곧바로 웃음을 지었다.
"감사 인사는 괜찮지만, 식사라면 언제든지."
"와, 다행이네.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네,라고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한 시간 안에 오라고 하셨잖아요." 닛타는 손목시계를 선배 형사에게 내보였다. "아직 15분 전이에요."
모토미야는 흘끗 시계를 넘어다보았다. "어디 거야?"
"예?"
"어디 시계냐고. 세이코야, 시티즌이야, 아니면 카시오?"
"오메가인데요." 닛타는 검은 문자판에 시선을 던졌다. "시간, 틀리지 않을 텐데?"
"얼마야?"
"예?"
"시계 가격 말이야. 빨리빨리 대답해."
"20만 엔쯤 줬던 것 같은데..."
모토미야는 혀를 끌끌 차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
"흥, 좋겠다, 독신으로 사는 녀석은 돈도 펑펑 쓰고, 나는 황금 같은 휴가에도 가족 서비스를 하느라 녹초가 되는데."
아무래도 시간 확인이 아니라 괜한 트집을 잡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모토미야도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인물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게 어쩐지 뜻밖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놀아주기라도 했던 것인가. 의외로 집에서는 다정한 아빠인지도 모른다.
- "야구치 씨 팀이야. 우리는 저 친구들이 맡은 사건을 지원하게 될 테니까 자네도 그렇게 알고 있어."
“우리 팀이? 대체 왜요?"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몇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목소리 좀 낮춰." 모토미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가 있어. 우리한테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있다고. 하긴 뭐, 그 대부분이 자네와 관련된 것이지."
"저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모토미야가 입가를 히쭉 틀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사정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닛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야구치 경감이 인솔하는 팀의 면면들을 새삼 살펴보았다. 같은 수사 1과라고 해도 다른 팀 형사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다.
- 아 참, 그렇지,라고 닛타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 인물이 시나가와 관할서에서 경시청 수사 1과로 배속되었다는 소식을 본인이 보내준 메일로 알았던 게 올 4월이다. '축하드립니다. 한잔하십시다'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그 약속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름은 노세라고 한다. 그가 시나가와 관할서에서 근무할 무렵, 닛타는 딱 한 번 콤비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어딘가 우둔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민완 형사에 머리 회전도 빠르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었다.
- 마지막으로 나타난 사람은 관리관 오자키였다. 논커리어인데도 경정까지 치고 올라온 인물이지만, 현역 형사 시절에도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 특유의 직인 같은 수사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독창적인 발상으로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급 정장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는 세련된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몸에 밴 게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오자키가 한가운데 서서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단숨에 분위기가 팽팽히 긴장했다.
(역자 주 : 지방직으로 채용된 경찰관의 속칭, 국가직에 속하는 '커리어' 경찰과 구분하여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지방직 경찰은 승진 상한이 정해져 있다.)
- "이나가키 팀이 꼭 필요한 거야. 좀 더 말하자면 닛타 씨, 당신이라는 주인공은 빠뜨릴 수 없어."
닛타는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계장님도 완전히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나가키 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직속 부하가 구세주 대접을 받는 거라서 분명 자랑스러울 거야."
"명령하는 쪽은 그걸로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쪽은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닛타는 휘휘 머리를 내젓고 맥주를 마셨다.
- 몇 년 전, 도쿄 시내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행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를 해독한 결과, 다음에 사건이 일어날 장소는 호텔 코르테시아도쿄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자 오자키 관리관이 생각해 낸 것이 몇몇 수사원을 호텔 직원으로 위장해 잠입시킨다는 작전이었다. 그때 프런트 클러크로 위장하고 현장에 나가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닛타였다. 영어 회화가 유창하고 생김새가 세련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행히 범인은 체포할 수 있었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면 닛타는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수사하는 것보다 호텔리어로서의 업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직업이 그토록 힘든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두 번 다시 안 한다,라는 것이 본심이었다.
- "신고자와 밀고자, 나아가 범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추리는 어떨까요?"
노세는 가느다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오, 대담한 의견이네."
"그 밀고장은 경찰에 대한 도전이었어요. 호텔의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에 나타날 테니 체포할 수 있으면 해 봐라,라는 것이죠. 그런 도전을 왜 하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노세는 맥주잔을 비우고 큭큭큭 목을 울리며 웃었다.
"자네의 유연한 사고방식에는 항상 놀란다니까. 그런 건 아무도 생각을 못 했거든. 좋아, 내 머릿속 한 귀퉁이에 넣어둬야겠군. 흠, 놀랍네, 놀라워."
닛타가 반쯤 농담으로 얘기한 의견을 무시하는 일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노세야말로 유연한 사람이다.
- "그렇게 깊은 관계였으면서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건 비밀로 해야만 하는 상대였다는 얘기일까요?"
"응,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
"상대 남자에게 가정이 있었다든가?"
그렇지,라고 노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점원이 옆을 지나가길래 닛타가 불러서 하이볼을 주문했다. 노세는 생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 하지만 이 작업은 그리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단순히 종이로 기모노나 양복을 만드는 것이라면 몇 군데 업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실제로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만들어내는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복, 게다가 실용성이 뛰어난 옷이라고 하자 어디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디자인을 보여주면 그 모양대로 만들어줄 수 있다, 다만 강도나 내구성은 보증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오미 역시 실제 전투복에 어느 정도의 기능성이 요구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한마디로 전투복이라고 해도 용도에 따라 다양한 옷이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오미는 고민에 빠졌다. 조지 화이트의 의견을 다시 물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전에 다시 한번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컨시어지는 그저 고객이 하라는 것만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그 끝에 생각난 것이 '이를테면'이라는 말이었다. 조지 화이트는 '이를테면 전투복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거칠게 다뤄도 괜찮을 만큼 질기다는 점을 어필할 수만 있다면 꼭 전투복이 아니어도 될 터였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조사해 보았다. 종이 재질의 의류 제작은 크게 나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포 즉 종이 천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지포는 종이 원료의 실로 짜낸 천으로, 이것을 사용한 의류는 가볍고 감촉이 좋아 예전에는 여름용 의류 소재로 쓰였다. 또 한 가지는 지의 즉 종이옷으로, 화지로 직접 의류를 만들어낸다. 어느 쪽인가 하면 전자는 고급품이고 후자는 저소득층이 애용해 온 모양이었다.
- 지의에 대해 조사하다가 눈에 들어온 한 문장이 있었다. 야전에서 방한복으로 무장이 착용한 적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 문장을 보고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즉시 몇몇 업자에게 문의해 보았다.
- 그날 밤, 나오미가 조지 화이트에게 제안한 것은 자의로 만든 스노보드웨어였다. 그것이라면 만들어줄 수 있다는 업자를 찾아낸 것이다. 프로 스노보더 선수에게 그 옷을 입히고 실제로 눈 위에서 달리게 하면 그 실용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보았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조지 화이트는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오미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원더풀!"
- 그는 그녀의 아이디어를 절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이해해 준 것에 대해 연거푸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에는 앞으로도 꼭 이 호텔을 이용하게 해 달라는, 호텔리어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 전화를 끊고 뭔가 메모한 뒤, 그는 나오미가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오랜만이에요"라면서 돌아보았다.
나오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몇 년 전과 똑같이 형사라고 생각되지 않는 세련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전한 것 같군요."
"그쪽도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요?"
- 바로 옆에서 구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오미 씨 말대로 이 카운터에는 단골손님 같은 중요한 고객님이 찾아주시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쪽에 고객님에 관한 데이터가 잘 저장되어서 대응하기가 쉬워. 어떤 고객님이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1층 프런트 쪽이 더 까다롭지. 그런 의미에서도 닛타 씨는 우선 여기서 연습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 일단 연습부터 하는 건가요?" 나오미는 닛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감이 둔해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뭔가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서슴없이 지적해 주시죠."
- "아니, 닛타 씨는 내일부터 1층 프런트에 서게 될 테니까 담당자는 다른 사람이 될 거야. 이쪽 플로어는 다른 형사분이 교대로 투숙객으로 위장해 감시에 나서게 되지. 닛타 씨 외에는 프런트클러크로 위장할 수 있는 형사분이 없는 모양이니까."
그건 그럴 거라고 나오미는 납득했다. 닛타는 특별한 것이다.
- "그러면 닛타 씨의 보좌는 누가 하지요?"
응, 그게,라고 구가는 잠시 머뭇거리는 기척을 보인 뒤에 "우지하라 씨에게 부탁했어"라고 말했다.
- "어떤 분이냐면..." 나오미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신중히 말을 골랐다. "3년 전쯤에 코르테시아요코하마에서 이쪽으로 오셨어요. 한마디로, 성실한 분이에요. 업무에 결코 빈틈이 없고 규칙에 엄격합니다."
- "뭔가 좀 바뀌었는데요."
"바뀌다니, 뭐가요?"
"샴푸 아니면 향수... 아니지, 야마기시 씨는 향수는 쓰지 않았지요?"
"글쎄 무슨 말이냐고요."
"냄새 말이에요. 그때와는 냄새가 미묘하게 달라졌어요."
- 나오미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에 의도적인 듯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란 이래저래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에요. 아니, 인간뿐만이 아니라 호텔도 그렇죠."
"그건 그래요.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찬찬히 관찰하도록 하죠. 즐거움이 불어났네요."
"즐거움? 닛타 씨가 이 유니폼을 입은 것은 수사를 위한 거 아닌가요?"
"그야 물론 그렇지만 수사 이외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게 잠복수사의 요령이거든요. 그러지 않고서는 몸도 마음도 버텨내지 못하니까."
- "네, 두 번 다시 나를 그런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에요."
"당연하죠. 하지만 야마기시 씨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뿐인가, 잠입 수사를 하는 동안에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컨시어지 업무를 맡겠다고 대답했다면서요? 왜죠?"
나오미는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왜 그랬을 것 같아요?"
닛타는 어깨를 으쓱 쳐들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니까 물어봤죠."
= "컨시어지는 어떤 곤란한 요청에도 결코 노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도망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에요. 이런 일에 냉큼 휴가를 내버린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죠. 우리를 기대하고 찾아주시는 고객님도 계실 텐데. 다만 나 이외의 다른 컨시어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데다 지난번 사건을 잘 모르고, 당연히 경찰의 잠입 수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죠. 그런 직원을 긴요한 컨시어지 데스크에 세워둘 수는 없잖아요. 결국 내가 맡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근무시간이 꽤 긴 것 같던데."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예요. 뭐, 괜찮아요. 체력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게다가 며칠이면 끝날 일이잖아요."
닛타는 감탄했다기보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닛타 씨 일행이 힘들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협조해 드릴게요."
- "고객님이 질문하시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이번 파티의 정식 명칭은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새해 카운트다운 매스커레이드 파티 나이트', 통칭 '매스커레이드 나이트'예요."
- 40세 전후, 중간 키에 적당한 몸집, 눈은 외까풀이지만 콧날이 우뚝해서 꽤 미남이라고 할 만한 용모였다. 잘 만든 고급 양복은 아마도 던힐일 것이고 코트는 진짜 캐시미어, 네모난 가방은 브릭스인가.
"구사카베 고객님,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현금입니까, 아니면 신용카드로 하시겠습니까?"
구사카베가 숙박표 기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지하라가 물었다.
신용카드로,라고 말하면서 구사카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여기 있어요. 복사하는 거죠?"
- 로열스위트에서 4박이라면 요금은 백만 엔이 넘게 나온다. 이런 고액을 떼어먹고 도망가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호텔 측으로서는 예치금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복사해 두는 것이 통례다. 구사카베도 그걸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 호텔 이용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단말기에 표시된 정보에 의하면 이 호텔의 단골은 아니었다.
- 우지하라가 카운터로 돌아와 신용카드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최상층만 가입할 수 있는 블랙카드였다. 이어서 단말기를 두드려 카드키를 발행했다. 카드키와 신용카드를 손에 들고 우지하라는 구사카베에게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이 객실 키입니다. 구사카베 고객님, 저희 호텔 이용은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십니까. 이번에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구사카베 고객님의 이번 이용에는 몇 가지 특전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를테면 조식입니다만..."
하지만 구사카베는 번거롭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손을 저었다.
"됐어요. 그런 건 궁금한 게 있으면 내 쪽에서 물어보도록 하죠. 게다가 어떤 호텔이나 비슷비슷하니까. 스포츠센터와 수영장의 이용은 무료라든가 에스테틱 살롱의 이용은 할인이 된다든가, 그런 것이지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우지하라는 머리를 숙였다. 손님이 오만한 태도를 취하면 우선은 사과부터 하라,라는 호텔리어의 규칙을 착실히 지키는 것 같았다. "그러면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세한 서비스내용이 적힌 안내장을 동봉하오니 시간 나실 때 훑어봐주십시오."
- "우지하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에." 닛타가 명함을 잡으려고 하자 우지하라는 손을 쓱 거둬들였다.
"성인끼리의 인사인데 아, 예에,라고 해서는 안 되지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불끈 화가 났지만 그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냉철함은 닛타에게도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닛타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 우지하라가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받아서 들여다보니 '프런트 오피스 어시스턴트 매니저 우지하라 유사쿠'라고 적혀 있었다.
"그쪽 명함도 주시겠습니까?" 우지하라가 말했다.
"명함? 아, 죄송합니다. 탈의실에 두고 왔어요. 경찰 배지라면 휴대하고 있는데..."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지하라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보여주실 거 없고요. 내가 말하는 명함이란 호텔 직원으로서의 명함입니다. 설마 준비가 안 된 건 아니겠지요?"
"앗, 그건 아직..."
그 즉시 우지하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 "에이, 형사 일행의 잠입 수사가 오늘 막 시작된 참이잖아요."
구가가 옆에서 거들어줬지만 우지하라는 거기에는 응하지 않고 닛타를 쓰윽 노려보았다.
"만일 고객님이 명함을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할 생각이죠? 지금 없습니다,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인데요."
닛타는 대답이 턱 막혔다. 약은 오르지만, 맞는 말이었다.
"우지하라 씨, 이제 그만하시죠." 구가가 달래고 나섰다. "명함쯤이야 어떻게든 둘러댈 수도 있는데."
"아뇨, 저희 쪽 실수였습니다."
- "피해자가 야마가타 출신이라는 건 지난번에 얘기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야마가타까지 출장을 나갔던 젊은 형사가 귀가 솔깃한 정보를 보내줬지 뭐야. 이즈미 하루나 씨의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거의 같은 시기에 도쿄에 왔다는 거야.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거였어. 그 어렵다는 닛타 씨의 모교야. 게다가 의학부."
"아, 예..." 닛타는 입을 헤벌리고 턱을 쓰다듬었다. 성적이 뛰어난 여학생이라면 법학부에도 여러 명이 있었다. 가볍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사무실 등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이도 많았다. 다들 무시무시하게 기가 세다. 의학부라고 하면 그런 경우와 똑같거나 혹은 그 이상인가. "왜 밤중에나 시간이 나죠?"
"그야 바쁘니까 그렇지." 노세가 시원하게 답했다. "아직 레지던트라서 격무에 시달리는 모양이야."
- "우지하라 씨가 오전 8시부터라고 알려줬으니까 아마 곧 이곳에 찾아올 겁니다."
"그래요? 일부러 알려줘서 고마워요."
닛타는 주위를 둘러본 뒤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어쩐지 밉상인 사람이에요. 아주 보란 듯이 블랙카드를 내밀더라니까. 그딴 거, 약간만 실적을 쌓으면 누구라도 발급해주는 카드예요. 우리 아버지도 아마 갖고 있을걸?"
나오미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도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을 닛타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왜요?" 닛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역시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 "상담 내용에 따라 달라지겠죠.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으니까."
닛타가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알고 있어요? 지금 비상사태라고요."
"잘 알죠.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 문제예요. 고객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다만," 이라고 나오미는 말을 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객님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겠죠. 그럴 때는 얘기할게요. 형사닛타 씨에게가 아니라 프런트 클러크 닛타 씨에게."
- 프런트 카운터와 마찬가지로 컨시어지 데스크도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에는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어딘가 추천할 만한 식당이 없느냐는 상담이 많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별일도 아니지만, 대개는 어려운 조건이 붙는다. 어린아이가 좀 떠들어도 괜찮은 식당, 개인 칸막이가 있고 술은 무제한이고 일인당 만 엔 이내의 식당, 자기 자리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식당... 컨시어지가 무슨 마법사인 줄 아느냐고 되묻고 싶을 만큼 손님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말하곤 한다. 때로는 이미 반년 치 예약이 밀려 있는 유명한 식당에 지금 즉시 가고 싶다고 말하는 손님까지 있었다.
- 하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다. 단순히 요리가 맛있다거나 가격이 저렴한 식당이라면 요즘 시대에 스마트폰 하나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일부러 컨시어지 데스크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컨시어지는 어떤 어려운 희망 사항에도 결코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반드시 대안을 제시해 만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규칙이다.
- 조금 전 찾아온 이탈리아인 커플의 희망 사항은 자기 나라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요리를 먹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초밥이나 튀김 정식 같은 흔한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웬만해서는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 입에 맞지 않는 것이라도 꾹 참고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낫토와 멍게는 이미 먹어본 모양이었다. 나오미는 이래저래 궁리한 끝에 두 가지 요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구사야, 그리고 또 하나는 후나즈시였다. 둘 다 강한 냄새가 인상적이어서 일본인도 질색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덧붙였다.
- "당신은 어느 쪽을 좋아해요?" 남자가 나오미에게 물었다.
"저는 둘 다 나름대로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이런 때는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다.
- 커플은 서로 상의해 답을 내렸다. 즉 양쪽 다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구사야는 하치조지마, 후나즈시는 시가현의 특산품이다. 양쪽 모두를 메뉴에 올린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이 호텔의 서비스가 일류인지 어떤지는 내 부탁을 어디까지 들어주는가라는 것으로 판단하도록 하지요."
닛타가 어쩐지 밉상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구나,라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상당히 개성이 강한 인물인 것 같다. 하지만 소중한 고객님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 "그런 절차는 필요 없어요. 내가 레스토랑에 전화해 부탁해 봤는데 안 된다더라고. 그래서 여기로 온 거예요. 어떻게 좀 해줄 수 없을까 하고."
"네에, 그러십니까..."
당연히 안 될 일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이 시즌이면 프렌치 레스토랑에는 당연히 수많은 예약이 들어와 있을 터였다. 그 손님들에게 일일이 양해해 달라고 연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좀 안 되겠어요? 내가 꼭 단둘이서만 식사하고 싶어서 그래요. 물론 비용이라면 얼마든지 낼 거예요."
- "그러시다면 별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드릴까요? 혹시 빈 곳이 없다고 해도 파티션 등을 이용해 다른 고객님들과 칸을 구분해 드릴 수 있을 텐데요." 무리한 요구에는 대안을 제시해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사카베는 손을 내두르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런 좁아터진 곳은 안 되지. 그래서는 내가 계획하는 행사를 할 수 없어요. 더구나 벽 하나로는 다른 손님의 기척을 없앨 수 없잖아요. 파티션 같은 건 더더구나 말도 안 되고."
"그러시다면..." 나오미는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다른 안을 찾아보았다.
- 얘기만으로도 듣고 있는 이쪽이 오글거릴 만큼 어설픈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임팩트도 있고, 구사카베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충분히 감격할 것이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 여부였다. 그 여자에게 들키지 않게 등 뒤에 수백 송이의 장미를 단시간에 촘촘히 꾸며놓아야만 한다. 실내가 어두워져 가는 타이밍에 하는 수밖에 없지만 스태프 한두 사람으로는 도저히 어려울 것이다.
- "정말 멋진 일을 하시네요." 나오미는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맙습니다,라고 그녀는 다시 인사를 건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 일을 팽개치고 미국에 따라갈 수는 없어요. 내가 여기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장애아를 돌보면서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스스로 살아갈 용기와 능력을 갖게 해주는 일이에요. 지금까지 계속 고민해 봤지만 드디어 답을 찾았어요. 나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 그래서 오늘 밤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절할까 했어요. 그가 분명 프러포즈를 할 거라고 짐작했으니까요. 하지만 전화나 메일로 이별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죠. 게다가 나도 그와 마지막 식사쯤은 즐기고 싶었어요."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결혼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계속 만난다든가."
나오미의 제안에 여자의 입술에 옅은 쓴웃음이 번졌다.
"아까 말했잖아요, 그건 내 사정만 앞세우는 거라고. 내가 미국에 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른 반려자가 필요해요. 나 같은 사람에게 계속 묶어둘 수는 없죠. 그리고 어쩌면 나한테도 앞으로 또 다른 만남이 있을 수도 있고요."
"... 네, 그건 맞는 말이네요."
상대의 냉철한 결심을 듣고 나오미는 침울한 말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연애가 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 "그건 좀 무모한 요구죠. 상대가 창피해하지도 않고 서로 어색하지도 않게 프러포즈에 노라고 대답할 방법을 찾아내라니, 너무 이기적인 얘기네."
"어렵더라도 생각해 내야 하는 게 컨시어지의 업무예요." 강한 어조로 딱 잘라 말하더니 야마기시 나오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한 말인지도 모른다.
- "남자가 프러포즈를 결심하는 것은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을 때예요. 머릿속에는 여자 쪽이 예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이미 완성되어 있죠. 그런 판에 노라는 말이 나온다면 분명 공황상태에 빠질걸요."
"그게 걱정이에요. 구사카베 씨는 자신만만한 분이라 거절당한다는 건 요만큼도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예 본인에게 미리 말해주면 어떨까요? 당신, 거절당할 겁니다,라고."
야마기시 나오미는 볼이 불룩해진 얼굴로 닛타를 노려보았다.
- 전화를 끊은 뒤, 닛타는 상대가 노세였다는 것을 야마기시 나오미에게 말해주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그녀도 노세 형사와는 안면이 있었다.
"그렇군요, 노세 형사님도 경시청으로... 영전하신 거네요?"
"원래부터 우수한 형사였으니까요. 게다가 나 같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에요. 착실히 자신의 발로 뛰어서 정보를 수집하고 그걸 착착 쌓아 올려 사건의 진상에 가닿거든요. 뭔가 꽁꽁 숨기던 사람도 노세 형사님에게는 술술 불어버리는 경우가 아주 많아요."
"대화술이 뛰어난 모양이죠?"
"대화술? 그건 아닌데..." 닛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 "그보다 노세 씨에게는 큰 무기가 있어요. 나한테는 전혀 없는 무기."
"그게 뭔데요?"
"그건 바로 성예요." 닛타는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나 우선 성의를 표합니다. 말투는 신중하고 항상 겸손해요. 그렇다고 은근무례한 건 결코 아니죠. 최대한 성의를 다해서 사람을 대하니까 누구라도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성의..."
"네. 나는 깜빡 계산 속을 발동하게 되는데, 그래서는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노세 씨는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아요."
- 야마기시 나오미의 눈이 큼직해졌다. 마치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뭔가를 마침내 보게 된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닛타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요. 계산 속은 좋지 않겠죠."
"엇, 무슨 말이에요?"
"어쩌면 구사카베 님 건의 답을 찾아낸 것 같아요."
"정말요? 어떤 식으로?"
"지금까지 잔재주를 부리는 쪽으로만 머리를 굴렸는데, 그런 건 성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요. 가노 다에코 씨의 진심도... 그래요, 어중간한 태도가 아니라 좀 더 스트레이트 하게 표현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야마기시 나오미의 말은 중간쯤부터 중얼중얼 혼잣말로 변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한 뒤, 문득 정신을 차린 기색으로 닛타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아, 닛타 씨, 미안해요. 내가 지금 서둘러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되니까..."
"알았어요. 건투하시기를. 방해해서 미안해요."
-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옆에서 구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시계에 신경을 쓰고 있군요."
"아뇨, 별일 아닙니다." 닛타는 대답했다. "오늘 밤에도 사무동에서 회의가 있어서 늦지 않게 가려는 것뿐이에요."
구가는 저런 저런, 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새삼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건 서로 마찬가지죠. 저도 단 며칠 동안이니까 흉내나마 내보는 것뿐이지 계속 호텔리어로 일하라고 한다면 아마 도망치고 싶을 거예요."
닛타의 말에 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요."
- "지금 당장 도망쳐도 괜찮아요." 카운터를 향하고 있던 우지하라가 한마디 던지면서 돌아보았다. "나로서는 오히려 대환영입니다."
그 말에 농담이라는 느낌 따위는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지하라 씨,라고 제지하며 구가가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닛타는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몸짓이었다.
- 뒤쪽에서는 가노 다에코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오미 일행이 있는 곳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보이는 구사카베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런 구사카베가 촛불에 입을 바짝 대고 후욱 껐다. 레스토랑 안이 한순간 완전한 암흑에 휩싸인 직후, 가노 다에코의 등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일직선으로 비춰졌다. 촘촘히 놓인 새빨간 꽃이 떠오른 광경은 저절로 숨을 헉 삼켜질 만큼 화려하고 박력이 있었다.
- 가노 다에코가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란 듯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는 이 연출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그래. 하지만 이 장미 꽃다발은 좀 더 특별해. 108송이야. 이 숫자일 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어. 혹시 모른다면 지금 바로 검색해 봤으면 좋겠는데."
역시 그런 식으로 나오는가,라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가노 다에코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108송이의 장미, 그 꽃말은 '나와 결혼해 주세요'인 것이다.
- 엇, 하고 구사카베가 놀란 소리를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장식된 꽃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장미가 아니잖아."
"그래요." 가노 다에코는 말했다. "장미가 아니라 스위트피예요."
- "미안해요." 가노 다에코는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밤을 우리의 새 출발의 날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 "그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 그래서 총지배인이 입회 자체를 금지하는 건 아닌가 하고 내심 조마조마했어요."
모토미야의 말에 이나가키는 흐흥 하고 코를 울렸다.
"그건 안 되지. 이번처럼 고객에게서 클레임이 들어올 우려가 있으니까 짐에 손을 대는 건 중지하라고 강경하게 말하긴 했지만, 수상쩍은 고객의 방을 형사가 체크해 주는 것 자체는 총지배인도 원하는 일일 거라고. 실제로 정보 제공이나 파티 참가자의 체크에 관해서는 양보해 줬잖아. 이번 협상을 통해 그 사람은 호텔 측이 경찰에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부하 직원들에게 여실히 보여준 셈이야."
- 닛타는 이나가키의 옆얼굴을 보았다. "후지키 씨의 항의는 부하 직원들을 향한 제스처였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겸하고 있다는 얘기지. 그 사람이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한 책사야.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렇구나,라고 닛타는 그제야 이해했다. 동시에 그것을 간파해 낸 이나가키의 혜안에 감탄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은 너구리와 너구리의 협상 자리에 동석했던 모양이다.
- "내 설이라면, 나카네 씨와 그 동행의 관계가 러브 어페어, 즉 불륜이라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닛타의 말에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한 분이 정말로 남편이라면 이건 상당히 어렵겠죠. 부부간에 여행 중인데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불륜 관계라면 얘기가 달라져요. 구사카베 고객님도 말했었지만, 앞으로도 그 여자분이 혼자서 기다리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어쩌면 남자 쪽에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 느낌도 들거든요."
"그건 무슨 얘기죠?"
"그 여자분이 티라운지에 혼자 있었던 것은 남자 쪽이 따로 가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를테면 부인이나 가족에게 갔다든가."
아하, 하고 닛타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 혹은 도쿄 주변에 갔을 거라는 얘기군요. 흠, 그건 그럴싸하네. 낮 시간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밤에는 뭔가 이유를 대고 이쪽으로 온다? 응, 가능한 얘기예요."
"예를 들어 그런 경우라면, 혼자서 기다려야 하는 여자 쪽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겠죠. 그런 때 기분전환을 할 상대가 나타난다면..."
거기까지 말하고 나오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 "새로운 러브 어페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닛타가 빙긋이 웃으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런데도 얼굴이 천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란 탓이리라.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를 함께 마시는 정도는 괜찮다고 해주지 않을까..."
"그렇군. 괜찮은 생각인데요?"
- 방을 아주 깨끗이 사용했다,라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나오미도 연수차 하우스키핑을 경험했었지만, 버릇 나쁜 손님의 방을 맡게 되었을 때는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였다. 쓰레기를 여기저기 어질러놓은 정도라면 얼마든지 참겠지만, 천으로 된 제품이나 벽지를 적셔놓고 지저분하게 더럽힌 경우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시간도 노력도 두 배 이상이 든다. 하지만 나카네 신이치로와 나카네 미도리 커플은 상당히 매너가 좋은 손님이었다. 젖은 수건이나 목욕가운이 아무 데나 내동댕이쳐져 있는 일도 없고 스낵과자를 사방에 흘려가며 먹은 흔적도 없었다.
- "플랫 톱이군요."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닛타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뭐죠?" 나오미가 물었다.
"라이터. 지포의 빈티지 라이터예요. 하긴 복각판이니까 가격은 몇천 엔 정도일 테지만."
- "내가 담배를 안 피워서 피우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해 보려고 이것저것 조사했던 적이 있어요."
나오미는 그의 얼굴을 새삼 골똘히 바라보았다.
"직업 정신이 투철하네요. 나도 선배에게 자주 그런 충고를 들었어요. 취미나 기호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라고."
"그거 재미있군요. 형사와 호텔리어의 업무는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공통된 부분도 있었다니."
"서로 다른 것은 목적이겠죠. 우리는 최상의 접대를 하기 위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해 상대를 알아보려고 하죠. 정말 그런 점은 전혀 다르네."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테이블 위의 책을 손에 들었다. 어느 틈에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 "닛타 씨, 손대면 안 돼요. 아까 약속했잖아요."
"총지배인은 짐을 뒤져보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뿐이에요. 만지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았어요. 이를테면 이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합시다. 그걸 주워서 테이블에 되돌려놓는 정도는 호텔 서비스로서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손님은 없을 것 같은데."
나오미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여전히 말솜씨가 대단하네요."
"기왕이면 논리적이라고 말해주시죠." 닛타는 책을 펼쳤다.
- "이 소설, 올봄에 문고본이 나왔어요. 그런데 왜 굳이 양장본을 들고 왔지?"
"이 책을 구입할 때는 아직 문고본이 출간되지 않았던 모양이죠. 오랫동안 묵혀둔 채 읽지 못했던 책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뭐, 그냥 그런 일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굳이 여행길에 들고 올까요, 부피가 큰 이런 양장본 책을?"
닛타는 다시 책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하면서 말했다.
- 닛타는 책장을 펼쳐서 내보였다. 그곳에는 출판사 광고지와 독자용 앙케트 엽서가 끼워져 있었다.
"읽은 책이라면 이런 건 버렸겠죠. 게다가 여행길에 들고 올만큼 애독서라면 따로 문고본을 구입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형사의 지적이 날카로워서 나오미는 선뜻 반론이 생각나지 않았다.
- "하긴 별다른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죠. 여행 준비를 할 때, 우연히 눈에 띈 책이 아직 안 읽은 책이라서 가방 속에 던져 넣은 것뿐인지도."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책 커버를 원래대로 씌워서 테이블의 제자리에 내려놓고, 그 대신 이번에는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박스 타입이고 개봉되어 있었다. 뚜껑을 열고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 뒤, 담뱃갑을 내려놓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 "형사라는 직업도 무척 힘든 것 같아요." 젊은 하우스키퍼가 거실의 냉장고 속을 체크하면서 말했다. "범인을 체포하려고 쓰레기통까지 훑어야 하고 정의감이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게요. 근데 닛타 씨의 경우에는 꼭 정의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요?"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라서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게임이라도 하듯이. 아마 특이한 사건일수록 열의가 불타오르는 모양이에요. 이런 기묘한 사건을 저지르는 인간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일단 호기심이 자극을 받으면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가 봐요."
- "이제부터 골프 여행을 가려는 건가? 아니면 돌아오는 길? 어쨌든 섣달그믐에 왜 도쿄의 호텔에서 2박씩이나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달랑 혼자서." 닛타는 의문을 입에 올렸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누군가와 내일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모양이지요. 그리고 1월 1일에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우지하라는 여기서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상대는 여자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 멋진 계획을 짤 정도의 사람이라면 좀 더 세련된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요? 호텔을 이용하는 데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
"어떤 일에나 처음은 있게 마련입니다." 우지하라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 "연말연시에 골프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소지한 현금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아까 보니까 예치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는 택시도 못 탈 정도인 것 같던데요."
"현금 인출을 깜빡한 모양이지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오늘이 12월 30일이잖아요, 내일부터는 지급이 중단되는 현금인출기도 많을 텐데요."
우지하라의 대답이 웬일로 조금 늦어졌다. 한 박자 틈을 두었다가 "연말연시에도 운용하는 현금인출기가 있겠지요"라고 말하고 닛타 쪽을 보았다. "그 고객님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이름표예요." 닛타가 말했다. "제가 아까 봤는데 골프 캐디백에 이름표가 없었습니다. 일일이 떼어내거나 하지 않잖아요. 보통."
- 그 뒤에도 체크인 손님이 쉴 새 없이 찾아왔다. 오늘 밤부터 투숙하는 손님 대부분이 2박 혹은 3박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을 느긋하게 호텔에서 즐기려는 것이다. 그런 손님들에 맞춰 호텔 측에서도 새해 첫 참배 투어, 설 명절 특선 요리, 니혼바시 칠복신 순례 투어 등, 다양한 플랜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물론 그 첫 스타트는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였다.
- "그러면 그 여자는 조금 전에 소노 씨와 함께 있었던 여자분은 아니군요?"
"전혀 아니죠. 딴 사람이에요." 우지하라가 딱 잘라 말했다. "아드님과 동행한 걸 보면 오늘 함께 온 여자분이 부인일 거예요. 그리고 부인 쪽에서는 당연히 소노 고객님이 이 호텔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은 모르겠지요. 그런 상황에 닛타 씨가, 항상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해버리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발을 밟히는 것도 당연하다,라고 닛타는 생각했다.
- "하지만 이쪽이 오해했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에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저희 호텔은 처음이시냐고 물어본 겁니다. 결과는 닛타 씨가 들으신 그대로예요."
닛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노멘 같은 우지하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덕분에 크게 배웠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까지 하시다니, 그야말로 프로시네요."
우지하라가 아주 조금 눈길을 떨구었다. "호텔리어로 오래 일하다 보면 누구라도 이 정도의 대응은 당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아뇨,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그 아저씨, 불륜 상대와 올 때 왜 가명을 쓰지 않았을까요?"
"맨 처음 호텔을 이용했을 때, 깜빡 본명으로 예약해 버렸겠지요. 가명이라는 게 순간적으로 척척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니면 그때는 현금이 없어서 신용카드를 써야 했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일단 처음 투숙 때 본명을 쓴 이상, 두 번째 이후부터는 다른 이름을 대기가 어려워요."
우지하라의 대답은 명쾌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생각을 더듬어 볼 것도 없이 척척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수없이 그 비슷한 경우를 경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 "덕분에 중요한 것을 알게 됐네요. 아,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평소에 불륜 상대와 드나들던 호텔에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연말연시에 찾아온다는 것은 대체 어떤 사정 때문일까요? 호텔 직원들이 자기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잖아요.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건 어떻게든 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우지하라는 말을 어물거리며 입을 슬쩍 핥았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군요. 닛타 씨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피해야 할 일이지요. 다만 조금 전에 소노 고객님의 태도로 봐서는 본인도 몹시 거북스러워하는 눈치였어요. 아마 이번에 호텔을 찾아온 것은 소노 고객님의 제안이 아닐 것이라는 게 나 혼자 해본 추리예요."
"남편 쪽의 제안이 아니다, 즉 부인 쪽에서 원해서 오게 되었다,라는 것이군요."
"이 시즌에 가족이 시티 호텔을 찾는 것은 대부분 부인 쪽의 아이디어예요. 연말연시에 이것저것 준비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정월 연휴쯤은 편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마사지숍을 예약한 것만 봐도 그런 저간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번 일로 잘 알았겠지만, 고객님 중에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 분도 아주 많아요. 그런 사정을 하나하나 헤아려가며 대응하는 것이 호텔리어의 일입니다. 수속 절차를 조금쯤 알고 있다고 함부로 응대에 나서는 것은 위험해요. 앞으로는 절대로 나서지 말아요. 아시겠지요?" 우지하라는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고서 다짐하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라고 닛타는 새삼 머리를 숙였다.
- 새로운 여자 손님이 카운터 앞으로 다가오자 우지하라는 금세 상냥한 프런트 클러크의 얼굴이 되어 응대를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닛타는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비위에 거슬렸지만, 손님을 알아보는 능력만은 누구보다 뛰어난 면이 있는 것이다.
우지하라 씨, 당신은 형사가 되었어도 아주 우수한 형사가 됐을 거예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진짜로 입밖에 내어 말했다고 해도 본인은 눈곱만큼도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 "하지만 정말로 가능하겠어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가능할 것 같다...?" 구사카베의 목소리 톤이 툭 떨어졌다.
"아뇨, 가능합니다. 어떻게든 꼭 해내겠습니다." 나오미는 서둘러 결연한 각오를 담아 말했다.
흠, 하고 품평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구사카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닛타 씨," 형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오미는 말했다. "고객님의 가면이 한순간 벗겨졌다고 해도 그걸 모르는 척해드리는 것도 호텔리어의 일이랍니다."
닛타는 한층 더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네, 잘 알죠. 그건 우리 형사들도 마찬가지예요. 가면이 벗겨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최대한 민낯에 바짝 다가가려고 하니까요."
"그런 열의가 지나쳐서 고객님과의 거리를 잡는 데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특히 조심해 주세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도 있으니까요.”
"아, 그런 거라면 염려 말아요. 내가 이래 봬도 그런 거리감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닛타는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 "최근 수십 년 동안 시계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그야말로 시간을 정확하게 알게 됐죠. 웬만큼 값싼 시계라도 하루에 단 1초도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그 바람에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이 더 증가했다,라는 설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아뇨, 처음 듣는 얘기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아슬아슬할 때까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더 쓰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 결과, 지각을 하죠. 그런 사람에게는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시계를 내준다는군요. 자칫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아 움직이게 되니까요."
- "아, 그렇군요." 닛타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윽고 갸우뚱했다. "근데 그게 아까 그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죠?"
"시계라는 기계에 지나치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닛타 씨 자신의 감각에 지나치게 기대는 건 위험할 수 있어요. 시간처럼 마음의 거리감에도 여유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나오미는 형사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과신은 금물입니다."
닛타는 가슴이 들먹거릴 만큼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기억해 두지요.”
"건방진 충고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아뇨, 중요한 걸 배웠어요."
그리고 인사를 건네자마자 닛타는 발길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 캔맥주, 하이볼, 스낵과자가 봉투 너머로 훤히 보였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노세가 하이볼 캔을 봉투에서 꺼내 닛타 앞에 내주었다. "야마기시 씨도 하이볼이면 될까? 그거 말고는 맥주밖에 없는데."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한잔쯤 마셔도 괜찮을 텐데요. 가끔은 함께해 주시죠." 닛타가 말했다. "술, 좋아하잖아요."
- 지난번 사건이 해결된 뒤 그녀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볍게 샴페인을 마시고 둘이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한 병씩 비웠다. 주량이 상당했던 것을 닛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하이볼을 좀 마셔볼까요." 야마기시 나오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지, 좋아. 올해의 마지막 밤이라서 내가 좀 넉넉히 사 왔어. 마침 잘됐네." 노세는 그녀에게도 하이볼 캔을 건넸다.
- "어때, 전혀 잘못 짚은 얘기인가?"
아뇨,라고 닛타는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높은 얘기예요." 그리고 그대로 야마기시 나오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마워요, 큰 힌트가 됐어요. 역시 야마기시 씨는 대단해요."
"별 얘기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왜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쪽으로는 미처 생각을 못할까요? 전부터 나는 그 점이 의아하더라고요."
"야마기시 씨, 그건 말이지, 남자라는 게 원래 어수룩한 동물이기 때문이야." 노세가 말했다. "자신은 못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아내나 연인이 바람을 피우리라고는 아예 상상조차 안 한다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한 거네요."
그렇지,라고 노세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맥주를 마신 뒤, 진지한 얼굴을 닛타에게로 향했다.
- "다만..." 의미심장하게 말을 멈췄다.
"다만, 뭡니까?"
"닛타 씨는 꼭 형사가 아니더라도 성공했을 거예요. 실제로 호텔리어 일도 요령껏 잘 해내고 있잖아요.”
닛타는 몸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우지하라 씨에게 번번이 혼이 나고 있는데요?"
"그래도 고객님에게 혼이 난 건 아니죠. 오히려 나카네 고객님은 크게 감동하셨어요.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는 건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기로 하면 야마기시 씨도 형사 쪽에 뛰어난 재능이 있죠. 조금 전의 지적도 아주 좋았어요."
"아니, 그건 닛타 씨와 노세 형사님이 여자를 너무 몰라서 그래요."
- 닛타 앞쪽에서는 우지하라가 체크아웃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친절한 웃음을 얼굴에 붙이고 담담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뒤쪽에 물러선 형사와는 대조적이었다.
- 하지만 그런 우지하라도 결코 낙관적인 전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더 절실한 위기감과 각오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텔에는 매일매일 다양한 인간들이 찾아오고, 그 속에 살인범이 섞여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날이라고는 단 하루도 없다,라는 것이 우지하라의 생각이다. 즉 나오미와는 달리 오늘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지키 총지배인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 그들의 논리는 나오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객의 가면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호텔리어의 의무라는 신념은 갖고 있지만, 그 가면 밑에 반드시 선량한 인간의 얼굴만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곳은 결코 화려하기만 한 공간은 아닌 것이다. 새삼 절실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걱정해 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다. 사건에 대해서는 닛타를 비롯한 형사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호텔 업무에 전력을 다하는 것뿐이다.
- 나이는 쉰 살 전후일까. 관록 있는 체형에 얼굴도 큼직하다. 나오미가 호텔 안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항상 오후 7시 반쯤에 체크아웃을 했으니까 데이 유스일 것이다. 호텔을 불륜 장소로 이용한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상대 여성이 누군지도 대략 짐작하고 있다.
- "중학생 아들도 함께 왔는데 방에서 게임하는 게 더 좋은 모양이에요."
"저런, 서운하시겠네요."
평소 자신이 불륜 장소로 이용하는 호텔에서 가족과 함께 연말을 보내다니, 정신 체계가 어떻게 된 사람인가 싶었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은 제각각 다른 법이다. 항상 드나들던 곳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객님은 고객님이다. 편견을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고 닛타는 전화를 끊었다. 얼굴을 들자 우지하라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끔은 온종일 호텔에서 느긋하게 지내려는 사람도 꽤 많아요. 외출을 피하는 겁니다. 회사에서도 가족에게서도 완전히 해방될 기회란 웬만해서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방금 통화한 내용을 들은 모양이다.
- "꽤 묵직했어요. 품명은 책이라고 적혀 있었고요."
우지하라는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주소가 치요다구라고 했지요, 정확하게는 어떻게 됩니까?"
닛타는 스마트폰을 꺼내 터치한 끝에 운송장 사진을 확인했다. "치요다구 사루가쿠초예요."
아, 하고 우지하라가 엷게 웃었다. "역시나."
- "치요다구의 사루가쿠초라면 간다 진보초와 마찬가지로 헌책방이 많은 동네지요. 거기서 꽤 많은 책을 구입했고, 자신이 직접 들고 올 수 없어서 택배로 호텔로 보냈다, 운송장은 헌책방점원이 기입했다. 분명 그런 것이겠지요. 올해의 마지막 하루를 독서로 마무리 짓자는 거 아니겠어요?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우지하라의 설명에 닛타는 선뜻 반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 "그 정도 무게라면 한두 권이 아니에요. 하루에는 도저히 못 읽을 텐데요?" 얼핏 생각난 의문을 입에 올렸지만, "굳이 하루에다 읽을 필요가 있나요? 다 읽은 책까지 포함해 나중에 모두 자기 집으로 배송할 생각이겠지요"라고 간단히 격퇴해 버렸다.
- 닛타는 하릴없이 빈 코를 들이켜고 눈썹 옆을 긁적였다. "혹시 우지하라 씨는 성선설 신봉예요?"
우지하라의 뺨이 움찔 움직였다. "그런 닛타 씨는 성악설 신봉파입니까?"
"어떤 사람이든 나쁜 짓으로 내달릴 우려는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을 의심하고 보는 것이 형사 일이니까요."
"그런 점은 호텔리어도 마찬가지예요." 우지하라는 즉각 대답했다. "모든 고객님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고 또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의심합니다. 당신들과 다른 점은 특정한 고객님만을 믿는 일도, 또한 의심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지요."
- "유감스럽게도 형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부터 조금씩 체에 걸러내서 진짜 악당을 찾아내야 하죠. 그런데 그 체라는 것이 항상 효과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오히려 따분하고 비효율적인 일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잘못 짚는 경우도 많아요." 닛타는 스마트폰에 올라온 운송장 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특정한 인물을 쓸데없이 의심하는 것도 업무 중 하나예요."
우지하라는 질렸다는 듯 슬쩍 어깨를 들썩였다. "힘들겠군요. 수고가 많습니다,라고 말해두기로 하죠."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닛타는 스마트폰을 다시 넣었다.
- 그리고 잠시 뒤에 체크인 타임이 닥쳐왔다. 역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만큼 손님들이 차례차례 프런트를 찾아왔다.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긴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 우지하라는 턱을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나도 놀랐어요." 평소의 노멘 같은 얼굴에서 약간 더 표정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이게 이 사람의 놀란 얼굴인지도 모른다.
- 우지하라는 그녀에게 1206호실을 지정해 주었다. 소노 일가가 투숙하는 방은 1008호실이다. 겨우 두 개 층 차이지만 투숙객이 계단을 이용하는 일은 일단 없다. 층이 다르면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칠 걱정은 없을 것이다.
- 체크인 손님들이 대략 처리되어서 닛타는 우지하라에게 소노 가족과 가이즈카 유리에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우리 쪽에서 따로 신경 써서 관리해야겠지만, 손님들이 각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때까지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아요."
"손님들 각자의 생각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우선 중요한 것은 가이즈카 씨가 우연히 찾아왔느냐 아니냐는 것이에요. 우연히 온 것이라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레스토랑이나 라운지, 스포츠센터, 수영장 등에서 가이즈카 씨와 소노 씨 가족이 덜컥 마주치지 않게 최대한 신경을 써드려야 해요. 만일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경우에는 본인들이 되도록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손을 써야겠지요. 물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눈치채여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의 관계를 호텔 측이 다 알고 있다고 하게 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곳을 이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데이 유스라도 골드클래스의 단골 고객님을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요."
우지하라는 가느다란 눈에 장사꾼 특유의 교활한 빛을 담고 있었다.
- 닛타는 입가를 틀었다. "어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네요."
"분명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별것도 아니에요. 더 힘든 것은 우연이 아닐 경우, 즉 계획적일 경우지요."
"일부러 같은 호텔에 투숙하기로 했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우지하라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첫째는 소노 씨와 가이즈카 씨, 둘이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가이즈카 씨의 방이 디럭스 더블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목적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닛타도 알 수 있었다.
- "가족끼리 호텔에 왔다고 해도 스물네 시간 함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한때의 밀회를 즐기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한때의 밀회 꽤 멋지게 포장하는구나 싶어서 닛타는 우지하라의 얼굴을 새삼 바라봤지만 베테랑 호텔리어는 특이한 말을 했다는 자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왜요,라고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상당히 대담한 계획인 것 같아서요."
우지하라는 오른쪽 뺨을 미묘하게 치켜들었다. "러브 어페어는 오히려 대담하게 나가야 발각될 확률이 낮아지는 법입니다."
그 말에는 묵직한 설득력이 있었다.
- "가능성이 두 가지라고 하셨죠? 또 한 가지는 어떤 경우입니까?"
우지하라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경우예요. 같은 호텔을 찾은 것이 우연한 일도 아니고 둘이서 약속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남는 건 한 가지뿐입니다. 둘 중 한 사람이 상대의 일정을 알고 일방적으로 그것에 맞춰서 찾아온 경우."
"왜 그런 짓을 하죠?"
글쎄요,라고 우지하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유는 모르지요. 대략 짐작은 가지만."
- 아마도,라고 우지하라도 말했다.
"가이즈카 씨는 독신일 것이고, 어쩌다 보니 유부남인 소노 씨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되었겠지요. 그런데 그 소노 씨가 연말연시에 하필 자기들이 불륜에 자주 이용하던 호텔에 가족과 함께 숙박한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가이즈카 씨는 소노 씨를 난처하게 해 주자는 생각에 자신도 이 호텔에 오기로 했다... 다들 말하지요, 질투는 세상 무엇보다 무서운 것이라고."
다시 한번 우지하라가 한숨을 지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긴 한숨이었다.
-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에는 나서지 않더라도 가이즈카 씨가 의도적으로 찾아온 것이라면 뭔가 계획하고 있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고객님께 폐가 될 것 같아서 걱정하는 겁니다."
닛타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호텔리어는 정말 다양한 것을 살펴봐야 하는군요."
"뭘 이제야 새삼스럽게?" 우지하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고 등을 홱 돌렸다.
- 그 직후였다. 컨시어지 데스크에서 나온 야마기시 나오미가 로비를 가로질러 옆의 사무동으로 이어진 통로로 향하는 모습이 닛타의 시야 끝에 들어왔다.
- "우지하라 씨에게서 약간 마음에 걸리는 얘기를 들었어요. 야마기시 씨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그 두 분이 데이 유스로 우리 호텔을 자주 이용하신다는 거?"
별일 아닌 듯이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닛타는 뜻밖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어요?"
"고객님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컨시어지로서 당연한 일이에요. 그 남자분은 항상 월요일 저녁 시간에 오세요. 그리고 오후 7시 반쯤에 체크아웃을 하시는데 그사이에 여자분은 엘리베이터 홀 쪽에서 나타나 여기 데스크 앞을 지나서 호텔을 나가셨어요. 어지간히 둔감하지 않는 한 금세 짐작할 수 있죠."
닛타는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도 그렇고 우지하라 씨도 그렇고, 역시 프로는 다르군요."
- "그래서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러브 어페어 고객은 호텔로서는 귀한 손님이라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귀 기울여 엿들은 게 아니라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다만 서로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어요. 설마 오늘 같은 날, 여기서 덜컥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겠죠."
"둘 다 놀랐어요?" 닛타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아닐 텐데? 남자 쪽은 모르지만, 여자 쪽은 태연하지 않았어요?"
- "또 룸서비스? 점심때도 그러더니 저녁 식사도 방에서 해치울 모양이네. 게다가 섣달 그믐날 밤에 카레라이스라니. 끼니를 대충 때울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느낌이잖아."
"점점 더 수상하죠? 그래서 주문한 요리를 내가 직접 가져가기로 했어요. 방의 상황을 체크해 보려고요."
- "뭐, 아마추어의 의견이니까 무시해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 로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우지하라의 뺨이 움찔했다.
닛타도 그의 시선 끝을 따라가 보았다. 소노 마사아키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로비와 인접한 다이닝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참이었다.
맙소사,라고 우지하라가 중얼거렸다.
"식사할 곳은 저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호텔 안, 게다가 하필 오픈 스페이스의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네."
"아까 그 애인과 덜컥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얘깁니까?"
우지하라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턱을 끄덕였다. "저 레스토랑은 혼자 온 손님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 "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물어봤죠. 그녀 말로는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두 사람이 마주친 것은 우연인 모양이에요. 그때 둘이서 이래저래 말을 맞췄을 테니까 또다시 덜컥 마주칠 염려는 없을 거예요."
우지하라는 시들한 표정이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겠지요."
"또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둘 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는 건 단순히 야마기시의 느낌일 뿐이에요. 실제로 어떤지는 본인들만 아는 일이지요. 사람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요."
"깜짝 놀란 척했다,라는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우지하라의 얼굴을 닛타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 "모든 고객님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의심한다. 그게 호텔리어라고 하셨죠. 특정한 고객님만 의심하지도 않을뿐더러 믿어버리지도 않는다는."
"그러지 않고서는 이 일은 해나갈 수 없으니까요."
- 아닌 게 아니라 우지하라의 의견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가이즈카 유리가 소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봤을 때, 닛타 역시 남자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걸 미리 알고 기다렸다고 생각했었다. 야마기시 나오미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이 틀렸다고 판단했었지만 가이즈카 유리가 연기를 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 닛타가 시선을 떨구고 생각을 굴리고 있으려니 "야마시타라고 합니다"라는 남자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체크인 손님인 모양이다.
"아, 네..."
평소에는 즉각 반응하던 우지하라의 대답이 웬일로 조금 늦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닛타는 고개를 들다가 흠칫했다.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배트맨과 캣우먼이었다.
- "손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잖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고객님의 패션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혹시 스키퍼일 경우에도 단서를 잡을 수 없게 돼요."
- "그럴 우려는 없어요. 방금 오신 고객님은 인터넷 결제를 이용했어요.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예치금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복사하면 됩니다. 꽤 놀라신 모양인데, 우리는 이미 상정했던 일이에요."
"이미 상정했던 일?"
"카운트다운 파티를 코스튬으로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지만 이 행사가 널리 알려지면서 체크인 때부터 코스튬 차림을 원하는 손님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숙박비 등의 결제에 별문제가 없는 고객님의 경우에는 인정해 드리기로 대응책을 마련했죠."
"돈만 낸다면 어디 사는 누가 됐건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방범카메라가 필요하죠?"
- "그러면 잠깐 묻겠는데요," 우지하라가 오른쪽 눈썹을 꿈틀 치켜들었다.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쓴 고객님이 체크인을 하러 왔을 때, 그걸 벗으라고 명령해야 할까요? 혹은 시각장애인이 선글라스를 쓰고 왔을 경우, 그걸 벗어달라고 부탁할까요? 때로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둘 다 쓰고 나타나는 고객님도 있어요. 그런 것과 배트맨 복면이 뭐가 다르지요?"
- 닛타는 일순 대답이 턱 막혔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죠"라고 대답했다. "오늘 밤은 특별하잖아요. 살인범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요. 호텔을 찾는 손님이라면 전원, 얼굴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니까요. 수사를 위한 일이에요."
"그래요, 닛타 씨 말대로 오늘 밤은 특별합니다. 고객님들을 마음껏 대담하게 즐기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는 밤이에요. 일반 손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경찰 수사 때문에 그런 행복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우지하라는 닛타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닛타도 덩달아 돌아보았다. 정면 현관으로 게임 캐릭터 마스크를 쓴 5인조가 들어오는 참이었다.
- "구사카베 고객님을 모셔 왔습니다." 나오미는 등 뒤에 서 있는 구사카베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카네 미도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더니 입가가 살짝 풀어졌다. "제가 상상했던 분과는 전혀 다르시군요."
"좀 더 젊은 미남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구사카베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뇨, 그 반대랍니다. 좀 더 연배가 있으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편이라서 죄송합니다. 오늘 이런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정중한 인사였다.
- 1층으로 내려와 컨시어지 데스크로 돌아온 뒤에도 나오미는 계속 마음이 들썽거렸다. 구사카베는 나카네 미도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설마 댓바람에 "당신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구사카베라는 인물은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 "아뇨,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나카네 미도리가 두 손으로 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의 것을 보고 와아 하는 탄성을 올린 것은 구사카베였다. 닛타도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진 속 케이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도저히 모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야마기시 나오미답다고 새삼 감탄했다.
- "자, 그러면," 나카네 미도리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맞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고백해야 할 이야기는 이제 끝이에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나요?”
-" 아,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같이 많아요." 구사카베가 말했다. "다만 이 일이 아니라 당신에 관한 겁니다.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음악이라든가."
우후훗, 하고 나카네 미도리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시다면 제가 제안 한 가지를 할까요? 오늘 밤 식사 약속이 아직 없으시다면 구사카베 씨도 이 방에서, 어떠세요? 디너가 2인분이 와 있으니까요."
엇, 하고 구사카베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저도 혼자 하는 식사가 몹시 쓸쓸하던 참이랍니다. 더구나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해서 화장실에 흘려보내는 것도 역시 마음에 걸리네요."
- "또 한 번 깜짝 놀랐네요."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 홀로 향하는 길에 닛타가 말했다. "정말 호텔이라는 곳은 다양한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군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싶은 일들이 총출동한 것 같잖아요."
- "그걸 눈치챘다고 해도 당신이 할 일은 전혀 달라질 게 없었잖아요."
나오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리 알았다면 신경 써드릴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았어요. 애초에 나카네 고객님이 저런 고백까지 하시게 된 것도 내 판단 실수가 원인이에요. 사실은 끝까지 아무에게도 이런 일은 알리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 닛타는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책임감덩어리군요. 그렇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피부에 안 좋아요."
나오미는 형사를 노려보았다. "내 피부까지 걱정해 주실 거 없어요."
- 여자가 로비 안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다이닝 레스토랑에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닛타가 어라라, 하는 묘한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아니, 실은..."
닛타의 말에 따르면, 한 시간쯤 전에 여자의 불륜 상대 남자가 가족과 함께 그 레스토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 "어떻게 된 거야, 마주치지 않게 둘이서 상의한 게 아니었나?"
"남자분은 그러자고 했겠죠. 하지만 여자 쪽에서 반드시 거기에 동의했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왜요?"
아니, 그게요, 하고 나오미는 닛타의 얼굴을 보았다.
"레스토랑에서 마주쳐도 여자 쪽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거든요. 오히려 남자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소해하지 않을까요? 평소에 남자가 어떤 식으로 가족과 어울리는지 찬찬히 관찰하는 기회도 될 수 있고."
닛타는 멍하니 나오미를 마주 보았다.
"어젯밤의 여성의 바람기에 대한 얘기도 그렇고, 야마기시 씨는 번번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서운 걸 가르쳐주는군요."
"무서웠나요? 여자라면 극히 일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남자 쪽이 좀 딱하죠. 지금쯤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겠네. 애인의 시선이 마음에 걸려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이고 뭐고, 정신이 없겠는데요."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자업자득이에요."
- "좋으시겠어요. 의상은 결정하셨습니까?"
네,라고 여자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이것저것 망설였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정했어요."
"그렇습니까. 어떤 캐릭터인지 지금 여기서는 여쭤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만일 보여드릴 기회가 있다면 그때 봐주세요."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젊은 두 사람이 신이 난 모습으로 나가는 것을 배웅한 뒤, "저 사람들도 오늘 밤 파티에 참석할 모양이죠?"라고 닛타가 말했다.
- "평소 불륜에 이용하는 호텔에서 애인을 덜컥 마주쳤다고? 게다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저 남자의 평소 행실이 어지간히 안 좋았거나 아니면..." 노세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었다.
"뭔데요?"
노세는 돌아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실눈이 되어 웃었다.
"애인이 일부러 쳐들어왔거나. 유부남과 사귀는 여자에게 크리스마스나 새해 명절은 정말 짜증 나는 날이거든. 자기는 혼자 쓸쓸하게 지내는데 남자 쪽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야. 한바탕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 "야마기시 씨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렇다면 여자가 무서워지는데요. 하지만 저 소노라는 남자도 최악이죠. 하필 아내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다니."
"실은 그런 경우가 아주 많아. 나이 지긋한 남자들은 새로운 여성을 만날 기회라는 게 거의 없어. 그런 점에서 여자들의 인맥은 다방면에 걸쳐 있지. 좋은 사례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의 엄마 모임이야. 그런 아내의 인맥에 슬쩍 편승해서 불륜에 빠지는 남자가 적지 않아."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노세의 말투는 자신만만했다. 최근에 그런 불륜에 얽힌 사건을 수사했는지도 모른다.
- "죄송합니다." 닛타는 옆에 있는 우지하라에게 사과했다. "연말인데 저 때문에 야간 근무를 하시게 됐네요."
"상관없어요." 손에 시선을 떨군 채 변함없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연말이든 뭐든 야간 근무 당번이 되면 퇴근은 못 하니까. 호텔리어 일을 선택한 이상,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즐길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요. 그런 점은 형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 그건 그렇죠."
- "그 여자분, 내일까지 있기로 했을 텐데요?"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더군요. 원하던 것도 이뤘고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어요. 닛타 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더군요.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했더니 무척 아쉬워하던데."
- 잠깐, 이라고 우지하라가 왼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고객님이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호텔리어로서는 큰 훈장이에요. 소중히 마음속에 담아두는 게 좋아요. 설령 진짜 호텔리어가 아니라고 해도."
우지하라의 말투는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나는 것이었다. 닛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우지하라가 단말기를 두드리며 정산 수속에 들어갔다. 잠시 뒤에 프린터가 이용명세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닛타는 소노의 모습을 슬쩍 살펴보았다. 이제 한 시간 뒤면 새해가 되는 참에 가족을 호텔에 남겨두고 집에 가봐야 한다니,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지하라가 옆에 있어서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소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닛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우지하라가 물어본 것은 손님이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고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에, 진짜 딱하게 됐네요."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우지하라 쪽을 향했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본인이 말하는 만큼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네, 가족과 함께 온 호텔에 애인이 떡하니 나타났으니 본인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겠죠. 그러고 보니 부인과 그 애인, 아무래도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요?"
닛타는 조금 전 2층에서 본 광경을 우지하라에게 들려주었다. 우지하라는 별반 놀란 기색도 없이 "뭐, 흔한 일이에요"라고 노세와 비슷한 감상평을 입에 올렸다.
- 오후 11시 정각, '매스커레이드 나이트'가 시작되었다. 입구의문이 활짝 열리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참가자들이 차례차례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배트맨이, 고릴라가 호빵맨이 들어간다. 게게게의 기타로와 눈알 아저씨도, 다스베이더도, 가면 때문에 얼굴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온몸으로 환희의 아우라를 풍기면서 입장했다.
- "그랬군요."
요즘은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 커플이 많다. 역시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이 호텔에서 빌려주는 의상에 비하면 싸구려 티가 팍팍 나겠지만, 가격 대비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가볍게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좋은데요? 아주 멋있어요."
공치사도 위로도 아니었다. 가장용 의상치고는 정말 근사했다. 요금은 기껏해야 천 엔 남짓일 것이다. 호텔에서 빌리기로 하면 아무리 급을 낮춰도 20만 엔은 든다.
"정말요? 와, 다행이다."
- 파티장 입구 근처에 야마기시 나오미가 있었다. 그쪽도 닛타를 알아봤는지 뭔가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우치야마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닛타도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를 한 차례 둘러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호화찬란한 장식과 화려한 오브제에 시선을 빼앗긴 게 아니다. 몇백 명에 달하는 코스튬 집단의 열기에 압도된 것이다.
- 여기서는 완벽하게 고객들이 주인공이었다. 쇼를 연기하는 마술사도 저글러도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싼 고객들이 훨씬 더 화려하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게 좋은 점일 것이다. 평소에는 상식의 울타리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오늘 밤 이 자리에서만은 자신이 아닌 뭔가로 변신할 수 있다. 그런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 호텔 코르테시아도쿄의 서비스인 것이다.
- 나오미는 스마트폰으로 정확한 시각을 확인했다. 새해까지 이제 20분 남짓 남았다. 닛타가 뭔가 심각한 기색으로 파티장에 들어간 것이 불과 몇 분 전이다. 그때 뭔가 움직임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 뒤로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 범인이 나타난 것일까.
- 닛타는 마음을 정하고 마이클 잭슨에게로 다가가 선글라스를 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혼자 오셨습니까?"
마이클 잭슨은 놀란 듯 등을 곧추세운 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나왔는데 춤이나 출까요? 어때요, 함께 추죠."
잠시 틈을 두고 마이클 잭슨은 가방을 내려놓더니 두 팔을 가볍게 펼쳤다. 아무래도 동의해 준 모양이다.
- 닛타는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손을 가볍게 잡았다. 상대가 그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어서 닛타는 팔을 돌려 등을 잡았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아보았다. 놀랍게도 상대 역시 경험자인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남자들끼리 춤을 춰도 괜찮다던데요." 닛타는 선글라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긴 나는 탱고는 별로지만."
마이클 잭슨은 말이 없었다. 고무 마스크라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략 짐작이 되었다. 감정 없는 차가운 얼굴이리라.
- "놀랍군요." 상대의 맨얼굴을 보고 닛타는 중얼거렸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 얼굴이 있었다.
"뭐가요?" 상대가 물었다. 예상대로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닛타도 스스로 가면을 벗었다.
- "인간의 눈이란 정말 신기하죠. 만일 처음부터 이 맨얼굴을 봤다면 나는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면을 쓰면," 닛타는 자신의 가면을 상대의 얼굴에 댔다. "당신의 눈과 입매밖에 안 보여요."
- "그런 시계를 왜..." 그렇게 말하다가 닛타는 문득 깨달았다. 놀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계가 너무 정확하면 여유를 가지려 하지 않는다는?"
네,라고 야마기시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닛타는 위를 우러러보며 후유하고 숨을 토해냈다.
"야마기시 씨가 프로다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 아빠 카메라를 맨 처음 몰래 꺼내본 건 작년 여름이에요. 버드워칭을 취미로 하는 아빠가 재작년에 구입한 초망원 카메라예요. 굉장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해서 전부터 저도 꼭 한 번 찍어보고 싶었어요.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 진짜 하나도 몰랐어요. 그 아저씨들이 여기저기 방 안을 둘러보는 걸 멍하니 보면서 설 명절 요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리고 다른 때처럼 세뱃돈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어요.
- 소노 마치코, 결혼 전 이름은 기무라 마치코였는데, 그녀와는 우리 고향의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어요. 네, 같은 반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서로 죽이 잘 맞았다는 것과는 약간 달랐던 것 같아요. 어느 쪽인가 하면 성격은 정반대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나는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웃도어 파였고, 마치코는 독서나 예술 쪽을 좋아하는 인도어 파였어요. 하지만 함께 얘기하다 보면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내가 모르는 것은 잘 가르쳐주고 반대로 내가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게 자극적이었습니다. 주위 친구들이 나한테는 화려하고 기가 센 편이다, 마치코는 수수하고 내성적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마치코가 오히려 나보다 더 기가 센 편이었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일단 원한을 품으면 절대로 잊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약간 대담한 짓도 해치우는 성격이에요, 걔가.
- 소노 마사아키 씨? 마치코의 남편이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 그거요?
물론 둘이 몇 번 만났죠. 그 신혼집에 찾아갔을 때였는데, 마침 마사아키 씨가 중소기업 진단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하길래 우리 가게의 경영에 대해 상담 좀 해달라고 부탁했던 게 계기가 됐어요.
- 그쪽에서는 다르게 얘기했나요? 내쪽에서 먼저 청한 기억은 없지만 혹시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만한 언동이 있었다고 한다면 뭐, 미안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죠.
- 실은 중학교 때, 지독한 따돌림을 지켜본 경험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따돌림을 당한 건 아니지만, 잠깐 방심하면 나한테도 불똥이 튈 만큼 따돌림이 거의 일상이었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따돌림을 하는 그룹에도 계급이 있더라고요. 누가 정점에 서서 아이들을 조종하는지 잘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 근거 중 하나는 생김새였어요. 유리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늘씬하고 교복도 누구보다 멋지게 입었어요. 행동 하나하나가 화려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냄새였어요. 아니, 실제로 맡아본 것은 아니에요. 이를테면 분위기나 기척 같은 것이지요.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학교 때 따돌림을 주도했던 여학생과 똑같은 냄새를 유리에게서 감지했습니다. 그런 후각을 가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어요. 여자라면 많든 적든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요? 유리와 친해지려는 여학생이 많았지만, 다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감을 발동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남자들은 이런 거, 잘 모르겠지만요.
- 유리와 친해지고 보니 역시나 그게 올바른 판단이었어요. 따돌림까지는 아니어도 어디에나 다툼이라는 건 생기기 마련이죠. 서로 대립하는 그룹이 생기고 각각 뒤에서 험담을 하는 일은 늘있잖아요. 하지만 유리와 한편이 되면 결국은 항상 이길 수 있었어요. 마치코는 유리의 그림자다, 아첨꾼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유리가 가진 그런 미모도 없고 아무 특기도 없는 내가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는 힘 있는 사람 옆에 붙어 있는 게 가장 빠른 길이죠.
- "상처 입히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면서 거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서 컨시어지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고사카는 등을 곧추세우고 나오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야마기시 씨의 연출은 아주 훌륭했어요. 그 스위트피에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가노 에코 씨도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 그런 그녀를 조금 전의 남자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라운지에서 나가는 것을 닛타와 노세는 선 채로 배웅했다.
- 모리사와 히카루가 그 형사에게라면 이야기하겠다면서 닛타를 지명한 것은 1월 10일의 일이었다.
- "<M. 버터플라이>를 알고 있나?"
"영화를 말하는 거라면, DVD로 봤습니다."
닛타의 대답에 모리사와는 한심하다는 듯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존 론? 흥, 그건 그냥 남자일 뿐이야. 그런 여장 따위에 속아 넘어갈 남자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예, 그렇게 생각했어요."
- <M. 버터플라이>는 문화 대혁명 당시의 중국을 무대로 한 희곡으로, 토니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대사관의 외교관이 경극의 주연 여배우를 사랑하고 그녀를 애인으로 만들어 아이까지 낳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스파이였고 게다가 남자였다는 스토리다.
"그 희곡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어."
- 닛타가 대답하지 않자 모리사와는 흐뭇한 듯 입가를 풀며 웃었다.
"그 외교관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닌 모양이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지명했습니까?"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 귓속에 남는 중성적인 목소리지만 남자 얼굴의 모리사와에게서 나와도 전혀 위화감은 없었다.
- "다행이군. 제법이네, 너무 사소한 것이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 "제대로 된 호텔리어라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아."
- "그야 프런트를 잠시만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어. 당신은 프런트 업무를 거의 하지 않았어. 앞쪽에 옛날 귀족 같은 얼굴의 프런트클러크가 가로막고 서서 혹시라도 당신이 호텔 업무를 하게 될까 봐 자신이 도맡아 부지런히 움직였어."
(리뷰자 주 : 화족을 말하는 것 같다.)
- "어떤 일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마침내 의문이 풀려버리면 인간이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게 돼."
- 그곳만 별도의 생물인 것처럼 잘도 돌아가는 그 혀를 바라보며 닛타는 세뇌당한 피해자들의 심리가 조금쯤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논리 정연하게 게다가 물 흐르듯 유창하게 늘어놓는 것을 듣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지독히 머리 나쁜 인간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아가씨, 개한테 물린 셈 치고 얼른 잊어버려요... 그렇게 말했어. 개한테 물렸다고?"
- "그래서 그 천박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 택시에서 내려 정면 현관의 유리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도어맨이 물었다.
"아뇨, 이쪽에서는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나는 항상 저 안쪽에서만 돌아다녔으니까." 유리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그러셨죠." 도어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일류 호텔이네. 정면 현관도 멋있어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도어맨이 머리를 숙였다.
- 닛타는 유리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코르테시아도쿄의 로비 전체를 둘러보았다. 눈에 익은 풍경일 텐데도 처음 찾아온 것처럼 긴장감이 느껴졌다. 눈에 익은 벨보이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마주 인사하고 프런트로 향했다.
- 프런트 카운터에는 우지하라의 모습이 있었다. 닛타가 다가가자 지금껏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최고의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체크인이십니까?"
"네, 닛타 고스케입니다."
우지하라는 손도 빠르게 단말기를 두드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닛타 고객님. 오늘부터 일박, 디럭스 더블을 이용하시는 것으로, 괜찮겠습니까?"
- 묘한 느낌이었다. 이 숙박표는 질릴 만큼 봤지만 기입은 처음이다. 게다가 볼펜이 정말 부드럽게 잘 써지는 것에도 적잖이 놀랐다.
- 우지하라는 눈을 떨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눈치채는 사람도 있군요. 죄송합니다. 내 실수였어요."
-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아뇨, 다음이라는 건 없어요. 저도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우지하라는 뭔가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닛타의 말도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원래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 다시 체크인 수속에 들어갔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닛타 고객님. 이쪽이 카드키입니다. 마침 빈방이 있어서 업그레이드 해 드렸습니다."
카드키 홀더를 내밀며 우지하라가 말했다.
"엇, 정말요? 큰 행운인데?"
"코너 스위트룸이랍니다."
우와,라고 탄성을 올리다가 방 번호를 보고 흠칫했다. 1701호실이었다.
- 우지하라는 빙긋이 웃었다. "오늘부터 영업을 재개해도 좋다는 경찰의 허가가 내려왔습니다. 닛타 고객님이 영업 재개 후 첫 손님이십니다. 편히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닛타는 쓴웃음을 짓고 프런트를 물러 나왔다. 컨시어지 데스크로 갔더니 야마기시 나오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 "로스앤젤레스 근무는 언제부터예요?" 닛타가 물었다.
"5월부터."
"그럼 앞으로 석 달이나 남았군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석 달밖에 안 남았다고 해야죠.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이 짧아요."
"괜찮아요, 당신이라면." 닛타는 가볍게 받아쳤다. "정 힘들면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그러면 그 기회를 만들어볼까요.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라도, 어때요?" 닛타는 카드키를 내보였다. "뜻하지 않게 코너 스위트가 내 손에 들어왔거든요. 인룸 다이닝, 어떨까요?"
- 야마기시 나오미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녁 식사 때라면 아직 근무시간이에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건가요?" 닛타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컨시어지잖아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묘안이 생각난 듯한 얼굴을 이쪽으로 향했다.
"닛타 고객님, 내일 밤은 어떠실까요?"
"내일 밤?"
"내일이라면 근무시간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 "오케이! 자, 그러면 내일 밤에." 그렇게 말하다가 닛타는 퍼뜩 생각나는 게 있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당신에게 감사인사를 못 했군요. 이번에도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고마워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보인 뒤에 빙긋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열심히 해주십쇼."
"닛타 씨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손을 놓고 닛타는 걸음을 옮겼지만 곧바로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내일 밤에 갈 레스토랑 좀 찾아줄래요?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곳이 좋은데."
"잘 알겠습니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닛타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응하고 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메마쿠라 바쿠, 오카노 레이코] 음양사 1-13 (완) (0) | 2023.09.03 |
---|---|
[에도가와 란포] 파노라마섬 기담 / 인간 의자 (0) | 2023.09.02 |
[히가시노 게이고] 매스커레이드 게임 (0) | 2023.09.02 |
[차영은] 나 혼자 피아노 친다 - 차차와 피아노 독학 (1) | 2023.08.31 |
[히가시노 게이고] 매스커레이드 이브 (0) | 2023.08.30 |
[히가시노 게이고] 매스커레이드 호텔 (0) | 2023.08.30 |